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국가보안법 폐지는 미룰 수 없는 당면 투쟁 과제이다

 

 

박문석 │ 부산지회 회원

 

 

0. 들어가며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판문점 선언을 하고, 싱가폴에서 진행된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로 공동성명이 발표된 후 구체적인 내용의 진척을 위한 후속회담과 추가 정상회담 일정이 연이어 잡히고 있다. 한반도 긴장 완화와 정전 종식 및 평화 분위기가 높아가는 정세이지만, 정작 문재인 정부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만큼은 못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문재인 정부의 이러한 모순된 행보에는 부르주아 독재의 유지 수단이자 체제유지법으로서 기능과 영구적인 신식민지 통치를 유지하고자 하는 미제의 통제력이 함께 발동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정치사상의 자유를 비롯한 기초적인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확장시켜 내는 투쟁은 진보 변혁세력의 숨통을 틔우는 일이다. 특히나 공황과 장기침체가 지속되는 현재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사회적 이슈화와 대중적 투쟁전선을 복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를 위해서 다시금 국가보안법을 들여다보고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는데 한계가 있는지라 오래전 출판된 박원순의 ≪국가보안법연구≫1)를 기초로 하여 필요한 논리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미제국주의의 신식민지국가에 대한 간접통치의 수단으로서의 국가보안법과,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의 체제 유지 수단으로서의 국가보안법, 그리고 그 둘의 상호 연관성과 경제적 토대변화에 따른 정치 격동이다.

먼저, 계급대중들 뿐만 아니라 활동가들마저도 학습하는 기풍이 많이 사라져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현실인지라 국가보안법의 제정과정과 변천사, 그리고 그 내용들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를 하고자 한다.

 

 

1. 국가보안법 제정의 역사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 일본에서는 ‘치안유지법’2)을 제정하였으며, 이 법의 적용으로 일본공산당 지도부를 괴멸시키고 사회혁명과 진보세력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일제치하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제의 치안유지법으로 인하여 1925~45년까지 8만여 명이 검찰에 송치되었고 수십만 명이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하여 1948년 12월 1일 미제의 꼭두각시인 이승만에 의해 제정되었다. 1948년 7월17일 공포된 제헌헌법 제100조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의 법과 미군정 때의 법들을 큰 문제가 없는 이상 그대로 가져다 쓴다는 것을 원칙으로 했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되살아나고, 일제의 ‘예방구금제도’가 ‘보도구금제도’로 재탄생 하는 이유다.

국가보안법은 제주 4.3항쟁과 10월 여수순천 군인항쟁이 있었던 바로 그 해에 남조선노동당을 비롯한 이남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미제와 이승만에 의해 제정, 공포된 것이다. 이것은 8월15일 단독정부수립 후 4개월만이며 형법이 제정되기 5년 전의 일이기도 하다. 일제로부터 해방직후 인민다수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국가보안법 제정 전후의 이남의 정치정세는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싼 인민들의 저항이 거센 시점이었다. 이를 말살하기 위한 미제와 이승만 정권의 무력탄압은 인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들이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권에 의한 사회주의자 탄압법(1878)을 비롯하여 일본, 미국, 대만 등 몇 개의 나라에서 존재한 바 있지만 오래전에 폐지되었고, 지금까지도 악명을 떨치며 유지되고 있는 곳은 유일하게도 한국의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에 있어 미제의 역할을 무시하고 이승만에 의한 것이라고만 서술되는 것은 옳지 않다. 1945년 9월 미제가 점령군으로서 이 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이승만을 비롯하여 지금의 문재인 정권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 군사, 경제 권력은 한 번도 미제의 통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미제는 국가보안법의 제정과 국정원(중앙정보부)설립에 깊이 개입하였고, 이들 파쇼악법과 파쇼기구 등을 앞세운 꼭두각시 정권의 배후에서 신식민지 지배를 은밀하게 관철해 왔던 것이다.

 

 

2. 국가보안법 변천사 

 

1) 국가보안법 제정에서 4차 개정까지의 시기(1948.12~1961.5)

 

 가. 제정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1949년 한 해 동안만도 118,621명이 검거・투옥되고, 같은 해 9~10월에 132개의 정당・사회단체가 해체되는 등, 국가보안법 사건과 적용자 수가 폭주함에 따라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한다.3) 그 내용으로는, ① 최고법정형의 사형제 도입, ② 3심제를 단심제로 축소, ➂ 보도구금제4)의 도입, ➃ 적용범위를 확대하는 것 등이었다.

 

 나. 한국전쟁에서 4.19 이전까지;

전쟁기간 중 나타나는 ‘부역자’에 대해서 일반법인 형법과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이 가능했으나, 더욱 간단한 처리절차를 위해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1950년 6월 2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하였다. 같은 해 10월 4일에는 군・검・경 합동수사본부가 발족한다. 전쟁기간 중 총 부역자수는 550,915명5)이며, 이들 중 상당수는 특별조치령과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전쟁 후 이승만은 1954년 4사5입 개헌으로 연임의 길을 열었으나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선전하자 1958년 초 대대적인 반대자 소탕작업에 돌입하여 1만여 명의 민주인사를 체포, 투옥하였다. 국가보안법으로 검거 투옥된 조봉암6)과 진보당원 10여 명도 그중의 일부이며, 진보당과 민주혁신당 등 많은 군소정당이 단순히 한반도 평화통일을 제창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혐의를 씌워 강제해산 시켰다.7) 그러나 그 후 정치적으로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언론의 부정선거 폭로와 경제적으로는 미국의 원조삭감으로 인한 실업의 증가 등으로 정권의 안보가 위협받고 사회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지방자치법의 개악과 국가보안법 개악8)으로 위기를 넘기려 하였다. 개악의 내용으로는 ‘모든 시장과 지방공무원의 선거를 중지하고 이들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도록 하는 것과, 국가보안법 제17조 5항의 ‘인심혹란죄’의 신설이며, 대통령 등 헌법기관에 대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1960년 선거를 위해 주로 언론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귀를 틀어막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리하여 59년 경향신문이 폐간된다. ‘막걸리보안법’도 여기에 기인한다.

 

국가보안법 3차 개정과 관련한 기억할 만한 일화가 있다.

 

1959년 1월 다우링 주한 미 대사가 남한사태의 수습을 협의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소환되었다. 뒤이어 2월에는 윌리엄 드레이퍼 특사가 국무성의 동북아시아국 차장과 함께 서울로 파견되었다. 그들은 민주당을 비롯한 각 야당에 새 국가보안법을 인정하고 이승만과 협력해 그것을 공산주의자 탄압에 이용하라고 부추겼다. 미국은 일란성 쌍생아 격인 이승만과 민주당이 공동의 적인 민중과 싸우기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한결같이 미국의 지지를 정권장악을 위한 필수요소로 간주하고 있던 보수정당에 대한 미국 대표의 설득과 회유는 분명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미국의 온화한 미소는 민주당으로 하여금 권력이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결국 민주당은 미국의 요청대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동의했다. 그들은 장차 자신들이 그 법을 이용할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다. 제2공화국하의 국가보안법;

4.19혁명의 결과 민주당이 집권(장면 정권)을 하게 되며 자유당독재 청산작업에 착수한다. 그리하여 독소조항이 많이 제거된 국가보안법 개정9)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때 ‘불고지죄’가 신설되고, 나아가 국가보안법 외에 ‘반공법’까지 제정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다. 당시 제안된 ‘반공법’에는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정당이나 단체의 결성은 간첩활동으로 간주되어 종신형부터 사형에 이르는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입법이 겨냥하는 진정한 목표는 공민권 박탈에 대한 저항 혹은 굶주림과 빈곤타파를 위한 움직임 등을 모두 ‘반역’죄로 고발하고, 또한 그러한 노력을 격려하고 지지하거나 혹은 동조하는 사람까지 모두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는 이유로 기소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10) 장면 정권의 반동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 반공법 제정 및 5차 개정 시기(1961.5~1980.12)
 가. 5.16군정하의 국가보안법;

 

5.16 군사쿠데타 당시 CIA의 최고 책임자였던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실토했다.

 

“내가 재임 중에 CIA의 해외 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5.16쿠데타)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일부 지도자가 지지하고 있던 장면 내각은 부패하였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1960년대 들어 미국 내에서 ‘매파’라 불리던 강경세력들은 아시아에서 대규모의 군사적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시작해 한반도와 타이완 등을 발판으로 중국을 최종적인 목표로 하는 대담한 전쟁계획 이었다. 여기서 한반도는 다시 한 번 주요한 전장으로 설정되었고 동시에 한국군은 그 같은 군사작전에 있어서 극히 필수적인 역할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한과 관련해 시급하게 요청되었던 것은 최대한의 효과적인 전시동원 체제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시 전쟁정책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소위 평화통일론자들을 일망타진함으로써 긴장과 대결을 본질로 삼는 반공정책을 한층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한을 병영국가로 만드는 것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같은 목표는 군대가 직접 정권을 장악하고 사회의 모든 분야를 전면적으로 통제해야만 손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같은 책)

 

60년대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시전쟁을 꾀했던 미제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내각을 버리고 박정희를 내세워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다. 미제를 등에 업은 박정희는 쿠데타의 명분을 얻고자 “5.16 군사혁명 이전 또는 이후에 반국가적 반민족적 부정행위 또는 반혁명행위를 처벌한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1961년 6월 22일 제정한다. 이 법은 국가보안법의 특별법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하거나 또는 기타의 방법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는 내용이다.

