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옌안문예강화 당파적으로 읽기 (3)

 

 

최상철 | 노사과연 운영위원

 

 

혁명적 대중 미술운동의 핵심 목판화운동

 

목판화는 글을 모르는 농민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 양식으로 판자와 조각칼만 있으면 누구라도 판화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판화는 그 특성상 쉽게 복제할 수 있기에 혁명적 이념을 대중들에게 쉽게 재생산 할 수 있는 도구였다. 화약, 나침반, 목판을 이른바 중국 3대 발명품으로 꼽는데 이에서 목판이 역사적으로 중국 인민과 친숙하다는 또 다른 장점도 찾아낼 수 있었다. 중국 혁명기의 목판화 운동은 지극히 열악한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제대로 된 조각칼마저 없어 우산대나 철사를 화로에 넣어 고쳐 만들었고, 그림을 고정시키는 압정이 없이 멧대추나무의 가시를 썼다고 한다.1)

이러한 혁명적 목판화 운동의 뿌리는 루쉰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쉰은 해외의 이론과 예술을 보급하는 데에도 정력적이었다. 루나차르스끼의 ≪예술론≫을 번역했고, 노동자의 삶을 진솔하게 그린 칼 메페르트(Karl Meffert)의 삽화집, 캐테 콜비츠(Käthe Kollwitz) 판화집, 예리한 풍자의 프란츠 마자렐(Franz Masareel) 판화집, 1920년대 러시아 혁명판화집 등을 발간하면서 리얼리즘 미술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1931년 8월 루쉰은 일본의 목판화가 우찌야마 카끼치(内山 嘉吉)2)를 초청하여 <목각 강습회>를 열었다. 강습회 이후 <목각연구회>가 발족되었고 중국미술사가들은 이를 중국 근대 신흥판화운동의 기념비적 출발로 삼고 있다.3) 루쉰의 목판화 운동은 해외의 리얼리즘 기법과 중국 전통의 목판화 기법이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게 결합된 것이었다.

 

<그림 1> 리후아(李桦, 리화), ≪울부짖는 중국(怒吼吧中国)≫, 1935.

전통 필선이 지닌 표현성을 이용한 신흥목판화 초기의 대표작.4)

 

옌안에 해방구가 열리면서 중국 목판화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옌안에 도착한 대부분의 화가들은 루쉰예술학교 미술과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팔로군과 행동을 같이 하기도 하고 농촌으로 들어와 인민의 삶을 배우고 선전활동을 하였다.5) 1939년 화베이연합대학(华北联合大学)이 옌안에서 외곽지역으로 옮겨간 후6) 외곽지역에서 목판화가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신사군 지구에서는 지폐와 우표도 목각으로 찍고 있었다. 1941년 장쑤성(江苏省, 강소성)의 옌청(盐城, 염성)시에 루쉰예술학교 분교가 설립되어 문학, 연극, 음악, 미술 등의 분야에서 학생들을 모집하였고 문예활동가들은 함게 학습을 하면서 대중운동에 복무하였다.7) “강화” 이후 문예운동가들의 당면과제는 보다 구체적인 것이 되었는데 문예계 전체에 “민간예술로부터 배우자”는 기풍이 크게 일어나 민요, 민간설화, 민간미술을 중시하게 되었다. “먼저 인민의 학생이 된 뒤, 인민의 선생이 될 것”을 몸소 실천하면서 미술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저우양이 1947년 ≪옌안목각선집≫8)에서 술회하고 있는 바처럼 이러한 예술적 수확은 빼어난 영감의 강림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오직 인민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태어난 예술만이 인민과 결합될 수 있는 생명으로 충만한 강한 창조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기존의 단색 목판화뿐만 아니라 인민들이 좋아하는 색깔 있는 그림을 위해 채색목판화 운동도 크게 번졌다. 민간의 종이 오리기(剪纸, 전지) 기법도 미술에 적극 반영되었다. 여러 면에서 해방구의 목판화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희망차고 경쾌한 전형을 창출하게 되었다. 1945년 중일전쟁이 끝나기까지 항전 8년간 중국 판화가들이 제작한 작품은 4천 종이 넘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 이 신흥목판화를 전세계에 알리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쏘련,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인도 등 세계 각국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도록을 편찬하여 세계 각지에 그 예술적 성과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9)

 

여기서 루쉰예술학교에서 공부한 중국 예술계의 탁월한 천재로 불리는 구위안(古元, 고원)의 작품을 맛보기해 보자. 그는 1940년작 ≪풀베기≫에서 목판 특유의 거친 질감 속에서도 섬세한 조각칼의 움직임으로 농민의 힘겨운 노동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 이는 작가가 옌안 바오타구(宝塔区, 보탑구)의 추안코우향(川口乡, 천구향)에서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작업에도 함께 참여했던 성과였다.

<그림 2> 구위안, ≪풀베기(铡草)≫, 1940.

<그림 3> 구위안, ≪감조회(减租10)会)≫ 1943.

 

“강화” 이후에 발표된 1943년작 ≪감조회≫에서는 구위안의 문제의식이 보다 진일보한다. 농민의 힘겨운 노동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러한 힘겨운 노동의 근원이 지주소작관계라는 봉건제도에 있음을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형상화해내었다. ≪풀베기≫에서의 거친 선은 보다 부드럽고 간결해졌고 밝은 분위기로 변화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지주를 향한 적극적인 항의의 움직임을 담으면서도 농민 군상의 다양한 움직임과 목소리를 작품에 놓치지 않고 담으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아이를 안은 여성농민도 항의에 같이 참여하나 아직은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아쉬운 면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같은 해에 발표된 ≪이혼소송≫에서는 이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여성농민의 목소리가 작은 목판의 넘어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그림 4> 구위안, ≪이혼소송(离婚诉)≫

 

목각판화 운동은 일제의 삼광작전이 전개되는 와중에도 전선의 최선두에 있었다. 이하에 목판화가 쩌우야(邹雅, 추아)가 회고하는 1940년의 상황을 인용한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그 즉시 가져온 많은 새 그림과 목각 작품을 석판으로 대량 복제하여 도처에 붙이고 다니며 선전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목각 작품은 근거지의 대중에게 좋은 교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장공작대의 동지들이 그것을 적 점령지역의 성내나 적의 보루 바로 밑에까지 부착하여 침략 일본군의 음모에 심리적으로 지대한 타격을 가했고, 일본군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괴뢰군의 사기도 크게 동요시켰다. 그 후 괴로군 중에는 이들 그림을 보고 투항해 오는 자들도 있었다.

