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의 제 조건

 

문영찬 │ 연구위원장

 

 

머리말

 

2017년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현 시점에서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운동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조건은 열악하다. 쏘련 붕괴를 핵으로 하는 20세기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의 영향은 아직도 여전하며 운동진영은 청산주의, 뜨로츠끼주의, 현대 프랑스 철학 등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또한 정치적 조건도 열악한데 파쇼적인 박근혜 정권 하에서 운동진영은 많은 탄압을 받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로도 국가보안법의 존재, 전쟁위기의 고조, 노동자계급에 대한 분열정책 등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한 조건은 열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무엇을 움켜쥐어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의 발전과 변혁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움켜쥐어야 할 핵심고리는 무엇인가?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투쟁 또한 있으며 이 세 가지 투쟁이 종합적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가 해체 상태에 있을 때 움켜쥐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 이데올로기이다. 즉, 경제 투쟁과 정치투쟁을 수행해가는 가운데 가장 핵심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의 재정립, 과학적 사회주의의 재정립을 사활적으로 수행해 가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은 사상을 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투쟁의 특성은 부르주아 사회가 생산하는 온갖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그것들의 본질을 폭로하고 그것들을 지양하는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 중에서 현재 노동자계급을 가장 짓누르고 노동자계급을 분열과 해체 상태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반공주의를 비롯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20세기 사회주의 붕괴 후 밀려들어온 청산주의, 뜨로츠끼주의, 현대 프랑스 철학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들 사조들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비판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들 철학 사조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데올로기 투쟁이 완료되는 것은 아니며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와 한계, 그 약점을 체계적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즉,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노동자계급 독자의 견해를 완성해가는 것이 필요하다. 쏘련 붕괴 직후 20세기 사회주의라는 쟁점은 운동의 해체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쏘련 붕괴의 영향으로 많은 활동가들이 사회주의 노선을 청산하고 운동을 떠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대립물의 전화를 이룩해야 한다. 즉, 20세기 사회주의라는 쟁점을 운동의 약화가 아니라 운동의 재정립, 사회주의의 기치의 재정립에 기여하는 것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평가를 통해 이데올로기를 재정립하고 현실 운동과 투쟁의 무기가 될 사회주의의 기치를 다듬어야 한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일차적으로 러시아 혁명 자체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제 조건,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 이는 하나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가에 대한 성찰이다. 이러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는 혁명은 대중투쟁의 한 번의 폭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혁명은 자연사적 필연성으로 관철되는 동시에 수많은 목적의식적 투쟁과 노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사적 필연성으로서 혁명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말하며 목적의식적 투쟁과 노력은 주체적 조건을 말한다. 그 각각을 고찰하여 어떠한 객관적 조건이 혁명에 요구되는지, 또한 주체의 상태는 어떻게 변화, 발전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승리의 이러한 객관적, 주체적 조건을 분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와 지금은 100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으며 그동안 자본주의의 발전은 비할 수 없이 고도화되었으며 한국사회라는 특수성은 또한 그 자체로 고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에서 사회주의 변혁의 조건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 혁명을 고찰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풍부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측면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매장되다시피한 레닌주의의 현실적 의미에 대한 인식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면 러시아 혁명에 대해 그 승리의 객관적, 주체적 조건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1.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의 객관적 조건

 

1) 자유경쟁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

 

19세기 말에 자본주의 세계는 심각한 불황에 직면해 있었다. 약 30년간 계속된 경제적 침체는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는데 자유경쟁 자본주의에서 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가 이때 이루어졌다. 이러한 독점의 발생은 자본 간의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원리가 관철된 결과인데 자본의 집적, 집중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곧바로 독점자본으로 질적인 변화를 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술적 측면에서는 경공업 중심에서 철강, 석탄, 기계, 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으로 전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중화학공업은 거대한 투자를 요청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독점자본의 대자본이 필요했다. 이러한 결과 20세기 초엽부터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지배적인 것은 독점자본주의였고 제국주의는 이러한 독점자본주의에 기초하여 산업자본과 은행자본의 융합 결과 탄생한 금융자본의 지배를 의미했다. 그리고 그러한 금융자본은 이 세계의 모든 곳, 즉, 농업지역만이 아니라 산업지역도 병합하려는 열망을 가졌고 그 결과 제국주의 모순의 격화를 가져왔다. 자유경쟁 자본주의 하에서 부르주아지의 기치가 ‘자유’였다면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 하에서 부르주아지의 기치는 ‘지배’가 되었다.

