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신탁 통치 오보 사건―모쓰끄바 3상 회의 결정의 왜곡 보도

 

송송이 | 회원

 

 

들어가며

모쓰끄바 3상 회의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전후 문제의 처리를 위해 쏘련, 미국, 영국의 외교 책임자들이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모쓰끄바에서 회담을 가진 것이다. 이 회담에서 한(조선)반도 문제를 비롯한 7개의 의제에 대해 토의하고 결정서를 발표했는데, 이 중 한(조선)반도에 대한 내용이 국내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 등 국내의 신문사1)에 의해 왜곡되어 보도되면서 한국(조선) 사회에 커다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한(조선)반도에 대한 모쓰끄바 회담 결정서의 주요한 측면이 임시 정부 수립에 관한 것이었으나 ≪동아일보≫는 미ㆍ쏘 양국에 의한 신탁 통치가 이 회담의 주된 결정 내용인 것처럼 보도하여 민중들이 모쓰끄바 회담 결정 사항에 커다란 반감을 갖게 했으며 심지어 신탁 통치를 제안한 국가가 미국이 아닌, 쏘련인 것처럼 반대로 보도하여 이후 반탁(신탁 통치 반대) 운동이 반쏘(反蘇) 운동과 결탁해 나가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역사를 뒤바꾼 오보 중의 하나로 평가되며 지금도 올바른 관점으로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사건인 이유는, 이 사건 자체가 갖는 왜곡과 기만성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역사로 기록될 때 또 한 번 거쳤던 날조와 조작의 역사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 현대사를 다룬 여러 책에서는 모쓰끄바 회담의 주요 결정 사항이 신탁 통치인 것처럼 기술하고, 반탁에 맞서 모쓰끄바 회담의 온전한 실현을 지지했던 진영 쪽의 논리는 찬탁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 프레임은 반탁 대 찬탁이다. 또한 모쓰끄바 결정 사항에 대한 ≪동아일보≫의 보도가 오보라는 것도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한 사실이다.2) 그렇다면 역사 속의 왜곡과 기록의 날조와 조작의 원인에 대해서 더 알아보기로 하자.

 

모쓰끄바 3상 회의 결정 사항

모쓰끄바 3상 회의에서 미국은 신탁 통치야말로 영국, 중국이라는 동맹국과 예속국을 활용하여 한(조선)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기대를 그대로 드러냈다. 미국은 한(조선)반도에 대해 미ㆍ영ㆍ중ㆍ쏘 대표들이 사법ㆍ입법ㆍ행정 등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신탁 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고 기간도 5년으로 하되 10년으로 연장할 수도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쏘련은 한국(조선)의 정당ㆍ사회단체들과 협의하여 임시 정부를 수립한 다음 이를 통해 4개국이 원조한다는 안을 내놓았으며 후견제 실시 여부도 임시 정부와 미쏘 공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죄종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

모쓰끄바 3상 회의는 그 원인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쏘련의 주장을 기본으로 한 결정 사항을 채택했다. 결정의 핵심 내용은 각 계층의 모든 민주 세력이 참여하는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이 임시 정부와의 협의 아래 최고 5년간 4개국에 의한 후견제 실시 여부를 결정하되 후견 기간에는 전적으로 조선인이 임시 정부를 통해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모쓰끄바 3상 결정의 전문을 그대로 싣는다.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부흥시키고 조선이 민주주의 원칙 위에서 발전하게 하며 장시간에 걸친 일본 통치의 악독한 결과를 쾌속히 청산할 제 조건을 창조할 목적으로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가 창건되는 데 임시 정부는 조선의 산업, 운수, 농촌 경제 및 조선 인민의 민족 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모든 필요한 방책을 강구할 것이다.

