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 투

 

 

김태균 │ 회원

 

 

1. 들어가며

 

지난 4월 13일 치러진 제20대 총선은 여소야대로 마무리되었다. 19대 국회에서 152석을 차지했던 새누리당이 122석으로, 127석이었던 민주통합당이 161석(더민주당 123석+국민의 당 38석)을 차지함으로써 세간의 예상을 넘어 여소야대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총선의 결과와 상관없이 노동자계급을 향한 공격을 늦추지 않고 있다. 아니, 오히려 총선 전인 여대야소 정국보다도 더 공세적으로 구조조정의 칼끝을 노동자, 민중의 목줄을 향해 겨누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4ㆍ13 총선이 끝나자마자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에 대한 여론전을 본격화하면서 조선ㆍ해운 업종에 대해 노동자 해고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부실기업 구조조정 기본 계획 및 방향’을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민주당ㆍ국민의당 등 거대 야당은 정권의 구조조정 그 자체의 반대가 아닌 구조조정 추진 속도, 투명성 등에 대한 문제제기1)를 함으로써 당적을 떠나 여야 정치권 모두는 구조조정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이러한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 구조조정 공세와 더불어 정권 출범 초기부터 진행된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주의적 작태는 노동자계급을 넘어 전체 인민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다른 한편, 박근혜 정권은 정권 출범 그 자체는 국정원을 동원한 불법 선거를 통한 것이었으며 최소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부정하는 것이었다. 부정선거를 통한 정권 장악에 이어 국정원을 동원한 정치사찰, 세월호 참사를 포함한 수많은 사건 사고2)에 대한 처리과정,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박근혜 정권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파괴 책동은 파쑈적인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이렇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박근혜 정권 스스로가 위기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계대공황으로 요동치는 정세에서 구조조정 공세와 부정선거, 정치사찰, 세월호, 통합진보당 폭력적 해산으로 표현되는 박근혜 정권의 파쑈적 행보가 바로 2016년 노동자계급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자, 동시에 노동자계급 투쟁의 출발점인 것이다. 즉, 임금삭감과 인원감축 등 구조조정으로 표현되는 경제적 영역의 투쟁 과제와 부정선거, 세월호, 통합진보당 해산 등 파쑈적 행위에 맞서 민주주의를 확장ㆍ강화해야 하는 정치적 투쟁 과제가 바로 한국 노동자계급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쉽지만은 않다. 특히 노동자계급 투쟁을 지지, 지원하고 또 다른 형태로 지도해야 하는 계급운동 진영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대한 판단의 오류가 노동자계급 투쟁에 있어 전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바로 박근혜 정권의 성격 관련한 계급운동 진영의 판단의 오류이다.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신자유주의 정권에서부터 파씨즘 정권으로까지 다양하게 바라보고 있는 계급운동 진영은 성격의 다양성만큼이나 그 구체적 전술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박근혜 정권을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는 진영은 반신자유주의 투쟁(반자본주의 투쟁)으로, 박근혜 정권의 성격을 파씨즘 정권으로 규정하는 진영은 반파쑈 민주화 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전술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 논쟁으로부터 이어진 전술적 차이는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적 작태, 파쑈적 작태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응의 차이, 즉 노동자계급의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전술의 차이로 나타난다. 필자는 계급운동 진영에서 나타나는 박근혜 정권의 성격에 대한 논쟁과, 이로부터 파생된 전술에 있어 일부 경향의 판단에 대한 오류가 노동자계급이 가져야 할 민주주의 투쟁의 원칙에 대한 몰이해, 즉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정치투쟁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 투쟁’과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에 대한 무지로부터 나타나는 혼돈의 문제라는 판단이다.

이에 본고는 노동자계급 투쟁의 두 가지 기본 형태, 즉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결합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정치투쟁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 투쟁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함으로써 현실 계급투쟁의 전망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양자의 결합

 

맑스는 “노동조합―그 과거, 현재, 미래”3)를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 제도적 요구 투쟁, 정치투쟁에 대한 상을 정리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내용 그리고 두 개의 기본적 투쟁의 결합 및 사회변혁 투쟁에 대한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규정이다.

맑스가 위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노동조합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이에 대한 결합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경제투쟁은 개별자본가나 개별자본가 집단을 상대로 임금과 노동조건(노동시간) 등의 문제를 요구하고 해결하는 투쟁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제투쟁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 투쟁이자, 단결과 투쟁의 출발점이다. 이에 반해 정치투쟁은 정부를 상대로 한 노동입법ㆍ제도적 요구투쟁이다. 8시간 노동일(표준노동일)의 법률에 의한 규제, 단결권ㆍ파업권 등 노동기본권의 확립, 보통선거권의 획득 등 정부에 대한 여러 가지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투쟁이 바로 노동조합의 정치투쟁이다. 또한, 노동조합은 일상적 경제투쟁이나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 등 정치투쟁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변혁이라는 사회운동, 정치운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이러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라는 기본 양대 투쟁을 올바르게 결합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레닌은 노동조합의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가미하고자 하는 각종 행위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 노동조합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상과 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경제투쟁은 고용자와 싸워 좀 더 나은 노동력 판매 조건과 좀 더 나은 생활 및 작업 조건을 얻어내기 위한 노동자의 집단적 투쟁이다. 따라서 이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조합 투쟁이 된다. 왜냐하면 노동조건은 직종에 따라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개선하려는 투쟁은 직종별 조직을 바탕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가미한다’는 것은 ‘입법적ㆍ행정적 대책을 통해 각 개별 직종의 작업조건을 개선하고 이들 직종상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모든 노동조합이 하고 있는 일이자, 이제껏 해온 일이다. … 그러므로 ‘경제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가미한다’는 오만한 발언은 ‘대단히’ 심오하고 혁명적으로 들리지는 모르나 사실은 사회 민주주의적 정치활동을 노동조합적 정치활동으로 격하시키려는 케케묵은 시도를 은폐하기 위한 수법에 불과하다.4)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 대해 레닌의 또 다른 말을 들어보자.

