노동사회과학연구소

계급은 자연 소멸하는가 ― 자율주의 비판 (2)

 

백철현(전국노동자정치협회 회원)

 

 

나는 노사과연의 <<정세와 노동>> 2006년 7ㆍ8월 합본호에서 “국가는 소멸하는가”라는 주제로 자율주의자들을 비판한 바 있다. 그 글에서 나는 자본의 세계화로 인해 국민국가의 역할이 사라지면서 자본주의 국가 간의 갈등과 투쟁, 억압, 전쟁을 낳는 제국주의가 아닌 제국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했다.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은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을 앞두고 제국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 사라지고 협력과 평화가 도래한다던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의 무정부적인 형태로의 재판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한 자율주의자는, 논리적 체계를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네그리는 국가의 경계선이 약화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했지 국가가 소멸된다고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네그리와 자율주의자들은 현재의 국민국가가 사라지면서 국가 간의 경쟁과 갈등, 전쟁이 사라지고 제국에 의한 평화와 협력이 온다고 했다. 결국 그들은 자국 내에서의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에 대한 내전적 폭력, 전쟁, 억압, 착취, 타민족에 대한 수탈을 핵심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핵심적인 역할과 본질을 왜곡, 부정하면서 국가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회피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자율주의자들이 국가를 자연히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이 글에 대해서도 그들은 ‘언제 네그리가 계급이 자연히 소멸된다고 했는가’ 하고 반박할자 모른다. 물론 네그리는 계급이 자연히 소멸된다고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에 살펴보겠지만, 네그리는 계급 대신에 다중 개념을 채택함으로써 계급론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계급모순을 호도하고 계급투쟁을 무력화하고 있다. 따라서 자율주의자들의 선의와 상관없이 네그리와 그들의 주장의 논리적 귀결은 계급이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번 글이 맑스주의 국가론을 가지고 자율주의를 비판했다면 이번에는 맑스주의 계급론의 관점에서 자율주의자들이 말하는 ‘다중’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들이 비물질 노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왜곡하는 맑스주의 가치론을 옹호하고 결국 혁명전략의 문제에서 다중―다중 개념은 참으로 몰계급적이지만, 계급론 자체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자율주의자들에게는 몰계급적이라는 비판 자체가 별로 타격이 되지 않을 것이다―이 과연 계급을 대신하여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맑스주의의 재구성이라는 이름으로 계급론을 폐기하고 맑스주의를 수정한 다중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자본주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이며 자본의 이해에 궁극적으로 복무하는 반동적인 이데올로기일 뿐인지를 고찰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수차례 회의해야 했다. 과연 지금 시점에서 자율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실천투쟁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과연 어려운 말로 도배를 하는 지식인들의 허위적 인식과 이데올로기, 노동자 계급의 구체적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노동자계급에게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지금 시기에 자율주의자들의 비판을 다시 한 번 쓰는 것이 정치적, 실천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저들에게 들어보자.

 

여지껏 맑스주의나 코뮤니즘이 actual(실재)만을 강조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virtual은 간과해 왔기 때문에 코뮤니즘적 관점이 actual한 관점에서만 머물지 않고 virtual에 대해 동시에 생각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신 관념은 강조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

 

아이온의 시간은 수평적 크로노스의 시간 사이에서 수직으로 솟아 오르는 시간으로 ‘사건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건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반복의 문제… (이상, 맑스 코뮤날레 관련 참세상 취재 기사에서)

 

도대체 이 무슨 잠꼬대 같은 말들인가? 이런 난해한(?) 말들의 향연이 지금 우리의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맑스 꼬뮤날레에서의 자율주의자들 간의 논쟁을 취재한 참세상의 위 기사 밑에다 한 노동자는 “어려운 말하기 시합합니까” 하고 촌철살인의 비판을 가하였다.

한 노동자의 참으로 유쾌한 반박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나는 그냥 웃고 지나갈 수만은 없었다. 나는 현실의 실천, 현실의 모순과 동떨어진 지식인들의 허위적, 위선적 담론에 대해 분노한다. 이들 지식인들이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맑스주의를 왜곡하는 현실은 더욱 더 참을 수 없다. 결국 개인적으로는 맑스주의의 가치론을 새롭게 고민해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과 자율주의 같은 반동적 사상이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진보연하며 행세하는 우리의 학문적, 운동적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로잡기 위해서, 그리고 책까지 사주면서 쓰기를 권유한 한 동무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네 그리ㆍ하트의 <<제국>>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사용해야 할 부분에서 종종 우화적 문체나 경구 등의 은유와 비유로 도피하는 <<다중>>을 따라잡으며 읽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많은 참을성을 필요로 하는 고역이었다.

