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 (하)

 

채만수 | 노사과연 소장

 

 

[독자들에게] 지난 호의 주제는 “러시아 혁명과 좌익공산주의 (계속)”이었고, “…는 조금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자”며 일단 글을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염치 불구하고 여기에서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논의하기로 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데에 대해서. 지난 번 글이 너무 짧고, 아무리 연재라 하더라도 사실상 중단해서는 안 될 곳에서 중단하고 있는 데에서, 혹시 이미 짐작하신 독자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주요 이유는 현재 저의 체력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읽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고통일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글을, 더구나 장황한 그것을 오로지 비판만을 위해서 두 번 세 번 분석적으로 다시 읽고 다시 읽으며 글을 작성한다는 것을 지금의 저의 체력ㆍ건강이 도무지 허용하지 않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비판만으로도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이 얼마나 자가당착적이고 터무니없는 것인가가 명백하기 때문에 여기서 중단해버려도 결정적 과오는 아니지 않나 생각합니다만, 저들이 저들 나름의 ‘적극적인 서술 방식’으로 쏘련 경제, 쏘련 사회의 ‘본질’을 논하고 있는 제4부에 대한 평가ㆍ비판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는 주위의 강력한 지적도 있고, 또 어떤 식으로든 글의 결말을 짓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번 호에서 저들의 ‘쏘련=국가자본주의’론의 본론 및 결론으로서의 이른바 ‘가치의 불구화론’을 간략히 비판하는 것으로 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 글의 뒷부분에서 여러분은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저 기상천외한 소위 ‘가치(와 사용가치)의 불구화’ 이론을 들어 어떻게 수정주의의 도입ㆍ만연으로 발생했던 후기(後期) 쏘련의 병리현상들을 이념형으로서의 쏘련, 즉 저들의 소위 ‘스딸린주의’ 쏘련의 탓으로 돌리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초좌익적 언사를 일삼는 저들이 시장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진하게, 그러나 부정직하고 은밀하게 고백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체력이 닿는 대로 지금 지키지 못하는 약속을 지키고 싶지만, 기약할 수는 없군요. 거듭 양해를 구합니다.

 

 

IV. 불구화된 정신의 ‘가치의 불구화론’1)

 

우리가 지금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책, ≪소련은 무엇이었나≫의 보다 완전한 제목은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소련은 무엇이었나: 소련 사회 붕괴와 해체에 대한 분석≫이라고 ‘번역’하고 계시지만― 원래는 ≪소련은 무엇이었나: 국가자본주의 하에서의 가치의 불구화 이론을 위하여(What was the USSR? Towards a Theory of the Deformation of Value under State Capitalism)≫이다. 그리고 쏘련의 “본질(nature)”에 관한 저들의 마지막 논문, 혹은, 자신들의 표현대로, “무용담(saga)”2)의 마지막 제4부의 제목은 “가치의 불구화 이론을 위하여(Towards a Theory of the Deformation of Value)”이다. 제1부로부터 제3부에 이르기까지의 장황한 헛소리(saga)는, 말하자면, 본론으로서의 이 제4부를 위한 예비 작업, 그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예비 작업이었던 셈이다.

저들의 결론적 주장인즉슨, “쏘련은 실제로는 국가자본주의 체제, 다만 거기에서는 가치법칙이 불구화되어 있었던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the Soviet Union was in fact a state capitalist system but where the law of value was deformed)”는 것인데, ‘가치법칙이 불구화되어 있는 자본주의’라는 저들의 참으로 기상천외한 사설(邪說)을 들어보자.3)

 

쏘련 사회의 모순적 두 양상?

 

저들은 “쏘련의 본질을 규정하는 데에서의 문제는 그것이 두 개의 모순적 양상들(aspects)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라면서, 그 첫 번째 양상을 이렇게 얘기한다.

 

한편에서는, 보건대, 쏘련은 분명 현존하는 서방(the West) 자본주의 사회들의 그것들과 현저하게 유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컨대, 쏘련 주민의 거대 다수는 임금노동에 그 생계를 의존하고 있었다. 스딸린 치하의 급속한 산업화와 강제적 농업 집산화는 전통적 공동체들을 해체하고, 원자화된 개인들과 가족들로 구성된 대중산업사회를 등장시켰다(Rapid industrialisation and forced collectivisation of agriculture under Stalin had led to the break up of traditional communities and the emergence of a mass industrialised society made up of atomised individuals and families).4) 한편 경제체제의 최우선적 목표는 경제성장의 극대화였다.

우선, “쏘련 주민의 거대 다수는 임금노동에 그 생계를 의존하고 있었다”든가 “스딸린 치하의 급속한 산업화와 강제적 농업 집산화는 전통적 공동체들을 해체하고, 원자화된 개인들과 가족들로 구성된 대중산업사회를 등장시켰다” 등등은 쏘련이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하는 자들로서야 응당 할 수 있는 주장이다. 다만, 물론 자신들의 주장을 사실과 논리로서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쏘련 주민의 거대 다수가 임금노동에 그 생계를 의존했다는 주장을,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리고 앞으로 다시 보게 되듯이, 저들은 입증할 수 없고, 특히 쏘련 사회가 “원자화된 개인들과 가족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데에 대해서는 저들은 어디에서도 그것을 입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저들은 거꾸로 쏘련에서는 노동자ㆍ인민이 결코 원자화되어 있지 않았고, 저들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스딸린 [시대: 인용자]이래 정치적ㆍ사회적 결속(dohesion)을 유지”해왔다고5)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좌익공산주의자들답게 그저 ‘원자화되었다’고 선언하여 중상ㆍ매도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체제의 최우선적 목표는 경제성장의 극대화였다”는 주장 역시 저들로서는 의당당한 그것이다. 아니, “이윤의 극대화였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괴이하다고 할까?

그건 그렇고, 여기에서 놓치지 않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저들이, “보건대, 쏘련은 분명 현존하는 서방(the West) 자본주의 사회들의 그것들과 똑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보건대, 쏘련은 분명 현존하는 서방(the West) 자본주의 사회들의 그것들과 현저하게 유사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쏘련 사회의 특징들이 서방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들과 ‘똑같을’ 경우 쏘련은 분명 자본주의 사회일 터임에 비해서, 단지 ‘현저하게 유사할’ 경우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현저하게 유사한 사회일지는 몰라도 분명 자본주의 사회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저들도 물론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또 그 때문에 저들은 쏘련을, ‘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는 대신에, 온갖 요설(妖說)과 사설(邪說)을 동원하여 자본주의 사회 일반과는 다른 ‘국가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어떤 요설과 사설을 다 동원하더라도 쏘련이 서방과 같은 사회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쏘련을 자본주의 일반이 아닌 ‘국가 자본주의’, 즉 ‘가치법칙이 불구화되어 있는 자본주의’로 규정하더라도 순진한 대중은 ‘쏘련=자본주의’로 받아들일 터이고, 그리하여 사회주의로 전진하려는 노동자들을 반쏘주의로 유도하여 실천적으로 반공주의로 내몰려는 자신들의 음흉한 의도가 관철되는 데에는 아무런 차질이 없을 터이니까!

아무튼 저들은 두 개의 모순적 양상들 중 두 번째 양상을 이렇게 얘기한다.

 

다른 한편에서, 쏘련은 맑스가 분석했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는 현격하게 달랐다. 쏘련 경제는 시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조절되는, 경쟁하는 사적 소유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모든 주요 생산수단은 국가소유였고, 그 경제는 중앙집중화된 계획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조절되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날카로운 분화(分化)가 없었고, 가족과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한 시민사회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경제성장은, 이윤 동기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가와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킬 사용가치의 양(量)을 확대시킬 필요에 의해서 추동되었다. (강조는 인용자)

 

쏘련 경제는 … 경쟁하는 사적 소유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모든 주요 생산수단은 국가소유였고, 그 경제는 중앙집중화된 계획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조절되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날카로운 분화(分化)가 없었고, … 경제성장은, 이윤 동기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가와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킬 사용가치의 양(量)을 확대시킬 필요에 의해서 추동되었다.”!!! ―― 강조하고 또 강조하건대, 이것은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 자신의 서술, 저들 과익공산주의자들 자신의, 보다시피, 정언적(定言的) 서술이다! 저들이 정언적으로 증언하는 사실들이다!

그렇다면, 즉 쏘련 경제가 저들이 정언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대로의 그것이었다면, 쏘련은 어떤 사회였을까?

적어도, 절대로 자본주의 사회는 아니었을 것이다. 절대로 어떤 형태,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었을 것이다. ― 이것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 정상적인 사람들의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거듭 말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쏘련 경제, 쏘련 사회는 어떻게 해서든 그 ‘본질’이 자본주의라고 규정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저들 특유의 요설(妖說), 특유의 수작이 시작된다. 이렇게,

 

그 결과, 쏘련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였다는 이론은 어떤 이론이나 쏘련의 이 모순적 외관(appearance)을 설명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이 모순적 외관(appearance)을 설명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자, 보라! 바로 앞에서는 정언적 사실들이었던 것이 어느덧 “외관(appearance)”으로 둔갑해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이 모순적 외관을 설명”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이렇게 쓰고 있다.

 

첫째로, 쏘련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나타난 지배적 사회관계들이 어떻게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이었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 이론은 쏘련의 가치분석(value-analysis of the Soviet Union)6)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그것은 어떻게 이들 사회적 관계가, 쏘련의 명확히 자본주의적인 특징들 속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분명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쏘련의 특징들에도 나타났는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저들이 미쳐 짖고 있는 바는 결국, 어떤 경제가 “경쟁하는 사적 소유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그와는 반대로, 모든 주요 생산수단은 국가소유”이고, “그 경제는 중앙집중화된 계획을 통해서 의식적으로 조절”된다하더라도, “그 결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날카로운 분화(分化)가 없”고, … “경제성장은, 이윤 동기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가와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킬 사용가치의 양(量)을 확대시킬 필요에 의해서 추동”된다 하더라도, 그 “지배적 사회관계들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인 경제, 그러한 사회, 그러한 국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며, 쏘련이 바로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이 입증하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참으로 가관(可觀)이다!

그러면 저들은 그것을 어떻게 입증하는가?

 

쏘련의 자본주의적 본질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도 ‘시장의 무정부성’도 없는 자본주의

 

우선 저들은 사실상 자신들 이전의 ‘쏘련 국가자본주의론’이 전혀 설득력이 없었음을 특유의 부정직한 서술방식으로 인정한다. 이렇게,

 

… 러시아 혁명 이후, 쏘련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게 된, 공산주의 좌익(Communist Left)으로부터 등장한 수많은 이론들이 있었다. 이들 초기 이론들의 대부분은 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계급적 본질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쏘비에뜨 체제의 가치분석을 발전시키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쏘련은 자본주의의 한 형태라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이론이 러시아 혁명의 계급적 본질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고, 쏘련 사회에서의 가치분석을 발전시키면 충분히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주(注)가 붙어 있다.

