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한국의 사회운동과 레닌주의

 

문영찬 │ 연구위원장

 

 

1. 머리말

 

2008년 시작된 세계대공황은 유럽 등의 재정위기를 거쳐 중국 등 신흥국들의 위기로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다. 현재 세계의 정세와 질서를 규정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대공황인데 이로 인해 세계 질서의 통합력이 약화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세계질서의 새로운 재편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미국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국에서 지난 4월의 총선은 예상외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의 패배를 결과했는데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파씨즘으로 치닫는 박근혜 정권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민중들이 반발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결과는 한국자본주의가 겪고 있는 경제 침체 즉 경제 공황의 결과 광범위한 민중들이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이반한 결과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권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대선 후보로 영입하는 것을 통해 레임덕을 막고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 세력은 협치를 내세우고 최근에는 개헌론을 들고나오며 경제공황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지배계급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있다. 반동세력과 자유주의 세력의 이러한 협치, 연합의 창끝은 노동자계급에게 겨누어지고 있는데 구조조정을 통한 광범위한 해고, 공공부문의 성과연봉제, 일반해고 등 노동자계급에게서 최소한의 생존권과 단결의 자유조차 박탈하려 하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운동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각각의 쟁점에 대해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상태이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능력, 정치투쟁 능력은 현저히 약화된 상태인데 이로 인해 노동자계급이 반박근혜 전선, 반파씨즘 전선을 주도하지 못하고 민중들의 불만의 성장, 민중투쟁의 성과가 자유주의 세력과 소부르주아 세력에게 귀속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정치적 무능력의 상태는 첫째 박근혜 정권의 파쑈적 억압에 대해 과학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 둘째 그동안 노동자계급이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 정의당 등으로 이어지는 개량주의 세력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셋째, 쏘련 붕괴 뒤 이어져 온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해체상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당면한 반파쑈의 과제, 생존권 투쟁 등 전술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의 사상을 재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주의 세력과 개량주의 세력의 헤게모니로부터 벗어나야만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학적 전술, 정치적 노선이 가능한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이데올로기적 독립성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운동은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보면 사민주의적 경향, 기본소득론 등 소부르주아적 경향, 뜨로츠끼주의적 경향 등 난맥상을 보이고 있다. 한국 사회운동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경향으로 조각나는 과정에서 80년대의 변혁적 운동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레닌주의는 어느덧 사라지고 말았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몰락이 레닌주의를 청산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닌주의는 맑스주의를 현실에 적용하여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의 과학적 이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전쟁과 평화, 민족 문제 등 현재의 시기에도 절실한 문제들에 대해 과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술의 원칙들, 그리고 민주집중제와 당건설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조직노선을 체현했던 사상이라는 점에서 21세기 현재의 시기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론이고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현재의 정치적 무능력의 타개, 이데올로기적 독립성의 쟁취! 이를 위해서 노동자계급은 레닌주의를 다시 고려하고 학습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다.

레닌의 사상과 노선은 항상 구체적이었고 또 일체의 요소들이 상호 간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통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보면 사상의 측면, 정치전술의 측면, 조직의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걸어갔는데 이는 곧 사회주의 건설론이다.

그러면 사회주의 운동의 핵은 사상이라는 점에서 먼저 사상노선의 측면에서부터 레닌주의의 요체에 대해 접근해 보자.

 

 

2. 레닌의 사상노선

 

레닌의 정치적 역정은 짜르 러시아, 봉건제의 러시아에서 맑스주의를 정립하는 과정으로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19세기 전반기부터 별빛 같은 혁명가들, 혁명운동이 있었는데 체르니셰프스끼 등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은 반짜르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혁명적 전통을 대신하여 19세기 후반에는 나로드니끼가 지배적이 되었는데 나로드니끼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을 생략하고 농촌의 공동체에 기반하여 직접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레닌의 활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나로드니끼들과의 싸움이었는데 레닌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연구≫를 집필하여 러시아 또한 자본주의 발전의 예외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이 필연적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발전이 배태하는 노동자계급의 발전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립해 갔다. 1890년대 후반까지 레닌의 활동은 반나로드니끼와 러시아에서 맑스주의의 대중적 보급, 노동운동에서 맑스주의의 확대를 향한 노력이었다.

이후 레닌은 서유럽의 제2 인터내셔널에서 확산되어가던 수정주의에 맞서서 단호한 투쟁을 하였다. 레닌은 수정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맑스주의가 존재한 두 번째의 반세기는 맑스주의 자체 내에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조류와의 투쟁(90년대에)으로 시작되었다. …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토대에 기초하여 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주의로서, 맑스주의의 일반적 토대 위에서 투쟁을 계속한다.”1) 프루동주의, 블랑끼주의 등 맑스 당시 존재했던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조류는 맑스주의의 확대에 따라 몰락했는데, 노동운동에서 맑스주의가 지배적 조류가 되자 소부르주아적 조류는 맑스주의 진영 내부로 들어와서 맑스주의를 ‘수정’하는 길을 택했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베른슈타인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철학에서 신칸트주의, 사회주의 이론에서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닌 윤리적 사회주의를 들고나왔다. 레닌은 이들 수정주의의 원천이 자본주의에서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세력이 노동자계급의 진영 내로 들어오면서 형성되는 것임을 밝혔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반동기가 시작되었을 때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당조직 자체가 와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레닌은 두 가지 편향에 맞서 싸웠는데 첫 번째 편향이 비합법 조직에 대한 청산주의였다. 비합법 조직을 해소하고 모두 합법적 활동으로 전환하자는 우익적 주장이었는데 이는 사실상 당을 해체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역편향으로서 의회 내의 의원단을 모두 소환하여 짜르 의회에서 철수하자는 주장이 있었는데 이는 합법적 활동을 포기하자는 것으로서 당을 대중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러한 두 가지 편향을 비판하면서 합법 활동과 비합법 활동을 결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 시기, 즉, 반동기에 러시아 활동가들의 사상적 와해의 정도는 심각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레닌의 벗이었던 보그다노프로 그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버리고 마하주의, 경험비판론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에 대해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철학 저서를 집필하여 경험비판론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19세기 말까지의 과학발전의 경험을 총괄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을 발전시켰다.

1905년의 러시아 혁명 전에 러시아 혁명을 둘러싼 전략, 전술의 불일치, 그리고 당건설을 둘러싼 의견의 불일치로 당내의 두 경향으로 나뉘었던 볼셰비끼와 멘셰비끼는 반동기를 거치면서 사실상 당적 통일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조직적으로 청산주의적 입장을 보였던 멘셰비끼는 당조직이 사실상 사라졌고 단지 경향으로만 남아 있었던 반면에 전투적 조직, 비합법 조직을 유지하였던 볼셰비끼는 1912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고양기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노동운동의 다수파가 되었고 의회 내 의석에서도 멘셰비끼에 비해 월등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뜨로츠끼는 볼셰비끼와 레닌에 대해 분열주의자라는 비판을 가했다. 뜨로츠끼는 1905년 이전의 당적 통일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주장하며 볼셰비끼가 독자적 조직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통일에 대한 외침을 구실로 한 통일의 파괴”라는 글에서 뜨로츠끼를 통렬히 비판했다. 뜨로츠끼가 스스로는 볼셰비끼와 멘셰비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소분파주의를 보이면서 존재하지 않는 당적 통일을 구실로 스스로의 분파주의적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제국주의질서가 강화되면서 민족문제가 새로운 차원에서 대두되었는데 레닌은 민족자결권을 옹호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논쟁을 벌였다. 19세기에 민족문제와 민족운동은 주로 유럽적 차원의 문제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서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전화하면서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나라들, 민족들이 식민지화되면서 민족문제는 유럽적 차원을 넘어서서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대두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민족자결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만약 우리가 법적인 정의로 요술을 부리거나 추상적 정의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역사적-경제적 조건들을 검토함에 의해 민족자결권의 의미를 파악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민족자결권은 이들 민족들의 외적인 민족적 구성체들로부터 정치적 분리, 그리고 독립적인 민족국가의 형성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2) 즉, 레닌은 민족자결권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분리의 자유, 독립적인 민족국가의 형성의 권리라고 파악한다. 레닌이 이와 같이 파악하는 근거는 자본주의 발전이, 봉건제에 맞선 자본주의의 승리가 민족운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민족국가라는 형식이 자본주의 발전의 요구와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로자 룩셈부르크는 당시 러시아에 종속되어 있던 폴란드의 혁명가로서 민족분리의 요구가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강화시킨다는 것을 들어서 민족자결권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그것은 협소하며 러시아 노동계급의 입장에서는 폴란드의 민족자결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폴란드 노동계급과의 연대를 위한 필수조건임을 들었다. 그런 점에서 민족자결권은 사회주의적 성격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고 민족 분리와 민족국가 형성의 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 부르주아적인 민족주의 운동, 민족주의자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민족자결권에 대한 승인은 그러나 전 세계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 제국주의로 전화한 상태에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에 대한 제국주의의 지배가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세계적인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이들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운동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바로 민족자결권의 승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자본의 지배에 맞선 투쟁은 피억압 민족의 해방운동이라는 동맹군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를 보면 러시아 혁명 후 중국, 조선 등의 민족해방운동이 폭발적으로 발전했는데 이는 전적으로 레닌의 민족자결권에 대한 승인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한 레닌은 민족문제를 넘어서서 제국주의 질서 자체를 분석하는 길로 나아갔는데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 한창일 때 제기되었던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해 분석하면서 자본주의하에서 유럽의 통일, 유럽합중국은 불가능하거나 반동적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억압과 여타의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을 지체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주목되는 것은 유럽합중국이라는 슬로건의 분석을 통해 레닌이 일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최초로 도출한 것이었다. “불균등한 경제적 및 정치적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법칙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의 승리는 처음에는 몇몇의 혹은 심지어 단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가능하다.”3)