이 글은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연구의 새로운 이론적 성과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이론적 역량이 일천하고 시간적으로 제한돼 있는 실천적 활동가인 내가 담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다만 기존 맑스주의 가치론의 입장에 서서 가치론과 계급론을 왜곡하는 자율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데에 이 글을 한정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맑스주의 가치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거나 또한 이로 인해 자율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효과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동지들이 지적해주었으면 좋겠다.

 

 

맑스의 계급론과 다중

 

다중은 계급적 개념이다. 경제적 계급에 대한 이론들은 전통적으로 통일성과 복수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통일성 쪽은 보통 맑스와 관련된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 범주들의 단순화가 이루어져 모든 노동형태들이, 자본과 대면하는 하나의 통일된 주체인 프롤레타리아로 합병되는 경향이 있다는 그의 주장과 관련된다. 복수성 쪽은 사회계급들의 불가피한 복수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논의들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설명된다. 실제로 이 두 관점 모두 옳다. (안토니오 네그리ㆍ마이클 하트, <<제국>>, 139쪽)

 

다중은 환원 불가능한 다양성이다. 다중을 구성하는 특이한 사회적 차이들은 항상 표현되어야 하며, 결코 동일성, 통일(성), 정체성, 또는 무차별로 평준화될 수 없다. (같은 책, 141쪽)

 

논의의 초기 단계의 접근법은 다중을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로, 그래서 잠재적으로 자본의 지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계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 노동계급은 근본적으로 배제에 기초를 두는 제한된 개념이다. 가장 좁은 의미로 파악된 노동계급은 오직 산업 노동자만을 지시하며 그래서 다른 모든 노동하는 계급들을 배제한다. (같은 책, 142쪽)

 

다중 개념은 그것이(노동계급의 주체성과 지도성) 오늘날에는 옳지 않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형태들이 사회적으로 생산적이다. 모든 노동형태들이 공통적으로 생산하고, 또한 자본의 지배에 저항할 공통적인 잠재력을 공유한다. (같은 책, 143쪽)

 

과연 맑스주의는 산업노동자계급만의 사상인가? 맑스주의는 산업노동자계급이 아닌 다른 노동자들을 배제하는가? 네그리는 맑스주의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맑스주의가 마치 산업노동자계급만을 포괄하는 사상인 것처럼, 맑스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다양한 층을 분열시키는 이데올로기인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네그리는 맑스주의에 대한 이러한 왜곡에 기초해서 다중을 내세운다. 물론 네그리는 맑스의 계급론을 직접적으로 거부한다고 하는 대신에 통일성을 가진 계급론과 복수성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의 다양한 계층론을 같이 수용한다. 그러나 “다중은 프롤레타리아 개념에 그 가장 풍부한 규정, 즉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규정을 부여한다”는 네그리의 개념과 “경제적 차이들뿐만 아니라 인종, 민족, 지리,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또 다른 요인들의 차이들에 기초하여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수의 계급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라는 규정은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모든 사람들로 확장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다는 다중 개념과 여성과 인종, 민족, 지리,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단일한 범주로 포함시킬 수 있는가? 여성 내에서도 부르주아 여성, 착취계급의 여성, 피착취계급의 여성이 있고, 인종 내에도 다양한 계급 차이가 있다. 인종, 민족 간 피부색과 언어, 문화, 역사의 차이는 또 얼마나 다양한가? 지리적 공간의 차이의 다양성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섹슈얼리티의 차이는 개인적 경험과 보편적 경험이 다양하게 교차하면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확장된 프롤레타리아 개념과 이렇게 다양한 복수성의 개념이 하나의 ‘다중’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포괄할 수 있는가?

만약 다중이 ‘환원 불가능한 다양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면 그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적 현상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에 전혀 쓸모가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 같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다중의 절충주의는 맑스의 계급론을 실제적으로 왜곡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맑스는 생산을 둘러싸고 사람들 간에 맺는 관계를 가지고 계급이라고 했다.

맑스는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고 있다. 계급에 의한 계급의 착취가 존재하지 않았던 원시공산제 사회를 제외하고 고대노예제는 노예소유주에 의한 노예의 착취, 중세봉건제는 영주와 귀족에 의한 농노ㆍ농민의 착취, 자본주의는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를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고 유지ㆍ강화된다. 국가는 이러한 한 계급에 의한 한 계급의 착취를 폭력과 억압으로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억압을 본질로 한다. 질서유지, 국민의 보호라는 국가의 현상적인 역할도 그 근본적인 목적은 계급투쟁이 한 사회를 갈등과 분열, 몰락으로 이끄는 것을 막고 현재의 계급지배 체제를 유지하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착취가 발생하게 된 원인은 잉여생산물이다. 잉여생산물을 차지하기 위한 각 부족 간, 부족 내부의 경쟁과 약탈과 전쟁이 시작되면서 잉여생산물을 독점한 지배계급과 그렇지 못한 피지배계급으로 확연하게 나눠지게 된다. 물론 맑스의 역사 유물론적 사상은 도식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역사발전의 시기구분을 정확하게 나눌 수 없다. 한 사회구성체로부터 다른 사회구성체로 변화할 때는 모순에 가득 찬 이행과정이 존재한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과도기 사회는 이미 봉건제 내부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예속 농민과 봉건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는 농민으로부터의 현물형태의 공물과 부역을 통해 유지되었다. 봉건제적 생산형태는 한편으로는 장인과 직인이라는 가내 수공업적 형태의 생산에 의해 생산물을 판매하였다.