 

이 강령의 핵심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획득과 사회주의 사회의 조직을 궁극목표로 하는 투쟁을 지도하는 데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경제투쟁(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개별 자본가 또는 개별 자본가집단에 대하여 수행하는 투쟁)과 정치투쟁(인민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즉 민주주의를 위해,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을 위해 정부에 대하여 수행하는 투쟁)으로 나누어진다. …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을 조직하는 것, 이것을 기초로 하여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동을 수행하는 것, 즉 고용주에 대한 노동자의 일상적인 투쟁을 원조하고 모든 종류의 억압에 대하여 노동자의 주의를 촉구하고, 그리하여 단결의 필요성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사회 민주주의자가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제투쟁을 위해 정치투쟁을 망각하는 것은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기본원칙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며, 노동운동의 전체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는 것이다.5) 

 

레닌의 위 글은 노동자계급의 당 강령에 대한 이야기지만 노동자계급 운동에 있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그리고 양자의 올바른 결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맑스와 마찬가지로 크게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으로 구분하였다.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개별자본가 또는 개별 자본가 집단을 상대로 한 투쟁을 경제투쟁으로, 인민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하여, 즉 민주주의를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을 위해서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을 정치투쟁으로 구분하고, 이러한 정치투쟁을 엄호ㆍ지지ㆍ지원하는 노동조합 투쟁의 역할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또한 레닌은 노동자계급 투쟁에 있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충실하게 진행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1)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의 의미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경제투쟁에서 그 중심은 당연히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대중이 처해 있는 객관적 조건에 기인한다. 노동자는 직종과 직무 등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는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가능하면 높은 수준의 임금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요구한다. 또한 지속적 노동력 판매를 위하여 적정한 노동강도를 요구한다. 이를 위한 협상과 투쟁은 노동자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투쟁이며 이를 경제투쟁이라 한다. 그러하기에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ㆍ존속―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존속―되는 이상 노동자들의 가장 기본적 투쟁―경제투쟁―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자본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대중은 노동력을 판매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조건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자본에 대항하는 계급’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자 대중의 공통요구(경제적 요구)를 가지고 자본에 대항하여 단결하고 투쟁할 때 노동자 대중은 비로소 그들 자신을 위한 계급이 된다. 노동자 대중이 공통의 요구 즉,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적정한 노동강도로 표현되는 요구를 가지고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은 노동자가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언하는 ‘혁명적 계급’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계급’으로의 전환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주체 형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2) 노동자계급의 노동입법, 제도적 요구를 건 투쟁의 의미

자본가계급을 상대로 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자본주의 사회 출현과 함께 시작했다. 이는 자본가계급의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라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현상이다.

자본주의 초기의 노동자계급의 투쟁양상은 직장별로 고립 분산된 형태로, 그리고 개별적인 저항 형태로 전개되었다. 임금과 노동시간 및 적정한 노동강도를 둘러싼 고립 분산적인 노동자계급 투쟁은 점차 개별자본가에서 자본가 집단으로 향하고,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정부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이들의 투쟁 과정에서 개별 자본가들이 자본가 집단을 만들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고, 정부는 노동자 투쟁에 대해 각종 반노동법을 동원하여 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동자 대중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 대중은 스스로 경제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개별 노동자에서 전체 노동자로 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또한 각각의 공장이나 부문, 산업을 뛰어넘어 정부를 상대로 한 노동입법, 제도적 요구를 건 투쟁을 시작해야만 됨을 자각하게 된다. 즉, 초기의 고립 분산적이며 개별적인 노동자 대중의 임금인상 및 노동시간 단축 관련한 경제투쟁이 자본과 정부의 총체적인 노동탄압을 거치면서 투쟁의 과정에서 점차 정부를 상대로 한 노동입법과 제도적 요구 투쟁을 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입법과 제도적 요구 투쟁은 임금 및 노동시간을 둘러싼 경제투쟁과는 달리 정치적 성격을 가지며 그 대상도 개별 자본가나 혹은 개별 자본가 집단에서 정부로의 전환을 전제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노동입법, 제도적 요구 투쟁은 노동기본권의 법적 확립, 노동시간이나 최저 노동연령 제한, 산업재해, 위생 등과 관련한 공장법 제ㆍ개정, 파업에 대한 법적 제한 철폐, 산업재해ㆍ질병ㆍ실업에 대한 사회보장 확립과 확충 등이 있다. 이러한 노동입법, 제도적 요구라는 정치투쟁은 개별적 혹은 직업적 이익을 유지ㆍ확대하는 경제투쟁과는 명확하게 구분된다.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기본적 경제투쟁과 양자 상호 간의 올바른 결합을 통해서만 그 의의를 가진다. 또한 이러한 정치투쟁은 전체 노동자 대중의 이익을 위한 투쟁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비록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 내(內) 투쟁(개량적 투쟁)이라는 한계를 가지지만 말이다.

 

3) 노동입법ㆍ제도적 요구 이외의 민주주의 투쟁으로서 정치투쟁의 의미

노동조합운동은 위에서도 확인했듯이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제투쟁과 노동입법ㆍ제도적 요구라는 정치투쟁 등 두 가지6) 형태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위에서 이야기한 두 가지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민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투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 또한 노동자계급의 중요한 투쟁이며,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라는 정치투쟁과는 또 다른 영역의 정치투쟁이다. 즉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은 정부를 상대로 한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 투쟁뿐만 아니라, 인민의 권리 확대 및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또한 포함한다.

 

(1) 민주주의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하면 ‘선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또 ‘~~주의’라는 번역으로 인해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의 형태로 이해되곤 한다. 민주주의를 영어로 하면 Democracy이다. Democracy는 일반적으로 서양의 정치사상에서는 ‘인민이 지배하는 정체(政體)’의 의미로 사용된다. ‘인민이 지배하는 정체(政體)’ 즉 민주제(民主制)는 국가의 통치형태로서 예를 들면 군주제, 귀족제, 공화제 등과 함께 다루어지는 형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Democracy가 민주제(民主制)로 번역되기보다는 ―ism을 의미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로 번역이 됨으로써 ‘하나의 통치형태’로서 민주주의가 아닌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로 민주주의가 곡해되고 있다.

