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950년대 인도공산당의 노선갈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 ― 인민민주주의 대 평화적 이행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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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ras), 뜨라반꼬레-꼬친”

 

이병진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

 

 

[편집자 주]

이 글은 이병진 동지께서 감옥에서 하나하나 수기로 작성한 원고를 교정한 것이다. 명백한 오류를 수정하고 글의 전체적인 맥락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편집자의 교정이 있었음을 밝힌다. Victor. M. Fic, Peaceful Transition to Communism in India 인용문 번역은 이병진 동지가 보내준  원문과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부분적으로 다소 불명확한 내용이 있지만, 이병진 동지가 출소한 이후의 과제로 남겨 둔다. 감옥에서 국가권력과의 힘겨운 투쟁 중에도 원고를 완성해주신 이병진 동지와 원고를 받자마자 한달음에 타이핑을 해준 배은주 동지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최상철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차례

 

1950년대 인도공산당의 노선갈등에 대한 역사적 고찰

─ 쏘련공산당의 간섭과 인도공산당의 우경화 ─

 

 

1. 시작 글

 

2. 1951년 모스끄바 강령과 전술지침 ; 인민민주주의노선

 

(1) 라나디베(Ranadive) 분파의 극좌모험주의

(2) 라제시와르 라오(Rajeshwar Rao)의 농민게릴라

(3) 인민민주주의노선 ; 모스끄바 강령과 전술지침

(4) 1952년 총선거에서 인도공산당의 약진

 

3. 쏘련공산당의 수정주의와 인도공산당의 노선갈등

 

(1) 1953년 제3차 전당대회 ; 민족민주연합전선

(2) 쏘련공산당의 데땅뜨와 인도공산당의 혼란

(3) 인도공산당의 우경화 ; 1955년 6월 당중앙집행위원회 회의

(4) 1956년 제4차 전당대회 ; 평화적 이행으로

 

4. 나오는 글

 

 

1. 시작 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제국주의자들과 민족부르주아 정당인 인도국민회의 간의 정권이양을 위한 정치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전 인도는 새 국가 건설에 대한 기대감으로 드높았다. 식민지배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 받았던 노동자, 농민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한편 혁명운동을 고양시켰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도공산당은 정권이양을 독점하고 있는 인도국민회의에 맞서 혁명전략과 전술을 갖고 싸워야 하는 중요한 임무가 주어졌다.

인도의 인민 대중들은 스스로를 조직하여 혁명 대오를 만들었다. 1946년에 일어난 뗄랑가나(Telangana) 농민봉기는 당시 대중들의 그런 높은 혁명적 열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도공산당은 그런 대중들의 혁명적 요구에 제대로 조응하지 못했다. 당시 인도공산당은 강령조차 갖고 있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혁명이행 전략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였다. 1950년대 초 인도공산당 내에는 혁명 주력군이 노동자계급인가, 농민계급인가를 두고 노선갈등이 있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네루 정권을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두고 혼란이 있었다. 이 논란은 계속 이어져, 결국 1964년에 인도공산당이 분열되었다.

이 글에서는 1950년대에 있었던 인도공산당의 내부노선 갈등과 투쟁이 왜 일어났으며, 인도정치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식민지 피지배 경험이 있는 국가들에서의 민족해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보다 풍부한 관점에서 재구성하여 이해하게 될 것이다.

1950년대는 인도의 독립으로 억압당하며 살던 피지배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표출되면서 인도공산당에게 객관적으로 유리한 정세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인도공산당은 내부노선 갈등으로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쳤다. 내부 노선투쟁은 수정주의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결국 인도공산당은 부르주아지에게 투항하였고, 피지배계급의 대의를 배신하였다. 수정주의자들은 인도공산당의 연합전술이 네루의 비동맹노선을 반제국주의전선으로 견인하고 사회주의식 계획경제 발전을 채택하도록 인도의 지배층을 압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인도공산당은 ‘혁명노선’에서 ‘평화이행노선’으로 전환하면서 부르주아계급의 공격에 맞서 싸울 물리적 기반(혁명무력)을 포기하였다. 이것이 인도공산당의 실패의 연원이다.

인도공산당이 내부노선 갈등에 휩싸여 분열한 근본 원인은 사상적 사대주의(事大主義)였다. 인도공산당의 지도부는 인도 현실에 맞는 혁명노선을 추구하기보다는 쏘련공산당을 찾아다니며 승인이나 얻으려는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인도 혁명의 전략과 노선을 쏘련공산당에게 물어보고 쏘련공산당의 후광을 얻으려 하며 권력 추구에 급급하였다.

1950년대 초 인도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투쟁의 실패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인도 혁명노선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인도공산당은 지도부의 사상적 사대주의 때문에 끊임없이 동요하였다. 이 글은 이와 같은 인도공산당의 문제점을 1948년 제 2차 인도공산당대회부터 1956년 제4차 인도공산당대회 시기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2. 1951년 모스끄바강령과 전술지침; 인민민주주의노선

 

1948년 제2차 인도공산당대회에서 즉각적인 혁명전쟁 노선을 채택하여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도시노동자를 중심으로 전위대오를 구축한 인도공산당의 투쟁은 네루정권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고, 인도공산당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더군다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위 전략은 농민들의 토지개혁 요구에 즉각적으로 호응하지 못함으로써, 당의 대중적 기반을 축소시켰다. 이로 인해 당이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자, 인도공산당 지도부는 1951년 모스끄바에 가서 스딸린과 함께 인도공산당의 노선에 대해서 진지한 토론을 하였다.

그 토론의 결과 인도공산당은 인민민주주의노선을 인도공산당의 총노선으로 정하고 전술지침을 내왔다. 이때 채택된 모스끄바 강령과 전술지침은 인도공산당의 극좌모험주의 경향을 바로잡고 인도공산당을 대중투쟁으로 발전시킨 중요한 방향전환이었다. 이 장에서는 모스끄바 강령과 전술지침이 나오게 되는 역사적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본다.

 

(1) 라나디베(Ranadive) 분파의 극좌모험주의

 

1942년 인도철수운동(Quit India Movement) 과정에서 투쟁의 주도권을 민족부르주아계급에게 내준 인도공산당은 대중들의 지지를 회복하는 게 중요한 정치적 과제였다. 인도공산당 총비서 조쉬(P. C. Joshi)는 대중들이 인도공산당에 대해 갖고 있는 반민족적이라는 평판을 잠재우고, 인도공산당을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대중정당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도공산당의 라나디베 분파를 중심으로, 즉각적인 혁명전쟁을 일으켜서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극좌모험주의가 급부상하였다. 이들은 조쉬의 대중노선을 우익수정주의노선이라고 비판하며, 즉시 국민회의 정부를 전복시키는 전면적인 혁명전쟁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1945년 인도독립 후 도시노동자들의 파업과 뗄랑가나 지역의 농민투쟁이 급진화되면서 점점 더 영향력이 커졌다.

