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대공황 8년: ‘좀비자본주의’와 노동자계급

 

채만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운영위원

 

 

1. 상황과 상황인식 (1)

 

2007년 가을에 발발하여 2008년 9월 미국의 거대한 투자은행 리먼브라더스(Lehman Brothers)의 파산으로 최고조에 달했던 공황. 발발 8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이 공황은 호황으로의 국면전환의 기미를 전혀 보여주지 못한 채 장기침체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과 유럽중앙은행(ECB)이나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금융기구들이 국가독점자본주의적 화폐ㆍ금융 수법을 한껏 동원하여 이른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1)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헬리콥터로 돈을 뿌린다’고 비유할 만큼,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대적인 규모의 돈을 뿌려대 왔지만, 그 엄청난 자금도 자본주의를, 겨우 연명시키고 있을 뿐, 그리고 새로운 붕락(崩落)을 배양하고 있을 뿐, 위기로부터 구제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야말로 대공황이다. 리먼브라더스의 부도 사태를 계기로 여러 사람들이 상기했던 1930년대의 대공황을 닮은 그것 말이다.2)

자본주의의 현 위기 상황이 어떠한지, 혹은 부르주아지의 좌절감이 어떠한지를 독일의 한 부르주아 평론가, 비판적인 부르주아의 전형적 시각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이는 평론가로 하여금 말하게 하면 이렇다. (인용이 무척 길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25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서방의 자유주의적인 경제적ㆍ사회적 질서는 거의 멈출 수 없는 개선의 행진을 할 것처럼 보였다.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정치가들은 세계적으로 규제 없는 시장을 찬송하고 있었으며, 미국의 정치학자 후란씨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언”을 기원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아무도 자유로운 자본 이동의 유익한 효과에 대하여 얘기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관심사는, 미국의 전 재무장관 래리 썸머스(Larry Summers)가 표현하듯이, “영속적 침체(secular stagnation)”이다. 미국경제는 1990년대의 반절만큼의 속도로도 성장하고 있지 않다. 일본은 아시아의 병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유럽은 독일이라는 수출 기계의 가동 속도를 낮추기 시작한 경기후퇴로 가라앉고 있으며, 번영을 위협하고 있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지난 주에 다시 명확해진 것처럼, 불안정한 자본주의(capitalism of uncertainty)이다. 실망스러운 약간의 미국 무역통계들이 발표되었을 뿐인데, 미국의 채권시장에서부터 원유시장까지 갑자기 시장이 전세계적으로 곤두박질쳤다. 소란은, 오랫동안 신경과민의 지표(indicator of jitters)로 간주돼온 국가, 그리스의 채권에도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융지(金融紙)들은 그것을 “순간 붕락(flash crash)”이라고 불렀다.

정치가들과 실업계(實業界)의 거물들은 지금 어디에서나 성장을 위한 새로운 결단들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들의 무기고(武器庫)는 텅 비어 있다. 금융위기 이후 종합적인 경제 자극책들에 지출된 수십억 (달러ㆍ유로: 인용자)은 대부분의 공업 국가들에서 산더미 같은 부채를 쌓아 왔으며, 이제 새로운 지출을 위한 자금이 없다.

중앙은행들 역시 탄약이 고갈돼가고 있다. 그들은 이자율을 0에 가깝게 밀어붙였고, 국채(國債) 매입에 수천억 (달러ㆍ유로: 인용자)을 지출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금융 부문에 퍼붓고 있는 거액의 자금이 경제 쪽으로는 흘러가고 있지 않다.

일본에서든, 유럽이나 미국에서든, 회사들은 더 이상 새로운 기계장치나 공장들에 거의 투자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에, 전세계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에서 가격들이 폭등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성장에 의한 붐(boom)이 아니라, 값싼 돈에 의한 붐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전문가들은 여러 분야에 임박한 붕락의 “우려스러운 조짐들”을 이미 확인해 왔다. 서방의 위기 정책은, 새로운 위험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데에 더해서, 공업 국가 자신들 내부의 갈등들 역시 악화시키고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체되어 있고 전통적인 예금계좌들엔 거의 아무런 이자도 붙지 않는 반면에, …. 부자들은 아주 듬뿍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

자료들은 자본주의 엔진 실(室)의 위험한 기능부전(機能不全)을 폭로하고 있다. … 중간계급 역시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왔다. 수년 동안, 수많은 평균 소득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이 커가는 대신에 줄어들고 있는 것을 목격해 왔다.

하버드 대학의 경제학자 래리 캐츠(Larry Katz)가 악담하듯이, 미국 사회는 기형적이고 불안전한 아파트 건물을 닮아 버렸다. 꼭대기의 펜트하우스는 갈수록 더욱 커지고, 맨 아래 층들은 사람들로 넘쳐나며, 중간층들은 텅텅 비어 있고,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 멈춰버린 아파트 건물을 닮아 버린 것이다.3)

 

현 위기에 대한 이 장황한 진단에는, 무엇보다도, “신경과민의 지표(indicator of jitters)로 간주돼온 국가, 그리스”라는 한 마디뿐, 공식 실업률이 25%를 넘나들고, 특히 청년 실업률은 55%에서 60%에까지 이르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남부유럽 국가들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것만 보더라도 위에 인용된 내용은 사실상, 미국이나 독일 등등, 이 새로운 대공황 속에서도 그나마 상대적으로 잘 나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국가들의 상황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평론가는 부르주아적 사고를 반영하여, “자본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전화되었다”라면서, 즉, 자본주의의 위기는 체제 그 자체의 전반적 위기로 전환되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분배 비판가 토마 피케티(distribution critic Thomas Piketty) 같은 좌파 경제학자들의 주장들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시장 자유주의자들조차 “1퍼센트 사회(one-percent society)”나 “금권정치(plutocracy)”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의 수석 평론가 마틴 울프(Martin Wolf)는 자본시장의 규제완화를 “악마와의 계약(pact with the devil)”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체제 내부자들조차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다. …

그들은 모두 깊은 불안감을 품고 있고, 일부는 반란의 기미까지 드러내고 있다.4)

 

이것이 대공황 발발 후 7년이 지난 2014년 10월 현재 자본주의 경제의 상황,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비교적 상황이 나은 국가들의 상황이고, 그에 대한 부르주아 평론가들의 비판적 인식이다.

 

 

2. ‘위대한 좌파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참고로, 위 인용문에서 피케티를 대표적인 ‘좌파 경제학자(leftist economist)’로 적시하고 있으므로, 그리고 우리 사회를 포함하여 전세계의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ㆍ이데올로그들이 그를 그렇게 칭송하고 있기 때문에, 나아가, 무엇보다도 특히 최근과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좌파 경제학자들’이 선진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이론적ㆍ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잠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좌파 경제학자인가를 보고 가기로 하자. 이미 ≪정세와 노동≫ 제111호 (2015년 4월호, pp. 19-22)에 ‘한 토막의 코메디’로 소개하며 적었던 내용인데, 독자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옮겨놓자면 이렇다.