그런데 레닌은 이러한 제국주의의 모순을 고찰하면서 중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는데 제국주의 하에서는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불가피하며 그 결과 일국 혹은 몇몇 지역에서조차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제국주의 하에서는 왜 불균등발전이 불가피한가? 자유경쟁 자본주의 하에서는 산업 간에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했고 따라서 평균적 이윤율의 법칙이 관철되었다. 그런데 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독점의 지배가 주된 것이 되었다. 이러한 독점자본은 평균적 이윤율을 훨씬 넘어서는 독점이윤을 추구하였고 수많은 자본들, 기업들을 하청계열화하였다. 그리하여 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의 동시적이고 평균적인 발전보다는 특정 자본의 비약적 발전, 독점 자본의 가속적 발전이 특징적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독점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의 불균등 발전이 일반적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균등 발전은 국내적으로만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관철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상황을 보면 영국과 프랑스라는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 속도는 느려지는 반면에 독일과 미국이라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중공업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독일의 생산력은 세계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생산력은 떨어지지만 축적된 자본이 많았다. 반면에 독일은 생산력은 영국과 프랑스를 능가하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축적된 자본이 적었고 대외적 측면에서 식민지가 영국과 프랑스에 비하면 매우 적었다. 이러한 모순들이 중첩된 결과 자본주의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의 충돌, 제국주의 세계전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는데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의 와중에 ≪제국주의론≫을 써서 제국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나아가 불균등 발전,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을 도출하였다.

 

2)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폭발

 

제국주의 세계전쟁,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한 축으로 하고 독일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또 한 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전쟁의 기운이 감돌 때 유럽의 사회주의 세력은 공식적으로는 전쟁 반대를 외쳤지만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대부분은 조국방위를 외치며 의회에서 전쟁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리고 소수의 세력이 전쟁반대를 고수했는데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의 반대,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를 주장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라는 레닌의 주장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졌는데 실은 레닌의 주장이 가장 현실적인 것이었다. 왜 그런가? 제국주의 전쟁은 첫째, 제국주의 모순의 폭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모순은 제국주의 세력 간의 모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모순 또한 포함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모순을 극단적으로 격화시키는 것이었다. 자본가계급은 전쟁을 통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전쟁에서 총알받이로 목숨을 내놓아야 하고 전쟁에 끌려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극단적인 기아와 강제노동,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즉, 제국주의 전쟁은 계급적 모순을 폭발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둘째, 제국주의 전쟁은 제국주의 열강들 상호간의 투쟁이라는 점에서 제국주의 세력 각각의 상대방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거대한 군비 지출, 생산력의 파괴, 수많은 인명의 살상 등을 불러온 제국주의 전쟁은 초기에는 소위 조국방위라는 민족주의 구호로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지만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전쟁의 본질, 즉,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한 약탈, 침탈이 전쟁의 목적이라는 것이 서서히 폭로되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적 지배계급은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가속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힘이 약화되었다. 러시아에서 짜르가 단 며칠 간의 대중 시위로 인해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전쟁의 지속이 지배계급을 현저히 약화시켰다는 것의 사례이다. 셋째, 인민들에 있어서 가장 절박한 것은 전쟁의 중단이었는데 전쟁의 계급적 성격이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점은 전쟁의 중단을 위하여서는 제국주의 지배계급의 타도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지배계급의 타도 없이는 전쟁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다는 것으로부터 레닌의 정식화된 주장, 즉,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라는 구호가 제출된 것이었다. 넷째, 제국주의 전쟁을 야기한 근본적 요소인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으로부터 도출되는 일국 혹은 몇몇의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의 가능성은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라는 레닌의 주장이 갖는 현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발전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제국주의 체제의 사슬 중에서 약한 고리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는 레닌의 인식은 제국주의 전쟁과 맞물려 현실성을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비교적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인민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러시아에서 혁명의 가능성이 자라났던 것이다.

 

 

3)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

 

러시아 혁명이 가능했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조건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농노개혁 이후 비교적 급속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한편으로 자본가계급의 성장을 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출현과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자본주의 발전은 봉건적인 짜르체제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낡은 봉건적 생산관계와 충돌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객관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앞두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운동 노선의 발전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은 나로드니즘이었다. 러시아가 자본주의 발전을 생략하고 농촌의 공동체에 기반하여 직접 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나로드니끼들은 짜르에 대한 암살 등 음모적 방식으로 혁명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하여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객관적 상황이고 경향이라는 것을 논증하고 이를 기초로 농촌 공동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형성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즉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는 노선을 제출했다.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은 후진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선진자본주의를 따라잡기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로 인해 중공업 중심의 발전, 대공장 중심의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은 노동자계급의 대규모 집결과 그를 기초로 한 단결에 유리했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은 수에 있어서는 농민 계급과 비교할 때 매우 소수였지만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 단결의 공고성 등에 있어서 변혁의 헤게모니 세력이 될 수 있었다.

