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인가?*—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에 대한 논평(Ⅲ)

 

≪인민일보(人民日報)≫와 ≪홍기(紅旗)≫ 편집국

번역: 장진엽 (노사과연 회원)

 

* [역자 주] 이 글은 Sino-Soviet Split Document Archive에 소개된 영문 자료를 번역한 것이다. (원문은 https://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cpc/yugoslavia.htm 참조.)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인가?

 

이것은 유고슬라비아 국가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나라들이 어떤 길을 따라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10월 혁명의 길을 따라 사회주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유고슬라비아의 길을 따라 자본주의를 복구할 것인가. 또한 이 질문은 티토(Josip Broz Tito) 일당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한 질문을 포함한다. 그들이 형제의 당이며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인가, 아니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배신한 자들이며 제국주의의 종인가.

이 문제에 관해서 한편으로는 쏘련 공산당(CPSU)의 지도자들과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 그리고 모든 다른 맑스-레닌주의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견해 차이가 있다.

모든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L. C. Y. the League of Communists of Yugoslavia)은 맑스-레닌주의와 유고 인민을 배반하였으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배신자들과 제국주의의 하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에 쏘련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나라이며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이 맑스-레닌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형제의 당이자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이라고 여긴다.

7월 14일자 공개서한1)에서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나라”이며 티토의 도당이 “국가라는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형제의 당”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최근 흐루쇼프(Nikita Sergeevich Khrushchov) 동지는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고 몇 번의 연설에서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의 진짜 관점을 더욱 분명히 드러냈으며, 이 질문에 관해서 그들 자신을 감추는 데 썼던 무화과 잎을 완전히 던져버렸다.

흐루쇼프의 생각으로는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발달된” 사회주의 나라이다. 거기서는 “혁명에 대한 쓸데없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회주의의 건설”을 발견하며, 유고슬라비아의 발전은 “전 세계 혁명적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실제적인 공헌”2)으로, 흐루쇼프는 이것을 꽤 부러워하고 모방하고 싶어 한다.

흐루쇼프의 생각으로는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과 티토주의자들은 “계급적 형제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당면 목표의 단일함에 의해 … 강하게 결합된 형제들”이다.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는 티토 일당의 “믿을 수 있고 충실한 동맹”이다.3)

흐루쇼프는 그가 티토 일당에게서 진정한 맑스-레닌주의를 발견했다고 믿는다.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공개서한에서 “얼마간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인 문제에 대한 차이점이 쏘련 공산당과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사이에 아직 남아 있다”고 한 것은 한낱 가식일 뿐이었다. 이제 흐루쇼프는 티토 일당에게 “우리는 하나의, 그리고 똑같은 견해를 갖고 있으며 똑같은 이론의 지도를 받고 있다”고, 그리고 둘 다 맑스-레닌주의의 기초에 서 있다고 말했다.4)

 

흐루쇼프는 1960년의 성명서5)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성명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산당들은 만장일치로 갖가지 현대적 수정주의적 “이론들”이 농축된 형태인 유고슬라비아의 갖가지 국제적 기회주의를 비난한다.

 

성명서는 말한다.

 

맑스-레닌주의를 한물간 것으로 칭하며 배신한 이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반(反)레닌주의적 수정주의 강령을 1957년의 선언6)에 대립시켰다. 그들은 L. C. Y를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성명서는 말한다.

 

[L. C. Y.의 지도자들은]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자들의 이른바 “원조”에 의존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유고 민중이 영웅적 투쟁을 통해 성취한 혁명적 성과들을 잃게 될 위험에 빠뜨렸다.

 

성명서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유고슬라비아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항한 파괴 공작을 수행한다. …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과 나라들의 통합에 피해를 주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 성명서는 전적으로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쏘련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감히 이렇게 말한다. “1960년의 성명에 따라서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나라로 간주한다.”7)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묻고 싶다.

성명서에서 말한 대로 어떤 나라가 갖가지 국제적 기회주의와 갖가지 현대적 수정주의 이론으로 인도된다면 그 나라가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는가?

성명서에서 말한 대로 어떤 나라가 맑스-레닌주의를 배반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에 대항한다면 그 나라가 사회주의일 수 있는가?

성명서에서 말한 대로 어떤 나라가 사회주의 진영과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대항한 파괴 공작을 수행한다면, 그 나라가 사회주의일 수 있는가?

성명서에서 말한 대로 어떤 나라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과 나라들의 통합에 피해를 주는 활동에 참여한다면, 그 나라가 사회주의일 수 있는가?

어떤 나라를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나라들이 몇 십 억의 달러로 육성해 왔다면, 그 나라가 사회주의일 수 있는가?

이것은 참으로 상궤를 벗어난 일이며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듣자하니, 똘리아띠(Palmiro Togliatti) 동지는 흐루쇼프 동지보다는 더 솔직하게 말한다. 똘리아띠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는다. 그는 1960년 성명서에서 티토 일당에게 취한 태도가 “틀렸다”8)고 말했다. 흐루쇼프는 그가 티토 일당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 보려고 작정하고 덤볐을 때부터 더 터놓고 말했어야 했다. 그 성명서를 옹호하는 척할 필요는 없다.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성명서의 평결이 틀렸고 뒤집혀야 하는가? 똘리아띠는 그것이 틀렸고 번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흐루쇼프 또한 사실상 그것이 틀렸고 번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틀리지 않았고 번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맑스-레닌주의를 고수하고 1960년 성명서를 인정하는 모든 형제 당들은 마찬가지로 그것이 틀리지 않았고 뒤집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서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의 의견으로는 우리가 “틀에 박힌 공식”과 자본주의 세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에 매달리고 있고9)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에서 ‘제명하려’ 한다”10)는 것이다. 나아가 누구라도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나라로 여기지 않는다면 사실과 반대로 가며 주관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것11)이라고 한다. 반면 사실에 눈을 감고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나라라고 단언한다면 그들은 “객관적인 법칙으로부터, 맑스-레닌주의의 가르침으로부터 계속 나아가고 있는” 것이며 “현실에 대한 심오한 분석”에 기초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12)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현실이란 어떤 것인가? 객관적인 법칙과 맑스-레닌주의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아가고, 유고슬라비아의 현실을 깊이 있게 분석하려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결론을 이끌어 내어야 하는가?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살펴보겠다.

 

 

유고슬라비아 도시들에서의 사적 자본의 발전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나라라고 단언하는 흐루쇼프의 논거 중 하나는 유고슬라비아에 사적 자본, 사적 기업과 자본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사실은 사적 자본과 사적 기업은 유고슬라비아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의 기록을 통해 판단하건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잡은 후 상당한 기간 동안 사회주의 나라의 국가 경제에 사적 자본가 부문을 포함한 서로 다른 부문들이 존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적 자본주의에 대해 정부가 어떤 종류의 정책을 채택하는지, 즉 그것을 활용, 제한하고 변형, 제거하려는 정책을 쓰는지 아니면 방임, 육성, 장려하는 정책을 쓰는가이다. 이것은 어떤 나라가 사회주의를 향해서, 아니면 자본주의를 향해서 발전하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이 문제에서 티토 일당은 사회주의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전후(戰後) 초기에 도입한 사회적 변화들은 애초에 철저하지 못했다. 티토 일당이 공공연한 배신 이후에 채택한 정책들은 사적 자본과 사적 기업들을 탈바꿈시키고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육성하고 확대하는 정책들이었다.

1953년 티토 일당이 발표한 규정은 “‘시민들’의 집단들”은 “기업을 설립”하고 “노동자를 고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명기하고 있다. 같은 해 티토 일당은 개인들이 국가의 경제기구들로부터 고정자산을 구매할 권리를 갖고 있음을 규정하는 법령을 공표했다.

1956년 티토 일당은 지방 정부들이 과세와 다른 정책들을 통해 사적 자본을 육성할 것을 장려하였다.

1961년 티토 일당은 개인들이 외화를 구매할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하였다.

1963년 티토 일당은 사적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정책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헌법 조항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인은 기업을 설립하고 노동자를 고용해도 된다.

티토 일당의 지원과 격려에 힘입어 사적 기업과 사적 자본은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에서 급속히 성장해 왔다.

1963년 베오그라드에서 발간된 유고슬라비아 공식 통계 포켓북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에는 115,000개 이상의 개인 소유의 수공업 시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사기업 다수의 소유주는 “장인(craftsman)”이 아니라 전형적인 사적 자본가들이다.

티토 일당은 비록 법이 개인 소유주에게 각각 최대 5명의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지만 열 배, 많게는 스무 배를 고용한 이도 있으며 심지어 “5,6백 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한 이도 있음13)을 인정한다. 그리고 몇몇 사기업들의 연간 총 거래액은 1억 디나르 이상이다.14)

1961년 12월 7일 ≪폴리티카(Politika)≫는 많은 경우 이 사적 기업가들이 실제로 “거대 기업가들”임을 폭로했다. 기사는 이러하다.

 

이러한 개인 사업가들의 망(net)이 얼마나 넓게 퍼져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법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의 일을 돕기로 되어 있는 다섯 명의 노동자를 보유할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자초지종을 알고 보면 실제로 이 다섯 명은 차례로 그들 자신의 ‘하도급업자’를 갖고 있는 도급업자들이다. … 대체로 이 도급업자들은 더 이상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며, 단지 한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명령을 내리고 계획을 세우고 계약을 체결할 뿐이다.