 

2. 조선 임시 정부 조직에 협력하여 이에 적응할 제 방책을 예비 작성하기 위한 남조선 미군 사령부 대표들과 북조선 쏘련군 사령부 대표들로써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위원회는 자기의 제안을 작성할 때에 조선의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와 반드시 협의할 것이다. 위원회가 작성한 건의문은 공동위원회에 대표로 되어 있는 양국 정부의 최종적 결정이 있기 전에 미ㆍ영ㆍ중ㆍ쏘 제국(諸國) 정부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3. 공동위원회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참가시키고 조선 민주주의 제 단체를 인입하여 조선 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보와 민주주의적 자치 발전과 조선 독립의 확립을 원조 협력(후견)하는 제 방책도 작성할 것이다. 공동위원회의 제안은 조선 임시 정부와 협의 후 5년 이내의 기한으로 하는 조선에 대한 4개국 후견의 협정을 작성하기 위하여 미ㆍ영ㆍ중ㆍ쏘 제국 정부의 공동 심의를 받아야 한다.

 

4. 남북조선과 관련된 긴급한 제 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그리고 남조선 미군 사령부와 북조선 쏘련군 사령부의 행정 및 경제 부문에 있어서의 일상적 조정을 확립하는 제 방책을 작성하기 위하여 2주일 이내에 조선에 주둔하는 미ㆍ쏘 양국 사령부 대표로써 회의를 소집할 것이다.

 

모쓰끄바 3상 결정은 분단 상태를 해소하고 통일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었다. 그것은 모쓰끄바 3상 결정이 임시 정부를 통해 조선 민중의 주권 행사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어떠한 형태의 제국주의적 침탈도 허용하지 않음은 물론 특정 강대국의 독점적 지배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둔다.

 

왜곡 보도된 경위

모쓰끄바 3상 회의는 1945년 12월 16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되었고, 27일 3상 회의 결정안이 확정되었으며, 모쓰끄바 시간으로 28일 아침 6시, 3상 회의의 결정서가 발표되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3상 회의의 결정서가 발표되기도 전인 27일에 결정서의 내용을 악의적으로 왜곡하여 보도했다. 그 내용은 쏘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쏘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이라는 헤드라인과 세부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출처로 워싱턴의 통신사를 들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사실은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미군을 상대로 발행하던 ≪태평양 성조기≫라는 미국 신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고, 그 필자 또한 악의적인 날조 보도로 유명한 우익 기자였다.

 

조작의 배후

미국은 모쓰끄바 3상 결정이 본래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정되자 극히 곤란했다. 왜냐하면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민중에 의한 통치권 행사는 근본적으로 대립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쓰끄바 3상 결정이 미국 내에 전달되자 냉전주의자들은 즉각 거부 반응을 보였고, 루즈벨트 이후 미국 정부 내에서 쏘련과의 전면적 대결을 추구하는 냉전주의자들이 정책 결정의 주도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하는 정세 속에서 미국 내 냉전주의자들과 국내 친일파들은 모쓰끄바 3상 결정의 원만한 실현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즉 모쓰끄바 3상 회담에 미국 대표로 참여한 번즈 국무장관을 쏘련과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면서 모쓰끄바 3상 결정을 남한으로 전하는 과정에 심각한 은폐와 왜곡을 자행한 것이다. 미군정에 우호적인 남한의 언론과 특히 한민당의 기관지나 다름없었던 ≪동아일보≫는 연일 날조된 소식만을 전했다. 특히 30일 자에서는 탁치 반대! 독립 전취!, 임정 지휘로 국민총동원 위원회 설치, 최후의 1인까지 혈투하자, 3천만아 살았느냐? 독립전선에 생혈을 뿌리자!면서 반탁 투쟁을 부추겼다.

 

친일파들의 신분 세탁과 반쏘 운동의 전개

이러한 정세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일제와 결탁했던 과거를 지우기 위해 미군정 편으로 돌아선 김성수 등 일단의 친일파들은 있지도 않은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는 허울을 쓰고 실질적으로는 모쓰끄바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작해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의 운동을 애국적인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 모든 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와 38선의 폐기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나섰다.

