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쏘련 영화에 대한 일고찰 ― 지가 베르또프의 ≪레닌에 대한 세 노래≫를 중심으로

 

최상철│ 운영위원

 

 

Ⅰ. 변혁을 위한 무기로서의 영화 예술의 가능성

 

1895년 뤼미에르(Lumière) 형제의 씨네마토그라프1)가 세계 최초의 영화를 탄생시켰다. 국경을 넘어 제정 러시아에도 이 혁신적인 매체가 전파되었다. 1896년 6월 22일 볼가강 근처의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씨네마토그라프를 처음 접한 막심 고리끼는 오데사의 신문에 기사를 작성하였다. 그는 당시의 충격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이 발명품이 광범위하게 사용되리라는 것을 나는 예언할 수 있다. … 이 발명품이 과연 관객의 신경쇠약을 보상할 만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겠는가?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신경이 약해질수록 감지력 또한 약해져서 일상생활의 자연스런 충격에는 둔감해지고 대신에 보다 새롭고 강렬한 충격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씨네마토그라프는 이러한 모든 문제들을 여러분에게 동시적으로 안겨준다.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반면에 무디게도 하는 것이다! 이 발명품과 같은 기이하고도 환상적인 충격이 일찍이 없었던 만큼 그것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커져 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자신감을 상실하고 일상생활의 감동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기이하고도 새로운 것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우리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2)

 

                  [영화 장면 1] ≪씨오따 역에 도착하는 열차≫(1896)3) 중에서.

 

고리끼의 선구자적인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씨네마토그라프의 발명으로 탄생한 영화 예술은 인류의 문화사에서 전환점을 가져 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최초로 탄생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영화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임무에 성공적으로 복무하였다.

영화는 기존의 예술 장르와 달리 독점자본주의의 고도로 발전된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 탄생하였다. 생산수단을 자본가 계급이 장악하고 있는 한, 영화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무제한적 이윤 추구의 욕망에 봉사하며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를 유포한다. 그리고 대중은 예술의 소비자로서 전락한다.4)

그것은 최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영화산업을 보여주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전형적이다. 헐리우드 영화산업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서 독점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로서 1선에서 활약하고 있다.5) 2차 대전이후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는 3S 정책을 펼친다. 거기에 영화(Screen)가 ?스, 스포츠와 함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미제국주의자들이 그 누구보다 영화의 위력을 잘 알고 그것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구축을 위해 활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1980년 오월 광주의 피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머금고 탄생한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으로 인민들을 우민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정권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지배계급의 대중 포섭을 위한 이데올로기 조작은 역설적인 상황을 낳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파쇼 독재자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는 3S 정책과 거의 유사한 3F 정책(Três F)을 펼다. 3F는 축구(Futebol)로 대표되는 스포츠, 파티마(Fatima)6)로 대표되는 종교, 파두(Fado)7)로 대표되는 대중예술을 뜻한다. 그런데 바로 반(反)살라자르 투쟁의 선봉에 파두 음악이 섰다. 1974년 4월 25일 0시 20분, 당시 금지곡이었던 파두 가수 주제 아폰수의 <햇볕에 탄 그랜돌라 마을(Grândola, Vila Morena)>이 라디오 방송에서 흘러나온 것은 살라자르 정권의 조종이 울렸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역설은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을 무덤으로 안내할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탄생시킨 것과 맥락이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독점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에 의해 태어난 예술도 독점 자본주의 자신을 향하는 예술적 무기가 될 수 있다.

이에 있어 영화는 다른 예술 분야보다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고도화된 기계문명의 발전을 바탕으로 시각·청각적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작품, 무용, 회화, 조각 등의 기존 예술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다.8) 영화의 등장은 사진의 발명이 회화에 가한 충격보다 보다 커다란 변화를 예술계에 가져왔다.9) 기술의 진보로 가능하게 된 현실 복제와 재현에 있어서 영화가 지니는 장점은 대중들의 접근과 이해를 쉽게 한다. 글을 모르는 이들도 영화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인민대중이 영화를 집단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극의 장점을 뛰어넘는다. 또한 노동집약적으로 이루어지는 영화 제작 방식을 노동자 계급이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집단창작방식의 전형을 창출해 낼 수 있다.10)

근로인민 계급이 혁명을 통해 생산수단을 장악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영화 예술은 질적인 전환을 이룬다. 사회주의 사회의 영화는 단순히 혁명 이후 변모한 모습을 그려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좌표를 제시하는 역할까지 해낼 수 있다. 쏘련에서의 경험이 그것을 실증한다.11)

 

 

Ⅱ. 볼쉐비끼는 어떻게 영화를 활용했는가

  ―혁명 이전부터 네쁘(НЕП, 신경제 정책) 시기까지

 

훗날 볼쉐비끼가 되는 고리끼가 이미 1896년 영화의 혁신적 가능성에 주목했지만 현실적으로 제정 러시아의 영화 산업은 자본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짜르는 원시적인 검열수단을 통해 영화를 검열하였고 경찰 기구를 이용하여 극장에 모이는 대중을 감시하였다. 왕족이 처형당하거나 죽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상영될 수 없었다.12) 1905년 혁명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905년을 피로 물들인 짜르의 폭압적인 탄압을 보고하는 영화는 단 한 편도 러시아에서 제작되지 못했다. 하지만 1905년의 혁명 운동의 여파로 짜르는 두마라는 기만적인 양보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거운동은 경찰에게 스피커를 압수당하는 등 여러 폭압적인 조건 하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사회민주당원들은 영화관 안의 어둠을 이용하여 대중적인 불법 선거운동을 벌였다.13)

한편 레닌은 혁명 이전에 “영화가 어리석은 투기꾼의 손 안에 있는 동안 득보다 오히려 많은 해를 끼치고 혐오스러운 각본으로 대중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대중이 영화를 장악할 때 그리고 영화가 사회주의 문화의 진정한 활동가의 손 안에 있게 될 경우 대중을 계몽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라며 영화 예술이 지니는 힘을 간파하였다.14)

한편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회민주주의자 지하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젊은 볼쉐비끼 마야꼬프스끼는 반동기에 당대 제정 러시아의 연극예술을 비판하며 새로운 미래 예술로서 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현대 연극은 정지해 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연극이, 예술의 공리적 전망에 대해 자신의 자유와 목적을 망각한 예술가들의 장식적인 작업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연극은 예술의 반문화적 노예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연극은 자신의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그 유산을 영화에 넘겨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산업은 체호프나 고리끼의 소박한 리얼리즘과 능란한 솜씨로부터 가지를 치고 나와서 미래의 연극―배우의 예술에 연결된―에 문을 열어주게 될 것입니다.15)

 

그는 짜르 시대의 검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절제된 언어로 새로운 예술관을 피력하였다. 여기서 이 글이 1913년에 쓰여진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 발표되기엔 그로부터 20년 이상이 세월이 필요했다는 데서 마야꼬프스끼의 선구적인 인식을 알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고립화되고 분절화된 예술 노동과 부르주아 예술의 몰취향을 비판하였다. 예술이 부르주아들의 여흥을 위한 것이 아닌 ‘광범위한 민주주의적 예술’로 전환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예술가의 ‘개인적인 필요노동이 사회에 유용한 것’이 되도록 해야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을 완수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에게 있어 그러한 시대적 사명은 구래의 연극의 답습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완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의 소박한 리얼리즘이 아닌 미래의 입체적인 리얼리즘에 복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예술을 영화에서 찾았다.

고리끼와 레닌 그리고 마야꼬프스끼와 같은 뛰어난 볼쉐비끼는 일찍이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하였지만 이들은 짜르 체제하에서 영화를 자신의 무기로 활용할 수 없었다. 더욱이 1905년 혁명 패배 이후의 반동기에 그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암흑과도 같은 제정 러시아의 반동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짜르 체제의 운명을 재촉하였다. 1917년 2월 27일 뻬뜨로그라드의 알렉산드린스끼 극장 내부에까지 총성이 들린 것은 짜르의 폐위가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것이었다.16) 촬영 기사들은 2월 혁명으로 파괴된 뻬뜨로그라드의 모습을 기록했다. 불타버린 관공서와, 감옥, 짜르의 궁정을 파괴하는 성난 군중들의 분노의 흔적을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2월 혁명 직후 이중권력 시기 영화종사자들과 전문가들도 자신들의 조합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3월 6일에는 2천여 명의 영화인들이 참석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뒤이어 극장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요구가 이어졌고 파업이 조직되었다. 뉴스영화는 전쟁에 반대하며 참정권과 빵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집회를 담아냈다. 2월 혁명을 반영하는 영화가 극장에서 상영되었다.17)

10월 혁명이후 볼쉐비끼는 본격적으로 영화산업에 개입해 나갔다. 끄루프스까야의 주도하에 교육인민위원회는 영화분과를 설립했다. 뻬뜨로그라드를 중심으로 영화 산업에 대한 통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적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영화산업을 체계적으로 폐쇄하고 각종 장비들을 제거하고 해외와 백군 점령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1918년 3월 4일에는 모스끄바 노동자・병사・농민 쏘비에뜨 상임위원회는 영화기업에 노동자관리제 도입을 알리는 포고령이 내려진다. 포고령은 영화산업 기반을 파괴할 수 있는 무리한 몰수를 허용치 않음을 밝혔다. 또한 각종 영화 장비들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고 영화 산업의 파괴행위를 엄중히 차단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18) 1918년 5월 26일에는 교육인민위원회 산하 영화분과의 기능이 새로운 모스끄바의 영화위원회로 이전되었고 그곳에서 영화의 새로운 교육적 역할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19)

쏘비에뜨 정부의 영화는 내전과 간섭전쟁의 전선의 선두에 섰다. 스튜디오 안의 작업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선의 곳곳을 누비며 현장을 기록하고 그것을 전 쏘비에뜨에 신속히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1918년 선동열차가 체코와의 동부전선으로 이동하였고 영화인들은 열차에 탑승해 적극적인 전선의 현황을 기록하고 적극적인 선전선동 활동에 복무하였다. 이때 촬영된 필름은 모스끄바의 영화위원회로 보내져, 거기서 20세의 지가 베르또프(Дзига Вертов)의 편집을 통해 쏘비에뜨 정권의 선전선동을 위해 활용되었다.20) 내전 과정에서 수많은 아기뜨까(агитка, 단편 선동영화)가 탄생하였다. 1919년에 막심 고리끼는 ‘인간의 두뇌와 의지, 상상력이 빚어낸 환상적인 업적들’을 묘사하는 데 영화야말로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판단하였고, 그가 주도하는 총서 출판사업계획에 있어 ‘원시 사회의 생활’을 영화화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입안하였다.21)

내전이 한창이던 1919년 8월 27일 쏘비에뜨 정부의 인민위원회는 의장 레닌의 이름으로 다음의 포고령을 발표한다. 포고령 “사진 및 영화산업을 교육인민위원회 관할로 이전하는 문제에 관하여”가 발표되면서 쏘비에뜨 정부는 영화 산업을 국유화하기 시작하였다.22) 파괴되었던 영화 산업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가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내전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새로운 영화산업은 혁명의 메가폰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냈다. 꿀레쇼프(Лев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лешо́в), 뿌드프낀(Всеволод Илларионович Пудовкин), 롬(Михаи́л Ильи́ч Ромм), 에이젠쉬쩨인(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Эйзенштейн), 베르또프 등 세계 영화사의 혁명적 거장들이 출현하였다.23) 1919년에는 세계 최초의 영화학교인 게라시모프 국립 영화학교가 설립되어 체계적인 영화인 교육이 시작되었다.24)

영화산업 국유화가 시작된 이후 레닌이 가장 먼저 강조한 부분은 뉴스였다. 레닌에 따르면 뉴스는 쏘비에뜨의 우수한 신문과 같이, 당의 노선에 따라 창작되는, 매력적인 영상 홍보매체였다.25) 내전기의 레닌은 극영화보다 당장의 시급한 선전선동을 위한 뉴스 영화의 제작을 독려하였다. 레닌은 1922년에 “모든 예술 중에 우리에게 영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적백 내전 이후 신경제정책으로 경제가 회복세에 접어들자, 영화 산업도 탄력을 받게 된다. 1922년 소련 국가 영화위원회 (Госкино)가 설립되어 국가적으로도 영화 산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인민위원이었던 쓰딸린은 비러시아계 소수민족을 위한 문화적 자율성 사업을 집행하면서 실천적으로 영화 산업진행을 위해 복무하였다.26) 네쁘 시기에 회복된 생산력을 토대로 비로소 쏘련 영화 산업의 자립적 기반이 구축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에이젠쉬쩨인을 비롯한 수많은 황금기의 무성영화들이 제작되었다.