– 쩌우야(邹雅, 추아), ≪진지루위 해방구의 목각활동(晋冀鲁豫解放区的木刻活动)≫11)

<그림 5> 쩌우야, ≪공성(攻城)≫, 1944.

 

 

낭만적 음악으로 혁명을 노래하다

 

음악은 추상성이 높은 예술로서 미술과 같은 직접적인 시각적인 인상으로 각인되는 것은 아니기에 감상자 또한 일정한 훈련을 요한다. 그런 측면에서 청각 예술은 음악은 시각 예술에 비해 다소 접근이 어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음악감상 및 악기연주를 비롯한 음악과 관련한 모든 활동은 인간의 두뇌 전체를 활용하는 일이며 또 가사와 관련한 활동이나 감상을 할 경우 언어중추를 적극 활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한 번 인상에 각인된 음악은 거듭해서 뇌리에 남아 인간의 사고와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옌안에서도 무수한 음악이 창작되어 홍군과 인민대중에게 널리 사랑을 받았으며 혁명적 실천의 동력을 제공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으로 ≪황허대합창(黄河大合唱, 황하대합창12))≫이 있다. ≪황허대합창≫은 시안싱하이(冼星海, 선성해)가 광웨이란(光未然, 광말연)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1938년 일제의 우한(武汉, 무한) 점령이라는 비극 속에서 창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비통한 정서만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항허강 양안 인민들의 용감무쌍한 항일투쟁을 소재로 하며 조국의 위대함과 인민의 근면ㆍ용기를 찬양함으로써 투쟁하는 인민들을 거인적 형상으로 빚어냈다. 웅장한 기세는 시대정신을 강렬히 반영하고 있으며 선명한 민족적 풍격을 체현한 것이었다.13) ≪황허대합창≫은 1939년 4월 13일 샨시성 북부 공립학교 강당에서 우시링(邬析零, 오석령)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당시 합창단은 40여명에 불과했고 실내악 편성의 작은 규모로 연주되었다. 심지어 경유통과 세숫대야까지 악기로 등장한 열악한 공연이었지만14) 청중들로부터 의미있는 반향을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작곡자 시안싱하이는 여성합창 부분에서 문제점을 드러낸 초연의 결과와 청중의 반응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였다. 시안싱하아니는 작품을 더욱 보강하여 5월 21일 루쉰예술학원에서 재연할 기회를 얻는데 이때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들이 대거 관람하였다. 재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마오쩌둥을 비롯한 청중들은 이곡을 열렬히 환영하였다.15) 이 곡은 창작 당시에는 9악장이었으나 이후 수차례 편곡되었는데 현재는 7악장 혹은 8악장으로 연주된다.16) 황하대합창이 옌안에서 공연되었을 때의 연주를 들을 길이 없으니 당대의 분위기와 작품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이후에 편곡되어 재편성 된  곡은 쉽게 웹상에서 찾아 들을 수 있는데, 위대한 인민의 투쟁의 역사를 담아낸 장대한 규모의 합창곡에 경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의 연주에서는 초기의 연주에 담겨있었을 투박하면서도 진솔한 혁명적 열기를 느끼기 힘들다는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진 1> 시안싱하이가 지휘하는 ≪황허대합창≫ 연습장면17)

 

옌안시대를 언급하며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음악가로 정률성이 있다. 정률성은 분단과 반공의 족쇄에 묶여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음악가였다. 1992년 3월 이이화의 “천재 음악가 정률성”이 ≪길을 찾는 사람들≫에 게재되면서 정률성에 대한 해금이 실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정률성은 광주 출신의 음악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중국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원래 의열단 활동을 하며 국민당군과 연계된 활동을 하였으나 그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18) 그는 1937년 옌안에 도착하여 서거하는 시각까지 인민의 군대를 위한 군가, 전가, 행진곡을 비롯한 작품의 창작을 멈춘 적이 없다.19) 13억 중국 인구중 10억은 정률성의 작품 중 최소한 하나는 알고 있을 정도로 그의 작품들은 유명하다. 정률성은 중국 현대음악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한 위대한 활동의 결과로 시안싱하이, 중국국가 ≪의용군행진곡(义勇军进行曲)≫의 작곡자 니에얼(聂耳, 섭이)과 함께 3대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다.20) 특히 올해는 정률성 탄생 100주년으로 중국에서는 대대적으로 정률성 탄생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그 일환으로 지난 8월 7일 <광주시립 국악관현악단>이 베이징에서 특별음악회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사진 2> 옌안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中国人民抗日军事政治大学,

약칭 항대(抗大))의 여성합창단을 지휘하는 정률성, 1938.21)

 

정률성의 작품은 고음과 장음이 많지만 변화가 심하면서도 괴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까다로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22) 그의 음악이 당대에 미친 영향은 보싸노바(Bossa nova) 형식이 재즈에 도입한 활기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보싸노바 형식은 현학적인 연주를 즐겨하던 재즈 연주자들의 욕구도, 쉽게 즐기며 몸을 맡길 수 있는 음악을 원하는 대중들의 욕구도 모두 만족시키며 관성에 젖어가던 재즈 음악에 활력을 불어넣었는데, 정률성의 음악이 가한 신선한 충격도 이에 견주해본다면 당시 대중과 음악활동가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해하는데 약간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률성의 음악에 담긴 사상과 의식성을 빼놓고 형식주의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의 곡들은 형식적인 기교로 텅빈 내용을 미봉하려는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선율과 선법, 박자를 다루는 탁월한 재능과 인민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혁명적 송가를 담은 그 내용이 잘 어우러져 연주자와 청중 모두로부터 갈채를 이끌어 냈다.23)

옌안의 정률성은 시대를 뛰어넘은 명곡 ≪옌안송(延安颂)≫을 작곡한다. 옌안송의 작사가는 모예(莫耶, 막야)인데 옌안 곳곳의 감동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지켜보던 정률성이 모예에게 거듭된 간곡한 요청을 했기에, ≪옌안송≫의 가사가 완성될 수 있었다.24) 곡은 1938년에 4월에 완성되었고 정률성이 직접 만돌린을 타면서, 가수 탕롱메이(唐荣枚, 당영매)와 함께 소합창 형식으로 ≪옌안송≫을 초연하였다. 당시 마오쩌둥과 주더를 비롯한 당 지도부를 비롯한 대중들은 열렬한 환호로 화답하였다. 곧 ≪옌안송≫은 해방구 각지를 넘어서 국민당 통치구의 화교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25)

≪옌안송≫에서 옌안은 이렇게 묘사된다.

