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자본론≫과 현대 자본주의

 

채만수 │ 소장대행

 

 

I. 각별한 인연

 

예나 지금이나 헌법에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를 포함한 온갖 자유를 화려하게 보장하고,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그리고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는 자유 대~한미국과 ≪자본론≫은 각별히 아름다운 인연을 가지고 있다. 1945년 8월 일제(日帝)의 식민지 (사상) 억압에서 벗어나자 2년 가까운 준비를 거쳐 1947년 6월부터 ≪자본론≫을 (최영철・전석담・허동 번역으로, 서울출판사에서) 분책으로 순차적으로 간행하기 시작했는데, 1948년 7월 15일의 제2권 제1분책(제2권 제2편 제17장)을 끝으로 더 이상 간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948년 8월 15일의 자유 대~한미국 건국을 기념하여!

이후 ≪자본론≫은 공포의 금서가 되어 자유 대~한미국에서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고,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까지는 40년이 걸렸다. 물론 그저 시간의 흐름이 해결한 게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 및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절정에 달했던 오랜 민권투쟁, 특히 직접적으로는 1980년대에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발전・격화되면서 그와 궤를 같이하여 투쟁의 침로와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사회구성체 논쟁” 혹은 “한국사회 성격 논쟁”으로 불렸던, 대대적인 사상・학문 투쟁의 성과였다.

아무튼, ≪자본론≫이 그렇게 공포의 금서가 되어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나는 학창시절에, 그것을 읽고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을 전혀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어떤 언어로도! 당시 대학에 침투해 있던 통일교의 극우 학생조직 ‘원리연구회’ 애들이 “자본론 화형식”을 한다며, 정말 ≪자본론≫인지, 아니면 애꿎은 다른 책인지 모를 두꺼운 책을 불태우는 것을 한번 멀리서 안타깝고 부글거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과학으로서의 경제학 공부는 주로,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일본의 연구자들이 ≪자본론≫을 축약하는 형식으로 쓴 ‘경제원론’(특히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經濟學大綱≫[改造社 ≪經濟學全集≫ 第1卷])과 ≪자본론≫의 내용 이해・해석과 관련한 논쟁서들, 맑스 경제학적 관점의 농업경제학 서적들, 그리고 논문들을 통해서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문(英文)으로는 영국의 모리스 돕(Maurice Dobb)이나 미국의 폴 스위지(Paul M. Sweezy), 레오 휴버만(Leo Huberman), 해리 맥도프(Harry S. Magdoff), 폴 바란(Paul A. Baran) 등의 일부 저서들을 통해서였다. 이런 책이나 논문들은, 맑스나 엥엘스의 저작도 아니고, ≪자본론≫이라는 표제도 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다행히 ‘공안・정보기관’의 무지 덕택에 고서점에서 판매되거나, 수입・판매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잠시 한 역사가의 익살 섞인 증언을 들어보자.

 

1970년대 말, 한 대학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불온서적 열람과 대출을 금지하라는 상부 지시에 따라 사서들이 바삐 움직이는 중에, 한 사람이 서가에서 막스 베버의 책을 치웠다. 작업을 감독하던 상사가 그에게 호통을 쳤다. “어이, 카를 마르크스 책을 치우랬더니 막스 베버 책은 왜 치우나? 둘은 다른 사람이라고.” 사서가 대답했다. “그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경찰은 모를 수도 있잖아요.” 실제로 1980년대에는 가방 안에 막스 베버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책을 넣어 두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곤욕을 치른 학생이 적지 않았다. / … / 1909년 2월23일 ‘출판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형식은 대한제국 법률이었으나 불온성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은 일본 제국주의의 관점이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점한 즉시 서적 수백 종의 발행과 판매를 금지했다.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에 금서(禁書)로 지정된 도서는 3천 종이 넘었다. 해방 후에도 불온서적 지정과 탄압은 계속됐고, 특히 국가보안법은 불온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었다. 한국에서 불온서적은 오랫동안 불법무기나 마약과 같은 물건이었다.1)

 

“가방 안에 막스 베버나 … 마르쿠제 책을 넣어 두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곤욕을 치른 학생이” 어디 1980년대뿐이었겠는가? 1960년대・70년대에도, 아니 그때에는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러한 곤욕은 물론 경찰의 무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경찰에 ‘찍힌’ 학생들을 ‘불심검문’을 빙자하여 괴롭히고 협박하는 수단이었을 것임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1909년 2월23일 ‘출판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형식은 …” 이하도 주목해야 한다. ‘출판법’이 공포된 1909년이면, ‘대한제국’은 껍데기뿐이어서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지나 진배없던 시기이다. 그때에 바로 사상・학문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었고, ‘해방’ 후에도 “불온서적 지정과 탄압은 계속됐고, 특히 국가보안법은 불온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두었다.” 그런데, 내가 듣기로는, 우리의 ‘일제시대’에 정작 일본에서는, 일제가, 학문적 저작이 아니고, ‘정치적 저작’이라고 강변한 ≪공산당 선언≫과 같은 극소수의 예외는 있었지만, 맑스・엥엘스의 저작들은 거의 모두 다 합법적으로 출판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유 대~한미국에서 ≪자본론≫ 등이 공포의 ‘불온서적’이던 시절, 정작 미국에서는 ‘불온서적’・‘금서’ 따위의 지정은 물론 없었다. 매카시즘이 한창이던 시기에 사실상의 탄압이야 물론 있었겠지만.

다음 기사는 식민지에서와 그 본국에서의 사상 탄압・통제의 강도의 차이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다.

 

일제 때인 1927년 11월 ≪예술운동≫ 창간호에 실린 시 ‘담(曇)-1927’에서 임화(1908-1953)는 지구 곳곳에서 진행되는 세계 혁명의 과정을 구체적인 사건과 연속적인 숫자의 배열로 생생하게 그려냈다. … 그러나 그 이듬해 발표한 … 시들에는 혁명의 당위성과 투쟁을 고취하는 직설적 표현이나 역동적 묘사가 없다.

‘결정적인 문제는 조선에서 발표된 임화의 시가 혁명의 시간을 대개 미래의 것으로만 정의했다는 점이다. 혁명적인 상황은 좀처럼 현재와 만나지 못하는데, 그것은 ‘담-1927’의 시간의식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었다.

…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이런 차이를 낳은 근본 원인이, ‘담-1927’은 ‘내지’ 일본에서 발표된 데 비해 그 뒤의 시들은 ‘외지’ 조선에서 발표됐기 때문이라고 썼다. … ≪예술운동≫을 도쿄에서 발행한 것은 그곳보다 훨씬 더 엄혹했던 식민지 경성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도쿄에서도 검열은 있었지만 그 법률과 행정규칙 등 검열수단의 효력범위(‘법역’)와 그것이 허용하는 서술 가능성의 한계(‘문역’)는 훨씬 넓었다.

그리하여 일제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던 임화 등 사회주의 작가들은 검열의 피난처로 도쿄를 활용했다.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했을 뿐 아니라 사후에 판금이나 압수 조처가 내려지더라도 그 사이 짧은 기간 유통할 수 있었고, 불법 지하유통은 물론 조선으로의 밀반입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1920년 말 도쿄에서 간행된 조선인 발행 출판물 28종 가운데 22종이 반제국주의운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 사회주의 문헌들은 당시 조선에선 ‘창간호부터 모조리’ 사전에 반포・발매 금지되거나 압수당했다. 위법자 처벌과 구금 환경도 ‘세계 최악’이었다. (대~한미국에서 ‘세계 최악’이었던 것처럼: 인용자.)

한 교수는 혁명에 대한 신념을 문자화할 수 없는 현실이 혁명에 대한 기대 자체를 약화시켰다고 봤다. …

한 교수는 검열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따른 ‘언술 내용의 도착과 이질성’이 종종 식민지문화의 미성숙을 증명하는 표지로 이해되거나 식민지인의 지적 활동에 대한 폄훼의 증거로 활용돼 왔다며, 한국의 근대소설사에 세계에 내놓을 만한 ‘위대한 대작’이 없다는 콤플렉스의 이면에도 이런 왜곡된 식민지성이란 오랜 관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했다. 그 검열기제는 일제 패망 뒤에도 미군 점령기를 거쳐 지금까지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2) (강조는 인용자. 이하에서도 밑줄에 의한 강조는 다른 언급이 없는 한 모두 인용자의 것이다.)

 

아무튼, 그리하여 내가 ≪자본론≫을 처음 구경한 것은 1983년 여름 일본에서 일본어 번역판으로였는데, 그때 9개 분책 중 제1분책(제1권 제2편까지)을 구매, 허겁지겁 서둘러 읽고, 아깝고 아까웠지만, 호텔방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국가가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는 자유 대~한미국에 입국해야 했기 때문에! 그러고 나서 내가 ≪자본론≫(일본어 번역판) 전권(全卷)을 입수한 것은 1985년 겨울이었는데, 그때 그것을 나에게 전해준, 이제는 고인(故人)이 된 사람은, 방안이었기 때문에 차마 장갑을 끼고 건넬 수는 없었던지, 십자(十字)로 묶인 비닐 끈에 조심스레 새끼손가락을 걸어 내게 건네주었다. 혹여 지문이라도 남아 횡액을 당할까봐서!

자유 대~한미국과 ≪자본론≫ 간의 (그리고 나와의) 얼마나 각별하고 아름다운 인연인가?!

