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코민테른과 스페인의 반파쇼인민전선

 

권정기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Ⅰ. 코민테른의 반파쇼 인민전선

 

1. 1930년대의 정세: 쏘련과 파시즘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반파쇼 노동자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을 공식적으로 선언한다. 1935년 8월 20일 채택한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의 코민테른의 임무(결의)”(이하“결의”1))에서 그 내용을 살펴보자. 당시 세계정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하 강조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경우 원문)

 

쏘비에트 국가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것. 이것은 세계적 중요성을 갖는 승리이며, 전 세계의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의 보루로서의 쏘연방의 위력과 역할을 눈부시게 높이고 있으며, 근로자를 격려하여 자본주의적 착취에 반대하고 부르주아적 반동과 파시즘에 반대하여 평화를 추구하여 각 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목표로 한 투쟁에 떨쳐나서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대의 경제공황. 부르주아는 인민 대중을 영락시킴으로써 이 공황에서 벗어나려고 수천만 실업자를 기아와 사멸의 운명에 밀어 넣고 근로자의 생활을 전대미문의 낮은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몇몇 나라에서 광공업 생산고가 증대하고 금융계의 거두들의 이윤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세계 부르주아지는 공황과 불황으로부터 벗어나는 데도, 자본주의 제 모순의 격화를 억제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나라들(프랑스, 벨기에 기타)에서는 공황이 계속되고 있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공황이 불황 상태로 옮겨가고 있는 한편, 생산이 공황 이전 수준을 넘어선 국가(일본, 영국)에서는 새로운 경제적 동요가 성숙하고 있다.

파시즘의 공세, 독일에서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2)하고 새로운 제국주의 세계전쟁과 쏘연방에 대한 공격 위협이 증대한 것. 자본주의 세계는 이러한 수단으로 제 모순의 막다른 길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위기. 그것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에 대한 노동자의 무장투쟁으로 나타났다. 이 투쟁은 아직 파시즘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를 가져오고 있지는 못하지만 부르주아가 파시스트 독재를 확립하는 것을 막고 있다. 또 1934년 2월의 시위와 프롤레타리아의 총파업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강력한 반파시즘운동.

⑤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걸친 근로대중의 혁명화. 이 혁명화는 쏘연방에서의 사회주의의 승리와 세계 경제공황의 영향을 받고, 또 중앙유럽에서― 독일, 나아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 조직 노동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당을 지지한 여러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일시적으로 패배한 데서 얻은 교훈에 입각하여 진행되고 있다. 국제노동자계급 사이에는 행동의 통일을 요구하는 강력한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식민지 여러 나라의 혁명운동과 중국의 쏘비에트 혁명이 확대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계급세력의 상호관계는 혁명세력이 성장하는 방향으로 점점 변하고 있다.3)

 

1929년에 자본주의 역사상 최대의 공황이 터졌다. 위기는 극복되지 않았고,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반면 사회주의 쏘연방은 성장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극복한 대안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걸쳐 근로대중은 혁명화 되었다. 자본가 계급은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은 파시즘이라는 광기― 반혁명을 목표로 하여 노동자계급을 급습 ―로 표출되었다. 파시즘은 그것이 권력을 장악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등 전 세계 자본주의국가에 널리 퍼진 현상이었다. “결의”는 파시즘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러한 정세에서 지배적인 부르주아는 파시즘, 즉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이며, 가장 배외주의적이고 가장 제국주의적인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독재의 수립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근로자를 약탈하는 비상조치를 실시하고, 제국주의적 강도전쟁을 준비하며, 쏘연방을 습격하고, 중국을 노예화하고 분할하는 등의 모든 방법에 입각하여 혁명을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4)

 

파시즘은 금융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분자의 공공연한 테러독재이며, 혁명을 방지하는 것을 핵심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공산주의자들, 특히 그 전위인 쏘련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한 전쟁이 쏘련과 독일의 전쟁이라는 데서 잘 드러난다. 둘째, 제국주의 간의 군사적 혹은 경제적 투쟁을 통해, 세계를 재분할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반혁명을 그 본질로 하는 파시즘이 핵심 목표로 했던, 쏘련을 절멸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의 국가(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생산력을 파괴함으로써, 과잉생산을 타개하고, 자본주의를 공황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2. 사회당 공산당 노동자의 반파쇼 통일전선

 

당시 파시즘은 “중앙유럽에서― 독일, 나아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에서 ―조직 노동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당을 지지한 여러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를 (일시적으로) 패배시켰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행동의 통일을 요구하게 되었다. “결의”는 “파시즘의 성장과 그 승리는, 부르주아와의 계급협조라는 사회민주당의 분열정책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그 대열을 해체 당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두 당에 속한 노동자들의 행동통일― 반파시즘 통일전선 ―을 주장한다.

 

통일전선운동은 지금은 발전의 초기에 불과하지만, 프랑스의 공산당계 노동자와 사회민주당계 노동자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투쟁하여 파시즘의 최초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는 국제적 규모의 통일전선운동에의 동원력으로 작용하였다.5)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하여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노동자계급의 통일투쟁전선을 실현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서 국제노동운동이 당면한 주요 임무라고 성명한다.

 

노동자계급의 다수자가 자본주의의 타도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공동강령에 입각하여 단결하기 이전에도, 그 소속 조직에 상관없이 노동자계급의 모든 부분의 행동통일을 이루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6)

 

공산당계와 사회민주당계 노동자의 통일전선운동은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1934년 1월 30일에 프랑스에서 달라디에 총리(급진사회당)가 입각하는데, 그는 극우파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비난 받고 있던 파리 경찰국장 쉬아프(Chiappe)를 해임했다. 그러자 2월 6일 파리에서 극우파시스트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총리는 즉각 실각했다.

바로 이어서 반파시즘운동이 분출하였다. 2월 12일 공산당과 사회당이 각자 총파업투쟁에 나섰다. 참가한 노동자 수는 전국에 걸쳐 450만 명에 이르렀고, 파리에서만도 노동자 100만 명이 총파업투쟁에 참가했다. 이 투쟁으로 파시즘의 위협이 격퇴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2월 행동”에서, 길거리에서 만난 공산-사회 양당의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하층 행동통일을 이루었고, 상층 행동통일을 요구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5월부터 사회당에 반파시즘 행동통일을 제안했고, 1934년 7월 27일 “프랑스 사회당-공산당 행동통일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노동자통일전선이 실현되었다.