 

바오타산 산봉우리에 노을 불타고

연하수 물결위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고

산과 산 금성철벽 이루었네

아, 옌안!

장엄하고 웅위론 도시(古城)

승리의 노래 울리누나!

……

아, 옌안!

장엄하고 웅위론 도시

철벽의 성새, 승리의 요람

그대 이름 세월과 함께

역사에 길이 빛나리!26)

<그림 6> ≪옌안송≫ 악보의 도입부

 

≪옌안송≫의 도입부는 4분의 3박자로 시작하며 옌안의 전경을 노래한다. 이어 4분의 2박자의 서술식의 음악은 적들에 대한 천만 청년의 증오를 보여준다. 이들 견고한 투사들이 강철성새가 되어 무적의 투사가 되리라 예언한다. 곡은 다시 4분의 3박자로 돌아오면서 1절의 후반부를 재현한 송가로 마무리 된다.27) ≪옌안송≫은 낭만적인 송가에 승리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다. 서양 고전음악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중간에 행진곡풍을 가미하여 여타 중국인 음악가들과도 다른 독창성을 발휘한 작품이다. 혁명적 열정과 노ㆍ농ㆍ병ㆍ인민의 일치단결에 근거한 해방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렇도록 찬란하고 낭만적인 송가가 나올 수 있었는가.

1864-75년 옌안에서는 이슬람교도의 봉기가 있었고, 1870년대에 대가뭄을 겪었다. 1920-30년대 대가뭄으로 인해 옌안 전체의 인구가 줄었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1938-39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28) 이렇게 19세기 후반부터의 고난이 중첩이 되고, 일제의 포위섬멸전이 시시각각 목을 죄는데다가, 국민당군도 호시탐탐 해방구를 노리고 있던 척박한 옌안의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본다면 결코 이렇도록 찬란하고 낭만적인 송가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고난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항일전쟁 시작 후 수천수만의 청년들의 활기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혁명의 성지로 거듭나고 있는 옌안에 대한 애정이 서정적인 선율과 전투적인 예술의 언어로 재탄생한 것이 ≪옌안송≫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옌안송≫은 오늘날에 이르도록 중국 인민대중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정률성의 음악 창작에 있어 행진곡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행진곡 형식을 이용하여 인민의 군대의 활동을 적절하게 반영하였다. 그것은 서구 음악형식을 차용하는데 있어서의 모범이 되었다.29) 1939년 정률성과 작사가 공무(公木, 공목)는 ≪황허대합창≫을 듣게 되는데 이는 두 사람의 공동 작품 창작에 자극제가 되었다. 당시 정률성은 박력있는 곡을 구상하며 손에 돌을 쥐고 돌을 쳐가며 작곡하였는데, 간혹 돌을 친다는 것이 손을 치게 뒤어 손에서 멍들고 피가 나기도 하였다.30) 이런 과정에서 창작된 ≪팔로군행진곡(八路军进行曲)≫은 정률성을 대표하는 행진곡이다. 이곡은 ≪팔로군대합창(八路军大合唱)≫의 일부인데 정률성의 합창곡은 이 곡은 간결하고도 힘찬 외침을 전하는 “전진! 전진! 전진!”으로 시작한다. 항일전선에 시급히 달려가려는 진실한 염원을 첫 구절에 담아 강한 호소력을 가지도록 하였다. 이어서 각지에서 싸우는 영웅적 홍군의 모습을 힘찬 걸음걸음으로 전진하는 듯한 선율과 리듬에 담았다. 시종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울 듯한 기세를 담은 이곡은 해방전쟁시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中国人民解放军进行曲)≫으로 되었고 1951년 중앙인민정부 혁명군사위원회가 공표한 “내무조령”에 따라 ≪중국인민해방군군가(中国人民解放军军歌)≫가 되었다.31) 

 

아, 나팔소리 울린다.

아, 항전의 노래 우렁차다

동무들 발을 맞춰 항일의 싸움터로

동무들 발을 맞춰 적들의 후방으로

앞으로, 앞으로 우리 대오는 태양을 향한다

나가자 화북벌로! 장성 밖으로!32)

 

정률성은 조선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작곡에 조선의 민요의 형식을 반영하였는데 ≪생산요(生产谣)≫와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또한 그가 작곡한 4분의 2박자 바장조의 ≪혁명가≫는 당시 화베이 조선인민전사들이 가장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닥쳐오는 결전은 우리의

필승을 보여 주네

압박 없는 자유의 사회를

과감히 쟁취하리

우리들은 피끓는 젊은이

혁명군의 선봉대33)

 

1945년 일제가 항복하자 옌안은 사흘 간 대축제 분위기였다. 정률성을 포함한 수백 명의 조선인 혁명가들도 “조선독립만세!” “조선민족해방만세!” “위대한 항일전쟁만세!”라는 구호를 감격적으로 외쳤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약 4백 명이었는데 떠나는 날 모두 ≪옌안송≫을 부르고 우뚝 솟은 바오타산(宝塔山, 보탑산)을 바라보면서 서운해 했다. 정률성은 당시 귀국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조국을 향하여 전진(向祖国前进)≫이란 노래를 작곡했는데 의용군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옌안을 떠났다.34)

 

 

신가극 운동의 결정체 백모녀

 

1937년 이후 연극인들도 좌우을 넘나들며 <중화전국희국계항적협회(中华全国戏剧界抗敌协会)>를 결성하여 항전극 유포에 노력했다. 특히 해방구에서의 활동이 활발했는데 결사적인 항전의 분위기는 격정적이며 즉흥적인 연극이 대두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 중일전쟁 후반기에 일어난 주요한 연극적 발전은 신가극의 등장이었다. 신가극은 서구적인 연극 구성방식과 중극 전통희곡, 전통음악이 합쳐져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서유기, 홍루몽, 수호전과 같은 고전극을 기반으로 한 창작이 성황을 이루었다. 1942년 루쉰예술학원과 팔로군의 경극극단이 연합하여 옌안평극연구원(延安平剧硏究院)35)을 창립하였고 <어쩔 수 없이 양산박으로 도망치다(逼上梁山>36), <축가장을 세 번 치다(三打祝家庄)>37)와 같은 연극을 공연하였다. 두 작품 모두 신편역사극(新编历史剧)에 속하지만 전통 경극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38) 1944년에는 루쉰예술학원이  대형 신가극 ≪백모녀(白毛女)≫를 집체 창작하여 상연하였다.39) 허징즈(贺敬之, 하경지)와 딩이(丁毅, 정의)가 대사를 쓰고 마커(马克, 마극) 등이 음악을 작곡하였다. ‘백모녀’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여인’이란 뜻으로 민간전설 백모선고(白毛仙姑)40)를 연원으로 한 것이며,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41)에 맞추어 옌안에서 초연되었다.42)

<그림 7> 영화로 제작된 ≪백모녀≫의 포스터, 1950.