최초의 순간에 사건의 진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던 조선 민중은 조속한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이승만 일파가 주도하는 시위에 휩쓸려 들어갔다. 이렇듯 사태가 자신의 의도대로 진전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군정 당국과 친일파들은 이른바 반탁 운동을 재빨리 반쏘 운동과 결합시켜 나갔다. 이제 반탁은 곧 반쏘련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듯했다. 그리고 모쓰끄바 협정을 지지하는 것은 조국을 쏘련에 팔아먹으려는 행위로 매도되었으며 이와 함께 모쓰끄바 협정을 지지하는 세력에 대한 불법적 탄압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민주 세력의 운동과 반민주 세력의 행보

한편 남북의 민주 진영은 오도된 소식이 전달된 지 얼마 후 모쓰끄바 3상 회의 진행의 전모와 협정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자주 국가 수립을 원하던 인사들과 자각된 민중은 모쓰끄바 협정이 외세의 지배와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라고 평가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지지하기로 함과 동시에 그 정당성을 밝히기 위한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이미 1946년 1월 23일경에서는 서울에서만도 200여 단체, 30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모쓰끄바 협정의 즉각적인 실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모쓰끄바 협정을 지지하는 대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꾸준히 확대되어 나갔다. 노동자ㆍ농민 대중은 말할 것도 없고 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도 협정의 핵심인 임시 정부 수립을 적극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1947년 하반기 이후 미국과 이승만 일파가 모쓰끄바 협정의 실현을 방해하고 나선 이유가 단독 정부 수립에 있음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모쓰끄바 협정이 갖는 정당성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한편 1946년 1월 26일경에 미쏘 공동위원회 쏘련 측 대표인 쉬띄꼬프 중장이 모쓰끄바 회담 경과의 전말을 공개하며 이 사태는 새로운 계기를 맞게 되었다. 쏘련 측의 기자 회견은 미국 정부의 위신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주었고 반탁 운동의 기만성이 여지없이 폭로되며 그 대열 또한 급속히 허물어져 갔다. 반탁 운동은 1947년 3월 1일 남산 집회를 마지막으로 그 의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이후부터는 모쓰끄바 협정의 실현을 촉구하는 민중 운동에 대한 반동적 테러 운동으로 전락했다.

 

예견된 결말, 미쏘 공위 결렬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에서 모쓰끄바 협정의 실현을 논의하기 위한 미쏘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마자 미쏘 양측은 심각한 이견을 노출시켰다. 그 주제는 임시 정부를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 문제였는데, 쏘련 측 대표는 반탁 운동에 참여했던 단체와 개인들을 이 협의 대상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들어 이를 반박했으며 결국 공동위원회 결렬로 나아갔다.

미국은 시종일관 모쓰끄바 협정의 원만한 실현을 위한 통일 정부 수립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미국이 쏘련의 협조를 얻어 한(조선)반도 내에 자국에 유리한 통일 정부를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일찌감치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3) 또한 이러한 미군정의 지원 아래 나온 것이다.

 

평가

모쓰끄바 3상 회의가 왜곡 보도되어 반탁 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모쓰끄바 결정 사항이 사실대로 보도되었다면 비난의 화살을 맞았을 미군정이 오히려 반쏘 운동을 조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사건이며, 이와 아울러 과거의 친일 경력으로 열세를 벗어나지 못하던 친일파 세력들이 반탁 운동으로 자신의 대중적 지지 기반을 만드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또한 처음에는 신탁 통치 반대를 지지하다가 모쓰끄바 협정 내용을 완전히 파악한 후 협정 내용의 실현을 위해 운동을 펼친 조선 공산당 등 좌익에 대한 평가는 왜곡되어 있다. 이들이 이후 모쓰끄바 협정의 원만한 실현을 위한 운동을 펼친 것을 찬탁 운동이라고 왜곡하며 이들을 매국노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었고, 이것은 그 당시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왜곡하여 기록함으로써 오늘날에 오히려 공산당과 좌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남한 사회가 둘로 나뉘어 일대 격돌했다거나, 혹은 이 사건으로 인해 분단까지 이르렀다는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이미 1946년 1월 23일경만 해도 모쓰끄바 협정의 즉각적인 실현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일어났고 이에 대해 3상 결정을 중심으로 소수의 반민주주의적 경향과 절대 다수의 민주 세력이 분립하고 있음이 지적되었다4)는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 진다.