 

3. 반파쇼 인민전선

 

코민테른은 노동자통일전선을 2가지 방향에서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 먼저 그 참여 폭을 더 넓혀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구축할 것. 그리고 그 핵인 노동자 통일전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공산-사회당을 단일한 정당으로 합치는 것. 먼저 인민전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공산주의자는 근로 농민, 도시 소부르주아와 피억압 민족의 근로 대중의 투쟁을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하에 통합하는 데 노력하면서, 이들 근로자층의 특수한 요구 중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근본적 이익과 일치하는 모든 요구를 지지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의 기초 위에 광범한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창설을 달성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다수 농민을 약탈하는 파시스트 정책에 반대하고…. 근로 농민을 동원하는 것이다. 모든 곳에서, 도시 소부르주아와 인텔리겐차, 나아가 직원 사이에서 활동하고… 이들 층을 묶어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7)

 

반파시즘 인민전선이란,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의 기초 위에 광범한” 인민들, 즉 근로 농민, 도시 소부르주아, 인텔리겐차를 결합시켜서, 반파시즘 투쟁체를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는 나라에 따라서, 도시 소부르주아만이 아니라, 대부르주아와 대지주를 제외한, 반파시즘에 동의하는 중소부르주아의 일부도 포함하게 된다. 그리고 코민테른은, 이 투쟁을 “프롤레타리아의 지도하에 통합하는 데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다.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가 지도할 때에만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사회주의로 더욱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 공산당은 1934년 10월 9일에 인민전선 슬로건을 내걸었다. 1935년 6월에는, 공산당, 사회당, 급진사회당8)과 기타 2개 정당, 2개의 노동총동맹, 반파시즘 지식인 감시위원회, 그 외 약 50개의 단체가 참가하는 “인민연합 전국위원회”가 만들어진다. 위원회는 인민전선의 중핵체가 된다. 1936년 1월 12일에 “프랑스 인민전선강령”을 채택ㆍ발표한다. 그리고 1936년 4월 26일-5월 3일의 총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한다. 인민전선에 의거하는 블룸(사회당)을 수반으로 하는 사회당-급진사회당 정부가 성립했다. 공산당은 내부결정에 따라 입각하지 않았다. 프랑스 인민전선 내각은 이후 1940년에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막을 내린다.

 

4. 공산당과 사회당의 통합

 

“결의”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단일조직으로 통합시켜 나가는 것이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밝히며, 그 방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행동의 통일이 긴급한 필요사항이며, 이것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어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생각….9)

 

그리고 행동의 통일에서 시작하여, 정치적 통일로 가기 위해서 다음을 제시한다.

 

(공산당이: 인용자) 사회민주당이나 그 산하 조직과 공동의 행동을 취한다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진실되고 이치에 맞는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든지, 사회민주당계의 노동자에게 공산주의 원리와 강령을 끈기 있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반동적 부분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는 한편, 개량주의적 정책과 싸우고 있고 공산당과의 통일전선에 찬성하고 있는 좌익 사회민주주의적 노동자ㆍ활동가·ㆍ조직과의 사이에 가장 긴밀한 협력관계를 세워야 한다.10)

 

또한 적색 노동조합과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을 통합하고, “공산청년동맹과 사회주의청년동맹의 반파시즘 연합을 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양당의 통합의 조건으로는 다음을 제시한다.

 

(사회민주당이: 인용자) 부르주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고, 사회민주당과 부르주아의 블록이 완전히 파기될 것, 이미 행동의 통일이 실현되어 있을 것, 부르주아의 지배를 혁명적으로 타도하고 쏘비에트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수립할 필요가 승인될 것, 제국주의 전쟁 시에 자국 부르주아에 대한 지지를 거부할 것, 러시아 볼셰비키의 경험에 의해서 검증된 의사와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는 민주적 중앙집권제에 입각하여 당을 건설할 것.11)

 

5. 인민전선 정부의 성격

 

반파시즘 인민전선 정부의 성격에 대해 “결의”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지배계급에게 이미 대중운동의 강력한 고양을 억제할 힘이 없어진 정치적 위기의 조건하에서는…. 노동자 대중을 권력의 혁명적 탈취 직전까지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근본적인 혁명적 슬로건(예컨대 생산과 은행의 통제, 경찰의 해산, 노동자 무장 민병에 의한 경찰의 대체 등등)을 내걸어야 한다. 대중운동의 이 같은 고양으로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 정부 또는 반파시즘 인민전선 정부― 이것은 아직 프롤레타리아 집권의 정부는 아니지만, 파시즘과 반동을 억누르는 단호한 조치를 실시할 수 있는 정부다 ―를 창설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며….12)

 

인민전선 정부는 “아직 프롤레타리아 집권의 정부는 아니지만”, “노동자 대중을 권력의 혁명적 탈취 직전까지 이끄는” 정부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극히 광범한 근로대중이 파시즘과 반동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아직 쏘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설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조건에서 가능한 정부라고 규정한다. 이 부분은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쏘비에트 혁명이란, 노동자 봉기를 통해 기존의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노동자 쏘비에트의 연합으로 새로운 국가조직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결의”는 “부르주아의 지배를 혁명적으로 타도하고 쏘비에트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수립”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1936년 초에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선거로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으니, “결의”가 발표된 1935년 8월에는 인민전선 정부가 선거를 통해 가능할 것이 충분히 예측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부는 “쏘비에트 형태”가 결코 아니므로, 코민테른의 시각으로는 혁명정부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혁명은 두 가지 경로가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쏘비에트를 창출하여,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고, 쏘비에트 연합으로 혁명국가를 구성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민전선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기구로 성장ㆍ전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중국과 동유럽에서, 새로운 혁명의 방식으로 나타난 인민민주주의 혁명 방식이 될 것이다. 전자, 즉 쏘비에트 방식을 추구한다면, 사회당과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파괴하는 것이 되는데, 이는 자기 파괴일 뿐이다. 그러나 후자 방식의 혁명론은 분명히 제기할 수 없었다. 당시에 새로운 혁명방식인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을 분명하게 제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결의”에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후 1937년 7월 26일 발표한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의 행동통일 신협정”에서는 다음을 선언한다.

 

현단계 계급투쟁과 정치투쟁에서 양당은, 민주주의 획득,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민주적 공화제― 인민에게 빵과 평화와 자유를 보장하고, 반동과 파시즘의 경제적 기초를 근저에서부터 파괴하는 데 필요한 제 조치(산업ㆍ은행 독점자본의 국유화, 농촌에서 일체의 봉건제의 타파)를 취하여 사회주의로의 전진의 길을 여는 공화제 ―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투쟁을 전 이탈리아 인민에게 호소하며, 또한 그들을 이 투쟁에로 조직할 것을 결의한다.13)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인민전선 정부의 성격을 “사회주의로의 전진의 길을 여는 공화제”로 규정하고, 산업ㆍ은행 독점자본의 국유화라는 사회주의적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즉 인민전선 정부가 사회주의정부(국가)로 성장 전화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Ⅱ. 스페인의 반파쇼 인민전선

 

1930년대의 스페인은 혁명전의 러시아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유럽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러시아도, 남쪽 끝에 있는 스페인도 정치경제적으로 유럽의 주변국이었다. 러시아의 짜르처럼, 스페인 왕정(1931년까지 통치)은 무능했다. 스페인의 노동자 농민도 러시아처럼 매우 전투적이었다. 그래서 제2의 러시아 혁명이,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인 스페인에서 예견되곤 했다.