 

이 사업가들이 창출한 수익을 보면 그들이 백 퍼센트 자본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베트(Svet)≫는 1961년 12월 8일에 “몇몇 개인 수공업자들의 순이익은 한 달에 백만 디나르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1961년 12월 20일에 ≪베오그라드 베체르녜 노보스티(the Belgrade Vecernje novosti)≫는 베오그라드에서 “지난해 116명의 사기업 소유자들 각각이 천만 디나르 이상의 수입을 얻었다”고 말했다. 몇몇 사업가들은 한 해에 “약 7천만 디나르의 수입을 얻었다.” 공식 환율에 따르면 이것은 미화 십만 달러에 가까운 금액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도시들에는 사기업들, 사설 서비스기관, 사적인 상거래, 개인 소유 주택단지, 개인 소유의 교통사업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개인은행가”로 알려진 고리대금업자들까지 있다. 이들 고리대금업자들은 공개적으로 영업하며 심지어 신문에 자신들의 사업을 광고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광고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석 달 동안 30만 디나르의 대출 제공. 반환금은 40만 디나르. 담보 필수.”15)

이 모든 것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티토 일당에 대한 평가를 뒤집는 데 열중하고 있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유고슬라비아에 사적 자본과 사기업과 자본가들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가 넘쳐나는 유고슬라비아 시골 지역

 

이번에는 유고슬라비아 시골 지역을 살펴보자.

흐루쇼프가 단언하듯이 거기에는 더 이상 자본가가 없는가?

아니다. 실은 그 정반대이다.

자본주의가 유고슬라비아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은 시골 지역에서 훨씬 더 충격적이다. 

맑스-레닌주의는 우리에게 개인경제와 소생산경제가 시시각각으로 자본주의를 발생시키며, 오직 집단화만이 농업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딸린은 이렇게 지적했다.

 

레닌은 개인소농경제는 자본가와 자본주의를 만들어내며, 그것이 그 나라에 지배적인 동안은 자본주의가 복구될 위험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명백히, 이러한 위험이 존재하는 한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승리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16)

 

이 문제에서 티토 일당은 사회주의에 역행하는 노선을 추구한다.

전후 최초의 시기에 유고슬라비아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졌고 소농들의 노동 협동조합이 다수 조직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부농경제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1951년 티토 일당은 농업 집단화의 길에 대한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소농들의 노동 협동조합을 해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대의를 배신함에 있어 티토 일당이 내딛은 중대한 한 걸음이었다. 그러한 협동조합은 1950년 6,900개에서 1953년 말 1,200개를 약간 넘는 수로, 그리고 1960년에는 147개로 감소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시골은 개인경제의 바다에 잠겨 있다.

티토 일당은 집단화가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입증되지 못했다고 단언한다. 그들은 “집단화는 몰수와 동일”17)하며 “가능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시골 지역에서 농노제와 빈곤을 보존하는”18) 길이라는 악의적인 모략을 해댄다. 그들은 농업의 발전이 “경제적 세력들의 자유경쟁에 기초해야”19) 한다는 터무니없는 견해를 지지한다.

많은 소농 노동 협동조합을 없애는 한편 티토 일당은 1953년부터 시골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는 법들을 잇달아 공포하였다. 사고팔고 빌려줄 자유와 농장 일손을 고용할 자유를 보장하며 농업생산물의 계획적 구매를 폐지하고 이 영역에서의 자유로운 거래로 대체하는 법들이다.

이 정책 하에서 자본주의 세력들은 시골 지역에 급속히 퍼져나갔고 양극화 과정이 촉진되었다. 이것은 티토 일당의 자본주의 복구 사업의 중요한 국면을 이루었다.

시골 지역에서의 양극화는 토지 소유에 생겨난 변화에서 가장 먼저 드러났다. 전(前) 유고슬라비아 농림비서 슬라브코 코마르(Slavko Komar)는 1959년에 전체 소농가구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5헥타르 미만의 토지를 소유한 빈농가구가 전체 개인소유 토지의 오직 43퍼센트만을 보유한 반면, 전체 소농가구의 13퍼센트만을 차지하는 8헥타르 이상의 땅을 소유한 부농가구가 전체 개인소유 토지의 33퍼센트를 갖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코마르는 또한 대략 10퍼센트의 소농가구가 매년 토지를 사고판다는 점도 인정했다.20) 대부분의 판매자는 빈곤한 가족들이다.

토지의 집중은 위에서 제시한 자료에 나타난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심각하다. 티토 일당의 기관지 ≪보르바(Borba)≫ 1963년 7월 19일 호에서 밝혔듯이, 한 지구 내에서만 “법적인 한도인 10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가진 수천의 소농가구”가 있었다. 비옐리나(Bijeljina) 코뮌에서는 “500호의 소농가구가 10-30 헥타르의 부동산을 소유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것들은 드문 사례가 아니다.

시골 지역에서의 양극화는 또한 역축(役畜)과 농기구 소유의 커다란 불평등으로 나타난다. 주요 곡물생산지인 보이보디나(Vojvodina) 지방 308,000호의 소농가구 중 55퍼센트는 역축을 갖고 있지 않다. 전체 소농가구의 40.7퍼센트를 차지하는 2헥타르 미만 토지를 가진 소농가구는 그 지역의 전체 쟁기의 4.4퍼센트만을 가지고 있거나 20가구당 평균 1개의 쟁기를 가지고 있다. 반면 부농들은 많은 수의 쟁기와 짐수레뿐 아니라 1,300대가 넘는 트랙터와 기타 많은 농기계들을 소유하고 있다.21)

마찬가지로 양극화는 노동자의 고용과 같은 자본주의적 착취 형태의 성장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1958년 2월 7일호 ≪코뮤니스트(Komunist)≫는 8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52퍼센트의 세르비아 소농가구들이 1956년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1962년 슬라브코 코마르는 몇몇 소농가구들의 가장이 최근 몇 해에 “강력해졌으며”, “그들의 수입은 자신의 노동이 아니라 불법적인 거래로부터, 그들 자신 및 다른 이들의 생산물의 가공으로부터, 불법적인 증류주 제조로부터, 구매를 통해 또는 더 빈번하게는 토지 임대, 가족들 사이의 거짓 분할, 공유지의 점령과 은닉 등을 통해 획득한 규정된 최대 10헥타르 한도 이상의 토지 보유로부터, 투기를 통한 트랙터의 획득으로부터, 그들의 땅을 가난한 이웃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해 경작하게 함으로써 착취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했다.22)

≪보르바≫는 1962년 8월 30일에 “이른바 인정 많은 생산자는 … 토지 임차인이며 고용주이며 능숙한 상인이다. … 그런 사람들은 생산자가 아니라 기업가이다. 몇몇은 일 년 내내 쟁기를 건드려 본 적도 없다. 그들은 노동자를 고용하고 단지 현장에서 감독을 할 뿐이며 거래에 종사한다”고 말했다.

고리대금업자 또한 유고슬라비아 시골 지역에서 매우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이자율은 종종 연간 100퍼센트를 상회한다. 게다가 실업자들의 곤경을 이용하여 노동시장을 독점하고 그 과정에서 착취를 일삼는 자들도 있다.

땅과 다른 생산수단을 빼앗기고 가난에 시달리는 많은 수의 소농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다. 1962년 8월 20일 ≪폴리티카≫에서 제시한 수치에 따르면 1961년 2헥타르 미만의 토지를 보유한 유고슬라비아 소농가구의 현금 수입 중 약 70퍼센트가 자신들의 노동력 판매에서 온 것이다. 이 소농들은 여기저기서 돈을 뜯기며 비참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위 사실들이 보여 주듯 유고슬라비아의 시골은 착취계급의 지배를 받고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에서는 유고슬라비아의 시골 지역에서 “사회주의적 부문”이 6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증가했다고 말한다.

불행히도, 심지어 이 초라한 비율조차 사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이 언급한 15퍼센트의 사회주의적 부문이란 말은 오직 티토 일당이 장려한 “농업농장(agricultural farms)”과 “전(全)농업협동조합(general agricultural cooperatives)”과 같은 조직들에만 해당될 뿐이다. 그러나 실은 “농업농장”은 자본주의적 농장이며 “전농업협동조합”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조직이다. 그들은 토지의 사적 소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그것들의 주된 기능은 부농경제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베오그라드에서 출판된 ≪유고슬라비아의 농업 문제(Problems of Agricultural in Yugoslavia)≫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것들이 오늘날 조직되는 방식과 기능하는 방식을 통해 판단하자면” 협동조합들은 “농업과 농촌의 사회주의적 재건을 조금도 뜻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사회주의 근거지의 창조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요소의 발전과 촉진을 위해 작동한다. 이 협동조합들이 쿨락(Kulak)의 연합들인 사례들도 있다.”

티토 일당은 “전농업협동조합”에 소농들로부터 농업생산물을 구매할 독점적 권리를 부여했다.  이른바 협동조합들은 이러한 특권과 농산물 가격의 걷잡을 수 없는 변동을 이용하여 투기를 일삼고 그러한 상업 활동을 통해 대규모로 소농들을 착취한다. 1958년 유고슬라비아는 흉작을 겪었다. 협동조합들과 다른 상업기관들은 농산물 판매가격을 올릴 기회를 잡았다. 1959년에는 수확이 더 나았는데 협동조합들은 소농들과의 계약을 깨고 구매량을 줄였다. 들판에서 곡식이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서슴지 않고서 말이다.

“전농업협동조합”들과 “농업농장”들은 많은 수의 장기적인, 그리고 임시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착취하고 있다. 196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 통계연감에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협동조합”들에 고용된 장기 노동자만 해도 1961년에 도합 십만이 넘는다. 많은 수의 임시 노동자들 또한 고용되어 있다. 1962년 12월 1일 ≪라드(Rad)≫에서 밝힌 것처럼 고용된 노동자들은 “자주 노골적인 착취에 시달리며(일일 근무시간은 15시간까지 길어지기도 한다.) 대체로 그들의 개인소득은 극도로 낮은 수준이다.”

