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서평]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읽고

 

천연옥 | 부산지회장

 

 

* 이 글은, 현장실천 사회변혁 노동자전선이 발행하는 ≪전선≫ 제114호(2019년 11월)에 실렸던 글입니다.

 

 

1. 글을 시작하며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1884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1820-1895)가 쓴 책이다.

엥겔스는 1883년에 칼 맑스(1818-1883)가 먼저 사망하자 맑스가 하고자 했으나 하지 못했던 저술 작업과 정치 활동을 계속해서 해야만 했는데, 이 책 또한 맑스의 유언 집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런 작업과 활동의 한 부분이다. 맑스는 루이스 모건(1818-1881, 미국의 민족학자이며, 과학적 인류학의 주창자)이 1877년에 발표한 ≪고대사회≫를 읽고, 꼼꼼하게 발췌하고 방주를 달아놓았다. 엥겔스는 이것을 바탕으로 1884년에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두 달 동안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하여 맑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에서 비어있었던 부분, 인류 역사의 발자취, 선사 시대의 문제를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이론화하였고, 앞의 여러 저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나 여기에서 좀 더 명확하게 국가론에 대해 정리하였고, 이것은 이후 레닌(1870-1924)의 ≪국가와 혁명≫(1917년)으로 발전하게 된다. 엥겔스는 1847년에 맑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표현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문장에 대하여 1888년의 영어판, 1890년의 독일어판에서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았다. 이 말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로 씌어져 전해오는 역사를 뜻한다. 1848년에는 사회의 전사(前史), 즉 글로 기록된 모든 역사에 선행한 사회 조직은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후 학스타우젠이 러시아에서의 토지 공동소유를 발견하였고, 마우러는 그것이 모든 독일 종족들이 역사적으로 출발했던 사회의 기초임을 증명하였다. 그리하여 인도에서부터 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공동의 토지 소유를 가진 촌락공동체들이 사회의 원시적 형태였다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원시 공산주의 사회의 내부 조직은 마침내, 씨족의 참된 본성과 종족 내에서의 그 지위에 대한 모건의 최종적 발견에 의해서 그 전형적인 형태로 밝혀졌다. 이 본원적 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특수한 계급들로의, 그리고 상호 대립적인 계급들로의 사회의 분열이 시작된다. 나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이 해체 과정을 추적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노동자운동의 발전을 위해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뿐만 아니라 가족의 기원과 본질에 관해 이론적으로 명백하게 할 필요가 생겼고,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 독일의 사회주의자)은 ≪여성과 사회주의≫(한국에서는 여성론으로 번역ㆍ출판되었다)를 1879년에 출간했다. 여기에서는 여성억압의 역사적 원인들을 설명하기엔 불충분했다. 베벨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출판되자, 완전히 책을 개편했고, 엥겔스의 책을 가족사 서술을 위한 토대로 삼았다.

 

한국에서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1986년에 처음으로 아침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 2012년에 두레에서 같은 역자에 의해서 다시 출판되었다. 역자 김대웅은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 74학번으로 백산서당의 편집장을 하면서 원전을 번역하는 일을 했고, ≪경제사 입문≫ 등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민예총 국제교류국장, 문예진흥원 심의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을 지냈고, 현재 서울 아트센터 대외협력이사로 있으면서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나는 1997년에 박종철출판사에서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으로 출판된 것을 2011년에 부산 지역의 세미나팀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었고, 이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두레출판사의 김대웅 번역본을 다시 읽었다.

 

 

2.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주요 내용

 

1) 1884년 초판 서문

유물론의 관점에 따르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 계기는 궁극적으로 직접적 생활의 생산 및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생활수단, 즉 의식주의 대상과 이에 필요한 도구의 생산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 그 자체의 생산, 즉 종족의 번식이다. 특정한 역사 시기 및 특정한 지역의 인간들이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회 조직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하나는 노동의 발전 단계에 의해, 다른 하나는 가족의 발전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

 

2) 1891년 제4판 서문

엥겔스는 여기에서 바호펜부터 모건에 이르는 가족사에 대한 견해의 발전을 개괄하여 정리했다. 가족사의 연구는 요한 J. 바호펜(1815-1887, 스위스의 인류학자)의 ≪모권론≫이 출판된 1861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기한다. ①인류는 최초에 무규율적인 성교(난혼이라는 부적당한 말로 표현)생활을 하고 있었다. ②이러한 관계는 아버지를 확정할 온갖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므로 혈통은 모계에 따라서, 즉 모권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다. 그리고 초기의 고대인들은 모두 그러했다. ③그 결과, 여자는 어머니로서, 즉 젊은 세대의 확실히 알려진 유일한 부모로서 높은 존경과 신망을 받았으며, 바호펜의 견해에 따르면 완전한 여성지배에 도달했다. ④여자가 오로지 한 남자에게 속하는 단혼으로 이행하는 것은 태고의 한 종교적 계율의 침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침해에 대해 여자는 일정한 기간 동안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 속죄해야만 했다.

바호펜에 따르면 남녀 상호 간의 사회적 지위에서 역사적 변천이 일어난 것은 사람들의 현실적 생활조건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조건들이 사람들의 두뇌에 종교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를 세계사의 결정적인 공간으로 보는 이러한 견해는 결국 신비주의로 빠져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한 연구자로서 그의 공적이 빛을 바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논증해 주었는데, 그리스인들과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는 단혼이 있기 전에 한 남자와 여러 여자 사이뿐만 아니라 한 여자와 여러 남자 사이에도 관습에 저촉되지 않고 성교를 맺었던 사례가 실제 있었음을 고대 고전 문헌에서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는 것, 이 관습이 이미 소멸되기는 했지만 그 흔적은 여자가 일정한 기간 다른 남자들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로 단혼의 권리를 사야 한다는 형태로 남아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혈통은 최초에는 오직 모계에 따라서만 따질 수 있었고, 아이들의 유일하고 확실한 부모로서의 어머니의 지위는 동시에 여성 일반에 대해, 그 후에는 다시는 획득하지 못한 그러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는 것 등을 논증해 주었다.

바호펜 다음의 후계자는 1865년에 나타난 존 F. 맥레넌(1827-1881, 스코틀랜드의 인류학자)이었다. 그의 공적은 족외혼이란 것이 곳곳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큰 의의를 갖고 있음을 지적한 데 있었다. 맥레넌은 단지 세 가지 혼인형태, 즉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그리고 단혼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남자가 다수의 여자를 공유하는 혼인형태가 미발전 종족들 사이에 있었다는 증거들이 날이 갈수록 더 많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존 러벅(1834-1913, 영국의 은행가, 고고학자,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1870년에 이 군혼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1871년에 루이스 H. 모건은 새로운 그리고 많은 점에서 결정적인 자료를 발표했다. ≪친족제도와 인척제도≫라는 저서를 통해 ①아메리카 인디언의 친족제도는 아시아, 그리고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해도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많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는 것. ②이 제도는 하와이와 기타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 섬들에서 지금 소멸 단계에 있는 군혼 형태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 ③그런데 그 섬들에는 이 혼인 형태뿐만 아니라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린 더 원시적인 군혼 형태로만 설명할 수 있는 친족제도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바로 여기서 지금 이 연구의 토대가 되는 ≪고대사회≫(1877년)가 출발했다. 원시사에서 시초의 모권제 씨족이 문화 민족들에게 널리 알려진 부권제 씨족의 선행 단계라는 이 새로운 발견은 다윈의 진화론이나 맑스의 잉여가치론이 각각 생물학이나 정치경제학에서 지니는 의의와 같은 것이다.

 

3) 1장, 선사 시대 문화의 단계들

루이스 H. 모건은 전문지식을 가지고 인류의 선사에 일정한 체계를 세우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야만, 미개, 문명이란 세 시기를 구분하고 앞의 두 시기와 세 번째 시기로 이행하는 단계를 연구했다. 두 시기를 식품(생활수단) 생산의 발전에 따라 다시 낮은 단계, 중간 단계, 높은 단계로 각각 구분하고 있다.