 

*        *       *

 

2007년 가을부터 진행되고 있는 대공황 속에서 일거에 전세계적으로 1백50만 부 이상이나 팔렸다는 ≪21세기의 자본≫이라는 저서로 ‘진보적 경제학’의 가히 혜성처럼 등장한 피케티(Thomas Piketty) 교수님5)의 말씀, 지난 3월 10일 독일의 주간지 ≪쉬피겔(Der Spiegel)≫과의 인터뷰에서의 발언인데, 들어보시라.

 

피케티: … 우리 유럽인들은 험악한 상황에 처해 있어서(in a bad situation), … 어지간한 구조개혁들(minor structural reforms)로는 그것을 전혀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쉬피겔≫: (그러면: 인용자) 당신의 제안은 무엇인가요? (What do you propose?)

 

피케티: 우리는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그리고 혁신과 연구에 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유럽의 성장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기획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들의 90퍼센트가 미국에 있고, 우리의 가장 우수한 두뇌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미국인들은 그들의 GDP의 3퍼센트를 대학에 투자하는데, 반면 여기에서는 1퍼센트 남짓입니다. 그것이, 미국이 유럽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주요 이유입니다.6)

 

“우리는 젊은이들을 훈련시키는 데에, 그리고 혁신과 연구에 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하라”! “그것이 유럽의 성장을 촉진하는 가장 중요한 기획 목표가 되어야 한다”!―이렇게 철저히 ‘경쟁’의 관점에서 문제를 재단하는 황금신의 발언.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계적으로, 그리하여 국내에서도 ‘진보적인’ 소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나 ‘진보적’ 언론에 의해서, 아니 사실은 보수ㆍ극우적 언론에 의해서도 사실상 이 시대 최고의 ‘진보적 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고 선전되고 있는 저 저명한 피케티 교수님의 발언이다!

대공황이 발발하고, 그 와중에 그리스 등 남부 유럽 국가들의 노동자ㆍ인민이 지옥과도 같은 대재앙을 겪고 있는 것은 결코 “혁신과 연구”의 부족, 그에 대한 투자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거꾸로 그것은 전세계적 규모에서도 유럽ㆍ유럽연합ㆍ유로존의 규모에서도 이른바 “혁신과 연구”가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와는 더 이상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기 때문이고, 그로 인하여 엄청난 자본주의적 과잉생산이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계적인 ‘진보적 경제학자’ㆍ‘좌파 경제학자’의 발언 속에서는 그러한 사고(思考), 그러한 과학적 사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그가,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의 아이콘처럼 화려하게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참고로 그가 이렇게 ‘진보의 아이콘’처럼 평가ㆍ선전되는 이유를 간단히 쉬운 말로 설명하자면, 그것은 그가, 이 사회의 ‘진보정당들’ㆍ‘진보적 정치인들’ㆍ‘진보적 시민단체들’ 등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부자세’를 부과함으로써 심각한 이른바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자고,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파멸로부터 구제하자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말을 빌리자면, 그가 “분배로 야단법석을 떨고, 그것에 주요한 역점을 두”면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제하려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의 구미에 맞는 소동, 그들의 구미에 맞는 기만이요 비과학이다!

그러나 과학자 맑스는 이렇게 언명한다.

 

(고타 강령의 초안이: 인용자)…. 소위 분배로 야단법석을 떨고, 그것에 주요한 역점을 둔 것은 대체로 잘못이었다.

어떤 시대에나 소비수단의 분배는 생산조건들 자체의 분배의 결과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산조건들 자체의 분배는 생산양식 그것의 한 특징이다. 예컨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물적(物的) 생산조건들이 자본소유와 토지소유라고 하는 형태로 노동하지 않는 자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고, 이에 비해서 대중은 단지 인적(人的) 생산조건, 즉 노동력의 소유자에 불과하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생산요소들이 이렇게 분배되어 있으면, 오늘날과 같은 소비수단의 분배가 저절로 생긴다.7)

 

생산수단의 분배를 변혁하지 않는, 오히려 일부 노동하지 않는 소수자에 의한 그 사적소유를 유지하기 위한 소득분배 야단법석, 피케티 교수님의 그것과 같은 야단법석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과학일 뿐인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진보적’ 지식인들ㆍ시민단체들이 열심히 야단법석을 떨며 팔아먹고 있는 기만과 비과학!

 

 *        *       *

 

이것이 바로 저들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좌파 경제학’이다.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19세기 중반에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는 임금을 자본가에게 대여하거나 (후불로 받거나)”, “노동을 시장가격 이하로(?) 제공하기 때문에 이 차액(?)을 자본가에게 투하한다고 볼 수 있다”며, 노동자를 자본가로 삼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을 “위대한 정신”으로 치켜세우는 것을 보며,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평평한 평야에서는 흙무덤도 언덕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우리 부르주아지의 천박함을 그들의 “위대한 정신”(großen Geister)을 척도로 삼아 측정해야 할 것이다.8)

 

이 말은 오늘날 위대한 진보적인 경제학자들로 칭송되고 있는 피케티나 칼 폴라니(Karl Polanyi) 등에 대해서도 그대로 해당될 것이다.

 

 

3. 상황과 상황인식 (2)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오면, 국가와 중앙은행들이 엄청난 돈을 풀어 왔지만, 그 돈으로 제조업을 위시한 경제 전반이 소생하는 대신에 “전세계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에서 가격들이 폭등하고” 있으며 “지속가능한 성장에 의한 붐(boom)이 아니라, 값싼 돈에 의한 붐이 조성되고” 있음을 독일의 저 평론가가 지적하는 것을 보았다. 나아가, 그는 뉴욕 월가의 한 시장 평론가를 등장시켜, 미국이 “부채 공화국”으로 되었다며, 이렇게 쓰고 있다.

 

그 보수주의자는 자신의 나라가, 서방 세계가 평화시에는 과거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부채 공화국으로 변형된 데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다. … 위기 이래 그 거대한 부채더미― 60조 달러 ―를 실제로 해체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재분배한 국가ㆍ은행들은 악성 대부의 많은 부분을 납세자들에게 전가할 수 있었던 반면, 정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미국의 중앙은행: 인용자; 이하에서는 “연준”)가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산더미 같은 빚이 실제보다 작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값싼 돈은 시대를 거슬러 미국을, 다음에 벌어질 것이, 바라던 바의 경제호황일지 아니면 다른 붕락일지 아무도 모르는 위험한 경기로 몰아넣고 있다. 전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Robert Rubin) 같은 전문가들은 주식시장의 현 반등은 사실상 다음 붕락의 전조라고 믿고 있다.9) (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

 

그러면서 그 “보수주의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완전히 왜곡되고 무능해진 시장으로는 연착륙(soft landing)10)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어떤 거대한 돌발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단지 언제냐 만이 문제이다.”11)

 

그러고는 자신의 판단을 이렇게 얘기한다.

 

오로지 하나만은 분명하다. 즉, 금융위기 7년 만에 미국 경제는 아직도 부채와 값싼 돈에 빠져 있다. 무엇보다도 최악은, [거대하게 살포된 자금의: 인용자] 회수 국면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2)

 

그 자체로서는 모두가 맞는 말들이다. 특히 저들이 최근의 주식ㆍ채권ㆍ부동산 시장의 반등을 새로운 파탄의 징조로 보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 상황에 대한 저들의 인식 속에서 저들의 시각의 한 특징을 본다.