결과적으로 신탁 통치 오보 사건이 미군정과 이승만 일파 등 친일파 들이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 계기는 되었을 수 있으나, 이후에 미군정과 이승만 일파의 행보는 남한에서의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것이었고 분단의 책임은 이들에게 있다고 보여 진다. 또한 미군정과 이승만 일파는 일관적으로 남한 내 민중들의 삶을 핍박했으며, 10월 항쟁 및 4ㆍ3 제주 항쟁, 여수ㆍ순천 봉기 이후 유격대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남한 민중들의 끈질긴 항쟁을 통해 한국(조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승만 일파는 남한 내에서 그 존립을 위협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탁 통치 오보 사건을 남한 내 분열과 분단의 원인으로까지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나오며

―≪동아일보≫의 날조, 그 필연성

≪동아일보≫가 미군정과 친일파 세력을 배후에 두고 모쓰끄바 3상 회의의 결과에 대해 왜곡 보도한 것은 이미 확인한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일제 강점기 때 학도병 권유문을 올리고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광고도 내는 등, 친일 어용 기관지로 전락했던 ≪동아일보≫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함께 3대 어용 언론지로 그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며 탄생하여 권력과 언론의 유착을 비판하는 등의 행보를 이어 왔던 ≪한겨레≫라고 다를까? ≪한겨례≫는 국민의 정부를 자임했던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정부의 노동자 탄압 정책을 옹호하며 노동자의 투쟁을 가로막으려 했다. 결국은 각 정부의 성향에 맞게 언론사의 성격만 바뀌었을 뿐이지 언론이 지배 계급이 소유한 정신적 생산 수단 중의 하나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45년 당시, 미군정과 남한 사회 지배 계급이 가장 두려웠던 것은 쏘련과 공산주의 사상이었을 것이다. 이것들과 민중을 멀어지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정신적 생산 수단을 활용한 이데올로기 공세였을 것이고 그 수단으로 왜곡 보도와 분열의 획책이 쓰였다.

지금도 지배 계급은 가장 두려운 것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언론, 대중문화, 교육 내용 등을 활용하고 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확산시키기 위한 일 또한 꾸준히 해 나가야 하겠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2018.

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2007.

정용욱, 신탁통치안 왜곡의 출발은 날조 전문 미국 기자, ≪한겨례≫, 2019. 6. 8.

 

 


 

1) 3상 회의 결정이 국내로 유입되었을 때 제목만 조금씩 차이가 났지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중앙신문≫, ≪신조선보≫ 등 대부분의 신문들이 왜곡된 내용을 1면 상단 헤드라인, 또는 중단에 그대로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가 한민당의 기관지나 나름 없었고 이 내용을 신문 전면을 모두 할애하여 보도하는 등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신탁 통치에 대한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 사건’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아래부터는 편의상 “≪동아일보≫ 등 국내의 신문사들”을 ≪동아일보≫라 칭하겠다.

 

2) 2010년에 개정된 금성출판사 한국 근현대사 고등학교 교과서에 ≪동아일보≫의 보도가 오보라는 것이 처음 등장했고, 2015년 개정 교육 과정 교과서에서도 천재교육, 금성출판사의 교과서는 오보라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지만, 미래엔 교과서는 여전히 오보 내용만을 해설하고 그것이 오보였다는 것은 기술하지 않았다.

 

3) “우리는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쪽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쏘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pp.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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