이렇게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열어가면서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의 와중에 당시의 전쟁과 정치를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에 들어갔는데 그것이 ≪제국주의론≫이다.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융합을 통한 금융자본의 형성과 금융과두제의 지배, 상품수출에 비한 자본수출의 비중의 비약적 증대, 자본가 단체와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세계의 분할과 재분할 등이 제국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근본요소임을 밝히면서 레닌은 사회주의 운동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결론을 내린다. 즉, 자본의 수출로 벌어들이는 이익의 증대로 이자 낳는 자본이 급증하면서 금리생활자가 증가하고 또 이윤의 일부를 노동자계급의 상층에 나누어 주게 되면서 노동운동에서 기회주의 흐름이 창출된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제국주의의 이러한 기생성을 밝히면서 제국주의는 부패한 자본주의이며, 사멸하는 자본주의이고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은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정식화하였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라는 것이 레닌의 결론이었고 그러한 결론의 올바름이 입증된 것이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1917년의 2월 혁명은 짜르체제를 무너뜨리고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수립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2월 혁명은 동시에 노동자, 병사 쏘비에트를 창출했는데 여기서 병사는 농민층이 다수였다는 점에서 레닌이 앞서 말했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쏘비에트라는 형태로 실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임시정부라는 권력과 쏘비에트라는 권력의 이중권력이었는데 여기서 레닌은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제시하여 부르주아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연속적인 전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레닌과 볼셰비끼의 노선은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노선이었는데 왜냐하면 노동자와 병사들이 무장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7월의 꼬르닐로프의 군사반란 이후 임시정부가 폭력적 탄압으로 나오자 비로소 볼셰비끼는 임시정부의 타도를 주장하고 그것은 10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사상적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레닌이 혁명을 앞둔 시점에서 집필한 ≪국가와 혁명≫이다. 임시정부의 탄압을 피해 피신하여 은둔한 상태에서 레닌은 국가의 문제, 혁명의 문제, 국가와 혁명의 관계 문제를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이 저작에서 레닌은 국가는 계급대립의 비화해성의 산물이라는 것,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결을 강제하는 국가를 의미한다는 것,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질적 전화를 하고 부르주아 의회와 달리 프롤레타리아적 대의기구는 입법과 집행의 통일 기구라는 것, 그리고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하며 국가 사멸의 경제적 조건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사멸이라는 것, 민주주의 또한 하나의 습관이 되어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고 사멸한다는 것 등을 밝혔다. 이렇게 레닌은 국가의 문제, 그리고 국가와 혁명의 연관성을 해명하고 10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10월 혁명의 승리 자체는 순탄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쟁에 얽혀 있어서 혁명에 대한 즉각적인 간섭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혁명이 발발했지만 실패로 귀결되고 제국주의 전쟁이 종료되면서 러시아 혁명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이 즉각 개시되었고 이들은 러시아 내의 반혁명 세력과 연계되어 러시아는 3년여에 걸친 내전을 겪게 되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 혁명의 사활은 제국주의 전쟁으로부터 러시아가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즉, 평화의 문제가 가장 절실한 것이었는데 객관적으로는 전쟁의 성격이 제국주의 전쟁이었고 또 주체적으로는 병사들이 지쳐있었고 광범위한 민중들이 평화를 절실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레닌은 독일에 영토의 일정 부분을 할양하고 평화를 얻고자 했으나 많은 반발을 샀고 특히 뜨로츠끼는 협상의 대표로서 독일에 대한 양보를 거부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은 더 큰 양보를 하여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고 쏘비에트 권력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 당시 러시아는 군대가 없었다. 즉, 짜르 당시의 군대는 이미 와해되어 있었고 강력한 혁명군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양보를 통한 평화만이 가능했는데 뜨로츠끼는 이러한 현실적 조건을 무시한 것이었다. 이러한 양보, 브레스트-리?스크 조약을 통해 쏘비에트 권력은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러시아 내의 혁명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러시아 혁명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을 때 독일의 카우츠키는 러시아 혁명을 비난하는 길을 걸었다. 카우츠키는 독재와 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대비시키면서 러시아 혁명이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달성된 것이 아니라 독재적 방식으로 즉, 무력으로 이루어졌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카우츠키를 비판하면서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주장하였다. “혹자는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적 방식으로 주장할 수 있다. 그 경우에 혹자는 피착취자와 착취자의 관계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아니면 혹자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경우에 혹자는 다수와 소수 간의 관계로부터 나아갈 것이다.”4) 여기서 레닌은 카우츠키가 착취자는 소수이고 피착취자는 다수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적으로 평화적으로 다수의 힘으로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하고 있다. 레닌은 민주주의 또한 계급적 성격을 가지며 따라서 단순히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착취와 피착취의 문제가 일차적이며 그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가 도출된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불가피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온전한 역사적 시기를 필요로 한다. 이 시기가 끝날 때까지, 착취자들은 불가피하게 복고의 희망을 보전하며, 이 희망은 복고에 대한 시도로 전화된다. 그들의 최초의 심각한 패배 후에 타도당한 착취자들―그들의 타도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결코 믿지 않았으며, 그러한 생각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던―은 열 배나 증가된 정력, 백배나 증가된 격렬한 열정과 증오로, 그들이 빼앗긴 “이상향”의 회복을 위한 싸움에 … 스스로를 내던진다.”5) 여기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객관적 필요성과 주체적 필요성을 다 같이 말하고 있다. 객관적 필요성은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라는 객관적 성격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불가피하게 한다는 것이다. 계급사회의 잔재, 계급대립의 유물들로 인해서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가 불가능하며 계급적 독재를 의미하는 국가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체적으로는 타도당한 착취자들의 저항이 타도당하기 전보다 ‘백배’나 더 강화되기 때문에 억압의 기능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레닌은 카우츠키를 반박하면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연관에 대한 심원한 분석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민주주의와 독재는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 연관성의 핵심은 계급적 성격의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공고화되며 거꾸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사회에 존재하는 부르주아적 요소가 약화되고 계급적 잔재가 극복될 때 발전하게 된다. 또한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발전할 때 부르주아 독재는 가장 공고화된다. 바로 그런 점에서 레닌은 카우츠키의 “순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다수와 소수의 문제 이전에 민주주의와 독재에 대한 계급적 접근이 일차적임을 주장했다.

내전이 승리로 끝나고 사회주의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대두된 문제는 당내에서 좌익공산주의의 조류의 문제였다. 좌익공산주의는 혁명적 구호를 앞세우면서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는 경향을 띠었는데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소아병≫에서 이들을 비판했다. 이 저작은 레닌이 20여 년에 걸친 볼셰비끼 운동을 총괄하면서 그 경험을 녹여서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인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회에 대한 참여의 문제,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지지의 문제, 동맹과 제휴의 문제 등을 통해 레닌은 보다 원숙한 전술원칙, 정치적 노선을 제기했다. 이 글에서 레닌이 혁명의 승리를 위한 조건으로서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지적한 것은 인상적이다. “승리는 전위만으로 얻어질 수 없다. 전체 계급, 광범위한 대중들이 전위에 대한 직접적인 지지 혹은 적어도 전위에 대한 우호적인 중립 그리고 적에 대한 지지의 배제의 입장을 취하기 전에, 전위를 결정적인 전투로 내모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범죄적이다. 선전과 선동만으로는 전체 계급, 노동인민의 광범한 대중, 자본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위해서는 대중들이 자기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가져야만 한다. 이것이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에서도 강제하는 힘으로 그리고 명백하게 확증된 모든 위대한 혁명들의 근본법칙이다.”6)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이 혁명 승리의 절대적 조건인 이유는, 혁명은 대중이 주체로 일어설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전의 단계에서는 몇몇 인텔리의 주도성이 주요할 수 있지만 실제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필요하며, 대중이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결단하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좌익공산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일종의 좌편향에 대한 비판인데 이는 우편향에 대한 비판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익적 개량주의 혹은 멘셰비끼는 소부르주아성이라는 계급성의 문제였다면 좌편향, 좌익공산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역량의 미성숙의 징표로서 교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스페인 내전에서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공화국에 대한 반란처럼 좌편향이 교정의 대상을 넘어서 실천적인 위험으로 전화될 소지는 그것이 ‘편향’이라는 점에서 존재한다.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이 승리를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레닌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레닌은 여기서 더 나아가 대중이라는 개념이 의미하는 바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투쟁의 성격의 변화에 따라, 역사발전의 단계에 따라 변화하는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나는 “대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단지 몇 마디를 하고 싶다. 그것은 투쟁의 성격이 변화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 운동에서 그리고 멘셰비끼에 대한 우리의 투쟁의 역사에서 여러분은 수천의 노동자들이 운동에 명확한 대중적 성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많은 사례를 발견할 것이다. … 운동이 확산되고 강화된다면, 그것은 점차적으로 혁명으로 발전한다. … 혁명이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대중”이라는 개념은 달라지게 된다: 수천의 노동자들은 더 이상 대중이 되지 않는다. … “대중”이라는 개념은 변화를 겪는데 그래서 그것은 다수 그리고 노동자만의 다수가 아니라 모든 피착취자들의 다수를 의미한다. … 절대적 다수가 언제나 본질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승리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본질적인 것은 노동계급의 다수만이 아니라 시골의 근로대중과 피착취 대중의 다수이다. …”7)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을 강조한 레닌은 혁명의 승리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조건으로서 대중의 지지를 고려하며 또한 대중의 범위가 투쟁의 성격의 변화에 따라, 발전의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변증법적인 통찰을 하고 있다. 선전 단계에서 대중의 범위는 수십 명으로 족할 수 있다. 선동 단계에서라면 대중의 범위는 수백, 나아가 수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향한 실제적인 투쟁과 나아가 권력의 유지가 문제되는 상황에서 대중의 범위는 전혀 달라지며 노동자계급과 나아가 피착취 대중의 다수의 지지와 참여가 관건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대중의 지지를 전취하기 전에 결정적 전투에 나서는 것은 “범죄적”이라고 레닌은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레닌의 여정과 러시아 혁명의 발전을 축으로 고찰한 레닌의 사상노선의 대략이다. 여기서 사상노선이라고 제시된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구성요소인 강령, 조직, 전술 중에서 강령과 유사한 내용을 갖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상은 조직, 전술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조직사상, 전술원칙, 전략사상 등과 같이 통일되어 있다. 다만 강령, 조직, 전술이라는 접근이 아니라 사상, 정치, 조직노선이라는 접근을 하는 것은 현재의 실천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다.

