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00주년에 즈음한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선언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번역: 문영찬(연구위원장)

 

 

들어가며

 

쏘련이 붕괴된 이후 제국주의 진영에서는 ‘역사의 종말’이니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이니 하며 현시대를 규정하려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역사의 종말은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자신감과 희망을 말한 것이고,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언은 사회주의 이념의 좌절을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자본가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2008년 대공황이 자본주의를 엄습해 왔다. 그리고 그 여파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에 진보진영은 고무되어 성급하게 자본주의 붕괴 날짜를 점치는 이들도 등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100주년을 기린다. 우리가 기리는 20세기 세계사의 정점의 사건은 자본주의가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없는 보다 우월한 사회 조직을 우리가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10월 혁명은 혁명적 계급투쟁의 힘을, 피착취자와 피억압자들의 힘을 두드러지게 했는데 그때 그들은 중심 무대에 서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사회적 해방의 방향으로 돌렸다. 역사적 견지에서 그것은 노예들의, 중세의 농민들의, 부르주아 혁명들의 연속이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 과정의 정점이었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혁명의 목표가 착취적인 계급사회의 폐지였기 때문이었다. 영웅적인 파리꼬뮨에 의한 “하늘의 폭풍” 후 46년이 지난 후 러시아 노동계급은 10월 혁명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동계급-인민 대중의, 수백만 인민의 비전을 구현하게 되었다.

10월 혁명은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의 결과로 하나의 나라 혹은 몇몇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레닌주의의 분석의 올바름을 드러냈다.

1917년 10월은 전 지구적이고 지속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충족시키는 노동계급(착취, 불안정, 빈곤, 실업 그리고 전쟁들이 없는 사회를 위한 혁명 투쟁을 이끌 수 있고 이끌어야만 하는 사회적 세력)의 잠재력을 확증했다. 또한 그것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의 실현은 경제활동인구에서 노동계급의 비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새로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위한 매개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확증했다.

동시에 10월은 혁명적 정치적 전위, 공산당의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두드러지게 했는데 사회주의 혁명에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의 형성, 강화,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를 위한 전체 투쟁의 기간에서 지도적 요소로서 그러하다.

10월의 불길은 이 시기의 사회민주당―노동계급과 혁명적 정치를 배신했고 부르주아 계급의 기치 하에 노동운동의 흡수의 길을 선택하고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젊은 노동자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의 군사공격을 지지한―에 반대되는 새로운 유형의 수많은 공산당들, 혁명적 노동자당들의 수립을 초래했고 가속화시켰다.

10월 혁명의 승리는 이전의 모든 노동자들의 봉기의 연속이었고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인류의 역사적 이행을 위한 길을 닦았다. 10월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요약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출발점을 마련하였다. 언제, 어느 날짜에 그리고 어느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이 과정을 완수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음이 깨졌다는 것이다; 길이 열렸고 그 길이 보이고 있다.”

10월의 교훈은 오늘날 특히 중요한데,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움직이고 있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위기와 후퇴의 상황에 처해 있고, 반혁명의 장기간의 결과(1990년대의 시작 이후로)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는 많은 노동자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견해를 강화하고 있는 오늘날에 그러하다.

역사적 발전은 그 자체로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프로젝트는 유토피아적 성격이었다고 주장하는 부르주아적 선전을 우리가 폭로하게 해준다. 어떠한 사회-경제적 체제도 인류의 역사에서 한 순간에, 단 한번에 수립되지는 않았으며 각 특수한 국면에서 사회적 진보의 매개였던 그러한 계급세력들의 승리 또한 일직선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위대한 노예 봉기인 스파르타쿠스가 박해를 받은 후에 노예제는 그러나 결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이후 로베스삐에르는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봉건제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는데 약 4세기가 걸렸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숨긴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봉건적 생산관계를 완전히 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발전하기까지 14세기의 북이탈리아 무역도시의 부르주아지의 첫 시도로부터 18세기 그리고 19세기의 부르주아 혁명들까지 수 세기가 걸렸다. 이 시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당한 정치적 패배는 지주와 농노 간의 낡은 생산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부르주아적 관계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역사적으로 필연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대표들은 자본주의는 대체될 수 없고, 영원하며 혁명적 계급투쟁은 더 이상 역사적 발전의 수단이 아니라고 헛되이 주장한다.

10월 혁명에 의해 시작된 사회주의 사회의 수십 년간의 존재와 성공들은 시장이 없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자본가가 없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결론은 이러한 특수한 국면에서 모든 자본주의적 소유와 가본가의 이윤을 영원히 폐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필연적이고 시의적절하며 현실적이다

 

사회주의의 필연성 그리고 시의적절성은, 집중화된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폐지할 잠재력은, 생산의 집중을 초래하는 자본주의의 발전으로부터 흘러나온다. 자본주의적 소유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대해 제동을 건다. 자본주의적 소유는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증대되는 인간적 필요―모든 사람이 실업의 악몽없이, 더 적은 시간을 일하고, 더 나은 생활수준을 누리고 높은 수준의 전적으로 공적인 무상의 교육과 건강과 복지에서 유사한 서비스를 누리기 위한―에 조응하는 더 나은 사회적으로 조직된 조건들에서 살 수 있는 잠재력을 소멸시킨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노동을 통해 이러한 가능성을,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의해 확대되는 가능성을 창출한다. 그러나 생산되는 모든 것이 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이윤의 기초 위에서 결정되는 사회에서는 노동계급과 인민 층의 필요는 분쇄된다. 문제의 본질은 생산하는 사람이 생산의 목표와 그 조직화에 대해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기적인 경제적 공황은 자본주의의 DNA에 있으며 점차 깊고 동시다발적으로 되고 있는데, 실업의 격심한 증가, 사회안전망이 없는 저임금 노동의 확대를 결과하고 있으며, 인권의 모자를 쓴 삶이 파괴되고 시장과 영토의 분할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 초래되고 있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에도 불구하고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의 악화는, 전체 자본주의 세계 그리고 물론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들에 관련된다. 자본주의 국가 스스로가, 그들의 연구조사센터들이 노동자의 수입이 축소되고 있는 반면에 자본가들의 부는 증대되고 있음을 인정한다.

이전 시기의 사회혁명들에서처럼, 낡은 착취체제의 힘의 침식을 위한 오늘날의 결정적 요인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그 내적인 모순들과 그 모순들의 격화이다. 

이 점은 계급투쟁의 발전과 상승 그리고 그것의 혁명적 성격의 획득을 위한 잠재력을 제공한다. 오늘날 독점자본주의의 시대에 체제의 기본적 모순은 첨예화되고 있는 반면에 노동과 생산은 유례없는 수준으로 사회화되어 왔는데 그러한 사회화의 결과의 대부분은 기업 집단들의 주주들에 의해 향유되고 있다. 이들은 경제적 생활의 대주주들-기생체들인데 그들은 생산의 조직화와 감독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을 착취한다. 주주들은 자신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성과로부터 배당액을 받고 있는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그것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도 종종 알지 못한다.