 

 

II. 창궐하는 비과학

 

맑스와 엥엘스는 “지배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라고 말했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3) 주지하는 것처럼, 실제로 20세기 후반 이후의 사회는 자본이 지배하는 대중조작 매체의 엄청난 발전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 본질적으로 경제비과학인 자본의, 맑스의 표현을 빌리면, 변호론적 속류 경제학이 자본주의 세계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유 대~한미국에서는 ≪자본론≫이 40년 동안이나 공포의 금서가 되는 인연・상황이었으니, 이 사회에서 ≪자본론≫에 대한, 따라서 사회・경제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그 인연・상황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심지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임을 자임하는 교수들조차, 말 그대로 극소수를 빼고는, 비(非)≪자본론≫적・비맑스주의적, 따라서 비과학적이다. 그들의 놀라운 ‘마르크스 경제학’에 의하면, 예컨대, 노동생산력이 증대하면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기도4) 하고, ‘노동생산력’과 ‘노동생산성’은 다른 것이기도5) 하며, 사실상 토지소유와 무관한 소프트웨어의 가치의 주요 구성부분이 지대이기도6) 하고, 국가지폐화된, 즉 불환의 현대 중앙은행권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기도7) 하다. 그리고 심지어 옛 쏘련은 자본주의 사회였단다!8)

이들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 하에 이렇게 비≪자본론≫적인 주장을 펼칠 때, 거기에는 전반적으로 물론 ≪자본론≫에 대한 이해의 부족, 혹은 심지어 전적인 몰이해9)가 있지만, 특히 국가지폐화된, 즉 불환의 현대 중앙은행권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 거기에는,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이른바 ‘관리통화제’ 하에서는 ≪자본론≫의, 따라서 맑스와 엥엘스의 화폐이론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낡은 이론, 단지 학설사상의 이론이 돼 버렸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실제로 이채언 교수는, 예컨대,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환지폐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잘못된 견해가 지금까지 지배하여 왔다. 하나는 오늘날의 불환지폐가 흔히 과거 18・19세기의 국가지폐와 같은 종류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지폐가치에 관한 설명이나 힐퍼딩의 지폐가치의 결정에 관한 설명, Knapp의 국가지폐에 관한 설명이 그러한데 이들은 모두 18, 19세기식의 국가지폐만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오늘날의 관리통화제도 하에서의 불환지폐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들은 모두 오늘날의 관리통화제도가 생겨나기 이전에 살았기 때문에 국가지폐와 오늘날의 불환지폐를 구별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관리통화제도 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불환지폐와 과거의 국가지폐를 여기서 구별해야 한다.10)

 

또한, ≪자본론≫의 역자 김수행 교수도, 예컨대, 명시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불환지폐가 유통수단으로서만 기능한다고 가정하면서 불환지폐의 유통량 증감에 따라 상품의 가격 또는 물가가 상승하거나 하락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지금의 불환지폐가 유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지불수단이며 가치저장수단으로 퇴장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 타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더욱이 이 주장은 화폐가 자본으로 기능함으로써 생산의 확대나 생산성의 향상에 기여한다는 점을 고려에 넣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실성을 가지지 않는다.11)

 

“얼씨구!” 소리가 절로 나온다.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임을 자임하는 노(老) 교수님(들)조차 이 지경이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구나 이 자유 대~한미국에서 나고 자란 순진한 대중들이 혹시 “아직도 ‘백수십년 전 ≪자본론≫’이냐”고 묻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묻는 정작 자신들은 수백 년, 수천 년 된 이런저런 경(經)들을 끼고 다니면서 시도 때도 없이 봉독(奉讀)・암송하시는 자가당착을 지적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론≫과 현대 자본주의”라는 문제가 제기될 때, 우리에게는, 당연히 “≪자본론≫에는 더욱 깊이 파헤쳐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할 논점도 있”고, “또한 맑스가 의도했지만 완성시키지 못하고 끝난 이론적 전개도 있”음을12) 인정하면서도, 그리고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자본주의의 발전・변용을 온전히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론의 보다 구체적인 전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문제들, 그 본질적인 문제들 역시 ≪자본론≫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그 본질과 운동법칙을 결코 올바로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할 의무가 있다.

지면상의 제약도 있고 하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우리 사회에서의 경제학 혹은 경제정세 문제의 이해와 긴밀하게 관련된,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문제 몇 가지만을 간단히 다루기로 하자.

III. ≪자본론≫과 현대 자본주의의 몇 가지 문제들

     ― 창궐하는 비과학 (2)

 

(1) 인플레이션에 대하여

주지하다시피, 1930년대의 대공황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은행권의 금태환을 항구적으로 정지하고, 불환의 중앙은행권에 강제통용력을 부여하여 법화(法貨)로 삼는 이른바 ‘관리통화제도’의 시대로 들어갔다. 말할 나위도 없이 독점자본주의 시대의 과잉생산 공황의 격화, 즉 전반적 위기의 심화에 따른 국가의 대응의 강화,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강화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 즉 금태환의 정지와 전면적인 불환통화제도로의 전환은, 즉 이른바 ‘관리통화제도’는 당연히 제도 그 자체에 인플레이션을 내포하고 있다. 금태환의 책임을 벗고 ‘무제한한’ 재정지출을 통해서 이른바 ‘유효수요’를 창출, 불경기・공황의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게 소위 ‘관리통화제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13) 미국의 도매물가 통계를 보면, 실제로 1933년 4월 1일에 금 태환을 정지하자마자 도매물가지수가 극적으로 오르기 시작한다.14)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사실상 모두 고율의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플레이션 현상을 두고, ‘주류 경제학’을 자임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은 그것을 화폐론적으로 해명하려는 어떤 진지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통화증발’에 따른, 혹은, 사실상 같은 말이지만, ‘방만한 재정지출’에 따른 물가상승이라고 하면서도, 그것을 화폐론적으로 해명하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경제학을 과학이게끔 하는 초석인 노동가치론은, 즉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량에 의한 상품의 가치 규정, 나아가 가격 규정은 자본의 이윤은 결국 잉여노동, 즉 착취된 노동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이 갈수록 확산・격화되면서 그 노동가치론이 현실적으로 자본에 위험한 것으로 되자, 부르주아 경제학은, ‘한계효용설’이라는 황당하게 과학적인 가치론을 거쳐 결국 가치론을 포기하고 가격이라는 현상에만 매달리고 있는 나머지, 인플레이션을 화폐론적으로 해명할 능력과 근거를 전적으로 잃은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문제의 하나인 인플레이션은 오로지 ≪자본론≫(과 그 전작[前作]인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에 의거해서만 그 화폐론적 본질 규명이 가능하다. 맑스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권(紙券, Papierzettel)의 량은 … 그것이 유통 속에서 대리하는 금화폐의 량에 의해서 규정되고, 지권은 그것이 금화폐를 대리하는 한에서만 가치표장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단순히 그 량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하여 유통하는 금의 량은 상품가격에 달려 있는 반면에, 유통하는 지권의 가치는 오로지 그 자신의 량에 달려 있다.15) (강조는 맑스.)

 

[지폐의 증발에 의한] 물가(Preise)의 등귀는 단지, 가치표장들이 그 대신에 유통한다고 칭하는 금의 량에 이 가치표장을 강제로 등치시키는 유통과정의 반작용에 불과할 것이다.16)

 

따라서 지권의 량의 증감― 지권이 배타적인 유통수단으로 되어 있는 경우의 그 증감 ―에 따른 상품가격의 등락은, 유통하는 금의 량은 상품의 가격에 의해서 규정되고, 유통하는 가치표장의 량은 그것이 유통에서 대리하는 금주화의 량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하는 법칙이 외부로부터 기계적으로 파괴된 경우에 유통과정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야기된 이 법칙의 관철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한편에서는 어떤 임의의 수량의 지권도 유통과정에 의해서 흡수되고, 말하자면, 소화된다. 왜냐하면, 가치표장은 그것이 어떤 금명의(金名義)를 가지고 유통에 들어가든 유통의 내부에서는 그 대신에 유통하고 있었을 금량의 장표로 압축되기 때문이다.17)

 

여기에서는 강제통용력을 가진 국가지폐만을 논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금속 유통으로부터 발생한다. ….

1파운드 스털링(Pfd.St.), 5파운드 스털링 등의 화폐명이 인쇄되어 있는 지권(紙券)들이 국가에 의해 외부로부터 유통과정에 투입된다. 그것들이 현실적으로 같은 이름의 금액(Goldsumme)을 대신하여 유통하는 한, 그 운동에는 화폐회류 자체의 법칙들만이 반영된다. 지폐유통의 특유의 법칙은 단지 금에 대한 지폐의 대리관계로부터만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 법칙은 단순히 이것, 즉 지폐의 발행은 그것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금(또는 은)이 현실적으로 유통하지 않으면 안 될 량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통영역이 흡수할 수 있는 금량은 사실은 어떤 일정한 평균수준의 상하로 끊임없이 변동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어진 나라에서 유통하는 매개물의 량은,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어떤 일정한 최소한 이하로는 결코 내려가지 않는다. 이 최소량이 끊임없이 그 구성부분들을 교체한다고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것이 끊임없이 다른 금조각들로 구성된다고 하는 것은 물론 이 최소량의 크기나 유통영역 안에서의 이 최소량의 회전에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최소량은 종이로 만든 상징들(Papiersymbole)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다. 그에 반해서, 오늘 만일 모든 유통수로(流通水路)들이 그 화폐 흡수능력의 최대한까지 지폐로 채워져 버린다면, 상품유통의 변동의 결과로 내일은 그 유통수로들이 범람할 수도 있다. 모든 한도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나 지폐가 만일 그 한도를, 즉 유통할 수 있을 같은 명칭의 금주화의 량을 초과하면, 전반적인 신용붕괴의 위험을 도외시하면, 지폐는 상품세계의 내부에서는 다만 그 내재적인 법칙들에 의해서 규정된 금량만을, 그리하여 또한 오로지 대리할 수 있는 금량만을 표시한다. 만일 지권의 량이, 예컨대, 1온스씩의 금 대신에 2온스씩의 금을 표시한다면, 실제로는, 예컨대, 1파운드 스털링은, 이를 테면, 1/4온스의 금 대신에 1/8온스의 금의 화폐명이 된다. 그 효과는, 마치 가격의 척도로서의 금의 기능에 변화가 생긴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이전에는 1파운드 스털링의 가격으로 표현되던 동일한 가치들이 이제는 2파운드 스털링의 가격으로 표현된다.