 

1951년 ≪백모녀≫는 딩링의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太阳照在桑干河上)≫와 함께  쏘련 쓰딸린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쏘련ㆍ체코ㆍ인도ㆍ일본ㆍ등지에서는 번역ㆍ상연되기도 하였다. 1950년에는 장춘영화제작소(长春电影制片厂)에서 영화화되어 체코에서 열린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기도 하였다.43) ≪백모녀≫ 현재까지도 완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에서 중국어 비전공자가 신가극 ≪백모녀≫를 충실한 감상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1950년에 영화화된 ≪백모녀≫를 감상하길 권장한다. 비교적 충실하게 가극을 영화화하였으며44) 전체적인 줄거리를 안다면 중국어를 모른다고 해도 내용을 대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다.

≪백모녀≫는 ‘낡은 사회는 사람을 귀신으로 만들지만, 새 사회는 귀신을 사람으로 만든다’45)는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내용을 담고 있어 인민대중 누구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작품의 내적 대립구도도 명확한데, 악덕지주와 그 앞잡이의 봉건계급은 타도대상, 지주의 핍박을 받는 소작농들의 선량함이 부각되고 이들 무산계급이 향후 건설될 사회주의사회의 주축이 될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다.46) 작품에서는 음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 대사를 노래로 처리(recitative)하는 오페라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이다.47) 시와 음악 무용의 요소가 낭만주의적 성격을 구심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결합하였고48), 훗날 무리 없이 발레로 재편성 되어 현재에까지도 자주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백모녀≫에서 드러나는 낭만주의는 “강화” 시기의 다른 모범적인 문에 작품들에서처럼 서유럽 낭만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일신하여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이 결합한 혁명적 낭만주의의 규범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49)

백모녀의 허베이성 북부에서 전해오는 민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를 <서북전지복무단(西北战地服务团)>의 시인 샤오쯔난(邵子南, 소자남)이 이를 취재하여, 극화하여 옌안에도 알려졌다.50) 

 

백모녀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허베이(河北, 하북)의 소작농 양바이라오(杨白劳, 양백로)는 악덕지주 황스런(黃世仁, 황세인)에게 세를 빚지고 있다. 이를 빌미로 황스런은 양바이라오의 외동딸 시어(喜儿, 희아)를 저당 잡힐 것을 강요하고 매매문서에 억지로 도장을 찍게 한다. 이에 양바이라오는 간수를 먹고 자살한다. 시어는 황가에게 끌려가고 약혼자 왕다춘(王大春, 왕대춘)은 역시 멀리 쫓겨난다. 시어는 황가네에서 갖은 학대와 모욕을 당한다. 게다가 황가의 모친은 아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다시 팔아치우려고 한다. 그녀는 장어션(张二婶, 장이심)의 도움으로 도망쳐 산에 올라가 과일과 사원의 제사음식을 먹으며 연명한다. 수년 후 시어는 머리카락과 눈썹 등이 모두 백발이 되고 우연히 마을 사람이 그녀를 목격하여 백모선고라고 여기게 된다. 왕다춘은 팔로군이 되어 승승장구하여 마을로 돌아온다. 왕대춘은 산사에 올라 백모선고가 바로 시어임을 밝히고 황스런은 빈농대중들의 공개재판을 받는다.51)

≪백모녀≫는 전통극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주제를 이어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설화의 미신과 숙명론을 버리고 공산당 팔로군과 함께 하는 농민해방의 이념을 제시시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 형식이 새시대에 맞추어 개편된 것이다.52) ≪백모녀≫는 새시대가 요구하는 민족형식의 전형을 구현하고 있는데, 당시 중국 서북 지역 인민들이 공산당의 지도 하에 감조감식 투쟁을 하였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53) 지나치게 선명한 내용과 결말의 때로는 작품을 무미건조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백모녀≫는 짜임새 있는 구조를 통해 설득력 있는 주제를 도출해 내면서 이를 극복해 내고 있다.54) ≪백모녀≫는 중국 서북 지역 인민들이 사용하는 평이한 구어와 토속적인 대사를 사용하여 인민의, 언어, 풍속, 신앙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준다. 종래의 희곡에서 흔히 보이는 난잡하고 현학적인 언어가 아니라 인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어를 재발견해 무대언어로 승화시켰다.55) 그리고 결말 부분의 인민재판을 통해 빈농 인민대중이 갈등 해결 주체로 등장하여 고난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는 밝고 희망찬 결말을 제시하고 있다. ≪백모녀≫는 구형식을 발전적으로 계승해내면서도 신형식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신가극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전형을 창출해냈다. 이는 마오가 “강화”에서 강조한 ‘보급’과 ‘제고’의 통일이 이루어진 모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문제

 

“강화”를 통해 항일 전쟁 시기의 예술운동에 있어서 민족적 형식을 계승ㆍ발전시켜야 함이 강조되었지만 그것은 외국의 것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거국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총화단결이 요구된다고 하여 국가지상주의, 민족지상주의를 표방하며 파쇼화했던 국민당 정권과 달리56) 중국 공산당은 혁명시기 시종일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올곧게 견지하려 노력하였다. 1937년 옌안에서 창간된 ≪해방일보≫의 권두논평에서 주더는 에스빠냐 내전에 대해 다뤘고57), 또한 중국 혁명의 전장의 곳곳에서 에스빠냐 내전에 연대하는 군중의 연대의식이 공공연하게 표출되었다. 이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국제연대의 본보기이다. 또 홍군은 일본 근로인민 대중과 함께 연대하기 위해 생포된 일본군 병사들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대우를 하였고 심지어 이들을 교육시키기까지 했다.58) 이러한 국제주의적인 분위기는 해외의 여러 활동가들이 중국 혁명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이를 다시 해외에 알려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영화 ≪4억 인민(The 400 Million)≫(1939)을 연출한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도 그 대표적인 인사이다. ≪4억 인민≫은 일제에 대항한 중국 4억 인민의 투쟁을 담은 작품이다. 영화음악은 한스 아이슬러가 담당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오늘날 영화 제작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이 작품을 현대의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교한다면 상당히 밋밋한 영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서 요리스 이벤스의 카메라는 희생되는 중국인들 곁을 지켜내었으며 이를 당대 최선의 예술적 언어로 생생하게 증언해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와 역사성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한 헌신적인 그의 연대를 널리 기리고자 중국 팔로군기념관(八路军西安办事处纪念馆)59)에서는 요리스 이벤스의 사진과 카메라가 전시되어 있다. 발표당시 이 영화는 제작을 한 미국에서도 상업적인 배급을 할 수 없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반파시즘을 내용으로 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되었다.60)