라나디베의 혁명이론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와 까르델(Kardelj)의 ‘상호결합혁명(Intertwined Revolution)’이론에 기초한 것이다. 이 이론은 민족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상호 결합하여 짧은 시간에 단 한 번의 혁명으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라나디베도 유고슬라비아처럼 인도에서 노동계급을 주력군으로 하고 농민군을 연합세력으로 끌어들여 민족부르주아 세력을 타도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1947년 9월 폴란드에서 열린 꼬민포름1)에서 쏘련 측 대표 쥐다노프(A. A. Zhdanov)는 공산주의자들은 반제무장투쟁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광범위한 ‘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정세분석과 인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나디베와 급진좌파 세력들은 조쉬를 계급협조주의자로 공격하면서 당내 노선갈등을 촉발시켰다. 라나디베 분파는 1947년 12월 7일부터 16일까지 봄베이에서 열린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이듬해인 1948년 2월에서 3월까지 캘커타에서 열린 제2차 인도공산당대회에서 조쉬를 총비서에서 몰아내고 당권을 장악하였다.

제2차 당대회에서는 유고슬라비아 고위 대표단인 블라지미르 데지예르(Vladimir Dedijer)와 라도반 조코비치(Radovan Zokovic)가 참석하여 상호결합혁명 전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2) 그리고 ‘인도공산당 정치테제(The Political Thesis of the Communist Party of India)’를 발표했는데, 그 핵심 내용은 네루정권 타도를 위한 혁명전쟁에 돌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나디베와 극좌모험주의 분파의 혁명전쟁은 당시 인도의 현실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공허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인도공산당은 반파시즘 전선에 동참한다는 명분 때문에 반영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바로 그 때문에 인도 인민들은 인도공산당이 아니라 인도국민회의를 보다 지지하였다. 게다가 독립 직후 인도의 혁명적 열기는 도시노동자가 아니라 농민들 사이에서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 조건에서 도시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전쟁으로 민족부르주아 정권을 타도하겠다는 것은 비현실적이었고 불가능하였다.

라나디베는 명목적으로는 ‘민족민주혁명(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민족부르주아 타도 혁명운동을 수행하려 하였다. 라나디베의 극좌모험주의노선으로 인도공산당은 네루정권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조직화된 농민군은 네루정부군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내부 혁명역량이 소진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도 전체의 총파업을 유도하기 위해서 벌인, 1949년 3월 9일 철도 총파업은 성과를 얻지 못했고, 당시에 가장 선진적이었던 철도노조의 와해만 가져왔다. 네루정권은 즉시 인도공산당을 비합법시켰고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는데, 9만 명에 이르던 인도공산당원이 1951년에는 1만 8천 명으로 급격하게 줄었다.3) 도시노동자들을 주력으로 하는 라나디베의 민족민주혁명은 그 협소한 계급주의 관점으로 인해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2) 라제시와르 라오(Rajeshwar Rao)의 농민게릴라

 

인도의 독립 직후 여러 지역들에서 많은 농민봉기가 일어났지만, 가장 성공적인 농민봉기는 뗄랑가나 투쟁이었다. 뗄랑가나의 대부분은 봉건 왕 니잠(The Nizam of Hyderabad)의 영역이었다. 뗄랑가나 농민들은 봉건지배의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자발적으로 농민군을 조직하여 니잠과 싸웠다. 이슬람교도인 니잠은 파키스탄을 지지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인도공화국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적인 봉건 왕국을 만들겠다고 선포하였다. 뗄랑가나 농민들은 1946년부터 낡은 봉건지배체제 유지 시도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만들어 농민해방구를 건설하였다. 이 시기에 농민해방구는 3천 개 이상의 마을에 건설되었다4).

당시 안드라 쁘라데쉬(Andhra Pradesh) 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은 라나디베의 좌경노선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뗄랑가나 농민투쟁의 성과들을 근거로 인도 현실에 맞는 혁명은 농민군을 주력군으로 내세워 도시를 포위해 들어가는 중국의 마오주의 노선이라고 주장하였다. 마오주의 혁명노선을 지지하는 그룹을 이끈 핵심 지도자가 라제시와르 라오였다. 그를 중심으로 인도공산당 안드라 쁘라데쉬 지역위원회는 안드라 테제(The Andhra Thesis)를 1948년 6월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안드라 테제는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거부되었고, 제2차 인도공산당 대회에서는 라나디베 노선이 채택되었다. 그렇지만 1949년 중국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함으로써 농민게릴라 전술을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까지 6주 동안 마오쩌둥이 모스끄바를 방문하였는데, 이후 코민테른도 인도의 좌경모험주의 노선을 비판하였다. 1950년 5월에 라제시와르 라오는 그런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여론을 배경으로 라나디베를 탄핵하고 인도공산당 총비서가 되었다. 라제시와르 라오는 인도공산당의 기관지인 ≪공산주의자(Communist)≫ 1950년 7ㆍ8월 호에 “마오쩌둥 동지에 대한 반레닌주의적 비판에 부치는 ≪공산주의자≫ 편집위원회의 성명(Statement of the Editorial Board of the Communist on Anti-Leninist Criticism of Comrade Mad Tse-tung)”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의 혁명은 여러 측면에서 고전적인 러시아혁명과는 다르고, 엄청난 정도로 중국혁명과 비슷하다. 그 전망은 농촌지역의 해방을 이끌기 위해서 총파업이나 총궐기가 아니라, 민주전선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끝이 나는 끈덕진 저항과 장기적인 농민혁명의 투쟁 형태이어야 할 것이다.”5)

 

인도 혁명의 주력이 노동자계급이냐 농민이냐를 둘러싼 인도공산당 내부의 노선투쟁은 뗄랑가나 농민게릴라 투쟁에서도 나타났다. 인도군이 뗄랑가나 농민군에 대한 진압 작전에 본격적으로 나서자 농민게릴라 투쟁전술을 둘러싸고 내분에 빠졌다. 네루정권은 인도공화국과 합병을 거부하는 하이데라바드 왕국과 협상을 하느라 군대파병을 보류했었다. 그러나 니잠 왕이 완강히 버티자 1948년에 인도군을 파병하여 무력으로 통합시켜버렸다. 뗄랑가나 공산주의자들은 농민게릴라 투쟁을 지속할지 또는 말지 고민하였다. 농민 무장투쟁에 대한 네루정권의 탄압은 혹독하였다. 공산당지도부가 검거, 투옥되었으며, 현대화된 인도군에게 보잘것없는 무기들을 갖고 싸우는 농촌게릴라는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또한, 니잠 왕이 네루에게 항복하고 인도공화국에 편입하기로 하자, 한때 농민봉기를 지지했던 부농과 중농들을 중심으로 뗄랑가나 농민투쟁의 명분이 없어졌다며 투쟁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중국식 무장투쟁 전략이 인도에서는 비현실적이라는 여론이 인도공산당 내부에서 강하게 일어났다.