스페인은 당시 2400만 인구 중 절반이 문맹이고, 70%가 농민인 농업국이었다. 주로 남부와 서부가 농업지역이었다. 토지소유자 중 2%의 사람들이 경작지의 절반을 점유할 정도로, 대토지 소유제가 지배적이어서, 소작농이 많았다. 농업노동자의 비율도 높았다14). 농민들의 삶은 비참했고, 19세기 이래 아나키즘의 영향(특히 안달루시아, 카탈루니아, 아라곤)으로 격렬한 산발적 봉기를 지속해왔다. 카톨릭 교회는 주요한 대토지 소유자였고, 제수이트회(Jesuits)는 주요 은행들과 철도, 광산, 공장들을 소유 혹은 통제하고 있었다.

공업은 북부지역인 아스투리아주와 바스크(Basque) 지역의 해안을 따라서 (주로 광업), 그리고 동부 해안의 카탈루니아(Catalonia, 주도는 바르셀로나, 경공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카탈루니아는 스페인 공업생산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주요 부분이 외국의 자본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프랑스가 압도적이었고, 영국, 벨기에, 캐나다, 미국 등이 주요 투자 국가였다.15)

정치지형은 크게 극우파시스트 진영, 공화 진영, 노동자ㆍ농민 진영으로 나눌 수 있다.

극우파시스트 진영은 왕당파(알폰소 국왕지지파와 카를로스파), 군부, 팔랑헤당,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CEDA) 등이다. 왕정, 카톨릭 교회, 대지주, 대자본가 등의 이해를 대변했다. 스페인 내전 시 프랑코 진영을 구성한다. 프랑코는 팔랑헤당과 카를로스파를 중심으로,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을 흡수하여 통합팔랑헤당을 만든다.

공화 진영은 부르주아 진영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좌우로 구분할 수 있다. 우익은 급진공화당, 자유공화우파, 카탈루니아 연맹 등인데, 이들은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하지 않는다. 좌익은 공화연합, 공화좌파, 카탈루니아 공화좌파 등이고, 이들은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한다. 정치적으로는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지지기반으로는 주로 중소자본가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인다.

노동자ㆍ농민 진영은 무정부주의 진영, 사회주의노동자당, 공산당, 맑스주의 통합노동자당이 있다.

무정부주의 진영에는 이베리아 아나키스트연합(FAI), 노동조합으로 전국노동연합(CNT), 청년조직으로 이베리아 절대자유주의 청년연합, 여성조직으로 자유여성이 있다. 스페인에는 바쿠닌의 무정부주의가 맑스주의보다 먼저 도입되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영향력이 크고, 사회주의자들보다 조직규모가 더 컸다. 그러나 정치참여를 부정하기 때문에, 대중적 세력에 비하여 정치적 힘이 제한되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879년에 만들어지고, 산하에 노조조직으로 노동자총동맹(UGT), 청년조직으로 사회주의청년단이 있다. 노동자총동맹의 구성은 1932년 당시에, 도시 서비스노동자 23만 6천, 광공업과 운수(주로 철도)노동자 28만 7천, 농민(소토지 소유농, 소작농) 44만 명이었다.

공산당은 청년조직으로 공산주의청년동맹이 있었다.

카탈루니아 통합사회당은 1936년 봄 카탈루니아 지역 사회주의 정당들의 합병으로 만들어지고,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였다.

맑스주의 통합노동자당(POUM)은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조직으로, 주로 카탈루니아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고, 세력은 미미하였다.

 

1930년대에 이들 간의 관계는, 군부를 중핵으로 하는 극우파시스트 진영과 사회-공산 진영을 중핵으로 하는 인민전선 진영과의 밀고 밀리는 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파시즘인가 사회주의인가를 두고 벌어진 투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공화 진영은 끝임 없이 좌우로 동요하고, 분열되었다.

 

1. 1931년 공화정부 수립: 공화파와 사회당의 연립정부 출현

 

1931년에 왕정이 폐위되고, 4월에 공화정이 시작된다.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익 80석, 중간파 100석, 우파 공화파 30석, 좌파 공화파 80석, 사회당이 120석을 차지했다. 무정부주의자는 선거에 참가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당시 당원 1천 명 정도 소규모 정당이었고, 선거에서 6만 표를 획득했다. 사회당이 제1당이 되었고, 공화파와 사회당의 연립정부16)가 출범한다. 자유공화우파의 사모라가 총리가 되지만 동년 10월에 사임하고, 공화좌파 아사냐가 총리가 된다. 사회당의 카발레로가 노동부장관을 맡았다.

공화국은 양성의 보통선거권을 확립했고, 충분치 못한 토지개혁을 선포했으며, 공공교육을 확대하고, 군과 카톨릭 교회의 특권을 축소했다. 토지개혁의 내용을 둘러싼 공화파와 사회당의 대립으로 농지개혁법은 세 번이나 유산된 끝에 1932년 9월에야 성립되었다. 근본적으로 대토지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실행은 지지부진했다. 1932년 말부터 1933년에 걸쳐 농민운동이 격화되었고, 특히 에스토레마도라와 안달루시아에서는 토지점거 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도 격화되었다.

 

스페인 제2공화정17)이 세계공황의 진행과정 중에 탄생된 것은 아사냐 정부에 중대한 시련을 부과한 것으로 되었다. 스페인에서의 공황은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 절정에 달해, 각지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운동이 격화되었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30년의 노동자 파업이 368건임에 반해, 1933년에는 1046건으로 증가하고 있다. 아사냐의 공화-사회 연립내각은 이들의 투쟁에 탄압을 가했다. 그러한 정부의 태도는 특히, 아나키스트계 노동자의 제2공화정에 대한 불만을 적의로 전화시켰다. 1933년 1월의 카디스 주의 카사드 비에하스에서의 아나키스트 반란에 대해 정부는 비행기에 의한 폭격이나 포로의 총살 등의 수단을 사용하는 탄압을 허용하였다. 이 사건에 의해 아사냐 정부는 좌우 양익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었다. 입각하고 있던 사회당 지도자 라르고 카발레로는 아사냐에 대한 협력을 거부하고, 아사냐 내각은 같은 해 9월 붕괴하기에 이른다.18)

 

토지개혁의 실패와 공황은 노동자ㆍ농민을 점차 급진화시켜 갔다. 이러한 대중들의 흐름을 반영하여, 사회당도 급진화되어 갔다(이른바 “볼셰비키화”). 이러한 흐름을 타고 기회주의적 좌파인 카발레로가, 우파 베스테이로와 프리에토를 누르고, 당과 노동자총동맹(UGT)을 장악한다.

