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비판과 맑스주의 이데올로기의 재건을 위하여

 

신재길 │ 회원

 

 

[목차]

1. 들어가며

2.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타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3.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문제점

   1)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왜곡

   2) 화폐 물신성 개념에 대한 왜곡

   3) 지젝이 말하는 ‘욕망의 실재’는 자본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4. 인간본질과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극복

   1)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

   2) 인간본질과 인간실존간의 괴리와 그 극복방향

 

 

 

1. 들어가며

 

쏘련이 붕괴된 이후 제국주의 진영에서는 ‘역사의 종말’이니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이니 하며 현시대를 규정하려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역사의 종말은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희망을 말한 것이고,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은 사회주의 이념의 좌절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자본가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2008년 대공황이 자본주의를 엄습해 왔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에 진보진영은 고무되어 성급하게 자본주의 붕괴 날짜를 점치는 이들도 등장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가 도래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동자ㆍ민중 중심의 대안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가야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이전의 사회구성체에서의 이행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의 이행은 자본제적 생산관계가 봉건제 내에서 발생하고 이에 기반하여 부르주아 정치혁명이 수행되어 자본주의 사회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먼저 정치권력을 노동자ㆍ민중이 장악하고 이 정권의 힘으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건설해 간다. 이런 이행과정의 특징은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에 우선한다는 점과 목적의식적 계획이 자생적 과정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을 떠받치는 것이 노동자ㆍ민중의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경제적 상황보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사회주의 변혁에 있어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2008년 대공황 이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자신의 허구성을 스스로 폭로하며 그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ㆍ민중진영은 아직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재건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소위 진보진영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 힘이 노동자ㆍ민중진영에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그 중 남한에서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가 소위 ‘세계적’ 학자인 지젝이다. 본고에서는 지젝의 주요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중심으로 그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론의 재건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 나타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쏘련 붕괴 직전에 쓰여진 책이라 냉전 종식의 시대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기본적 틀이 이 책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볼 때, 그리고 이 책에서 나타난 관점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책을 중심으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을 검토하기로 하자.

지젝에 따르면 우리는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지배되는 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일종의 기본적이고 구조적인 순진함을 함축한다. 자신의 실질적인 조건들에 대한 오인, 그리고 소위 사회적인 현실과 우리의 왜곡된 표상 사이의 거리와 차이, 그것에 대한 우리의 허위의식 등등이 그것이다.1) (강조는 지젝.)

 

지젝은 이렇게 고전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허위의식으로 정의하고 이 개념이 오늘날 적용 가능한가 자문하고는 부정적으로 대답한다. 그리고 새로운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제기한다.

 

우리의 문제는 이 순진한 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개념이 오늘날 세계에도 여전히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2)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냉소적인 이성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것은 계몽된 허위의식의 역설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보편성 뒤에 숨겨져 있는 특정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하진 않는다.3)

 

따라서 그런 냉소적인 이성 앞에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이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4)

 

결국 냉소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상황에서 고전적 이데올로기 이론은 힘을 쓸 수 없기에 새로운 이데올로기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지평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의 자리는 어디인가? ‘지식’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아니면 현실 속에서 ‘행동’인가? 언뜻 보기에 대답은 자명한 듯하다. 즉 이데올로기적인 환영은 ‘지식’에 위치해 있는 듯하다.5)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지평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고전적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비판적 의문을 제기하고 고전적 이데올로기론의 대표로 맑스주의를 무대에 세운다.

 

우리는 ‘물화(物化)’에 대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모티브를 만나게 된다. 즉 우리는 사물의 이면에서 사물들 간의 관계 이면에서 사회적인 관계, 인간 주체들 간의 관계를 탐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공식을 그런 식으로 읽는다면 개인들이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알고 있는 수준에서뿐만이 아니라, 이미 사회현실 자체 속에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의 수준에서도 작동하고 있는 왜곡, 환영, 오류 등을 그대로 남겨두게 된다. 개인들이 돈을 사용할 때, 그들은 거기에 마술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6)

냉소주의적 개인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행한다는 것이고, 맑스는 이런 냉소주의적 인간을 보지 못했다는 점을 비판한다.