동시에 독점 그룹들의 지배에 따라 거기에는 상대적인 정체의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즉, 생산력의 발전의 현재의 수준에 의해 창출되는 잠재력과 활력과 관련한 정체, 사회가 생산의 추진력으로서 이윤을 제거한다면 양적으로 그리고 질적으로 생산될 수 있는 것과 관련한 정체. 기생성이라는 특징 그리고 상대적인 정체는 다음과 같다: 상품들의 소위 인위적인(in-built) 노후화(생산물의 수명을 제한하기 위한 과학적 지식의 사용), 기업집단들에 의해 소유되는 특허에 기인하는 기술의 확산에 대한 제한, 충분한 이윤을 가져오지 않는 부문들에서 다양한 기간 동안의 저발전(예, 지진에 대한 보호), 자본주의적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환경의 비이성적 활용으로 인한 파괴, 무기생산과 억압의 수단 등의 생산을 위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거대한 소비.

오늘날, 노동계급을 위한 세력들의 부정적인 상호관계는 자본의 힘과 공세가 무적이라는 인상(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에 기인하는)을 재생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본주의의 부패성을 감출 수 없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폐지를 위한, 노동자의 권력에 의한 사회화와 중앙의 계획 및 사회의 이익에 기초하는 그것들의 활용을 위한 객관적 잠재력을 감출 수 없다.

10월 혁명의 전체 역사는 그리고 그에 앞서서 있었던 일들은 세력들의 부정적인 상호관계가 영원하거나 불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혁명적 격변을 위한 우호적인 조건들의 출현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들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자동적으로 그것의 실현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한 중요한 이유는 자연의 법칙과 비교해 볼 때, 사회적 진보는 인간의 적절한 활동을 요구하는데 이 경우에는 낡은 사회의 폐지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계급투쟁을 요구한다.

사회주의 혁명의 발발은(인간 사회에서 모든 사회혁명처럼) 인민을 흡수하고 억압하고 진압하는 지배계급의 능력이 약화되는 상황의 출현을 전제로 한다.

레닌은 혁명적 상황의 정의를 정식화했고 혁명의 전야에 사회에서 축적되는 주요한 객관적 및 주관적 특징들을 확인했다.

 

-“상층의” 사람들이(자본가들의 지배계급) 그들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지배하고 관리를 할 수 없다.

-“하층의” 사람들이(노동계급과 인민층) 그들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중의 활동성의 비상한 상승이 관찰된다.

그리하여 “하층의” 사람들의 궁핍 그리고 불만이 그들의 정치적 활동을 증가시키고, 반면에 혼란, 약점, 모순, 우유부단이 “상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지배적이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혁명적 타도를 위한 이러한 우호적인 상황의 출현은 객관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모순의 급격한 첨예화로부터 흘러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강조했듯이, 이것은 모든 혁명적 상황이 혁명으로 전화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의식적 전위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계급의 계획된 혁명적 봉기없이는 하층의 사람들의 반발 혹은 상층의 사람들의 위기는 타도의 계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자의 혁명이 발발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이론과 발전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맑스-레닌주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봉기을 지도할 수 있는 혁명적 정치적 전위, 공산당이 출현해야만 한다.

물론 혁명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모든 요인들을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사적 경험은 중요한 요소로서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과 결합된, 깊고 동시다발적인 자본주의 공황의 표현들을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러시아에서 최초의 노동자 혁명의 승리는 당에 의해 지도되는 노동계급이 유사한 상황에서  이러한 역할을 떠맡을 수 있는 능력의 결과였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적 상황을 위한 잠재력을,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제국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로서 출현하는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예기했다.

 

 

1917년 10월의 승리를 향한 볼쉐비끼의 역정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짜르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비록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었지만 짜르를 수반으로 하는 낡은 절대주의 국가의 강한 특징들이 존재했었다. 시골에는 봉건적 관계들의 중요한 잔재에 의해 고통받는 농민층/소생산자들의 광범한 대중들이 존재했다.

1905-1907년의 혁명은 국가 두마, 즉, 매우 제한된 권한을 가진 입법적인 대표기관의 형성―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형식적인 부르주아 의회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하지 않았다―을 초래했다. 두마라는 기관은 부르주아 계급과 짜르 정권 간의 타협을 표현했다. 시골에서는,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1861년 이래로 폐지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광범한 부분은 대지주들의 억압으로 고통당했는데 대지주들은 농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하여 허드렛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그들의 수확의 절반을 넘기도록 강요했다.

1905년 혁명의 시기에, 쏘비에뜨는 강화되는 파업투쟁과 계급 대립의 조건 내부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활동의 조직화를 위한 기관으로서 탄생했다. 쏘비에뜨는 선출된 대의원을 가진 노동계급의 조직의 새로운 형태였고 미래의 노동자 권력의 씨앗과 형태로 기능했다.

모스끄바와 뻬뜨로그라드(후에 레닌그라드라고 재명명된) 같은 주요한 러시아의 도시들의 핵심적 중심들에 있는 대공장의 창출은 임금노동의 중대한 성장을 초래했고 노동계급이 짜르 제국의 전체 인구의 다수가 아니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을 나라에서 기본적인 사회적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볼쉐비끼들은 계급투쟁의 발전을 통해서 두 가지를 옹호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 노선을 세웠다: a) 임박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의 꼬리가 되지 않기 위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 b) 혁명이 그 역사적 시기와 관련하여 근본적 성격을 가질 수 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행을 촉진하기 위해서 노동계급에 의한 전체 인민의 운동의 지도(즉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 및 중농과의 사회적 동맹). 결론적으로 농민층을 노동계급의 측으로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서, 볼쉐비끼의 전략은 중세 시대에 반대하는 모든 농민들과 함께한다는 노선에 기초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빈농과 함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반프롤레타리아들과 함께 하고 그리고 시골마을의 부농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객관적인 발전이 짜리즘이라는 후진적인 정치적 상부구조와 그리고 시골에서 농노제의 잔재의 유지와 모순되게 되었다는 평가에 기초한 것이었고 또한 유럽적 수준에서 혁명적 과정이라는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동시에 1905년의 부르주아 계급은 18세기와 19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의 시기의 진보적인 부르주아 계급이 더 이상 아니었다. 어쨌든 자본주의는 지금 전 세계적 수준에서 제국주의라는 반동적 시대로 이행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경쟁자인 노동계급이 스스로를 독립적인 정치적 세력으로 세워냄에 따라 정치적 혁명을 바라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했다.

결론적으로 레닌은 혁명이 임시혁명정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해야만 한다고 평가했는데 그것은 볼쉐비끼의 “최소” 강령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수행해야 할 것이었다(제헌의회, 보통선거권, 농업개혁 등). 이 권력은 짜리즘의 흔적을 근절할 것이었는데 그것은 선진적인 자본주의 서유럽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불을 붙이고 그것은 차례로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할 것이었다. 볼쉐비끼는 이 시기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과 연계시키고 노동계급의 특수한 이익의 옹호와 혁명의 성과를 확대하기 위해 혁명정부에 대해 끊임없이 압력을 가할 필요를 강조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의 민주주의적 독재”는 레닌이 말했듯이, 절대주의를 분쇄한다는 점에서 통일적인 관점을 갖고 있지만 사회주의라는 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레닌은 혁명이 발전함에 따라, 동맹 내부에서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의 지배 내부에서 투쟁이 첨예화되고, 소부르주아 요소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요소의 지배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을 목표로 하는 노동계급의 중농과 부농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가 궁극적으로 초래될 것임을 예견했다.