러시아가 부르주아 혁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19세기의 서유럽의 혁명 당시와 비교할 때 매우 취약했다. 서유럽의 18세기, 19세기의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지와 인민세력의 연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헤게모니 세력은 부르주아지였다. 인민들은 투쟁력에서는 강력했지만 자신의 고유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헤게모니 세력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이 점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함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봉건세력보다 노동자계급을 더 두려워하게 되었고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혁명에 있어서 철저한 세력이 아니라 타협적 세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혁명이 철저하게 수행되었을 경우 그것은 노동자계급과 인민세력을 강력하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서유럽의 상황이 이러했다면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상황은 부르주아지를 혁명의 선도세력이 아니라 비굴한 타협세력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리하여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는 혁명에 있어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볼쉐비끼 당을 조직하여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하에 농민과 동맹하여 수행하고 연속적으로 빈농과 동맹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전략을 제출했는데 이러한 전략은 서유럽의 부르주아 혁명과 다른 러시아 혁명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4)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탄생

 

러시아 혁명 승리의 객관적 조건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점은 전시에 국가독점자본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러시아만이 아니라 독일 등에서도 발생한 전반적인 현상이었는데 이는 전시의 동원을 위한 것이었다. 전시에 국가가 식량을 배급하고 각 기업의 생산과 원료의 공급을 통제하게 됨에 따라 19세기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경제체제가 성립했다. 기존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경제는 자본가계급에 맡기고 국가는 야경국가, 작은 정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시 상황에서 국가가 경제에 전면 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더구나 자유경쟁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전화된 상태에서 국가와 독점자본은 긴밀하게 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출현에 대해 레닌은 날카롭게 분석하는데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입구이며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어떤 중간 단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물질적 전제라고 파악했다. 레닌의 이러한 파악은 시의적절했는데 왜냐하면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제1차 대전이 종식된 후에 선진 자본주의의 일반적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의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국가와 경제의 융합의 과정을 거쳤는데 이는 제1차 대전에서의 전시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레닌이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사회주의의 입구라고 파악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국가의 경제에 대한 전면적 개입은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를 의미하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극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취득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이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최고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다. 둘째, 국가의 경제에 대한 전면적인 개입은 경제의 발전과 관리에 있어서 자본가계급의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경향을 띠는 것이었다. 이전에 자본가계급은 자본가 없이는 경제운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사회주의를 부정했다. 그런데 국가가 경제에 전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자본가 없이도 경제의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자본가계급의 그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셋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등장은 독점자본주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독점자본은 이전의 자유경쟁 자본주의와 달리 자유가 아닌 지배를 원하며 사회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지배하려는 열망을 가진다. 따라서 독점자본의 증식욕구는 사회의 유지가 불가능할 정도로까지 사회적 토대를 허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독점자본의 본성이 갖는 결함과 모순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가 독점자본과 융합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바로 이러한 성격을 간파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 단계도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전형적으로 출현하는 공정거래법, 독점금지법 등의 경제법과 노동자계급의 권리를 승인하는 노동법, 그리고 사회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법 등은 독점자본의 증식욕이 사회의 토대 자체를 허무는 것을 막는 장치와 다름없다.

이와 같이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는 중간의 계단,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회가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은 그 사회가 사회주의 혁명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닌은 가장 선구적으로 이러한 점을 파악했고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정식화를 이루었고 이러한 관점과 인식을 러시아 혁명에 적용했다.

 

 

 

2.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대혁명 승리의 주체적 조건

 

이와 같이 러시아 혁명은 단지 볼쉐비끼 당이라는 주체에 의한 의식적 활동만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 그리고 제국주의의 출현과 제국주의 전쟁의 폭발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한국사회의 변혁에 있어서도 상응하는 객관적 조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함을 말한다. 한국에서 자본주의 발전,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 한국자본주의의 세계체제에서의 위치 등이 그러한 객관적 조건일 것이다.

그러면 객관적 조건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하고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가능하게 한 주체적 조건을 살펴보자. 그런데 주체적 조건은 단지 볼쉐비끼 당에 대한 분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의 발전에 기초하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혁명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나라의 혁명이라 할지라도 국제적 성격을 필연적으로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볼쉐비끼 당의 활동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20세기 초반까지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국제적 위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발전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1)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상승기

 

세계사적 차원에서 보면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상승기에 발생했다. 제국주의 전쟁의 참화로 인해 반동의 기운이 높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세계사적 차원에서는 맑스주의 운동의 상승기였다.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의 발생을 사회주의 운동의 강령적 문헌인 ≪공산당 선언≫이 제출된 1848년을 기점으로 보면 러시아 혁명 전까지 부침은 있었지만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초기에 맑스주의는 프루동, 바쿠닌 등의 무정부주의 조류와 격렬한 투쟁을 하였고 빠리 꼬뮨을 거치면서는 정치적 전술과 조직노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제 1 인터내셔널의 성립과 발전은 유럽이라는 국제무대에서 맑스주의적 사회주의 운동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이 되면 맑스주의는 노동운동에서 다수파가 되고 각국에서는 노동당 혹은 사회주의당이 건설되어 의회에 진출한다. 그리하여 제 2 인터내셔널이 건설되어 맑스주의는 공고한 국제적 조류가 되었다.

