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발생과 쏘련에서의 반혁명

 

 

권정기 │ 소장

 

 

1. 시기구분

 

쏘련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태어나, 1991년 사라졌다. 74년이라는 전체 기간 동안 사회주의 사회였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제1단계인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 단계에서는 생산수단(공장과 토지)이 국유화되어 계급이 사라진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존재했던 계급사회(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의 유산ㆍ잔재는 여전히 토대1)ㆍ상부구조(의식, 도덕)에 남아 있다. 따라서 완전한 공동체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지향ㆍ세력과 계급사회의 구습을 유지하고 계급사회를 부활시키려는 세력과의 계급투쟁이 진행된다. 그래서 지배 계급(노동자 계급)이 피지배 계급(패배한 자본가 계급)을 억압하는 기구인 국가 또한 존재하며, 그 국가의 성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이다.

‘흐루쇼프 수정주의 발생과 쏘련에서의 반혁명2)’이라는 우리의 주제를 다루기 위하여, 쏘련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사회주의,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로 표현한다.

 

 

1) 맑스-레닌주의 시대와 수정주의 시대

 

당과 국가를 지도하는 사상이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두 시기로 크게 구분한다.

 

① 맑스-레닌주의 시대:

1917년-1956년. 레닌, 쓰딸린이 지도하던 시기. 프롤레타리아 독재시기.

쓰딸린은 1953년 3월에 사망했다. 그러나 쓰딸린의 후계인 말렌꼬프는 기존의 노선을 이어갔다. 때문에 같은 시기로 보았다. 흐루쇼프가 수정주의를 선포하는, 1956년 제20차 당 대회를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었다.

 

② 수정주의 시대:

1956년-1991년.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고르바쵸프가 집권하던 시기. 1991년 반혁명이 발생.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부정되고, ‘전 인민의 국가’, ‘전 인민의 당’으로 변질되어, 1991년 반혁명에 이르는 시기. 그 결과로 부르주아 독재국가(현재의 러시아, 우끄라이나 등등 자본주의 국가들)가 나타난다. 따라서 ‘전 인민의 국가’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세력과 부르주아 독재를 지향하는 세력이 대치하는 시기이다. 또한 부르주아 독재 경향ㆍ세력이 주도하면서 점차 자신을 강화하여 가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1917년-1956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지향하는 세력과 부르주아 독재를 지향하는 세력이 대치하는 시기이다. 또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경향ㆍ세력이 주도 혹은 압도하던 시기였다.

 

2) 맑스-레닌주의 시대

 

맑스-레닌주의 시대는 다시 세 부분3)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 정치권력의 수립기:

1917-1921. 10월 혁명과 내전시기.

10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타도된다. 1918-21년 동안 내전이 진행되었다. 1918년 제국주의 국가들이 혁명을 전복시키기 위해, 침략전쟁을 개시하였다. 타도된 구지배계급(짜르군대, 지주, 자본가 계급)들이, 여기에 고무되어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정치적 수준에서, 국가권력을 소유하기 위해 벌이는 계급투쟁이, 이 시기의 주요한 측면이다. 그 결과  정치적 상부구조, 즉 쏘비에뜨 국가권력이 자리를 잡았다.

 

②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 구축기:

1921-1936년. 신경제정책(네프, 1921-294)), 제1차ㆍ제2차 5개년 경제계획을 거치며, 1936년 사회주의 헌법(“쓰딸린 헌법”)을 제정하는 시기.

정치적 상부구조(국가권력)를 지렛대로 하여,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는 시기이다. 경제적ㆍ물질적 수준에서 여전히 남아 있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자본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특징으로 한다.

당시의 경제적 상태를 보자. 도시의 공업에서 대자본은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중소 산업자본가, 상인은 남아 있었다. 농촌에서는 토지가 국유화되었고, 개인들에게 분배되었다. 토지는 매매나 저당은 금지되었지만, 농민들은 생산에 사용할 권리를 얻었다. 당시 인구의 80%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광범한 소농이 창출되었다. 계급분화가 진행되어 농촌 자본가인 부농(꿀락), 소부르주아인 중소농, 그리고 빈농이 출현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건설하는 사업은 도시에서는 중소 산업자본가, 상인과의 투쟁을 의미했다. 농촌에서는 부농(꿀락)과의 투쟁을 의미했다.

신경제정책은 자본주의 세력들에게 양보하고, 이들의 활동을 제한된 범위에서 허용하는 조치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경제를 복구하기 위하여, 이들의 활력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925년, 파괴되었던 기존 공업시설을 복구하여 재가동하는 데 성공하였고, 공업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수준에 도달하였다. 이제는 경제를 복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사회주의 공업의 생산을 확장하여, 사회주의적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는 과제가 제기되었다.

당 내에서 경제건설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서, 노선투쟁이 벌어졌다. 뜨로츠끼파는 처음에는 영구혁명론(혹은 세계혁명론)을, 이후에는 농촌을 수탈하는 경제건설 방법을 제기하였다. 영구혁명론에서, 뜨로츠끼는, 후진 농업국인 러시아는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인 국가적 지원이 없이는, 러시아 노동계급은 정권을 유지하며 자기의 일시적 지배를 장구한 사회주의적 독재로 전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강조는 쓰딸린)”5)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세계혁명, 즉 서유럽 국가의 혁명 없이 러시아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이후에 경제건설 방법으로 제기한 ‘농민수탈론’(일명 ‘사회주의 본원적 축적론’)은, 전체 농민에게 높은 과세를 거두어들이는 방법 등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공업을 건설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쏘련은 노농동맹이 국가권력의 지주였다. 따라서 농민을 수탈한다면, 국가권력이 유지될 수 없었다. 결국 초좌익적이고 급진적 주장을 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다. 이를 좌익 기회주의6)라고 한다.

부하린은 부농들이 집단농장(협동농장)을 만들어, 사회주의 경제제도로 발전하여 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따라서 부농에게 “부자가 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쏘련은 사회주의적이고 공업적인 도시가, 부르주아적(부농)이고 소부르주아적(중소농)인 광대한 농촌에 포위되어 있었다. 중소농은 분해되어 부농과 빈농으로 분해되면서, 부농을 양산하고 있었다. 농업 자본가인 부농은, 농촌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하린은 부농의 발전을 제한하지 말고,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 이는 사회주의적인 도시를 자본주의적인 농촌이 포위하게 만들어, 결국 사회주의를 몰락시킬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부르주아지에게 굴복하여, 결과적ㆍ객관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 적대하는 경우, 이를 우익 기회주의라 하고, 수정주의라고도 부른다.

쓰딸린은 좌우익 기회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했다. “일국 사회주의론”으로 뜨로츠끼를 격파했다. 노동자와 빈농ㆍ중농과 동맹(노농동맹)하여 부농을 격파한다는 노선을 제기했다.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 정책”이 채택ㆍ추진되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은 1929년 시작되어, 목표가 1년 앞당겨 완료되어, 1932년 완료된다. 제2차 5개년계획은 1933년 시작되어 1937년 완료된다. 농업 집산화는 1929년 시작되어 1936년이면 거의 완료된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거대한 도약이었다.

1936년 사회주의 헌법이 제정된다. 1936년 쓰딸린은 “쏘비에뜨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헌법초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1936년에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떠한가?

… 인민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완전히 청산되는 시기이다. …

이제 와서는 인민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사회주의 체계의 완전한 승리가 사실로 되고 있다. …

우리의 쏘비에뜨 사회는 이미 기본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였으며 사회주의 제도를 창설하였다. 즉 맑스주의자들이, 다른 말로 공산주의 첫 단계 혹은 낮은 단계라고 부르는 그것을 실현하였다.7)

 

“사회주의를 실현”하였다는 것은, 20여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고 얻은 눈물겨운 승리였다. 제국주의가 촉발시킨 내전 때문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1921년-1922년에 900만 명이 사망했다. 1932-33년에는, 우끄라이나에서 100-200만 명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농업 집산화에 저항하는 부농들의 파괴활동과 가뭄이 겹쳐서 흉작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쟁취한 사회주의란 계급투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쓰딸린은 이러한 거대한 승리는 “자기 힘에 대한 확신을 굳게 하며, 공산주의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에로 동원한다8)”라는 말로 자신의 글을 마친다. (이하 강조는 별도의 언급이 없는 경우 모두 인용자)

 

③ 건설된 사회주의의 성과 방어기:

1936-1956년. 맑스-레닌주의와, 관료주의(발생하고 있는 수정주의)와의 투쟁시기. 제2차 세계대전(1941-1945).

“공산주의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있었다.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외부의 적, 제국주의자들의 파괴활동이 193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은, 쏘련 내부와 외부에 있었던 구지배계급(짜르시대 장교출신의 군부 내의 반혁명세력, 자본가, 지주, 부농,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 청산된 기회주의세력(뜨로츠끼파, 부하린파)들을 포섭하였다. 이들 반혁명세력들은 군부 쿠데타 음모, 간첩활동, 산업파괴활동을 벌였다. 1941년, 독일은, 쏘련이 쟁취한 성과를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참혹한 파괴가 있었다. 그렇지만 1945년 전쟁을 승리로 끝내고, 1948-1949년이 되면 전후복구도 기적적으로 완료된다. 외부의 적으로부터는 승리했다. 그리고 이들의 하수인이었던 국내에 잔존하던 반혁명세력들 또한 제거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이 부상하고 있었다. 계급사회의 물적 토대는 제거되었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계급사회의 잔재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공산주의의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을 위하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부르주아 의식, 계급사회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투쟁이 새로운 중요성을 가지고 떠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주의의 성격 자체가 가지는 약점으로 인해, 다양한 부르주아적 경향이 발생했다. 또한 거대한 성공은 거대한 부와 절대적 권력을 낳았다. 그리고 그 모두를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부와 권력을 사유화하려는 세력이 고급관료들에서, 관료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관료주의는 국가의 본질에서 유래한다. 국가란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계급의 폭력ㆍ억압기구이다. 계급사회에서 국가 관료는 인민을 억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관료주의로 표현된다. 사회주의 국가 또한 폭력ㆍ억압기구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에 대해 그렇다. 그런데 만일 어떤 관료가, 주어진 권력을 가지고, 인민을 억압한다고 하자. 그는 관료주의자라고 불릴 것이다. 이때 관료주의의 계급적 성격은 무엇인가. 그 역할은, 부르주아 국가의 관료와 동일하다. 그래서 관료주의의 계급적 성격은 부르주아적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이 부르주아지의 권력으로 변질된 것이다. 관료들이 프롤레타리아 공동의 권력을 사유화하여,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로 변질시킨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관료주의란, 프롤레타리아 국가 기구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는 부르주가 국가의 싹이다.

1930년대 성장한 관료(당관료, 국가관료, 기업의 경영진9))들은, 1956년부터 수정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주체들이다. 그래서 수정주의는 애초에 관료주의라는 모습으로 발생했다. 수정주의 시대를 연 흐루쇼프도 1930년대 부상한다. 1918년 당원에 가입하고, 1931년 모스끄바 시당으로 전근되었다. 1934년, 모스끄바 지하철 건설을 지휘한 공로로, 레닌훈장을 받았다. 1935년 모스끄바 시당 제1서기가 되었다. 이 자리는 권력핵심으로 통하는 요직이었다. 1938년에는 우끄라이나 공화국 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10)

맑스-레닌주의 지도부와 관료주의자들과의 투쟁은 1937-1938년에 본격화된다. 그러나 임박한 전쟁 등으로 중단되었고, 전쟁 이후 다시 진행된다. 결과는 관료주의자들의 승리였다. 이들은 1956년부터 수정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사회주의의 성과를 점점 더 사유화한다. 결국 사회주의 성과의 모든 것을 사유화하는 것, 즉 자본주의를 부활시키게 된다.

 

 

2. 관료주의의 전개

 

1) 관료주의의 발생(1920년대)

 

10월 혁명 당시 러시아 인구의 80%를 차지했던 농민들의 상태에 대해, 루도 마르텐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시아 농민의 특징

농민 대중의 특징인 극도의 빈곤과 무지가 볼쉐비끼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적들’ 중의 하나였다. …

밀 요셉 딜론(Émile Joseph Dillon) 박사는 1877년부터 1914년까지 러시아에서 살았다. 여러 러시아 대학의 교수였던 그는 또한 러시아 신문의 수석 편집자였다. … 그는 먼저 대다수의 농민들이 물질적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음을 서술한다.

‘러시아 농민들은 … 여섯시나 겨울에는 심지어 다섯 시에 잠자리에 드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등불을 밝히기에 충분한 기름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고기, 달걀, 버터, 우유, 종종 양배추도 없고, 검은 빵과 감자가 주식이었다. 생활? 그들은 검은 빵과 감자도 부족해서 굶어 죽는다.’

그런 다음 딜론은 농민들을 속박하던 문화적, 정치적 후진성에 대해 적었다.

‘농민들은 … 중세적 관습을 가지고 있고, 난폭하고, 그리고 시대에 무척 뒤떨어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농민들은 [러시아 군인의 장화에 들어가 다리를 물어 군인들을 죽이는 세균전을 하여], 일본이 만주 전투에서 이겼다고 믿었다. 지방에서 전염병이 번졌을 때, 그들은 ‘우물에 독을 풀어 병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종종 의사들을 죽였다. 그들은 여전히 기뻐하며 마녀들을 화형시켰고, 귀신을 쫓는다고 시체를 파냈으며, 부정한 부녀자들을 완전히 벗겨 수레에 묶고 마을을 돌면서 채찍질 했다… 그리고 그러한 대중들을 질서 있게 유지한 유일한 구속력이 갑자기 사라지자, 공동체에 끼친 그 결과는 대재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여러 세대 동안 인민과 무정부주의 사이에는 신과 짜르에 대한 원시적인 사고에 의해 형성된 허약한 (농촌이 무정부주의적 혼돈상태로 되는 것을 막아주는 ― 역자) 경계벽이 있었다; 그리고 만주 전투 이래로 이러한 것들은 급속하게 사라져 버렸다.’11)

 

부르주아 혁명과 자본주의의 발달은, 개인들을 신분적 속박과 인격적 예속12)에서 해방시키고, 시민적(부르주아적ㆍ개인적) 권리의식 등을 발전시킨다. 여전히 후진적 농업 국가였던 혁명 러시아는 이러한 것이 부족했다. 그래서 “인구의 대다수인 농민들이 중세적 관습을 가지고 있고”, 또 대다수가 문맹인 나라에서, 관료주의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또한 짜르정부는 유독 관료주의가 심했고, 이러한 역사적 유산도 단기간에 극복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관료주의적 태도, 관료의 편의주의적 요구에 대한 개인의 종속, 상투성, 그리고 강박관념은 (10월 혁명 이전: 인용자) 러시아 역사에서 항상적인 주제였고, 러시아의 보통의 인민들에게 항상적인 시련이었다. 쏘비에뜨 시기에도 이 ‘관료주의’는, 그것을 제거하려는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John N. Westwood(존 N. 웨스트우드), Endurance and Endeavour―Russian History 1812-1986(인내와 노력―러시아사 1812-1986), 제3판, pp. 48-49.>13)

 

쏘비에뜨 시기에 들어서는 1919년 3월 18일-19일의 러시아공산당(볼)의 제8차 대회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된다. 내전이 관료주의를 발생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1919년 3월 18일-19일의 러시아공산당(볼)의 제8차 대회는,

… 쏘련 내에서의 관료주의의 부분적 부활 (레닌, ≪전집≫ 제32권)

에 관해 솔직하게 언급하는 새로운 강령을 채택했기 때문이다.14)

 

1920년대 초에, “노동조합과 관료주의”에 대해 뜨로츠끼와 논쟁하던 당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는 데는 수 십 년이 걸릴 것이다 (레닌,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보고”, ≪레닌전집≫ 제32권, pp. 56-57., 1921년 1월 23일.)15)

 

(요술지팡이를 흔들어 간단히 관료주의를 종식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용자) … 선동과 기만을 농(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료주의의 해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 백 가지의 조치들이 필요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문화적으로 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노농감독부(the Workers’ and Peasants’ Inspection)의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레닌전집≫, 제32권, p. 68.)16)

 

레닌의 말처럼 관료주의는 종식시킬 수 없었다. 1928년, 쓰딸린은 관료주의와 투쟁할 것에 대해 말한다.

 

‘관료주의는 우리의 전진을 막는 최악의 적의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조직에 존재한다. … 문제는 그것이 구시대의 관료주의자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관료들, 쏘비에뜨 정부에 동조한 관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관료들의 문제이다. 공산주의 관료는 가장 위험한 유형의 관료들이다. 이유는? 왜냐하면 그는 당원의 직함으로 자신의 관료주의를 감추기 때문이다.’

‘우리 당 조직의 일부에서의 부패와 도덕적 타락이라는 이러한 부끄러운 사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당의 독점이 불합리한 정도로까지 진행되었고, 일반인들의 목소리가 억압당하고, 당 내부의 민주주의가 폐지되고, 관료주의가 만연되었다는 사실. … 나는 당원 대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통제를 조직하고 또한 당 내부에 민주주의를 불어 넣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해악과 싸우는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패 분자들에 맞서서 당원 대중의 격분을 깨워 일으키며, 그들에게 이러한 분자들을 통째로 쫓아낼 기회를 주는 것에 대해, 어떤 반론이 있을 수 있나?’

‘노농감독부, 당 중앙위원회 등에 의한 비판 등등, 상부로부터의 비판들이 있다. 물론, 그것 모두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충분함과는 거리가 있다. 더욱이 그것은 현 시기 결코 주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주요한 것은, 관료주의에 반대하고, 특히 우리의 사업상의 결점을 극복하기 위한, 광범위한 비판의 물결을 전반적으로 일으키는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 우리는 관료주의에 맞선 성공적인 투쟁의 전개와 그것의 근절을 기대할 수 있다.’17)

 

“공산주의 관료는 가장 위험한 유형의 관료들이다. 이유는? 왜냐하면 그는 당원의 직함으로 자신의 관료주의를 감추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이 이후에 수정주의를 추진한다.

그러나 “당원 대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통제를 조직하고 또한 당 내부에 민주주의를 불어 넣”기에는, 당원과 인민들의 정치의식이 여전히 너무 낮았다. 루도 마르텐스는 말한다.