이와 같이 이른바 사회주의적 부문이라는 이 농업기구들은 자본주의적 농업기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하다.

소농들에 대한 몰수와 자본주의적 농장의 촉진이 농업 분야에서 티토 일당의 기본적인 정책을 형성한다. 1955년으로 돌아가서 다음과 같은 티토의 말을 보자.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작은 농장들이 하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 미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길을 취하기 위해서 1959년 티토 일당은 경작지의 이용에 대한 법을 공포했다. 그 법은 요건에 맞춰 경작할 수 없는 소농들이 단독으로 일하는 토지는 “전농업협동조합들”과 “농업농장들”의 “강제관리”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자본주의적 농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소농들에 대한 몰수와 그들 토지의 강제합병을 의미한다. 이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자본주의적 농업의 길이다.

소농경제에서 대규모 농경으로의 이행에 대해서 스딸린은 말했다.

 

두 개의 방향이 있다. 자본주의적 방향과 사회주의적 방향. 즉, 사회주의로의 전진의 길과 자본주의로의 후퇴의 길.

제3의 길이 있는가? 스딸린은 말했다. “이른바 세 번째 방향은 실제로 두 번째 방향, 자본주의로의 후퇴로 이어지는 길이다.” “개인 농경으로 돌아가고 쿨락을 복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쿨락 속박을 되살리는 것, 쿨락들의 소농 착취를 되살리는 것, 쿨락들에게 권력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쿨락을 복구하는 동시에 쏘비에트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쿨락의 부활은 반드시 쿨락 권력의 창조로, 쏘비에트 권력의 청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반드시 부르주아 정부의 형성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부의 형성은 결국 지주와 자본가들의 부활로, 자본주의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다.”23)

지난 십 년 남짓한 기간 동안 농업에서 유고슬라비아가 택한 길은 정확히 자본주의를 복고하는 길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논쟁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티토 일당에 대한 평결을 번복하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유고슬라비아에 자본가들이 없다고 단언할 수가 있는가?

 

 

전 인민이 소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에서

자본주의 경제로의 타락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복고는 사적 자본주의가 도시와 시골 지역 모두에서 자유롭게 퍼져가고 있다는 사실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유고슬라비아 경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공공의” 기업들이 변질했다는 점이다.

티토 일당의 “노동자 자주관리(workers’ self government)”의 경제는 특별한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조건 하의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티토 일당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관료-매판 부르주아지의 독재로 바꿔놓은 상태에서의 국가자본주의이다. “노동자 자주관리” 하에서의 기업들의 생산수단은 한 명이나 그 이상의 사적 자본가들의 소유가 아니라, 티토 일당으로 대표되는 관료들과 관리자들을 포함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형태의 관료-매판 부르주아지의 소유이다. 국가라는 이름을 찬탈하고 미제국주의에 의존하며 사회주의를 가장하고서, 이 관료-매판 부르주아지는 본래 근로인민들이 갖고 있던 재산을 강탈했다. 사실상 “노동자 자주관리”는 관료-매판 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가차 없는 착취 체제이다.

1950년부터 티토 일당은 모든 국가 소유의 공장, 광산들과 통신, 교통, 무역, 농업, 임업, 공공사업 분야의 기업들에 “노동자 자주관리”를 도입하는 일련의 법령을 공표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핵심은 “노동하는 집단”에 기업들을 넘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기업들은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그 자신의 원재료를 구매하고 생산물의 종류, 생산량, 가격과 그것들의 판매에 대해 결정하며 자신들의 임금 규모와 이윤의 일부에 대한 분할에 대해 결정한다. 유고슬라비아의 법령은 나아가 경제적 기업들이 고정자산을 매매, 임대할 권리가 있음을 명기하고 있다.

티토 일당은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기업들에서 소유권은 “사회주의적 소유의 고도의 형태”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노동자 자주관리”를 통해서만 “실제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순전한 사기이다.

이론적으로 말해 맑스주의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듯이 “노동자 자주관리”와 “공장을 노동자에게”와 같은 구호는 결코 맑스주의자의 구호였던 적이 없으며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들(syndicalists),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 구(舊) 기회주의자들과 수정주의자들이 내건 구호들이었다.

“노동자 자주관리”와 “공장을 노동자에게”라는 생각은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맑스주의 이론에 정면으로 배치한다. 그것은 고전적인 맑스주의 저술가들에 의해 오래 전에 완전히 논박된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지적했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우위를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점차적으로 탈취하고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 …”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국가소유로 전환시킨다”고 썼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수단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의 근본 원칙이다.

10월 혁명에 뒤이은 쏘비에트 권력의 초기 시대에, 몇몇 사람들이 생산자들이 직접 “생산을 조직”할 수 있도록 공장을 그들에게 양도하자고 주장했을 때, 레닌은 이러한 관점은 실제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반대를 의미한다고 하면서 단호히 비판했다.

그는 예리하게 지적했다.

 

… 개별 공장이나 개별 직종들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 또는 국가권력을 약화하거나 방해할 그들의 권리에 대한 어떠한 직ㆍ간접적인 합법화도 쏘비에트 권력의 기본 원칙에 대한 가장 커다란 왜곡인 동시에 사회주의에 대한 완전한 포기이다.24)

 

그러므로 “노동자 자주관리”가 사회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분명하다.

사실상 티토 일당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노동자들의 자주관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난질이다.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기업들은 실제로 티토 일당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관료-매판 부르주아지의 손아귀에 있다. 이들은 기업들의 자산과 고용인들을 관리하며 이 기업들의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간다.

티토 일당은 은행을 통해 나라 전체의 신용과 모든 기업들의 투자기금과 유동자본을 장악하고 그들의 재정을 감독한다.

티토 일당은 세금 징수나 이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 기업들의 수입을 약탈해 간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행정위원회의 1961년 사업보고서”의 통계에 따르면 그들은 이런 식으로 기업들의 순수익의 약 4분의 3을 가져갔다.

티토 일당은 인민의 노동의 결실을 장악하고 있다. 그 결실은 주로 이 관료 일당들이 낭비적인 비용을 맞추기 위해, 그들의 반동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근로인민을 억압하는 기구를 강화하기 위해, 외채의 이자를 지불하는 형태로 제국주의자들에게 뇌물을 주기 위해 도용된다.

게다가 티토 일당은 그들의 관리자들을 통해 이 기업들을 통제한다. 관리자들은 명목상으로는 기업들에 의해 경쟁을 통해 선발되지만 실은 티토 일당의 지명을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이 기업들에서 관료-매판 부르주아지의 대리인 노릇을 한다.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기업들에서 관리자와 노동자들의 관계는 사실상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이다.

현 상태 하에서 관리자들은 이 기업들의 생산계획과 발전방향을 결정하고 생산수단을 처분하고 기업 수입의 분배에 대해 결정하며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해고하고 노동자평의회 또는 관리위원회의 결정사항을 각하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언론이 보여 주는 풍부한 정보들은 노동자평의회는 단지 형식적인 것으로서 거수기 역할만을 하며, 회사의 모든 권력은 관리자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기업의 관리자가 그 기업의 생산수단과 수입의 분배를 지배한다는 사실은 그가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실을 다양한 특권들을 통해 전유할 수 있게 해준다.

티토 일당 스스로도 이 기업들에서 관리자와 노동자 사이에 임금뿐 아니라 상여금도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을 시인한다. 몇몇 기업들에서 관리자들과 더 높은 직원들의 상여금은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것의 40배나 된다. “어떤 기업들에서는 일단의 지도자들이 받는 상여금의 총합이 전체 집단의 임금 기금과 맞먹는다.”25)

게다가 기업의 관리자들은 다양한 속임수를 써서 큰돈을 버는 데에 그들의 특권을 사용한다. 뇌물, 횡령, 절취는 관리자들에게 훨씬 더 큰 수입의 원천이다.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이 빈곤 속에 살고 있다. 고용에 대한 보장은 없다.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회사의 폐업으로 직업을 잃는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63년 2월 실직자의 수는 339,000명, 취업자 수의 약 10퍼센트에 이른다. 게다가 매년 많은 노동자들이 일을 찾아 해외로 나가고 있다.

≪폴리티카≫는 1961년 9월 25일 “몇몇 노동자들과 사무직 고용인들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며, 전자는 후자를 그들의 임금을 ‘집어삼키는’ ‘관료’로 여긴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 사실들은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유고슬라비아 기업들에서 새로운 사회적 집단이 다수의 노동의 결실을 전유하는 소수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집단은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관료-매판 부르주아지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노동자 자주관리”를 추진함으로써 티토 일당은 본래 전 인민이 소유했던 기업들을 완전히 사회주의 경제의 길 밖으로 밀어내었다.

이것의 주요한 징후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에 의한 통합된 경제계획의 포기.

둘째, 기업 운영의 주된 장려책으로 이윤의 사용. 그들은 자신들의 수입과 이윤을 늘리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기업들에서 생산의 목적은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느 자본주의적 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을 장려하는 정책의 추구. 티토는 기업들의 관리자들에게 “국내에서의 경쟁은 우리나라의 서민들,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티토 일당은 또한 “경쟁, 이윤의 추구, 투기와 같은 것들”을 허용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생산자들, 그들의 집단들, 공동체들 등의 주도성을 고취하는 데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26)이라고 공공연하게 천명했다.