여기서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 연상된다. 저항군을 배신하고 감각적 즐거움에 만족해하는 이전의 저항군이었던 사람이 고급식당에서 맛있어 보이는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 사람 앞에 옛 저항군 동료가 다가와서 이 모든 것은 허구임을 일깨워 준다. 이에 대해서 그 배신자는 자기도 다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 스테이크가 단지 인공단백질에 불과하다는 것, 실제로는 아무런 맛도 없다는 것, 자신이 맛있게 느끼는 것은 신경회로의 조작에 불과하다는 것, 이 모두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이것을 선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데올로기 상황을 지젝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그들은 이론상으로는 아니지만 실천적으로는 물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모르는’ 것, 그들이 오인하는 것은 사회활동과 현실(상품교환행위) 속에서 자신들이 물신주의적인 환영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다는 것이다.7)

 

그리고 “환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8) 묻고 답한다.

 

환영은 지식의 측면에 있는 게 아니라 이미 현실 자체에,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것의 측면에 있다. … 그들은 실제로 사물들의 실상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마치 그것을 몰랐다는 듯이 행동한다.9)

 

결국 지젝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지평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행위의 차원임을 말한다. 우리는 국가권력이 지배계급의 도구임을 잘 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배자를 선출하기 위해 마치 선거가 주권자의 권리인 것처럼 투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자본가후보에게 그가 반노동자적 후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 후보의 본질이 반노동자적이라고 폭로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노동자 후보에 표를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눈을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통해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스펙터클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인 꿈을 깨뜨리려 하지만 이는 허사이다.10)

 

그렇다면 이런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젝의 대응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인 꿈의 위력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편은 꿈속에서 자신을 예고하는 욕망의 실재와 대면하는 것이다.11)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행위의 차원이므로 이데올로기는 모두 현실적 이데올로기다. 현실적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가 허위임을 알고 있더라도 그럼에도 그에 따라 행위하도록 작동하는 힘이다. 따라서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 문제는 현실이라는 진짜와 이데올로기라는 허위의식의 대립구도가 될 수 없다. 지젝은 ‘욕망의 실재’와 이데올로기적 행위를 대립시킨다. 지젝에 의하면 ‘욕망의 실재’는 현실적 행위구조에 포섭되지 않은 실재의 부분이라고 한다. 이런 ‘욕망의 실재’의 예로 지젝은 계급투쟁을 든다.

 

 

3.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의 문제점

 

1)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왜곡

지젝은 고전적 이데올로기 개념을 ≪자본론≫에 나오는 맑스의 유명한 말인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를 인용하면서 ‘허위의식’이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맑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단순히 허위의식이라고 정의 내리는 것은 단순화의 잘못을 넘어 왜곡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의 맑스주의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해서 복잡한 논거를 제시할 필요도 없이 사전적 정의와 대비해 봄으로써 그 왜곡의 심각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특정한 계급이익을 표현하며 또 그에 상응하는 행동규범, 입장, 가치평가를 포괄하는 사회적(정치적, 경제적, 법적, 교육적, 예술적, 도덕적, 철학적 등) 견해의 체계12)

 

이러한 맑스주의적 이데올로기 개념에는 소위 ‘허위의식’이라는 요소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 다만 이데올로기가 계급의 이익을 표현하는 사상의식이므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노동자ㆍ민중 이데올로기로 나뉘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그 계급적 한계로 허위의식에 머물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지의 착취적 성격을 은폐하고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하기에 현실의 불평등과 자본주의의 착취구조를 옹호, 은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다. 그러나 노동자ㆍ민중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ㆍ민중의 이익을 표현하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ㆍ민중의 이데올로기는 진리인 것이다.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바라볼 때 계급적 관점에 서 있지 못하므로 이데올로기 일반을 허위의식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이익을 반영하기에 허위적 이데올로기와 진실된 이데올로기로 나뉜다. 이데올로기는 계급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계급적 입장에 서지 않고 이데올로기 일반을 허위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노동자ㆍ민중의 이데올로기도 허위의식이다’라는 허위의식을 유포하기 위한 수단이다.