레닌이 활동을 개시하던 1890년대는 이렇게 제 2 인터내셔널이 존재하고 있었고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발전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닌은 우선적으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부정하는 나로드니끼들과 투쟁했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 자체에 의해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의 투쟁에 의해 나로드니끼들이 패배함에 따라 맑스주의는 러시아 노동운동의 다수파가 되었다. 이어서 레닌은 노동운동 내 소부르주아 세력인 멘쉐비즘과 투쟁한다. 볼쉐비즘과 멘쉐비즘은 조직노선과 전술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강고한 전위당을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느슨한 써클들의 연합으로 당을 건설할 것인가, 그리고 당면한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인정할 것인가 아닌가, 또한 노동자계급의 동맹세력은 부르주아지인가, 아니면 농민인가 등에서 볼쉐비끼들과 멘쉐비끼들은 근본적으로 부딪혔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투쟁을 통하여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에서 맑스주의 조류는 강고하게 자리 잡았고 러시아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은 러시아를 반동의 보루에서 변혁의 선진부대로 자리매김 되게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짜르체제의 한계를 인식한 러시아 인민이 봉기하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다.

 

 

2) 러시아의 1905년 1차 혁명의 경험

 

1905년 짜르가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러시아 인민은 자연발생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도화선은 짜르에 대한 청원 시위에 대해 군대가 발포하여 폭력적으로 진압한 것이었다. 이후 인민의 봉기는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봉기는 단순한 시위를 넘어 무장봉기로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러시아 인민은 봉기의 기관으로서 쏘비에뜨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쏘비에뜨 등이 형성되었는데 쏘비에뜨는 자연발생적인 대중조직이면서 동시에 봉기의 기관이었고 나아가 일종의 평의회로서 권력기관으로 발전할 싹을 가진 것이었다.

이 시기에 최대의 쟁점은 제헌의회의 소집 문제였다. 그것은 짜르체제를 종식시키고 헌법을 제정하여 민주공화국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러한 제헌의회의 요구에 대해 짜르는 그것을 자문기구로 제한하려 했고 부르주아 세력은 짜르와 타협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노동자계급과 인민세력은 짜르의 퇴진과 제헌의회의 소집을 요구했는데 볼쉐비끼는 제헌을 혁명적 방식으로 하기 위한 임시혁명정부의 수립을 요구했다. 제헌 자체가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제헌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경로로 임시혁명정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멘쉐비끼는 제헌의회를 소집한다는 결의 자체를 혁명의 성공으로 간주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임시혁명정부의 요구에 있어서 볼쉐비끼와 대립하였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근본적 이유는 볼쉐비끼는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갖고 농민과 동맹하여 짜르를 타도하고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고자 했던 반면 멘쉐비끼는 19세기의 서유럽 혁명처럼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가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혁명적 상황에서 볼쉐비끼와 멘쉐비끼는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이 이렇게 통일되지 못함에 따라 짜르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고 반동을 준비하여 혁명을 압살하게 된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은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첫째, 짜르체제의 허약성, 반인민성이 대중적으로 폭로되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1905년 이후의 반동기를 볼쉐비끼 당은 견뎌낼 수 있었고 다시금 고양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둘째, 쏘비에뜨라는 봉기의 기관, 대안적 권력기관이 창출된 경험은 1917년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민 스스로 권력기관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혁명의 승리가 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셋째,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은 러시아에 존재하는 각 계급 세력으로 하여금 다양한 전술을 전개하게 했는데 이를 통해 다양한 계급세력의 본성이 대중적으로 각인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유약하고 타협적이라는 것, 볼쉐비끼는 봉기를 끝까지 책임지려 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멘쉐비끼는 동요하는 세력이라는 것이 드러났는데 그리하여 멘쉐비끼는 이어지는 반동기에 조직의 대부분이 와해되게 되었다. 넷째, 혁명은 패배했지만 혁명과정에서 제출된 인민의 요구는 그 혁명을 압살한 짜르에 의해 일정하게 수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극심한 반동기가 어느 정도 지나고 다시 고양기가 시작되면서 볼쉐비끼는 선거에서 노동자지구의 대부분의 지지를 받았고 또 일간신문을 발간하면서 당을 대중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1917년 혁명의 리허설이었다. 레닌 스스로 이 리허설이 없었다면 1917년의 혁명은 여러모로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1905년 러시아의 혁명의 영향은 러시아 내부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유럽과 근동, 중국 등의 많은 지역에 미쳤다. 그리하여 그 지역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또한 피억압 민족의 민족운동을 크게 자극하였다.