사회당이 정부에 협력을 거부하자, 공화-사회당 연립정부는 1933년 9월에 붕괴하게 된다. 그러나 중소부르주아 진영인 공화좌파를 배척하여, 연립정부를 무너뜨린 것은, 사회당의 좌경적 오류임이 후일 드러난다.

 

2. 1933년 파시스트들의 대두

 

파시스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파쇼적 제 세력들이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 주된 조직으로서 스페인 혁신당, 팔랑헤당19), 힐로브레스가 이끄는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CEDA) 등이 있다. 이들 제 조직 중 독일의 나찌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당과 흡사한 이데올로기와 운동형태를 갖고 있었던 것은 팔랑헤당이었다. 그 조직자는 독재자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아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이며, 푸른 셔츠를 입은 팔랑헤 당원은 오로지 가두에서 테러 행동에만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팔랑헤 세력은 결코 크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농촌에 기반을 가지는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이 공화정에 불만을 품은 제 분자를 규합해서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파쇼 내지 준 파쇼 제 당파의 출현은, 독일에서 나찌의 제패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리베라도 힐 로브레스도 독일에서 히틀러를 만나고 있었으며, 나찌의 자금 원조를 받고 있었다. 1933년 1월 히틀러의 독일수상 취임에 의한 나찌의 등장과 함께, 유럽에서는 유사한 독재적 정권이 잇달아 나타나고 있었으며, 그러한 국제적 환경 속에서 스페인에도 공화정을 타도하고 파쇼적 체제를 수립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던 것이다.20)

 

3. 노동자들의 전열정비: 노동자동맹(노동자 통일전선)

 

파시스트의 반대편에서는 노동자들이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1933년 말까지는 카탈루니아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노동전선 통일의 움직임은 그 지역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가진 아나키스트-CNT를 권외로 밀어내면서 카탈루니아 좌익 제 정당과 노동조합을 가담시켜 나갔다. “모든 경우에 통일전선을”이라는 구호가 그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노동자 동맹”의 출현은 이러한 이론이 현실화한 행동이었다 (공산당은 1934년 10월 4일에 가입한다: 인용자). 그러나 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이 노동자동맹이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스투리아스에서였고 또 아스투리아스에서 뿐이었다.

그런데 아스투리아스에서 노동자동맹의 형성은 히혼의 CNT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33년 3월 13일 히혼의 CNT 대의원인 호세 마리아 말티네스, 아베리노 곤자레스 엔트리알고, 오라시오 알귀레스 등 세 명은 오비에도에서 UGT 대의원인 그라시노 안토니아와 회합하고 스페인의 정치, 사회상황의 중대한 사태에 직면하여 노동자동맹의 조속한 체결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전부터 노동자동맹의 형성을 주장하여 오던 아스투리아스 사회당 UGT로서는 CNT의 이러한 제안을 환영하여 빠른 시일 내에 UGT-CNT 간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CNT는 이와 마찬가지로 1933년 5월 이후 다른 지방에서의 동맹결성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갈리시아, 마드리드에서는 그 지역 CNT의 호의적 반응을 얻었으나, 발렌시아에서는 부진한 채로 끝을 보았다.

UGT와 CNT는 1934년 3월 말경에는 히혼에서 노동자동맹 협정을 10개조에 걸쳐 구체화하기에 이르렀다.21)

 

4. 1933년 11월 총선거와 우파들의 승리

 

아사냐 내각이 1933년 9월 붕괴하자,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11월 총선거가 치러졌다. 우파가 승리했다.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CEDA)이 제1당이 되었다. 지주들의 공세가 시작되어, 토지개혁은 후퇴한다. 급진당의 레루와 삼페르가 번갈아 총리를 맡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반동화가 진행되어 갔다. 이후 1936년의 인민전선 정부의 승리까지의, 이 시기는 “암흑의 2년”으로 불린다.

제1당이 된 파시스트정당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CEDA)을 살펴보자.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우익 CEDA의 기관지 ≪엘 데바테≫는 그들의 정책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해 놓고 있었다. “처음엔 레루(급진당 소속 총리: 인용자)를 지지하고, 다음에는 레루와 함께 통치하며, 마지막으로 레루를 대치한다.” 이에 의하면 삼페르(급진당 소속 총리: 인용자) 내각은 그들의 정권 획득극의 제1막인 셈이었다. 라르고 카발레로는 CEDA의 수령 힐 로부레스의 정책에 매우 위험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감지하고 ≪엘 소시알리스타≫ 등의 기관지를 통하여 연일 정책의 저지를 절규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힐 로부레스는 스페인의 드레퓌스이며 히틀러의 재판이라고 했다.

 

“군주제냐? 공화제냐? 그런 것은 어떠해도 상관없다”고 그(힐 로브레스: 인용자)는 서슴없이 말한다… 또한 힐 로부레스의 궁극적 목표―카톨릭 원리를 기초로 한 일종의 조합국가(Corporative system)의 형성과 그에 의한 국가와 사회의 조화도 좌익으로서는 파시즘과 동일시되는 것이었다.22)

 

마침내 1934년 10월, 에스파니아 자치우익연합에서 3명의 각료를 입각시켰다. 레루와 함께 통치하는 정권 획득극의 제2막이 시작된 것이다. “스페인 판 히틀러”의 등장이 현실화되었다. 그러자 모든 좌익들이 궐기했다. 그 결정판인 아스투리아스 “10월 봉기”가 터져 나왔다.

 

5. 아스투리아스에서의 1934년 “10월 봉기”: 노동자들의 반격

 

1934년 10월 CEDA 출신의 각료[3인: 역자]가 포함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자 노동자총동맹(UGT,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의 사회당원들과 공산당원들은 이를 파시즘의 개시로 간주, 마드리드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러나: 인용자) UGT의 지도부는 지하로 잠입했고, 무정부주의자들이 이끌던 거대 노총인 CNT(Confederacion Nacional del Trabajo)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파업은 단명으로 끝났다. 카탈루니아에서는 제네랄리?(Generalitat, 지방자치정부)이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은 역시 이에 참가하지 않았고, 반란은 단명했다.