다음으로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지식의 차원에 한정한다. 그리고는 행위와 대립시킨다. 이는 또 다른 왜곡이다. 맑스주의에서 이데올로기는 ‘행동규범’의 체계이다. 행동규범은 사람의 행동을 규제하는 역할을 한다. 행동규범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의 행동의 방향과 목적을 규정하며 행동과정을 조절, 통제한다. 따라서 사람은 이데올로기적인 신념과 의지의 정도에 따라 행동에 있어 적극성과 능동성이 달라진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행동규범인 것이다. 단순히 지식의 문제라면 알고도 앎과 반대로 행할 수도 있고, 지식이 현실의 조건과 괴리가 발생해 아는 대로 행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의지가 없거나 능력의 부족으로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행위규범은 다르다. 행위규범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신념이나 의지, 도덕이나 관습의 차원이다. 즉 행동규범은 사유, 의지, 감정 등이 일정한 이상, 목적 등을 이루기 위해 마땅히 따라야 할 법칙과 원리이다. 모든 사람은 사회적, 계급적, 또는 개인적 행동규범을 가지고 있다. 사람인 이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행동규범 없이 행동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젝처럼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지식의 차원으로 협소화시키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무지를 넘어 노동자ㆍ민중으로부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분리시키려는 의도에 복무하게 된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가치평가의 체계이며,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행동규범은 가치평가에 근거하고 있으며 사물의 가치나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치평가는 평가하는 사람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에 근거한다. 따라서 사람이 행하는 행동이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가치관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그 사람 자체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리는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 사회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과 그 결과만 가지고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일 수 있다.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한 행위가 우연하게 사회적으로 기여한 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런 사람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어떤 행동의 동기나 의도, 목적 등도 함께 고려하여 평가할 때 그 행동의 의미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의 행동의 동기, 의도, 목적 등을 규정하는 것이 가치관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가치를 평가할 때 그 행동과 더불어 그 사람의 이데올로기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지젝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철저히 부르주아지의 입장에 서 있다. 다음으로 지젝이 맑스의 물신성 개념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자.

 

2) 화폐 물신성 개념에 대한 왜곡

지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위의식에 대한 물적 기반으로 화폐 물신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물신성 개념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상품물신의 본질적인 특징은 흔히 말하는 듯이 인간을 사물로 대치하는 데(‘인간들 간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구조화된 네트워크와 그 요소들 중의 하나가 이루고 있는 관계에 대한 어떤 오인에 있다. 진정으로 구조적인 효과라고 할 수 있는 것, 요소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의 네트워크의 효과라 할 수 있는 것이 요소들 중의 하나의 직접적인 속성으로 나타난다.13)

 

A는 마치 B에게는 A의 등가물이 되는 것이 A의 ‘반영적인 규정’이 아니라는 듯이 B와 관계 맺는다. 다시 말해 마치 B가 본질적으로 이미 A의 등가물이 된 것처럼 관계 맺는 것이다.14)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지젝은 화폐 물신성을 모든 상품들과 특수한 상품인 화폐와의 관계로 왜소화시킨다. 그리고 화폐가 물신성을 갖는 것은 상품관계의 ‘네트위크 효과’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프로이트의 꿈분석과 동일시한다.

 

그 해답은 마르크스의 해석절차와 프로이트의 해석절차 사이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품분석과 꿈분석 사이에 근본적인 상동관계가 있다는 데 있다. 두 경우 모두 요점은 형식 뒤에 숨겨져 있다고 추정되는 ‘내용’에 대한 물신적인 현혹을 피하는 것이다. 분석을 통해 밝혀져야 하는 ‘비밀’은 형식(상품의 형식, 꿈의 형식)이 숨기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그 형식 자체의 ‘비밀’이다.15) (강조는 지젝.)

 

진짜 문제는 상품의 ‘숨겨진 중핵(그것이 생산되면서 소비되는 노동의 양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왜 노동이 상품가치의 형식을 띠고 있는지를, 왜 그것은 오로지 생산물의 상품형식으로만 자신의 사회적인 특성을 단언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16)

 

지젝에 의하면 상품형식의 효과 때문에 노동은 상품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상품형식의 효과를 ‘가정의 성격’이라고 한다.

 

실질적인 교환행위에 함축되어 있는 ‘마치∼인 듯이’라는 가정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교환행위가 일어나는 동안 개인들은 마치 산출과 부패의 자연적인 순환으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의식’의 수준에선 그들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17) (강조는 지젝.)

