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변증법적 논리학의 재정립을 위하여

 

 

문영찬 │ 연구위원장

 

 

머릿말

 

20세기 말에 쏘련 등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졌을 때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슬며시 자취를 감추었다. 사회주의 진영 붕괴의 세계관적 충격이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의 청산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침체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변혁의 무기인 변증법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21세기에 들어서서 각종의 신사회운동 즉, 환경, 여성, 인권,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부문별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변혁의 전망은 서서히 사라졌고 노동운동은 그러한 여러 가지 부문운동 중의 하나로 격하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혁명의 대수학이라 일컬어졌던 변증법은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집요하게 공격을 받으면서 청산의 대상, 매장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면 아도르노,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 지젝, 자율주의 등등의 이데올로그들은 놀랍게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변증법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청산한다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사회운동에 있어서 변증법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현실의 운동과정에 변증법을 적용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변증법을 대신한 것은 조악한 형식논리이거나 아니면 절충주의였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운동의 발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즉, 운동의 침체와 변증법의 쇠퇴는 맞물려 있었던 것이며 이는 이론과 실천의 양 측면에서 운동이 질곡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모순의 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변화와 발전의 사상이고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혁적 운동이 살아나지 않을 때 변증법적 논리는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운동의 침체가 이론적 측면에서 변증법의 쇠퇴를 가져온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점은 역으로 운동의 재건과 발전을 위해서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재정립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보여준다. 변증법 이론의 도움을 받아 현실 사회에 흐르는 모순의 운동을 파악하고 그 속에서 운동의 발전법칙을 규명하여 운동의 전망을 열어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한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변증법적 논리는 현실 사회의 반영이기 때문에 변증법적 논리학의 발전은 몇몇 도식을 정립하는 문제가 아니라 현실사회에 대한 깊은 천착과 분석의 과정, 특히 현실 의 사회운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분석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목적에 복무하기 위해 지금 단계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이론적 전제들, 쟁점들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왜냐하면 변증법적 논리학의 온전한 재정립은 노동자계급의 공동의 노력, 당적 실천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1. 형식논리학과 변증법적 논리학

 

변증법적 논리는 철학의 발생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대부분 변증법론자였다. 그러나 이 당시의 변증법은 하나의 과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직관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의 철학과 과학의 초보적 수준에 따른 당연한 것이었다. 변증법은 철학의 역사에서 장기간 잠복되고 그를 대신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립된 형식논리학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형식논리학의 정립은 고대에서 초보적 과학의 성립을 의미했다. ‘A는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닐 수는 없다’는 모순율은 2천년 동안 지고의 논리로 여겨져 왔다. 모순율이 이렇게 지고의 논리로 여겨져 왔던 것은 그것이 논리에 있어서 참과 거짓을 가르는 기준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율은 참과 거짓의 기준을 논리의 내용이 아니라 논리의 형식에 놓았다. 예를 들면 저 나무는 소나무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모순율은 내용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 저 나무는 소나무이지만 소나무가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해서 비로소 그것이 모순율에 위배되었다는 판정이 가능하게 된다. 즉, 모순율은 논리의 내용이 아니라 논리의 형식에 국한된 역할에 그친다.

물론 이러한 모순율, 형식논리는 논리의 구사와 적용에 있어서 최소한의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는 기준으로서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실제적 사고의 내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 더구나 그러한 형식논리가 논리학의 최고봉, 논리학의 본질인 양 여겨지면 그것은 인간의 사고를 제약하는 것이 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논리형식상 모순을 금지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서서 현실의 대상에는 내적인 모순이 존재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많은 변증법론자들을 부정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질곡의 상황이 2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 논리와 변증법적 인식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고대의 원자론은 이 세계를 원자와 공허로 설정했는데 원자 스스로 공허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 세계의 모습이라는 상을 정립했다. 이는 변증법적 인식을 보여주는데 원자라는 존재와 공허라는 비존재의 통일이 이 세계의 모습이라는 것으로서 이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대립의 통일을 상정하는 변증법적 세계상이었다.