 

 나. 제3공화국과 유신치하;

5.16 군사쿠데타에 의한 군정을 거치면서 1961년 7월 3일 ‘반공법’이, 같은 해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법’이 제정된다.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에서는 “군사쿠데타 이후의 핵심적인 프로그램 이었던 중앙정보부의 창설 역시 미국 CIA의 상당한 개입과 후원 아래 이루어졌다”고 언급한다.

 

중앙정보부가 미국 정부, 그중에서도 CIA의 직접적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은 중앙정보부의 창설과 이후의 활동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기구의 하나가 한국군 내의 중앙정보위원회였다는 점이다. 이 중앙정보위원회는 처음부터 미국 CIA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사실상 그 지도를 받으면서) 쿠데타 직전에 설립되었는데, 당시 한국인 책임자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관의 무관을 역임한 이후락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국 CIA가 쿠데타를 음모하면서 중앙정보부의 창설을 이미 준비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기구를 자신의 지배아래에 넣기 위해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것이었다.

 

미국 CIA와 중앙정보부의 결속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온 것은 1958년 한미 양국 간에 체결된 ‘군사정보교환협정’이었다. 이 같은 결속은 특히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지배력이 뒷받침되면서 중앙정보부에 대한 미국 CIA의 통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5.16 군사쿠데타 이후 남한에 대한 미국의 개입 시 군과 정보기관이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그에 따라 주한미군사령관과 CIA 한국지부장도 남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반공법(反共法)은 국가보안법의 반국가 행위 중에서 공산계열의 활동과 관련된 내용을 규제할 목적으로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가 있은 지 두 달여 만인 1961년 7월 3일 제정된 법이다.

 

*반공법; 

-제3조, 1) 반국가단체에 가입하거나 타인에게 가입할 것을 권유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 전 항 미수범은 처벌한다. 3) 제1)항의 죄를 범할 목적을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4조; 1)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 전 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 도서,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 수입, 복사, 보관, 배포, 판매 또는 취득한 자도 전 항의 형과 같다.

-제5조; 1) 반국가단체나 국외의 공산계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구성원 또는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또는 통신 기타방법으로 연락을 하거나 금품의 제공을 받은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3) 6차 개정, 반공법의 흡수 통합(1981~1991.5)

민주세력 탄압으로 반공법에 대한 비난이 커지자 전두환의 ‘국가보위입법회의’11)는 1980년 12월 31일 반공법을 폐지하면서 ‘찬양고무. 회합통신. 잠입탈출. 편의제공’ 등 주요 내용을 고스란히 국가보안법에 삽입하는 기만적인 조치를 하였다.

 

 

3. 국가보안법의 내용

 

국가보안법은 헌법전문과 제4조 평화통일 추구이념과 제11조 법 앞의 평등, 제12조, 제13조의 죄형법정주의, 제37조 기본권 제한의 일반요건을 모두 위배하고 있는 법률이다. 언론, 출판, 학문, 예술의 자유, 정치・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악법중의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이 규정하는 대부분의 조항은 이미 형법이나 기타 형사특별법규에 중복되어 있으므로 그 형법이나 형사특별법 법규조항만으로도 국가안보 침해사범을 충분히 처벌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이유는 ‘찬양, 고무, 동조죄’에 있을 것이다. 이 조문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반형법과 모두 중첩되어 있다.(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국가보안법은 언론, 출판, 학문, 예술의 자유, 정치・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악법중의 악법이다. 2015년 11월6일 UN 자유권규약위원회는 한국의 시민적 권리 전반을 심의해본 뒤 한국정부에 최종 권고문을 내린바 있는데, 아래의 내용은 그것들 중 일부항목들이다.

 

“위원회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총체적 언급(번호34)과 1999년 위원회의 의견을 다시 돌이켜보며, 한국정부에게 “국제규약은 어떤 생각이 단지 적대국이 가진 생각과 일치하거나 적대국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이유로 그 생각의 표현이 제약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바이다. 한국정부는 국가보안법 7조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

“위원회는 ‘기본적 민주질서’ 위반혐의로 2014년 헌법재판소가 명령한 통합진보당 해산은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북한(DPRK) 이데올로기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이미 국가보안법 7조에 따른 혐의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했음을 우려한다.”

“정당해산이 끼치는 특별히 광범위한 영향을 고려할 때 국가는 최대한 자제하여 마지막 수단으로 정당해산을 사용해야 하며, 비례의 원칙을 구현해야 한다.”(번역- 뉴스프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을 정도로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국가보안법의 주요내용을 살펴보자. 

 

제6조(잠입・탈출)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②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③삭제 [91・5・31]

④제1항 및 제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개정 91・5・31]

⑤제1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⑥제2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제7조(찬양・고무등)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②삭제 [91・5・31]

③제1항의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④제3항에 규정된 단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사항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⑤제1항・제3항 또는 제4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 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 [개정 91・5・31]

⑥제1항 또는 제3항 내지 제5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개정 91・5・31]

⑦제3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제8조(회합・통신등)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②삭제 [91・5・31]

③제1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개정 91・5・31]

④삭제 [91・5・31]

 

제9조(편의제공)

①이 법 제3조 내지 제8조의 죄를 범하거나 범하려는 자라는 정을 알면서 총포・탄약・화약 기타 무기를 제공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개정 91・5・31]

②이 법 제3조 내지 제8조의 죄를 범하거나 범하려는 자라는 정을 알면서 금품 기타 재산상의 이익을 제공하거나 잠복・회합・통신・연락을 위한 장소를 제공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편의를 제공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는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 [개정 91・5・31]

③제1항 및 제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④제1항의 죄를 범할 목적으로 예비 또는 음모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⑤삭제 [개정 91・5・31]

 

제10조(불고지)

제3조, 제4조, 제5조제1항・제3항(제1항의 미수범에 한한다)・제4항의 죄를 범한 자라는 정을 알면서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는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전문개정 91・5・31]

 

제11조(특수직무유기)

범죄수사 또는 정보의 직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이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라는 정을 알면서 그 직무를 유기한 때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는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

 

제12조(무고, 날조)

①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이 법의 죄에 대하여 무고 또는 위증을 하거나 증거를 날조・인멸・은닉한 자는 그 각조에 정한 형에 처한다.

②범죄수사 또는 정보의 직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이나 이를 보조하는 자 또는 이를 지휘하는 자가 직권을 남용하여 제1항의 행위를 한 때에도 제1항의 형과 같다. 다만, 그 법정형의 최저가 2년 미만일 때에는 이를 2년으로 한다.

 

제21조(상금) -> 최대20억(2016.12기준)

①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통보하거나 체포한 자에게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상금을 지급한다.

②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인지하여 체포한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종사하는 자에 대하여도 제1항과 같다.

③ 이 법의 죄를 범한 자를 체포할 때 반항 또는 교전상태 하에서 부득이한 사유로 살해하거나 자살하게 한 경우에는 제1항에 준하여 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

 

 제6조~10조까지의 “잠입탈출, 찬양고무 등, 회합통신, 편의제공, 불고지”죄를 보면, 남북정상회담과 더불어 활발하게 전개되는 후속 접촉들과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범죄자가 됨을 알 수 있다. 최근 극우세력 일부가 문재인대통령을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한다는 성명이 온라인에 떠돌기는 했으나 실제 고발을 했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실제 고발을 안했다면 그들 또한 국가보안법상 처벌의 대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제12조(무고, 날조)죄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간첩사건들은 경찰 보안수사대, 기무사, 국정원에서 조작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수많은 간첩단 사건들이 조작으로 확인되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러한 조작질을 통해 무고・날조한 사람들이 제12조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혹시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서 처벌을 면하게 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

박근혜 정권시기 민중총궐기투쟁이 한창이던 2016년 12월,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신고한 사람에게 상금을 최대 20억 원으로 인상했다. 무려 4배나 인상했는데, 정치적 위기를 공안바람을 통해 극복해 보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던 듯하다. 실제 이 시기 국군 기무사령부에서 계엄령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는 문건이 생산되어 2018년 7월에야 폭로되어 현재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4. 국가보안법 탄압의 역사

 

‘좌경・용공’세력이라 규정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를 양산한 독재정권. 좌경・용공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기준도 검찰, 경찰, 문공부, 내무부 등 기관마다 다르고 추상적이다. 대체로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노동자계급 혁명과 사유재산의 부정, 공산당 독재나 인민민주주의 독재를 표방하는 사람들, 그리고 북을 포함하여 공산권국가에 우호적이면서 자본주의국가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을 좌익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좌익의 사상과 행동에 동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좌경・용공세력으로 통칭하며 탄압의 그물을 크게 쳤던 것이다.(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국가보안법은 이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철저히 봉쇄하기 위하여 해외교포일지라도 이를 어길 경우 대부분 간첩으로 몰아서 극형에 처해왔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이남의 노동자・민중들을 맑스주의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고 미제와 독점자본의 노예로 살기를 강제해 왔다. 그리하여 지금 세계에서 최악의 ‘헬조선’이 되고 말았다.