 

 

3. 레닌의 정치노선

 

레닌은 한편으로 철저하게 실천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과학적이었다. 맑스 또한 실천과 이론적 과학성이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맑스와 레닌은 일정한 차이가 있는데 맑스는 노동자계급의 발생기에, 노동운동의 태동기에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개척해 갔다면 레닌은 이미 존재하는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러시아에서 혁명운동을 개척해 갔다. 또한 레닌은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직접적으로 목표로 하는 시대, 제국주의 시대의 사회주의 운동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조직과 전술에서 맑스와 엥겔스 시대보다 구체적인 진전을 이루어냈다. 그런 점에서 레닌의 정치노선은 맑스와 엥겔스 시대보다 더 정교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레닌은 철저히 맑스주의를 고수하였고 맑스주의 원칙을 러시아의 현실과 유럽적인 규모에서 창조적으로 적용시켰다.

레닌의 정치적 역정은 당시 유럽에서 형성되고 있던 제2 인터내셔널 내의 혁명적 조류와 개량주의 조류(수정주의의 조류)의 존재에 의해 규정되었다. 레닌은 서유럽의 선진적인 이론과 경험을 흡수하면서 러시아에서 혁명적 조류를 건설하고자 했다. 레닌의 저작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시 유행하던 ‘비판의 자유’라는 구호를 비판하는데 거기서 레닌은 비판의 자유가 실은 맑스주의 원칙에 대한 수정의 자유를 의미하며 이러한 수정주의가 유럽적 규모에서, 제2 인터내셔널 내에서 형성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고찰을 통해 러시아에서 유럽적 규모의 개량주의, 수정주의와 구분되는 혁명적 조류의 건설이 필요함을 주장하며 레닌은 사회주의 정치의 근본원칙들을 개진한다.

레닌은 사회주의는 계급투쟁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과 나란히 발전하는 것이며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도출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여기로부터 레닌의 유명한 정식, ‘외부로부터’(from without)이라는 정식이 나온다. 사회주의 의식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의 외부로부터, 목적의식적으로 도입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의식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직접적 대립을 의미하는 경제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계급들의 상호관계와 그들의 국가와의 연관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이 점에서 사회주의자의 역할, 나아가 사회주의 당의 역할이 도출되며 그들의 실천인 사회주의 정치의 본질이 나온다.

레닌은 “과정으로서의 전술”이라는 경제주의자들의 전술관을 비판하며 이에 대해 “계획으로서의 전술”을 대치시킨다. 그러면서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자연발생적인 정치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주의 정치를 고찰하면서 그에 대해 사회주의 정치를 대치시킨다. “자연발생적인 노동계급운동은 그 자체로는 단지 노동조합주의만을 만들어 낼 수 있고(그리고 불가피하게 만들어 낸다) 노동계급의 조합주의 정치는 정확히 노동계급의 부르주아 정치이다. 노동계급이 정치투쟁에 참여하고 심지어 정치 혁명에 참여한다고 해도 그 사실이 본질적으로 그 정치를 사회민주주의 정치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8) 노동조합 또한 정치적 역할이 있고 정치투쟁을 수행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정치는 일차적으로 노동자의 경제적 조건의 개선을 목표로 하고 또 부르주아 체제 내에서 노동자의 지위의 개선을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노동조합주의 정치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띠는데 레닌은 이를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 노동조합주의 정치와 구분되는 사회주의 정치는 어떠한 것인가?

레닌이 사회주의 정치의 핵으로 들고 있는 것은 ‘포괄적인 정치폭로’이다. “이러한 억압이 사회의 가장 다양한 계급들에 영향을 주는 한, 그것이 생활과 활동의 가장 다양한 영역들―직업적, 시민적, 개인적, 가족, 종교적, 과학적 등등―에서 표현되는 한, 우리가 그 모든 측면들에서 전제에 대한 정치적 폭로의 조직화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을 발전시킨다는 우리의 과제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지 않는가?”9) 이는 대중의 정치적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 내부를 넘어서서 사회를 구성하는 일체의 요소들 속에서 나타나는 억압에 대한 폭로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폭로는 경제적 측면에만 제한되는 것은 아닌데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적으로, 이러한 것들이 경제적인 것에 기초한 정치적 선동으로 제한되지 않을 때만, “노동대중의 활동을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정치선동의 필수적인 확대를 위한 기초적인 조건은 포괄적인 정치폭로의 조직화이다. 이러한 폭로를 수단으로 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대중들은 정치적 의식과 혁명적 활동으로 훈련될 수 없다.”10) 나아가 레닌은 경제적 요구투쟁을 개량투쟁으로 파악하면서 이를 사회주의 정치 속에서 다음과 같이 위치 지운다.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는 언제나 개량을 위한 투쟁을 그 활동의 부분으로 포함해 왔다. … 한마디로 그것은 전체의 부분으로서 개량을 위한 투쟁을 자유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종속시킨다.”11) 경제주의자들은 경제투쟁을 통한 정치적 의식의 제고, 그리고 나아가 경제투쟁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주장했던 반면에 레닌은 사회의 제 계급의 관계에 대한 분석과 일체의 억압에 대한 포괄적인 정치폭로를 통한 정치적 의식의 제고를 주장했고 경제투쟁의 요구는 일종의 개량으로서 자유, 즉,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파악했다. 그리하여 레닌은 노동자계급은 민주주의 획득을 위한 투쟁에서 전위투사이며 사회주의자는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은 자연발생적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정치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부르주아 정치이며 사회주의자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넘어서는 전체 사회 계급들의 상호관계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일체의 정치적 억압을 폭로하는 포괄적인 정치폭로, 정치선동을 조직해야 하며 그것이 사회주의 정치의 본령이고, 경제적 요구, 개량투쟁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사회주의 정치관이라 할 수 있다. 1917년의 혁명까지의 그리고 이어지는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레닌의 치열했던 정치적 역정은 바로 이러한 사회주의 정치관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레닌의 정치전술의 측면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이라는 저작에서이다. 이 저작은 먼저 러시아에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적 성격을 띠는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그러한 혁명을 19세기의 유럽과 달리 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을 제기했다. 부르주아 혁명인데 왜 부르주아 계급의 주도성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장해야 하는가? 그것은 19세기와 달리 20세기 들어서서 부르주아 계급의 진보성이 사라지고 부르주아들이 혁명에 대해 움츠러들고 혁명보다는 반동세력과의 타협을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71년의 빠리꼬뮌의 충격 이후로 부르주아들은 노동자계급의 성장에 겁을 먹게 되었고 독일의 부르주아지는 혁명적 방식이 아닌 타협적 방식으로 독일의 지배계급과 연합하여 부르주아 사회로의 이행을 추구했다. 이러한 경향은 러시아에서 더욱더 심화되었는데 러시아의 부르주아들은 사회의 발전이 객관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일정에 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짜르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이 아닌 타협을 추구했는데 레닌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조류를 간파하고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정립하고 그를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과의 동맹을 전략으로 설정했다.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의 문제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혁명의 결과는 노동계급이 부르주아지의 보조자, 전제에 맞선 공격력에서는 강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보조자의 역할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인민 혁명의 지도자의 역할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12) 혁명의 성격은 주체의 역량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회발전의 단계라는 역사적 조건에 따라 객관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혁명의 성격은 봉건제라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 그 모순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 점에서 러시아에서 혁명은 명확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어느 계급이 주도할 것인가에 따라 혁명의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진다. 부르주아지가 주도할 경우 그것은 짜르와의 타협으로 끝나고 봉건제, 지주의 억압이 잔존하는 가운데 지루한 개량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가장 혁명적인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단지 투쟁부대로서 역할하는 것을 넘어서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움켜쥔다면, 그리고 자신의 주위에 동맹군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인민혁명’의 방식으로 수행되며 그 결과 봉건제가 일소되고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되며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지속적으로 발전하면 그것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된다. 타협을 통한 개량인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하의 인민혁명인가? 이것이 레닌이 1905년 혁명을 앞두고 정식화한 전략의 문제였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전체 인구 중에서 노동자계급이 차지하던 비율은 매우 낮았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힘은 그 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차지하는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위상, 즉, 무산자로서 혁명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점과 또한 생산에서 차지하는 노동자계급의 결정적 역할에서 나온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당시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의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1917년 혁명 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많은 독특한 역사적 조건들하에서, 후진적인 러시아는 혁명의 시기에 피억압 대중들의 독립적 활동의 급속한 성장(이것은 모든 위대한 혁명들에서 일어났다)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성은 전체 인구에서 그것의 비율보다 한없이 크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주었다.”13)