 

1928년에서 1931년 사이에, 140만 명의 신규당원들이 당에 입당했다.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사실상 정치적 문맹자들이었다. 그들은 혁명적인 감성은 가지고 있었으나, 실질적인 공산주의 지식은 없었다. 꿀락들, 이전의 짜르시대 관리들, 여타의 반동분자들이 당에 쉽게 침투했다. 조직화 업무에 어느 정도 능력을 보유했던 모든 이들이 자동적으로 당에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당에 간부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18)

 

당원 대중들의 “관료주의에 맞선 투쟁”이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1930년을 전후한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쓰딸린 지도부는 집산화를 돕기 위해 대공장 출신의 2만 5000명의 숙련된 공업 노동자(당원, 공산주의 청년 동맹원))들을 농촌으로 파견했다. 다음은 이들이 관료주의에 대해 고발한 내용이다.

 

2만 5000명 중의 한 명인 자하로프(Zakharov)는, 농민들에 대한 어떠한 (집산화를 위한: 인용자) 예비 작업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썼다. 그 결과, 농민들은 집산화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 간부들의 불법적 행위와 만행을 하소연했다. 마꼬프스카야(Makovskaya)는 ‘농민들에 대한 간부들의 관료적인 태도’를 비난했으며, 그녀는 관리들이 ‘손에 연발 권총을 쥐고’ 집산화를 이야기했다고 말했다.19)

 

관료주의적으로 집산화가 추진되는 것을 비판한 쓰딸린의 글, “성공으로 인한 현훈증”에서도 관료주의에 대해 말한다.

 

북부 소비지대의 여러 지방에서는 꼴호즈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 작업은 하지 않고, 오히려 빈번히 꼴호즈 운동을 하라고 관료주의적으로 명령이나 하면서, 꼴호즈를 장성시키자고 종이장 위의 결정이나 하고, 종이장 위의 꼴호즈나 조직하는 것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런데 실지는 이러한 꼴호즈가 아직 없고, 있다면 꼴호즈가 “있다”고 자랑하는 결정의 무더기뿐이다.

뚜르께르스딴 지방들에서는, 아직 꼴호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농민들을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관개 용수와 농업제품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는 방법으로, 쏘련의 선진지방들을 “따라 잡고 앞서려고” 하는 시도가 이미 있었던 것이다. …

이러한 왜곡, 꼴호즈 운동에 대한 이러한 관료주의적 명령, 농민들에 대한 이러한 당치 않은 협박이 그래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20)

 

위의 두 글들은 극심한 관료주의가 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반대의 측면도 동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료주의가 대중들에게 잘 먹히지 않고, 따라서 그것이 일정 수준에서 억제되고 있을 것임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첫째, 농민들이 관리들의 관료주의적 명령에 고분고분 따른다면, “‘손에 연발 권총을 쥐고21)’ 집산화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관개 용수와 농업제품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할 필요도 없다. 인민들이 고분고분 따른다면, “꼴호즈 운동을 하라고 관료주의적으로 명령이나 하고”, “꼴호즈를 장성시키자고 종이장 위의 결정”만하면 꼴호즈가 만들어질 것이다. 둘째로 위와 같이 폭력적이거나 거짓말을 하는 관료주의자들은 상부나 하부에서 쉽게 발각되고 공격당한다.

그런데 관료주의적 명령에도 대중이 고분고분 따르고, 종이장 위에서만 결정해도 실제 일이 이루어지고, 따라서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어져서 상부에 발각되지도 않고, 그 결과 노동자 농민들의 피와 땀의 대가로 관료주의자들이 고속으로 출세를 하는, 그러한 시기가 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2) 관료주의의 성장(1930년대)

 

1930년대는 사회주의가 승리한 시대이다. 마리오 소사는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투쟁”에서 ‘1930년대에 관한 진실들’에 대해서, 그 성과를 정리한다.

 

1930년대에 관한 진실들

 

그렇지만 그에 앞서 독자들에게, 쏘련 역사에서 사실상 결정적인 시기였던 1930년대의 쏘련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무엇보다도 1930년대는 제1차 및 제2차 5개년 계획이 실행되고 농업 집산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929년에 2천9백만 루블이었던 국민소득은 1938년에는 1억5백만 루블로 증가했다. 10년간 360%가 증가한 것으로서 이는 산업화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고용노동자 수는 1930년의 1천450만 명에서 1938년에는 2천8백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산업 노동자들의 평균 연봉은 1930년의 991루블에서 1938년에는 3,447루블로 증가하였다. 국가예산상의 사회적ㆍ문화적 교부금은 1930년의 약 20억 루블에서 1938년에는 350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전체 산업부문이 최대 7시간 노동일(광부 및 유사 직종의 노동시간은 더 짧았다)로 이행했는데, 이 개혁 조치는 1930년대 말엽에 나찌 독일의 전쟁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폐기되었다.

1930년대에 쏘련의 생산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속도로 증가했다. 1930년 초 쏘련의 산업생산 총액은 2천1백만 루블이었다. 8년 뒤 산업생산액은 1억 루블 이상이었다(두 수치는 모두 1926-27년의 가격 기준임). 국가의 산업생산액이 8년 사이에 거의 5배로 증가한 것이다! 1930년 초 파종면적은 1억1천8백만 헥타르였는데, 1938년에는 1억3천6백9십만 헥타르에 달했다. 동시에 농업의 완전한 집단화를 달성했고, 농업의 집단화 및 현대화와 관련된 거대한 문제들을 경험하고 해결했다. 1930년 초에 쏘련에는 3만4천9백 대의 트랙터가 있었다. 1938년에는 48만3천5백 대로, 8년 사이에 거의 14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에 콤바인수확기는 1천7백 대에서 15만3천5백 대로, 수확기는 4천3백 대에서 13만8백 대로 증가했다.

1930년대에는 쏘련의 문화 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929년의 각급 학교의 학생 수는 약 1천4백만 명이었다. 1938년에는 그 수가 약 3천4백만 명으로 증가하였고, 동시에 시간제 강의만 듣는 학생들까지를 포함하면 4천7백만 명 이상에 달했다. 전체 국민의 거의 3분의 1이 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초에는 인구의 33%(1913년에는 67%)가 여전히 문맹이었으나, 1938년에는 그 수년 전부터 문맹이 완전히 근절된 상태였다. 이 기간 동안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는 20만7천 명에서 60만1천 명으로 거의 3배로 증가했다! 도서관은 1933년에 4만 곳이었던 것에 비해, 1938년 7만 곳이 되었다. 도서관의 총 장서 수도 1933년에 8천6백만 권이었던 것에 비해 1938년에는 1억26만 권이라는 엄청난 수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는 쏘련의 이념적 물질적 활력과, 모든 시민을 평등하게 대우하려는 의지를 입증해 주는 또 다른 조치도 실행되었다. 전반적이고 의무적인 초등교육이 전국의 모든 민족들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로 시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이전에는 기록된 형태로는 거의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언어들로 된 수많은 새 책과 교과서들, 기타 학습 자료들을 만드는 엄청난 문화적 작업을 의미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언어로 문헌이 출판된 민족도 여럿이었다. 이것이 앞으로 고찰할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투쟁의 배경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이 사실을 상기하도록 하자. 22)23)

 

그러나 모든 사물에는 명(明)이 있으면 암(明暗)도 있다. 이러한 성과는 동시에, 관료주의가 성장하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당과 국가, 그리고 경제기관의 관료(지도자)들의 권력과 권위가 강력해졌다. 1934년 1월, “승리자 대회”라고 명명된 제17차 당 대회에서, 쓰딸린은 공업화ㆍ집산화ㆍ레닌주의가 승리하여 사회주의가 승리했음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말한다.

 

우리의 당, 정권기관, 경제기관 및 기타 여러 기관들과 그 지도자들의 힘과 권위가 전에 없이 제고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힘과 권위가 전에 없이 제고되었기 때문에 바로 지금 모든 것, 거의 모든 것이 다 그들의 사업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소위 객관적 조건을 구실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당 정치 노선의 정당성이 다년간의 경험에 이해 증명되었고 이 노선을 지지하려는 노동자, 농민의 각오가 명백해진 지금에 와서는 이른바 객관적 조건의 역할이 최소한도로 국한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조직들과 그 지도자들의 역할은 결정적이고 절대적으로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이제부터 우리사업에서의 결함과 부족점들에 대한 책임의 십중팔구가 “객관적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오직 우리들에게 있다24)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25)

 

둘째, 정치사업(맑스-레닌주의 교양)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를 경시하는 풍토가 나타났다. 1937년 당시에,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들이 당과 국가기구에 파고들었고, 파괴활동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당의 지도자들은 그들에 대해 무사태평하고 안일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여기에 대해 쓰딸린은 당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경제적 성과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말한다.

 

왜 우리 사람들은 이러한 것(뜨로츠끼주의자들의 파괴활동: 인용자)을 보지 못하였으며, 왜 그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모두 잊었는가? …

문제는 우리 당원 동지들이 최근 시기 경제 사업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경제적 성과에 극도로 도취되었으며, 이러한 일에 도취되어 다른 모든 것을 다 잊었으며 다른 것을 다 포기한 데 있다.

문제는 그들이 경제적 성과에 도취하여 이것이면 만사가 다 되는 것으로 보고 쏘련의 국제적 지위, 자본주의의 포위, 당 정치사업의 강화, 해독행위와의 투쟁 등등과 같은 문제에는 전혀 주의를 돌리지 않거나, 이런 문제는 다 2차적인, 아니 3차적인 문제라고까지 생각하게 된 데 있다.

우리의 성공과 성과는 물론 위대하다. 사회주의 건설 분야에서 거둔 우리의 성과는 참으로 거대하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러하듯이 성과에도 자체의 부정적인 면이 있다. 정치에 경험이 적은 사람들은 큰 성공이나 성과로 하여 무사태평, 안일, 자만, 지나친 자기 과신, 자고자대, 교만 등에 빠질 수 있다. 여러분은 최근 시기에 우리들 가운데서 자만가들이 무수히 자라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자만가들은 말한다: 인용자) 당 규약, 당 기간 선거제, 당원대중 앞에서의 당 지도자들의 보고제라고? 도대체 이러한 것이 다 필요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경제가 장성하고 노동자, 농민의 물질적 형편이 더욱 더 개선되고 있는데, 대체 이러한 사소한 일에 매달릴 필요가 있겠는가? … 모스끄바와 당 중앙에는 괴상한 사람들이 앉아 가지고, 그 어떤 문제를 생각해 내며, 그 어떤 해독행위(파괴활동: 인용자)에 대해 떠들면서, 자기들도 자지 않고 남들도 자지 못하게 만든다26). …

바로 이것이 경험이 적은 우리의 일부 동지들이, 경제적 성과에 도취하여, 정치적 암둔성에 쉽사리 또 “맹랑하게” 물젖는 뚜렷한 실례이다.27)

 

셋째, 관료가 수적으로 늘어나고 관료체계가 발달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사적 개인이 기업을 경영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관료가 경제를 계획하고, 기업을 직접 경영한다. 당연히 관료체계가 거대하다. 예를 들어 경제조직의 단면을 살펴보자. 한국에서 장관(長官, minister)이 책임지는 부(예, 국토교통부, 재정경제부 등등)에 해당하는 것이, 쏘련에서는 인민위원부이고, 책임자를 인민위원이라 부른다. 자본주의와 다르게, 인민위원부는 기업 경영자를 임명하고, 기업을 관리하였다. 쏘련 전체의 경제계획은 국가계획위원회(고스쁠란, Gosplan)에서 담당하였고, 인민위원부는 실행부서이다. 인민위원부의 확대 과정을 보자.

 

(1930년대의 경제성장에 따라: 인용자) 경제분야에서 인민위원부의 수는 급속하게 늘었다. 1934년 말에 모든 제조업 및 광업은 4개의 인민위원부, 곧 중공업ㆍ경공업ㆍ목재ㆍ식량 인민위원부가 관장하였다. 가장 큰 중공업 인민위원부는 곧 좀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 세분화는 더욱 더 진행되었다. 1939년경에는 섬유, 군수, 일반 기계제작, 석탄, 화학, 비철야금 등의 이름을 가진 무려 21개나 되는 공업 관련 인민위원부들이 있었다. 이것은 1940년-41년에 더욱 세분화되었다.28)

 

즉, 경제분야에서만 장관(인민위원)이 4명(1934년)에서, 21명(1939년)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관료들은 행정과 경영 지식을 쌓아나가고 독점하게 된다. 이것은 관료들의 힘을 강화하고, 관료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

넷째, 경제가 성장하면, 각종 과학과 인문학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인텔리겐챠 또한 증가한다. 당시에 과학기술이 너무나도 절실하였기 때문에, 인텔리겐챠를 집중적으로 양성하고, 물질적 유인을 주기 위해 특별히 우대하였다. 이들과 관료층은 정신노동을 담당한다. 때문에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기층 대중(노동자, 농민)과 모순 관계에 있다. 이들 전문가 집단은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며, 배타적 세력을 형성하고,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회적 몫을 가능한 늘리려는 경향을 가진다. 인텔리겐챠층은 1930년대 후반부터 당에 대거 유입된다. 1939년 제18차 당 대회에서, 신입당원을 받을 때 노동자를 우대하던 기존의 제도를 폐지하고, 노동자, 농민, 인텔리겐챠의 입당 조건을 단일화하였다. 그 결과 당원에서 인텔리겐챠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소련공산당사≫ 일본어판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종래의 노동자, 농민, 인텔리겐챠 구별을 폐지하고, 모두 1년의 후보기간을 거치며, 세 명의 당원의 추천을 받을 것을 규정한 제18차 당 대회(1939년)의 새 당 규약(이 채택됨: 인용자).

이 결과 1939년 1월-1940년 1월에 전체 당원 수는 230만 6973명에서 한꺼번에 339만 9975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인텔리겐챠의 수가 얼마인지를 보여주는 자료는 없지만, 지방의 통계에 의해 당시의 추세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첼랴빈스크 주에서는, 1941년과 1942년의 첫 2개월 동안에, 각 노동자 660명, 집단농장농민 289명, 화이트칼라 2025명의 당원후보와, 노동자 903명, 집단농장농민 399명, 화이트칼라 3515명의 당원 입당을 허용했다. 이처럼 대략 당원후보와 정식 당원의 70% 이상이 새로운 인텔리겐챠임을 알 수 있다.29)

 

신입 당원의 70% 이상이 인텔리겐챠라는 것은, 인구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비중을 볼 때 대단히 높은 것이다. 이후에 이들이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라 불리며, 수정주의의 주요세력을 구성한다. 한편 이에 대해, 1969년에 나온 ≪소련공산당사≫에서는 “쏘비에뜨 사회의 선진적인 사람들이 입당하는 경우가 늘었다”30)고 평가한다. 자화자찬이다.

다섯째, 1930년대의 급속한 성장을 위해서, 1920년대에 비해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관리자의 권한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분명히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경제 일꾼들: 인용자) 여러분은 최단 기간에 조국의 낙후성을 청산하고, 조국의 사회주의적 경제 건설 사업에서, 진정한 볼쉐비끼적 속도를 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닌은 10월 혁명의 전야에 “죽는냐, 그렇지 않으면 선진적인 자본주의 나라들을 따라 잡고 앞서느냐”라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선진적인 나라들보다 50-100년이나 뒤떨어졌다. 우리는 이 간격을 10년 동안에 달음질쳐 나가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든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짓밟혀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31)

 

쓰딸린은 이 연설을 1931년 2월에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10년 후, 1941년 6월에 독쏘전쟁이 터졌다. 그는 예언처럼, “10년 동안에 달음질쳐 나가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해내든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짓밟혀 버리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경제건설은 전쟁의 또 다른 형태였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권리 약화; 1920년대에는,

 

국영기업에서 노동조합 위원회의 서기는 경영자 및 당서기와 나란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유의 ‘삼두’ 경영은 20년대 내내 거의 유지되었다. …

노동자들을 얼마간 좀더 직접적으로 참여시키는 전통이 있는 상황에서 ‘생산회의들’과 1924년에는 ‘생산위원회들’도 설치되었으며, 후자는 공장 내의 피고용인을 대표하는 상설자문기관이었다. 이 기관들은 경영에 그다지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곧 이 기관으로 진출한 노동자들 가운데서, 새로운 유형의 미래의 경영자들이 많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새로운 간부를 양성하는 교육과정을 밟았다.32)

 

그러나 1929년부터,

 

1929년 9월 5일 단독경영 원리가 (공산당: 인용자) 중앙위원회의 한 결정서에서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공장의 당 조직은 관리자의 책임에 관여하지 않게 되었으며,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문화적ㆍ위락적ㆍ경제적 욕구를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생산활동 및 노동대중이 가진 창의성의 열정적인 조직가’여야 했다. 관리자는 원칙적으로 단독 책임을 졌다. 1929년 12월 25일 또 하나의 결정은 기업이 ‘공업을 관리하는 기본단위’여야 하며, 경제적 혹은 상업적 회계원리는 적절한 재정적 자율성과 법인을 가지는 기업33)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34)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규율 강화와 차등임금제;

1920년대 후반에 추구되었던 임금평준화 정책은 1931년 들어서서 파기되었다.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안정된 노동력이 필수적이었다, ‘빈번한 직장 변경자’와 무단결근자들을 물질적으로 처벌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1930-33년에 제정된 일련의 규칙과 포고령들은, 해고를 시키고 공장숙소에서 쫓아내며 갖가지 혜택을 박탈함으로써, (습관적 음주의 결과로 너무나 만연해 있던) 무단결근을 처벌하였다. 1931년 쓰딸린은 임금의 ‘평등주의’에 대해 유명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 목적은 한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기술을 습득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가장 저급한 수준의 미숙련 노동자와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 사이에 1:3.7의 비율로 임금률을 달리하는, 새로운 임금표가 정해졌다. 이것은 숙련노동자가 극히 부족한 시기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었다35)

 

(1931년부터: 인용자) 성과급의 영역이 더욱 확장되어, 1930년 후반 경까지는 전 노동자의 3/4에 달하는 인구가 이 체계에 따라서 급료를 지불받았다. … 그 당시 도급의 공통적인 형태는 소위 “누진성과급제도”로서 산출이 어떤 비율을 넘으면, 수입도 크게 오르는 제도였다. 예를 들어 단위시간당 표준산출양이 여러 직업에 대해 각각 결정된다. … 이 표준치를 초과하는 생산량에 대해서는, 그 직업의 규정 도급률보다 50%를 더하여 임금이 지불된다.36)

 

“노동에 비례하여 보수를 받는다”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방금 태어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것은 등가물의 교환이라는 부르주아적 권리이다. 사회주의는 이러한 부르주아적 권리 위에 서 있다. 따라서 자신의 발이 아니라 남의 발로 서 있는 불안정한 사회이다. 이것이 유지ㆍ강화되는 것은 부르주아적 의식의 유지ㆍ강화를 의미하고, 그만큼 사회주의는 더욱 불안정해진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적 분배, 즉 사회보장의 확대는 노동의욕을 감소시킬 수 있다. 소득격차의 확대는 노동자 간의 단결을 저해한다. 평등주의가 후퇴하여, 관리자나 전문가 등 정신노동자들의 특권과 고소득(근로 인민의 공동소유물에 대한 수탈)을 용인하게 만든다.37)

관리자의 권한과 특권 강화;

 

어떤 경우에는 소위 “성공의 척도(success indicator)”와도 같은 (상부에서 채택되며, 단위 기업의 성과를 측정하는 지표로 제시된 특정한: 인용자) 양적지수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부 관리지표에 강한 압력이 가해졌다. 그러나 여기에 계획 달성에 대해 지불되는 실질적인 보너스의 영향이 부가되었다. 즉 이에 따른 영향은 이윤으로부터 조달된 이른바 관리자기금이 갖는 영향을 압도하게 되었다.38)

 

기업에서 발생하는 이윤39)의 사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윤의 ; 인용자) 일부는 세금으로 예산에 편입된다. (사실 이것은 어떤 경제에서든 기업이 만든 이윤의 일부는 예산형성을 목적으로, 전체 공동체로 돌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일부는 산업 내의 자본의 축적을 위해 산업은행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관리자기금 부분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특정하게 명명된 어떤 목적을 위해 기업의 자유재량에 따라 사용되는데. 간부들에 대한 상여금, 피용자를 위한 복지시설, 주택마련 등이 이에 속한다. (계획이윤을 넘는) 얼마간의 추가적 이윤이 생기면, 이 후자의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최소한 계획이윤만을 올리는 경우보다 매우 큰 중요성을 갖는다. 따라서 (공장의: 인용자) 효율을 높여서 특별이윤을 올리게 되면 (관리자 기금이 많아지고: 인용자), 이것은 각 공장의 구성원들에 대해서, 그리고 개개의 사업에 대해서 “계획을 앞지르자”라는 집단적 유인의 역할을 한다.40)

 

멘쉐비끼의 아들인 알렉 노브는 비난조로 말한다.