이후 근대에 이르러 변증법은 하나의 직관을 넘어서서 근대과학에 기초하여 서서히 정립되는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근대에 있어서 변증법의 정립은 유물론에 기초하기 보다는 관념론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는 뉴튼 등 당시 과학이 역학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어서 역학이 내포하는 기계론적 사고, 형이상학적 사고의 영향으로 인해 유물론은 형이상학적 유물론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변증법에 대한 모색은 라이프니츠 등의 관념론자가 선도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는 독일고전철학에 이르러 철학사에서 비약이 이루어지면서 변증법이 정립되게 되었다.

칸트에 의해 변증법적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헤겔에 의해 포괄적으로 완성된 변증법적 논리학은 형식논리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모순들을 접하면서 그리고 이율배반의 논리를 접하면서 논리의 형식을 넘어서는 논리의 내용을 포괄하는 논리학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연과 사회의 현실 모습, 그것의 현실적인 변화와 운동을 논리에 담아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변화와 운동의 논리로서 변증법은 근대에 다시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되게 되었다.

칸트는 형식논리를 넘어서기 위해 세계의 현실적 내용을 담는 범주들을 제기했다. 그리고 현실세계의 모순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변증법이 단지 궤변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의 발전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논리임을 승인했다. 그런 점에서 칸트는 변증법을 철학에 다시 복권시킨 공헌을 했다. 그러나 칸트는 변증법은 인간의 인식에서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회피해야만 하는 일종의 딜레마로 파악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계에 대한 이율배반이라는 문제의식에 그치고 말았다. 예를 들면 칸트는 이 세계는 무한한가 유한한가라는 문제제기를 하면서 결론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칸트가 유한과 무한의 대립은 설정했지만 대립의 극복전망을 찾지 못하고 이율배반에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헤겔은 칸트를 극복하면서 변증법은 단지 이율배반인 것이 아니며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논리학, 현실 세계의 변화와 운동을 담아내는 보다 고도의 논리학임을 제기했다. 이율배반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제기했다. 즉, 칸트의 이율배반은 대립을 설정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헤겔은 대립물의 통일로서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유한과 무한의 통일이 세계의 모습이라는 관점이 가능해지며 이는 세계에 대한 가장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었던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은 형식을 넘어서는 내용, 질료를 포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상의 질과 양, 한도(도량), 현상과 본질, 모순, 그리고 개념 등 자연과 사회, 인간 정신의 일체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변증법은 하나의 과학적인 논리학으로서 역사상 최초로 완성된 모습을 나타냈다. 그러나 헤겔은 관념론자였고 변증법의 일체의 개념은 절대이성이 외화되는 모습이고 과정이었다. 이는 현실을 뒤집어서 사고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변증법의 개념들은 현실에 있어서는 절대이성의 외화의 산물이 아니라 자연과 사회의 변화와 운동들이 인간 이성에 반영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맑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워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뒤집혀진 유물론이라 했듯이 헤겔의 변증법의 개념들의 대부분은 과학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이는 비록 관념론의 지반 위에서였지만 헤겔이 논리의 형식을 넘어서는 논리의 내용을 추구했고 그것은 곧 자연과 사회의 변화와 운동을 담는 논리학이었기 때문이었다. 엥겔스는 이러한 헤겔의 논리학으로부터 양적 변화의 질적 변화로의 전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모순), 그리고 부정의 부정이라는 변증법의 주요 법칙들을 끌어낸 바가 있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은 관념론의 지반에 기초한다. 그리하여 개념은 스스로 운동하여 논리를 전개해 간다. 헤겔의 변증법은 많은 면에서 신비한 색채를 띠고 또 일정하게 왜곡된 모습을 보인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을 유물론적으로 개작을 하여 유물론적 변증법을 완성하였고 그에 따라 변증법적 논리학은 신비한 색채를 걷어내고 자연과 사회의 인간 정신에 대한 단순하고 명료한 반영의 성질을 띠게 되었다. 변증법적 개념을 가지고 자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연, 세계에서 변증법적 개념을 찾아내서 자연으로부터 그 개념들을 전개하는 것으로 올바르게 위치지워졌다,