한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네루는 중국을 지지하고 미국을 침략자라고 맹비난하였다. 이런 네루의 외교정책은 중국과 쏘련의 주목을 받으며 인도공산당의 입지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사회주의진영에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핵무기로 무장한 미제국주의에 맞서는 평화운동이 대두되었다. 영국공산당 당원이며 꼬민포름의 명망가인 팜 두트(Palme Dutt)는 인도공산당 지도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네루의 비동맹노선을 지지하고 민족부르주아 세력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National Democratic Front)을 제안하였다.6)

이 편지를 계기로 ‘민족민주전선’은 인도공산당의 화두가 되었으며, 인도공산당의 주요 지도자인, 단게(S. A. Dange)와 고쉬(A. K. Ghosh)가 라제시와르 라오의 농민게릴라 노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다. 특히 그는 그의 연합정부론을 라나디베와 라제시와르 라오가 모두 거부했다며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라제시와르 라오 동지는 개인적인 테러리즘을 당의 정규 활동으로 조직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체계적이고 계획에 기초하여 실행하고자 한다. 반면에 라나디베 동지는 아마추어적이며, 우연성에 의존하고, 무계획적이며, 비일관적이었다. 이것은 합법ㆍ비합법 조합주의도 아니고 노동계급에 끼어든 테러리즘이다. 라나디베는 우리들의 대중 노동조합의 기초를 해체하였고 라제시와르 라오는 개별 투사들을 테러분자로 만들려 하면서 청산주의자의 역할을 한다.”7)

 

비록 농민게릴라 전술을 지지하는 라제시와르 라오가 당의 총비서였지만, 그의 노선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1950년 12월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의 노선에 대한 합의에 실패하자 모스끄바로 당대표단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식 혁명론을 지지하는 단게와 고쉬 그리고 중국식 농민혁명론을 지지하는 라제시와르 라오와 바싸반뿌니아가 인도공산당의 대표로 모스끄바를 방문하였다. 스딸린과 인도공산당은 인도공산당의 노선갈등에 대해서 토론하였고 그 결과물로 새로운 당 강령초안(An Outline of a new Draft Programme of the Party)과 전술노선(the Tactical Line)을 도출해냈다.

 

(3) 인민민주주의노선; 모스끄바 강령과 전술지침

 

인도공산당은 내부의 노선갈등과 분열로 인해 스스로의 힘으로 당의 강령조차 정하지 못해 스딸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비록 인도공산당 스스로 사상노선을 정립한 것은 아니었지만, 모스끄바 강령은 당시 국제공산주의 투쟁의 역사적 교훈을 참고하여 인도 현실에 기초한 당의 강령과 전술적 지침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쓰딸린의 지도하에 인도공산당 지도자들은 러시아식 혁명과 중국식 혁명 모두 인도의 현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깨닫고, 인도식 ‘인민민주주의’노선을 당의 새로운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면서 전술지침으로 노동계급과 농민계급이 동맹을 맺는 ‘연합전선’을 전술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그런 단결에 기초하여 민족부르주아들과 싸워 인민민주정권을 건설해야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와 동시에 선거에 참여하여 부르주아 계급의 반동성을 폭로하고 대중들이 갖고 있는 부르주아에 대한 환상을 깨는 일도 중요한 전술지침으로 평가하였다.

이런 전술지침은 그동안 인도공산당이 혁명전쟁 전술에 매몰되어, 선거 참여를 거부하여 대중들로부터 고립되는 오류를 바로잡고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또한 노동자계급과 농민 그리고 모든 피억압 대중들을 위한 인민민주국가 건설이라는 당면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모든 진보적 세력이 인도공산당을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게 하였다. 모스끄바 전술지침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도공산당의 강령 초안을 만드는 데 있어서 당면한 주요 목표들은 봉건주의 청산, 봉건 지주가 소유한 모든 토지들을 농민과 농업노동자들에게 분배, 그리고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이다. 이런 목표들은 평화적이고 의회주의적 방법으로는 현실화 될 수 없다. 이들 목표들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 오직 지금의 인도 국가를 전복시킴으로써, 그리고 그것을 인민민주국가로 대체시킴으로써 현실화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공산당은 전체 농민들과 노동계급을 봉건 착취자들과 투쟁하게끔 불러 일으켜야 하고 노동계급과 농민들 사이의 동맹을 강화시키며 모든 반제국주의 계급들(민족부르주아를 포함하여), 계층들, 그룹들, 정당들과 그리고 인도의 민주주의와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는 구성원들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민족적 범주세력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게끔 분투해야 한다.

 

2. 가장 기초적인 유형을 포함하여 모든 유형의 투쟁에 의존해야 하며 대중 동원을 위해 모든 합법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대중들을 투쟁으로 이끌도록 하면서, 공산당은 항상 현재의 인도의 식민지적 구성에 대한 관점을 견지해야 하고, 합법 영역과 의회의 가능성이 제한적이고 진정한 민주적 자유가 부재하므로 지금의 국가를 인민민주국가로 대체하는 일은 오직 인민들에 의한 무장혁명으로써 가능하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당 안에서 이런 무장투쟁의 정확한 성격과 승리를 확정짓기 위해서 해야 할 정확한 형태에 관해서 잘못되고 왜곡된 사상이 퍼져 있다. 제2차 당대회 이후 당내 지도부의 지배적인 경향은 인도경제의 식민지적 성격을 망각하였고, 중국과 다른 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운동들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지 않았으며, 농민투쟁의 엄청난 중요성을 축소하였고 도시나 산업지역들에서 정치적 총파업이 그것 자체만으로 전국적 범위에서 내란을 촉발시킬 것이고 지금의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이론에만 빠졌다.

 

그 뒤에, 중국혁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인도혁명은 중국혁명처럼 똑같이 발전하며 게릴라 전쟁이 핵심이거나 또는 거의 유일하게, 혁명의 승리를 확정짓는 무기라는 이론에 빠졌다. 앞의 이론은 농민대중의 중요성을 축소한 반면에, 뒤의 이론은 노동계급의 중요성과 그것의 행동을 축소하였다. 둘 모두의 전술지침은 인도의 특수한 정세에 관한 무지와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그대로 기계적으로 따른 결과였다.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주요한 전술 지침은 노동계급과 농민과의 동맹이라는 핵심 임무를 거부했던 것이며, 그러므로, 확고한 동맹에 기초한 민족전선연합 건설 임무를 거부하는 것이며, 반제반봉건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거부하는 것이었다.8)

 

모스끄바 전술지침의 핵심은, 1950년대 인도의 정세에서 요구되는 전술은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지도로 광범위한 피착취 대중들을 단결시켜 인민민주정권을 세우는 것이었다. 농민무장봉기도 인민민주정권 수립에 기여할 때 의미가 있는 전술이라고 한정하였다. 또한 대중들의 정치의식 수준이 민족부르주아들의 허구성과 계급적 본질을 이해할 만큼 높지 않기 때문에, 의회정치에 참여하여 인민민주정권 수립에 활용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것은 인도공산당이 선거참여를 전면 거부하고 오직 노동자 총궐기 혹은 농민게릴라전쟁 노선이라는 극단적인 비합법투쟁 노선만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그 오류를 적절하게 비판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모스끄바 전술지침을 토대로 인도공산당 지도부는 모스끄바에서 돌아와 1951년 4월에 “인도공산당 강령 초안(Draft Programme of the Communist Party)”를 만들고 1951년 5월에는 “인도공산당 정책 성명서: 인도는 스스로 자유와 인민의 지배를 위한 길로 갈 수 있다(A Statement of Policy of the Communist Party of India : India will strike its own Path to Freedom and People’s Rule)”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두 개의 문건을 1951년 10월에 인도공산당 특별전당대회에서 통과시켰다. 인도공산당은 특별당대회에서 당면 과제를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인민민주정부 수립으로 제시하고 반제반봉건 세력이 결집하는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 1951년 10월 특별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은 인도공산당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고수하여야 함에도,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발전의 현 단계에서 공산당이 사회주의 건설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인도경제 발전의 후진성과 노동자, 농민, 지식인 대중조직의 취약성을 고려할 때, 우리 당은 현 시기에 우리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 당이 우리나라에서 모든 민주세력과, 반봉건, 반제국주의 세력의 연합이라는 기초를 통해 반민주, 반인민 정부를 새로운 인민민주정부로 대체하는 과업의 기반은 상당히 성숙되어 있다.”9)