 

쓰딸린은 또한 공업 간부들에게 더 많은 봉급과 특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장려하였으며, 당원은 숙련노동자보다 더 많이 받아서는 안 된다는, 레닌이 세운 오랜 규칙을 포기하였다. …

선택된 노동자 부류든, 관리든, 주어지는 특권은 당시에는 ‘부수입’ 형태, 곧 ‘폐쇄’상점41)에 들어가는 것, 좋은 주택을 배당받는 것, 좋은 의복을 살 수 있는 허가증42) 등등의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부족이 만연한 상황에서 당국이 제공하거나 허용할 수 있는 어떤 추가적인 것 없이, 화폐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매우 많았다.43)

 

계획을 달성하고, 또 초과달성하기 위해서, 기업의 “생산관리지표에 그것을 실행하라는 강한 압력이 가해”지면, 관리자는 압박을 받고, 그 압박은 다시 노동자에게 향할 것이다. 또한 관리자가, 더 많은 봉급과 보너스, 관리자기금의 관리, 여러 형태의 특권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파고 들어보자. 소유의 형식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사태를 해석해보자.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전 인민적 소유로 만든 것은 공산주의의 소유형식이다. 그러한 소유의 형식으로 담겨지는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 착취의 폐지이다. 이제 타인의 노동의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은 없다. 둘째, 생산의 목적은, 인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사회적 필요의 충족)으로 변화한다. 이윤을 위한 생산은 사라진다.

만일 사회주의(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기업 관리자(경영자)가 자신이 사회에 투여한 노동보다 몇 배의 보수를 얻는다면, 자기노동을 초과한 몫은 타인의 노동의 결과물이다. 관리자기금은 이윤의 일부이고, 기금의 일부를 관리자들이 가진다. 타인의 노동의 결과물을 자신의 소유로 한다는 의미에서 착취와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 그만큼 공산주의라는 형식(그릇)에 자본주의적 내용이 담기는 것이다. 형식과 내용은 충돌한다. 그러나 초기에는 그들이 공짜로 가져가는 양은 미미했을 것이고, 그만큼 충돌은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보적 측면도 있다. 이것은 물질적 동기로 작용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작용, 즉 사회 전체적으로 생산물과 잉여생산물의 양을 늘리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요소인 이러한 내용은 이후에 계속 자라난다. 1930년대를 건너 뛰어 흐루쇼프 집권시대(1956-1964)로 가보자. 알렉 노브는, 흐루쇼프의 시대에 발생한 경제계획의 위기에 대해서 말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계획이 톤으로 잡혀 있고, 얇은 철판에 대한 고객의 주문을 받아들이는 것이 계획의 수행을 위협하였기 때문에, 강철판은 너무 두껍게 만들어졌다. 도로 운송차량은 톤-킬로미터로 표시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쓸모없는 여행에 나섰다. 흐루쇼프 자신도 가구산업에서 만든 무거운 샹들리에(톤으로 계산되는 단위)와 너무나 큰 소파(루블로 표시된 계획들을 완수하는 가장 손쉬운 길)의 사례들을 인용하였다.44)

 

기업 관리자가 더 많은 보수를 받으려면, 계획을 초과달성하여야 한다. 상부의 계획부서로부터, 강철판을 총10톤을 만들라는 기준목표가 제시된다. 관리자는 10톤 이상을 만들어야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강철판은 얇은 1톤짜리이다. 그런데 1톤짜리 얇은 강철판을 10개를 만드는 것보다, 2톤짜리 5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쉽다. 관리자는 2톤짜리 5개를 만들고, “10톤 생산 목표 달성!”이라고 상부에 보고한다. 여력으로 이제 3톤짜리 하나를 만든다. 그리고 “30% 초과 달성!”이라고 상부에 보고한다. 그리곤 보너스를 두둑히 받는다. 창고에는 두꺼운 강철판이 재고로 쌓여 있다.

이 관리자에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공장의 생산의 목적은 무엇이 되었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강철판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제 생산의 목적은 관리자의 개인적 축재로 되었다. 사회적 소유형태가 담으려는 내용의 또 하나가 부정되었다.

생산의 목적을 관리자의 개인적 축재로 변화시킬 수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제 그의 욕망은 사태를 더욱 전개시킨다. 두꺼운 강철판이 재고로 쌓여 있어, 시중에는 1톤짜리가 부족해 아우성친다. 몰래 1톤짜리를 만들어, 암시장에 팔면 1만 루블을 얻을 수 있다. 간부들에게 조금 떼어줘도, 자신은 5천 루블을 얻는다. 부의 입구에서는 머뭇거릴 수 없다! 이제 생산의 목적만이 아니라, 생산의 결과물까지 자신의 치부 수단이 되었다. 생산의 목적이 생산의 결과물을 복종시킨 것이다.

내용이 하나씩 하나씩 모두 부정되면서, 사회적 소유형태는 더 이상 사회에 봉사할 수 없어진다. 공장은 개인의 치부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사회적 소유물이 사적 소유물처럼 기능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내용적으로 부활했다. 공장의 공산주의적 소유형태와 부르주아적 내용(부르주아적 사용)은 전면적으로 충돌한다. 부르주아적 내용은 자신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부르주아적 소유형태를 부활시켜야 한다. 관리자는 사적 소유물처럼 기능하는 생산수단(공장)을 사적소유로 전환시켰다. 내용은 자신에 맞는 형식을 획득했다. 이에 대해 에릭 홉스봄은 고르바쵸프 시대의 “사회주의의 종식”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고르바쵸프는 경제간부들에게서 … 뻬레스트로이까에 대한 꽤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활동을 수행하는 데에 당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당 관료층이 사라지더라도 그들은 그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다. … 실제로 그들은 쏘련이 무너진 뒤에도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그들은 이전에 법적 소유권이 없이 지휘해온 기업들의 (잠재적인) 법적 소유자로서, 새로 생긴(1990년) ‘산학연합(産學聯合, NPS)과 그 후속단체들의 내의 압력집단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45)

 

그러나 홉스봄은 좀더 분명히 말해야 했다. “경제간부들”이 누구를 위해, 어떻게 기업을 “지휘해온” 것인가를 밝혀야 했다. 그들은 법적 소유권이 없이도, 법적 소유권이 있는 것처럼, 즉 사적이익을 위해 “지휘해온” 것이다. 그들이 법적 소유자로 된 것은, 내용을 승인하는 절차였고, 내용에 의해 강제된 결과일 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미국인이 몰래 한국에 들어와 불법체류하고 있다고 하자. 그는 법적으로는 미국에 있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한국에 있다. 또 그가 한국에 신고를 하고 법적으로 한국에 등록한다고 해서, 법적 등록이 그를 한국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가 한국에 이미 있었기 때문에 법적 존재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법은 존재를 단지 승인한 것이다. 창조한 것이 아니다. 기업의 법적 소유권 문제도 동일하다.

사회주의 원리는 노동에 따른 분배이다. 즉 100만큼 일하면 50은 공동의 재산(축적기금, 비노동인구 부양기금, 보험기금)이 되고, 50을 개인이 받는다. 애초에 관리자들은 110을 받았다. 그들은 노동자보다 다소 많은 봉급이라는 형태로, 사회 공동의 재산 중에서 소비품(소비수단)을 조금 빼앗은 것이다. 이때는 좀도둑에 불과했다. 그러나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 마침내 그들은 생산수단을 빼앗은 것이다.

개인적 부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저열하지만 가장 강력한 욕망이다.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강력한 노동동기가 필요했다. 개인적 부에 대한 욕망을 이용하여야 했다. 그래서 노동자 사이에, 노동자와 관리자 사이에 보수의 차이를 늘렸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효과와, 관리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다르다. 노동자는 아무리 많이 받아도, 자신의 노동 이상을 받을 수 없다. 그가, 개인적 부에 대한 욕망에 자극을 받아 노동을 하더라도, 그만큼 사회적 부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착취와 수탈에 대한 욕망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관리자는 다르다. 그는 자신의 노동 이상을 받는다. 그는 더 일할수록, 사회적 부를 개인적 부로 만들 수 있다. 이는 착취와 수탈에 대한 욕망을 발전시킨다.

참고로 알렉 노브가 예로 든 사례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획경제의 비효율성, 나아가 불가능성을 말한다.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을 말한다. 그러나 위의 사례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사적 소유에 대한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법만 가지고는 안 된다. 만일 대다수 사람들이 사적소유는 부정한 것이고, 사회적 소유를 당연하게 여긴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사회적 소유의식이 완전히 지배한다면, 그리하여 모든 것은 공유되어야 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교환(시장)마저도 불가능해진다. 마찬가지로 계획경제는, 사람들이 사회적 소유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여길 때, 그만큼 가능해진다. 그럴 때는, 톤 단위로만 계획목표지시가 내려와도, 사회에 필요한 1톤짜리 강철판을 생산할 것이다. 사회적 소유와 “사회에 필요한 생산”은 불가분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소유라는 의식이 강화될수록 자본주의가 불가능해지듯이, 사적 소유라는 의식이 발전할수록 사회주의(계획경제)는 그만큼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위의 예는, 흐루쇼프 시대에 관리자들에게 사적 소유 의식이 발전하여, 이것이 계획경제와 사회주의에 적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획을 보다 정확하게 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쏘련에서 진행되었듯이, 1965년에 시행되고 197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던 꼬시긴 개혁처럼, 시장경제원리를 도입해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잠재적 자본가였던 경영관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이었다. 이는 사적 소유 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그 반대로, 사적 소유의식과 관료들과 투쟁해서, 사회적 소유의식을 발전시키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3. 관료주의와의 투쟁(1937-38년 대숙청46))

 

위에서 1930년대의 성과를 정리한 마리오 소사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성장은 문화혁명을 낳았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여가시간(피교육과 문화활동시간)이 주어지고, 육체와 정신이 전면적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생겨났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을 극복할 가능성이 생겨났다. 문맹이 사라지고 의식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인민들이 경영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발생했다. 관료주의를 극복할 가능성이 발생하고 있었다.

1937년, 쓰딸린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주로 가맹 공화국들의 지도자급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관료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한다.

 

(당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인용자) 일꾼들을 객관적 표징에 의해 선발하지 않고 우연적이며 주관적이며 속물적인 소시민적인 표징에 의하여 선발한다. 말하자면 친척, 친우관계, 동향관계, 개인에 의거하는 사람, 아첨쟁이들을 그들의 정치적 준비와 실무능력에는 관계없이 종종 선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임적 일꾼들의 지도적 집단 대신에, 친지들의 소가정이 이루지고 있으며, 서로 화목하게 살며, 서로 모욕하지 않으며, 집안 허물이 밖에 나가지 않게 하며, 서로 칭찬하며, 그리고 때때로 중앙에,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공허하고 불쾌한 보고를 보내려고 애쓰는 동업조합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가족적 분위기에서는 사업상 결함에 대한 비판도, 지도자들의 자기비판도 있을 여지가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러한 가족적 분위기가 아첨쟁이를 길러 내며, 자존심을 잃어 끝내는 볼쉐비즘과 인연을 끊는 사람들을 길러내기에 알맞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르조얀과 와이노브를 예로 들어 보자. 전자는 까자흐스딴 변강47) 당 단체 비서이며, 후자는 야로슬라블 주 당 단체 비서이다. 이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제일 낙후한 일꾼들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일꾼들을 선발하였는가? 전자는 그가 전에 사업하던 아제르바이잔과 우랄에서 30-40명의 “자기” 사람들을 까자흐스딴으로 데려다가, 그들을 까자흐스딴의 책임적 지위에 배치하였다. 후자는 그가 전에 사업하던 돈바쓰에서, 야로슬라블로 10여명의 역시 “자기” 사람들을 데려다가, 그들을 또한 책임적 지위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미르조얀은 그의 동업조합을 가진 셈이다. 와이노브에게도 동업조합이 있는 셈이다. … 이 동지들은 개인에 의거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선발함으로써 지방 사람들에 대해서나 중앙위원회에 대해서나 얼마간의 독자적인 환경을 자기들이 가지려고 한 것 같다.48)

 

또한 과거에 있었던 숙청사업49)의 결함에 대해 책임자들을 비판한다. 그동안의 숙청사업은 주로 평당원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나는 개별적인 당원들의 운명, 당원들의 출당, 또는 출당된 당원들의 권리 회복 문제에 대한, 일부 우리 당원 동지들의 형식적이고 냉담한 관료주의적 태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 그들이 당원들과 당 일꾼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보통 되는 대로 행동한다. 즉 그들을 덮어놓고 요란하게 칭찬하는가 하면, 또 덮어놓고 호되게 내려치며, 당에서 수천 수만 명씩 몰아낸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대체로 수만 명에 대하여는 생각하려 하나, “한 사람”, 개별적인 당원, 그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수천 수만 명씩 당에서 몰아내면서도 우리 당은 2백만 명의 당원을 가지고 있으므로, 수만 명을 당에서 내보내는 것은 당의 형편을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리라고 자위하면서,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실지에 있어서 극히 반당적인 분자들만이 당원들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

소위 열성부족 때문에 대부분이 제명되고 있다. 그러면 열성부족이란 무엇인가?

보건대 당원들이 당 강령을 파악하지 못하였다면 그는 열성부족이요, 따라서 제명되어야 한다고들 간주한다. 그런데 동지들, 이것이야말로 옳지 못한 것이다. … 만일 이대로 나간다면, 당에는 다만 인텔리와 일반적으로 학식 있는 사람들만 남게 될 것이다50). … 우리에게는 … 당원자격에 대한 레닌적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의하면, 당 강령을 승인하고 당비를 납부하고 당의 어느 한 조직에서 일하는 자는 당원으로 인정된다. …

노동자, 당원이 오류를 조금 범하거나, 한두 번 당 회의에 늦어지거나, 어떤 이유로 당비를 지불하지 못하면, 그는 즉시로 당에서 내쫓긴다. …

동지들, 이러한 무법천지를 끝장 낼 때는 이미 온 지 오래이다.51) (강조는 쓰딸린)

 

“극히 반당적인 분자”, “무법천지를 끝장 낼 때”, 최고 권력자가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이는 관료주의자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다. 지도부는 “당원 대중의 격분을 깨워 일으키며”, 투쟁을 촉구하였다. 중간 간부들을 숙청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투쟁이 발생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의 원조라고 할 만한 대격동이 발생했다. 제도적 정비도 있었다. 엄격한 민주주의 규정을 따르는 당 총선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할 것이 결정되었다. 자기비판, 당 내에서의 민주주의, 그리고 간부급 당 관리들에 대한 통제에 대해서, 언론에서 논쟁도 시작되었다. 루도 마르텐스는 게티(미국의 역사 교수 J. Arch Getty)의 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게티는 이렇게 적었다:

‘중앙당은, 평당원 활동가들이 중간 수준의 기관을 비판하는 것을 확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위로부터의 공식적인 재가나 압력이 없었다면, 일반 당원들이 그들 스스로 직속상관들에 맞서서, 그러한 운동을 조직하여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게티)

여러 지방 기관에서, 관료들의 관료주의적이고 전횡적인 경향은, 그들이 행정 경험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강화되었다. 볼쉐비끼 지도부는 평당원들이 이러한 관료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경향에 맞서 투쟁하도록 격려했다. 게티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성과는 없었으나, 그러나 일반 당원들을 동원하여 지역의 폐쇄적 기관들을 부수고 열려는 진실한 시도였다.’(게티)

1937년 초에, 서유럽 국가 만큼이나 넓은 영토의 서부지역을 통치한 루?체프(Rumiantsev)와 같은 지방총독은, 평당원들의 비판으로는 퇴위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인용자) 그는 우보레비치(Uborevich, 군사반혁명 음모자: 인용자)에게 협력한 자로서, 군사적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중앙당에 의해서 면직되었다.