이로부터 변증법적 논리학의 위상, 나아가 철학의 위상이 변화되었는데 기존의 철학은 다른 모든 학문들 위에 군림하는 학문의 제왕을 지향했다면 맑스와 엥겔스에 이르러서 철학은 학문의 제왕이 아니라 단순한 세계관으로 전화되었는데 기존의 철학은 발전하는 여러 과학으로 분화되고 그러한 과학들의 상호 연관 속에서 하나의 과학적 세계관의 성립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변증법적 논리학 또한 형식논리학과 더불어 인간 사고에 대한 과학으로 정확하게 위치지워졌다. 즉, 변증법적 논리학은 논리의 형식을 넘어서서 세계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는 보다 고차적인 논리학으로서 자연과 사회가 인간의 정신에 반영될 때의 형식을 의미하는 개념, 법칙, 범주들의 학문 즉, 객관적 세계의 주관적 상, 사고를 다루는 학문으로 위치지워졌다.

 

 

2. 논리학과 인식론, 그리고 변증법의 일치에 대하여

 

레닌은 ≪철학노트≫에서 ‘변증법=논리학=인식론의 일치’라는 정식을 제기한 바 있다. “『자본론』에는 논리학, 변증법, 유물론의 인식론(이 세 개의 낱말은 필요없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일한 것이다.)이 하나의 과학에 적용되고 있다.”1) 이와 같이 레닌은 논리학과 변증법 그리고 인식론의 통일 혹은 일치라는 정식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 드물다. 이에 대해 쏘련의 E.V.일렌코프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에서 일정하게 답을 하고 있는데 필자 또한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면서 나름대로 이 정식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정식의 올바름을 살피기에 앞서 레닌의 정식은 논리학 그리고 인식론이 모두 유물론적인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관념론적인 논리학과 관념론적인 인식론을 전제로 한다면 그것들의 일치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의 인간의 인식과정과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유물론적으로 개작된 변증법적 논리학과 인간의 인식과정에 대한 유물론적인 접근을 전제로 할 때만 그것들의 통일의 참다운 의미가 드러난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고 확인해 보자.

먼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변증법이 유물론적으로 개작되면서 논리학의 내용은 유물론적 변증법이 되었다. 즉, 유물론적인 변증법적 논리학이 되었다. 그리하여 변증법적 논리학은 관념론적인 절대이성의 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인식하는 인식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형식논리학과 다르게 변증법적 논리학이 논리의 내용, 세계의 내용을 논리에 포괄하게 됨에 따라 변증법적 논리학은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과 일치하게 되었다. 과거 형식논리학만을 따를 때는 논리학은 인간의 세계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과정과 괴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형식논리학은 논리의 형식만 다루지 논리의 내용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논리가 형식을 넘어서서 내용을 다루는 변증법적 논리학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을 담는 것이 된다. 또한 관념론적인 절대이성의 외화라는 관점에서는 변증법적 논리는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은 절대이성의 외화가 아니라 외적 세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외적 세계의 반영이기 때문에 감성적 인식, 이성적 인식 단계를 거치면서 개념적 사고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적인 인식과정인데 절대이성의 외화라는 관점은 이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학은 변증법이라는 점에서 논리의 형식만이 아니라 내용을 담아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것은 절대이성의 외화라는 관념론적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물론적인 변증법적인 논리학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논리학의 내용과 과정이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의 과정과 일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레닌의 문제의식이 집중되어 있는 언급을 살펴보자. 다소 길지만 레닌의 명료한 문제의식을 볼 수 있다.