<사진 3> 영화 ≪4억 인민≫의 포스터

 

소설 ≪닥터 노문 베쑨≫에도 중국혁명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소중한 실례가 등장한다. 노만 베쑨은 중국 동지의 투쟁가에 ≪탤만 대대의 노래≫61)를 부르며 화답한다. 통역을 통해 전달된 캐나다인 베쑨이 부르는 마드리드 전선을 위한 반파시즘 독일 투쟁가가 중국의 노농병 교사들에게 위화감 없이 다가갔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파시스트 앞에서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리,

총탄이 빗발처럼 퍼부어진다 하여도.

동지여, 우리의 굳센 투사들이여, 우리 곁에 서시오.

우리의 앞길은 오리지 승리, 후퇴 없으리.

 

북을 울려라, 총검을 세우라!

앞으로 전진하라, 승리가 보답하리라.

깃발을 앞세우고 적진을 쳐부수라.

탤만 대대여, 앞으로 전진하라.62)

  

마오쩌둥은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생애를 중국 혁명에 바친 베쑨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며 아래와 같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다시금 강조하였다.

 

우리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 무산계급과 단결해야 하며, 일본ㆍ영국ㆍ미국ㆍ독일ㆍ이탈리아 및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무산계급과 단결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과 인민을 해방시키며, 세계의 민족들과 인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국제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편협한 민족주의와 편협한 애국주의를 반대하여 싸우는 우리의 국제주의인 것이다.63)

화가 쉬베이홍(徐悲鴻, 서비홍)의 작품 ≪우공이산도(愚公移山图)≫64)에서도 국제주의를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쉬베이홍은 중국 수묵화의 전통에 새시대의 리얼리즘을 접목한 궈화(国画, 국화)를 제창한 미술운동가로써 중국 근대 회화 발전에 주요한 공로를 세웠다. ≪우공이산도≫는 144×421cm의 거대한 화폭에 담긴 수묵채색화이다. 1940년 항일 전쟁기라는 고난의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 우화를 통한 선전선동이 현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 8> 쉬베이홍, ≪우공이산도≫ 쉬베이홍기념관(徐悲鸿纪念馆) 소장.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쉬베이홍은 타고르의 초청을 받아 인도국제대학에서 전시를 갖고 인도를 여행했다. 이때 작가는 간디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인도에서 완성된 이 수묵화는 고전 우화를 주제로 하여 전통화법과 서양화법을 통합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작가는 강인한 노동자를 그려내면서 중국 인민의 승리에 대한 굳은 믿음과 인류의 협동으로 미래를 건설해나가자는 진심어린 희망을 표현했다. 그림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남성 누드 군상이다. 동시대 수묵화와 비교할 때 대단히 예외적인 구성이라 할 수 있다.65) 중국 노동자와 인도 노동자가 대등하게 다루어진 것도 흔히 볼 수 없는 이례적인 구도이다. 다만 이 작품에는 주요한 한계점이 있다. 그것은 남성 노동자의 나신과 근육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그것이 여성의 노동과 전면적으로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별 위계 분업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중국노동자와 인도노동자의 국제연대는 남성만의 것으로 비춰질 우려가 다분하다. 새로운 인류의 이상사회 구현을 위해서는 여성의 주체적인 실천이 그 어느 때보다 주요하게 필요하다. 더욱이 인류 과학기술의 발전은 지속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근력의 차이를 근거로 한 성별 위계분업화를 철지난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쉬베이홍의 ≪우공이산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전진에 오히려 역행한다는 것을 반드시 지적해야만 한다.

 

 

또 한 명의 조선인 문예투사 한락연

 

1924년 1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미술계의 수재로 소개되고 프랑스에 유학하며 중국의 삐까쏘라는 별칭을 얻은 미술가 한락연도 중국 공산당의 활동에 적극 복무한 문예투사였다. 이전에 그의 생애는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5년에 국립현대미술관과 베이징의 중국미술관과 공동주최로 <한락연 특별전>이 덕수궁미술관 열리면서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서서히 고조되고 있다. 그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락연은 1898년 지린성 용정시66)에서 태어났다. 1919년에는 용정에서도 3ㆍ1 봉기가 일어나 3만 여명의 군중들이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한락연은 당시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만드는 임무를 담당하며 동참하였다.67) 1923년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68) 통일전선운동을 위해 국민당에도 가입하였다. 1925년 하얼빈에 파견되어 청년독서회를 꾸리고 야학을 조직하고 교편을 잡으며 청년지식인과 학생들 속에서 당사업을 전개하였다. 1929년 당조직의 비준을 거쳐 프랑스 리옹에서 고학을 하였다. 어려운 생계 속에서도 미술학습에 열중하였고 이국에서도 조선 민족의 해방과 중국혁명에 관심의 끈을 놓치 않고 활동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하자 ≪빠리시보≫의 촬영기자로써 반파쇼 국제선전사업에 종사하였다. 그해 가을 우한에 도착하여 <동북항일구망총회(東北抗日救亡總會, 약칭 동총(東亡))> 당지부에서 선전대활동을 하며 항일 공연활동을 힘있게 지원하였다. 당시 진보적 항일 월간지 ≪반공(反攻)≫의 표지를 그리거나 원고편집 및 집필을 하였다.69)

 

<사진 4> 항일 잡지 ≪반공≫

당시의 표지와 삽화는 대부분 한락연이 담당했다.70)

 

<사진 5> 한커우(汉口, 한구)의 강한관(江汉关)

 이 건물 종탑에 한락연의 선전용 대형 유화가 걸려있었다.

한락연의 걸개그림과 관련한 아무런 사진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볼 때 안타깝게도 유실된 것으로 보이다.