지폐는 금표장(金標章) 즉 화폐표장(貨幣標章)이다. 상품가치들에 대한 지폐의 관계는 단지, 지폐에 의해서 상징적・감각적으로 표시되는 동일한 금량에 상품가치들이 관념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데에 있을 뿐이다. 지폐는 오로지, 다른 모든 상품분량과 마찬가지로 역시 가치량인 금량을 그것이 대표하는 한에서만, 가치표장이다.18)

 

이른바 ‘관리통화제’ 하에서, 즉 전면적인 금태환 정지 하에서 불환은행권의 증발에 의한 명목적인 물가상승을 가리키는 ‘인플레이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훨씬 전의 저작들이지만, 그 인플레이션의 화폐론적 본질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인플레이션이란, 화폐가 그 유통을 매개하는 상품 혹은 상품들과 화폐인 금과의 가치비율, 따라서 교환비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즉 상품가격이 실질적으로는 상승하지 않았는데, 그 상품의 유통에 필요한 금량을 넘어 불환의 지폐가 유통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그에 비례하여 물가가 명목상으로 상승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1971년 8월 15일 이전에는 인플레이션과 불환의 현대 중앙은행권을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하는 데에 대해서 적어도 맑스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어떤 이의(異意)・이견(異見)도 없었다.

그런데 그 후에는 이론(異論)이 목소리를 높이며 등장했다. 국제수지 적자의 누적으로 대외단기채무가 그 금보유고를 훨씬 상회하기에 이른 미국이 1971년 8월 15일 대통령 닉슨의 “특별성명”을 통해, IMF에 대한 1944년 이래의 교환 보증을 무시하고, ‘금-달러 교환’ 정지를 선언하자,19) 비과학의 세계인 부르주아 경제학계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자칭 타칭 맑스경제학자라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앞에서 본 김수행 교수나 이채언 교수와 같은, ‘금폐화론자(金廢貨論者)들’이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것이다. 저들이 어떻게 요설(饒舌)・요설(妖說)을 롱(弄)하든, 그 주장인즉슨, 미국의 대통령, 즉 미국 정부가 ‘금-달러 교환 정지’라는 조치를 통해서 금을 폐화(廢貨), 즉 더 이상 화폐가 아니게끔 하였고, 미국의 달러를 비롯한 불환의 중앙은행권을 화폐이게끔 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철학자’이시며, 이른바 ‘기본소득’ 운동의 저명한 이론적 지도자들 중 한 분이신, 서울시립대의 곽노완 교수께서도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표현하고 계신다.

 

1971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브레튼우즈 협정을 어기면서 달러화의 금태환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이어 1973년에는 급기야 브레튼우즈 협정의 파기를 선언함으로써, 달러화를 세계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는 붕괴되고 각국의 외환거래는 기본적으로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에서 최종적인 지불수단은 더 이상 금이 아니라 지폐로 전환된 것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의 최종지불수단인 화폐는 상품화폐인 금(또는 은)일 수밖에 없다고 한 맑스의 테제는 자기 시대의 사례를 절대화한 것임이 역사적으로 판명되었다.20)

 

전형적인 ‘화폐국정설’이다! 그러나, 맑스는 ≪자본론≫ 제1권 제1장 제3절 “가치형태 즉 교환가치” 및 제2장 “교환과정”을 통해서 상품의 가치척도 기능과 유통수단 기능이 어떻게, 왜 교환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특정한 상품인 금 또는 은의 배타적 기능으로 고착되는가, 즉 어떻게, 왜 금 또는 은이 화폐로 되는가를 밝히고 있고, 엥엘스는 그것을 한 마디로, “금, 즉 가치의 척도로서 그리고 유통수단으로서 복무하는 특수한 상품은, 사회의 더 이상의 간여 없이, 화폐로 된다.(Gold, d.h. die spezifische Ware, die als Maß der Werte und als Zirkulationsmittel dient, wird ohne weiteres Zutun der Gesellschaft Geld.)”21)고 언명하고 있다. 금폐화론을 주장하는 놀라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들’과는 분명 정반대로!

앞의 이채언 교수나 김수행 교수로부터의 인용문들에서 보는 것처럼, 저들 금폐화론자들은 이른바 ‘관리통화제’ 하의 불환은행권은 ‘가치저장 기능’ 및 가치척도 기능을 포함, 화폐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자신들의 지적 바탕인 부르주아 경제학이 이른바 ‘GDP 디플레이터’ 운운하고 부르주아 통계당국이 이를 통계에 반영할 때, 그것은 현대 불환은행권이 이른바 ‘가치저장 기능’도, 가치척도 기능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암묵 중에, 그러나 또한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그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아니, 사실은 그것을 뻔히 목도하면서도 그렇게 지껄이고 있다. 도대체 자신들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를 모른 채!

앞에서 보았듯이, 이채언 교수나 김수행 교수는 오늘날의 불환 중앙은행권을 ≪자본론≫에서 논하는 국가지폐와 동일시하는 관점・논자들을, “그들은 모두 오늘날의 관리통화제도가 생겨나기 이전에 살았기 때문에”라거나, “지금의 불환지폐가 유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지불수단이며 가치저장수단으로 퇴장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 타당성을 가지지 않는다” 운운하면서, 폐물로 취급하고 있다. 언필칭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라는 자들이, 맑스도 엥엘스도 불환의 국가지폐나 불환은행권의 전일적(全一的) 통용을 경험하지도,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기의 저 악명 높은 아씨냐(assignat) 지폐의 증발이나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의 그린백(green back) 지폐의 증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은 물론, 나폴레옹 전쟁(1796-1815) 시기에는 영국에서조차 군비를 조달할 목적 때문에 은행권의 금태환이 중지되고 1799년에서 1819년까지 잉글랜드 은행의 불환은행권이 유통되었던 사실은 맑스가 아니더라도 당시대인들에게는 생생한 경험, 생생한 기억이었다.22)

 

특히 엥엘스는, ≪자본론≫ 제3권(1894년)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불환은행권은, 오늘날의 러시아에서처럼 그것이 국가신용에 의해서 사실상 지지(支持)되고 있는 곳에서만 일반적 유통수단이 될 수 있다. 그 때문에 불환은행권은 이미 전개된 불환국가지폐의 법칙들(제1권, 제3장, 제2절, c 주화. 가치표장)에 종속된다.23)

 

그런데 사실은,

 

뿐만 아니다. 불환은행권이 전일적ㆍ배타적으로 유통하고 있는 조건 속에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인플레이션의 원인과 본질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해주는 유일한 이론으로서의 지폐유통의 특유의 법칙(spezifisches Gesetz der Papierzirkulation)24) 역시 국가지폐로 대표되는 불환통화의 전일적 유통을 조정(措定)하지 않고서는 결코 도출될 수 없는 것이었다.25)

그런데도 저들은, 과연 독점자본 지배 하의 자유 대~한미국 강단의 놀라운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자들’답게,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혹은 그러한 사실들조차 모르는 무지와 박학(薄學)을 과시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의 명목적 상승과 그에 따른 실질임금의 끊임없는 저하는 오늘날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에게 매년 ‘임금인상 투쟁’이라는 시시포스(Sisyphus)적 노동을 강요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하자.

 

(2) 경제위기, 즉 공황에 대하여

‘공황’ 하면, 나한테는 잊히기 어려운 기억들이 있다.

우선, 1989년 이후의 오랜 논쟁과 특히 1997-1999년의 속칭 ‘IMF 사태’(!)라는 실천적 경험을 통해서 가히 경제과학의 불모지 자유 대~한미국에서도 이제는 “공황”이라는 경제정세・국면 규정이 낯설지 않지만, 그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낯선 말은 결코 아니면서도, 그 현실성은 부정되고 있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상황을 소개하자면,

 

대표적으로 1989년 2/4 분기에 폭발하여 대략 1992년 초까지 지속된 공황과 관련한 논쟁에서 표출된 일부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인식을 예로 들어봅시다.