넷째, 자본주의적 자유경쟁을 촉진하는 중요한 지렛대로서 신용과 은행의 사용. 티토 체제의 신용과 은행 제도는 대출을 제공할 때에 투자 입찰을 모집한다. 가장 짧은 시기에 대출금을 갚고 가장 높은 이율의 이자를 제공할 능력이 있는 자라면 대출을 받게 된다. 그들의 말로는 이것이 “투자 신용을 할당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서 경쟁을 활용하는 것”27)이다.

다섯째, 기업들 간의 관계가 통합된 정부 계획 하에서의 상호 지원과 협력이라는 사회주의적 관계가 아니라 자유 시장에서의 자유경쟁과 경쟁상대라는 자본주의적 관계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기반 자체를 침식해 왔다.

레닌은 말했다.

 

사회주의는 … 수천만의 인민들로 하여금 생산과 분배에서의 단일한 기준을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만드는 계획된 국가기구 없이는 생각도 할 수 없다.28)

그는 또한 말했다.

 

… 모든 방면의 국가 회계와 재화 생산과 분배의 통제, 근로자의 권력, 근로자의 자유가 없다면 유지될 수 없으며, … 자본주의의 멍에로 되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29)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간판 아래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경제 부문과 기업들이 격렬한 자본주의적 경쟁에 갇혀 있다.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기업들에서 횡령, 투기, 매석에 관여하는 것, 시장과 이윤을 얻기 위한 경쟁에서 가격을 부풀리고 뇌물을 주고 기술상의 비밀을 감추고 기술담당자를 붙잡아 두며 심지어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서로를 공격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유고슬라비아 기업들 사이의 격렬한 경쟁은 국내시장에서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에서도 계속된다. 유고슬라비아 언론은 유고슬라비아 국제무역기구의 2, 30명의 대리인이 같은 해외시장을 방문하고 사업을 위해 그들 간에 경쟁을 하며 다른 사람의 고객이나 공급자를 가로채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기적인 동기에서”,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이 기업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이윤을 얻기 위해” 애쓰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격렬한 경쟁의 결과는 유고슬라비아 시장의 혼란이다. 가격은 서로 다른 도시나 지역들뿐만 아니라 같은 지역의 다른 가게들에서도, 심지어 같은 생산자의 같은 종류의 제품에 대해서조차 큰 폭으로 달라진다. 높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몇몇 기업들은 많은 양의 농산물을 망쳐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 격렬한 경쟁의 또 다른 결과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많은 기업들의 폐업이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식 회보가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최근 몇 년 동안 한 해에 5백 내지 6백의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이 모든 것들은 유고슬라비아의 “공공” 경제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의 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경쟁과 생산의 무정부성의 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자주관리” 하의 티토 일당의 기업들은 사회주의적이 아니라 그 본질상 자본주의적이다.

우리는 티토 일당에 대한 평결을 번복하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거짓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관료-매판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받는 국가자본주의 경제를 사회주의 경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가?

 

 

미제국주의에의 예속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자본주의 복고 과정은 티토 일당이 미 제국주의에 굴종해 가는 과정, 그리고 유고슬라비아가 미 제국주의에의 예속으로 전락해 가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배신과 함께 티토 일당은 국가의 주권을 팔아치우고 미 제국주의의 자선으로 살아가게 되는 수치스러운 과정에 돌입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2차 대전의 종결로부터 1963년 1월까지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 세력은 티토 일당에게 합계 약 미화 54억 6천만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였다. 그중 60퍼센트가 넘는 35억 달러가 미국의 “원조”이다. 미국의 원조이 가장 대부분은 1950년 이후에 제공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유고슬라비아의 재정과 경제의 대들보가 되어 왔다. 티토 일당이 1961년 미국과 미 지배 하의 국제 재정기구에게서 받은 대부는 1961년 합계 3억 4천6백만 달러, 그 해 유고슬라비아 연방 예산 수입의 47.4퍼센트에 이르는 금액이었음을 공식 통계는 보여준다. 다른 서방 국가들의 원조까지 포함해서 티토 일당이 1961년 서방으로부터 받은 돈은 합계 미화 4억 9천3백만 달러, 그 해 연방 예산 수입의 67.6퍼센트였다.

미국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티토 일당은 미국과 일련의 배신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유고슬라비아와 미국이 1951년 상호방위지원협정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기록에서는 미국 정부 관료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미국의 군사원조품의 수령과 배분을 감시, 감독하고 “통신과 정보 시설들에 자유롭게 접근”할 “무제한적인 … 자유”를 가진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다. 이 협정은 또한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에게 전략적 천연자원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1951년 유고슬라비아와 미국 사이에 맺은 군사원조에 관한 협정은 유고슬라비아가 “자유세계의 방어력 증진과 유지를 위해 … 최대한의 기여를” 해야 하며, 유엔에 병력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협정 하에서 미국이 보낸 군사 사절단이 유고슬라비아 군대를 직접 지휘했다.

1952년 유고슬라비아-미국의 경제협력협정은 유고슬라비아가 미국의 원조를 반드시 “기본적인 개인의 인권과 자유, 민주적 제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즉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활용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1954년 유고슬라비아는 그리스 및 터키와 동맹, 정치적 협력, 상호지원에 대한 조약을 체결했다. 두 나라 모두 나토(NATO) 회원국이다. 조약은 세 나라 사이에 군사적, 외교적 협조를 규정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유고슬라비아는 미국이 지배하는 군사 블록의 실질적인 일원이 되었다.

1954년부터 유고슬라비아는 자신의 주권을 포기하면서 미국과 일련의 협정들을 체결했다. 1957년과 1962년 사이의 기간에 그러한 조약들이 50개 이상 체결되었다.

이 조약들과 협정들의 체결 때문에, 그리고 티토 일당이 유고슬라비아를 미 제국주의에 종속되게 만들었기 때문에, 미국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다음과 같은 권리들을 누린다.

(1) 유고슬라비아의 군사업무를 통제할 권리

(2) 유고슬라비아의 외교업무를 통제할 권리

(3) 유고슬라비아의 국내문제에 간섭할 권리

(4) 유고슬라비아의 재정을 조종하고 감독할 권리

(5) 유고슬라비아의 대외무역을 통제할 권리

(6) 유고슬라비아의 전략적 자원을 약탈할 권리

(7) 군사적, 경제적 기밀을 수집할 권리

유고슬라비아의 독립과 주권은 이리하여 티토 일당에 의해 경매로 처분되었다.

미국과의 일련의 불평등 조약으로 유고슬라비아의 자주적 권리를 팔아넘긴 것에 더하여, 티토 일당은 미국의 원조를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국내외 정책에서도 유고슬라비아에 침투하려는 서구 독점자본의 요구에 응하는 조치를 하나씩 취해 나갔다.

1950년부터 티토 일당은 대외무역에 대한 국가 독점을 폐기했다.

1953년 공포된 대외무역활동법은 기업들이 독립적으로 대외무역을 수행하고 서구 독점자본 기업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1961년 티토 정권은 외환 및 대외무역에 대한 제도들에 대한 개혁을 시행했다. 개혁의 주요 내용은 수출 및 수입에 대한 규제완화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주요한 반가공 원료와 특정한 소비재들의 수입에 완전한 자유화를 가져왔고, 다른 상품들의 수입에 대한 규제가 다양한 수준으로 완화되었다. 이른바 제한 없는 수입에 필요한 외화 공급에 대한 규제도 철폐되었다.

대외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이 사회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레닌은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절대로 산업의 보호 없이는 우리의 산업을 회복시키고 러시아를 산업국가로 만들 위치에 있지 않은데, 이는 결코 관세 정책을 통한 보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로지 대외무역의 독점을 통한 보호만을 의미하는 것”30)이라고 말했다.

스딸린은 “대외무역의 독점은 쏘비에트 정부 강령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 중 하나”이며 대외무역 독점의 폐기는 “국가의 산업화에 대한 포기”,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자본주의 국가들의 상품들로 넘쳐나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를 독립국에서 반식민지로 바꿔놓는 것”을 의미할 것31)이라고 말했다.

티토 체제가 해왔던 것과 같이 대외무역에 대한 국가독점을 폐기하는 것은 제국주의 독점자본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티토 일당이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받고 제국주의에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사실로 인한 경제적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유고슬라비아가 제국주의자들의 덤핑시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에서 온 거대한 양의 공산품과 농산물이 유고슬라비아 시장에 범람하게 되었다. 외국 독점자본에 봉사하여 거액의 돈을 벌어들인 유고슬라비아 매판 자본가들은 이윤을 좇아 비록 그 상품들이 국내에서 생산될 수 있다 해도, 심지어 재고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데도 그것들을 계속해서 수입한다. ≪폴리티카≫는 1961년 7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산업이 “외국 산업의 지속적이고 매우 복잡한 경쟁으로 인해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 “어디에서나 명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둘째, 유고슬라비아는 제국주의적 투자의 출구가 되었다.

많은 유고슬라비아의 산업체들은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 나라들의 “원조”로 세워진 것들이다. 외국의 많은 사적인 독점자본들이 유고슬라비아에 침투해 왔다. 1952년과 1956년 사이에 유고슬라비아 투자은행의 총지배인으로 있었던 아우구스틴 파피치(Augustin Papic)에 의하면 “외국 기금의 비율이 전체 경제적 투자 가치의 32.5퍼센트에 달했다.” 미 국무장관 딘 러스크(Dean Rusk)는 1962년 2월 5일, 유고슬라비아 자본의 원천은 “대부분 서방에 있었다”고 말했다.

셋째, 유고슬라비아는 제국주의가 천연자원을 뽑아내는 기지가 되었다.