 

 

3)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발전

 

노동자계급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숫자가 아니라 생산에서의 지위에 의해 운동과 변혁에 있어서 헤게모니를 갖게 된다. 레닌이 활동을 개시하면서 가장 주력했던 것도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성을 규명하여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을 부정하는 나로드니끼들과 투쟁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비록 짜르의 봉건적 체제 하에서였지만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은 노동운동의 고양을 가져왔다. 특히 뻬쩨르부르크, 모스끄바 등의 대도시에 있는 대공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집결과 단결의 조건은 노동자계급의 지적, 정치적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운동에 맑스주의가 보급되면서, 특히 볼쉐비끼와 멘쉐비끼의 투쟁이 전개되면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은 대중적으로 훈련되는 과정을 거쳤다. 노동자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경제투쟁에 더하여 정치투쟁이 전개되고 나아가 이데올로기 투쟁 또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동심원적인 전방위적인 투쟁 경험의 축적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특히 의회전술에 있어서 참여전술, 보이코트 전술 등 다양한 전술의 전개는 대중들이 어느 세력이 참다운 인민의 벗인가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레닌은 1905년 혁명 과정에서 처음에는 선거의 보이코트 전술을 주장했다가 혁명의 퇴조 후에는 이를 교정하여 참여전술을 주장했다. 이렇게 시의 적절하게 전술이 전개됨에 따라 그러한 전술을 경험하는 대중들은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갖게 되었다.

또한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을 강조하는 볼쉐비끼의 노선은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었던 노동자대중에게 있어서 충분히 승인이 가능한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은 고립된 세력이 아니라는 것, 러시아의 광대한 농민대중이 노동자계급의 지지자이고 동맹이라는 인식이 러시아 사회에 스며들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선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분들 가운데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부분이 증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이론적 의미를 넘어서서 정치적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사상과 노선은 1917년의 두 차례 혁명에서 극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고 10월 사회주의 대혁명의 승리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900년대 초반은 볼쉐비끼가 써클에서 당조직으로 발돋움하는 단계였다면 1910년대의 볼쉐비끼는 대중적 세력으로 등장한다. 반동기 다음 다시금 고양기가 시작되었을 때 볼쉐비끼는 일간 신문을 발행하고 선거에서 노동자 지구 다수의 지지를 받아 의회에 의원단을 진출시킨다. 이러한 상황은 노동자계급이 써클 수준을 넘어 당적인 차원에서 조직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1905년 당시와 비교하면 노동자계급의 조직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간 신문-당조직-대중조직의 발전이라는 입체화된 노동자계급의 발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엄혹함을 이겨내고 혁명의 승리가 가능했던 조건이었다.

 

 

4) 볼쉐비끼의 사회주의적 전위운동

 

러시아 혁명 승리의 주체적 조건의 핵심은 레닌으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사회주의 전위조직운동의 존재이다. 볼쉐비끼들이라 불렸던 이 조직의 형성과 발전에 대한 고찰은 러시아 혁명의 승리를 해명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적 상황과 혁명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발하는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주체의 강고한 준비정도에 달린 것이다.