야만의 낮은 단계는 인류의 유년기로 인간들은 열대나 아열대의 삼림 속에서, 일부는 나무 위에서 살았고, 분절언어가 발생한 것이 이 시기의 주요한 성과이다. 야만의 중간 단계는 어류(갑각류, 패류, 기타 수생동물 포함)를 잡아먹고 불을 사용함으로 시작된다. 야만의 높은 단계는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시작된다. 미개의 낮은 단계는 토기제조법을 터득하면서 시작된다. 미개의 특징은 동물을 길들이고 사육하며 식물들을 재배하는 것이다. 때문에 두 대륙의 자연조건의 차이가 매우 중요해지는데, 동부대륙 즉 구세계는 모든 동물과 대부분을 식물을 길들이고 재배할 수 있었으나, 서부대륙 즉 아메리카는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은 라마뿐이었고, 재배할 수 있는 식물은 옥수수뿐이었다. 이 자연조건의 차이로 두 반구의 주민은 다른 길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개의 중간 단계는 동부대륙에서는 가축을 길들이는 것에서 시작하고, 서부 대륙에서는 관개를 통해 식용작물을 재배하며 아도브(햇볕에 말린 벽돌)와 돌을 건축에 사용하면서 시작된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인류는 철광석을 제련하고 문헌을 기록하는데 문자를 이용하면서부터 문명으로 이행한다. 모건의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야만은 주로 자연이 만들어내는 산물을 가져다 쓰는 시기로 인간이 만든 것들은 주로 그 자연 산물을 가져다 쓰기 위한 보조도구로 사용된다. 미개는 목축과 경작을 도입하는 시기로 인간의 활동을 통해 자연물을 더 많이 공급받을 수 있는 방법을 습득하는 시기이다. 문명은 자연물을 한층 더 낫게 가공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는 시기로 본래적 의미에서 공업 및 기술의 시기이다.

 

4) 2장, 가족

원시사 연구가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남편들이 다처제 생활을 하는 한편 그 아내들도 다부제 생활을 하며, 이에 따라 쌍방의 아이들이 그들 모두의 공동의 자녀로 인정되었던 상태가 있었다. 한 부족 내에서 구속 없는 성교가 지배하는 원시 상태, 즉 모든 여자가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해 있던 원시 상태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태 자체가 최종적으로 단혼으로 이행하기까지는 숱한 변천을 겪는다. 즉 공동부부의 유대가 포괄하는 범위가 처음엔 아주 폭넓다가 점차 줄어들어 나중에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한 쌍 한 쌍의 부부만이 남게 된다. 모건에 따르면 무규율 상태의 원시 상태로부터 다음과 같은 가족형태가 발전해 나왔다.

 

① 혈연가족: 가족의 첫째 단계

여기에서는 혼인 집단이 세대별로 되어 있다. 선대와 후대 간에서만, 즉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서는 서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배제된다. 친형제와 친자매, 종형제와 종자매, 재종형제와 재종자매는 모두 형제자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부부이다. 현재는 전멸한 이러한 가족형태로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은 하아이식 친족제도와 이후의 가족의 전체적인 발전이 이러한 가족형태를 필연적인 선행 단계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➁ 푸날루아 가족(군혼의 최고 형태)

가족의 조직에서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 제1의 진보라면, 제2의 진보는 형제와 자매 간의 성교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푸날루아 가족(원시 상태에서 집단결혼이 허용된 가족형태)은 일정한 수의 친자매 또는 방계의 자매는 그들의 공동남편들의 공동아내였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는 그들의 공동남편 중에서 제외되었다. 이 남편들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지 않고 푸날루아(친근한 동료, 동반자)라고 불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계열의 친형제 또는 촌수가 먼 형제들도 자기의 자매를 제외한 일정한 수의 아내와 공동결혼생활을 했으며, 이 아내들도 서로 푸날루아라고 불렀다. 이 가족의 주된 특징은 일정한 가족권 내에서 남편과 아내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아내 쪽의 친형제, 나중에는 촌수가 먼 형제가 배제되었으며, 그리하여 다른 쪽에서도 남편의 자매가 배제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지금까지의 가족제도에서 전연 무의미하던 조카와 조카딸, 종형제와 종자매라는 촌수가 필요하게 된다.

씨족이라는 제도는 대부분 푸날루아 가족에서 직접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오스트레일리아 반족(대부분의 오스트레일리아 종족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반족혼은 푸날루아 가족보다 덜 발달한 군혼형태로서, 한 반족의 전체 남자들과 다른 한 반족의 전체 여자들이 집단결혼을 한다) 역시 씨족제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나, 그들에게는 씨족제도는 있으나 푸날루아 가족은 없고, 훨씬 미숙한 군혼 형태가 있다. 군혼 가족제도에서는 형태에 상관없이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지는 알 수 없어도 누가 아이의 어머니인지는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전체 가족의 모든 자녀를 자신의 자녀라고 부르며, 또 그들의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진다. 그러면서도 그 여자는 역시 자기의 친자녀들을 다른 아이들과 구별한다. 군혼이 존재하는 한, 혈통은 모계만이 인정된다. (바호펜은 모권이라고 부르지만 원시 공산제 사회는 평등했기 때문에 모계가 모권은 아니다.) 모든 형제와 자매 간의 성교가 금지되고, 나아가 어머니 쪽의 가장 먼 촌수의 방계 친족끼리의 성교까지 금지되자 한 집단의 친자매들과 방계자매들은 씨족으로 전화했다. 즉 서로 결혼해서는 안 되는 모계 혈족자들의 공고한 집단이 형성되었다. 푸날루아 가족으로부터 씨족으로 발전한 것이 필연적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기까지 하다고 인정한다면, 씨족제도를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종족, 즉 거의 모든 미개인과 문명인이 과거에 이러한 가족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단정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지배적인 전체 반족 사이의 결혼은 원시적이고 아주 저급한 군혼형태이지만, 푸날루아 가족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군혼의 최고 발전 단계이다. 전자는 유랑하는 야만인의 사회 발전 수준에 상응하는 것이며, 후자는 원시 공산주의적 공동체의 상당히 확고한 정착을 전제로 하며, 더 높은 그 다음 발전 단계로 직접 이어진다. 이 두 결혼형태 사이에도 많은 중간 단계가 있었지만, 아직은 새로운 연구 영역이다.

 

③ 대우혼 가족

결혼 금지가 더욱 복잡하게 되자 군혼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어 대우혼 가족으로 대체되었다. 일정한 기간 동안 한 남자는 한 여자와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계속해서 일부다처제의 권리와 때로는 정조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있었다. 반면에 여자에게는 같이 사는 동안 정조를 엄격히 지킬 것을 요구했으며, 그들의 간통은 잔인한 처벌을 받았다. 이전의 가족형태에서는 여자의 부족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제는 여자가 부족하여 약탈과 매매가 시작되었다. 아내를 얻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 이 징표에 대해 약탈혼이니 매매혼이니 하는 특수한 가족형태가 있는 것처럼 맥레넌은 꾸며냈다.

대우혼 가족은 그 자체가 아직 극히 미약하고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세대를 요구한다거나, 심지어 그렇게 할 생각조차 못했다. 따라서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원시 공산주의적 세대를 결코 해체시키지 못했다. 원시 공산제 사회는 가정에서 여성의 지배를 의미한다. 여자가 대부분 또는 모두 같은 한 씨족에 속하는 한편 남자는 여러 씨족에 분속되어 있는 원시 공산주의적 세대는 원시 시대의 어디에서나 일반적이었던 여성지배의 현실적 토대이다.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부의 원천이 조성되었고, 전혀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선진적인 목축민들은 말, 낙타, 나귀, 소, 양, 산양 및 돼지 등의 가축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시나 하고 웬만큼 거두어만 주면 끊임없이 대량 번식하여 젖과 고기를 아주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재부는 일단 개별 가족의 사유재산으로 넘어가서 번식이 빨라지자 대우혼과 모권 씨족에 입각한 사회에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대우혼은 친어머니와 함께 친아버지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해 주었다. 재부가 증대함에 따라 가족 내에서 한편으로는 아내보다도 남편이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 강화된 지위를 이용해 남편은 자녀들을 위해 기존의 상속 순위를 폐지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모권에 의해서 혈통을 따졌던 시기에는 그것이 실현될 수 없었다. 모권은 폐지되어야 했고 폐지되었다. 실로 이 혁명(이것은 인류가 체험한 가장 근본적인 혁명 중의 하나이다)은 살아있는 씨족 성원 단 한 사람도 건드리지 않고 이전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앞으로는 남자 성원의 자손이 씨족에 남아 있어야 하고, 여자 성원의 자손은 자기 아버지 쪽 씨족으로 넘아가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결정을 하였다. 이것으로써 모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모권 상속은 폐지되고, 부계에 의한 혈통의 결정과 부권 상속이 도입되었다. 엥겔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강조했다.