 

실로, 최고의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인 폴 마틱(Paul Mattick)이 가치의 문제를 고찰했을 때, 그는, 자신의 전통적인 맑스주의적 전제들과 이론적 성실성 때문에 쏘련에는 정말로 가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독일 좌익[공산주의자들: 인용자]의 국가자본주의론을 현실적으로 약화시켰다. (Indeed, when the foremost council-communist theorist, Paul Mattick, looked at the issue of value, his traditional Marxist assumptions along with his theoretical integrity led him actually to undermine the German Left’s theory of state capitalism by accepting that value did not really exist in the USSR.)7)

이 주가 흥미로운 것은, 저들이 이 주를 통해서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국가)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이 “가치의 불구화” 운운할 때, 그것은 바로 폴 마틱이 인정했던 사실, 즉 쏘련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궤변이기 때문이다.

저들의 수작을 계속 들어보자면,

 

물론, 쏘련은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적이었다8)는 이론은 어떤 이론이나, 자본주의를 단순히 사적 소유와 ‘시장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이윤 구동 체제로 보는 정통 맑스주의의 통속적 해석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Of course, any theory that the USSR was in some sense capitalist must reject the vulgar interpretation of orthodox Marxism which simply sees capitalism as a profit driven system based on private property and the ‘anarchy of the market’.)9) (강조는 인용자.)

 

자본주의를 … 사적 소유와 ‘시장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이윤 구동 체제로 보는” 것은 ‘단순한’ 것이며, “정통 맑스주의의 통속적 해석”, 혹은 그 “저속한(vulgar) 해석”이란다! 그리하여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단다! “정통 맑스주의(orthodox Marxism)”의 거부! ― 이것은 실로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면 저들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저들은 말한다.

 

자본주의의 정수(精髓)는 자본의 사회적 관계의 지배이다. 그러나 자본은 무엇인가? 맑스로부터 입증할(argue) 수 있는 바로는, 자본이란 본질적으로 소외된 노동의 자기확장(self-expansion)이었다. 즉, 인간의 의지와 필요를 자신의 자율적 확장에 포섭하는 외적 힘으로 되는, 인간 활동의 창조력ㆍ생산력들이다.

 

저들이 맑스를 끌어들여 입증(?)하는 바에 의하면, 자본주의란 결국 ‘소외된 노동의 자기확장의 사회적 관계의 지배’, 즉 ‘인간의 의지와 필요를 자신의 자율적 확장에 포섭하는 외적 힘으로 되는, 인간 활동의 창조력ㆍ생산력들의 사회적 관계의 지배’인 셈이다! 비정통 맑스주의 곧 좌익공산주의적 맑스주의의 얼마나 단순하지 않고 통속적이지 않은 해석인가!

이는 물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도, ‘시장의 무정부성’도 없는 자본주의를 강변하기 위한 가소로운 수작이다. 그 수작을 지켜보자.

 

하지만 노동의 소외는, 그 자체가 생산수단과 생존수단 양자(兩者)로부터 직접생산자들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는 임금노동을 전제하고 있다. 물론,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에서는(in the ‘classical form’ of capitalism) 사적 소유가, 생산수단과 생존수단 양자로부터 직접적 생산자들이 분리되는 제도적 수단이다. … 노동자는 … 그 결과,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생존수단을 구매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면서 노동계급은 자신들의 장래의 생존수단과 자신들의 장래의 생산수단10)을 자본가계급의 사적 소유로서 생산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결국 자본과 임금노동 관계를 재생산한다.

 

대략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저들은 굳이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에서는(in the ‘classical form’ of capitalism) 사적 소유가, 생산수단과 생존수단 양자로부터 직접적 생산자들이 분리되는 제도적 수단이다” 운운하고 나선다. 당연히 다음의 헛소리를 위한 수작이다. 이어서 들어보자.

 

하지만 이 사회관계는 생산수단과 생존수단 양자의 국가적 소유라고 하는 제도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물론 스딸린주의[만악의 근원인 그 스딸린주의!: 인용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는 전체 주민에 의한 소유를 의미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명백백히(quite clearly) 하나의 법률적 형식이었다. 쏘비에뜨의 노동계급이 그들의 공장들을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않았던 것은, 산업 국유화 시대에 영국의 노동자들이 브릿티시 스틸(British Steel)이나 브릿티시 콜(British Coal), 브릿티시 레일랜드(Brotish Leyland)를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가적 소유는, 러시아에서든 혹은 다른 어디에서든, 단지, 노동계급이 생산수단과 생존수단 양자로부터 배제되고 그리하여 그들의 노동력을 팔지 않을 수 없는 특정한 제도적 형태에 불과했던 것이다.

… 따라서 아주 진정한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소외시켰고, 그리하여 자본을 생산했다. 자신들의 노동력을 사적 자본가 기업이라는 형태의 자본에 파는 대신에, 러시아의 노동계급은 단지 자신들의 노동력을 국가적 소유 기업이라는 형태의 자본에 팔았을 뿐이다.

 

자, 저들은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소유되어 있든, 국가적으로 소유되어 있든, 생산수단 및 생존수단으로부터의 노동자들의 분리에는, 그리하여 자본-임금노동이라는 사회관계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산업 국유화 시대(the days of nationalised industries)”, 그러니까 제2차 대전 후 전후 복구기의 영국의 주요 산업 국유화로써 이를 예증하고 있다. 그러면서 쏘련에서의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전체 주민에 의한 소유였다는 ‘스딸린주의적 변호’를 반박한다. 브라보! 브라보!

실제로, 심히 미친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산업 국유화 시대”에 영국의 노동자들이 국유화된 그 산업들을 소유ㆍ통제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명명백백한 사실을 들어 저들은, 저 비열한 지적 사기꾼들은 쏘련에서의 생산수단의 국유도 명명백백히 하나의 법률적 형식이었을 뿐이고, 거기에서도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의 소유로부터 배제ㆍ분리되어 있었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11)

그러면, 저들은 무엇을 숨기며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12) 비혁명적이었던 레닌이 1917년 4월 테제 이후 잠시 동안 혁명적인 것 같았으나, 이내 “혁명의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의 이분법(dichotomy)이 그의 사고 속에서 명백해”지면서 곧 비혁명적으로 혹은 반혁명적으로 회귀했다고, 저들이 레닌을 비판ㆍ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사실은 누구의 사고 속에 그러한 이분법이 명백한 것일까?

저들은 영국과 쏘련의 국가권력의 성격 차이, 근본적으로 다른 그 계급적 차이를 깡그리 무시한 채 단지 법률적 형태로서의 ‘국가적 소유’를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국가적 소유’라고 하는 형태만을 보고 그것을 각각의 국가의 성격으로부터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나아가, 바로 그 국가의 계급적 성격 차이 때문에 쏘련과 영국 등 기타 부르주아 국가 사이의 ‘국가적 소유’에는 그 범위에서도 정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저들은 함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즉, 쏘련에서는, NEP를 폐지한 이후에는 특히, 주요 생산수단을 전반적으로 국유화 내지 집단화했음에 반해서, 영국 등 부르주아 국가에서는, 특히 제2차 대전에 의해서 극도에 달한 자본주의적 생산ㆍ소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수의 전략적 산업들, 보다 정확히는 전략적 기업들만을 예외적으로 ‘국유화’했을 뿐이며, 그리하여 사적소유가 지배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 ‘국유’조차 사적소유를 유지ㆍ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저들은 철저히 함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저들은 스스로 쏘련에서의 “경제성장은, 이윤 동기에 의해서 추동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국가와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킬 사용가치의 양(量)을 확대시킬 필요에 의해서 추동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얘기한다.

 

… 러시아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노동력의 등가를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래 일하게 함으로써 러시아 국가 기업들은, 바로 서방의 기업들처럼, 잉여가치를 착출할 수 있었다. 나아가, … 서방에서처럼, 그 최대 부분은 그 경제의 확장에 재투자되고(reinvested), 그리하여 국가자본의 자기확장을 보장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소유 형태들의 이면(裏面)을 파고듦으로써 우리는 쏘련 내부의 진정한 사회관계들이 본질적으로 자본의 사회관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쏘련은 그리하여 ―국가자본주의라는 특수한 형태에서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쏘련에서 이루어진 확대재생산, “국가와 주민 전체의 필요를 충족시킬 사용가치의 양(量)을 확대시킬 필요에 의해서 추동”된 생산의 확대가 이번엔 저들에 의해서 잉여가치의 착취와 ‘자본의 자기확장’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이 “자본이란 본질적으로 소외된 노동의 자기확장(self-expansion)”이라고 규정하고 나선 것도 이유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헌데 뭔가 심히 수상하다. “소유 형태들의 이면을 파고듦으로써”, 즉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와 상관없이 직접생산자가 필요노동시간을 넘어 노동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그 잉여가치의 일부가 생산에 재투하되어(reinvested) 그 생산이 ‘자기확장(self-expansion)’된다는 점만을 들어 쏘련이 자본주의적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고대 노예제 사회도, 중세의 봉건사회도 모두 자본주의적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쏘련에서의 상품생산

 

앞에서 한 소리 다르고 뒤에서 하는 소리 다른 이러한 미치광이 같은 헛소리에는, 어쩔 수 없이, 반쏘주의자들 내부에서조차 반론이 제기되었던 모양이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이 반론했다는 것이다.

 

쏘련을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아무리 정치적으로 유용하고 직관적으로 올바르다13) 하더라도, 문제는 그 자체로서 이러한 접근은 쏘련의 명백히 비자본주의적인 양상들(the apparently non-capitalist aspects of the USSR)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헤겔을 잘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말하곤 하듯이 ‘본질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As anyone acquainted with Hegel might say ‘the essence must appear!’.)14) 자본은 소외된 노동의 자기확장일지도 모르지만, 가치의 형태에 있는 노동이다. 시장이 없어 진정한 교환을 위한 생산이 없었기 때문에 상품생산이 없는데, 어떻게 가치에 대해서, 혹은 실로 잉여가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강조는 인용자)

 

우선, “정치적으로 유용하다”? 무슨 뜻일까? 순진한 노동자 대중 사이에 반쏘주의를, 따라서 반공주의를 선동하는 데에 유리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 외의 어떤 뜻을 가질 수 있는가?