저들은 무엇보다도 현 위기의 본질을 금융위기로서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원인을 금융시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규제완화ㆍ통화정책에서, 구체적으로는 레이건 행정부 시절에 시작된 그것에서 찾고 있다. 이렇게 얘기한다.

 

레이건 시절의 부채 정책이 미국의 보수 혁명가들의 첫 번째 오류였지만, 그것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

금융산업을 자유화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행했던 것은 그때, 즉 …. 당시 연준 의장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 새로운 통화정책을 발명할 때였다. 경제와 시장이 약한 징후를 보일 때마다 그는 이자율을 낮추었고, 거대 금융기관에 문제가 생기면 중앙은행의 힘으로 그것을 구제했다.

그린스펀의 값싼 돈 정책은 …. 월가에 달콤한 독약이 되었다.13)

 

그리고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다음과 같이 되었다고, 저 평론가는 자못 날카롭게 비판한다.

 

과거에는,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결국엔 그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꿈이라는 약속의 일부였다.14) 오늘날에는 부자들이 미국 자본주의의 과실(果實)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체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포에 대한 공포(fear of fear)이다. 연준이 계획대로 내년에 이자율을 올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비용 증대로부터 오는 압력이 정부 적자를 폭발시킬까? 주식시장의 거품이 파열될 것이며, 금융기관들이 붕괴될 것인가? 경제가 붕락할 것인가?15)

 

그 자체로서는 역시 대체로 맞는 얘기지만, 저들의 시각은 이렇게 금융이라는 문제에 갇혀 있다. 그리고 그만큼 현재 지속되고 있는 대공황에 대한 저들의 시각은 피상적이고, 천박하다. 그리하여, 저들은 사실상 어느 나라에서나 “더 이상 새로운 기계장치나 공장들에 거의 투자하지 않고” “그 대신에, 전세계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에서 가격들이 폭등”하면서 새로운 붕락을 배양하고 있다고 개탄하지만, 바로 이 천박성 때문에 저들은 상황이 왜 그렇게 전개되어 가는지, 즉 값싸게 살포된 거대한 자금이 왜 제조업 생산의 효율을 개선하고 증대시키는 데로 흐르지 않고 그렇게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으로만 몰려드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형식상으로만 보면, 독일의 저 평론가가 그것을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우선 드라기(Draghi)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저금리 정책을 비판하고, 특히 “마이너스 예금 이자율” 조치를 “특히 위험하다”고 비판한다. 그의 비판을 옮기자면, 이렇다.

 

이 (마이너스 이자율: 인용자) 역시 대출을 독려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그러나 그 조치는, 고객의 예금에 의존하고 있는 저축은행들이나 협동조합은행들과 같은 금융기관들의 상황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

많은 전문가들은, 이러한 조치들로 ECB는 그것이 달성하고자 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것을 달성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신용 부문은 강화되는 대신에 약화되고 있다. 리스크가 줄어드는 대신에 새로운 리스크들이 생기고 있다. 병든 은행들을 청산하는 대신에, 그것들이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다.16)

 

그러고 나서, 금융위기의 교훈은 그들 병든 은행들을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철저히 청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지금까지 경제는, 새로운 위기 자본주의나 소(小, miniature) 성장, 소 인플레이션, 소 이자율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근년(近年, recent years)에, 예컨대, 일본과 스칸디나비아에서 대형 신용 거품이 파열된 후에 경제학자들은 한 가지를 배웠다. 금융 및 은행 위기 후에 맨 처음 해야 할 일은 은행들을 정리하는(clean up) 것이고, 그것을 재빨리 그리고 철저히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성장할 수 없는 기관들은 폐쇄할 필요가 있으며, 반면에 다른 기관들에는 자본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이다.17)

 

그런데 유럽에서는 그 교훈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비판한다.

 

유럽에서는 그러나 금융 로비의 압력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 수년 동안 질질 끌려 왔다. 산업(industry)의 상태가 현재 너무나도 암울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공포 영화에서 빌려온 은유를 사용하여 그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좀비 은행(Zombie banks)”이란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는 은행들이며, 그 은행들은, 할리우드 영화들 속의 좀비들처럼, 유럽의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 은행들은 실질 경제에 돈을 빌려주기에는 너무나 병들었지만, 금융 투자로 투기를 할 만큼은 충분히 건강하다.18)

 

“좀비 은행들(Zombie banks)은 실질 경제에 돈을 빌려주기에는 너무나 병들었지만, 금융 투자로 투기를 할 만큼은 충분히 건강하다”?―이 설명 아닌 설명이,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바로 값싸게 살포된 거대한 자금이 왜 제조업 생산의 효율을 개선하고 증대시키는 데로 흐르지 않고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으로만 몰려드는지에 대한 저 평론가의 ‘설명’인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는 여기에서 “좀비 은행들”이니 “할리우드 영화들 속의 좀비들”이니 하는 저 “전문가들”의 은유에 주목하자.

저들이 정의하는 바에 의하면, 좀비들이란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는 존재들(those that are being kept alive artificially with government bailouts)”이자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는(wreaking havoc throughout)” 존재들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잠시 숨을 돌려 생각하면, 우리가 주요 소재로 삼아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저 평론가의 평론의 제목은 “The Zombie System: How Capitalism has Gone Off the Rails (좀비 체제: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는 궤도를 벗어나 버렸는가)”이다. 그런데 그의 장문의 평론 속에서 좀비라는 말, 좀비라는 은유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여기, 곧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연명되고 있는 은행들을 “좀비 은행들”로 규정하는 곳뿐이다. 그렇다면, 저 평론가가 말하는 “좀비 체제”란 곧 “좀비 은행 체제”를 의미하게 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분명 현재 지속되고 있는 대공황을 바라봄에 있어서의 저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금융ㆍ신용 현상 위주의 시각, 그러한 천박한 시각의 표현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는 존재”,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존재는 병든 은행들만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부들의 구제금융, 그것도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구제금융에 의해서만 연명되고 있는 존재 그것이고, 도처에 만연한 실업과 반실업, 빈곤, 고통이 웅변하는 것처럼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존재 그것이다. 그 어떤 무엇보다도 현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더구나 대공황에 허덕이는 자본주의 체제 그것이야말로 가장 사악한 “좀비 체제” 바로 그것인 것이다!