 

이로써 인도공산당은 반제ㆍ반봉건 그리고 민주세력이 결집하는 대중정당노선을 당의 총노선으로 정하고 다가오는 1952년 총선거에도 참여하게 된다. 인도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 노선은 당시의 상황에서 혁명무력이 담보되지 못한 상황에서 혁명전쟁을 당의 노선으로 삼았던 인도공산당의 비현실적인 오류를 수정하여 노동자, 농민, 지식인 그리고 진보적인 민족부르주아와 연합하여 네루정권을 쓰러뜨리고 진정한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데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것을 계기로 인도공산당은 대중정당으로 발전하는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민주주의 노선은 한계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인도의 투쟁경험을 총화하여 전술지침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도의 현실에서 인민민주주의 노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서 불명확했고 추상적이었다. 또한 모스끄바 전술을 현실 운동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데에도 심각한 오류가 드러났다. 1951년 5월에 당강령 초안을 발표하면서, 아무 대책도 없이 뗄랑가나 농민무장 투쟁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런 갑작스런 결정은 기층 단위에서 반발을 일으켰다. 그동안 농민무장 투쟁으로 몰수한 토지를 도로 지배계급에게 돌려주는 인도공산당의 일방적인 혁명포기선언은 인도공산당의 새로운 분열의 씨앗이었다. 또한 1953년 스딸린의 사망은 모스끄바 강령과 전술의 입지점을 크게 뒤흔들었다.

 

(4) 1952년 총선거에서 인도공산당의 약진

 

인도임시정부가 영국제국주의에게 1947년에 정권을 이양 받고 헌법을 만들었는데 그 헌법에 의한 최초의 총선거가 1952년 1월에 실시되었다. 인도공산당은 1948년 제2차 당대회 때 선거거부를 당의 공식노선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1951년 10월 특별당대회를 열어 선거참여를 결정하였다. 이것은 총선거를 3개월 앞둔 전향적인 변화였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서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인도공산당은 지배계급에게 별 관심도 끌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간디의 암살로 국민회의 내부의 권력 싸움과 암투가 심했는데 점점 보수화되는 국민회의를 비판하며 국민회의 내부에서 뛰쳐나온 사회민주주의계열 세력의 영향력이 공산당보다 오히려 더 컸다.10)

그런데 놀랍게도 1952년 총선거 결과, 인도공산당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하였다. 당시의 여론은 사회당과 간디의 노선을 따르는 끼싼 마스도르 쁘라자 당(The Kisan Masdoor Praja Party, KMPP)이 많은 의석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선거 결과는 공산당보다 미미한 성과를 거두었다.11)

<표1>은 1952년 총선거 결과와 지지율을 보여준다.

〔표1〕1952년 하원(Lok Sabha)과 지방의원(State Assemblies) 선거결과

〔표1〕1952년 하원(Lok Sabha)과 지방의원(State Assemblies) 선거결과

 

정당

하원의석수(석)

지지율(%)

지방의원의석수(석)

국민회의

364

45.0

2,248

공산당과 연합

 23

 4.6

 147

사회당

 12

10.6

 125

KMPP

  9

 5.8

  77

잔 샹(Jan Sangh)

  3

 3.1

 

힌두(Hinda Mahasabha)

  4

 0.9

  85

람(Ram Rajya Parishad)

  3

  2.03

 

기타

 30

12.0

 273

무소속

 41

15.8

 325

합계

489

 

3,279

 

 

1952년 첫 총선 결과 인도국민회의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차지하였지만 그 지지율은 과반수도 안 되는 45퍼센트에 불과하였다. 더군다나, 지방정부 선거에서 국민회의는 마드라스((Madras), 뜨라반꼬레-꼬친((Travancore-Cochin), 오리싸(Orissa), PEPSU의 4개 주에서13) 다수당이 아닌 소수당으로 몰락하였다. 그래서 네루는 무소속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끌어들여 겨우 지방정부를 세워야 할 만큼 인도국민회의에 대한 인기는 시들해졌다. 반면에 인도공산당은 총선 3개월 전에 선거참여를 결정하고 선거를 치렀는데도 하원에서 제1야당의 지위로 급부상하였으며, 마드라스, 뜨라반꼬레-꼬친, 하이데라바드 주에서는 다수의 지방의원들이 당선되었다.

이런 선거결과는 인도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와 대중정당건설이 대중들로부터 지지와 호응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 노선이 당시 인도 현실에서 성공 가능한 현실적인 전술이었음을 증명해 주었다. 이와 같은 선거 참여 전술의 성공을 바탕으로, 인도공산당은 혁명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 새로운 현실에 맞게 어떻게 전술을 짜고 실천해야 할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3. 쏘련공산당의 수정주의와 인도공산당의 노선 갈등

 

1953년 스딸린이 죽자, 쏘련공산당은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수정주의로 노선을 바꾼다. 이런 쏘련공산당의 노선 변화로 인도공산당은 인민민주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쪽과 수정주의 노선을 따르려는 쪽으로 양분되어, 새로운 당내 노선 갈등이 전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1953년 제3차 당대회는 공산당이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한 주도성을 전제로 하여 민족부르주아 세력과의 연합을 당의 당면과제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1954년 네루가 비동맹중립 외교정책을 추진하자, 쏘련공산당은 인도공산당에게 네루정권을 지지하도록 강요하였고, 그런 쏘련의 간섭으로 인도공산당 노선은 네루정권과의 ‘연합정부론’까지 크게 후퇴한다.

 

(1) 1953년 제3차 당대회: 민족민주연합전선

 

1952년 치러진 주 선거에서 국민회의는 마드라스 주에서 전체 375석 가운데 152석, 뜨라반꼬레-꼬친 주에서는 108석 가운데 44석밖에 당선시키지 못했다. 이런 결과는 반국민회의 세력이 단결하면 야당이 주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도공산당은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을 보고 연합전선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러면서 연합전선의 범주에 민족부르주아 계급까지 포함시켜서 당면과제를 인민정부 수립에서 인민민주연합정부 수립으로 변경한다. 인도공산당은 이런 변화된 노선을 1953년에 열린 제3차 인도공산당 대회에서 공식화하였다. 제3차 인도공산당 대회에서 결정된 핵심 내용은 민족부르주아 세력까지 포함하는 민주세력의 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원숙한 경제 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 발전의 초기 단계이다. ㅎ250

..