여기서 맑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민주주의는 내용과 형식이다. … 이와 같이 민주주의는 모든 국가체제의 본질, 사회화된 인간의 하나의 특수한 체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7)

 

맑스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치체제이면서 모든 정치(국가)체제의 본질이라고 언급하였다. 맑스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하나의 국가형식 또는 정치체제로 바라보았다.8) 그리고 ‘민주주의’를 하나의 일반적 형식(form)으로 규정하면서 군주제, 귀족제 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국가 형식이라 규정하였다.

맑스에 이어 레닌의 말도 보자.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승인하는 하나의 국가,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강제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대중의 한 부류가 여타 다른 부류에 대하여 권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체 이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9)

 

소위 국가의 사멸은 민주주의의 사멸을 의미하며, 국가의 폐지는 곧 민주주의 폐지를 의미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오류를 지속적으로 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0)

 

레닌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규정을 보면 ‘민주주의’는 ‘~주의’로서 ‘민주주의’가 아닌 ‘국가통치형태’로서 ‘민주주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고 레닌은 ‘민주주의’조차 계급 사회에서 하나의 계급이 또 다른 계급을 지배할 때 체계적으로 강제력을 행사하기 위한 국가 형태, 즉 계급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주의’로서 체계화된 이론이나 학설의 의미보다는 하나의 정형화된 일반적 형식(form)으로써 국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국가와 마찬가지로 계급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한 착취 도구인 것이다.

‘민주주의’가 ‘~주의’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형화된 일반적 형식으로써 ‘민주주의’라 할 때 ‘민주주의’는 어떠한 내용을 가질까?

‘민주주의’는 국가형태와 마찬가지로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때 체계적으로 강제력을 행사하기 위한 일반적 형태이다. ‘민주주의’는 ‘군주제’, ‘귀족제’ 등과는 다른 내용을 가진다. 맑스에 의하면 ‘민주주의’는 개체적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러한 내용은 봉건제와의 투쟁의 결과로서 성립되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민주주의는 봉건제와의 투쟁의 결과물이자 개체적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피지배계급을 지배할 때 체계적으로 강제력을 행사하기 위한 국가형태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계급을 초월한(또는 현실을 초월한) 그 어떠한 관념의 총체가 아닌 계급사회에서 계급사회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즉 계급사회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하기에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뜻한다.

봉건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지는 신흥 중간계급으로 사회적 신분과 예속이라는 봉건제 시대의 구습을 타파하고, 자유로운 자본가계급으로서의 물적 조건을 형성해야 하는 역사적 과제 앞에 놓여 있었다. 광범위한 노동자ㆍ농민이라는 생산자 대중의 투쟁과 함께 전개되었던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으로서 온전하게 이윤 착취를 위한 물적 토대, 즉 사회적 신분과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개인적 소유를 철저하게 인정하는 새로운 사회에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과제로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중세 봉건 질서의 극복 과정이라는 역사적 이행기에서 신분제적 정치질서를 타파하려는 진보적 원리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또한 중세 봉건 질서를 극복하는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체적 인간의 자유와 같은 의미로서의 정치 행위가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사회 양식과 결합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형식적 평등으로 제한되어 나타났다. 선거에 참여하여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위임하는 절차상의 자유로만 제한되는 선거권의 평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봉건제 질서를 타파하고 출발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만인의 평등과 자유가 아닌 자본가계급에게 있어 착취의 자유를,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형태의 형식적 평등과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만을 부여하는 기능을 하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라는 하나의 계급만의 민주주의, 즉 부르주아 독재로 나타난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본가 국가를 유지ㆍ존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부르주아 독재에 봉사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2) 부르주아 민주주의―의회제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특징은 의회제 민주주의이다. 봉건제 사회와의 투쟁의 과정에서 등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원리가 자본제 사회의 질서와 맞물리면서 의회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의회제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핵심적 내용은 바로 권리의 위임이다. 인민의 권리가 입법부라는 정치제도에 위임되어, 입법부를 통해 인민의 권리와 이익이 대표되고 보호받게 되는 정치 제도가 바로 의회제 민주주의인 것이다. 봉건제 사회와의 투쟁의 과정에서 등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봉건제 사회의 신분제에 근거한 정치적 질서에 대항하여 인민의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정치적 권리의 평등으로 나타났다. 평등한 인간의 정치적 권리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에게 위임되었고, 위임된 대표자(정치인)에 의해 그 권리를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맑스는 이렇게 성립된 의회제 민주주의가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질적으로 보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과 부자유에 기초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라인주 의회는 국민의 모든 권리를 자기 속으로 흡수하여 그것을 특권으로 삼아 국민에 대항하여 행사했던 중세의 신분제 의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스스로의 특권을 국민의 권리에 대항시키는 신분제 의회를, 주민 스스로 행동하고, 대표하는 자치기관으로서의 의회로 근본적으로 개조할 것11)

 