레닌의 탁월한 점은 러시아라는 조건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보편성을 체현하면서도 러시아의 특수성을 투철하게 사고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레닌은 맑스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20세기 사회주의의 장을 열 수 있었다. 그러면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쉐비끼의 노선, 전위 운동의 노선을 살펴보도록 하자.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는 노동자계급과 분리된 이해를 갖지 않으며 다만 공산주의자가 다른 정파와 다른 점은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공동 이해를 내세우고 주장”하며 “다양한 발전 단계들에 있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레닌의 전위 개념은 맑스의 이러한 인식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레닌은 맑스의 위와 같은 견해에 더하여 대중의 자연발생성과 전위의 목적의식성에 대해 전면적인 고찰을 하고 발전시킨 점에서 맑스와 차이가 난다. 목적의식성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과학적 인식을 기초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거한 의식적 활동을 조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중은 자연발생적으로 운동에 참가하지만 과학적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의 부재로 인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부르주아 사회의 공고한 틀을 깰 수 없고 노동자계급은 노동조합주의적 활동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반면에 목적의식성은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특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토대로 하여 자유로운 선택에 기초한 투신과 헌신을 의미한다. 레닌이 이러한 목적의식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맑스 당시보다 자본주의 발전이 더 고도화되어 압제의 기제가 발전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의 경우 짜르의 전제라는 엄혹한 상황이 특수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자연발생성과 목적의식성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해명하는 것을 기초로 노동조합주의 정치와 사회주의 정치의 근본적 차이점에 대해 분석한다. 노동조합주의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부르주아 정치라는 것, 그것으로는 결코 부르주아 사회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제기하며 사회주의 정치에 대해 분석한다. 사회주의적 전위는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전체 인민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 사회주의 정치는 공장의 틀을 넘어서는 제 계급들의 상호관계, 그리고 그 계급들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정치폭로를 전제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레닌의 사회주의 정치관은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강조한 것을 더욱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렇게 목적의식성과 전위에 대한 철학적 정립과 사회주의 정치관을 정립하는 단계를 거쳐 레닌은 당 건설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당 건설의 문제에 있어서 레닌은 전국적 정치신문을 중심으로 한 당 건설, 그리고 당 대회를 통한 위로부터의 당 건설을 주장했다. 반면에 멘쉐비끼는 전국적 정치신문을 탁상공론이라 했으며 위로부터 당 대회를 통한 당 건설이 아닌 써클 질서를 온존시키는 써클 연합으로서 당 건설을 주장했다. 볼쉐비끼와 멘쉐비끼는 형식적으로는 중앙집권주의인가 아닌가로 부딪히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레닌이 사상을 중심으로 당 건설을 제기했다면 멘쉐비끼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국적 정치신문이라는 당 건설 노선은 당 건설의 핵은 사상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또 당 대회를 통한 써클 질서의 해소를 주장한 점은 형식적으로는 써클 질서를 온존시킬 것인가 아니면 중앙집권적인 당을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내용적으로는 사상에 기초한 권위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사상적 통일을 이차적인 것으로 남겨두고 느슨한 사상적 통일에 기초한 써클 연합을 건설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볼쉐비끼 당의 발생과 발전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레닌이 주장했던 바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오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레닌이 100여년 전 당시에 제기했던 바의 참다운 의미를 새기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전국적 정치신문 노선과 당 대회를 통한 위로부터 당 건설이라는 레닌의 당 건설 노선을 집약하면 ‘사상에 기초한 중앙집권주의의 건설!’이라 할 수 있으며 바로 이것이 바로 레닌주의의 당 건설 노선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과학적인 노선에 입각했기 때문에 1905년 혁명의 실패 후 반동기가 대두되었을 때 볼쉐비끼는 당조직을 유지했지만 멘쉐비끼들의 조직은 대부분 사라졌던 것이다. 그리고 반동기를 이렇게 이겨내었기에 1912년 이후 시작되는 고양기에 볼쉐비끼들은 일간신문-당조직-대중조직의 입체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노동자계급을 혁명적으로 준비시킬 수 있었다.

 

 

5) 전쟁에 대한 올바른 전술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는 퇴위하였다. 1주일여 남짓의 대중시위의 물결로 짜르가 퇴위했는데 이는 이미 전쟁의 지속으로 인해 짜르체제가 내적으로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제국주의 전쟁이 러시아를 갈수록 약한 고리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2월 혁명의 결과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구성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병사 쏘비에뜨가 구성되었다.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쏘비에뜨의 다수파였던 멘쉐비끼 등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임시정부는 말로는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지만 현실에서는 전쟁의 지속을 정책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쟁으로부터 탈출구의 문제가 러시아에서 최대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레닌은 이러한 상황에서 망명지에서 러시아로 귀국하자마자 4월테제를 발표하고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구호를 제창했다. 레닌은 당시 성립한 쏘비에뜨를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파악했다. 즉, 노동자계급과 군복을 입은 농민들의 연합권력으로 파악했다. 이렇게 쏘비에뜨를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러시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일단락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이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구호를 제기한 것은 혁명의 성격에 대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이러한 전략적 문제의 성격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전술적 성격 또한 있는 것이었다.