1987년 6월 항쟁 때나 특히 그해 7월에서 9월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기에 자본과 그 나팔수들은 이들 투쟁이 ‘경제에 미치는 치명적 악영향’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떠들어댔지만, 사실 그 시기에 한국 자본주의는 이른바 ‘3저 호황’이라는 대호황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의 대투쟁이 이러저러하게 끝나고, 또 그해 말을 휩쓴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열병도 지나가버리자, 이제 부르주아 경제 이데올로그들은 한국 경제의 번영과 확 트인 전망을 찬양하기에 바빴습니다. 1988년도에 그들의 머리를 지배한 것은 “한국 경제가 이제 궤도에 올랐다(on the track)”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에게는 이제 궤도 혹은 탄탄대로를 달릴 일만 남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 그 이데올로그들이 그렇게 장밋빛 환상에 빠져들 때면, 공황은 언제나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영구호황(永久好況)이라는 달콤한 환상에 빠지게 되는 것은 호황 국면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이고, 그 결과 생산이 극대화되면서 경기가 더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즉 번망기(繁忙期)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88년 하반기, 특히 그 말엽에 다가갈수록 증권시세와 부동산 가격의 폭등 등등, 심대한 공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가 뚜렷해졌습니다. 그런데, 대호황을 찬양하는 데 정신이 팔린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소위 ‘진보적’ 이론 진영, 혹은 노동운동 진영의 어느 누구도 당시의 그러한 경제정세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한국 경제가 이제 궤도에 올랐다”는 부르주아적 선전에 역시 영혼을 팔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1989년 벽두에 어쩔 수 없이 여러 모로 부족한 제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증권시세와 부동산 가격의 대폭등을 ‘한국 경제가 지속적인 호황의 궤도에 오른’ 증거로 내세우는 저들의 주장에 맞서, 그것들의 대폭등은 거대한 투기붐의 결과로서, 이는 과잉생산으로 자본의 이윤율이 극도로 낮아진 데서 연유하는 것이며, 따라서 한국 자본주의에 ‘공황이 임박’ 했음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발달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로서의 한국 경제가 ‘궤도에 올라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궤도는, 결코 저들이 주장하던 ‘지속적인 호황’의 그것이 아니라, 나락으로 질주하는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의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바로 이어서 1989년 2/4분기부터 실제로 심대한 공황이 엄습했고, 이에 자본은 “총체적 위기”니, “산업구조조정”이니 하고 요란을 떨면서 노동자・농민의 더욱 가혹한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그렇게 공황이 임박했음을 얘기하고 그 후 이어진 “총체적 위기” 혹은 “ 산업구조조정” 국면의 성격을 공황으로 규정하자, 지금은 한신대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계신, 당시 ‘진보’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정건화 등이 ‘진보적 정세・이론지’ ≪동향과 전망≫에 그것을 ‘파국론’ 이라고 비난하면서, “현대 자본주의의 축적위기는 국가의 개입으로 공황(Crisis)으로 전개되지 않는다”(정건화의 표현 그대로)라고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말하자면, “현대 자본주의에는 위기는 있지만 국가의 효과적인 정책개입으로 더 이상 공황은 없다”,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에 파국은 없다”고 하는, 싸구려 코미디, ‘국가독점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을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는 당시의 정세 성격은 공황 국면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 국면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주장, 비판은 정건화 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정건화와 ‘한국사회과학연구소’를 같이하던 ‘진보적 경제학자들’, 구체적으로는 임휘철, 정태인(노무현 정권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다 특정 자본 지원 압력사건으로 그만두게 되는 인물) 같은 자들도 논전에 가세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지만, 상황은 그들의 원망(願望)을 배반해서 진행되었고, 나중에 그들은 “공황이 아니라 소공황” 운운하는 옹색한 변명, 또 하나의 저질 코미디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26)

 

또 하나, 1988년에는 그토록 “한국경제는 이제 궤도에 올랐다”며 일종의 영구호황론을 떠들어대던 정부와 자본이 1996년에는 한국경제가 경제위기에 빠져 있으며, 그 경제위기의 원인은 노동자들의 고임금에 있다고 떠들어댔다. 당시 국내총생산이 연률 6% 내지 7%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정부의 통계도 말해주고 있듯이, 분명 아직 한창 과잉생산을 향해 치닫던 호황기였는데도 그렇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한국은행장을 지낸 박승 중앙대 경제학 교수 같은 이는, 저명한 경제학자님답게, ‘통계가 보여주는 여러 지표에 의하면 경제위기라고 할 수 없지만, 이른바 체감경기에 의하면 경제위기임에 틀림없다’는 과학적 체감(體感)까지 내세우시면서!

그런데, 정부와 자본 측의 이러한 주장에 명색이 ‘진보적 경제학자님들’께서 그 황당함을 지적・비판하기는커녕, 그것을 윤색・합리화시켜 주기에 바빴다. 예컨대, 당시 경상대 장상환 교수는, 연률 6-7%의 비율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같으면 경제위기가 아니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경우 고율성장 체질이라서, 빠른 속도로 달리던 자전거가 천천히 달리면 넘어지는 것처럼, 연률 6% 내외의 성장도 한국 자본주의의 경우에는 경제위기라고 주장했다.27) 또한 ≪자본론≫의 또 다른 번역자 동아대 강신준 교수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 주요 산업부문이 모두 포스트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으로 생산방법을 바꾸었으나, 한국 경제의 경우 조선업(!) 등 주요 산업부문이 아직도 포드주의적 생산방식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제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28)

그리고 노동운동 측은, 경제위기는 노동자 책임이 아니고, 부동산 투기, 재테크나 하면서 기술혁신・기술개발에 투자를 게을리 한 재벌 탓이므로, “재벌은 부동산 투기, 재테크나 하면서 노동법 개악을 통해서 노동자를 초과착취하려 하지 말고, 기술혁신・기술개발에 투자하라”고 응수했다. 그러나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려는 것은 맞지만, 그 노동법 개악은 기술혁신・기술개발에 투자를 게을리 하려는 게 아니었다. 당시는 세계무역기구(WTO)가 성립되고, 또한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여, 재벌을 포함한 한국의 대자본이 더 이상 고율관세나 기타 비관세장벽 등 국경적 보호무역의 테두리에 안주할 수 없음이 확인된 시기였고, 재벌 등 자본의 과잉생산도 도를 더해가던 시기였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국내시장을 유지하고 해외시장을 확대하기 위해서 경쟁력을 더 높이지 않으면, 즉 임금을 억누를 뿐만 아니라 기술혁신・기술개발을 더욱 가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경제위기’라고 떠들며, 노동법 개악을 강행한 배경이었다.29) “재벌은 … 기술혁신・기술개발에 투자하라”는 노동자들의 주장은, 말하자면, ≪자본론≫으로 대표되는 경제과학, 경쟁과 과잉생산, 공황에 대한 이해의 부재 때문에 자본의 경쟁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생긴 자해적인 주장이었던 것이다.

한편, 1998년 초에 당시 널리 읽히던 진보적 월간지 ≪말≫의 요청으로, “막 오른 대공황, 노동자계급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더니, 이 사회 식자들의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글쓰기가 만들어온 ‘편집관행’에 따라 연락도 없이 제목을 “막 오른 대공황, 노동자 총력투쟁으로 저지해야”로 바꾸어 출판하였다. ‘노동자 총력투쟁으로 대공황을 저지해야’ 한다니! 글의 내용에 ‘대공황 저지’ 따위의 황당한 말은, 아니 그 비슷한 말조차 한 마디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 모두가 ≪자본론≫에 의거하지 않고는,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에 필연적이고 주기적인 경제공황조차 공황으로서, 필연적인 공황으로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공황은 산업혁명 후 발달한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간의 모순의 주기적・필연적 폭발이다.30) 그런데 무엇보다도, 공황이란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에 필연적이고 주기적이란 인식이 없기 때문에 공황이 닥칠 때마다 매번 저급한 정략적 논쟁만 난무하고, 대중은 거기에 혼을 빼앗겨 자신이 왜 그 공황의, 자본주의적 생산의 제물(祭物)이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요즘 공황이 아직 본격적으로 엄습하기 전인데도 경제상황이 악화되는 조짐을 보이면서 특히 실업 즉, 산업예비군이 증대하자, 자유한국당 등등은 문재인 정권의 정책 실패 탓이라고 떠들어대고, 정권과 더불어민주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9년간의 정책 실패 탓이라고 응수하는, 저질의 정략적 공박만 난무하면서, 대중은 어느 장단에 맞장구를 처야 좋을지 몰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한 것은, 지난 200년 동안 공황은, 날고뛰는 부르주아 천재들의 온갖 경세방략에도 불구하고, 대략 10년을 주기로 반복되어 왔고, 그렇게 반복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격화되고 심화되면서 19세기말・20세기 초와 1930년대에는 장기불황・대공황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수천만의 인명을 제물로 바치는 세계대전들을 통해서만 그 대공황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편, 부르주아지의 천재는 끝도 없이 빛나고 있다. 다음은 2018년 10월 9일자 ≪조선일보≫의 기사이다.

 

실업률 3.7%로 49년 만에 최저 … 소비자물가는 2%대 수준 유지

경제학 통념 깬 안정적 호황

미국이 연일 기록적인 경제지표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 5일(현지 시각) 미국 노동부는 9월 실업률이 3.7%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1969년 이후 49년 만의 최저치였다. …

최근 쏟아지고 있는 경제지표들을 보면 미국 경제는 그야말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표현할 정도다. 미국 경제 수장들도 이런 평가에 동의한다. 미 연방준비제도(연준) ‘넘버 3’인 존 윌리엄스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는 지난 5일 미국 경제에 대해 “골디락스(Goldilocks) 경제”라고 평가했다. 골디락스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절한 온기(溫氣)를 이어가는 경제 상황을 표현하는 용어로, 최고의 찬사라고 할 수 있다. …31)

 

1988년도에 자유 대~한미국의 경제가 ‘궤도에 올랐다’면, 2018년 10월엔 상국 미국 경제가 ‘궤도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바로, 바로 그 다음날(10일)부터 미국의 증시는 폭락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여파로 다시 그 다음날인 11일(목요일)에는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과 유럽 등 사실상 전 세계 증시가 폭락했고, 이제는 “검은 목요일”이라며 비명들을 질렀다.32) 그리고 15일엔 한때 미국의 최대 백화점 망(網)이었던 씨어스(Sears)가 파산을 신청했다.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 ― 그것은 1930년대 대공황의 출발점이 되었던 1929년 10월 24일 미 증시의 대폭락에 의한, 지워지지 않는 상처(scar)다!