 

 

Ⅲ.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노선의 본격화와 문예노선

 

1. 네쁘에서 공업화로 이행의 필연성

 

레닌은 사회주의 경제가 그 독자적인 토대 속에서 자립하지 못한다면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혁명이 패배할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레닌은 수십 년에 걸친 제국주의 국가들의 발전을 단 몇 년 안에 따라 잡아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경제를 건설하는 것보다도 전시공산주의의 파괴를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1920년대 신경제정책은 전시공산주의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강요되었던 우선회였다. 레닌의 말 그대로 그것은 완전한 참패를 면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였다27).

그러나 네쁘는 자체로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네쁘로 인해 성장한 부유한 네쁘마니(Нэпманы)는 농업과 공업 분야 모두에서 근로인민대중과 격렬한 계급투쟁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감독 지가 베르또프는 네쁘 시대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영화가 유입되는 현상에 대해 심각하게 경고하였다. “혁명 이전 시대의 예술 작품은 우상처럼 여러분 주위에 있고 아직도 여러분의 독실한 감정을 지배합니다. 외국은 화려한 기술적 차림새로 치장한 영화, 드라마의 산송장을 새로운 러시아에 보내면서 여러분을 혼란 속에서 부추깁니다.”28) 알렉세이 똘스또이(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적인 공상과학물 ≪아엘리따(Аэлита)≫(1923)를 산출한 네쁘 시대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 공업화와 집단화로 전환해야 하는 1930년대로 이행해야 했다. 결국 네쁘는 그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전사회적 계획경제로 사회주의 경제의 토대를 구축하느냐 아니면 혁명을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전환하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2. 제1차 5개년 계획

 

1928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쏘련 경제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격렬한 계급투쟁 속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농업집단화 과정에서는 극심한 갈등을 야기했다.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벌어진 꿀락과의 투쟁은 알렌산더 도브?꼬(О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Довженко) 감독의 영화 ≪대지(Земля)≫(1930)로 형상화된 바 있다.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전개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거대한 성과를 달성하였다. 쏘련은 농업국가에서 대공업국가로 전환되었다. 대공업의 기초를 건설하고 농업에서는 집단화 달성을 통해 거대한 생산력 발전을 이뤄냈다. 이를 통해 사회주의적 국유경제의 기초를 수립할 수 있었다. 1920년대까지 부르주아 엘리트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던 조건에서 이제 노동자계급 출신의 전문가가 각 분야에서 양성되기 시작했다. 문맹률이 혁신적으로 감소하였고 인민대중의 교육수준이 올라갔다29).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1920년대보다 훨씬 진일보한 토대에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

 

                       [영화 장면 2] 제1차 5개년 계획을 통한 운송분야의 성과.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그림 1] <운송분야의 발전은 5개년 계획 수행을 위한 중요한 과제>(1929)-끌루찌스30

30)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과는 부르주아들조차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었는데 그중에 일부를 살펴보자.

 

1932년 영국 부르주아 잡지 ≪원탁(The Round Table)≫31)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5개년의 성과는 놀랄 만한 현상이다. 하리꼬프 및 쓰딸린그라드의 트랙터 공장, 모스끄바의 아모 자동차 공장, 니즈니 노브고로드의 자동차 공장, 드니쁘르 강의 수력발전소, 마그니또고르스끄 및 꾸즈네츠크의 거대한 제강소, 쏘련의 루르가 되고 있는 우랄의 일련의 기계 제작 공장 및 화학 공장들―이 모든 것들과 기타 전국 각지의 공업이 거둔 성과는 쏘련의 공업이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하더라도 마치 물을 잘 대어준 식물과도 같이 장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 5개년 계획은 장래 발전의 기초를 축성하였으며 쏘련의 위력을 비상히 강화하였다.32)

 

1932년 11월 미국 부르주아 잡지 ≪국민(The Nation)≫33)은 이렇게 찬탄한다.

 

새로운 도시들은 초원과 황무지에서 생겨났는데 그것은 얼마 안 되는 몇 개 도시인 것이 아니라 5만 명 내지 25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들이 적어도 50 개나 된다. 이 모든 도시들은 최근 4년 동안에 생겨났다. 그 매개 도시들은 자연 자원을 개척하기 위해 건설된 새 기업 또는 일련의 기업의 중심지인 것이다. 수백 개의 새로운 지방 발전소와 드니쁘르 수력발전소 건설 관리부 같은 일련의 대기업들은 “사회주의는 쏘비에뜨 정권 더하기 전기화”라는 레닌의 정의를 점차 실생활에 구현하고 있다. … 쏘련은 러시아가 일찍이 한 번도 생산한 적이 없는 각종 제품의 대량 생산을 조직하였다. 즉 트랙터, 콤바인, 질 좋은 강철, 인조 고무, 볼 베어링, 대형 디젤 기관, 5만 kw의 터빈, 전화기, 광산용 전기기계, 비행기, 자동차, 자전거 기타 수백 가지의 새 기계 등등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 러시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알류미늄, 마그네사이트, 인회석, 요드, 탄산칼륨 및 기타 각종 귀중한 광물을 다량으로 채굴하고 있다. 쏘련의 평원에 서 있는 이정표는 교회당의 큰 십자가나 둥근 지붕인 것이 아니라 대곡물 창고이며 사료 저장탑이다. … 러시아는 나무 시대로부터 철, 강철, 콘크리트 및 발동기의 시대로 급속히 넘어 가고 있다.34)

 

                              [그림 2] <위대한 작업 계획을 수행하자>(1930)-끌루찌스

 

 

3.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의 본격화

 

1) 시대적 배경

 

1933년부터 1937년 말까지의 제2차 5개년계획은 1차 5개년계획의 경험을 토대로 수립되었다. 중공업 우선투자 방침이 지속되었지만 경공업 부문에도 1차 5개년계획 때보다 많은 부분의 재원이 투자되었다. 면방적기계와 직조기 생산이 10배 이상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제사 능력이 약 40% 신장되었다35). 이제 중공업뿐만 아니라 경공업 발전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구비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930년대는 대외적으로도 격변이 진행되고 있었다. 쏘련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서는 대공황의 여파가 지속되어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겪고 있었다. 1933년 나치의 독일 제패 이후 새로운 세계전쟁의 위협이 부단히 점증하였다. 1931년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쏘련의 극동 지역에서도 위협이 생겨났다. 1936년에는 에스빠냐 내전36)이 발발하여 바야흐로 세계는 파시즘이냐 야만이냐는 선택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1930년대 문예의 큰 흐름이 규정되었다. 30년대 쏘련 문예를 특징짓는 단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다. 실제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은 1932년 5월 23일자 ≪문학신문(Литературная газета)≫에서였다.37)

그런데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쓰딸린이 자신의 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고안해낸 발명품이라 주장하는 부르주아 평론가들의 말잔치는 크게 고려할 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부르주아 미식가들과 달리 예술에 있어서도 관념론을 배격하며 철저한 유물론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예술을 독립적인 것으로 신비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물적 토대와의 관련성 속에서 예술을 고찰해야 한다. 그것은 맑스-레닌주의의 발전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서 주의 깊게 살피는 과정이다. 즉 예술에 있어서도 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야 한다. 부르주아 평론가들의 비평에는 신경을 끄고 예술의 주체가 인민대중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에 대해서 보다 주목하자. 이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2)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예사적 연원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강조하는 당파성과 전형성은 일찍이 맑스와 엥엘스가 그 기본개념을 제시하였다. 라쌀레와의 지킹엔 논쟁과 엥엘스와 마가렛 하크니스와의 편지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엥엘스는 마가렛 하크니스(Magaret Harkness)의 ≪도시 소녀(A City Girl)≫에 대해 노동자 계급을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평하였다. 마가렛 하크니스의 소설이 전형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바람직한 대안으로 발자끄의 소설을 제시하였다.38) 다만 우리는 맑스와 엥엘스의 시대에 노동계급이 문화예술 분야에 있어 아직 자기의 발로 서지 못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엥엘스가 마가렛 하크니스에게 발자끄를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그러한 역사적 한계 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레닌의 “당조직과 당문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이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라는 보다 진일보한 조건에서 등장한 것이다. 레닌의 당파성은 러시아사 회민주노동당과 관련 속에서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구체적인 당파성으로 등장하였다. 레닌의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비유는 그 수용 주체의 성격에 따라 전혀 다른 반응을 불러온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표현에서 억압을 떠올린다. 주체를 객체화시키고 도구화하는 비민주주의의 ‘전형’을 발견한다. 반면에 레닌의 표현에 대한 알렉산드라 꼴론따이의 문학적 표현을 보자. “거스를 수 없는 역사를 향해 갓 굴러가기 시작하는 힘찬 기계 속에 하나의 톱니가 된 만족감을 처음으로 맛보게 되었다.”39) 자유주의적 소부르주아적 지식인은 맑스-레닌주의 당 조직에서 구속감을 느낀다. 그러나 맑스-레닌주의자는 바로 당조직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누리는 구속감에서 해방되고 새로운 자유를 온몸으로 느낀다.

또 레닌 시대는 맑스・엥엘스의 시대와 달리 프롤레타리아가 문예 창작의 당당한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철의 흐름≫(1924)의 작가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는 레닌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는 레닌에게 노동자들이 지식, 문화를 결여하고 있다고 걱정하였다. 이에 레닌은 웃음으로 작아진 눈으로 그를 바라 보며 말했다. “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글 쓰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며, 우리는 세계에서 최초로 탁월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갖게 될 것입니다. … ”40)

 

 

3)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의 탄생

 

한편 1930년대에는 레닌시대보다 진일보한 토대에서 문예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대에 진행된 논쟁은 바로 제1차 5개년 계획의 총화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1930년대에는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의 힘들은 세계관적으로 통일되고 결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예술 강령에 의지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의 탄생은 쏘련의 제1차 5개년 계획 이후라는 구체적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예술창작은 1930년대라는 구체적인 시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혁명운동과 혁명적 예술활동의 경험을 현실에서 끊임없이 재해석해내어 새로운 사회주의적 미래를 전망하는 역할을 해내었다.

새로운 사회주의적 현실은 작가에게 사회적 변혁에서 생겨나는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볼 것을 요구했다.41) 1932년엔느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역사적인 헌장 “문학 예술 조직의 개조에 관하여”42)가 발표되었다.