““자연, 즉 이 직접적 총체성은 논리적 이념으로 그리고 정신으로 스스로를 전개시킨다.” 논리학은 인식에 관한 학설이다. 즉, 인식론이다. 인식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반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직접적인, 총체적인 반영이 아니라 일련의 추상화, 정식화, 여러 개념들이나 법칙들 등등의 형성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개념들이나 법칙들 등등(사유, 과학=“논리적 이념”)이야말로 끊임없이 운동하며 발전해 가는 자연의 보편적 합법칙성을 조건적・근사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다. 여기서 실제로 객관적인 세 개의 항이 있다. 1)자연, 2)인간의 인식=인간의 두뇌(바로 상술한 자연의 최고 산물로서의 두뇌), 그리고 3) 인간의 인식 안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 그리고 이러한 형식이야말로 다름 아닌, 개념, 법칙, 범주 등등이다. 인간은 자연을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그 “직접적 총체성”을 파악=반영=모사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추상화나 개념이나 법칙이나 과학적 세계상 기타 등등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 자연으로 끊임없이 가까이 접근해 갈 뿐이다.”2)

여기서 레닌은 논리학은 곧 인식론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인간의 인식이 자연의 반영이라는 점에 기초하여 반영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자연, 인간의 두뇌, 그리고 인간의 인식에서 자연을 반영하는 형식으로서 개념, 법칙, 범주들 등이 레닌의 논리의 골간이다. 이러한 레닌의 논리를 따를 때 인간의 인식이 자연의 반영이라는 관점없이는 논리학과 인식론의 과학적인 일치를 논할 수 없다. 즉, 유물론의 관점에서 논리학과 인식론의 일치는 반영론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영론에 기초해서 볼 때 인간의 인식과정은 개념, 법칙, 범주들 등의 추상화를 통해 자연을 반영하는데 바로 이러한 개념, 법칙, 범주야말로 논리학의 개념, 법칙, 범주들이며 그것은 곧 변증법의 내용이기도 하다. 또한 그러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개념, 법칙, 범주들은 곧 인간의 인식과정에 대한 과학적인 파악이다. 여기서 레닌은 헤겔에 대한 독해를 통해 논리학과 인식론의 일치를 끌어내고 있다. 레닌은 다른 곳에서 헤겔이 논리학과 인식론의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것은 헤겔이 비록 관념론적이지만 논리의 형식을 넘어서는 변증법적 논리학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겔의 논리학은 인간의 인식에 대해 자연의 반영이 아니라 절대이성의 외화라고 보는 점에서 인간의 실제적인 인식과정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서 논리학과 인식론의 일치는 관념론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헤겔이 인식론과 논리학의 일치라는 점으로 나아간 것은 전적으로 세계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에 기인한다. 이 세계의 내용 즉, 질과 양, 모순, 개념 등 자연과 사회, 인간 정신을 모두 포괄하는 변증법을 논리학으로 정립함에 따라 관념론적 지반 위에서이지만 논리학은 곧 인식론이라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인식과 레닌의 인식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헤겔이 논리학과 인식론의 일치를 이루는 것은 절대정신의 외화라는 관념론적인 기반 위에서였다. 그러나 레닌은 그와 반대로 인간의 인식은 자연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인 근거에서 인식론과 논리학의 통일을 구하였던 것이다. 즉, 레닌은 인식론과 논리학의 일치라는 명제는 헤겔에게서 구했지만 그 근거는 유물론적으로 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의 실제적인 과정과 일치하는 것은 헤겔이 아니라 레닌적인 반영론이라는 점에서 변증법=논리학=인식론의 통일이라는 과학적 정식을 성립시킨 것은 레닌이라 할 수 있다.