‘1930년대의 이러한 두 가지 급진적 흐름은 1937년 7월에 하나로 모아져, 그 결과 관료주의를 파괴하는 격동이 일어났다. 쥐다노프(Zhdanov)의 당 부흥 운동과 예조프(Ezhov)의 적들에 대한 추적이 결합하여, 이제 당을 휩쓰는 혼란스러운 ‘대중적 테러(populist terror)’를 만들어냈다….’(게티)

‘반(反)관료주의적 대중주의와 경찰테러는 공무원은 물론이고 여러 기관까지 파괴하였다. 급진주의는 정치기구를 뒤집어엎었고 당의 관료주의를 파괴했다.’(게티)52)

 

대숙청의 물결은 노동조합운동에도 퍼져나갔다. 1937년 봄에 노동조합중앙평의회 회의에서, 서기인 쉬베르니끄(Shvernik)는 조합 내의 비민주적 사례들을 비판하였고, 모든 노동조합기관에서 간부들이 밀실합의로 위원회의 공석을 메꾸는 일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반드시 공정한 비밀선거를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1937-1938년 대숙청은 공산당에서 27만8818명이 추방되는 것53)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에 관료주의가 승리하는 것으로 보아, 게티의 평가처럼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은 성과는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 숙청의 동력은 평당원과 최상층 지도부였다. 첫째, 평당원은 이제 겨우 읽고 쓰는 것을 배운 수준이었다. 그것과 맑스-레닌주의를 이해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더구나 맑스-레닌주의를 익혀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들은 여전히 정치적으로는 문맹자였다. 노련한 간부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둘째, 숙청을 지휘했던 핵심인물인 내무인민위원 예조프가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대량으로 숙청하였다. 숙청이 시작되고 불과 수개월 만에, 쓰딸린은 그를 억제54)하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숙청사업 또한 억제되었다. 셋째, 1937-38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진행되고 있었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고, 1937년에는 일본이 중일전쟁을 시작했다. 1938년 9월에는 뮌헨조약55)이 체결된다. 이러한 준전시 상황에서 대규모 숙청사업을 계속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넷째, 그 동안 광범위하게 성장했던 “공산주의자 관료주의 세력”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저항했음을 짐작케 해준다.

1939년 3월 열린 제18차 당 대회에서는 대량 숙청을 폐지하는 규약을 채택한다. 이에 대해 ≪소련공산당사≫에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량 숙청은, 과도기에는 당의 구성을 개선하는 수단이었지만, 사회주의가 승리함과 동시에 의의를 잃었던 것이다.56)

 

쓰딸린도 당 대회 보고에서 “우리는 더는 대중적인 숙청사업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57)”라고 말한다. 숙청 일반이 아니라 “대량 숙청”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사태전개로 보아, 이는 오류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오히려 전후에 대량 숙청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주의의 승리”는 공산주의가 아니고, 사회주의의 연속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계급투쟁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그것은 공산주의로 가는 “과도기” 사회이다.

이러한 규약이 만들어진 것은, 당 내에서 관료주의자들이 강력한 세력을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맑스-레닌주의 지도부는, 그들의 주관적 생각이 어떠한 것이었든지 간에, 결과적ㆍ객관적으로 보아 그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관료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흐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료주의자와 쓰딸린 지도부의, 결과적으로 발생한 타협은, 필연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혁명 이후에 행정ㆍ경영ㆍ조직 업무 등에 있어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족하였다. 1920년대에 자본가 출신 경영자를 기용하고, 구 정부 출신 공무원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서 얻는 것이, 그들에게 주는 것보다 많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너무도 절실하였기 때문이었다. 1930년대 들어, 점차로 그들은 당원들로 교체된다. 그러나 인민들의 정치적 문맹은 여전했고, 이른바 “공산주의 관료주의자”들이 내부에서 자라났다. 흐루쇼프가 모스끄바 지하철 건설로 최고훈장인 레닌훈장을 받듯이, 이들은 사업능력이 있었다. 이들 또한 자본가 출신 경영자처럼 각종 특권을 누리며 가져가는 것이 많았지만, 주는 것이 더 많았다. 물론 그들이 “주는 것”이란, 그들이 짜낸 근로 인민의 고혈이지만, 어쨌든 그러하다.

혁명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1945년 끝나고, 복구가 완료된 1950년경까지는 쏘련은 전 기간이 전쟁기간이었다. 단지 고강도의 전쟁(내전, 제2차 세계대전)이냐, 아니면 저강도의 전쟁이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내부와 외부의 적대 세력과 끝없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관료주의자들과도 본의 아닌 연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목적은 다르지만, 그들도 부강한 조국이 필요했다. 중국에서는, 일본제국주의와 전쟁을 위해, 공산당은 국민당과 손을 잡았다(국공합작). 쏘련에서는 제국주의자들과 또 그들이 앞잡이가 되어버린 반대파(뜨로츠끼파, 부하린파)들과 싸우기 위해서, 관료주의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4. 전쟁(1941-1945년 세계대전)과 관료주의의 강화

 

1941년 6월, 독쏘전쟁이 발발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사회는 거대한 군대가 되었다. 그 군대를 지휘하는 당과 국가의 관료체계는 더욱 거대해지고 강력해진다.

참고로 국방비의 변화를 살펴보자.

 

국가총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율(%)58)

연도(년)

33

34

35

36

37

38

39

40

비율(%)

3.4

9.1

11.1

16.1

16.5

18.7

25.6

32.6

 

 

국방비의 액수를 보면, 1933년 1,421백만 루블에서, 1940년 56,800백만 루블로 약 40배가 늘어났다. 1939년이 되면, 국방비가 예산중 25.6%로 급격하게 상승하며, 사실상 전쟁상태로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의 권리는 1940년부터 전면적으로 후퇴했다.

 

1940년의 포고령들의 … 핵심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 갖가지 부류의 전문가들(‘엔지니어, 기술자, 십장, 사무원, 숙련노동자’)에 대한 노동지침의 부가.

② 훈련을 위해 100만 명에 이르는 젊은 학교 중퇴자들을 ‘노동예비학교’로 강제소집하는 것.

③ 직장을 무단결근하는 자는 범죄자로 취급되어 최고 6개월에 이르는 ‘고용장소에서의 강제노동’(최고 25%의 감봉과 함께 부과되는 일종의 중노동근무)이라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  한 번 더 규칙을 위반할 때는 위반자를 ‘빈번한 직장변경자’로 ‘간주’하였으며, 그리하여 만일 이런 일이 최초의 형이 집행되고 있는 기간에 일어나는 경우에는 무조건 투옥판결을 받았다.

④ 작업에 20분 이상 늦는 자는 누구든지 무단결근자로 취급되었다. 여기에는 점심시간에 늦게 되돌아오거나, 일찍 퇴근하는 것도 포함되곤 하였다. 규칙을 두 번 위반할 경우, 그것은 다시 한 번 ‘빈번한 직장변경자’로 간주되어 감옥행을 의미했다.

⑤ 어느 누구든 허가 없이 자신의 직장을 떠날 수 없었다. … 누구든 규칙을 위반하고 작업장을 떠나면, 형사처벌 대상이 되어 ‘빈번한 직장변경자’로 투옥될 것이었다. 4개월 형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⑥ 노동일이 7시간에서 8시간으로, 노동주가 6일 중 5일59)에서,  7일 중 6일(일요일은 정상적인 휴일이 될 것이었다)로, 임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일이 없이 길어졌다.60)

점차로 이러한 조치들은 더욱 강화되었다. “전쟁수행과 연관 있는 공업의 노동자들은 동원된 다음, 군사적 규율하에 놓여졌다. 운송노동자들도 동일했다. 휴일은 없어졌다.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일터를 떠날 수 없었다.”61)

 

 

당원들의 손실은 거대했다. 전쟁전야에 당원이 약 400만 명이었다. 1941년 말경에 붉은 군대에 130만명의 당원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쟁초기의 반년 동안에만 50만 명 이상의 당원이 전사했다.62) 그런데 가장 앞장서서 헌신적으로 싸울수록 사망할 확률은 높다. 그렇게 볼 때, 이들은 가장 단련되고 선진적인 당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실은 훌륭한 당원을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전후에, 문제를 야기할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당원들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인용자) 전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41년 8월 12일, 전선 장병들의 입당 요건을 완화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탁월한 전공을 세운 병사와 지휘관은 … 당원의 추천에 의해 입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3개월간의 당원 후보기간이 설정되었다. 입당을 결정하는 권한은 최하급 당 조직의 사무국이 가지게 되었다. …

1941년 후반기 중에, 일찌감치 20만 명의 장병이 입당하고, 1942년에는 약 140만 명이 입당했다.63)

 

당 대열이 급속히 늘어났다. 1944년에 … 112만 5000명이 (신입: 인용자) 당원이 되었다. … 전쟁 중에 입당한 사람들이 전체 당원의 거의 2/3를 차지했다. 그러나 당 조직은 이데올로기 활동에 대한 관심이 약해져 있던 터였다.64)

 

1944년에, 전쟁 중에 입당하는 당원이 전체 당원의 거의 2/3를 차지했다고 한다. 물론 군인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1945년 1월 1일 현재 576만 명이라는 전례 없이 많은 당원 수를 기록한다. 전쟁 중에는, 당내 민주주의와 비판과 자기비판이 제한된다. “이데올로기 활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는 것 또한 필연이다. 당의 이데올로기는 심각하게 약화될 수밖에는 없다.

위에서 전쟁 직전 1930년대 후반에, 당에 인텔리겐챠가 대거 유입되었다고 밝혔다. 여기에다 전쟁 중에 군인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당은 그 구성에서는 노동자ㆍ농민의 당이 아니라, 인텔리겐챠와 군인들의 당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들은 전문가적인 성격을 가지고, 인민들에 대해 배타성을 쉽게 가질 수 있다. 군부가 더 폐쇄적이다.

군부를 대표하는 인물인 게오르기 주꼬프를 보자. 그는 전쟁 중에 총사령부 최고 사령관, 전쟁 후에는 쏘련 국방상, 당 중앙위원, 중앙위 간부회(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와 당의 최고 간부 중의 한 명인 그가 인민들의 피의 대가인, 국가의 재산을 횡령한 증거를 보자.

 

1948년에, 주꼬프는 실제로 강등을 당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죄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고, 그는 자신의 죄를 시인했다. 그는 쏘비에뜨 정부의 재산인 독일 전리품 중에서 상당히 많은 귀중품을 불법적으로 횡령했다. …

 

극비

쏘련 각료회의

쓰딸린 동지에게

… 올해 1월 8‒9일 밤에, 모스끄바 근처 루블레보(Rublevo) 마을에 있는 주꼬프의 별장을 비밀리에 조사했다.

조사 결과, 별장의 두 개의 방이 창고로 개조되어 있었고,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상품들과 귀중품들이 엄청나게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모직물, 비단, (금은실을 섞어 짠) 비단, 벨벳, 기타 등등 – 모두 4000미터 이상;

모피 – 흑담비, 원숭이, 여우, 물개의 모피, 새끼양의 곱슬한 털의 검은 모피(양질의 양모) – 모두 323개;

최고 품질의 새끼염소 가죽 – 35개;

포츠담(Potsdam)과 궁전들 그리고 독일 가정들에서 가져온 고가의 카페트들과 커다란 고블렝 양탄자들(Gobelin rug) – 총 44개, 몇몇 개는 여러 방들에 깔려 있거나 걸려 있었고, 나머지는 창고에 있었다. 별장의 방들 중의 하나에 있던, 커다란 카페트는 특별히 기록할 가치가 있다;

예술적 액자에 담긴 고가의 매우 커다란 고전주의 풍경화들 – 총 55개, 별장의 여러 방에 걸려 있었고, 몇몇은 창고에 있었다;

매우 고가의 테이블과 차 세트(예술적 장식이 있는 자기(磁器), 수정) – 커다란 상자 7개;

은 테이블과 차 세트 – 2상자;

호화로운 장식이 있는 아코디언들 – 8개;

고틀란트(Gotland) 회사의 독특한 사냥총들과 기타 종류의 사냥총 – 총 20개;

이러한 물품들이 51개의 트렁크와 여행가방에 들어 있거나, 쌓여 있었다.

그 외에도, 별장의 모든 방들에, 그리고 창문, 계단, 테이블, 테이블 옆에는, 청동과 자기로 만든 수많은 꽃병과 예술 조각상, 그리고 온갖 종류의 외국제 장신구와 골동품들이 있었다.

조사했던 사람들의 선언—주꼬프의 별장은 사실상 실내 전체에 값진 다양한 작품이 널려 있는 골동품 창고 혹은 박물관이다—에, 나는 주목한다. …

(주꼬프 개인의: 역자) 아파트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고, 국가의 재산으로 박물관에 보관되어야 마땅한 매우 값진 수많은 그림들이 있다. 거의 모든 방의 바닥에 20개 이상의 커다란 카페트들이 깔려 있다.

가구, 카페트, 그릇, 장식품에서, 창문의 커튼까지 모든 것들이 외국산으로 주로 독일산이다. 그 별장에는 문자 그대로 단 하나의 쏘비에뜨 제품도 없다. …

그 별장에는 단 하나의 쏘비에뜨 책자도 없다. 반면에 책꽂이에는 금으로 부각(embossing)된, 아름답게 장정된 책들이 많이 있었는데, 예외 없이 독일어 책이다.

당신이 그 집에 간다면, 독일이 아니라 모스끄바 근처에 왔다고 상상하기가 힘들다. …

우리가 주꼬프의 아파트와 별장에서 발견한 몇몇 귀중품들—옷감과 여러 품목들—의 사진들을 이 편지에 동봉한다.

 

아바꾸모프(Abakumov)

1948. 1. 10.65)

수천만 명이 사망66)하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비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한복판에 있었지만, 그 참혹함도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의 부에 대한 탐욕을 잠재울 수 없었다. 일찍이 엥엘스는 이렇게 적었다.

 

(원시 공산사회를 계급사회로 발전시킨: 인용자) 문명이 시작된 첫 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노골적인 탐욕이 문명을 추동해왔다. 첫째도 부요, 둘째도 부요, 셋째도 부, 그것도 사회의 부가 아니라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다 67)

 

쏘련은 1930년대에 거대한 부를 축적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찬란한 승리를 쟁취했다. 관료주의자들 또한 거기에 크든 작든 분명히 기여를 했다. 그러나 무엇이 그들을 추동했는가? 주꼬프는 말하고 있다. “첫째도 부요, 둘째도 부요, 셋째도 부, 그것도 사회의 부가 아니라 탐욕적인 개개인의 부, 이것이야말로” 관료주의자들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목표였다”. 그러한 그였기에 “탐욕적인 군부집단의 부”를 위해, 군비를 늘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군비 축소를 주장하는 말렌꼬프와, 이후에는 흐루쇼프와 대립했다.

전쟁 중에, 발달된 무기를 개발ㆍ생산하기 위해, 과학기술 전문가 집단을 우대했고, 그들의 세력이 성장했다. 이들과 군부가 결합하였고, 이들은 전후에도 국방비 지출삭감에 저항했다. 다음은 고르바쵸프 시대에 대한 언급이다.

 

국방비 지출의 삭감은 저항에 부딪쳤다. …

그리하여 로기노프(V. Loginov)는 ‘기계제작단지’에 고용되어 있는 1650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3분의 1에 불과한 560만 명만이 민간부문(비군사부문) 관련 성68)들의 관할하에 있는 기업에서 일하였다.69)

 

즉, 고용인원의 3분의 2인 1090만 명이, 군사관련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이 군비만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예를 들면, 민간용 트럭과 군수용 트럭을 함께 생산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엄청난 재원이 낭비되고 있다.

쏘련의 군사비의 증가에 대해, 바만 아자드는 다음과 같이 이유를 밝힌다.

 

1960년대 이후에 쏘련의 군사지출이 증가한 주요한 이유를, 단지 당 지도부의 낙관적인 태도에서만 찾아서는 안 되고, 증대하고 있던 국가 관료층의 이해관계에서도 이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 관료의 관점에서 보면, 군비확장 경쟁은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 간의 생존을 건 역사적인 투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쏘련 정부와 서방측, 특히 미국 정부와의 대립이었다. 이들 관료층은 당과 사회주의의 장기적인 이익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실제로 군비확장 경쟁을 계속하면서 군사부문에 대한 지출을 늘리는 것은 단지 이들 관료층의 권력기반으로서의 국가 기구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 관료층을 경제적ㆍ정치적으로 강화했다. 바로 그 때문에 이들 증대하던 관료층은 사회주의의 군사지출을 삭감할 어떤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그러한 정책이 자신들의 객관적인 이해에 반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쏘련 자신의 쏘비에뜨 이데올로기까지도 위협할” 정도의 군비확장 경쟁 전략을 사회주의에 강요하는 데에 성공했고, 세계혁명을 크게 지연시켰던 것이다.70)

 

즉 군부와 군수공업관련 과학기술 전문가, 국가관료들이 결탁하여, 거대한 재원을 자신에게 끌어오고,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의 인민에 대한 역할은, 미국의 군산복합체와 동일하다. 미쏘는 서로, 상대가 인민을 위협하고 있다고 협박하면서, 인민들의 고혈을 짜냈다.

전쟁과 더구나 그 거대한 승리는 관료주의자들을 크게 성장시켰다. 1945년 6월 24일, 모스끄바 붉은 광장에서는 전승기념 퍼레이드가 열리고, 장엄한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웅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알리는, 영웅들에 대한 진혼곡이었다. 그리고 들쥐들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살찐 들쥐들은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인민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갉아먹을 것이었다.