 

1) 이승만 정권(1948.7~1960.3)

국가보안법 공포이후 1년간 이 법에 의해 체포된 사람은 11만 명.

전쟁초기 국민보도연맹 학살(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까지), 전쟁부역자 학살(55만 명 이상)…12)

1958년 초 대대적인 반대자 소탕작전에서 1만여 명의 민주인사가 체포・투옥되었고 그중에는 민주혁신당의 지도자와 조봉암 등 진보당의 간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울러 진보당과 민주혁신당 등 많은 군소정당이 단순히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제창한 것을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를 씌워 강제 해산시켰다.

 

2) 2공화국(장면 정권)(1960.4.19~1961.5.16)

한옥신 부장검사 사건13), 오화섭 교수사건14) 등.

국가보안법 외 반공법의 제정 시도. 불고지죄라는 독소조항 추가

 

장면 정권이 제안한 법률 중 하나는 ‘반공법’으로 이 법에 따르면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정당 혹은 단체의 결성은 간첩활동으로 간주되어 종신형부터 사형에 이르는 처벌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입법이 겨냥하는 진정한 목표는 공민권 박탈에 대한 저항 혹은 굶주림과 빈곤타파를 위한 움직임 등을 모두 ‘반역’죄로 고발하고, 또한 그러한 노력을 격려하고 지지하거나 혹은 동조하는 사람까지 모두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는 이유로 기소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악법은 ‘데모규제법’으로 이는 공공건물로부터 20미터 이내에서 일어나는 시위와 집회를 모두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외국인이 소유 또는 접수한 건물이나 저택에 서 있는 사람, 일몰 이후의 시위, 확성기를 설치해 사람을 불러 모으거나 또는 확성기의 사용을 방조하는 행위 등은 그것만으로도 범죄의 성립조건이 되었다. 경찰의 허가나 지도가 없는 데모가 일체 금지된 것이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3) 박정희 정권(1961.5~1979.10)

박정희는 집권 기간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1천9백68명, 반공법(고무`찬양 죄)으로 4천1백67명을 구속했으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3명, 반공법 위반으로 29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긴급조치 위반 등의 혐의로 254명이 사형이 집행되었다.15)

또한, 정치활동정화법(3,849명), 사회안전법(19명), 집시법(625명), 비상사태하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15명),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15명), 긴급조치9호(726명) 등 전체 11,384명을 구속하였다.

 

민청학련사건; 1974년. 연행된 1,224명의 학생・지식인 중 253명을 구속해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하고 다시 그 중에서 이철, 김지하 등 7명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정문화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

긴급조치 4호 발동.

 

“민청학련과 관계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고무, 찬양하는 일체의 행위,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 수업 또는 시험을 거부, 학교관계자 지도・감독하의 정상적 수업과 연구 활동을 제외한 학내외 집회, 시위, 성토, 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 집단행위를 금하고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한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4) 전두환 정권(1981~87)

전두환은 국가보안법으로 1천5백12명을 기소했고, 그중 13명에 대해서는 사형, 28명에 대해서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1980년대에는 민중의 의식화, 조직화, 이론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이전의 시기에는 국가보안법이 집중적으로 적용될 조직적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분산적 우발적으로 적용되고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이르러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조직적 실체가 확고한 의식과 이론적 뒷받침 위에 부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언제든지 국가보안법의 ‘먹이’는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미제의 비호 하에 광주학살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 확보는 어려웠고,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광범위한 저항투쟁이 본격화 되었으며, 이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의 양산으로 ‘국가보안법의 시대’라는 딱지를 얻게 되었다. 5공화국 전 기간 동안 ‘찬양, 고무죄’가 압도적이었고,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죄’는 정권성립기인 81년과 정권의 최대위기국면인 86년에 집중된다.

1985년에는 ‘민중교육’지 사건, 민추위 사건 등 조직사건도 잇달아 본격적인 국가보안법 시대를 열기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서노련 사건, 삼민투위 사건 등을 비롯하여 정권과 민족민주운동세력간의 대 공방이 19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지면서 국가보안법의 남용이 극에 달하였다. 1984~87년까지 3년간은 매일 0.7건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이 발생하여 0.9건이 입건될 정도로 격렬한 탄압과 저항이 있었다.

 

 5) 노태우 정권(1988~92)

1987년 민주항쟁의 분위기로 인해 잠시 움츠렸던 국가보안법은 5공 청산 기피에 대한 인민들의 저항과 1989년 4월 문익환목사 방북사건 이후 민주・통일운동에 대한 탄압과정에서 다시 부활하여 전두환 정권 때보다도 훨씬 많은 국가보안법 적용과 구속자를 만들어 냈다. 특히 이시기에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여 출판인, 화가, 교사 등에 대한 탄압이 심했고,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등과 찬양, 고무, 동조가 전체의 약 80%를 차지한다.

1990년 7월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수많은 정치, 경제, 언론인들의 방북이 있는 가운데, 정부 비판적 학생, 재야인사 등에 대해서는 ‘불온서적’ 한 권만 가지고 있어도 무지막지한 탄압이 지속되었다.

연도별 구속자수를 살펴보면, 1988년 125명, 1989년 215명, 1990년 10월까지는 275명이 구속되었다.

 

<표 1> 간첩검거현황  (단위; 명)

연도별

19

80

19

81

19

82

19

83

19

84

19

85

19

86

19

87

19

88

인원

65

14

13

8

3

8

10

9

0

0

(출처;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표 2> 국가보안법 위반사범 검거현황

연도별

19

80

19

81

19

82

19

83

19

84

19

85

19

86

19

87

19

88

건수

1,565

116

165

166

108

94

101

365

302

148

(출처;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표 3> 국가보안법 기소/구속자수

연도별

기소건수

구속자수

2016

30

18

2015

63

21

2014

56

7

2013

90

32

2012

74

26

2011

38

14

2010

38

16

2009

38

15

2008

26

13

2007

28

13

2006

29

11

2005

37

11

2004

69

31

2003

101

72

2002

145

115

2001

126

110

2000

156

119

1999

20

20

1998

32

31

1997

86

79

1996

225

216

1995

232

213

1994

320

284

1993

114

75

1992

304

255

1991

358

295

1990

426

326

1989

320

238

1988

111

85

(출처; 검찰청, 범죄분석통계)

 

<표 4> 국가보안법 검거/구속자수(1988~2005)

연도별

검거인원

구속자수

2005

39

13

2004

88

36

2003

33

24

2002

35

27

2001

50

35

2000

104

60

1999

232

163

1998

388

269

1997

540

451

1996

375

333

1995

214

184

1994

334

264

1993

198

104

1992

281

177

1991

391

233

1990

547

345

1989

485

215

1988

209

125

(출처; 경찰청, 범죄통계)16)

 

<표 5> 범죄유형별 공안사건 처리현황(국가보안법 위반 사범)17)

 

 6) 김영삼 정권(1993~1997)

김영삼 정부는 1996년 학생자치단체인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집권 5년 동안 무려 1천336명을18)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문민정부 발족 후 상대적으로 입지가 축소된 공안당국의 자리보전을 위한 남용의 경향이 국가보안법 적용으로 인한 인신구속의 증가로 나타났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신공안정국이 형성되고, 조문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구속과, 애도 현수막 게시 학생들에 대한 구속 등이 잇따른다.

 

7) 김대중 정권(1998~2002)

김대중 정부 출범 첫 1년 간 국가보안법 구속자 수(269명)19)는 심지어 전두환, 노태우 집권 초보다 더 많았다. 당시 법무장관 박상천은 “경제 위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며 IMF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에 맞선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이용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8) 노무현 정권(2003~2007)

국가보안법 구속자가 감소했지만, 집시법과 노동악법에 의한 구속자는 대폭 늘어났다. 국가보안법으로 집권기간 중 전체 기소건수는 264건이며 전체구속자는 138명이다.20) 이는 이명박 정권에서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9) 이명박 정권(2008~2012)

집권기간 중 총 402건을 입건하여 202건을 기소하였으며, 이중 111명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하였다.21) 광우병 쇠고기 투쟁 등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입건자수가 급증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무리한 적용으로 영장기각률이 높아졌다. 과거 정권에서 통일부 등에 방북 허가를 받아 입국하여 합법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도(진보연대, 범민련,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통일연대 등) 이명박 정권에서는 국가보안법으로 입건, 구속했다.

