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한국 자본주의의 현 단계와 계급 구성

 

문영찬 ∣ 노사과연 연구위원장

 

 

1. 머리말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권의 반동적 공세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국가폭력, 학살에 항의하는 민중투쟁이 타올랐으나 새정치연합의 민중배신으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고 있고 세월호 투쟁은 교란될 위기에 처해 있다.

새정치연합이 소위 개헌론에 맞장구를 치며 권력분점의 가능성에 군침을 흘리는 사이 노동자, 민중의 현실은 더욱 참담하게 변화하고 있다. 공무원연금 개악은 지배계급의 민중들에 대한 경제적 공격의 신호탄이며 자본가계급은 민중수탈을 통한 한국 자본주의의 구원의 길을 가려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진영은 지금까지의 수세적 저항, 지배계급의 공세에 대한 방어적, 즉자적 저항을 넘어서는 새로운 투쟁의 전략, 전술로 무장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의식적 투쟁, 과학적 실천을 건설하는 길을 갈 때만 박근혜 정권의 반동적 공세를 물리치고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내올 수 있다.

세계대공황의 전개에 의해 세계정세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상황, 그리하여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 그에 대해 지배계급은 개헌론으로 권력분점을 매개로 반민중연합, 반혁명연합을 구축하려 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운동의 질곡을 타개할 것과 운동의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전환은 변혁적 운동의 창출로 요약된다. 한국 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 기초한 변혁의 전망을 세우는 것, 한국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나아가 상부구조에 대한 분석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변혁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그러한 변혁적 운동의 창출로 가는 길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이 글에서는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세우는 것을 모색하려 한다. 나아가 그러한 한국 자본주의론에 기초하여 한국 사회의 계급구성, 계급현실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모색은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 사회에는 변혁운동의 전통이 있고 8, 90년대의 치열한 모색의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8, 90년대의 운동의 정수를 담고 있는 사회구성체론을 말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청산주의적 입장을 단호히 거부하고 8, 9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일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먼저, 8, 90년대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면서 그 성과와 한계, 오류를 짚는 것을 통해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에 접근하는 기초를 세우고 이어서 한국 자본주의의 현 단계를 역사적 맥락에서 추적하여 지금 운동이 발딛고 있는 현실을 조망하고 그에 기초하여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급의 현실과 상태를 분석하고자 한다.

 

 

2. 8, 9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평가

 

1) 사회구성체 논쟁의 서막

한국 사회는 분단 이후 적색공포증(레드 콤플렉스)이 지배하였다. 해방직후 솟아올랐던 민중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한국전쟁에 의해 철저히 뿌리가 뽑히고 한국 정치는 친일파의 후계세력, 지주계급의 후계세력인 보수주의세력이 지배하였다. 이승만 독재에 항거한 4.19혁명은 주체세력의 미약한 상태로 인해 5.16 반동쿠데타에 의해 압살당했고 한국 사회는 예속적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모순은 1979년 공황이 닥치자 폭발했는데 박정희의 암살과 민주화의 봄을 통해서 민중세력이 다시 진출하였고 이는 전두환의 쿠데타에 대한 광주민중의 무장항거를 낳았다. 짧은 기간의 해방공간이었던 광주가 전두환에 의해 짓밟힌 뒤 한국 사회는 숨을 죽인 상태에서 몇 년을 보내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의 운동진영은 광주항쟁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거듭나는 과정을 겪었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70년대까지의 지식인 중심의 운동 혹은 소시민적 운동은 한국 사회를 변혁하려는 변혁운동으로 거듭나는데 이 과정에서 전두환 권력의 성격은 파쇼권력이며 이 권력의 지지기반은 독점재벌들이고 이들을 위해 노동자, 민중이 착취받고 수탈되는 사회라는 인식이 성립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이 자유에 대한 우호세력이라는 인식에서 제국주의 세력이며 파시즘을 지원하는 세력이라는 인식으로 변화되었다. 또 해방공간의 역사도 서서히 복원되었고 이리하여 분단 이후 한국 사회의 역사가 소수지배계급과 그에 항거하는 민중들의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이 성립하였다. 

이러한 변혁지향적 흐름이 창출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맑스-레닌주의가 광범하게 보급되기 시작했고 실천적으로 반제반파쇼 투쟁이 전개되면서 운동은 질적인 비약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변혁의 전략에 대한 고민은 우선적으로 변혁의 대상이면서 운동이 발딛고 있는 현실인 한국 사회에 대한 과학적 인식으로 모아졌고 이리하여 한국 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고 이 논쟁은 한국 사회를 맑스주의적 틀인 사회구성체로서 이해하려는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2) C-N-P 논쟁

 

한국 사회의 운동이 소시민적 민주화운동에서 변혁운동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첫 번째 표지는 80년대 초중반 민청련을 중심으로 논쟁되었던 C-N-P 논쟁이다. 이 논쟁은 CDR(시민민주주의 혁명), NDR(민족민주혁명), PDR(민중민주주의 혁명)의 대립구도로 진행되었는데 이 논쟁은 당시 특정한 조직을 대표하는 논쟁이라기보다는 당시의 대략적인 경향성을 대표하는 논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쟁은 운동이 변혁전략을 고민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즉, 80년대 운동이 기존의 70년대 운동과 질적으로 다른 변혁운동으로 전화되고 있다는 것의 신호였던 것이다.

C-N-P 논쟁의 내용을 살펴보면 CD의 입장은 “70년대부터 이어지는 국민운동의 입장으로서 미국의 민주화계획 등 변화된 제 3세계 정세 속에서 발생하는 외세와 군사독재의 상대적 갈등에 기대하고 …현 단계 운동의 주요과제는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정부의 수립이라고 본다. 그리고 운동의 주체는 현실적으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민중역량이 미약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각성된 중간계층(지식인, 학생, 재야민주인사, 양심적 정치인)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아가 한다고 본다”는 것이었고 ND는 “외세와 군사독재의 갈등은 상대적, 부차적인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민중과 화해할 수 없는 중첩된 모순으로 반외세 민족자주화와 반군사독재 민주화의 과제는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운동의 주체는 외세의 신식민지적 침탈과 예속 군사독재체제에 의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민중이며, 기층민중을 주체로 학생, 양심적 지식인, 종교인 등 헌신적, 투쟁적 중간계층과도 연합을 구축해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었고 PD는 “현장론의 입장에서 현단계 주요 변혁대상 파악에 있어서 민족문제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보다는 계급모순 환원론적 입장에 서며, 운동의 진정한 주체는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층민중이므로 기회주의적 정치세력 및 중간적 운동세력과도 차별성을 명확히 하면서 기층민중역량이 미숙한 상태에서는 정치투쟁보다는 역량강화를 위한 지원활동과 조직활동에 주력해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었다.1) 이것은 당시 민청련 활동가였던 이을호 씨의 공소장에서 인용된 것인데 80년대 초반의 재야운동에서 논의되던 내용의 근사적인 묘사이다. 지금 관점에서 평가해보자면 CD는 당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세력이 운동진영에 대해 취하는 태도와 유사하다. 즉, CD는 당시 운동의 주요세력으로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을 상정하지 않았었고 70년대 반독재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ND는 80년대의 운동의 성격의 초기적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데 반외세와 반독재가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후 80년대 운동의 질을 규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PD는 당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상당수 활동가들의 경향을 보여 주는데 노동현장 투신론에 기초하여 계급모순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들에 대해 김근태씨는 “한국 사회의 주요 모순을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대결로 파악하고 모순해결을 위한 무분별한 공개정치투쟁으로 역량을 소진하는 것보다는 민중지원투쟁에 전력하여 민중역량을 강화하는데 전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2)고 파악하였다.

이러한 이을호, 김근태씨의 주장이 반공개 조직이었던 민청련을 중심으로 한 입장이라면 당시 선구적으로 비합법조직운동을 했던 민추위의 문용식씨는 NDR의 입장에서 C-N-P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CD는 당면투쟁의 과제를 파쇼타도에 두면서 BD(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의 전략적 연대를 주장하고 운동의 주도권을 BD에게 맡기려 한다. 즉 독점자본과 민중과의 모순을 해결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아니하고서 당면한 반파쇼투쟁에만 주력을 기울인다. …PD는 현 한국 사회의 주요모순을 독점자본과 민중을 경계로 설정하여 제국주의자와 파쇼는 물론 BD까지도 공격대상으로 설정한다. CD와 PD는 일견 서로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파쇼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을 실천적인 투쟁으로까지 폭발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ND는 CD와 PD를 실천적으로 통일시켜 BD들과 한편으로는 제휴하고 한편으로는 견제하는 전략을 세운다.”3) 이러한 문용식 씨의 입장은 ND와 PD의 차이를 잘 보여 주는데 PD가 계급모순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 민중들의 역량부족을 이유로 대기론에 빠지면서 반제와 반파쇼라는 주요모순에 맞서는 현실적인 정치투쟁을 놓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당시의 PD는 90년대 이후 운동에 존재하는 PD와는 다른 것인데 당시의 PD는 주로 현장론에 기반한 대기주의적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C-N-P 논쟁은 80년대 초, 중반의 운동의 상태를 보여 주는데 여전히 자유주의세력의 영향력이 막강한 가운데 반제와 반파쇼라는 한국 사회운동의 주요과제를 설정하려는 노력을 그리고 동시에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과 지배계급과의 대립에 천착하려는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노력이 단지 이론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으로의 투신과 현실적인 정치투쟁의 전략으로서 즉, 변혁전략으로서 정립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박현채-이대근 논쟁

 

위와 같은 C-N-P 논쟁이 주로 변혁전략의 차원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한국 사회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논쟁은 ≪창작과 비평≫에 실린 박현채 선생과 이대근 교수의 논문을 통해서 시작된다.

박현채 선생은 ‘현대 한국 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에 관한 연구: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을 둘러싼 종속이론 비판’이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성격을 주장하고 종속이론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이대근 교수가 종속이론을 옹호하는 관점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에 관하여: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부쳐’라는 논문을 통해 박현채 선생을 비판한다. 이 두 논문의 논쟁을 통하여 한국의 운동진영은 한국 사회성격 논쟁 혹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단계로 진입하게 되고 이러한 논쟁구도는 현상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80년대 전체를 관통하게 된다.

먼저 박현채 선생의 기본적 관점을 보면 “한 사회의 성격과 발전단계를 밝힌다는 것은 일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사회구성체로서의 한 사회가 갖는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와 그것을 기초로 한 여러 가지 관계에서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을 가려내고 이것의 상호관련과 주요모순으로의 전화를 밝힘으로써 안으로는 한 사회 내에서 인간간의 상호관계를 보다 진보적인 것으로 만들고 밖으로는 민족간의 불평등관계를 청산하는 실천적 요구에 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그간의 역사에서의 노력이 그러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의미에서이다”4)라고 하여 사회성격을 밝힌다는 것은 ‘실천적 요구에 답’하는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이대근 교수의 기본관점을 보면 “최근 들어 우리 주변에서 한국 사회구성의 성격규정 문제를 놓고 연구 및 토론 작업이 맹렬하게 전개되고 있음은 우선 경하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 우리 내부에서의 실천적 요구와 결부된 기존이론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필요성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리라. …이들 이론의 전파 내지 수용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입장의 차이는 곧 오늘 한국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 하는 데 있어서의 시각의 차이로 귀결된다. …하나는 오늘의 한국 사회-나아가 제 3세계 저개발국의 일원-도 그동안의 서구 자본주의와의 접촉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서구사회와 동일한 자본주의의 사회구성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다고 보고, 사회구성체론적 시각에서 이에 대한 부정 내지 수정을 가하고자 하는 어떠한 이론이나 주장도 배격코자 하는 입장이다. 한국 사회의 현 단계를 예컨대 ‘국가독점자본주의’ 등으로 파악코자 하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에 반하여 비록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이 관철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서구 자본주의사회와 동일한 성격의 사회구성으로 변모해 가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그것과는 동일시할 수 없는 특수한 성격의 자본주의로 파악코자 하는 견해가 있다. 예컨대 ‘주변부 자본주의론’의 입장이 그것이다”5)는 것이다. 이대근 교수와 박현채 선생 모두에 공통된 것은 사회성격논쟁 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의 필요성과 현실성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쟁점이 한국이라는 3세계 국가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승인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성을 승인할 것인가 아니면 주변부자본주의론을 승인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예외성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적으로 박현채-이대근 논쟁의 본질이다.