그건 그렇고, 위 반론이 제기하는 바를 다시 정리하면 이런 것이다. 1) 자본이란 ‘가치의 형태에 있는 노동(labour in the form of value)’이다. 2) 쏘련에는 시장이 없었고 따라서 ‘진정한 교환을 위한 생산(real production for exchange)’, 즉 ‘상품의 생산(production of commodities)’이 없었다. 3) 그런데 어떻게 가치에 대해서, 잉여가치에 대해서, 가치로서의 자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가치의 형태에 있는 노동” 따위의 현학적 헛소리를 제외하면, 위의 반론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발달한 시장, 혹은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일반적인 전제”15)여서, 시장 없는, 즉 상품생산ㆍ상품유통이 없는 자본주의, 따라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없는 자본주의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에게는 사실 이러한 반론에 대꾸할 의무가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를 단순히 사적 소유와 ‘시장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이윤 구동 체제로 보는 정통 맑스주의의 통속적 해석을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뱀에 다리를 그린다. 즉, 쏘련에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이, 즉 시장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려고 든다.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들어보자.

 

… 뜨로츠끼주의 이론가들은, 생산수단의 국유화 문제에 이르면, 소유 형태를 크게 중시한다. 생산수단의 국가적 소유, 그리고 따라서 사적 소유의 폐지를 자본주의를 넘어선 결정적 전진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쏘련에서 주요 생산수단들을 모두 국가가 소유하긴(own) 했지만, 생산수단의 현실적 합법적 점유(possession)16)와 운영은 국유 기업들과 국유 트러스트들에 맡겨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회계와 생산 책임을 가진 별개의 법률적 실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 the state enterprises and trusts, each of which was constituted as a distinct legal entity with its own set of accounts and responsibilities for production).17)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이를 얼버무리고, 국유 기업들의 이러한 법률적 형태들을 단지 형식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어 왔던 데에 반해서, …. 그와는 달리, 우리는 별개의 국유 기업들로의 경제의 이러한 분할(division)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들의 표현이었음을 증명할(argue) 것이다.

 

저들이 어떤 궤변으로 사적 소유가 폐지된 쏘련의 생산양식을 자본주의적이라고 증명할 것인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여기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저들이, 주요한 생산수단이 모두 국유화되어 있지만 그 ‘현실적ㆍ합법적’ 점유와 운영이 각각 자신의 회계와 생산 책임을 가진 국유 기업들과 트러스트들에 위임되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쏘련에서의 생산관계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었다고 단정하고 나서는 점, 자본주의적이었음을 입증하겠다고 나서는 점이다.

두 점이다. 하나는, 저들의 표현을 빌면, “경제가 별개의(distinct) 국유 기업들로 분할되어 있었다는 것(division of the economy into distinct state enyerprises)”18), 두 번째는, 그들 각 기업이 자신의 회계와 생산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과연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민경제가 회계와 생산 책임을 가진 별개의(distinct) 기업들로 분할되지 않는 것일까?

먼저, ‘별개의 기업으로 분할되지 않은 경제’? ― 적어도 근대 이후의 ‘국민경제’ 혹은 ‘국가경제’에서, 그 국가가 설령 아주 소규모의 도시국가일지라도,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소규모의 국민경제라도 그것을 ‘분할되지 않은’ 단일한 기업으로 총괄하기에는 사회적 분업의 각 부문의 성격이 너무나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그렇더라도 각 기업이 각각 자신의 회계와 생산 책임(its own set of accounts and responsibilities for production)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기업의 분할은 그 자체로 분할된 기업 각각의 회계와 생산 책임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각각의 회계와 생산 책임을 전제로 그것들을 총화함으로써만 국민경제 전체의 ‘중앙집권화된 계획(centralised planning)’이 가능했던 것이고, 가능한 것 아닌가? 그리고 각 단위기업이 회계와 더불어 할당된 책임을 다해야만 예의 계획이 계획대로 실현되는 것 아닌가?

더욱이 회계(accounts)와 생산 책임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회계는 당연히 생산 책임의 전제이며, 생산을 사회적 규모에서 계획하는 데에서 필수적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고, 또 저들이 스스로 맑스에 기초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더욱 필요한 지적이지만, 맑스가, 예컨대, 다음과 같이, 계획경제로서의 공산주의적 생산에서 회계의 가일층의 필요성ㆍ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과정의 통제 및 관념적 총괄로서의 부기(Buchführung)는, 그 과정이 더욱더 사회적 규모에서 진행되고 더욱더 순수한 개인적 성격을 잃어갈수록 더욱더 필요해진다. 따라서 수공업경영이나 농민경영의 분산된 생산에서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더욱더 필요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보다 공동체적 생산에서 더욱 필요하다.19)

 

분할될 수밖에 없는 하부 생산단위들, 그러니까 국유 기업들 개개의 회계, 즉 부기가 정확하고 철저하면 할수록 공동체적 생산 전체의 회계ㆍ부기가 그만큼 정확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면 저들이 쏘련에서의 상품생산을 어떻게 증명하는가를 보자.

우선, 저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소절(小節)의 제목은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형태가 존재했는가(To what extent did the Commodity-form exist in the USSR)”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별개의 국유 기업들로의 경제의 이러한 분할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인 생산관계들의 표현이었음을 증명할 것”이라고 장담한 다음, 곧바로 묻는다. ― “상품이란 무엇인가(What is a commodity)?” (혹은, “무엇이 상품인가?”)

그러곤 다시 곧바로 스스로 답한다.

 

가장 간단한 대답은, 상품이란 팔리기 위해서 생산된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이러한 단순한 정의(定義)는 특유의 사회적 형태로서의 상품을 이해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상품형태의 참뜻(implications of the commodity-form)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 살필(to probe a little deeper)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저들은, “좀 더 깊이 살피는” 게 아니라, 독자들이 읽어보면 알겠지만,20) 타인을 위한 생산이니, 사용가치와 가치의 대립이니 하며, ≪자본론≫ 제1권 제1편 제1장 상품(과 부분적으로 제3편 제5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만 읽어본 사람이면 다 아는 얘기를 별로 정확하지도 않고 별로 깊지도 않게, 그러나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그것을 일일이 소개ㆍ분석할 필요도 없고, 또 그 장황함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다. 저들을 비판하는 데에는, 저들이 그 장황함으로 어떻게 사기를 치고 있는지 한 가지만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저들은, 그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화되기 위한 조건, 그 중에서도 특히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야말로 그 불가결의 조건임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없는 자본주의’를 증명하려니까 그것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존재조건이다, 비록 상품생산이 거꾸로 사회적 분업의 존재조건은 아니지만. 고대인도의 공동체에서는, 생산물들이 상품으로 되지 않고, 노동이 사회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혹은, 보다 비근한 예를 들자면, 각 공장에서는 노동이 체계적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이 분할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개별적 생산물들을 교환하는 것에 의해서 매개되지는 않는다. 단지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적인 사적노동의 생산물들만이 서로 상품으로서 상대하는 것이다(Nur Produkte selbständiger und voneinander unabhängiger Privatarbeiten treten einander als Waren gegenüber).

 

단지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적인 사적노동의 생산물들만이 서로 상품으로서 상대하는 것” ― 바로 생산수단이 사적으로, 즉 배타적ㆍ독점적으로 소유된 사회의 노동의 생산물들만이 상품으로 전화된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저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실로, 맑스가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상품 관계는 인간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상품들은 공동체들 사이에서 교환되었고, 상이한 공동체들이 접촉하게 되었을 때에 발생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반복할지 모른다. “보라, 역사적으로 상품교환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일어났는데, 공동체에서는 생산수단은 사적으로 소유되어 있지 않았지 않느냐?!” 라고.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물론 공동체 내부에서는 생산수단들이 공동으로 소유되어 있지만, 공동체와 공동체의 관계에서는 그것들이 사적으로, 즉 다른 공동체에 대하여 배타적ㆍ독점적으로 소유되어 있는데도,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공동체들 사이에서” 시작되고 발생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니까 말이다.

내친 김에 간단히만 말하자면, 이 점, 즉 공동체 내부와 ‘공동체가 끝나는 곳’의 분간은, 일반적으로 화폐라고 불리는, 예컨대 쏘련의 루블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관건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경우에 본래의 의미의 화폐이며, 어떤 경우에 단지 화폐로 의제된 것인지를 분간하는 데에 말이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오면, 저들은 자신들이 소절을 나누면서 제기했던 문제, 즉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형태가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소절을 맺는다.

 

쏘련 사회는 서방 자본주의 사회 못지않게 원자화되고 물상화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The society of the USSR would have seemed to be no less atomised and reified than those of western capitalism)21). 어느 정도까지 이것이 상품관계가 만연한 결과였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22) 먼저 쏘련에 상품생산이 있었는지 여부를 검토할 것이고, 그러고 나서 상품교환의 존재 문제를 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 여기에서도 다시 한번 좌익공산주의자적 사고를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앞에서 인용했던 문장에 이어 “상품교환이 발전함에 따라 전통적 인간 사회들은 해체되어, 궁극적으로는 원자화된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발생한다”고 씌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 거기에 다음과 같은 주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 중의 하나는 원자화의 만연이다. 물론 사회의 이러한 원자화는 상품형태의 지배와 이 상품형태의 지배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관계의 물상화로부터 직접적으로 발생한다. 틱틴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원자화는 쏘련의 특징이었다. …

 

이렇게 다 기정사실로 선언해놓은 마당에 어이하여 새삼 “어느 정도까지” 이 원자화와 물상화가 “상품관계가 만연한 결과였는가” 하고 묻는단 말인가? 어이하여 새삼 “쏘련에 상품생산이 있었는지 여부를 검토”하며, 쏘련에 “상품교환의 존재 문제를 볼” 요량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한, 상품생산의 존재 여부와 상품교환의 존재 여부는 별개의 문제인가? 상품생산의 존재 여부 따로 검토하고, 상품교환 따로 보겠다니 말이다.

아무튼 저들은 소절을 바꾸어가면서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생산이 존재했는가”,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교환이 존재했는가” 그리고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화폐가 존재했는가”를 묻고 있다.

우선,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생산이 존재했는가”를 묻고 논하는 소절에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논의도 없다. 쏘련에서도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어서 자신의 ‘즉각적인(immediate)’ 필요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유 기업의 경영진을 위해서 노동을 했느니, 노동과정은 착취과정이자 소외과정이었느니, “그리하여 쏘련에서의 생산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볼 수 있다”느니 하고, 사실은 자신들이 입증해야 할 것들을 마치 자신들이 입증한 사실인 양 거듭거듭 선언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헛소리만으로 한 소절을 끝낸다면, 그건 필시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답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과연 좌익공산주의자들답게, “그리하여 쏘련에서의 생산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볼 수 있다”고 선언하고 난 후, 곧바로 이어서 이렇게 얘기한다.