결국 인간의 자유와 평등은 의회제 민주주의처럼 입법부를 통해 자신이 권리를 위임하고, 그 대표를 선출하는 방식의 형태가 아니다. 인간의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 위임되거나 양도될 수 없으며 인간 스스로에 의해서 결정되고 대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위임의 형식인 의회제 민주주의는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는 체계인가? 이는 바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우선 첫 번째로 의회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인 시민사회의 불평등과 부자유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대표성을 위임받은 대표인 입법부 의원들은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즉, 사적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활동을 한다. 즉, 의회제 민주주의는 위임된 인간의 권리가 사적 소유자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변질되게 하는 사적 소유관계, 자본주의 자체 모순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의회제 민주주의 체계가 시민사회와 정치사회를 분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표현양식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 모두가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 권리를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입법부에 참여하는 형태는 바로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된 곳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형태이다.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가 행하는 정치가 아닌, 권리를 위임받은 별도의 정치인들이 정치를 하는 형태, 유권자와 정치인이 분리되는 형태는 바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분리를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곳에서는 의회제 민주주의 형태가 발생할 수 없다. 인간의 권리가 입법부를 통해서 위임되는 것은 자본제 사회만이 가지는 특징일 뿐 인간의 일반적 특성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정치형태는 아닌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민주주의 투쟁의 핵심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와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실천 활동이다.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은 결국 의회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또 다른 통치 수단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사적 소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과, 이로 인해 인민의 정치적 평등이 대표를 선출하는 것 자체에 대한 평등으로 한정되고, 위임받은 정치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사적 소유)에 근거하여 위임받은 인민의 정치적 권리를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만이 가지고 있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와의 분리의 또 다른 얼굴인 의회제 민주주의―부르주아 민주주의인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ㆍ의회제 민주주의는 그 사회적 내용과는 별개의 일반적 형식이 아니라 그 사회적 성립의 산물인 것이다. 그 사회의 성립, 즉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비롯된 제 모순의 표현이자, 그 모순을 유지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기능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ㆍ의회제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ㆍ의회제 민주주의의 문제는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본가계급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치질서를 보장하는 문제만을 해결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는 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해결이 참여를 통해서는 즉, 의회참여의 양적 확대를 통해서나 혹은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공공이익을 대변하는 합리적 활동을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맑스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어떠한 권위나 제도도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대표할 수 없으므로,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인민 스스로에 의해서 결정되고 대표되어야 하는 형태를 이야기하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ㆍ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한다. 신분제에 기초한 봉건제 사회를 극복하였던 부르주아 민주주의ㆍ의회제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성을 인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진보성과 한계, 바로 이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시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통 선거권에 대한 맑스의 주장을 들어보자.

 

보통 선거권은 지금까지는 신성한 국가권력에 의회의 승인을 부여하기 위해서 악용되었거나, 혹은 수년에 한 번 의회제적 계급지배를 승인하기 위해서만 인민에 의해서 사용되어온, 지배계급 수중의 장난감으로 악용되어 왔다.12)

 

(3) 노동자 투쟁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이 가지는 의미

민주주의는 체계화된 학설이나 이론 등 현실과 분리된 관념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하는 하나의 일반적 형식이다. 봉건제 사회의 신분제 정치질서를 지양하며 자본주의 사회 출현과 함께 형성된 하나의 정치체제가 바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분리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형태이며, 인민의 정치적 권리가 정치인들에게 위임되는 의회제 민주주의로 제도화되며, 이런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가와 함께 성장, 소멸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에게 시민사회 영역에서는 임금노예의 지위를 부여하고, 정치사회 영역에서의 형식적 평등을 부여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ㆍ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반해 노동자계급의 역할은 바로 시민사회 영역에서의 임금노예제의 철폐를, 정치사회 영역에서 형식적 평등을 실제적이고 인간적 평등으로 가져가기 위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언론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없다면 노동자계급의 해방 투쟁의 전진은 없다. 물론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여타의 계급ㆍ계층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계급과는 달리 노동자계급을 제외한 여타의 소부르주아들에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목표이다.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 해방의 세상으로 진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철저한 지양은 노동자계급만이 가능하며, 노동해방된 세상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엥겔스의 말을 들어보자.

 

부르주아적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권리에 대한 선동과 같은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지의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들이 없이는 노동자 당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다, 노동자 당이 이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 본래의 생존요소, 자신들이 숨을 쉬는 데 필요한 공기를 획득하는 위해서이다.13) 

 

(4) 정치투쟁 그리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

경제투쟁은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개별 자본가 혹은 개별자본가 집단을 상대로 한 투쟁이다. 정치투쟁은 인민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투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정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다. 물론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부를 상대로 한 노동자계급의 노동입법ㆍ제도적 요구 투쟁도 정치투쟁에 포함된다.

레닌의 말을 조금 더 확인해 보자.

 

계급투쟁이란 무엇인가? 개별 공장, 개별 직종의 노동자가 자신의 한 고용주 또는 자신의 고용주들과 투쟁하기 시작한다면 … 그것은 계급투쟁의 미약한 맹아에 지나지 않는다. … 개별 노동자가 자신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한 성원임을 자각할 때, 또 개별 고용주나 개별 관리에 대한 자신의 일상적인 사소한 투쟁을 부르주아지 전체와 정부 전체에 대한 투쟁으로 간주하게 될 때,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투쟁은 계급투쟁이 된다.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 마르크스의 유명한 이 말은 고용주들에 대한 노동자의 모든 투쟁은 언제나 항상 정치투쟁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오류일 것이다. 그 말은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은, 그것이 계급투쟁으로 되는 데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정치투쟁이 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14)

 

이는 맑스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라는 말에 대한 레닌의 해석이다. 자본에 대한 노동자의 투쟁, 즉 경제투쟁은 ‘계급투쟁의 미약한 맹아’에 지나지 않지만 계급투쟁으로 되는 데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치투쟁이 된다는 의미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경제투쟁은 정치투쟁으로 전화한다’는 말과 같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구분하지만, 경제투쟁은 ‘계급투쟁의 맹아’이며 계급투쟁으로 되는 데에 따라 ‘정치투쟁으로 전화한다’는 의미이며, 넓은 의미로는 경제투쟁 또한 정치투쟁과 그 형태를 달리하지만 계급투쟁에 포함됨을 뜻한다.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순차적일까? 혹은 하나의 종속변수에 따른 독립변수적 개념일까? 이 질문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답을 하고 있다.

 

경제파업과 정치파업의 상호의존 관계 ― 둘이 긴밀하게 결합하지 않고는 참으로 광범하고 참으로 대중적인 운동은 불가능하다. 이 결합의 구체적인 형태는, 한편으로는 운동의 초기나 새로운 층이 운동으로 들어올 때에는 순경제적인 파업이 우세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파업이 후진층을 깨우치고 일깨워 운동을 일반화하고 확대하며 그것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는 것이다.15)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그 어떠한 것이 또 다른 것에 대한 원인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 관계이다. 경제투쟁을 힘 있게 전개하기 위해서도 정치투쟁을 통한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각성이 요구되며, 역으로 정치투쟁을 힘 있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경제투쟁을 통한 노동자 대중의 조직화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3. 2016년 노동자계급의 상태

 

1) 2016년 객관적 정세

2016년 현재의 정세를 키워드로 정리해 보자면 경제위기(공황)ㆍ구조조정ㆍ민주주의 퇴보로 정리할 수 있다.