 

상품형식의 네트워크 효과가 ‘잘 알고 있지만 마치 모르는 듯이’ 행위하는 냉소적 주체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를 지젝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고 한다. 지젝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현실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느끼거나 생각하는 상념이 아니다. 지젝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주체가 자신들의 욕망을 구조화하고 조직하는 방식이다. 바로 상품형식이 주체들이 자신의 욕망을 구조화하고 조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형식 이면의 비밀이 아닌 형식 그 자체의 비밀’을 마치 맑스가 고전파경제학자들을 비판하면서 주장한 듯이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맑스는 지젝류의 ‘속류’학자들을 이미 ≪자본론≫에서 비판하였다. 맑스가 지젝을 어떻게 비판하는지 보자.

 

고전파경제학에 반대해 중상주의가 부활했는데 (가닐 등), 이들은 가치에서 오직 사회적 형태만을, 또는 오히려 사회적 형태의 실체 없는 외관만을 보고 있다.18) (강조는 인용자.)

 

지젝이야 말로 ‘형식 그 자체’를 강조하면서 ‘실체 없는 외관’의 효과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젝이 ≪자본론≫을 인용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발생하는 노동생산물의 수수께끼와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오는가? 분명히 이 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19)

 

여기에서 지젝은 ‘형태 자체에서 오는 것’을 강조하면서 중상주의자들이 범한 오류를 맑스의 이름으로 반복하고 있다. 지젝은 상품의 신비한 성격이 상품의 사용가치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상품형태 그 자체에서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는 지젝이 인용한 문장에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왜냐하면, 각종 인간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로서 동등한 객관성을 가진다는 구체적 형태를 취하며, 인간노동력의 지출을 그 계속시간에 의해 측정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이라는 형태를 취하며 끝으로, 생산자들 사이의 관계[그 속에서 그들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증명된다]는 노동생산물 사이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20)

 

결국 상품형태 그 자체를 맑스가 강조한 것은 ‘관계들의 네트워크 효과’ 때문이 아니라 상품형태가 보이지 않는 추상노동의 물적 대상화이며 그것의 사회적 외화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맑스는 고전파경제학자들이 내용만 보고 그 외화 형태를 간과한 것과 중상주의자들이 그 형식만 보고 본질과 내용을 보지 못한 것을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젝은 중상주의자들이 고전파경제학자들을 비판한 것을 가지고 마치 맑스가 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더욱이 맑스는 중상주의자들을 고전파경제학자들에 대비하여 속류경제학자들이라고 경멸적으로 부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젝은 이 경멸적인 속류경제학의 견해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3) 지젝이 말하는 ‘욕망의 실재’는 자본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적 꿈의 위력을 깨기 위한 방편으로 ‘욕망의 실재’와 대면할 것을 제안한다. ‘욕망의 실재’를 지젝은 ‘동일한 외상적인 중핵’, ‘상징화를 비켜가는 실재의 잔여물’, ‘잉여대상’, ‘잉여향락’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지젝은 잉여가치와 등치시킨다.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가동시키는 ‘원인’)와 욕망의 대상-원인 잉여향락사이의 상동관계이다.21)

 

이 잉여향락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무능력을 힘의 근원으로 변형’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젝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이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영구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산조건들을 발달시켜 영구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는 바로 그것의 내재적인 모순 덕분이다.22)

 

잉여향락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설이다.23)

 

지젝에게 있어 욕망은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서 있다고 한다. 생물학적 욕구는 욕구가 채워지면 만족하게 되고 욕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결여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만족을 모른다. 이 점에서 자본과 닮아 있다.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역사적으로 제한되고, 계급적으로는 자본가에 한정된 특수한 욕망이다. 잉여가치가 자본의 욕망 대상이자 욕망의 원인인 점에서 ‘잉여향락’과 상동관계이다.

