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신식민지주의와 신식민지 파씨즘

 

채만수 │ 편집위원

 

* 이 글에서는 일반적으로 “파시즘”, “파쇼”, “파시스트”라고 표기되는 것을, 인용문 속에서의 그것들까지를 포함하여, 모두 “파씨즘”ㆍ“파쑈”ㆍ“파씨스트”로 (고쳐) 표기하였다. 우리 사회에서 사실상 어느 누구도 ‘파시즘’이라거나 ‘파쇼’, ‘파시스트’라고 발언하지 않고 “파씨즘”ㆍ“파쑈”ㆍ“파씨스트”로 발음할 뿐 아니라, 이쪽이 소위 ‘현지 발음’과도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제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 후의 식민지 민족 ‘해방’

 

5,000만 명 이상의 인간을 도륙하고 유럽과 동아시아, 그리고 북부 아프리카의 생산력을 대대적으로 파괴한 저 제2차 세계대전. 1930년대 대공황의 비극적 귀결이었던 이 제국주의 세계대전은 그 전쟁의 엄청난 규모만큼이나 그 결과, 그 영향 또한 엄청났다. 다방면에 걸친 그 엄청난 결과ㆍ영향 가운데 국제정세상의 3대 변화만을 들자면, 주지하다시피, 그 첫째는 무엇보다도, 제1차 제국주의 전쟁의 한 결과로서의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에 이은,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형성이었고, 그 두 번째는 미국의, 제국주의의 절대적 패권자로서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그 세 번째는, 제국주의에 의한 구 식민지 지배체제의 붕괴와 식민지 피지배 민족들의 ‘해방’ㆍ‘독립’이었다.

물론, 그 ‘해방’과 ‘독립’의 과정은 다양했다. 그중에서도, 독일이나 일본, 이태리 등 패전 추축국들의 식민지들과, 전승 제국주의 국가들이나 기타 중소(中小)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들은 그 ‘해방’ㆍ‘독립’으로의 여정이 크게 달라, 전자가 전쟁ㆍ패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사실상 거의 ‘자동적으로’ ‘해방’ㆍ‘독립’되었음에 비해서, 후자는 민족해방전쟁ㆍ민족독립전쟁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해방’ㆍ‘독립’될 수 있었음은 대개 누구나가 다 아는 대로이다.

그러나 그 ‘해방’ㆍ‘독립’의 경로상의 다양성이나 갖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구 식민지 지배체제 붕괴의 결정적 계기였던바, 그것은, 무엇보다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의 역량이 급격히 발전한 데에다가, 제2차 대전의 결과 식민지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을 지지ㆍ지원하는 사회주의가 거대한 세계체제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대전 후 특히 1960년대 초까지는 가히 식민지 민족해방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아시아ㆍ아프리카의 수많은 식민지 피지배 민족들이 대거 ‘해방’되어 ‘독립국가들’을 건설하였다.

 

 

신식민지주의

 

그런데, 어떤 민족이 구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형식상 ‘독립국가’를 건설하였다 하더라도, 그 ‘독립국가’란 것이 만일 경제적으로 여전히 제국주의에 예속되어 있다면, 더구나 그 ‘독립국가’가 구 식민지 지배에 부역하던 인물들, 그 세력이나 기타 어떤 제국주의의 꼭두각시에 의해서 지배된다면, 그 해방, 그 독립이 과연 실질적인 그것일 수 있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할 경우 그 해방, 그 독립은 허울뿐일 것이며,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새로운 형태, 은폐된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제2차 대전 후 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의 구 식민지의 ‘해방’ㆍ‘독립’은, 많은 경우,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경우, 그 ‘해방’ㆍ‘독립’까지의 여정ㆍ경로의 다양성과 상관없이, 바로 그러한 허울만의 것이었다. 그 ‘독립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제국주의에 예속되어 있었고, 정치적ㆍ형식적으로만 ‘독립’되었다. 그리하여 그 실상은, 다름 아니라, 현지의 토착 지배ㆍ착취세력을 전면(前面)에 내세운 ‘간접 지배’, 기만적 독립 ― 바로 저 신식민지주의이다!

이 경우 그 ‘해방’과 ‘독립’은 식민지 인민의 실질적인 해방과 독립이 아니며, 식민지적 억압과 착취의 실질적 연속이기 때문에 거기에서의 계급투쟁은 우선 여러 형태의 민족해방투쟁으로 나타난다. 남부 베트남과 필리핀을 거론 가능한 두 예로서 들어보자.

베트남의 경우, 제2차 대전 동안 프랑스군을 대신하여 베트남을 점령했던 일본군이 철수하자 베트남 인민은 독립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구 식민지 지배의 재건을 꾀했으나 1954년 저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그 인도차이나 지배는 끝났다. 그러나 1955년 이후 남부 베트남에는, 한국에서 당시 고딘 디엠 및 구옌반 티우로 알려졌던, 프랑스 식민지군 경력의 응오 딘 지엠(Ngô Ðình Diệm) 및 응우옌 반 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의 미 제국주의 괴뢰 정권이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잇달아 들어섰고,1) 이에 남베트남 인민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게릴라전으로 맞섰고, 고난의 투쟁 끝에 1975년 마침내 승리, 완전한 해방과 통일을 쟁취하였다.

남베트남 인민의 이러한 반(反)신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억압ㆍ좌절시키기 위해서 미국은 남베트남에 한때 50만 명이 넘는 미군과 용병들을 파견, 대량 학살 등 온갖 잔학행위들을 저질렀고,2) 비밀공작의 비기(祕技)를 발휘하여 통킹만 사건이라는 대대적 폭격의 구실을 조작, 남ㆍ북 베트남에 제2차 대전 동안에 사용한 포탄보다도 몇 배나 더 많은 포탄을 퍼부었다. 미군은 전쟁을 라오스ㆍ캄보디아 등지로 확대하였고, 당시 무차별하게 퍼부은 네이팜탄 등 대량의 살상무기와 고엽제 등 독성 화학물질들은, 주지하다시피,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을 위시한 이들 지역의 인민과 자연에는 물론이요 전장에 끌려갔던 수많은 미군 및 여러 나라의 군인들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명목의 침략전쟁이 장기화하고 그 잔학상이 널리 폭로되면서 국내ㆍ외에서 반전 여론과 반전 투쟁이 비등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대 규모의 전비(戰費) 지출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즉 달러 살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3) 전후(戰後) 제국주의 통화ㆍ금융질서로서의 브레튼우즈 체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4) 그리고 미국 내의 반전투쟁과 흑인 민권투쟁이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대돼가고 격렬해져가던 중에 일대 공황이 엄습, 자칫하면 미국의 독점 부르주아 지배체제 자체가 위협받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자 1973년 서둘러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트남 인민의 피해는 거대하고 참혹했지만, 미 제국주의의 베트남 신식민지 지배의 야욕은 좌절된 것이다.5)

이에 비해서, 필리핀은 제2차 대전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철수한 후 다시 복귀한 미 제국주의와 현지의 꼭두각시 토착 지배계급에 의한 신식민지주의 지배가 관철된 경우이다. 국내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30년에 창설된 필리핀 공산당(Partido Kommunista ng Piplpinas: PKP)은 중부 루손 섬을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 조직을 급속히 확대시키며 민중운동을 전개시켜 가다가, 파씨즘의 대두에 따른 세계정세의 급속한 변화에 대응하여 계급투쟁을 중단하고 광범위한 반(反)파씨스트 인민 전선을 결성, 당면한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수행해가게 된다. 1938년에 이루어진 필리핀 공산당과 사회당의 합당도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 PKP는 1942년 필리핀에 침입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무장 조직을 창설하는데, 이것이 흔히 후크단이라고 불리우는 항일인민군(Hukbong Bayan Laban sa Hapon: Hukbalahap)이다(…). 이 후크단은 일본군이 침략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부 루손에서 전개되었던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 출신의 노동자와 소작 농민들로 이루어진 민중의 군대로서 항일 무장투쟁에서 주도적인 투쟁을 수행하며 눈부신 성과를 올렸다. 2차 대전의 종전 이후 PKP는 필리핀에 복귀한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독립 이후의 정치에 참여,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들은 전후 다시 등장한 친일 협력자인 로하스 세력에 반대하여 광범한 통일전선인 민주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전국농민동맹(PKM), 노동조직위원회(CLO) 등 후크단과 관련된 중심 조직 이외에도 자유주의자에서 급진파에 이르는 광범한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최대의 조직적ㆍ사회적 기반은 역시 후크단을 기반으로 한 전국농민동맹이었다.

민주동맹은 1946년의 선거에 참여, 6개의 의석을 확보하기까지 하였지만, 미국과 국내 보수 세력의 탄압에 직면, 의원 선서조차 거부당했고, 지방에서는 지주와 그들의 편인 경찰 및 자경단에 의해 끊임없는 테러를 당하면서 생존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의회주의 노선의 고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PKP는 계속 시도했던 정부와의 협상이 거듭 배반당하자 마침내 1948년, 당 지도부의 교체와 함께 방기되었던 후크단의 지도권을 다시 장악, 항일인민군을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여 전열을 새롭게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호세 라바의 무장투쟁 노선을 채택한 것이다.

새로운 PKP 지도부는 필리핀 경찰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중국 공산당의 중국 본토 장악,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소련의 분석 등에 고무되어 마침내 1950년 1월 혁명적 정세가 도래한 것으로 결론짓고, 8월 일제 공격을 감행하였다. 총공세는 일시적으로 큰 성과를 올렸으나 10월 PKP의 정치국이 적발되어 호세 라바와 정치국원 2명을 포함한 당의 주요 간부들이 동시에 체포됨으로써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 후 미국 CIA의 지도를 받는 막사이사이 지휘 하의 필리핀군이 후크단 소탕 작전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게 됨에 따라 1954년까지 후크단은 거의 소멸하고 말았다(…).6) (강조는 인용자.)

 

새삼 부언하지 않아도 사태의 진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여담처럼 덧붙이자면, 어려서부터 막사이사이를 위인(偉人)으로 배워온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미국 CIA의 지도를 받는 막사이사이” 운운하는 대목에서 당혹감을 느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국내에도 번역ㆍ소개된 한 필리핀인의 저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막사이사이 정권은 파렴치하게도 막사이사이 자신이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바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 정권은 자신의 노예근성에 대해서 ‘긍정적 민족주의’(positive nationalism)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어 했으나 상원의원 클라로 마요 렉토(Claro Mayo Recto)가 주도한 반(反)제국주의자들의 비난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7) (강조는 인용자.)

 

재벌의 신문도 이렇게 쓰고 있다.