상업무역과 함께 봉건제의 태내에서 자본주의적 요소의 출현이 시작되었다. 기존 수공업자 일부와 무역상인들은 상업무역을 통해 점차로 교역과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교류의 확대, 시장의 확장과 더불어 수요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기존의 수공업자들의 생산은 점점 더 그 한계를 가지게 되고, 생산은 공장제 수공업, 공장제 대공업으로 생산력을 급속히 발전해 나갔다. 소규모 생산과 지역적 판매, 신분제적 예속관계, 생산력의 정체를 특징으로 하는 봉건제적 생산관계는 점점 더 발전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력과 경쟁하지 못하고 뒤떨어지게 되었다.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봉건제에서의 이행기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는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상업무역에 종사하면서 사회적 힘과 세력을 강화해 오던 부르주아지는 봉건제의 신분질서에 맞서는 신흥 중간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중간계급으로의 성장, 지배세력으로의 부상과 더불어 노동자계급도 대공업의 발밑에서 사회, 정치적으로 주요한 계급으로 떠올랐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사회 내에서 점차로 경제적 지배권과 권리를 획득해 왔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최종 정치권력을 장악하기에 이르는 이행은 자연적이고 점진적인 과정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부르주아지의 최종적인 정치권력 장악은 정치투쟁과 정치혁명으로 기존 봉건국가 지배계급을 타도하면서 이루어 졌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우경적 세력에 의한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나폴레옹 황제권력과 부르봉 복고 왕정의 등장, 1848년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 같은 우회와 지그재그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로 이행했다. 부르주아지의 이러한 경제적 발전과 정치권력의 장악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에 착취당하면서도 더 큰 적인 봉건체제에 맞서 부르주아지와 연합해서 맞섰으나 그 주도권을 빼앗기고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이 된 뒤에는 부르주아지의 가장 위협적인 저항세력이 되었다.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던 시기의 부르주아지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계급은 경제적 지배권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노동자계급은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생산수단을 장악한 자본가계급으로부터 수탈과 착취를 당하면서 고통 받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내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비천하지만 생산에서 차지하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노동자계급은 그 숫자나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다른 피착취 계급에 비해 주도적 계급이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역사상 최초의 거대한 다수의 운동이라고 했다. 이 말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범주로써 자본에 예속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받고 사는 넓은 의미의 노동자계급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공장과 공장 밖, 공장과 직장 등의 구별 등 노동이 이뤄지는 공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 있다.

물론 남성의 산업노동과 여성의 가사노동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취업한 남성의 산업노동은 직접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임에 비해 가사노동 같은 여성의 재생산 노동은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복무한다. 이러한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이다. 오히려 직접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고 노동력의 재생산을 하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무급으로 하는 것은 자본가계급이다. (혹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원리의 표현이다.) 자본가계급은 남성은 바깥 노동, 여성은 가사노동이라는 차별적 분업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낮추고 이것이 여성과 남성의 자연적 본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본의 이러한 분업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노동을 부업노동이라고 평가절하 하여 저임금을 합리화 하고, 자본의 위기 시에 여성을 가장 먼저 정리해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도록 한다. 여성 노동자들 중에서 비정규직이 70% 이상을 차지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맑스는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노동형태를 가지고 노동자계급과 비노동자계급을 구별하지 않았다. 맑스는 오히려 자본주의에서 농민 등 다양한 층들이 프롤레타리아화하면서 계급구조가 단순해진다고 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농민 등 소소유자들을 동맹군으로 하여 자본주의와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맑스주의가 남성과 여성, 노동자와 농민, 취업자들과 실업자들을 분할하고 배제한다는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악선동에 불과하다.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에 속하기도 하고 실업이 장기화되면서 삶의 의욕을 잃고 수동화되거나 몰락하거나 심지어는 범죄적으로 타락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조건 때문에 맑스는 이들이 “경우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끌려 들어오는 일도 있지만 그들의 전반적인 생활처지 때문에 반동적 음모에 매수될 소지가 많다”고 혐오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룸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맑스의 비판적 분석은 개인적 혐오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규정되지 않은, 해체되어 여기저기 버려져 있는 집단”으로서의 사회적 조건이 그들을 때로는 반동적으로 이끌기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본의 한 줌 떡고물에 이끌려 노동자, 철거민, 빈민투쟁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용역깡패나 조직폭력배들이 전형적인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이다. 노숙자 중 일부가 자본의 매수에 의해 효성 등 투쟁사업장에 용역깡패로 동원된 것도 이들이 자본에 의해 언제든지 반동으로 이끌릴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맑스는 이들이 혁명에 끌려 들어오는 일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이들과 강력한 계급적 연대를 하고 정치적 힘이 강력해야만 가능하다.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체념과 무기력, 자포자기하게 만들고 때로는 범죄적으로 타락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다. 맑스는 엄청난 부를 쌓고 향락을 즐기는 자본의 반대편에서 수없이 많은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을 빈곤과 노동의 고통, 무지와 도덕적 타락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에 대해 분노하면서, 이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고 노동능력을 상실하거나 취업의 가능성이 없는 이들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며 강력하게 투쟁했다.