수사기관의 감청도 83%가 국가보안법 사건에 집중되었다. 통신비밀보호법에는 2개월 이내로 감청을 허용하지만 계속해서 기간연장을 청구하여 감청한다. 인터넷 상(노조 홈페이지 게시판, 블로그 등)에 유포되는 표현행위도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수사했다.

 

10) 박근혜 정권(2013~2017.4)

박근혜가 2017년 4월 감옥으로 간 이후 그해 말까지 5년간 국가보안법으로 350건이 입건되었고, 195건이 기소되었으며, 99명이 구속되었다.22)

종북몰이 광풍, 그 절정은 바로 ‘RO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통합진보당 해산 공작이었다. 한미군사훈련 반대, 반전평화, 미군철수집회도 국가보안법으로 유죄판결을 때렸다.

재미교포 신은미 강제출국(2015년 1월), 노동자의 책 이진영 구속, 그리고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운동단체 자유게시판 등에 이북에서 올린 것으로 보이는 글들을 지우지 않았다고 하여 기소하고, sns에 이북과 관련된 글을 퍼 올렸다고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다.

 

11) 문재인 정권(2017.5~ )

2017년 8월 1일 자주시보 김병길 대표의 자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압수수색을 실시하였다. 수원시민신문 민족국제팀 강호석 기자가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로 입건하여 재판중이고, 평양시민 김련희도 찬양, 고무죄와 잠입, 탈출 등의 혐의로 입건하여 수사 중이다. 재미 최재영 목사에 대해서도 국가보안법 위반 출석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2002년부터 통일부에 신고를 하고 대북 사업을 오랫동안 진행해 왔던 김호를 증거조작을 통해 2018년 8월에 구속하였다. 국가내란음모죄가 무죄판명 되었음에도 이석기 전 의원을 비롯한 수많은 양심수들이 감옥에서 아직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정부비판적인 입장에 선 사람에 대해서만 선택적이고도 편파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이후락(1972년), 장세동(1985년), 박철언(85. 89년), 정주영(89, 98년), 김대중(2000년), 노무현(2007년), 문재인(2018년) 등 정부차원이나 정부가 필요에 의해 대북접촉을 허용한 경우는 문제 삼지 않았고, 문익환(1989년), 임수경(1989년), 문규현(1998년), 이병진(1993, 1994년) 등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하였다. 문재인정권 들어서 입건자나 구속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간간히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언론에 떠오른다.

 

 

5. 국가보안법과 노동운동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근거는 검찰, 경찰, 문화공보부, 내무부 등 기관마다 다르다. 기본적으로는 맑스-레닌주의 사상・이론적 노선과 선전선동에 대한 탄압이다. 노동자계급운동이 설 자리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는 말이다.

 

[국가보안법의 처리 근거]23)

* 검찰의 판단기준;

1. 공산주의를 선전할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사상과 활동을 고무, 찬양

2. 자본주의 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전복하기 위해 폭력혁명을 선동

3. 계급투쟁에 입각하여 민중혁명적으로 노사분쟁을 선동

4. 공산주의적 시각에서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

5. 김일성주의를 미화하거나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과장 또는 옹호

6. 북한 대남선전 1차 자료를 비판 없이 소개하여 동조

 

* 내무부의 판단기준;

<사상분야>

1. 경제투쟁 이상으로 정치적 폭력투쟁의 필요성 강조

2. 해당문제(노사・학생문제 등)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체제적 문제로 확산하고자 하는 내용

3. 폭력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당위성 강조

4.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강조하면서 명목상 민족, 민주, 민중을 논하는 경우

 

<조직분야>

1. 소수정예, 비밀의 전위조직의 필요성 강조

2. 전위조직의 지도아래 합법적 지하조직을 두고자 하는 경우

3. 지상, 지하의 이중조직을 구사하는 경우

4. 조직상 계급성을 강조하는 경우

 

<전략전술분야>

1. 연속 2단계 혁명을 논하면서 민족, 민주, 민중으로 ‘혁명’을 위장하는 경우(민민투 노선)

2. 구분된 2단계 혁명을 내세우며 반미자주, 민족해방, 민주혁명을 주장하는 경우(자민투의 경우)

3. 노동자 계급의 영도권을 강조하는 경우

4. 빈농, 도시빈민, 노동자, 소수 지식인의 동맹을 필수적으로 강조하는 경우

5. 맑스 레닌주의의 전략・전술에 입각하여 국내의 주・객관적 변화에 따라 투쟁의 조직 형태와 구호를 변경하여 투쟁 목표를 수시로 변화시키는 경우

6. 대중선전・선동을 꾀하면서 폭력투쟁으로 이끌려는 경우

 

<이론분야>

1. 유물변증법과 유물사관을 강조하는 경우

2. 특히 계급투쟁에 입각한 혁명을 강조하는 경우

3. 공산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완전 국유화만을 강조하는 경우

4. 투쟁적 모순, 구조적 모순 등을 내세워 현 체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

 

<북한관계>

1. 김일성을 애국자, 위대한 영도자 등으로 찬양하는 주장

2.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찬양 또는 그에 대한 북한 당국의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소개하는 주장

3. 해방 전후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소련군을 해방군, 미군을 점령군으로 규정짓는 경우

4. 북한을 복지사회, 남한을 악의사회로 규정하는 주장

 

<기타분야>

1. 문학과 예술을 공산주의 혁명 투쟁의 시각에서 취급하는 것

2. 종교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묘사

3. 소외문제를 다루면서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강조하는 주장

4. 제반 인간관계를 계급투쟁의 시각에서 조명하면서 혁명투쟁을 합리화하는 주장.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부당한지에 대해서는 김선수 변호사의 다음의 글이 있다.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사노맹을 반국가단체로 인정한 것 이외에는 거의 모두가 국가보안법 제7조에 의한 것이다. 찬양・고무 내지 이적표현물 제작・소지 및 이적단체구성죄가 노동운동탄압에 악용된 것이다. 국가보안법 제7조가 행위형법이라기보다는 심정형법 또는 행위자형법이라는 지적처럼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국가보안법이 적용되는 경우에도 이는 매우 자의적으로 적용되었고, 특히 단체구성원이 아닌 노동활동가들에 대하여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적용될 때에는 합리적인 기준도 없이 적극적 노조활동가에 대해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여 소위 이적표현물이 나오면 이를 빌미로 처벌하였던 것이다.

특히 노동운동은 노동계급의 각성과 실천을 촉구하고 그 기반 위에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권들은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노동운동에 대하여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취하고 일반 국민들로부터 분리시키고자 국가보안법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가 그 권익을 신장하기 위하여 자본과 대립하면서 투쟁하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기본적인 현상이므로 구체적인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노동운동을 불온시하거나 형사 처벌로써 탄압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대처방법이 될 수 없다.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이적단체로 규정되어 관련자들이 처벌된 노동운동단체들은 가장 심한 경우라 하더라도 사회주의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그 실천을 위해 구성원들이 학습하고 상호토론하며 그 결과를 기관지에 담아 배포하는 정도의 수준에 머물렀다. 직접적인 물리력을 준비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정도의 활동을 형사 처벌로 단죄하는 것은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노동운동단체에 대한 이적단체 규정과 탄압은 불행하게도 현 정권 하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국제경쟁의 강화는 노동운동의 이념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으나, 여하튼 노동운동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하는 것은 부당하기 이를 데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현 정권 하에서도 노동운동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처벌하는 행태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결국 이를 근절시키는 방법은 국가보안법의 완전한 폐지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김선수, 국가보안법과 노동운동)

 

 

1)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보안법의 적용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고 분단이 고착되자 이승만 정부는 좌익세력을 탄압하였고, 노동운동 내에서도 우익진영의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1948년 8월 대한노총으로 개편)이 결성되고 1946년 9월과 47년 3월 총파업을 거치면서 미군정과 우익의 탄압으로 크게 약화되어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전평 파괴에 나선다. 국가보안법 제정 직후부터 한국전쟁의 기간 동안 전평에 가입한 많은 노조원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처형된다. 국가보안법은 전평과 남노당과 관련된 노동운동 탄압에 동원되어 무수한 구속자를 유발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남에서의 좌익세력은 말살되었고, 반공이데올로기 광기 하에 노동운동은 불온시 되었고, 군사쿠데타 이후 수출주도 경제개발정책으로 노동자권리가 철저히 유린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노동운동에 대한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의 적용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이후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하면서 노동자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본격화 되었고 이에 대한 독재정권의 노동자계급 운동에 대한 탄압도 본격화 된다.