 

하지만, 쏘련에서의 생산은 누군가 타인을 위한 생산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판매를 위한 물건들의 생산이었다고 불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쏘련에서의 상품 교환 및 유통의 존재라고 하는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하게끔 한다.

 

저들의 사고가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쏘련에서의 상품유통

 

아무튼 우리는 저들이 그 “쏘련에서의 상품 교환 및 유통의 존재라고 하는 결정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보아야 하는데, 저들은 그것을 예의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교환이 존재했는가”라는 소절에서 ‘논하고 있다’.23) 아주 재미있는 아마 ‘3단 논법’으로, 이렇게.

 

제1단:

생산자본의 순환(P…P’)의 내부에서는 교환은 주로, 확대된 규모에서 생산을 갱신하기 위해 필요한 단순 상품유통(C – M – C)의 내부에 한정되어 있다. …

생산자본의 관점에서는 상품교환은 그리하여 생산자본의 확대를 고려한 단순한 기술적 수단이다. 상품생산이라는 사회적 분업에서 기인하는 생산자들의 분화를 극복하기 위한 필요수단(A necessary means for overcoming the division of producers that arises out of the social division of labour of commodity production).24)

 

제2단:

하지만, 상품들의 유통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 이상(以上)이다. 상품의 구매와 판매는, 인간적 필요(human needs)로부터 소외된 인간 노동이 인간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적 필요와 재결합되는 소외된 사회적 형태이다. [얼씨구!: 인용자]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 하에서는 이 사회적 형태는, 경쟁하는 이기적 개인들의 충돌을 통해 구성되는 시장이다. … (강조는 인용자)

 

제3단: [이 부분, 이 문단은 완역한다. 그리고 이 문단이 바로 “쏘련에서의 상품 교환 및 유통의 존재라고 하는 결정적인 문제”,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교환이 존재했는가”를 논하는 소절의 끝이다.]

그런데 시장이라는 외적인 위력(威力)은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개인들의 사회적 기술적 필요가 충돌하는 데에서 발생하지만, 국가라는 외적 위력은 그렇지 않다(Yet while the alien power of the market arises out [of: 인용자] the conflicting social and technical needs of the individuals that make up society the alien power of the state does not).25) 국가 계획은 필연적으로 사회경제(social-economy)의 외부로부터 강요된다. 그리하여 사회적 필요를 소외된 노동과 조화시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관계에, 그리고 화폐의 형태와 그 기능의 관계에 반영되었다.

 

자, “이는 사용가치와 가치의 관계에, 그리고 화폐의 형태와 그 기능의 관계에 반영되었다” 따위의 뜻 모를 헛소리는 그렇다 하고, 도대체 이상(以上) 어디에서 저들은 “쏘련에서의 상품 교환 및 유통의 존재라고 하는 결정적인 문제”,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교환이 존재했는가”를 논하고 있는가?! 혹시 자신들의 미치광이 환상 속에서?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저들은 시장을, 상품경제 일반 혹은 하다못해 자본주의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조절 기구로서 논하는 대신에,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그것으로서 논하고 있다.

이유 혹은 그 목적이 무얼까?

다름 아니라, ‘시장 없는 상품’. ‘시장 없는 상품생산’, ‘시장 없는 상품교환ㆍ상품유통’, ‘시장 없는 (비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도 존재한다는, 자신들의 미치광이 주장을 암암리에 기정사실화하려는 음흉한 수작이다!

저들이 “쏘련에서의 상품 교환 및 유통의 존재라고 하는 결정적인 문제”,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상품교환이 존재했는가”에 대한 논의를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끝내고 있는 것도 바로 저들이 국가의 계획에 의한 생산과 그 생산물의 분배도 상품생산이며, 상품교환ㆍ상품유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친 신념에서 보기 때문이다.

 

소련에서의 화폐유통

 

이제는 저들이 “쏘련에는 어느 정도까지 화폐가 존재했는가”를 어떻게 논했는가를 볼 차례이다.

이 소절이야말로 저들의 이른바 “가치의 불구화 이론”의 핵심이라면 핵심이고, 백미(白眉)라면 백미(百媚)여서, 그 노는 꼴이 정말 무척 흥미롭다.

저들은 “독립적인 가치형태로서의 화폐”를 폐지하고 노동시간으로서 직접적으로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자고 제안했던 쁘루동(Proudhon)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 그러한 쁘루동주의의 제안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맑스는, 독립적 상품 생산자들의 사회에서는 화폐는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상품들과 다른 독립적 가치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through his critique of such Proudhonist proposals Marx showed that in a society of independent commodity producers money must necessarily assume an independent form of value distinct from all other commodities).26)

그러고 나선, 앞 소절에서는 시장을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 하에서”의 조절의 “사회적 형태”라고 했던 태도로부터 일변하여, 시장을 가리켜 이제는 “상품경제가 조절되는 것은 실로 이 사회적 매카니즘을 통해서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 때문에, 맑스는 독립적 가치형태로서의 화폐는, 독립적 상품 생산자들의 경제가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계획적 생산으로 바뀌어야만 폐지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식으로 시장에 의한 생산의 조절은, 노동을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게끔 하는 사회적 계획에 의해서 대체될 터이다(In this way the regulation of production by the market would be replaced by a social plan that would make labour immediately social).27) (강조는 인용자.)

 

여기까지는 맞는 얘기다. 그런데 그 다음에 저들이 어떻게 노는가를 보자. 그 불치의 광기를 보자.

저들은 방금 우리가 인용한 문장 다음에 어떤 문구 하나도 매개시키지 않고 곧바로 이렇게 이어간다. 아우프헤벤이란 자들의 원문에서는 문단을 바꾸어서, 그리고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에서는 같은 문단 속에서.

 

우리가 입증해온 것처럼,28) 쏘련에서는 생산자본(productive-capital)을 억지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화폐자본(money-capital)을 억눌러야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립적 형태로서의 화폐 그 자체의 발전의 제한을 수반했다. 이를 위해서 시장에 의한 생산의 조절은 경제 계획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무계급 사회(classless29) society)의 계획이 아니라, 계급 착취에 기초한 원자화된 개인들의 사회로부터 발전한 계획이었다. 그렇게 사회 위에 서 있는 시장이라는 외적 위력은 국가라는 외적 위력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국가 계획의 명령들이, 경쟁적 시장의 외적 명령들처럼 외적인 강제로서 생산자들에 맞섰던 것이다(The imperatives of the state plan confronted the producers as an external force just as the external imperatives of the competitive market).30) 계획이 상품생산의 조절자로서의 시장을 대체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의연히 서로로부터 소외된 채인 사회적 필요로부터의 노동의 분리를 극복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독립적 가치형태로서의 화폐는, 독립적 상품 생산자들의 경제가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계획적 생산으로 바뀌어야만 폐지될 수 있다…(… money as an independent form of value could only be abolished if the economy of independent commodity producers gave way to the planned production of freely associated producers.)”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시장에 의한 생산의 조절은, 노동을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게끔 하는 사회적 계획에 의해서 대체될 터이다”고 말한 저들이, 곧바로 그에 이어서 하는 말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쏘련에서는 “계획이 상품생산의 조절자로서의 시장을 대체했지만”, 그 사회는 여전히 화폐가 유통하고 있고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하는 계급사회로서의 자본주의였다는 것이다! 시장 없는 (비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 바로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통 맑스주의(orthodox Marxism)’를 거부하는 저들 좌익공산주의의 맑스주의, 미치광이 맑스주의이다!

물론 이 미치광이 맑스주의에 구원의 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쏘련에서는 계획이 시장을 대체했으나 그 계획은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들’의 무계급 사회의 계획이 아니라, 계급 착취에 기초한 원자화된 개인들의 사회로부터 발전한 계획”(not the planning of a classes society of ‘freely associated producers’ but a plan developed out of a society of atomised individuals based on class exploitation)이었고, 그리하여 그 계획, 혹은 계획에 의한 시장의 대체 “그것이 의연히 서로로부터 소외된 채인 사회적 필요로부터의 노동의 분리를 극복하지는 않았다”(it did not over come the separation of labour from social needs that remained alienated from each other)는 것이 저들의 구원의 신이라면 구원의 신이다. (“의연히 서로로부터 소외된 채인 사회적 필요로부터의 노동의 분리를 극복하지는 않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무릇 신(神) 일반이 으레 그러한 것처럼, 저들의 구원의 신 역시 현실적 존재, 실제의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저들의 두뇌의 산물일 뿐이고,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특히 맑스주의 대열에 잠입한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작원으로서의 저들의 비열하고 사악한 반쏘ㆍ반공주의 책동ㆍ모략일 뿐이다.31) 그렇지 않다면, 목소리 높여 선언과 선언을 거듭하는 대신에 사실과 논리로써 증명해봐!32)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이 입증해야 할 주장들을 마치 그것이 부동의 사실인 것처럼 거듭거듭 선언하고 있을 뿐이야! 그것도 가히 제정신이 아닌 논법, 앞에서 한 말 다르고 뒤에서 하는 말 다른 논법을 구사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시장 없는 자본주의’ 같은 미치광이나 떠들어댈 법한 소리를 떠들어대면서 말이야! 그리고 심지어 자신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사실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인 양 들이대면서 말이야!