 

 

5. 관료주의의 승리 (1945-1956)71)

 

전쟁 이후 쓰딸린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차기권력을 두고 세 집단이 존재했다. 첫째, 쓰딸린을 이념적으로 계승할 쥐다노프였다. 그는 전쟁 동안 레닌그라드 방어전을 책임졌고, 레닌그라드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둘째는 내무인민위원 베리야였다. 셋째는 흐루쇼프였다. 베리야와 흐루쇼프는 관료주의(이후 수정주의) 세력을 대표했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1) 관료주의의 공세; “베리야의 음모”. 레닌그라드 사건(1948-1950)

 

1930년대부터 쓰딸린 지도부의 핵심 중 한 명이었던, 쥐다노프가 1948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당시 문화정책 총책임자였고 정치국원이었던 쥐다노프는, 1946-1948년까지 문화예술분야에서 부르주아적 경향과 투쟁하고 있었다. 뒤이어 레닌그라드사건(1948-1950)이 일어난다. 쥐다노프 사망 후 두 달 뒤부터 1950년까지, 쥐다노프 세력인 보즈네쎈스끼(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꾸즈네쪼프(중앙위원회의 비서), 로디오노프(Rodionov, 러시아 공화국의 수상), 레닌그라드 관리 수백 명이, 해임되고 총살을 당한다. 그들은 가장 영향력 있는 새로운 간부진의 일원이었다. 흐루쇼프는, 그들이 제거된 것은 베리야의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말렌꼬프는 그것을 방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쥐다노프의 죽음은 베리야72)에 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또 그의 추종자들이 대량으로 제거되면서, 쓰딸린의 후계세력이 제거되었다. 이는 쓰딸린의 패배와 관료주의(이후 수정주의) 세력의 승리를 알리는 것이었다. 쓰딸린은 보즈네쎈스끼 등을 처벌하는 것을 반대했었다73). 쥐다노프가 사망하고 그 측근들이 제거된 이후에, 쓰딸린의 노선을 이어가려던 세력은 무기력했다. 말렌꼬프는 당시에 이미, 베리야와 거래를 하고 있었고, 몰로또프는 쓰딸린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까가노비치도 무기력했다.

 

2) 쓰딸린의 투쟁

 

쓰딸린은 당시에 사태의 심각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루도 마르텐스의 글을 보자.

 

흐루쇼프에 따르면, 쓰딸린은 1952년 말의 의사들의 음모74) 이후에 정치국 위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네들은 새끼 고양이처럼 눈이 멀었다: 내가 없이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국가는 누가 적인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네들 때문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75)

 

쓰딸린은 정치국원, 즉 흐루쇼프, 베리야 등이 국가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가를 무너뜨릴 세력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정치국원들에 대한 전쟁선포와 다름없는 말이다. 그는 이미, 쥐다노프의 의문의 죽음에 대해, 1951년 말에 조사를 시작하여, 베리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같은 시기, 그루지야76) 공산당 지도자가 공공 자금을 전용하고, 국가 재산을 도둑질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들은 영국 및 미국의 제국주의와 연결된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으로 기소되었다. 그 결과로서 일어난 그루지야에서의 숙청으로, 중앙위원회 임원의 반 이상이 면직을 당했는데, 그들은 베리야의 추종자들로 알려졌다. 새로운 그루지야 제1서기장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숙청은 ‘쓰딸린 동지의 개인적인 지시’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언급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전 연방 공산당 대회가 끝나고,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25명을 선출하여야 했다. 그때 쓰딸린은, 흐루쇼프, 베리야, 미꼬얀 등을 제거하고, 젊은 세력을 새로이 선발하려고 했다.

1952년 열린 제19차 당 대회에서, 쓰딸린이 쓴 것이 확실한 글을, 말렌꼬프가 보고한다. 이 글은 관료주의자들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를 선포하는 글이다. 여기에는 당시에 만개한 관료주의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루도 마르텐스의 설명과 함께 들어보자.

 

제19차 당 대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말렌꼬프는 공산당의 주된 네 가지 약점을 강조했다. … 말렌꼬프는 많은 관료화된 간부진이 평당원들의 비판과 통제를 거부했으며, 형식주의자이자 부주의한 이들이라고 강조했다.

‘우리의 오류와 부족함, 약점과 병폐를 폭로하고 극복하는 원칙적 방식인 자아비판과 특히 아래로부터의 비판이, 공산당 모든 기구에서 그리고 어디에서도 결코 충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

‘인민들이 비판을 했다고 박해받고 희생당한 사례가 있다. 우리는, 공산당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을 공언하는 데에 결코 싫증내지 않지만, 아래로부터의 비판에 사실상 견딜 수 없으며, 그것을 억누르고, 자신을 비판한 이들에 대해서 보복을 하는 책임 있는 (간부: 역자) 노동자들을 여전히 만난다. 우리는 비판과 자아비판에 대한 관료주의적인 태도가 … 창발성을 죽이고 … 관료주의적인 반당적인 습성과 당의 불구대천의 원수들로 일부 조직을 감염시킨 수많은 사례를 알고 있다.

‘여러 조직과 기관 활동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가 약화된 곳이 … 어디든지 간에, 거기에서 … 관료주의와 퇴보, 그리고 심지어는 공산당 기구의 개개 부문에서 부패도 변함없이 발생한다. …’

성취가 당의 대오에 자기만족적 경향을 낳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운 듯이 가장하게 만들고, 자기도취되고, 이미 얻은 승리에 안주하고, 과거의 공헌을 밑천으로 살아가려는 욕구가 일부 인민들에게서 생겨났다. … 지도자들은 … 드물지 않게 허영심과 자기찬양을 목적으로, 활동적인 당원들을 모아 모임이나 총회를 개최하며, 결과적으로 사업의 오류와 결함, 병폐와 단점이 폭로되어 비판받지 않는다. … 나태한 정신이 우리 공산당 조직에 침투했다.’

이것은 1930년대 쓰딸린의 글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였다: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활동적인 당원들을 억압하며, 부주의하고, 공산주의의 적들처럼 행동하는 관료주의화된 이들을 비판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평당원들에게 호소하라. 쓰딸린이 수정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비판의 물결을 다시 한 번 더 분출시키고자 했던 이 글은 사람들을 경탄스럽게 한다.77)

 

관료주의가 발생하는 이유가 “아래로부터의 비판의 부족”, “대중들의 통제가 약화”된 것,  “성취가 당의 대오에 자기만족적 경향을 낳”은 것에 있다고 지적한다. 관료주의자들은 패거리를 만들어, 자신을 비판하는 인민들을 박해하고 희생시키고 있고, 결국 공산당 기구에 부패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둘째로, 말렌꼬프는 공산당의 규율을 무시하고 소유자처럼 행동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탄했다:

‘공산당과 정부의 결정에 대한 형식적 태도, 그리고 그것을 수행하는 데 있어 수동성은 아주 무자비하게 뿌리 뽑아야 하는 악덕이다. 공산당은 일에 대한 흥미보다, 그들 자신의 편안함을 더 원하는 수동적이고 무관심한 집행부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은 끈기 있게 헌신적으로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책임지고 있는 기업이 국가의 기업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것들을 그들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만들려고 하는, 집행부 인사들이 상당히 많다. … 그곳에서 … 그들은 …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공산당의 결정과 쏘비에뜨의 법은 자신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믿는 상당히 많은 수의 집행부 인사들이 있다.’

세 번째로, 말렌꼬프는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는 파벌을 형성하고, 불법적으로 재산을 불린 간부들을 공격했다.

‘몇몇 공직자들은 집단 농장의 재산을 좀도둑질 하는 데 전념하였다. … 이들은 공유지를 그들 사유지처럼 사용하고, 집단 농장 위원회와 의장들에게 강요하여, 곡물, 고기, 우유, 다른 농산물을 저렴하게, 심지어는 공짜로 그들에게 공급하도록 강요했다.

‘몇몇 우리 집행부 사람들은 정치 및 업무 능력을 보고 직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혈연, 친밀성, 지연 등을 고려하여 선택하였다. … 직원의 선출과 승진에 관한 문제에서, 공산당 노선의 그러한 왜곡으로 인해, 상호 보험의 관계를 맺고, 공산당과 국가의 이해보다, 자신들의 이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친밀한 패거리들이 몇몇 조직에서 생겼다. 그러한 사태가 대개 퇴행과 부패를 초래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78)

 

파벌을 만들어, 그 힘을 이용하여 생산수단, 즉 기업과 토지를 사적 소유물로 만들고 있었다. 즉 이미 자본가처럼 행동하는 사람들, 장래의 자본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고 있었다.

 

끝으로, 말렌꼬프는 이데올로기 사업을 경시하여, 부르주아 경향을 또다시 출현시키고,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도록 허용하는, 간부진을 비판했다.

‘많은 공산당 조직들은 이데올로기 사업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있으며, 이는 공산당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많은 조직에서 태만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약화된다면, 그 효과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흔적과, 사적 소유의 정신과 도덕이라는 잔재가 있다. 이러한 잔재들은 … 매우 집요하여 그들의 지배력이 강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그들에 맞선 결정적 투쟁이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또는 내부로부터, 쏘비에뜨 국가에 적대적인 집단들의 잔재로부터 유래하는, 이질적인 관점, 사상, 정서의 침투로부터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  …

‘우리 당의 일부 조직은 경제 업무에 그들의 모든 주의를 쏟고 이데올로기 문제들은 잊는 경향이 있다. …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한 주의가 이완될 때는 언제나, 우리에게 적대적인 관점과 사고의 부활에 우호적인 토양이 생겨난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 조직의 통제범위 밖의 이데올로기 사업 분야들이 있다면, 공산당 지도력과 영향력이 약해진 분야가 있다면, 이질적 요소들과 공산당에 의해 분쇄된 반레닌주의 조직들의 잔재들이, 이러한 분야들을 지배하려고 할 것이다.’79)

 

경제 업무에 모든 주의를 쏟고 이데올로기 문제들은 잊어버렸다.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그 효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사적소유의 정신과 도덕이 부활하고 있었다.

이미 관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세력으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적소유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생산수단(기업과 토지)를 사적으로 이용하며, 사실상 사적 소유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미 잠재적 자본가 계급이 출현하고 있었다.

 

 

3) 베리야의 반격 : 쓰딸린 암살(1953.3.5)

 

루도 마르텐스는 “쓰딸린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쓰딸린이 죽기 몇 달 전, 그를 보호하던 모든 보안체제가 해체되었다. 그의 개인 비서이며, 1928년부터 훌륭한 능력으로 그를 도왔던 알렉산더 쁘로스크레비체프(Alexander Proskrebychev)가 해고되어 가택연금 당했다. 그는 비밀문서를 변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25년 동안 쓰딸린의 개인 보안실장이었던 니꼴라이 블라시끄(Nikolay Vlasik) 중령은 1952년 12월 16일에 체포되었고, 몇 주 뒤 감옥에서 죽었다. 쓰딸린의 경호 책임자이자, 크렘린 경비대의 부사령관인 뻬쩨르 꼬신낀(Peter Kosynkin) 소장은 1953년 2월 17일 ‘심장 마비’로 죽었다. 제랴빈(Deriabin)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쓰딸린을 보호하는 모든 경호체계를 해체하는 과정은 계획적이고 매우 교묘하게 수행된 일이었다.’

오직 베리야만이 그런 음모를 준비할 수 있었다.

3월 1일, 23시, 경호원들이, 쓰딸린이 자신의 집 방바닥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전화로 정치국의 임원들에게 연락했다. 흐루쇼프는 자신 또한 도착했고, (그후: 역자) 각자가 집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발작 이후 12시간 뒤에 쓰딸린은 처음으로 치료를 받았다. 그는 3월 5일 죽었다. 루이스(Lewis)와 화이트헤드(Whitehead)는 이렇게 적었다:

‘몇몇 역사가들은 미리 계획된 살인의 증거를 찾았다. 아브두라하만 아브또르하노프(Abdurakhaman Avtorkhanov)는 1930년대의 경쟁자들(베리야, 흐루쇼프: 인용자)을 숙청하려고, 쓰딸린이 눈에 보이게 분명한 계획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보았다.’80)

 

쓰딸린은 독쏘전쟁 시기에 극도로 과로하였다. 건강이 파괴되었고, 전후에 정치활동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1950년에 들어서면 더욱 심각해져서, 정치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로 인해 판단력이 약화되어, “눈에 보이게 분명한 계획”을 하여, 역습의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 있다. 당시에 이미 관료주의자들이 당의 상층부와 중간부위를 장악하였다. 그들이 주도권을 이미 쥐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불리한 역관계를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평당원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즉, 중국의 마오쩌뚱처럼 “문화대혁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늙고 병든 쓰딸린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쓰딸린이 죽은 후 즉시, 정치국(최고회의 간부회)이 소집되었다. 베리야는 말렌꼬프를 장관 회의의 의장(수상; 인용자)으로 추천했고, 말렌꼬프는 베리야를 부의장 및 내무부 장관과 국가 보안국의 장관으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 그 뒤 몇 달 동안 베리야는 정치무대를 지배했다. 흐루쇼프는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시기를 경과하고 있었다.’라고 적었다.

일단 보안국의 지도자로 임명된 베리야는 쓰딸린의 비서였던 쁘로스크레비체프를 체포했고, 그 다음에는 쥐다노프의 의문스런 죽음에 대한 조사를 지휘하던 류민을 체포했다. … 4월까지도, 베리야는 그의 고향인 그루지야에서 반쿠데타(counter-coup)를 준비하였다. 그는 또 다시 자기 사람을 공산당과 국가의 최고위직에 임명했다.81)

 

 

4) 관료주의자들의 이전투구 : 불가능해지는 계획경제(1953-1956)

 

맑스-레닌주의 지도부는 제거되었다. 쓰딸린을 계승했다는 말렌꼬프는 베리야에 종속되었다. 그는 관료주의의 준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1953년 4월 11일 각료회의의 한 포고령으로 성들(그 산하 부서의 장)의 정책결정권이 강화되었다. 성들은 정해진 테두리 안에서 관할하에 있는 기업의 직원편제를 바꾸고, 설비, 원료 및 재원을 재분배하며, 중소 규모의 투자계획을 승인하는 것 등을 할 수 있었다.82)

 

성들(그 산하 부서의 장)의 정책결정권이 강화되고 있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중앙의 통제(계획과 집행)에서 벗어나, 장관 등 관료집단이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도시와 농촌의 좀더 높은 소득, 소비재 생산 및 투자를 좀더 늘리려는 계획, 대규모 농업프로그램, 주택건설 및 그밖의 소비자 써비스의 확대, 그리고 이와 동시에 기간공업의 지속적 성장, 비행기와 폭탄 분야에서 미국의 높은 우위가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군부의 주장, 이 모든 것들은 유지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프로그램이었다. 흐루쇼프에 의해 정치적으로 약화된 말렌꼬프 체제는 재원을 둘러싼 청구자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할 만큼 강력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몰락하였다.83)

 

농업부분, 공업부분, 생산재 공업, 소비재 공업, 군부 등등에 똬리를 튼 관료주의자들이, 정부재원을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진흙탕 싸움을 하고 있다. 이들 들쥐들은 “사회적 부”가 아니라 “배타적인 집단의 부”를 위해, 그리고 그 집단 보스의 “개인적 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다. 권력의 최상층부라고 다르지 않다. 흐루쇼프와 말렌꼬프는 권력을 독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었다.

오직 폐쇄된 각각의 집단 사이의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투쟁하는 각 집단을 통제할 기구는 더 이상 없다. 계획경제는 불가능하다. 생산은 점차 무정부 상태가 된다. 사회의 부를 목적의식적으로 계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점차로 인간이 생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개체ㆍ집단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적자생존이 부활한다. 인간은 다시 동물계로 퇴보한다. 엥엘스는 말했다.

 

사회에 의한 생산 수단의 점유 획득과 함께 상품생산은 제거되며, 그럼으로써 생산자에 대한 생산물의 지배도 제거된다.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 상태는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조직화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개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중지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결정적으로 동물계를 벗어나고, 동물적 생존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참으로 인간적인 생존 조건의 길로 들어선다. … 이제까지 역사를 지배해온 객관적이고 외적인 힘들은 인간의 자신의 통제 아래로 들어온다. 인간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게 되며, 인간들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적 원인들은, 이때부터 비로소 주로, 점점 더 그들이 원하는 작용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필연의 왕국으로부터 자유의 왕국으로의 인류의 비약이다.84)

 

자유의 왕국으로 비약하려던 인류는 다시 추락하고 있었다.

 

 

6. 수정주의 시대(1956-1991)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가 열린다. 흐루쇼프는 비밀연설에서 쓰딸린을 격하한다. 당 대회에서는 또한 (1) 제국주의와의 전쟁 불가피론이 부정되고 평화공존론, (2)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3) 사회주의로의 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이 주장된다. 이 시기부터 일반적으로 수정주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면 수정주의는 어떻게 발생하였는가를 살펴보자.

 

 

1) 관료주의가 수정주의로 발전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루도 마르텐스의 글이다.

 

(쓰딸린 사후에: 인용자) 흐루쇼프는 베리야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는 먼저 베리야의 ‘부하’인 말렌꼬프로부터 지원을 얻고, 그 다음에 개별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접촉한 사람은 미꼬얀으로, 그는 베리야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1953년 6월 24일 최고회의 간부회(정치국)가 소집되었고, 베리야를 체포할 수 있었다. 미꼬얀은 베리야가 ‘우리의 비판을 마음에 새기어, 스스로 교정하려고 했다’라고 진술했다. 사전에 준비된 신호에 따라, 주꼬프가 지휘하는 11명의 원수들과 장군들이 방으로 들어가 베리야를 체포했고, 그는 1953년 12월 23일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총살당했다.85)

 

베리야를 제거하는 과정은 조직폭력배의 수준이다. 석달 후인 1953년 9월86)에, 흐루쇼프는 제1서기가 된다. 1955년 2월에는 말렌꼬프를 수상 자리에서 제거한다. 1957년 6월에는 까가노비치, 말렌꼬프, 몰로토프 등 쓰딸린을 지지하는 세력이,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흐루쇼프를 축출하려 시도했다. 흐루쇼프는 다시 주꼬프의 힘을 이용하여, 다수를 획득하여 승리한다. 주꼬프는 그때, 비행기를 동원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중앙위원회 위원들을 모스끄바로 실어왔다. 그러나 네 달 뒤인 10월에 흐루쇼프는 주꼬프마저 중앙위원회에서 제거한다. 그리고 1958년 3월에는 수장직까지 겸하며, 권력을 완전히 틀어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알렉 노브는 말렌꼬프의 실각에 대해 말한다.