 

 

4.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다

 

지금 저들 비판적인 부르주아 분석가들ㆍ평론가들ㆍ경제학자들이, ‘앨런 그린스펀이 발명한 새로운 통화정책’ 운운하며, 떠들고 있는 바는 사실상 결국 규제 받지 않는 신자유주의적 금융, 즉 신자유주의적 신용(信用)이 이 대공황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비단 저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2008년 가을 소위 ‘리먼 쇼크’ 직후에 국내외의 내로라하는 ‘진보적’ㆍ‘좌파’ 경제학자들과 언론인들에 의해서도 우후죽순처럼 제기되었음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인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져버리고 사실상 더 이상은 들리지 않지만, 그러한 원인 인식에 기초하여 당시에 그들 ‘진보적’ㆍ‘좌파’ 경제학자들과 언론인들이 제안한 대안적 정책 방향이 케인즈주의적 국가 규제의 강화,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적 규제의 강화였음도 우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19)

그러나 이 대공황의 위기를 그렇게 금융, 즉 신용의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에서 찾는 한, 방금 말한 것처럼, 거대하게 풀려나간 자금이 왜 제조업 등 산업 쪽으로가 아니라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으로만 모여드는가조차 저들은 해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우선, 아무리 천박하다고 하여도, ‘풀려나가는 자금을,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이 아니라, 제조업 등에 투자하도록 통제했어야 하고, 그렇게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 즉 신용의 팽창이나 수축을 그 자체로서 공황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서 맑스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경제학의 천박성은 특히, 산업순환의 시기전환의 단순한 징후인 신용의 팽창과 수축을 그 (즉, 산업순환의: 인용자) 원인으로 삼는 데에서 나타난다. 일단 일정한 운동에 던져진 천체가 끊임없이 동일한 운동을 반복하는 것과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사회적 생산도 그것이 일단 팽창과 수축이라는 교대 운동에 던져지자마자 이 운동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결과가 다시 또 원인이 되고, 그 자신의 조건들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모든 과정의 부침(浮沈)은 주기성의 형태를 취한다.20)

 

그러면서 그는 공황의 원인이 신용의 급작스런 축소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재생산과정의 모든 연관이 신용에 입각해 있는 생산체제에서는 신용이 돌연 중지되고 단지 현금지불만이 통용되게 되면 명백히 공황이, 지불수단에 대한 맹렬한 쇄도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첫눈에는 그리하여 모든 공황이 단지 신용공황과 화폐공황으로서만 나타난다.21)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야말로 바로 “재생산과정의 모든 연관이 신용에 입각해 있는 생산체제”이다. 그리고 바로 이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서 “신용이 돌연 중지되고 단지 현금지불만이 통용되게 되면 명백히 공황이 …. 발생하지 않을 수 없”고, “첫눈에는 그리하여 모든 공황이 단지 신용공황과 화폐공황으로서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항변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우리는 금융의, 즉 신용의 신자유주의적 팽창이 공황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난데없이 마치가 우리가‘신용의 축소가 공황의 원인이었다’고 말했다는 듯이 모략하고 드느냐”하고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 그렇게 항의하고 나선다면, 그는 자신이 금융, 즉 신용과 공황의 관계에 대해서는 물론 신용 그 자체에 대해서도 그야말로 철저히 무지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황이, 더구나 금융공황이 발발하는 직접적인 계기는 “재생산과정의 모든 연관이 신용에 입각해 있는 생산체제”에서 대량의 채무불이행이 발생하기 때문인데, 즉 대형 어음부도가 나기 때문인데, 이런 채무불이행ㆍ어음부도야말로 말 그대로 무언가의 이유로 “신용이 돌연 중지” 내지 축소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황 국면에서 국가와 중앙은행이 거액의 ‘구제금융’을 쏟아 붓는 것도 바로 그 중지 내지 축소된 신용을 확대하여 공황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것 아닌가?

공황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그 전유(專有)의 사적 성격 및 그에 따른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있지만, 그 직접적 원인은, 주지하는 것처럼, 과잉생산에 있다. 그리고 신용 즉 금융의 공여(供與)ㆍ확대는 공황의 원인이 아니라 과잉생산을, 따라서 공황을 격화시키는 원인이다. 이에 대해서 엥엘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판매되지 않은 상품에 대한 선대(先貸)를 얻는 것이 쉬우면 쉬울수록, 그러한 선대는 더욱 더 많이 차입되고, 오로지 우선 화폐선대를 받기 위하여 상품을 제조한다든지 혹은 이미 제조된 상품을 먼 시장에 투매하려는 유혹이 더욱 더 커진다. 한 나라 사업계 전체가 어떻게 그러한 현혹(眩惑)에 사로잡힐 수 있는가, 그리고 그 후 그것이 어떻게 끝나는가에 관해서는 1845-1847년의 영국의 상업사(商業史)가 우리에게 설득력 있는 예를 제공하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신용이 무엇을 해내는가를 본다.22)

 

그리하여 (= 인도 및 중국과의 무역에서 영국의 공장주들은 이중의 이득을 얻었기 때문에: 인용자) 선대를 받는, 인도와 중국으로의 대량 위탁판매제도가 생겼는데, 이 제도는 곧 선대를 받기 위한 위탁판매제도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 필연적으로 시장의 대량 공급과잉과 파국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었다.23)

 

여기에서 “선대” 혹은 “화폐선대”는 모두 당연히 신용을 의미하는데, 그 신용 또는 그 용이함은, 그것 자체가 공급과잉 즉 과잉생산이나 파국(Krach)의 원인이 아니라, 그 과잉생산과 파국을 격화시키는 요인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금융, 즉 신용을 그 자체로서 공황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과잉생산과 공황을 격화시키는 요인으로서 이해할 때에만, 앞에서 부르주아 평론가들이 지적만 할 뿐, 그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 문제, 아니,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공황 구제를 위해서 살포된 엄청난 자금을 왜 “일본에서든, 유럽이나 미국에서든, 회사들은 더 이상 새로운 기계장치나 공장들에 거의 투자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에, 전세계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에서 가격들이 폭등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 문제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지불의 연쇄가 파열되자, 거대한 금융위기를 불러온 만큼의 지난 호황기 및 번영기의 거대한 신용 때문에 이미 과잉생산이 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거대한 재고에 짓눌려 있고 디플레이션이라고 비명을 지를 만큼 대대적인 할인판매와 투매로 자본가치가 파괴돼가고 있기 때문에, 우선 “더 이상 새로운 기계장치나 공장들에” 투자하여 그 과잉생산을 더욱 격화시킬 필요가 거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경기부양’을 위한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초저금리 정책으로 이자 소득 또한 적기 때문에 대대적인 투기가 벌어지면서 “전세계적으로 주식과 부동산, 채권시장에서 가격들이 폭등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새로운 기계장치나 공장들에” 투자하지 않더라도, 즉 기존의 “기계장치나 공장들”에 의해서만도 그 과잉생산이 이미 얼마나 거대하게 벌어지고 있는가는, 대공황 자체가, 즉 공황과 침체가 8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지만 회복의 기미, 호황으로의 국면 전환의 징후가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증거이다. 그리고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오늘날 다시 부르주아 국가와 독점자본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디플레이션이 그 증거이다.

실제로 오늘날 과잉생산이 얼마나 거대하게 벌어지고 있는가는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을 인용한 ≪한겨레≫(2015. 4. 27.)의 다음 기사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 경제가 원자재 등 상품뿐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과잉에도 시달리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공급과잉에 시달리는 세계 경제가 향후 10년 동안 저성장, 저인플레로 침체되는 디플레이션을 겪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크레디스위스 은행에 따르면, 현재 세계 경제의 부는 지난 2000년의 117조 달러에 비해 약 263조 달러로 늘어 저축과 자본의 과잉공급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은 이자율을 끌어내려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갉아먹고 있다. 노동력도 과잉되어, 임금 역시 정체하고 있다. 소련 등 사회주의권 몰락과 중국의 부상으로 약 10억 명의 노동력이 새롭게 세계 노동시장에 진입한 상태다.