이런 조건들에서 매일매일 요구되는 투쟁들, 세금과 가격 인상, 실업에 반대하는 투쟁들, 시민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를 지키고 확대하는 투쟁들은─ 모든 것들이 점점 더 연계되면서 ─현 정부를 민주연합 정부로 대체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고양시키는 것이다.”14)

 

인도공산당은 1951년에 만든 인민민주정부 건설이라는 목표는 그대로 유지하였지만, 당시 인도의 상황에서는 급격한 사회주의화 노선을 실행하기 어렵다고 보고, 1953년 제3차 당대회에서 연합전선 전략에 의한 민족민주 혁명역량 강화로 당의 혁명 목표를 바꾸었다. 이런 전략수정으로 인도공산당은 중간계급과 민족부르주아들까지 포함하는, 사회주의 세력과 좌파진영과의 연합전선 구축에 나섰다. 비록 인도공산당이 인민정부 건설에서 민주연합정부로 투쟁의 수위는 낮추었으나 당시에 혁명무력을 담보하지 못했던 인도공산당으로서는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그렇지만 인도공산당의 연합전선은 성공하지 못하는데, 사회당과 우파 민족주의 정당인 KMPP는 인도공산당과의 연합을 거부하고 국민회의로 넘어갔다. 그런 가운데, 네루정권의 외교정책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네루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당성을 두고 미국과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런 인도를 견제하고자 미국은 동남아시아조약기구(the South-East Asai Treaty Organization) 설립을 추진하고 파키스탄과 군사협정을 맺으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군사적 지배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에 대응해서, 네루는 비동맹 노선을 추진하였고 쏘련과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만들어 나갔다.15)

한편, 네루는 1954년 12월에 헌법전문 일부와 ‘정부정책 명령원칙들(the Directive Principles of State Policy)’을 개정하여 사회주의 개혁정책에 관심을 보였다.16) 이와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인도공산당의 일부 분파에서는 제3차 인도공산당의 노선이 인도의 현 정세와 맞지 않다며 공개적인 비판을 제기하였다.17) 이런 문제제기에 인도공산당 우따르 쁘라데쉬 주 위원회가 동의하고 당중앙위원회에 민족플랫폼의 필요성을 공식 제기하면서 노선갈등에 불을 당겼다.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네루의 전향적인 비동맹 노선으로 촉발된 네루정권의 성격을 둘러싼 당내 갈등을 논의하려고 1954년 9월에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당중앙집행위원회는 네루의 외교정책이 진보적이라 하여도 네루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국민회의 정권교체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라 보고 연립정부전술을 기각하였다. 그 당시 당의 지배적인 시각은 비록 네루정권이 진보적 외교노선을 걷는다 해도 네루정권의 기본적인 성격은 대지주, 독점자본가 정권이었다. 그런 인도 내부의 계급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권교체가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렇게 당중앙집행위원회에서 결론을 짓고 당내 갈등을 수습하려고 하였으나, 당의 수정주의 세력은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을 편협한 보수주의자들이 내린 결정이라며 계속해서 공격하였다. 이렇게 당내 노선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인도공산당은 1955년 2월에 치러진 안드라 쁘라데쉬 주 선거에서 참패하였다. 안드라 쁘라데쉬 주는 뗄랑가나 농민운동으로 인도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인데도, 주의회 의석수를 1952년 선거보다 무려 75%나 잃었다. 이를 계기로 수정주의 세력은 당중앙집행위원회에서 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공격하여 극심한 노선갈등이 이어졌다.

3천 개 마을 이상의 농촌해방구가 건설되었을 만큼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였던 안드라 쁘라데쉬 지역의 선거 패배는 아무런 대책과 대안 없이 농민투쟁을 접은 인도공산당이 인민들을 배신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내 수정주의자들은 인도공산당 내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적인 네루정권과의 연합을 거부한 데 따른 민심이반의 결과라며 당중앙집행위원회를 비판하고 정치적 책임까지 요구하였다. 이런 당내 수정주의 세력의 압박과 국제사회주의 진영의 정세변화로 1955년 6월에 열린 당중앙집행위원회 회의는 수정주의 입장을 대폭 수용하였다.

 

(2) 쏘련공산당의 ‘데땅뜨’와 인도공산당의 혼란

 

1953년 3월에 스딸린이 사망하자, 쏘련공산당은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수정주의적으로 노선을 전환하였다. 쏘련의 새 지도부는 네루의 비동맹, 중립외교정책이 미국을 반대하고 쏘련에 우호적이라고 보고 네루정권과 협력적 관계를 모색하였다. 쏘련 지도부는 1954년 여름에 제네바에서 열린 인도-차이나 전쟁 종결을 위한 협상을 계기로 외교정책 기조를 ‘데땅뜨(긴장완화, détente)’로 바꾸었다. 쏘련 수정주의 지도부는 아시아 지역의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노선을 접고 평화공존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면서 네루의 비동맹ㆍ중립노선을 적극 지지하였다.

인도공산당 총서기인 고쉬는 1954년 7월부터 모스끄바에 머물면서 인도공산당의 노선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인도공산당의 멘토인 팜 두트는 1954년 9월 인도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반네루 노선을 바꾸라고 간섭하였다.18) 두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제국주의 등장으로 평화가 위협받고 있으며, 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 쏘비에트의 평화정책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정책이라고 강조하면서, 국제공산주의 운동도 쏘련의 평화노선을 지지하고 동참할 것을 요구하였다.19)

모스끄바는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인도공산당에게 네루정권에 대한 지지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1954년 9월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의는 쏘련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도공산당은 인민정권 수립을 위해서 네루정권 타도를 목표로 투쟁해 왔는데, 스딸린이 죽은 지 1년 만에 쏘련공산당이 갑자기 방침을 바꿔 네루정권을 지지하라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도공산당은 쏘련공산당의 지침에 따라야 한다는 세력과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면서 혼란으로 빠져 들었다.

이처럼 당내 노선갈등이 심각한데도 인도공산당 총비서였던 고쉬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계속 모스끄바에 머물고 있었다. 모스끄바에서 5개월 동안 머물렀던 고쉬는 1954년 12월 초에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네루의 외교정책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네루 선생(Pandit)은, 과거 자신의 외교정책을 비난하던 인도공산주의자들이, 쏘련과 중국과 같은 나라들이 네루의 외교정책에 호응하자, ‘어리둥절’하게 된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지금 네루 선생의 외교정책의 변화로 공산주의자들이 ‘어리둥절’하고 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변화를 환영합니다. 최근 두려움 없이 그리고 한결 같이 진보적 방향의 인도외교정책을 요구하고, 쏘비에트 연방과 중국 같은 나라들이 인도와 가까운 유대관계를 맺게끔, 캠페인을 벌였던 거의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은 거의 단독적으로, 우리 인민들에게, 아시아 나라들을 뒤덮는 미제국주의의 위협의 그림자를 경고하기 위해서, 현재 아시아에서 미제국주의가 계획하는 전쟁에 반대하는 네루 선생의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밖에 없습니다.”20)

 

이처럼 네루정권과 관계발전을 원하는 쏘련과, 그런 수정주의 노선을 따르려는 인도공산당의 총비서 고쉬의 영향으로, 1954년 12월에 열린 인도공산당 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같은 해 9월 결정한 당의 방침을 철회하고 ─네루정권의 비동맹노선을 지지하고 ‘네루정권 타도’에서 ‘비판적 지지’로 당의 노선을 바꾸었다.

한편 네루정권은 1956년 4월부터 시작되는 제2차 5개년 계획안을 1955년 4월에 발표하였는데, 제1차 5개년 계획과는 달리 쏘련식 국가계획 발전모델을 제안하였다. 국가소유와 국가주도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빠른 산업화를 이루는 게 계획경제발전의 핵심 내용이었다. 네루정권이 친쏘 외교정책뿐만 아니라 경제발전 전략도 자본주의식 발전모델에서 사회주의식 계획경제 모델로 바꾸려하자, 네루정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노선변화에 영향을 끼쳤다.21) 당내 수정주의 세력은 네루정권을 사회주의로 견인하기 위해서라도 인도공산당이 비판적 지지에 머물지 말고 함께 연합정부를 만들자는 의견까지 제출하였다.