 

정확히 무엇이 궁극적으로, 지도부의 대다수로 하여금 말렌꼬프를 제거하게끔 했는지에 관해서, 어떤 종류의 공개적 논의도 없었으므로, 아직 명확하지 않다.87)

 

과거를 돌이켜보자. 뜨로츠끼파와 부하린파 등과 쓰딸린은 공개적으로 논쟁했고, 뜨로츠기파들은 당원들의 총투표를 통해 패배했고 축출되었다. 부하린은 논쟁에서 패배했지만 여전히 고위직을 유지했고, 이후 제국주의자들과 연계된 반혁명조직에서 활동하여 체포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집권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어떤 종류의 공개적 논의도 없었다”. 단지 존재하는 것은 음모와 파벌 간의 이합집산, 권력투쟁뿐이다. 그리고 이후 브레즈네프, 고르바쵸프 시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것은 중요하다. 이들에게는 권력 그 자체가 최고의 목표이다. 그들은 오직 권력을 위해 이합집산할 뿐이다.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목표이다.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최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이제 누구와 손을 잡고 누구를 물리치고, 또 누구를 중립화하여야 할 것인가.

적대 세력을 보자. 첫째는 인민이다. 우리는 공적 부와 권력을 사유화했다. 우리는 그것을 인민들에게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인민들은 예전과 같이 어리숙하지 않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1948-49년에 이미 전쟁복구가 완료되었다. 1950년대도 경제가 계속 성장했다. 인민들은 문화적ㆍ정치적으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당과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를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억압적인 국가기구와 당의 권력도 점차적으로 사회 속으로 잠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와 당의 정치권력, 인간에 대한 지배 자체가 점차 축소되고, 마침내 국가와 당이 인민들의 자치로 해소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민들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 대해 요구하며, 권력을 공유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아가 점차로 정치기구 자체를 축소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이들의 요구를 억압하여야 한다. 둘째, 쓰딸린 세력이다. 이들은 인민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또 인민들의 요구를 실현하려 한다. 매우 위험한 최대의 정적이다. 셋째는 국외에 존재하는 맑스-레닌주의 자들이다. 이들은 국내의 쓰딸린 세력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다. 공산권에는 집권세력으로 존재한다. 자본주의 안에도 있다. 넷째는, 맑스-레닌주의 이데올기 그 자체이다. 이것은 우리의 적들 모두의 강력한 무기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아군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물론 우리 자신의 핵심 패거리들이다. 이를 핵으로 관료세력을 최대한 끌어 모아야 한다. 둘째,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 세력을 끌어 모아 맑스-레닌주의와 싸워야 한다. 물론 정면 승부는 안 된다. 이데올로기를 왜곡시켜야 한다. 여전히 존재하는 멘쉐비끼, 뜨로츠끼파, 부하린파, 사민주의 등등 청산된 기회주의 세력을 끌어 모아야 한다. 이들은 풍부한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학계 상층부에는 현란하고 노련하게 맑스-레닌주의의 정수를 거세할 저명한 인사들이 많다. 셋째는 국외세력이다. 공산권과 자본주의권에 존재하는 사민주의 세력과 연대하여야 한다.

아주 중요한 세력이 또 하나 있다. 타협을 해서, 중립화시키고, 제한적으로 제휴할 세력이 있다. 제국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가장 강력한 세력이다. 우리는 국내에서 반인민적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관료지배층과 인민 사이에는 균열이 생길 것이다. 국가는 예전처럼 강력할 수 없다. 만약 제국주의자들과 충돌이 발생하면, 우리는 제국주의자들과 인민들에게 포위될 수 있다. 제국주의에게 양보하고 그들과 타협하여야 한다.

이러한 정세를 돌파할 가장 핵심 고리는 반쓰딸린주의이다. 이 슬로건으로, 현 시기 가장 위험한 적인 국내의 맑스-레닌주의자(“쓰딸린주의자”)를 분쇄할 수 있다. 국외의 사민주의자들과 연대하여, 외국의 집권 맑스-레닌주의 공산당을 타도할 수 있다. “쓰딸린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우회적으로 공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또한 이를 통해 제국주의자들과 타협하고 제휴할 수 있다.

흐루쇼프는 제20차 당 대회의 “비밀연설”에서 반쓰딸린주의를 세계에 선언했다. 그러나 물론 정면승부를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비밀연설”을 치밀하게 연구한 그로버 퍼는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흐루쇼프가 “비밀연설”에서 제시한 증거는: 인용자)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거짓말이고, 그 한 가지에 대해 나는 진실임을 입증할 수도 없고, 거짓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88)

 

제20차 당 대회에서 선언된 내용을 다시 살펴보자. (1) 제국주의와의 전쟁 불가피론이 부정되고, 평화공존론 채택: 이는 제국주의자들에 대해 타협을 제안한 것이다.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평화공존론은 레닌시대부터 제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그는 “평화공존론”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으로 제기하여, 결과적으로 식민지 국가들과 제국주의자들과의 평화공존, 자본주의 국가 내부에서의 자본과 노동의 평화공존을 내포하게 되었다. 식민지 해방투쟁과 계급투쟁을 억제하여, 제국주의자들의 편을 들고 있었다. 제국주의와의 타협을 위한 공물인 셈이다. (2)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다양성, (3) 사회주의로의 혁명의 평화적 발전 가능성: 이는 레닌이 오래 전에 비판한, 사민주의의 내용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싸우는 맑스-레닌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사민주의자들과 연대를 선언하는 내용이다. 또한 맑스-레닌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혁명을 사실상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타협도 의미한다.

사적 개인ㆍ폐쇄된 집단의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은 처음에 관료주의 속에서 발전하였다. 당시에 그들의 부와 권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관료주의 속에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이제 국가권력을 잡았다. 사적 권력과 부가 거대해진 만큼, 적대세력 또한 거대해졌다. 실체가 금방 폭로되는 관료주의를 가지고는 자신들을 지킬 수도 없었다. 맑스-레닌주의라는 과학을 가진 적들과 싸워 이길 수도 없다. 자신들의 세력을 최대한 결집하고, 적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체계적인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대부분 이미 있었다. 사회주의 내의 우익 기회주의, 즉 부르주아에게 굴복하고 타협하는 수정주의가 그들의 이익에 가장 잘 어울렸다.

 

 

2) 수정주의의 전개

 

여기서 인류의 역사에서, 무계급 원시공산사회에서 계급사회가 어떻게 발생했는가를 살펴보자. 쏘련에서의 사태전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수천 년 전, 씨족을 기본 단위로 한 공동체 사회가, 노예제라는 계급사회로 발전되어 가던 시대에,

 

약탈 전쟁은 최고 군사 지휘자의 권력뿐만 아니라, 하급 지휘관들의 권력도 강화하였다; 관습적으로 동일한 가족 중에서 후계자를 선출하던 것이, 특히 부권제가 도입된 이래 점차 세습제로 이행했는데, 세습제는 처음에는 용인되는 수준이었으나, 이후에는 요구되는 것이 되었고, 마침내는 찬탈되는 것이 되었다; 세습적 왕권(최고 군사 지휘자: 인용자)과 세습적 귀족(하급 지휘관: 인용자)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이리하여 씨족제도의 기관들은 인민 속의, 즉 씨족, 프라트리(몇 개의 씨쪽 집단으로 구성: 인용자), 부족(몇 개의 프라트리 집단으로 구성: 인용자) 속의 자기의 뿌리와 점차로 유리되었으며, 전체 씨족 제도가 자기의 대립물로 전화하였다: 전체 씨족 제도는 자기 자신의 일을 자유롭게 처리하기 위한 부족의 조직에서 이웃사람들을 약탈하고 억압하기 위한 조직으로 전화했으며, 이에 따라 그 기관은 민의의 도구에서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립기관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만일 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 성원들을 부자와 빈자로 분열(계급으로 분열: 인용자)시키지 않았다면, “동일한 씨족 내부에서 재산상의 차이가 씨족원들의 이해와 통일성을, 그들 사이의 적대로 전화시키지”(맑스) 않았다면, 만일 노예제가 확대된 결과, 자신의 노동을 통한 생계수단 획득을, 노예만이 해야 할 일로, 또 그것을 약탈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게 되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89)

 

씨족 공동체 사회에는 군사지휘자와 그 하급 지휘관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점차로 권력을 찬탈하면서 왕과 귀족으로 발전한다. 이때 그들이 지휘하는 “그 기관은 민의의 도구에서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립기관으로 전화하였다”. 그러나 최고 군사 지휘자와 하급 지휘관들의 의지만으로는,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립기관을 만들 수 없다. 씨족 공동체 사회가 유지된다면, 그리하여 그들의 단결이 유지되고, 착취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지배와 피지배는 불필요하고, 용납될 수도 없다. 부에 대한 탐욕이 씨족 성원들을 부자와 빈자로 분열시켜야, 즉 씨족성원이 계급으로 분열되어야 가능하다. 부에 대한 탐욕이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착취ㆍ수탈을 발생시킨다. 착취ㆍ수탈자는 부자가 된다. 피착취ㆍ수탈자는 빈자가 된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착취ㆍ수탈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빈자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폭력기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국가이다. 부자들은 단결하여 씨족 사회에 존재하던 군사지휘자를 왕으로 옹립하고, 그 하급 지휘관들은 귀족으로 된다.

쏘련 사회에서는 관료가 장악한 당과 국가가 바로 이렇게, 1991년에 “민의의 도구에서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립기관으로 전화하였다.” 초대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쏘련 시기에 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러시아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의장이었다. “씨족제도의 기관들이 자기의 뿌리(씨족공동체)와 점차로 유리되었듯이”, 흐루쇼프의 수정주의 권력도 자기의 뿌리인 사회주의 사회와 점차로 유리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전체 씨족 제도(공동체사회)가 자기의 대립물(계급사회)로 전화하였듯이”, 사회주의 또한 1991년에 자신이 대립물인 계급사회(자본주의)로 전화하였다.

흐루쇼프가 집권하고 수정주의가 발생한 것은, 사회주의라는 공동체 사회에 존재하는 민의의 도구인 쏘비에뜨 국가가 “인민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자립기관으로 전화하는” 과정을 단지 시작했을 뿐이다. 그 과정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부에 대한 탐욕이 사회주의 전체 구성원들을 부자와 빈자, 계급으로 분열시켜야만 했다. 상품ㆍ화폐경제만이 그러한 작용을 할 수 있다. 엥엘스는 상품ㆍ화폐경제가 경제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설명한다.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가 상품 그 자체에 내재된 가치 형태를 화폐형태로 한층 발전시키면, 지금까지 가치 속에 숨어 있던 갖가지 맹아들이 즉각 표면에 나타나게 된다.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작용은 상품 형태의 일반화이다. 화폐는 이제까지 직접적 자가소비를 위해 생산되던 대상들에 대해서도 상품 형태를 강요하며, 그것을 교환 속으로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상품형태와 화폐는, 생산을 위해 직접 사회화된 공동체 내부의 살림에 침입하여, 공동체의 끈을 차례차례 끊어버리고 공동체를 일군의 사적 생산자로 해체시켜버린다. 화폐는 처음에는, 인도에서 볼 수 있다시피 토지의 공동 경작을 개별경작으로 바꾸어버린다; 다음으로 화폐는, 아직 때때로 반복되는 재분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지의 공동 소유를 결정적인 배분에 의해 해체시켜 버린다(예컨대 모젤 유역의 게회퍼샤프트에서 그러하고, 또한 러시아의 공동체에서도 그러한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화폐는 아직 공동소유로 남아있는 그 밖의 삼림과 방목지도 분배하도록 강요한다. 생산의 발전에 기초한 다른 원인들이 이 과정에 협력한다 하더라도, 그 원인들이 공동체에 작용을 미치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어디까지나 화폐이다. 그러고 설사 뒤링의 경제공동체가 그 언젠가 실현된다 하더라도, 화폐는 역시 그러한 자연 필연성을 가지고서 어떠한 “법률 및 행정 규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경제 공동체를 해체시켜 버릴 것이 틀림없다.90)

 

쏘련은 공산주의로 발전하지 못했다. 사회주의에는 자본주의 잔재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상품과 화폐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상품과 화폐의 역할과 활동범위는 자본주의와 비교하여 결정적으로 제한된다. 사회주의에서 화폐는 노동력을 구매할 수 없다. 이는 법적으로도 금지된다.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다. 국영기업들 내에서 이전한다. 그 생산수단이 기업 간에 물질적으로는 이전해도, 모두가 국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소유권의 이전은 없다. 교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품과 화폐는 존재한다. 국유화된 공업과 집단적 소유인 집단농장 간에는, 두 개의 공동체 간에 서로의 생산물을 교환했다. 여기에서는 상품ㆍ화폐 관계가 존재한다. 소비재의 경우 국영상점에서 루블을 주고, 소비재를 분배받는다. 사회주의 원칙은 노동에 따른 분배이다. 노동자는 기업소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지 않는다. 그는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자로서 생산한다. 그래서 그가 매월 받는 루블은 몇 시간의 노동을 했다는 증명서이다. 그것은 화폐가 아니다. 국영상점에서, 루블과 소비재는 교환되는 것이 아니다(그럴 경우 소비재는 상품이고 루블은 화폐가 된다). 이때에 루블은 노동증명서이다. 그럼에도 교환되는 것처럼 보이고, 루블은 화폐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태가 다르다.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화폐와 교환한다. 그리고 다시 시장에서 그 화폐와 상품을 교환한다.

사회주의에서 이렇게 상품과 화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은, 커다란 약점이다. 수정주의자들은 이를 이용했다. 그들은 개인적 부에 대한 탐욕 때문에, 상품ㆍ화폐경제를 지속적으로 확장시켰다. 이는 의도했든 아니었든 간에 공동체를 부자와 빈자로 분열하게 만들었다. 쏘련에서, “상품형태와 화폐가, 생산을 위해 직접 사회화된 공동체 내부의 살림에 침입하여, 공동체의 끈을 차례차례 끊어버리고 공동체를 일군의 사적 생산자로 해체시켜버리”는 모습을 보자.

1988년 고르바쵸프는 협동조합을 허용했다. 이는 사실상의 사기업이었다. “독점적 국가부문과 경쟁하기 위해서, 소규모 공업, 써비스, 요식 및 상업협동조합91)”이 만들어졌다.

 

협동조합의 활동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재화 및 써비스 생산은 1989년 400억 루블에서, 1990년에 700억 루블로 증가하였다. 1990년 말에, 많은 경우 아주 소규모인 26만 개의 협동조합들이 시간제 직원을 포함하여 620만 명을 고용하고 있었지만, 그 중 상당수는 (재정적 통제를 피하는 수단으로서) 국영기업과 직접 연결되어(혹은 심지어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공업에서 임대된 기업들은 480억 루불 상당의 재화를 생산하였다.92)

 

사회주의사회는 “사회화된 공동체”이다. 거기에 협동조합으로 위장한 사기업이 “공동체 내부의 살림”에 침입하여, “공동체의 끈을 차례차례 끊어버리고, 공동체를 일군의 사적 생산자로 해체시켜버리”고 있다. 국영기업까지 해체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상품ㆍ화폐 경제가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결과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화폐는 아직 공동소유로 남아있는 그 밖의 삼림과 방목지도 분배하도록 강요”했듯이, 공동소유물인 생산수단을 분배하도록 만들었다. 쏘련에서 자본주의는 부활했다. “화폐는 역시 그러한 자연 필연성을 가지고서 어떠한 ‘인민의 요구에도, 사회주의 법이 선언하는 공동소유형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경제 공동체를 해체시켜 버렸다.” 아래에서 그것을 다시 확인하도록 하자.

 

 

3) 수정주의의 몇 가지 측면들

 

정치적 측면을 보자. 그들은 “전 인민의 국가”, “전 인민의 당”을 선언했다. 맑스-레닌주의의 핵심 중 하나인 국가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폭력기구이다. 저들은, 사회에서 계급이 사라지고 사회구성원 전체가 인민이 되어, 국가 기구가 “전 인민의 이익과 의지를 표현하는 기구로 전화하였다”93)고 한다. 그러나 계급이 사라지면, 폭력이 불필요해진다. 그러면 국가는 “전 인민의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 그리곤 “인간에 대한 지배를 대신하여, 사물에 대한 관리와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나타난다.”(엥엘스) 그것은 “전 인민의 이익과 의지를 표현하는 기구”이겠지만, 국가는 아니다. 수천 년 전 국가가 나타나기 전에도 존재했던, 씨족공동체 사회의 기구들처럼, 공동사무를 관장하는 자치기구이다.

이들은 자신의 권력 기구인 국가를 강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사기 행각을 벌였다. 그들의 말처럼 쏘련에서는 자본가 계급이 사라졌다. 사회구성원이 인민들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만큼 계급에 대한 폭력은 불필요해지고 있었다. 국가기구와 그 권력은 축소되어야 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권력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국가론을 부정하여야 했다. 국내외의 사민주의 세력 또한 계급의 폭력기구로서의 국가론을 부정한다. 이들과 연대를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전 인민의 국가”란, 쏘련의 국가가 더 이상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관료들의 국가이고, 언젠가는 자본가 국가로 전화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경제적 측면을 살펴보자.

쏘련에는 트랙터, 콤바인 등 현대적 농업장비를 국가가 소유하고 관리(정비, 갱신, 임대)하였다. 농촌지역마다 농기계관리소(MTS)를 설치하였다. 기계를 사용한 대가로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받았다. 그러나 1958년, 흐루쇼프는 MTS를 폐지하고, 장비를 농민들에게 매각하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심각했다.

 

① 1958년의 개혁은 꼴호즈(집단농장; 인용자)에 과도한 부담을 지웠고 조달가격94)은 이 부담을 충분히 떠맡지 못하였다. 꼴호즈들은 (국가로부터 구매한: 인용자) 농기계 비용을 너무 많이, 그것도 너무 빨리 지불해야만 하였다. 그 결과 투자가 감축되고, 농민의 급료95)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② MTS의 폐지는 기계의 정비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거의 모든 꼴호즈들은 고급 장비를 적절하게 정비하고, 수리할 작업장이나 숙련 인력을 갖지 못하고 있었는데, MTS가 폐지됨으로써 이들 고급 장비가 꼴호즈들에게 여기저기로 분산되었다. 많은 기계공과 트랙터 운전수(이들은 국유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이다: 역자)들은 꼴호즈 농민이 되느니, 차라리 마을을 떠나는 쪽을 택했다.96)

 

이러한 문제는 이후 고르바쵸프 시기까지도 농업을 정체에 빠뜨렸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된 것이었다. 1952년에, 쓰딸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에서 논한다.