 

사회주의ㆍ공산주의에서의 가치규정

 

자, 다시 저들의 노는 꼴로 돌아가 보면, ―― 방금 본 것처럼 저들은 쏘련에서의 국가 계획에 의한 시장의 대체를 확언했지만, 역시 좌익공산주의자들답게 쏘련에는 여전히 ‘상품유통ㆍ화폐유통’이 있었다고 ‘증언’하고 논한다. “쏘련에서의 화폐(Money in the USSR)”이라는 소제목 하에 이렇게,

 

쏘련에서 단순 상품유통이 생산자본의 순환의 일부로서 존재했던 한에서는 화폐는 단지, 다음의 생산 순환을 위해 필요한 투입물들을 위한, 이전의 생산 순환의 산출물들의 교환을 촉진하는 유통수단으로서만 등장했다. 하지만 완전히 발달한 자본주의에서였다면 그러한 유통―구매 없는 판매 혹은 판매 없는 구매―은 결딴이 났겠지만, 쏘련에서는 이것[=이 결딴: 인용자]이 국가 계획에 의해서 배제되었다(But whereas under fully developed capitalism such circulation could break down – a sale without a purchase or a purchase without a sale – in the USSR this was precluded by the state plan).33)

 

이렇게 시장 없는 상품유통! 시장 없는 화폐유통! ― 가히 미치광이의 환상 아닌가?!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저들은 쏘련에서의 상황, 사태의 진행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자본을 각 산업에 할당하고, 산출을 규정하며, 가격들을 설정하는 계획을 국가가 강요했다. 이 점에서 각 자본에 의해 생산된 상품들의 가치는, 화폐로의 그 전형 행위에 의해서 확증되거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그것들을 가치들로서 인정함으로써 사전에 확증되었다. 그러므로 상품들은 구매되어야 했고 화폐는 구매해야 했다. 가치법칙에 의한 상품생산자들의 조절은 국가 계획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쏘련에서의 상황, 사태의 진행을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고전적 형태의 자본주의’와는 다르지만, 모종의 자본주의, 저들이 말하는 ‘국가자본주의’로 강변하려는 가소로운 수작이다. 저들에 의해 비뚤어진 서술을 보다 사실에 부합되게 수정하면 대략 이렇게 될 것이다.

 

자원을 각 산업에 할당하고, 산출량을 규정하며, ‘가격들’을 설정하는 계획을 국가가 시달했다. 이 점에서 각 기업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들의 ‘가치’는, 화폐로의 그 전형 행위에 의해서 확증되거나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전에 산정했다. 시장은 국가 계획에 의해서 대체되었다.

 

사회적 생산과 그 재생산이 이렇게 진행된 사회를,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이나 소위 ‘국제사회주의자들’(IS)34)과 같은, 반쏘 일념에 제정신이 아닌 자들 말고, 누가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35)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계획이 시장을 대체한 경제, 그러한 사회는 결코 어떤 의미, 어떤 유형의 자본주의 경제,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다. 자본주의이긴커녕, 어떤 의미, 어떤 유형의 상품경제도 결코 아니다.

그런데, 저들의 비뚤어진 서술을 수정한 내용을 보고는 혹시 의아해 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자본주의이긴커녕, 어떤 의미, 어떤 유형의 상품경제도 결코 아니라더니, 가치니, 가격이라니?’ ― 하고 말이다.

우선 맑스의 얘기를 들어보면,

 

…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폐지된 후에도 사회적 생산이 유지되는 한, 가치규정은, 노동시간의 규제와 다양한 생산집단들(Produktionsgruppen)로의 사회적 노동의 배분, 마지막으로는 이에 관한 부기가 이전보다도 가일층 중요해진다는 의미에서 의연히 지배적이다(vorherrschend bleiben).36)

 

그렇다. 쏘련에서 노동생산물과 관련하여, 특히 그 배분과 관련하여 ‘가치’니, ‘가격’이니, ‘화폐’니 하는 말들이 쓰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와 필요 때문이었다. 즉, 의연히 지배적인 가치규정에 따른 노동시간의 규제와 다양한 생산집단들로의 사회적 노동의 배분, 그리고 이에 관한 부기의 필요성과 중요성 때문이었다. ‘임금’이니, ‘기업’이니 말들이 쓰인 것도 물론 같은 이유와 필요성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즉 임금이니 기업이니 하는 것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 것임은, 새삼 상론(詳論)할 필요조차 없이, 그 자체로서 명백하다.

 

가치 및 사용가치의 불구화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사회에서의 ‘가치’ㆍ‘가격’ㆍ‘화폐’ㆍ‘임금’ㆍ‘기업’이란, 나아가 생산물들의 ‘판매’ 혹은 ‘구매’란 각각 그러한 것, 즉 가치규정의 지배에 의한 노동시간의 규제 및 배분, 부기의 필요성에 의한 범주인 것이고, 쏘련에서의 그것들도 바로 그러한 것이었기 때문에, 저들 반쏘 좌익공산주의자들도 자신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다.

 

쏘련에서는 화폐가, 생산자본의 순환 내부에서 상품들의 단순유통 단계에 필요한 기능들에 ― 즉, 가치의 관념적 척도로서의 그리고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들에 ― 구속되어 있었고, 화폐가 독자적인 가치형태로서 등장하는 것은 배제되어 있었다. 첫째로,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상품들의 가치는 사전에 확증되었다. 트랙터들의 관념적 가격은 트랙터들의 가치로서 직접적으로 실현되었는데, 이는 그 판매가 이미 그 계획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폐는 판매를 위한 상품들의 가치의 관념적 척도로서 작용했지만, 독립성은 없었다.

 

자, 위에서 “생산자본의 순환”을 ‘순환적 재생산 과정’으로, “상품들”을 ‘생산물들’로 바꾸어 읽어보라. 그러면 그 의의가 보다 더 명백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꾸어 읽어야 할 곳들을 염두에 두면서, 저들의 증언을 계속해서 들어보자.

 

더 나아가, 판매하여 수령한 화폐는, 생산자본의 그 특유의 순환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특정한 상품들에 사용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화폐는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의 형태로서 기능하지 않았다. 그것은 생산자본(…)의 특정 순환에 묶여 있었다. 그것은 회수되어 다른 순환에 투하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일련의 상품들의 다른 일련의 상품들로의 교환을 수월하게 하는 유통수단으로서 복무했을 뿐이다.

 

저들 스스로의 이러한 증언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소련에서 루블은 화폐라고 불렸지만, 이름만 화폐일 뿐, 자본주의적 유통에서의, 뿐만 아니라 상품유통 일반에서의 화폐와는 그 기능과 본질이 전혀 달랐다는 것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들 앞에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쏘련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물론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결코 호락호락한, 범상한 인물들이 아니다. 그리하여,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쏘련이 적어도 비(非)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증거를 저들은 그것이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로 내세운다. 그러다 보니, 가치의 불구화 혹은 가치 및 사용가치의 불구화(deformation of both value and use-value)라는, 가히 천천재적(賤天才的)인, 기상천외한 개념ㆍ이론을 발명하게 된다. 이렇게,

 

화폐가 단순히 덧없는 유통수단으로 제한됨으로써, 그리고 상품들의 가치가 사전에 확증됨으로써, 화폐는 독립적인 가치 형태로서 기능할 수 없었다. 상품은 그 자신의 가치를 그 자신으로부터 독립적인 화폐라는 외적 형태로 표현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가치는 상품들의 사용가치로 환산되어 표현되었다. 그 결과 가치의 증대는 순수하게 양적이고 보편적인 형태 [즉: 인용자] 화폐에 있어서의 가치의 양적 증대 속에서 그 가장 적절한 표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질적이고 특수한 형태들 [즉: 인용자] 사용가치들에 있어서의 가치의 양적 증대 속에서 그 가장 적절한 표현을 발견했다(As a consequence the expansion of value did not find its most adequate expression in the quantitative expansion of value in the purely quantitative and universal form money but in the quantitative expansion of value in the qualitative and particular forms use-values). 가치와 사용가치는 악화되어 결국 가치도 사용가치도 불구화되었다(Value and use-value were compounded leading to the deformation of both value and use-value).

 

이것이 바로 저들이 대표제(大標題)로, 그러니까 ≪소련은 무엇이었나: 국가자본주의 하에서의 가치의 불구화 이론을 위하여(What was the USSR? Towards a Theory of the Deformation of Value under State Capitalism)≫ 하고 내걸었던 가치(와 사용가치)의 불구화 바로 그것이다!

 

수정주의 쏘련의 병리현상
  ―그리고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시장 신앙

 

이렇게 해서 저들은 ‘가치와 사용가치의 불구화 이론’이라는 이론적 무기를 획득했다. 이제는 그것을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저들은 이 무기를, 무엇보다도 먼저, 후기(後期) 쏘련 사회의 온갖 병리적 현상들을 설명하는 논거로 들이댄다. 즉 그 소위 ‘가치와 사용가치의 불구화’가 그 병리적 현상들의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들어보자. (참고로 말하자면, 바꾸어 읽어야 할 부분들을 바꾸어 읽으면, 저들의 비뚤어진 증언은 물론 쏘련이 결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훌륭한 증언이 된다.)

 

실로, 쏘련에서는 생산자본의 축적은, 즉, 가치의 자기증식은, 생산된(…) 사용가치들의 양으로 환산되어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화폐로서의 화폐―가치의 독립적 형태로서의 화폐―의 완전한 발전 없이 그러한 사용가치들의 내용이 사회적 재생산의 필요에 반드시 들어맞지는 않았다. 화폐는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상품들의 교환을 허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리하여 표준 이하의(sub-standard) 상품들을 구매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상품의 사용가치의 품질은, 화폐 그러니까 구매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 계획에 의해서 보증되었다. 그러나 국가 계획은, 우리가 입증해온 것처럼, 다양한 경제 행위자들― 그들이 노동자들이건 국유 기업들이건 ―의 외부에 서 있었다.

그 결과, 그 계획에 의해서 규정되고 재가된 사용가치는 사회적 필요에 반드시 들어맞지는 않았다.

 

… 쏘련에서의 화폐의 결함― 그것이 보편적이고 독립적인 가치 형태로서 기능하지 못한 것 ―은 또한 끝내 쏘련의 종언을 불러오는, 저 고유의 결함 있는 사용가치의 생산을 초래했다.

 

후기 쏘련에서의 불량품 생산의 원인이,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눈에는 이렇게, 결국엔 쏘련을 해체시키기에 이른 흐루쇼프 이래의 수정주의의 도입 및 만연에, 즉 그 기회주의적 반동의 도입과 만연으로 인한 노동자ㆍ인민의 이니셔티브의 쇠퇴ㆍ약화, 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후퇴ㆍ약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소위 ‘가치의 불구화’, ‘화폐의 불구화’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위 ‘결함 생산(defective production)’의 원인을 소위 ‘가치의 불구화’, ‘화폐의 불구화’ 이론으로 ‘설명’하는 저들의 태도 속에는 사실은 시장에 대한 저들의 불치의 신앙, 사악한 형태의 반공주의로서의 저들 좌익공산주의의 불치의 신앙이 은밀히, 그러나 맹독성을 띠고 숨겨져 있다.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우리는 맹독성을 띠고 은밀히 숨겨져 있는, 시장에 대한 그 신앙의 사악하게 부정직한 고백을 보다 더 선명히 읽을 수 있다.