군사원조에 관한 협정에 따라 티토 일당은 1951년부터 계속해서 미국에게 많은 양의 전략적 천연자원을 공급해 왔다. 196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 통계연감에 의하면 1957년부터 마그네슘, 납, 아연, 안티몬과 같은 유고슬라비아의 중요한 금속 수출량의 대략 절반이 미국으로 갔다.

넷째, 유고슬라비아의 산업체들이 서구 독점자본 회사들의 조립공장이 되었다.

많은 유고슬라비아의 주요 산업들은 서구 국가들의 허가 아래서 생산하며 반가공 원료, 부품, 예비부품, 반제품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 산업들의 생산은 서구 독점자본의 지배하에 있다.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국산품으로 팔리는 공산품 중 많은 것들이 이미 만들어져 수입되는 부품들을 조립하여 유고슬라비아의 상표를 붙인 것이다. 1962년 4월 25일자 ≪베스니크 유 스레드(Vesnik u sredu)≫는 “우리 산업체들 중 몇몇은 생산하지 않고 조립을 하는, 단지 다른 기업들의 제품에 자기 상표를 붙이기만 하는 특별한 형태의 상업 기구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세계시장에서 서구 독점자본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재정과 경제 영역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단단히 묶여 있으며 제국주의, 특히 미 제국주의에의 예속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 나라가 그 자신의 독립성과 자주권을 팔아넘기고 제국주의의 부속품이 될 때, 자본주의 체제의 부활은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티토 일당이 선전하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방식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의 특별한 길이란 것은 제국주의의 필요에 맞추기 위해 사회주의 체제를 자본주의 체제로 바꾸는 길이요 독립국에서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에 불과하다.

흐루쇼프는 미 제국주의에 대한 이러한 종속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공상이다. 미국의 원조를 자신의 상표로 달고 있는 자칭 사회주의는 맑스, 엥겔스, 레닌에 의해 비판된 사회주의의 가짜 브랜드에 추가될 새로운 변종이며, 아마도 이것이 티토와 흐루쇼프가 “맑스-레닌주의의 이론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일 것이다.

 

 

미 제국주의의 반혁명 특별 분견대

 

국제관계에서 티토 일당이 맡은 반혁명적 역할과 그들의 반동적 대외정책에 비추어 볼 때,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이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국제무대에서 티토 일당은 세계혁명을 사보타지하기 위한 미 제국주의의 특수 분견대이다.

유고슬라비아에서 자본주의 복고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티토 일당은 미 제국주의가 사회주의 나라들 안에서 “평화로운 발전(peaceful evolution)”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돕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라는 간판 아래 티토 일당은 사회주의 진영을 미친 듯이 반대하고 방해하며, 반(反)중국 캠페인에서 적극적인 대리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비동맹주의와 상호 공존을 빙자하여 티토 일당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민족해방운동을 파괴하려고 애쓰며 미국의 신식민주의에 복무하고 있다. 

티토 일당은 미 제국주의를 그럴듯하게 치장해서 제국주의자들의 전쟁과 침략 정책에 맞서 싸우는 전 세계의 인민들을 마비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스딸린주의”에 반대한다는 구실 하에 티토 일당은 사방팔방에 수정주의의 독을 퍼뜨리고 모든 나라의 인민의 혁명에 반대하고 있다.

티토 일당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주요한 국제적 사건들에서 다양하게 미 제국주의의 하인 역할을 맡아 왔다.

1. 그리스에서의 혁명. 1949년 7월 10일, 티토는 그리스 민중의 게릴라들에 맞서서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사이의 국경을 폐쇄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의 파쇼 왕정주의자 군대들이 후방에서 게릴라들을 공격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런 식으로 티토 일당은 영미 제국주의자들이 그리스 인민들의 혁명을 옭죄는 것을 도왔다.

2. 한국전쟁. 1950년 9월 6일 공표된 연설에서 당시 외상이었던 에드바르드 카르델리(Edvard Kardelj)는 침략에 저항한 그곳 인민들의 정당한 전쟁을 뻔뻔스럽게 비난하고 미 제국주의를 옹호했다. 12월 1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연설에서 티토 일당의 대표는 “한국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이유로 중국을 공격했다. 티토 일당은 또한 중국과 조선에 대한 유엔의 금수조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3. 베트남 인민의 해방전쟁.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제네바회담이 열리기 직전, 티토 일당은 베트남 인민들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게 “전후 냉전 정책의 카드로서” 이용당하고 있다32)고 주장하며 베트남 인민들의 정당한 투쟁을 맹렬히 비난했다.

그들은 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를 해방시키려는 베트남 인민들의 위대한 전투에 대해 그것은 “선의의 제스춰가 아니다”33)라고 말했다.

4. 알바니아에 대한 파괴 공작. 티토 일당은 오랫동안 사회주의 알바니아에 대한 전복 활동과 무장 도발을 수행해 왔다. 그들은 1944, 1948, 1956, 1960년 네 번의 주된 반역 사건을 획책했다. 1948년부터 1958년까지 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 국경에 대한 저들의 무장도발은 470회가 넘는다. 1960년 티토 일당과 그리스의 반동들은 지중해에서 미국의 제6함대와 공동으로 알바니아에 대한 무장 공격을 계획했다.

5. 헝가리에서의 반혁명 반란. 티토 일당은 1956년 10월 헝가리 반혁명 반란에서 간섭주의자들의 선동가라는 수치스러운 역할을 수행했다. 반란의 발발 이후 티토는 반역자 나지(Imre Nagy)의 반동적 조치들을 지지하는 서한을 발표했다. 11월 3일 티토 일당은 나지에게 헝가리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하라고 말했다. 11월 11일의 연설에서 티토는 반혁명 반란을 “진보주의자들”에 의한 저항으로 특징지으며, 뻔뻔스럽게도 “유고슬라비아의 행로”가 승리할지, 아니면 “스딸린주의의 행로”가 승리할지에 대하여 물음을 던졌다.

6. 중동의 사건들. 1958년 미 제국주의가 레바논을, 영국 제국주의가 요르단을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미국과 영국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하는 저항의 물결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중동 사태에 대한 유엔 총회의 긴급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 외무상 코차 포포비치(Koca Popovic)는 “미국과 영국이 취한 조치에 대해 규탄하자거나 승인하자고 우리가 주장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는 기구인 유엔의 개입을 지지했다.

7. 대만해협에서 일어난 사건. 1958년 가을,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만해협에서의 미 제국주의의 도발에 맞서고 미제의 하수인인 장제스(蔣介石) 패거리를 응징하기 위해 진먼(金門)을 포격했다. 티토 일당은 중국의 정당한 투쟁을 “전 세계에 대한 위험”34)이자 “평화에 해롭다”35)고 비난했다.

8. U-2 사건. 1960년에 미국은 U-2 정찰기를 보내 쏘련을 침범하고 빠리에서 열리기로 예정된 4개국 정상회담을 방해했다. 5월 17일 티토는 쏘비에트 정부가 취한 적절한 태도가 “그토록 대규모의 논쟁”을 유발했다며 공격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9. 미국에 대항한 일본인들의 애국적인 투쟁. 1960년 6월, 일본인들은 미국에 대항하여 정당하고도 애국적인 투쟁을 벌였다. 그 규모는 전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티토 일당은 미국의 일본 점령은 “일본에서 정치적 생활의 민주화를 촉진했다”36)고 말하며 미제국주의를 옹호했다. 계속해서 저들은 “미제국주의는 일본과 중국 인민의 공통의 적이다”라고 한 일본 사회당 전 총재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의 성명서를 공격하며 그가 “극단주의 노선을 지지한다”37)고 비난했다.

10. 인도네시아 인민의 투쟁. 티토 일당은 제국주의에 대한 인도네시아 인민들의 투쟁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저들은 인도네시아에 “나사꼼(Nasakom)” 내각, 즉 민족주의자, 종교계, 공산주의자로 구성된 전국연합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한 비열한 활동에 참여했다.

11. 콩고 사건. 1960년 여름 미제국주의가 유엔의 깃발 아래 콩고에 대한 공격을 실행했을 때 티토 일당은 유엔에서 미제국주의에 찬성표를 던졌을 뿐 아니라 미제국주의의 바람에 따라 콩고 인민에 대한 유혈 진압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콩고로 공군을 파견했다.

12. 라오스 문제. 미 제국주의가 1961년 1월 라오스에 대한 개입을 강화했을 때, 티토 일당은 미국이 “라오스의 평화와 중립화에 대해 정말로 염려한다”38)는 관점을 퍼뜨렸다. 미제국주의가 1963년 5월 라오스에서 정치적 암살과 무력충돌을 꾀하였을 때, 티토 일당은 라오스의 애국적 세력들이 “미국에 모든 책임을 떠넘긴다”39)며 공격했다.