레닌은 쏘비에뜨와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공존하는 상황에 대해 이중권력의 상황으로 파악하고 ‘모든 권력의 쏘비에뜨로의 이전’을 볼쉐비끼 전체의 노선으로 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구호는 당시에 무력에 기반하는 봉기의 구호가 아니라 평화적인 선전의 구호였다. 이러한 평화적 노선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에 무력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수중에 즉, 쏘비에뜨 측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무장하고 있었고 병사들이 쏘비에뜨로 조직되어 있는 상황이 평화적 이행노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레닌은 이렇게 혁명적인 상황에서 1917년 7월까지 무려 4-5개월 간 평화적 이행의 노선을 취한다. 이 기간의 의미는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기간을 통해 볼쉐비끼가 쏘비에뜨에서 소수파에서 다수파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볼쉐비끼가 이 기간 동안에 다수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으로부터의 탈출구를 명확하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권력이 쏘비에뜨로 이전될 때만 전쟁의 종식이 가능하다는 볼쉐비끼의 주장은 임시정부가 전쟁을 지속함에 따라 점차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임시정부는 그 계급적 성격으로 인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자본가계급을 대표하는 임시정부는 쏘비에뜨의 멘쉐비끼의 지지를 기초로 권력을 유지했는데 임시정부는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는 자본가계급의 요구로, 특히 러시아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차관을 제공했던 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로 인해 전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쏘비에뜨에서 볼쉐비끼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자 반동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꼬르닐로프의 반란이다. 꼬르닐로프는 전선에 있는 군대를 수도에 진입시켜 혁명을 진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볼쉐비끼의 요청을 받은 노동자들은 군대가 수도로 이동하는 것을 저지했고 쿠데타는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볼쉐비끼를 불법화하고 레닌에 대해 수배령을 내려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을 한다. 이후 레닌과 볼쉐비끼는 봉기의 때를 계산하는데 군대와 대중의 압도적 세력이 볼쉐비끼를 지지하게 되는 때를 기다려 10월에 봉기를 한다. 기술(art)로서 봉기를 주장한 레닌은 봉기 전야에 수도로 복귀하여 봉기를 직접 지도하고 봉기는 거의 무혈로 성공한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사회주의 혁명, 10월 혁명은 성공으로 막을 내린다.

2월에서 10월로 이어지는 혁명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전쟁의 문제였다. ‘모든 권력을 쏘비에뜨로!’라는 구호는 단순한 당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정세에서 전쟁의 문제에 대한 레닌과 볼쉐비끼의 과학적인 대안이었다. 모든 권력이 쏘비에뜨로 이전될 때만 대중들이 가장 염원하는 전쟁의 종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평화적으로 선전하는 노선을 혁명적 상황에서 무려 4-5개월 간 인내심을 갖고 밀고 나간 것! 바로 여기에 10월 혁명의 승리의 원인이 놓여 있었다.

 

 

6) 내전과 권력유지의 성공

 

10월 혁명 자체는 거의 무혈혁명이었다. 그러나 타도당한 부르주아지는 제국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내전을 일으켰다. 적군과 백군의 내전이 발발하였고 그 과정에서 멘쉐비끼와 사회혁명당 세력도 볼쉐비끼에 반대하여 내전에 참가하였다. 멘쉐비끼들은 볼쉐비끼 권력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사회혁명당 좌파도 볼쉐비끼와의 연합권력을 거부하고 반대세력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3-4년 동안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은 쏘비에뜨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가 최대의 문제였다.

한편 혁명 직후 상황에서 혁명 러시아가 전쟁으로부터 철수하는 문제가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전쟁의 문제는 임시정부의 타도를 가능하게 했던 핵심적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레닌과 볼쉐비끼 당은 독일에 양보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고자 했으나 협정체결의 임무를 맡았던 뜨로츠끼는 독일에 대한 양보를 거부하여 독일군의 공세를 불러왔고 결국은 독일에 더 큰 양보를 하고 브레스뜨-리또프스끄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많은 희생을 감수한 것이었지만 전쟁으로부터 철수는 러시아 전체 인민의 지지를 받았다.

제국주의 세력은 이 당시 상호간에 전쟁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러시아 혁명에 대해 신속하게 개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 종료됨에 따라 제국주의 열강들은 러시아 내부의 백군과 연합하여 개입전쟁을 벌였다. 거의 모든 제국주의 열강이 러시아의 영토의 일부를 점령했고 또 백군의 공세가 강화됨에 따라 쏘비에뜨 정권이 지배하는 지역이 줄어들었다. 식량공급이 위기에 처하고 물자들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쉐비끼는 군대를 조직하고 노동자를 조직하여 내전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모든 물자는 전선을 중심으로 하여 배치되었는데 이 당시의 경제정책이 후에 전시공산주의라 일컬어졌다. 예를 들면 농민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하고 잉여 식량을 징발하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러시아의 노동자계급과 인민은 혁명이 가져다 준 전쟁의 종식, 평화와 토지분배 등을 지지하였고 서서히 내전의 형세는 볼쉐비끼에 유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0년경이 되면 대부분의 백위군이 격퇴된다.