 

 

3. 추상적 보편과 구체적 보편

 

보편과 특수 그리고 개별의 문제는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주요 개념으로 쓰였던 바가 있다. 당시 논쟁에서 보편 개념에 대한 심도깊은 논쟁과 인식은 부족했다. 이는 보편 개념에 대한 추상적 이해와 구체적 이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편 개념은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노란 꽃, 빨간 꽃 등을 보며 그것의 공통적 성질을 추출하여 꽃이라는 개념을 뽑아낼 때가 그러하다. 일종의 추상화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보편 개념은 인간의 지적 발전에서 거대한 역할을 했다. 내리는 눈, 쌓인 눈, 눈보라 등을 보면서 ‘눈’이라는 보편화를 이루는 것은 인간이 원시 단계에서 지적 단계로 발전하면서 이룬 진보였다. 플라톤의 보편 개념, 중세유럽의 유명론과 실재론의 논쟁 등 보편 개념은 철학사에서 주요 쟁점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보편 개념에 대한 입장에서 관념론은 보편을 관념적 존재로, 전형적으로는 신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대해 유물론적 관점은 보편이 실재한다고 보면서도 보편은 개별 속에, 개별을 통하여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물론적 관점은 보편에 대한 추상적 접근을 극복하면서 보편에 대한 구체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여러 사물 중에서 공통의 성질을 뽑아내어 그것을 보편이라 하는 것은 추상적 보편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추상적 보편 개념은 형식논리학의 동일율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는 추상적 보편 개념을 넘어서서 구체적 보편 개념을 추구한다. 그러면 구체적 보편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 변증법적 논리학에서 보편 개념이 어떻게 규정되고 적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헤겔의 논리학에 있어서 보편 개념을 살펴보자. “이를테면 보편은 구체적인 것에 내재하는 바로 이 구체적인 것의 혼일뿐더러 오직 이 보편은 구체적인 것의 다양성과 상이성 속에서도 아무 거리낌없이 스스로 자기와의 동등성을 유지하는 것이다.”3) 여기에는 보편 개념이 구체 개념과 맞닿아 있다. 보편이 구체의 혼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보편 개념이 관념론적 개념인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보편이 구체와의 통일을 통하여 구체에 대해 규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보편은 결국 자유로운 힘과도 같은 것이어서 오직 이것은 바로 이 보편 자체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타자에게도 힘을 뻗치는 것이 된다.”4) 이는 보편 개념이 올바로 구사될 때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헤겔은 보편과 특수의 관계에 대해 보편이 특수를 포괄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제야 비로소 논리적인 것은 주관적 정신에 대한 한낱 추상적 보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특수적인 것이 지니는 풍요함을 자체 내에 포함하는 보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5) 특수의 풍요로움을 지니는 구체적 보편! 이것이 보편 개념에 대한 헤겔의 관점이다. 이러한 헤겔의 논리는 보편이 형식논리적인 동일성에 머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특수와 개별을 스스로의 내부에 포함하는 구체성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헤겔의 보편 개념은 관념론적인 지반 위에서의 개념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하여 “헤겔에 따르면 일반(보편-필자) 그 자체는 엄밀히 순수 사고의 에테르 속에만 존재하며 외적 실재의 시공 속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외적 실재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은 수많은 특수한 외화태, 구현태뿐이다.”6) 즉, 헤겔이 논하는 보편의 구체성은 관념의 영역에서, 개념의 수준에서의 문제이며 그것은 보편의 실재성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헤겔이 보편 개념을 구체성의 개념과 통일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유물론적 변증법의 구체적 보편 개념이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했다.

쏘련의 E.V.일렌코프는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에서 구체적 보편 개념에 대해 매우 심도깊은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맑스의 ≪자본론≫을 분석하면서 거기서 관철되는 보편 개념의 구체성을 논한다. 그는 먼저 추상적 보편 개념으로는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상품, 화폐, 자본, 이윤 등 가치 개념과 관련되는 여러 개념과 범주들을 추상한다고 해서 가치 개념이 얻어지는 것은 아님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노동가치설에 따를 때 가치는 노동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인데 자본의 이윤은 노동만이 아니라(즉, 가변자본만이 아니라) 기계 등 불변자본으로부터도 발생하는 것이 경험적 사실이기 때문에 추상적 보편의 방식으로는 가치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렌코프는 맑스가 ≪자본론≫에서 적용한 방법을 분석하면서 구체적 보편의 개념을 끌어낸다. 맑스가 가치 개념을 도출하는 방법은 화폐, 상품, 자본, 이윤 등에 대한 추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상품에 내재하는 모순(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대립)과 상품과 상품의 물물교환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였음을 지적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상품생산과 교환의 발생적 기원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와 같이 대상들에 존재하는 추상적 동일성이 아니라 그 발생적 기원을 통하여 대상들에 존재하는 통일의 계기가 구체적 보편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를 때 가치 개념이라는 보편은 단지 하나의 상품과 상품교환에도 존재하는 실재적인 것이 되며 그러한 보편은 역사적으로, 논리적으로 단순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거치면서 뻗어나가고 발전하는 실재적인 존재이다.