볼쉐비끼의 노선은 그 시대의 우익기회주의자들인 멘쉐비끼들에 반대하여 그리고 또한 농민층의 역할과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뜨로츠끼에 반대하여 형성되었다. 레닌은 뜨로츠끼의 입장이 “농민층의 역할에 대한 부정”과 혁명의 불구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러시아의 참가는 사회적 모순들을 첨예화시켰다. 전선에서 러시아 군대의 반복되는 패배, 영토의 손실(예, 폴란드, 발틱 나라들)은 전쟁의 파괴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와 농민들에게서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 사이에서도 중대한 불만을 야기했다. 짜리즘의 기구들이 독일쪽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리고 독일과의 단독 평화조약에 조인할 가능성은 부르주아지의 반작용을,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지지받고 짜르를 타도할 계획의 조직화를 초래한 반작용을 유발했다. 1916년에 다양한 민족들의 동시다발적인 봉기가 까프까즈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짜르제국에 반대하여 발발했다.

짜르를 타도하려는 부르주아지의 계획들은 주요하게 인민들의 동원 그리고 파업들과 결합되었는데 그것들은 식량부족, 대규모의 실업 그리고 사회문제들의 급속한 강화의 결과로서 1917년 2월에 수행되었다. 혁명적 상황의 형성, 쏘비에뜨에 조직된 노동자와 농민들의 대규모적인 정치적 활동, 군대의 분해는 결국 짜르의 혁명적 타도를 초래했다.

혁명적 상황은 수많은 중요한 요인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과정의 지형에서 창출되었다: 제국주의 세력 상호간의 적대의 첨예화, 제국주의 전쟁이 지난 3년간 인민 층에 대해 창출한 문제들, 짜리즘과 부르주아지의 동맹에서의 불협화음―이는 더 이상 “상층의” 사람들이 이전과 같이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노동계급과 병사들의 대열에서 전쟁 전과 전쟁 동안에 수행된 볼쉐비끼들의 정치적 및 조직적 작업.

위기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조건에서 부르주아지와 짜리즘 사이의 모순들의 갑작스런 강화는―이것의 불가피성은 볼쉐비끼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부르주아지가 2월 혁명에서 우세를 점하도록 했다.

임시민주정부가 러시아의 부르주아 자유주의 당들의 대표들에 의해 수립되었고 부르주아 권력기관을 구성했다. 동시에 노동자와 농민의 대중적인 정치적 투쟁은 쏘비에뜨(대의원들의 회의체)를 통하여 짜르의 타도에 참가한 무장한 대중들의 조직을 표면화시켰다.

멘쉐비끼들(기회주의적 조류) 그리고 사회혁명당원들(“소부르주아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이 시기에 쏘비에뜨를 지배했는데 임시민주정부를 지지한다는 쟁점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레닌이 “이중권력”이라고 규정지은 상황이 출현했는데 이는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갖고 있지만 무장한 인민대중의 조직(예, 쏘비에뜨는 자기 자신의 방위대를 갖고 있었다)을 해산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못한 혁명적 과정의 이행기적 시기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임시민주정부와 쏘비에뜨 간의 타협을 이해하고서, 다음의 필요를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확신하기 위하여 특수한 노선이 제출되어야만 한다고 사고했다:

 

a) 부르주아 계급의 정부인 임시민주정부를 지지하지 말 것.

b) 계속되고 있는 전쟁은 제국주의적이며, 침략적이며 부정의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c) 쏘비에뜨에서의 세력들의 상호관계를 볼쉐비끼에 우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멘쉐비끼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을 포기하는 것.

d) 인민 층의 모든 절박한 요구들(평화, 토지, 빵)의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쏘비에뜨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

 

잘 알려진 “4월 테제”와 이 시기의 다른 저작들에서 레닌은 2월 혁명의 성격에 대한 매우 명확한 평가를 하였다. 그는 권력이 바뀌었고 부르주아 계급의 수중으로 들어갔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때까지 볼쉐비끼 전략에서 기본적인 쟁점,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적 동맹이라는 쟁점은, 프롤레타리아트 다수가 방향을 잃고 부르주아지의 꼬리로서 역할하는 소부르주아의 대표자들을 신뢰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이미 쏘비에뜨라는 형태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수되지 않았고 많은 목표들이 실현되지 않았다(예, 제헌의회, 농업개혁들)는 “구볼쉐비끼들”(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의 입장에 반대하여 레닌은 각각의 혁명의 주요 쟁점은 권력이라는 쟁점이라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수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볼쉐비끼 전략에서 변화가 요구되었다. 2월부터 계속하여, 풀려야할 최초의 그리고 기본적인 쟁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을 끌어 올리는 것, 사회적 동맹의 틀 내에서 전위적 입장의 승리였다. 이것은 혁명적 기관 자체 내에서(쏘비에뜨들) 투쟁을 요구했고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토대를 준비하기 위하여 반프롤레타리아들 그리고 빈농을 집결시키는 것을 요구했다.

임시민주정부가 7월에 볼쉐비끼들과 노동운동에 대한 거친 억압적 조치를 취했을 때, 볼쉐비끼들은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구호를 철회하였다. 이 결정적 시기에 그리고 특히 꼬르닐로프의 군사 쿠데타의 발발 이후에 레닌은 객관적인 상황은 부르주아 군사독재의 승리의 완성을 초래하든가 혹은 노동자들의 무장봉기의 승리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의회적 이행에 관한 환상들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강화하였고 무장봉기의 목표는 당의 강령적 목표의 실현을 위하여 빈농층의 지지를 받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권력의 장악일 뿐이라고 선언하였다.

1917년 9월에, 볼쉐비끼가 뻬뜨로그라드와 모스끄바의 쏘비에뜨들에서 다수를 획득한 이후 그들은 새로운 내용을 가진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구호로 돌아갔다. 이전처럼, 타협, 멘쉐비끼와 부르주아 정부의 연합을 폭로하고 세력들의 상호관계를 변화시킬 구호로서가 아니라, 임시민주정부의 타도를 위한 구호로서, 혁명적 봉기를 위한 구호로서. 볼쉐비끼들은 제헌의회 혹은 쏘비에뜨 대회를 위한 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이런 방향에서 행동했다.

레닌과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볼쉐비끼 지도부의 단호함이 1917년 10월 25일(새로운 달력을 따르면 11월 7일) 결국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가져왔다.

10월 혁명의 경험은 쏘비에뜨 노동자의 권력,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쟁점들(토지, 빵, 평화)를 다루었다는 것을 그리고 부르주아 권력이 아니며, 실제로는 존재할 수 없는 어떤 “중간적” 형태의 권력이 아니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했다. 쏘비에뜨 권력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폐지를 위한 길을 닦았다.