모권의 전복은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였다. 남자는 가정에서도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어 여자는 자기의 존귀한 지위를 상실하고 노비로, 남자의 정욕의 도구로, 순전한 산아도구로 전락했다.

 

이렇게 확립된 남성독재의 최초의 산물은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가족이라는 중간형태이다. 모건의 ≪고대사회≫는 이렇게 묘사한다. 토지를 소유하고 가축 떼를 돌보기 위해서 일정수의 자유민과 비자유민(노예)을 가장의 권력하에 하나의 가족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 이 가장은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 … 비자유민은 한 명의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고 일정한 구역에서 가축을 돌보고 있었다. 비자유민이 가족의 성원이 된 것(파물루스[famulus]는 가내노예를 의미했고, 파밀리아[familia]는 한 사람에게 종속된 노예의 총체를 의미했다)과 가장의 권력이 핵심인데, 이런 가족 형태의 완성된 유형은 로마의 가족이다.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는 지역에서는 가부장적 세대공동체가 있었다.

 

④ 일부일처제 가족

이것은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에서 대우혼 가족으로부터 발생한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른 것으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만이 이 유대를 끊고 아내를 버릴 수 있으며, 이 단계에서도 남편은 정조를 지키지 않을 권리를 관습상 보장받고 있다(나폴레옹 법전). 일부일처제는 자연적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에 기초한, 즉 원시적ㆍ자연발생적 공동소유에 대한 사적소유의 승리를 기초로 한 최초의 가족형태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결혼에는 대체로 인류 발전의 3개의 주요 단계에 상응하는 3개의 주요 형태가 있었다. 야만 시대에는 군혼, 미개 시대에는 대우혼, 문명 시대에는 간통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일처제가 있었다. 이 진행 과정의 특징은 군혼 시대의 성적 자유를 여자는 점차 박탈당하지만 남자는 그렇지 않고, 사실상 남자는 오늘날까지도 실질적으로는 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일부일처제의 경제적 기초가 다가올 사회적 변혁에 의해 사라진다면 일부일처제는 제대로 실현될 것이고, 남자에 대해서도 현실이 될 것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결혼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이에 기초한 소유관계가 지양됨으로써, 오늘날 아직도 배우자의 선택에 아주 큰 영향을 주는 그 모든 부차적인 경제적 고려가 제거됨으로써 비로소 일반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때에는 이미 상호 간의 애정 이외의 다른 아무런 동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한 후에 자리 잡을 양성 관계의 형태는 남녀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남자는 일생을 두고 금전이나 기타 사회적 권력수단으로 여자를 사는 일이 없고, 여자는 진정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기로도 결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며,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거부하지 않을 때 확정될 것이다.

 

5) 3장, 이로쿼이인의 씨족

모건의 또 다른 발견에 의하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한 종족 내에서 동물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혈연결합체(씨족)들은 본질적으로 그리스인들의 게네아나 로마인들의 겐테스와 동일한데, 아메리카의 형태(모계씨족)는 원시적인 것이며, 그리스ㆍ로마의 형태(부계씨족)는 좀 더 나중의 것이자 파생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국가 발생 이전의 원시 시대에 있던 사회제도의 기본 특징들이 밝혀졌다. 모건은 원시적 씨족의 고전적 형태로서 이로쿼이인들의 씨족 중에서, 8개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세네카 부족을 들고 있다. 세네카 부족의 각 씨족에는 다음과 같은 관습이 있다. ①자기의 사쳄(평상시의 족장)과 군사 수령(전시 지휘관)을 선출한다. 선거에는 남녀 모두가 참여했고, 다른 일곱 개의 씨족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②씨족은 임의로 사쳄과 군사 수령을 해임할 수 있다. 역시 남녀가 공동으로 결정한다. ③씨족 성원은 아무도 씨족 내부에서 결혼할 수 없다. ④사망자의 재산은 남아있는 씨족 성원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씨족 성원들이 그 씨족 내에 남아있어야만 가능하다. ⑤씨족 성원들은 서로 돕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특히 족외자의 침해에 대해 복수에 협력할 의무가 있다. ⑥씨족 명칭을 가진다. ⑦씨족은 족외자를 양자로 삼아서 전체 부족의 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⑧종교적 제전에는 사쳄과 군사 수령이 신앙의 수호자로 간주되어 사제의 직능을 수행한다. ⑨공동묘지를 가진다. ⑩평등한 투표권을 가진 성인남녀 씨족 성원들의 민주주의적 회의인 평의회가 있다.

대부분의 인디언 부족들은 각각 3-4개의 씨족을 한데 묶어서 따로 한 집단을 조직하고 포족이라고 불렀다. 이로쿼이인 포족의 기능은 일부는 사회적이었고, 일부는 종교적이었다. 공놀이 시합 때 포족별로 서로 대항하고, 부족 평의회에 각 포족의 사쳄들과 군사 수령들이 각각 마주 앉으며, 부족 내에 살인이 일어나면 피해를 입은 씨족이 형제씨족에게 호소하는 일이 있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서 포족을 형성하고, 몇 개의 포족이 모여서 부족을 형성한다.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의 특징은 ①자기 자신의 영토와 자기 자신의 명칭을 가진다. ②독특한 방언이 있다. ③씨족들이 선출한 사쳄과 군사 수령을 엄숙하게 임명할 권리가 있다. ④그들을 선출한 씨족의 의사에 거슬리더라도 그들을 파면할 권리가 있다. ⑤공동의 종교적 표상과 예배의식이 있다. ⑥공동 사업을 심의하기 위해 각 씨족의 전체 사쳄과 군사 수령들로 구성된 부족평의회가 있다. 최종결정은 만장일치의 가결을 요구했다. ⑦몇 개의 부족에는 한 사람의 수석족장이 있었다. 권한은 아주 미약했고 사쳄의 한 사람으로서 긴급한 행동이 요구되는 경우에는 평의회가 소집되어 최종 결정이 채택될 때까지 임시 조치를 취할 책임이 있었다. 여기서 집행권을 가진 공직자의 맹아를 보게 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중에 부족 동맹이 가장 발달한 형태가 이로쿼이인 동맹이다. 이 동맹의 기본 특징은 ①부족의 모든 내부 문제에서 완전히 평등권과 자주성을 바탕으로 수립된 5개 혈연부족의 영구동맹이었다. ②동맹의 기관은 지위와 권위가 평등한 50명이 사쳄으로 구성된 동맹평의회였다. ③이 50개의 사쳄 자리는 동맹의 여러 목적을 위해, 특별히 설치된 새로운 지역의 담당자로서 동맹 창립 당시 부족과 씨족들에게 배정되었고 임명권은 동맹평의회가 가졌다. ④이 동맹 사쳄들은 동시에 자기네 종족의 사쳄이기도 했고, 종족평의회에 참석할 권리와 투표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⑤동맹평의회의 모든 결정은 만장일치의 가결을 요구했다. ⑥투표는 종족별로 실시되었다. ⑦5개의 부족평의회 중 어느 평의회나 동맹평의회를 소집할 수 있었으나, 동맹평의회는 자기 자신의 발의로는 소집될 수 없었다. ⑧회의는 소집된 인민들 앞에서 진행되었으며, 이로쿼이인은 누구나 발언할 수 있었으나, 결정은 평의회만이 내릴 수 있었다. ⑨동맹에는 개인적으로 공인된 우두머리, 즉 행정권의 맨 위에 서 있는 개인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⑩동맹에는 평등한 권한과 평등한 권력을 가진 두 사람의 최고 군사 사령이 있었다. 이것이 아직 국가를 형성하지 않은 사회조직이었다.