레닌은 멘셰비끼의 전략노선에 맞서 혁명적 전략 노선을 발전시켰다. 이 당시는 아직 전략과 전술의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레닌의 전술 개념은 오늘날의 전략과 전술 개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레닌은 전술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당의 전술에 대해, 우리는 당의 정치적 행위, 혹은 그것의 정치활동의 성격, 방향, 그리고 방법들을 의미한다. 전술적 결의는 새로운 과제 혹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전체로서 당의 정치적 행위를 정확히 규정하기 위하여 당대회에 의해 채택된다.”14) 여기서 레닌은 전술의 전제가 새로운 과제 혹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 정세라고 규정한다. 즉, 전술은 정세와의 관련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새로운 정세에 조응하는 당의 정치적 행위, 태도, 입장을 결정하는 것이 곧 전술이다. 또한 전술은 정치활동의 성격, 방향, 방법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전술의 총체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즉, 전술은 새로운 정세 속에서 요구되는 당의 총체적인 정치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며 어떤 부분적 행동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당의 전술 결의는 반드시 총체적인 내용을 담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전술은 정세에 조응하는 실천적인 정치행위라는 점에서 선전과 다르다. 이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살펴보자. “다른 한편으로 결의는 단지 임시혁명정부만을 다루고 있고 다른 어떤 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권력의 장악” 일반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회가 이것을 그리고 유사한 문제들을 제거한 것은 올바랐는가? 의심할 여지없이 올바랐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 정치적 상황은 결코 이러한 문제들을 당면한 쟁점으로 만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5) 여기에는 전술과 선전의 차이가 잘 녹아 있다. 당시 러시아의 정세는 짜르의 타도, 제헌의회의 수립이 쟁점이 되는 상황이었다. 이 쟁점에 대한 레닌의 전술은 짜르의 타도와 제헌의회의 수립을 부르주아적인 타협의 방식이 아니라 혁명적 방식으로 해야 하며 그를 위해 임시혁명정부라는 슬로건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당대회의 결의는 그렇기 때문에 임시혁명정부라는 슬로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레닌은 이것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레닌은 당대회의 결의에서 ‘권력의 장악’의 문제가 빠져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것은 지금의 쟁점이 아니라고 보았다. 즉, 당시의 정세에서 권력 장악 자체가 쟁점이 아니며 권력 장악은 당시의 정세에서는 여전히 선전의 과제 즉, 권력 장악 ‘일반’의 문제에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 전술 결의에 담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레닌은 전술 결의에는 선전의 과제를 빼고 쟁점에 대한 실천적 결의만을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권력 장악은 언제 쟁점이 되는가? 그것은 다수 대중이 짜르의 타도를 자신의 입장으로 갖게 되고 짜르의 퇴진 이후 권력의 성격이 무엇인가가 이론적 쟁점이 아니라 현실 정치적 쟁점이 될 때이며 그때 비로소 권력 장악의 문제는 선전이 아닌 전술의 영역이 된다. 선전은 소수에 대한 이론적 접근의 문제라면 전술은 다수 대중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고 전술 결의는 이론의 영역을 넘어서는 현실 정치의 영역의 문제이다.

그러면 레닌이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문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립하는가를 살펴보자. 레닌은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라고 고찰하면서 그로부터 노동자 당의 정치적 독립성의 필요성을 도출한다. “이 진리에 대한 주장은 이론적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정치의 견지에서도 거대한 중요성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로부터 현재의 “일반 민주주의” 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완전한 계급적 독립성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16) 부르주아 혁명 자체는 그 객관적 성격으로 인해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세력과 구분되는 계급적,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며 만약 이러한 독립성의 유지가 없다면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혁명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에게 정치적으로 ‘용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치적 독립성을 전제로 레닌은 철저한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길을 논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들로부터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의 가일층의 발전을 제외한 어떤 것에서 구원을 찾는 것은 반동적이라는 사상이 따라 나온다. 러시아와 같은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로부터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불충분한 발전으로 고통받는다. … 부르주아 혁명이 더 완전하고, 더 단호하고, 그리고 더 일관될수록,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그리고 사회주의를 향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더 확실할 것이다.”17) 나로드니끼는 자본주의 발전을 건너뛰고 사회주의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레닌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제외한 구원의 길은 반동적이라고 규정하면서 나로드니끼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 즉,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필연성을 인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한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를 노동자계급이 주도함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접근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변증법적인데 바로 필연성의 지양으로서 자유의 쟁취를 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이로써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이론을 정립했다. 그런데 헤게모니가 되기 위해서는 따르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곧 동맹의 문제이다. 레닌은 동맹으로서 부르주아지가 아닌 농민층을 주목하는데 소부르주아적인 농민과 부르주아들의 ‘동요’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그런데 농민층의 불안정성은 부르주아지의 불안정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현재 농민층은 사적 소유의 절대적 보전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사적 소유의 주요한 형태의 하나로서 지주의 영지의 몰수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18) 부르주아지의 불안정성과 농민층의 불안정성은 외관상으로는 비슷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있는데 부르주아지는 짜르로 대표되는 지주계급과의 타협으로 부르주아적 길로 가려 하기 때문에 근본적 불안정성이 있는 반면에 농민층은 소부르주아로서 자기 토지의 보전에 관심이 있지만 그럼에도 현재는 지주토지의 몰수를 통한 봉건적 질곡에서 해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당면 혁명에서 혁명성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렇게 동맹의 문제를 해결한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의 최대치로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대안 권력으로 상정한다. 이 독재는 부르주아적 틀 내에서,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혁의 과제를 최대치로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그를 통해 노동자계급이 발전하고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강화된다면 서서히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1905년 당시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미성숙했고 또 짜르체제가 비록 러-일 전쟁에서 패배했다 하더라도 강력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1차 혁명은 노동자와 민중들의 봉기를 정점을 하는 혁명적 정세를 창출했음에도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기나긴 반동기가 시작되고 1912년이 되어서야 노동자계급의 대중운동과 당운동은 다시 살아나고 이때 볼셰비끼는 ≪쁘라브다≫라는 합법 일간지를 창간하고 또 선거에서는 노동자 지구에서 다수를 당선시켜 의회에 진출한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의 정세는 다시 암흑기로 접어드는데 이러한 암흑기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가 퇴진하면서 끝나게 된다.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레닌은 그 전쟁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영토의 점령과 다른 민족들의 복속, 경쟁하는 민족들의 파괴와 그들의 부에 대한 약탈, 러시아, 독일, 영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노동대중의 관심을 국내적인 정치적 위기로부터 돌리는 것, 노동자들의 단결의 파괴와 민족주의적인 우민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한 그들의 전위의 절멸 ― 이것들이 현재의 전쟁의 유일한 실제적 내용, 중요성 그리고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19) 이것이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규정할 때의 실제적인 내용으로서 레닌이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전쟁은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전화되고 금융자본의 지배가 전일적으로 되면서 제국주의 간의 모순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당시 독일의 비약적인 자본주의 발전은 제국주의 간 모순을 격화시켰는데 영국은 자본의 축적 정도와 식민지의 확대에서 앞서 있었지만 자본주의 발전 속도가 매우 느려지고 있었던 반면에 독일은 자본주의 발전의 속도는 매우 급속했지만 축적된 자본의 양은 영국에 비해 적었고 또 식민지 점령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영국, 프랑스와 독일 간의 대립을 전쟁의 폭발로 이끌게 했다. 이렇게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제2 인터내셔널의 세력들의 다수는 ‘조국방위’라는 구호 아래 전쟁공채에 찬성표를 던지고 노동자대중을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것에 동의했다. 이로서 제2 인터내셔널은 파산했고 소수파였던 짐머발트 좌파를 중심으로 제3 인터내셔널의 건설이 모색된다. 레닌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를 기치로 내세운다. “그러나 모든 선진적 나라들에서 전쟁은 사회주의 혁명의 슬로건―전쟁의 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어깨를 더욱더 무겁게 누를수록, 그리고 대규모의 자본주의의 거대한 기술적 진보라는 조건에서 현재의 “애국적인” 야만주의의 공포 후에 유럽의 재창조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미래의 역할이 더욱더 적극적으로 될수록, 더욱더 긴급하게 되는 슬로건―을 일정에 올려놓았다. … 현재의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는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며, 빠리꼬뮌의 경험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바젤결의(1912)에서 틀이 잡힌 것이다.”20) 당시 러시아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변혁의 성격은 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서유럽의 선진 나라에서는 전쟁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이 일정에 올랐다는 것이 레닌이 개괄한 혁명의 전망이다. 이러한 레닌의 전망은 타당한데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은 짜르의 퇴진을 핵으로 하는 민주주의 혁명이었지만 그 뒤 발생한 독일혁명 등은 비록 유산되었지만 사회주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의 성격은 각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제국주의 전쟁은 각각의 나라에서 혁명적 위기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으며 레닌은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 전화!’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여 짜르가 퇴진하고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미의 관심사는 전쟁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인내심을 갖고 대중을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정복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필요한 것일 뿐이라고 전쟁을 받아들이는 혁명적 방위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믿음을 갖고 있는 광범한 부문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정직하다는 견지에서, 그들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는 견지에서, 특별한 숙고와 끈질김, 인내를 갖고서, 대중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설명하고, 자본과 제국주의 전쟁 간에 존재하는 뗄 수 없는 연계를 설명하고 그리고 자본을 타도함이 없이는 진정한 민주주의적 평화, 폭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닌 평화를 통해, 전쟁을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21) 여기서 레닌은 당시의 최대의 쟁점이었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전쟁의 원인은 바로 자본에 있으며 자본의 이익을 위해 전쟁이 수행되고 있으며 따라서 자본을 타도함을 통해서만 진정한 민주주의적 평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설명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레닌은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과학적 태도를 견지할 것과 다른 하나는 당시의 정세가 대중들이 짜르를 타도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 정부의 헤게모니하에 놓여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레닌은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아닌 쏘비에트야말로 노동자와 인민의 진정한 정부라고 말한다. “쏘비에트 정부가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의 혁명적 정부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이 정부가 부르주아지의 영향력하에 굴복하는 한, 그들의 전술의 오류에 대해 인내심 있고 체계적이고 끈질기게 설명하는 것, 특별히 대중들의 실천적 필요에 맞는 설명을 하는 것임을 대중들이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22) 레닌은 대중들이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헤게모니하에 놓여 있는 한 진정한 혁명정부는 쏘비에트임을 대중들에게 인내심 있게 설명하는 것이 당시 정세에서 핵심적 과제라고 보고 있다. 이때 레닌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자본을 타도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임시정부의 타도를 즉각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니고 쏘비에트로의 평화적인 권력이양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평화노선은 당시 노동자들과 병사들, 즉 농민이 무장하고 있었다는 조건에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2월 혁명 직후에는 두 개의 권력, 이중권력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이중권력이란 무엇인가? 임시정부, 부르주아지의 정부와 나란히, 또 하나의 정부가 부상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약하고 갓 태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의심의 여지없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성장하는 하나의 정부가 있다 ―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의 쏘비에트.”23) 레닌은 이러한 이중권력의 과도적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중권력은 단지 혁명의 발전에서 과도적 성격을 표현할 따름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보다 더 나아갔지만,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순수한” 독재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이다.”24) 이렇게 이중권력의 본성을 파악했기 때문에 레닌은 ‘모든 권력을 쏘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제시했고 대중들이 부르주아 임시정부로부터, 나아가 이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멘셰비끼 등으로부터 이반하기를 기다리면서 평화적 이행의 노선을 고수한다. 이러한 평화적 이행 노선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최초의 내전은 끝났다; 우리는 지금 두 번째의 전쟁―제국주의와 무장한 인민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이행기의 시기에, 무장력이 병사들의 수중에 있는 한, 밀류꼬프와 꾸치꼬프가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한, 이 내전은 우리로서는 평화적이고, 장기적이고, 그리고 인내심 있는 계급적 선전으로 전화된다.”25) 여기서 레닌은 두 가지를 조건으로 평화적 이행 노선을 말하는데 그 조건들은 첫째, 무장력이 병사 등 인민의 수중에 있을 것, 둘째 임시정부가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라 볼셰비끼의 노선은 평화적인 장기간의 ‘선전’의 노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고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쏘비에트의 멘셰비끼는 서서히 대중적 영향을 상실해 갔다. 그리고 7월에 군부의 꼬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노동자들이 철도를 봉쇄하여 군대의 이동을 저지하는 등의 실력행사로 반란은 실패한다. 이후 러시아 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는데 대중의 압도적 다수가 볼셰비끼를 지지하게 된다. 또한 임시정부는 폭력과 탄압에 의존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레닌은 피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10월 혁명이 일정에 오르고 볼셰비끼는 압도적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쏘비에트 권력을 수립한다.