볼쉐비끼당은 레닌의 결정적인 공헌과 더불어 혁명의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의 전략적 견해를 발전시키고 경쟁하는 계급들 간의 상호간의 세력관계의 빠른 변화를 심화시키고 예측하고,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 내부에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항상적인 이론적 및 정치적 노력을 하였다. 1905년에서 1917년 10월까지 혁명적인 정치노선에서 변화는 그것의 전략적 정교화의 성숙을 반영했다.

그것은 쉽지 않았다. 1903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2차 대회에서 멘쉐비끼로부터의 분리와 1912년에 독립적인 당의 형성으로부터 시작하여 볼쉐비끼들은 기회주의세력에 반대하는 투쟁의 조건에서 그리고 그들로부터 사상적-정치적-조직적 분리의 조건에서 단련되었다.

승리를 향한 과정은 항상적인, 일관된 이론적 및 정치적 정교화의 결과였다.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의 형성을 위한 결정적인 공헌은 독점자본주의의 특성에 대한 연구(“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는 저작에서),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입장과 노동자의 권력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성격에 대한 연구(“국가와 혁명”), 그리고 변증법적 사고에서 더 일반적인 심화와 발전에 대한 분석(“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이라는 저작에서)에서 제공되었고 반면에 짜르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분석은 이미 그 이전에 있었다(“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저작에서).

이러한 역작(力作)들은 독점자본주의의 시대에 집적된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위한 잠재력 그리고 불균등한 경제적-정치적 발전에 의해 창출되는 잠재력 그리고 제국주의 사슬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파열되고 한 나라 혹은 몇몇 나라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기 위한 제국주의 상호간의 모순의 첨예화를 강조하였다.

레닌은 볼쉐비끼의 전략을 발전시키면서 플레하노프, 카우츠키, 마르또프의 입장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소위 자본주의의 성숙을 강제적으로 경과하여야만 한다고 사고한 볼쉐비끼 간부들의 입장에 대해 실천적으로 반대했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전 러시아에 광범하게 퍼져있었고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입장은 러시아 경제에서 농업생산의 특별한 비중, 그것의 기계화의 결여, 전기화라는 측면에서 후진성, 짜르 제국 대부분의 전자본주의적 잔재들에 기초해 있었다. 레닌은 자본주의 관계들의 발전, 대도시에서 독점그룹들의 창출 그리고 생산력의 발전에 커다란 자극을 주는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위한 잠재력에 대해 조명했다.

자연스럽게도, 볼쉐비끼 전략의 성숙은 빠르고 쉽게 발생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볼쉐비끼 당은 계급투쟁의 첨예화의 순간에 대중들에 의해 발전하는 혁명적 주도력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고 또한 그들에 의해 창출되는 기관들(쏘비에뜨들)을 혁명적 봉기를 위하여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였다.

계급투쟁의 발전의 각 국면에서 볼쉐비끼 당은 상응하는 정치노선으로써, 동맹, 슬로건들, 교묘한 책략으로써, 그리고 멘쉐비끼와 나머지 기회주의 세력에 맞서서 기민하게 수행되는 대결로써 자신의 전략에 봉사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드러내었다. 볼쉐비끼 당은 1905-19017년의 전 기간에 걸쳐 거친 계급 전투들에서 자신의 당원들에 의해 획득된 전투경험을 최선의 방식으로 활용하였다. 볼쉐비끼 당은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에서 세력들의 상호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견고하고 단호하게 작업하였고 제1차 대전 기간에 뻬뜨로그라드와 모스끄바에서 대규모 노동조합들에서 세력들의 상호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고 주요하게는 점차적으로 노동자와 병사의 반란의 기관들(쏘비에뜨들)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이론적 준비성과 전투적인 실천적 능력은 볼쉐비끼 당에게 노동자-인민세력과의 혁명적 유대를 강화시키고 자신의 활동에서 직면하는 국가폭력, 준국가적 폭력과 같은 실천적 어려움들에 굴복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1905년에서 1917년에 이르기까지 어려운 과정에서, 볼쉐비끼들은 짜르 국가의 폭력과 소부르주아적인 그리고 후진적인 인민층의 반혁명적 활동에 실천적으로 마주쳤다. 특징적인 사례는 1905년 혁명에서 백인조였는데 그때 레닌은 실천적 방식으로 그들을 다루는 것은 노동자의 전투그룹을 위한 훈련을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볼쉐비끼들은 이 시기에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심화시키기 위하여 거대한 노력을 하였다. 1905년에 뻬뜨로그라드에서 최대규모의 시위에서 군중은 짜르 경비대에 의해 공격당하기 전에 성인(the saints)들과 짜르 자신의 상을 들고 찬송가를 불렀다.

특히 1917년의 2월에서 10월까지의 결정적 기간에 그들은 대중을 오도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능력을 지닌 께렌스끼와 같은 유능한 부르주아 정치가들과 직면하였다. 볼쉐비끼들은 혁명적 봉기를 위한 정치적, 조직적 그리고 군사적 준비의 계획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과감하게 작업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의 승리의 결과는 사회주의 혁명의 전략을 확증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와 연계되어 있는 많은 교훈을 준다: 혁명적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입각한 그것의 작동, 이것은 자신의 근본적 특징으로 집단성과 통일된 행동의 수호를 가지고 있다. 노동계급을 자본의 권력에 반대하여 집결시킬 필요, 농민과 다른 중간층을 혁명으로 견인하고 다른 부문들을 중립화시킬 필요.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으로 낡고 반동적인 성격, 자본주의의 틀에서 어떤 정부에 참가하지 않거나 혹은 지지할 필요성,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권력의 이행기적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할 필요.

10월 혁명에서 볼쉐비끼들의 전략뿐만 아니라 그것의 형성과 발전(1905년부터 1917년까지)에 대한 연구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준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계급의식이 성숙된 수준의 노동자와 인민층에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귀중한 경험을 제공한다. 볼쉐비끼들은 국내적 및 국제적 발전의 연구, 이론적 작업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거친 계급투쟁으로부터의 경험에 대한 연구를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결합은 공산주의자들이 세력들의 상호관계가 부정적인, 복잡하고 어려운 조건들에서 효과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오늘날 더욱 더 필요하다.