맑스가 당시 산업노동자계급에 대해 주목을 한 것은 편협한 사상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노동형태였기 때문이었다. 사무직노동자집단은 엥겔스 말년에 가서야 나타났다. 맑스가 노동자들을 생산적 노동자와 비생산적 노동자로 분류한 것은 과학적 분석을 위해서였지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맑스주의는 육체노동자 사상이 아니라 자본에게 착취 받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사상이다.

다른 계급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주도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편협한 노동자계급의 직업적 이익이나 배타적 이해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와 맞서 싸우면서 전체 인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소부르주아에 비해 노동자계급이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농민은 분산되어 있고 보통 토지를 소유하는 것에 운동의 목표를 제한하는 것임에 비해 노동자계급은 생산수단을 박탈당하고 있어서 자본의 일상적인 착취를 근본적으로 없애지 못하면 임금노예의 처지를 영원히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바로 그 때문에 잠재적으로 혁명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서 산업노동자계급이 주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산업에서 자본의 이윤을 직접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는 점, 거대한 공장에 하나로 집중되어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 비교적 동질적인 노동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점, 공장규율로 단련되고 훈련되어 있다는 점, 거칠고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의 조건상 보다 전투적일 수 있다는 점 등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산업노동자계급이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 절대적이고 경제적인 법칙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투쟁의 주도성은 매시기, 매조건 마다 달라질 수 있다. 먼저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와 물리적 공격을 이겨내야 한다. 거대한 공장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자본의 노무관리가 고도로 집중될 수 있다는 점이 될 수도 있고, 그러한 공장규율 때문에 자본의 힘이 지배적일 때에는 노예적인 근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또한 공장으로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성과급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통치 등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넘어 간다면 조직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 운동에서도 1970년대 운동은 경공업의 여성 노동자들이 주도하다가 1980년대로 넘어 오면서는 자동차, 조선 등 남성 중공업 노동자들이 주도성을 발휘했으며, 지금은 압도적 다수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위치뿐만 아니라 그 수에서도 거대한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계급은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더욱 더 압도적인 계급으로 변해가고 있다. 신중간계급으로 분류되던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사무자동화의 발전, 구조조정 등으로 인해 이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노동자계급의 일원이 되었고, 최근에는 공무원,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점차로 노동자계급의 층이 넓어져 가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의사들 내부에도 전문의와 전공의로 나누어서 계급분화의 조짐이 있다. 또한 전문의들도 점차로 현대, 삼성 등의 거대자본에 밀려서 자본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대학의 강사들은 물론이고 전임교수들도 스스로 노동자계급의 일원임을 선언하고 나서기 시작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법관들조차도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있다. 이렇게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개량주의자들 사이에서 이른바 중산층 이데올로기인 신중간계급론이 한때 유행했으나 양극화로 표현되는 절대적, 상대적 빈곤의 증대, 자본 독점화의 강화로 인한 소부르주아의 몰락과 불안정성의 증대 등으로 맑스의 계급론은 점점 더 현실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고 맑스주의는 여성, 민족, 인종의 문제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계급으로 환원하는 소위 ‘계급 환원론’인가? 맑스주의는 여성, 민족, 인종 문제들은 자본주의 계급모순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양한 모순들은 독자적 모순의 측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계급모순을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 모순으로부터 다양한 형태와 색채로 파생되어 나온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비물질 노동의 헤게모니와 노동가치론의 폐기

 

네그리는 여전히 수적으로는 물질노동이 지배적이지만 산업노동은 이제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같은 비물질 노동에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생산적인 협력의 핵심적인 형식들은 더 이상 노동을 조직하는 기획의 당사자인 자본가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 자체의 생산적인 에너지들에서 발생한다. 이것―소통, 사회적 관계들, 협력을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비물질노동의 핵심적인 특징이다.(같은 책, 150쪽)

 