그런데 아스투리아스 지방에서는 사회주의적 광부들과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광부들이 협력,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켜 쏘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정부는 외인부대와 고데드(Goded) 장군 및 프랑코(Franco) 장군이 지휘하는 무어인(Moorish) 정규군을 불러들였다. 모로코 전쟁에서 군단을 지휘하여 명성을 얻은 프랑코는 백만장자인 후안 마르시(Juan March)에 의해 이 진압 작전을 지휘하도록 선발되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3,000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항복 후에 살해되었다. 3만 명이 수감되었다.23)

 

즉 급진화된 사회당, 공산당, 아나키스트들이 쏘비에트 혁명을 통해 파시스트를 몰아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광부들과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적 광부들이 협력”하여, 노동자통일전선이 형성되었던 아스투리아스에서만 봉기가 성공하였다. 광부들의 영웅적 투쟁으로 쏘비에트는 2주 동안 유지되었지만, 고립되어 결국 진압당하고 만다. 노동자계급은 “쏘비에트 혁명을 위한 투쟁에 떨쳐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24)이 증명된 것이다. 개량주의자들인 사회당 지도부 우파는 봉기 자체에 반대했다. 당내 좌익인 카발레로가 봉기를 계획하고 주도했지만, 정작 카발레로파의 본거지인 마드리드에서 움직임이 미미했다. 전국적 조직을 가지고, 가장 많은 조직원을 가진 무정부주의자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들도 움직임이 없었다.

여기서 당시 카발레로가 주도한 사회당의 좌경적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1933년에는 사회-공화 연립정부를 붕괴시켜, 결국 파시스트들에게 정부를 넘겨주었다. 둘째로, 정부를 버리는 대신, 1934년에 그들은 쏘비에트 혁명을 위한 봉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지도부도 대중도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목전에서는 파시스트 체제가 완성되어 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당장에 혁명적으로 떨쳐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른 방법이 모색되어야 했다.

 

6. 인민전선 정부의 승리

 

10월 봉기가 실패한 이후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때부터 1936년 2월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공산당은 3개의 기본적인 방침― 정치범의 처형반대와 대사면 요구, 노동자계급의 통일, 반파시즘 인민블럭의 형성 ―에 따라 투쟁을 진행했다. 1935년 3월에 각 당파를 망라한 “정치범 구원 전국위원회”가 결성되어, 사형수 감형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파시스트 진영에서는 1935년 5월에 CEDA 당수 힐 로브레스가 육군장관, 프랑코가 참모총장이 되었다. 여기에 맞서 공산당은 민주적 조직들과 정당에 대해 반파시즘 인민블럭의 형성을 제안했다. 사회당과 공화좌파(당)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은 1935년 초여름 다른 공화파 정당들과 함께 인민전선의 첫 전국조직을 결성했다. 참가한 조직은 공산당, 공산주의 청년동맹, 연방공화당, 좌익급진사회당, 좌파공화청년동맹, 통일노동총동맹, 담배노동자연합, 노동총동맹에 가입한 국가공무원 노동조합 등이었다.

노동자들의 통일전선 움직임도 계속 되었다. 사회당 청년조직인 스페인 사회주의청년동맹(서기장 카릴리요)은 코민테른의 강령을 승인하고 있었는데, 공산당의 청년조직인 공산주의청년동맹과 통합을 추진하였다. 이후 1936년 4월, 두 조직은 통합되고, 11월에 공산당에 가입한다. 사회당 내에서도 통일에 대한 압력이 강화되어 갔다. 1935년 12월 공산당의 영향 아래 있던 통일노동총동맹(CGTU)이 사회당계의 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을 향한 거보를 내딛었다. 이후 내전 시기인 1937년경에는 사회당계와 공산당계 노동자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더욱 높아져, 각지에서 양당 합동운동이 시작되었다. 1937년 6월 18일-20일에 발렌시아에서 열린 공산당 “전쟁 시 제2차 중앙위원회 총회”는 주로 프롤레타리아 통일정당을 결성하는 문제를 의제로 삼았다. 수천 명의 사회당 노동자들도 이 총회의 결의를 환영했고, 각지의 집회에서 사회당 지도자들도 통일선언을 했다.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정당을 결성하기 위한 당의 투쟁은 내란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37년 8월 17일 채택한 “공산당-사회당 공동행동강령25)”은 그러한 전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935년 가을 급진당의 부패 사건26)이 잇달아 터져서, 자치우익연합(CEDA)과 급진당의 정부가 위기에 빠진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1936년 2월에 새로운 선거를 실시할 것을 포고했다.

1935년 11월 공화좌파의 아샤냐가 사회당에 편지를 보내 선거연합을 제안했다. 사회당 집행위원회는 선거연합에 공산당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고, 노동자 조직과 좌파 공화파들과의 블록의 기초가 될 강령초안27)을 작성했다. 공화파 정당과 노동자 정당들과의 회담은 난항을 거듭했다. 마침내 1936년 1월 15일, 사회당과 공산당 측의 유연한 태도로 인민전선협정(인민블럭협정)이 공화파 정당들과 노동자 정당들의 대표들 사이에 조인되었다28).

여기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애초 제출했던 강령 초안을 비교해보자. 농민의 토지 문제에 대하여 사회당은 토지국유화와 강제집단화를 주장했다. 공산당은 봉건적 토지소유의 무상몰수와 농업노동자 및 빈농에 대한 그 분배를 요구하는 데 그치고, 집단화는 농민의 자발성에 맞추고 있다. 공산당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로 보았다. 즉 카톨릭 교회와 대지주들의 봉건적 대토지소유를 일소함으로써, 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을 이루고자 했다. 이는 파시즘의 기반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집단화라는 사회주의적 조치까지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소부르주아와 그 정치세력인 좌파 공화세력들을 견인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사회당이 제출한 즉각적인 토지국유화와 강제집단화는 사회주의적 조치로서, 소부르주아와 충돌하고, 결국 좌파 공화세력들에 적대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인민전선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사회당이, 농민문제에 대해서 좌경적 오류를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9).

반면 파시스트들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는, 공산당이 왕당파 조직과 파시스트 조직의 무장해제와 해산을 요구하였다. 반면 사회당의 초안에는 이러한 요구가 없다. 이 부분에선 사회당이 우경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6년 2월 16일 선거는 인민전선과 우익 및 중앙파의 결전이었다. 선거 결과 우익과 중앙파가 205석, 인민전선 268석(공화파 158석, 사회당 88석, 공산당 17석)으로 인민전선이 승리했다. 그러나 전체 득표수를 보면 우익이 약 450만 표, 인민전선 약 460만 표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총 105석이고 공화파는 158석이다.