1930년대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구체화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작가들에게 혁명적 활동을 찬양 고무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특정한 문예사조나 형식43)이 아니라 창작에 있어 세계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한다.44) 물론 인간이 새롭게 건설할 미래에 대한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묘사를 담아낼 것을 요청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는 낭만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사실주의적 전통이 흐르고 있다. 뿌쉬낀, 체르니쉐프스끼, 네끄라소프, 고골리, 똘스또이, 체호프, 고리끼로 이어지는 러시아 문예의 전통이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뿌리가 된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열거한 작가들 중 고리끼를 제외하면 부르주아 문학의 전통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만 뿌쉬낀이 러시아 짜르체제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았으며, 체르니쉐프스끼, 네끄라소프와 같은 작가들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이다. 고골리와 체호프의 비판적 리얼리즘은 제정러시아의 모순을 드러냈다. 그리고 레닌은 똘스또이의 문학적 성취와 그 문학에 내재한 모순을 분석함으로서 패배한 1905년 혁명의 교훈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과거의 문학의 한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지만 그 성취를 전면 부정해서도 안 된다.

한 편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당대의 쏘련의 작가들에게 창작활동의 일정한 지침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예술가들이 당과의 긴밀한 연관속에서 인민대중의 투쟁을 반영하는 작품을 창작해야만 한다는 시대적인 요청에 따른 것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아직도 문예 창작이 지식인들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한계에서 제기된 것이기도 하다. 모든 인민대중이 위대한 예술가들과 다를 바 없이 창작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더 이상 당의 문예 창작 가이드라인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노동과 물질노동은 분리되어 있고 문예는 현실의 제모순 속에서 창작되어야만 한다. 예술은 다른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토대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작가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일화를 보자. 1934년 제1차 쏘비에뜨 작가대회에 참석한 이후 보리스 빠스쩨르나끄는 자신의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두려움 없이 무자비하게 천공기를 써서라도 보다 깊이 들어가시오. 그러나 자신 속으로, 자신 속으로, 그리고 만일 당신이 그곳에서 인민, 땅과 하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탐색하는 것을 그만두시오. 그때는 찾을 곳이 아무 데도 없을 겁니다.” 그는 인민을 향한 움직임을 내적・도덕심리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깊이 이해하고 있다.45)

 

4)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논쟁들과 그 성과

 

한편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제기된 것은 전형성이다. 전형성의 문제는 오랜 기간 문학 논쟁의 중심을 이루는 주제이다. 여기서는 조금 다르게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쏘련의 예술가가 아닌 타국인의 시선에서 전형성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를 들겠다. 쏘련을 방문한 독일 음악가인 한스 아이슬러의 평론을 읽어 보자.

 

마그니또고르스끄는 내가 방문한 곳 중 가장 흥미로운 곳이었다. 이 도시는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고 있었다. 도시가 생긴지 2년 반밖에 안 되었지만 27만 5천명이 거주하였고, 이들은 거대한 제철 주조소를 건설하는 일에 전력하였다.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는 데 모든 민족들이 실천적으로 참여하였다. 2년 전에 유목 사냥꾼이었던 끼르끼즈인 옆에는 숙련된 독일 노동자가, 새로운 유형의 노동계급인 젊은 러시아인 건설 기술자 옆에는, 고도로 숙련된 미국인 전문가가 일하고 있다.46)

 

마그니또고르스끄의 눈에 띄는 특징은 단지 용광로뿐만이 아니라 인민이 대초원을 변모시켜 거대한 공업단지가 되고 번갈아서 공업단지가 그 건설자들을 변모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전형의 인간이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47)

 

아이슬러는 1930년대 초 마그니또고르스끄에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한 쏘련의 경험을 직접 목격하면서 영화음악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의 경험을 편견없이 기록하면서 변화하는 인민과 새로운 유형의 노동계급을 관찰하였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전형의 인간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영화 ≪영웅의 노래 꼼소몰(Песнь о героях. Комсомол)≫(1932)의 음악이었다. 공장 현장의 소음을 녹음하여 유성영화 시대의 새로운 음악적 효과를 내게 하고 우랄 산맥의 강철 생산을 우렁찬 합창으로 찬양하는 “꼼소몰 단원들의 마그니또고르스끄 발라드”를 영화의 절정 부분에 배치하였다. 그는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예술가로서 새로운 예술적 전형을 창출해내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문학 논쟁의 과제만을 던져 준 것에 그치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본격화 되면서 쏘련의 예술계에는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혁명 직후와 20년대 문예 분야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던 루나차르스끼가 대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던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그것은 루나차르스끼가 이제 노동자 계급이 더 이상 부르주아 출신의 전문가에게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대중적인 운동이 벌어졌던 1930년대의 속도감을 따라가고 있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48)

그리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지금까지도 부르주아 미식가들의 집중 포화대상이 되고 있다. “1932년 쓰딸린은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노동자 예술조직들을 해체시켰으며, 사실상 모든 예술적 실험활동이 정지당했다”49) 쟈네티는 당이 예술을 통제하는 것은 비민주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당원으로서 활동하며 당의 예술에 대한 방침을 함께 결정하는 것을 애써 무시한다. 이들은 지식인에게 가해지는 공격 그 자체에만 주목하며 어떠한 지식인이 비판을 받았는지 어떠한 예술이 비난을 받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이들은 당대의 예술과 쏘비에뜨 인민의 생활상에 대해서 세세하게 인식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이들은 민주주의를 중앙집중제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인식한다. 이들의 사고에 있어 민주적 중앙집중제, 프롤레타리아적 중앙집중제는 형용모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 핵심을 ≪국가와 혁명≫을 통해 이해한다. 

 

맑스는 중앙집중주의자다. 앞서 인용한 그의 글에는 중앙집중제로부터의 이탈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직 국가에 대한 쁘띠부르주아적 ‘미신’에 가득 찬 사람들만이 부르주아적 국가기구의 폐지를 중앙집중제의 폐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50)

 

쟈네티는 쓰딸린 시대에 모든 예술적 실험활동이 정지당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의미 있는 ‘예술적 실험’이란 인민대중과 유리된 고립된 예술가들의 유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쓰딸린 시대에 쏘련 공산당에서 비판을 받은 예술가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이다. 쓰딸린 시대에 인민들이 이루어낸 위대한 예술적 성취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는다. 또한 쁘롤레뜨꿀뜨를 해산시킨 것도 레닌이었으며, 레닌도 마야꼬프스끼를 비롯한 미래파 예술가들에 대해 적대적이었으며 여러 국가적 예술 사업에 있어 이들과 대립하고 갈등하였음을 잊어서는 안된다.51) 여러 반공주의적 편견을 담고 있지만 1930년대를 언급한 존 버거의 글을 보자.

 

전시회를 조직함으로써, 지방의 쏘비에뜨인들과 상업 조합 그리고 공산청년동맹(꼼소몰)으로 하여금(비록 중앙당국을 경유해서나마) 의뢰하고 사도록 고무시킴으로써, 책을 출간함으로써, 학교 교과목에 예술작품 관련 사항이 확고하게 존재하게 함으로써, 박물관을 유치하고 단체관람객을 정연하게 모음으로써, 공공 건물에 벽화를 이용함으로써, 공장에 아마추어 회화 그룹을 조직함으로써, 30년대에 문화적인 용도의 건물에서 하도록 준비된 공연 계획을 통해 시작된 당국의 공식적인 예술 프로그램은 전체 쏘련 인민들로 하여금 시각예술은 그들 자신의 삶 속에 진입하여 모종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영국, 독일 또는 미국 등지에서 미술에 대해 광범하게 유포된 공공연한 무관심은 쏘연방의 심지어는 가장 혜택받지 못한 지방에까지도 충격을 줄 것이다.52)

 

이것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존 버거는 반공주의적 편견을 가졌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이뤄낸 쏘련의 예술적 성취를 결코 부정하지 못한다. 1930년대의 예술적 성취는 당의 지도를 통해 국가적으로 조직된 대중 교육의 성과를 통해 이루어졌다.

10월 혁명 직후의 러시아는 인민 대중에게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게 하는 것보다는 도서관을 건설하여 다수 인민 대중의 문맹을 해소하는 것에 역점을 두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이었다53). 인민 대중에게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논할 단계조차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혁명의 20년이 흐르자 이제 쏘비에뜨 사회 전체에서 예술이 인민대중에게 널리 파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1930년대는 인민의 힘이 엄청나게 긴장을 느꼈던 시대였다. 극히 짧은 역사적 시간 속에서 사회주의적인 변혁을 완수하기 위해 인민의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노력이 강행되어야 했던 시대, 사회적 삶과 인간관계, 첨예한 사회적 갈등을 힘겹게 풀어 나가야 했던 시대였다.

이 기간은 문학의 전성기였고, 산문, 시, 드라마의 영역에서 새롭게 위대한 완성을 이루었던 때였다.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새로운 예술 방법의 원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바탕하여 창작을 하였다. 무수한 장르와 문체, 새로운 세계를 그리는 풍부한 예술이 이 기간을 풍성하게 장식했다.54)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은 1930년대라는 한계 속에서 제시된 것이고 그것의 적용에 있어서 여러 오류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1차 5개년 계획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조직된 쏘련의 집단적 예술은 20세기 인류 문화사의 위대한 도약을 이루어 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Ⅲ. 지가 베르또프, 쏘련 다큐멘터리의 선구자

 

                                                      [사진 1] 지가 베르또프

 

1918년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끼는 그의 시 “예술군대에 내린 명령”에서 ‘도로는 우리의 그림 붓/광장은 우리의 팔레트’라는 과감한 선언을 공개하였다. 영화 감독 지가 베르또프 또한 마야꼬프스끼의 미래파 선언과 동일한 맥락에서 자신의 예술활동을 시작하였다. 지식인이 펜을 들고 화가가 붓을 들고 이데올로기 전투에 참여하듯이 베르또프는 영화 예술을 무기로 예술에서의 전선에 복무하였다.

우리에게 보다 잘 알려진 쏘련 영화는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이나 프세볼로트 뿌도프낀과 같은 대가들이 기초한 극 영화이다. 그러나 지가 베르또프는 극 영화보다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에 주목하였다. 그는 스타가 출연하고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플롯이 있는 영화를 거부했다.55) 그는 영화의 혁명적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다큐멘터리에서 찾았다. 또한 관객이 주체적으로 영화를 수용할 수 있도록 영화의 메커니즘과 제작과정 자체를 영화가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6)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실을 단지 그대로 재현하는 영화는 아니다.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1922)의 사례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다큐멘터리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시선이 개입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어떤한 입장에서 어떻게 현실을 해석하고 현실에 개입하느냐가 중요한 판단의 준거가 된다.

그는 미래의 영화는 곧 사실의 영화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눈보다 우위에 있는 카메라의 렌즈가 이 세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것이고 시각적인 혼란을 응집력있고 객관적인 상(像)으로 조직할 것이라고 보았다.57) 그의 영화와 기술 문명에 대한 입장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로드첸꼬(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о́дченко)가 작업한 베르또프의 영화 ≪영화-눈(Кино-глаз)≫(1924)의 포스터를 보자.

 

                                              [그림 3] ≪영화-눈≫의 포스터.