 

 

20세기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전략에 대하여

 

볼쉐비끼 당과 10월 혁명은 제 1 그리고 제 2 인터내셔널의 틀에서 맑스주의자들의 혁명적 진영의 활동의 계속이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봉기의 발발에 기여했는데 그 봉기는 그 뒤에 베를린, 부다페스트, 튜린으로 확산되었으나 패배하였다. 일반적으로 보면, 10월 혁명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발전을 가속화시켰고 제 3 인터내셔널(1919-1943)을 창출했는데 그것은 자본의 국제적 힘에 대응하기 위해 수립되었다. 제1차 대전에서 노동계급을 배신한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명확한 분리를 위한 필요, 그들에 반대하는 투쟁을 강화할 필요는 1920년의 제2차 대회에서 제 3 인터내셔널에 대한 어떤 당의 가입을 위한 21개의 조건들, 자신의 혁명적 성격을 수호하는 것과 연관된 조건들의 정식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후에 10월 혁명의 적극적 경험은 수용되지 않았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역사의 기간 동안 지배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사회주의 권력의 이행의 국면으로서 부르주아 권력과 노동자의 권력 사이에 중간적 형태의 권력 혹은 정부라는 목표를 설정하는 전략이 그 존속 기간에 상당한 정도로 퍼졌는데 그것은 이 쟁점에 대한 모순들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종종 이러한 선택은 볼쉐비끼들의 최초의 전략적 정교화에 기초하여 정당화되었고 물론 자본주의 경제체들에 적용되었고 1905년의 러시아의 상황과 유사한 상황을 갖지 못했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국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이유는 명확하게 더 깊고 자세한 연구를 요구하는데 우리 당은 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문제되는 전략적 정교화의 확산에 기여한 어떤 요인들과 어려움들을 주목할 수 있다.

10월의 승리 몇 년 후에 노동운동의 혁명적 물결이 특히 1918년의 독일과 1919년의 헝가리 혁명의 패배 후에 퇴조했는데 반면에 혁명적 상황을 위한 전제조건의 창출이 일부 공산당들에 의해 활용되지 못했는데 후에는 1920년 이후 자본주의 열강들이 일시적으로 경제 공황을 극복하고 안정화되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다수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의 덫에 걸려 있는 상태였고 그 중 몇몇은 이탈리아와 독일과 같이 강력한 당내 투쟁이 지속되었다.

동시에 선진적인 자본주의 서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가 없다면 사회주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세력(뜨로츠끼와 다른 사람들)과 쓰딸린에 의해 영도되는, 쏘비에뜨 권력은 사회주의 건설의 방향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 간의 전연방 공산당(볼)내부의 대결이 강화되었다.

1930년대에 쏘련에 대한 새로운 제국주의 군사공세의 증대되는 위협은 혁명적 물결의 퇴조에 더하여 또 하나의 요인이었는데 그것은 쏘련 내부에서의 매우 첨예한 계급투쟁과 시급히 극복되어야 하는 장애물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의 논쟁은 적절한 혁명적 전략을 정교화 함에 있어서 모순들과 이론적 약점들을 첨예하게 했다.

제국주의의 공세를 가능한 한 늦추고 이 방향에서 제국주의 중심들 간의 모순들을 활용하려는 쏘련의 대외정책의 복합적인 노력은 다음의 수십 년간에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이후 부정적 역할을 한, 국제 공산주의 노선에서의 중대한 변경과 변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변화들은 파시스트 조류와 어떻게 대결할 것인지, 사회민주주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입장이라는 쟁점과 관련되어 있었다. 제국주의 동맹들을 파시즘 세력을 포함하는 침략적인 것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세력을 포함하는 방어적인 것으로 정치적으로 분리하는 접근이 이 시기에 출현했다.

더욱 특별하게는, 1930년대에 사회민주당의 좌익과 우익의 존재와 관련한 잘못된 평가가 있었는데, 이는 그들과 동맹하는 것을 정당화하였고 이 시점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당으로 그들이 완전히 변형되었다는 것을 과소평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구별은 제2차 대전이후에도 또한 유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객관적으로 노동운동의 투쟁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치 하에 덫에 걸리게 했다. 유사하게 제국주의 중심들을 평화에 친화적인 것과 전쟁에 친화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은 제국주의 전쟁과 파시즘의 대두의 실제적인 원인을, 즉 독점 자본주의라는 것을 감추었다. 다른 말로하면, 그것은 민족해방 혹은 반파시즘 투쟁을 위한 세력의 결집을, 많은 나라들에서 형성되었던 혁명적 상황이라는 조건을 활용하면서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를 위한 투쟁과 결합시킨다는 공산당의 긴급한 전략적 과제들을 조명하지 못했다.

일반적으로는, 그 시기의 성격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략적 정교화에서 과소평가되었고 혁명의 성격에 대한 지배적인 정의는 국제 제국주의 체제에서 어떤 자본주의 나라의 위치에 대한 기준에 기초해 있었다. 즉, 국제 제국주의 체제에서 지도적인 열강에 의해 달성된 높은 수준과 비교하여 어떤 나라의 발전의 낮은 수준이, 뿐만 아니라 혁명적 노동운동을 희생시키는 세력들의 부정적 상호관계가 그릇되게도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준으로 채택되었다.

이 잘못된 방법론의 접근은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하나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생산력의 발전에 커다란 자극을 주고 그것을 해방시키는 잠재력을 과소평가했다. 예를 들면 쏘련이 물려받은 전기화에서의 현존하는 후진성은 문맹의 경우에 있어서처럼 매우 빠르게 극복되었다. 노동자의 권력은 그 시대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사회적 서비스를 조직했다.

자본주의 경제체들의 불균등한 발전과 국가들 간의 불평등한 관계는 자본주의의 틀 내에서 근절될 수 없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각각의 자본주의 나라에서 혁명의 성격은 국제 제국주의 체제에서 각 나라의 위치의 상대적 변화와 무관하게, 그것이 해결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기본적인 모순들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된다.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과 과제들은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각 자본주의 나라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기본적인 모순의 첨예화로부터 발생한다.

공산당들의 많은 노작들에서, 노동자 권력이라는 목표를 향한 접근은 세력들의 상호관계라는 기준에 기초해 있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의 객관적인 규정―그것은 어느 계급이 사회적 발전 즉, 사회적 해방을 향한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에 기초해 있지 않았다.

레닌은 “잘못된 깃발아래”라는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독점자본주의의 시대를 요약했다: “막 시작된 세 번째의 시대는 부르주아지를 봉건지주들이 최초의 시대 동안에 스스로를 발견했던 것과 같은 “위치”에 놓는다. (레닌은 1789년의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으로 인한 부르주아지의 혁명적 부상의 시대를 언급하고 있었다). 이것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 격변의 시대이며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의 본성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격변의 시대이다.”

그 시대의 성격은, 사회주의로 이행을 위한 물질적 전제조건들의 성숙의 정도와 방식이라는 점에서 나라마다의 변형들과 무관하게, 전 지구적 차원을 갖는다. 자본주의적 착취를 겪는 임금노동의, 노동계급의 집중과 팽창은 자본주의의 성숙의 주요한 지시기이다.

 

 

쏘련에서 사회주의의 건설

 

10월 혁명은 우월한 사회조직을 전면화 시켰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자신에 선행했고 또 공통의 특징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갖고 있었던 모든 체제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쏘련에서는 누구도 어떤 개인을 고용할 수 없었다. 소외된 노동의 고용의 폐지는 10월 혁명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결과이며 노동자의 삶을 위해 성취된 모든 다양한 것들의 자궁이었다. 사회화된 생산수단을 사용하기 위한 사회적 생산관계로서 중앙의 계획을 통해, 중요한 사회적 성취들이 수십 년간 수행되었다.