공산당은, 중간층으로 불리는 공화파를 견인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그 이유가 바로 노동자당들의 힘만으로는 선거에서 우익을 이길 수 없고, 이는 파시즘에 대한 패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사회당 좌파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노선을 추구했는데, 이 노선이 실현되었다면 공화파들과 적대하게 되고 결국 선거에서 파시즘의 승리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들의 좌경적 오류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2월 19일 공화좌파의 아사냐 내각이 성립했다.

의회에서 파시즘은 격퇴되었다. 인민전선의 승리는 공산당의 정책이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했다. 당의 권위와 영향력은 커졌고, 당원 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당원 수는 1936년 2월에서 3월까지 3만 명에서 5만 명으로 늘었다. 4월에는 6만 명, 7월 8만4천 명, 7월 17일의 파시스트 반란 직전에는 1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30)

 

7. 파시스트들의 반란: 1936년 7월 18일, 스페인 내전 발발

 

의회 내에서 파시스트들은 패배했지만, 그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6년 7월 17일 의회 밖에서의 투쟁, 즉 군사 쿠데타를 도발했다. 쿠데타는 전면적 내전으로 발전했다. 내전은 다시 국제전(제2차 세계대전의 축소판, “국제적 내전”)의 양상을 띠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 파시스트들 쪽으로 참전했다. 반면 쏘련과 멕시코, 그리고 세계 각지의 공산당이 조직한 국제여단이 인민전선(공화국) 쪽으로 참전했다. 그리고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자본주의 국가들은 “불간섭정책”을 표방하였지만, 사실상 파시스트들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인민전선 측으로 가는 지원은 봉쇄(쏘련의 인적ㆍ물적 지원과 국제여단의 스페인 입국 등)하였지만, 독일과 이탈리아가 파시스트를 지원하는 것은 모르는 체했다. 결국 3년 동안의 내전은 1939년 4월, 프랑코 파시스트들의 승리로 끝났다31).

스페인 2천4백만 명의 인구 중 내전으로 1백만 명이 사망했다. 이 중 10-15만 명은 전투에서 사망했지만, 나머지 85만-90만 명 중 많은 부분은 테러나 처형 등으로 살해되었다(기아나 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인민전선 정부 지역에서는, 파시스트로 몰려 약 2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면 파시스트들에 의한 학살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프랑코 점령 지역에서 내전 초기인 1936년 7월부터 1944년까지 30만-40만이 테러나 처형으로 살해되었다32)고 하지만, 그 숫자는 훨씬 더 클 것으로 생각된다. 내전 종료 후에도 인민전선 정부 측 인사 1만 명이 처형당하고, 25만 명이 투옥되었다. 40만 명이 외국으로 망명했다.

 

8. 인민전선정부가 패배한 원인

 

인민전선은 결국은 패배했다. 패배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노동자들이 인민전선 정부의 초기에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 군사 쿠데타의 성패는 초기 대응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전국 50개의 병영에서 거의 동시에 장군들의 쿠데타가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무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공화좌파의 키로가 총리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건네주지 말고, 멋대로 무장하는 사람은 쏘아죽이라는 명령을 전국의 주지사에게 내렸다. 그는 오른쪽의 파시스트들보다도 왼쪽의 노동자들이 무장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결국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찰서와 병영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파시스트들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그러지를 못했다. 결국 그 48시간 동안 파시스트들은 내전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이 최초의 국면이 끝날 무렵에는 스페인 국토의 3분의 2와 인구의 4분의 3이 공화국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카탈루니아, 북부 아스투리아스 등 공업지역과, 정치의 중심인 마드리드 등 대도시는 모두 공화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파시스트들은 북부 산악지역과 남서부 안달루시아 일부, 그리고 스페인령 모로코를 장악했을 뿐이다. 만약 공화파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 정부였다면 반란은 단호하게 제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독일과 이탈리아의 개입이, 또 다른 패배의 원인이다. 그들은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초기에 매우 불리했던 군사반란의 형세를 역전시킨다. 반면 공화파도 쏘련과 국제여단의 지원을 받지만, 그 양과 질은 현저한 차이가 난다.

 

파시스트들의 주력군은 외인부대와 모로코에 있는 아프리카 군단(Army of the Africa)의 무어인 정규부대였지만, 그들은 해협을 건너 스페인으로 갈 수 없었는데, 이는 함대의 수병들이 그들의 장교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반란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곤궁에서 프랑코를 구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최초의 대대적인 군사지원을 했는데, 20대의 수송기를 파견하여 아프리카 군단을 스페인으로 실어 나른 것이다. 최고조에 달했을 때 독일은 콘도르군단(Condor Legion)이라는 약 6천 명에 이르는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프랑코를 지원했는데, 이 부대는 거대한 양의 물자와 주로 기갑병, 비행기 조종사, 포병 및 고문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프랑코를 지원한 이탈리아 군의 최대 규모는 약 10만 명의 병력과 막대한 양의 물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공화국에 무기를 팔기를 거절하면서 시작된 ‘불간섭’ 정책으로 거들었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협력하여 해상봉쇄를 수행했다.

 

공화국에 대한 쏘련의 원조가 스페인에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마드리드 방어를 위한 탱크 분견대가 겨우 도착한 1936년 10월이었다. 스페인 내의 쏘련 병력 수는 한 번도 총 700명이 넘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국경을 봉쇄한 후 쏘련의 무기 수송이 제한되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잠수함과 비행기, 그리고 ‘불간섭’ 순찰이라는 장애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세계대전을 피하고자 하는 바람― 결국은 실현되지 못한 바람 ―때문이었다. 프랑코 측의 자료에 의하면, 무기를 운반하고 있다는 이유로 53척의 상선이 침몰되었고, 324척이 나포되었으며, 1,000척이 해상에 억류되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쏘련의 전쟁물자를 운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무튼 침몰된 것으로 알려진 쏘련 선박 중에는 콤소몰호, 티미리아체프호, 블라고에프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온갖 종류의 외국의 간섭 때문에 공화파는 한 번도 동등한 무기로 싸워본 적이 없으며, 전형적으로 물자와 인력에서 3대 1, 혹은 4대 1의 열세에 부딪쳤다.33)

 

셋째, 노동진영 내부에서는 공산당이 주도권을 가지지 못했다. 1936년 9월 사회당의 카발레로 내각이 들어서고, 1937년 5월에는 사회당의 네그린 내각이 들어서서 종전까지 유지되었다. 내전이 지속되며 공산당의 세력은 강화되어 갔지만, 네그린 내각에서도 사회당원 3명, 공산당원 2명, 공화당원 2명, 카탈루니아 민족주의자 1명, 바스크 민족주의자 1명의 순이었다.