박현채 선생은 주변부 자본주의론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기본경제법칙은 그 구성체의 그 밖의 모든 특수경제법칙을 규정한다. 주변부 사회구성체는 이와 같은 사회구성체로서의 요구를 충족하고 있지 않다. … 주변부자본주의와 중심부자본주의의 차이는 사회구성체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의 차이에 따르는 상황의 차이 이상의 것은 아니다”6)고 하여 주변부자본주의론이 사회구성체의 개념이 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고 종속이론에 대해 “개개의 종속론자들이 역사발전의 동인을 내부적 요인에서 보지 아니하고 외부적 요인(중심부)에서 보는 경향을 지니”7)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이 중국의 사회성격논쟁, 일제하 조선사회성격 논쟁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주변부 자본주의론과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결합되면서 일정한 사회구성체론으로서 제기되고 있으나 “사회구성체라고 이야기되는 주변부자본주의 사회구성체나 식민지 반봉건 사회구성체 특히 그 가운데서도 식민지 반봉건사회에서 기본모순은 제시되지 않고 있”으며 “이행의 동인이 모순이라고 이야기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외부적 조건인 국제적 분업에 따르는 것이 됨으로써 역사발전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서 벗어나고 있다… 역사변혁의 동인은 주변부 자본주의의 경우 사회구성체 안에서가 아니라 사회구성체 밖에서 계급투쟁의 세계적 차원에서 주변부 민중의 경제외적인 영역에서 축적된 세계적 역량에 의해 주어질 뿐이다”8)고 비판하면서 “주변부 사회에 고유한 계기적인 역사발전 논리 또는 단계를 설정하려는 식민지 반봉건 사회구성체론은 사회구성체론으로서의 이론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9)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박현채 선쟁의 주장과 비판에 대해 이대근 교수는 “일국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은 전자[서구사회: 필자]의 경우는 노ㆍ자 대립이라는 기본모순관계가 확연히 부각되지만, 처음부터 선진자본의 결정적 영향 아래 자본주의화의 길을 걸은 후자[식민지 혹은 3세계: 필자]의 경우에는 침략해 오는 제국주의 세력과 식민지 민중간의 모순관계에서 보듯 기본모순관계를 생성시키는데 처음부터 민족모순이 보태졌던 것이다. 즉, 후자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민족모순을 사상한 기본모순관계의 설정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10)고 하여 식민지 혹은 3세계의 예외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대근 교수의 입장은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인한 계급대립의 문제에 주목하기보다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 사회의 규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민족모순을 기본모순 즉, 계급모순과 대등한 위상으로 설정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대근 교수는 또한 1960년대 이후를 한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전개로 보는 박현채 선생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노동의 재생산과정이 자본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든가,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주요한 지표인 사회보장제도의 광범한 실시 등이 한국에서는 없고 따라서 “국가가 공적 자본을 이용하여 사적 독점체의 이윤을 보장해주며 강력한 노동통제를 실시한다는 등의 지표만을 가지고 그 나라 경제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할 수는 없다”11)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대근 교수의 주장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하나의 단계로 보는 입장(단계론)인데 독점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인하여 국가가 사적 독점의 축적을 떠받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한다는 경향론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대근 교수와 같이 서구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유형만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고 나아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하나의 단계로 본다면 1980년대의 한국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박현채 선생과 이대근 교수의 논쟁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와는 별도로 한국에서도 자본주의 발전의 보편성이 승인될 것인가 아니면 제 3세계적 예외성을 인정하여 그것을 부정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점은 실천적으로도 매우 중요한데 여기서의 차이로 인해 자본주의의 발전과 계급대립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에 입각한 전략,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결정적 차이가 있었기에 이 논쟁은 이후에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승인하고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에 입각한 전술을 주장하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반대로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의 성격을 부인하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대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박현채-이대근 논쟁은 한편으로 모택동의 모순론을 전거로 하여 진행되었는데 기본모순,  내적 모순, 외적 모순, 주요모순, 부차적 모순 등의 개념을 운동진영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이러한 모순개념들이 현란하고 현학적으로 많이 남용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순이라는 변증법의 핵심개념이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맑스주의 철학의 보급을 촉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4)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식민지 반자본주의론)의 논쟁

 

박현채-이대근 논쟁은 한국 사회운동진영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 논쟁의 구도였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주변부자본주의론의 대립은 이후 새로운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대립구도의 출현이었다. C-N-P 논쟁 당시 반외세와 반파쇼를 통일된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ND가 다수가 되었으나 이 ND는 이후 반외세를 중심에 놓는 경향과 반파쇼를 중심에 놓는 경향으로 분화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사회구성체 논쟁 차원에서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대립구도가 발전했던 것이다. 이중 먼저 정립되었던 것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 1986년 8월 한신학보에 ‘한국 자본주의 성격규정: 식민지반봉건성 규정의 방법론을 중심으로’라는 글이 발표되어 한국 사회운동론으로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출현하였다. 이 글에서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기본관점이 드러나 있는데 “한국 자본주의 성격론을 분석ㆍ평가하는 핵심적 기준은, 그것이 이 사회에 있어서 식민지성과 반봉건성을 어떤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12)고 규정한다. 그리고 기존의 한국 자본주의 성격논쟁의 한계에 대해 “그 한계란 논쟁의 내용, 주체, 실천적 검증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논쟁의 문제의식 자체가 생산력주의적ㆍ노동자주의적이었다는 데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13)고 파악하여 한국 사회를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시각에서 보는 관점을 생산력주의와 노동자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반외세운동을 비판하면서 “제국주의의 운동논리를 그 경제적 영역으로 한정시키고, 정치ㆍ군사적 지배는 부차적 측면으로 치환시키면서, 지금 외세는 대중에게 직접적인 대립성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반외세운동은 보다 낮은 차원의 운동의 계기적 발전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경제주의적 민족운동론”14)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 관점을 바탕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 반봉건성에 대하여 한국 사회는 사회구성체상으로는 자본주의지만 그 성격은 식민지 반봉건성이라고 규정하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사구체 범주는 한 사회의 다양한 모순과 그것들간의 상호관계를 포착하는데 제한적이다. 사구체는 그 안에 다양한 제 생산양식ㆍ우클라드의 병존과 복잡한 결합을 허용하고, 동시에 토대와 상부구조 전체를 포괄하는 범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기본적 생산양식의 기본모순을 가지고서 사회를 분석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문제가 단지 외적 조건만이 아닌 후진사회 일반에서는 그 범주는 복잡한 모순구조, 특히 민족모순의 규정성을 위치지우는데 난점이 많다”15)고 방법론을 세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민족문제와 사회구성체개념의 연관을 파악하는 관점이 이대근 교수의 주변부자본주의론과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주변부자본주의론과 차이는 있을지라도 경향성에서는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의 의미도 이 관점에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판이하게 파악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자본주의는 외세가 그 식민지성을 관철시키는 ‘형식’이다. 그러했을 때, ‘자본주의 중심론’은 형식만 보고 내용-식반성-을 보지 못하는 오류일 수가 있다”16) 이러한 파악은 사회구성체로서 자본주의의 의미가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고 내용은 식민지반봉건성이라고 보는 것이어서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의미와 그에 근거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전술을 말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이론과는 근본적 관점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에서는 사회성격론과 사회구성체론이 다른 것으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같은 사회분석의 원칙을 충족시키기에는 사회구성체보다 사회의 성격이란 범주가 훨씬 적합하다. 사구체가 일반성이라면 사회의 성격은 그 일반성 하에서의 특수성이고, 사구체가 형식이라면 사회의 성격은 그 내용이다. 그리고 사구체가 기본모순의 대립ㆍ투쟁을 강조하는 개념이라면 사회의 성격은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인 경우의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17)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파악은 사회구성체 개념과 사회성격 논의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박현채 선생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는 방법론 자체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초점은 한국 사회의 식민지적 성격을 강조하는데 모아지고 있는데 이들의 식민지성 규정은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의 식민지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국 사회의 식민지성이란 한국민족 전체가 외세의 침략성에 의해서 피억압민족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그 자체이다. … 현 한국 사회의 식민지성은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단상태 강제가 그 본질이다. 따라서 식민지성의 파악에는 분단의 성격과 본질규명이 그 중심에 놓인다. … 분단은 민족억압의 신식민지적 형태라기보다는 식민지적 형태에 가깝다. … 식민지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정치적 병합과 경제적 병합 양측면을 강제하는데 비해 신식민지주의는 대체로 후자만을 강제한다. 그러나 국토분단은 정치적 병합에 가깝기 때문에 한국은 식민지적 성격이 강해진다. …”18) 즉, 한국 사회가 식민지라고 규정되는 주된 이유는 분단때문이며 신식민지주의는 경제적 측면만 강조하는데 비해 분단은 정치적 병합에 가깝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신식민지가 아니라 식민지라고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규정은 분단의 정치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올바르지만 신식민지주의가 경제적 측면만 보고 정치적 측면은 보지 못한다는 것은 일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반봉건 사회론은 1986년도에 출현한 이래 당시 분출되었던 NL경향의 운동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되었다. 아직까지 한국 사회운동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NL경향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 바로 이 문건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에 대해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 가열되자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진화한다. 그 내용을 보면 식민지의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고전적인 의미의 경제적 토대와 정치적 상부구조의 조응이라는 명제도 식민지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게 된다”19)고 파악하고 있으며, “식민지의 경제적 토대 자체도 오로지 제국주의의 경제적 부속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현재의 군부정권은 미국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국내자본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20)라고 파악하여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의 조응이라는 사적 유물론의 근본규정이 식민지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관점을 천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식민지사회의 기본적인 계급모순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민중간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 바로 그것이다”21)고 보아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로서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이 기본모순임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예속자본가계급의 출현과 노동계급의 발전이라는 한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현상적으로 승인하지만 실제로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기본관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식민지 반자본주의론)이 출현하는 상황에서 당시 박현채 선생으로 대표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진영은 진화를 하면서 단지 학계 차원이 아니라 현실운동의 조직과 논리로서 발전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87년 비합법문건으로 발표되었던 ‘한국 사회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임무’(이하 ‘성격과 임무’로 표기)이다.

‘성격과 임무’의 기본관점은 박현채 선생과 같이 한국 사회의 성격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사회구성체 개념을 채택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 연구란 한 사회 내의 일상생활의 제 측면, 물질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관계 및 제 계급간의 대립이라는 사회적 현상, 경제적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호ㆍ강화하는 정치적 상부구조, 사회사상, 관념, 심지어는 가족관계 등을 포함하는 총체적 구성체의 성격을 해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할 때만 변혁의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리고 당면 변혁의 성격과 그것에서의 임무가 무엇인가, 그리고 전략ㆍ전술 수립의 토대로서 기본적인 목표나 방향이 무엇인가가 해명된다”22)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은 한국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방법론으로서 사회구성체 개념이 적절하지 않다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의 관점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특히 사회구성체 개념이 주로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대립이라는 기본모순의 해명에 치우친다는 견해를 비판하고 사회구성체 개념이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담는 개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성격과 임무’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 한국 사회를 식민지로 규정하는 것과 달리 한국 사회의 신식민지성을 강조하는데 그 근거로서 세계체제의 변화를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론이라는 틀로서 설명하면서 2차 대전 후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식민지체제가 붕괴하고 신식민지체제가 성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식민지체제의 붕괴와 신식민지체제의 성립의 원인으로서 (i) 식민지 자체의 내적 모순의 성장으로 인한 피억압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의 발전 (ii)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으로 인해 식민지 민중이 대안사회를 사고할 수 있게 된 점 (iii) 2차 대전에서 드러났듯이 제국주의 상호간의 대립으로 인해 어느 일국의 영토에 대한 배타적 독점권을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점 등을 들고 있고 이에 기초하여 신식민지주의에 대해 규정하는데 “신식민지주의란 바로 ‘제국주의의 세계적 지위가 약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또 식민지 체제가 붕괴되어가는 제 조건 하에서 제국주의적 지배의 유지 및 확장을 위해 채택하는 정치적ㆍ경제적ㆍ이데올로기적 제 정책’을 지칭하는 것”23)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신식민지 내의 새로운 지배계급을 창출, 이를 통하여 간접지배하는 신식민지적 자본주의의 길을 강요”24)했다고 파악하여 구식민지와 신식민지의 차이가 신식민지내의 새로운 지배계급의 창출과 이를 통한 간접지배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가권력의 성격에 대해서도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달리 “우리 사회의 성격규정에서 제국주의의 의도와 정책 변화에 대한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제국주의의 규정을 받으면서도 국내에서 예속적 부르주아지와 민중의 계급대립이 새로이 창출되고, 그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로서 국가권력의 등장이 필연적”25)이라고 보아 한국의 국가권력의 성격에 대해 “식민지의 정치권력은 식민지 자체의 경제적 토대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제국주의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보는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는 근본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신식민지적 지배하에서도 자본주의의 발전단계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말하면서 “신식민지 지배하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끊임없이 발전ㆍ고도화되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규정으로 인하여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신식민지국의 자본주의 발전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관련되어 진행되는 것이라면 ‘축적의 진전은 곧 예속의 심화’로 귀결”26)될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박현채 선생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예속자본가계급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의 탄생과 이를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발전을 전적으로 승인하고 있고 나아가 한국의 국가권력이 바로 이 예속자본가계급과 한국 민중의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임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박현채 선생의 견해와의 차이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서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적 한계가 탈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체제의 문제가 전반적 위기론 속에서 전면적으로 고찰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성격과 임무’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역사에 대해서 박현채 선생의 견해를 상당부분 수용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한국에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시기를 1960년대로 보는 것이 그러하다.