 

구속된 화폐의 제 결과(The consequences of constrained money):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형태로서의 화폐의 존재가, 사용가치들이 사회적 필요에 들어맞도록 보장한다. (강조는 인용자)

 

독립적이고 보편적인 가치 형태로서의 화폐”란, 다름 아니라, 상품생산ㆍ상품유통의 전제이자 거기에서 발생ㆍ기능하는 화폐, 따라서 본래의 의미의 화폐이다. 따라서 그러한 화폐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시장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저들은 그러한 화폐ㆍ시장에 대한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예의 ‘가치의 불구화’ 이론으로 소위 ‘결함 생산’뿐 아니라 소위 ‘블라트(blat)’도, 즉 후기 수정주의 쏘련에 만연했던 관료주의 및 그와 연관된 일련의 사회적ㆍ경제적 별리현상들도 설명한다. 물론 마치 그것이 ‘스딸린주의’ 쏘련의 병리?상들이었던 것처럼. 들어보자.

 

그러나 더 나아가, 독립적 가치 형태로서의 화폐는 또한 사회적 권력의 분산형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입증해온 것처럼,37) 쏘련에서는 화폐가, 생산자본의 순환을 위해 꼭 필요한 기능들에 구속되어 있었고, 사회적 필요는 국가 계획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블라트 및 고유의 결함 생산과 같은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형태들의 지속.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형태들”로서의 ‘블라트’! ― 자본주의에 대한 저들의 저 그윽한 애정ㆍ신뢰!

어떤 궤변과 악의로써 그 애정과 신뢰를 표현하고 있는지를 더 들어보면,

 

기술적ㆍ사회적 필요가 국가 계획에 의해 규정된 틀의 외부에서 발전하는 한, 그것들은 화폐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의해 articulate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Insofar as technical and social needs developed outside the framework prescribed by the state plan they had to be articulated by something other than by money).38) 화폐는 오직 그 계획에 의해 확립된 한계 내부에서만 구매할 수 있었다. 화폐의 구매력이 제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화폐를 필요로 했지만, 그것은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했다. 그 결과, 비화폐적인 사회관계들로 목적을 달성해야 했다(As a consequence, non-monetary social relations had to be persevered).39) 정부 인사들의 영향력과 호의, ‘고객 관계’ 등이, ― 즉, 블라트로 알려진 체제가 ―, 특권적 상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일이 되게 하는 수단으로서 쏘련 관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었다.

그렇게 블라트는, 화폐가 생산자본에 종속됨으로써 화폐의 기능들에 가해진 제한들로부터 등장했다. 그렇게 블라트는, 필연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인적(人的)이고 수량화할 수 없는 관계를 수반한, ― 전(前)자본주의적은 아닐지라도 ― 비(非)자본주의적인 사회적 형태였다.

 

그런데 흥미롭지 않은가? 한편에서는 쏘련이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왜장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그 사회 관료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소위 블라트를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형태(non-capitalist social form)라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쏘련에서의 이러한 병리현상은 명백히 1960년대 이후의 현상이었다. 저들도 본의 아니게 이를 이렇게 실토하고 있다. 즉, “1960년대 이후 갈수록 명백해진, 그리고 1990년의 쏘련 붕괴에서 극에 달한 쏘련의 만성적인 경제 침체…”운운.

그런데 저들이 말하는 소위 ‘가치의 불구화’는 기본적으로 사실상 10월 혁명 이후 곧바로, 그리고 최대한 늦추어 잡아도 NEP가 종식된 1920년 대 말부터는 쏘련에 고착된 제도였다. 그런데도 1950년대 말까지는 어떤 파렴치한 반쏘ㆍ반공 선전자도 “쏘련의 경제 침체”, 하물며 “쏘련의 만성적 경제침체” 따위는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오히려 세계는 쏘련에서의 새로운 형태, 새로운 질의 고도의 경제적 성장을 경이(驚異)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40)

따라서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1960년대 이후 갈수록 명백해진, 그리고 1990년의 쏘련 붕괴에서 극에 달한 쏘련의 만성적인 경제 침체”의 원인을 1950년대 이전에는 없었던 무언가 새로운 변수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그 원인이 반동적 수정주의의 도입ㆍ강화ㆍ만연에 있었음을, 그 외에는 찾을 수 없음을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반쏘ㆍ반공주의자도 그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거꾸로 후기의 모든 병리현상이 저들의 소위 ‘스딸린주의’ 탓으로 돌린다. 경제적ㆍ사회적 병리현상뿐 아니라 일체의 정치적ㆍ문화적 병리현상도 그렇게 ‘스딸린주의’ 탓으로 돌린다!

 

쏘련에서의 노동력의 판매

 

노동력이 자유로운 상품으로 등장하지 않는 자본주의. 그것은 물론 언어도단이다. 그 때문에 저들도 자신들의 글 전체를 통해서 과연 쏘련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등장하여 매매되었던가 하는 문제를 거듭거듭 제기하고 있다. 주로, 쏘련을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대신에 소위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는, 또 다른 반쏘주의자들,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제기하는 이의(二儀)의 형식으로.

그리하여 저들은 그러한 이의에 응답해야 할, 즉 쏘련에서 노동력이 매매되었음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고, 그리하여 글의 말미에 “[쏘련에서의: 인용자] 노동력의 판매”라는 소절을 배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의에 대하여 저들이 할 수 있는 입증이란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즉,

 

하지만, 우리가 입증해온 것처럼, 쏘련에는 상품생산이 있었고 또한 제한된 형태의 상품유통이 있었으며, 그리하여 노동력은 임금을 매개로 다른 상품들과 교환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자유가 제한되었다는 것도 진실이다.

 

이것이 입증인가? 순환논법적으로 거듭되고 있는 선언 아닌가? 그리고 저들은 과연, 저들 말대로, 쏘련에서의 상품생산ㆍ상품유통을 입증해왔던 것인가?

그건 그렇고, 여기에서도 저들의 최대의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즉, 쏘련에서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매매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대신에, 이미 앞에서 여러 번 거듭된 내용이지만, 쏘련은 결코 노동력이 매매되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었음을 다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들은 쏘련에서는 완전고용이 이루어졌다고 증언한다. 앞에서도 한번 인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이렇게.

 

실로, 완전고용은 스딸린 이래 쏘련의 정치적ㆍ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는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Indeed, full employment became an important element in the maintenance [of: 인용자] the political and social cohesion of the USSR from Stalin onwards).

 

‘고용’이란 말 자체가 사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전제하는 것이어서 보다 정확히는 ‘완전취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국가가 말 그대로의 ‘완전고용’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그러한 자본주의가 가당키나 한 말인가?

맑스의 말을 들어보자.

 

… 과잉노동자 인구가 축적의, 또는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의 부(富)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이 과잉인구는 거꾸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 아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존조건(Existenzbedingung)이 된다. 그것은, 흡사 자본이 자신의 비용으로 육성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41) (강조는 인용자)

사회적 부, 기능 자본, 그 증가의 크기와 힘, 따라서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적 크기와 그 노동생산력이 크면 클수록, 산업예비군도 더 크다. 처분 가능한 노동력은 자본의 팽창력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원인에 의해서 발전한다. 산업예비군의 상대적 크기는 그리하여 부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증대한다. 그러나 이 예비군이 현역 노동자군에 비해서 크면 클수록 고정적 과잉인구가 더욱더 증대하는데, 그 궁핍은 그 노동의 고통에 정비례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극빈층과 산업예비군이 크면 클수록 공인된 피보호빈민도 증대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이다.42) (강조는 K. 맑스.)

 

이렇게 맑스는 과잉인구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존조건”이라고 단언하고 있고, 그 증대와 그에 따른 공인된 피보호빈민의 증대를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러다면, 맑스주의자들임을 자처하는 저들로서 ‘완전고용’이 보장된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했어야 하겠는가? 맑스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문자 그대로의 ‘완전고용’이 보장된 쏘련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에게는, 그리고 ≪마르크스가 예견한 미래사회≫의 저자 김수행 교수에게도 그러한 규정한 가능하다!

그런데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위 인용문에 바로 이어서 이렇게 얘기한다. 즉, “완전고용의 유지는 노동력의 만성적 부족을 초래했다”고! 그러니까 저들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는 ‘노동력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자본주의’도 가능한 것이다!

한편, 저들은 쏘련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매매되었지만, 동시에 동시에 이렇게 얘기한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유가 제한되었다는 것도 진실이다. 내국여권제도(internal passport system) 같은 다양한 제한들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이동이 제한되었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의 이동의 법률적 제한(legal restrictions of the movement of labour)” 또한 저들에 의해서 아주 흥미있게 소개되고 있다. 우선 이렇게 얘기한다.

 

그러나 보다 면밀히 살펴보면, 노동자들의 이동을 이렇게 법률적으로 제한한 것은 어쩌면 그 제한을 지키는 것보다는 그것을 위반하는 것이 보다 더 영광으로 생각되는 흥미 있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But on closer inspection these legal restrictions on the movement of labour appear more as a response to exiting situation which were honoured more in the breach than in their implementation).43)

 

참고로 말하자면, 원문 중 ‘exiting situation’은, 내가 보기로는 그대로는 아래에 보여준 오세철 교수님의 기상천외한 ‘번역’ 이외의 어떤 의미도 만들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그것을 ‘exciting situation’에서 ‘c’가 탈자된 것으로 보고 번역했다. 그러나 어떻든 저 문장의 요지는, ‘제한은 그 제한의 위반이 더 영광스럽게 생각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제한을 위반하는 ‘영광’은 존재할 수 없을 터이니 결국 위반의 영광을 위해서 제한이 가해졌다는 말이다! Bullshit!

그런데 저들의 반쏘 악의는 이 개소리를 근거로 이렇게 얘기한다.

 

노동의 이동에 대한 이러한 제한들이 노동자들을 특정한 생산수단에 결박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그들은 임금노예들이었다기보다는 산업농노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44)

그런데 저들은 역시 미덕을 발휘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국가가 저들을 특정한 생산수단에 결박된 ‘산업농노’로 만든 게 아니라, 국유기업의 경영진과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공모하여’ 그렇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역시 특유의 기괴한 논리로 이렇게,

 

실제로는 노동자들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정도로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데에 자유로웠다는 사실은 노동력을 비축하기 위한 국유 기업들의 경영진의 전략에서 볼 수 있다. 실로, 국유 기업들의 경영진들은,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에 충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노동자들의 이동에 대한 제한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적극적으로 공모(共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법률적 제한은 단지 이런 것, 즉 자신들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데에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노동자들을 제한하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이 사악한 궤변! 경영진들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공모하여 노동력의 이동 제한을 극복했다는 말은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사기이다! 저들은 지금 농노해방이나 농민층의 분해를 위해 노동자들과 공모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조건, 즉 농노의 해방도 농민층의 분해도 과제로 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기업의 경영진이 노동력을 비축(hoard)한다는 얘기는 바로 자신들이 확보한 노동력의 이동을 제한한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저들에 의하면, 바로 그 제한을 노동자들과 공모했다는 것으로 된다! 노동자들이 ‘산업농노’가 되기를 자청한 것으로 된다!