주도권을 가진 사회당은 분파주의적이고, 불철저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카발레로는 1937년 5월 카탈루니아에서 무정부주의자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이 반란34)을 일으킨 후에도,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하여 무정부주의자들을 입각시키려 했다. 전쟁이 한창인 1938년에, 전쟁장관이던 사회당 프리에토는 프랑스 대사 라본에게 전쟁은 이미 패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많은 공산주의 장교들을 군에서 추방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좌익’ 사회주의 허풍장이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발레로(Francisco Largo Caballero)가 수반으로 있던 공화파 정부에게 도시의 요새화를 조직하도록 촉구했다. 수상 카발레로는, “스페인 사람들은 나무 뒤에서 싸울지는 몰라도 결코 참호 속에서는 싸우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카발레로 수상뿐 아니라 전쟁장관 역시 그의 눈부신 무능력을 특정 시간에만 과시했다. 오전 8시 30분에서 9시까지만 서류에 결재를 하겠다는 것이며, 오후 10시 이후에는 연락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1936년 11월 6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수도 방위 책임을 방기하고 발렌시아(Balencia)로 옮겨갔다. 공산당원들을 제외한 모든 각료들이, 심지어 전쟁장관의 음반들까지 챙겨서, 라르고 카발레로와 함께 떠나버렸다. 시가전이 한창이던 9일 카발레로는 놓고 온 은식기들을 챙겨 오도록 마드리드로 심부름꾼을 보냈지만, “마드리드에 남은 사람들이 아직 식사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다.35)

 

최대 노동자조직이었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11월 8일에서 15일 사이에 9개의 민병 부대들이 다른 지역에서 마드리드로 왔다. 그 중에서 아라곤 전선(Aragon Front)에서 온 3천 명으로 이루어진 한 무정부주의자들의 부대는, 무정부주의적 군대 조직의 실례로서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그 부대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36)가 통솔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른 부대가 자신들의 전과를 가로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한 구역을 독자적으로 담당하겠다고 요구했고, 이 요구는 무정부주의자인 법무장관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

이들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포병 및 항공 지원과 함께, 대학 도시의 한 구획이 맡겨졌으나, 공격하기를 거부했다. 다음날 파시스트들이 공격해오자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학 내의 주요 교량과 진지들을 버리고 도주했다. 녹초가 된 민병들과 국제여단의 반격으로 잃었던 땅의 일부를 되찾긴 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어진 전선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두루티는 부하들의 그러한 행동들을 부끄러워하며 그들이 마드리드를 떠나지 않도록 만류하려 했지만, 그들 중 한 사람에 의해 사살되었다.37)

 

바르셀로나에서의 파시스트들의 반란이 실패한 후 무정부주의자들과 POUM 당원들은 아라곤(Aragon) 전선에서 ‘싸운’ 민병대들을 조직했다. 그들의 군사적 업적은 정말로 놀라웠다.

그들은 아라곤의 수도인 사라고사(Zaragoza)를 향해서 진격해 갔고, 거기에 주둔하면서 이따금 파시스트들과 교전했다. 뉴욕타임즈의 통신원인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hews)는 후에스카(Huesca)에 있는 ‘레닌’ 사단의 POUM 민병대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는 저 아래 벌판에서 파시스트들과 축구를 하곤 했다. 그들은 좋은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사라고사나 하카(Jaca)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도록 초대했고, 우리가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새로 조직된 인민의 군대들이 후에스카를 본격적으로 장악하려고 했을 때에는 카탈로니아 민병대들이 사실상 11개월 동안이나 그곳을 포위한 채 아무 일도 안 한 후였다. 파시스트들은 그러한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축구경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튼튼한 요새를 구축했다.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개전 1년 후 에브로(Ebro) 강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부대를 구조하던 국제여단들은 파시스트들과의 2킬로 미터에 이르는 전선의 어디에서도 요새나 진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 전 3개월 동안 정확히 2명의 사상자만이 인근 군병원에 수용되었다. 무정부주의적 민병대들은 혼돈을 정치적 원칙으로까지 승격시켰던 것이다. 아라곤에 배포된 한 전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군사적 편제는 무정부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쟁의 승리가 혁명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전쟁에서는 인간성의 부정을 전제하는 규율이 아니라 기술과 전략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만은, “전쟁은 무정부주의자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들이 하는 것이다”라는 두루티의 한탄이 정말로 옳았다.38)

 

결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세력, 즉 스페인 공산당이 인민전선에서 열세였던 것,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파시스트 세력에 비하여 쏘련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민전선이 승리하기 위한 주요 조건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세력이 주도하여 노동자계급을 통일시키고, 그 힘을 가지고 도시 소부르주아와 농민을 지도하며 인민전선에서 노동자계급이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다.

 

9. 뜨로츠끼에 대하여

 

뜨로츠끼는 1937년 12월 27일 발표한 글, “스페인의 교훈: 마지막 경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39)

 

승리의 조건

 

3. 적군의 최전선과 아군의 최전선, 그리고 양군의 후방에서 선전은 사회혁명의 정신으로 완전히 충만해야 한다. “우선 승리하고, 그 다음에 개혁을!”이라는 구호는 성경에 나오는 왕부터 스딸린에 이르기까지 모든 억압자와 착취자의 구호이다.

4. 정책은 투쟁에 참가하는 계급과 계층에 의해 결정된다. 혁명적 대중은 자신의 의지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곧바로 표현하는 국가기구를 가져야 한다. 오직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의 쏘비에트만이 그러한 기구 역할을 할 수 있다.

 

뜨로츠끼는 “사회주의 혁명만이 파시즘을 분쇄할 수 있다40)”며, 아군의 후방에서 사회혁명을 선전해야 하며, 혁명적 대중은 국가기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성공적 봉기는 지배계급이 최악의 어려움에 꽉 잡혀 옴짝달싹못할 때에만 가능하다41)”며, 인민전선 정부가 내전으로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 때, 봉기를 해서 노동자 병사 농민 대표들의 쏘비에트를 만들라고 주장한다.