이상의 내용이 10월 혁명의 승리까지 레닌의 정치적 역정의 대략이다. 여기서는 레닌의 사회주의 정치관, 전술노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정치노선의 핵심은 정세와 전술의 문제인데 선전과 전술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전술원칙이 어떠해야 하는가가 주요하다. 레닌은 사회주의 혁명을 실행하기까지 대중의 절대적 다수가 볼셰비끼를 지지하게 되는 때를 기다렸고 그 기간 동안 인내심 있게 선전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군사반란의 악수를 두고, 폭력으로 나오면서 대중의 지지가 급격히 볼셰비끼로 쏠리고 임시정부의 정치적 힘이 고갈되었을 때 볼셰비끼는 거의 평화적인 방식으로 임시정부를 타도했다. 이 과정에서 전쟁과 평화라는 주요 고리를 레닌과 볼셰비끼가 움켜쥐는 것을 통해 승리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 전술의 운용에서는 주요고리를 파악하고 그것을 대중의 힘을 통해 뒷받침하는 것이 관건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4. 레닌의 조직노선

 

아무리 사상이 굳건하고 또 정치전술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을 조직으로 뒷받침하고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현실은 변혁되지 않는다. 선전의 단계에서 조직문제는 부차적이다. 느슨한 써클의 수준으로도 선전의 과제는 상당부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정치적 활동을 하려면, 정세의 쟁점에 대한 전술을 세우고 이를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며 그때는 조직노선의 문제가 일정에 올려지게 된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전국적 정치신문을 제기하며 조직노선을 개진한다. ““고용주와 정부에 대한 경제투쟁”은 결코 전 러시아적인 중앙집중화된 조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따라서 이러한 투쟁은 한 번의 총공격에서 모든 정치적 반대, 항의 및 분노의 표현을 결합시키는 그런 조직, 직업적 혁명가들로 구성되고 전체 인민의 실제적인 정치적 지도자들에 의해 지도되는 조직을 발생시킬 수 없다. 이것은 이유가 있다. 어떤 조직의 성격은 자연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그것의 활동의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26)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직을 하나의 형식으로 파악하는 레닌의 관점이다. 즉, 조직은 그것이 어떤 정치적 활동을 수행하는가라는 내용에 의해 결정되는 일종의 형식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직문제는 복잡한 것,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것이라는 등의 조직에 대한 일반적 관점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직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제기하는, 조직은 정치활동의 내용에 의해 규정되는 형식이라는 관점은 바로 조직문제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정치활동의 성격의 문제인지, 아니면 조직의 형식의 문제인지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며 먼저 수행해야 할 정치활동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확보한 후에 조직의 문제를 검토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레닌은 노동조합조직과 구분되는 혁명가들의 조직, 전위조직을 상정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의 구분은 바로 그것이 수행해야 하는 정치활동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동조합 조직은 노동자 대중의 경제적 조건의 개선을 목표로 개별자본가와 정부에 대해 투쟁을 한다. 그러나 수행해야 할 활동이 전제정부에 맞서는 민주주의 투쟁이고 나아가 그것을 사회주의 혁명투쟁으로 전화시키려 할 때는 강력한 통일성을 갖는 전위조직이 불가피하게 된다.

전위조직 나아가 전위당은 포괄적인 정치폭로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질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활동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직접적 대립이라는 경제투쟁을 넘어서서 사회의 전 계급들의 상호관계와 국가와의 관계에서 투쟁을 요구하며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넘어서는 의식적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전위조직의 현실적 활동의 내용은 일차적으로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데 첫째는 사회주의의 선전, 선동이며 둘째는 당면한 정치투쟁, 정치폭로의 조직화이다. 사회주의의 선전, 선동 없이 정치폭로 혹은 전술적 과제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주의 세력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어떠한 조건과 난관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를 선전, 선동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때만 그 조직과 활동가가 사회주의 조직, 사회주의자로 규정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전제이고 정체성의 문제이다. 전술은 그러한 선전 활동과 달리 실제 정치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포괄적인 정치폭로와 전술적 슬로건의 결정, 대중의 힘에 의해 전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레닌은 전위조직이라는 상을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레닌이 전위조직의 조직원리로 제기한 민주집중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민주집중제는 전위조직의 조직원리만이 아니라 20세기의 100여 년에 걸쳐 노동조합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계급의 조직 그리고 운동조직의 조직원리가 되어 왔었다. 그러나 민주집중제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으며 부르주아들에 의해서는 전체주의 조직원리로 매도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민주집중제는 중앙집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통일이다. 중앙집권주의가 필요한 이유는 현실의 정치투쟁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전 조직원이 일사불란하게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있어야 지배계급과 국가에 맞선 치열한 정치투쟁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멘셰비끼와 같이 중앙집권주의를 부정하고 느슨하게 산개된 써클의 망으로는 ‘정부에 맞선 경제투쟁’은 수행할 수 있을지 몰라도 변혁적인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중앙집권주의는 민주주의 원리와 통일되어야만 한다. 모든 성원들이 지도부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권리를 가지고 능동적 주체로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만 전위조직, 전위당은 살아 있는 조직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 강력한 중앙집중과 다른 한편으로 철저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통일될 수 있는가? 운동조직에서 중앙집중은 보고의 집중을 의미한다. 부르주아적인 조직에서 중앙집중은 돈과 권력의 집중을 의미하지만 노동자계급에서 중앙집중은 정확한 보고를 통한 올바른 정치방침, 통일된 정치방침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중앙집중과 민주주의가 유기적으로 통일되기 위해서는 분권화가 필수이다. 전위당, 전위조직의 부문조직과 지역조직, 그리고 그 밑의 지구조직 등은 각각 책임 있는 권한을 가져야만 한다. 유기체의 신체는 근육조직, 장기조직, 감각기관, 신경조직, 두뇌기관 등등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것들은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기 위해 투쟁하는 전위조직은 최고도의 유기성을 지녀야만 하고 그것은 철저한 분권화를 의미한다. 즉, 전위조직은 한편으로 일사분란하게 통일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성원과 기관들이 자유롭게 투쟁의 영역을 개척하고 자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존재이다. 여기서의 자유개념은 필연성의 지양으로서 자유를 의미한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분권화라는 개념 대신 전문화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전문화(specialisation)의 결여는 우리 기술의 가장 심각한 결함 중의 하나이다. 그것에 대해 B-v는 정당하고 통렬하게 불평하고 있다. 우리의 공통의 대의에 입각한 각각의 분리된 “활동”(operation)이 더 작게 될수록, 우리는 이런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사람(대부분의 경우에 직업적 혁명가가 되기에는 전혀 불가능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 한마디로 전문화는 중앙집권주의를 불가피하게 전제하고 그리고 또한 그것을 요구한다.”27) 여기서 레닌이 사용하는 전문화의 개념은 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분권화를 전제로 한다. 세세한 것 하나하나 혹은 각각의 영역에 대해 중앙의 지도부가 의견과 방침을 내는 것은 써클의 수준에서는 가능하지만 조직의 규모가 100명 이상이 될 때는 불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분권화를 수행할 때만 그 조직은 활력 있게 되고 발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레닌이 말했듯이 전문화 혹은 분권화의 전제는 강력한 중앙집중적인 통일이다. 분권화가 조직의 분열로 귀착되지 않기 위해서는 보고의 집중을 기초로 하는 통일성의 제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통일성을 근거지우는 것은 과학적 노선 이외에는 없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당적 통일을 형성해 가는 유력한 무기로서 전국적 정치신문을 제기했다. 20세기 초반의 조건에서 규칙적으로 발행되는 비합법적인 정치신문은 당건설의 유력한 무기로 작용했다. 전국적 정치신문이 당건설의 무기가 되고 선전가일 뿐만 아니라 배포망을 통해 조직가로서도 역할하는 것, 즉 사상적 통일과 조직적 통일의 무기로서 전국적 정치신문은 당시로서는 창조적인 발상이었고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지금의 시점에서 레닌 당시를 그대로 흉내낼 수는 없다. 인터넷과 SNS를 통한 정보의 홍수가 일상인 현실에서 레닌을 교조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지금의 현실에서 당건설의 무기가 무엇인가는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 운동의 현실에 대한 천착을 통해 서서히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당건설의 구체적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향후의 과제로 미루더라도 당이 무엇인가에 관한 레닌의 견해는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당은 1890년대 후반에 창건되었다. 그러나 당건설 직후 많은 당원들이 검거되었고 당은 사실상 와해된다. 즉, 최초의 당은 일종의 선언적 당으로 머물렀다. 그리고 러시아의 노동운동이 발전하고 맑스주의 보급이 확대되고 레닌이 ≪이스끄라≫를 통해 실질적인 당조직을 형성해 가면서 1903년에 2차 당대회가 열렸고 이를 통해 러시아에서 당은 실질적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당원자격 규정을 둘러싸고 볼셰비끼와 멘셰비끼가 나뉘었고 그리하여 당건설 이후 당적 통일은 선언적인 상태에 머물고 실질적으로는 볼셰비끼 당과 멘셰비끼 당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두 그룹은 당내의 경향이라 할 수 있었다. 레닌은 당대회 직후 당대회를 분석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이다. 이 저작에는 당이 무엇인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20세기의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당은 대부분 이 조직노선에 따라 건설되었다.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에서 나타난 근본적인 사상은 ‘위로부터 당건설’의 사상이다. 즉, 당대회를 통한 당건설의 사상이다. “물론 조직문제에서 기회주의자들의 완전한 입장은 1항에 대한 논쟁에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산개되어 있고, 강력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은 당조직에 대한 그들의 옹호; 당대회와 그것에 의해 수립되는 기구들로부터 출발하여 위로부터 밑으로 당을 건설한다는 사상(“관료주의적인” 사상)에 대한 그들의 적대; 모든 교수, 고등학교 학생 그리고 모든 “파업참가자들”이 스스로를 당원으로 선언하는 것을 허용하는, 밑으로부터 나아가려는 그들의 경향…”28) 볼셰비끼는 당대회를 통한 당건설, 위로부터의 당건설을 주장한 반면 멘셰비끼는 당대회의 실질적 권위를 부정하고 당을 느슨한 연합으로 이해하면서 교수, 학생, 파업참가자들이 스스로를 당원으로 선언할 수 있는 당을 그리고 있었다. 위로부터 당건설과 밑으로부터 당건설의 대립! 위로부터의 당건설은 언뜻 보기에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고 멘셰비끼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당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의 대립이 요약되어 있다. 레닌과 볼셰비끼는 당을 사상적 통일을 핵심으로 하여 ‘사상의 힘을 권위의 힘으로 전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멘셰비끼는 이러한 강력한 통일성을 부정하고 기존의 써클적 질서를 용인하면서 그러한 써클들의 느슨한 연합으로서 당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당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2차 당대회는 당원자격을 둘러싼 논쟁을 통해 다수파(볼셰비끼)와 소수파(멘셰비끼)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당대회의 의미에 대해 레닌은 규약 18조의 규정을 인용한다. “대회의 모든 결정들과 그것이 수행한 모든 선거는 당의 결정이며 모든 당조직들을 구속한다. 그것들은 누구에 의해서도 어떠한 구실로도 도전받을 수 없고 오직 다음 당대회에 의해서만 취소되거나 수정될 수 있다.”29) 이와 같은 규약의 규정을 통해 당대회는 최고의 권위를 갖는 기관이 되는 것인데 멘셰비끼는 당대회 이후 당대회의 결정을 사실상 무시하였고 레닌은 이를 비판하고 있다.