전두환이 쿠데타로 권력을 잡으면서 반공법을 흡수하여 국가보안법을 새롭게 제정하고 정권유지의 강력한 무기로 활용하면서 노동운동에도 국가보안법 적용이 본격화 되었다. 특히 노동자대투쟁의 기세에 위협을 느낀 독재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노동운동 탄압의 주요수단으로 삼았으며, 노동운동의 선진부분에 대한 타격과 조직사건의 조작이 잇따랐다.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권이 해체되면서 노동운동진영의 청산주의와 합법활동에 대한 표방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하는 경우 언제나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탄압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에도 계속된다.

 

2) 노동운동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양상

여럿을 묶거나 재야단체를 몰아서 이적단체로 만든다/ 조작사건으로 만들려다가 여의치 않아 이적표현물 소지 등을 적용하여 기소한다/ 이적표현물 제작, 소지 등으로 구속한다.

노조활동의 위축을 위한 탄압/ 상담소 등 노동운동단체들에 대한 조작사건 탄압/ 노동자 정치조직 사건에 대한 탄압.

 

 가. 순전히 노동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노동운동가 또는 활동가에 대해 이적표현물 소지,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혐의로 처벌하는 경우.

 -핵심적인 노동운동가나 활동가들에 대해 특별히 흠잡을 것이 없는 경우에 노조사무실이나 집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하여 거기에서 나온 소위 이적표현물을 빌미로 탄압. 국가보안법 적용으로 빨갱이로 몰아 현장으로부터 분리시켜 냄.

 -85년 위장취업 활동가가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의 역사’, ‘노동조합사’, ‘임금이란 무엇인가’ 등을 교재로 의식화시킨 혐의로 구속 하는 등, 학습모임에 대한 국가보안법적용 탄압과 책자나 유인물 소지, 배포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탄압 등이 집중되어 나타났다.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구분하는 것 중에는 ‘태백산맥, 남부군, 조선통사, 사적 유물론, 세계철학사, 민중의 바다, 노동자의 길, 레닌주의의 기초, 한국노동운동론,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원시공산제 사회, 세계와 인간, 노동계급, 마창청년 소식지, 민주노조, 노동자의 철학, 기타 책자나 소식지’ 등이 있다.

 

 나. 단체로 엮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결국 이적표현물 소지 등의 혐의로 기소한 경우

 -수사과정이나 재판과정에서 입증에 실패하여 이적단체 부분을 빼버리고 가택수색 등을 통해 나온 ‘이적표현물’ 소지 등의 혐의로만 기소하거나 판결을 내림.

 -1987년 ‘노동운동후원회’,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성남지역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노선 현장활동가그룹’

 -1990년 ‘남도주체사상연구회’, ‘북부지역노동자연맹’,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노동자투쟁조직(인천노동상담소)’

 -1994년 ‘한누리노동청년회’

 

 다. 이적단체 또는 반국가단체로 기소하여 처벌한 경우

 노동운동단체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단체 또는 반국가단체로 규정되어 형사처벌이 된 것은 한국전쟁이후 80년대 들어 처음으로 등장한다. 폭압적인 군부독재 하에서 사회주의혁명을 통해 근본적인 사회변혁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파악한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노동운동단체들이 많이 발생하였고, 이들에 대하여 정권의 가혹한 탄압이 진행되었다.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몰락으로 노동운동 진영에서도 사회주의 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단체가 감소하게 되자, 정권은 공개적인 노동운동단체들에 대해서도 정부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노동자투쟁을 지원하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이적단체로 내몰아 처벌하였다. 김영삼, 김대중 정권 하에서 벌어진 이러한 탄압은 군부독재 시절보다도 더 많았다.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단체 중에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노동운동단체, 공개적인 노동자정당을 지향하는 단체, 사회주의적 이념에 따라 노동자를 의식화 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하혁명단체도 있다.

 

*조직사건24)    

 -전두환 정권; 전국민주노동자연맹(민노련),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전국노동자연맹투진위원회(전노추), ML당 결성기도, 반제동맹당, 안산지역 노동자해방투쟁위원회, 사상정치교양학교, 친북과 반미공산혁명기도사건,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노해사), 서울남부지역노동자동맹(남노련), 성남지역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노선 현장활동가그룹 사건 등.

 -노태우 정권; 반제반파쇼한국민중전선, 인천・부천지역민주노동자회(민노회), 안양민주노동자일동그룹,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인천지역노동자그룹, 노동계급, 기독교문화노동운동연합(기문노련), 일꾼노동문제연구원, 인천노동자대학,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노동자동맹), 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혁노맹),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관련-사노맹・노동문학실・남한사회주의과학원), 민중민주주의노동자투쟁동맹, 경수지역노동자연합,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 서울지역대학생노동자예술인연합, 성남노동자투쟁위, 일동그룹,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안산민중민주주의노동자투쟁동맹, 노동자문화 마당일터, 국제사회주의자들, 노동자계급해방투쟁위원회(노해투위), 노동자정치활동센타.

 -김영삼 정권; 혁명적사회주의노동자투쟁동맹(혁사노), 국제공산주의당, 노동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 성남지역노동자회, 사회민주주의청년동맹(사민청), 노동자민족문화운동연합, 남한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동맹준비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 공산주의자연합, 노동자해방통일전선, 노동자중심의 진보정당추진위원회(노진추), 노동자정치연대(노정연), 북부노동자회, 한국노동청년연대(한청련), 참세상을 여는 노동자연대, 부천민주노동청년회(부민노청), 디딤돌.

 -김대중 정권; 관악노동청년회,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 진보민중청년연합(진보민청), 민족사랑청년노동자회.

 -이명박 정권; 사회주의노동자연합.

 

 

6. 국가보안법과 국정원

 

● 미군정(CIC25), CIA)과 이승만 -> 육군본부정보국(방첩대->국군정보사, 특무대->기무사) -> 79호실(1959년 1월) -> 중앙정보위원회(1961년 1월) -> 중앙정보부 설립.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정법령 제28조에 의거, 남조선 과도정부에 의해 국방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오늘날 국군기무사령부26)의 효시가 되는 정보과가 탄생한다. 다시 2년 뒤인 1947년, 조선경비대 안에 진일보한 정보처가 설립됨으로써 군이 필요로 하는 정보수집 및 군 내부에 방첩활동과 국내주재 해외무관과의 연락 등 정보업무를 관장하였다. 이 초기의 정보처가 1948년 4월 3일 제주항쟁을 계기로 정보조직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같은 해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군이 창군되면서 육군, 해군, 공군 정보국이 각 창설된다.27)

육군정보국에는 박정희, 김종필, 이후락, 김창룡 등이 몸담고 있었고, 전투정보과(1과), 특별조사과(2과), 공작과(3과)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또 1과에서는 북한과와 남한과로 나뉘어져 있었고, 2과에서는 특별 정보과와 방첩과로 나뉘어졌다.

2과인 특별조사과는 1950년 10월 육군본부 직할로 친일경찰출신의 악명 높은 김창룡이 지휘하는 특무부대로 분리된다. 이후 1960년 육군방첩부대로, 68년에는 육군보안사령부로, 77년에는 육군보안사와 해군방첩대와 공군특별수사대를 통합하여 국군보안사령부로 재편되고, 91년에는 국군기무사령부로 명칭이 바뀐다. 국군기무사령부가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 시절 여론조작, 세월호 유족 사찰, 계엄령 준비 등의 활동을 한 것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일자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1일 국군기무사를 국군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3과인 공작과는 1967년 육군첩보부대로, 72년에는 육군정보사령부로, 90년에는 3군의 첩부부대를 통합하여 국군정보사령부로 개편되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28)

 

보안사의 모체가 된 정보과는 완전히 미군이 조직한 것으로서 미국의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초 단독정부 수립 후 이승만은 미제 24사단 정보참모 토마스 와팅톤 대령, 경찰고문 에릭슨 대령등과의 회담을 통해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제971CIC를 모방하여 한국CIC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경찰신분과 미CIC에 고용된 한국인 중에서 선발・교육된 60명으로 한국정보국을 설치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의 정적 제거목적에 악용될 것을 우려한 국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국회에서 이와 같은 민간정보기구의 설립이 거절되자 토마스 와팅톤은 한국군 내에 군사CIC를 창설할 것을 구상하고 정보국 3과를 설치한 다음 1948년 12월 미 제971파견대는 귀국한 것이다. 이 정보국 3과29)가 보안사의 모체가 된 것이다.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민간정보기구 설립이 좌절되면서 그 기능을 대신하는 군내의 정보기구가 바로 보안사의 모체였기 때문에 비록 외관상 군정보기구의 형태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민간개입의 여지와 가능성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 일제헌병의 하수인 출신의 김창룡이 부대장으로 있던 특무부대는 경찰, 헌병대와 더불어 이승만 독재정권의 3대 파수꾼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 후 5.16과 함께 창설된 중앙정보부와는 권력을 향한 갈등과 경쟁관계에 놓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민간관여가 전혀 봉쇄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10.26 이후 보안사는 ‘최고의 권부’였으며 ‘제5공화국의 권력을 창출한 산파역’이 되었다. (같은 책)

 

1960년 4.19 혁명에 놀란 미제는 61년 5월 16일 박정희 등의 군부세력을 앞세워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게 하고, 4일 뒤인 5월 20일 김종필을 중심으로 특무부대와 첩보부대요원 3천명을 차출해 CIA를 모델로 하여 중앙정보부를 창설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보, 조정, 수사권 모두를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1980.12)와 국가정보원(1999.1)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살기등등하게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제는 국가보안법과 국정원을 통해 정치, 군사, 경제적 신식민 지배를 교묘히 은폐하고 은밀히 신식민지 통치를 행사해 오고 있는 것이다.