 

또한 한락연은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도와 의약품 지원을 조력했으며 에드가 스노우, 레위 앨리71) 등과도 협력하여 국제선전을 추진하였다. 1938년 옌안을 참관하였고 여자대학에서 항일전쟁시기 민족민화예술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1939년부터 국공양군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하여 국민당군의 포화를 공산당이 아닌 일본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항일투쟁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1940년 국민당군에 체포되었는데 감옥에서도 당의 비밀의 고수하고 자신의 신분을 폭로하지 않았다. 당조직의 구명활동으로 1943년 석방되지만 국민당은 야비하게도 ‘서북지역을 떠나지 못하’며 ‘근로인민을 형상화한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제약을 걸었다.72) 훗날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때의 심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국민당 정권은 내게 풍경화와 정물화만 그리게 하고 노동 대중은 그리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태평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만큼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국민당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풍경 속에 때로는 사람, 특히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도 담아내었다. 이처럼 국민당 특무에게 흠 잡히지 않을 정도로 교묘한 수법으로 노동현장의 인민들을 자신의 작품에 포함시켰다.73)

<그림 9> 한락연, ≪절구질하는 까자흐 여인≫, 1945.

 

한락연은 유학시기 신인상파와 초현실파의 작품들을 접하였으나 이들 조류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았다. 색광의 표현을 목적으로 색책분석을 추구하는 신인상파나 초현실적인 몽환을 추구하는 조류와는 달리 한락연의 작품에는 시종일관 리얼리즘의 원칙이 올곧게 견지되고 있다.74) 한락연의 다음을 좌우명으로 삶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했다. “미술을 하려면 인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가 그 진의를 씹어서 소화하여야 하는데 마치도 모래 속에서 금을 씻어내는 것처럼 연마하여 제 것으로 만들어야 발전이 있다.”75) 1947년 한락연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인데 사고현장에 대한 보도가 없고 한락연의 유품을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76) 한락연이 사망하자 영국의 ≪타임즈(The Times)≫지도 부고를 냈고, 중국 공산당은 그를 혁명열사로 칭하고 유족들은 광영지가(光荣之家) 영예를 얻는다.

<그림 10> 시안에서 국민당군에 투옥되었을 당시 한락연의 옥중자화상, 1940.

 

생산과 교육 그리고 예술의 위대한 결합 마침내 중국 대륙을 붉게 뒤덮다

 

이외에도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이 중국혁명의 전진의 길에 수를 놓았다.

중국 혁명의 승리의 길은 고난과 절망을 딛고 일어났기에 현실이 되었다. 학살과 패배의 역사를 뒤로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대장정을 해야 했다. 옌안에 해방구를 형성한 이후에도 숱한 인민들, 혁명가, 문예활동가들이 전장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중국 공산당원들은 역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힘겨운 시기일수록 마오의 노선으로 단결하여 승리에 대한 확신을 지니며 인민 속에서 실천하고 인민과 함께 현실을 바꾸어 내면서, 인민으로부터 배우는 인민의 교사가 되었다. 그러한 꾸준한 실천의 결과 해방구 곳곳에서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34,000 에이커의 황무지가 곡물과 채소를 가꾸는 논밭으로 바뀌었다. 산기슭에는 새로운 동굴집들이 점점이 들어서 있고, 샨시(山西)성 전투지역에서 쫓겨 온 피난민들은 새로운 마을을 이루고 정착했다. 협업장과 소규모 공장, 학교가 있는가 하면 산에는 양과 염소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노련한 특파원들은 전쟁이 벌어진 후 처음으로 먹고 입는 데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중국군과 농민들을 만났고 또한 처음으로 읽고 쓸 줄 아는 병사들과 농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77)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모이고 모여 해방구의 방비를 더욱 단단해졌고 국통구와 일제 점령 지역에도 차츰 공산당의 영향력을 증대하였다. 올바른 구심점을 찾은 대중운동은 잊고 있던 자신의 위대한 힘을 역사를 통해 보여주었다. 노농병 대중과 문예 활동가들의 일치단결 생산과 교육 그리고 예술의 위대한 결합은 경이로운 기적을 이루어내었다. 마오는 바로 이 대중운동의 핵심을 밝혀내었다. 예술과 정치의 분리라는 오래된 이원론을 극복해내고 레닌의 “당조직과 당문학”의 노선을 중국의 구체적 현실에서 혁명적 실천으로 외화 해냈다. “강화”를 문예운동의 이론적 지침이자 정치투쟁의 실천적 지침으로 삼은 노ㆍ농ㆍ병ㆍ지식인 대중은 일치된 문무전선에서 일제와 국민당 봉건세력과 맞서 싸워나갔으며 마침내 파쇼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봉건 중국사회를 신민주의의 새시대로 이끌어냈다. 시종일관 창의적인 문예운동으로 전세계 혁명운동에 지대한 영감을 준 중국혁명의 역사는 인민의 해방투쟁과 함께 길이 할 것이고 향후 문예 운동에 있어서도 끊임없는 원천을 제공할 것이다. 

 

혁명 이후 중국 사회주의가 신민주주의 혁명을 훌쩍 넘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 1962년 옌안을 방문한 시인 신디(辛笛, 신적)는 시 “옌안의 조원(枣园)78)에서”를 쓰며 위대한 혁명 투쟁을 찬양한다.

 

위대한 마오쩌둥의 사상은 혁명의 방향을 가리키고,

또한 생활의 표준이다.

……

마지막, 마침내 못내 아쉬워하며 물러 나왔을 때,

조원에 햇빛이 찬란하여,

오색빛깔 화려하니,

바로 위대한 조국의 아침이로다!79)

 


 

1) 토미야마 타에꼬(富山 妙子), 이현강 역, ≪해방의 미학≫, 한울, 1985, p. 195. 토미야마 타에꼬는 일본의 미술가로서 조선인 군 위안부에게 바치는 유화와 석판화 작업을 하였고(http://ja.wikipedia.org/wiki/富山妙子), 1980년 광주인민봉기에 연대하기 위해 희생당한 임산부의 모습을 ≪학살≫이라는 판화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2) 유홍준의 글에서는 ‘야마우찌(山内 嘉吉)’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정확히 바로 잡아준 Julia님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라.

(https://kotobank.jp/word/内山嘉吉-1274223)

 

3) 유홍준 “중국 신흥판화 50년의 발자취와 교훈”,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유홍준 평론집≫, 창비, 1996, p. 304.

 

4) 유홍준, 같은 글, p. 307.

 

5) 같은 글, p. 310.

 

6) 당시 학교의 이동은 일본과의 전황에 따른 전시 작전조처의 일환이었다.

(http://baike.baidu.com/view/532219.htm)

 

7) 토미야마 타에꼬, 앞의 책, p. 194.

 

8) 유홍준의 글의 제목을 그대로 간체자로 옮겨 周扬, ≪延安木刻选集≫, 1947을 여러모로 조합하여 검색해보았으나 일치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바이두 백과사전에도 일치하는 내용이 없으며(http://baike.baidu.com/subview/73931/4966879.htm), 중문판 위키백과는 소략하게 작성되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확한 원문 제목을 병기하지 못하였다.