다음으로 쟁점이 되는 것이 당적 질서가 써클적 질서의 온존을 용인하는가 아닌가였다. 당인가, 써클인가가 쟁점이었다. “그리하여 쟁점은 다음과 같이 되었다: 써클인가 아니면 당인가? 대의원들의 권리가 가상적인 권리라는 이름으로 혹은 다양한 조직들과 써클들의 규약의 이름으로 당대회에서 제한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모든 하부의 조직들과 이전의 그룹들이 진정으로 공식적인 당의 기관들이 창출되는 과정에서 완전히, 명목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당대회 앞에서 해산되어야 하는가?”30) 처음에는 위로부터 당건설인가, 아래로부터 당건설인가를 둘러싸고 당대회의 권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되었다면 이후에는 당대회를 통한 당건설이 이루어지는 현실 앞에서 써클적 질서를 해소할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가 문제되었던 것이다. 다양한 써클들은 당건설과 써클적 질서의 유지가 배치되지 않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중앙집권적인 당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고 이 점이 당원 자격 조항에 대한 논쟁을 계기로 폭발했다.

볼셰비끼는 당원 자격에 대해 당 강령을 받아들이고 하나의 당조직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자로 규정했던 반면에 멘셰비끼는 당원 자격에 대해 당강령을 받아들이고 활동하는 것은 승인했으나 하나의 당 조직에 참가한다는 규정을 첨가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이것은 당적 질서를 각각의 써클의 느슨한 연합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단일한 통일성을 갖는 중앙집권적인 조직으로 할 것인가의 대립이었다. 이렇게 당인가 써클인가의 쟁점은 당적 질서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로 문제가 좁혀졌는데 이러한 논쟁을 통하여 당과 계급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가 쟁점이 되었다. 여기서 레닌이 당과 계급의 차이를 논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당조직으로 승인된 조직의 성원만이 당원으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어떠한 당조직에도 결합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당에 속하지는 않지만 당과 연계되어 있는 조직에서 여전히 활동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활동하는 것, 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누구라도 밖으로 내친다는 논의는 있을 수 없다. 반대로 우리의 당조직들이 실제적인 사회민주주의자로 구성되어 더 강해질수록, 당내에서는 동요와 불안정성이 더 적게 되고, 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당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계급 대중들의 요소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더 광범위하고 더 다양하게 되고 더 풍부하고 더 결실 있게 될 것이다. 노동계급의 전위로서 당은 결국, 전체 계급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31) 여기서 당은 계급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레닌은 주장하고 있는데 당은 노동계급의 전위이며 당원자격이 엄격해질수록 당은 사상적 통일이 높아지고 결국 당이 강화되고 이렇게 당이 강화될 때 계급전체의 역량도 강화된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의 요지이다. 따라서 당과 계급이 혼동되면, 당원 자격은 실제적인 활동의 반영이 아니라 하나의 타이틀로 전락되고 당내에 비조직적 사상이 유입된다고 레닌은 경고한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 당대회를 결산하면서 레닌은 당의 질, 당적 질서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들은 이전에는 우리 당이 형식적으로 조직된 하나의 전체가 아니었고 단지 분리된 그룹들의 총계였을 뿐이며 그리하여 사상적 영향력의 관계를 제외한 다른 관계들이 이들 그룹들 간에 불가능했다는 것을 잊었다. 지금은 우리는 조직된 당을 갖고 있고 그리고 이것은 권위의 수립, 사상의 힘의 권위의 힘으로의 전화, 하부 당기구의 상부 당기구에 대한 종속을 의미한다.”32) 사상의 힘의 권위의 힘으로의 전화! 이것이 바로 당건설의 의미이고 당적 질서의 내용이다. 써클이 아니라 당이기 때문에 그 당은 계급 전체의 당이 된다. 따라서 당건설은 계급 전체의 사회주의 역량의 총화이어야 한다. 레닌이 멘셰비끼와 많은 노선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당대회를 치룬 것은 바로 당은 계급 전체의 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 전체의 당이어야  비로소 당적 질서를 논할 수 있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당이 건설되기까지는 써클 혹은 정파의 시대가 계속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건설을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잠재적인) 당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레닌의 조직노선은 철저히 실천적이고 당파적이다. 레닌은 조직은 정치활동의 형식이라는 근본적 사상을 기초로 당대회를 통한 위로부터 당건설 사상을 제기했다. 위로부터 당건설 사상의 의미는 사상적 통일을 기초로 사상의 힘을 권위의 힘으로 전화시키자는 것이다. 또한 당건설을 통해서 써클적 질서가 해소되어야 하며 당은 계급과 달리 계급의 전위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러한 당이 건설될 때만 명실상부한 의미에서의 계급투쟁, 계급전체의 역량을 동원하는 투쟁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조직사상은 부르주아적 조직과는 그 원리가 판이하다. 부르주아 조직은 돈과 권력 등에 의존한다. 그러나 무산계급이 조직적으로 결속하기 위해서는 과학적 조직노선이 요구된다. 한국 사회의 노동계급은 써클 시대에서 당건설로 이행하는 시대에 처해 있다.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을 실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적 조직노선을 벼려내는 것을 통해 서서히 당건설의 전망을 열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5.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론

 

레닌은 10월 혁명의 승리 이후 한편으로는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전취하는 것, 그리고 쏘비에트 권력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한편으로는 생산을 조직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러시아의 전체 인민이 짜르를 타도하고 나아가 10월 혁명을 통해 임시정부를 타도한 것은 바로 전쟁의 문제 때문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독일에 대해 굴욕적인 협상이었지만 브레스트-리?스크 협정을 통해 전쟁을 종료하고 평화를 이루어 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이 간섭을 시작하고 국내에서 타도당한 지배계급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내전이 시작되었고 이 내전은 1920년까지 약 3년의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레닌과 볼셰비끼의 모든 관심은 내전의 승리에 두어졌다. 볼셰비끼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제국주의 간섭을 물리치고 강력한 백군세력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즉 쏘비에트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본원인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유지하고 견고히 하였기 때문이었다. 10월 혁명은 농민들에게 토지와 평화를 가져다 주었지만 반란군들은 그 점령 지역에 다시금 지주의 지배를 부활시켰다. 그에 따라 시골의 농민층은 내전 과정에서 누가 진정한 농민의 벗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장기간의 내전이 볼셰비끼의 승리로 기울 수 있었다.