 

미제는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1961년 1월 ‘나약해 빠진’ 장면정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음모와 중앙정보부 창설을 미리 기획하여 한국군 내 중앙정보위원회를 창설했던 것이다. 중앙정보위원회는 군사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로 곧바로 확대 재편된다. 이 전 과정에서 CIA가 맡은 역할은 지대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직까지 그 영향력은 지속되고 있다. 미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신식민통치를 은폐해 왔고, 미제의 통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지는 통로에 해당하는 많은 군부대와 정보기관은 이 때문에 철저히 성역으로 취급되고 가려져 왔던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당시 CIA의 최고 책임자였던 덜레스가 ‘쿠데타가 CIA공작의 결과’였다고 밝힌 사실을 기억하자.

중앙정보부는 설치 시점부터 존립한 시기 내내 집권 정치세력의 공작정치와 시민 기본권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많은 정치적 갈등과 대립에 관여하였고, 그러한 정황의 적극적 조성자로 기능하였다. 정치적 활동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중앙정보부의 실상은 방대한 조직과 인원을 동원하여 대통령을 정점에 둔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과 반대 활동을 감시・통제하는 데에 집중하는 기관이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통제 대상에는 시민사회의 개인 및 단체는 물론이고 야당 국회의원과 여당 국회의원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6월 10일, 법률 제619호에 의해 발족된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한은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되었는지 같은 책에서 살펴보자.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국내외 정보사항 및 범죄수사와 군을 포함한 정부 각 부서의 정보, 수사활동을 감독’하며, ‘국가의 타 기관소속 직원을 지휘・감독’하는 권한을 갖도록 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중앙정보부는 각종 정보, 수사기관뿐만 아니라 정부를 구성하는 모든 기관의 활동을 지휘, 감독할 수 있는 명실 공히 최고 권력기구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같은 중앙정보부가 현역군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군부에 완벽하게 장악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군부는 비계엄 상태에서도 중앙정보부라는 기관을 이용해 모든 분야에 대한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중앙정보부는 단지 국가기관만을 지휘, 감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모든 분야에 직접 파고들어 감시와 통제활동을 펼쳐나감으로써 민중에 대한 군사 통치를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중앙정보부는 위와 같은 빈틈없는 감시와 통제를 하면서 저항적인 요소가 발견되면 즉각 탄압을 가함으로써 그 같은 요소가 확산되는 것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했다.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1961년 7월3일에 공표된 소위 ‘반공법’이다.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이처럼 중앙정보부의 제도적 특권은 중앙정보부의 수사권을 검찰의 지휘 아래 두지 않고 오히려 검찰을 지휘・관리하도록 한 점과 중앙정보부의 업무수행에 필요한 협조와 지원을 전 국가기관이 해주도록 한 점에서도 확인된다. 더 나아가 1963년 12월 14일 개정된 중앙정보부법은 대통령 소속 기관으로서 중앙정보부의 조직 구성, 소재지, 정원, 예산 및 결산 등에 대한 비공개를 합법화하였고, 또 타 부처 예산에 중앙정보부의 예산을 계상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다.

국정원의 조직은 원장 1인, 1차장(해외분야), 2차장(국내분야), 3차장(북한분야), 기획조정실장(지원분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정보부 창설 시에는 특무・방첩부대원 3,000명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3년 뒤인 1964년에는 37만 명에 이르게 된다. 요원들의 역할배치로는 휴민트(인적정보, 스파이)의 운용과 테킨트(과학기술 정보, 감청, 해킹 등)의 운용으로 집중된다. 현실에서 드러나는 국정원의 활동상은 정적제거, 테러, 간첩조작, 고문, 감청, 선거개입, 정치공작 등이다.

국정원의 예산규모는 특수활동비 명목에서 예산 약 4000~5000억원, 예비비 약 3000억원, 부처 곳곳에 산재된 ‘특수활동비’ 약 2000~3000억 원으로 총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사용하고 있다고 2013년 알려진 바 있다. 지금의 예산규모는 얼마나 늘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국회 정보위가 유일하게 국정원의 예산을 다루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예산내역은 알 수 없고 요청하는 대로 대부분 수정 없이 통과되는 현실이다. 감사 또한 국가정보원장의 ‘셀프 회계감사’로 대신한다. 결국 국회가 국정원을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이 생산한 문서 중 영구대상 기록물은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거 모두 국가기록원에 보관하게 되어있지만 국정원의 기록물은 지금까지 단 한건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별 문제가 되지 않고 있다.

 

 

7. 변화된 정세와 체제변혁기로서의 대공황기

 

자본의 축적위기에 따른 지배계급의 체제위기에 대한 인식은 2001년 김대중 정권 당시 입법 예고되어 2016년 3월 2일 기어이 통과시킨 테러방지법의 사례로도 알 수 있다.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격하게 일어날 노동자민중들의 시위를 국무총리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선제적 조치를 한 이후, 국회를 통해 군대철수여부를 묻겠다는 내용이다.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은 정세전망에 대해 눈이 어둡겠지만 자본과 정권은 자신들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대처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한편 자본은 이윤축적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총력을 다하지만 고도의 생산력에 기초한 과잉생산공황은 자본의 그러한 노력을 무력하게 한다. 국내 기업들의 동남아, 중국, 러시아 등으로의 시장개척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고, 유일하게 남은 곳이라고는 이북뿐이다. 이윤축적의 위기극복의 일환으로서 남북교류와 경제협력의 새로운 틀을 기대하는 것.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 군사적 긴장을 해소할 수밖에 없는 것. 다행이도 이북의 핵무력은 미국의 한반도정책의 변화를 이끌었고, 국내 독점자본과 미 제국주의 자본은 마침내 지금까지의 대립구도를 파열하고 새로운 자본투하와 이윤축적의 활로를 기대하며 빠른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재인정부의 남북관계변화와 방향은 철저히 계급적대에 기초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정권의 계급적 토대와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남북 모두에게 있어서 체제수호는 결사적인 것이다. 국가는 그 기능을 철저히 수행하고자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인민들의 교류와 접촉 또한 확대될 것이며, 이로 인해 북에 대한 왜곡된 정보만을 주입받은 남쪽 인민들의 충격적인 반응과 북쪽 사회주의에 대한 그간의 적대적 태도가 무너지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심각한 균열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정권과 국가차원에서도, 미 제국주의 차원에서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한 남북경제교류의 확대로,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들의 ‘경거망동’을 통제하기 위하여 파쇼악법과 파쇼기구를 동원한 정교한 탄압으로 나설 것이다. 문재인정권이 권력의 계급적 속성을 혹시라도 망각한다면 미 제국주의로부터 권력의 안정성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미제는 세계 각국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많은 정권을 좌지우지해온 역사가 있다. 박정희와 박근혜가 어떻게 ‘제거’되었는지를 지금의 정권 또한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선’을 넘지 않는 수준의 정치적 행보를 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미평화협정이 단계적으로 또는 급진전 된다고 하더라도, 남쪽에 대한 미제의 정치・경제・군사적 영향력은 계속 유지하고자 할 것이다. 군대는 한발 빼더라도 그 공백을 메꾼다는 명분으로 상당기간 무기판매는 더더욱 증가할 것이다. 남북경제교류의 확대는 제국주의자본의 투자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은 문재인정권 하에서도 결코 폐지되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뒤에 숨어서 은밀한 감시기능을 작동시키다가 적절한 시점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내부단속’을 하는데 그 역할을 다할 것이다. 국정원 또한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저들 스스로에 의해서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계급지배의 수단일 뿐이다.