씨족은 일단 사회의 기본 세포가 되자 거의 불가항력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씨족, 포족 및 부족이라는 하나의 체계로 발전한다. 이 세 집단은 모두 혈연관계의 각기 다른 정도를 표시한다. 씨족제도는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조직이다. 군인도 헌병도 경찰관도 없으며, 귀족도 왕도 총독도 지방 장관도 재판관도 감옥도 소송도 없지만 모든 것은 원시 공산주의적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다. 토지는 종족 전체의 재산이며, 가난한 자, 불행한 자도 있을 수 없다. 원시 공산주의적 세대와 씨족은 노인, 병자, 전쟁불구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를 잘 알고 있었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로웠다. 각종 계급으로 분열되기 전까지 인류와 인류 사회는 이러했다. 이것은 사실의 한 측면이다. 이 조직은 멸망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종족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법적 보호 밖에 있었다. 평화조약이 제대로 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부족들 사이에는 늘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전쟁은 인간 이외의 동물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잔인성을 띤 것이었다. 이 원시적 공동체는 계급사회의 출현으로 붕괴되고, 새로이 발생한 사회의 2,500년의 역사는 다름이 아니라 끊임없이 압도적 다수를 억압ㆍ착취하는 극소수자의 발전사였다.

 

6) 4장, 그리스인의 씨족

그리스인들은 씨족, 포족, 부족, 부족동맹 등의 조직 계열에 따라 조직되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역사 무대에 등장하자마자 이미 문명의 문턱에 서 있었다. 모권은 부권에 자리를 내주었고, 발생 중에 있었던 사적재화는 씨족제도에 첫 번째 균열을 만들어 놓았다. 아테네 씨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공동의 종교적 제전 ②공동묘지 ③상호상속권 ④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서로 돕고 보호하며 지원할 의무 ⑤특별한 경우, 처녀가 고아이거나 여자가 상속인인 경우 씨족 내에서 결혼할 상호 간의 권리 및 의무 ⑥자체의 아르콘(우두머리)과 회계원을 두고 재산을 공동소유하는 것 ⑦부권에 따라 혈통을 따지는 것 ⑧여자 상속인을 제외한 족내혼의 금지 ⑨씨족의 양자를 맞아들일 권리 ⑩수령을 선출 또는 해임할 권리.

친족관계에 있는 몇 개의 포족들은 부족을 형성한다. 아티카(그리스 중부에 있는 반도, 아테네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는 네 개의 부족이 있었고, 각 부족에는 세 개의 포족이 있었고, 각 포족에는 30개의 씨족이 있었다. 그리스의 부족들은 대부분 이미 준민족들로 결합되어 있었으나, 씨족, 포족, 부족들은 그 내부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주성을 완전히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었다. 경작이 확대되고 수공업이 발달함과 더불어 가축군과 인구도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재산의 차이도 벌어지게 되었고, 이 재산의 차이와 함께 구식의 원시적 민주주의 내부에 귀족적 요소 역시 성장하게 되었다. 다양한 소규모 준민족들은 더 좋은 토지를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전리품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고, 전쟁포로의 노예화는 이미 공인된 제도였다. 이 부족들과 준민족들의 관리조직은 다음과 같다. ①상설적인 권력기관은 평의회(불레). 본래는 씨족의 족장들로 구성되었으나, 나중에는 그 수가 많아져서 선발된 일부 족장들로 구성되어 귀족적 요소가 발전될 가능성이 조장되었다. 중요한 문제는 평의회가 최종 결정. ②민회는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평의회가 소집했으며, 남자는 누구나 발언권이 있었다. 결정은 거수 또는 함성으로 채택되었다. 궁극적인 최고권력은 민회에 속했다. ③군사령관(바실레우스). 모든 공직은 대부분 씨족 내부에서 선거를 통해 임명되었으며, 또 그러한 한 씨족 내에서 세습되었다. 그리스인의 군사령관은 로마의 왕처럼 인민에 의해 선출되거나 혹은 인민이 승인한 기관(평의회 혹은 민회)을 통해 확인되어야 했다. 바실레우스는 군사적 지휘권을 가지고 있으며 군사적 민주주의를 뜻하는 직책이었으며 근대적 의미의 통치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녀들의 재산 상속제를 수반하는 부권제가 그리스 씨족제도 몰락의 단초이다. 한 가족에 의한 재화의 축적을 조장했고, 가족을 씨족에 대항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재산상 차이가 세습적 귀족 및 왕권의 첫 맹아의 형성을 거쳐 사회제도에 반작용을 주게 된 사실과 노예제도는 처음에는 전쟁포로뿐이었지만 같은 씨족 성원까지 노예화시킬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새로 획득한 각자의 재화를 씨족제도의 원시 공산주의의 전통으로부터 보호하고, 사유재산을 신성화하고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착취할 권리와 무산계급에 대한 유산계급의 지배를 영구화시킬 제도, 국가가 만들어졌다.

 

7) 5장, 아테네 국가의 탄생

국가의 발생 과정을 추적하는 데에는 아테네보다 더 좋은 사례가 없을 것이다. 우선 아테네에 공동평의회라는 중앙기관이 설치되었다. 개별적 부족이나 씨족의 법적 관습보다 아테네의 우월한 일반적 시민법이 발생했다. 씨족, 부족과 관계없이 전체 시민을 귀족, 농민, 수공업자라는 세 계급으로 구분하고 귀족에게 공직을 차지하는 독점을 부여했다. 귀족의 지배는 갈수록 강화되었다. 귀족들은 공직을 독점하고 해상무역과 해적질, 화폐와 고리대금으로 부를 축적했다. 아버지가 자녀를 판다는 것, 이것은 부권과 일부일처제가 맺은 첫 열매였다! 그래도 모자랄 경우 아버지는 채무자 자신을 노예로 팔았다. 이것이 아테네 문명의 첫 서광이었다! 무장한 인민 전체와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을 만들어냈고, 혈연적 집단이 아니라 지역적 동거에 따라 인민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구분했다. 솔론의 개혁은 귀족이 독점하던 공직을 자유민 전체에게 넘겼으며, 귀족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고 채무자를 보호하는 대책을 내놓았다. 국가의 본질적인 특징은 인민 대중과 동떨어진 공적 권력이라는 것이다. 군대와 함대는 외부의 적을 방어하고, 또 이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노예들을 복종시키는 데 이용되었다. 아테네의 사회 및 정치제도의 기초를 이루는 계급적 적대는 이미 귀족과 평민 간의 적대가 아니라 노예와 자유민 간의 적대였다. 아테네를 멸망으로 이끈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의 노동을 천한 것으로 만들어버린 노예제였다.

 

8) 6장, 로마의 씨족과 국가

로마의 씨족은 그리스의 씨족과 같은 제도였다. 로마의 씨족은 전성기에 다음과 같은 제도를 갖고 있었다. ①씨족 성원들의 상호 상속권. 재산은 씨족 내에 남아 있었다. 부권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모계의 후손은 상속에서 제외되었다. ②공동묘지의 소유 ③공공의 종교적 제전 ④씨족 내에서 결혼하지 않을 의무 ⑤토지의 공동소유 ⑥씨족 성원들이 서로 보호하고 원조할 의무 ⑦씨족명을 달 권리 ⑧다른 씨족 성원을 씨족의 양자로 삼을 권리 ⑨족장을 선출하고 해임할 권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지만 로마의 역사 초기에 일체의 공직이 선출되거나 임명되었고, 쿠리아(10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포족)의 제관들도 쿠리아에 의해 선출되었으므로 씨족의 족장도 선출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부권으로 이행하였음을 제외하면 이로쿼이 씨족과 일치한다. 로마의 쿠리아는 그리스의 포족보다 한층 더 중요한 사회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각 쿠리아는 자기의 종교적 의식, 신전 및 제관 등이 있었으며, 이 제관들이 전부 모여 로마 제관단의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10개의 쿠리아가 1개의 부족을 형성, 각 부족에는 한 사람의 선출된 수장(군사령관 겸 제사장)이 있었다. 세 부족 전체가 로마인을 형성했다. 이들의 최초의 통치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사회적인 문제들은 우선 300개 씨족의 족장들로 구성된 원로원에서 처리했다. 원로는 언제나 각 씨족의 동일한 가족 중에서 선출되는 관습 때문에 로마에서도 최초의 씨족적 귀족이 형성되었다. 이 가족들은 귀족이라고 불렸으며 그들은 원로원 의원이 되는 독점적 권리와 기타 일체 공직을 차지할 권리를 요구했다. 원로원은 새로운 법령을 심의하고 법령의 최종 채택은 쿠리아 회의(각 쿠리아에서 한 표씩 투표권을 가진)라고 불린 민회에서 했다. 민회는 레크스(왕)를 포함한 고위 공직자들을 선출했다. 레크스는 그리스의 바실레우스에 해당하며 군사령관이기도 하고 재판관이기도 했다. 영웅 시대의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왕정 시대의 로마인들도 씨족, 포족, 부족에 기초했고, 또 그것들로부터 발전한 군사민주주의가 있었다. 병역의 의무를 지는 전체 남성 주민은 그 재산에 따라서 6계급으로 구분되었다. 이 새로운 겐투리아 민회는 시민들이 중대별로 100명씩 한 겐투리아를 이루어 군대식으로 정렬했으며, 각 겐투리아는 한 표를 가지고 있었다. 제1계급은 80, 제2계급은 22, 제3계급은 20, 제4계급은 22, 제5계급은 30, 제6계급(가난해서 병역과 납세가 면제된 자들)은 체면상 1 겐투리아를 이루었다. 거기에 가장 부유한 시민들로부터 충당된 18 겐투리아의 기병대가 있었다. 모두 193 겐투리아에 제1계급과 기사만 합치면 98 겐투리아로 과반수를 만들 수 있었다. 이전 쿠리아 회의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권리는 새로운 겐투리아 회의로 넘어갔다. 쿠리아 회의는 완전히 없어지고 국가가 세 개의 혈연부족을 제거하고 네 개의 지역부족을 조직했다. 혈연적 유대에 입각한 낡은 제도는 붕괴되고, 영토에 따른 구분과 재산상의 차별을 기초로 한 새로운 현실적인 국가제도가 수립되었다.