이러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논쟁은 단지 이론적 논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사회운동의 노선을 규정하는 이론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이 1970년대의 운동은 물론 1980년대 초ㆍ중반의 단계를 뛰어넘어 본격적인 변혁운동의 단계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5)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내에서의 논쟁

 

한편 한국 사회의 운동이 발전하자 학계에서 변혁이론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주요하게 강단학자들이 사회구성체 논쟁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논객이 이진경과 윤소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학자들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입장에 서서 이론적 차원에서 PD경향을 창출하는 역할을 했다. ‘성격과 임무’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변혁론에서 NDR(민족민주변혁)을 고수하고 노동계급 주도의 민족민주변혁(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변혁으로 성장전화를 주장했다면 이진경, 윤소영 등의 강단 PD파는 당면 변혁의 민주변혁적 성격을 부정하고 1단계 2과정 혹은 ‘민주변혁도 아니고 사회주의 변혁도 아닌 민중민주변혁’을 주장했다. (이 시기의 PD적 경향은 80년대 초ㆍ중반의 C-N-P 논쟁 당시의 PD와는 질을 달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 강단학자들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핵심테제로서 ‘독점강화/종속심화’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심지어 이러한 테제를 수식을 통해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까지 하였다. 이렇게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ND적 경향과 PD적 경향으로 분화됨에 따라 이들 상호간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성격과 임무’ 진영에서는 이들 강단 PD파들의 작업이 “‘정치적 실천’과의 연관성 속에서 진행되는 ‘이론작업’이 아니라 알튀세르 식으로 이해된 ‘이론적 실천’”27)임을 비판하면서 이들 강단 PD들이 “제국주의 문제 및 통일문제에 대하여 일관된 과소평가의 태도를 취”28)하는 상황을 비판한다. 강단 PD파가 NL에 대한 비판의 역편향으로서 ‘식민지 사회’에도 자본주의가 발전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한 측면으로 흘렀다고 비판하면서 “PDR에서는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규정성의 문제가 아직까지 사회구성체 개념의 외부에 존재한다… 제국주의 시대의 사회구성체 개념은 그 사회의 자본주의가 어떠한 발전단계에 도달했는가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어떠한 ‘지위’를 획득하고 있는가를 동시에 결합시켜야만 사회구성체의 개념은 총체성을 가질 수 있다”29)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구성체론에 있어서의 일국적 관점이 PDR론자들로 하여금 반제투쟁을 간과하게 만들고 통일투쟁의 긍정적 의의를 부정하게 만드는 근원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 남한사회의 변혁운동 전략에 ‘선진국가독점자본주의’ 이론을 조건도 고려하지 않고 끌어대는 경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30)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강단 PD파가 제국주의의 세계질서 문제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전반적 위기론의 붕괴론적 편향에 대한 반대로서 전반적 위기론의 합리적 핵심은 붕괴론이 아니라 진영테제라는 주장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데 “레닌이 ≪제국주의론≫에서 ‘사멸하는 자본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을 변증법적으로 사용하고 있듯이 ‘붕괴론’에 대한 비판은 ‘발전’과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이해되는 ‘사멸’이라는 규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 전반적 위기론은 체제간 대립이라는 진영모순과 제국주의의 내적 모순 격화론을 통일적으로 이해함으로써만 달성된다”31)고 하여 강단 PD파들이 이해하는 진영론적 전반적 위기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강단 PD파의 핵심테제인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를 비판하고 있는데 “‘독점의 강화와 종속의 심화’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구성하는데 불가결한 요소라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독점의 강화와 종속의 심화’는 제국주의와 관계의 한 측면, 즉 ‘종속의 구조’만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보다 광의의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제국주의의 규정성 위에서 형성되는 계급대립의 총체적 구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생산력의 측면에서 그리고 생산관계의 측면에서 그리고 나아가 국가권력의 성격을 비롯한 상부구조의 측면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 …‘독점의 강화, 종속의 심화’라는 명제는 ‘종속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머무르고 있지만 우리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축적 속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착취의 구조’를 동시에 고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착취의 구조’를 전제하지 않는 ‘종속의 구조’에 대한 분석은 아카데미즘적 편향을 야기시킬 뿐이다”32)고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PDR론은 전반적으로 식반론 비판의 역편향으로 선진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명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데 문제가 있다”33)고 진단하고 있다.

여기서 ‘성격과 임무’ 진영이 독점강화/종속심화 테제를 비판하는 핵심은 그 테제가 종속의 구조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착취의 구조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 즉, 종속의 문제가 착취의 강화를 규정하는 측면, 종속구조의 문제와 착취구조의 문제 양 측면을 통일시킬 때만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서는 사회구성체론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격과 임무’ 진영의 비판에 대해 ≪현실과 과학≫의 대표적 논객이던 이진경은 격렬히 반발한다. 제국주의 규정성이 사회구성체 개념에 내포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현대와 같이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에 세계체제는 개별사회는 물론 사회구성체적 발전 자체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사회구성체 내부에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34)고 주장한다.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의 사회구성체론이라는 시도는 “성공한 경우를 아직 본 적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개 잘못된 견해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주체시대의 새로운 사회(구성체)이론’을 만들어낸 주체의 사회역사이론이 그러한 오류의 대표적인 경우이다”35)고 반박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에 대해 “일국과 세계를 분리시키고 일국적 분석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종종 있었는데 그 역시 이러한 상투적 비판을 반복하고 있다”36)고 반박하고 있다.

또 전반적 위기를 진영론적으로 이해한다는 비판에 대해서 이진경은 “실제로 ‘전반적 위기’가 현대의 세계체제를 설명해주는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단지 자본주의의 내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오히려 대립하는 양대 세계로 이루어지는 세계체제를 표현하는 개념이 아니면 안된다”37)고 하여 진영론에 입각한 전반적 위기 개념의 이해를 옹호하고 있다. 

‘성격과 임무’ 진영과 이진경으로 대표되는 ≪현실과 과학≫진영의 이러한 논쟁은 한편으로 사회구성체 논쟁의 심화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시대 사회구성체론, 전반적 위기에 대한 이해, 종속의 구조와 착취의 구조의 관계 등 기존에 비해 발전된 지점들을 보여 주면서도 논쟁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것이다.

 

6) 종속약화논쟁

 

‘성격과 임무’ 진영과 ≪현실과 과학≫진영 간의 논쟁,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진영 내의 논쟁이 90년대 초반의 논쟁의 주요한 축이라면 또 다른 하나의 축은 종속약화논쟁이라 할 수 있다. 종속약화논쟁은 80년대를 거치며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 한 단계 상승한 국면을 경험하면서 이러한 자본주의의 발전이 종속성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제기된 데서 비롯된다. 예를 들면 80년대 중반까지 외채규모가 500억 달러에 육박하여 세계 3위를 기록하여 종속성의 대표적인 사례로 치부되었던 것이 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을 거치면서 경상수지 흑자의 누적으로 외채규모가 격감하여 종속성이 약화되는 추세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대표적인 논자는 안병직 교수였는데 그는 중진자본주의론을 제기한다. 그는 한국 사회의 신식민지성 자체에 대해 문제를 삼는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지배적인 학설이 된 신식국독자론은 한국경제의 성격을 신식민지이면서 국독자 단계로 파악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런데 이 학설에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원래 신식민지주의라는 것은 전후 제국주의의 정책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출현한 것인데 그 용어를 억지로 저개발국과 중진국의 경제체제를 특징짓는 용어로 둔갑시켰다는 것. 본래 신식민지라는 것은 비교적 자립성이 강한 제 3세계회의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스스로 통치하고 있는 나라를 신식민지로 규정했다면, 그것은 역사의 우스갯거리이다. 둘째, 생산력의 면에서 보면 이제 막 중진국의 수준에 도달한 나라에 국독자 단계라는 선진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구체적인 현실 분석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38) 이러한 안교수의 주장은 신식민지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막 중진국에 도달한 나라에 선진국의 개념인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적용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으로서 이러한 주장이 표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에서 90년대 초반 종속약화론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타격하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안 교수는 “자본주의의 독자적 발전을 가늠하는 기본적 지표는 그 발전의 주역이 자국자본인가 외국자본인가 하는 점에 있으며, 금융적, 기술적 종속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다만 이들 지표는 독자성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이며, 독자적이냐 아니냐를 가늠하는 지표가 아니다”39)고 파악하여 자국자본이기만 하면 그 자체로 종속성을 벗어난 지표가 된다고 하여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핵심개념인 ‘예속독점자본’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안 교수는 3세계에서 일반적인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 “중진자본주의론은 그러한 역사과정을 왜곡이 아니라 저개발제국 또는 지역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독자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요소들이 성장하는가를 보는 것이다. … 그러한 곳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종속성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종속성을 서서히 극복하면서 독자적인 자본주의로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중진자본주의론과 종속이론ㆍ신식국독자론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갖는다”40)고 하여 중진자본주의론의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 예속성과 자본주의 발전을 통일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종속성이 서서히 극복된다는 주장으로 대치시키고 있고 이러한 관점에서 중진자본주의론은 예속성으로 인해 자본주의 발전이 정체 혹은 저지된다는 종속이론과 예속성과 자본주의 발전을 통일시키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동열로 놓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중진자본주의론의 문제제기는 80년대 논쟁의 구도의 기본전제였던 반외세와 반파쇼를 통일시킨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고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대립 외부에서의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종속약화론은 안교수와 결은 달리하지만 이병천 교수도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종속약화론의 문제제기에 대해 주요한 표적이 되었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진영에서는 안 교수에 대해 부르주아 이론에 투항했다고 비판을 한다. “그[안병직 교수: 필자]는 남한 사회의 예속성을 단지 자본주의의 후진성으로 바라보면서, 경제개발 이후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을 자본주의의 보편적 발전의 과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식민지경제론의 핵심은 자본의 국적을 독자적 발전의 지표로 보는 데 있는데, 그에게 예속성이란 자본주의의 발전에 부수되는, 자본의 국적만 회복된다면 축적의 진전과 함께 극복될 후진성의 의미 이상은 아니다. 식반론의 완고한 입장에서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전향한 안교수는 신식국독자론을 격렬하게 비판하는데 그 주요한 논점은 식민지론에 대한 비판, 발전단계론으로서의 국독자론 비판이다. …그는 신식국독자론에 기존의 자신의 이론이 가지고 있던 오류를 모두 전가함으로써 신식국독자론이 이미 극복하고 넘어선 남한 자본주의의 붕괴론적 이해(사실은 자신의 이전의 견해)에 머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41)고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교수가 자신의 과거 견해의 책임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안교수의 입장의 변경의 의미이다. 완고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자였다가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현실에 압도되어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폐기하는 것을 넘어 자본주의 발전과 신식민지성을 통일시키는 입장까지도 부정하는 것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90년대 초반 한국에서 종속약화론이 나타나게 되었던 현실적인 배경이다. 또한 안교수의 종속성에 대한 이해 즉, 식민지 혹은 신식민지 규정을 단지 후진성으로만 이해하고 한국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세계체제의 연관의 의미로까지 파악하는데 실패했다는 점이 안교수의 종속약화 주장의 근본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교수는 “예속적 발전이든 자립적 발전이든 자본주의의 발전 그 자체를 옹호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파시즘 정권(이른바 권위주의적 지배, 개발독재)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옹호한다. … 이에 따라 그의 변혁대안은 사실상 변혁의 불가능성에 대한 설교이며 사회민주주의적 길의 도입이다”42)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상 9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종속약화론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한국 사회에서 개량주의적 경향의 강화로 귀결되었던 것이 현실이었던 것이다.

인민노련의 경우도 이러한 종속약화론의 대열에 합류했는데 “이들은 식반론에 대한 역편향으로 남한 정치 및 경제적 ‘자립화/개량화론’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현재에는 국독자론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데까지 발전하고 있다. …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의 국적(독점의 민족적 구별)이므로 독점의 강화란 그것이 외국자본의 직접적 투자가 아닌 한,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든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든 종속의 심화와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금융적 종속이 종속의 핵심이라고 보며 기술종속의 심화라는 형태조차 토착독점자본의 자립력의 강화, 자기자본 동원력의 강화의 결과라고 주장한다.”43) 이들 인민노련이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길, 개량주의의 길을 걸어간 것과 종속약화론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7) 사회구성체 논쟁의 성과와 한계

 

이러한 사회구성체 논쟁은 그러나 이후 발전하지 못하고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라는 세계사의 대격변 속에 소멸하고 말았다. 즉, 당시 사회구성체 논쟁의 전제였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이해와 그것의 견지라는 점에서 매우 취약했던 것이고 이후 사회구성체 논쟁은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논쟁으로서 사회구성체론은 90년대를 거치며 소멸했지만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대표되는 8, 90년대의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은 한국 사회를 군사파시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시켰다. 그러나 논쟁의 소멸로 표현되는 8, 90년대의 운동의 한계는 한국에서 변혁적 전통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90년대, 2000년대는 개량주의의 시대가 되었고 2008년 세계대공황의 발발 이후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의 시계가 거꾸로 돌며 반동화의 길을 걷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한국 사회는 개량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이 변혁운동의 태동을 이루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8, 90년대 한국 사회 운동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사회구성체 논쟁의 발생, 성장, 소멸을 고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먼저, 발생의 측면을 보면 사회구성체 논쟁을 불러온 가장 1차적인 계기는 광주민중항쟁이다. 이 항쟁이 무참히 짓밟히는 경험을 겪고 나서 한국 사회의 운동은 70년대까지의 소시민적 운동, 지식인 중심의 운동과 단절하고 변혁운동으로 이행을 시작하였고 그것의 표현이 C-N-P 논쟁이었고 학계에서는 박현채-이대근 논쟁이었다. 이러한 현상의 의미는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대안사회를 목표로 하는 변혁전략의 문제가 현실운동의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고 한국 사회성격 논쟁은 그러한 전략 수립을 위한 치열한 과학적 모색의 산물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운동은 맑스-레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운동으로 되었고 운동진영은 반동세력, 자유주의세력과 버금가는 정치세력이 되었고 이를 기초로 반제 반파쇼 투쟁의 고조 속에서 민주주의로 이행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둘째, 논쟁의 성장을 고찰해 본다면 초기의 C-N-P 논쟁, 국가독점자본주의-주변부자본주의논쟁을 통하여 변혁전략이라는 문제의식이 생성되었고 또 해외의 이론을 수입하여 가공하는 단계를 거쳤다면 식민지 반봉건사회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논쟁은 수입되었던 해외의 이론, 맑스-레닌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이론을 현실적 운동으로 전화시켜 본격적으로 변혁운동이 성립, 발전하는 단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운동은 양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비약을 보여 주는데 강고한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이 창출되어서 운동을 이끄는 상태가 되었다. 이들 비합법 전위조직운동은 지식인 중심의 운동이 아니라 지식인은 ‘존재이전’을 하고 선진노동자는 사회주의자로 상승되어 상호 결합되어 레닌적 의미의 ‘전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러한 전위적 인자가 80년대 초,중반에는 극소수였다면 이 단계에서는 매우 폭이 넓어지면서 수많은 비합법 전위조직이 건설되는 단계가 되었던 것이다.

셋째, 소멸의 측면을 본다면 먼저 위와 같은 성장단계가 당건설로 연결되지 못하고 정파운동의 정립으로 그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파운동으로는 최대치에 이르렀으나 당건설의 성공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는 것에 8, 90년대 변혁운동의 한계, 그리고 사회구성체 논쟁의 한계가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당건설 실패의 원인을 보면 먼저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한국 사회의 반공체제, 레드 콤플렉스를 이겨내지 못했다는 점이 있다. 이러한 반동적 정치질서가 정파들이 당으로 결집되는 것을, 당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는 결정적 조건이었던 것이다. 주체적 측면을 본다면 쏘련 붕괴로 인한 사회구성체 논쟁의 소멸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사회에서 맑스-레닌주의의 도입과 발전의 기간이 매우 짧았던 것이 큰 요인이다. 이에 따라 맑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부족했고 대중과 결합할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 그러한 능력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쏘련이 붕괴하던 90년대 초반 노태우정권 당시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공표하는 것은 곧 구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한국의 변혁운동이 쏘련 붕괴에 따라 쇠퇴가 시작될 당시 한국 사회의 정치적 조건은 최소한의 사상의 자유도 부족했던 것이다.