일렌코프가 분석하는 추상적 보편의 개념과 구체적 보편의 개념의 결정적인 차이는 추상적 보편은 대상들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지만(이것은 대상들에 대한 죽은 도식이다) 실제로 그러한 동일성은 존재하기 어려운 반면에 서로 상이할 지라도 대상들을 통일시키는 연관의 계기, 발생적 기원의 통일성을 드러내는 것이 보편에 대한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인 접근이라는 점이다.

일렌코프는 추상적 보편과 구체적 보편의 또 다른 예로 인간 본질에 대한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들고 있다. “… 인간의 본질은 고립적 개인에게 내재해 있는 추상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인간 본질은 사회관계들의 총체이다.”7) 여기서 추상적 보편의 개념을 적용하면 인간의 본질은 각 개인들의 공통점을 추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그것은 고립된 개인에 내재해 있는 추상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맑스는 인간 본질은 사회관계들의 총체라 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구체적 보편 개념이 있는 것이다. 즉, 사회관계들의 총체는 개인들의 죽어 있는 동일성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인간들의 고유한 차이를 승인하면서도 그들을 연관시키고 통일시키는 계기를 말하는 것이다. 상이성 속에서의 연관, 대립물의 통일의 계기라는 변증법적 관점이 여기서도 관철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곧 구체적 보편이라는 것이다.

일렌코프는 구체적 보편의 또 다른 예로 인간은 도구를 만드는 동물로 규정한 프랭클린을 들고 있다.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는 규정은 모차르트나 톨스토이, 칸트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삶의 보편적 형식이 노동이라는 점에서 도구를 만드는 동물로서 인간이라는 점은 인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하나의 본질적인 연관의 계기인 것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구체적 보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체적 보편은 죽은 동일성을 찾는 추상적 보편을 넘어서서 상이성 속의 연관, 대립물의 통일로서 보편이다. 맑스는 보편 개념에 대해 이렇게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적용했기에 ≪자본론≫을 완성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레닌은 맑스가 ≪자본론≫의 논리학을 남겼다고 말했었다.

그러면 추상적 보편은 의미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추상적 보편 개념의 핵심은 형식논리학의 동일율이다. A=A라는 동일율은 어떤 대상들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논리이다. 그 동일성의 파악이 변증법적이 아니라 형식논리적 수준에서의 파악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형식논리적 동일성은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추상화를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서 개념 또한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개념은 형식논리적 수준에서의 불완전한 개념으로 그치게 된다.

 

 

4.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대하여

 

쏘련이 무너지고 변증법이 매장되면서 각광을 받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이른바 분석철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그는 20세기 초에 러셀에게서 논리학을 배우면서 러셀을 넘어서서 나름의 논리학을 전개했다. 많이 신비화되어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은 실은 형식논리학을 개량한 것에 불과하다.