 

(3) 집값의 폭등에 대하여

또 다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집값・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뜨거운 사회문제로 되자, 정부는 이런저런 ‘안정책들’을 내놓기에 바쁘고, 야당과 극우 언론은 정부의 정책실패와 서울시장의 ‘여의도・용산 개발’ 등 ‘말실수’를 규탄・질책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정부와 여당은 이 역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지난 9년간의 정책실패의 결과’라고 맞받아치고 있다.

그러나 집값을 비롯한 이 부동산 가격의 폭등은 어느 정권의 정책 실패 탓이 결코 아니다.33) 증권시세나 부동산 가격의 대폭등은 주기적인 거대한 투기붐의 결과로서, 이는 과잉생산과 과잉자본의 여파로 자본의 이윤율과 이자율이 극도로 낮아진 데서 연유하는 것이며, 따라서 ‘공황이 임박’했음을 짐작케 하는 징조라는 사실은 앞에서 말한 대로거니와,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내재한 모순의 발현형태의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그것은, 어느 정권이나 어느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 모두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34) 공황이 발발하면, 주가만큼 급격하게는 아니지만, 이들 부동산 가격은 물론 하락한다. 요즈음의 동향을 보자면, 한국의 주식시세의 폭등은 이미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지난 10월 10일의 미국 증시의 대폭락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주식시세는 하락세에 있다. 과연 언제 새로운 공황이 본격적으로 엄습할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예측・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하지만,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말하자면, 최근 터키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이탈리아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재정・외환위기 사태들이나 특히 세계적인 주식 폭락 등을 볼 때, 그리고 이미 몇몇 국가에서는 집값이 하락하고 있는 것을 볼 때,35) 세계적 규모에서는 이미 새로운 공황이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만일 실제의 상황이 그렇다면, 서울의 부동산 가격의 폭등도 멈추고, 나아가 하락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36)

사실, “주거권은 생존권의 일부다”37)라고 골백번을 외처 봐도, 집값의 동향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런 것도 설명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순진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시세(時勢) 민감한 지식인의 넋두리일 뿐이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 아파트 가격은, 전국적으로, 균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비율로라도 폭등하는 게 결코 아니다. 실제로 최근의 상황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폭등하고 있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대체로 잠잠하다. 왜 그런가? 역시 맑스(≪자본론≫)에게서 들어보자.

차액지대는, 무릇 지대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며, 어디에서나 농업 차액지대와 같은 법칙을 따른다. … 건축용 토지에 관해서는, 그 지대의 토대가 어떻게, 모든 비농업 용지들의 지대와 마찬가지로, 본래의 농업 지대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는가를 애덤 스미쓰가 설명하고 있다(…). 이 지대는, 첫째로, 여기에서는 위치가 차액지대에 미치는 영향이 압도적이라는 점 (예컨대, … 대도시들에서의 건축지의 경우 대단히 현저하다), 둘째로는, 소유자의 수동성이 전적으로 명백해서, 그의 능동성이란 단지, 산업 자본가라면 무언가를 했을 사회적 진보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서 그 진보를 착취한다는 데에 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많은 경우 독점가격이 우세하고, 빈곤의 파렴치한 착취(…)가 우세하다는 점 … 이 두드러진다. … 단지 인구의 증가와 그에 따른 주거 수요의 증대뿐 아니라, 토지에 합체되거나 토지에 뿌리를 박고 그 위에 서는, 모든 건축물들, 철도들, 창고들, 공장건물들, 부두들 등과 같은 고정자본도 필연적으로 건축지대를 상승시킨다.건축용지에 대한 수요는 공간과 토대로서의 토지의 가치[정확히는 ‘가격’: 인용자]를 올린다. …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도시들에서는, 특히 런던처럼 건축이 공장식으로 경영되는 곳에서는, 주택이 아니라 지대가 건축투기의 본래의 대상을 이룬다. …38)

 

그런데 토지가격은 사실은 “자본화된 지대”이다.39) 따라서 ≪자본론≫으로부터의 위 인용문은 왜 다른 곳이 아니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땅값과 집값, 아파트값이 폭등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백수십년 전의 저작이라서 시대 뒤떨어졌다는 ≪자본론≫이다!

실제로 “그린벨트 풀어 집 늘렸더니 집값은 되레 올랐다”는, 다음 기사를 보자.

 

정부・여당이 “집값 안정을 위해 그린벨트를 풀어 주택공급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과거 집값 상승기에 주택 공급을 위해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를 푼 경우 되레 집값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

… ≪노컷뉴스≫ 기사와 한국감정원의 주택가격동향(2003-2018년) 통계를 분석해보니, 최근 10년 동안 집값이 폭등하던 시기엔 그린벨트를 해제해 주택을 공급해도 집값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2년 12월부터 현재까지 수도권 지역 그린벨트가 해제된 총 23차례 가운데 해제 직후 집값이 오른 경우는 모두 17차례에 이르렀다. 이때는 모두 집값이 상승하던 시기였다. …

특히 집값이 한창 오르던 2007년 1월의 매매가격지수(2017년 11월 서울의 주택가격을 100으로 했을 때)는 81.6이었으나, 같은 해 7-8월 그린벨트를 푼 직후인 9월엔 이 지수가 86으로 뛰었고, 2008년 1월에는 88.8까지 치솟았다. 2008년 3, 4, 9월에도 세 차례나 그린벨트를 풀었지만, 집값은 같은 해 9월 98.3까지 올랐다. 비교적 최근인 2016-2017년에도 8차례 그린벨트를 풀었으나, 같은 기간 집값은 96.7에서 100.3까지 치솟았다.40)

 

그런데도 위 기사가 보도된 바로 그날 정부는 “수도권 주택공급 물량을 늘리기 위해 서울과 1기 신도시 사이에 총 330만㎡ 이상 면적의 신도시 4-5곳을 추가 조성해 총 20만 가구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서울 도심 내 주택공급 확대를 위해 상업지역과 준주거지역에 대한 용적률 규제를 완화”, “서울 주상복합 건물의 주거외 용도비율을 기존 20-30%에서 일괄 20% 이상(주거용 비율 상한 80%)으로 하향 조정하고, 상업지역 주거용 사용비율(용적률)을 기존 400%에서 600%로 상향 조정”하며, “또 서울시 내 모든 준주거지역에서 용적률을 초과하는 부분의 50% 이상을 임대주택으로 공급하면 용적률을 기존 400%에서 500%로 늘리는 것을 허용키로 했다.”41) 원대(遠大)하게도 “중장기 안정 효과”, “구조적인 집값 안정”을 위해서!

그린벨트를 풀어 주택의 공급을 늘려도 되레 집값이 상승하는 것에 대해서 “국토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 “공급의 역설이다. 그린벨트를 풀면 대규모 투자와 활황 심리 등으로 인해 단기적으로 집값이 오를 수 있다. 그러나 대규모 공급은 중장기적으로는 집값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그런 구조적인 집값 안정을 추구하는 것”42)이라고!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최근의 세계적인 경기 동향을 보면, 분명 머지않아 이 나라에도 공황이 엄습할 것이고, 그때에는 집값 폭등이 멈출 뿐만 아니라, 그 하락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 저들 정책 당국자들과 토목・건설 자본, 그리고 주택 공급확대 정책에 흡족해 하고 있는, 그들 자본의 대변자인 극우언론들43)은 외칠 것이다. “봐라! 수도권에 주택공급을 대폭 늘리니 (혹은, 늘리겠다고만 해도) 중장기 안정 효과, 구조적인 집값 안정 효과가 나타나지 않느냐!” ― 그러나 다만 다음 순환기의 더욱 증폭된 폭등을 위해서!

아무튼,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 폭등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란 게, 그리고 소위 진보적 언론・사회단체들이 촉구하는 대책이란 게, 그러니까 한 마디로 분명 ‘현대적인’ 대책이란 게 가관이다. 하나는 수도권에서의 아파트의 ‘공급 확대’, 즉 결국은 지대 상승을, 따라서 집값・아파트값 상승을 더욱 증폭시키는 인구집중책, 그것도 이미 전체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책이요, 다른 하나는 폭등하는 집값・임대료를 억제하기는커녕 그 부담만 ‘파렴치하게’ 세입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는 부동산 관련 세금인상책이기44) 때문이다. 특히 언필칭 진보적 언론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노무현 정권 하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을 인상했지만, 폭등하는 아파트 값을 억제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 부담이 고스란히 세입자의 몫이 되었다는 것에는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토지공개념’ 따위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부터 부르던 소부르주아적 가락을 질리지도 않고 다시 부르는 ‘진보적 인사들’, 그런 단체들까지 있다.45)

최근의 수도권 집값 폭등과 관련하여, 아주 작은 목소리이면서도 욕을 먹고 있긴 하지만, 그나마 들을 만한 대책은 정부조직과 공기업들의 지방분산책, 즉 인구의 지방분산책일 것이다. 이에 더해서 교육 등 문화적 여건이 함께 분산・진흥된다면, 물론 이 역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폭등의 정도를 분산하여 미미하게 완화할 수 있을 뿐이겠지만,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책과는 분명 다른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주기적인 집값 폭등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물론 토지를 위시한 주요 생산수단의 전면적인 국유화이며, 그 위에서의 인민경제의 계획적 운영이다.