당시 인도의 사회계급적 모순을 고려했을 때, 네루정권과의 연합정부 구성은 공산당 스스로 부르주아 계급의 들러리가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그런 인도공산당의 우유부단함은 인도공산당의 사상적 사대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도공산당은 당시 인도의 사회ㆍ경제적 현실과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당의 노선을 결정하기보다는 쏘련공산당의 지시와 단편적인 국제정세를 고려하여 당의 노선을 수시로 바꾸었기 때문에, 정책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파벌과 분파가 생기면서 쉽게 노선갈등에 빠져 들었다.

 

(3) 인도공산당의 우경화: 1955년 6월 당중앙집행위원회 회의

 

1955년 2월에 실시된 안드라 쁘라데쉬 주의 중간선거에서 패배하고 1955년 4월 네루의 제2차 5개년 계획이 발표되자, 1955년 6월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는 인도공산당을 우경화로 이끄는 중대한 결정서를 발표하였다. 중앙집행위원회는“평화, 민주주의, 민족적 전진을 위한 인도공산당의 투쟁(The Communist Party of India in the Strugle for Peace, Democracy and National Advance)”이라는 제목의 결정서를 발표하였고, 이어서 이 결정서의 내용과 의미를 설명하는 3개의 글을 발표하였다.22)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서는 인도공산당의 우경화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인도공산당 지도부는 현시기 인도를 “민족 민주 혁명” 단계라고 보고 국민회의가 주도하는 부르주아 혁명에 인도공산당이 개입하여 부르주아 혁명을 성공시키는 게 당면과제라고 하였다.

 

“인도의 정치적 자유의 성취와 인도에서 대(大) 부르주아지의 지도적 위치가 인도 혁명의 기본 목표와 기본 전략을 바꾸지 못한다. 지주와 제국주의 타협세력과 동맹하고 있는 인도 부르주아지는 현 상태 우리나라에서 완성해야 할 부르주아 민주주의 임무를 완성할 수 없다.

모든 민주적 계급을 포함한, 모든 민족부르주아를 포함한, 그러나 노동계급이 지도하는 인민민주정부를 수립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그런 임무들을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완성할 수 있다. 인민민주 혁명은 그런 임무들을 실행할 뿐 아니라 조국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 것이다.”23)

 

이 6월 결정서는 인도공산당 내부의 여러 분파 사이의 타협과 흥정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말잔치에 불과하였지만, 네루가 주도하는 민족부르주아 정권을 인정하고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인도공산당이 노동자계급과 농민 그리고 핍박받는 인민계급을 위해서 투쟁하는 당이 아니라 (민족)부르주아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부르주아 정당과 경쟁하는 당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결정이었다. 이런 수정주의 결정에 대해서, 당시 인도공산당의 총비서이며, 수정주의로 전향한 쏘련공산당의 핵심지도부와 깊이 교감하고 있던, 고쉬는 보다 분명하게 당의 수정주의 전향을 밝혔다.

 

“몇몇 동지들은 진보적 정책을 위해서 투쟁하는 것은 혁명노선에 있어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단지 진보적 정책을 위해서 싸울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정권 교체 슬로건을 내걸고 싸워야 한다고 한다(전 인도적 차원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이라는 식으로). 이 구상은 잘못되었다. 정권 교체는 특별한 정세에서나 만들어질 수 있는 행동 슬로건이며 오늘날의 정세와 부합하지 않는다.”24)

 

또한 인도공산당 지도부는 결정서에서 네루정권의 제2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지지를 보낸다.

 

“최근에 발표된 계획의 틀은 주로 공공영역이 될 ‘기초산업의 발전’을 강조하는 급속한 공업화를 제안한다….

기초산업 건설을 위한 제안은, 실행되기만 한다면, 대(對)외국 자본재 종속을 줄이며, 국내 산업의 입지를 상대적으로 강화시키고, 우리 경제의 입지와 민족 독립을 강화시킨다. 그러므로 당은 그런 제안을 지지하고, 또한, 그런 산업 제안은 공공영역에서 중요하게 발전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런 모든 발전들에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 동원에 의해 그것들이 진전되게끔 분투해야 한다. 외국자본의 이익을 반대하는, 봉건ㆍ반(半)봉건 농업관계에 반대하는, 독점자본을 억제하기 위한 투쟁은 모든 단계에서 우리의 거대한 정력적이며 아낌없는 지지를 받을 것이다.”25)

 

이처럼 1955년 6월에 열린 당중앙집행위원회는 네루의 비동맹 외교노선뿐만 아니라 경제발전 계획까지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인도공산당이 민족부르주아 세력에 투항하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6월 결정 이후, 인도공산당 내부에서는 네루정권과의 협력 범위를 놓고 또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크게 3개의 분파로 갈려 싸웠는데, 첫째는, 반제ㆍ반봉건 투쟁을 위해 네루정권에 대한 투쟁을 완화하자는 비판적 지지파이다. 두 번째 분파는 국민회의 내 진보세력과만 연합하자는 제한적 지지파가 있었다. 세 번째 분파는 미제국주의 아시아 침략으로 인도의 상황을 ‘민족적 위기(National Emergency)’라고 주장하며 국민회의와 함께 즉시 ‘민족민주연립정부(National Democratic Coalition Government)’를 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제 인도공산당은 네루정권을 대체하는 세력이 아니라, 그들과 연합하려는 수준을 놓고 내부 노선갈등을 벌일 만큼 우경화되었다.

이와 같은 당내 우경화를 처음으로 비판한 사람은 남부디리빠드(E. M. S. Namboodripad)이다. 그는 네루의 진보적인 비동맹노선과 반동적인 국내정책 사이에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과, 그런 네루정권의 ‘양면성’을 지적하였다. 그는 1955년 8월에 국가자본주의가 주도하는 계획경제가 과연 진보적인지 문제제기를 하였다. 그는 네루가 추진하려는 계획경제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길로 가는 것이라면서 인도공산당의 수정주의 노선을 비판하였다.26)

그런 남부디리빠드의 비판에 대해서 고쉬는 다시 한 번 네루의 친쏘련 정책을 지지하면서, 인도공산당이 네루의 모든 정책을 확고하게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남부디리빠드의 주장을 반박하였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쉬의 우경화에 대한 당내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민족부르주아 세력과의 연합에 대해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면서, 그는 인도국민회의가 이미 진보파와 수구반동파로 분열되었으므로 인도공산당이 인도국민회의 진보파를 지지하고 연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조금 완화된 주장을 하였다.28) 1955년 6월 인도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결정은 인도공산당의 우경화 경향을 반영한 것이었다.

 

(4) 1956년 제4차 전당대회: 평화적 이행으로

 

1956년 4월에 열린 제4차 인도공산당 대회는 1947년부터 이어져 온 혁명노선을 공식폐기하고 ‘평화적 이행’을 당의 공식노선으로 결정한 중요한 사건이다. 이미 1953년 스딸린 사후부터 인도공산당은 수정주의 경향으로 흘렀지만 제4차 당대회는 이것을 공식화하였다.