 

‘막사이사이’가 영웅이 된 것은 ‘후크’단 소탕에 공이 컸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수천 개의 원시림에 덮인 섬으로 된 필리핀에서 후크단이 막사이사이 시절에 완전히 뿌리 뽑힌 것은 아니다.8)

 

무엇보다도, “막사이사이 정권은 파렴치하게도 막사이사이 자신이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바로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사회에서는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제국주의 미국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막사이사이가 ‘위인’이고,9) 심지어 대표적인 원로 진보 사학자로 명성이 자자한 강 아무개 교수님께서는 영예롭게도 ‘막사이사이상’ 수상자 선정위원이시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데올로기 상황이 어찌 한국에서뿐이겠는가? 제국주의ㆍ독점자본의 대중조작의 위력이 그저 가공하기만 하다.

그건 그렇고, 우리의 주제로 돌아오면, 현지의 토착 지배세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간접 지배’로서의 신식민지주의는 필리핀에서만 관철된 사태가 아니며, 사실 제2차 대전 후 ‘해방’ㆍ‘독립’된 아시아ㆍ아프리카의 수많은 국가들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은 또한 제2차 대전 후 아시아ㆍ아프리카에서의 새로운 식민지 지배형태만도 아니다. ‘신식민지’니 ‘신식민지주의’라는 개념들은 물론 제2차 대전 후에, ‘해방된 식민지’의 새로운 피지배형태 및 그 새로운 지배형태를 규정하기 위해서 태어났지만, 실제에 있어서의 그것은 제2차 대전 훨씬 전에 일찍부터 미 제국주의가 이미 중남미 여러 국가들에서, 그리고 필리핀에서도 애용하던 지배형태이다. 마음씨 좋은 엉클 쌤 제국주의는 역시 처음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예컨대, 제2차 대전 전의 필리핀과 관련하여, 앞에서 인용했던 연구자의 글을 다시 인용하자면,

 

미국의 필리핀과의 관계에 대한 고려 없이 필리핀 사회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미국은 역사적으로나 현재에 있어서도 필리핀 사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관계를 우리는 제국주의적 지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미국의 독점자본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필리핀 사회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한다는 의미이다. 미 제국주의는 19세기 후반 스페인에 대한 필리핀 민중의 반제(反帝) 투쟁이 거의 승리하였을 때 이들의 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구실로 필리핀에 진출, 이에 저항하는 20여 만 명의 필리핀 민중을 학살하면서 1902년 완전한 식민지 지배 체제를 확립하였다.10)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 정책은 일찍부터 현지인들에 의한 대행 기관을 설립하여 통치해 온 것이 특징이다. 1907년에 최초의 선거를 실시, 국민당을 집권당으로 하는 의회를 설립하였고 1935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 정부(Commonwealth-government)라고 하는 자치 정부를 구성, 자체의 행정부 및 상비군을 갖는 통치를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배타적인 제국주의적 이해가 침해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주와 매판 부르주아 계급에게 허용한 정치적 자유의 외연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자유의 외연은 필리핀 민중들에게 자국인에 의해 통치된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의 직접적 분출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지배 체제의 성격은 1945년,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지속되어 왔다.11) (강조는 인용자.)

 

이렇게 늦게 잡아도 1935년이 되면, 필리핀에서 신식민지주의적 지배형태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현지인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이러한 신식민지주의적 지배는 결국, “민중들에게 자국인에 의해 통치된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의 직접적 분출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만큼 교묘ㆍ교활하고, 그만큼 강고한 식민지 지배형태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만큼 교묘ㆍ교활하고, 그만큼 강고한 식민지 지배형태인 만큼 그것은 제2차 대전 이후 제국주의의 지배적인 식민지 지배형태이다. 식민지 민족해방과 민족자결을 지지ㆍ지원하는 사회주의가 제2차 대전을 계기로 강력한 세계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식민지 민족해방이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되었고, 그리하여 사실상 어떤 제국주의 국가도 더 이상 구 식민지 지배형태를, 즉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지배형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현지 대리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기만적인 식민지 지배형태로서의 신식민지 지배가 구 식민지 지역에 광범하게 수립되는데, 이러한 지배형태에서는, 현지의 인민이 ‘미국식 민주주의가 도입되어 자국인에 의해 통치된다’는 환상을 갖도록 선전되기 때문에, 그 지배는 그만큼 강고해지는 것이다.

 

 

식민지ㆍ신식민지 지배의 필수조건

 

신식민지주의는 현지 대리인을 전면에 내세우는 간접 지배 형태이기 때문에 이 현지 대리인 집단의 존재,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제국주의와 이해를 같이하는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존재는 신식민지 지배에 있어서 절대적인 조건이 된다. 그리하여 제2차 대전 후 제국주의는 “민족 주권을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투쟁하는 아랍세력에 대해 보수적인 왕제를 세우고” 이 “보수적인 세력에게 정치ㆍ경제적 원조를 하면서 민족운동을 억제하”였으며,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서는 “부족대립과 인종차별을 격화시키면서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여 경제를 원조하고” 흑인 민족주의 “정권은 편의상 친서방파를 군부 안에 육성시켜 쿠데타로 타도하였다. 1966년 ‘검은 지도자의 별’로 불리는 가나의 은크루마 정권이 강대국의 개입정책과 친서방세력의 쿠데타로 전복되었던 사건은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의 정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다.”12)

신식민지 지배국의 입장에서는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대표자들을 대리통치 집단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물론 현지 인민의 저항을 억압하고, 인민적 정치세력, 인민의 총의에 의한 정권을 전복ㆍ제거하여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미국의 신식민지 세력권 내에 혁명적인 반제국주의 정부가 존재한다는 것은 레이건 행정부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유럽뿐만 아니라 지구촌에 대한 주도권을 유지할 만한 의지와 능력을 미국이 과연 갖고 있는가에 의혹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지구촌 전체를 고려하고 있는 워싱턴은 니카라구아 대중이 선거를 통해 선택한 정부를 전복시키고 워싱턴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할 만한 정권으로 이를 대체하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미국정부는 과테말라 자코보 아르벤즈(Jacobo Arbenz) 정권(1954), 도미니카 공화국의 쥬안 보쉬(Juan Bosh) 정권(1965), 그리고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1974) 등을 몰아냈다. 이들은 모두 국민이 선거로 선택한 정부였다.13)

 

그러나 이는 현지 인민의 의사에 반한 정권 전복의 일부의 예에 불과하다. 앞에서 가나의 은크루마 정권의 전복에 대해서도 언급했지만, 사실은 개발도상국으로 불리는 국가들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는 군부 쿠데타와 그에 의한 정권 전복의 배후에는 으레 제국주의의 비밀공작ㆍ조정이 있다. 그중에서도 1965-66년에, 비동맹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친쏘ㆍ친중국-반제국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 정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수하르토 군부가 벌인 대학살은 가장 비극적이다. 피학살자의 규모가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까지로 추정되는 이 대학살의 배후에 미 CIA와 국무성을 비롯한 미 행정부가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공공연한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물론 자세한 진상은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당연히 인도네시아 인민은 “진실 없이 화해 없다”고 울부짖고 있다.14)

1965-66년 인도네시아 학살에서의 미국의 역할이 아직 이렇게 장막에 가려져 있지만, 엄밀한 방식으로, 즉 추정이 아니라 획득 가능한 자료에 기초하여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미국의 한 연구자는, “그러나 CIA의 기록의 극히 일부만 기밀 해제되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인도네시아에서의 CIA의 비밀 작전이, 과거에 알려진 것보다 광범위했고 음흉했음을 입증해준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워싱턴 당국은 [인도네시아: 역자] 군부가 인도네시아공산당(PKI) 당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을 고무하고 돕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으며, 미국의 관리들이 염려했던 것은 단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비무장 지지자들을 충분히 죽이지 않아서 수카르노가 다시 권력을 장악, 행정부가 입안 중인 수카르노 이후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계획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뿐이었다.15)

 

미국의 관리들이 염려했던 것은 단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비무장 지지자들을 충분히 죽이지 않아서 수카르노가 다시 권력을 장악, 행정부가 입안 중인 수카르노 이후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계획을 좌절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뿐이었다.(U.S. officials worried only that the killing of the Party’s unarmed supporters might not go far enough, permitting Sukarno to return to power and frustrate the administration’s emerging plans for a post-Sukarno Indonesia.)” ― 과연 자유세계ㆍ인권의 끔찍한 수호자다운 미 제국주의이다! 그런데 이렇게 충분히 죽이지 않아서 계획에 차질이 올까봐 걱정하던 것은 물론 미국의 관리들만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재벌 신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수하르토’ 장군을 정상으로 하는 현 정권은 아직 많은 난관을 안고 있다. ‘수카르노’ 개인의 권한은 거의 배제되었으나 ‘자바’를 중심한 방대한 세력의 반격가능성도 부정될 수 없다. 그리고 군부탄압으로 40만 당원(라이프지 추산)이 살해되었지만 동남아 최대의 공산당원(공칭 3백만)을 자랑하던 세력이라 그 방대한 당원의 지하조직이 위장전술로 각계에 침투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수카르노’ 정도의 역량과 매력을 지니지 못한 ‘수하르토’가 과연 ‘수카르노’와 PKI의 재기 봉쇄란 난관을 무난히 치르고 분열된 국내를 통일하고 파탄에 이른 경제문제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는 낙관할 수 없다.16)

아무튼, 크고 작은 규모의 차이야 있겠지만, 이러한 학살, 이러한 끔찍한 걱정이 어찌 인도네시아뿐이겠는가!

그런데, 예컨대 1920년대의 일제의 소위 ‘문화 통치’가 1910년대의 무단 통치보다 섬세하고 신경을 많이 써야 했던 것처럼, 신식민지 지배도 당연히 구식민지 지배에 비해서 보다 섬세하고 보다 많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경과 비용을 많이 써야 하는 것은 현지 대리 지배인들, 즉 꼭두각시들과 친제국주의 엘리트 지식인들, 즉 전문개[專門家]들의 양성이다. 이미 세워놓은 정권이 너무나도 인민의 분노의 표적이 된 나머지 그에 대한 저항ㆍ투쟁이 자칫 혁명적 상황으로라도 발전할 염려가 있다거나, 실제로 예기치 않은 정변이 있어 그 정권이 무너지거나, 혹은 너무나도 장기간 집권한 나머지 분수를 잃고 간덩이가 부어 호락호락 말을 듣지 않거나 하는 경우에 그를 교체할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친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그 사회를 물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수(買收)는 이러한 인적 자원의 양성을 위한 상용(常用) 수법이지만, 군ㆍ관계(官界)ㆍ학계ㆍ종교계, 기타 각종 문화계의 촉망 받는 젊은이들을 엄선, 장학금을 받는 유학생으로 초청하는 것도 조직적으로 이용되는 방법이다. 소위 ‘진보적’ 교수ㆍ지식인들의 다수가 친미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주의 대리 통치자들을 이렇게만 설명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그러한 대리 통치자들을 개개인으로 파악하자면, 그들은 물론 다양한 계급에서 배출되고 있지만, 만일 제국주의와 물질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토착 세력이 계급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개개의 대리 통치자들도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존재는, 비단 신식민지 지배의 필수조건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식민지 지배 일반, 따라서 구식민지 지배의 필수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와 물질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대지주 계급 및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없었다면, 친일 관료ㆍ경찰ㆍ군인ㆍ밀정이 있었겠으며, 일제의 조선 지배가 가능했겠는가를.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대동단결을 외치지만, 그 민족의 몰계급적인 대동단결이란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계급으로 분열된 민족의 대동단결이 과연 가능한가를.