사회구성체 논쟁은 당시 이러한 성과와 한계가 있었다. 그러면 2014년 현재의 시점에서 사회구성체론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사회구성체론은 청산의 대상이 되어 지워지고 새롭게 출발하면 되는가? 그것은 어리석은 길이다. 현재 존재하는 한국 사회운동은 8, 90년대 변혁운동의 자산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구성체론은 현재의 조건에 맞는 위상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고 나아가 8, 90년대 논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2014년 지금의 조건에 맞는 운동의 과학화, 변혁화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론은 현재도 유의미하다. 즉,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거시적 관점, 맑스적 의미에서 구성체적 접근은 운동의 발전을 위해 여전히 필요하다. 이것은 결코 청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소위 세계화 시대 일국적 접근은 불합리하다는 일부 주장은 자본주의에 압도되어 맑스주의적 접근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계질서와 일국적 규정의 통일로서 사회구성체론은 여전히 변혁이론의 일부분으로서 견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가 90년대 그리고 2000년대를 거치며 변화, 발전한 현실은 당시의 사회구성체적 접근만으로는 새로운 변혁운동의 기초로서 부족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거시적 접근과 미시적 접근을 통일시키는 것, 현 단계의 한국 자본주의가 모순구조, 착취구조와 종속구조 등을 해명하고 8, 90년대와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규명하는 것, 동일성과 차이성을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사회구성체적 접근에 기초하되 거기서 더 나아가 현 단계 한국 자본주의론을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3.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현 단계

 

위와 같은 사회구성체론은 한국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여 변혁의 성격과 과제를 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한국 자본주의는 진화를 거듭하여 OECD에 가입하고 외환위기가 있었고 2008년 세계대공황의 발발 이후에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발전의 고도화를 이루었고 주요 독점자본들은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8, 90년대와의 연속성은 무엇이고 차별성은 무엇인지가 규명되어야 한다. 또한 한국의 변혁의 성격은 90년대를 거치며 민족민주변혁에서 사회주의 변혁으로 변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반제반파쇼의 동력을 끌어내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했던 8, 90년대의 사회구성체론적인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넘어서서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회구성체론과 별도의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현 단계에서 노동자계급의 관점의 수립이 요구되는 것이다. 현 단계 한국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축적의 구조는 어떻게 고도화되었는지,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들의 구조와 상호연관들은 어떻게 되는지 등이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8, 90년대 사회구성체론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접근의 기본적인 방법론을 제공한다. 즉, 한국 자본주의의 종속의 구조와 착취의 구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것,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접근과 구별되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선 접근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태동부터 현 단계에 이르기까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기초로 한국 사회주의 변혁의 물질적 토대를 규명하고 한국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모순들을 규명하고자 한다.

 

1) 한국 자본주의의 태동

 

일제 식민지에서 조선의 해방은 조선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의 고양과 2차 대전에서 전개된 반파쇼통일전선이 국제적으로 승리함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분단이 되었고 분단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성립하고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이후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로서 이북은 사회주의 국가로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고 이러한 분단의 상황은 민족 문제의 차원을 넘어 한국과 이북이 별도의 사회구성체를 형성하고 발전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의 길을 걷게 됨에 따라 한국 변혁의 주체는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민중이라는 관점이 성립하는 것이다. 즉, 한국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이 배태하는 한국 내의 계급대립이 한국의 변혁의 관건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북과 별도의 사회구성체로서 한국 자본주의를 그 자체로 고찰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한국 자본주의를 그 태동에서부터 고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1948년의 분단과 1950년의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사회는 식민지 조선과 다른 구조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창출되었음을 말한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정한 공업이 발전했지만 지주계급이 광범했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미미했다. 그러나 분단을 전후하여 한국에서 일본인이 남기고간 귀속재산의 불하와 토지개혁은 지주계급의 몰락과 신흥자본가계급의 창출을 가져왔다. 당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재산이 미군정에 귀속되었는데 당시 남한 총 공장 수의 85%를 차지하였고 이 귀속재산은 헐값으로 친일성향을 지녔던 사람들에게 넘어갔다.44) 또한 이북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실시는 남한의 토지개혁을 압박하였고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지주계급이 광범하게 몰락하였다. 소작농에게 분배하는 토지가격은 연간 생산량의 3배로 정하고 농민이 1년 수확량의 20%를 15년간 국가에 현물로 내면 소작농지를 농민소유로 전환시켜주는 것이었고 농지소유의 상한선은 2헥타르로 제한되었으며 지주들은 전쟁 중의 인플레이션으로 토지보상금이 감가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리하여 지주계급은 소멸의 길을 걸었다.45) 이와 같이 귀속재산의 불하와 토지개혁으로 인해 한국에서는 신흥자본가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창출되었고 이들은 친일, 친미세력이라는 점에서 이는 예속자본가계급의 창출이었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지배계급을 육성하여 이들을 통하여 지배력을 유지한다는 신식민지주의를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이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를 기초로 195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가 전개된다.

195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는 미국으로부터 원조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1953년에서 1954년까지의 기간에 미국의 원조는 GNP의 6-7%에 달했고, 1955년에서 1957년까지의 기간에 두 배로 증가했다. 바로 이 원조 덕택에 복구기(1953-1957)동안 남한 GNP의 연평균 성장률이 5%를 보였던 것이다.”46) 또한 “이 원조가 갖는 주요하고도 일차적인 의미는 자본주의적 제 관계의 재생산을 확대시키는 작용”47)이었는데 이는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제국주의적 이해에 부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관계가 안정되고 발전함에 따라 수입대체 공업화가 전략적 목표로 설정되었다. 수입대체라는 목표는 한국의 공업발전에 자극을 주었는데 “1955년에서 1962년까지의 시기에 이 나라의 연평균 성장률은 비록 4%를 초과하지 못했지만 연평균 공업성장률은 11.2%였다.”48) 수입대체는 중공업 부문에서도 발전했는데 “1953년에서 1960년의 기간에 남한의 중공업 제품의 생산은 거의 3배로 증가하였고 같은 시기에 경공업은 2.5배로 증가하였다.”49)

그리고 이 당시 오늘날 한국의 지배계급인 재벌들의 원형이 탄생했는데 “1995년 기준으로 30대 재벌 중 21개가 이승만 정권 때 설립되었고 박정희 정권 때 새로 설립된 것은 3개뿐이다.”50) 이들 재벌들은 원조자금의 특혜적 배분을 기초로 삼백(三白)산업(제분, 면방직, 제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이들 산업은 원조물자를 가공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산업에 대해 특혜에 기초한 독점력을 갖는 기업들이 나타났던 것이다.51)

그러나 1950년대말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공황국면에 처하고 미국의 원조금액이 삭감되자 한국경제의 성장률이 전반적으로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이러한 경제상의 위기는 민중투쟁의 폭발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1960년의 4.19혁명이다. 이승만 정권의 기반은 새로 창출된 예속자본가계급이었고 원조물자를 특혜배분하는 것을 기초를 이들을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속자본가계급과 민중의 대립이 부정선거를 계기로 폭발했던 것이다. 4.19이후 민중들은 거세게 진출했는데 민족통일의 요구, 교원노조의 설립 등의 정치적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세력이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뿌리가 뽑힌 상태에서 4.19혁명의 과실은 보수세력인 민주당에게 돌아가 민주당의 장면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는 박정희의 5.16쿠데타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195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 발전을 요약하면 귀속재산 불하와 토지개혁을 통해 예속자본가계급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였다는 것, 미국의 원조를 기초로 수입대체 공업화가 추진되어 공업의 일정한 성장을 가져왔다는 것, 새로운 예속자본가계급과 민중의 대립이 4.19혁명으로 폭발하여 분단 이후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계급대립의 원형을 보여 주었다는 점 등이다.

 

2)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

 

원조물자의 가공을 중심으로 하는 수입대체 공업화라는 전략은 박정희 정권 초반에도 지속된다. “수입대체는 남한의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근간이 되었다. …이 단계에서 제 일차적 관심은 선도적인 공업부문-전력, 섬유, 시멘트, 화학비료생산-에 모아졌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제 1차 5개년 계획기간의 연평균 GNP 성장률은 7.8%였다.”52) 그러나 수입대체는 공산품 수입의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공도가 높은 상품의 수입을 가공도가 낮은 제품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53) 이러한 수입대체는 소비재의 수입대체 단계, 생산재의 수입대체 단계 등으로 상승을 도모하는 것이었는데 높은 소득불균형의 문제 등은 수입대체전략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96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수입대체전략에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전략으로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남한이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전략을 선택하는 데에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와 IMF(국제통화기금)의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국제개발협회(IDA)의 미국지부 전문가들에 의해 고안된 남한의 수출지향적 발전계획은 국제부흥개발은행이 발전도상국들에게 행한 기본권고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 권고는 다음과 같다. 산업발전을 선진자본주의국 시장과의 관련을 전면적으로 강화시키는 쪽으로 방향지울 것, 경쟁력있는 경제부문에 자본을 투여할 것, 수출경제부문을 국제노동분업체계 속에 끌어들일 것, 국내부문의 성장을 억제시킬 것, 국내소비를 최소수준으로 유지할 것, 국가가 생산을 통제할 것 등등이다.”54) 이러한 내용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길을 열어주되 그 발전의 방향을 제국주의 질서에 예속시키는 것이고 또한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정도를 심화시킬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수입대체 전략은 서서히 수출지향 전략으로 전화되게 된다. “수출지향적 개발노선의 긍정적 측면 가운데 하나는 이 노선이 남한에게 선진공업국이 이미 도달한 기술수준과 첨단과학의 업적들을 광범위하게 이용할 가능성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55)  그런데 이러한 이점은 “수출부문의 우선적 개발이 … 국제 노동분업에 실질적으로 속박되어 있었던 까닭에 전일적인 공업복합체의 창출과 개발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56) 그리하여 수출을 위하여 수입이 증대되는 구조가 성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출은 먼저 경쟁력이 있는 부문이었던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을 중심으로 증대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제2차 5개년 계획기간에 이 나라의 연평균 수출성장률이 40% 이상이나 증대된 가운데, 경제전체의 성장률은 9.2%였던 반면, 가공공업의 연평균 생산성장률은 18.2%에 달했다. 경공업발전의 결과인 반제품 및 생산수단에 대한 수요증대는 남한의 중공업발전을 촉발시켰다.”57) 이러한 과정은 한국의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데 “1961년에서 1973년의 기간에 GNP에서 차지하는 공업의 비율은 14.9%에서 29.4%로 성장한데 반해, 농림어업은 43.8%에서 22.8%로 감소되었다.”58) 이 과정에서 요구되는 자금은 차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남한정부는 외국차관자금을 분배함에 있어서 수출부문을 우대하였다.”59) 그러나 “외국자본의 대규모 반입이 수출경제 부문의 성장에 주요한 물질적 기반이 되었던 한, 수출주도형의 발전은 객관적으로 보아 서구의 제국주의 그룹에 대한 남한의 신식민지적 종속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귀착되었다.”60)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는데 각종의 수출신용과 자금의 분배, 주도적 산업부분의 개발에 대한 기획과 집행 등이 그러하다. 그리하여 한국 자본주의는 명실공히 국가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또한 50년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독점자본들은 60년대가 되면서 발전을 가속화했다. “1958년에 총공업생산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몫이 30.1%이고 총자본투자에서는 30.8%였던 반면, 1966년에는 각각 59.7%, 77.9%를 차지”61)하여 생산과 자본의 집적, 집중이 매우 높은 수준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남한에서의 독점화 과정 그 자체의 특징은 첫째로 그 과정이 제국주의 중심부의 현대적 독점구조와 비교하여 많이 뒤떨어진 기술ㆍ경제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 두 번째 그것은 아직 산업독점과 은행독점의 결합, 그리고 금융과두제 형성의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한에서 활동하는 독점자본의 상당부분이 다국적 기업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62)는 것이 한국에서 독점화 과정, 독점자본의 형성과 성장의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선진자본주의에 비해 매우 뒤떨어진 경제적 토대와 사회발전 단계에도 불구하고 독점화가 급속히 이루어진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1960년대에 한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적 독점들이 뒤떨어진 기술적, 경제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매우 높은 생산과 자본의 집적, 집중을 보여 주고 있고 또 국가가 경제의 전면에 나서서 사적 독점들을 떠받칠 뿐만 아니라 주요 생산부분을 국가 스스로 창출하는 모습 등은 전형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선진국과 같은 발전된 단계에서나 가능하다는 입장, 나아가 사회보장의 실시와 같은 지표가 나타나는 단계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입장(단계론)에서는 1960년대 한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을 부정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 독점자본의 지배적 위치가 존재하고 국가가 경제에 전면 개입하여 사적 독점의 이윤을 떠받치는 것이 국가독점자본주의라(경향론)고 본다면 60년대에 한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성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선진국과 달리 매우 낮은 기술수준, 경제적 토대에서 성립한 것이지만 이것이 예속자본주의로서 한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의 특징이라 파악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또한 한국에서 이러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은 신식민지적 예속의 심화속에서 발생한 것이고 그리고 그러한 예속의 심화를 통해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일본과의 굴욕적인 수교를 통해 일본자본의 유입을 끌어내고 한국 자본주의 전체가 수출주도 경제로 변신하면서 국제분업질서에 깊숙이 편입되고 이에 따라 제국주의 질서에 예속성이 심화되는 과정이 한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의 과정이었고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신식민지적 조건에서 성립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성립은 축적체제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고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착취질서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한에서는 고용노동력의 착취도가 비교적 높게 나타난다. 1960년에서 1970년의 기간에 노동생산성이 3배 이상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의 실질임금은 1.5배 증가했다.”63) 이는 예속적 조건 하에서 제국주의 자본의 이윤을 보장하면서도 한국의 예속독점자본들의 급속한 축적을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초과착취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종속의 구조와 착취의 구조의 관계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가 이렇게 수출주도 경제로 전환되면서 각 부문 간의 불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제2차 5개년 계획(1967-1971)에 있어서 대부분의 계획이 초과달성되었지만 농업에 대한 투자는 계획보다 낮았으며 그에 따라 농업생산 발전이 정체되는 사태가 나타났던 것이다.64) 이러한 불균형의 모습은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불균형은 경제성장 속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산업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높은 성장지표(특히 수출공업부문에서)의 계속적인 추구는 이 나라 경제의 주요 부문들의 발전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산업자체의 내부에서도 심각한 불균형과 그 발전 역학에서의 비합리적인 상호관계를 야기하였고 그 결과 남한 경제구조의 불균형은 이후 경제성장의 커다란 장애요소가 되었다.”65)

이러한 불균형의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는데 60년대에 성립한 수출주도 경제는 자체의 논리에 따라 발전한다. 70년대에 들어서 “남한의 수출품목보다 저렴한 상품들이 개발도상국들로부터 세계시장에 인입됨에 따라 이 나라 경공업 생산물의 경쟁력이 상실”66)되는 문제가 나타났고 나아가 74-75년의 석유가격의 급격한 인상과 세계공황의 상황에 처하여 한국 자본주의는 중공업 중심구조로의 전환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석유가 상승으로 인하여 선진국들이 기존의 중공업에서 에너지 절약형 산업, 첨단산업으로 이행하게 됨에 따라 한국이 국제분업체계에서 에너지 다소비형 중공업을 이전받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개의 부문이 전략적으로 육성되었는데 철강, 비철금속, 선박, 기계, 전자 및 화학산업이 그것이다. 이러한 산업의 형성과 육성에 필요한 자금은 국가주도의 신용에 의한 것이었는데 국내의 저축과 해외의 자금을 동원하여 충당되었다.