이로써 인도공산당은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선거에 대중을 동원하는 선거운동 정당이 되었다. 1957년 총선거에 인도공산당은 적극 참여하여 께랄라 주에서 공산당 정부를 세우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59년에 네루정권은 무력으로 께랄라의 공산당 정권을 강제 해산시켜 버린다. 부르주아 정권의 공격을 분쇄할 수 있는 혁명무력 없이는 민주연합정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께랄라 주의 사례가 잘 보여준다. 인도공산당의 수정주의로의 후퇴로 인도공산당은 부르주아 계급의 무자비한 공격에 대해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할 힘이 없었고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였다.

1956년 2월에 쏘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 인도 대표로 참석했던 고쉬는 3월에 인도로 돌아왔는데, 그는 도착하자마자 ‘평화적 이행’으로 당의 총노선을 변경할 것임을 암시하였다.29) 고쉬는 1956년 3월 26일-31일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쏘련의 수정주의 노선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모스끄바의 새 노선을 당의 공식노선으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고쉬는 1956년 4월 19-29일에 열린 제4차 인도공산당 대회에서도 인도공산당이 쏘련의 새로운 노선을 지지할 것을 호소하였다.30) 그는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을 사례로 들면서, 민족부르주아들과 공산당이 협력하여 평화적으로 민족민주혁명을 실행할 수 있고, 머지않아 평화적인 방법으로 부르주아들을 패배시켜 프롤레타리아독재 국가를 건설하여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면서, 인도에서도 평화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제4차 당대회에서는 평화적 이행 전략에 대한 인도공산당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31) 그렇지만 제4차 당대회는 제3차 당대회와는 확연히 다르게 수정주의 영향력이 크게 반영되었다. 제4차 당대회는 네루정권과 협력적 관계를 확대해 가려는 당의 변화가 확실히 나타나 있다. 제4차 당대회 정책결의안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국과 인민의 이익의 길잡이인 공산당은, 평화를 지키려는 정부의 정책과 제국주의로부터 인도 경제의 종속을 줄이려는 정부의 모든 조치들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지지를 확대해갈 것이다.”32)

 

이처럼 제4차 당대회는 쏘련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아 네루정권과의 협력 가능성을 크게 열어놓았다. 물론 네루정권과의 연합정부 구성을 두고는 확고한 결론을 짓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게 당대회를 끝냈지만, 수정주의는 당의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50년대 인도공산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반복적인 문제점은 당이 공식적으로 정치적 입장과 노선을 정했음에도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분파를 만드는 것이었다.33) 제4차 당대회에서 당이 부르주아 지배계급과의 연합정부 구성을 기각시켰는데도 당내 수정주의 세력은 쏘련의 지지를 배경으로 계속해서 노선 갈등을 일으켰다.

이것은 인도공산당이 인도 현실에 맞는 과학적인 혁명 이론으로 사상투쟁을 하기보다는 쏘련공산당의 수정주의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려는 사상적 사대주의의 전형적인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인도의 사회ㆍ경제적 현실을 고려한다면, 인도공산당이 네루정권과 협력을 논의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쏘련공산당의 수정주의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세력 때문에 인도공산당은 제4차 당대회 이후 수정주의로 퇴행하였다. 이런 당내 혼란과 갈등은 1957년 총선거를 앞두고 더욱 치열해졌으며, 결국에 인도공산당은 1964년 분열하였다.

 

 

4. 나오는 글

 

중국공산당의 인민혁명정권 수립 성공은 영국제국주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인도공산당에게 혁명운동을 고무시키는 유리한 정세였다. 인도 내부에서도 영국제국주의 지배로 인한 인도 내부의 사회경제적 모순이 심화되었고 노동자, 농민, 인민들이 겪는 고통이 심각하여 혁명에 대한 열기로 가득하였다.

인도의 독립을 전후하여, 인도 인민들은 자발적으로 총파업 궐기에 나섰으며, 농민들은 해방군을 조직하여 인도공산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인도의 공산주의자들은 인도의 노동계급과 농민계급 그리고 인민들을 굳건하게 믿고 그들의 이해관계에 충직하게 혁명정부 건설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인도공산당의 간부들은 무슨 문제만 생기면 모스끄바에 달려가 쏘련공산당에 자문하고 그들의 권위를 빌려 인도에서 편안하게 사회주의 건설을 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반면에, 인민민주정권을 절박하게 염원하고 그를 위해 싸우는 인도 인민들의 분투와, 그런 인민들의 요구에 따라 진정성을 갖고 투쟁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덕분에, 1957년 선거 결과 께랄라 주에서 처음으로 공산당이 주정부 정권을 잡는 성과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인도공산당이 인도의 인민들을 믿고 불굴의 의지로 혁명 투쟁을 하였다면 인도공산당에 대한 인민들의 신뢰와 지지는 더 강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공산당은 러시아식 혁명이냐 중국식 혁명이냐를 놓고 우왕좌왕하며 분열하였다. 1951년에 스딸린의 중재와 권고로 겨우 당의 분열이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53년 스딸린이 사망하고 쏘련공산당이 수정주의 경향으로 흐르자, 인도공산당은 또다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내부 노선갈등에 빠졌다. 이 글에서는 1950년대 인도공산당의 노선갈등과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면서 인도공산당의 우경화 흐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인도공산당 내부에서는 민족부르주아 정권의 모순을 인식하고 쏘련의 수정주의 노선 즉, 평화이행 전략을 비판적으로 보고 인도공산당의 공식노선으로까지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인도공산당이 쏘련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갈 만큼 사상과 이론이 견고하지는 못하였다. 사상적으로 사대주의에 빠져 노선갈등과 당내 혼란으로 그 한계를 극복해 내지 못한 인도공산당은 스스로 수정주의 덫에 빠졌고 결국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배신과 공격에 속수무책 당하고 주저앉아야 했다. 수정주의의 대가는 비참하고 참혹하였다.

 


 

1) 1947년 9월 폴란드에서 제9차 공산당 노동자당 회의(A Conference of

the Nine Communist and Workers Party)가 열렸는데, 이 회의에서 공산주의자 정보위원회(the Communist Information Bureau, Cominform)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2) Victor. M. Fic, Peaceful Transition to Communism in India, Nachiketa Publications, Bombay, 1969, p. 19.

 

3) Bipan Chandra, Aditya Mukherjee, Mridula Mukherjee, India Since Ind-ependence, Penguin Books, India, 2008, p. 259.

 

4) E.M.S. Namboodiripad, The Communist Party in Kerala ; Six Decades of Struggle and Advance, National Book Centre, New Delhi, 1994, p. 97.

 

5) The “Statement of the Editorial Board of the Communist on Anti-Leninist Criticism of Comrade Mao Tse-Tung”, Communist, Vol Ⅲ No. 3(July-Agust 1950). p. 25. ; Victor. M. Fic, Ibid, p. 26.

 

6) “Palme Dutt Answers Questions on India”, Crossroads, January 19, 1951. ; Victor. M. Fic, Ibid. p. 36.

 

7) Joshi, P. C., “Problems of the Mass Movement”, Vol.Ⅱ, pp. 39-41. ; Victor. M. Fic, Ibid. p. 37.

 

8) “The Tactical Line”, India Communist Party Documents 1930-1956, pp. 72-74. ; Victor. M. Fic, Ibid. pp. 40-41.