13. 미국의 진보를 위한 동맹 프로그램. 1961년 8월 미국은 여러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진보를 위한 동맹 프로그램에 조인하도록 강요했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미국의 새로운 제국주의 도구였다. 이 공격 프로그램은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티토 일당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요구사항을 대단히 충족시키는 것”40)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14. 중국-인도의 국경분쟁. 인도의 반동들이 1959년 중국-인도 국경에서 긴장을 유발한 이래로 티토 일당은 끊임없이 중국에 대항하는 인도 반동의 팽창주의, 공격과 도발을 지지했다. 저들은 “국경선의 획정은 금세기 초에 이미 완성되었고 유명한 맥마흔라인(McMahon Line)의 형태로 표현되었다”41)는 거짓말을 공공연하게 유포했다. 그리고 중국이 “고의로, 그리고 무력을 통해 인도와의 국경을 변경하도록 스스로 허용”42)하고 인도를 “공격했다”43)는 비방을 하면서 옳고 그름을 혼란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5. 쿠바혁명과 카리브해 위기. 티토 일당은 쿠바가 “혁명만을 신봉”44)하며 쿠바혁명은 “혁명의 길에 대해 본보기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외”45)라고 말하며 쿠바를 공격했다. 1962년 가을 카리브해 위기 동안에 티토 일당은 “쿠바혁명이 미국 기업들이 아끼는 옥수수를 짓밟았을 때 곤란이 시작”46)했고, “만약 미국이 가까운 이웃에 있는 쿠바에서 로켓기지 설립을 방해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해할 만하다”47)고 하면서 미제국주의의 공격을 옹호했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지난 십여 년 동안 티토 일당이 사회주의 나라들에 필사적으로 반대해 왔으며 민족해방운동을 방해하려고 애썼고 모든 나라 인민들의 반제국주의 혁명투쟁을 비방했으며 제국주의, 특히 미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복무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흐루쇼프는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와 티토 일당 사이에 국제 문제들에 대한 그들 태도에 “만장일치”와 “합의”가 있다고 반복적으로 말해 왔다.48) 자,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과 티토 일당의 반혁명적 범죄들 사이에 만장일치나 합의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대답해 달라, 그럴 용기가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부르주아지의 독재로의 타락

 

결국 유고슬라비아의 도시와 시골 모두에서 자본주의가 넘쳐나게 된 것, 전 인민의 경제에서 국가자본주의 경제로 타락한 것, 유고슬라비아가 미제국주의의 속국으로 전락한 것은 모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당과 국가권력의 변질에 그 원인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과 이탈리아의 공격에 맞서 영웅적으로 싸우면서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과 인민들은 제국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그 하수인들의 반동적인 통치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하의 인민의 민주적 국가권력을 확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부는 유고슬라비아의 당과 국가권력의 점진적 타락을 가져오면서 맑스-레닌주의를 배신하고 수정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혁명 투쟁의 영광스러운 전통을 갖고 있다. 티토 일당의 배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 내의 강력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이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티토 일당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을 당에서 축출, 제거했다. 1948년부터 1952년 사이에만 이십만 명의 당원들, 곧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원조 당원들의 절반이 제명되었다. 이른바 코민포름 요소들에 반대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저들은 많은 수의 맑스-레닌주의자들과 혁명적 간부들과 인민들을 체포하고 학살했다. 체포되어 수감된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수만 해도 3천이 넘는다. 동시에 티토 일당은 반동들, 부르주아 분자들, 온갖 종류의 반사회적 분자들, 당원증을 통해 부와 지위를 구하려는 출세주의자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1952년 11월 티토 일당은 “당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걸맞지 않다”고 선언하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개칭했다. 유고슬라비아의 모든 정직한 공산주의자들의 뜻을 거슬러 저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위로서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성격을 바꾸고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을 저들의 독재적 지배를 유지하는 실질적인 수단으로 만들었다.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국가권력은 공산주의 정당의 지도력 아래에 있다. 공산주의 정당에서 부르주아 정당으로의 변질과 함께 국가권력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서 부르주아지 독재로 타락한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국가권력은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장기간의 영웅적 투쟁의 결실이었다. 그러나 티토 일당이 변절함에 따라 이 국가권력의 성격도 변질했다.

티토 일당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즉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수단은 점차로 불필요진다”49)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유고슬라비아에 더 이상 독재가 있는가? 그렇다,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실제로 더 이상 없는 반면 부르주아지 독재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야만적인 파쇼 독재가 있다.

티토 체제는 많은 파쇼적인 교도소와 강제수용소를 세웠으며, 그곳에서 수천의 혁명가들이 온갖 비인간적 형벌로 고문을 받아 죽어갔다. 동시에 티토 체제는 반파쇼 전쟁에서의 반동들과 반역자들을 대량으로 사면했다. 1951년 1월 7일 ≪합동통신사(United Press)≫ 특파원에게 답하면서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에서 11,000명의 수감자들을 석방했음을 시인했다. 1962년 3월 13일 해외 망명 중인 또 다른 15만 명의 반동들이 사면을 받았다. 이들 인민의 적들에 대한 독재는 사실상 폐기되었고 그들은 “민주주의”를 얻어냈다. 티토 일당이 어떤 듣기 좋은 어구를 사용하든 간에 저들의 “민주주의”는 신구(新舊)의 부르주아 분자들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일 뿐이며 근로인민에 대해서는 철저한 독재이다. 티토 일당은 소수의 착취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세운 혁명적 국가 기구를 프롤레타리아트와 광범위한 대중을 억압하는 기구로 바꾸어 놓았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국가권력의 변질은 폭력에 의한 원래 국가권력의 타도와 새로운 국가권력의 수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발전”을 통해서 일어났다. 외관상 같은 사람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이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자와 소농들, 근로인민들의 이익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신구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국가권력을 활용하고 국가의 경제적 생명줄을 쥐고 흔들며 티토 일당은 유고슬라비아의 근로인민을 최대한으로 착취하고 관료 자본가 계급을 발생시켰다. 미제국주의에 의존하고 있는 이 계급은 성격상 강하게 매판적이고 또한 매판자본가 계급이다. 티토 일당이 지배하는 국가권력은 관료-매판 부르주아지 독재 권력이다.

위의 사실들은 티토 체제가 추구하는 정책들이 자본주의를 복고하고 발전시키는, 즉 유고슬라비아를 반식민지 내지 종속국으로 만드는 것들임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준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국가권력의 변질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파괴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부활로 이어졌다. 새로운 형식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재건됨에 따라 새로운 관료-매판 부르주아지가 점차적으로 성립하면서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굳히기 위해 부르주아지 독재의 강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알맞은 정치체제의 발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이 유고슬라비아에서 당과 국가권력의 변질로부터 자본주의의 복고에 이르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실현되어온 방식이다. 타락의 과정은 15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로 “평화롭게 발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티토 일당은 미제국주의의 지원, 관료-매판 부르주아지 독재의 국가기구와 그들이 매수한 노동귀족, 시골의 부유한 농민들에 의지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한다. 동시에 저들은 자신의 반동적 성격을 숨기고 인민을 속이기 위해 여러 가지 교활한 수법들을 사용한다. 그러나 저들의 반동적 정책들은 극도로 인기가 없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의 변질, 독립국에서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내지 종속국으로의 전락은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기본적인 이익에 역행하는 것으로, 모든 정직한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유고 인민들의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인민과 공산주의자들이 처한 현재의 곤경에 깊이 공감한다. 비록 티토 일당이 한동안 인민들을 포악하게 짓밟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떠한 고압적인 수단과 사기술에 기대더라도 한 번 인민을 거스른 통치 집단이 좋은 결과에 이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티토 일당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속임을 당한 인민들은 결국에는, 점차 깨어날 것이다.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유고슬라비아의 인민과 공산주의자들이 배신자 티토 일당에게 영원히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의 미래는 밝다.

 

 

유고 문제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원칙적 태도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은, 일정한 기간동안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고 지금 중국의 지도자들이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극적으로 바꾸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다. 유고슬라비아는 한때 사회주의 국가였다. 잠시 동안 그 나라는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나아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티토 일당의 배신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체제는 점차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1954년 흐루쇼프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개선을 제안했을 때,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의 길로 돌려놓고 티토 일당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를 지켜보겠다는 목적에서 유고를 사회주의 형제 나라로 대하는 데 동의했다.

우리는 그때 티토 일당에게 그리 큰 희망을 품지 않았다. 1954년 6월 10일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거래가 이미 상당히 진척되었으므로 그들이 자신들을 설득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거부하고 사회주의의 길로 되돌아오기를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평화, 민주주의, 사회주의 진영에 어떠한 정치적 손실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민들과 세계 앞에 유고 지도자들의 위선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말은 모두 진실로 판명이 났다! 정말로 티토 일당은 자신들을 설득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딱 잘라 거절하고 수정주의의 길로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1957년의 선언에 조인하기를 거절한 뒤, 티토 일당은 1958년 자신들의 철저한 수정주의 프로그램을 진행시켰으며 모든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정당들이 인정한 공동 프로그램인 1957년 선언에 반대하여 현대적 수정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자본주의 복고 과정이 한 단계 한 단계 실행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티토 일당은 더욱더 의욕적으로 미제국주의의 반동적인 특수 분견대로 복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티토 일당에 대한 모든 맑스-레닌주의 정당의 태도는 더 이상 형제 당이나 우애의 나라에 대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또 티토 일당을 우리 편으로 되돌리겠다는 것이어서도 안 된다. 저들에 대한 태도는 배신자 무리를 완전히 폭로하고 확고하게 물리치겠다는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1960년 성명서는 이 점에 관한 분명한 결론을 내려주었다.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은 1957년 11월 형제 당들의 회의 후에 일어난 일련의 중요한 사건, 그리고 또 1960년 형제 당들의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도달한 결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였으며, 1957년 9월 12일 인민일보에 실린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사설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여 쏘련 공산당 지도부의 잘못된 입장을 옹호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티토 일당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실제와 일치하며 원칙에 입각한 태도이고 1960년 형제 당 회의의 공동합의와도 일치하는 것임은 사실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반면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티토 일당에 대한 평결을 뒤집기 위해 무수히 많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이 맑스-레닌주의를 배신하고 1960년 성명서를 저버리고 유고 인민과 전 세계를 속이고 있는 미 제국주의와 그 종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다.