그리하여 신식민지주의에서 제국주의의 하수인으로서의 현지 대리 통치자들 등은 사실은 현지의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대표자들 내지 그들에 고용된 자들이며, 구식민지 지배도 신식민지 지배도 그 토대는 바로 제국주의와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경제적ㆍ정치적 이해의 일치이다. 제국주의가 현지의 대리 통치자들을 내세워 “민중들에게 자국인에 의해 통치된다는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의 직접적 분출을 완화시키”지 않고는 현지 노동자ㆍ인민의 저항ㆍ해방투쟁에 부딪쳐 식민지 지배를 유지할 수 없다면, 현지의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은 제국주의의 무력의 도움 없이는 노동자ㆍ인민의 저항ㆍ혁명투쟁에 부딪쳐 자신들의 지배ㆍ착취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양자는 제국주의 후견 하의 대리통치에서 공통의 이해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식민지적 종속이든 신식민지적 종속이든 식민지적 종속 일반은 이렇게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이익에 기초하고, 그 이익을 유지ㆍ보존하는 것이 필수적 조건이기 때문에, 저들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에게 있어 그 종속은 결코 강요된 것이 아니다. 그 종속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고, 능동적ㆍ적극적인 것이다.17)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에서 입신출세코자 하는 야심에서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반인반수의 혈서가 자발적이었고 능동적ㆍ적극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제 지배 말기에, 후일 대한민국의 부통령이 되는 김성수(金性洙) 등의 친일 지식인들이나, 지난해 7월 새누리당 대표의 자격으로 여러 명의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대동하여 미국을 방문,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장성의 묘에 큰절을 올리고 “아이고 우리 장군님 감사합니다”며 “새똥이 많이 떨어져 있”던 그의 비석을 손수건으로 닦아준18) 김무성19)의 아버지 가네다 류슈(金田龍周) 등의 기업가들이 조선의 젊은이들을 친일 전장으로 내모는 데에 혈안이 되고 전투기 헌납운동을 벌인 것이 자발적이었고 능동적ㆍ적극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20)

종속 혹은 예속에의 이 자발성과 능동성ㆍ적극성은 당연히 식민지ㆍ신식민지 지배가 위기에 처할수록, 따라서 민족해방 투쟁이, 즉 식민지ㆍ신식민지 내의 계급투쟁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격렬해지면 격렬해질수록 더욱 적극적이 되고 더욱 강해지게 된다. 제국주의의 계속적 지배만이, 제국주의의 무력만이 노동자ㆍ인민의 저항ㆍ혁명에 대항한 자신들의 생명줄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ㆍ신식민지 지배에 관한 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만을 지배자로서 강조하지만, 이 점, 즉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이 제국주의와 그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제국주의 (신)식민지 지배의 필수 조건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

식민지ㆍ신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은 내부에 강고히 구축되어 있는, 제국주의의 교두보이다. 그 때문에 그들을 그대로 둔 채로는, 그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민족해방, 즉 식민지ㆍ신식민지 노동자ㆍ인민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신식민지 파씨즘’의 개념과 계급적 기초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지배의 목표는 제국주의적 착취를 유지ㆍ확대하는 것이고, 이러한 목표는 현지의 착취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즉 그 착취 체제가 붕괴되어 비자본주의적으로ㆍ사회주의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달성된다.21) 그리고 그 착취체제를 뒤엎고 민족적ㆍ계급적 해방을 쟁취하려는 피착취 노동자ㆍ인민의 끊임없는 저항ㆍ투쟁에 직면하여 제1선에서 그 저항ㆍ투쟁을 억압ㆍ압살하고 착취체제를 유지할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토착 착취ㆍ지배 계급이며, 그 권력으로서의 대리통치기구이다. 따라서 그 지배는, 미국식 민주주의니, 자유니, 인권이니 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지만,22) 실제에 있어서는 극히 폭압적, 즉 파쑈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신식민지 파씨즘에 대해서는 그 개념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싸고 일부 이견이 존재한다. 그 개념의 정당성 여부를 둘러싼 이견은 결국은 신식민지 파씨즘의 계급적 기초를 둘러싼 문제이기 때문에, 널리 제기되는 이견들을 검토해보자.

우선 하나는 독일이나 일본, 이딸리아 등 위기에 처한 제국주의, 즉 독점자본주의의 국가형태로서의 파씨즘 개념을, 제2차 대전 후 구식민지 체제가 붕괴되고 구 식민지들의 대부분이 신식민지주의에 편입될 당시를 기준으로 볼 때 많은 경우 아직 반(半)봉건적 내지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던 신식민지23)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이는, 독점자본주의ㆍ제국주의의 성숙에 따른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세계성을 망각한 이견이다.

주지하는 바처럼, 자본주의ㆍ제국주의는 세계적 체제이고, 따라서 그 전반적 위기도 세계적일 수밖에 없다. 신식민지 국가들은 그 경제발전 단계가 낮다 하더라도 제국주의에 종속되어,24) 그 착취의 대상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들 국가에서의 계급투쟁은 제국주의ㆍ독점자본과 그 토착 앞잡이들에 대한 투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에 따른 체제의 위기는 그 경제적 발전단계를 넘어 어느 곳보다도 첨예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한 억압은 폭압적ㆍ파쑈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제국주의의 식민지ㆍ신식민지라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곳에서는 그 첨예한 위기 때문에 이른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고, 그 자본주의는 그 발전 초기부터 ‘국가 자본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정치적 지배형태는 파씨즘, 즉 식민지ㆍ신식민지 파씨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신식민지에서의 폭압은 지배 제국주의에 의해서 사주ㆍ고무되고 뒷받침되고 있다. 예컨대, 2003년에 영국의 한 일간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기밀 해제된 미국의 파일들이 1970년대 군사정부(junta)에 대한 지원(backing)을 폭로하다.

새롭게 기밀 해제된 미 국무성 문서들에 의하면, 1970년대에 3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된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을 헨리 키신저가 승인했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 씨는, 미 의회의 회기가 재개되기 전에 행동할 것을 아르헨티나의 군부에 촉구하고, 워싱턴 당국은 아르헨티나 군부에게 “불필요한 어려움들”을 야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 군부에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25)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음지에서 일하는 CIA가 아니라,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공식적으로 행동하고, 공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국무장관의 움직임에 관한 문서ㆍ보도임을 감안하면서 상황을 추정하고 음미해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의 이견은 이렇게 제출된다. 즉, 앞에서 필리핀에서의 신식민지 파씨즘과 관련하여 인용했던 연구자인 조형제 씨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필리핀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세계사의 진보적 흐름에 역행해 오던 마르코스의 종속적 권위주의 체제는” 1986년 2월에 “마침내 민중의 힘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다”26)고 말하면서 “종속적 권위주의 체제”에 붙인 후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72년이 계엄 선포 이후 성립된 필리핀 정치 체제에 대해서는 여러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요한 것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합헌적 권위주의 체제(constitutional authoritarianism)

   …

② 파시스트 국가(fascist state 또는 state fascism)

   유럽의 나찌즘과 파시즘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국가 개념으로서 필리핀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치 세력들이 마르코스 통치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폭력적, 억압적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계엄 선포를 전후한 필리핀의 정치 변동에서는 파시즘의 불가결한 요소인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주도, 통치자의 카리스마, 대중에 대한 광범한 이데올로기적 동원 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파씨스트 국가’는 필리핀 정치 체제의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전혀 밝혀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③ 종속적 권위주의 체제(dependent authoritarianism)

   ‘권위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형태를 자유민주제에 대립되는 국가형태로서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가 취약할 때 일반적으로 강력한 노동 통제를 기반으로 국가가 자본 축적을 주도하고 관리하는 억압적 정치 체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Alex Mogno는 필리핀 정치 체제를 이러한 ‘권위주의 체제’로 보고, 거기에 미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종속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다. 더 이상의 좋은 대안적 개념이 없으므로 우리는 이 글에서도 ‘종속적 권위주의 체제’의 개념을 사용하려고 한다. …

④ …27)

 

그러나 이는 오해와 독단에 근거한 주장이다.

독단에 대해서 먼저 말하자면, 조형제 씨는, 한편에서는, “더욱이 ‘파씨스트 국가’는 필리핀 정치 체제의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전혀 밝혀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필리핀 정치 체제를 … ‘권위주의 체제’로 보고, 거기에 미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종속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며, …“더 이상의 좋은 대안적 개념이 없으므로 … ‘종속적 권위주의 체제’의 개념을 사용하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필리핀 정치 체제를 … ‘권위주의 체제’로 보고, 거기에 미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종속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고 말하고 있지만, “파씨스트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필리핀 정치 체제의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전혀 밝혀 주고 있지 못”한 것처럼, “권위주의 체제”라는 개념 자체는 “필리핀 정치 체제의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전혀 밝혀 주고 있지 못”하다. 그리하여, “권위주의 체제”라는 규정에 “종속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때, 그것은 “미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예속성을 밝히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파씨스트 국가”라고 해서 그 앞에 “예속적”이나 “종속적” 같은 수식어를 못 붙일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따라서 “더욱이 ‘파씨스트 국가’는 필리핀 정치 체제의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전혀 밝혀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적절한 개념” 운운하면서 필리핀과 관련, “파씨스트 국가”라는 개념을 기각하는 것은 분명 독단이다. 아니, 방금 앞에서 “파씨스트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필리핀 정치 체제의 제국주의와의 관련성에 대해서 전혀 밝혀 주고 있지 못”한 것처럼 운운했지만, 사실은 “파씨스트 국가”라고 할 때, 거기에는, 앞에서 논한 것처럼, 제국주의 체제의 전반적 위기가, 따라서 신식민지의 제국주의에의 종속성이 사실은 전제되어 있는 것이고, 거기에 “신식민지”라고 덧붙일 때, 그것이야말로 그 예속성ㆍ종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앞에서 ‘각주 6)’을 붙여 인용하고 있는 조형제 씨 자신의 글 등에서도 명백한 것처럼, “마르코스 통치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폭력적, 억압적 성격을 지칭하기 위해” “파씨스트 국가”라는 개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필리핀 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정치 세력들”이야말로 미 제국주의에 대한 필리핀의 예속성을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고, 누구보다도 투철하고 처절하게 그 예속성을 극복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세력 아니던가!