미국의 최대 석유비축기지가 있는 오클라호마 쿠싱의 석유비축량은 지난주 4억8900만 배럴까지 올라 사상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면화는 전 세계적으로 1억1천만 베일(면화 거래 단위ㆍ약 80kg)이 비축되어 있다. 이는 미국이 면화 재고량을 발표하기 시작한 1973년 이래 최고치다. 지난 12개월 동안 세계 원자재 가격 지표인 ‘에스앤피 지에스시아이’(S&P GSCI)는 34% 급락해,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완제품 재고량도 크게 늘었다. 지난 2월 미국 내 가공 내구재의 전체 재고는 4130억 달러어치로 치솟았다. 이 역시 미국이 이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한 1992년 이래 최고치다. 전세계에서 자동차 판매량이 가장 빠르게 늘던 중국에서도 2년 6개월 만에 미판매 자동차 대수가 최고로 올랐다.

수요 부족으로 고민에 빠진 각국 정부가 빚으로 경기를 부양하려 하면서, 부채 역시 엄청나게 쌓이고 있다. 미국의 정부ㆍ기업ㆍ소비자 부채는 2008년 17조 달러에서 현재 25조 달러로 늘었다. 부채가 미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65%에서 181%로 늘은 것이다. 유럽 역시 부채가 국내총생산의 180%에서 204%로, 중국은 134%에서 241%로 늘었다.

빚에 몰린 정부를 대신해 중앙은행들의 역할이 커졌다. 미국 연준과 영국 중앙은행은 최근 국내총생산의 거의 25%에 해당하는 규모로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하는 등 돈을 풀었다. (강조는 인용자)24)

 

참고로, 이러한 사태를 “전문가”는 “역사상 전례 없는 사태”로 보고 있다며, 위 기사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과잉공급의 시대≫의 저자인 대니얼 앨퍼트는 “경제학은 (자원의) 희소성에 기반한다. 과잉공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고전적 경제학의 개념이다”라고 말하면서, 현재의 과잉공급 경제는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례 없는 사태라고 지적했다.25)

 

“과잉공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고전적 경제학의 개념이다”?―일반적 과잉생산의 가능성을 부인한 것이 고전파 경제학의 부르주아적 편견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저 대니얼 앨퍼트가 “고전적 경제학”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필시 그 자신 그 흐름의 일원인 부르주아 경제학 일반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한 한에서, “과잉공급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고전적 경제학의 개념이다”거나 “경제학은 (자원의) 희소성에 기반한다” 운운은, 나아가 “현재의 과잉공급 경제는 인류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례 없는 사태” 운운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그리고 그걸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옮기는 기자의 ―무지, 그 비과학성에 대한 고백일 뿐이다. “과잉공급 경제”26) 그것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례 없는 사태”이기는커녕, 산업혁명 후 대략 10년을 주기로 끊임없이 겪어온 사태이고, 특히 1930년대의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사실상의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만 그 “과잉공급”, 즉 과잉생산의 규모와 그에 대응하여 부르주아 국가들이 살포하고 있는 자금의 규모,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불수단의 규모뿐일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날의 디플레이션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디플레이션이란 말로 표상하는 바는 물가의 지속적인 하락인데, 국가와 자본 측이 제시하는 통계에 의하는 한, 각국의 물가동향은, 약간의 간헐적 예외를 제외하면,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런데도 디플레이션이라는 비명이 자못 소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명목상ㆍ형태상으로는, 디플레이션이 아니라, 그 상승률이 저들의 물가 목표치라는 2%에는 못 미치고 있지만, 즉 과거의 악성 인플레이션에 비해 그 상승률이 무척 낮긴 하지만, 여전히 인플레이션 현상, 저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신조어(新造語)에 의하면 ‘로우플레이션(lowflation)’ 현상 혹은 ‘미니아춰 인플레이션(miniature inflation)’ 현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도 우리도 그것을 디플레이션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인플레이션이란, 자본주의적 생산체제가 전반적 위기에 봉착하자 지불수단의 부족으로 파산하는 독점자본의 구제 등, 위기 타개를 위하여 부르주아 국가가 은행권의 금태환을 중지하고, 은행권의 발행 권한을 중앙은행에 집중하여 그 은행권을 국가지폐화한 후 그 불환은행권을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금량) 이상으로 남발함으로써 발생하는, 물가의 명목적 상승이다. 금의 일정량으로 표시되는 상품의 가격들, 즉 상품들의 금물가(金物價)는 변동이 없거나 심지어 하락(실질적 하락)하는데도, 불환은행권=지폐로 표현되는 물가는 상승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에 비해서, 디플레이션이란 물가의 실질적 하락, 즉 금물가 혹은 금량으로 표현되는 물가의 하락이며, 그것도 과잉생산에 따른 수요의 부족으로 지속적으로 물가가 실질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대공황을 맞아 살포되어 왔고 또 살포되고 있는 가히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은, 두말할 나위 없이, 상품유통에 필요한 화폐량, 즉 상품유통에 필요한 금량을 넘는 거대한 양의 국가지폐 증발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폐의 그러한 증발(增發)은 당연히 고율의 인플레이션의 요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디플레이션” 운운하는 현상의 배후에서 고율의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살포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나고 있는 각국의 인플레이션 율은, “디플레이션” 운운할 만큼, 대체로 2%에도 못 미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선 한편에서는, 현상의 배후에서 그 인플레이션과는 정반대 방향의 물가운동, 즉 지속적인 거대한 과잉생산 = 지속적 수요 부족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이, 그것도 고율의 디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상적으로 보는 한, 일부 국가에서 간헐적으로밖에는 나타나고 있지 않은 디플레이션 현상, 즉 간헐적인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디플레이션! 디플레이션!” 하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도 그들이, 비록 그 이유와 원인을 과학적으로 해명할 능력은 없더라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표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27)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현재 진행 중인 대공황 속에서의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1930년대 대공황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을 예로 들어 보자면, 무엇보다도, 1929년 대폭락을 계기로 가파르게 진행되던 디플레이션은 1934년 4월에 시작된 ‘뉴딜’과 더불어, 즉 금태환의 정지 및 그에 기초한 불환 달러의 살포와 더불어 멈추고, 곧바로 인플레이션으로 반전되었음에 비해서,28) 이번의 대공황에서는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양적 완화’, 즉 자금의 살포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이라는 비명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야기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뉴딜이, 파산의 위기에 처한 독점자본의 직접적 구제, 즉 직접적인 구제금융을 물론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대규모의 공공토목사업 등을 통해서, 즉 실업자 구제를 통해서 노동자 대중의 소득을 상당 정도 증대시키고, 그를 통하여 상품에 대한 총수요를 진작(振作)시켰음에 비해서, 현재의 ‘양적 완화’, 즉 자금의 살포는 사실상 전적으로 독점자본의 직접적 구제, 그것도 거대 금융자본의 직접적 구제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총수요의 증대로 이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극소수 독점자본의 손아귀로의 부의 집중을 변호하기 위해 떠드는 “적수효과(trickle-down effects)” 운운의 기만에 반해서, 살포된 자금이 노동자 대중의 소득으로 되어 상품에 대한 수요를 진작시키는 대신에 주식시장이나 부동산ㆍ채권시장에 몰려들어 투기만을 격화시키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파산의 위기에 처한 독점자본을 구제하기 위한 단순한 지불수단으로서 자금이 공급될 때, 그때는 은행권, 즉 불환지폐의 실제의 발권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양적 완화’라는 이름으로 살포되고 있는 자금의 규모가 가히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그에 수반하여 살포되는 지권(紙券), 즉 불환은행권=불환지폐의 절대적 규모 역시 분명 엄청난 크기이겠지만, 그 상대적 규모는 아주 작을 수 있다.29) 그리하여 이것이 인플레이션의 율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오늘날 저들 자본으로 하여금 계속 디플레이션의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양적 완화’, 즉 대량의 자금 살포는 왜, 팽배한 실업과 반실업에도 불구하고 실업 구제와 그것을 통한 총수요의 진작을 외면한 채, 독점자본의 직접적 구제에만 집중되는 것일까?