 

 

<표 7> 국내기업의 외국인 지분율 (2018. 09. 기준)(출처; 코스닥)

 

금융회사

비금융회사

 

회사

외국인 

총지분율(%)

회사

외국인 

총지분율(%)

국민은행

70.30

삼성전자

52.65

신한금융지주

69.45

삼성전기

31.12

우리은행

27.42

삼성SDI

31.71

삼성화재

50.44

신세계

30.78

하나금융지주

71.33

한국전력

28.04

KB금융

70.30

현대자동차

46.17

기업은행

23.68

현대건설

21.78

삼성카드

12.59

현대중공업

16.09

삼성증권

24.86

LG

34.41

10

한국금융지주

34.69

LG화학

37.74

11

우리투자증권

13.92

LG전자

46.91

12

동부화재

46.64

LG유플러스

41.1

13

BNK금융지주

55.03

SK

25.55

14

한국금융지주

34.69

SK텔레콤

42.47

15

NH투자증권

13.92

SK에너지

30.78

16

삼성생명

16.15

KT

49.00

17

메리츠화재

16.87

KT&G

54.00

18

 

 

기아자동차

40.16

19

 

 

쌍용자동차

77.4

21

 

 

포스코

56.35

지난 2018년 1월10일 언론발표를 보면 문재인정권의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UN 인권이사회 회원국 95개 국가가 지난해 11월 ‘국가별 정례 인권검토(UPR)’ 회의에서 개선을 권고한 218개 항목의 수용 여부를 결정해 다음 달까지 보고해야 한다. 주무부처인 법무부는 ‘85개는 권고 수용’ ‘3개 불수용’ ‘130개는 검토 후 확정’ 등의 내용을 담은 보고서(제3차 국가별 정례인권 검토 실무그룹 보고서)를 작성한 상태다.

이날 법무부는 미정이었던 ‘130개’ 항목 중 주요 항목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이어서 주목된다. 법무부가 이날 배포한 회의 자료에 따르면 UN이 권고한 ‘국가보안법, 북한인권법 등 국제인권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국내법 폐지’ 항목에 대해 법무부는 불수용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뿐 아니라 민족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한 법이자 정책 추진 기반”이라고 의견을 달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회의에서 “다만 국가보안법은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임의로 기본권을 제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보충 설명했다.30)

 

김대중 정권시절 국가보안법과 관련한 논란은 아래의 글에서 상세히 알 수 있다. 지금의 정세와 유사성이 있어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성급한 예측이었던 결론이 났지만, 2000년에는 정치권에서 국가보안법의 부분적인 개정이라도 진행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었다. 그것은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의 급진전으로 말미암은 한반도 냉전체계의 급속한 해체가 진행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정부 여당이 3대 개혁입법의 조속한 해결을 위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정치권에서 국가보안법의 논의는 오히려 후퇴하였고,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공방은 다시 새해로 넘어오고 말았다.

정부와 여당은 1999년에는 그래도 대폭적인 개정시안을 마련하였었다. 민주당은 당시 △제2조 반국가단체의 정의에서 ‘정부를 참칭하거나’라는 문구의 삭제 △제10조 불고지죄 폐지 △제19조 구속기간 연장의 삭제 △제18조 참고인의 구인․유지 및 제21조 상금 조항의 삭제 등의 대폭적인 개정시안을 마련하였다. 가장 큰 논란이 되는 제7조에 대해서는 1항(찬양․고무), 5항(이적표현물)을 삭제하여 3항(이적단체 구성, 가입)에 포섭하기로 한 바 있다. 이 안이 2000년에 들어와서는 민주당 내의 국가보안법 개정 특위 시안에서는 제7조 부분에 대한 존속과 삭제, 부분개정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 최고위원 회의에 넘겨졌고, 최고위원 회의에서는 장태완 등의 개정 불가 입장 등에 막혀 당론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소장파 개혁의원들이 주축이 된 대 개혁입법 추진의원모임(총무 김민석)이 건의에서는 “제7조와 관련해서는 형량을 감경하는 정도의 수정안”을 건의했다. 제7조의 부분삭제 및 개정의 입장에서 개혁파 의원들조차도 존속의 입장으로 후퇴하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정치권의 분위기는 오히려 이전보다도 더 후퇴하였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에서 다시 3대 개혁입법의 완결을 약속하였지만, 본인 스스로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해서는 심중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 있다. 자칫 다른 개혁입법과는 달리 국가보안법 개폐는 김대중 정부 하에서 실종될 위기에 있는 것이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2001년 1월 글)

 

노무현 정권에서도 집권초기 국가보안법을 폐지해 보겠다는 시도는 있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폐지된 것’이라고 말들은 많았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그 악명에 맞는 역할을 기꺼이 했던 것이다. 노무현의 그림자라던 문재인정권이 노무현도 못한 국가보안법을 어찌해 볼 수 있을까? 국가보안법은 국정원과 마찬가지로 미제의 은밀한 통치수단으로 탄생한 만큼 미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폐지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사건건 미제의 눈치를 보며 ‘대한미국’의 대통령으로 제한된 역할을 수행하는 문재인 정권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기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가만히 있어도 정세변화로 인해 남북문제가 개선되면서 폐지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그러나 한반도문제는 북미간 문제가 상수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양대 계급의 적대관계에 있다. 따라서 계급관계를 떠나서 남북관계・북미관계를 고찰할 수 없고 계급적대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의 자동폐기를 기대하는 것은 망상이다.

정치사상의 자유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없이는 노동자, 인민의 정치적 발전도 어렵다. 한국사회 구성원들의 정치의식의 미발전도 국가보안법과 국정원 같은 파쇼악법과 파쇼기구들이 활개쳐 왔던 결과이다. 이것은 사회진보 세력의 성장과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회변혁 세력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다. 세계대공황으로 현상되는 체제변혁기에 국가보안법과 테러방지법의 폐지는 피할 수 없는 당장의 과제이다.

따라서 촛불항쟁의 뜨거운 경험과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국가보안법 폐지를 공세적으로 제기하고 투쟁해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투쟁은 권력의 노골적인 파쇼화를 지연시킬 것이며, 파쇼악법 철폐를 구심으로 한 민주주의 투쟁 전선이 성장함에 따라 국가보안법의 실질적인 폐지와 함께 사회진보와 변혁을 향해 성큼 나아갈 수 있는 조건 또한 확장될 것이다.

 

 

8. 노동해방을 전망하며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본격화 하자

 

국가보안법이 인권탄압, 헌법침해, 사상의 자유 및 민주주의의 기본가치 침해 등 숱한 독소를 가진 악법중의 악법이요, 이를 폐지한다 해도 국가안보에 어떠한 위해요인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 법을 끝내 존치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보안법은 그 제정 이래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이념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는 법적 장치 역할을 해왔다. 일반 형사사범의 처리절차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법으로 인식되게 하는 가혹한 밀실수사, 고문, 장기구금과 또한 지나치게 무거운 법정형의 규정은 이 법이 국민에 대하여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도록 해왔음은 물론 이러한 탈법이 오히려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항의를 봉쇄하고 또 그것이 감히 거론할 수 없는 법질서의 상위에 존재하는 가치인 양 국민들의 잠재의식 내부에 각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반공이데올로기는 국가보안법의 위력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왔고 역으로 국가보안법은 반공이데올로기의 이름아래 그 탈법적 자의적 운영이 용인되어 온 것이다. 독재 반공이데올로기를 권력의 강화와 생존의 명분으로 삼아온 역대 정치권력이 이 법을 폐지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존치하려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국가보안법의 역할에 있다.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국가보안법은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이념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는 법적 장치’이자 민주, 통일, 체제변혁 세력을 억압하고 제거하는 수단으로서 파쇼기구인 국정원과 함께 그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또한 미제의 신식민지 지배를 은폐하고 국내 독점자본과 정치권력의 안위를 위해 복무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현 정세를 규정짓는 경제공황기에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과 계급해방 투쟁의 진전을 위해서는 반민주 파쇼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폐지 투쟁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더불어 주한미군철수와 함께 파쇼악법과 파쇼기구들의 존재기반인 ‘헌법 제37조 제2항’의 폐지를 위한 노력도 함께해야 할 것이다.

 

현 정세에서 쟁취해야 할 당면목표는 무엇보다도 국가보안법을 위시한 반민주 파쇼악법들과 그 제도, 기구, 관행, 인물들을 폐지, 척결하여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 특히 사상, 학문, 언론, 결사, 통신의 비밀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어야 한다. … 그것들이야 말로 노동자들이 역사와 사회의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끔 하고,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의 발전을 가로막고,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조직, 자신들이 정당을 갖지 못하도록 억압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불구의 계급, 기형적인 계급으로 만들고 있는 원인이자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채만수. 박근혜 퇴진 투쟁이 한창이던 2017.1~2월의 글)

 

헌법 제37조 제2항. 즉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 운운하는 조항을 개폐하는 것이어야 한다. 헌재가 아무리 정치적이라고 할지라도 저 헌법 제37조 제2항이 없이는 국가보안법 등의 파쇼악법들을 ‘합헌’이라고 판결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한 ‘합헌’ 판결이 없다면 국가정보원 등 각종 파쇼기구들이 노동자인민의 자유와 권리를 마구 짓밟을 수도, 나아가 그 기구들 자체가 존속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채만수, 정세와 노동 132호, p. 41.)