한편, 조형제 씨는 “계엄 선포를 전후한 필리핀의 정치 변동에서는 파시즘의 불가결한 요소인 쁘띠부르주아 계급의 주도, 통치자의 카리스마, 대중에 대한 광범한 이데올로기적 동원 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며, 마르코스 치하의 필리핀을 “파씨스트 국가”로 규정하는 것을 기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파씨즘에 대한 커다란 오해에서 유래하는 주장일 뿐이다. “통치자의 카리스마” 유무 판단의 주관성이나, 전국의 사실상 모든 가정을 뒤덮고 있는 대중매체들을 통해서 밤낮 없이 쏟아지는 제국주의ㆍ독점자본의 애국주의 캠페인이나 질서 캠페인, 경제 안정ㆍ성장 캠페인을 두고도 “대중에 대한 광범한 이데올로기적 동원 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운운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파씨즘을 독점자본이 아니라 “쁘띠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야말로 놀랄 만큼 피상적인 견해이다!

파씨즘을 ‘쁘띠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을 비판하기 전에, 조현제 씨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해서 먼저 간단하게 언급하자.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권위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국가의 형태를 자유민주제에 대립되는 국가형태로서 지배 계급의 헤게모니가 취약할 때 일반적으로 강력한 노동 통제를 기반으로 국가가 자본 축적을 주도하고 관리하는 억압적 정치 체제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 체제’는 결코 자유민주제에 대립하는 자본주의 국가형태가 아니다. ‘권위주의 체제’를 그렇게 소위 자유민주제에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저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거짓 선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 이른바 현대 자유민주제가 바로 ‘권위주의 체제’이고, 그러한 ‘억압적ㆍ파쑈적 정치 체제’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이고 진실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결코 “국가가 자본 축적을 주도하고 관리하”지 않는다. 자본축적을 주도하고 관리하는 것은 (독점)자본 그 자체, 그 인격화로서의 (독점)자본가들이다. 국가는 단지 “강력한 노동 통제”와 같은 “억압적 정치 체제”를 통해서 (독점)자본의 그러한 자본축적과 관리를 외적으로 보증할 뿐이다.

사실 ‘권위주의 체제’라는 용어는 ‘비판적인’ 부르주아 강단 이데올로그들이, ‘파쑈 체제’라는 용어를 기피하면서, 즐겨 쓰는 용어이다. 그들이 이 용어를 즐겨 쓰는 것은, 그들의 주관적 의도야 어떻든, 그것이 현대 독점부르주아 국가체제의 반(反)노동자ㆍ인민적 성격을 많건 적건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파씨즘을 ‘쁘띠부르주아 계급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파악하는 문제로 돌아오면, 그러한 견해는 1930년대 초에 널리 제시되었고, 따라서 당시에 이미 충분한 비판이 이루어진 바 있다.

대표적인 비판자는 인도 출신의 영국 공산당원인 팔메 두트(R. Palme Dutt)인데, 그는 “파씨즘이 일반적으로 ‘중간계급(middle-class)’ (즉, 소부르주아) 운동으로 제시되는” 것에 대해서 우선 이렇게 평가한다.

 

초기에 파씨즘이 중간계급(소부르주아) 인자들로부터 발생하고, 조직 노동자계급 및 트러스트들과 거대금융에 반대하여 중간계급에게, 즉 소기업 및 전문가계급들에게 많이 호소하며, 그 구성의 대부분, 특히 그 지도부를 중간계급으로 채우고 있고, 위기적 상황에 처한 중간계급ㆍ소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에 젖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기에는 분명 상당한 진실이 있다.28)

그러나 파씨즘을 “조직 노동자계급 및 대규모 자본 양자에 대립적인, 자본이나 노동과는 관계가 없는 ‘제3자’로서의 중간계급의 독자적인 운동이라는 의미에서의 중간계급 운동으로서 제시하는” 데에 대해서는, 그는 이를 “파씨즘을 자유주의적이고 사민주의적으로 취급하는” 개념이라며29) 이렇게 비판한다.

 

파씨즘을 이렇게 대 부르주아지에 대한 소부르주아 혁명으로 보는 견해는 명백히 사실에 있어서 오류이며, 파씨즘의 진짜 성격 및 그에 대한 투쟁을 진지하게 이해하는 데에 극도로 위험하다.

사실에 있어서 오류라고 하는 것은, 파씨즘의 실제의 역사, 발전, 기초 및 실천을 가장 간단히 조사해보는 것만으로도 명백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파씨즘의 공공연한(open and avowed) 지지자들은 티쎈가(Thyssens)나 크룹가(Krupps),30) 몬드가(Monds),31) 디터딩가(Deterdings),32) 오언 영가(Owen Youngs)33) 같은 대자본의 대표자들이다.

파씨즘은, 그 초기에는 막연하고 명백히 부정직하게 반(反)자본주의 선전을 하는 체하지만, 처음부터 대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즉 대지주들, 대금융자본가들 및 대산업자본가들에 의해서 조장되고, 자양분이 주어지며, 유지되고, 보조금이 주어진다.

나아가, 파씨즘은 오직 부르주아 독재의 직접적인 보호에 의해서만 그 초기 단계에 노동자계급 운동에 의해서 일소되지 않고 구제되어 성장할 수 있다. 파씨즘은, 파씨스트의 불법은 공공연히 못 본 척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반대는 전력을 다하여 으깨 부수는 국가 폭력의, 고위 군부의, 경찰 당국의, 법원과 장관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파씨즘이 부르주아 국가 독재로부터 “권력을 정복”했다? 파씨즘은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권력을 정복”하지 않았다. 어느 경우에나 파씨즘은 부르주아 독재에 의해서 위로부터 권좌에 앉혀졌다. 이딸리아에서 파씨즘은, 그에 대한 계엄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무쏠리니를 권력으로 초대한 국왕에 의해서 권좌에 앉혀졌다. 무쏠리니의 전설적인 ‘로마로의 진군’은 침대차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독일에서 파씨즘은 대통령에 의해서 권좌에 앉혀졌는데, 당시 파씨즘은 선거 결과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독일에서 심하게 지지를 잃고 있을 때였다.

사실 부르주아지는 실제로는 권력을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겨주면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른 것이고, 그 실체는 오직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의 강화였다.34)

 

파씨즘을 중간계급, 즉 소부르주아지의 운동으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잘못된 인식인가를 알 수 있다. 파씨즘은 위기에 처한, 즉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한 독점자본의 대응이며, 이것은 식민지ㆍ신식민지에서의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ㆍ신식민지 자체의 경제발전이 그 자체의 독점자본가계급을 낳을 만큼의 단계에 이루지 않은 경우에도 그곳에서의 위기ㆍ계급투쟁은 제국주의, 즉 식민지ㆍ신식민지 지배 독점자본에 대한 투쟁을 포함하는 것이며, 현지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은 이들 제국주의와 이해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즉, 현지의 토착 지배계급은, 그 경찰과 군대, 관료들은 자신들과 계급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제국주의의 방어를 위해서, 그들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어 식민지ㆍ신식민지의 노동자ㆍ인민을 파쑈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다.

 

 

신식민지 파씨즘의 한 전형, 라틴 아메리카

 

신식민지ㆍ신식민지주의라는 개념은, 주지하는 것처럼, 아시아ㆍ아프리카의 구식민지들이 제2차 대전 후 ‘해방’ㆍ‘독립’되었으나 그 ‘독립’된 국가들이 다시 제국주의에 종속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신식민지는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는 독립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들”로 정의되고 있다.35)

그런데, 신식민지를 이렇게 “정치적으로는 독립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들”로 정의할 때, 신식민지주의는, 앞에서 필리핀과 관련하여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했지만, 결코 제2차 대전 후의 현상만도 아니며, 아시아ㆍ아프리카에 한정된 현상만도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는 그 전형적인 예들을, 과거에는 ‘종속국’이라는 말로 불렸던 중ㆍ남미 국가들, 즉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미 19세기에 종주국 스페인과 뽀르뚜갈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야말로 신식민지주의와 그에 대한 저항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드러나 온 지역인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신식민지주의와 그에 대한 저항이 가장 극적인 형태로 드러나 온 것은, 미 제국주의야말로 신식민지주의의 맹주인 데다 라틴 아메리카는, 그 지역성 인접성과도 관련하여, 미국의 ‘앞마당’이니 ‘뒷마당’이니 할 만큼 이미 19세기 말엽부터 미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막강한 곳이기 때문이고, 또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신식민지 파씨즘에 대한 저항이 강렬한 곳이기 때문이다.

잠깐 여기에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얘기하자면, 앞에서 우리는 신식민지를 “‘정치적으로는 독립하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들’로 정의할 때” 운운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정의는 정확한 게 아니다.

제국주의에 경제가 종속되어 있더라도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국가를 신식민지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수카르노 집권 시의 인도네시아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장기간에 걸친 식민지 지배의 유산으로 그 경제가 제국주의에 종속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그 정치적 독립을 공고히 하고 그 경제적 예속을 극복하고자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경제적 예속을 이유로 신식민지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식민지가 신식민지인 이유는, 그 국가가 정치적으로 ‘독립’되었다고 하지만, 그 독립은 허울일 뿐 실제로는 제국주의의 정치적 지배ㆍ조종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치적 지배ㆍ조종은, 앞에서도 거듭 얘기한 것처럼,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이, 그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대표자들이 그 계급적 이해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ㆍ능동적으로 제국주의에의 종속을 추구ㆍ유지하고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결국 신식민지는 형식적ㆍ외양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제국주의에 종속된 국가들이다.

자, 이제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신식민지 지배를, 아니 오해를 없애기 위해 말하자면, 그 극단적 형태를 보기로 하자.36)

 

정치적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에 군사 파씨즘의 개발독재가 위세를 떨친 20여 년(60년대 중반-80년대 중반) 동안 1천만 명의 정치범과 3만여 명의 실종자를 기록하는 억압과 폭력의 암흑기가 연출됐다.37)

 

≪중앙일보≫ 기자 세 사람이 1990년 2월 10일부터 50일간 라틴 아메리카 6개국을 ‘기획취재’하여 6개월간 연재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엮어 발행하면서 “책 머리에” 하고 붙인 서문의 일부이다. “3만여 명의 실종자” ― 이는 분명 파씨스트들에 의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피살된 사람들일 터이다.