과연 비물질 노동은 자본의 지배 하에서 자유로운가? 자본에 종속되지 않은 비물질 생산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지극히 부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최근에는 오히려 미술, 연극, 영화, 오페라, 가수, 작곡자, 작사가, 프로그래머 등 비물질적 형태의 생산물을 생산하는 다양한 노동자들이 자본에 고용되어 종속되어 있다. 극히 예외적이던 작가도 방송사나 출판사와 계약하여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비물질 노동자들의 자본에 대한 종속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추세이다. 개인들의 아이디어, 창작물, 저작권, 발명품도 지적재산권의 명목으로 대부분 독점자본이 소유한다. 하지만 비물질 노동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전 세계적 차원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물질노동과 물질 생산물이 지배적이다.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비물질 노동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기계화, 자동화의 증가로 인한 노동자의 구조조정의 결과물인 동시에 전 세계적 차원의 분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히 생산물의 경우에는 여전히 먹고 자고 입는 물질적 생산물이 지배적이다. 비물질적 생산물들이 없다면 불편하겠지만 물질적 생산물이 없다면 인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고용된 노동자층들로부터 빈자들을 분리하는 질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점점 더 공통적이 되는, 실존 및 창조적인 활동조건이 존재하며 이것이 전체 다중을 규정한다. 빈자들, 실업자들, 불완전취업자들 그리고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창발성은 사회적 생산에 필수적이다. 사회적 생산은 오늘날 공장 담벼락 내부와 외부에서 똑같이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진다. 어떠한 사회적 분할선도 생산적 노동자들과 비생산적 노동자들을 가르지 못한다. 사실상, 생산적 노동자들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고,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는, 언제나 의심스러웠던 낡은 맑스주의적 구분은 이제 완전히 내던져야 한다.(같은 책, 173-174쪽)

 

실업자들과 불완전취업자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을 가르는 것은 자본이 조장한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열과 대립에서 기인한다. 자본은 산업예비군이라고 하는 실업자나 불완전취업자들을 활용해서 기존 취업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임금을 낮추고 투쟁을 파괴시킨다. 자본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의 창조성과 창발성이 아니라 이들을 통한 지배와 통제의 확립, 착취의 증대다. 고용된 노동자들과 빈자들을 분리하는 질적 차이는 자본이 적극 활용한다. 맑스는 물질생산과 비물질 생산을 기준으로 해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가르지 않았다. 오직 잉여가치를 직접 만들어 내느냐의 여부에 따라 나누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생산적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역량들은 언제나 우리의 생산적 노동―다시 말해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보다 더 위대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비물질적 생산 패러다임의 핵심적 측면은 그것이 협력, 협동 그리고 소통과 맺는 밀접한 관계―요컨대 그것이 공통된 것에 토대를 둔다는 것―이다.(같은 책, 187쪽)

 

이 주장에는 여러 가지 모순이 담겨져 있다. 창조적인 역량 즉 비물질 노동은 자본을 생산하는 물질 노동보다 위대하다고 하고 있다. 네그리는 물질 비물질 생산의 차이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는 물질노동과 비물질 노동이라는 노동의 소재적 성격을 가지고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으로 나누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노동, 따라서 그 생산물의 소재적 성격은 절대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이 구별과는 아무런 공통성도 없다. 예컨대 식당의 요리사와 종업원은 그들의 노동이 식당 주인에게 있어서 자본으로 전화되는 한에서는 생산적 노동자이다. 내가 동일한 이 사람들의 봉사를 자본으로 만들지 않고 그 봉사의 대가로 나의 소득을 지출하는 한에서는 그들은 하인으로서의 비생산적 노동자이다.(맑스, <<잉여가치학설사(1)>>,아침, 1989, 172쪽)

 

맑스는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자본을 성장시키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이라고 했다. 물론 생산적 노동 중에는 직접 잉여가치를 만들어내지는 못하지만 생산물의 판매를 통해 잉여가치를 실현시키고 자본의 재생산을 빠르게 해서 잉여가치를 높이는 데 역할을 하는 노동도 있다.

네그리는 다른 곳에서는 모든 비물질 생산의 노동이 신체와 두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물질적임을 강조해야 한다면서 비물질적인 것은 그 생산물이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네그리는 노동과정과 노동력이 발휘되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노동과정의 차이에 따라 물질 비물질로 생산물의 성격이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물질노동이나 비물질 노동이나 노동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신체와 두뇌를 사용하게 된다.

생산물의 소재적 성격을 가지고 생산적이냐 비생산적이냐 나누는 것은 생산물의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물론 생산물이 상품이 될 수 있으려면 유용성 즉 사용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교환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생산물이 상품이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 사용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럴 때에 상품간의 교환이 이루어지는데 이 상품간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은 서로 다른 상품에 공통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교환되는 상품의 소재적 성격이 다른 두 상품이 서로 동등하게 교환될 수 있는 것은 두 상품에 동일한 크기의 노동시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품을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노동시간의 길이에 따라 상품의 가치 크기가 결정되고, 가치가 같은 상품까리 서로 교환되며, 교환되는 다른 상품의 양을 가지고 상품의 교환가치를 측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용가치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구체적인 노동형태가 교환의 필요 혹은 그 동기를 규정한다면, 상품 교환의 양적 비율을 규정하는 것은 구체적인 노동이 아니라 추상적인 인간노동 그 자체이다.