 

(MTS를 폐지하고, 농기계를 꼴호즈에 판매하자는 사람들: 인용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꼴호즈에 대한 투자는 주로 꼴호즈 농촌의 문화적 수요에 지출하여야 할 것이고, 농업생산의 수요를 위해서 종전대로 그 대부분의 투자를 국가가 부담하여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꼴호즈가 이러한 부담을 전부 감당할 능력이 충분한 만큼, 국가를 이러한 부담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국가는 소비품을 풍요하게 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투자를 하여야 한다

이러한 논거는 성립될 수 없다. … MTS의 기계라든가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은 우리나라의 현 조건하에서 농업의 운명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누구나 우리나라의 농업생산의 거대한 장성, 즉 곡물, 면화, 아마, 사탕무우 등의 생산의 장성을 기뻐하고 있다. 그런 이 장성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 장성의 근원은 이 모든 생산부문에 이용되고 있는 현대적 기술에 있으며, 수다한 현대적 기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비단 기술 일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개선되어야 하며, 낡은 기술은 폐기되고 새로운 기술로 교체되어야 하며,  또 새로운 기술은 보다 새로운 기술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 그런데 수십만 대의 차륜식 트랙터를 없애고 이를 무한궤도식 트랙터로 교체하며, 수만 대의 낡은 콤바인을 새로운 콤바인으로 교체하며, 또 예컨대 새로운 공예 작물용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6년 내지 8년 후에야 비로소 보상될 수 있는 수십억 루블의 지출을 부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꼴호즈들이 백만장자라 하더라도 과연 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감당할 수 없다. … 이러한 지출은 오직 국가만이 부담할 수 있다. …

이렇다면 MTS를 꼴호즈의 소유로 판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꼴호즈에 많은 손실을 주며, 꼴호즈를 영락(零落)시키며, 농업의 기계화를 파탄시키며, 꼴호즈의 생산속도를 저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 MTS를 꼴호즈에 판매하여, 그 소유로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하자. 그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첫째로, 꼴호즈는 기본 생산도구의 소유자로 될 것이다. 즉 꼴호즈는 우리나라의 어느 한 기업소조차 당해 보지 못한 그러한 예외적인 처지에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에서는 국유화된 기업소조차 생산도구의 소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한 처지는 꼴호즈적 소유(국가적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 소유: 인용자)를 전 인민적인 소유의 수준까지 제고시키는 데 도움이 되며, 우리나라가 사회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넘어가려는 것을 촉진시킬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러한 처지는 꼴호즈적 소유를 전 인민적 소유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할 수 있을 따름이며, 그것은 공산주의에 접근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산주의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둘째로, 상품유통의 작용범위가 확대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방대한 양의 농업생산도구가 상품유통의 궤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상품유통범위의 확대는 … 공산주의로의 우리의 전진을 저해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엥엘스는 ≪반-뒤링론에서≫ … 상품유통이 존재하는 한 뒤링의 소위 “경제공동체”는 자본주의를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였다.97)

 

흐루쇼프는, “MTS의 기계를 매각하여 농업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그의 후임자들도 결코 이를 되돌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방대한 양의 농업생산도구가 상품유통의 궤도에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이 보다 강력했기 때문이다. 집산화된 농업부문에 있는 관료보다, 국유화된 공업부문의 관료들이 힘이 더 세다. 공업부문의 관료들은 “국가를 이러한 부담에서 해방시”켰다. 그 운영비, 기계를 판매한 대금, 그리고 앞으로 판매할 대금은 이제 자신의 관리하에 들어온다. 이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전진이냐, 후퇴냐? 내 알 바 아니다. 내 갈 길을 가라! 남들이 뭐라든!

그들은 농업을 영락(零落)시켰다. 이제 공업을 영락시킬 차례이다. 1965년 이른바 꼬시긴 개혁을 실시했다. 그 단면을 보자.

 

오랜 기간, 기업의 경영업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은 총생산고였다. … 기업은 완전 독립채산제로 이행하게 되었으며, 기업의 경영 업적 평가에 새로운 원칙, 즉 현금화된 제품의 총량과 기업이 얻은 이윤을 근거로 삼는 새 원칙이 도입되었다.98)

 

이것이 이른바 “개혁의 핵심”이라고 한다.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의 차이는 무엇인가? 비누를 만든다고 가정하자. 계획경제에서는 사회적 필요량을 파악한다. 10개가 나온다 하자. 공장에 10개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생산물은 이후에 분배된다. 그 공장의 평가는 “총생산고”가 결정한다. 비누 10개를 생산하는 노동은 생산 당시부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다. 이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보자. 생산이 무정부적으로 진행된다. 15개가 만들어진다. 10개는 시장에서 팔리고 “현금화된다”. 5개는 버려진다. 이때 “현금화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10개를 만드는 노동만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현금화되지 못한 나머지 5개를 만드는 노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적 개인의 노동이고,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현금화” 여부로, 사회적 필요노동과 불필요 노동으로 심판을 받는 것은, 시장경제에 고유한 것이다. 이제 화폐가 불필요 노동이라고 규정한 노동은 다음해에는 생산을 할 수 없다. 화폐는 권력이 되고 생산을 결정한다. 이것은 계획경제가 아니다. 그런데 “개혁”은 판매에 성공하여, “현금화된 제품의 총량”(사실상 현금 그 자체)과 그 현금으로 계산된 이윤을 근거로 기업을 평가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계획경제를 포기하겠다는 말이고, 시장경제를 도입하겠다는 말이다. 상품ㆍ화폐경제를 확대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개혁”이 발생했을까? 우리는 위에서 각 부서의 관료들이 사회적 재원을 둘러싸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의복생산을 담당하는 부서와 가구생산을 담당하는 부서가 있다고 하자. 계획을 입안하는 기구에서는 의복과 가구의 사회적 필요량을 계산한다. 생산에 필요한 재원(원료, 노동력)도 결정한다. 그러나 생산부서들은 이러한 결정을 거부한다. 더 많은 재원을 얻으려 싸운다. 힘의 논리가 재원분배를 결정한다. 의복부서가 이기고, 의복은 생산량을 초과달성(!)하고, 보너스를 받는다. 의복은 남아돌고, 가구는 부족해진다. 계획경제는 난맥상을 보인다.

그러자 저명한(!) 교수님이 나타난다. 이것이 계획경제의 비효율성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양을 측정할 수 없고, 불필요한 것을 생산하여 자원을 낭비한다. 오직 화폐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기업을 총생산량으로 평가하지 말고, 팔린 것만을 가지고 평가하자. 모든 생산물을 상품으로 시장에 던져 넣고, 화폐의 판단에 맡기자. 그리하여, 화폐가 무엇을 얼마만큼 생산할지를 결정하게 하자. 화폐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그런데 화폐 역시 상품, 가장 뛰어난 일반적인 상품이다.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자신의 생산물을 지배할 수 없다. 오직 생산물만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계급사회에서) 그렇게 잘 살아왔다.

상품ㆍ화폐경제가 점점 살아나는 만큼, 기업 관리자는 자본가를 닮아간다. 또 그만큼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임금노예를 닮아간다.

 

 

7. 반혁명(1991년)

 

수정주의하에서 쏘련 경제는 여기저기서 난맥상을 보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틀은 여전히 존재했고, 위력을 잃지는 않았다. 거대한 승리의 역사가 주는 관성도 존재했다. 무엇보다도 인민들이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쏘비에뜨 인민의 실질소득이 1960-1984년 사이에 3.47%의 평균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이 시기에 생활수준이 3배가 되었다99) … 고르바초프의 긴밀한 동반자 중 한 사람인 니콜라이 리즈코프(Nikolai Ryzhkov)에 의하면, 1987년 이전 35년 동안에 쏘련의 국민소득은 6.5배 성장100)하여, 평균 연간성장률은 5.5%였다(같은 기간에 미국의 국민소득은 2.8배 상승했고, 평균 연간성장률은 3%였지만, 이를 감히 경제적 침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01)

 

그러나 수정주의하에서 꾸준히 성장한 잠재적 자본가들은 반혁명을 노리고 있었다. 1986년 제27차 당 대회에서 고르바쵸프가 집권하면서, 드디어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정치적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긴급히 수행되어야 할 사회주의 체제의 변혁(개혁이 맞을 것이다: 인용자)이 (수정주의하에서: 인용자) 25년 동안이나 지연됨으로써 자신의 이해에 지극히 민감하고 그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관료층, 사회주의를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말살하는 것에서 이익을 발견하는 계층이 악성종양처럼 비대화되었다. 사회주의의 쇄신 과정을 최종적으로 그 파괴와 해체 과정으로 전화시킨 것은 바로 이 계층,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인 계급적 적에게 무조건적으로 지지를 받은 이 계층이었다.

(1986년 쏘련 공산당: 인용자) 제27회 대회는 … 대회가 선출한 새 지도부의 구성은 커다란 역사적인 후퇴였다. 왜냐하면 국가 기구 내부에서 성장하고 있던 관료ㆍ테크노크라트 층이 당 지도부의 관건적인 전략적 지위를 점하고, 당 기구에서 조직적인 지배권을 장악한 것이 이 대회였기 때문이다. (1961년 흐루쇼프 시기: 인용자) 제22회 대회와 그후 수년 동안은 관료ㆍ테크노크라트 층이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적 기구와 기관을 지배하게 되는 전환점102)이었는데, 제27회 대회는 그들 계층과 그 정치적 대리인―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그 동반자 집단―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권력의 최고사령부, 즉 공산당 지도부에 침입하여 그 실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를 파괴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이 권력을 효과적인 무기로 전화시키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오랜 동안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제국주의는 이용 가능한 모든 물질적 수단과 선전수단을 총동원하여 쏘련공산당 지도부 내에서 당의 전면적 지배를 꾀하는 이 새로운 정파를 지원했다.103)

 

전면적인 이데올로기 공세가 이어졌다.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7개의 신문은 모두 침묵을 강요당했다. 대중 매체는 세계의 모든 반사회주의 단체에 개방되어 있다. ‘라디오 자유 유럽(Radio Free Europe)’도 ‘라디오 자유(Radio Liberty)’도 모든 대도시에 지국을 개설하고 매일 방송을 하고 있다. 미국의 우익 TV 설교자들이 모두 쏘련의 대도시 방송에 등장하고 있다. 극우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을 필두로 CIA가 지원하는 조직들이 쏘련 전역에 방송되는 프로그램들을 소유하고 있다. 존 수누누(John Sununu)나 FBI의 국장들, ‘청년공화당원회(Young Republicans)’의 간부들이 정기적으로 중앙위원회나 콤소몰(Komsomol, 청년공산동맹)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미군은 ‘군의 민주화’에 대해 강의하기 위해서 쏘련에 강사들을 파견하고 있다. 미국의 정부 고문, 경제학자, 이데올로그 및 대학교수들이 모든 연구소나 정부조직들에서 열심히 자본주의 경제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설교하고 있다. 당연히 학생 교환 프로그램이 더욱 확대되어 쏘련의 남녀가 하버드나 예일대에 수년씩 머물면서 ‘기업가’가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쏘련은 포르노나 선정적인 책을 포함한 외국의 모든 잡지와 신문에 대해서 수문을 개방하는 한편, 해외의 공산주의 신문 구독을 모두 해약했다. 이러한 광범한 이데올로기적 침투가 고르바초프와 그의 무리들의 동의하에 진행되고 있다.104)

 

그리고 마침내 관료들은 자본가가 된다. 그들의 최후의 목적은 공적재산의 횡령이었던 것이다.

 

1990년 말에 고르바초프와 그 공모자들은 수백만 명의 공산당원과 근로인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적기업의 사유화와 주식거래소 설립을 위한 법률들을 정식으로 통과시켰다. 그들은 서둘러 이들 기업의 소유권을 그것들을 경영하고 있던 관료층에게 양도했다. 인민의 국부(國富)가 이 계층에 매도되면서 어제의 경영자는 급조된 자본가로 변신하고, 자본주의 쿠데타는 정치적 영역으로부터 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공적재산의 횡령과 국가 관료층에 의한 사적 처분은 경제에서 통상적인 일이 되었다. 마피아적인 신흥 자본가층이 버섯처럼 성장하여 근로인민의 등 뒤에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했다. 고르바초프와 그의 동반자들은 메릴린치(Merril Lynch)와 같은 일련의 제국주의 금융기관들로 하여금 국가기업의 사유화 과정을 감독ㆍ지도하도록 했고, 그리하여 그들은 쏘비에뜨 경제의 제국주의적 후견인이 되었다.105)

 

흐루쇼프의 후예들은 자본가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부활했다. 사회주의는 패배했다. 인류는 다시 동물계로 추락했다.

 

10월 혁명은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106)에서 발생했다. 후진적 농업국가, 약한 제국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강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침략했다. 여기에 고무된 국내의 구지배계급 또한 공세를 계속했다. 경제는 폐허가 되었고, 수많은 당원들이 싸우다 죽고, 과로로 죽고, 굶어서 죽었다. 혁명은 점점 가망이 없어 보였다. 내부에서는 이탈자들이 줄을 이었다.

“절멸되는가, 아니면 사회주의 공업을 건설하는가.” 중세적 잔재를 여전히 가지고 있고, 태반이 문맹인 농민들과 함께 사회주의는 건설되어야만 했다. 그것은 전쟁의 연속이었다.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그리고 그 전제인 농업의 집산화를 위해, 모든 가능성을 활용하여야 했다. 구시대의 자본가 경영진, 행정가, 과학자, 군인도 활용하여야 했다. 부르주아적 의식도 활용하여야 했다. 물질적 동기를 강력하게 부여했고, 엄격한 규율과 관리체계를 갖추어야 했다. 이것은 비적대적 부르주아와의 타협체제를 의미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정치의식(맑스-레닌주의)의 발전은 우선 순위에서 밀려났다.

부르주아와 동거하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ㆍ정치의식이 지체되면서, 관료들이 부르주아 의식에 오염되었다. 경제적 성공과 전쟁 승리는 이 과정을 촉진했다. 너무 장기간의 동거도 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또 전쟁으로 파괴되어, 복구하는 과정은 무려 30여 년이었다. 선진국이라면 수년이면 끝났을 일이다. 관료주의자들은 이미 1930년대 말에 맑스-레닌주의 지도부와 대등할 정도로 자라났다.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부르주아가 했던 공업화를 프롤레타리아가 하는 과정에서, 당이 부르주아화 되어버린 것이다. 전쟁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구나 그 거대한 승리는 더욱 결정적이었다. 그것은 그들을 크게 성장시켰고, 전후 드디어 주도권을 잡았다.

평당원들과 인민들만이 정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야 겨우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한층 성숙해졌을 때는 수정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맑스-레닌주의 지도부가 너무나도 위대했기에, 강렬한 기억은 결코 지워질 수 없었다.  대중들이 보기에, 변질된 지도부는 여전히 그 거대한 유산의 상속자였다. 맑스-레닌주의 또한 수정주의의 공격을 받아 해체되었다. 지도부 없이 지도적 사상 없이, 투쟁은 불가능했다. 약한 고리에서의 혁명은 강한 고리에서의 혁명보다 쉬웠다. 그러나 그 성공은 더 어려웠다.

1917-1953년까지 프롤레타리아의 함성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전 세계 노동자ㆍ인민은 열광했다. 부르주아지는 공포에 가위눌렸다. 그들은 미치광이가 되었고, 프롤레타리아의 신세계를 피로 흠뻑 적시고 또 적셨다. 부르주아지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역사상 최악의 범죄집단이 되었다. 그들은 증명했다; 계급사회는 종언을 고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전위는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리고 패배했다. 그들은 인류가 동물계로부터 도약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인류의 자존심이었다. 가슴 아프도록 위대했던 “영웅시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노사과연

 


 

1) 사회주의 초기에 중소자본가(공업, 상업, 농업)는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소부르주아는 상당히 오랜 기간 존재한다.

 

2) 그리스 공산당,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 ≪노동사회과학 제2호: 사회주의, 20세기와 21세기≫, 노사과연, 2009, p. 363.

 

“우리는 ‘붕괴(collapse)’라는 말을 거부한다. 반혁명 활동의 정도를 과소평가하고, 사회주의 건설에서의 주체적 요인의 약점과 일탈에 의해서 반혁명 활동이 발전하고,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사회적인 기반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공산당은 붕괴 대신에 “반혁명의 승리”를 쓴다. 필자도 여기에 따른다. “붕괴”는 사회주의가 체제 자체의 한계 때문에, 무너졌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나아가 사회주의는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3) 쓰딸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 보고”,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p. 367-368.

 

10월 혁명 이후 우리의 사회주의 국가는 자기 발전에서 두 개의 주요한 단계를 경과하였다.

첫 단계는 10월 혁명으로부터 착취계급이 청산된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의 기본 임무는 전복된 계급들의 반항을 진압하고 외국 무력 간섭으로부터 나라를 보위하며 공업과 농업을 복구하며 자본주의적 요소를 청산하기 위한 조건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

둘째 단계는 도시와 농촌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청산된 시기부터 사회주의적 경제체계가 완전히 승리하고 새로운 헌법이 채택된 시기까지이다. 이 시기의 기본 임무는 전국적으로 사회주의 경제를 조직하고 자본주의적 요소의 잔재를 종국적으로 청산하며 문화혁명을 조직하고 나라를 보위하기 위해 현대적 무기로 충분히 무장된 군대를 조직하는 것이다.

 

4) 신경제정책이 언제 종결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공식적 종결선언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도시에 있는 산업자본가, 상인, 그리고 농촌에 있는 자본가인 부농(꿀락), 소부르주아인 중소농에 대한 양보조치였다. 그런데 1929년에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과 농업 집산화 정책은 이들에 대한 총공세를 의미한다. 그래서 1929년에 사실상 신경제정책이 종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쓰딸린은 1936년을 “신경제정책이 종결”된 해라고 한다.

 

5) 쓰딸린, “보고 “우리 당 내의 사회민주주의적 편향에 관하여”에 대한 결론”(1926. 11. 3.), ≪쓰딸린 선집≫ 제2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6, p. 165.에서 재인용.

 

6) 기회주의(Opportunism, 機會主義)

일반적으로 일정한 확고한 원칙을 세우지 않고 그때그때의 형세를 보아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노동운동의 용어로 사용되는데, 이 경우 기회주의란 한때의 전세(戰勢)나 부분적 이익에 이끌려, 노동자 계급의 계급적 이익을 지배 계급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반(反)노동자적 사상과 행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노동운동의 내부에 침투한 부르주아적 또는 쁘띠 부르주아적 사상의 현상이다. 기회주의는 크게 우익 기회주의와 좌익 기회주의로 나누어지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반(反)노동자적 조류로서 서로 조장(助長)하고 서로 도와 주는 양쪽의 기회주의로서 나타난다. 이것을 극복하는 투쟁을 기회주의에 대한 두 개의 전선에서의 투쟁이라고 한다.