 

(1) 현재의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첫 번째 키워드는 바로 공황이다.

2014년 제조업의 매출액이 지난 1961년 이후 처음으로 -1.6%로 떨어지는 등 한국 자본주의는 경제위기로 접어들었다. 2016년 지금도 경제위기는 한층 심화되고 있는 상황16)이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대로 주저앉았으며, 5년 연속 세계 평균을 밑도는 성장률을 보였다. 수출은 1년여 넘게 연속으로 마이너스 행진을 기록하고 있고, 물가상승률은 IMF 직후인 1990년 0.8% 이후 16년 만에 0%대로 떨어졌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조차 갚지 못하는 한계기업이 전체의 10%를 넘어섰다. 대기업 54곳과 중소기업 175곳은 이미 구조조정 수술대에 올랐다.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2015년 74.2%로 IMF 직후인 1998년(67.6%) 이후 1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4월 13일 20대 총선이 끝나자마자 조선ㆍ해운ㆍ석유화학ㆍ철강ㆍ건설 등 5대 업종을 중심으로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수출 의존도가 60%를 넘어서는 한국의 경우 미국과 유럽의 경제위기 그리고 중국 및 일본의 경기침체 또한 그 심각성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인민의 살림살이 또한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가계부채는 2015년 한 해 동안 100조원 이상 늘어 1,200조 원을 넘어섰다. 은행 부채 관련해서는 가계의 가처분 소득에서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5년 21.7%에서 올해 벌써 24.2%를 넘어섬으로 인해, 인민의 호주머니를 털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금융자본의 위기까지 엿볼 수 있는 실정이다.

 

(2) 두 번째는 구조조정으로 불리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대적 공격이다.

자본의 위기인 경제위기(공황)는 노동자계급에게도 그 살인적 여파를 몰고 오고 있다. 삼성, 현대, SK, 금호 등 30대 한국 독점자본의 고용은 2015년 한 해 0.4% 감소했으며, 2016년 20대 총선 이후 몰아치는 인원감축의 정도는 2015년 그것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은 4ㆍ13 총선 직후인 지난 4월 26일 ‘3차 산업경쟁력 강화 및 구조조정 협의체’를 개최하여 조선ㆍ해운 업종 등 부실기업 구조조정 기본 계획 및 방향을 발표하였다. 문제는 조선ㆍ해운 업종 관련한 구조조정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과 해운 업종에 이어 철강 및 모든 산업으로 확산되는 구조조정은, 결국 취업군에서 내몰린 실업 노동자뿐 아니라, 그나마 취업군에 있는 비정규직ㆍ정규직 구분 없이 전체 노동자들에게 살인적 고통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전교조, 공무원 노동조합 등 공무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공무원 연금 개악을 추진했고, 올해 초 정말로 맘대로 임금삭감과 일반 해고를 하기 위한 양대 지침을 발표했다. 임금 피크제, 성과연봉제 등을 중심으로 한 임금삭감과 해고의 자유는 민주노총 위원장 등 지도집행력의 구속 등과 맞물려 총체적 노동조합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공황이라는 경제위기에서 부실한 자본을 살리기 위한 ‘기업구조조정촉진법’과 ‘테러방지법(시행령)’의 통과는 부실한 자본을 살리기 위해 무엇을 공격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3) 마지막 세 번째 바로 박근혜 정권의 무능력과 민주주의의 퇴보이다.

국정원을 동원한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박근혜 정권은 부르주아의 준거인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위기로 몰리고 있다. 2014년 12월 통합진보당의 해산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장 대표적 특징인 의회제 민주주의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또한 언론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수많은 노동자, 민중을 저들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가두고 억누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세월호, 옥시 가습기 사건 등 수많은 사건 사고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국민국가 수준에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와의 분리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종합적으로 2016년 노동자계급 앞에 놓여 있는 객관적 정세는 공황이라는 자본주의 경제위기의 한복판에서 노동자 민중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과 함께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훼손하는 파쑈적 정국이다.

 

2) 공황이라는 객관적 조건은 노동자계급에게 물러설 수 없는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개별 자본가나 개별 자본가 집단들을 상대로 더 나은 노동력 판매 조건과 좀 더 나은 생활 및 작업 조건을 얻어내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투쟁, 즉 경제투쟁의 영역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보다 나은 조건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이 아니라, 기존의 투쟁의 성과로 쟁취했던 수많은 경제적 조건들이 자본의 반격에 의해 빼앗기고 있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 단지 빼앗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인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집단교섭을 진행하고, 집단행동(파업)을 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조차 파괴되고 있는 상황이다. 즉 지금의 상황은 더 빼앗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투쟁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투쟁해야 하는 벼랑 끝 상황이다. 공무원 연금 개악, 임금피크제와 성과연봉제를 동원한 임금삭감과 원샷법을 동원한 자유로운 해고, 테러법을 동원한 집회, 시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개별 자본가의 공세가 아니라 정부의 자본 지원 정책이며, 직접 노동자계급을 상대로 한 정부의 노동자 죽이기 정책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의 일부분, 즉 노동입법과 제도적 요구 투쟁 또한 경제적 투쟁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 몰리고 있다. 현재의 상황은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 투쟁이 아니라, 정권의 자본 살리기, 노동자 죽이기 공세에 맞선 방어적 투쟁인 셈이다.