 

9) 7장, 켈트인과 게르만인의 씨족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켈트인(유럽 인종의 하나. 스위스ㆍ스코틀랜드ㆍ아일랜드 등지에 살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키가 크고 머리털은 금발 또는 밤색이다. 역사적으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후에 영국과 프랑스 등지로 분산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람과 동화되었으나 아일랜드 등지에서는 아직도 고유의 민족성을 간직하고 있다)의 가장 오래된 법률을 보면 당시에도 씨족이 아직 충분히 활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웨일스의 사료와 아일랜드의 사료가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11세기 켈트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대우혼이 일부일처제에 의해 밀려나지 않았다. 웨일스에서는 혼인한 지 7년이 지나면 이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아내가 갈라설 때 자기 재산상 권리를 하나도 상실하지 않고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여성들은 민회에서 투표권이 있었다. 아일랜드 씨족의 존재는 비단 고대의 법전들에서뿐만 아니라 클랜(아일랜드 부족)들의 토지를 잉글랜드 왕의 직할령으로 만들기 위해 아일랜드에 파견되었던 17세기 잉글랜드 법학자들에 의해서도 확인되고 서술되었다. 토지는 17세기 직전까지도 클랜 혹은 씨족의 공유재산이었다. 모건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클랜은 … 그 조직과 정신으로 보아 씨족의 훌륭한 전형이며, 씨족 성원들을 지배하는 씨족생활의 뚜렷한 실례이다. … 그들의 분쟁과 피비린내 나는 복수, 클랜에 따른 영토의 분배, 그들에 의핸 토지의 공동이용, 클랜 성원들의 족장에 대한 신뢰와 상호 간의 신뢰 등 그 어디에서나 우리는 씨족 사회의 확고한 특징을 보게 된다. … 혈통을 따지는 방식을 부권에 따랐기 때문에 남자의 자녀들은 클랜에 남아 있었지만, 여자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 쪽의 클랜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이전에 스코틀랜드에 모권이 지배했다는 것은 베다에 의해 픽트인의 왕가에서는 모계에 의해 상속이 있었다는 사실에 따라 증명된다. 웨일스인(켈트계의 민족의 하나)과 스코트인(갈리아인을 일컫는 라틴어, 처음에는 아일랜드섬과 브리튼섬에 사는 갈리아인을, 나중에는 브리튼섬 북부지역에 사는 갈리아 인들을 의미하다가 스코틀랜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들 사이에서는 푸날루아 가족의 잔재가 초야권의 형태를 띠면서 중세기에 이르기까지 보존되고 있었다. 이 초야권은 그것이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종족 우두머리나 왕이 이전에 공동남편들의 최후의 대표자로서 이 권리를 모든 신부들에게 행사할 수 있었다.

 

민족의 이동 직전까지 게르만인(북유럽의 민족언어학 집단이다. 네덜란드를 기준으로 북쪽 국가를 게르만 민족 국가라고 한다. 독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이 해당된다)이 씨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카이사르(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 장군)의 ≪갈리아 전쟁기≫와 5세기 이래 현재의 알자스, 동부 스위스 및 서남부 독일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던 알레만인의 게르만 부족 동맹 관습법을 묶은 6세기 말 7세기 초의 ≪알레만 법전≫은 게르만 인들이 씨족과 친족집단 별로 분포되어 정착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씨족은 후세의 마르크공동체 또는 촌락공동체와 아주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막심 코발렙스키(1851-1916)에 따르면 이 씨족이란 것은 대규모의 세대공동체(모권적 공산주의적 가족과 현대의 고립적인 가족 사이의 중간 단계로서 가부장적 세대공동체가 보편적으로는 아니지만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로서 그것들 사이에는 토지가 분배되었으며, 촌락공동체는 나중에 이 세대공동체로부터 발전해 나왔다는 것이다. 타키투스(56-120, 로마의 정치가, 역사가)의 ≪게르마니아≫와 신들의 황혼과 세계의 멸망을 노래한 고대 북유럽의 시 무녀의 예언에 의하면 모권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타키투스 시대에 게르만인들 사이에서는 모권이 이미 부권에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중세가 시작된 지 한참 후에도 모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사라져 간 모권의 또 다른 유물은, 로마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게르만인들의 여성 존경이다. 게르만인들의 농업 및 토지이용의 단계는 씨족제도에 정확히 부합되는 것으로서 경작지는 매년 변경(재분배)하면서도 공유지는 아주 풍부하게 남기는 것이었다. 통치조직은 미개의 높은 단계에 걸맞는 것으로 수장평의회가 있었다. 평의회는 비교적 작은 문제에 결정을 내렸으며, 더 중요한 문제는 민회의 결정 채택을 위한 예비심의를 하였다. 부권제로의 이행은 그리스 및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선출제가 점차 세습제로 이행하는 것을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각 씨족 내에서 귀족의 발생을 조장했다. 군사령관은 혈통과 상관없이 선출되었다. 군통수권은 제관들이 가지고 있었고, 실권은 민회가 장악하고 있었다. 왕, 즉 부족장은 사회를 보고 결정은 인민이 내렸다. 민회는 동시에 재판소이기도 했다. 게르만인들의 경우에 판결을 내리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전체 집단이었다. 카이사르 시대 이후 부족동맹들이 형성되었고, 그중 일부에는 이미 왕이 있었다. 최고 군사령관은 참주정치를 획책했으며, 때로는 그 목적을 달성했다. 친병제(명성을 얻은 군사령관은 자기 주위에 약탈욕으로 가득 찬 한 무리를 청년들을 긁어모아, 그들을 부양하고 그들 사이에 일정한 위계질서를 설정하고, 충성하게 했다)는 첫째로 왕권의 발생을 촉진시켰다. 둘째로 그것은 부단한 전쟁과 약탈적 습격에 의해서만 하나의 조직체로 유지되었다. 이제는 약탈이 목적이 되었다. 친병대의 지휘관은 근방에서 할 일이 없을 때 전쟁과 전리품을 찾아 다른 인민들에게 자기 부대를 거느리고 떠났고, 용병제도의 맹아가 되었다. 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 왕이 거느리던 이 친병들은 로마 궁정의 비자유민 신하들과 더불어 후세의 귀족의 두 번째 구성 부분을 이루었다. 여러 민족으로 결합된 게르만 부족에게는 대체로 영웅 시대의 그리스인들이나, 소위 왕정 시대의 로마인들에게서 발전한 것과 동일한 통치조직이 있었다. 즉 민회, 씨족장평의회, 왕권을 탈취하려고 일을 꾸미는 군사령관이 있었다. 이것은 씨족제도 아래서 이룩될 수 있었던 가장 발전된 통치조직이었다. 그것이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 전형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다. 사회가 이 조직이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던 범위를 벗어나자 씨족제도는 종말을 고하고 그 대신에 국가가 등장했다.