 

국가보안법에 대한 각 정치세력의 태도를 살펴보자면, 우선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반동부르주아 세력은 남북관계의 급진전에 발목을 잡고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동원한 색깔논쟁을 적극 유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으로 자유주의 집권세력은 국군기무사를 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만 바꾸어 활용하고자 하듯이 국가보안법 역시 폐지하지 않고 ‘엄밀히 적용’하여 적절히 활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자주통일 세력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국가보안법이 자연스럽게 사문화 되거나 폐지될 것이라 생각하여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보다는 남북간 교류접촉에 뜨겁게 반응하고 있고, 주한미군 철수투쟁 쪽으로 관심이 많다. 변혁운동 세력은 주한미군 철수 등의 반제투쟁과 국가보안법폐지 투쟁에 아직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반공이데올로기와 파쇼장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저들 지배계급에 맞서, 자주통일운동 세력과 변혁운동 세력의 각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1)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방향

지금 시기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방향은 첫째, 민주주의 투쟁으로서 정치・사상의 자유와 결사・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확장하지 못하면 운동은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하여 무수한 간첩조작과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발전을 가로막아온 ‘국정원’과 ‘기무사(안보지원사)’의 해체도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이며, 미제의 식민통치 수단을 부분적으로나마 제어하는 의미를 갖는다.

둘째, 분단체제에 대해 정전의 종식과 분단 해체 및 한반도 평화를 구현하는 것이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연속해서 개최되고 민・관의 대북교류가 활발하게 열리고 있는 이때, 반동 수구세력이 딴지를 걸 정도로 제도적 장애물을 그대로 두고 남북관계를 계속 진전시켜 나간다는 것은 모순되고 기만적인 것이다. 종전 선언과 한반도 평화는 미제의 축출과 맞닿아 있다.  셋째, 자본주의 체제변혁기인 현재,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보급하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계급)대중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당 건설의 주체를 발굴하며, 투쟁의 발전 정도에 따라 운동의 질적 변화도 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투쟁의 주체

투쟁의 주체로는 첫째,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 고통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또한 사회변혁의 주체이어야 할 노동자계급 대중이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 반제투쟁과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자주통일 운동진영이나 하는 것으로 사고하는 계급운동・변혁운동 내의 정서는 극복되어야 한다. 노동자계급 운동이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통해 그동안 비판이 집중되었던 대중조직에서의 조합주의와 경제주의를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동안 탄압이 집중되었던 자주통일 진영에서도 제국주의 지배의 산물인 국가보안법의 폐지 없이 한반도 평화와 미제 축출은 요원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계급운동 진영과 함께 투쟁에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미 제국주의의 하수인인 국내 지배 권력에 대한 투쟁에서 승리할 때 제국주의의 축출도 가능한 것이다. 제국주의와 결탁한 독점자본과 정치권력에 대한 투쟁, 그리고 미군철수 등의 반제투쟁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분리되어야 할 성격이 아니다.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전선은 계급운동 진영과 자주통일운동 진영이 반드시 만나야 하는 지점이다. 그렇게 될 때 시민운동 세력과 몰락하는 소부르주아 세력도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으로 견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투쟁전술

투쟁전술에 있어서는 우선, 남북교류의 확대와 한반도 긴장완화의 정세를 충분히 활용하고,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미군철수, 사드철거 등의 정세에 부합하는 정치적 슬로건과 국가보안법 폐지 슬로건을 결합시켜야 한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조직의 대규모적인 선언운동과 성명의 조직화 및 대중 집회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가두를 중심으로 현장의 요구와 결합시켜 정치투쟁의 세를 키워 나가야 한다.

투쟁의 과정에서 경계해야 할 것으로, 문재인정권은 남북관계의 변화에 조응하라는 대중의 압력에 밀려 국가보안법 폐지보다는 일부 개정을 일정한 시점에서 시도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우리의 태도는 그 어떠한 개정도 아닌 완전한 폐지임을 분명히 하며, 전선의 분열을 막고 투쟁의 강도를 높여 계속 끈질기게 밀고 나가야 한다.

끝으로 부산에서 시도되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소개하자면, 2018년 5월 9일 1,173명의 대중적인 노동자 선언의 조직화와 기자회견 이후 지속적으로 도심 집회 및 선전전을 펼쳐가는 중이다. 민주노총 골간조직을 통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지역차원의 국가보안법 폐지 공동행동을 조직하고 확대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노사과연

 


 

1) 박원순의 ≪국가보안법연구≫는 1982~1992년에 시리즈로 출판된 총 3권으로, 국가보안법 변천사(1권), 국가보안법 적용사(2권), 국가보안법 폐지론(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예방구금제도; 1925년 제정된 내용은 국체의 변혁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정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와 행동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1928년 공산당원 뿐 아니라, 그 지지자 그리고 노동조합, 농민조합 활동,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 참가자까지 적용되게 되었다. 그 뒤 1935년에 치안유지법의 대상이었던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괴멸하나, 이 이후 일본의 사법부는 종교단체, 학술연구 단체 등을 단속 대상으로 하여 천황제 파시즘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법은 1941년 더욱 강력해져, 전65조로 전면적으로 개정되었고, 특히 제3장 전26조에 걸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 내용은, 예방구금 제도입니다. 이것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형을 받고 비전향인 채로 형기를 만료하여 출소한 자의 재범을 방지하기 위해 그 사람을 계속 구금할 수 있는 것으로 지방재판소 검사가 청구하여 재판소가 결정하기만 하면 바로 그 대상자를 구금할 수 있다. 이 예방구금은 2년으로 제한되나, 전향하지 않는 경우 갱신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미전향 공산당원은 형기 만료 후에도 일본의 패전까지 감옥에 있게 되었다. 세계 최대의 악법 또는 자유사형법이라 불리며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치안유지법은 패전 직후 1945년 10월 15일 GHQ(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지령으로 폐기되었다. 일본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치안유지법의 희생자는 체포에 의한 송치 75,681명, 기소 5,162명이나, 송치되지 않은 경우를 포함하면 10여만명, 질병 등의 이유로 옥사가 1,503명, 114명이 고문, 학대로 옥사, 65명이 학살당했다. (출처: 1976년『문화평론(文化評論)』임시증간호)

 

3) 1차 개정; 1949년 12월 19일 / 2차 개정; 1950년 4월 21일

 

4) 보도구금제; 사상전향공작을 하는 보도소에 구금하는 것, 이것은 후에 법원의 재판을 배제한 ‘사회안전법’으로 독립, 발전한다. 특히 ‘보도구금’제도 관련해서, 사상전향이 되었다고 판단해 석방한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만 했던 ‘국민보도연맹’이 있다. 1950년대 초반(전쟁 전) 보도연맹원수는 30만명이 넘으며, 대부분 전쟁 발발 직후 국군에 의해 학살된다.

 

5) 내무부 치안국 자료

 

6) 조봉암은 195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된다.

 

7)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8) 3차 개정; 1958년 12월 24일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날치기 통과시킴.

 

9) 4차 개정; 1960년 6월 10일

 

10)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돌베개

 

11) 1980년 5월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권력 장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제반 법과 제도적 장치를 자신들 마음대로 정비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발족시킨 과도입법기구.

 

12) 부역자 55만 명, 보도연맹원 30만 명, 재소자 5만 명, 그 외…하여 100만 명 이상의 학살자 발생으로 추정하는 기록들이 많음.

 

13) 북에서 남파된 이종사촌인 간첩 김종섭을 만났으나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

 

14) 매부인 간첩 정연철이 포섭 차 왔으나 포섭에 응하지 않고 ?아냈을 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

 

15) http://chamstory.tistory.com/3067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16) <표 3>과 <표 4>의 구속자 수가 차이가 있다. 특히 김대중 정권에서의 구속자 수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17) <표 5>에서도 앞의 표에 비교해서 차이가 있다. 지저분하게 ‘맛사지 한 통계’이다보니 서로 다른 수치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부 각 기관에서 생산하는 통계수치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

 

18) <표 4> 경찰청, 범죄통계.

19) <표 4> 경찰청, 범죄통계

20) <표 3> 검찰청, 범죄분석통계

21) <표 5> 대검찰청, 내부자료

22) <표 5> 대검찰청, 내부자료

 

23)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역사비평사

 

24) 박원순, ≪국가보안법연구≫ 2권, 역사비평사 참고.

 

25) 미 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Counter Intelligence Corps)

 

26) 국군보안사령부-> 국군기무사령부-> 국군안보지원사령부(2018.9.1.)

 

27) 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인간 전두환, 창조와 초극의 길≫,
동서문화사

 

28) 김당, ≪시크릿파일 국정원≫, 메디치미디어

 

29) 2과(조사과)의 착각으로 보임.

 

30) 현일훈 기자, “법무부 ‘국가보안법 폐지’ 수용 안하기로…진보측 반발”, ≪중앙일보≫, 2018.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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