이러한 정치투쟁 또한 위에서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벼랑 끝 경제투쟁과 동일하게 회피할 수도 회피해서도 안 되는 절체절명의 투쟁이다. 그렇다면 왜, 2016년 현재의 상황이,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조건을 위한 경제투쟁 혹은 정치투쟁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려 살아남기 위한 경제투쟁, 정치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경제위기(공황) 때문이다. 공황은 경쟁력이 있고, 자금력이 강한 자본에게 있어서는 ‘위기’가 아닌 ‘기회’가 된다. 작금의 2016년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그 자체로서 최소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 심폐기능을 담당하는 연수를 비롯한 뇌간까지 정지가 되어 기계가 심폐기능을 대신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태를 우리는 흔히 뇌사상태라고 한다. 공황기 한국 자본주의는 별도의 조치를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상태, 즉 뇌사상태와 마찬가지로 위기 상태이다. 공황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의 표현 형태인 과잉생산으로 인해 나타난다.

공황 관련한 맑스의 말을 들어보자.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길, 이 ‘폭발적 증가, 대 격변, 공황’들은 …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더욱 대규모로 반복된다.’ 점점 더 깊어지는 불황으로 특징지어지고, 점점 짧아지는 호황 기간으로 점철된 체제, 생산 가능한 부의 총량을 처리할 수 없는 체제를 그는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었다.17)

 

맑스의 이 말은 공황 그 자체의 만성적인 주기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공황은 다음과 같이 귀결18)된다. 우선 공황, 경제위기는 경제위기에 그치지 않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함으로써 사회적ㆍ정치적 위기를 조성한다는 점이다. 한국 전쟁 이후 처음으로 나타난 1958년 미국의 경제원조 중단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경제위기(공황)는 60년 4ㆍ19 혁명으로 이어졌고, 1969년 공황은 1970년 전태일 열사 투쟁과 경기 광주 대단지 투쟁으로, 1970년대 말 공황은 YH산업 노동자들의 투쟁, 부마항쟁, 박정희 피살, 사북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과 광주항쟁으로 이어졌던 것을 상기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19)하다.

과잉생산으로 인한 공황을 통해서 나타나는 두 번째 귀결점은 하락한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본 스스로가 자본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인해 과잉 생산된 재화의 소비는 전쟁을 통하거나, 혹은 자본 스스로 자본을 파괴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는 경제위기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중소자본은 물론 일부 대자본조차 부도를 내면서 도산해 가고 있는 현실에서 쉽게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새로운 기술, 새로운 생산수단의 도입 등 경쟁력 강화를 통해 저하된 이윤율을 극복하기 위해 자본은 모든 방법을 강구한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바로 노동자계급을 대상으로 한 착취의 정도가 매우 강화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파괴, 자본의 파괴, 새로운 혁신, 착취 강화는 공황이라는 자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본의 자구책으로서, 이 결과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고도화되는 과정을 가져온다. 경쟁력과 자금 동원력 등이 약한 자본은 소멸해 가지만, 반대로 경쟁력과 자금 동원력이 강한 자본은 평소와는 달리 공황기에 더욱 급격하게 자신을 키워가게 된다. 새로운 기술과 생산수단의 도입 및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한 집적의 고도화, 부실 자본의 인수 합병 등을 통한 자본 집중의 고도화는 공황기 경쟁력이 있고 자금 동원력이 강한 자본에게는 곧 위기가 아닌 기회인 것이다.

 

3) 공황은 노동자계급에게 새로운 사회로의 전진을 위한 ‘기회’이다.

공황은 자본의 위기 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자계급의 위기이다. 경쟁력이 없는 자본의 퇴출 과정은 노동자 대중의 광범위한 실업의 문제, 새로운 기술과 생산수단 도입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에게 나타나는 장시간 노동과 임금의 삭감 문제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본의 공황기 위기관리 과정에서 나타나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 및 실업의 확산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자본 입장에서는 기필코 해야만 자본이 살아남는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도 뒤로 한 발 물러서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벼랑 끝 투쟁인 셈이다. 경제위기, 공황은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의 표현인 과잉생산으로부터 나타난 자본주의만의 독특한 현상20)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생산력과 그를 규정하는 생산관계와의 충돌로부터 나타난다. 사회의 물질적 생산력은 그 발전이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게 되면, 기존의 낡은 생산관계와 필연적으로 충돌을 하게 된다. 새로운 사회 초기에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추동했던 것과는 달리, 공황은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사회혁명의 물적 조건이 마련된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충돌의 시점에서 투쟁함으로써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충돌을 해결한다. 바로 이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충돌은 한편으로는 자본의 위기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류에게 있어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물적 조건, 즉 기회를 제공한다.

 

 

4. 공황기 노동자계급의 투쟁

―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변증법적 통일을 위하여

 

1)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

공황기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은 공황이라는 조건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는 부르주아지의 위기를 반영한다. 물러 설 수 없는 경제투쟁의 영역과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 투쟁, 숨을 쉬어야지만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인간에게 ‘공기’ 같은 민주주의가 부정되는 상황에서의 정치투쟁, 이 양자의 변증법적 결합은 그 어느 시기보다 당면한 공황 시기에 노동자계급에게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엥겔스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임금인상과 노동시간의 단축을 위한 투쟁 등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 (중략) 좀 더 높은 목적, 즉 임금제도의 완전한 폐지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21)

 

결국,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은 임금제도의 완전한 폐지라는 목적을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 한 가지이다. 이러한 수단과 임금제도 폐지라는 목적과 관련해서 레닌의 말을 이어서 들어보자.

경제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과 올바로 결합하는 것을 조건으로 할 때만 노동자 대중의 상태를 영속적으로 개선하고 그것의 진정으로 계급적인 조직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22)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은 임금제도의 완전한 폐지라는 정치투쟁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경제투쟁이며, 경제투쟁 그 자체가 정치투쟁과 올바로 결합해야지만 경제투쟁 그 자체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비록 개량이라는 한계를 가지고는 있으나, 노동입법과 제도적 요구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는 경제투쟁을 올바로 하기 위해서도, 임금제도의 완전한 철폐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특히나 수많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쟁취했던 성과가 파괴되고 있는 공황기 파쑈적 정세에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의 중요성은 더욱더 큰 의미를 가진다.