 

 

티토가 “그의 오류를 제거”했는가?

아니면 흐루쇼프가 티토를 그의 교사로 여기는 것인가?    

 

흐루쇼프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들이 오류로 생각되었던 것들을 많은 부분 제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티토주의자들은 그들이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것을 제거했을 리 만무하다. 티토주의자들은 그들이 어떤 오류도 수정할 “필요가 없”50)으며, “그것은 그저 시간낭비일 뿐”51)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그러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필요하고 터무니없는”52) 일이다.

사실들을 살펴보자. 티토주의자들이 그들의 수정주의 프로그램을 변경하였는가?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1957년 선언과 1960년 성명서를 수용하였는가? 아니,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그들의 수정주의적 국내외 정책을 변경하였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1963년 유고슬라비아 연맹 인민의회가 채택한 새 헌법은 티토 일당이 자신들의 수정주의적 입장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가장 명백히 보여준다. 헌법은 티토 일당의 속속들이 수정주의적인 강령의 법적인 구현체이다. 에드바르드 카르델리는 새 헌법 초고에 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그것이 L. C. Y. 강령의 개념에 대한 “법적-정치적이고 유기적인 구현”이라고 말했다.

흐루쇼프는 티토 일당과 열성적으로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는 저들이 자신들의 오류를 수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티토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고려하라.

1. 티토는 맑스-레닌주의를 근본에서 반대하기 위해 스딸린을 비난한다. 흐루쇼프는 같은 목적으로 스딸린을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

2. 티토와 흐루쇼프 모두 맑스-레닌주의의 근본 이론을 부정하며, 둘 다 맑스-레닌주의를 굳게 지키고 있는 중국인들과 다른 공산주의자들을 교조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둘 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수정을 맑스-레닌주의의 “창조적 발전”이라고 표현한다.

3. 티토와 흐루쇼프 모두 미 제국주의의 수장을 찬양한다. 티토는 아이젠하워가 “끈질기게 평화를 수호하는 사람”53)이며 케네디의 노력이 “국제관계의 향상과 긴급한 세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도움을 줄 것”54)이라고 말한다. 흐루쇼프는 아이젠하워가 “평화에 대한 충심어린 바람을 갖고 있”55)으며, 케네디는 “평화 유지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다”56)고 말한다.

4. 티토와 흐루쇼프 모두 세계의 인민을 위협하여 혁명 투쟁을 중단하게 만들기 위해 핵전쟁의 공포를 과대 선전한다. 티토는 핵전쟁이 일단 발발하기만 하면 “인류의 절멸”57)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흐루쇼프는 일단 핵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우리의 노아의 방주인 지구를 파괴하게 될 것”58)이라고 말한다.

5. 티토와 흐루쇼프 모두, 제국주의가 상존하는 상황에서 무기가 없고 군대도 없고 전쟁도 없는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설교한다.

6. 티토 일당은 “적극적인 평화공존”이 유고슬라비아 대외정책의 초석59)이라고 공언하고, 흐루쇼프는 평화공존이 쏘련의 “대외정책의 전반적인 노선”60)이라고 선언한다.

7. 티토와 흐루쇼프 모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인 이행의 가능성이 증대했다고 선언한다. 티토 일당은 “인류는 서로 다른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 시대로 이르는 먼 길에 막을 수 없이 접어들고 있다”61)고 말한다. 흐루쇼프는 10월 혁명의 길이 “의회적인 수단”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말한다.

8. 티토는 “평화적인 경쟁”을 통한 세계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의 시행62)을 지지한다. 흐루쇼프 또한 “평화적인 경제적 경쟁”을 통한 제국주의와의 “전면적인 협력”을 옹호한다.

9. 티토 일당은 민족해방운동과 민족해방전쟁들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해한다. 흐루쇼프는 “어떠한 작은 ‘지역적인 전쟁’도 세계전쟁이라는 큰불로 점화될 수 있다”63)는 구실 아래 민족해방운동과 민족해방전쟁들을 반대한다.

10. 티토 일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포기를 선언했다. “전 인민의 국가”라는 슬로건 아래 흐루쇼프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해 포기 선언을 했다.

11. 티토 일당은 공산당이 노동자계급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마찬가지로 흐루쇼프는 쏘련 공산당이 “전 인민의 당이 되었다”64)고 말한다.

12. 티토 일당은 “비연합(non-bloc)”이라는 꼬리표를 드날리며 사회주의 진영에 대립하고 있다. 흐루쇼프 또한 “연합(블록)들 같은 표현은 일시적인 현상이다”65)라고 말했다. 그들 둘 다 사회주의 진영을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국내와 대외 정책 모두에서 흐루쇼프가 실제로 티토를 그의 교사로 여기고 티토의 뒤에 바짝 붙어 수정주의의 길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흐루쇼프는 쏘련과 쏘비에트 인민, 그리고 전 세계 인민들의 이익을 완전히 거슬러 맑스-레닌주의를 버리고 1960년 성명서에 흠집을 내었으며 변절자 티토 일당과 함께 진창 속에 뒹굴고 있다.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을 지닌 모든 이들, 즉 위대한 쏘비에트 인민들, 쏘련 공산당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당원들, 여러 수준의 간부들은 이것을 참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쏘비에트 인민과 쏘련 공산당 당원들은 흐루쇼프가 맑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형제 당들에 대립하여 티토 일당과 결탁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쏘비에트 인민과 쏘련 공산당 당원들은 흐루쇼프가 사회주의 중국, 알바니아, 그리고 다른 형제 나라들에 대립하여,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에 반대하여 티토 일당과 결탁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쏘비에트 인민과 쏘련 공산당 당원들은 흐루쇼프가 세계의 인민과 혁명에 대립하여 티토 일당과 결탁하고 반동들과 협력하는 것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쏘비에트 인민과 쏘련 공산당 당원들은 유고슬라비아 수정주의자들을 본받고 당과 국가의 성격을 변화시켜 자본주의 복고의 길을 닦으려는 흐루쇼프의 노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흐루쇼프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나라 쏘련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우게 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쏘련 공산당과 쏘련 역사의 막간에 불과한 것이다. 잠시 동안 속임을 당한 사람들은 결국에는 점차로 깨어날 것이다. 역사는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확인시켜 줄 것이다. 진보하고 있는 쏘비에트 인민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자는 수레를 막아선 사마귀 같은 존재임을. 그는 결코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짧은 결론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복고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새로운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잡았을 때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투쟁은 계속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길 사이의 승리를 위한 투쟁은 계속되며, 자본주의가 되살아날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유고슬라비아는 자본주의 복고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자계급 정당이 권력을 잡기 전에 노동귀족의 지배 아래 떨어져 부르주아 정당으로 전락하고 제국주의의 하인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권력을 잡은 후에도 새로운 부르주아 분자들의 지배하에 떨어져 부르주아 정당으로 타락하고 제국주의의 하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은 그러한 타락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회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의 복고는 반드시 반혁명 쿠데타나 제국주의자들의 무력 침입을 통해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지도 집단의 타락을 통해서도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요새를 함락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내부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이에 대한 전형적인 예시를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여준다. 수정주의는 제국주의적 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을. 예전의 수정주의는 노동귀족을 매수하고 육성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의 결과로서 나타났다. 현대의 수정주의도 같은 방식으로 생겨났다. 제국주의는 이제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작전 범위를 확대해가고 있으며 사회주의 나라의 지도 집단을 매수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들이 바라는 “평화적인 발전” 정책을 추구한다. 유고슬라비아는 이 점에 있어 본보기를 세웠기 때문에 미제국주의로부터 “선두주자”로 여겨진다.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자본주의의 부활은 모든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세상을 더 잘 보게 만들 것이고 사람들로 하여금 현대적 수정주의에 대항한 전투의 필요성과 긴급함을 더욱 날카롭게 깨우쳐 줄 것이다.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사회주의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부활할 위험이 사라졌다고 말할 근거는 명백하게 없다.

쏘련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들이 이미 자본주의 부활의 위험을 제거했으며 공산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선포한다. 만약 이것이 진실이라면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상 그들이 모든 면에서 유고슬라비아를 흉내 내고 있으며 가장 위험한 길을 택했음을 알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깊은 염려와 괴로움을 준다.

위대한 쏘련과 위대한 쏘련 공산당에 대한 따뜻한 애정의 발로로서, 우리는 쏘련 공산당의 지도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한다. 동지들 그리고 친구들이여! 유고슬라비아의 길을 따르지 마시오. 즉시 되돌아오시오. 그러지 않으면 너무 늦을 터이니!

 

1963년 9월 26일

≪인민일보(人民日報)≫와 ≪홍기(紅旗)≫ 편집국 작성

 


 

1) [역자 주] “모든 당 조직들과 모든 쏘련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Open Lett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to All Party Organizations, to All Communists of the Soviet Union)”, 1963. 7. 14.를 가리킨다. 전문은 https://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cpsu/openletter.htm 참조.

 

2) N. S. 흐루쇼프, “벨레니예 대중집회에서의 연설(Speech at a Mass Rally in Velenje)”, 유고슬라비아, 1963. 8. 30.

 

3) N. S. 흐루쇼프, “라고비차의 한 공장의 회합에서의 연설(Speech at a Meeting in a Factory of Rakovica)”, 유고슬라비아, 1933. 8. 21.

 

4) N. S. 흐루쇼프, “브리오니에서의 외국 특파원과의 인터뷰(Interview with Foreign Correspondents at Brioni)”, 유고슬라비아, 1963.8.28. Tanjug의 보고.