이 책의 “중남미 파씨즘”38)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더욱 생생하다. 이 글은, 반공연맹원들에 의한, 브라질의 노바 이과수라고 하는 빈민 지역의 이폴리트라는 한 천주교 주교의 납치ㆍ폭행ㆍ유기(遺棄) 사건(1977년)과, 경찰이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예비 수사조차 하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시키고 말았다는 사실”을 소개한 후, 이 사건은 “1950년대 이래 라틴 아메리카를 휩쓸어오고 있는 군사 파씨즘의 한 단면을 상징한다”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미에서의: 인용자] 가톨릭교회의 신앙적 전통과 … 현실적 영향력 등으로,” “극우 파씨즘의 포악한 군사정권들도 가톨릭 성직자들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의례적인 예우를 하고, 대화의 파트너로 받아들인다. …”

… [그런데: 인용자]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인 주교가 이런 수난을 당한다면, … 라틴 아메리카 대다수 민중들이 당하는 고통은 쉽게 짐작될 수 있다.

물론 이폴리트 주교 납치사건을 훨씬 능가하는 끔찍한 일도 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영화로도 소개된 바 있는 엘살바도르 로메르 대주교의 피살사건이다.

1980년 3월 엘살바도르 수도인 산살바도르의 한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군사정부의 지원을 받는 ORDEN이라는 준군사조직 암살단원들로부터 총격을 받고 쓰러진 로메르 대주교의 피살은, 또 하나의 비극적인 중남미 파씨즘의 단면이다.39)

 

그러고 나선, 이 “라틴 아메리카의 비극”ㆍ신식민지 중남미 파씨즘의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 군사파쑈라는 전체주의가 자리를 잡게 한 정치적 명분은, 흔히 ‘국가안보주의’라는 것이었다.

1940-1950년대에 걸쳐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 치하에서부터 준비돼온 라틴 아메리카 국가안보주의는, 1959년 쿠바 공산화 이후 케네디 행정부의 피그만 침공 실패와, 월남의 디엔 비엔푸 함락40)이 있은 후 본격적인 태동을 서둘렀다.

케네디 행정부는 미국의 대(對)중남미 정치ㆍ군사전략의 전통적 개념을 재정립, 방어 중심의 고전적 군사전략을 게릴라와 대중폭동을 견제하고 분쇄하며, 그에 대응하는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개발안보’라는 반(反)게릴라전 방식으로 바꾸었다.41)

 

여기에서 논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우선 “방어 중심의 고전적 군사전략”이든, “게릴라와 대중폭동을 견제하고 분쇄하며, 그에 대응하는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개발안보’라는 반(反)게릴라전 방식”이든, 어느 경우에나 저들의 ‘국가안보주의’가 국가의 적(敵)으로 상정하고, 또 그렇게 대하고 있는 것은 어느 국가나 모두 자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미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토착 지배ㆍ착취세력이 자국의 국민을 적으로 삼아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에서 “케네디 행정부는 … 방어 중심의 고전적 군사전략을 … 반(反)게릴라전 방식으로 바꾸었다”고 할 때, 사실은 바뀐 것은 군사전략의 내용이 아니라, 그 방식뿐이다. 즉 “방어 중심”의 소극적인 전략 방식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식으로 그 전략이 바뀌었던 것이다.

그 다음엔,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개발안보’”라는 것에 관해서인데, 신식민지주의를 논할 때면 일일이 지적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일반적으로 ‘경제개발’이 언급되고 특히 그를 위한 미국의 ‘경제원조’ 혹은 ‘개발원조’가 언급된다. 대개는 그것이 미국의 경제적 이해와는 무관한 것으로, 혹은 심지어 미국이 그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제공했고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읽히는 방식으로!

그러나 이른바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그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과학적인 이해이다. 즉, 문제를 전적으로 몰계급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제국주의가 제3국에 제공하는 원조는 제국주의의 이해에 복무할, 피원조국의 대리통치기구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러한 원조를 제공하는 제국주의 본국의 계급관계에서는 노동자ㆍ인민으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으로, 혹은 (적자재정에 의한 원조일 경우) 그것을 담보로 독점자본의 시장을, 특히 군수 독점자본의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위 저자들은 이렇게 계속한다.

 

미국의 대(對)중남미 정책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60년대부터 중남미에 등장한 군사정권들이, 라틴 아메리카 자체 내의 백인 군국주의와 파씨즘ㆍ미국의 매카시즘들을 뒤섞어 만든 … 중남미 파씨즘은, 대륙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안보주의는 … 세련화된 신식민사회와 …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비극적 현실을 변명하기 위한 도구라는 인상을 짙게 드리우고 있다.

미 국방부 자문기구인 랜드연구소에서조차 “미 국방부는 미 다국적 기업들이 중남미 여러 나라들의 중앙정부와 오랜 부패의 역사를 맺어올 수 있도록, 군부를 통해 뒤치닥거리 해왔다”는 우려를 표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 파씨즘과 미군부의 관계 및 중남미 파씨즘의 이면을 들어내 보여주었다.

… 라틴 아메리카의 군국주의 전통은 미국 대외정책이 강조한 국제공산주의라는 편리한 ‘속죄양’과, 미 국방부가 라틴 아메리카 군부 장교들의 교육과정을 통해 형성시킨 국가안보주의 교의(敎義)를 바탕으로 한, 극우 반공정권을 중남미 11개국에 탄생시켜 암살과 고문ㆍ테러로 뒤덮인 군사 파씨즘의 선풍을 일으켰다.

워싱턴 당국은 특별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도 반공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중남미 독재자들을 지원했고, 이 같은 공산주의에 대한 선입견은 결과적으로 문제의 ‘중남미 파시즘’을 탄생시켰다.42)

 

중남미 군사파쑈는 반게릴라전을 돕는다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압과 고문의 기술을 크게 발전시켰고, 이를 국내 독재통치에 활용하기도 했다. 미국의 국방성과 국제개발처(AID)ㆍ중앙정보국(CIA) 등은 직접, 간접의 갖가지 공안교육 프로그램과 자금지원을 통해 반게릴라전에 필요한 테러와 고문ㆍ감시 기술 등을 가르쳤고, 장비를 제공했다. 7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미국의 역할은 중남미 지역 경찰의 맏형으로 나선 브라질에 이전돼 수행됐다.43)

 

이것이 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자유와 인권을 외치는 미 제국주의의 민낯이다.

참고로, 여기에서 “특별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경우에도” 운운할 때, 저자들은 극우반공의 파쑈 정권을 유지ㆍ강화하는 것 자체가 미 제국주의, 즉 미 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은 자신들이 바로 앞에서 인용한 미 국방부 자문기구 랜드연구소의 발언, “미 다국적 기업들이 중남미 여러 나라들의 중앙정부와 오랜 부패의 역사를 맺어올 수 있도록, 군부를 통해 뒤치닥거리 해왔다” 운운과 모순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타성적 사고(思考)를 하는 저들이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신식민지 파씨즘에서 노는 미국 다국적 기업들의 역할은 저들로 하여금 “다국적 기업도 한몫”이라는 소제목 하에, 즉 ‘중남미 파씨즘의 비극에 다국적 기업도 한몫했다’는 소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고문과 암살이라는 군사 파씨즘의 질병을 일으킨 병균들 중에는, 상당 정도가 미국의 다국적 기업 회의실과 군사기구들에 의해 배양됐다는 비판도 있다.44)

 

브라질의 한 가톨릭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총과 고문과 테러가 없다면 브라질 군부체제는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군부체제가 없다면 외국기업들이 계속 민중을 희생시켜 막대한 이윤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45)

 

또 “지배 세력화한 [라틴 아메리카: 인용자] 군부”라는 글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군부”는 “대부분 미[국에: 인용자]서 훈련받은 ‘반공 십자군’”이라며,46) “미 경제이익 보호”라는 소제목 하에 이렇게도 얘기한다.

 

미국의 대(對)중남미 군사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 정치학자 제임스 프라츠 박사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워싱턴 군부는 라틴 아메리카 군부들에게 군부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개인적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급소’를 구축해 주고 교육시킨 뒤, 미국의 경제적 이익 보호를 위해 그 군부를 이용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 정치체제의 심장부로 진입했다.”47)

 

그러면 이러한 신식민지 파씨즘 하에서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으로서의 대자본가, 대지주들의 행태는 어땠을까? 저자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연속되는 쿠데타의 연출로 탄생되는 역대 군사정권들은, 법과 질서를 옛날의 신화로 돌려버린 채 준군사ㆍ준경찰 조직의 비호 아래 아무런 처벌의 위험도 없이 마약밀매ㆍ강도ㆍ공갈ㆍ협박 등의 범죄가 자행될 수 있게 했고, 대재벌이나 대농원 지주들이 저항하는 노동자들과 사업경쟁자를 없애버리기 위해 암살단을 고용, ‘총잡이’들로 하여금 쏴 죽여 버려도 눈을 감았다.

실제로 브라질ㆍ아르헨티나 등의 대농원들이 자기들 농장에 땅을 팔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농민들이나, 말썽을 부리는 농업노동자들을 돈을 주고 고용한 ‘총잡이’들을 시켜 살상한 사례는 수없이 많고, 민정(民政)으로 돌아온 현재에도 대농원의 농업노동자 감독들이 총기를 휘두르는 예가 적지 않다.48)

 

그런데, 이들 라틴 아메리카 파씨즘의 현지 집행자들의 정신세계 또한 신식민지 파씨즘을 현지에서 집행하는 자들의 정신세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브라질 국가안보주의는 친미주의자인 고토 예 실바 장군을 비롯한 고위 장성들에 의해, 1950년대부터 미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나름의 개발을 시작했다.

실바 장군은 …

… “우리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를 겨냥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통해 미국을 겨냥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서구문명의 파수꾼인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릇된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전제 아래 ‘미국 이익 = 브라질 이익’이라는 등식을 세웠다. 따라서 브라질은 미국 이익을 보호하는 지역경찰이 돼야 하며, 그 크기와 위치에서 볼 때 남대서양의 민주주의와 자유기업을 안전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49)

 

‘미국 이익 = 브라질 이익’! 물론 ‘미국 독점자본의 이익 = 브라질 대자본 및 대지주의 이익’이라는 뜻이다. 바로, 제국주의의 이익과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의 이익이 동일하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급적 이해의 동일성이야말로 제국주의로서는 저들 현지 대리인들을 통해 신식민지 지배가 가능한, 그리고 현지의 토착 지배ㆍ착취계급으로서는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노동자ㆍ인민의 저항과 투쟁을 억압ㆍ압살할 수 있는 기초인 것이다.

참고로, 위 실바 장군의 발언 중에 “서구문명의 파수꾼인 미국” 운운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때 “서구문명”이란 사실은 “자본주의”를 기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어찌 “서구문명의 파수꾼”이기만 하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인용한 것에서만 보더라도 미국은 민주주의의 파수꾼, 자유의 파수꾼, 테러와 고문ㆍ암살의 파수꾼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한 파수꾼인 미국이 비단 라틴 아메리카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선들 어찌 “그릇된 짓을 할 리가” 있겠는가?!