 

2) 2016년 투쟁

2014년부터 심화된 한국 자본주의의 공황은 지금도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위기에서 노동자계급을 상대로 한 자본과 정권의 폭압적 구조조정 공세는 더 이상 물러섬 없는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적 작태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은 노동자계급에게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2016년 노동자계급의 투쟁 요구는 1)부실 및 대자본의 국유화, 2)실질임금 하락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쟁취, 3)언론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통한 민주주의 사수 투쟁으로 집중되어야 한다. 이러한 2016년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성과는 바로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의 강화와 함께 해방세상 건설의 주체인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로 이어져야 한다.

 

(1) 부실 및 대자본의 국유화를 통한 고용안정 쟁취 투쟁

4ㆍ13 총선이 끝나자마자 자본과 정권은 조선업을 시작으로 공황기 부실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주문하고 있다. 구조조정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고도화 과정으로 이어진다. 경쟁력 있는 자본을 중심으로 자본의 집중을 구체화하고, 이 과정에서 인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공적자금으로 자본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서부경남지역과 부산ㆍ울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산업의 구조조정은 단순한 지역경제의 파산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길거리로 밀려나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실업의 문제이다.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실업수당이나 혹은 연금 등의 문제조차 긴축 재정 등으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한국 자본주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에게 실업의 문제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 자본가계급에게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한 자본 집중 고도화만이 살길이라면, 노동자계급에게는 부실기업을 비롯한 대기업의 즉각 국유화 요구를 통한 고용보장이 살길이다. 그 어떠한 이유로도 노동자계급의 죽음을 의미하는 해고를 받아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2) 실질임금 하락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쟁취 투쟁

한국 자본주의 공황에 대한 자본의 대응은 공무원 연금법 및 노동법 개악, 해고의 자유, 성과연봉제 도입, 정년 보장 미명하에 자행되는 임금 피크제 도입 등 노동자의 임금수준 저하와 장시간의 노동 요구이다. 이는 설사 해고되지 않아도 해고로부터 나타나는 고통과 별반 차이가 없는 살인적 고통을 요구하는 것이다. 작금의 공황은 재화의 생산이 부족하여 나타나는 공황이 아니라, 과잉생산으로부터 나타나는 자본주의만의 특수한 현상이다. 공황으로 나타나는 고통은 공황의 원인 해소를 통해 극복할 수밖에 없다. 즉 과잉생산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근본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의 해소를 통해서만이 완전하게 공황으로부터의 고통을 해소할 수가 있다. 자본의 집적의 고도화 전략에서 제출되고 있는 임금삭감과 장시간 노동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바로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다. 혹자들은 이야기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아니 설사 노동자계급 투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도 공황이라는 조건에서 부르주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요구인가?”라고. 공황은 자본가계급의 위기이다.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위기이면서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기회이기도 하다. 공황이라는 작금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에게 더 이상의 양보는 죽음을 의미한다. 양보와 타협의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면 더 이상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투쟁을 통해 생존을 확보할 것인가? 문제가 이와 같다면, 더 이상 양보나 혹은 부르주아들이 받아들일 것에 대한 걱정은 집어치워야 하지 않을까?

 

(3) 박근혜 정권의 파쑈적 공세에 대해 전 민중과 함께 민주주의 사수 및 확장 투쟁

박근혜 정권은 출범과정에서 저들이 정한 규칙인 의회제 민주주의조차 부정하는, 국정원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권력을 찬탈했다. 세월호, 옥시 가습기 사건 등 수많은 인민이 사건 사고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그들의 일이 아닌 양 하고 있을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통합진보당 해산과 언론ㆍ출판ㆍ결사ㆍ집회ㆍ사상과 양심의 자유조차 부정을 하는 등 반민주적ㆍ파쑈적 행보를 걷고 있다. 이러한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적 행보는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여타의 계급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소를 빼앗듯이 노동자 인민을 낭떠러지로 내몰고 있다. 이에 노동자계급의 해방세상으로 진군하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인간생존에 필요한 공기를 획득하기 위해서도, 파쑈적 반민주 작태에 맞선 민주주의 투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공황기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동자계급의 부실기업ㆍ대기업의 국유화 투쟁, 실질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쟁취 투쟁의 승리를 위해서도, 노동자계급의 반파쑈, 민주주의 투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4) 살인적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 파쑈적 반민주에 대응하는 투쟁의 성과가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의 기초 다지기로

공황은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위기이자, 동시에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위기이자 기회이다.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한 적대적 긴장도가 최고조에 이르는 공황 상태는 노동자계급이건 자본가계급이건 양보 그 자체가 계급으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공황기 노동자계급의 부실기업ㆍ대기업의 국유화와 실질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반민주에 맞선 반파쑈 민주화 투쟁은 공황기 노동자 민중의 숨통을 열어주는 역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사회로의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투쟁이다. 이에 공황기 노동자계급 투쟁의 모든 성과는 곧이어 전개될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가장 강력한 수단인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의 성과로 모아져야 할 것이다.

 

 

5. 나오며

 

필자는 2014년부터 심화된 한국 자본주의 경제위기에서 노동자계급이 취해야 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 그리고 정치투쟁의 주요한 영역인 민주주의 투쟁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경제투쟁은 개별 자본과 개별 자본가 집단을 상대로 노동자계급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건 개선 투쟁을 의미한다. 정부를 상대로 노동입법 및 제도적 요구 투쟁과 보통 선거권 획득 등 인민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투쟁,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노동자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정치투쟁이다. 그리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다. 임금제도 철폐라는 정치적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경제투쟁, 이러한 수단으로서 올바른 자리매김이 경제투쟁을 충실하게 수행하게 하고 그것이 바로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올바른 결합이다.

민주주의는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표현이다. 봉건사회의 신분제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의회제 민주주의로 표현된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이라는 자본주의 모순의 특징인 의회제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와의 분리를 제도화한다.