 

9) 유홍준, 앞의 글, pp. 310-312.

 

10) 감조는 소작율 인하를 말한다. 이전 연재를 참고하라. 최상철, “옌안문예강화 당파적으로 읽기 (2)”, ≪노동사회과학≫ 제6호, 노사과연, 2013, p. 32.

 

11) 晋冀鲁豫边区(진기노예변구). 산시-허베이-산둥-허난에 이어지는 중국 공산당의 해방구. 이 지역의 문예 노농병 인민대중 및 문예활동가들은 일제와 치열하게 격전을 펼치는 와중에도 국민당군과도 맞서야 했다. 토미야마 타에꼬, 앞의 글, p. 194에서 재인용.

 

12) 대합창은 서양 음악의 칸타타(Cantata)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13) 编著組(비엔쭈주, 편저조), 유홍준ㆍ박수인 역, ≪예술개론≫, 청년사, p. 132의 역자 주.

 

14) 다음 카페 societas musici(http://cafe.daum.net/GermanMusicology)의 ‘머나먼 정글’님의 글 “중국의 경우-피아노 협주곡 ‘황하’에 대해”, 2006. 12. 12.

 

15) ‘머나먼 정글’님의 글에서는 ≪황허대합창≫ 초연에 마오쩌둥이 관람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오류로 보인다. (http://web.stanford.edu/~dlsun/yellowriver/creation.html)

 

16) ‘머나먼 정글’, 같은 글. 바이두 백과사전에는 8악장 편곡을 기준으로 곡 해설을 하고 있다. 전곡의 가사도 담겨 있으니 참조하라. (http://baike.baidu.com/subview/40643/10971929.htm)

 

17) 정확한 사진의 날짜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합창인원을 일일이 세어보니 1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데, ‘머나먼 정글’님의 글이 정확하다면 초연을 위한 연습장면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18) KBS 스페셜, ≪한중 수교 20년 기획—13억 대륙을 흔들다, 음악가 정율성≫, 2012년 1월 15일 방송. 원래 이 다큐멘터리는 2011년 8월 광복절 특집으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정률성의 이북에서의 행적을 문제삼는 이들 때문에 11월로 연기되고 한 차례 더 연기되어 이듬해에야 방영될 수 있었다.

 

19) 딩쉐쑹(丁雪松, 정설송) 편, ≪중국 인민해방군가의 작곡가 정률성—② 그의 음악≫, 형상사, p. 22. 인용한 부분에서는 정률성이 19세인 1933년 중국에 도착하였는데 19세에 옌안에 도착한 것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20) 하성봉, ““하성봉의 중국이야기 9”—조선인 음악가 ‘정율성’ 중국 또 하나의 보물”, 2012. 1. 12. (http://m.mediatoday.co.kr/articleView.html?idxno=99722)

 

21) 사진출처: 인민음악가정률성 기념관 웹싸이트 (http://www.zhenglvcheng.net)

 

22) 딩쉐쑹 편, 앞의 책, p. 31.

 

23) 같은 책, pp. 31-32.

24) 같은 책, p. 68.

25) 같은 책, p. 69.

 

26) 현대 한국어 사용자들이 볼 때 다소 어색하게 들리는 표현이 있지만 중국의 조선인들이 부르는 ≪옌안송≫의 분위기를 전달하고자 일부부만 수정해서 옮긴다.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예술사≫, 중국민족출판사ㆍ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p. 53.

 

27)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같은 책, 같은 곳.

 

28)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16권, 한국브래태니커회사, 2002. pp. 82-83.

 

29)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앞의 책, p. 55.

 

30) 최화, “정률성과 공목의 또 다른 이야기 들어본다—공목의 부인 오상(吴翔)녀사를 만나”, ≪길림신문≫, 2014. 8. 28. (http://kr.chinajilin.com.cn/sports/content/2014-08/28/content_141670.htm)

 

31)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앞의 책, p. 55.

 

32) 가사 번역의 출처는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9년 8월 17일자 김혁의 기사 “해방군 군가의 작곡가 정률성을 아십니까(3) 태양따라 앞으로(3)—인민음악가 정률성의 음악과 삶”이다. 아래 싸이트에서 재인용하였다.

(http://koreancc.com/show.php?ctid=12BBA4E5DBE3D574A26B535E0113F7BB&idx=14580)

 

33)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앞의 책, p. 41.

 

34) 하성봉, ““하성봉의 중국이야기11”—정률성이 고향 광주로 못가고 북으로 간 까닭은”, 2012. 1. 26. (https://mediatoday.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99967)

 

35) 평극은 경극(京剧)의 다른 이름이면서 연극 일반을 가리키기도 한다. 서구에서는 오페라(opera)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36) 핍상양산. 북송말기 임충(林沖)의 고사에서 유래한 사자성어. ≪수호전(水滸傳)≫은 봉건시대의 학정에 저항하는 농민반란을 소재로 하였기에 항전문학으로 재탄생하기에도 본질적으로 적합한 것이었다. 또 수호전에 나오는 “팔방이 한 지역이요, 온갖 성이 한 집안을 이루었네(八方共域 异姓一家)”라는 대목은 봉건시대에 제출된 이상적인 사회상이라고 볼 수 있다. 주춘밍(朱存明, 주존명)ㆍ왕하이롱(王海龙, 왕해룡), 유세종 역, ≪사회주의 미학연습≫, 전인, 1989, p. 232. <어쩔 수 없이 양산박으로 도망치다>는 1943년 옌안에서 초연되었다.

(http://baike.baidu.com/subview/117463/11034945.htm)

 

37) 이 작품 또한 ≪수호전≫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축가장을 공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막 42장의 연극으로 1945년 2월 초연되었다. (http://baike.baidu.com/subview/73225/10268674.htm)

 

38) 신지영, ≪중국 전통극의 이해≫, 범우사, 2002, pp. 130-131. 단 신지영의 책에서는 <연안평극연구원>의 창립년도를 1941년으로 표기하고 있지만 바이두백과(百度百科) 및 다른 경로로 검색해 보았을 때 1942년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라 판단한다. (http://baike.baidu.com/view/1546722.htm)

 

39) 양회석, “호극(滬劇) ≪백모녀≫를 통해 본 중국 희곡개혁운동”, ≪중어중문학 제11집≫, 한국중어중문학회, 1989, p. 257.

 

40) 중국전통 설화에 등장하는 권신징악의 신.