 

크게 확대된 눈(익스트림-클로즈업 기법)과 동공이 상당부에 위치하고 있다. 하단의 양 단에는 두 소년이 이 눈을 올려다 보고 있고 이들의 머리 위에는 아이들의 시선과 같은 시점을 공유하는 영화 카메라가 확대된 눈을 향하고 있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세 개의 눈, 세 개의 시선은 바로 ‘카메라-눈’으로 통합되어 인간의 시각이 영화 카메라에 의해 확대됨을 형상화하고 있다.58)

베르또프가 내세운 또 다른 주요 신조는 ‘리얼리티에 대한 공산주의적인 해석’이었다. 그는 맑스주의만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현실 분석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당 기관지의 이름을 따서 ≪영화-진실(Кино-Правда)≫을 제작하였다.59) 쏘비에뜨의 전역을 누비며 제작된 영상은 곳곳에서 상영되었다. 이동 영사반이 마을에 도착하고 장비를 풀어서 야외 상영을 하였다. 1920년대 초중반까지의 연작 다큐멘터리 ≪영화-진실≫에는 곳곳에서 전기화하고 있는 쏘비에뜨 사회를 그려낸다. 또한 쏘비에뜨 사회가 이룬 성취를 각 분야에서 보여준다. 의료, 교육, 장애인, 노숙인, 아동, 가사노동의 사회화, 체육과 교육의 결합, 발레 하는 학생이 보여주는 예술적 성취, 체스와 같은 여가생활을 영상에 담아내었다. 그는 열차를 멈추고 선로를 망가뜨려 반혁명의 전진을 멈춘 위대한 인민의 투쟁을 그려내었다. 그러면서도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면서 장밋빛 환상만을 유포하지도 않았다. 내전기에 굶주리고 죽어간 아이들의 참상은 시대와 흑백화면을 넘어 지금까지도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베르또프는 다큐멘터리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에 있어도 선구적인 작품을 제출하였는데 ≪쏘비에뜨의 장남감들(Советские игрушки)≫(1924)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영화 장면 3] ≪쏘비에뜨의 장난감들≫ 중에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의 영화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극영화조차 쏘비에뜨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타성에 젖어 있던 기존 영화 제작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한편에서 그의 혁신적인 영화 실험은 에이젠쉬쩨인 같은 지지자들조차 형식주의적인 것이라 비판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의 격렬한 논쟁을 거치며 르포 형식의 다큐멘터리가 더 이상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기 힘들게 되자 여러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60) 그는 당대에 있어 논쟁적인 감독이었고 지금까지도 무수한 논쟁을 야기하고 있는 작가이다.

1929년 작 ≪카메라를 든 사람(Человек с киноаппаратом)≫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낙천적인 일상과 인민의 생활을 스케치로 표명한 기록물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바로 영화라는 작가의 관점을 흥미롭고 신선한 방식으로 구현해내어 영화사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화 기법을 통해 대중들을 교육하는 역할까지 해내었다.61)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는 카메라트릭, 슈퍼 임포우즈, 애니메이션, 슬로우모션 등의 당시로서의 최신의 영화 기교가 자유자재로 활용되었다. 즉 혁명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영화의 혁신을 가져온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62) 이 때문 베르또프의 이름은 에이젠쉬쩨인과 함께 부르주아 영화 교과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 교과서는 다분히 형식주의적 측면에서 베르또프의 영화를 평가한다. 예를 들어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 잠시 등장하는 이혼 장면에 대해 주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유로운 이혼을 가능하게 한 것이 여성의 권리 신장에 얼마나 큰 변화를 준 것인지 고찰하는 것보다 눈에 들어오는 혁신적인 기교에 더 주목할 뿐이다.

                                  [영화 장면 4] ≪카메라를 든 사람≫ 중에서

 

그러나 영화 평론가들의 미식적인 몰취향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해서 예술적 성취를 못 이루어 낸 것은 아니다. 보다 덜 주목받는 네쁘 시대의 ≪전진, 쏘비에뜨!(Шагай, Совет!)≫(1926)를 보자. 이 작품은 네쁘 시대의 부정적인 요소와 거리가 멀다. 경제의 전선에서는 소총을 든 병사가 아니라, 망치와 삽과 톱을 든 노동자가 싸운다. 이들에게는 못과 나사, 벽돌이 탄환이다. 철도의 건설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의 모습, 자본가의 공장폐쇄에 맞서 노동자가 생산을 장악해서 기계를 가동하는 모습이 역동적이고 활기있게 펼쳐진다. 그는 쏘비에뜨 인민의 투쟁과 역사적 진리를 새로운 영화 기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초기 쏘비에뜨 정권의 교육, 의료・보건, 장애인 노숙인 정책의 편린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 ≪전진, 쏘비에뜨!≫의 포스터

 

그는  또한 레닌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영화를 통해서 실천하고자 했다.

 

공산주의는 쏘비에트 권력 더하기 나라 전체의 전기(電氣)화이다. 전기화 없이는 공업은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63)

 

베르또프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원칙에 따라 기계 모터소리와 같은 공장의 소음, 경적 소리, 환호 소리, 고적대 소리 등을 삽입한 ≪열의: 돈바쓰 교향곡(Энтузиазм: Симфония Донбасса)(1930)을 제작하였다.64) 이 영화에는 드미뜨리 쇼스타꼬비치의 관현악이 효과적으로 삽입되어 영상과 함께 상승작용을 하고 있다. 군중들이 정교회의 돔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붉은 깃발이 올라간다. 모여든 인민대중이 환호성을 울린다. 자막이 등장한다. “종교에 대한 투쟁은 새 생활을 위한 투쟁이다.” 젊은 노동자들을 위한 회관이 건립되고 피켓을 든 노동자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선전차량이 등장하고 ≪레닌 전집≫ 제 12권의 출간을 알린다. 마을에는 영화관이 건설된다. 여성 조각가는 레닌의 두상을 만든다. 계획과 사회주의의 건설을 알리는 움직이는 모형이 등장하고 절정에 이른 관현악과 함께 거대한 공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집단 농장의 여성 농민은 노동요와 함께 수확을 한다. 제1차 5개년계획 중에 돈바쓰에서 일어난 거대한 변혁은 라디오를 타고 다른 지역에도 알려진다. 이러한 거대한 변화는 개별 노동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당의 서기, 노조 위원장, 엔지니어와 같은 개개인이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니다. 꼼소몰로 조직된 전 사회적 역량과 열성노동자를 중심으로 인민들의 피땀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다.

 

 

                              [영화 장면 5] ≪돈바쓰 교향곡≫ 중에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전선에서 영화를 제작하며 파씨스트 격퇴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너에게, 전선(Тебе, фронт!)≫(1942)에서 까자흐스딴의 민족적 정서를 적극 활용하며 인민들의 투쟁을 독려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쏘련에서 대러시아주의가 부활했다는 주장은 얼마나 가당치 않은가!

 

                [영화 장면 6]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까자흐스딴 노인.
                ≪너에게, 전선≫ 중에서

 

 부르주아 영화평론가들의 눈과 귀에는 베르또프의 영화적 실천과 그것이 쏘련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갖는 의미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들은 오직 당대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아직 난해한 것으로 비춰졌던 영화의 형식적 실험에만 주목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예술가와 당을 분리하고 예술가와 인민대중을 분리해낸다. 그들에게 사회주의의 기록자이나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사회주의 건설에 함께 복무한 베르또프는 없고 ‘당국에 의해 낙인찍힌 문제 작가’만이 있을 뿐이다. 과연 그들과 우리가 같은 영화를 본 것인지 의심스럽다. 아니 과연 영화를 직접 시청하고 평론 나부랭이를 작성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Ⅳ. ≪레닌에 대한 세 노래≫ -그 이해를 위한 주석

 

                                     [사진 2] 당 기관지 ≪진실(Правда)≫에 실린
                                     ≪레닌에 대한 세 노래≫의 기사

 

1934년에 레닌 사망 10주기를 맞아 베르또프의 ≪레닌에 대한 세 노래(Три песни о Ленине)≫가 발표된다. 그는 이 작품에서 1917년 혁명이후과 제1차 5개년계획의 성과를 영화로 구현해 내면서 혁명을 보고하는 다큐멘터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이 제시된 이후의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와 같은 혁신적인 영화 기교는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열의: 돈바쓰 교향곡≫에서와 같은 난해한 화면 구성도 철저하게 자제되어 있다. 영화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은 독립된 소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체 주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1934년의 시점에서 바라본 레닌주의의 성취를 보여준다. 1부는 “내 얼굴은 어두운 감옥에 갇혀 있었네”로 주로 소수민족과 여성을 부각하고 있다. 2부는 “우리는 그를 사랑했다”로 레닌과 10월 혁명 그리고 레닌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테마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거대한 바위의 도시에서”를 마지막 3부로 레닌 사후에도 지속되는 혁명을 그려낸다.

 

1. 1930년대 쏘련의 여성, 소수민족, 농민 문제의 이해를 위해

 

                          [영화 장면 7] 혁명 이전에 강요되었던 파란자.65)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영화의 1부는 혁명의 성과가 봉건적 이슬람교66)를 믿던 인민들에게까지 미쳤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혁명 이전의 과거와 혁명 이후의 변모된 소수민족 여성들과 인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다. 영상에서 드러나는 제 민족들의 전통은 변모한 쏘비에뜨적 삶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영화 장면 8] 노래하면서 민속 춤을 추는 소수 민족 어린이의 모습.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농노해방이전에 러시아의 농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고 있던 끔찍한 폭력을 묘사한 네끄라소프의 1848년의 시를 감상하자.

 

 

어제, 다섯 시 쯤에

 

어제, 다섯 시 쯤에

우연히 나는 센나야 광장에 들렀네 ;

그곳에서 한 여인, 젊은 농부 아낙네가

채찍질당하고 있었네.

 

그녀의 가슴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채찍만이 날뛰며 휘파람소리를 내었네. …

나는 내 시신(詩神)에게 말했네,

<보아라, 너의 친누이로다!>67)

 

혁명적 민주주의자 네끄라소프는 예술가로서 사회를 고발하는 임무를 잊지 않았다. 1840년대와 50년대 초에 네끄라소프의 시에는 잡계급 지식인이나 가난한 노동자의 고통과 쓰라린 운명에 대한 장면 묘사가 두드러진다. 특히 이 시에서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은 시인의 숭상하는 시신, 즉 뮤즈의 누이로 형상화된다. 네끄라소프의 시에서 등장하는 뮤즈는 고대 신화에서 움직이는 형상들이 아니라, 1848년 현실의 러시아에서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을 공개적으로 당하는 젊은 여성 농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네끄라소프의 뮤즈는 자신의 고통 속에서 당당하고 아름다우며 복수를 호소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시신이다.68)

그러나 위대한 혁명적 민주주의자도 결코 제정 러시아의 거대한 벽과 같은 폭력을 직접 제거하지 못하였다. 혼자서는 그러한 폭력의 현장에 개입하여 그것을 저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였으리라. 그는 그저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그것을 예술의 힘을 빌려 고발할 수밖에 없었다. 1848년 러시아의 여성 농민은 스스로를 조직하여 자기의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였다. 혁명적 민주주의자인 남성 지식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처지를 알릴 수 있을 뿐이었다.

대략 70년이 흐른 1917년 혁명 이전의 제정 러시아 말기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하일 숄로호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요한 돈강(Тихий Дон)≫(1957)에서 드러나는 단적인 묘사를 보자. 제정러시아 말기 까자끄 여성 농민 아크시냐는 혼외 관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배우자에게 잔인하게 매질을 당한다. 러시아 여성들은 매질당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면 시대를 건너뛰어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서 묘사되는 여성을 보자. 이제는 더 이상 초월적 대리인인 뮤즈를 찾지 않아도 된다. 베일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진 소수민족의 여성, 집단 농장의 여성 농민, 노동 영웅이 된 여성노동자,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여성, 사격을 배우는 여성, 무장한 여성이 주인공이 된다. 영화에서는 19세기 러시아에서와 같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폭력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30년대는 여성해방을 위한 아주 기초적인 물적 토대를 갖추었을 뿐이며 모든 여성 억압을 폐지 것은 보다 긴 과제와 투쟁을 요구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장면 9] 사격을 배우는 여성.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20년대와 30년대는 전혀 다른 조건에 놓이게 되었음을 영화에 출연하는 집단 농장의 여성농민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1920년대 꿀락을 풍자하는 빅또르 제니(Виктор Дени)의 포스터를 보자.