 

9) The Communist Party of India, The Programme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India, Bombay, October 1951. pp. 12-13, 23-24. ; Victor. M. Fic, Ibid. pp.46-47. (편집자주: 강조는 Victor. M. Fic에 의한 것.)

 

10) 인도국민회의에 속해 있던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1948년 인도국민회의를 탈퇴하고 사회당(the Socialist Party)을 만들었다. 사회당의 지도자였던 자야뿌라까쉬 나라얀(Jayaprakash Narayan)은 네루 수상 다음으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사회당에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명망가가 많았으므로 사회당에 대한 여론의 관심과 영향력이 컸었다.

 

11) 1952년 총선 이후, 사회당과 KMPP는 낮은 지지율 때문에 존재감이 사라지자 1952년 9월에 두 당을 통합하여 쁘라자 사회당(the Praja Socialist Party)을 만들었다.

 

12) 인도공산당 단독으로는 16석의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연합전선 선거구에서는 하이데라바드의 인민민주전선에서 공산당 소속의원이 7명, 뜨라반꼬레-꼬친의 좌파연합전선에서 공산당 소속의원이 3명 당선되었다. 따라서 공산당과 연합전선으로 당선된 총의석수는 26석이었다. 또한 Victor. M. Fic의 연구에 의하면 지방의원의석수는 194명이었다. Victor. M. Fic, Ibid. pp. 57-58.

 

13) 마드라스는 오늘날 타밀나드 주, 뜨라반꼬레-꼬친은 오늘날 께랄라 주, PEPSU(Patiala and East Punjab States Union)은 오늘날 뻔자브 주로 바뀌었다.

 

14) The Third Congress Indian Communist Party Documents 1930-1956, pp. 108-111. ; Victor. M. Fic, Ibid. pp. 70-71.

 

15) 인도와 중국은 1954년 4월에 불가침, 불간섭, 평화공존, 상호주권과 영토존중이라는 5개 원칙(Panchsheel로 널리 알려짐)에 합의하였다. 이를 계기로 1954년 6월 저우언라이가 인도를 방문하였고 네루는 같은 해 10월에 중국을 방문하여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때 인도와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지배를 반대하며 ‘아시아 평화지대’를 제안함으로써 중립적인 비동맹 운동에 활력을 주었다.

 

16) 인도헌법 제4장 정부정책 명령원칙들(the Directive Principles of State Policy)에는 정부법을 만들 때의 원칙들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통제 개념이 반영되어 있지만, 사법적 구속력이 없어서 현실에서는 공허하게 존재한다. 국가권력의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17) 인도공산당 주간지 ≪새시대(The New Age)≫의 편집장인 라마무르띠(P. Ramamurthy)가 대표적이다. 그는 인도공산당 내 수정주의 여론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국민회의와 함께 민족플랫폼(National Platform)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으며, 미제국주의로부터 인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중국과 수교하고 ‘사회주의 방향으로 정책 선회를 하고 있는’ 네루를 지지하고 공동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 두트의 주장은 꼬민포름의 저널 For A Lasting Peace, For A People’s Democracy 1954년 10월 8일 호에 “New Feature in the National Liberatio-n Struggle of Colonial and Dependent People”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 Victor. M. Fic. Ibid. p. 117.

 

20) A. K. Ghosh, “Communists Answer to Pandit nehru”, New Age Vol.Ⅱ, No. 10 December 5, 1954. pp. Victor. M. Fic, Ibid. p. 120.

 

21) 편집자 주: 다만 여기서는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의 정부 계획과 사회주의 계획경제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유념하길 바란다.

 

22) 이때 발표된 3개의 글은 첫째, “The Communique of the Meeting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of India” (New Age, Vol. Ⅱ, No. 40, July 3, 1955), 둘째, “Communist Proposals for National Reconstruction” (New Age, Vol. Ⅱ, No. 41, July 10, 1955), 셋째는 고쉬가 쓴 “On the Resolution of the Central Committee” (New Age, Vol. Ⅱ, No. 41, July 10, 1955)이다.

 

23) A. K. Ghosh, “On the Resolution of the Central Committee”, New Ag-e, Vol. Ⅱ, No. 41, July 10, 1955. p. 9, ; Victor. M. Fic, Ibid. p.137. 강조는 글쓴이가. (편집자주: Victor. M. Fic는 아래의 구절을 강조하고 있다. “지주와 제국주의 타협세력과 동맹하고 있는 인도 부르주아지는 현 상태 우리나라에서 완성해야 할 부르주아 민주주의 임무를 완성할 수 없다.”)

 

24) A. K. Ghosh, Ibid, p. 4. ; Victor. M. Fic, Ibid. p. 138.

 

25) “The Communist Party of India in the Struggle for Peace, Democrac-y and National Advance”, New Age, Vol. Ⅱ, No. 41, July 10, 1955, p. 8.; Victor. M. Fic, Ibid. p. 145. (편집자 주: 강조는 Victor. M. Fic의 것.)

 

26) E. M. S. Namboodripad, “The Character and Polices of Nehru Government”, New Age, Vol. Ⅳ, No. 8, August, 1955. pp.25-31. Victor. M. Fi-c, Ibid. p. 154.

 

27) Ghosh, A. K., “The Internal Policies of the Government”, New Age, Monthly, Vol. Ⅳ, No. 11, November 1955, pp. 5-24. ; Victor. M. Fic, Ibid. p. 155.

 

28) Ghosh, A. K., “The Indian Bourgeoisie”, New Age, Monthly, Vol. Ⅳ, No. 12, December 1955. pp. 17-18. ; Victor. M. Fic, Ibid. p. 155.

 

29) A. K. Ghosh, “Soviet Communist Party Congress”, New Age, Vol. Ⅲ, No. 26. March 25, 1956. ; Victor. M. Fic, Ibid. p. 234.

 

30) “The Report of Comrade Ajoy Ghosh to the Fourth Congress of the CPI on the XX Congress of the USSR” in Communist Double Talk at Palghat, The Democratic Research Service : Bombay, December 1956. Docu-ment No. 3, pp. 106-107. ; Victor. M. Fic, Ibid. pp. 234-235.

 

31) 제4차 당대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회 보고서(the Report of the Central Executive Committee)가 제출되었고 정책결의안(the Political Resolution)이 통과되었다. 이 두 개의 문건에는 평화적 이행 전략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다.

 

32) The Political Resolution, Adopted at the Fourth Congress of the Communist Party of India, Palghat, April 19-29, 1956. The Communist Par-ty of India : New Delhi, May 1956. pp. 23-24. ; Victor. M. Fic, Ibid. p. 244.

 

33) 네루정권과의 즉각적인 연합정부를 구성하자는 수정주의 분파는 쏘련공산당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제 4차 당대회 결정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비판하였다. Rubinstein은 당시 주목받는 수정주의자였다. 그의 “A Non-Capitalist Path for Underdeveloped Countries” (The New Time, Moscow, No. 28, J-uly 5, 1956)가 모스끄바에서 발표되었고, 이 글이 다시 인도에서 (New A-ge, Monthly, Vol. Ⅴ, No. 10, October 1956)에 소개되면서 노선갈등에 불을 당겼다. 그 핵심 주장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네루정권과 즉각 연정을 구성함으로써 사회주의 발전 경로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쏘련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그의 이론이 인도공산당에 알려지자 인도공산당의 수정주의 분파는 더욱 거친 목소리로 제4차 당대회 결정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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