지젝이 말하는 ‘욕망의 실재’로서의 계급투쟁은 결국은 잉여가치를 ‘대상-원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잉여가치를 ‘대상-원인’으로 하는 욕망이란 자본의 욕망에 다름 아니다.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깨라는 말은 결국은 부르주아가 되어 잉여가치를 욕망하라는 말이다. 복잡한 논리를 따라온 지젝의 이데올로기론은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속물근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지젝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행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에 등치시키는 것은 지젝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기인한다. 지젝이 기초하고 있는 인간관은 정신분석학적 인간관이다. 물론 지젝은 프로이트식의 생물학주의에 반대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무의식적 욕망은 사회적 욕망이지 생물학적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회적 욕망이란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자본의 욕망이지 인간 본질로부터 나오는 욕구나 욕망이 아니다. 욕망과 욕망의 억압이라는 정신분석학적 분석틀은 잉여가치의 추구와 그 좌절(공황)이라는 자본의 운동과정이 개인 심리에 반영된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런 정신분석학적 틀을 기본으로 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새로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뿐이다. 현실적으로도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붕괴 이후 지젝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 이제 맑스주의 입장에서 지젝이 제기한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검토해 보자.

 

 

4. 인간본질과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극복

 

1)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

맑스주의적 이데올로기비판은 인간의 본질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데올로기 비판의 중심적 내용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에 반영되고 다시 이 사회적 의식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인간의 실천행동에 작용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즉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세계와 자신을 자기의식에 반영하고 이 자기의식이 어떻게 다시 대상화되고 외화되는가 하는 문제가 이데올로기 문제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에 따라 그 사회적 의식의 대상화와 외화의 방향이 결정된다.

만약 자본의 욕망이 인간본질의 보편적인 성질이라면 인간은 자본주의에서 행복을 느끼며 자본주의의 유지에 힘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이 보편적인 인간본질에 반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불행하게 되고 인간본질에 맞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할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인간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적 본질은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In seiner Wirklichkeit)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24)

 

위 인용은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6번에서 말한 유명한 인간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회적’이라는 말의 해석에 여러 왜곡이 있다. 이를 뮈슬리프첸코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부르조아적 및 수정주의적인 문헌에서는 마르크스의 정식이 난폭하게 비뚤어져 있다. 왜곡은 세 가지 기본적 경향으로 나타난다. 일부는 마르크스가 인간의 본질을 현존의 사회적 제 관계, 주어진 사회체제와 동일시한 것으로 이 명제를 해석하고 있다. 다른 것은 마르크스가 인간의 이해를 단지 생산 제관계만의 총체로 환원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제3의 것은 마르크스의 테제가 인간의 능동적, 활동적 본질을 나타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25)

 

이러한 왜곡은 ‘현실적으로(In seiner Wirklichkeit)’라는 말의 잘못된 해석에 기인한다고 뮈슬리프첸코는 지적한다.

 

종종 이 문구는 ‘실제로는’으로, 혹은 객체(사회구조)의, 고정화된, 비능동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이해는 인간의 본질을 너무나도 직선적으로, 또한 무매개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제관계와 동일시하게 되었다.26)

독일어에서 wirklich라는 형용사는 게르만 고유어로 크게 보아 ‘①현실의, 실제의 ②본래적인, 참된, 진실한’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다. 따라서 ‘현실적으로(In seiner Wirklichkeit)’이란 말은 주어진 것으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참으로’의 의미를 함축한다. 또 Wirklichkeit(현실성)은 헤겔 철학에서 ‘본질과 실존의 통일 또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통일’이라고 정의된다. 즉 현실성은 내적인 것으로서의 본질이 외적인 것으로서 나타난 것이며, 본질의 발현 그 자체이다. 현실성은 본질과 현상의 통일과정이다. 현실성을 이렇게 해석한다면 인간의 본질을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제 관계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 경제적 제 관계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의 현실적 외화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란 인간의 어떤 내적인 본질이 외적인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현존하는 경제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

뮈슬리프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현실성에 있어서’라는 문구는 정태가 아니라 동태를 의미하고 있다. 즉 인간의 본질적, 현실적 여러 힘이 객관적 실재성으로 전화하는 과정, 그들 여러 힘이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일정한 사회적 관계, 제도, 문화 등이 인간적 본질의 형성에 대하여 작용하는 역과정, 인간이 스스로의 본질적 힘을 자기 것으로 획득하는 과정도 의미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이 변증법은 그의 노동활동의 과정에서 비로소 실현된다.27)

 

또한 현실성개념은 과정을 내포하기에 역사성을 갖는다. 현실성은 가능성이 일정한 조건하에서 필연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일정한 조건’이란 역사적 조건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성은 역사적 과정을 포함하게 된다.