 

                                       [그림 5] <땅 거미 꿀라끄-기적>(1922)

 

1922년은 내전과 전시공산주의 하에 많은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는 시기였고 아사자들도 발생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발표된 제니에 포스터는 살찐 꿀락이 곡물을 포대 단위로 쌓아놓고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풍자하면서 농촌에서 척결해야 할 꿀락을 정조준하고 있다. 반면에 제니의 포스터로부터 12년 후의 작품인 ≪레닌의 세 노래≫에서는 더 이상 이전의 척결 대상이었던 꿀락이 등장하지 않는다. 풍자의 기법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대상도 없다. 12년의 세월 동안 농업 집단화의 성공으로 쏘비에뜨 사회의 계급 역관계가 완전히 달려졌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농업 집단화 문제에 대한 레닌의 글을 보자.

 

우리가 소농민 국가에서 살고 있는 한 러시아에는 공산주의를 위해서보다 자본주의를 위한 더 튼튼한 경제적 토대가 존재한다. 이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농촌생활을 도시생활과 비교하여 주의 깊게 관찰한 사람은 누구나 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뿌리를 뽑아 버리지 못했으며 국내의 적들에게서 그들의 토대와 기초를 허물어 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국내의 적들은 소경영에 의지하고 있다. 이것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한 가지 수단이 있을 뿐이다. 즉 농업도 포함하여 나라의 경제를 제 기술의 토대 위에, 현대적 대규모 생산의 기술적 토대 위에 옮겨 놓는 것이다. … 오직 나라가 전기화될 때, 공업, 농업 및 운수에 현대적 대공업의 기술적 토대가 놓여질 때, 오직 그때에라야 우리는 종국적으로 승리할 것이다.69)

이렇게 레닌은 사회주의 체제의 흥망에 있어 농업 집단화의 중요성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농업경제에 있어 풍작이나 경공업의 발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중공업의 부흥이 사활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했다. 따라서 농업 집단화의 과제는 쓰딸린 시대의 강제로 인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경제의 승리를 위해 필수적으로 제기되는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농업과 공업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발달한 중공업의 토대 위에서만 농업도, 경공업도 재조직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집단화가 달성되어 꼴호즈가 곳곳에 조직된 시기에 쓰딸린의 연설을 보자.

 

이제는 여성에 대하여, 여성 꼴호즈원에 대하여 몇 마디 말하려 한다. 동지들 꼴호즈에서 여성 문제는 큰 문제이다. 나는 여러분 중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을 과소평가하며 심지어는 비웃기까지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동지들, 이것은 잘못이다. 큰 잘못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여성들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꼴호즈 운동이 훌륭하고 유능한 많은 여성들을 제도적 지위에 등용하였다는 점에 있다. 이 대회의 구성을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여성들이 이미 오래 전에 뒤떨어진 사람으로부터 앞선 사람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볼 것이다. 꼴호즈의 여성은 큰 힘이다. 이 힘을 파묻어 둔다는 것은 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임무는 꼴호즈의 여성들이 앞으로 나아가게 하며 그 힘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

여성 꼴호즈원들 자신에 관해서 말하면, 그들은 꼴호즈가 여성들을 위하여 어떠한 힘과 의의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여야 하며 오직 꼴호즈에서만 여성들이 남자들과 대등한 처지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여성 꼴호즈원 동지들은 이것을 기억하여야 하며 꼴호즈 제도를 눈동자와 같이 귀중히 여겨야 한다. (긴 박수)70)

 

[영화 장면 10] 민족 의상을 입고 트랙터를 운전하는 중앙아시아 여성 농민.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이런 배경을 참조하여 영화에서 그려지는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을 보자.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은 대공업의 산물인 트랙터와 같은 중장비를 통해 경영되고 있다. 영화에서는 농장에서 작업을 지시하면서 자신은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구시대 지주의 전형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여성들은 농업과 관련한 과학기술을 익히고 직접 트랙터를 운전하면서 사회주의적 농업의 기초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

 

2. 쏘비에뜨 국가와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영화 장면 11] 편대 비행하는 쏘비에뜨사회주의공화국연방(СССР).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레닌에 대한 세 노래≫는 전 국가적인 역량지원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거대한 공장과 댐과 조선소를 촬영하는데 촬영감독과 관계자들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항공기가 공중에서 쏘비에뜨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의 약자 СССР를 그리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 비행기에서 공중촬영을 하기 위해서 또한 거대한 산업 시설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 곳곳에서 행간을 읽어야 한다. 시대는 다르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 꾸바 감독의 인터뷰를 참고해 보자.

 

우리가 갖고 있는 국가 소유의, 국가 중심의 생산방식은 예를 들면 ‘독립적인’ 개인회사가 보여주는 생산방식과는 매우 다릅니다. 나는 ‘독립적인’에 인용부호를 놓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시스템 아래서 사람은 항상 어느 정도 힘 있는 사람에게 종속되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그 종속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해방시키려면, 무능력이나 완전고립에 빠져 버립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71)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가들은 거대한 사회 시스템 하에서 고립된 객체로서 작업을 한다. 반면에 사회주의 국가의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사회화된 인간들이’ ‘의식적이고 계획적으로’ 사회 시스템을 ‘통제’하면서 공동의 협력을 통해 예술작품을 탄생시킨다.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 자막으로 등장하는 소유격 “나의”와 “우리의”를 보자. “나의”라는 표현은 1부에서 총 9번 등장하는데 각각 국영농장, 나라, 땅, 대학, 공장, 집단농장, 가족, 손, 당을 수식한다. 지주와 꿀락에게 억압받던 농민이 자신의 토지에 대한 소유를 집단적으로 소유한다. 이곳에서 함께 노동하는 동료에 대해 “내 가족”으로 묘사함으로써 기존의 배타적인 가족의 의미는 확장된다. 자본주의 체제와는 달리 손으로 행하는 노동은 기계에 의해 축출당하는 것이 아니라 중공업의 발전과 조화를 이루는 농업노동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조국이 없는 노동자가 아니라 이제는 자신 있게 근로인민 대중의 쏘비에뜨 국가를 “내 나라”라고 칭하며 이를 지도하는 당을 나의 것으로 찬양한다. 한편 레닌 사후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어 가는 3부에서 “우리의”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석유, 석탄, 금속이다. 이제 인간은 비로소 자연력을 소수의 착취자의 수중의 것이 아닌 전 사회적인 “우리의” 것으로 통제한다. 거대한 자연자원을 토대로 건설한 신도시와 중공업은 사회주의를 위한 물적 토대를 건설한다. 계급사회의 사적 소유제에 기초한 ‘나의 것’이라는 개념은 철저하게 타인을 배척한다. 반면에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서 나와 우리의 소유는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지만 결코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은 이렇게 온전하게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토대에서 생산된 예술작품도 결코 고립・분절적인 노동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한편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로서 사회주의 사회는 아직 필요에 따라 분배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단계이다. 이 사회에서는 각인은 각자 사회에 기여한 바에 따라 분배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기여한 바를 어떻게 측정하고 사회에 대한 기여를 어떻게 독려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쓰딸린에 의해 강요된 노동이라는 비난을 가한다면 레닌이 1919년 전시 공산제 하에서 근로인민의 노동을 어떻게 독려했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노동과정에서 근로인민대중이 어떻게 새로운 주체로 거듭났는지 종합적인 면에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는 드니쁘르강 댐 건설에 참여한 여성 노동돌격대원(Ударник)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전문배우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이 영화에 직접 등장하여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을 자신있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주의적 경쟁은 개인적인 열성을 독려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효과적인 작업방식의 조직을 통한 집단적인 경쟁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강조되었던 대중운동을 통한 사회주의적 경쟁의 성과를 영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72)

 

[영화 장면 12] 드니쁘르강 댐73) 건설 과정에서 레닌상을 수상한 노동돌격대원의 인터뷰.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영화에서는 지식을 인민대중의 것으로 돌리는 것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하고 있다. 문맹을 벗어나 책을 든 여성, 끊임없이 인쇄되는 레닌의 출판물,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아동들의 모습 그리고 이제 인민들이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 장면 13] 혁명 이후 중앙 아시아 지역에 건설된 초기 학교의 모습.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영화는 쏘비에뜨의 건설자로서 그리고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서 레닌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다. 꼬민떼른의 지도자로서 레닌이 영상에 흐르는데 여기에서 뻬뜨로그라드에서 열린 제2차 꼬민떼른 대회를 그린 보리스 꾸스또디에프(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Кусто́диев)의 회화 작품을 참고로 보자.

 

[그림 6] <제 3인터내셔널 제2차 대회의 개막을 위한 유리츠끼 광장에서의 축하연>(1920)

 

꼬민떼른의 두 번째 대회가 1920년 7월 뻬뜨로그라드에서 열렸다. 대회의 개막식은 인민의 축제로 화하였다. 이를 지켜보았던 꾸스또디에프는 시 의회로부터 위촉을 받아 이 축제를 재현하기 위한 대규모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를 위해 그의 아들 끼릴 꾸스또디에프가 조력했다.74)

 

이 영화는 기존 베르또프가 촬영한 기록들을 재편집해 활용하고 있다. 영화 ≪11주년(Одиннадцатый)≫(1928)에서 드니쁘르 댐의 물결 왼편에 합성된 레닌의 이미지는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서 효과적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또 레닌의 장례식 및 내전기 1917년 혁명 직후의 모습도 훌륭하게 재편집되어 활용되고 있다. 영화 편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작가정신을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장면 14] 드니쁘르강 댐의 물결에 합성된 레닌상의 이미지.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3. 1930년대 쏘련 유성영화의 이해를 위해

 

한편 이 작품은 유성영화 시대의 작품이다. 세계최초의 유성영화는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재즈 가수≫(1927)이다.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영화에는 혁신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전함 뽀쫌낀에 등장하는 쇼스따꼬비치의 웅장한 관현악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전함 뽀쫌낀(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1925)은 무성영화 시대의 작품이다. 무성영화 시대에 음악은 극장에서 실내악단 혹은 피아노 독주, 바이올린 2중주 등을 통해 직접 연주되었다.75) 당대에 대편성 교향악단의 음악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거의 요원한 일이었다. 현재 우리가 시청하는 ≪전함 뽀쫌낀≫에 삽입된 음악은 당대가 아닌 훗날의 작업의 의한 것이다.

1928년~29년에 걸쳐 따게르(Павел Григорьевич Тагер)와 쇼린(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Шо́рин)과 같은 과학자들은 독창적인 유성 녹음기구와 함께 첫 실험 유성 영화를 만들었다. 또 여러 과학자들의 음향 기록을 위한 연구 성과물들은 쏘련에서 유성 영화의 등장을 촉진시켰다.76) 발달한 녹음장비와 라디오 전송 장치의 개발은 쏘련 영화 산업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쏘련에서 유성 영화의 등장은 과학기술의 성과로 인한 것이고 이는 계획경제를 통한 집중적인 연구의 성과이다. 쏘련 영화에서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영화에는 새로운 역할이 부여되었다.