한편, 이러한 식민지ㆍ신식민지 지배ㆍ억압과 그 착취는 당연히 피착취 인민 대중의 저항ㆍ투쟁을 불러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저들의 파씨즘이 저토록 잔혹하게 전개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억압과 착취에 대한 저항ㆍ투쟁이 그만큼 광범하고 격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씨즘은 체제의 위기에 대한 독점자본의 대응이고, 그 강도는 바로 그 위기의 강도에 비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여러 형태의 저항과 투쟁, 실질적인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들이 벌어져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 승리는, 대표적인 예로 1970년대 초 칠레에서의 아옌데 정권의 성립처럼 합법적 절차에 의한 것이든, 니카라구아의 산디니스타 혁명처럼 무력에 의한 것이든, 쿠바 혁명을 제외하고는, 미국의 직접적, 혹은 간접적, 즉 신식민지 현지 군대와 그 외곽의 극우ㆍ반공 단체들을 동원한 ‘개입’에 의해 좌절되고, 타격을 받곤 했다.

여기에서는 니카라구아 산디니스타 혁명에 대한 자료를 간략히 제시해보자. (물론 소부르주아적 관점의 자료인 점을 감안하며 읽어야 한다.)

 

1979년 7월 이전에 니카라구아에 존재했던 자본주의 국가는 미국인들의 군사침략과, 본질적으로 이러한 침략의 산물인 소모사 독재정권을 통해 미국이 이 나라에 행사해온 정치적 영향력의 산물이었다. 니카라구아에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근대국가를 설립하려는 노력은 여타의 라틴 아메리카 지역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코스타리카 등지에서 훨씬 이전에 이미 도입된 자유주의적 제 개혁의 영향을 받아 지난 세기가 끝날 즈음에서야 비로소 근대화된 부르주아 일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 및 국가의 자본주의적 개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보수적 과두독재와 미국(당시 중미에서의 운하건설에 이해관계가 있었던)과의 결탁은 니카라구아의 자유주의적 개혁계획에 급속하고 폭력적인 제동을 걸었다. 1909년 젤라야(Zelaya) 대통령은 미국 지원세력과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국토를 침략하게 되는 미 해군의 침공에 의해 전복되었다. 1910년 ‘도손협정’(Dawson Accords)의 강요로 니카라구아는 미국의 실질적인 보호국으로 개편되었다. 1912년 미국 군대가 니카라구아를 점령하였다. 1914년 보수 정권은 미국과 브라이언-차모르 조약(Bryan-Chamorro Treaty)을 체결함으로써 양 대양을 연결할 수 있는 니카라구아의 지리적 잠재력을 미국이 장악하도록 했으며, 파나마까지의 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지배를 허용하였다. 1917년 미국은 함대외교를 펼쳐 보수주의자들의 수령격인 에밀리아노 차모르를 대통령에 앉혔다. 그는 외무상으로서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과의 조약을 체결ㆍ서명했던 바로 그 자이다. 1921년과 1926년 미국 군대가 다시 니카라구아를 침범했다.

1927년에서 1933년 사이 산디노 장군의 군대는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미 점령군에 맞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해방 전쟁을 벌였으며, 마침내 미국은 이 나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제국주의 지배의 연장을 보장하기 위해 이나스타시오 소모사를 수령으로 하는 국가방위군이라는 정치ㆍ군사기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소모사는 일종의 트램폴린(trampoline) 기구로서 국가방위군을 이용하여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독재왕국을 건설하였으며, 이는 1979년까지 유지되었다.50) 소모사 독재정권은 그의 식민지적 국가기구를 통해 미국과 국내의 지배적 부르주아 간의 동맹을 맺게 하는 정치적 교량 역할을 했다.

오랜 기간 니카라구아의 지배계급들은 스스로 종속적인 독재국가에 대한 그들의 종속상태를 받아들이는 데 아무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국가주권의 종속성은 지배적인 사회세력들 자신이 소모사 독재정권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산디노의 투쟁과 뒤이은 FSLN[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인용자]의 투쟁은 모두 민족주권이라는 전투적이며 노도와 같은 계획으로 이러한 신식민주의적 계획에 대항하였다.51)

“산디니스타가 권력을 장악한 1979년 7월 19일 이래 혁명 니카라구아가 직면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미국과의 관계”였고, “미국으로서도 니카라구아 혁명체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그런 가운데, “카터 행정부가 물러날 때까지의 기간 동안 미국과 니카라구아의 관계는 양국 간에 얼마간의 불길한 조짐, 기만, 알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양호하였다.” 즉, 카터 행정부는 “신정부의 안팎에서 우익세력을 강화하여 그들을 약화시키려고 기도”하기도 했고, “산디니스타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해 정치적ㆍ외교적 압력뿐만 아니라 경제적 압력도 가했”지만, “군사적 해결책은 가능성이 희박한 대안으로서 고려되었을 뿐이었다.”52) 그러나 신자유주의 레이건의 극우 정권이 들어서자 상황이 일변했다. 그리하여,

 

1981년 내내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자신들의 군사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 계획에는 쫓겨난 [소모사의: 인용자] 국가방위군 잔존세력으로 반산디니스타 무장세력을 창설하는 것과 엘살바도르ㆍ온두리스 연합군의 훈련안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온두라스에서 그들의 첫 번째 육해군 합동훈련에 들어갔고 니카라구아에 대한 봉쇄ㆍ침공의 위협을 노골적으로 가함으로써 이 지역에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였다.

소모사 독재체제가 무너지자 미국의 훈련을 받은 소모사의 국가방위군의 대부분은 온두라스로 도망쳤다. 온두라스의 정부와 군부의 지원을 받아 그들은 니카라구아 국경 400km를 따라 14개의 군사진영을 설치했다. 1980년 내내 그리고 1981년 몇 개월 동안 국가방위군 병사들은 니카라구아 영토로 침입해 들어와 약탈, 암살을 자행하였고 국경 지역의 산디니스타군 전초기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 시기 동안에 국가방위군은 어떤 형태의 군대도 창설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무기는 보잘것없었으며 그들의 공격은 산발적이고 통일되지 못했던 것이다.

1981년 마지막 몇 개월 동안 레이건 행정부는 기본적으로 CIA를 통해서 활동하면서 약탈 집단들을 통합, 훈련, 무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군사지원으로서 1,900만 달러를 제공받았다. 이 자금을 다 써버리자 워싱턴은 추가로 2,400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 1984년 초에 또 다시 2,100만 달러가 계획되어 8,000-10,000명 병력의 반혁명군을 창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전에는 서로 달랐던 그룹들이 CIA에 의해서 니카라구아 민주전선(Fueza Democtatica Nicaraguense)이라는 정치적ㆍ군사적 연합체 아래 결속되었다. 일반적으로 콘트라(Contras)로 알려진 FDN은 반니카라구아 비밀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 의해서 하나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

1981-1982년 사이에 레이건 행정부는 온두라스를 적당한 시기에 니카라구아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개시하기 위한 강력한 군사적 발판기지로 만들었다.53)

 

이후 10년 동안 산디니스타 정권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 반군 사이에 전쟁이 계속되고 3만여 명이 희생되지만, 미국은 군사적으로는 산디니스타 정권을 붕괴시킬 수 없었다. 자신이 소망과 객관적 사실의 전개를 혼동하는 일부 관찰자들은 ‘아직도 산디니스타 혁명은 지속되고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그 혁명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붕괴돼버렸다. 산디니스타가 사회주의를 내걸었지만, 사실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못하고, 즉 맑스-레닌주의적이지 못하고, 단지 민족주의적이었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생산수단의 소유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지, 반혁명적 계급ㆍ분자들의 혁명 파괴공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산디니스타 혁명 30주년을 맞아 ≪프레시안≫은 이렇게 쓰고 있다.

 

이후 10년 동안 산디니스타와 콘트라 반군의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니카라과는 두 동강이 나고 3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토록 심했던 내전은 다당제가 도입돼 선거가 치러진 1990년에 종결됐다. 내전으로 지친 니카라과인들은 그 선거에서 산디니스타와 오르테가를 거부했다. 대신 광범위한 보수주의자 연합이 정권을 잡았다.

오르테가의 혁명 동지이자 부통령을 지낸 세르히오 라미레즈는 당시 선거에서 패배를 인정했던 것이 오르테가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한다.54)

 

1990년에 니카라구아인들이 산디니스타를, 그 지도자 오르테가를 거부한 것이 과연 “내전으로 지친” 때문이었을까? 생산수단의 사회주의적 국유화ㆍ공동소유가 취해졌고, 반동적인 혁명 파괴ㆍ공작 분자들에 대한 혁명적 독재가 취해졌더라도 니카라구아인들이 산디니스타를, 그 지도자 오르테가를 거부했을까?

오르테가 지도하의 산디니스타 정권이 취한 기본적인 정책은 고작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혁명 성공 후 산디니스타는 경제계와 지식인, 보수주의자 정치인과 맑스주의 정치인 중에서 온건파들을 망라하는 국가재건위원회를 설립했다. 그것은 중미 지역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인 실험이었다.

새 정부는 정치적 다원주의와 혼합경제를 표방했다. 문맹률을 60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낮추는 문맹퇴치운동 역시 제시됐다.55)

 

그토록 엄중한 상황에서 그토록 어려운 “혁명 성공 후” 고작 저런 조치를 취한다는 건, 비단 “중미 지역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혁명적인 실험”일 것이다. 그러한 노선의 필연적 결과는 붕괴와 타락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르테가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적들과 타협함으로써 혁명의 원칙을 포기해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엄한 낙태금지법을 통과시킨 것도 막강한 영향을 가진 가톨릭교회를 달래기 위한 오르테가의 양보안이었다고 생각한다.”56)

물론 “오르테가의 타협적 행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칭송이 없지도 아니다. 예컨대, “한때 산디니스타의 사령관이었던 이든 파스토라(Eden Pastora)는 오르테가를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이든 파스토라(Eden Pastora), 그런데 그는 “산디니스타의 사령관이었다가 1980년대 혁명에 환멸을 느껴 콘트라 반군 쪽으로 전향했다가 다시 오르테가 지지자로 돌아온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며,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탄하고도 거래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물이다!57)

아무튼 그렇게 해서 니카라구아는 아직도 신식민지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       *

 

너무나 남의 얘기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염치가 없어서라도, 조심스럽지만, 우리의 문제를 다룬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끝맺어야 하겠다.