그런데 이 당시 위기상황이 내부에서 발생했다. 즉, 끄론슈타트의 수병들이 볼쉐비끼 정권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수병들은 곧 농민들이었는데 이 반란은 농민들이 볼쉐비끼 정권에 대해 이반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내전과 다르게 또 다른 차원에서 쏘비에뜨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는 문제였다. 이에 대해 레닌과 볼쉐비끼당은 농민들에 대한 식량 징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시공산주의를 멈추고 농민에게 최소한의 현물세를 내는 것을 조건으로 식량의 자유판매를 허용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나아가 이러한 정책을 사회 전반의 정책으로 확대했는데 이것이 신경제정책(NEP)라 불리는 정책이었다.

레닌과 볼쉐비끼 당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한편으로 내전이 승리로 기울고 있다는 사정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쏘비에뜨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노-농 동맹의 강화가 중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레닌은 내전 기간에 쏘비에뜨 권력의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동맹의 유지라는 것을 강조했고 전시 공산주의 정책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농민과의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가장 염려했다. 그런데 끄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은 그러한 균열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볼쉐비끼 당은 정책의 대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전에서의 승리를 기초로 볼쉐비끼 당은 자본주의 경제의 일정한 용인, 농민들의 자유시장에서의 거래, 사회주의 기업에서 이윤원리의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신경제정책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전환에 대해 레닌과 볼쉐비끼 당은 그것이 불가피한 후퇴이지만 그것은 사회주의의 강화를 결과할 것이라고 보았는데 실제로 신경제정책은 1920년대 경제의 신속한 부흥과 쏘련 사회주의 강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러시아 혁명은 혁명의 근본문제인 권력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이어지는 농업의 집단화, 공업화,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최초로 계급사회를 폐지한 혁명으로서 노동자계급과 인민에게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안겨다주었다. 러시아 혁명은 계급의 폐지에 기초하여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전,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같은 인민의 복지의 확대, 여성의 참정권의 보편적 실현 등 소수자의 권리의 보호, 문맹의 퇴치와 과학과 문화·예술의 높은 수준으로의 실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인민의 향유를 가능하게 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레닌의 민족자결권의 원칙에 입각하여 러시아 내의 소수민족의 분리와 독립국가 형성의 권리 혹은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했다. 또한 역사상 최초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발전하여 공장은 민주주의의 기초단위가 되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은 국제적으로는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 투쟁과 세계 각지에서 제국주의의 압제를 받는 민족들의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을 가져왔다. 제국주의 사슬의 약한 고리의 파열이 세계사를 대변전시키고 인류를 도약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노동과 자본의 모순의 첨예화에 기초한 자연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모순의 심화, 노동과 자본의 모순의 심화, 그러한 모순의 폭발로서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전제의 성숙 등이 결합되어서 러시아 사회를 사회주의 혁명으로 밀어올렸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는, 인간의 역사는 하나의 자연사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또한 인간의 의식적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1917년의 2월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 내적으로 무너지고 있던 짜르 체제를 1주일여의 대중시위로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10월 혁명에 이르는 기간은 고도의 목적의식적인 전술이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혁명의 성격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되었다는 것, 당시 정세에서 핵심 고리는 전쟁의 문제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권력이 쏘비에뜨로 이전되어야만 하다는 의식적 방침을 세운 것, 또한 그러한 방침의 수행이 즉각적인 봉기노선이 아니라 평화적 선전의 노선을 장기간 취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술(art)로서 봉기를 조직하여 거의 무혈로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것 등에서 우리는 레닌과 볼쉐비끼 당의 목적의식성의 사례를 풍부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혁명은 자연사적 필연성으로 모순의 격화의 결과 발생하지만 발생하는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목적의식적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닌은 혁명의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라는 점에 입각하여 노-농 동맹의 유지를 골간으로 하여 내전에서 승리하여 권력유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는 쏘비에뜨 권력의 본질에 대한 통찰의 결과인데 쏘비에뜨 권력에서 헤게모니는 노동자계급이 갖지만 그것을 농민의 지지로 보충하지 않으면 쏘비에뜨 권력은 유지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졌기에 내전에서 승리가 가능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노-농 동맹의 균열이 가시화될 조짐이 보였을 때 레닌과 볼쉐비끼 당은 노-농 동맹을 유지, 강화하는 것을 초점으로 하는 정책의 대전환, 신경제정책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렇게 혁명의 승리는 객관적 조건, 주체적 조건이 조응할 때 가능하다. 현재 세계사는 쏘련 붕괴 후의 반동기를 지나고 있다. 이 세계사적 반동기는 노동자계급이 다시금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승리의 경험,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창조했던 20세기 사회주의의 경험, 그 역사적 성과와 한계 그리고 심지어 오류에 대한 고찰은 21세기의 사회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노사과연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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