 

10) 8장, 게르만인의 국가형성

게르만인들은 이로쿼이인들에 비해서 인구가 대단히 많았다. 기원 초기에 게르만인은 적어도 600만 명쯤은 되었을 것이다. 5대호 지방에서부터 오하이오와 포토맥 강에 이르는 전 지역을 공포에 떨게 만든 이로쿼이인의 인구는 10만이 채 못 되었다.

로마의 세계 지배는 라틴어로 온갖 민족어를 굴복시켰다. 민족들 간의 차이는 모두 소멸되었다. 로마의 행정과 로마의 법률은 곳곳에서 고대의 씨족적 결합을 파괴했고, 그와 함께 지역적 및 민족적 자립성의 마지막 잔재까지도 없애버렸다. 로마 국가는 오로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거대한 기계로 변질되었다. 조세, 국가 부역 및 각종 가렴주구 때문에 시민들은 점점 더 깊은 빈궁에 빠지게 되었다. 총독, 세리, 병사들의 강탈은 이 압박을 가중시켰다. 로마 국가의 존립권은 대내적으로 질서의 유지에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개인에 대한 방위에 있었다. 로마 국가는 미개인을 물리치고 시민을 보호하겠다고 나섰지만, 바로 그 미개인이야말로 시민이 갈망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각국 인민의 지배자로서 로마인들은 상공업에 결코 종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리대금업에서만은 뛰어났다. 겨우 명맥만 유지하던 상공업은 관리들의 강탈로 사라져버렸다. 전반적 궁핍화, 무역 및 수공업 그리고 예술의 쇠퇴, 인구의 감소, 도시의 황폐화, 더욱 낮은 수준으로 전락한 농업, 이러한 것들이 로마에 의한 세계 지배의 마지막 결과였다.

고대 세계 전반에 걸쳐 결정적인 생산부문이었던 농업이 이제 다시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노예노동에 기초한 대규모 농업형태인 라티푼디아 체계(고대 말기에 목장과 장원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이용되었다)는 더 이상 채산이 맞지 않았다. 소규모 경작이 다시금 수익성 있는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장원은 잇달아 소규모의 분할지로 세분되어 일정액을 지불하는 세습소작인 또는 분익소작인에게 임대되었다. 분익소작인은 소작인이라기보다는 관리인이었으며, 그는 자기의 노동의 대가로 연간 생산물의 1/6, 때로는 1/9밖에 받지 못했다. 이 소분할지는 주로 콜로누스에게 임대되었다. 이들은 일정한 돈을 지불했으며, 토지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 분할지와 함께 매각될 수 있었다. 콜로누스들은 노예가 아니었으나 자유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자유민과 결혼할 수도 없었으며, 자기들 간의 결혼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노예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동거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중세기 농노의 선구자였다.

고대 노예제는 대규모 농업에서나 도시의 수공업 작업장에서나 이미 지출된 노동을 보상할 만큼 수익을 내지 못했으므로 수명을 다했다. 노예가 해야 할 모든 생산적 노동은 로마의 자유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로마에는 남아돌아서 짐이 되어버린 해방노예들과 콜로누스와 영락한 자유민들의 수가 증대했다. 고대 노예제가 사멸한 것은 기독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기독교는 수 세기 동안 로마 제국에서 노예제의 지지자였다. 그 후에도 기독교인들은 노예매매, 더 후의 흑인매매도 결코 방해하지 않았다. 노예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없어진 것이다. 노예제가 사라지면서 생산적 노동에 대한 경멸이라는 것만 남겨 놓았다. 콜로누스들과 함께 자유로운 소농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관리들의 폭압을 모면하기 위해서 종종 어떤 유력한 자의 파트로나트(후견인)에 의지했다. 파트로나트는 보호가 필요한 자들이 토지 소유권을 자기에게 양도하면서 그 대신 토지를 일생 동안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신성한 교회는 이 관계를 이용해 9세기와 10세기에 하느님의 왕국과 자신의 토지재산을 확장하는 데 이용했다. 게르만의 미개인들은 로마인들을 그들 자신의 국가로부터 해방시켜 준 대가로 전 국토의 2/3를 빼앗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다. 분배는 씨족제도에 따라 이루어졌다. 정복자들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드넓은 토지가 분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일부는 전체 부족의 소유로, 일부는 개별적 부족이나 씨족의 소유가 되었다. 각 씨족 내에서는 경지와 목초지가 개별적 세대들 사이에 추첨을 통해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이후에는 재분배가 폐지되고 할당받은 토지는 양도할 수 있는 사유재산으로 되었다. 삼림과 목초지는 분배되지 않고 그전처럼 공동으로 이용했다. 씨족이 자기 촌락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게르만인과 로마인의 융합이 점점 더 강화될수록, 유대의 혈연적 성격은 희박해지고 지역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씨족은 마르크공동체 속으로 용해되었다. 지역적 조직은 씨족제도의 특징인 원시적 민주주의 성격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었고, 최근까지도 씨족제도의 생생한 요소를 보존하고 있었다. 씨족의 혈연적 유대는 얼마 후 그 의미를 상실했는데, 피정복자에 대한 지배는 씨족제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마의 각 지방들을 지배한 게르만인들은 자기들이 정복한 이 지역들을 조직적으로 통치해야만 했다.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국가기관으로 전환되어야 했다. 군사령관의 권력은 왕권으로 바뀌었다. 프랑크 왕국(5세기 말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프랑크족이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에 세운 왕국)을 예로 들어 보자. 프랑크 왕국에서는 승리한 살리아인이 막강한 로마 국가의 직할지뿐만 아니라 아직 크고 작은 각 관구나 마르크공동체들에 분배되지 않은 모든 광활한 지대, 특히 비교적 광활한 삼림지대를 모두 독차지했다. 평범한 군사령관으로부터 진짜 군주가 된 프랑크 왕의 첫 사업은 인민의 재산을 왕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인민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신하들에게 증여 또는 대여하는 것이었다. 인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새로운 귀족의 토대가 형성되었다. 수장평의회는 왕의 측근들로 교체되었고, 민회는 하급 지휘관들과 신흥 귀족들의 집회로 변질되었다. 프랑크인의 대부분을 이루는 토지 소유 농민들은 부단한 내란과 정복전쟁 때문에 공화제 말기의 로마 농민처럼 피폐해지고 몰락했다. 샤를마뉴 대제(742-814,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의 왕으로 신성로마제국을 세움) 사후 50년이 지나서 이 프랑크 왕국은 로마 제국이 400년 전 프랑크인들에게 유린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저항도 없이 노르만인(8세기 유럽 해안지방을 습격하여 파괴적인 약탈을 시작한 덴마크,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출신의 해적들이었으나 이후 프랑스어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들에게 유린당했다. 프랑크 왕국의 자유농민들은 그 선행자인 로마의 콜로누스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수 세대 후에는 대부분 농노로 전락했다. 자유농민층의 급속한 소멸에 대해 이르미농이 작성한 셍-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의 토지대장이 잘 말해 주고 있는데, 이 수도원 주변의 광대한 영지에는 샤를마뉴 대제가 살았던 당시에도 거의 전부 게르만인의 이름을 가진 프랑크인들이 2,788세대가 살았는데, 그중에 2,080세대가 콜로누스이고, 35세대가 반자유농민, 20세대는 노예, 자유이주민은 8세대에 불과했다. 이리하여 주민들은 400년이 지난 뒤 자기가 출발했던 바로 그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한다. ①로마 제국 쇠퇴기의 사회적 분화와 재산 분배방식은 당시의 농업과 공업의 생산수준에 아주 걸맞는 것이었다. ②이 생산수준이 그 이후 400년 동안에 본질적으로 낮아지지도 않았고 높아지지도 않았으며, 그리하여 똑같은 필연성을 가지고 동일한 재산분배와 동일한 계급 구성을 다시금 살펴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 상황은 지배적인 대토지 소유자와 예속된 소농을 낳는다. 이 400년 동안 진보는 있었다. 로마 말기에 노동을 노예의 것으로 멸시하다 몰락해 버린 가난한 자유민들은 소멸했다. 9세기의 사회계급은 몰락해가는 문명의 늪 속에서가 아니라 새 문명의 진통 가운데서 형성되었다. 현대적인 민족을 준비하고, 다가오는 역사를 위해 서유럽의 인류를 새로이 형성한 성과가 있었다. 게르만 시기에 있었던 국가의 해체는 노르만인과 사라센인들에게 정복당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은대지제도(중세 전기 유럽에서 봉건 영주가 가신에게 은대지를 주는 대가로 군역 따위의 봉사 의무를 요구한 제도)와 보호위탁제도(보호자를 위해 군무나 기타 봉사를 수행하며, 자기의 토지를 보호자에게 양도하고 그것을 소작지로 도로 받아 부치는 등 일정한 조건으로 농민이 봉건 영주의 보호를 받는 제도)가 봉건제도로 발전ㆍ성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게르만인들이 빈사 상태의 유럽에 새로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힘은 바로 그들의 미개성, 즉 그들의 씨족제도였다. 게르만인들은 일부일처제의 고대적 형태를 개조하여 가정에서 남자의 지배를 완화하고, 일찍이 고전적 세계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여자에게 부여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권제적 유습이다. 그들은 독일, 북부프랑스, 잉글랜드 등 주요 국가에 본래의 씨족제도 한 가닥을 마르크공동체의 형태로 봉건 국가에 도입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혹하기 그지없는 중세의 농노제의 조건하에서도 피억압계급인 농민들에게, 고대의 노예나 근대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형태로는 가질 수 없었던 지역적 단결력과 저항수단을 부여했던 것이다.