형식논리적인 내용을 명제화하고 그것을 수학의 개념을 빌려 정교화한 것이다. 그러면 먼저 비트겐슈타인 말을 빌려 그 자신의 논리학의 의미에 대해 접근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머리글에서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이 책의 전체적인 뜻은 대략 다음의 말로 요약될 것이다. 대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8) 여기에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의 핵심이 요약되어 있다. 즉,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논리학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상적인 언어에서 불명료하게 사용되는 것이 많은데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논리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의 표현에 스스로 한계를 긋는 것으로서 일종의 불가지론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을 자연과학에 한정하고 있는데 자연과학의 명제와 그와 관련된 언술을 보다 명료하게 표현하는데 자신의 논리학을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 이외의 학문 즉, 사회에 대한 과학을 비트겐슈타인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인간사회에 대한 일은 침묵해야만 하는 영역이 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9)는 매우 소극적인 언명으로 자신의 논리학을 끝맺는다. 이는 비트겐슈타인 논리학의 영역이 매우 좁다는 것을 말해 주는데 앞서 고찰한 변증법적 논리학에 비한다면 매우 후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이 형식논리학의 일종임은 다음의 언명으로 알 수 있다. “논리학적 명제는 서로 결합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명제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그 논리학적 특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논리학의 명제가 하는 일이다.”10)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명제를 만드는 것이 논리학의 특성이라는 것은 그 논리학이 아무것, 즉, 내용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 형식논리임을 가리킨다. 앞서 고찰한 형식논리학의 본질이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일목요연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적인 명제형식이 명제의 본질이다.”11)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명제의 의미인데 그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명제의 내용이 아니라 명제의 형식이 명제의 본질이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논리를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만 가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헤겔은커녕 칸트와 견주어 보더라도 한참 후퇴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논리를 극복하면서 변증법적 논리학이 출현한 것인데 20세기 사회주의진영의 붕괴가 논리과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후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형식논리에 가두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밝히고 있는 철학적 기반은 매우 협소하고 취약하다. “논리적 형식에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특권적인 수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철학적 일원론이라든가 이원론 등도 있을 수 없다.”12) 논리학에 특권적 수가 없다는 것이 철학적 일원론과 이원론에 대한 부정으로 나아가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고 형식논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수에 특권적 의미를 부여한 인물인데 그러한 논리에 대한 부정과 철학적 일원론, 이원론의 의미는 결을 달리하는 것이다. 철학적 일원론과 이원론은 수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이 세계를 물질과 의식의 대립으로 볼 것인가, 그 중에서 어느 것에 일차성을 둘 것인가, 둘 다 근원적인 것으로 볼 것인가 등의 문제가 철학적 일원론, 이원론의 문제이다. 이는 수의 문제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수에 대한 형식논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이는 그가 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피상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유아론자임을 천명한다. “유아론(唯我論)이 말하려는 바가 전적으로 옳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낼 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것은 언어[내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하는데서 드러난다.”13) 유아론이 옳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이 유아론, 즉 주관적 관념론자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것을 철학적으로 정리해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철학적 기반이 취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주관적 관념론자임은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 언명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일관된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우왕좌왕하는데 유아론은 순수한 실재론(實在論, 즉 유물론)과도 합치된다고도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혹은 논리학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가 사고와 언어를 사실상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사고는 언어로 위장한다”고 하여 사고와 언어를 분리하고 있지만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이다”14)라고 천명하여 사실상 사고와 언어를 동일시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인간의 사고에 관한 학문인데 그것이 곧 언어비판이라는 것은 인간의 사고를 언어로 한정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구의 철학의 상당수가 철학은 곧 언어의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철학은 결코 언어비판으로 한정될 수 없는데 사고와 언어는 본질적 위상이 다를 뿐만 아니라 사고의 표현은 언어로 한정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고의 표현은 언어만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자체, 실천을 통하여 표현된다. 언어는 그러한 사고의 표현에 있어서 주요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분일 따름이다. 사실 이 세상에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혹은 논리학의 취약성은 논리의 문제와 세계와의 관련에서 가감없이 드러난다. “논리학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질문은 모두 단번에 결정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기본 원칙이다. [이런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세계를 관찰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15) 이는 논리학의 문제가 세계와 무관하게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은 세계와의 관련성을 상실한 허구적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관적 관념론의 입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이 맞는 것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세계와의 관련성을 상실한 것이며 이는 그의 논리학이 비과학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논리학이 과학이 되려면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적 필연성은 승인하지만(왜냐하면 논리학자이기 때문에) 객관세계에 있어서 필연성은 부정한다. “무언가가 일어났으니 또 다른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강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논리적 필연성이다.”16) 이는 필연성을 주관적인 논리로는 승인하지만 필연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이 세계, 외적 세계에는 필연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적 세계, 자연에 존재하는 객관적 필연성을 구명하는 것이 곧 과학이기 때문이다. 객관 세계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면 도대체 어떤 것이 과학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뒤에 가서는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연과학을 승인하고 있다. 이는 그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며 또한 철학적 사고와 그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학은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을 좀 더 명료하게 말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매우 많은 철학적 혼돈과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혼돈과 오류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칸트와 헤겔 이래로 철학에서 과학적 발전의 길은 오직 유물론적 방향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결론: 변증법적 논리학 재정립의 전망