 

(4) 실업과 빈곤문제에 관해서

역시 주지하는 것처럼, 실업문제, 특히 청년실업의 문제가 갈수록 악화되면서 첨예한 사회문제, 사회적・정치적 논쟁의 소재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최근 특히 인공지능(AI)으로까지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과학기술혁명이 실업문제를 격화시키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언론에서의 논쟁은 여전히 실업문제에 대한 정부와 국가의 성공적・효과적 정책 여부로, 즉 저질의 정략적 논쟁으로 일관하고 있다. 게다가 논리적으로 실업문제와 모순일 수밖에 없는 ‘저출산 문제’, 즉 ‘출산장려 문제’가 동시에 역시 저질의 정략적 논쟁이 되어 만발하고 있다.

실업문제와 관련, 제1권의 “기계와 대공업”의 장(제13장)이나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의 장(제23장)을 위시하여 ≪자본론≫ 전(全) 3권의 곳곳에서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즉 대량의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적 생산 그것의 생존조건이며,46)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가 산업예비군을 항상적으로, 그리고 특히 공황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그리고 대량으로 생산・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물론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필시 ≪자본론≫이란 게 워낙 시대에 뒤떨어진 저작이라서 그럴 것이다!!!

≪자본론≫에서의 산업예비군에 관한 논의, 즉 실업문제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음을 인용해두는 것으로 그치자. 그리고 절(節)을 바꾸어 다시 논하자.

 

… 저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이 그들 계급에 미치는 파괴적인 결과들을 부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자가 노동조합 등에 의해서 취업자와 실업자의 조직적 협력을 조직하려 하자마자 자본과 그 아부자인 경제학자들은 ‘영원한’, 그리고 말하자면 ‘신성한’ 수요공급의 법칙의 침해에 관해서 비명을 지른다. 취업자와 실업자의 모든 결합은 저 법칙의 ‘순수한’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다.47)

 

아니, 이 자유 대~한미국에서는 “취업자와 실업자의 조직적 협력을 조직”하면, 그것은 노동조합이 노동조합이 아니게 되는 법률상의 빌미가 되기조차 한다!

 

(5) 환경・생태문제에 대하여

생태・환경문제 역시 ≪자본론≫으로 대표되는 맑스주의가 시대 뒤떨어진 사상・관념으로 치부되는 대표적 영역 중의 하나다. 예컨대, 생태주의자들의 단체인 ‘녹색연합’은 2013년 12월에 “생태철학 5강 – 맑스의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 토건주의, 성공주의”라는 강좌를 열고 있다. “철학 속의 생태 읽기” 연속강좌 중 마지막 제5강이었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강의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강의 제목과는 별반 서르 ᄉᆞᄆᆞᆽ디 아니하는, 어느 ‘장학생’의 “후기”48)가 그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그 “후기” 덕분에 강사가 “신승철 선생님”이었던 걸 알고 인터넷을 검색해본 결과, 인문・사회・자연의 온갖 과학에 통달하신, 그리하여 범인(凡人)으로서는 감히 범접 못할 천하의 석학 신승철 박사님의 강의였으며, ‘녹색연합’에서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거듭되는 고가의 강의라는 것은 알게 되었으나, 역시 아쉽게도 강의 내용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맑스의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의 스크립트. 철학 속 생태 읽기. 맑스의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 토건주의, 성공주의49)라는 것을 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강의 내용의 상세를 접하지 못하더라도, 그 강의가 청중에게, 그리고 그 제목을 접하는 모든 이에게 어떤 메씨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는 누구나 “맑스의 생산력주의와 성장주의, 토건주의, 성공주의”라는 강의 제목 자체로부터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한편,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는 2012년 3월 8일부터, 자신들이 “총 16강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라고 규정한 “우리 눈으로 보는 서양 현대 철학 강좌”를 4개월에 걸쳐 진행하는데, 이에 앞서 2월 3일 그 강좌의 “기획 의도를 듣는” 좌담회를 갖는다. 아래는 그 좌담회에서 나온 말씀들이다.

 

김성민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 회장: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 본질적인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면밀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려면 마르크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

서유석 전회장: “현대 사회 사상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보완 혹은 재구성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반대하면서 풍부해졌어요. 즉, 어쨌든 마르크스를 매개로 하지 않으면, 설령 그것이 우파의 정치사상이라 할지라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마르크스주의를 사상의 저수지라 부릅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도 한계가 있어요. 19세기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어 누구보다도 면밀하게 분석하였지만, 20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문제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 때문에 볼 수 없었습니다. 가령 이번 강좌 기획에도 포함되어 있지만 시민 사회, 문화, 생태, 페미니즘 등을 둘러싼 문제의식은 특히 1968년 이후에 새롭게 등장했어요.

이 운동의 대부분은 검은 깃발로 상징되는 아나키즘의 조류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이해하려면 마르크스에서 레닌으로 이어지는 붉은 깃발과는 차이가 있는 검은 깃발, 즉 아나키즘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이 둘은 현실 운동에서 서로 너무나 적대적입니다.”50)

 

명색이 ‘마르크스・엥겔스전집 한국어판번역사업 사무총장’51)이라는 사람의 발언이다. 나는 저 앞의 발언이나 이런 발언들을 듣다보면, 예전에 붐비는 시골 5일장에서 세상에 모르는 것 없는, 능수능란한 말솜씨로 만병통치약을 팔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아참, 뱌암장수도 있었지!)

하나의 예만 더 들자면, “사상가 앙드레 고르스의 ≪에콜로지카≫”의 번역・출간 소개 기사도 요란하다. 필시 그 책에서 따왔을 것으로 짐작되는 “자본주의는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어떠한 제도 보완을 통해서도 갱생할 수 없다”는 가히 혁명적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 기사52)는 이렇게 이어진다.

 

정치생태학의 선구자이자 신좌파 이론가인 앙드레 고르스(1923-2007)는 단호히 자본주의 파산선고를 내린다. 촌철살인의 논조로 자본주의가 끝장나고 있음을 선언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뛰어넘기가 이미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정보혁명에 따른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자본주의는 지식과 체험을 자본화하는 인적 자본 중심의 지식경제 체제로 나아가려 하나 ‘비물질적인’ 지식 자체가 갖는 무상성(無償性) 때문에 결국 자본주의 경체체제에 균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로 맑스주의를 넘어 생태주의로, 생산력주의를 넘어 인간주의로, 노동사회를 넘어 문화사회로, 자본주의를 넘어 민주사회주의를 제시한다. ‘자본주의’의 반대는 곧 ‘공산주의’라며 이념적 경직현상을 보이는 우리 사회에 제3의 길을 새로운 지향점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촌철살인의 논조로 자본주의가 끝장나고 있음을 선언한다”는 혁명적 저작이 어떻게 이 자유 대~한미국에서, 그것도 사실상 공영의 통신사 발(發) 기사로서 극우적 매체에 게재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니라, 일견 ‘혁명적’ 언사로 들리지만, 사실은 노동자・인민 대중을 오도하여 그들의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무력화하는 소부르주아의 헛소리를 롱(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만병통치약장수의 얘기를 (비록 간접적으로지만) 더 들어 보자.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어쩔 수 없이 뇌리에 떠오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시해온 삶, 기술, 노동 등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신주의와 구조주의를 넘어 인간의 역동적 주체성과 공유 및 나눔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그리고 여유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찾아가자는 얘기. ‘충분함’의 윤리에 기초한 자율규제를 통해 생산, 유통, 분배, 소비, 재생, 활동, 여가, 안전 등 삶의 전 과정을 새롭게 구성하자는 것이다.

고르스는 생태사회적 정치의 핵심을 노동시간과 무관한, 경우에 따라서는 노동 자체와도 아무 상관없는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생활이나 환경이 돈벌이 경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경제적 합리성이 적용되지 않는 활동영역이 온 사회에 늘어나는 것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는 자본가뿐 아니라 그 지배질서 속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노동계급에 대해서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돈벌기’에만 급급한 양자는 모두 공모관계에 있다며 여기에 예속된 노동계급은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근래 들어 한국사회에서도 논의되기 시작한 기본소득과 일자리 나누기 등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공동화(共同化)와 상생(相生), 무상(無償)의 지식경제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모두 맑스(주의)는 ‘생산력주의’ 내지 ‘성장 제일주의’라서 반(反)생태주의적이거나, 적어도, 시대적 이유에서든 어떤 이유에서든, 생태문제에 무지하다는 주장이다. 천하의 대석학들이신 자신들이 맑스(주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하다는 자각이나 반성, 자신들이 저 라만차의 기사가 돌진하던 풍차에 돌진하고 있다는 자각이나 반성은 물론 눈곱만큼도 없다!

맑스(주의)는 과연 반생태주의적이거나 생태문제에 무지할까?

≪독일 이데올로기≫나 ≪자연 변증법≫ 등에서의 생태문제, 정확히는 자연에 대한 언급들은 차치하고, ≪자본론≫에서의 그것을 몇 곳만 인용하자면, 이렇다.