소리와 언어가 부재한 1920년대 영화와 비교해 볼 때 유성영화는 보다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새로운 영화 형태에 따라 영화의 서술 구조, 인민들의 생활상과 새로운 조형적 요소와 배우들의 연기에 있어 다양한 창작 법칙이 가능하게 되었다. 몽타쥬 기법을 비롯한 기존의 방법론이 불가피하게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77) 에이젠쉬쩨인과 꿀레쇼프와 같은 선구자들에 의해 발전된 몽타쥬 기법은 무성영화 시대의 조건에서 시작한 것이다. 유성영화 시대의 베르또프의 작품에서도 여전히 몽타쥬 기법은 중요한 구성원리로 작동한다. 뿐만 아니라 시각적 시공간의 공백을 청각적 이미지로 메우며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있어 유성영화의 다양한 기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영화에서는 음악, 구술, 음향효과, 그리고 레닌의 육성연설을 영상과 함께 적절히 배치하였다. 1930년대에는 녹음을 위해서는 무거운 장비가 필요하고 수백m의 기록매체로도 짧은 시간 밖에 녹음할 수밖에 없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이를 감안할 때 영화의 음향 제작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베르또프는 직접 현지를 누비며 소수민족의 음악을 채집하였다. 그곳에서 레닌에 대한 창작된 민요들을 확인하고 녹음하였다. 현장에서 민요를 채집하고 녹음했다면, 영화 제작에 필요한 인력을 철저하게 조직적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당과 현장 예술가들 그리고 해당 지역 인민들의 유기적인 조화가 없이는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개인이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있어도 촬영과 녹음 편집 모두를 할 수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으로도 20세기 초의 무거운 카메라 장비와 수백m의 테이프가 담아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상정보를 편리하게 담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시각에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다.

베르또프와 공동작업을 하지 않았지만 1932년에 쏘련을 방문해서 유성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독일 음악가 한스 아이슬러의 민요 채집 과정에 대한 기록은 쏘련 유성영화 제작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단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베르또프 작품의 이해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따라서 최초에는 작곡가라기보다는 “음악 기록자”로서 임했다. 테잎 녹음기를 들고 네델란드 감독 요리스 이벤스(Joris Ivens)가 있던 마그니또고르스끄로 가서 그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성을 배웠다. 먼저, 용광로 건설 작업과 그것의 문제에 대해 알아야 했다. 다음에 소수민족 고유의 음악과 공장의 소음을 녹음해야 했다. …

철을 주조하고 있는 귀를 멀게 하는 굉음을 마이크로 가장 잘 기록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커다란 용광로를 구석구석 누비는 것에 익숙치 않았기에, 그곳의 작업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요리스 이벤스의 환상적인 열의와 꼼소몰 조직의 동지적인 도움은 주의를 끌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7일 간 익숙치 않은 기후에서 온 힘을 다해 750m가 넘는 공장 소음과 음악을 녹음했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몇몇 까자흐 노인들의 노래를 녹음하는 것은 특히 흥분되는 것이었다. 내가 까자흐의 옛 민요를 추적하고 있을 때 까자흐인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내게 까자흐어로 불러주길 원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것이었다. 제 민족의 노동자들의 어마어마한 열의와 노동자의 의식 그리고 공산주의 당국자들의 의무감과 책임감은 나를 감격시켰다.78)

 

                              [영화 장면 15] ≪영웅의 노래 꼼소몰≫ 중에서

 

네델란드인 요리스 이벤스 감독과 독일인 한스 아이슬러의 음악으로 쏘련에서 제작된 영화 ≪영웅의 노래 꼼소몰≫은 쏘련의 제1차 5개년계획이 단지 일국 사회주의의 건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전진에 있어 지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임을 빼어난 음악에 실린 영상으로 실증하였다.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서도 소수 민족의 민요와 대공업 단지의 소음이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아마도 아이슬러가 작업했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로 녹음되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서는 레닌을 회상하는데 있어 배경음악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유명한 베토벤79)의 피아노 쏘나타 비창(피아노 쏘나타 8번, 다단조, 작품번호 13)의 2악장 도입부의 선율이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흐른다. 피아노 원곡에는 느리게 노래하듯이(Adagio cantabile) 연주하라는 지시사항이 있는데 영상에 흐르는 관현악도 노래하듯이 유려하게 연주되지만 보다 속도감 있게 연주되고 있다. 배경 음악은 다소 정적인 영상과 대비되어 동적인 느낌을 주며 영상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레닌은 음악을 사랑하였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 연주를 배웠으며, 레닌의 어머니는 그가 음감이 좋고 재능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레닌은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지만 일생동안 음악을 사랑했고 세심하게 음악을 감상했다.80)

 

[영화 장면 16] 레닌의 장례행렬을 바라보는 나줴즈다 끄루프스까야.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2부의 레닌의 장례식을 인도하는 음악은 장송행진곡으로 알려진 유명한 쇼팽의 <쏘나타 2번 내림나단조 작품 35.> 제3악장이다. 쇼팽의 장송행진곡은 영화의 2부 전체를 관통하는 테마곡이기도 하다. 역시 베토벤의 비창과 마찬가지로 관현악으로 편곡되었다. 느리고 장중한 단조의 선율이 레닌을 잃은 인민들의 비통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에도 <인터내셔널가>는 여지없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한 레닌의 일화를 보자.

 

“나는 <인터내셔널가>를 1889년 여름에 처음으로 들었다. 우리는 사마라 지방의 알라까예프까에 있는 농장에 머물고 있었다. 올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라 마르세예즈>81)로 연주를 끝마쳤다. 나는 급히 누나에게 다가가 그것을 다시 쳐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그때 블라지미르 일리치가 예기치않게 갑자기 그 방에 들어왔다. 그때는 아침이었고, 그 시간이면 야생마들이 그의 독서를 방해하지 못할 때였다. 그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자고 요청했다. 그는 올가와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 둘은 새로운 선율을 연주해나갔다. 그리고는 함께, 매우 나직하게 프랑스어로 불렀다.”82)

 

레닌이 러시아어로 번역한 가사로 불린 <인터내셔널가>는 1917년에서 1943년까지 쏘련의 국가였다.83) 레닌은 외젠 뽀띠에(Eugène Edine Pottier)의 25주기 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노래를 통한 가장 위대한 선전가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가 최초의 노래를 작곡했을 때에는 노동자출신 사회주의자는 수는 많아야 열명 남짓 하였다. 외젠 뽀띠에의 역사적인 노래는 이제 수천만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알려져 있다.84)

 

쏘련 중공업의 성과로 생산된 자동차가 도로를 지나는 장면에서는 빠르띠잔의 노래로 알려진 <계곡을 넘고 언덕을 넘어(По долинам и по взгорьям)>가 삽입되었다. 이 곡은 <시베리야 소총수의 행진(Марш Сибирских стрелков)>(1828)의 선율에 가사를 붙인 것이다. 우리에게는 붉은 군대 합창단의 연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수많은 나라에서 번안되어 불린 곡인데 덴마크의 록밴드 Savage rose(들장미)도 <Partisansangen(빠르띠잔의 노래)85)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연주하였다.

작중에서는 현장에서 채집한 다양한 민속 음악이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양한 민속음악에 대한 탐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작에 있어 주요하게 강조되었던 요소이다. 이와 관련한 루나차르스끼의 언급을 참고하자.

설탕을 너무 많이 뿌려서 못쓰게 된, 너무 달아서 오히려 역겨운 호두과자가 아니라 정말로 식욕을 돋우는, 영영가가 많고 알맞게 구어진 음악의 빵을 우리는 원한다.

이러한 과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때 인민대중은 스스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은 대중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새롭고 더 흉허물 없어 농민음악―우리 연방의 슬라브 민족들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의 가족이 된 수많은 다른 민족들의 음악까지도―의 거대한 원천들에 접근해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혁명 도시의 단순한 리듬에도 귀를 귀울여야 한다. 음악가라면 우리 시대의 형상화되지 못한, 원초적인 음악의 굉굉히 울리는 새로운 요소들의 공기 속에서 이러한 거대함을 포착할 수 있다.86)

 

                           [그림 7] ≪레닌의 세 노래≫ 해외상영을 위한 포스터

 

 

4. 소위 ‘개인 숭배’의 문제에 대해

 

[영화 장면 17] 1918년 맑스와 엥엘스 기념비 제막식에서 연설하는 레닌.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1930년대에는 수많은 레닌과 관련한 영화들이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현미경을 들이 밀며 쓰딸린 ‘개인숭배’의 초기 형태를 찾아내려는 이들이 있다. 쓰딸린이 레닌 자신이 거부한 우상들을 곳곳에 세우면서 혁명의 대의를 훼손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들에게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런 식으로 보자면 레닌조차 ‘개인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레닌은 혁명 직후 광장에 과거의 위대한 위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을 건립하려고 했다. 1918년 4월 12일 인민위원회 회의는 법령 “공화국의 기념물에 관하여”를 포고하였다. 이 조치는 쏘비에뜨 정권의 탄생 이후 처음 맞이하게 될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짜르와 전제정 시대의 관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던 기념물들 및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없는 기념물들은 거리와 광장에서 제거되거나 창고로 옮겨져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공화국 재산 인민위원회와 교육인민위원회 예술분과장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어떤 기념물이 철거되어야 하는지를 모스끄바와 뻬뜨로그라드의 예술협회의 동의를 거쳐 결정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87) 당시 인민위원회의 의장은 레닌이었으며 이 법령은 레닌이 서명하고 포고한 결정이었다. 또한 레닌은 미래파 예술이 아닌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세밀한 사실주의 초상화와 같은 작품을 선호하였다. 바로 레닌이 선호하던 방식으로 ―과거의 위인들을 위한 조형물이 제작되었던 것처럼― 레닌을 위한 조형물이 제작되었다.88)

 

                            [영화 장면 18] 레닌의 죽음을 슬퍼하는 눈동자.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1924년 레닌이 서거하였다. 각지에서 몰려든 여러 민족구성의 인민들이 레닌의 시신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폐위되어 처형당한 짜르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던 바로 그 인민들이다. 한 세대를 자신들과 함께 하여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전망을 제시하였으나 사회주의 사회의 성과를 누리기도 전에 과로로 쓰려져간 혁명가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며 모여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립된 레닌을 위한 기념물은 생전에 바치지 못한 마지막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위대한 혁명가의 사상과 업적을 조형물 속에 가두어진다면 그 한계는 명확하다. 하지만 레닌을 대상으로 한 조형물과 예술작품 뿐만 아니라 근로인민 그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그 자신이 주체로 된 수많은 조형물과 예술작품이 함께 등장하였음을 있지 말아야 한다. 시대를 개척한 영웅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영웅들에 대한 숭배도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 시대의 영웅들은 자신들만을 숭배받기 위해 만인을 들러리로 내세우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들과 함께 평범한 인민들이 역사에서 복무하며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갔다.

 

                           [영화 장면 19] 증언하는 집단농장의 농민
                           ≪레닌에 대한 세 노래≫ 중에서

 

 

Ⅳ. 사회주의 리얼리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위하여

 

이렇게 베르또프의 작품 ≪레닌에 대한 세 노래≫는 1934년이라는 구체적인 시대적 역사적 배경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발전이라는 조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베르또프는 자신의 다큐멘터리에 대한 원칙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전환기의 인민대중적 예술적 요구를 반영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당대에 쏘련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해외 국가들에서도 상영되어 H. G. 웰스와 같은 러시아어를 모르는 이들에게서도 화면만으로도 충분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물론 오늘날에도 맑스-레닌주의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한 영화를 학습하는 이들에게 지침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에 달성해낸 영화 예술의 성취를 쏘련에서 지속적으로 이어갔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의문이 든다. 물론 쓰딸린 사후에도 뛰어난 작품들도 많다. 그러나 1930년대와 같은 격렬한 사회적 갈등 속에서 예술을 창작하여 사회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이어내려는 조직적인 노력은 퇴조하였다.