한편, 저들은, 쏘련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분명 자본주의적 임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외관상 ‘연금’처럼 나타났던 것, “그것이 말하는 모든 것은 쏘련에서의 노동계급의 특수한 힘, … 중요한 의미를 갖는 힘이다(All that it indicates is the particular power of the working class in the USSR that, …, was to have important implications)리고, 역시 그 미덕을 살려 말하고 있다. 결국, 저들에 의하면, 쏘련의 노동자들은 특수한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힘을 가진 농노ㆍ노예였던 셈이다. 그 힘의 일면을 저들에 따라 다시 소개하자면, 예컨대, 이런 것이다.

 

… 국유 기업들의 경영진에게는 노동력을 통제할 당근도 채찍도 없었다. 실로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 대하여 상당한 정도의 부정적 통제[부정적 통제? 이 진한 악의!: 인용자]를 행사할 수 있었다.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국유 기업들이 노동력 [확보: 인용자]에 필사적이었던 완전고용의 조건에서는 해고(sack)45)는 비효과적인 제재조치였다.

 

아무튼 이 정도면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쏘련에서의 노동력의 매매를 얼마나 훌륭히 입증 내지 논증했는지가 명백해졌을 것이다.

과거 쏘련에서 노동자들의 수입이 ‘임금’이라고 불렸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가치규정이 지배하기 때문이지 그 생산관계가,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본-임노동관계이기 때문이 아니다.

고도로 사회화된 사회주의의 대규모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자신의 노동, 그 노동량에 대한 증서를 받고, 그 증서가 사회적으로 집적ㆍ관리되는 소비수단의 폰드로부터 소비수단을 끌어내는 청구권이 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저들은 외관상의 형태를 들어 그것이 바로 노자관계임의 증거, 쏘련이 자본주의 사회였던 증거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렇다면, 저들로부터, 그리고 마찬가지로 김수행 교수로부터 그러한 혐의를 받지 않는 ‘자개연’, 즉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혹은 ‘자유롭게 연합한 개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46)

자못 궁금하고 또 궁금할 따름이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고백
  ― 결론을 대신하여

 

수도 없이 본 것처럼,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특이한 사고, 특이한 서술은 저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반대증거들, 그들의 주장과 논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보여 주는 증거들을, 그 형태야 어떻든, 그러니까 때로는 그 자체로서 명백한 형태로, 그리고 때로는 은폐되고 뒤틀린 형태로, 사실상 거의 모두 저들 스스로의 글이 제공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러한 특이한, 미치광이 악마와 같은 서술방식이 제공하는, 저들의 사악하게 뒤틀린 정치적 고백을 들어보자.

저들은 이렇게 쓰면서, 즉 이렇게 고백하면서 자신들의 “saga”, 곧 무용담 혹은 모험담 내지 장황한 소설을 끝맺고 있다.

 

… 국제적 가치법칙의 지배에의 러시아의 재종속(Russia[’s: 인용자] re-subordination to the dictates of the international law of value)으로 러시아 경제의 일부는 물물교환경제(barter)로 되돌려졌고, 다른 부분은 … 마피아 자본주의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IMF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자본주의로의 이행의 수렁에 빠져 있다.

 

저들이 이 고백 전에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든, 그리고 어떤 의도로 이렇게 고백하든, 이 인용문의 내용은, 물론 모든 게 발전한다는 걸 고려하면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는 저들은 이렇게도 고백하고 있다.

 

코소보 전쟁과 관련한 마지막 호(號)에서 본 것처럼,47) 러시아라는 문제는 지정학적 무대에서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동유럽 블록(Eastern bloc)을 해체하여 자본주의 세계 구조 속에 재통합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찾아야 할 문제의 하나이고, 특히 러시아 그 자체의 경우 더욱 그렇다.

 

“동유럽 블록(Eastern bloc)을 해체하여 자본주의 세계 구조 속에 재통합하는 문제는 아직도 해결을 찾아야 할 문제의 하나이고, 특히 러시아 그 자체의 경우 더욱 그렇다.” ― 그렇다! 바로 그래서 당신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문제, 소련 문제에 그토록 열심히 매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들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제1부에서 지적한 것처럼, 러시아 혁명과 최초의 ‘노동자 국가’의 설립은48) 세계정세에 깊은 충격을 주어왔다(…the Russian Revolution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workers state’ has had a profound impact in shaping our world).49) 처음에는 러시아 혁명의 명백한 성공이 자본주의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공산주의는 아닐지라도― 사회주의 사회가 그 잔해 위에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투쟁하고 있는 수세대(數世代, generations)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을, 그들의 목표와 방법을 명확히 보여 주면서, 고무했다. (강조는 인용자)

 

자, 강조한 부분에 유의하면서 보자면, 위 인용문은,

명확히 러시아 혁명이 타도했던 것은 자본주의였으며, 건설한 것은 노동자 국가, 사회주의 사회였음을 저들은 고백ㆍ증언하고 있다. ― 그래서 저들은 쏘련은 ‘국가자본주의’였다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저개발ㆍ후진성으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있었다고 미친 듯이 왜장쳐야 한다!

그리고 저 인용문은 특히, 러시아 혁명의 충격 혹은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와 싸우고 있는 사회주의자들 및 노동자들에게 준 고무ㆍ감화는 결코 단발성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친 것, 수세대에 걸친 것이었음을 증언ㆍ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무ㆍ감화는, 물론 저들의 미친 듯한 반쏘ㆍ반공 책동을 포함한 여러 이유로 과거와 같지 않지만, 아직도 지속되고 있고, 또한 언제 폭발할지 모를 휴화산과 같이 잠복해 있기도 하다. ― 그래서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더욱 분주하고 미쳐 날뛴다! 이렇게 …

 

그 후진성과 세계적 분업 속에서의 종속적 지위를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 후 형성된 국가 관료배는 국가자본주의라는 이행형태를 통해서 자본주의로 이행을 추구했다. 산업화하려는 노력 속에서 러시아 국가는, 화폐 및 상품자본이라는 보다 더 세계적이고 공황에 시달리는 형태의 억압을 요구하는 생산자본의 억지 발전을 추구했다.

 

그런데 여보시오, 좌익공산주의자님들, 방금 앞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고 그 대안으로, 비록 공산주의는 아닐지 몰라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자본주의와 싸우는 “수세대”의 사회주의자들 및 노동자들을 고무했다더니?!

그리고 혁명 후 러시아ㆍ쏘련의 기술적 생산방식이, 당신들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고 있는 그 생산방식이 비(非)기계제적, 수공업적인 그것은 아니었지 않소?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을 체현하고 있는 기계제 대공업의 생산방식이었지 않소? 그러한 고도의 생산력을 가진 자본주의인데도 ‘국가(적)’이라는 규정으로 공황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야? 그런 자본주의가 있을 수 있다고야??? 이 개차반만도 못한 양반들아!50)

 

*          *          *

 

마지막으로 나는 한국의 내로라 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최대의 찬사, 최대의 경의로 이 글을 맺고 싶다.

 

“‘현실 사회주의’를 아직도 혁명의 허상으로 붙들고 있거나, 스딸린주의를 교조로 삼는 사람들이 맑스주의자들이라면, 이 글과 같은 분석을 내놓기를 바랄 뿐이다”면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자”면서, 이 ‘책’을 ‘번역’ㆍ출간하신지도 벌써 5년. 이 격동하는 시대에 5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여직껏,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겠으되, 한국의 그 많은 내로라하는 ‘진보적 지식인들’ 중 누구 한 사람 좌익공산주의자들과 오세철 교수님의 이 “훌륭한 글”에 가타부타 언급하고 나섰단 얘기를 듣지 못했다. 저들 ‘진보적 지식인들’의 넓고도 높은 인품에, 그 소부르주아적 인품에, 그 패거리주의적 인품에 최대의 존경의 염(念)을 표한다!

 


 

1) 여기에서부터는 오세철 교수님의 기똥찬 ‘번역’을, 정 보아 넘기기만 할 수는 없는 경우 가끔 심심파적으로 예시는 하되, 기본적으로는 무시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참고로, “가치의 불구화(deformation of value)”의 deformation은 ‘기형화’로도 번역 가능하나, 오세철 교수를 따라 ‘불구화’로 번역한다.

 

2) 저들은 “마지막 논문” 제4부를 “So our saga on the nature of the USSR draws to a close. (그리하여 쏘련의 본질에 관한 우리의 saga는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로 시작하고 있다. 이때 saga는, 분명 본래의 북유럽의 전설이 아닐진대, 무용담ㆍ모험담ㆍ대하소설 등의 뜻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저들 필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장황한 헛소리에 대한 꽤나 적절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3) 미리 말해두자면, ‘가치법칙이 불구화되어 있는 자본주의’란 무슨 의미인가? “가치법칙이 불구화되어 있는” 따위의 표현, 무언가 그럴듯한 어구로 부정직한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지식야바위꾼적 표현을 걷어내면, 그것은 ‘가치법칙이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 자본주의’, 보다 정확하게는 ‘시장 없는 자본주의’ 바로 그것이다! 좌익공산주의자들답게 얼마나 과학적인 자본주의 규정인가!

 

4)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스딸린 하에서의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강제적 집산화는 전통적 공동체를 깨뜨리고 산업화된 대중사회의 출현은 원자화된 개인과 가족을 형성했다.” (p. 163.)

 

5) “실로, 완전고용은 스딸린 이래 쏘련의 정치적ㆍ사회적 결속을 유지하는 중요한 한 요인이 되었다(Indeed, full employment became an important element in the maintenance [of: 인용자] the political and social cohesion of the USSR from Stalin onwards).”; 점착ㆍ합착ㆍ결합ㆍ결속ㆍ응집력 등을 의미하는 ‘cohesion’은 결코 ‘원자화된(atomised)’과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6) 참고로, 이 “쏘련의 가치분석(value-analysis of the Soviet Union)”이라는 표현은, “쏘비에뜨 체제의 가치분석(value-analysis of the Soviet System)”, 혹은 “가치형태들의 쏘련을 분석하다(analyse the USSR of value-forms)” 등으로 형태를 바꾸면서 이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저들이 아무리 심히 미쳤기로서니 설마 쏘련 그 자체를 가치 혹은 가치물로 보거나 쏘련에 의한 가치분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각각 “쏘련에서의 가치분석(value-analysis in the Soviet Union)”, “쏘비에뜨 체제에서의 가치분석(value-analysis in the Soviet System)”, “쏘련에서의 가치형태들(… value-forms in the USSR)” 등으로 이해하자.