이러한 중공업중심으로의 전환은 국제분업체계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를 한 단계 상승시키는 것이었지만 국내시장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세계시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데 1979년에 재차 세계공황이 닥치자 한국 자본주의는 위기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1979년 5월 이후 무려 13개월 동안 생산감소가 지속되었고 다시 5월 수준으로 회복되기까지 20개월이나 소요되었다. …1980년 당시 주요 중화학공업의 가동률을 살펴보면, 제 1차 금속만이 74.8%로 제조업 평균 71.8%를 웃돌고 있을 뿐 기계 42.3%, 수송기기 44.05%, 전기기기 58.6%, 비철금속 62.0% 등 대부분 업종의 가동률이 극히 부진하여 생산과잉이 심각한 수준에 달하였음”67)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중공업중심 구조로의 전환이 파탄에 직면하면서 한국경제는 공황국면에 진입했고 이는 정치적 위기로 이어져 박정희가 살해되는 상황이 빚어지고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봄’을 맞게 되었다. 

 

3)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의 폭발과 이행의 시작

 

1979년 한국 자본주의가 공황에 진입하고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민주화의 봄이 시작되고 민중들이 정치적으로 진출하게 되는 상황은 1960년대에 성립하고 70년대에 발전을 거듭한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의 폭발이라 할 수 있다. 수출주도 경제의 빠른 발전은 수출부문과 내수부문의 단절이라는 불균형을 가져왔고 또 제조업의 발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업의 발전의 정체를 가져왔다. 또한 이는 자본주의 발전에서 독점자본의 급속한 축적에 비해 중소자본의 상대적 저성장을 고착화시켰고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 민중의 대립을 심화시키는 것이었다. 신식민지적 예속 하에서 독점자본의 급속한 발전은 제국주의 자본의 한국민중에 대한 수탈을 용인하고 그에 편승하면서 예속독점자본의 한국의 노동계급에 대한 초과착취, 민중들에 대한 수탈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계급대립이 유신체제에 대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가져왔던 것이고 이러한 운동에는 제도적 야당인 신민당 등 자유주의세력도 참가했고 이러한 계급대립의 심화 속에서 1979년 한국 자본주의가 공황에 진입하면서 YH여성노동자의 신민당사 농성 등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불이 붙고 부마항쟁이 발생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지배계급은 민주화의 봄을 용인하면서도 반동을 계획하고 끝내 전두환의 쿠데타가 발생하고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학살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한국 사회는 다시 반동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과 그에 대한 학살에서 드러났던 계급대립의 현실은 한국 사회의 운동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서 반제반파쇼 민족민주 변혁운동으로 성장ㆍ전화시키게 된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80년대는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의 폭발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공황국면의 타개의 문제가, 운동의 측면에서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평가와 운동의 질적인 변화의 모색이 지배적이게 된다.

80년대 한국 자본주의는 70년대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동시에 79년 공황에서 나타났던 한국경제의 취약성에 대한 대응이 초점이 된다. 이른바 경제안정화 정책이 실시되었는데 “1979년 5월의 투자조정에 이어 1980년 8월의 중공업 통폐합조치, 9월의 중화학공업 2차 투자조정 그리고 기업체질 강화대책, 자동차 공업투자조정계획, 석유화학공업 육성기본계획 등 중복과잉투자 문제를 국가의 강제적인 산업재편 정책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68) 또한 대규모의 자금지원이 이루어졌는데 “1980년부터 1983년 6월까지 3,221억 원 대출과 6.251억 원 지급보증 그리고 1,884억 원 투자를 합하면 모두 1조 1,357억 원의 자금지원이 이루어졌다. 이외에도 경영부실이 계속된 28개 기업에 대해서는 1981년 9월 1,988억 원의 시중은행 대출금에 대한 원리금 상환유예(3년)조치가 이루어졌다.”69) 이러한 공황구제 정책은 1986년까지 이어졌는데 “1986년 7월에 ‘공업발전법’, 12월 ‘조세감면 규제법’ 등의 법적 장치를 구체화하고 이를 근거로 투자조정의 대상이 되었던 업종을 합리화업종으로 지정하여 신규참여 배제와 제품별 전문화 등의 강권 조정이 이루어지게 되고 구조불황업종에 대해서는 자금지원에 나섰다.”70) 또한 “축적체제의 개편은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강제”되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노동입법의 개악을 통해 노동3권을 극도로 제한”했고 “‘사회정화’의 이름아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였다.”71)

이렇게 80년대 초,중반은 79년 공황에 따른 공황구제에 집중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공업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가일층의 탄압과 억압이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한국 자본주의의 취약성은 외채위기로 현상하였는데 외채규모가 80년대 중반 500억 달러에 달하여 세계 3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한 중대한 변수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85년 미국과 일본의 플라자 합의에 따른 달러가치의 하락과 저금리, 저유가라는 3저에 따른 호황국면으로의 진입이었다. “1986-88년의 3년 동안 매년 12-13%의 고성장을 달성함은 물론 대량 수출에 따른 국제수지 흑자로 경제개발과정에서 최대의 취약점으로 거론되어 왔던 국제수지 적자누적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였고 그 결과 대외채무도 급감하였다.”72) 이러한 상황의 결과 한국 자본주의는 국제적 분업체계에서 한 단계 상승하여 산업구조가 한층 고도화되는 단계로 접어든다. 경공업 중심에서 중공업과 전자산업 중심의 수출구조로의 전환이 이루어졌고 독점자본들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지는 가운데 이들 자본의 해외투자가 시도되는 단계가 된다. 즉, 자본수출이 가능하고 필요하게 될 정도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 단계 상승을 한 것이다. 이전까지의 한국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자본의 투자를 기초로 성장하는 체제였다면 이제는 거꾸로 자본수출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의 이러한 발전은 동시에 계급대립의 발전을 수반하는 것이었고 한국에서 사회운동은 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반제반파쇼의 변혁운동으로 발전한다. 87년의 6월 항쟁은 군사파쇼체제에 대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항거였고 이어지는 7, 8월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등장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지배계급은 파시즘 주도하의 개량정책을 펴고 운동의 체제내화에 주력한다. 그러나 운동은 지속적으로 성장하였고 한국에서 사회주의운동이 탄생하고 발전하는 상황까지 된다. 이에 대해 지배계급은 파시즘과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을 도모하였고 이는 1989년의 3당합당을 통한 민자당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련 등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은 한국의 운동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고 한국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운동의 쇠퇴를 조건으로 축적의 가속화의 길을 걷는다.

이리하여 8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는 79년 공황에서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모순의 폭발과 그에 대한 대응을 중심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3저 호황을 통한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 극복과 고도화에 따른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그러한 이행의 첫 번째 표지는 대외개방 압력의 증대였다. 미국이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에 대응하기 위해 3저 호황에 따른 막대한 무역흑자를 실현하고 있던 한국에 대해 대외개방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한국의 예속독점자본들은 대외개방의 불가피성의 인정, 대외개방 요구를 한국자본의 대외진출의 지렛대로 삼을 것 등을 전략으로 삼고 새로운 단계로의 이행에 진입하였다. 그리하여 상품수입자유화율이 “1979년 68.6%에서 1985년 87.7%로 높아지고, 1990년에는 다시 96.3%까지 높아지게 된다. 특히 1980년대 말에 이르면 보호의 당위성을 갖고 있던 농산물 시장까지 개방에 몰리게 된다.”73) 또한 “1988년 11월에는 IMF 제8조국으로 이행함으로써 국제수지 악화를 이유로 외환개입이나 특정국에 대한 차별적 조치가 불가능하게 되었다.”74) IMF 8조국에 가입은 이른바 외환자유화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는 한편으로 환율정책에 제한을 가한다는 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자본수출의 자유를 확대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신용시스템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는데 그때까지 신용체제를 국가가 주도했다면 80년대 들어 제2금융권이 확대되고 독점자본들의 제2금융권을 통한 자금조달이 확대되었다. 또 직접금융시장도 확대되는데 “기업부문의 외부자금 조달에서 직접금융(유가증권 발행 등)의 비중은 1975년 19.9%에서 1980년 22.0%, 1985년 26.2%에서 1990년 42.4%로 급증하여 직접금융이 간접금융을 넘어서게 된다.”75) 이러한 상황은 식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국가와 사적 독점의 관계가 기존의 국가주도에서 사적 독점자본 주도로 변화되는 토대가 되는 것이었고 이러한 독점자본들의 힘은 심지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현대그룹 정주영의 선거출마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를 통하여 한국 자본주의에서 이른바 ‘자유화’로의 이행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인데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파쇼적 통제에서 사적 독점 주도의 ‘자유화’로 한국 자본주의가 이행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자유화’의 흐름, 국가의 사적 독점에 대한 통제의 약화와 사적 독점의 주도성의 강화는 90년대 전반의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이었고 이러한 흐름은 금융자유화의 진전, 자본시장개방의 진전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90년대 금융자유화 추진과정에서 우선 정부는 경쟁제고가 금융시장에서 경제효율성을 높일 것이라 믿고 금융기관의 진입과 사업 범주에 대한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 그 결과 단기 상업어음할인이나 단기자금대출을 담당하던 수많은 단자회사(이후 종금사)가 상업은행 기능을 수행했다. 1994년에 9개, 1996년에 16개가 추가로 설립되었으며, 대다수가 재벌기업의 소유였다.”76) 또한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재벌기업 소유권 제한을 완화했는데 보험사, 투자신탁회사가 재벌기업의 통제 하에 편입되었다.77) 그리고 “1991년부터 1997년에 이르기까지 4단계에 걸쳐 이자율에 대한 규제도 완화되었다. …높은 이자율을 통한 금융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기업 외부자금 조달에서 CP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고(1992년 7.6%에서 1995년 16.1%로 증가) 단기금융상품이 금융거래의 큰 몫을 담당했다. 결국 한국 금융시장은 단기금융활동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높은 금융 리스크를 동반하게 되었다.”78) 이러한 금융자유화는 독점자본으로 하여금 신용상의 주도권을 허용한 결과 금융시장의 취약성이 증대되게 된 것이었고 이것은 97년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된다. 또한 “1993년 이후 OECD 가입을 희망하던 한국정부는 회원국 가입조건을 이행하기 위해 자본시장 개방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30대 재벌기업의 자금 조달에서 비금융기관을 통한 대외금융거래를 허용하고 촉진시켰다. 개방조치는 첫째, 국내기업과 금융기관에 의한 외국통화 표시 채권발행에 대한 규제 철폐, 둘째, 수출 관련 해외차입과 일반 상업차입 한도 확대, 셋째, 금융기관에 의한 외대대출에 대한 연간 상한 철폐 등이다.”79) 그리하여 “금융자유화의 결과, 1990년대 들어와 재벌기업들의 과도한 부채의존적 투자확대가 석유화학, 자동차, 전기ㆍ전자 부문에서 이루어졌다.”80) 이는 금융자유화로 인한 자금조달의 용이성으로 말미암아 부채의존 성장을 강화시켰다는 것이고 특히 자금조달에 있어서 단기금융을 장기투자에 쓰는 것이어서 문제가 증폭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금융자유화와 자본시장개방은 한국의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자본의 결합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투자영역규제의 폐지와 자본활동의 전반적 자유화는 국내의 지배적 자본과 외국 자본 양자의 이해가 결합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81) 이는 자본시장 개방의 결과 제국주의 자본과 국내 독점자본의 결합관계, 즉, 동맹관계가 고도화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동맹관계를 기초로 국내의 독점자본은 국내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 나아가 국내 독점자본의 해외시장 진출, 자본의 수출에 고도화를 기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자본주의는 80년대를 거치며 위기를 넘기고 3저호황 속에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의 독점자본은 국가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주도성을 획득하게 되고 금융자유화, 자본시장개방의 진전 속에서 축적의 고도화 나아가 초국적 자본화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87년 대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이 진출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실질임금이 상승하였다. “노동분배율을 보면 1980-1985년에는 53.9%, 1986-1988년에는 54.7%로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1989-1994년에는 한꺼번에 60.4%로 변화하였다.”82) 그러나 실질임금은 90년대 중반을 거치며 증가율이 다시 저조하게 변화하였고 한국 자본주의의 내수 주도의 성장은 90년대 초반에 그치고 만다. 농민을 보면 농업시장개방과 농산물 가격지지정책의 포기로 어려움에 처했고 그에 따라 80년대에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시장개방은 독점자본들의 수출시장 확대를 위해 국내농업을 희생하는 것이었다. “농가경제의 파탄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지표는 농가부채의 증가이다. 1980년 339억 원에 불과하던 농가부채는 1989년에는 3,899억 원으로서 10년 사이에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이러한 농가부채의 증가는 농산물 가격의 파동과 더불어 영농기계화라는 명목으로 추진된 각종 농기계의 외상 구입 장려 때문이었다.”83)