 

노동의 시간적 통일성이 가치의 기본적 척도가 되는 것은 오늘날에는 맞지 않다. 실로 노동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여전히 가치의 근본적인 원천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노동인지, 그리고 그것의 시간성은 어떠한지 연구해야 한다. … 공장생산의 규칙적인 리듬과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명확한 구분은 비물질노동의 영역에서는 쇠퇴하는 경형이 있다.(마이클 하트ㆍ안토니오 네그리, <<다중>>, 185쪽)

 

시간 구분의 이 흐려짐은 비물질노동의 생산물들의 경우에 훨씬 더 명확하다. 물질적 생산―예를 들어 자동차, TV, 의류, 음식의 생산―은 사회적 삶의 수단을 창출한다. 사회적 삶의 근대적 형식들은 이 상품들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달리, 아이디어, 이미지, 지식, 소통, 협력 그리고 전통적 관계들의 생산을 포함하는 빗물질 생산은 사회적 삶의 수단이 아닌 사회적 삶 자체를 생산하기에 이른다. 비물질적 생산은 삶 정치적이다.(같은 책, 186쪽)

 

상품의 가치는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맑스는 자본이 노동자계급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고 이것을 넘어서 노동력을 착취해서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고 했다. 맑스는 유통, 판매, 기획 같은 경우에는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지 못하지만 운송노동의 경우에는 생산적 노동이라고 하고 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같은 비물질 노동의 경우에도 컴퓨터라는 물질노동의 생산물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네그리는 비물질 노동은 규칙적인 공장생산과 달리 노동시간으로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비물질 노동의 경우에도 대부분 자본과의 시간적 종속관계 속에서 노동이 이루어진다. 실례로 첨단산업이라고 불리는 IT산업의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현실을 보면 이들이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착취를 당하고, 고통 받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1970년 11월 13일 이제 한창의 나이인 스물두 살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이 담긴 법전을 가슴에 안고 석유를 뒤집어 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달려가며 외쳤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정보통신산업에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어떠할까요? IT노조에서 실태조사를 한 결과로는 정보통신노동자의 43.4%가 주평균 근로시간이 60시간을 넘게 일하고 있으며 7.6%의 노동자는 주80시간 이상의 초장시간노동을 하고 있고 최대 100시간이 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IT산업 종사자라고 하면 세련되고 편안한 작업환경, 코스닥과 고임금 등의 환상을 떠올립니다. 아직도 IT업계는 중고등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IT노동자들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억대연봉, 벤처와 대박의 신화는 무참히 깨져나갔고 그 뒤에는 골병드는 IT노동자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2004년 10월 14일에 발표된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의 기자회견문의 일절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21세기 최첨단 노가다’라고 자조적으로 부르고 있다. 이처럼 정보통신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가 40여 년 전에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처절한 삶을 고발하고 있다. 자본이 이들 비물질 노동자들을 주 60시간 또는 심지어 10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통해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장시간 노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간구분이 흐려져서 착취가 자행됨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시간, 노동공간이 일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시간 노동이 요구되고 있고, 이것이 추가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해서 시간외 수당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는 증권산업의 코스콤 노동자들을 보라!

자본에 종속된 비물질 노동은 과연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는 것인가? 자본은 노동일에 종속되어 있다. 다만 창조적 노동, 정신노동의 경우에는 정해진 노동시간 외의 시간대에도 공간상으로는 자본으로부터 떠나 있지만 노동을 지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적인 착취를 받고 있고 더욱 더 자본에 종속되고 착취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대표적인 비물질 산업이라 할 수 있는 영화산업의 경우에도 거대자본의 이윤추구의 장으로 수천, 수만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에 고용되어 있다. 영화를 만드는 데는 시나리오 같은 비물질 노동의 결과물도 있지만 직접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카메라, 필름, 소품, 그림 등 무수한 물질노동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영화를 제작하는 데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과거 노동이 포함된 첨단장비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집단적 노동시간이 투여되어 있다.