 

41) ‘7대’는 1945년 4월 23일 개막되어 6월 11일에 폐막되기까지 50일간에 걸쳐 열렸다. 대회의 정식 대표는 547명, 후보 대표는 208명으로서 당원 121만명을 대표하고 있었다. 대회에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15인의 주석단을 조직했으며 개막식에서는 일본 공산당수 오까노 스스무(岡野 進)의 연설도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 대회에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폐막식에서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제목으로 폐막사를 하였다. 시아오시아오친(肖效钦, 소효흠)ㆍ리리앙즈(李良志, 이양지), 최윤수 역, ≪중국 혁명사 2≫, 거름, 1990, pp. 120-121.

항일 전쟁의 최후의 승리를 준비하는 결정적 시기에 혁명의 수도 옌안에서 ≪백모녀≫ 공연이 성황리에 펼쳐졌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문무전선의 일치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42) 신지영, 앞의 책, pp. 130-131.

 

43) 배연희, 석사학위논문 “신가극 ≪백모녀≫ 연구”, 1991, p. 2. 참고로 배연희의 논문은 1953년 개정본을 주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44) 여기에서 말하는 충실한 영화화는 초연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모녀≫는 초연이후 집단적인 토론과 비판을 거쳐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배연희, 같은 글, p. 34.) 또 ≪백모녀≫는 오늘날에도 새로운 재해석이 등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충실한 영화화란 전체 가극의 큰 줄거리와 갈등구조가 영화에 잘 구현되어 누가 보더라도 작품의 큰 줄기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유튜브나 중국 웹싸이트 http://www.youku.com에서 ‘白毛女’로 검색하면 쉽게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45) 저우양의 표현. 배연희, 같은 글, p. 33에서 재인용. 이는 또한 5막 제2장 제78곡의 가사이기도 하다. 양회석, “신가극 ≪백모녀≫와 민족형식”, ≪중극희곡≫ 제4호, 한국중국희곡학회, 1996, p. 96.

 

46) 양회석, “호극(滬劇) ≪백모녀≫를 통해 본 중국 희곡개혁운동”, p. 260.

 

47) 양회석, “신가극 ≪백모녀≫와 민족형식”, p. 93. 5ㆍ4운동 이래로 서양 오페라 형식은 중극에 널리 유입되었고 혁명적 악극에도 오페라 형식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48) 배연희, 앞의 글, p. 32.

49) 배연희, 같은 곳.

50) 양회석, 앞의 글, p. 95.

51) 신지영, 앞의 책, pp. 130-131.

52) 배연희, 앞의 글, p. 34.

53) 양회석, 앞의 글, p. 106.

54) 양회석, 같은 글, p. 96.

55) 같은 글, p. 107.

 

56) 한국사회연구소편, ≪사회과학사전≫, 풀빛, 1990, p. 541.

 

57) 아그네스 스메들리, 홍수원 역,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두레, 1986, p. 353.

 

58) 아그네스 스메들리, 같은 책, p. 381.

 

59) http://baike.baidu.com/view/1619652.htm

 

60) 변영주,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화평사, 1995, p. 213.

 

61) ≪Die Thälmann-Kolonne(Spaniens Himmel)≫. 파울 데싸우(Paul Dessau) 작곡, 구드룬 카비쉬(Gudrun Kabisch) 작사의 곡으로 양자는 부부관계이다. 파울 데싸우는 에스빠냐 내전이 한창이던 시기 나치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해야 했고 그 시기 빠리에서 이 곡을 작곡했다. 에른스트 부쉬(Ernst Busch)가 불러 널리 유명해졌으며 이후 세대인 하네스 바데어(Hannes Wader)가 부른 것도 대중적으로 유명하다.

 

62) Ted Allan & Sydney Gordon, The scalpel, the sword : the story of Doctor Norman Bethune, Dundurn Press, 2009, pp. 277-279. 테드 알렌ㆍ시드니 고든, ≪닥터 노먼 베쑨≫, 천희상 역, 실천문학사, 2010. pp. 454-456.

 

63) 마오쩌둥, 김승일 역, “베쑨을 기념하며(纪念白求恩, 1939)” ≪모택동 선집 2≫, 범우사, 2002, p. 369. 1939년 옌안의 눈보라가 치던 날 밤 정률성은 베쑨을 추모하는 곡을 창작했다. 딩쉐쑹 편, 앞의 책, p. 60.

 

64) 원래 이 작품은 2010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아시아 리얼리즘 전>에서 전시될 예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전시도록에만 실리고 실제로 전시되지는 않았다. 김영태, “한용운의 시 ‘해당화’, 그림으로 피어나다”, ≪노컷뉴스≫, 2010. 7. 26.

 

65) 국립현대미술관, ≪아시아 리얼리즘≫, 한겨레, 2010, p. 58.

 

66) 룽징(龙井)로 표기해야 본문에서 일관된 표기원칙이 관철되겠지만 조선인의 비율이 절반을 훨씬 넘어가는 곳이기에 ‘용정’으로 표기한다.

 

67) 서봉학, “중국의 《피카소》한락연”. (http://www.korean1234.cn/show.aspx?id=289&cid=16)

 

68) 중국 조선인 중 첫 공산당원이었다. “반파쑈투사이며 저명한 화가 한락연”, ≪연변일보≫, 2010. 4. 27. (http://www.iybrb.com/gih_vew.aspx?id=1725)

 

69) 김성룡, “중국의 비카소 한락연 ②”. (http://www.ckywf.com/blog/read/jinchenglong/136743/0/0)

 

70) 사진출처: http://www.ckywf.com/blog/read/jinchenglong/136743/0/0

 

71) Rewi Alley(1897-1987). 뉴질랜드인으로 중국 공산당원으로 가입하며. 중국 해방투쟁에 적극 동참한 작가. (http://en.wikipedia.org/wiki/Rewi_Alley)

 

72)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앞의 책, pp. 391-396.

 

73) 이종한, “실크로드에 묻힌 조선족 화가 한낙연”, ≪신동아≫, 2005년 11월 통권 554호.

 

74)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 앞의 책, p. 401.

 

75) 같은 책, p. 400.

 

76) ≪연변일보≫에 실린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중국 공산당뉴스≫ 조선어판 싸이트에서 재인용. (http://korean.people.com.cn/68167/75117/5086020.html)

 

77) 아그네스 스메들리, 앞의 책, pp. 391-392.

 

78) 대추나무 정원이라는 뜻으로 옌안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집무실이다.

 

79) 신디, 홍석표 역, ≪신적시선≫, 문이재, 2005, pp. 10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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