 

5) [역자 주] “81개 공산주의자 및 노동자 정당들의 성명서, 쏘련 모스크바 회의, 1960년(Statement of 81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 Meeting in Moscow, USSR, 1960)”을 가리킨다. 전문은 https://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other/1960statement.htm 참조.

 

6) [역자 주]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산주의자 및 노동자 정당들의 선언, 쏘련 모스크바 회의, 1957년(Declaration of Communist and Workers’ Parties of the Socialist Countries, Meeting in Moscow, USSR, 1957)”을 가리킨다. 전문은 https://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other/1957declaration.htm 참조.

 

7) “창조적 맑스-레닌주의의 승리를 위해, 그리고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길에서의 수정주의에 반대하여(For the Victory of Creative Marxism-Leninism and Against the Revision of the Course of the World Communist Movement)”, ≪코뮤니스트(Kommunist)≫ 편집국 논설, 모스크바, No. 11, 1963.

 

8) 빨미로 똘리아띠(Palmiro Togliatti), “현실적인 한계로 돌아가 논쟁을 이끌어 가자(Let Us Lead the Discussion Back to Its Real Limit)”, ≪우니타(L’Unita)≫, 1963. 1. 10.

 

9) N. S. 흐루쇼프, “쏘련 최고소비에트회의에서의 보고(Report to the Session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1862. 12.

 

10) “모든 당 조직들과 모든 쏘련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 1963. 7. 14.

 

11) 같은 글.

 

12) N. S. 흐루쇼프, “쏘련 최고소비에트회의에서의 보고”, 1882. 12.

 

13) M. 토도로비치, “두 전선에서의 투쟁(The Struggle on Two Fronts)”, ≪나샤 스트바르노스트(Nasha Stvarnost)≫ 3월호, 1954.

 

14) ≪베스니크 유 스레두(Vesnik u sredu)≫, 1961. 12. 27.

 

15) ≪베스니크 유 스레두≫, 1961. 12. 6.

 

16) J. V. 스딸린, “곡물 조달과 농업 발전의 전망(Grain Procurements and the Prospects for the Development of Agriculture)”, ≪저작집(Works)≫ 영문판, FLPH, 모스크바, 1954, Vol. XI, p. 8.

 

17) 에드바르드 카르델리(Edvard Kardelj), “제4차 유고슬라비아 근로인민 사회주의동맹 연방위원회의 제9차 총회에서의 개막연설(Opening Address at the Ninth Plenum of the Fourth Federal Committee of the Socialist Alliance of the Working People of Yugoslavia)”, 1959. 5. 5.

 

18) 블라디미르 바카리치(Vladimir Bakaric),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제6차 대회에서의 연설(Speech at the Sixth Congress of the League of Communists of Yugoslavia)”.

 

19) 에드바르드 카르델리, “마을들에서의 우리 정책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On Some Problems of Our Policy in the Villages)”, ≪코뮤니스트≫, 베오그라드, No. 4, 1953.

 

20) 슬라브코 코마르(Slavko Komar), “교외지역 및 소농가구들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Some Problems Concerning the Countryside and the Peasant Households)”, ≪소셜리잠(Socializam)≫, No. 5, 1962.

 

21) ≪유고슬라비아 저널 색인(The Yugoslav journal Index)≫, No. 2, 1962.

 

22) 슬라브코 코마르, 앞의 글.

 

23) J. V. 스딸린, “집단농업 돌격대 제1차 전 연방 대회에서의 연설(Speech De-livered at the First All-Union Congress of Collective-Farm Shock Brigaders)”, ≪저작집≫ 영문판, FLPH, 모스크바, 1955, Vol. XIII, p. 248.

 

24) V. I. 레닌, “민주주의와 소비에트 권력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관하여(On the Democracy and Socialist Character of the Soviet Power)”.

 

25) “2월 17일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중앙위원회가 산하의 조직들과 모든 수준의 지도부들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L. C. Y. to Its Organizations and Leaderships at All Levels February 17)”, 1958.

 

26) 블라디미르 바카리치,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 동맹 제4차 대회에서의 보고(Report to the Fourth Congress of the League of Communists of Croatia)”, 1959. 4. 7.

 

27) 아우구스틴 파피치,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투자자금 조달(Investment Financing in Yugoslavia)”, ≪애널스 오브 콜렉티브 이코노미(Annals of Collective Economy)≫, 베오그라드, l959. 4-11월.

 

28) V. I. 레닌, “좌익, 유치함과 소부르주아적 사고방식(Left-Wing, Childishness and Petty-Bourgeois Mentality)”, ≪선집(Selected Works)≫ 영문판, 인터내셔널 퍼블리셔스(International Publishers), 뉴욕, 1943, Vol. VII, p. 365.

 

29) V. I. 레닌, “쏘비에트 정부의 당면 과제(The Immediate Tasks of the soviet Government)”, ≪선집≫ 영문판, 인터내셔널 퍼블리셔스, 뉴욕, 1943, Vol. VII, p. 327.

 

30) V. I. 레닌, “대외무역의 독점에 관하여(On the Monopoly of Foreign Trade)”, ≪전집(Collected Works)≫ 러시아어판, SPPL, 모스크바, 1950, Vol. XXXIII, p. 420.

 

31) J. V. 스딸린, “최초의 미국 노동자 대표단과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First American Labour Delegation)”, ≪저작집≫ 영문판, FLPH, 모스크바, 1954, Vol. X, pp. 115-116.

 

32) ≪보르바(Borba)≫, 1954. 4. 23.

 

33) ≪보르바≫, 1954. 5. 8.

 

34) ≪슬로보드니 돔(Slobodni Dom)≫, 1958. 9. 4.

 

35) ≪슬로벤스키 포로체발레치(Slovenski Porocevalec)≫, 1958. 9. 9.

 

36) ≪코뮤니스트≫, 베오그라드, 1960. 6. 2.

 

37) ≪포린 폴리티컬 불레틴(Foreign Political Bulletin)≫, 1962. 2. 1.

 

38) ≪보르바≫, 1961. 1. 13.

 

39) ≪폴리티카≫, 1963. 5. 5.

 

40) ≪코뮤니스트≫, 베오그라드, 1961. 8. 17.

 

41) ≪라드(Rad)≫, 1959. 9. 12.

 

42) ≪보르바≫, 1960. 12. 26.

 

43) ≪폴리티카≫, 1959. 9. 3.

 

44) ≪쿠바의 반란(The Rebellion of Cuba)≫, 베오그라드, 1962. 11.

 

45) ≪폴리티카≫, 1963. 1. 1.

 

46) ≪코뮤니스트≫, 베오그라드, 1962. 9. 13.

 

47) ≪폴리티카≫, 1962. 11. 13.

 

48) N. S. 흐루쇼프, “스플리트의 대중 집회에서의 연설(Speech at a Mass Rally in Split)”, 유고슬라비아, 1963. 8. 24.

 

49) 에드바르드 카르델리,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의 새 헌법(The New Constitution of Socialist Yugoslavia)”, ≪보르바≫, 1962. 9. 29.

 

50) J. B. 티토, “베오그라드 기차역에서의 연설(Speech at the Belgrade Railway Station)”, 1962. 12. 20.

 

51) J. B. 티토,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제7차 대회에서의 연설(Speech at the Seventh Congress of the League of Communists of Yugoslavia)”, 1958. 4.

 

52) J. B. 티토, “베오그라드 기차역에서의 연설”, 1962. 12. 20.

 

53) J. B. 티토, “≪뉴욕타임즈≫ 논평가와의 대담(Talk with a New York Times Commentator)”, 1958. 2. 28.

 

54) J. B. 티토, “J. F. 케네디에게 보내는 인사의 말(Message of Greetings to J. F. Kennedy)”, ≪보르바≫, 1961. 1. 21.

 

55) N. S. 흐루쇼프, “쏘련 최고소비에트회의에서의 연설(Speech at the Session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1960. 5.

 

56) N. S. 흐루쇼프, “J. F. 케네디에게 보내는 서한(Letter to J. F. Kennedy)”, 1962. 10. 27.

 

57) J. B. 티토,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의회에서의 보고(Report to the Session of the Federal People’s Assembly of Yugoslavia)”, 1958. 4. 19.

 

58) N. S. 흐루쇼프, “오스트리아-쏘비에트 사회의 회담에서의 연설(Speech at a Meeting of the Austro-Soviet Society)”, 1960. 7. 2.

 

59)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의회에서의 대외정책에 관한 코차 포포비치의 보고(Koca Popovic Report on Foreign Policy to the Session of the Federal People’s Assembly of Yugoslavia)”, ≪보르바≫, 1957. 2. 27.

 

60) N S. 흐루쇼프, “쏘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의 보고(Report to the 20th Con-gress of the CPSU)”, 1956. 2.

 

61)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Programme of the League of Communists of Yugoslavia)”.

 

62) J. B 티토, “≪워싱턴포스트≫ 특파원 드류 피어슨의 질문에 대한 답변(Re-plies to Questions by Washington Post Correspondent Drew Pearson)”, ≪보르바≫, 1962. 8. 12.

 

63) N. S. 흐루쇼프, “7월 8일 비엔나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성명서(Statement at the Press Conference in Vienna July 8)”, 1960.

 

64) N. S. 흐루쇼프, “쏘련 공산당의 강령에 관하여(On the Programme of the CPSU)”, 제22회 쏘련 공산당 회의에서 발표됨, 1961. 10.

 

65) N. S. 흐루쇼프, “유고슬라비아의 브리오니에서의 외신특파원들과의 인터뷰(Interview with Foreign Correspondents at Brioni in Yugoslavia)”, 1963.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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