비물질 노동에 의해 대량으로 복제되는 정보재의 예처럼 노동시간이 투여되지 않은 상품을 노동시간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정보재 논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대량으로 복제되는 정보재는 노동시간이 거의 0에 가깝다. 결국 이러한 정보상품은 가치가 0이지만 가격은 있다. 이것은 지적재산권과 같이, 독점자본의 소프트웨어에 대해 국가가 폭력적으로 이윤보장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국가는 ‘불법’ 복제에 대해 소유권을 빌미로 각종 통제를 가하고 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인해 가치가 0인데도 가격을 갖는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생성을 잘 보여준다. 과학기술발전, 정보통신의 발전 등 생산력의 발전으로 실제 생산물을 만드는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면 노동시간 단축, 실업자의 적극적 고용의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데 자본주의는 오히려 대량실업과 독점자본에 대한 폭력적 이윤의 보장 등 반동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 개념과 그에 기초한 착취 규정을 자율주의자들은 ‘근대적 시간’ 개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자본주의는 자본의 시간과 노동의 자유로운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계급투쟁의 시기가 아닌가? 현대자본주의에서도 자본은 노동시간 연장과 노동강도 강화 등 노동일을 연장하고 착취를 강화하기 위한 노동악법의 도입ㆍ강화 등 각종 공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네그리는 “우리의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역량들은 언제나 우리의 생산적 노동―다시 말해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보다 더 위대하다”면서 생산적 노동과 비물질 노동의 차이를 말하다가 뒤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은 물질적 노동이 그러하듯이 여전히 자본의 지배 아래에서 착취를 당한다. … 여기서 적대가 작동한다”고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하고 있다. 그렇다면 네그리가 말하는 공통된 것의 강탈, 즉 착취는 무엇인가? 과연 노동시간의 지속(노동강도의 강화는 시간의 연장과 다를 바가 없다)에 의한 잉여가치의 창출과 이를 통한 착취가 아니라면 자본이 무엇을 가지고 공통된 것을 강탈할 수 있는가? 네그리는 협력, 협동, 소통 같은 것을 공통된 것으로 보면서 삶 정치적 생산 자체를 자본이 부분적으로밖에 포획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네그리는 비물질 생산의 헤게모니 하에서는 “‘빈자’가 생산의 주요한 형상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네그리에게는 착취가 없는 셈이다.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 안에 있는 “맑스주의 가치론의 의의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맑스주의의 노동가치론의 과학성을 전면 부정한다.

 

지금 고려하는 제 상품에 있어서는 일정한 시기에 측정하는 정확한 척도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위에서 인정한 가치라는 것도 순전히 추상적인 것이고, 고센, 제본스, 뵘 바베르크학파의 효용가치와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로날드 L. 미크, <<노동가치론의 역사>> 302쪽에서 재인용)

 

베른슈타인은 맑스의 노동가치론에서 노동량,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으로 상품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일부 상품이 노동시간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기 때문에 주관적인 효용가치론과 같다고 하고 있다. 그는 맑스주의에서의 ‘추상’의 방법론을 철저히 왜곡하고 있다.

 

경제적 법칙들은 모두 근사로서의, 경향으로서의, 평균으로서의 실재성을 가질 뿐, 결코 직접적 현실성으로서의 실제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 법칙들의 작용이 다른 법칙의 동시적 작용에 의해서 저지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법칙의 개념으로서의 본성 때문입니다. (엥겔스, “쮜리히의 콘라트 슈미트에게”).

 

맑스는 사물들과 관계들 속에 놓여 있는 공통된 내용을 그것들의 가장 일반적인 사상적 표현이라고 개괄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추상은 사물 속에 이미 존재하는 내용을 사상적 형태로 재현한 것일 뿐입니다. (엥겔스, “쮜리히의 칼 카우츠키에게”)

 

맑스에게 있어서 추상은 사회현실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방법이다. 맑스가 추상의 방법으로 사용한 공통의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의 측정은 경험적, 역사적으로 교환이 발전하면서 현실과 대체적으로 일치해 오는 것이다. 물론 추상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노동시간을 측정하는 데 있어서 실험을 교란시키는 모든 요인들을 배제하고 동일한 조건―평균의 노동력, 노동조건, 노동시간―을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자본주의 교환에서 별의미가 없다. 현실의 자본주의 교환은 교환되는 상품들의 생산에 소비된 노동시간을 하나하나 측정하면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사회적, 경험적으로 확인된 공통의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교환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맑스의 추상은 사회현상을 경제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론이지만 이것은 현실과 무관한 허구의 가설이 아니다. 노동가치론은 자본에 고용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자본에 의해 지불되는 필요노동시간과 지불되지 않고 착취되는 잉여노동시간으로 나누며, 자본가의 자본의 성장 즉 축적은 물론 자본가 자신의 생활 유지조차 이 착취된 잉여노동에 의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처럼 이러한 노동가치론의 현실성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단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가상(假想)이나 가설(假說)에 불과하다고 본다면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노동가치론을 거부하면서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라는 과학적 개념과 계급투쟁의 원리를 버렸다. 이제 이러한 베른슈타인에게 남는 것은 착취의 철폐, 임노동제의 철폐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소득분배의 개선뿐이다. 이 소득분배에 있어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공정한 분배를 하는 기준점은 어디에도 없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와 ‘맑스를 넘어선 맑스’라는 네그리의 맑스주의의 재구성은 이렇게 노동가치론에 대한 폐기를 통해 그 만남이 이뤄지고 있다.