한편 내전의 급한 불이 잦아들면서 혹은 내전의 와중에 볼셰비끼는 생산의 조직화라는 사상 초유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자본가계급의 기업과 자산을 몰수했으나 이제는 자본가가 아닌 사회주의적 방식과 계획에 의해 생산이 조직되어야만 했다. 레닌은 10월 혁명 직후부터 이러한 사회주의적 생산의 조직화에 착수했는데 이때 레닌이 제창한 것이 사회주의적 경쟁과 회계와 통제라는 구호였다. 사회주의적 사회에서 비로소 노동자들은 자본에 의한 억압을 떨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적 경쟁의 조직화인데 레닌은 그러한 사회주의 경쟁을 통한 생산력의 발전을 주장한 것이었다. 또한 회계와 통제가 매우 중요했는데 국유화된 기업에서 계획적인 사회주의 생산은 노동자의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열정과 의지에 기반하여 생산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표현하는 것이 노동자 통제였다. 혁명 직후 자원의 분배와 생산의 조직은 오직 노동자 통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또 하나 레닌이 제창한 구호가 회계였는데 회계를 통해서만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하고 개별기업 나아가 전 국가적인 생산 계획의 설정과 분배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노동자 통제와 회계는 한편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을 놓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내전이라는 긴급상황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쏘비에트 권력의 유지가 6개월을 넘어서는 1918년 4월에 레닌은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라는 구호를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규제, 혹은 조절이라는 구호로 대체한다. “노동자의 통제(control)가 하나의 사실이 될 때까지, 선진적 노동자들이 이 통제에 대한 위반자들 혹은 통제의 문제에 부주의한 사람들에 대한 승리적인 그리고 무자비한 성전을 조직하고 수행할 때까지, 최초의 단계로부터(노동자 통제로부터) 사회주의를 향한 두 번째의 단계로, 즉, 생산에 대한 노동자의 규제(regulation, 조절)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33) 노동자 통제가 생산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장악과 지배를 의미하는 긴급한 조치였다면 노동자 규제 혹은 조절은 생산에 대한 합리적인 조정을 노동자가 주도적으로 시행한다는 의미이다. 즉, 지배의 문제에서 생산의 합리적 조직화의 문제로 단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레닌이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내전의 상황에서 전시공산주의가 강제되고 있었지만 레닌은 1918년 5월에 사회주의 건설의 수단으로서 국가자본주의의 조직화를 제기한다. “국가자본주의가 우리의 쏘비에트 공화국에서 현재의 사정들과 비교해 볼 때 앞으로의 한 발짝 전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없다. 대략 6개월 내에 국가자본주의가 우리 공화국에서 수립된다면, 이것은 커다란 성공일 것이고 일 년 내에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서 항구적으로 확고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무적이 될 것이라는 확실한 보증이 될 것이다.”34)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주목할 만한데 국가자본주의라는 방책이 1920년 이후 NEP시대에 비로소 제기된 것이 아니라 혁명 직후부터 사회주의 건설의 방도로 국가자본주의의 조직화가 제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레닌이 이러한 방책을 제기하는 것은 러시아의 경제적 현실에서 비롯된다. 즉,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소부르주아적인 농민인 상태에서 국유화된 기업의 사회주의 경제와 노동자계급이 장악하는 국가자본주의를 통해서 압도적 다수의 소농민 경제가 발생시키는 위험을 감소시키고 평화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사회주의와 전쟁하는 것은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에 맞서 싸우는 소부르주아지 더하기 사적 자본주의이다. … 왜냐하면 소소유의 무정부성의 계속은 가장 크고 가장 심각한 위험이며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파멸이 될 것(우리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면)이며 반면에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더 무거운 공물의 지불이 우리를 파멸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가장 확실한 길에 의해 사회주의로 이끌 것이다. 노동계급이 소소유의 무정부성에 맞서서 국가체제를 방어하는 것을 배웠을 때, 노동계급이 국가자본주의 노선과 나란히 전국적 규모에서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는 것을 배웠을 때, 노동계급은, 내가 이 표현을 써도 된다면, 모든 트럼프 카드를 쥘 것이고 그리고 사회주의의 공고화는 확실하게 될 것이다.”35) 여기서 레닌이 언급하는 국가자본주의는 대규모 기업을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윤의 추구를 국유화된 기업에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은 이러한 타협이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서 불가피하며 이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 생산의 조직화의 경험을 쌓게 될 때 그 기업이 이윤 추구가 아닌 사회주의적 목표로 전환하는 것은 쏘비에트 권력하에서는 용이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자본가계급이 타도된 상황에서 생산의 무정부성을 극복하고 나아가 소소유가 발생시키는 자본주의 복고경향의 위험을 상쇄하기 위해서 대규모 생산의 조직화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이 국가자본주의의 조직화임을 레닌이 주장한 것이다. 나아가 전국적인 소소유 농민이 압도적인 현실에서 이들과 적대하지 않기 위해서는 ‘거래’를 통해서 노동자계급이 소농민층과 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피하고 그 고리가 바로 국가자본주의 조직화라고 레닌은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국가자본주의를 레닌에게 강제하는 조건은 바로 전국적인 소농민, 소소유의 지배인데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소농민이 지배적이라는 조건이 없다면 국가자본주의 조직화는 그 양과 질에서 그리고 그 시간의 정도에서 단축되거나 생략될 수 있을 것이고 직접적인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는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19년 3월에 제1차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해 주목할 말한 주장을 한다. “낡은, 즉,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와 의회제 체제는 노동인민 대중들이 정부기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도록 그렇게 조직되었다. 쏘비에트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반대로 노동인민이 정부기구에 가깝게 가도록 조직되었다. 또한 그것은 쏘비에트 국가조직 하에서 입법권력과 집행권력을 결합시키고 생산단위―공장―에 의해 지역적인 선거구를 대체하는 목적이다.”36) 여기에는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인민성, 대중 친화성이 표현되어 있고 동시에 국가의 조직원리가 나타나 있는데 입법과 집행의 통일 즉, 맑스가 말한 빠리꼬뮌형 국가로서 쏘비에트가 제시되어 있고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으로서 선거구가 지역적 단위가 아니라, 즉, 지역구가 아니라 생산단위, 공장을 단위로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대의기관으로서 쏘비에트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보증하는 것이다. 공장을 기준으로 쏘비에트 대의원을 선출한다면 그 대의원은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잃을 수가 없다. 그런데 1930년대 쏘비에트 헌법이 개정되면서 이 조항이 변경되었는데 즉, 공장을 중심으로 한 생산단위 선거구가 지역단위 선거구로 개편되었다. 이것은 쓰딸린의 커다란 실책이라고 생각되는데 이 개편을 통해 쏘비에트 권력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출신이 아니라 관리자, 간부당원, 인텔리 출신의 비중이 서서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한편 레닌은 내전의 상황에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의 유지에 심혈을 기울인다. 레닌은 특히 중농에 대해 인내의 정책을 가져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중농과 관련하여 어떠한 힘의 사용도 용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심지어 부유한 농민과 관련하여서도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것처럼 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 ― 부유한 농민과 꿀락에 대한 절대적인 수탈. 이 구분은 우리의 강령에 들어가 있다. 우리는 부유한 농민들의 반혁명적 노력의 저항은 진압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완전한 수탈은 아니다.”37) 여기서 레닌은 중농에 대한 강제적 힘의 사용의 금지를 말한다. 소소유자로서 중농에 대해서 인내의 정책을 가지고 동맹을 유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부유한 농민과 꿀락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면서 부유한 농민들의 반혁명은 진압해야 하지만 그들의 재산을 완전히 수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꿀락은 러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소농민과 빈농들에 대한 수탈자로 인식되어 왔고 심지어는 ‘흡혈귀’로 규정되어 왔다. 레닌은 꿀락에 대해서는 수탈의 정책을 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부유한 농민과 꿀락을 구분하여 수탈의 대상을 가능한 한 좁히려 하고 있다.

내전이 한창일 때 러시아에서 철도노동자들의 영웅적 투쟁이 있었는데 그것은 내전의 수행을 원조하기 위해 철도노동자들이 휴일인 토요일에 일정시간 노동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내전의 승리를 위한 자발적 노동은 이후 많은 지역에 퍼져나갔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감격해 하면서 이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의 싹이라고 하였다. “위대한 시작”이라는 글에서 그러한 노동자의 영웅정신을 높이 평가하면서 레닌은 노동생산성의 문제가 사회주의 승리의 관건임을 지적한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노동생산성은 새로운 사회체제의 승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주요한 것이다.”38) 