특히 ‘해빙’기와 ‘전인민의 국가’ 슬로건이 발표된 이후 쏘련의 영화는 기술적으로 과거보다 진보하였지만 사회주의의 진실을 영화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있어서는 심각하게 퇴보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많은 모순과 한계 속에서 생산된 레닌과 쓰딸린 시대의 영화 작품들을 통해서 오늘날에도 새로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예술적 영감과 원천을 얻어낼 수 있다. 치열한 비판과 갈등이 사라진 ‘해빙’기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락한 나태함이 가득하다. 페르난도 솔라나스(Fernando E. Solanas)와 옥따비오 게띠노(Octavio Getino)는 레프 똘스또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Бондарчу́к) 감독의 ≪전쟁과 평화(Война и мир)≫(1967)를 혹평한다. ‘미국 영화 산업에 부과된 모든 전제들(구조, 언어 등), 특히 영화의 개념들에 완전히 종속한 기념비적인 예’88)라는 것이다. 과거의 위대한 문학작품을 영화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총 70만 이상 엑스트라를 쓴 거대한 국책 사업을 아카데미에서 주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소위 해빙기에 발표된 ≪나는 모스끄바를 걷고 있네(Я шагаю по Москве)≫(1963)에서의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도, 전후 쏘비에뜨 영화로 해외에서 도 인기를 얻은 ≪병사의 발라드(Баллада о солдате)≫(1959)에서도 더 이상 사회주의를 위한 고뇌와 실천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매력적인 로맨스 ≪운명의 아이러니Ирониясудьбы)≫(1975)에서는 아예 프랑스제 선물을 선사하며 장면이 나오며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알리고 있다. 영화 속에 아름다운 선율에 실린 아흐마또바(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와 예프뚜센꼬(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의 시의 시적 화자는 철저한 개인이다. 쏘련이 무너지고 발표된 러시아 영화는 보다 심각하다. ≪다 잘될 거야(Всё будет хорошо!)≫(1995)에서는 쏘련 해체 이후 잃어버린 방향성을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주인공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삐쩨르 FM(Питер FM)≫(2006)에서 ‘테러의 위협’에 검문검색을 당하는 장면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제는 ≪나는 모스끄바를 걷고 있네≫에서 경찰의 고압적이고 관료적인 태도에 밝고 당당하게 항의하는 모습조차 없다. 삼성의 협찬을 받았는지 삼성 휴대폰이 광고처럼 클르즈업 된다.

다시 지가 베르또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전술한 대로 베르또프 작품은 무수한 논쟁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그의 말년에는 거대한 국책 영화 제작에서 물러났고 뉴스를 제작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다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많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는 당국에 의해 희생된 뛰어난 개인을 부각한다.

그러나 쏘련에서 영화 예술을 둘러싼 이러한 논쟁과 비판은 베르또프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에이젠쉬쩨인을 비롯한 거장들도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에이젠쉬쩨인의 위대한 영화 ≪10월(Октябрь)≫(1927)도 당대에 상영되었을 때는 앞줄의 많은 관객이 코를 골며 잘 정도로 대중들에게 어렵게 받아들여졌다.89) 또 도브?꼬의 ≪이반(Иван)≫(1932)에 대해 “영화는 내부적으로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움 속에서 인간을 물질 소재의 무게로 짓누르고 있다”는 고리끼의 비판이 있었다.90) 뿌도쁘낀 같은 이들은 도브?꼬를 지지하였지만, 보다 젊은 감독과 비평가, 작가, 관객들은 보다 친밀하고 이해하기 쉬운 에르믈레르(Фри́дрих Ма́ркович Э́рмлер)와 유뜨께비취(Серге́й Ио́сифович Ютке́вич)의 ≪대항하는(Встречный)≫(1932)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91) 따라서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영화인들과 당대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지형 속에서 벌어진 논쟁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당국에 의해 희생된 감독으로서 베르또프를 부각하는 것은 반공주의의 논리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베르또프가 뉴스 편집에만 종사하게 된 것은 시대의 거대한 변화와 그에 따른 요청 그리고 현실에서 굴절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의 관철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말년의 베르또프와 관련한 필자의 학습이 부족하여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힘들다. 다만 직접 적용하는 데에는 비약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1977년 또마스 구띠에레쓰 알레아(Tomás Gutiérrez Alea) 감독과 대담에서의 ≪영화인(Cineaste)≫ 측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당신을 꾸바 정치체제의 죄인으로 보려는 것이 해외에서의 전형적인 강한 바람입니다. 그들의 생각은 당신이 일 년에 영화 한 편을 발표해야 할 위대한 감독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이라는 거죠.92)

 

이상으로 1930년대의 시대적인 배경과 쏘련 영화 산업의 역사라는 배경 하에서 지가 베르또프 감독의 ≪레닌에 대한 세 노래≫에 대해 소개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기술적 진보의 성과는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베르또프 시대의 것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뛰어난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이제는 단순히 스크린에 비춰진 영상을 객석에서 관람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을 통해 직접 체험가능한 형태의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디지털 혁명과 인공지능의 시대의 기술적 진보는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전개한 선구적인 예술적 논의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새롭고 풍부하게 한다. 우리는 진작에 폐지되어야 할 자본주의와 자유의 왕국을 가능하게 할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의 한 가운데에서 새로운 예술을 건설해 내야 한다. 우리는 영웅적 투쟁 끝에 패배한 쏘련의 역사와 그 예술적 성취로부터 배워야 하며 거기에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예술의 기초를 배워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날이 새롭게 발전하는 생산력과 기술적 진보를 온전히 활용하고 또 결국에는 그러한 생산력을 노동자 계급의 손에 온전히 장악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예술을 위해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폐기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찰 속에서 그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야 한다. 오직 그러할 때만이 노동자 계급의 21세기 사회주의 예술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노사과연

 


 

1) 씨네마토그라프는 필름 카메라이면서 필름 영사기와 인화기이다. 이것을 누가 발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역할을 단지 특허권을 따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여기서는 널리 알려진 설을 따른다.

 

2) 제이 레이다(Jay Leyda), ≪소련영화사 1≫, 배인정 역, 공동체, 1988, pp. 36-37. 이하의 번역 인용에서 표현을 달리하거나 표기를 바꾸기도 하였다. 때로는 찾아낸 오역을 바로 잡기도 하였다.

 

3) 루미에르 형제의 ≪씨오따 역에 도착하는 열차(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는 인류 최초의 영화 작품으로 단순히 열차가 역에 도착하는 장면을 활동사진으로 보여준다.

 

4) 김규항, “혁명의 영화, 영화의 혁명 ―1920년대를 중심으로 본 에이젠슈테인의 예술세계”, ≪노동자 문화 통신 3≫,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1990, p. 261. ‘맑스-레닌주의’를 부르짖던 김규항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자.

 

5) 홍만, “영화소집단운동”, ≪영화운동론≫, 서울영화집단 편, 화다, 1985, pp. 212.

 

6) 파티마는 포루투갈의 도시 이름이다. 이 도시에서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라는 헛소동이 벌어졌다. 독재정권은 카톨릭 신비주의와 ‘파티마의 성모’ 사건을 자신의 체제 유지에 적극 활용한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임을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사례이다.

 

7) 1820년 리스본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는 포루투갈의 전통 가요. 파두는 운명이라는 뜻으로 매우 통속적이고 구슬픈 정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포루투갈의 파쇼정권은 마치 한국에서 ‘뽕짝’이 속류적이며 현실 체념적인 정서를 인민대중들에게 유포하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를 파두 음악으로부터 기대하였다. 아말리아 호드리게스(Amália Rodrigues)와 같은 파두 가수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편이다. 201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8) 홍만, 같은 글, p. 210.

 

9) “그러나 사진이 전래의 미학에 제기했던 어려움은 영화가 전래의 미학에 제기했던 어려움과 비교해보면 아이들 장난과도 같은 것이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제3판)”,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최성만 역, 길, 2008, p. 119.

 

10) 홍만, 같은 글, p. 210-211.

 

11) 김규항, 같은 글, p. 261.

 

12) 파쇼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이 영화에 나오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짜르 체제 보다 더욱 악할한 예술 탄압이 아닐 수 없다!

 

13) 제이 레이다, 같은 책, pp. 44-51.

 

14) 김규항, 같은 글, p. 261.에서 재인용.

김규항은 레닌의 편지의 출처를 밝히고 있지 않다. 김규항의 글에 따르면 레닌이 1907년에 보그다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와 같이 언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 ≪전집(Collected Works)≫ 제43권을 기준으로 한다면, 레닌은 1907년에 보그다노프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이 없다. 1917년에도 레닌은 보그다노프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는 훗날에 보다 정확하게 보완하기로 한다.

 

15) 마야꼬프스끼, “연극, 영화 미래주의”, ≪소련영화사 1≫, pp. 386-387.

 

16) 제이 레이다, 같은 책, pp. 148-149.

 

17) 같은 책, pp. 155-166.

 

18)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의무사항을 어기는 자는 전 재산의 몰수 및 투옥과 같은 엄벌에 처할 것이다”. 같은 책, p. 207.

 

19) 같은 곳.

 

20) 같은 책, p. 218.

 

21) 같은 책, p. 229.

 

22) 배효룡, “영화예술에서의 사회주의 현실주의의 한 창조자에 관한 단상”, ≪노동자 문화 통신 3≫,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1990, p. 331.

이와 같이 영화 산업의 국유화 조치는 이미 레닌 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쏘련의 영화 국유화가 전적으로 쓰딸린 시대의 강제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는 비난은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23) 같은 곳.

 

24) <https://ru.wikipedia.org/wiki/Всероссийский_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_институт_кинематографии_имени_С._А._Герасимова>

<https://en.wikipedia.org/wiki/Gerasimov_Institute_of_Cinematography>

 

25) 김규항, 같은 글, p. 265.

 

26) 제이 레이다, 같은 책, p. 253.

 

27) 레닌, “신경제정책과 정치교육부의 임무”, ≪신경제정책론―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화론 2≫, 새길, 1991, p. 111.

 

28) 전양준 “지가 베르또프”, 전양준 편, ≪가치의 전복자들 2≫, 청담사, 1992, pp. 58-59.

 

29) 박태성 교수는 사회주의 대혁명 이후 문맹 퇴치 운동의 성과에 대해 애써 깎아 내린다. 박태성이 인용하고 있는 수치가 실제 사실에 부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문맹 퇴치 운동의 업적을 폄하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박태성, “쏘련 사회주의 교육의 허와 실”, ≪슬라브학보≫ 제17권 1호, 2002. 7, p. 253.

“끼르기스스딴에서는 1917년에는 500명당 겨우 1명꼴로 읽고 쓸 수 있었으나, 50년 후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읽고 쓸 수 있었다.”Roger Keeran and Thomas Kenny, Socialism Betrayed: Behi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iUniverse, Inc.: New York, 2010, p. 3.

또한 박태성은 문자조차 없던 민족이 혁명 이후에 비로소 자신의 민족어로 된 출판물을 쏟아 내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고 있지 않다. 우리는 반공주의자들의 숫자 놀음에 현혹될 만큼 한가하지 않다.

 

30) Густав Густавович Клуцис.

이하의 포스터 선정에서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였다.