 

신식민지란 국내 지배자와 국외 지배자들의 일종의 이해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결국 신식민지 상황으로 피해를 보는 쪽은 평시에 각종 민영화, 시장화, 외국자본 침윤 속에서 착취당하고, 동북아 국제 상황이 심각해지면 총알받이로 징집당해야 할 한국 민중뿐일 것이다. 피해자인 민중이야말로 탈식민화를 위한 투쟁에 앞장서야 하지 않겠는가? 군사ㆍ정치ㆍ경제적 종속이 심화돼가는 상황에서는 민중을 위한 좀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 것만은 확실하다.58)  노사과연

 


 

1) 응오 딘 지엠은 1963년 11월 군부 쿠데타로 실각, 민심을 달래려는 일종의 속죄양으로 처형(피살)되었고, 응우옌 반 티에우는 1975년 4월 사이공이 함락되자 미군의 도움으로 대만ㆍ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2) 주지하는 것처럼, 참전한 한국군 역시 그 용맹함을 자랑했다. 다음 기사를 보라, ― “베트남에 ‘따이한(大韓, 한국) 제사’라는 것이 있다. 이름도 생소한 이 제사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을 위한 제사다. 베트남 인민들의 따이한 제사는 그래서 마을별로, 지역별로 한날한시에 열린다. 죽은 날이 같으니 온 동네가 집집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사를 지낼 사람이 남아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은 제사를 지낼 수도 없다. / 제삿날이면 마을 전체가 향 연기로 뒤덮인다. 자욱하게 가라앉은 연기 속,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를 추모하는 사람의 제례가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2월 26일, 빈딘성의 고자이 마을에서는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48주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을 것이다. 이날은 고자이 마을에서 단 한 시간 만에 380명의 민간인이 한국군에게 한꺼번에 몰살당한 날이다. 그곳의 향 냄새가 혹여 당신의 코끝에 날아오지는 않는가. / 베트남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파악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에, 피해자 수만 9000여 명에 달한다.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갓난아이와 어린이, 노인, 그리고 여성들이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와 인민들이 확연히 밝히고 있는 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정부는 학살 50년이 다 되어가도록 인정도,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황윤희, “‘설명없이 집단학살, 그게 한국군의 특징이었다’. [베트남 평화기행①] 베트남 민간인 학살 공식 희생자만 9천여 명 … 한국 정부는 ‘침묵’”, ≪오마이뉴스≫, 2014. 2. 2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61839>

 

3) 이 거대한 규모의 전비 지출, 즉 달러 살포는 물론 ‘군산복합체’로 불리는 국수독점자본의 시장 창출ㆍ확대를 위한 것이다.

 

4) 브레튼우즈 체제, 즉 구 IMF 체제는, 금 1온즈 = US$35.-의 비율로 미국이 가맹국 통화당국들의 금과 미 달러화 교환 요구에 응한다는 조건하의 고정환율제가 그 핵심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체제는 달러화 가치가 안정되어 있는 한, 즉 국제화폐금융사에서 ‘달러 부족의 시대’로 불리는 조건이 지속되는 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1950년대 말엽이 되자, 한편에서는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 등의 전후복구가 ‘완료’되고, 즉 그들 국가의 달러 수요가 크게 감소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 국가가 국제 상품시장에서 미국의 수출 경쟁국으로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 경영, 즉 자본주의 세계 지배를 위한 해외 주둔 군사비 등,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누적되면서 국제 화폐ㆍ금융시장은 이른바 골드러시(gold-rush), 즉 달러 투매와 금 매입 쇄도가 거듭되면서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1960년대 초 케네디 정권 때부터 거듭 달러 방위 정책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불균등 발전 법칙의 관철로 국제 상품시장에서마저 미국의 수지 역조가 누적돼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특히 월남 전비를 위시한 국제수지 적자가 거대하게 누적되면서, 미 정부는 1971년 8월 15일 ‘특별 성명’ 발표, ‘금-달러 교환 정지’를 선언하게 되고, 이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는 그 출범 4반세기여 만에 그 생명을 다하게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예컨대 다음 인용문에서처럼,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를 미국의 월남전 패배의 결과로 보고 있으나, 동의하기 어렵다. ― “…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선진제국에 의한 인도지나 반도의 군사개입 정책은 1975년에 있어서 선진제국의 완패, 인도지나의 새로운 체제개편으로 종결되었으나, 이 역사적 사건은 … 다른 원인과 함께 세계화폐인 달러의 가치를 상당히 하락시켰고, 마침내 경제적 세계지배의 중요한 지배기구인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실질적 붕괴를 가져왔다.” (스야마 야스지(巢山靖司) 저, 서경원 역, ≪라틴아메리카 변혁사≫, 백산서당, 1985, p. 25.) 참고로, 위 인용문 중 “선진제국”은 ‘제국주의 미국’을 가리키는데, 극히 억압적이었던 당시의 사상적ㆍ학문적 상황 때문에 “선진제국”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5)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베트남은 3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200만 명이 불구가 됐다. 고엽제 살포로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고엽제 피해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400만-800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2세, 3세에게 대물림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입된 폭탄의 양만 제2차 세계대전의 3배에 달한다. / 이는 1㎡에 폭탄 하나가 떨어진 셈으로, 베트남 인민들은 땅굴을 파고 살 수밖에 없었던 전쟁 당시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지상에 살고 싶어도 살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그리하여 땅굴은 전쟁 수행을 위한 구조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구조물에 더 가까웠다. 미국에게도 베트남 전쟁은 자국의 역사상 가장 길고(20년), 가장 많은 전사자(5만 명)를 내고, 가장 많은 비용을 투입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었다.” (황윤희, 앞의 글.)

 

6) 조형제, “마르코스 체제의 성격과 민중운동의 성장”, 김종채ㆍ공제욱ㆍ조형제ㆍ이성형 저, 손학규 편, ≪필리핀 2월혁명: 마르코스 독재정권의 붕괴와 민족민주운동≫, 민중사, 1987, pp. 66-7.

 

7) 아마도 구에레로 저, 정종길 역, ≪필리핀 사회와 혁명≫, 공동체, 1987, p. 73.

 

8) 김유 기자, “무법의 왕국 ‘후크’단, 필리핀 ‘루존’도”, ≪중앙일보≫, 1967. 8. 10. <http://news.joins.com/article/1130306>

 

9) “막사이사이는 퀴리노 정권 하에서 국방위원장으로 재직시 혁명대중운동을 패퇴시킨 공로로 미국 및 토착착취계급의 신임을 받아 왔다. 미국의 프로파겐다 공장(언론기관 및 여론형성기구를 말함)은 그가 행한 무자비한 대중억압 및 민주적 권리탄압의 대가로 그를 ‘대중의 지도자’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조작선전하면서 그의 대통령선거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 / 막사이사이는 1953년 선거에서 퀴리노와 대결하기 위하여 자유당에서 국민당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행동을 보아도 미국이 이 두 보수정당 사이에 어떠한 기본적 차이도 부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막사이사이는 필리핀 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 독점자본이 미국의 필리핀 상업회의소를 통하여 막사이사이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주어 전대미문의 호화ㆍ부정선거를 치르게 하였다. 합동미군사고문단의 권위를 이용하여 미군장교들을 군의 중대 차원으로까지 침투시킴으로써 그들이 미는 막사이사이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하였다. / 짧은 기간의 재임기간[1954-1957: 인용자]을 통하여 막사이사이는 당과 민중의 군대의 분쇄책동을 완성하였다.” (아마도 구에레로 저, 정종길 역, 같은 책, p. 70.)

 

10) ‘자유세계’의 파수꾼 미 제국주의는 역시 식민지 피억압 민족의 해방자이다!

 

11) 조형제, 앞의 글, pp. 59-60.

 

12) 스야마 야스지(巢山靖司) 저, 서경원 역, 앞의 책, p. 36.

 

13) 리차드 L. 해리스, “포위된 혁명”, 리차드 L. 해리스 외 저, 편집부 역, ≪니카라구아 혁명 연구≫, 이성과현실사, 1987, p. 290.

 

14) 인탄 수완디(Intan Suwandi), “No Reconciliation without Truth: An Interview with Tan Swie Ling on the 1965 Mass Killings in Indonesia”, Monthly Review, Vol. 67, No. 7, Dec. 2015, pp. 14 이하 참조.

 

15) 브레들리 심슨(Bradly Simpson), “미국과 1965-19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The United States and the 1965-1966 Mass Murders in Indonesia)”, Monthly Review, Vol. 67, No. 7, Dec. 2015, p. 46.

 

16) 이현석, “‘수카르노’ 대 ‘수하르토’ | <‘인도네시아’ 공산당 쿠데타 미수> 9ㆍ30 사건 1주년 결산”, ≪중앙일보≫, 1966. 1. 1. <http://news.joins.com/article/1080338>

 

17) 2013년 11월 8일자 ≪한겨레≫에는 흥미롭게도 “도청보다 심각한 ‘자발적 식민성’”이라는 제목의,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인(현재는 정의당 의원)의 다음과 같은 칼럼이 실려 있다. ―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한국을 주요 정보 수집 대상으로 분류하고 도ㆍ감청을 포함한 무차별적인 정보 수집 활동을 해왔다고 외신이 폭로했다. … / 그러나 필자에게는 미국이 공연한 수고를 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굳이 엄청난 첨단 장비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한국을 감시하지 않아도 한국에는 자발적으로 미국에 정보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미 정보기관 요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있는 한 관리는 재임 기간 중 한국 국방부, 합참, 방위사업청 관계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문제점을 까발리고 상관에 대한 험담까지 늘어놓는 데 대해 깜짝 놀란 적이 많았다고 회고한다. … 거물급 정치인들이 자신과 관련된 정치 현안에 대해 미 대사관을 찾아가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관례화되었다. / 3년 전에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외교전문만 보아도 한국에는 자발적인 미국의 정보원이 널려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2008년 11월13일자 외교전문은 박근혜 대통령도 2002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캐슬린 스티븐스 미 대사와 오찬을 함께 하면서 상세히 소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 / 미국에 정보를 제공하는 밀고자들에게는 조국이 두 개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이중 충성’이 덕목이다. 이런 정보 제공자들이 국회, 국방부, 외교부, 군부대, 방위사업청에 득실거린다. 미국이 없으면 당장 우리나라가 망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중 충성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란 없다.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국방부 정보본부장은 ‘미국이 없이 남북한이 일대일로 싸우면 진다’고 했다. 그에게 미국이란 단순한 동맹국, 그 이상의 존재다. 여기에는 미국에 대한 의존성을 넘어선 자발적 식민성이 도사리고 있다. …”

 

18) “장윤석 ‘김무성의 큰절이 뭐가 문제냐’ vs 한인섭 ‘쪽팔려’”, ≪뷰스앤뉴스≫, 2015. 7. 30. <https://www.viewsnnews.com/article?q=122949>

 

19) 김무성을 위시한 이들 의원들이 워싱턴의 미 국립묘지에서 벌인 영예로운 행동들은, 예컨대, ≪한겨레≫의 기사 “‘친일’ 김무성 아버지가 애국자로 둔갑하고 있다”(<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02704.html>)에서 지금도 누구나 볼 수 있다. 그런데, 김무성은 그에 앞서 같은 달 초에는 국회의 국방위원들을 대동하고 용산의 한미연합사를 방문, “존경과 감사” 마음으로 주한미군 사령관을 등에 업고 희희낙락하기도 했다. 혹시 생물학자들은 모종의 ‘유전자’ 운운할지 모르지만, 분명 계급적 본능의 표출 아니겠는가!