 

상의나 아마포의 존재, 즉 천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재적(素材的) 부의 모든 요소의 존재는 언제나, 특수한 자연소재들을 인간의 특수한 욕망들에 적합하게 하는 어떤 특수하고 합목적적으로 생산적인 활동에 의해서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사용가치들의 형성자로서는, 즉 유용 노동으로서는, 노동은 모든 사회형태들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존재조건, 즉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物質代謝, Stoffwechsel)를, 따라서 인간의 생활(menschliches Leben)을 매개하기 위한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

사용가치들인 상의, 아마포 등등, 요컨대 상품체들은 두 개의 요소, 즉 자연소재와 노동의 융합물들이다. 상의나 아마포 등등에 들어 있는 다양한 유용 노동들을 모두 제거하면, 언제나 남는 것은 인간의 관여 없이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물질적 기반(基盤)이다. 생산을 하면서 인간은 단지 자연 그 자체가 행하는 것처럼 행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소재들의 형태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형태를 변경하는 이 노동 그 자체 속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력의 지원(支援)을 받는다. 노동은 따라서 인간에 의해서 생산되는 사용가치들의, 즉 소재적 부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다. … 노동은 그 아버지고, 토지는 그 어머니다.53)

 

노동은 우선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자신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物質代謝)를 매개하고, 규제하며, 통제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연소재 자체에 대해서 하나의 자연력(自然力)으로서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소재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에 속하는 자연력들인 팔과 다리, 머리와 손을 운동시킨다. 인간은 이 운동에 의해서 자신의 외부의 자연에 작용을 가하여 그것을 변화시키면서,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의 자연(Natur)을 변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자연 속에 잠자고 있는 능력들을 발전시키고, 그들 힘의 운동을 통제한다.54)

여기에서 “인간의 생활(menschliches Leben)”, 즉 인간의 삶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物質代謝, Stoffwechsel)”로서, 그리고 노동은 그 자신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신의 외부의 자연에 작용을 가하여 자연과 동시에 자기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키면서 이 물질대사를 매개하는 운동으로서 파악되고 있다. 인간의 삶・생활과 노동을, 그리고 사용가치의 생산을 이렇게 파악할 때, 그 어떤 생태주의자가 생태・환경의 문제를 이보다 더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겠는가?

 앞에서 본 것처럼, “촌철살인의 논조로 자본주의가 끝장나고 있음을 선언”하는 “정치생태학의 선구자이자 신좌파 이론가인 앙드레 고르스”는, 한편에서는 노동자계급이 “‘돈벌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본가계급과 “공모관계에 있다며 여기에 예속된 노동계급은 더 이상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55) 일언지하에 재단해버린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시해온 삶, 기술, 노동 등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야 한다”거나, “물신주의와 구조주의를 넘어 인간의 역동적 주체성과 공유 및 나눔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그리고 여유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찾아가자는 얘기. ‘충분함’의 윤리에 기초한 자율규제를 통해 생산, 유통, 분배, 소비, 재생, 활동, 여가, 안전 등 삶의 전 과정을 새롭게 구성하자”거나, “생활이나 환경이 돈벌이 경제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 경제적 합리성이 적용되지 않는 활동영역이 온 사회에 늘어나는 것이 요구된다”고 왜장친다. 필시 그가 상정하는 ‘혁명의 주체’, 즉 소부르주아 생태주의자들을 향한 외침일 터이다.

그러나 ≪자본론≫에서의, 따라서 맑스의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관점은, 이 따위 소부르주아적・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 공염불과는 전적으로 다르다. “대공업과 농업”에 관한 절(節)에서이지만, 따라서 형식상 농업문제에 한정해서 하는 얘기지만, 맑스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농업 영역에서 대공업은, 그것이 구(舊) 사회의 보루, 즉 ‘농민’을 파멸시키고, 그를 임금노동자로 바꿔치는 점에서 가장 혁명적이다. 농촌의 사회적 변혁욕구들과 대립들은 그리하여 도시의 그것들과 차이가 없어진다. 극히 진부하고 극히 불합리한 경영 대신에 과학의 의식적이고 기술학적인 응용이 나타난다. 농업과 제조공업의 유치하고 미발전한 모습을 휘감고 있던, 그 두 산업의 본원적인 가내유대(Familienband)의 분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러나 이 생산양식은 동시에 어떤 새로운, 보다 고도의 통합을 위한, 즉 농업과 공업의 대립적으로 단련된 모습들에 기초한 그 양자의 결합을 위한 물질적 전제들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대중심지들에 집적하는 도시의 인구가 끊임없이 증대・우세해짐에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한편에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적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과 대지(大地) 사이의 물질대사를, 다시 말해서, 인간에 의해서 식료(食料) 및 의료(衣料)의 형태로 소비된 토지성분들의 토지로의 복귀를, 따라서 지속적인 토지비옥도의 영구적인 자연조건을 교란한다. 그와 함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도시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적 생활을 동시에 파괴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저 물질대사의 상태들을 파괴함으로써 동시에 그 물질대사를, 사회적 생산을 규제하는 법칙으로서 그리고 인간의 완전한 발전에 적합한 형태로 체계적으로 확립할 것을 강제한다.56)

 

“당연시해온 삶, 기술, 노동 등에 대한 관점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야 한다”거나, “물신주의와 구조주의를 넘어 인간의 역동적 주체성과 공유 및 나눔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그리고 여유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찾아가자는 얘기. ‘충분함’의 윤리에 기초한 자율규제를 통해 생산, 유통, 분배, 소비, 재생, 활동, 여가, 안전 등 삶의 전 과정을 새롭게 구성하자” 따위의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른 자연・생태 파괴의 필연성을 적시하면서 그 파괴가 왜,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 그것을 지양할 역사적 동력, 즉 주체를 집적하고, 자연과 인간 간의 새로운 보다 고도의 물질대사의 법칙을 확립할 것을 강제하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소부르주아적 주의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저들 소부르주아적 생태주의자들 역시 그러한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자 역사의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위 인용문에서는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도시노동자의 육체적 건강과 농촌노동자의 정신적 생활을 동시에 파괴한다”는 지적도 주목해야 한다. 맑스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도 표현하고 있다.

 

무릇 자본주의적 생산은, 극히 인색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재료(人間材料, Manschenmaterial)에 관해서는 철두철미 낭비적인바, 그것은 마치 자본주의적 생산이 다른 한편에서는 상업을 통한 그 생산물의 분배 방법과 그 경쟁 방식 때문에 그 물질적 수단들을 아주 낭비적으로 다루어, 한편에서 개별 자본가들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다른 한편에서 사회에게는 손해가 되는 것과 전적으로 마찬가지다.57)

 

환경 또는 생태의 문제를 자본주의적 생산, 특히 그 소비행태에 의한 그것의 훼손・파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만 고찰하는 소부르주아적 생태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맑스는 이렇게 생태문제와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성, 그 운동법칙에 의한 인간 그것의 파괴를 통일적으로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태 문제와 관련하여 맑스는 생태 파괴는 자본주의적 생산 그것에 고유한 법칙의 관철임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에 생산수단의, 따라서 본원적 생산수단인 토지의 사적소유가 있다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렇게 얘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으로 결국 분해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가는 소규모 경작에서든, 자본주의적 경영양식에 기초한 대토지 소유든: 인용자] 두 형태 모두에서는 토지의, 공동의 영구적 소유로서의, 즉 연쇄적으로 교체되어 가는 인류의 양도할 수 없는 존재조건과 재생산조건으로서의 자각적이고 합리적인 취급 대신에, 지력(地力)의 착취와 탕진이 나타난다. … 소규모 소유에서는 이는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과 과학이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대규모 소유의 경우에는 이는 차지농업가와 토지소유자의 가능한 한 최대한의 급속한 치부를 위해서 이등 수단이 악용되기 때문이다. 두 경우 모두 시장가격에의 의존에 의해서 생긴다.

… 토지의 모든 사적소유가 농업생산과 토지 자체의 합리적 취급, 유지, 개선에 대항하여 내놓는 이러한 제한과 장애는 이쪽과 저쪽에서 단지 다른 형태들로 전개될 뿐이며, 해악의 이들 형태에 관한 언쟁에서는 그 궁극적 원인이 망각돼 버린다.58)

 

“해악의 이들 형태에 관한 언쟁에서는 그 궁극적 원인이 망각돼 버린다”! 마치 대개의 생태주의자들이 자본주의적 소비행태에 정신을 빼앗기고, 특히 자본은 마음만 잘 먹으면 생태 파괴를 지양할 수 있다는 사고 때문에 생태 파괴의 궁극적 원인을 망각해버리고 있는 것처럼!

생태・환경 파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에서, 그리고 그 기초인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에서 찾는 맑스는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보다 고도의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입장에서 보면, 지구에 대한 개인 개인의 사적소유는, 어떤 인간에 의한 다른 인간의 사적소유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하나의 사회 전체조차, 하나의 국가 전체조차, 아니, 동시대의 모든 사회를 일괄한 것일지라도, 토지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토지의 점유자이고 용익자(用益者)일 뿐이며, 그들은 좋은 가장(boni patres familias)으로서 그것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남겨주지 않으면 안 된다.59)

 

개인은 물론 “하나의 사회 전체조차, 하나의 국가 전체조차 … 토지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토지의 점유자이고 용익자(用益者)일 뿐이며, 그들은 좋은 가장(boni patres familias)으로서 그것을 개량하여 다음 세대들에게 남겨주지 않으면 안 된다”! ― 보라! 맑스(주의)가 얼마나 반생태주의적인가를!