김은경, “러시아 구성주의 포스터(1920-1930년대 초반) 연구 – 광고포스터, 영화포스터, 정치포스터를 중심으로”, ≪슬라브 학보 제23권 4호≫, 2008. 12.

 

31) 1910년부터 런던에서 발간된 영국 부르주아지의 가장 보수적인 계층의 견해를 반영한 잡지. 대영제국의 식민지 정책 문제와 국제 관계 문제를 취급하였다.

 

32) スターリン, ≪スターリン全集≫ 第十三卷, “第一次五か年計画の総結果(제1차 5개년 계획의 총화)”, 大月書店, 1980, p. 190.에서 재인용.

 

33) 자유주의 경향, 소부르주아계급의 견해를 반영한 잡지. 1865년부터 뉴욕에서 발간되었다.

 

34) 같은 책, pp. 192-193.에서 재인용.

 

35) 모리스 돕, ≪소련 경제사≫, 임휘철 역, 형성사, 1989, pp. 304-

305. 

모리스 돕의 연구 결과를 따른다면 다음과 같은 진술은 편견에 찬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쓰딸린의 산업화 전략은 중공업을 최대한 강조하면서 소비재 산업과 서비스 부문의 발전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게일 W. 라피더스(Gail W. Lapidus), “소련에서의 여성 노동과 가정내 역할간의 상호 관련”, ≪러시아혁명기의 사회와 문화≫, 한국슬라브학회 편, 민음사, 1988, p. 213.

 

상식적 수준에서 판단해 보아도 라피더스의 주장은 쉽게 논박할 수 있다. 경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장설비와 방적기계 등의 기계를 대량으로 구축해야 한다. 우리는 중공업의 발전 없이 경공업의 기반 구축이 가능한 것인지, 중공업과 경공업 각각을 객체화하여 비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경제사를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인지 되물어야 한다.

 

36) 꼬발레프 외, ≪러시아 현대문학사≫, 임채희・이득재 역, 제3문학사, 1993, p. 187.

 

37) 이강은ㆍ이병훈, ≪러시아 문학사 개설―러시아 문학의 민중성과 당파성≫, 한길사, 1989,

 

38) 필자의 졸고를 참조하라. 최상철, “맑스-레닌주의 문학・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노동사회과학 제2호: 사회주의, 20세기와 21세기≫, 노사과연, 2009, pp. 297-301.

 

39) 꼴론따이 ≪위대한 사랑≫, 정호영 역, 노사과연, 2013, p. 50.

 

40) 레닌, ≪레닌의 문학예술론≫, 이길주 역, 논장, 1988, p. 348.

별다른 부가 설명이 없지만 이 회상은 혁명 직후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41) 꼬발레프 외, 같은 책, p. 148.

 

42) 영역본을 다음 싸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sovlit.net/decree1932/>

 

43) 사회주의 리얼리즘 음악은 명확한 형식화 및 형상화 의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복잡한 구조를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위대한 전통을 토대로, 사회주의적 현실의 체험 속에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발전시킬 수 있다. 관찰 가능하고 체험 가능한 비례, 균형감과 불균형감, 새로운 음향적-조음적, 리듬적-율동적 매개변수의 역할은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청중들로부터도 평가되고 숙고되어야 한다.

 

“음악에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테제”, ≪노동자 문화 통신 2≫, 박정민 역,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1990, p. 168. 역자 박정민은 어떤 주체가 어떤 경로로 언제 이 테제를 발표한 것인지에 대해 전혀 밝히지 않고 있다.

 

44) 고리끼는 1935년 쉐르바꼬프(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Щербако́в)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고리끼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핵심이 ‘노동하는 진실(working truth)’을 구체화하는 것임을 있음 강조하고 있다. Maxim Gorky, “To A. S. Shcherbakov”, On Literature, Progress, p. 344.

 

45) 꼬발레프 외, 같은 책, p. 221.

 

46) 한스 아이슬러, “용광로의 음악 ―쏘련에서의 유성영화 작업”, 최상철 역, ≪정세와 노동≫ 제62호(2010년 11월), 노사과연, p. 83.

인용하면서 당시에 번역자였던 필자의 오역을 정정했다. 

 

47) 한스 아이슬러, 같은 글, p. 85. 

 

48)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이정희, “스탈린의 문화혁명과 그 사회적 의미에 대한 일고찰, 1928-32년”, ≪슬라브학보≫ 제16권 2호, 2001, 12.

 

49) L. 쟈네티, ≪영화의 이해 ―이론과 실제≫, 현암사, 1996, pp. 444-445.

 

50)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 안규남 역, 아고라, 2015, p. 79.

 

51) 물론 우리가 레닌의 미래파에 대한 비판을 현재의 조건에서 성찰하지 않고 그대로 반복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교조주의적인 것이 될 것이다. 쏘련에서만해도 1930년대에는 레닌의 시대와 달리 마야꼬프스끼가 대단히 높이 평가되었다.

 

52) 존 버거, ≪사회주의 리얼리즘≫, 김채현 역, 열화당, 1991, p. 30.

 

53) 레닌, ≪문학예술론≫

 

54) 꼬발레프 외, 같은 책, p. 147.

 

55) ≪씨네21 영화감독사전≫, “지가 베르토프”, <http://www.cine21.com/db/person/info/?person_id=10754>

 

56) 구회영,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에이젠스테인에서 홍콩느와르까지≫, 한울, 1995, p. 46.

프랑스 누벨 바그(Nouvelle Vague)의 기수 장 뤽 고다르와 그의 동료 장 삐에르 고랭이 지가 베르또프 집단(Groupe Dziga Vertov)이라는 작은 협력 단체를 결성했던 것에서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에까지 미치는 베르또프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고다르의 작품을 비롯한 프랑스 누벨 바그 영화들은 사회주의를 건설해 나가는 프롤레타리아 문화예술의 범주에 포함시키기엔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급진주의적 지식인 중심의 영화운동의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57) ≪씨네21 영화감독사전≫, 같은 곳.

 

58) 김은경, 같은 글, pp. 157-158.

 

59) ≪씨네21 영화감독사전≫

 

60) 전양준, 같은 글, p. 58-63.

 

61) 영화를 통해 교육을 지향했던 베르또프의 방법은 교육극을 통한 연극 실험을 시도했던 브레히트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2) 구회영, 같은 책, p. 286.

 

63)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p. 419.

 

64) 정태수, ≪러시아-소비에트 영화사 1≫, 하제, 1998, p. 192.

 

65) فرنجية. 주로 따지끼스딴과 우즈베끼스딴에서 혁명 이전에 강요되던 부르카와 유사한 복식.

 

66) 이슬람교 일반이 봉건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해 달라. 인기가 있었던 ≪미녀들의 수다≫(이 프로그램에서 또한 상업방송의 의도에 맞춘 여성의 대상화가 이루어졌음은 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라는 텔레비전 쇼에 등장했던 우즈베끼스딴 등 과거 쏘련의 한 공화국을 이루던 국가에서 온 이슬람교를 믿는 여성들을 기억해 보자. 무슬림식 인사 ‘앗쌀라무 알라이꿈’으로 자신을 알리지만 전혀 얼굴을 가리지 않고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이슬람교 일반의 것으로 비난하면서 자신은 악행의 역사에 대한 면죄부를 얻으려는 기독교도들의 위선은 가당치 않다. 이러한 억압은 종교 그 자체보다 여전히 강요되고 있는 봉건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종교 이데올로기와 굳건하게 싸워야 한다. 그런데 종교와의 투쟁은 개인의 양심인 신앙심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종교라는 미신이 존재하는 물적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67) 네끄라소프, ≪거리에서≫, 임채희 역, 열린 책들, 1993, p. 48.

제목이 없는 시이기에 첫 행이 제목을 대신한다.

 

68) 임채희, “네끄라소프의 생애와 시 세계”, 같은 책, p. 154.

 

69) V. I.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p. 516.

 

70) スターリン, コルホーズ突擊隊員第一次全国大会での演説. “제1차 전연맹 꼴호즈 돌격대원 대회에서 한 연설”, 같은 책, pp. 275-276.

 

71) “개인적인 수행과 집단적 달성 ―또마스 구띠에레쓰 아레아와의 대담”, 서울 영화집단 편, 같은 책, p. 169.

 

72)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송준서, “전후 스탈린 시기 사회주의적 경쟁의 퇴조와 ‘대협약’의 성립, 1944-1953”, ≪슬라브 학보≫, 제24권 1호, 2009. 3. 물론 우리는 강단에서 생산된 이론의 편견을 잘 걸러내고 독해해야 한다.

 

73) 불행하게도 드니쁘르 강 댐은 1941년 쏘독 전쟁 과정에서 파괴되어야 했다.

 

74) 존 버거, 같은 책, 1991, p. 54.

75) 제이 레이다, 같은 책, p. 145.

76) 정태수, 같은 책, p. 189.

77) 정태수, 같은 책, p. 206.

78) 한스 아이슬러, 같은 글, p. 83. 

79) “베토벤의 음악이 프랑스 혁명의 시기에 생겨나서 그것으로 가득 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혁명에 의해 깊은 감동을 받아서 베토벤은 음악적 요소의 심연에 심취할 수 있었다. 음악적 의식과 연관하여 이러한 요소는 고뇌와 투쟁, 승리를 구현할 수 있다. 순수음악적 균형에 대한 커다란 위반이었고 조화로운 해결로의 예술적 인도였다.”

 

루나차르스끼, “음악과 혁명”, ≪노동자 문화 통신 2≫,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1990, p. 161.

 

80) 드미뜨리 울리야노프, “음악에 대한 그의 사랑”, ≪레닌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8, p. 309.

 

81) 인용자 주: 당대의 러시아 혁명가들은 <라 마르세예즈>를 즐겨 불렀고 1917년 혁명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프랑스 극우주의자들이 국가를 강요하는 모습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의 철저한 완수를 선동하는 혁명가의 역사적 의미가 퇴색하고 있다.

 

82) 드미뜨리 울리야노프, 같은 글, ≪레닌의 문학예술론≫, p. 311. 역자 이길주는 이 부분을 번역하면서 치명적인 오역을 하였다. ‘new air’는 ‘새로운 기분으로’가 아니라 드미뜨리가 처음 들은 ‘새로운 선율’을 뜻한다.

 

83) 이유리ㆍ임승수,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시대의 창, 2009, p. 76.

 

84) 레닌, ≪레닌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8, p. 121.

 

85) Savage rose의 <빠르띠잔의 노래>를 처음 국내에 소개한 음반은 Savage rose의 동명 타이틀로 시완 레코드에서 발매한 편집음반(SRMC 4019)이다. 음반 뒷표지에 각각의 곡의 제목을 해석해 놓았는데 이 곡을 파티 노래로 번역하는 오류를 담고 있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86) 루나차르스끼, 같은 글, pp. 164-165.

 

87) ≪문학예술론≫, p. 299.

 

88) 앞으로 건설된 사회주의 사회에서 쏘련에서와 같은 조형물이 건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다만 사회주의 사회의 예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그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과 사회상에 대해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89) ≪영화운동론≫, 서울영화집단 편, 화다, 1985, p. 28.

 

90) 박원용, “소비에트 권력 초기 10월 혁명의 기억 만들기”, ≪슬라브학보≫ 제24권 1호, pp. 204-205.

 

91) Газ, Кино от 17, Ⅳ, 1935.(≪끼노≫, 1935년 4월 17일자.) 정태수, 같은 책, p. 198에서 재인용.

 

92) 정태수, 같은 책, p. 198.

 

93) “개인적인 수행과 집단적 달성 ―또마스 구띠에레쓰 아레아와의 대담”, 같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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