쏘련에서 노동할 권리가, 사회적 현상으로서 실업의 폐지에 의해 최초로 실천적으로 보호되었다. 여성에 대한 다면적인 경제적,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사회적 차별의 폐지를 위한 토대들이 구축되었고 이 분야에서 거대한 후진성을 보이던 지역에서조차 그러했다. 과학과 무상교육 그리고 무상의 높은 질의 의료가 모든 수준에서 빠르게 발전되었고 문화와 스포츠에 기여하는 인민의 보편적인 접근과 능력이 확보되었다.

또한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사회의 여러 측면의 관리에 효과적으로 참가하는 것을 보장하는 기관들이 창출되었고 그리하여 대중들에게서 정치적 및 사회적 삶의 한계를 제거하였다. 처음으로 노동자와 청년들이 선출하고 선출되는 권리가 실제화되었는데 자본주의에서 이들 권리의 순전히 형식적인 내용과 비교해 볼 때 그러하다. 이러한 성취들은 참조점을 구성하고 다른 요인들과 더불어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노동-인민의 운동에 의한 이익의 획득에 기여했다. 공산주의적 생산관계가 심화될수록 사회적 관계들 자체는 더욱 더 혁명화 되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 실천적으로 입증되었다.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집단적인 사회적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성취들의 중요성은 우리가 그것들이 성취되었던 조건들을 고려한다면 더욱 증가될 것이다. 혁명 전의 러시아를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같은 자본주의 열강들과 분리시키는 거리는 매우 컸는데 왜냐하면 이들 국가들은 생산력의 발전에서 그리고 노동생산성의 수준에서 매우 우월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열강들은 자기 자신의 인민과 다른 민족들에 대한 착취에 자신들의 발전의 근거를 두었다(고용주의 협박, 식민지체제, 토착민에 대한 폭력, 어린이 노동에 대한 착취). 이것과 비교해 볼 때, 젊은 쏘비에뜨 권력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창출하려고 했는데, 계급투쟁의 첨예화라는 조건에서 즉, 해외로부터 노동자 권력을 타도하려는 적극적인 시도와 연계된 그 나라 내부의 부르주아의 반동이라는 조건에서였다. 쏘련의 성취는 생산에 대한 적극적인 침해, 외국의 무장간섭의 항상적인 위협, 볼쉐비끼들과 다른 지도적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암살이라는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징적인 시기는 다음과 같다: 14개 국가―E. 베니젤로스가 수상으로 있던 기간에 그리스 또한 참가했다―가 1919년에 혁명의 진압을 위해 우끄라이나를 침략했던 것. 1929-1934년간의 1차 5개년계획(이것은 산업화와 농업생산의 집단화를 포함했다) 기간에 소위 “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사회주의의 공세”에 대한 러시아 내부의 부르주아 계급의 반응이었던 반혁명적 잔학행위 그리고 후에는 제2차 제국주의 세계전쟁 전의 시기와 전쟁기간 동안에 자본주의 국가들의 입장은―각 국가의 특수한 열망들과 더불어― 또한 쏘련의 타도라는 공통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추가적인 장애를 가져왔는데, 다른 어떤 나라도 이런 대규모의 파괴를 경험하지 않았고 사회주의-자본주의 간의 지구적 경쟁에서 쏘련의 주요 적이었던 미국이 자신의 영토에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우리가 위의 성취들을 접근할 때, 우리는 쏘비에뜨 사회가 성숙되고 충분히 형성되고 “번성하는”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러나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는 공산주의 사회, 공산주의적 구성 하의 사회였다.

공산주의 사회의 탄생과 발전은 상당한 정도로 자본주의적 과거로부터의 잔재를 수반할 뿐만 아니라 지구적 수준에서 자본주의의 지배의 결과를 수반한다. 이러한 결과들―그것은 쏘련의 사회적 생활의 모든 부문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은 새로운 사회 내에 있는 낡은 사회의 잔재였고 그것과 아직 근본적으로 대결하지 않았고 또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충분히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변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의 그러한 잔재였다.

쏘련의 역사에 대한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 비판은 쏘련이 미성숙한 수준의 공산주의 사회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숨긴다. 이러한 비판은 혁명적 노동자의 활동을 비방하고 좌절시키기 위해 이상적인 공산주의 사회의 견지로부터 약점과 실수들을 지적한다. 동시에 다면적인 부르주아 선전은 범죄들을 만들어내는데 노동자의 권력이 그것을 침식하려는 외부의 시도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권리에 갖다 붙이는 것이며 반면에 동시에 공산주의를 파시즘과 동일시하는 것에 의해 역사를 위조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선전은, 노동자의 권력 그리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적 소유, 공장들, 국내의 에너지 자원들, 광물적 부, 토지, 기반시설 등에 의해 보장되는 견고한 토대에 기초한,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중앙 계획의 우월성을 감출 수 없다. 쏘련의 역사는 노동자들이 생산수단과 사회적 부의 주인이 되었을 때, 그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했을 때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입증한다. 후자의 민주주의 형태는 부의 실제적 생산자들을 운전석에 앉히는데 그것은 노동계급의 종속을 위한 자본주의적 지배의 무기인 위선적인 부르주아 의회제 민주주의가 아니다. 실업의 일소, 작업장의 빠르고 효과적인 전문화, 경제에 관철되는 적절한 분배, 우주공간의 탐험에서의 성취, 제2차 대전 전야에 평화시 산업의 전쟁 산업으로의 전환과 같은 노동자 권력의 중앙의 과학적인 계획의 결과들은 유례가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짜르 러시아에서 지배적이었던 많은 지역에서의 전자본주의적 후진성 그리고 자본주의 발전의 심각한 불균형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국내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생산력의 발전에서 노동자 권력이 돌파한 거리는 실로 거대하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반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타도에 부딪혔는가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경로는 직선적 방식으로 위로 상승하는 부드러운 운동이 아니었다.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건설의 긍정적 및 부정적 경험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그것의 주요한 역사적 시기들을 간단하게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라의 생산적 토대에 재난을 가져왔던 외국의 간섭과 계급에 토대를 둔 내전(1917-1922) 그리고 신경제정책(1922-1929)―이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잠정적인 후퇴였다―이후에 1929년의 최초의 5개년 계획의 작성은 사회주의 세력의 공세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 시기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에, 쏘련에서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발전을 위한 투쟁, 임금노동의 폐지와 중앙의 계획에 기초한 생산의 사회주의화된 부문의 지배는 전반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이 투쟁은, 제국주의의 포위와 전쟁의 위협이라는 조건―커다란 후진성의 유산과 결합되어 있는―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건설을 위한 과정의 가속화를 요구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었다.

그 기간 동안에 노동자의 참가의 기관들이 발전되었는데 그것의 핵심은 작업장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관계는 그 뒤 침해되었는데 존재하는 객관적인 어려움들 그리고 또한 주체적인 압력에 직면하여 후퇴하였다. 임박하는 전쟁에 대비하여 모든 인민의 적극적 공헌을 위한 준비라는 압력 하에서, 1936년의 쏘비에뜨 헌법은 거주지에 따른 보통의 비밀선거권을 일반화하였다. 노동자 권력의 조직의 핵심으로서 각 생산단위의 회의체(assemblies)는 강등되었다. 실천적으로 상층의 국가 기관으로부터 대의원을 소환하는 것의 어려움이 증가되었다.