 

11) 9장, 미개와 문명

그리스, 로마, 게르만인의 예를 들어 씨족제도가 분해되는 것을 고찰했는데, 이제 그것의 경제적 조건을 연구함으로써 이 책을 마무리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맑스의 ≪자본론≫이 모건의 저서와 함께 필요하다. 미개의 낮은 단계에서 전성기에 이른 씨족제도는 거기에 지배와 예속이 있을 수 없다는 데에 그 위대성과 동시에 한계가 나타나 있다. 이 제도의 경제적 토대를 고찰하자. 인구는 매우 적었으며, 단지 부족의 거주지에만 조밀했다. 분업은 순전히 자연발생적인 것으로서 남녀 양성 간에만 있었다. 남자는 수렵이나 어로에 종사하며 먹을거리를 구해오고, 여자는 가사를 돌보며 음식과 의류를 만든다. 남녀는 각자 자기 영역에서 주인이다. 인간은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을 발견했으며, 나중에는 길들여서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을 발견했다. 목축부족은 다른 미개인들과 분리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커다란 사회적 분업이다. 목축부족은 다른 미개인들보다 더 많이 더 다른 것들을 생산하였다. 이것이 처음으로 규칙적인 교환을 가능하게 하였다. 가축 떼가 개별 재산으로 되자 개인들 간의 교환이 점점 더 우세해졌으며, 마침내 그것은 교환의 유일한 형태가 되었다. 처음에 가축을 위해 재배되던 곡물이 얼마 안 가서 사람의 식료로도 이용되었다. 경작지는 여전히 부족의 소유였으며, 처음에는 씨족이, 나중에는 세대공동체가, 마지막에는 개인들이 이용하도록 양도되었다. 직기가 사용되고 광석이 용해되고 금속이 가공되었다. 목축, 농업, 가내수공업 등 모든 부분에서 생산이 늘어나자 인간의 노동력은 자기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생산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포로는 노예로 전락했다. 최초의 거대한 사회적 분업은 주어진 모든 역사적 조건 아래서 필연적으로 노예제도를 가져왔다. 가축 떼와 기타 새로운 재부의 출현과 더불어 가족 내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가축은 남자의 것이며, 가축과 교환해서 얻어온 상품과 노예들 역시 남자의 것이었다. 사나운 전사와 사냥꾼은 집에서 여자 다음가는 자리에 만족했지만, 조금 더 온화한 목축민은 자기의 재부를 뽐내고 첫 번째 자리로 올라서면서 여자를 두 번째 자리로 끌어내렸다. 여성의 해방, 남녀의 평등은 여자가 사회적 노동에서 배제되어 사적인 가사노동에만 종사하고 있는 한 불가능하며, 또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란 것이 이미 여기서 명백해진다. 여성의 해방은 그들이 사회적 규모의 생산에 광범위하게 참여하고, 그들이 돌보아야 할 가사가 아주 적을 때 비로소 가능해 질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근대적인 대규모 공업에 의해서만 가능해졌다. 가정에서의 남성 지배가 실제로 확립되면서 남성독재는 모권의 전복, 부권의 도입, 대우혼으로부터 일부일처제로의 점차적 이행에 의해 확인되고 영속화되었다. 이것은 낡은 씨족제도에 금이 가도록 만들었다. 개별 가족이 씨족과 대립하는 하나의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다음의 한 발자국은 미개의 높은 단계로, 철검과 철보습과 철도끼를 체험하는 시기로 내딛는다. 농업에서 수공업이 분리되는 제2의 거대한 분업이 발생하였다. 생산의 끊임없는 증가와 이에 따르는 노동생산성의 끊임없는 향상은 인간의 노동력의 중요성을 드높였다. 노예제도가 이제 사회제도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가 되었다. 상품생산이 발생하고 귀금속은 화폐상품으로 정착되기 시작한다. 자유민과 노예 간의 차별과 함께 빈자와 부자의 차별이 나타난다. 경작지는 공동경작에서 완전히 사적소유로 전환되고, 대우혼이 일부일처제로 이행하는 것과 함께 개별 가족이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 나타난다. 군사령관, 평의회, 민회는 씨족사회에서 발전하는 군사적 민주주의 기관을 형성한다. 전쟁이 상시적인 생업으로 바뀌고 최고 군사령관과 그 밑의 지휘관들은 선출직에서 세습직으로, 결국엔 찬탈된 세습권력으로 이행한다. 이리하여 문명의 문턱에 도달하였는데, 문명시기 고유의 결정적 의미를 갖는 제3의 분업을 추가했다. 문명은 생산에도 종사하지 않고 생산물의 교환에만 종사하는 계급인 상인을 낳았다. 상인층과 함께 금속화폐, 즉 주화가 출현하며, 비생산자가 생산자와 생산물을 지배하는 새로운 수단이 나타난다. 화폐를 주고 상품을 구매한 뒤부터 화폐대부가 나타났고, 이와 함께 이자와 고리대금업이 등장했다. 상품, 노예, 화폐의 재부와 함께 토지의 재부가 다시 나타났다. 토지에 대한 개인 소유가 발생하자 토지는 판매되거나 저당 잡혀도 되는 상품이 되었다. 상업의 확대와 화폐 및 고리대금업, 토지 소유 및 저당권과 함께 소수 계급의 수중으로 재부의 집적과 집중이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다. 이제 씨족제도는 종말을 고하고, 국가로 대체되었다. 국가란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헤겔(1770-1831, 독일의 철학자)이 주장하는 것처럼 윤리적 이념의 현실태이성의 향상 및 현실태가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모순에 빠졌으며, 자기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불상용적인 대립으로 분열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나 그 위에 올라서서 사회와는 더욱더 멀어져가는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씨족적 조직과 비교해 볼 때 국가의 첫 번째 특징은 국민을 지역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두 번째 특징은 자기 자신을 무장력으로 조직하는 주민과 더 이상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공권력의 설립이다. 공권력은 국가 내부에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됨에 따라서 강화된다. 이러한 공권력을 유지하려면 시민의 납부금, 즉 조세가 필요하다. 조세가 부족하면 국채를 발행한다. 관리들은 공권력과 조세징수권을 가짐으로써 사회의 기관이면서도 사회 위에 군림한다. 국가는 계급 간의 대립을 억제하기 위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려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된다. 그리하여 피억압계급을 압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따라서 고대 국가는 노예소유자들의 국가였으며, 봉건 국가는 농노와 예농을 압박하기 위한 귀족들의 기관이었으며, 현대의 대의제 국가는 자본이 임금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다.