이는, 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1970년대를 경과하면서 케인즈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부터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했으며, 그 후 계속 신자유주의를 심화시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과 사실상 동일한 질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그 재생산ㆍ축적 체제가 신자유주의적 체제로 이행한 것, 혹은 이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 그 노동생산력의 고도의 발전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가 다시 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그 노동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한편에서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극도로 강화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의 이윤율이 현저하게 낮아져 노동자ㆍ근로인민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가 재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케인즈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로부터 신자유주의적 그것으로의 이행은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의 재격화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격화된 전반적 위기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 한, 아니, 되돌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 이행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인 것, 즉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공황 구제자금의 살포도, 케인즈주의적 총수요 진작이 아니라, 독점자본을, 그것도 금융자본을 직접적으로 구제하는 방식, 즉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밖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리먼 쇼크’ 직후 신자유주의를 성토하면서 케인즈주의적인 국가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만발했지만, 그 주장들이 어느 날 모두 슬그머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잦아들은 것도 사실은 전반적 위기의 재격화로 케인즈주의적 체제로의 복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공황 발발 후 오늘날에도 경쟁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것은, 저 ‘진보적’ 지식인들이 떠들어대던 케인즈주의적 규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탈규제가 아닌가?

역사적 과정과 상황이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도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상황에 합당한 것이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그 재생산ㆍ축적 체제의 불가역적인 단계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하여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신자유주의 비판은 정당하지만, 오늘날 ‘진보적’ㆍ‘좌파’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선도하고 있고,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아래에 있는 순진한 대중이 외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말고도) 수천 개의 대안이 있다’는 ‘비판’, 즉 신자유주의가 아닌 더 좋은 자본주의가 있을 수 있다는 식의 ‘비판’과 주장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 오도된 것이며, 본질적으로 좌익 포퓰리즘(left populism)이다. 그러한 ‘비판’과 주장은 신자유주의의 역사성,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의 그 필연성을 전혀 도외시한 비과학적인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다.

 

 

5.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과학과 혁명적 정치 지도부를

   다시 쟁취해야

 

우리는 앞에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현 상태와 관련한 은유로서의 ‘좀비’를, 독일의 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평론가가 정의하는 바에 따라,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는 존재”이자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존재로 규정했고, 그렇게 규정했을 경우, 다른 무엇보다도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바로 그 사악한 ‘좀비 체제’임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만약 어떤 존재가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으면서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존재가 무엇이든 그것을 인위적으로 연명시켜서는 절대로 안 되고,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자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 역시 그것이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연명되고 있는 존재”이자 “도처에서 해악을 끼치고 있는” 존재로서의 ‘좀비 체제’인 한, 그것을 폐지ㆍ제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자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주지하는 바처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성격과 특징상 이 과업을 이행해야 할 주체, 수행할 수 있는 주체는 당연히 노동자계급이다. (독점)자본의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서 몰락의 일로에 있는 소부르주아지, 특히 그 하층 또한 그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주체의 일익을 담당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비타협적인 혁명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계급과의 동맹 속에서, 그 지도 아래에서라는 것은 이미 역사적 경험과 정치과학이 명백히 입증하고 있는 대로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두에 서서 그 “좀비 체제”의 폐지ㆍ제거라는, 그리고 보다 고도의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라는 과업을 수행해야 할 노동자계급의 오늘날의 상태는 어떤가? 그들은 과연 그 과업을 수행할 각오와 역량을 구비하고 있는가?

누구도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한국에서도, 세계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결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의 그리스 총선30) 결과가 보여주는 것처럼, 심지어는 공식 실업률31)이 25%를 넘나들고, 특히 청년 실업률은 55%에서 60%에까지 이르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남부유럽 국가들의 노동자 대중조차 그 대부분이 아직은 ‘좀비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폐지ㆍ제거하고 새로운 생산관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 “좀비 체제”를 고치고 ‘개량’해 쓰려는 헛된 노력에 매달려 있는 것이 오늘날의 노동자계급의 현실이다. 세계 도처에서 혁명적으로 진출하던 1930년대 대공황 당시의 노동자계급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 확연히 대비되는 정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과 세계관, 나아가서는 그에 기초한 자신의 혁명적인 정치적 참모부를 해체당하고 제거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0년대와 1940년대를 통해서 확립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그야말로 극소수의 국가들, 그것도 극소수의 소국(小國)에서만 어렵게 연명하고 있을 뿐, 해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앞에서 독일의 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평론가도 상기시키지 않았던가? 1989년과 1991년에 걸쳐 동유럽과 쏘련에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ㆍ해체되자 미국의 극우 정치학자 “후란씨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언’을 기원하고 있었다”고.

돌이켜 보면, 1930년대에는, 자본주의는 대공황의 수렁 속에서 노동자ㆍ근로인민에게 극한적인 빈곤의 고통을 강요하고, 나아가 이탈리아나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일본 등지에서는 파시즘이 득세하면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야욕을 노골화하고 있었음에 반하여, 쏘련에서는 아주 급속한 속도로 사회주의를 건설해가고 있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그때에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반공 모략이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발달한 국가의 노동자계급, 특히 유럽 각국의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를 지향하여 혁명적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되어 버린 현재와는 현저하게 다른 상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1930년대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혁명적 진출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즉 파시즘의 침략을 저지ㆍ분쇄하는 것이 우선적 목표일 수밖에 없었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잠시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멈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혁명적 진출을 멈추게 한 것은 전쟁 중에 기획되고 종전 후에 빠른 속도로 제도화된 이른바 ‘복지국가’ 체제였고, 그와 동시에 그 지배력을 현저히 강화한 독점자본의 반공 이데올로기였다.