 

7)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물론 유명한 평의회공산주의 이론가인 폴 매틱이 가치의 쟁점을 보았을 때 그의 이론적 정체성과 함께 전통적 맑스주의 가정들은 가치가 소련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국가자본주의의 독일 좌파이론을 손상시키게 했다.” (p. 164.)

 

8) 저들의 어법,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였다”가 여기에서는 왜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적이었다”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는 수수께끼다.

 

9)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물론 소련이 어떤 의미에서 자본주의였다는 어떤 이론도 자본주의를 단순히 사유재산과 ‘시장의 무정부성’에 근거한 이윤추구체제로 보는 정통 맑스주의에 대한 거친 해석을 거부해야 한다.” (p. 164.)

 

10) “자신들의 장래의 생산수단(their future means of production)”?

 

11) 그리고 우리의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앞에서 보았듯이, 서슬 퍼렇게 외치신다, 이렇게! ― “‘현실 사회주의’를 아직도 혁명의 허상으로 붙들고 있거나, 스딸린주의를 교조로 삼는 사람들이 맑스주의자들이라면, 이 글과 같은 분석을 내놓기를 바랄 뿐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말자.”!

 

12) ≪노동사회과학≫ 제6호, pp. 29-30 참조.

 

13) “직관적으로 올바르다”가 “intuitively correct” 대신에 원문엔 “intuitive correct”로 되어 있으나 명백히 탈자(脫字)에 의한 오류일 것이다.

 

14)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헤겔과 친숙한 사람은 ‘본질은 나타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p. 166.)

 

15)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374.

 

16) ‘possession’은 ‘소유(권)’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또 오세철 교수님께서도 그렇게 ‘소유’로 번역하고 계시지만, “주요 생산수단들을 모두 국가가 소유하긴 했지만, 생산수단의 현실적인 합법적 소유와 운영은 국유 기업들과 국유 트러스트들에 맡겨져 있었다”라고 한다면, 글쎄 제정신일까?

 

17) 여기에서 굳이 원문을 보여 주는 것은, 내 생각에는, 그것이 역시 현학적이고자 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다운 비논리적 서술이고, 뒷부분만을 적자면, “… 그 각각은 자신의 회계와 생산 책임을 가진 별개의 법률적 실체였다(each of which was a distinct legal entity with its own set of accounts and responsibilities for production)”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18) ‘distinct’를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특유한” 혹은 “특정”이라고 번역하고 계시지만(p. 198), 그리고 나로서는 이는 온당한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번역ㆍ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지적에 대한 반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19) ≪자본론≫ 제2권, MEW, Bd. 24, S. 137.

 

20) 물론, 그 특유의 기상천외한 ‘번역’ 덕분에, 좌익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자로서는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서’만을 읽어서는 저들이 도대체 무슨 말씀들을 하고 계신지 분명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터이지만!

 

21)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소련사회는 서구자본주의와 같이 덜 원자화되고 물상화된 것처럼 보였다.” (pp. 200-201.); 참고로, 이 문장 중의 ‘reify’는 나로서는 어떻게 번역해야 좋을지 난감한 표현인데, 일단 오세철 교수님을 따라서 ‘물상화되다’로 해둔다.

 

22) 원문에 이 부분은 ‘first of’로 되어 있는데, ‘first of all’에서 ‘all’이, 혹은 ‘first off’에서 ‘f’가 탈자된 것으로 간주하여 이렇게 ‘우선’으로 번역한다.

 

23) 내가 왜 ‘논하고 있다’고, 따옴표를 붙이는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24)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생산자의 분화를 극복하는 필요수단은 상품생산의 사회분업으로부터 나온다.” (p. 203.)

 

25)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그러나 시장의 외부권력이 사회를 형성하는 개인들의 사회적, 기술적 필요를 충돌하게 하지만 국가의 외부권력은 그렇지 않다.” (p. 204.)

 

26)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이러한 프루동주의자의 제안을 비판하면서 맑스는 독립적 상품 생산자의 사회에서 화폐는 반드시 모든 다른 상품들과 구별되는 독립적 가치형식을 가정하고 있다.” (p. 205.)

 

27)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이러한 방식으로 시장에 의한 생산의 규제는 노동이 즉각적으로 사회적으로 만드는 사회적 계획으로 대체될 수 있다.” (pp. 205-206.)

 

28) 저들이 “입증해온 것”이라고 하는 것, 사실은 그냥 떠들고 선언해온 것 중의 하나는, 러시아는 그 저발전(underdevelopment) 때문에 10월 혁명 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이행했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국가가 산업발전을 억지로 발전시켰다는 것, 그리하여 그 자본주의의 성격 내지 유형이 ‘국가자본주의’였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에서 산업화하는 ―그리고 따라서 자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유일한 길은 국가와 자본의 융합을 통해서였다 ― 즉, 국가자본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통해서였다.” 쏘련에서 계획이 시장을 대체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에 대한 중상모략ㆍ비방선전이면, 그것이 아무리 근거 없는 악의의 산물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회가 극우언론ㆍ극우인간쓰레기들에게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이듯이, 저들이 제멋대로 떠드는 것,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제멋대로의 악의적 반쏘 선전도 제국주의 부르주아 사회가 저들에게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일 터이다. 맘껏 즐겨라. 지금은 당신들의 세상이니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임을 잊는 것도 당신들의 자유일진대!

 

29) 원문에는 ‘classes’로 되어 있으나, 명백히 탈자일 것이다.

 

30)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국가계획의 명령은 경쟁적 시장의 외부적 명령처럼 외부의 힘으로 생산자에게 주어졌다.” (p. 206.); 참고로 말하자면, 이 문장의 ‘imperatives’ 역시 ‘force’와 마찬가지로 ‘강제(력)’으로서 이해ㆍ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31) 이는 물론 “자개연(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운운하면서 “쏘련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였다”(김수행,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한울, 2012)고 주장하는, 저 저명한, ‘≪자본론≫ 번역가’ 김수행 교수님 등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32) 지난 9월 하순 어느 날,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울시청 앞 집회에 참가한 어느 노부부는, 그 생김새로 보아 자신들이 손수 무언가 하얀 판때기에 매직펜으로 써서 만들었음에 분명한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그 피켓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너희가 죽였지? 그래서 수사권ㆍ기소권 막는 거지? 아니면 세월호법으로 증명해봐

 

33)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그러나 완전하게 발전된 자본주의 아래에서 이러한 순환은 깨어지고, 즉 구매 없는 판매 또는 판매 없는 구매가 되는 반면 소련에서는 이것이 국가계획에 의해 배제된다.” (p. 206.)

 

34) 한국에서는 ‘다함께’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노동자연대’로 이름을 바꾼 자들.

 

35) 물론 똑같이 ‘쏘련’(USSR)이라고 불리지만 1956년 쏘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이전의 그것과 그 이후의 그것은 그 발전의 기본적 성격, 기본적 방향에서 판이하다. 그러나 반쏘ㆍ반공주의자들이 스딸린주의 운운하며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쏘련’은 주로 1956년 이전의 쏘련, 그러니까 스딸린 지도 하의 쏘련이고, 그것을 나름대로 이념형화한 쏘련이다. 따라서 당장의 우리의 논의도 당연히 그러한 쏘련, 그렇게 이념형화된 쏘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36)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859.

 

37) 즉, 선언해온 것처럼.

 

38) 문장 중의 ‘had to be articulated’를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명료하게 표현되어야 한다”고 ‘번역’하시고 계시지만, 나로서는 번역할 방도가 없다.

 

39)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그 결과 비화폐적인 사회관계가 보존되어야 했다.” (p. 210.)

 

40) 그리고 물론 미국ㆍ영국ㆍ프랑스 등 ‘민주국가’의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은 히틀러의 나찌를 부추겨 저 쏘련을 말살할 것인가에 골몰했다. 그것이 제2차 대전을 앞둔 1930년대, 자본주의 대공황기의 세계정세의 주요 특징의 하나였다.

 

41)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61.

42)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73.

 

43)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의 ‘번역’: “그러나 면밀히 살피면 노동의 움직임에 대한 이러한 법적 제약은 그 시행보다는 그 불이행에 있어서 더 의미가 있는 존재하는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p. 212); 무엇보다도 원문의 “exiting situation”을 기상천외하게도 “존재하는 상황”으로 번역하고 계시다.

 

44) 물론 저들은 여기에서는 쏘련의 노동자들이 “임금노예들이었다기보다는 산업농노들이었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그들이 ‘산업농노이자 노예였다’는 악담을 서슴지 않는다.

 

45) 심심파적.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이번엔 이 ‘sack’을 기상천외하게도 “착복”(p. 215)이라고 ‘번역’하고 계시다. 전번(p. 88)에는 “약탈”이라고 ‘번역’하시더니!

 

46) 저들이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혹은 고도의 공산주의로의 사회주의의 이행단계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독재’ 운운하며 거부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다루지 않는다.

 

47) 이건 물론 지금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48) 담백하게 “노동자 국가의 설립은”이라고 말하는 것을 저들의 반쏘 심성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소위 노동자 국가의 설립은”이라는 의미로 “노동자 국가”를 따옴표로 묶고 있다.

 

49) 좀 좀스럽게 들리지 모르지만, 주지하는 것처럼, 영어에는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유럽어 일반에는) 동사 변화에 과거형과는 다른 ‘…완료형’이라는 게 있고, 그 표현의 차이가 중요할 때가 많다. 그리고 이 경우가 그렇다.

 

50) 나는 이 경멸을, 쏘련 사회가 무언가의 형태의 수공업적 생산에 기반한 사회였음을 증명하지도 못하고, 주기적인 공황에 시달리고 있었다고도 증명하지 못하면서,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 모든 ‘쏘련=자본주의’론자들에게 보낸다. 물론 그들 중 누군가가 그 둘 중 하나, 즉 쏘련이 수공 생산 사회였다든가, 주기적 공황에 시달린 사회였다고 입증한다면, 내가 그들에게 보낸 경멸은 그 몇 배로 증폭되어 나에게 쏟아지게 될 것이고, 나는 기꺼이 그런 경멸을 감수할 것이다!

 

채만수 소장

1개의 댓글

  • 좌익공산주의의 결함과 더불어, 맑스경제학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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