이렇게 90년대 축적구조는 독점자본 주도성의 강화와 이른바 ‘경제자유화’ 나아가 자본시장 개방 등이 진전되면서 독점자본의 축적의 고도화를 이루어갔고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자본의 관계가 자본시장 개방을 매개로 고도화 혹은 내밀화되어 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예속의 관계가 예속적 동맹으로 고도화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90년대는 7,80년대와 연속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수출부문 주도의 경제구조가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점, 노동자계급과 민중에 대한 초과착취와 수탈구조가 강화되고 있는 점, 부채의 증가에 기초한 투자의 급속한 확대 등이 그러하다. 특히 독점자본들이 해외로부터 종금사를 통해 단기자금을 끌어와서 장기투자를 행하는 상황이 90년대 중반 벌어졌는데 이는 수출이 급속히 확대되는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었고 일본의 엔화가 평가절하되면서 수출이 감소하고 무역적자가 확대되는 96년, 97년에는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4) 97년 외환위기와 한국 자본주의 축적구조의 변화

 

97년 외환위기는 94년도 멕시코 위기와 같이 해외자금이 급속히 빠져나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즉, 97년 위기는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구조의 내적 모순의 폭발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97년 위기를 낳은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구조의 모순은 무엇인가? 이러한 모순, 외환위기 발생의 원인은 크게 2가지이다. 먼저, 외환위기 전인 1994년과 1995년에는 엔고의 영향으로 수출이 급속하게 증대되었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구조는 수출증대를 위해서는 수입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1960년대 성립한 축적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94-95년에 수출증대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가 악화되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무역수지가 악화되는 것과 함께 무역외수지가 악화되었는데 “무역외 수지의 내역을 보면 해외여행 자유화, 소비의 고도화에 따라 1990년대 들어 급증한 여행수지, 대외자금의 도입 증가에 따른 투자수익수지, 산업고도화를 향한 기술도입 대가나 대외이자 지불의 증가에 따르는 운임, 보험 항목 등이 모두 적자로 돌아서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84) 이렇게 무역수지와 무역외 수지가 악화하는 가운데 “경상수지 적자는 1995년에 GDP 대비 1.94%였는데 1996년에는 5% 수준까지 한꺼번에 상승”85)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 당시와 크게 다른 점은 이미 경상거래의 대부분이 자유화된 현재 예전처럼 정부개입에 의해서 경상수지 불안을 억제할 수단이 없어졌다는 점이다.”86) 나아가 1996년 후반부터 엔저가 진행되어 한국의 수출이 크게 악화하고 무역적자가 급증하였다. 이 상황에서 철강부문의 한보, 삼미가 무너졌고 기아차도 파산에 몰렸고 내수의 위축을 반영하여 식품, 유통의 진로, 두산, 뉴코아 등이 파탄하였다. 그리하여 1997년 8월까지 30대 재벌 중 이미 7개 그룹의 경영이 파탄하거나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재벌들에 자금을 대었던 종금사들이 파탄하고 이들과 연계되어 있던 은행들을 위기에 몰아넣었다. 이렇게 수출의 위축으로 인한 무역적자, 경상적자의 상황에서 주요 재벌들이 무너지고 이들을 떠받치던 금융시스템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에서 한국의 원화가치가 폭락하면서 외환위기는 발생했던 것이다.

수출을 위해 수입을 증대하는 상황, 수출 확대에 따라서 단기금융으로 장기투자를 하는 상황이 엔화의 변동이라는 대외적 조건의 변동에 따라 위기를 불러왔던 것이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의 수출주도 구조의 취약성을 다시금 드러낸 것이었고 동시에 90년대의 경제 자유화, 금융자유화, 자본시장 개방이 위기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외환위기 상황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IMF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IMF는 긴축정책에 따른 거시 조정과 더불어 ① 금융ㆍ자본시장의 개방, ② 금융개혁, ③ 재벌개혁으로 이루어진 구조조정을 요구”87)하였고 김대중 정부는 이를 수용하여 이후 한국 자본주의는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먼저 대외개방을 보면 “외환관리에서 시장평균 환율제를 폐지하고 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 “무역정책에서 수입선 다변화 제도와 수입승인제는 폐지되었고 무역관련 보조금 역시 폐지했다. 자본자유화 조치로서 1997년 12월 주식시장에서 외국자본 지분비율을 50%로 확대한 후, 1998년 5월 외국인 주식투자의 회사별, 개인별 지분 제한 상한선을 모두 폐지했다…외환자유화도 급진전되었다. … 선물환 거래에 대한 실수요원칙의 폐지, 재무건전 기업에 대한 1년 단기 외화차입 허요, 기업의 대외영업 활동과 관련한 경상지급 제한 철폐, 기업ㆍ금융기관의 해외직접투자 및 해외부동산 취득자유화, 외국업무의 등록제 제한 및 환전상 설치의 자유화” 이루어졌고 “해외여행 경비제한 완화, 유학비 등 증여성 송금의 규제철폐, 4인 가족 기준 100만 달러인 해외이주비 규제 철폐” 등이 이루어져서 단기적 투기자본에 대한 보호장치가 완전히 해제되었다.88) 이로써 한국은 자본시장 개방을 완성했는데 이를 통해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한국에 진출, 나아가 국내 독점자본과 제국주의 자본의 예속적 동맹의 구조는 가일층 발전하게 되었고 은행과 주요 재벌에 대한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지분이 50%를 상회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또한 IMF 구조조정의 하나의 요구였던 재벌개혁은 용두사미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김대중 정권이 경제위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재벌총수들을 처벌하지 않고 구조조정과 경제회생주체의 역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재벌개혁의 중점이 경제독재체제를 본질로 하는 재벌의 기업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방향이 아니고 재벌의 경영행태를 합리화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즉, IMF의 재벌개혁안의 내용인 결합제무제표 작성, 상호지급보증의 해소 등은 기업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총수일족의 소유경영 독점구조를 그대로 둔 채 재벌경영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89)했기 때문이다. IMF는 재벌에 대해 단지 합리화를 요구했다는 것인데 이는 제국주의 금융자본의 입장에서 한국의 독점자본을 동맹세력으로 보고 동맹관계에 적합한 조건을 요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IMF와 김대중 정부의 재벌 정책은 경제력 집중을 오히려 가속화하는 것인데 이른바 삼성공화국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삼성자본의 압도적 지위가 IMF 외환위기 이후 두드러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재벌정책 때문인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적 집중을 구체적으로 보면 “국내제조업 매출에서 1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초로 40%를 초과했다. …30대 재벌의 매출액은 80%를 넘었다. …10대 재벌 계열사의 시가총액은 2011년 기준 52.2%를 차지했다. 30대 재벌의 자산규모비율은 2002년 53%에서 2010년에는 88%로 많이 증가했다. 이와같은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은 2009년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폐지, 금산분리 완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속화되었다.”90)

또 하나 IMF의 구조조정으로 형성된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구조의 주요한 특징의 하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정리해고제의 도입 등 노동관계의 개혁을 요구하는 IMF의 요구를 적극 수용했고 당시 한국의 노동운동은 노사정 위원회의 설립에 동의하고 정리해고제, 파견제 등 노동시장유연화 법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의 합법화와 맞바꾼 것이었는데 바로 이 지점이 한국에서 노동운동의 개량화, 체제내화를 결정지은 것이었고 이렇게 노동운동의 개량화를 조건으로 IMF이후 200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고 노동운동은 개량주의의 시대를 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자본가계급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를 심화시키는 것이었는데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50%를 넘게 되는 상황이 빚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직노동자의 개량화와 비정규직의 확대가 2000년대 착취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정규직의 확대는 소위 노동시장유연화를 통해 축적을 극대화하려는 자본의 요구에 기초하는 것이지만 계급적으로 보면 조직노동운동이 개량화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조직노동운동이 개량화되는 것은 한편으로 한국의 지배계급이 개량정책을 펼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쏘련 붕괴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운동이 쇠퇴한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이라는 주체적 조건과 지배계급의 개량의 여지의 축소라는 객관적 조건이 맞물릴 때 노동운동 전체의 변혁적 재건이 이루어지면서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IMF 위기 이후 투자의 축소를 겪었고 그에 따라 경제성장률이 90년대에 비해 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럼에도 수출시장으로서 중국의 성장이 한국의 수출주도 경제를 지탱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한국의 제 1의 수출시장이 되었고 이 상황이 2008년 세계대공황의 발발 전까지의 과정이었다.

 

5) 2008년 세계대공황의 발발과 한국 자본주의의 현 단계

 

2008년 미국에서 발발한 금융위기는 전 세계에 대공황을 일으켰다. 대공황은 2010년을 전후하여 유럽, 미국, 일본 등의 재정위기로 심화되었고 이후 중국,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신흥국의 위기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자본주의는 2008년에 위기를 맞았으나 중국경제가 투자의 확대를 기초로 위기를 극복하면서 그와 연동되어 수출이 증가하면서 일정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12년을 전후하여 세계무역증가율 자체가 축소되고 중국의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한국 자본주의는 다시금 위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더구나 중국에 부품 등 중간재를 수출하여 한국의 수출을 증대시키던 것이 중국경제의 급속한 고도화, 기술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수출이 감소 혹은 정체되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경제의 둔화 혹은 위기와 함께 한국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그리하여 2008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는 버팀목이 되었던 중국경제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제는 한국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존재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중국자본이 한국자본의 경쟁상대가 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경제의 위기의 심화에 연동되어 한국경제도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근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한국의 초국적기업이 위기에 몰리는 양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30대 재벌에서 10대 재벌로 구분의 기준이 달라지고 나아가 5대 재벌로 재벌의 기준이 바뀌다가 이제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양대 자본이 두드러지는 정도로 한국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집적, 집중이 고도화되었는데 그 자본들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고 이는 한국 자본주의 전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고도로 집적, 집중된 자본의 위기는 맑스가 언급한 자본주의 축적의 역사적 경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질곡이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91) 현재의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가 자본주의적 외피와 충돌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취득의 사적, 자본주의적 성격’간의 모순이다. 생산의 사회화 즉, 현대의 생산은 수많은 사람들의 협업과 분업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생산수단 자체가 이러한 협업과 분업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며 이렇게 생산의 사회적 성격, 공동노동의 성격이 발전함에도 취득은 여전히 사적 소유관계라는 점, 이 점이 자본주의의 모든 운동을 불러오는 원인이고 동력이라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의 의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러한 근본모순이 심화되어 지금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는 것이며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위기는 점점 더 많은 대중에게 이러한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의 한국적 현상을 알리면서 근본모순의 지양의 필연성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변혁적 재건에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조합주의, 개량주의, 실리주의라는 노동운동의 병폐를 씻어내고 전투적 노동운동을 재건하는 것,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 속에서 사회전체의 변혁적 전환, 한국 자본주의의 지양을 이루어내는 운동을 창출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커져가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사회주의 변혁의 물질적 조건은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다. 자본주의 발전이 이루어내는 생산의 사회화의 정도가 그러한 물질적 조건의 핵심이며 또 그러한 발전이 배태하는 계급대립이 물질적 조건을 주체적 조건으로 전화시키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이제는 사회주의 변혁의 물질적 조건의 성숙을 정치적 조건으로 전화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할 것이다.

 

 

4. 한국 사회의 계급구성

 

1) 맑스주의 계급론의 현재

 

쏘련 붕괴 후 사회주의운동이 퇴조하면서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도 사라졌다. 그리하여 사회를 계급적 질서로 보는 것, 사회의 발전을 계급적 대립의 발전으로 보는 관점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모순의 발전이며 자본주의 발전이 자본가계급을 발전시키는 것과 함께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발전시키며 따라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힘,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자, 계급대립 자체를 지양함을 통해서만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세력을 성장시킨다.

한국 자본주의는 예속자본가계급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이래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하면서 격렬한 계급대립의 역사를 거쳐 왔다. 4.19혁명, 79년 부마항쟁과 80년의 광주항쟁, 87년의 6월항쟁과 7, 8월 노동자대투쟁이 그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속적 자본가계급은 예속독점자본가로 우뚝 서면서 한국의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을 착취, 수탈해왔다. 중소자본가는 한국 자본주의가 예속적 자본주의로서 발전함에 따라 민족적 색채를 탈각하고 독점자본에 하청계열화되는 길을 걸어왔으며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예속적 독점자본가와 중소자본가의 동맹 체제가 성립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8, 90년대의 민족민주변혁에서 이제는 사회주의 변혁으로 변혁의 성격이 전화된 상태이다.

노동자계급은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수에 있어서 급팽창을 하였는데 이제는 임금노동자의 규모가 1,500만을 넘어서고 있다. 87년 7, 8월 투쟁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역사적 등장을 알린 노동자계급은 90년대에 민주노총으로 결집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사회주의운동의 퇴조에 따라 노동운동은 개량화의 길을 걸었고 그에 따라 자본가계급의 공격 앞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 착취되는 상태가 되었다.

농민은 자신들을 2등 국민으로 규정한다. 제국주의와 동맹을 축적의 조건으로 하는 한국 자본주의는 시장개방을 통해 농업을 희생하는 정책을 펴왔고 이는 농가부채의 증가, 농촌주민의 고령화, 식량자급율의 기록적인 저하 등 농업의 파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에 따라 한국농업은 어려움에 처해 있고 농업과 제조업의 불균형은 극에 달한 상태이다. 현재 농민의 규모는 300만을 약간 넘는 상태이고 대부분 중ㆍ소농, 빈농으로 구성되며 부농, 자본가적 농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따라 농촌에서 농업노동자의 존재는 미미하다.