유산계급은 보통선거권을 통해 직접 지배한다. 피억압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기를 해방시킬 만큼 성숙하지 않는 한 그들 대부분은 현존 사회질서를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또 정치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을 따르면서 그의 극좌익을 형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성숙해지고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함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정당을 조직해 자본가들의 대표가 아니라 자신의 대표를 선출할 것이다.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성숙 정도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보통선거권이라는 온도계가 노동자들의 비등점을 가리킬 바로 그때,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국가는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도 사회는 존재했으며, 국가와 국가권력에 관한 개념이 없었던 사회도 있었다. 계급으로의 사회의 분열과 필연적으로 연결된 경제적 발전의 일정 단계에서 국가는 이 분열로 말미암아 필요한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계급의 존재가 필연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생산의 직접적인 장애가 되는 생산의 발전 단계로 급속히 접근하고 있다. 계급의 소멸은 과거에 계급이 생겨날 때처럼 불가피하다. 계급의 소멸과 함께 국가도 불가피하게 사라질 것이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결합에 기초하여 생산을 새로이 조직하는 사회에서는 전체 국가기구를 그것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즉 고대 박물관으로 보내 물레나 청동도끼와 나란히 진열할 것이다.

문명이란 분업과 이 분업에 발생하는 개인들 간의 교환, 그리고 그 두 과정을 결합시키는 상품생산이 전면적으로 발전해 이전의 사회 전체에 변혁을 일으키는 사회 발전 단계이다. 문명이 시작되는 상품생산 단계는 다음과 같은 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①금속화폐, 그와 함께 화폐자본, 이자 및 고리대금업의 도입 ②생산자들을 중개하는 계급으로서 상인들의 출현 ③토지의 사유 및 저당권의 발생 ④지배적인 생산형태로서의 노예노동의 출현이다. 문명에 상응하여 또 문명과 함께 마침내 자기의 지배를 확립하는 새로운 가족형태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지배, 즉 일부일처제이며, 사회의 경제적 단위로서의 개별 가족이다. 국가는 문명사회를 총괄하는 힘으로서 모든 전형적인 시기에 예외 없이 지배계급의 국가이며, 또 본질적으로 모든 경우에 업압받고 착취당하는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다. 문명에는 온갖 사회적 분업의 기초로서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고착화시키고, 소유주로 하여금 자기가 죽은 후에도 자신의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유언제를 도입했다. 이러한 제도에 입각하여 문명은 씨족사회에서 전혀 해낼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그 추동력은 다름 아니라 탐욕적인 개인의 재부였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가운데 진행된다. 미개인들의 경우에는 권리와 의무 간에 차이가 없었다. 문명은 한 계급에게 거의 권리만을 주고, 한 계급에게 거의 의무만을 부담시킴으로써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권리와 의무 간의 차이와 대립을 알 수 있도록 만든다. 지배계급은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사회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마치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은 전체 사회에도 좋은 것처럼 말한다. 그러므로 문명은 진보하면 할수록 자신이 생산한 부정적 죄악을 점점 더 사랑의 보자기에 싸서 미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기만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에 대한 모건의 판결문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자. … 재부를 둘도 없는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그런 역사 과정의 결말로서 사회의 멸망이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왜냐하면 그런 역사 과정은 자멸할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에서의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의 우애, 권리와 특권의 평등, 교육의 보편화 등은 경험, 이성 및 과학이 항상 지향하는 더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고대 씨족이 지닌 자유, 평등, 우애의 더 고양된 형태의 부활이 될 것이다.

 

 

3. 글을 마치며

 

책의 내용을 너무 길게, 너무 자세하게 요약한 것은, 자본과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현장의 활동가들이 두꺼운 책을 읽기도 쉽지 않고, 읽어도 내용 파악이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간결하게 책을 요약해 보았다. 나 역시 집회와 선전전을 쫓아다니는 상황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의 고생이 이 땅의 많은 활동가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기꺼이 고생을 했다.

이 책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사상에서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포함한다. 하나는 국가론이며 하나는 여성론이다. 국가론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 내용은 최근 노동사회과학연구소가 펴낸 ≪노동사회과학 12호: 자본주의 위기격화와 계급투쟁≫에 김용화 동지의 서평이 실려 있다. 여기에서는 그 서평을 읽어보기를 안내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다음 주제는 내가 애초에 이 서평을 쓰게 된 계기인 페미니즘과 관련한 여성론이다. 이 역시 최근에 발행된 노동전선의 ≪현장과 광장≫ 창간호에 과학적 사회주의 vs 낭만적 페미니즘이란 제목으로 실린 서의윤 동지의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론≫에 대한 서평이 이 주제를 잘 다루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발표한 이후 베벨은 1877년에 발행한 ≪여성과 사회주의≫ 초판을 수정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사상으로서 여성론을 발전시켰다. 그 후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알렉싼드라 꼴론따이 등의 위대한 여성혁명가들에 의해서 노동자계급의 여성운동의 이론과 실천이 발전하였고,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건설된 쏘비에트 사회에서 꼴론따이는 ≪공산주의와 가족≫ 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의 여성문제를 실천적으로 적용시켰다.

그러나 현장의 활동가들에게 현재의 다양한 페미니즘들은 복잡한 색깔과 논리를 펴면서 쉽게 이해되지도, 쉽게 받아들이기도 힘든 것들이 많다. 그 이론적 뿌리들을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올바른 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해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여성억압의 기원의 문제이다. 위의 책의 요약된 인용문들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여성억압은 모계제가 부계제로 전환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사유재산과 상속의 욕구가 결국 모계제를 부계제로 바꾼 것이다. 여성억압의 기원을 역사적이고 사회적 원인이 아니라 생물학적 특징에서 찾는 다양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이다. 다음으로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이 또한 부계사회에 선행하여 모계사회가 존재했음을 이로쿼이 씨족을 통해 엥겔스가 자세히 추적하고 있다. 물론 모건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말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에서 항상 남성이 여성을 지배했다는 류의 페미니즘에 반대한다. 또한 바호펜처럼 모계제가 모권제였으며 인류는 여성지배에서 남성지배로 전환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엥겔스는 지적한다. 모권제란 엄밀한 의미에서 틀린 표현이라고, 왜냐하면 모계 사회는 어느 한 성이 어느 한 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체제가 아니라 남녀가 평등한 원시 공산제 사회였기 때문이다. 1984년 동독의 활동가들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출판 100주년을 기념하여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맑스주의를 왜곡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비판한 ≪가부장권과 사회≫(한국에서는 ≪사적 유물론과 여성해방≫이란 제목으로 1990년에 중원문화에서 출판되었다)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는 엥겔스의 저술에서는 대우혼과 일부일처제 사이에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가족형태였다. 그러나 가부장제는 196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핵심 개념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들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 왔으며, 이것이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므로 남성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부장제의 기원과 토대에 대해 여성과 남성 간 생물학적 차이, 즉 여성의 임신과 출산 가능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유물론적 페미니즘,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도 가부장제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생산양식이라면 가부장제는 재생산양식이고, 전자가 계급억압의 장소라면 후자는 여성억압의 장소라며 이원화시켰다. 값싼 노동력을 통한 이윤의 확대에 대한 탐욕으로 이어지는 자본주의적 착취는 여성 노동자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부장제에 대한 몰역사적, 몰계급적 해석은 현실운동에서 남녀 노동자의 단결을 저해할 수도 있다. 여성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도 엥겔스는 위의 인용문에서 밝히듯이, 사유재산과 계급억압이 사라질 때 완전한 여성해방도 가능하다고 한다. 여성해방의 물적 토대는 여성이 사회적 노동으로 편입되고, 여성에게만 전가되는 가사노동이 사회화되고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여성 노동자계급이 남성 노동자계급과 단결하여 자본주의의 착취를 끝장내고 새로운 세상을 나아가는 것이 여성해방을 위한 발걸음인 것이다. 그런데 남성 노동자계급에게 남아 있고 묻어 있는 성차별주의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성차별의식만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왜곡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묻어 있는 자본주의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노동자계급의 사상으로 무장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사상에서 국가론여성론의 모든 논쟁의 출발점인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새로운 세상을 열어나갈 우리 현장노동자들이 읽고 토론하고 이해하고 발전시키고 현실운동에 적용시켰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나의 고생은 보람이 될 것이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맑스ㆍ엥겔스, ≪칼 맑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사회과학 12호: 자본주의 위기격화와 계급투쟁≫(2019년 11월).

노동전선, ≪현장과 광장≫ 창간호(2019년 11월).

W. 쉬바르츠 외, ≪사적 유물론과 여성해방≫, 중원문화.

 

천연옥 부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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