‘모든 사회적 제관계’의 총체로서 인간본질의 형성은, 이 총체가 현존하고 있는 여러 관계만이 아니라 인류와 인류문화의 역사경험 중 일정한 총체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유적, 본질적 힘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끌어내는 인간의 능력은 인류의 총활동에 의해서만, 역사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28)

 

그리고 ‘총체(ensemble)’라는 말의 해석도 문제가 된다. 이 말은 불어에서 온 단어로 우리가 흔히 ‘앙상블’이라고 알고 있는 말이다. 남한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말을 오케스트라에 비견하여 개인성, 개별성, 단독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왜곡한다. 즉 개별 연주자들의 연주가 완전해야 전체연주도 완전할 수 있다는 논리로 개인을 강조한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연합’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간의 본질을 개인의 속성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나 원래 ensemble은 한 벌의 조화로운 옷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말이지 ‘개별자’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옷이라도 어떻게 코디하느냐에 따라 그 개성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렇듯 개별요소의 특징을 넘어서는 전체적인 효과를 이르는 말이 앙상블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도 개개인의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전체적 효과로서의 성질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인간의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라는 말은 인간의 어떤 내적 속성이 사회적 관계들의 효과로 현실화되는 역사적 과정을 의미하게 된다. 즉 인간의 사회적 본질의 외화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의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총체는 인간의 사회적 본질이 성장함에 따라 인간의 사회적 본질의 발전을 억압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새로운 사회적 관계의 총체로 이행하게 된다. 이 과정의 경제적 표현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회적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사회적 본질은 개인의 속성이나 현존한 경제관계로 환원될 수 없고 인류의 기원에서 그 시원을 찾아야 한다.

 

지구상에서 인간의 출현은 인류의 기원과 사회의 기원이 합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생물의 독특한 종의 출현을 의미한다.29)

 

인간이라는 종(種)은 주위환경에 대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존원리를 실현할 뿐 아니라 진보 그 자체의 본질을 변화시켰다. … 인간으로 진화한다는 생물학적인 법칙이나 수단도 지금에서는 이미 응용될 수 없게 되었다. 사회적 발전이 시작되었다.30)

 

이상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인류의 기원과 사회의 기원이 동일하다는 점과 인류의 출현 즉 사회의 출현은 ‘완전히 새로운 생존원리’의 실현이라는 점이다. ‘완전히 새로운 생존원리’는 생물학적 법칙을 넘어서는 ‘사회적 생존원리’를 말한다. 이 ‘사회적 생존원리’가 인간의 사회적 본질이다. 맑스는 ‘사회적인 것’을 “생산이 다수 개인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고 하였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출현하는 과정에서 생산 즉 노동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생산이란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독립을 의미한다. 루카치는 이를 무구속성(Unbefangenheit)이라고 하였다. 무구속성은 활동에 제약이 없다는 뜻이다. 즉 자유를 말한다. 생산으로 인간은 자연의 제약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을 통제, 지배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연과 분리된 사회라는 새로운 생존원리를 생산이라는 노동을 통해 획득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의 사회적 본질인 자연에 대한 독립성(자유)과 주동성(주도력)을 획득한다.

또 생산과정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협업은 인간 상호 간의 교통을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언어가 생겨나게 된다. 언어의 탄생은 곧 의식의 탄생을 말한다. 이로서 인간은 의식성이라는 사회적 속성을 얻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의식의 획득은 생물학적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적 창발의 결과라는 점이다. 즉 인간이 의식을 획득하게 된 것은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생물학적 진화라는 생존원리를 극복하고 사회적인 생존원리를 실현한 결과인 것이다. 이 점은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의식은 처음부터 이미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의식적인 생산과정은 그 자체가 창조적 과정이다. 따라서 의식성과 더불어 창조적 성격이 인간의 사회적 생존원리로 출현하게 된다.