도시 소부르주아지는 주로 영세상인, 자영업자를 말하는 것인데 한국의 경우 자본주의가 발전한 여타의 나라와 달리 자영업자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인데 그 수는 600만 내외를 기록하고 있다. 자영업자들의 이러한 팽창은 경기가 침체되는 상황,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 독점자본의 골목상권 진출 등으로 그들의 급속한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 자영업자의 절반이 3년내에 폐업하는 상황이 현실이다. 도시 소부르주아지 중 상층은 전문직업을 가진 층인데 이 수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팽창해왔다. 이들 상층 소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일정하게 민주주의적 색채를 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한국에서 계급적 질서의 대략적 내용인데 사회구성에 대한 이러한 계급적 접근은 맑스주의 진영 내에서 일정하게 논쟁이 되어왔다. 20세기 중반 자본주의가 호황을 구가할 때 광범하게 팽창한 화이트칼라, 관리직, 기술자 계층을 노동자계급으로 볼 것인지 소부르주아지로 볼 것인지가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 과정에서 맑스주의 계급론의 원칙이 무엇인지가 논쟁이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을 고찰하여 맑스주의 계급론의 원칙을 세우는 것을 기초로 한국 사회에 대한 계급분석에 접근하고자 한다.

먼저 계급이란 무엇인가가 규명되어야 한다. 영어의 class라는 단어는 계급과 계층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일반적 용어로는 이 둘이 구분되지 않고 있고 이론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주류 부르주아 사회학에서는 계급은 계층과 구분되지 않고 사회를 이루는 많은 집단들 중의 한 종류일 뿐이다. 현대의 주류 사회학은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발생, 발전기에 부르주아 학자들은 공공연히 계급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이는 두 갈래였는데 하나는 프랑스 혁명 후에 그 혁명의 과정을 분석하면서 계급의 존재, 계급대립이 프랑스 역사발전의 규정력이라는 것이 프랑스 역사가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다른 하나는 영국의 정치경제학자들인 아담 스미스, 리카르도 같은 학자들이 소득의 원천에 따라 지주계급, 자본가계급, 임금노동자계급으로 계급을 나눈 것이었다. 이는 중세의 신분질서가 부르주아 혁명을 거치며 계급질서로 대체되는 상황에서의 인식이었다. 맑스는 이에 대해 계급의 존재를 지적한 것은 자신이 처음이 아니며 자신이 한 것은 계급대립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어질 것임을 지적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맑스에 의해 이루어진 진보는 하나가 더 있는데 그것은 계급의 존재가 소득원천에 의해 규정된다기 보다 생산에서의 지위, 생산관계 속에서의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밝힌 것이었다. 이리하여 계급이라는 개념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성립된 것이었다.

20세기 중반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계급론 논쟁이 벌어졌는데 반독점전선을 주장하는 프랑스 공산당에게는 이 전선을 구성할 계급들에 대한 분석이 요청되고 있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플란차스는 프랑스 공산당의 계급분석과 구별되는 자신의 계급론을 제출했었다. 프랑스 맑스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레닌의 계급정의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적으로 규정된 사회적 생산체제 속에서 차지하는 지위,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 사회적 노동조직 속에서의 역할, 따라서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부의 몫을 수취하는 방법과 그 몫의 크기가 비슷한, 사람들의 커다란 집단을 가리킨다. 계급이란 일정한 구조, 즉 사회경제 속에서 차지하는 그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그 중의 한 쪽이 다른 쪽의 노동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92)(1919년의 문서 ‘위대한 출발’에서 인용) 이러한 레닌의 계급에 대한 정의는 20세기에 맑스주의자들의 계급에 대한 인식을 보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급에 대한 정의에 기초하여 계급의식에 대해 “계급의식과 계급이데올로기란 계급귀속을 규정하는 객관적 요소에 덧붙여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객관적 제요소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변증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 계급의식의 기본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구성요소, 그것은 계급투쟁이다”93)는 분석이 제출된다. 계급적 존재와 계급의식의 상호관계의 문제는 한두마디로 규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운동과 활동 전체는 계급적 존재와 계급의식의 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적 존재와 계급의식의 관계가 맑스주의 계급론의 주요지점이며 쟁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주요한 쟁점이 되는 것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관계이다. 이 점은 플란차스의 경우 기존의 이해와 다른데 기존의 견해, 20세기 맑스주의자들의 보편적 견해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전문화를 현저하게 진전시켰다. 그러나 그 반면에 대량의 노동자로 하여금 단순화되고 반복적이며 세분화된 노동만을 공급하게 했다. 정신적, 과학적 활동은 육체노동에서 분리되어 고립화되었다. … 오늘날 기술이 진보함에 산업에 있어서 복잡노동의 확대 및 비육체적 노동자의 증가,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구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모든 생산활동이 점차 사회화됨에 따라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새로운 통일이 한층 더 요청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객관적으로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 통일을 결코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 그러나 기본적으로 육체활동은 여전히 전체 생산과정의 지배적인 요소이다.”94) 이렇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강제되지만 한편으로 기술의 발전은 양자간의 통일의 조건을 만들어내며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그것을 실현시킬 수 없고 여전히 생산에서 지배적인 요소는 육체노동이라는 것이 위 견해의 요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의 진보에 현혹되어 비물질노동이 지배적이 된다는 소위 자율주의의 견해를 반박하는 것이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와 통일의 문제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맑스주의 계급론의 전통적인 요소로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 문제가 있다. 비생산적 노동자를 노동자계급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묻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정의에 대하여 맑스가 일찍이 ≪자본론≫에서 언급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지만 유통, 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경우도 생산적 노동이 창출한 잉여가치의 실현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사회전체적으로 잉여가치의 실현, 유통에 소요되는 노동을 감축하여 상업자본가가 산업자본가로부터 잉여가치를 취득하는데 기여하고 또한 상업자본가에게 잉여노동을 제공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95) 이것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생산노동과 비생산노동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잉여가치의 창조와 실현에 관련된 노동자는 크게 보아 노동자계급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또 지식인과 노동자계급의 관계가 계급론적 차원에서 언급될 수 있다. 특히 1968년의 68사태를 겪으며 지식인의 급속한 증가현상과 관련하여 “발전한 사회에서는 생산제도의 중추가 이미 대공업 안에 있지 않고 지식과 기술 측에 있다. 권력은 이제 부나 이윤의 축적이 아니라 지식의 축적과 관련되어 있다… 과학기술혁명은 지식인게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문화적 제력은 혁명의 동력으로 전화’할 것이라는 견해라는 식의 관념”96)이 유포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맑스주의자들은 “지식인의 대부분이 자본주의적 생산영역 외부에 있는데 대해 노동자계급은 대공업, 즉 현대 및 장래의 생산제력,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가장 현저하게 나타내고 있는 생산활동과 굳게 관련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은 그 성원 모두가 반드시 명확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본성 그 자체에 의해, 또 전면적으로 부르조아지와 대립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야말로 생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 자체로부터 자본주의적 착취를 누구보다도 직접 또 가혹하게 받고 있으며, 자연히 그 착취에 대해 최대의 결의로 싸우는 계급이다. …대공업과 결부된 노동자계급의 최대부분은 거대한 생산단위들의 심부에 대량으로 집결되어 있다. 연구센터, 거대한 대학센터의 비중이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고는 하나 대다수의 지식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97)는 견해를 제출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대체로 당시 프랑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론에 대한 견해이고 20세기 맑스주의자들의 보편적인 견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플란차스는 이러한 견해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플란차스의 견해는 먼저 다음과 같은 전제로 시작된다. “독점자본주의와 그 다양한 국면을 통해 비생산적 임금노동자들, 가령 상인, 은행원, 사무직, 서비스직 노동자들과 같이 이른바 화이트칼라나 제 3부문의 노동자라 불리는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마르크시즘 사회계급 이론과 계급투쟁 이론을 논박하려는 시도를 불러일으킨다.”98) 이들 새로운 임금소득집단에 대해 부르주아 계급으로 보거나 노동자계급으로 보는 견해 혹은 일부는 부르주아지 일부는 노동자계급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플란차스는 비판한다. 그러면서 플란차스는 이들을 전통적 쁘띠부르주아지와 구분되는 신쁘띠 부르주아지로 규정한다. “이들 새로운 임금소득 집단에 대한 특수한 문제가 아래 분석의 주요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신쁘띠부르주아지로 부를 것이다.”99) 이러한 플란차스의 인식은 계급의 개념 자체에 대해 기존의 견해와 인식을 달리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다. 플란차스는 다음과 같이 계급을 정의한다. “모든 사회계급의 구조적 결정은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관계에서의 위치를 포함한다. …이러한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관계는 쁘띠부르주아지의 (계급입장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구조적 계급결정에 개입한다.”100) 이러한 플란차스의 견해는 계급의 결정 즉, 계급의 존재의 결정에 의식의 요소가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의식의 요소를 강조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의식의 요소와 존재적 요소의 관계를 올바로 위치지우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존재, 계급적 존재 자체는 의식과는 무관하게 생산에서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이 객관적 현실이며 의식의 요소는 그러한 존재가 계급적 연대를 이루고 계급투쟁의 주체로 나서게 하는 문제인 것이다.

플란차스는 이들 새로운 임금소득집단을 신쁘띠부르주아지라 부르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서 ‘신(新)’이란 접두어는 소멸의 위협을 받고 있는 전통적 쁘띠부르주아지와 달리 자본주의 그 자체의 확대재생산에 의해, 또한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이행에 의해 발전하고 팽창하도록 조건지워진다는 의미이다.”101) 여기서 올바른 것은 이들 새로운 임금소득집단 즉, 화이트칼라, 기술자 등은 전통적인 쁘띠부르주아지인 소생산자, 자영업자 등이 몰락의 길을 걸을 운명인데 반하여 현대자본주의에 의해 산출되고 팽창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을 노동자계급이 아닌 쁘띠부르주아지로 규정할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보강하기 위해 플란차스는 생산적 노동의 개념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의 문제로 나아간다. 플란차스는 화이트칼라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 엔지니어와 기술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엔지니어와 기술자는 자본주의 생산적 노동의 부분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직접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자본을 안정화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노동계급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회적 분업 내 위치에 있어 그들이 노동계급의 자본에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종속관계를 유지시키고(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할) 계급결정의 이러한 측면이 그들에게는 지배적이기 때문이다.”102) 이러한 플란차스의 견해는 생산적 노동에 대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가 여부를 기준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옳지만 계급결정의 문제에서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관계가 지배적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자본가에게 잉여가치를 착취당하는 존재가 엔지니어로서 정신노동을 한다고 노동자계급이 아니라는 것은 주관적 요소가 계급적 존재를 결정한다는 것으로서 맑스주의적 계급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더구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의 책임이 자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엔지니어에게 있는 듯이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이렇게 계급의 존재를 의식의 요소, 주관적 요소를 기준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그리하여 플란차스도 수입이라는 지표에 의해 계급결정을 보강하려 한다. “이러한 계급경계의 존재는 일련의 중요한 지표에 의해 입증되는데, 무엇보다 수입이라는 지표에 의해 가장 잘 드러난다. 노동계급 내에는 임금 차별성이 존재한다. 노동계급 내의 임금 등급과는 별도로 숙련노동자 중 가장 많이 임금을 받는 자와 기술자 중 가장 적게 받는 자 사이에는 상당한 임금격차가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개인기업과 국영기업에 고용된 종업원의 1969년 연평균소득을 살펴보면 미숙련노동자는 8,854프랑, 반숙련노동자는 10,467프랑, 숙련노동자는 13,116프랑, 감독직 근로자 20,667프랑, 기술자는 22,271프랑, 엔지니어는 45,756프랑이다.”103) 이러한 플란차스의 접근은 옹색한 것이다. 임금격차가 있다고 하고 심지어 엔지니어가 감독직 보다 높은 임금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엔지니어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이러한 현상 즉, 과거에 자본가계급에 속했던 기능들이 임금노동자에 의해 수행되는 현상, 그리고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화이트 칼라가 늘어나는 현상은 노동자계급의 폭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육체노동을 하는 소부르주아지가 몰락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들어오듯이 정신노동의 상당부분도 임금노동자에 의해 수행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고 이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이 확대된다는 법칙이 관철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단 그들 새로 나타나고 편입되는 대열의 상당부분은 소부르주아 의식을 갖고 있는 경향이 있지만 의식과 존재는 차원이 다른 것이고 그들의 계급적 존재는 노동자계급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플란차스가 20세기 중반 급팽창하는 화이트칼라 노동자 대열에 대해 신쁘띠부르주아지로 보는 것은 그들의 의식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생산관계에서의 위치에 의해 계급적 존재가 결정된다는 맑스주의의 원칙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예속독점자본가 계급

 