내전이 서서히 종식되면서 레닌이 혁명 직후에 사고하였던 국가자본주의를 통한 소소유의 극복이라는 정책은 구체화되고 내전의 종식과 함께 신경제정책이 전개된다. 이 정책은 한편으로 국가자본주의의 조직화 즉, 기업에서 이윤원리의 도입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내전 수행을 위해 농민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을 강제적으로 징발했던 정책을 변경하여 일정량의 현물세로 전환한 것이 주요하다. 레닌은 “현물세”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거래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제한(경제에서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수탈, 정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지배)은 충분히 협소하고 “적당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물세의 근본적인 사상이고 경제적인 의미이다.”39) 지주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수탈이 이미 이루어졌고 정치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지배가 공고한 상황에서 더 이상 자본주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농민에게 거래를 허용하고 고무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전 상황에서는 잉여농산물에 대한 강제징발로 잉여농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거래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제징발이 일정량의 현물세로 전환되어 잉여농산물이 농민에게 발생하게 되면서 농민들이 거래를 자유롭게 하여서 농촌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경제와 국가자본주의로 조직된 노동자계급과 ‘거래’를 통해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의 요지이다. 레닌은 심지어 ‘거래’를 당면한 주요고리라고까지 말한다. “거래는 1921-22년의 우리의 사회주의 건설의 이행기적 형태들에서, 우리, 프롤레타리아 정부, 우리, 지배하는 공산당이 ‘모든 힘을 다하여 움켜쥐어야만 하는’ 사건들의 역사적 사슬의 “고리”이다.”40) 레닌이 이렇게 거래를 주요고리로 파악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농민이 다수인 러시아의 현실에서 농민경제의 발전이 곧 전체 국가경제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정치적으로는 거래를 통한 노동자계급과 농민층의 관계의 공고화, 즉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의 강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한편 내전이 끝나고 신경제정책으로 이행하면서 당내에서 노동조합 논쟁이 발생하였다. 뜨로츠끼는 ‘노동의 군사화’를 들고 나왔는데 이는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조합의 위상을 정식화했다. “국가는 강제의 영역이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에 강제를 포기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적 접근과 “조타(操舵)”는 필수불가결하다. 당은, 직접 지배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이고 전위이다. 영향력의 특수한 수단 그리고 전위를 숙정하고 강화시키는 수단은 강제가 아니라 당으로부터의 추방이다. 노동조합은 국가권력의 저수지이고, 공산주의의 학교이며, 관리의 학교이다. 이 영역에서 특수하고 주요한 것은 관리가 아니라 “중앙의 국가관리”(그리고 물론 지방도), “국가경제와 노동인민의 광범한 대중 간의” “끈”이다(당강령, 경제부문, 5항, 노동조합을 다루는 부분을 보라).”41) 이러한 레닌의 견해는 노동조합을 국가기관화하려는 뜨로츠끼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국가는 “강제의 영역”이라는 점이 본질적인데 노동조합이 국가기관화되면 노동조합은 대중의 자발적 조직이라는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노동조합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노동조합의 기능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라지게 된다. 레닌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당에 대해서도 강제가 아니라 당으로부터 추방을 통해서 당과 전위를 강화한다는 점을 밝혔다. 왜냐하면 당의 본질은 국가와 달리 강제가 아니라 사상적 권위(정치적 권위)를 통한 영향력의 행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레닌은 노동조합은 대중의 자발적 조직, 대중조직이라는 성격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에 기초하여 국가관리(행정)와 노동대중을 연결하는 ‘끈’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레닌은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의 대두와 관련하여 많이 논쟁된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의 계급투쟁의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 계급투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상이한 형태를 띨 뿐이다.”42)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중요한데 20세기의 사회주의의 몰락을 가져온 수정주의의 발생과 전개는 바로 레닌의 이 정식화된 주장을 왜곡하고 거부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국가가 사멸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계급대립의 문제가 종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따라 계급투쟁은 형태가 변화하여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전개된다. 쏘련의 역사에서 나타난 생산에 대한 사보타지, 제국주의와 결탁한 반혁명분자의 음모들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더욱이 사회주의 국가 외부에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반혁명의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흐루쇼프 등의 쏘련의 수정주의, 그리고 덩샤오핑 등의 중국의 수정주의는 계급투쟁의 시대는 종료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제국주의와 화해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주의의 결말은 세계 사회주의진영의 붕괴와 착취의 부활이었다.

레닌은 전시공산주의에서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사회주의 건설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때 내건 구호가 “공산주의는 쏘비에트 권력 더하기 나라 전체의 전기화이다”43)였다. 이러한 레닌의 구호는 의미심장한데 이 구호는 정치에서 쏘비에트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유지하는 가운데 전기, 즉, 생산력의 발전이 무계급 사회의 건설의 지름길이라는 노선을 의미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그 나라에서 착취의 생산관계를 제거한다는 점에서 생산력을 해방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한다. 레닌이 강조한 이 구호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해방된 생산력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고 생산력의 발전과 비례하여 사회주의는 공고화되고 무계급 사회는 앞당겨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 노선은 내전의 상황에서 직면한 생산의 조직화에서 출발하였다. 최초에는 노동자의 통제, 이어 노동자의 규제(조절)로 생산의 조직화의 단계를 높이면서 소농민이 압도적인 러시아의 현실에서 국가자본주의의 조직화를 통한 대규모 생산의 조직화를 달성하여 소농생산이 가져오는 무정부성의 위험을 제어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앞당기고자 했다. 또한 내전의 상황에서 레닌은 농민과의 동맹의 유지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측면과 더불어 경제적 측면에서도 농촌에서 ‘거래’를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 노농동맹을 공고화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닦았다. 이러한 레닌의 사회주의 건설론은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데 21세기에 닥칠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많은 영감과 시사점을 주는 것이다.

 

 

6. 결론

 

현재 한국 사회에서 레닌은 쟁점이 거의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 운동이 퇴조하고 운동의 지배적 조류가 개량주의가 되면서 변혁의 길을 걸었던 레닌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또한 뜨로츠끼주의적 조류는 겉으로는 굉장한 혁명적 구호를 외치고 뜨로츠끼의 혁명적 미사여구를 동원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적 노선을 팽개치는 것이다. 20세기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세계사적인 격변은 세계적 차원에서 반동의 시대를 가져왔으며 각지에서 노동자계급은 이데올로기적 해체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자신의 깃발을 상실한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각개격파 당해왔으며 최근에는 공황에 따른 구조조정 공세에 놓여 있다.

그러나 세계대공황의 전개는 자본주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있다. 세계대공황으로 인해 세계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으며 공황의 현실을 통해 금융자본의 기생성, 자본주의의 부패성을 생생하게 목도하는 세계의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은 서서히 반자본주의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의 초반에 발생기의 제국주의를 분석하면서 혁명의 길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인류최초의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에서 21세기 지금의 시점에서도 많은 영감을 우리에게 주며 레닌이 전개했던 사상노선, 정치적 전술원칙, 조직원리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어떻게 운동의 전망을 개척해가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교과서로 작용한다. 레닌의 노선들이 교과서인 이유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그것들이 21세기 지금도 유효한 원칙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레닌이 철저히 맑스주의를 고수하면서 러시아의 현실에 맑스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가운데 현실과 결합된 원칙,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칙을 개척해갔기 때문이다. 둘째로 레닌이 21세기 사회주의자들에게 교과서인 이유는 그것이 기계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레닌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인물이다. 레닌 이후 세계는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을 체계적으로 쌓았고 또 2차 대전이라는 대전쟁을 겪었고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성립과 붕괴를 목도했다. 또한 세계 식민지체제가 붕괴되었고 자본주의 내적으로는 독점자본주의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경제에 전면 개입하여 사적 독점을 떠받치는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발전하였다. 또한 지금은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어 세계사적인 대반동이 전개되는 시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대공황의 시기이기도 하다. 즉, 레닌 당시와 지금은 계급투쟁의 조건이 많은 점에서 다르다. 따라서 레닌의 테제들을 지금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운동을 질곡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운동의 현실은 청산주의, 개량주의가 지배적인 이유로 해서 레닌 자체가 운동의 잣대가 되지 않고 있다. 이는 소중하고 풍부한 운동의 경험이 외면되는 것과 같다. 레닌의 노선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계급투쟁의 과학을 제공한다. 우리 운동이 파쑈적 억압의 현실을 극복하고 운동의 재건을 이루고 당건설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레닌주의의 복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레닌주의를 복원하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장기간의 노력과 투쟁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인류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경험을 압축하는 레닌주의를 외면하고서는 21세기의 어떠한 혁명적 조류의 창출도 불가능할 것이다. 

                                                                                        노사과연

 


 

1) 레닌,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레닌 선집≫ 1권, progress, 모스끄바, p. 50.

 

2) 레닌, “민족자결권”, 같은 책, pp. 568-9.

 

3) 레닌, “유럽합중국 슬로건에 대하여”, 같은 책, p. 631.

 

4)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레닌 선집≫ 3권), progress, 모스끄바, p. 34.

 

5) 같은 책, pp. 35-6.

6) 같은 책, p. 350.

 

7) 레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3차 대회”, 같은 책, pp. 576-7.

 

8)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 선집≫ 1권), p. 165.

 

9) 같은 책, p. 135.

10) 같은 책, pp. 144-5.

11) 같은 책, p. 139.

 

12)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레닌 선집≫ 1권), pp. 426-7.

 

13) 레닌, ≪좌익공산주의―소아병≫(≪레닌 선집≫ 3권), p. 347.

 

14)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앞의 책), p. 430.

 

15) 같은 책, p. 432.

16) 같은 책, p. 451.

17) 같은 책, p. 452.

18) 같은 책, p. 492.

 

19) 레닌, “전쟁과 러시아의 사회민주주의”, ≪레닌 선집≫ 1권, p. 618.

 

20) 같은 글, p. 624.

 

21) 레닌, “현재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 ≪레닌 선집≫ 3권, pp. 29-30.

 

22) 같은 글, p. 30.

23) 같은 글, p. 34.

24) 같은 글, p. 40.

 

25) 레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볼)의제 7차(4월) 전러시아 협의회”, ≪레닌 선집≫ 3권, p. 74.

 

26)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앞의 책), p. 168.

 

 

27) 같은 책, pp. 191-2.

 

28) 레닌,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레닌 선집≫ 1권), p. 243.

 

29) 같은 책, p. 246.

30) 같은 책, p. 253.

31) 같은 책, p. 286.

32) 같은 책, p. 374.

 

33) 레닌, “쏘비에트 정부의 긴급한 임무들”, ≪레닌 선집≫ 2권, progress, 모스끄바, p. 599.

 

34) 레닌, ““좌익” 소아병과 소부르주아적 정신상태”, 같은 책, p. 631.

 

35) 같은 글, pp. 632-4.

 

36) 레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 ≪레닌 선집≫ 3권, p. 105.

 

37) 같은 글, p. 145.

 

38) 레닌, “위대한 시작”, 같은 책, p. 177.

 

39) 레닌, “현물세”, 같은 책, p. 545.

 

40) 레닌, “금의 중요성”, 같은 책, p. 590.

 

41) 레닌, “다시 한번 노동조합에 대하여”, 같은 책, p. 489.

 

42) 레닌,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대에 경제와 정치”, 같은 책, p. 236.

 

43) 레닌, “제8차 전 러시아 쏘비에트 대회”, 같은 책, p. 461.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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