 

최근까지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변증법을 매장하는데 공통의 일치를 보여 왔다. 그러나 이 세계가 변화하고 운동하는 한, 변증법은 결코 매장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운동은 곧 모순의 운동이며 세계의 모순적 존재와 그 운동, 방향성을 정직하게 그리고 과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곧 변증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리학은 정치적으로 이 사회에서 죽은 도식으로 취급되고 있다. 상황이 이와 같이 된 데는 쏘련 붕괴 후의 청산주의와 수정주의가 한몫을 했지만 운동진영의 책임 또한 크다. 그 책임의 가장 큰 부분은 운동 진영이 저항은 하지만 변혁적 전망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이다. 변혁적 전망을 상실한 상태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은 적어도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죽은 도식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태를 타개하는 것에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변혁의 전망을 다시금 제기하고 변혁운동의 불씨를 살려내는 일이다. 변혁운동의 재정립과 그 운동의 일보일보는 곧 변증법적 성격과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그러한 변혁운동의 재건과 발전의 형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위한 변증법적 논리학의 재정립은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 전체의 노력을 필요로 하며 특히 당적인 실천 속에서 서서히 재정립의 길을 열어가야 할 성질의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학의 재정립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사회의 모순구조, 변화의 방향을 밝혀내는 것이다. 이 사회의 변화, 발전 속에서 관철되는 변증법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이 사회를 변혁하려 하는 운동, 사회운동들의 현실에서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러한 운동들의 변증법적 발전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적 과제에 변증법적 논리학이 복무하게 될 때 변증법적 논리학은 더 이상 죽은 도식인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도식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제는 노동자계급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특히 당적 실천을 하려고 하는 의식적 활동가들의 공통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이론은, 변증법적 이론은 현실의 실천을 반영하고 또 그것과 통일되어 있을 때만 살아 있는 도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변증법적 논리학을 재정립하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변혁운동의 전망을 제기하고 변혁운동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다름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변혁운동의 전망과 그 재정립은 변증법적 논리학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역으로 변증법적 논리학의 전면적 발전은 운동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실천적 투쟁과 통일될 때 가능해진다.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통일 속에서 비판의 무기는 무기에 의한 비판으로 전화될 것이다.    노사과연

 


 

 1) 레닌, ≪철학노트≫, 논장, 1989, p. 296.

 

 2) 앞의 책, pp. 133-134.

 

 3) 헤겔, ≪대논리학(3)≫, 벽호, 1994, p. 58.

 

 4) 앞의 책, p. 59.

 

 5) 헤겔, ≪대논리학(1)≫, 벽호, 1994, p. 50.

 

 6) E.V.일렌코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1990, p. 275.

 

 7) 앞의 책, p. 270에서 재인용

 

 8)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동서문화사, 2016, p. 31.

 

 9) 앞의 책, p. 114.

 

 10) 앞의 책, p. 100.

 11) 앞의 책, p. 83.

 12) 앞의 책, p. 63.

 13) 앞의 책, p. 94.

 14) 앞의 책, p. 51.

 15) 앞의 책, p. 92.

 16) 앞의 책, p. 110.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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