혁명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노동자계급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포섭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대폭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독점자본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회보장제도를 대폭 강화하여 이른바 ‘복지국가’ 체제를 확립하였고, 그를 통해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로 포섭해 갔다. 그리하여 대략 1955년을 변곡점으로 하여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복지국가’ 체제의 사회보장제도에 안주(安住)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시간이 가면서 자신들의 과학과 세계관, 나아가 혁명적인 정치적 참모부를 상실해 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급속히 거대하게 발달하고 그 대중적 영향력을 가히 혁명적으로 강화해온, 텔레비전을 위시한,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 그 지배력의 절대적 강화도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저 유명한 ‘3S’, 즉 ?스(sex)ㆍ스크린(screen)ㆍ스포츠(sports)를 통해서 대중의 정치의식ㆍ사회의식을 마비시키고, 극우적 반공 모략선전을 통해서 대중의 머릿속에 쏘련의 현실과 사회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스멀스멀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수많은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대학의 강단과 대중매체에 여러 형태로 고용되어 노동자계급의 과학을 해체하는 데에, 그리하여 그들의 혁명적인 정치적 참모부를 타락시켜 해체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더구나 이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영향력은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만을 지배하게 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 내부에는 물론이요, 쏘련 내에도 면면히 잠복되어 있던 우파적 경향, 현대 사민주의적 경향을 고무하여 수정주의, 즉 기회주의적 세력들이 득세하게끔 하였고, 마침내는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과 쏘련의 붕괴라는,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를 가져왔다.32)

 

저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이론과 사상, 나아가 정치적 실천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고,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고 화려하게 그 모습을 바꿔오고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대공황 발발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동자ㆍ근로인민에 대한 영향력ㆍ지배력을 유지하고 있다.

새로운 대공황 발발 8년이 지나며 ‘좀비 체제’ 자본주의가 노동자ㆍ인민의 빈곤과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지만, 심지어 그리스나 스페인 등등과 같이 그 빈곤과 고통이 사실상 극한에 달해 있는 곳들에서조차 노동자계급이, 1930년대와 달리, 혁명적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 제1차적 원인은 바로 이것 때문, 즉 저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의식, 그 혼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사상과 이론은 그 형태에서 다양하고, 또 정세의 변화에 따라 화려하게 변신하고 있지만, 그 공통의 본질은 ‘스딸린주의 비판’이라는 날조된 구실하의 반쏘ㆍ반공주의, 반(反)맑스-레닌주의이다. 그것은 부정직한 언설로 노동자계급을 기만하고 농락하면서 독점자본의 이익을 옹호하고, 그 지배를 강화ㆍ유지시키는 반동적 비(非)과학인 것이다.

저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개개인이 자신들의 그러한 반동적 역할을 의식하고 있든, 아니면 의식하지 못하든, 즉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희생자이든, 그 차이는 객관적으로는 전혀 어떤 의미도 없다. 어쩌면 상당수의 그들이 그렇겠지만, 만일 저들이 주관적으로, 그것도 열렬히 착취와 억압으로부터의 노동자ㆍ인민의 해방을 위해서 그러한 언설을 늘어놓고, 그러한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맑스가 ≪자본론≫ 제1권(1867)에서, 그리고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에서 인용했던 서양의 한 속담을 상기하고,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아무튼, 노동자계급이 저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그러한 ‘반스딸린주의’ 선전에 놀아나고, 그리하여 저들의 반쏘ㆍ반공주의 선전에 놀아나는 한, 저들의 새로운 ‘대안들’에 놀아나는 한, 그리하여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 맑스-레닌주의를 되찾지 못하고, 자신의 혁명적 정치 지도부를 재건하지 못하는 한,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할 수 없는 것, 독점자본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상황이 입증하고 있는 것처럼, 명확하다.

물론, 독점자본이 지배하는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저들 ‘진보적’ㆍ‘좌파’ 지식인들,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기만적 이론과 사상이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지배가 영원할 수는 없다. 앞의 각주 30)에서, 그리스에서의 이른바 “급진좌파연합(SYRIZA)”의 집권이 그리스 노동자ㆍ인민으로 하여금 그 생활상의 처지 때문에 결국은 자신의 과학과 혁명적 정치 지도부를 되찾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33) 독점자본이, 신자유주의가, 결국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빈곤과 고통이 동시에 결국은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그 과학과 혁명적 정치 지도부를 되찾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간이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그것을 호황으로 바꾸기 위한 갖은 정책 모두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가고, 이제는 주지의 사실이 되어 있는 것처럼, 끝내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파괴ㆍ대살육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양적 완화’라는 이름으로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규모의 자금을 살포하고 있지만, 발발 8년이 지나도록 현 대공황 역시 그 끝을 모르고 지속되고 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의 끝을 상기하면,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 대공황 역시 ‘대전쟁’이 아니면 그 끝을 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대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은 과연 이 대공황을 끝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대량의 핵병기 시대인 지금 다시 그러한 대전쟁이 발발한다면, 그 전쟁은 대공황을 끝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인류의 사실상의 절멸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새로운 대공황이 발발하고, 전세계가 이른바 ‘리먼 쇼크’에 전율할 때에 우리가, “21세기 전반기는 결정적인, 최종적인 사회혁명의 시대이거나 인류의 사실상의 절멸을 초래할 대전쟁의 시기일 수밖에 없다”34)고 말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재무장은 지체되고 있는 데에 반해서, 독점자본은 곳곳에서 전쟁책동을 노골화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의 고조도 고조려니와, 특히 중동과 리비아ㆍ이집트 등 북부 아프리카에서의 상황과 우끄라이나에서의 상황은 참으로 우려스럽게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렇게 자신의 과학과 세계관을 되찾아 혁명적 정치 지도부를 재건하기 위하여 노동자계급이 서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재무장을 위하여 깨어 있는 선진 노동자, 선진 활동가들이 목적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그러한 긴박한 상황에 지금 우리는 처해 있는 것이다.

 


 

1) 이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혹은 그 머릿글자인 ‘QE’는 이제 경제학상의 부동의 용어로까지 자리잡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2)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현재의 세계적인 경기하강은 대공황(Great Depression)과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현재의 거액의 구제금융 조치들이 실패한다면, 세계경제에 대한 그 후과는 마찬가지로 격렬할 것이다.” (쉬피겔(Spiegel) 편집진, “Is 2009 the New 1929? Current Crisis Shows Uncanny Parallels to Great Depression (2009년은 새로운 1929년인가? 현재의 위기는 대공황과 기묘한 유사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SPIEGEL ONLINE, 2009, 4. 29.)

 

3) Michael Sauga, “The Zombie System: How Capitalism has Gone Off   the Rails (좀비 체제: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는 궤도를 벗어나 버렸는가)”,

SPIEGEL ONLINE, 2014. 10. 23.

 

4) 같은 곳.

 

5) ≪쉬피겔≫은 그를 “저명한 프랑스 경제학자(celebrated French economist)”, “경제학자들 중의 혜성(a shooting star among economists)”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6) “Thomas Piketty on the Euro Zone: ‘We Have Created a Monster’ (In-terview by Julia Amalia Heyer and Christoph Pauly)”, <http://www.spiegel.de/international/europe/thomas-piketty-interview-about-the-european-financial-crisis-a-1022629.html>

 

7) K. 맑스, “고타 강령 비판”, MEW, Bd. 19, S. 22.

 

8) K. 맑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541.

 

9) Michael Sauga, 같은 글.

 

10) “연착륙(soft landing)”이란, 호황 국면으로부터 생산의 축소ㆍ침체 국면으로의, 충격이 없는 부드러운 이행을 의미하는,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경제 이데올로그들의 상상과 염원 속의 경기 국면 이행방식이다. 그리고 저들의 ‘경착륙(hard landing)’이란 물론 이 상상과 염원 속의 경기 국면 이행방식으로서의 “연착륙”의 개념적 반사물이다.