제2차 대전 후에 재건과 공산주의 관계의 가일층의 발전은 혁명전략의 적절한 조응을 요구하는 새로운 도전과 요구들을 제기했다. 전쟁 후 최초의 기간에 쏘련공산당 내에서 지배적인 방향은 반시장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이론적 약점과 결함들에도 불구하고―공산주의적 관계들의 발전, 불평등과 농업생산에서 상품의 계획된 근절(콜호즈 협동조합을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킨다는 목표와 결합된)이라는 목표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초의 전후 경제계획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은 지체를 경험하였다. 또한 생산부문간의 비율과의 관련을 포함하는 중앙계획에서의 어떤 문제들이 불거졌다.

공산주의 전략을 사회적 생산에서 새로운 발전 수준에 의해 제기되는 도전들에 적응시킬 수 있는 집단적으로 성취되는 이론적 역동성이 없었다. 떠오른 문제들은 올바르게 해석되지 않았고 공산주의적 관계들의 강화와 확대의 방향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중앙계획의 본성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약점들로 해석되었고 낡은 잔재로 인한 모순들의 결과로서, 비과학적으로 정교화된 계획의 오류의 결과로서 해석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생산관계의 고무와 확장을 향한 해결책을 추구하는 대신에, 과거 즉, 도구의 이용과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주목하는 것이 추구되었다. 그 해결책은 시장의 팽창에서, “시장 사회주의”에서 추구되었다.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1956년)는 전환점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대회에서 소위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역자)라는 구실 하에서 공산주의 운동 전략에 대하여, 국제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경제에 대하여 일련의 기회주의적 입장들이 채택되었다. 전반적으로 중앙의 계획 기능이 약화되었다. 콜호즈를 소포즈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우는 대신에, 모든 협동조합적인 콜호즈 생산을 국가 통제로 이행시키는 것을 시작하는 대신에, 이전에 거부된 적이 있었던, 트랙터와 다른 기계들을 콜호즈 소유로 하는 것이 1958년에 실시되었다.

 

몇 년 후에 소위 “꼬시긴 개혁”(1965년)을 시작으로 각 개별적 생산단위의 “기업 이윤”이라는 부르주아적 범주가 채택되었고 관리자와 노동자의 임금은 그와 연동되었다. 생산량에 기초한 사회주의적 생산단위들의 생산성에 대한 평가는 생산물에 대한 가치 평가로 대체되었다. 각 사회주의 단위의 축적의 과정은 중앙계획과 분리되었는데, 생산수단과 생산 원료의 사회적 성격의 약화를 초래했다. 동시에 1975년 즈음에 모든 국영농장들, 소포즈들은 완전한 자기관리 하에 놓였다. 이러한 모든 조치들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던 사적인 횡령과 사적인 소유를 위한 조건의 창출을 초래했다.

각 기업에서 노동자와 관리자 간에, 뿐만 아니라 상이한 기업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노동수입의 차이가 증가하였다. 사회적 이익을 희생하는 개인적 이익이 강화되었고 공산주의적 의식, 사회적 소유를 방어하고 증진시키는 입장이 침해되었다.

소위 “그림자 자본”이 기업 이윤뿐만 아니라 “암”시장, 사회적 생산물을 찬탈하는 범죄적 행동의 증가의 결과로 출현했는데 이것은 생산에서 자본으로서의 합법적 기능을 추구했다; 실제로는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소외된 노동의 고용, 자본주의의 복고였다. 그것의(그림자 자본)의 소유자들은 반혁명의 추진력이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노동자의 국가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인식 또한 수정되었다. 쏘련공산당 22차 대회(1961년)는 쏘련이라는 국가를 “전인민” 국가로 그리고 쏘련 공산당을 “전인민 당”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입장들은 당의 혁명적 성격과 사회적 구성을 빠르게 무디게―그리고 결과적으로 변전하게―했다. 쏘련 공산당의 공공연한 반혁명세력으로의 기회주의적 타락이라는 변화는 1987년에 명백하게 되었는데 악명높은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찌” 정책, 소유관계의 다양성이라는 구실 하에 자본주의적 관계들을 제도적으로 수립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사실은 반혁명 시기의 공식적인 시작을 특징짓는다.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가 소유의 사회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협소한 개인적 및 그룹별 이익을 강화하는 선택을 채택함에 따라, 사회적 소유로부터 소외의 감정이 생겨났고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좀먹게 되었다. 실천이 선언으로부터 점차 멀어짐에 따라 무관심과 개인주의의 길이 활짝 열렸다. 이러한 과정은 반혁명적 격변의 시기 동안에 나타난 대부분의 인민의 수동성을 설명해주며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쏘련공산당의 지배써클이 도달한 타락을 보여준다.

 

 

그리스 공산당의 현대 혁명전략의 계획

 

쏘련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의 전복 그리고 1991년의 그리스 공산당의 내적인 당적 위기의 발발―자신의 대열에서 활동하던 기회주의 그룹의 제거를 가져온―에 이어서 그리스 공산당은 자신의 혁명적 재조직화를 시작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반혁명의 결과에 기인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그리스 공산당은 이 모든 기간에, 현대의 발전을 연구하고 그리스와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결론들을 이끌어 내고 동시에 노동계급과 인민 층과의 전투적 연계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노력을 다했다. 이 과정의 주요한 결론들은, 1990년대에 그것을 연구하려는 최초의 시도 이후로, 쏘련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2009년의 18차 당 대회)와 2013년의 19차 당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에 포함되었다. 물론 적절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리스 공산당은 일상의 경제적 및 정치적 투쟁을 자본의 권력을 타도하는 주요한 혁명적인 정치적 과제로부터 분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혁명적 상황을 초래하는 요인들은 예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공황의 심화, 심지어 무력 충돌로 끝나는 제국주의 중심들 간의 모순의 격화는 그리스에서 이러한 상황을 창출할 수 있다. 방어적 전쟁이든지 침략적 전쟁이든지, 그리스가 제국주의 군사적 행동에 얽혀들 경우, 노동계급과 인민의 운동은 잘못된 깃발 아래 있어서는 안된다. 당은 전쟁 혹은 인민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평화”를 부과하는 부르주아지의 총체적 패배를 가져오기 위하여 노동자-인민의 투쟁의 독립적인 조직화를 이끌 것이다.

 

그리스 공산당이 현대의 혁명전략을 입안했다는 사실은 경제의 모든 부문, 모든 대규모 작업장,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저항과 반격의 지도적 위치를 조직화하는 능력을 증가시킨다.