 

20) 나중에 일본 총리대신과 부총리를 지내는 자민당의 아소 타로(麻生太郞)는 2003년 5월 31일 도쿄대 강연에서 과거 일제가 조선 황민화 정책으로 강요했던 창씨개명에 대해 “조선인들이 성씨를 달라고 한 것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 日 자민당 정조회장 망언”이라는 ≪한국일보≫(2003. 6. 2.) 보도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여권을 받으면 이름 앞에 ‘김(金)’이라든가 하는 조선명이 쓰여 있었다. 이것을 본 만주 사람들이 ‘조선인이군’이라고 말해 일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성씨를 달라고 한 것이 원래 창씨개명의 시발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005년 10월 31일 아소 타로가 일본 외무대신으로 기용되자 한국의 극우신문들은 다시, 예컨대, “‘창씨개명 한국이 원했다’ 망언꾼 외상 기용”(≪조선일보≫, 2005. 11. 1.) 운운하며 떠들어댔다. 그런데, 아소 타로가 말하는 ‘조선인’이라는 게, 조선의 무지렁이 노동자ㆍ농민은 분명 아니고, 힘 꽤나 쓰고 돈 꽤나 있는 조선인들, 즉 친일 조선인들이었을진대,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했다”는 발언은 과연 그냥 ‘망언’이기만 할까? 이 사회 저 극우세력들의 ‘망언 규탄’ 그것은 사실은 진실에 대한 불편함의 표현, 즉 일제하에서 그 선대(先代)들이 벌인 자발적ㆍ적극적ㆍ능동적 친일이 드러나는 데에 대한, 그리고 식민지,ㆍ신식민지 지배의 계급적 기초의 일각이 드러나는 데에 대한 이 사회의 정치ㆍ경제ㆍ문화 지배층의 히스테리일 것이다.

 

21) “서구열강의 제3세계 정책의 목표는 신흥국들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며, 신흥국들이 경제적으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막고, 특히 외국자산의 국유화나 사회적 부문의 형성을 막으며, 최종적으로는 비자본주의적 발전으로 옮아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확대하는 것을 막는 것을 노리고 있다. / … 신식민지주의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를 살려내기 위한 투쟁이며, 사회주의의 확대에 반대하고, 발전도상국가들 중 사회주의를 지향하려고 하는 나라들이나 사회주의와 동맹을 맺는 국가들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신흥국들을 세계자본주의 경제에 통합시켜야 할 부분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예. 아블리나(E. Ablina) 저, 中村良広ㆍ衫田憲道 역, “帝國主義と發展途上國”, ソ聯邦科學アカデミー 편, ≪社會科學≫, 1974년 No. 4, 통권8호, 도쿄: 社會科學社, pp. 232-3.)

 

22) 대부분의 신식민지주의 종속 국가들에서 “미국식 민주주의”가 내세워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미국, 즉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이기 때문이다.

 

23) 주지하는 것처럼, 이들 가운데 몇몇에서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해 있고, 그런 만큼 그 계급적 분열과 투쟁도 고도화되어 있다.

 

24) “‘제3세계’란 것은 가설적(假設的)인 개념이다. 그것은 사회ㆍ경제면에서 대단히 다양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의 각각에 있어 어느 것에나 특징적인 것은,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경제적으로 후진적이고, 세계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있다.” (예. 타라브린(Е. ТАРАБРИН ), “‘第三世界’と帝國主義 ―力關係における新たなもの―”, ソ連科學アカデミ-ㆍ世界經濟と國際關係硏究所, (國際關係硏究所譯編), ≪世界經濟と國際關係≫ 제30집, 도쿄: 協同産業KK出版部, 1975, p. 178.) 참고로, 타라브린의 이 글은 그러나, 쏘련에서의 수정주의ㆍ기회주의의 성장을 반영하여, 정세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파악하는 대신에 아전인수식으로, 낙관적ㆍ낭만적으로 파악하는 병증(病症)을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이렇게 쓰고 있다. ―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신식민주의의 주요한 동인(動因)이다. 구종주국이나 그 제국주의적 동맹국=경쟁상대국은 신식민주의적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 신흥국가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고, 이들 국가의 생산력, 특히 천연자원을 약취할 가능성을 확보하며, 발전도상국을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 내에 붙잡아매려 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국제정세 하에서 신식민지주의 정책은 갈수록 그 파국을 드러내고 있다. … / 분석이 보여주는 바로는, 신식민지주의는 그 장기적 전략목표를 어느 것 하나 달성하지 못했다.” (pp. 178-9.) 보다시피, 실제의 국제정세 전개와는 정반대의 ‘분석’을 보여주고 있다.

 

25) 던칸 캠벨(Duncan Campbell in Los Angeles), “키신저가 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을 승인했다(Kissinger approved Argentinian ‘dirty war’)”, The guardian, 2003. 12. 3. <http://www.theguardian.com/world/2003/dec/06/argentina.usa>

 

26) 조형제, 앞의 글, p. 56.

 

27) 김종채ㆍ공제욱ㆍ조형제ㆍ이성형 저, 손학규 편, 앞의 책, pp. 113-4.

 

28) 팔메 두트(R. Palme Dutt), ≪파씨즘과 사회 혁명(Fascism and Social Revolution)≫(개정판 1935), Wildside Press, p. 97.

 

29) 팔메 두트(R. Palme Dutt), 같은 곳.

 

30) 티쎈(Thyssen AG)과 크룹(Krupp AG)은 모두 철강, 기계, 선박, 무기 등을 생산하며 나찌의 전쟁 수행에 기둥 노릇을 했던 독일의 거대 독점자본으로서 각각 티쎈가(家)와 크룹가가 설립ㆍ운영자였다. 두 회사는 1999년 합병하여 티쎈크룹(ThyssenKrupp AG)으로 되었다. 국내 대형 빌딩의 엘리베이터 중 다수가 바로 이 회사의 제품이다.

 

31) [어떤 가문인지, 독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32) 디터딩(Henri W. Deterding)은 영국과 네덜란드하 합작한 거대 석유회사 로얄더취쉘(Royal Dutch Shell Oil Company)의 최고경영자였다.

 

33) 오언 영가(Owen Young)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의 대주주 가문이다.

 

34) 팔메 두트(R. Palme Dutt), 앞의 책, pp. 100-1.

 

35) 예컨대, “국가유형 가운데 ‘발전 수준이 가장 낮은 경우’인 AㆍAㆍLA[아시아ㆍ아프리카ㆍ라틴 아메리카: 인용자]도 상세하게 살펴보면 50년대 말경부터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독립한 상태였다. 이는 … 구식민지 상태로부터 형식적으로는 독립되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지배당하는 신식민지 상태로의 이행을 뜻한다.” (스야마 야스지(巢山靖司) 저, 서경원 역, 앞의 책, p. 31.)

 

36) 아시아 대신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예를 드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관한 것은 일단 남의 얘기여서 우리 사회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37) 이은윤ㆍ문일현ㆍ최재영 저, ≪격동하는 라틴 아메리카≫, 세진사, 1991,p. 10.

 

38) 저자들이 서문 말미에, 그리고 그것을 받아 책의 앞표지 안쪽 날개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 “이 책은 필자들이 중앙일보 기획취재팀으로 50일 동안 라틴 아메리카 6개국을 순방취재, ‘중남미 영광과 좌절’이라는 제목으로 … 연재했던 내용들 중 지면 제작상 부득이 끊어내야 했던 부분 등을 되살리고, 신문에는 연재하지 않았던 10개 항목(중남미 파씨즘ㆍ반미감정ㆍ사회주의에의 동경ㆍ후지쇼크ㆍ의식화 고양기법ㆍ…)을 추가로 덧붙여 담은 것이다.” 그렇게 “추가로 덧붙여” 단행본으로 엮어낸 저자들의 의지와 용기에 갈채를 보낸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했다면, “지면 제작상 부득이 끊어내야 했던 부분 등”은 “지면 제작시에 부득이 가위질 당했던 부분 등”이라고, 그리고 “신문에는 연재하지 않았던 10개 항목”은 “신문에는 연재하지 못했던 10개 항목”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중남미 파씨즘”이니 “반미감정”이니, “사회주의에의 동경”이니 “의식화 고양기법”이니 하는 저 10개 항목은, 그것들이 남의 나라들의 얘기라고는 하지만, 재벌의 신문사로서는 그것들을 수십만 독자가 읽게끔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39) 이은윤ㆍ문일현ㆍ최재영 저, 앞의 책, pp. 47-8. 다만, 인용문의 첫 문단은 논의의 전개를 위해 인용부호를 붙여 인용문의 순서를 재배치했다.

 

40) 저자들의 착각이며, 디엔 비엔푸 함락은 1954년의 일이다.

 

41) 같은 책, p. 48.

42) 같은 책, p. 49.

43) 같은 책, pp. 53-4.

44) 같은 책, p. 54.

45) 같은 책, p. 55.

46) 같은 책, p. 106.

47) 같은 책, p. 107.

48) 같은 책, p. 51.

49) 같은 책, p. 50.

 

50) 소모사는 산디노를 암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 “1934년 2월 21일, 그 이후 40년의 암흑시대를 결정짓는 일은 단 하룻밤에 이루어졌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대하는 산디노 일행을 친위장교로 구성된 순찰대가 체포 연행하였다. 산디노와 참모장 에스트라다(Estrada) 장군, 제4유격대장 우만조르는 암살되었다. 전 아메리카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되던 산디노를 간단히 쏘아 죽이는 거짓말 같은 일은 미국 대사와 소모사의 합의 속에서 벌어졌다. 세 장군의 시체는 새벽에 교외로 비밀리 수송되어 암매장되었다.” (정명기, ≪니카라구아 혁명사. 민중노선의 승리≫, 한마당, 1986, p. 87.)

 

51) 카를로스 M. 빌라스(Carlos M. Vilas)ㆍ리차드 L. 해리스(Richard L. Harris), “민족해방, 대중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로의 이행”, 리차드 L. 해리스 외 저, 편집부 역, 앞의 책, pp. 259-60.

 

52) 만리오 티라도(Manlio Tirado), “미국과 산디니스타 혁명”, 리차드 L. 해리스 외 저, 편집부 역, 앞의 책, pp. 239-41.

 

53) 같은 글, pp. 244-5.

 

54) 선명수 기자, “니카라과 혁명 30주년… 혁명은 ‘미완성’”, ≪프레시안≫, 2009. 7. 22.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547>

 

55) 같은 글.

56) 같은 글.

57) 같은 글.

 

58)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 “탈식민을 위하여!”, ≪한겨레≫, 2015. 8. 5.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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