그러하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ㆍ의회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사회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하며, 부르주아 독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공황이라는 자본의 위기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며, 이러한 현상은 파쑈적 형태로 나타난다. 자본주의 위기ㆍ공황이 노동자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은 민주주의 훼손을 통한 파쑈적 흐름과 살인적 구조조정으로 나타난다. 자본의 위기인 공황은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위기이자 곧바로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기회이다. 이에 노동자계급에게 있어 한국 자본주의 공황은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기회이자 곧 해방된 사회 건설의 주체인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시기이다.

맑스는 ‘역사’를 인간의 활동이라 규정하였다. 노동자계급의 투쟁, 인간의 활동이 바로 역사를 개척해 간다.

 

역사가… 마치 하나의 개별적인 인격이라도 되는 듯이, 그 자신의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인간을 활동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다만 자기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일 뿐이다.23)

 

2016년 현재, 우리들의 투쟁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 투쟁이며, 거스를 수 없는 역사발전의 진군을 의미한다. 공황기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노동자계급의 진군은 바로 내가 딛고 있는 현실로부터 시작함을 의미한다.  노사과연

 

 

■ 참고자료

권정기(2016), “노동자계급은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 ≪정세와 노동≫(2016. 5.), 노사과연.

권정기(2016), “노동자계급은 주도하는 반파쇼 민주주의 통일전선을 구축하자”, ≪정세와 노동≫(2016. 1.), 노사과연.

김상복(1991), ≪노동조합운동의 전략과 전술≫, 새길.

김수행(2006),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공황≫, 서울대학교 출판부.

김태균(2015), “한국 노동자계급의 경제공황기 대응 방안”, ≪노동사회과학 제8호: 파시즘인가 사회주의인가≫, 노사과연.

레닌, “RSDLP 통일 대회에 제출하는 전술 강령”, ≪전집≫ 10권.

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레닌, ≪레닌저작집1≫, 전진.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거름.

문영찬(2014), “세계정세와 반 박근혜 전선의 유지, 발전의 조건”, ≪정세와 노동≫(2014. 10.), 노사과연.

문영찬(2015), “반파쇼 민주주의 전선 구축을 위하여”, ≪정세와 노동≫(2015. 5.), 노사과연.

엥겔스, “노동조합”, ≪맑스ㆍ엥겔스의 노동조합이론≫.

엥겔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3권), 박종철출판사.

채만수(2013), ≪노동자 교양경제학≫(6판), 노사과연.

채만수(2008), ≪피억압의 정치학≫, 노사과연.

칼 마르크스(1843), ≪헤겔 법철학의 비판≫, 아침.

칼 마르크스(1845), ≪신성가족≫, 편집부, 이웃(1990).

칼 마르크스(1866), ≪맑스ㆍ엥겔스의 노동조합 이론≫, 이경숙 옮김, 새길(1988).

칼 마르크스(1976), “제6회 라인주 의회의 투쟁”.

칼 마르크스, ≪≪프랑스에서의 내전≫을 위한 제1초고≫.

칼 마르크스, ≪자본론≫ 3권.

크리스 하먼(1995), ≪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 김종원 옮김, 풀무질.

 


 

1)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박근혜 정권의 구조조정 관련 △구조조정 과정의 투명성 강화, △국회와 충분한 협의, △부실 초래 대주주 일가의 방만 경영 책임 규명, △기업 부실 방관 정부 책임 규명, △실업대책 등 사회안전망 강화 등을 주장하면서 대체적인 구조조정 자체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2) 2013년 7월 해병대 캠프 참가했던 모 고교생 5명 사망 사건, 2014년 2월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고로 모 대학생 10명 사망 사건, 같은 해 4월 16일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인해 295명 사망과 9명 실종 사건, 10월 경기도 분당 환풍구 사건으로 인해 16명 사망과 11명 부상 사건, 11월 담양 펜션 화재로 인해 4명 사망과 6명 부상 사건, 15년 3월 인천 강화도 캠핑 화재 사건으로 5명 사망과 2명 부상 사건, 5월 메리스 사건으로 36명 사망 사건, 영유아 중심으로 사망자 239명을 내고 지금도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3) 맑스 저, 이경숙 역, ≪맑스ㆍ엥겔스의 노동조합 이론≫, 새길, 1988, pp. 78-9.

 

4)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거름, pp. 177-8.

 

5) ≪레닌저작집1≫, 전진, p. 78.

 

6) 물론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일반적으로는 경제투쟁, 정치투쟁 그리고 이데올로기 투쟁 등 3가지 영역으로 구분한다.

 

7) 맑스, ≪헤겔 법철학의 비판≫, 아침, p. 231.

 

8) 같은 책, pp. 231, 234.

 

9) 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p. 104.

 

10) 같은 책, p. 103.

 

11) 맑스, “제6회 라인주 의회의 투쟁”.

 

12) 맑스, ≪≪프랑스에서의 내전≫을 위한 제1초고≫.

 

13) 엥겔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의 노동자 당≫(≪맑스ㆍ엥겔스 저작선집≫ 3권), 박종철출판사, p. 60.

 

14) ≪레닌저작집1≫, p. 81.

 

15) 같은 책. p. 436.

 

16) 권정기, “노동자계급은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응 할 것인가”, ≪정세와 노동≫ 제123호(2016. 5.) 참조.

 

17) 크리스 하먼 저, 김종원 역, ≪마르크스주의와 공황론≫, 풀무질, 1995, p. 19.

 

18)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6판), 노사과연, 2013, pp. 494-512.

 

19) 김태균, “한국 노동자계급의 경제공황기 대응 방안”, ≪노동사회과학 제8호: 파시즘인가 사회주의인가≫, 노사과연, 2015 참조.

 

20) 맑스, ≪자본론≫ 3권, pp. 265-8.

 

21) 엥겔스, “노동조합”, ≪맑스ㆍ엥겔스의 노동조합이론≫, p. 127.

 

22) 레닌, “RSDLP 통일 대회에 제출하는 전술 강령”, ≪전집≫ 10권, p. 145.

 

23) 맑스, “최근 프로이센의 검열제도에 대한 견해”, Collected Works, Vol. 1., pp.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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