모든 수준에서 그리스 공산당의 강화는―그것은 최근의 20차 당 대회에서 중요한 쟁점이었다―자신의 혁명적 정책의 강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많은 노동자들은 좋은 취지로, 사회주의 건설이 현대의 그리스와 같은 잠재력을 가진 나라에서 시작될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이에 대해 그리스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인민들의 요구는 생산의 잠재력과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부에 기초하여 충족될 수 있다.

-국내의 생산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소유와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높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오직 노동자의 권력만이 인민의 이익을 위하여, 오늘날 첨예화되는 제국주의 동맹 간의 모순들을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광활한 지역에서 세력들의 상호관계에 대해 정태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더 넓은 지역에서 혁명적 상황에서는 중대하게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리스 공산당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슬로건으로 표현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인민의 국제적 연대에 따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재조직화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이미 “국제 공산주의 리뷰”와 유럽의 공산주의자 이니셔티브를 통하여, 맑스-레닌주의 원칙에 기초하는 명확한 지주의 창출을 위한 노력을 향한 약간의 작은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의 현대의 전략의 통합적 부분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강령적 인식이다. 사회주의 건설은 노동계급에 의한 권력의 혁명적 장악으로 시작된다. 노동자의 국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른 형태와 수단으로 사회주의에서도 계속되는 계급투쟁에서 노동계급의 도구이다. 그것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의 계획적인 발전을 위해 활용되는데, 그러한 관계들은 반혁명적 노력에 대한 진압을 전제하면서도 노동계급의 공산주의적 의식의 발전을 전제한다. 정치적 지배의 기제로서 노동자의 국가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공산주의적으로 변혁될 때까지, 공산주의적 의식이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에서 형성될 때까지, 그리고 가장 강력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혁명의 승리 때까지 필요하다.

노동자의 권력의 질적으로 새로운 요소는 작업장(생산단위, 행정 단위, 사회적 서비스, 농업협동조합)을 그 조직화의 핵심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민주주의가 각 생산단위의 노동자의 회의체(assembly)에 기초한다. 뿐만 아니라 선출된 대의원을 통제하고 철회할 수 있는 능력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자본의 독재의, 오늘날의 형식적인 선거권과 비교하여 실질적인 선거권 또한 그러한 회의체에 기초한다.

이러한 권력의 우선적인 과제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형성인데, 그것의 지배는 자본주의적 관계, 자본과 임노동의 관계의 총체적인 폐지를 기본적으로 전제한다. 그리스 공산당의 강령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집중화된 생산수단은 사회화된다. 그러나 최초에는 상품-화폐 관계의 존재를 위한 기초가 되는 개인적 및 그룹별 소유의 형태가 잔존한다. 생산협동조합의 형태들이 형성되는데 그것은 생산력의 수준이 여전히 생산수단의 사회주의화를 허용하지 않는 부분에서이다. 그룹별 소유의 형태는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사이의 이행기적 형태이며 공산주의적 관계의 미성숙한 형태가 아니다.1)

중앙집중화된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에 기초하여, 경제에 대한 중앙의 계획은 모든 생산자를 연결시키는 공산주의적 관계로서 발전한다. 중앙의 계획은 또한 농업의 협동적 생산을 어느 지점까지 통합한다. 공산주의적 생산관계의 확장과 심화와 더불어, 노동계급은 점차적으로 생산과정의 상이한 부분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동시에 필요에 기초하여(교육, 건강, 난방 등) 생산물의 한 부분을 분배하면서 사회주의적 생산은 그 생산물의 나머지 부분을, 복잡노동과 단순노동, 육체(실천적)노동 혹은 정신적 노동의 분리 없이 각 개인이 전체로서 사회적 노동에서 개인적 노동에 따라 공헌하는 것에 기초하여 분배한다.
공산당은 혁명적 노동자의 권력의 지도적 핵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에 기초하여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은 길을 보여준다.

 

오늘날, 반혁명을 민족들 간의 우호와 평화를 위한 길을 닦는 사회주의의 재생의 과정으로 특징짓는 이론들은 완전히 파산했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의 “인간화”를 위한 모든 이론과 정책들은 또한 붕괴하였다. 동시에,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국제적 영역의 독점그룹들 간의 모순들은 점점 더 전쟁의 발화점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현존하는 위험을 만들고 있다.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소유의 사회적 암은 “자신의 피 묻은 이빨을 보여주고 있다”

1989-1991년의 반혁명적 전복을 축복하는 사람들은 모두 완전히 폭로되었다. 그들은 노동운동의 침식에, 지배적인 숙명론과 타협의 태도에 공헌했다. 반대로 그리스 공산당은 붉은 기가 크렘믈린 궁에서 내려지던 날이라는 결정적 순간에 “리조스타스티스”를 통하여, “동지들, 깃발을 높이 올려라”라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요구하는 연설을 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 자부를 느낀다.  

오늘날 그리스 공산당은 “전천후” 혁명적 전위로서 행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특성을 얻기 위해 거친 투쟁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의 조건에서, 계급적-착취적 사회의 명확한 폐지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한 투쟁은 10월 혁명과 그것의 목표를 기리는 실제적인 길이다.

반혁명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마야꼬프스끼의 다음과 같은 말은 계속해서 그 길을 보여준다:

 

 

“혁명이여 영원하라, 즐겁고 빠르게

이것은 역사가 알고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유일하게 위대한 전쟁이다.”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2017년 5월 23일 노사과연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2017년 5월 23일  노사


 

1) 역주) 그룹별(group) 소유와 집단적(collective) 소유가 그리스 공산당의 이 문헌에서는 구분되지 않고 쓰이고 있다. 만약 쏘련에서 집단농장이 전형적인 집단적(collective) 소유가 공산주의적 관계의 미성숙한 형태 즉,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집단적 소유는 자본주의적 소유가 아니라는 점에서 착취관계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집단적 소유 또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 소유는 국가적 소유, 전인민소유로 표현되는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닌 협소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적 관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쓰딸린 시대의 쏘련에서처럼 국가가 협동 농장 등의 집단적 소유와 적절한 관계(MTS, 각종의 지지와 원조 등)를 맺는 것을 통해 그것을 서서히 전인민소유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집단적 소유와 구분되어 그룹별(group) 소유가 성립할 수 있다. 이것은 쏘련에서의 집단농장보다 더욱 협소한 그룹의 소유관계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도시에서 일정 구역의 소비조합, 영세업자들의 생산조합 등이 그러한 사례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유에 대하여 사회주의 국가는 그것들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들을 지원하고 육성하여 보다 높은 수준의 집단적 소유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즉, 그 내부에 착취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협소한 그룹별 소유라고 해서 부정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쏘련이 붕괴하던 시점에 그룹별 혹은 집단적 소유는 특히 도시에서 자본주의적 소유로 이행하는 형태 혹은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감추는 도구가 되기도 했는데 이는 그룹별 혹은 집단적 소유가 갖는 한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사회주의 국가는 생산력의 발전과 사회주의 사회의 발전에 조응하여 협소한 그룹별 혹은 집단적 소유를 점차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룹별 혹은 집단적 소유가 그 내부에 착취관계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공산주의적 관계의 미성숙한 형태, 즉, 사회주의적 관계가 아니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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