한국의 명실상부한 지배계급은 독점자본가계급이다. 흔히 재벌로 불리는 이들은 한국 사회의 발전방향을 규정하고 있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민중에 대한 수탈을 통해 한국 사회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 독점자본가 계급 중 상당수는 현재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하고 있고 일부는 제국주의 자본과 대등한 경쟁을 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97년 외환위기는 이른바 신자유주의적인 ‘합리화’에 의해 이들 독점자본가들 간의 분화를 비약적으로 증대시켰고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더니 이제는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라는 2개의 자본이 한국경제 전체를 좌지우지 하는 상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들 독점자본은 공식적으로 한국에서 공정거래법상 대기업집단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들이 통칭 재벌로 불리는 것이다. 이들 독점자본의 매출액은 현재 한국경제 전체의 8-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의 재벌이 다른 나라의 독점자본과 구별되는 것은 이른바 재벌체제라는 것인데 재벌총수의 존재와 영향력, 그리고 사업의 다각화, 상호보증과 출자에 의한 연결망 등이 재벌체제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독점자본의 존재방식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최초에는 카르텔의 형식이었다. 카르텔은 주요기업간에 협정을 통해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회원기업들 사이의 단순한 협정체로부터 회원 기업들의 상업적 독립성을 제거한 상업적 단일체로 전환한 카르텔을 신디케이트”104)라 불렀다. 또한 이들과 달리 아예 기업의 독립성을 제거하고 합병한 것을 가리켜 트러스트라 불렀다. 한국의 재벌은 이러한 독점자본의 카르텔적 성격과 트러스트적 성격을 일부분씩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재벌체제가 유지된 것은 한국의 경제성장 속도가 빨랐고 재벌체제가 이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총수라는 단일한 의사결정구조, 자금동원의 집중력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재벌체제는 국가독점자본주의 하에서 국가에 의한 신용동원에 주요하게 근거한 것이었고 현재는 한국의 은행체제가 이들을 떠받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독점자본가계급은 한국의 경우 미-일 등 제국주의와 예속적 동맹 속에서 축적의 확대를 도모해왔다. 이들 독점자본가계급이 탄생한 195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의 출발 자체가 예속적 자본주의로서 시작된 것이었고 원조-차관 등이 이들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7, 80년대를 거치며 비약적으로 성장한 이들은 이제는 초국적 자본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이들 자체의 힘만으로는 초국적 자본으로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제국주의 특히 미국과의 예속적 동맹의 힘을 바탕으로 이들이 초국적 자본으로서 세계시장에 진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으로서 예속성은 원조-차관 등의 저차적 단계에서 예속적 동맹이라는 고차적 단계로 상승해왔고(한-미 FTA는 이를 집약적으로 표현한다) 이 구조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방향을 규정하는 규정력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3) 중소자본가 계급

 

한국에서 중소자본가계급은 80년대까지 반파쇼 블록에 가담했었다. 김대중, 김영삼 등의 자유주의세력이 이들 중소자본가계급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소자본가계급은 박정희가 주도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방향, 예속적 자본주의로서 재벌 중심의 수출주도경제에 반발했었다. 왜냐하면 신용의 배분 등 자본가로서 축적의 조건에서 소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일정부분은 민족부르주아지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이들 중소자본가들의 존재를 변화시켰다. 즉, 이들 중소자본가 대부분은 이제는 독점자본에 하청계열화가 된 상태이다. “2005년 기준 중소기업 매출액의 85.1%가 하도급거래 관계 속에서 위탁기업의 주문을 받아 생산했으며, 중소기업의 63.1%가 하도급 기업이고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는 독립 중소기업은 31.2%에 불과하다.”105) 이렇게 중소기업가의 존재가 예속적 독점자본인 재벌에 종속된 상태로 변하면서 중소자본의 민족적 색채는 탈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중소자본의 존재의 변화는 정치적으로도 반영되었는데 8, 90년대 김대중과 김영삼이 파시즘 세력과 연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중소자본의 존재의 변화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독일과 같은 강소기업, 중견기업을 꿈꾼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체제에서 예속독점가계급의 규정력을 생각한다면 하청계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계급이 여전히 한국에서 자유주의적 경향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레닌에 따를 때 독점은 ‘자유가 아닌 지배’를 원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허약성을 보여 주는 것인데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주요 정치세력으로 군림하는 것은 운동의 체제내화에 기초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에서 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발전은 이들 자유주의경향의 극복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4) 노동자계급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다. 이에 대해서 맑스는 고전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적으로 소유된 사유재산은 부자로서 ‘스스로’를 유지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그 대립물인 프롤레타리아트를 ‘존속’시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모순의 ‘적극적’ 측면, 즉, 자기충족적인 사유재산이다. 한편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 자기 자신과 그 대립물, 또한 자신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드는 생존조건, 즉 사유재산을 철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모순의 ‘부정적’ 측면으로서 바로 그 자체 내의 불안정성, 즉 해체되는 동시에 자기해체적인 사유재산이다.”106) 이러한 맑스의 언급은 노동자계급이 해체로서 사유재산이라는 것, 즉, 사유재산의 부정태이며 그런 점에서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는 세력으로서 자신의 본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즉, 무산자로서 노동자계급의 본성은 스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대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립 자체, 계급의 철폐를 이룰 수밖에 없는 계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자계급의 발전과 일치하는 것이며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 자신의 발전을 이루고 자본주의 자체의 지양을 준비해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비약적인 성장을 해왔다. 그 수에 있어서 1800만여 명에 달하고 있고 교육수준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이다. 20세기 초중반의 노동자들이 대부분 문맹이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단결의 정도에 있어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대중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민주노총, 전교조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또 80년대 운동의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부대로서 사회주의 전위조직운동의 역사가 있고 90년대 이후에는 합법적인 진보정당운동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의 쇠퇴에 따라 노동운동이 개량화되면서 외환위기 이후 자본가계급의 공세 속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계약직, 파견직, 사내하청, 특수고용 등의 고용형태 속에서 강도 높은 착취에 시달리고 있고 끊임없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규직노동자의 경우 8, 90년대 노동운동의 성과를 일정하게 향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조합주의, 개량주의, 실리주의가 지배적이 되면서 대(對)자본 관계에서 밀리는 형국이라 할 수 있고 경제위기 국면에서 정리해고의 위협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청년노동자의 경우 청년실업으로 고통받고 있는데 88만원 세대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착취의 강도가 높고 연애, 결혼, 출산의 포기를 말하는 3포 세대라는 용어가 말하듯이 실업, 빈곤,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의 경제위기 상황은 실질임금을 하락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계급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5) 농민

 

한국에서 농민의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이제는 300만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고령화되어 농업의 위기가 조장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체제가 농업을 희생시키는 것을 기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농가부채, 저조한 식량자급률은 농민과 농업의 파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업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미미하며 그에 따라 농업노동자계급의 수도 미미하다. 그리하여 농민의 대다수는 소농과 빈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업의 가치는 소위 GDP 산출액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농업은 생명과 자연을 재생산하는 본질적인 가치를 가치고 있는 것이며 예속경제가 아닌 자주적 경제에 있어서 필수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운동은 80년대 맹렬하게 사회적 진출을 이루었고 토지를 농민에게! 등의 구호를 제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운동 전체가 개량주의로 흐르면서 농민운동은 위축되었고 민주노동당과 연합한 전농의 경우 신자유주의 농정을 비판하면서도 농업에 대한 개량주의적 정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시장관계에서 독립된 농업이라는 꿈은 공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농민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중요한 동맹세력으로 파악해야 한다. 이는 농민의 수의 측면보다는 사회전체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이며 그것은 부르주아적으로 평가된 농업의 가치가 아닌 민중적으로 평가된 농업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대부분 빈농과 중,소농으로 구성된 농민은 한국 자본주의의 변혁적 전환에 참가할 수 있고 새로운 사회건설의 중요한 주체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6) 도시 소부르주아지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농민의 소생산과 영역을 달리하여 도시에서 소부르주아지가 광범하게 출현하였다. 주로 영세상인, 자영업자로 불리는 이들 도시 소부르주아지는 한국의 경우 그 규모가 매우 크다. 600만 명 내외의 이러한 자영업자 규모는 경기의 부침에 따라 달라진다. 영세상인들인 이들의 사회적 처지는 지난 용산참사가 잘 말해준다. 이들은 생존의 벼랑에 서있는 존재들이며 경기가 좋아지면 노동자로 전환될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 절반은 3년 내에 폐업에 몰리고 자신의 임금이라도 건지면 다행인 처지이다. 이들은 한국 자본주의의 변방에 있는 존재들로서 사회주의 변혁에 있어서 견인하여 동맹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영세상업을 협동조합화한다는 대안을 제시하면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영세상인 이외에 소수의 상층 소부르주아지가 있다. 주로 전문직 종사자들인 이들은 자본주의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부르주아지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며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사회주의 변혁의 관계에서 본다면 중립화대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 결론

 

한국 사회는 세계대공황의 상황과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깊어지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세계대공황은 세계질서를 변동시키고 있는데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부상과 그에 대한 미-일 동맹의 대립이 주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사회는 박근혜 정권의 파쇼적 폭압에 직면해 있는데 최근에는 새정치연합 등 자유주의세력이 박근혜와 연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박근혜 정권의 반동적 공세를 물리치는 주체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이 중심이 되는 진보민중진영일 수밖에 없고 박근혜 정권에 비타협적으로 맞서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재건하는 길을 가야 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은 이미 농익을 대로 익었고 사회주의 변혁의 물질적 조건은 성숙하였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취득의 사적, 자본주의적 성격 간의 모순은 강렬하게 한국 사회에 표출되고 있고 이러한 토대를 이제는 정치적 주체의 성립으로 모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의 차이는 의식성의 정도의 차이이며 결정적으로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의식적인 자신의 핵으로 하는가 여부에 따른 것이다. 쏘련 붕괴 뒤 사회주의 운동의 퇴조는 운동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성의 퇴조를 불러왔고 운동은 의식성의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즉자적 운동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에서 의식성의 부족은 운동에 있어서 노선의 부재를 말하며 그에 따라 현재 정파 간의 차이는 노선의 측면보다는 써클적 차이로 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주체의 변화, 변혁운동의 재건, 사회주의운동의 재건을 내세워야 하며 그를 통해 노동운동을 재건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사회구성체 논쟁의 재평가와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세우는 것은 운동의 의식적 재건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다. 변혁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실을 파악하고 변혁의 대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획득하는 것은 운동의 재건의 첫걸음이다.

 


 

1) 박현채, 조희연 편,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 I≫, 죽산, p. 182.

 

2) 같은 책, p. 185.

3) 같은 책, p. 186.

4) 같은 책, p. 199.

5) 같은 책, pp. 230-231.

6) 같은 책, p. 210.

7) 같은 책, p. 212.

8) 같은 책, p. 225.

9) 같은 책, p. 227.

 

10) 같은 책, p. 233.

11) 같은 책, p. 245.

12) 같은 책, p. 354.

13) 같은 책, p. 355.

14) 같은 책, p. 358.

15) 같은 책, p. 360.

16) 같은 곳.

17) 같은 책, p. 361.

18) 같은 책, pp. 362-363.

19) 같은 책, p. 367.

20) 같은 곳.

21) 같은 책, p. 368.

 

22) 편집부 엮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논쟁 I≫, 벼리, pp. 14-15.

 

23) 같은 책, p. 23.

24) 같은 책, p. 24.

25) 같은 책, p. 26.

26) 같은 책, p. 28.

 

27) 박현채, 조희연 편,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 III≫, p. 178.

 

28) 같은 책, p. 179.

29) 같은 책, pp. 181-182.

30) 같은 책, p. 182.

31) 같은 책, p. 184.

32) 같은 책, p. 194.

33) 같은 책, p. 196.

34) 같은 책, p. 200.

35) 같은 책, p. 201.

36) 같은 책, p. 202.

37) 같은 책, p. 206.

38) 같은 책, pp. 286-287.

39) 같은 책, p. 288.

40) 같은 책, pp. 289-290.

41) 같은 책, p. 362.

42) 같은 책, p. 364.

43) 같은 책, pp. 364-366.

 

44) 석혜원, ≪대한민국 경제사≫, 미래의 창, p. 25.

 

45) 같은 책, pp. 27-28.

 

46) S. S. 수슬리나, ≪남한 경제론≫, 솔밭, p. 18.

 

47) 같은 책, p. 21.

48) 같은 책, p. 24.

49) 같은 곳.

 

50) 김윤태, ≪한국의 재벌과 발전국가≫, 한울, p. 133.

 

51) 석혜원, 앞의 책, p. 36.

 

52) S. S. 수슬리나, 앞의 책, pp. 24-25.

 

53) 같은 책, p. 27.

54) 같은 책, p. 31.

55) 같은 책, p. 32.

56) 같은 곳.

57) 같은 책, p. 36.

58) 같은 책, p. 35.

59) 같은 책, p. 34.

60) 같은 책, p. 35.

61) 같은 책, p. 59.

62) 같은 책, p. 113.

63) 같은 책, p. 129.

64) 같은 책, p. 42.

65) 같은 책, p. 126.

66) 같은 책, p. 45.

 

67) 김진업, ≪한국 자본주의 발전모델의 형성과 해체≫, 나눔의 집, p. 167.

 

68) 같은 책, pp. 168-169.

69) 같은 책, p. 169.

70) 같은 책, p. 170.

71) 같은 책, p. 171.

72) 같은 책, p. 174.

73) 같은 책, p. 176.

 

74) 후카가와 유키코, ≪대전환기의 한국경제≫, 나남출판, p. 88.

 

75) 김진업, 앞의 책, p. 178.

 

76)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체제 변화: 1987-2003≫, 한울 아카데미, p. 178.

 

77) 같은 곳.

78) 같은 책, pp. 178-179.

79) 같은 책, p. 179.

80) 같은 곳.

 

81) 김진업, 앞의 책, p. 201.

 

82) 후카가와 유키코, 앞의 책, p. 96.

 

83) 김진업, 앞의 책, p. 187.

 

84) 후카가와 유키코, 앞의 책, p. 104.

 

85) 같은 곳.

86) 같은 곳.

87) 같은 책, p. 370.

 

88) 경상대 사회과학원, 앞의 책, p. 103.

 

89) 같은 책, p. 99.

 

90) 김윤태, 앞의 책, pp. 158-159.

 

91) 맑스, ≪자본론 I(하)≫, 비봉출판사, p. 959.

 

92) 나델ㆍ플란차스 외, ≪사회계급론≫, 백산서당, p. 101에서 재인용.

 

93) 같은 책, p. 103.

94) 같은 책, pp. 109-110.

 

95) 맑스, ≪자본론 II≫, 비봉출판사, pp. 147-149.

 

96) 같은 책, p. 137.

97) 같은 책, pp. 137-138.

98) 같은 책, p. 190.

99) 같은 책, p. 201.

 

100) 같은 책, p. 204.

101) 같은 책, p. 205.

102) 같은 책, p. 237.

103) 같은 책, p. 241.

 

104) 루돌프 힐퍼딩, ≪금융자본≫, 새날, p. 289.

 

105) 김윤태, 앞의 책, p. 159.

 

106) 나델ㆍ플란차스 외, 앞의 책, 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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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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