즉 인간의 ‘완전히 새로운 생존원리’는 인간의 사회적 존재원리이고 사회적 본질이다. 그리고 인간의 존재원리인 사회적 본질은 독립성(자유)과 주동성(주도력) 그리고 의식성과 창조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완전히 새로운 생존원리’의 성장, 발전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의 괴리와 그 극복방향

인간본질이 위에서 본 사회적 생존원리라고 한다면 인간실존은 사회, 역사적 상황 속에 한계 지워진 인간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인간은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은 모순적 통일이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본질과 실존의 모순과 괴리를 지양해 온 과정이다. 인간본질은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자연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연에 대해 주동적인 사회적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 본질로 인해 사람은 목적의식적이고 창조적 삶을 살아갈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의 인간실존은 자연과 사회로부터 새로운 구속과 제약을 받게 된다. 이에 인간은 새로운 구속과 제약을 극복하며 자신의 본질을 발전, 실현시켜 나아간다. 인간의 본질과 실존의 대립과 통일의 과정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때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의 괴리와 모순이 허구적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토대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본질과 인간실존의 괴리는 노동의 소외와 화폐물신성으로 나타난다.

소외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생산물의 사적 소유의 대립의 결과로 인해 인간노동의 생산물이 자립적으로 인간에게서 독립하고,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며, 인간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변화한 결과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상품과 상품의 물적 관계로 전도된다. 화폐는 이런 물적 관계를 지배하는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이런 현상이 화폐의 물질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화폐물신성이다.

이러한 전도된 상황에서 인간본질과 현실의 인간실존은 괴리를 일으킨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에 대해서 독립적이고 그에 대해 주동적 역할을 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와 요구에 맞게 의식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고 창조적으로 새로운 자연과 사회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현실적 처지는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 지배받는 무력하고 소외된 존재로 실존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이 자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은 자본증식의 수단이 된다. 인간은 자본에 복종하지 않으면 생존조차 힘들어진다. 이는 부르주아지라고 다르지 않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계급적 처지로 말미암아 사실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사실을 정확히 본다는 것은 자본가에겐 자기부정이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부르주아지가 지배권을 갖는 사회이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는 소수의 지배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의 지배권은 소수에 의해서, 그리고 소수를 위해 행사된다. 따라서 노동자ㆍ민중을 속이는 이데올로기 지배가 부르주아지 지배체제 유지를 위한 불가결한 전제로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과학이란 이름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를 은폐하기 위한 허위의식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잉여가치의 진정한 기원에 대해 은폐한 무수한 이론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는 계급대립을 초연한, 사회전체를 위한 국가라는 허위적 국가이론이나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허위의식 등을 유포시킨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본주의 생산의 담당자이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계급이다. 이런 처지로 해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와 달리 자본주의의 모순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의 노동자는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에 지배당한다. 이데올로기 지배의 배후에는 항상 국가폭력이 있다. 노동자들이 국가 관료조직과 폭력조직에 대항할 힘이 없을 때 무력감을 느끼고 이런 무력감으로 인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지젝이 지적한 냉소주의 즉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고 현재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설명하는 것은 자본의 폭력적 지배와 그의 이데올로기적 은폐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냉소주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어쩔 수 없이”로 바꿔야 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하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하에서의 이데올로기 지형이다. ‘어쩔 수 없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왜곡함으로서 지젝은 자신도 모르게 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의 본성에 맞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싸우는 심리학≫(서해문집)에서 이런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자본주의에서의 인간 심리를 무력감, 고립감, 권태감으로 진단하고 있다. 거대한 자본의 지배로부터 개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기력한 심리가 형성되고, 경쟁의 강요에 의해 고립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노동하는 시간에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노동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인간은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의미 없는 삶 속에서 인간들은 권태감에 시달린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이 실현되지 못하는 실존의 상황 속에서 느끼는 심리들이다.

이러한 심리로부터 자본주의적 인간의 사회적 성격은 설명될 수 있다. 무력감에 대한 방어기제로 힘에의 추구가 나타나고 이는 권위주의적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고립감에서는 대중추종주의적 성격이 형성되어 유행에 민감해진다. 그리고 권태감에서 감각적, 쾌락지향적 성격이 형성된다. 이러한 현대인의 성격의 바탕에 시장지향적 성격이 즉 인간상품의 심리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대중추종주의, 쾌락지향주의 등은 인간본질과 인간실존 간의 괴리와 모순에서 오는 무력감, 고립감, 권태감을 방어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적 토대에서는 필연적 현상이기도 하다. 이런 자본주의적 사회성격을 정당화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면 이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지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대면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젝이 말하는 정신분석학적 욕망은 자본의 욕망에 다름 아니기에 지젝의 대안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게 된다.