 

 

혁명전략의 문제

 

모든 정치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혁명의 문제, 국가권력의 문제와 연결이 된다. 그러나 자율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현실의 혁명을 거부한다. 네그리는 “모든 주권적 권력은 필연적으로 명령하는 머리, 복종하는 손발 그리고 지배자를 지탱하기 위해 함께 기능하는 기관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신체를 형성한다. 다중 개념은 주권에 대한 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진리에 도전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네그리는 “오늘날의 신좌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물질적이고 개념적인 파열―산업노동자 운동, 그들의 조직, 생산의 관리를 위한 그들의 모델 등의 이데올로기적인 전통과의 존재론적 단절―을 토대로 하는 탈사회주의적이고 탈자유주의적인 프로그램의 관점에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율주의자들은 비물질 노동의 헤게모니를 강조하면서도 독점자본이 물질노동은 물론이고 비물질 노동마저 장악하여 전 세계적 기업의 네트워크를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현실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한다. 자율주의자들은 국민국가가 사라진다고 하면서 여전히 현실의 거대한 폭력으로 남아 있는 국가권력과 맞서 싸우려 하지를 않는다. 사회 전체에 의해 집단적으로 생산된 물질, 비물질 노동의 결과물들이 사적으로 소유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국가가 지적재산권의 형태로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에 대해 다중의 네트워크는 저항할 현실적인 무기가 되지 못한다. 자율주의자들은 고도로 조직된 물질적 힘인 국가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역시 비물질적이다. 현실의 폭력적인 권력과 자본의 힘을 극복하고 그들 말대로 코뮌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물질적 방안이 전혀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서 타도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물질적 힘들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비물질의 세계로 도피한다. 생산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한 사회를 유지하는 계급 간, 계급 내 관계를 분석하고 착취 받는 계급의 조직된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계급론이 그들에게는 필요 없다. 계급론은 한 사회를 분석하는 과학이자 이 힘을 이끌어내는 조직의 수단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의 계급으로 통일되고 집중되는 힘 보다는 분산적이고 원자화된 다중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계급의 일부인 전위이자 고도로 조직화된 저항의 무기인 당, 새로운 사회의 지도세력인 당을 거부한다. 대신에 네그리는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하고 투쟁하는 과학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를 역설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을 하나의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이 바로 다중의 구성적 힘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 우리에겐 사랑에 대한 더 넓고 더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전근대적 전통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공적이고 정치적인 사고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 …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 모두 다중의 공통적인 물질적ㆍ정치적 기획 속에서 표현되고 구체화된다. (<<다중>>, 417쪽)

 

자율주의의 추상적인 자본주의 분석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한다. 이들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과학과 정신을 기회주의적으로 왜곡하고 추상적 경구와 언어, 종교적 회피로 노동자 계급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무장해제시키려 하고 있다. 자율주의는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지극히 반동적인 소부르주아 사상이다.

이진경(박태호 교수)은 프롤레타리아트란 “사회를 지배하는 척도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라면서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되기’ 전략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적 척도에 복속되는 길을 벗어나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 다른 종류의 가치,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안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진경의 ‘프롤레타리아-되기’는 그가 주장하는 ‘코뮨주의’의 핵심이다.

이진경과 마찬가지로 조정환도 다음과 같이 자본주의가 아닌 코뮨주의를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이다. 특이적 공통으로서의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은 이러한 노력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들이다.(조정환, “코뮤니즘 ‘발견’하고 현실화를 ‘발명’하라”, <<한겨레>> 2008. 2. 28.)

 

이들에게 코뮤니즘은 자본주의를 변혁하여 궁극적으로 달성할 이상이 아니라 단지 현실의 인식수단―그것도 왜곡되고 추상적 방식―으로써 발견하고 발명할 것에 불과하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말하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부르주아 국가의 전복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회피한다고 비판했다. 자율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국가 사멸을 통한 공동체 사회인 꼬뮨사회를 말하면서도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푸코, 들뢰즈, 네그리 같은 소위 포스트 맑스주의자들은 베른슈타인에 이어 현대의 대표적인 수정주의자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포스트 맑스주의는 쏘련의 몰락 이후의 청산주의적 흐름 속에서 이진경, 조정환 같은 수많은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리고 그 한 조류가 자율주의이다.

자율주의는 이진경이나 조정환 등처럼 과거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에 복무해왔던 지식인들이 혁명을 포기한 채 받아들인 소부르주아 잡사상이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사실은 그 자체로서 어떤 합리적 의미ㆍ내용도 가질 수 없는― 아카데믹한 지식담론을 일삼으며 진보적 지식인의 행세를 하고 있다. 자율주의는 현실의 운동과 무관한 소부르주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반동적 이데올로기는 맑스주의를 참칭하며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자율주의 같은 소부르주아 잡사상에 맞서 맑스주의의 원칙을 사수하고 맑스주의의 깃발을 더 높이 치켜 올리는 것이 우리 시대 혁명적 활동가들의 또 다른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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