당시에 만약, 파시즘을 분쇄하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먼저 인민전선 정부의 공화파들을 분쇄하여야 한다. 사회혁명에 반대하는 사회당의 개량주의 세력을 분쇄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은 인민전선 정부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쏘비에트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이미 1934년 아스투리아스 “10월 봉기”에서 시기상조임이 드러났다. “혁명적 봉기” 세력이 그동안 성장했다 해도 혁명까지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를 타격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싸움에서 “혁명세력”도 타격을 입을 것이다. 파시스트들은 어부지리를 얻을 것이다. 뜨로츠끼는 노동자 인민의 정부였던 인민전선 정부가 “최악의 어려움에 꽉 잡혀 옴짝달싹못할 때”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외부의 파시스트와 호응하라는 지령을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10. 혁명노선으로서의 인민전선

 

내전이 진행되면서, 인민전선 정부 진영에서는 토지개혁이 진행되었다. 또한 대자본가들이 파시스트 진영으로 달아났기 때문에, 그 기업들은 인민전선 정부가 운영했다. ‘1937년의 공산당-사회당 강령’에서는, 군수공업 국유화와 국민경제회의를 통한 계획경제 정책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당시 코민테른 서기장이었던 디미트로프는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것은 사적 자본주의적 소유를 최종적으로 폐기하지 않고 생산을 조직하는 문제이다. 노동자계급과 그 동맹자, 즉 소부르주아지와 농민을 참가시키고 또 그 통제하에 생산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대체로 노동자 계급과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의 특수한 형태라고 말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42).

스페인의 인민전선정부는 “노동자 계급과 농민의 민주주의적 독재의 특수한 형태”, 즉 아직 노동자계급의 독재인 “쏘비에트 국가는 아니지만”, 그 이행의 형태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민민주주의 혁명론으로 구체화된다. 스페인에서, 사회주의 정부로 성장ㆍ전화하던 인민전선 정부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분쇄되었던 원인이 스페인 공산당과 쏘련의 열세 때문이었다고 위에서 지적했다. 그러나 세계대전에서 쏘련이 승리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인민전선 정부들은 사회주의 정부로 성장ㆍ전화하게 된 것이다43)

 


 

1)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의 코민테른의 임무(결의)”,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 132.

 

2) 1933년 1월 30일, 독일에서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3) 같은 글, pp. 135-136.

4) 같은 글, p. 136.

5) 같은 글, p. 138.

6) 같은 글, p. 139.

7) 같은 글, pp. 142-143.

 

8) 공화제 옹호, 반(反)교회주의, 반독점 등을 정강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강령은 완화해 사유재산제를 인정했다. 소부르주아 층을 기반으로, 중소농민, 소상인 등이 이 당의 주요 지지층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9) “결의”, pp. 149-150.

 

10) 같은 글, pp. 141-142.

11) 같은 글, p. 149.

12) 같은 글, p. 143.

 

13) “이탈리아 사회당-공산당의 행동통일 신협정”,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 188.

 

14) 농업노동인구가 450만 명이고 이들 중 70%(315만 명)는 토지가 없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수확기와 파종기에 대농장에 일시적으로 고용되는 농업노동자였다. 안달루시아 지역에 특히 많았으며, 무정부주의자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연합의 중핵을 이루었다. 광공업 노동인구는 200만 명이었다.

 

15) 미국 진보노동당, “스페인 내전(1936-1939)의 교훈”, ≪정세와 노동≫ 제32호, 2008. 2. p. 63.

 

16) 의원내각제 형태이다. 총리(수상)가 정부를 운영하고, 대통령이 있지만 형식적 존재이다.

 

17) 스페인 제1공화국은 1873년 2월 11일-1874년 12월 29일 동안 존재했었다. 그래서 1931년 성립된 공화국을 제2공화국이라고 한다.

 

18) 사이토 다카시, “1930년대와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연구≫, 형성사, 1993, p. 44.

 

19) 1933년 10월에 만들어진다.

 

20) 같은 글, p. 47.

 

21) 미찌꼬 외, “아스투리아스 혁명사 서설”, ≪스페인 내전 연구≫, 형성사, 1993, pp. 156-157.

 

22) 같은 책, pp. 164.

 

23) 미국 진보노동당, “스페인 내전(1936-1939)의 교훈”, ≪정세와 노동≫ 제32호 (2008년 2월호), pp. 64-65.

 

24)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고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지향하는 투쟁에서의 코민테른의 임무(결의)”,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 143.

 

25) “자료17: 공산당-사회당 공동행령강령, 1937.8.17”,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p. 203-209.

 

26) 1935년 10월, 에스트라페를로 도박추문 사건: 네덜란드인 사업가 2명이 도박인 룰렛 게임의 특허권을 따내서 스페인에 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사행성 게임이 법으로 금지되고 있었다. 그래서 뇌물을 써서 허가를 얻고자 했다. 이 뇌물수수 사건에 레루 총리의 양자인 아우렐리오 등 급진당 인사들이 연루되었다.

동년 11월에도 사업가 안토니오 타야가 뇌물을 써서 정부 발주 계약을 따낸 사건이 터졌다.

 

27) 전문은 다음을 보라.

“자료16: 인민전선의 선언, 1936.1.15.”,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p. 203-209.

 

28) 전문은 다음을 보라.

같은 글, pp. 192-202.

 

29) 이후 1937년 8월 17일 채택하게 되는 “공산당-사회당 공동행령강령”에서는 “제10. 상공업 소부르주아와의 우호적 원조관계를 맺기 위한 정책”을 분명히 하며 공산당의 노선이 관철된다. 토지문제에 대해서도 공산당의 노선이 관철된다.

 

30) 이 부분은 다음을 요약한 것이다.

“자료16: 인민전선의 선언, 1936.1.15.”,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p. 192-194.

 

31) 스페인 내전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32) 사이토 다카시, “1930년대와 스페인 내전”, ≪스페인 내전 연구≫, 형성사, 1993, p. 72.

 

33)미국 진보노동당, “스페인 내전(1936-1939)의 교훈”, ≪정세와 노동≫ 제32호 (2008년 2월호), pp. 87-89.

34)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보라.

채만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상)”, ≪노동사회과학 제5호; 좌ㆍ우익 기회주의의 현재≫, 2012. 4. pp. 119-124.

 

35) 미국 진보노동당, “스페인 내전(1936-1939)의 교훈”, ≪정세와 노동≫ 제32호 (2008년 2월호), pp. 89-90.

 

36) 전투적인 무정부주의 지도자.

 

37) 같은 글, p. 93.

38) 같은 글, pp. 95-96.

 

39) 레온 트로츠키, ≪레온 트로츠키의 스페인 혁명≫, 정민규 옮김, 풀무질, 2008.4.15. p. 345.

 

40) 같은 책, p. 350.

41) 같은 책, p. 350.

 

42) “자료의 이해를 위하여”, 편집부 엮음, ≪코민테른 자료선집 3―통일전선, 민족식민지 문제≫, 동녘선서, 1989, p. 32.

 

43) 스딸린 사후 쏘련이 약화되고, 결국 무너지며 전세는 다시 한 번 역전되고, 사회주의 정부들 또한 쏘련과 운명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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