 

11) 같은 글.

12) 같은 글.

13) 같은 글.

 

14) 결국,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은 업보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15) 같은 글.

16) 같은 글.

17) 같은 글.

18) 같은 글.

 

19) 저들 ‘진보적인’ 소부르주아 경제학자 및 언론인들 가운데 당시 국내에서 목소리가 높았던 대표적인 사람들의 인식과 대안에 대한 간단한 비판에 대해서는, 채만수, “새로운 대공황과 그 역사적 의의”, ≪노동사회과학 제1호, 공황과 사회주의≫, 2008. 11. pp. 13-42 참조.

 

20) K. 맑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62.

 

21) K. 맑스,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507.

 

22) K. 맑스,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S. 420-421의 엥엘스의 보충 설명.

 

23) 같은 책, S. 422의 엥엘스의 보충 설명.

 

24) 정의길 선임기자, “WSJ, ‘세계경제 공급 과잉…10년간 디플레 위기’”, ≪한겨레≫, 2015. 4. 27.; 거대한 인구와 높은 성장률로 과잉생산의 완충기로서의 역할이 기대되어 온 ‘시장 사회주의’ 중국 역시 과잉생산ㆍ재고누적의 상황임을 주목하자. 사실은 ‘세계의 공장’으로서의 중국이야말로 과잉생산의 주요 진앙지이지만.

 

25) 정의길 선임기자, 같은 기사.

 

26) 여기에서의 “과잉공급 경제”는 물론, 사회 주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는, 절대적 ‘과잉공급 경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ㆍ계급관계에 의해서 제약되는 수요, 이른바 유효수요를 넘는 ‘과잉공급 경제’이다.

 

27) 최근의 디플레이션 및 디플레이션론에 대한 약간 더 상세한 비판적 논의에 대해서는, 채만수, “부르주아적 디플레이션 담론에 대하여 ―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의 반대가 아니다”, ≪정세와 노동≫ 제108호 (2015년 1월호), pp. 48-67 참조.

 

28) 미국의 도매물가지수(1926년=100)

 년

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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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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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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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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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64

 

 

10

7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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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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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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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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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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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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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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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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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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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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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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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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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81

 

193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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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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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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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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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75

 

 

10

81

 

     출처: 三宅義夫, 󰡔金―現代の經濟におけるその役割󰡕, 岩波書店, 1968, p.128.

 

29) “…. 이러한 화폐핍박(Geldkllemme)의 시기에는 이 (=유통수단의: 인용자) 총량은 이중의 방식으로 제한된다. 1. 금의 유출에 의해서, 2. 단순한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에 대한 수요에 의해서. 이 두 번째의 경우에는 발행된 은행권이 곧바로 환류되거나, 전혀 은행권의 발행 없이 장부상의 신용에 의해서 거래가 청산된다. 이 경우에는 따라서 단순한 신용거래가, 그 청산이 유일한 목적이었던 지불들을 매개한다. 화폐가 단지 지불들을 결제하기 위해서 기능하는 경우에는 [그리고 공황의 시기에 선대(先貸, Vorschuß; 이 경우에는 대부, 즉 신용을 의미한다: 인용자)를 받는 것은 지불하기 위해서이지 구매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지나간 거래를 청산하기 위해서이지 새로운 거래를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결제가 전혀 화폐의 개입 없이 단순한 신용조작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조차 화폐의 유통은 보잘 것 없다는 것, 그리하여 화폐융통을 향해 크게 쇄도(殺到)하는 경우에도 그 (=화폐의: 인용자) 유통을 확대하지 않고 이 거대한 양의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화폐의 특성이다.”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475.)

 

30) 그것은, 주지하는 것처럼, 자칭 “급진좌파연합(SYRIZA)”의 집권이라는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그 자칭 “급진좌파연합(SYRIZA)”은 실제로는 전혀 ‘급진적’, 보다 정확히는 전혀 ‘근본적(radical)’이지 않고 소리만 요란한 소부르주아 정당이다. 이 “급진좌파연합(SYRIZA)”의 강령도 실천도 전혀 “좀비 체제”로서의 그리스 자본주의를 해체ㆍ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연명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리스의 노동자ㆍ인민 대중은 이윽고 그 집권이 현재 그리스의 노동자ㆍ인민이 겪고 있는 지옥과 같은 빈곤과 고통을 완화ㆍ제거할 것이라는 기대가 한낱 환상이었음을, 그리고 그 빈곤과 고통을 제거하는 유일한 길은 그 “좀비 체제”를 제거하고 새로운 고도의 사회체제를 건설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급진좌파연합(SYRIZA)”이 수행할 역사적 임무는 바로 그것, 즉 그리스 노동자ㆍ인민의 지체된 정치의식을 바로잡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역할 그것일 것이다.

 

31) “북아메리카, 유럽, 호주에서 실제 실업률은 ‘공식적’ 실업률의 대략 두 배이다”(Pete Dolack, “Real unemployment double the official rate”,

The Guardian: The Worker’s Weekly, Issue #1678 March 25, 2015. (<http://www.cpa.org.au/guardian/2015/1678/14-real-unemployment.html>).

 

32) 쏘련 내에서의 좌파적 경향과 우파적 경향의 계보와 투쟁, 우파적 경향의 득세와 그로 인한 쏘련의 해체에 대한 아주 개략적인 설명에 대해서는, “‘배반당한 사회주의: 1917-1991년 쏘련 붕괴의 이면’의 공저자 토마스 케니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omas Kenny co-author of ‘Socialism of Betrayed: Behi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1917-1991’)” (<http://politicaleconomy.ie/?p=908>) 참조.

 

33) 참고로, 물론 가야 할 길이 한참 멀고도 멀긴 하지만, “급진좌파연합(SY-RIZA)” 집권 만 3개월 만에 영국의 ≪더 가디언(The Guardian)≫은, 그리스를 “오늘날 낙담이 지배하고 있다”며,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공약에 대한 기대가 높았기 때문에 알렉씨스 치프라스(Alexis Tsipras)의 반(反)긴축 정부는 처음엔 유례없는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3개월 후 …. 기대는 스러지고 있다(hope is ebbing). … 지난 주 여론조사는, 급진좌파연합(SYRIZA) 주도의 연립정부가 그들을 떠받쳐온 민중적 지지를 대량으로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좌파 및 협상에서의 그들의 강경노선에 대한 지지가 가파르게 떨어져왔다.” (Helena Smith, “Greeks’ view of the debt crisis: ‘What lies ahead is great, great hardship’”, The Guardian, 2015. 4. 25. <www.theguardian.com/world/2015/apr/25/greeks-view-of-debt-crisis-great-hardship>). 여기에서, “협상에서의 좌파 정부의 강경노선에 대한 지지가 가파르게 떨어져왔다” 운운은 물론 부르주아적인 전도된 시각의 표현이다.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좌파 정부의 강경노선” 그것이 아니라, ‘강경노선’으로 위장된 저들 ‘급진좌파’ 정부의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에 대한 굴종ㆍ숭배이기 때문이다.

 

34) 채만수, “새로운 대공황과 그 역사적 의의”, ≪노동사회과학 제1호, 공황과 사회주의≫, 2008. 11. p. 51.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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