우익 기회주의는 계급협조의 사상과 행동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자본주의의 기본적 모순에 기초한 계급투쟁의 필연성을 부정하고, 특히 제국주의의 정책에 따르며, 목전의 이익을 위해 노동운동의 근본적인 이익을 희생시키는 한편, 노동자 계급을 지도계급으로 하는 인민의 혁명적 투쟁을 방기한다. 좌익 기회주의는 이것에 반발하여 과장된 혁명성을 주장하는 모험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고, 노동운동의 합법칙적인 발전을 방해하는 도발에 의해, 지배 계급의 탄압 정책을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7) 쓰딸린, “쏘비에뜨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 헌법초안에 대하여, 1936.11.25.”,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p. 210-211. p. 218.

 

8) 쓰딸린, 같은 글, p. 246.

 

9) 기업이 국유기업이기 때문에, 경영진은 대부분 당과 국가의 관료가 맡는다.

 

10) 브레즈네프(1906년 생)는 1931년 쏘비에뜨 연방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5년에는 우끄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36년에는 드니쁘로제르쥔스끄 야금 교육원의 교장이 되었다. 1937년 우끄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도바 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에는 드니쁘로뻬뜨로프스끄(현재의 우끄라이나 드니쁘로)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 산업을 조직하였다.

 

11) Ludo Martens, Another view of Stalin, EPO, 1994, pp. 46-47.

 

12) 당시에 남아 있던 신분적 속박과 인격적 예속이라는 관습은, 사회주의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과 결합하여 온존ㆍ강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산당의 성공에서 오는 권위도 이러한 경향을 낳았을 수 있다. 이것은 관료주의를 발생시키는 힘으로 된다.

 

13) 토니 클라크(Tony Clark),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 문영찬 역, 노사과연, 2009, p. 66.에서 재인용

 

14) 같은 책, p. 67.

15) 같은 책, p. 71.

16) 같은 책, p. 87.

17) Ludo Martens, Op. Cit. p.103.에서 재인용.

18) Op. Cit. p. 102.

19) Op. Cit. p. 58.

 

20) 쓰딸린, “성공으로 인한 현훈증”, ≪쓰딸린 선집≫제2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6, pp. 696-697.

 

21) 내전시기에 농민출신들이 붉은 군대에서 복무하다, 당에 입당한다. 이들이 내전이 끝나자 농촌에서 사업을 하게 된다. 군사적 명령체계(“군사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농촌사업에서 관료적 고압적 태도를 종종 보이게 된다.

 

22) 원주: J.V. Stalin, Works, vol. 12, Moscow 1955, p. 242;

    J.V. Stalin, Works, vol. 13, Moscow 1955, p. 288;

    J.V. Stalin, Problems of Leninism, Peking 1976, p. 874.

 

23) 마리오 소사(Mario Sausa), “1930년대 쏘련에서의 계급투쟁―쏘련공산당(CPSU)의 숙청과 정치재판”, ≪진실이 밝혀지다―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13, pp. 68-70.

 

24) 이 말에서 다음을 도출할 수 있다; 먼 훗날 벌어진 쏘련에서의 반혁명의 원인은, 당과 국가 간부들의 관료주의적 탈선과 수정주의 때문이다.

 

25) 쓰딸린, “연맹 공산당(볼) 제17차 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보고”,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 166.

 

26) 당의 중간 간부(주로 쏘련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의 지도자)들이 쓰딸린 등의 최상층 지도부의 지도를 거부하는 것을 말하다.

 

27) 쓰딸린, “당 사업의 결함과 뜨로츠끼 및 기타 양면(two-faced)주의자들을 청산할 대책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p. 260-262.

 

28) 알렉 노브(Alec Nove), ≪소련 경제사≫, 김남섭 역, 창작과 비평사, 1998, p. 299.

 

29) B. N. 포노말료프 외, ≪소련공산당사≫제4권, 거름 편집부 역, 거름, 1992, p. 196.의 각주 26)번.

 

30) 같은 책, p. 227.

 

31) 쓰딸린, “경제일꾼들의 과업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 11.

 

32) 알렉 노브(Alec Nove), ≪소련 경제사≫, 김남섭 역, 창작과 비평사, 1998, pp. 131-132.

 

33) 기업별 독립채산제를 말한다. 기업의 성과를 평가하여, 책임을 묻고, 생산을 독려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상부에서의 계획에 의해서, 주어진 원료와 기계, 노동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최대한의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계획이 생산물의 양과 종류를 결정한다.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자본주의하에서의 독립채산제와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자본주의에서는 이윤이 생산물의 양과 종류를 결정한다.

 

34) 알렉 노브, 같은 책, pp. 239-241.

35) 알렉 노브, 같은 책, pp. 235-256.

 

36) 모리스 돕(Maurice Dobb), ≪소련 경제사≫, 임휘철 역, 형성사, 1989, pp. 515-516.

 

37) 모리스 돕, 같은 책, pp. 517-518.

후일 전후시기, 누진도급제와 특별작업에 대한 큰 규모의 상여급 제도는 점점 더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 제도는 노동자들의 관점에서는 보너스의 많은 부분까지 포함하는 소득 수준에 익숙해짐에 따라, 노동자의 통제 밖에 있는 조건에 의해서 산출이 떨어지는 경우에는[예를 들어 공장의 생산흐름이 흔들릴 때(원료 공급 등이 부족해서 생산이 불가능할 때: 인용자)] 기본임금이 하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불리한 것이었다. 관리자의 관점에서는 이미 보았듯이 비용을 상승시키는 경향(생산성은 전반적이고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경향을 가지는데, 여기에 따라 임금이 상승: 인용자)을 갖는다는 점에서 불리한 것이었다. 1950년대에는 누진적 보너스의 급격한 증가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운동이 발전하였다. 나중에 그것은 대체로 최고 수준을 향상시킴으로 임금차별을 감소시키는 경향과 함께, 점차적으로 폐기되어 갔다. 1956년에는 산업노동자의 40%가 ‘누진도급제’에 포괄되어 있었으나, 1960년경에는 이 제도는 중공업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다른 부문에서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38) 모리스 돕, 같은 책, p. 418.

 

39) 자본주에서의 이윤과 사회주의에서의 이윤

자본주의: 이윤이 생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윤을 위해서 계획이 존재한다. 어디에다 어떤 공장을 짓고, 어떤 원료를 얼마나 구입해서, 노동력은 얼마나 구입해서, 어떤 상품을 만들어 얼마에 어디에 팔지에 대한 계획은  모두 다 이윤이 결정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존재하고, 계획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계획이,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지를 결정한다. 원칙적으로 판매는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에 따라 분배된다. 생산이 완료되면, 이윤은 이 계획이 효율적으로 실행되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로 봉사한다. 이윤이 계획에 봉사한다.

 

40) 모리스 돕, 같은 책, pp. 438-439.

 

41) 일부 사람들에게만 개방된 상점. 예를 들어, 개별 공장에 부속된 상점이 있었는데, 그 공장의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42) 1930년대까지도 물자부족이 심각하여, 부족이 심한 상품은 허가증(+돈)이 있어야 살 수 있었다.

 

43) 알렉 노브, 같은 책, p. 236.

44) 같은 책, p. 397.

 

45)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 하권, 이용우 역, 까치글방, 2016. pp. 662-663.

 

46) 1937-38년 대숙청은, 반혁명 활동으로 적발된 부하린과 르이꼬프 집단에 대한 숙청, 그리고 군부쿠데타를 모의한 뚜하체프스끼(Tukhachevskii)원수에 대한 숙청을 포함한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은 생략한다.

 

47) 쏘련의 가맹 공화국의 행정단위. 예를 들어 러시아 공화국은 몇 개의 주ㆍ변강ㆍ 거대 도시(예, 모스끄바, 레닌그라드)로 구분된다. 이들은 같은 급이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도ㆍ광역시(서울, 대구)에 해당한다. 주와 변강을 구분하는 기준은 아마도, 외국과의 경계지방을 변강으로 특별히 명명하는 것 같다. 한국의 시ㆍ군ㆍ구에 해당하는 것은 “구역 혹은 지구”라 번역된다. 주ㆍ변강ㆍ거대 도시의 지도자급(중간수준간부)에서 관료주의자들이 특히 많았다.

 

48) 쓰딸린, “당 사업의 결함과 뜨로츠끼 및 기타 양면(two-faced)주의자들을 청산할 대책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p. 280-281.

 

49) 대규모 숙청은 1919년, 1921년, 1928년, 1929년, 1933년, 1934년, 1935년, 1937-38년에 이루어졌다. 1937-38년을 제외하고는, 평당원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50) 이 지적은 중요하다.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이후에 인텔리겐챠의 비중이 늘어났다.

 

51) 쓰딸린, “당 사업의 결함과 뜨로츠끼 및 기타 양면(two-faced)주의자들을 청산할 대책에 대하여”,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p. 291-294.

 

52) Ludo Martens, Op. cit. pp. 163-164.

53) Ludo Martens, Op. cit. pp. 167-168.

리터스폰(Rittersporn)에 의하면, ‘대숙청’ 기간인 1937-1938년 동안에 공산당에서 27만8818명이 추방되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이전년도보다 훨씬 적다. 1933년에 85만4330명이 추방되었고, 1934년에는 34만2294명, 1935년에 그 수치는 28만1872명이었다. 1936년에는 9만5145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방이 이전 기간의 추방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대숙청’은 주로 간부들에 집중되었다. 대숙청 이전 해에는 공산주의와 관련 없는 인사들, 일반 범죄자들, 주정뱅이들, 당 규율 위반자들이 추방된 이들의 다수를 구성했다.

 

54) 예조프는, 1938년 11월 25일에 내무인민위원에서 해임된다. 그 자리에는 베리야가 임명된다. 1939년 3월, 예조프는 공산당의 모든 지위에서 해임되었고, 4월 10일 체포되었다. 1940년 2월 4일, 처형되었다.

 

55)뮌헨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앞둔 히틀러를 달래기 위한 시도였으나 실패로 끝난 조약이다. 독일은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뒤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를 합병하려 했다. … 1938년 9월 29일과 30일,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와 함께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 체코는 참석하지 않았다(때문에 오늘날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이 조약을 뮌헨 늑약 혹은 뮌헨의 배신이라고 부른다). 이 회담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유화책으로 독일의 수데텐란트 합병을 승인한다. 그러나 뮌헨 조약에도 만족하지 않은 히틀러는 1939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9월 1일 폴란드로 진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다음 백과]

 

56) B.N. 포노말료프 외, ≪소련공산당사≫ 제4권, 거름 편집부 역, 거름, 1992, pp. 196-197.

 

57) 쓰딸린, “제18차 당 대회에서 행한 전 연맹 공산당(볼) 중앙위원회 사업 총화 보고”(1938. 3. 10.), 쓰딸린,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

출판사, 1964, p. 351.

 

58) 알렉 노브, 같은 책, p. 257.

59) 포고령 이전까지는 5일을 일하고 하루를 쉬었다.

60) 같은 책, pp. 293-294.

61) 같은 책, p. 314.

 

62) B.N. 포노말료프 외, ≪소련공산당사≫ 제5권, 거름편집부 역, 거름 1992, 여기저기에서.

 

63) 같은 책, p. 29.

64) 같은 책, p. 86.

 

65) 그로버 퍼(Grover Furr), Khrushchev Lied(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 Erythros Press Media, LLC Corrected Edition, 2011, pp. 363-365.

 

66) 쏘련 인민은 2천만 명 이상 죽었고, 1천만 명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을 당했다.

 

67) 엥엘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박종철 출판사, 2000, pp. 194-195.

 

68) 한국과 비교하면 장관이 관장하는 부서로, 재정부나 국토교통부 등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인민위원회로 불렸으나 개명되었다.

 

69) 알렉 노브, 같은 책, pp. 440-441.

 

70)바만 아자드(Bahnman Azad),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채만수 역, 노사과연, 2009, p. 166.

 

71) 이 부분은, Ludo Martens, Another view of Stalin, EPO, 1994, pp. 254-262. “From Stalin to Khrushchev(쓰딸린에서 흐루쇼프까지)”를 정리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다음을 읽어보기 바란다.

<루도 마르텐스, “스딸린 바로 보기(19)”, 노사과연 편집부 역, ≪정세와 노동≫ 제93호(2009년 9월), 노사과연, pp. 38-65.>

 

72) Ludo Martens, op. cit. p. 260.

쓰딸린의 유망한 후임자였던 쥐다노프(Zdanov)는 1948년 8월에 죽었다. 심지어 그가 죽기 전에도, 여의사인 리디아 띠마쉬크(Lydia Timashuk)는 부적절한 치료로 그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다며 쓰딸린의 의사들을 비난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계속 이러한 비난을 반복하곤 했다. …

(의사들이 쥐다노프를 죽였는지에 대해서: 인용자) 과거에 쓰딸린 개인 비서실의 보안 책임자였던 류민(Ryumin)이 조사를 지휘했다. 9명의 의사들이 체포되었고, “미국 정보국에 의해 설립된, 국제 유대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조직인 ‘JOINT’(American-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와 연관”된 혐의로 고소되었다. (이후에 다시 베리야는 류민을 체포하고 의사들을 무죄석방시킨다: 인용자)

 

73) Grover Furr, Op. cit. pp. 368-369.

“레닌그라드 사건”에서의 체포, 유죄판결, 처형들에 대해 쓰딸린의 “제멋대로인 행동”의 결과라고 비난했던 흐루쇼프가, 1957년 6월에는 보즈네쎈쓰끼와 기타 다른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을 쓰딸린이 반대했었다고 주장했다!

흐루쇼프: 말렌꼬프, 당신은 알지 — 그리고 몰로또프, 미꼬얀, 싸부로프(Saburov), 뻬르부힌(Pervykhin)도 잘 안다 … 내가 호명한 동지들은 쓰딸린이 보즈네쎈쓰끼와 꾸즈네초프의 체포를 반대했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체포를 반대했었고, 음흉한 야수들, 베리야와 말렌꼬프가 쓰딸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보즈네쎈쓰끼, 꾸즈네쪼프, [그리고] 뽀쁘꼬프를 체포하고 처형할 것을 선동했다. 말렌꼬프, 당신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고, 당신의 양심은 깨끗하지 않다. 당신은 비열한 인간이다.

말렌꼬프: 당신은 나를 중상하고 있다.

흐루쇼프: 내가 있을 때 쓰딸린은, “왜 보즈네쎈쓰끼를 국가은행에 배치하지 않는가, 왜 그러한 움직임이 없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역시 그 말을 들었다. 그러나 베리야와 말렌꼬프는 쓰딸린에게 보즈네쎈쓰끼, 꾸즈네쪼프, 뽀쁘꼬프와 다른 사람들이 죄인들이라고 말했다. 왜? 왜냐하면 언젠가 쓰딸린은 정당하든 아니든지 간에 말렌꼬프 대신에 꾸즈네쪼프를 승진시켰고, 그리고 보즈네쎈쓰끼를 쏘비에뜨 각료회의 의장으로 만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이 무사하지 못했던 이유이다.

 

74) 쥐다노프를 치료하던 의사들이, 그를 죽였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던 사건.

 

75) Ludo Martens, op. cit. p. 260.

 

76) 베리야는 그루지야 공화국 출신이고, 그루지야는 그의 지지기반이다.

 

77) op. cit. pp. 256-257.

78) op. cit. pp. 258-259.

79) op. cit. pp. 258-259.

80) 루도 마르텐스, 같은 책, p. 261.

81) 루도 마르텐스, 같은 책, pp. 261-267.

82) 알렉 노브, 같은 책, p. 363.

83) 알렉 노브, 같은 책, p. 373.

 

84) 엥엘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로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2000, p. 472.

 

85) Ludo Martens, Op. cit. p. 262.

 

86) 1953년 3월부터 1953년 9월까지는 말렌꼬프가 공산당의 제1서기를 지냈다.

 

87) 알렉 노브, 같은 책, p. 372.

88) Grover Furr, Op. cit. p. 1.

 

89) 엥엘스, “가족, 사적소유 및 국가의 기원”,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6권, 박종철 출판사, 2000, p. 182.

 

90) 엥엘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변혁(반-뒤링),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2000, pp. 340-341.

 

91) 알렉 노브, 같은 책, p. 437.

92) 알렉 노브, 같은 책, pp. 437-438.

 

93) B.N. 포노말료프 외, ≪소련공산당사≫ 제6권, 거름 편집부 역, 거름, 1992, p, 49.

 

94) 국가가 농민들에게 농산물을 구매하는 가격. 흐루쇼프는 이 가격을 인상하여 주었다.

 

95) 꼴호즈에서는, 개개 농부들이 일한 시간을 계산하여 농부들에게 급여를 지급하였다.

 

96) 알렉 노브,  같은 책, pp. 405-406.

 

97)쓰딸린,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 문제”(1952), ≪쓰딸린 선집≫ 제3권,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pp. 535-539.

 

 

98) B.N. 포노말료프 외, 같은 책, p. 152. pp. 148-149.

 

99) Victor Perlo, “The Economic and Political Crisis in the USSR”, Political Affairs, August 1991, p. 12.

 

100) 그러나 이 시기에, 그 성장의 결실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인민과 특권층 간에 빈부격차가 발생하였다.

 

101) 바만 아자드, 같은 책, 2009, p. 193.

 

102) 이 부분에 대해 필자는 이견을 가진다. 당과 국가는 사실상 결합되어 있었고, 당이 주도했다. 당연히 수정주의(관료주의)도 당이 주도했다.

 

103) 바만 아자드,  같은 책, pp. 189-190.

 

104) 바만 아자드, 같은 책, pp. 196-197.에서 재인용. (원문;  Gus Hall, “쏘련의 위기”(1991년 9월 8일 미국 공산당 전국위원회 특별회의에서의 보고), ≪社會評論≫ 제85호, pp. 4-5.)

 

105) 바만 아자드, 같은 책, p. 199.

 

106) 당시 공업생산고에서 러시아는 세계에서 5위, 유럽에서는 4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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