자본의 욕망을 극복하는 길은 자본의 욕망이 역사적으로 한시적이며, 일부 자본가계급의 편향된 욕망임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는 자본주의 그 자체에 있다. 일례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2008년 금융위기와 대공황에의 진입으로 그 이데올로기적 허구성을 스스로 폭로하였다. 양식 있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파산하지 않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토대가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즉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토대를 제거해야 함이 전제가 된다. 그러나 토대를 바꾸기 위해서는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야 한다.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노동자, 민중이 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몰라서라기보다는 투쟁에 나설 때 돌아올 폭력과 억압이 두렵기 때문이다. 반동기에는 이런 두려움이 지배적이기에 일정 정도 이상의 투쟁을 수행하기가 어렵고, 제한적 투쟁도 다분히 경제적인 요구에 머물게 된다. 반동기에는 레닌의 말처럼 국가권력에 대한 “(직접행동이 아니라) 대중의 의지를 준비시키는 임무가 더욱더 절박한 것이 된다.”31) ‘대중의 의지를 준비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폭로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ㆍ민중의 이데올로기인 맑스-레닌주의를 현 상황에 맞게 재건해 내야 한다. 선진 노동자와 민중이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을 받아들이고 그 이행경로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때에만 선진 노동자와 민중의 투쟁의지는 살아날 것이고 이는 노동자, 민중 전체로 확대될 것이다.

다음으로는 노동자, 민중의 대중조직이 이익 집단적 성격을 극복하고 공동체적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 공동체적 성격이란 자본주의적 물적 지배로부터 오는 두려움, 고립감, 권태감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본질적 성격을 말한다. 연대의식과 동지애의 강화로 고립감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조직, 조직활동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자각함으로서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느끼는 조직이 공동체적 조직이다.

이렇듯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에 대한 인식과 미래 사회주의에 대안과 전망, 그리고 노동자ㆍ민중의 저항적 공동체의 건설이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론 비판을 기초로 맑스-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 재건을 위한 방향을 인간본질을 중심으로 간단히 제시해 보았다.

인간의 본질을 중심으로 바라보아도 자본주의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인간본성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억압은 회귀하기 마련이다. 억압의 회귀는 억압기제의 전복으로 나타날 것이다. 만에 하나 자본주의적 억압기제가 영원히 성공하더라도 자본주의는 유지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억압기제가 성공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말살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인간 없는 자본주의가 되고 말 것이며 이는 더 이상 인간사회일 수 없기 때문이다.  노사과연

 


 

1)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p. 60.

 

2) 같은 책, p. 61.

3) 같은 책, p. 62.

4) 같은 책, p. 63.

5) 같은 책, p. 64.

6) 같은 책, p. 65.

7) 같은 책, p. 66.

8) 같은 책, p. 67.

9) 같은 곳.

10) 같은 책, p. 93.

11) 같은 책, p. 94.

 

12) ≪철학대사전≫, 동녘, p. 1020.

 

13) 지젝, 앞의 책, p. 52.

14) 같은 책, p. 54.

15) 같은 책, p. 33.

16) 같은 책, p. 34.

17) 같은 책, p. 43.

 

18) 맑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 1권(상), 비봉출판사, p. 104, 각주 34.

 

19) 같은 책, p. 92.

20) 같은 곳.

21) 지젝, 앞의 책, p. 101.

22) 같은 책, p. 100.

23) 같은 곳.

 

24) 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독일이데올로기1≫, 두레, p. 39.

 

25) 뮈슬리프첸코, ≪인간≫, 논장, p. 98.

 

26) 같은 책, p. 98.

27) 같은 책, p. 99.

28) 같은 책, p. 99.

29) 같은 책, p. 93.

30) 같은 책, pp. 96-7.

 

31) 레닌, ≪러시아 반종파투쟁≫, 미래사, p. 46.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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