그런데도 저들 반맑스주의를 선동하는 생태주의자들은 맑스(주의)를 생산력주의라고 매도하면서, 대개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폐지에 대해서는, 토지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폐지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반맑스주의적 생태주의자들이여, 온 정성을 다하여 기원(祈願)하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만세를! 그리고 맘껏, 맘껏 향유(享有)하며 찬양하라, 토지・생산수단의 사유를!

 

 

IV. ≪21세기 자본≫론?

     ― 부르주아적 비과학의 극치60)

 

여기에서, 맑스의 낡아빠진 ≪자본론≫이 아니라,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최신의 ‘자본론’, ≪21세기의 자본≫(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 원제: Le capital au XXI siècle)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자.

이 세기적인 명저가 등장한 것은 2013년이었고 미국어로, 그리고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2014년이었으니, 바로 2008년 가을 미국의 4대 투자은행의 하나인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의 파산을 계기로 증폭된 세계적 금융・경제위기와 2010년 남부 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의 충격으로 여기저기에서 새삼 맑스에 대한 관심이 꿈틀대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세기적 명저답게 등장과 동시에 “학술적 설득력과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세계에 피케티 광풍을 불러왔”으며,61) “누진적 소득세”라는, 자본주의의 “부의 불평등” 혹은 “자본-노동 간의 분배의 불안정성”을 해결할 열쇠를 제공하고 있는 저작이니 만큼, 그에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여간 영광이 아니다.

이 저작이 세기적인 명저인 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첫눈에 명확하다. 무엇보다도, 자본을 “온갖 종류의 부동산(거주용 부동산 포함)과 금융자본 그리고 기업과 정부 기관들이 사용하는 사업 자본…(공장, 사회기반시설, 기계류, 특허권 등)…[을] 포함”하여 “시장에서 소유와 교환이 가능한 비인적 자산…의 총계로 정의”하고62) 있는 점, 즉 세기적 대가답게 제멋대로 정의하고 있는 점; 리카도 경제학의 핵심은 “희소성의 원리”이고,63) 맑스의 경제학 연구의 “주요 결론은 ‘무한축적의 원리’”이며,64) 특히 “그보다 앞선 연구자들처럼 마르크스도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다”65)거나, 나아가서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암묵적으로 장기적인 생산성 증가율이 제로(0)라는 엄격한 가정에 기초해 있[다]. (Marx’s theory implicitly relies on a strict assumption of zero productivity growth over the long run.)”66)고 제멋대로 지껄여대고 있는 점, 즉 사기치고 있는 점; 언제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통제’(?)한 적이 있다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을) … 수 있는 (democracy can regain control over capitalism)”67)이라든가 “민주주의가 현 세기의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를 다시 통제하려면 (if democracy is to regain control over the globalized financial capitalism of this century)”68) 운운하는 등의 헛소리, 등등등.

지나는 김에 얘기하자면, “직역을 우선으로 했”다면서도,68) 번역의 대본으로 삼은 미국어판의 “private capital”을 수미일관 “민간자본”으로 번역하고 있다. 물론 반드시 잘못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private(私的인, 私有의)가 갖는 개인의 독점성・배타성은 철저히 사라지고 없다. 본래 유유상종이라 했겠다, 물론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 세기적 저작의 최대의 특징은 상품의, 따라서 부(富)의 직접적 생산과정과 생산관계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잉여노동, 잉여가치의 생산, 즉 착취도,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간의 대립・적대도 전적으로 은폐된다.70) 그리고 남는 게 “공정한 소득 분배와 민주적 사회질서” 따위의 희떠운 소리뿐이다. 그리하여 그 방대한 분량의 책 속에서 지껄여대고 있는 것이라곤, 방대한 ‘통계자료’에 기초한, 그러나 그 통계들 자체의 개념적・현실적 타당성에 대해서조차 어떤 비판적 검토・분석도 없는, 그저 국민소득의 량적 ‘분배’(!) 뿐이다. 그 ‘국민소득’ 통계가 과연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분배’의 대상으로 되어 있는 그 ‘국민소득’이,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년간(年間) 가치생산물이 어떠한 생산관계 속에서 생산되는가 하는 것은 피케티에게는 전혀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저 “전 세계의 소득이 노동과 자본에 각각 얼마나 돌아가는지 그리고 그 몫이 18세기 이후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룬다.”71) 그리하여, ‘자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 운운하고 떠들어대지만,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의 잉여노동・잉여가치의 착취는, 그리고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근본적인 모순・대립도 장광설 속에 은폐되어 버린다. 간혹 노동자들의 파업과 그에 대한 경찰의 살인적 억압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상 우연적인 사건들일 뿐이다.

여기에서 잠깐, 피케티가 방대한 ‘통계자료들’을 동원하면서도 그 통계들 자체의 개념적・현실적 타당성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적 검토・분석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두 가지만 지적하고 가자.

우선, ‘국내총생산’이나 그 ‘증가율’, ‘생산성 증가율’ 같은 것들은 그의 논의에서 시종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현실적인, 따라서 과학적인 의의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그것들이 소위 GDP 디플레이터를 반영했든 아니든, 가격의 통계가 아니라, ‘사용가치의 총생산’이어야 하고, 그 ‘사용가치 생산에 있어서의 증가율’이어야 한다. 물론 그 증감을 표상(表象)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질적으로 서로 극히 다른 수십만・수백만 종류의 사용가치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나의 단위로 총화(總和)하여 계량화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소수점 이하의 단위까지 엄밀하게! 그런데도 부르주아 경제학은 버젓이 그런 것들을 통계화하고 있고, 그것들을 기초로 하여 피케티는, 예컨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버트 고든Robert Gordon과 같은 경제학자들은 1인당 생산 증가율이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둔화될 수밖에 없으며 2050-2100년에는 연 0.5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고든의 분석은, 증기기관과 전기의 발명 이후 계속된 여러 혁신의 물결을 비교하고 가장 최근의 혁신의 물결一특히 정보기술 혁명을 포함한一이 이전에 비해 성장 잠재력이 훨씬 더 낮다는 연구 결과에 기초한 것이다. 최근의 혁신은 기존의 생산 방식을 크게 뒤바꾸지도 못할 뿐더러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72)

 

“정보기술 혁명을 포함한 최근의 혁신은 기존의 생산 방식을 크게 뒤바꾸지도 못할 뿐더러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지도 못”한다? 분명 사바세계에 사시는 분들인 터인데, 그야말로 어이없는 말씀이다! 물론 오늘날 너나 할 것 없이 ‘저성장’이나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을 얘기하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같은 입으로 ‘4차 산업혁명’이니, AI 즉 인공지능이니 하고 떠든다. 그렇다면,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등이 생산성 증대의 둔화요인으로라도 작용한단 말인가?

사실, 저들 부르주아 경제 이데올로그들이 오늘날 ‘저성장’이니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니 하고 떠들어대는 것은, 그들이 질적으로 다양하여 어떤 공통의, 동일한 단위로 계량(計量)할 수 없는 사용가치의 생산과 그 증대를 엉뚱하게도 가격, 즉 교환가치로서 총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저성장’이니 ‘생산성 증가율의 둔화’니 하는 소리는, 실제로는 오히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따른 생산성의 비약적 증대가, 따라서 실제로는 사용가치의 생산의 거대한 증대・성장이 ‘부가가치 생산성’이라는 부르주아적 비과학에 의해 왜곡되어 반영된 헛소리들인 것이다.

두 번째로는, 그가 “자본-노동 간의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논할 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본’의 개념을 제멋대로 규정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는 부르주아 국가가 제공하는 소위 ‘노동 분배율’이나 ‘자본 분배율’이니 하는 통계를 참으로 무비판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 무비판이 그의 무지 때문인지, 한편에서는 불평등의 실상을 밝히고 비판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자본의 소득’의 상당 부분을 ‘노동’의 소득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불평등의 실상을 은폐하려는 의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철저히 무비판적이다.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그가, 부르주아 통계가 소득을 분류하고 있는 기준과 동일하게, 기업의 “관리자들”을 노동자로 분류하고73)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그가 통계에 따라서 노동자들의 임금의 수백 배, 수천 배에 이르는 이른바 CEO니 하는 “관리자들” 곧 경영자들의 ‘월급’・‘연봉’・‘수당’・‘상여금’ 등을 모두 “노동 소득”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자본가들을 “소주주, 중간 규모의 주주, 대주주, 지주들”로 분류하고 있는 데에서도 명확하다. 이렇게 되면, ‘자본’의 소득은 명백히 ‘주주’의 자격과 ‘지주’의 자격으로서 획득하는 소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단언컨대, 부의 분배에는 두 차원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요소 간’ 분배로, 여기서 노동과 자본은 추상적으로 동질적 존재인 ‘생산요소’로 취급된다” 운운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자본’에 대해서만 얘기하자면, 그의 사고(思考)・경제학 체계 속에서는 다음 둘 중의 하나다: 말 그대로의 ‘생산요소’, 즉 토지를 포함한 물적 생산요소들이 소득의 주체이든가, 주주들이나 지주가 생산요소이든가! ― 그냥 웃어넘기자.

다시 앞서의 주제로 돌아가면, 아무튼, 저 세기적 저작에는 분배관계와 생산관계 간의 본질적 동일성에 대한,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인식은 털끝만큼도 없다.

 

이른바 분배를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그것에 주요한 역점을 두는 것은 일반적으로 오류이다.

소비수단의 어떤 분배도 생산조건 자체의 분배의 결과일 뿐인데, 후자의 분배는 그러나 생산양식 자체의 성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예컨대, 대중은 단지 인적인 생산조건, 즉 노동력의 소유자일 뿐인 반면에 물적 생산조건들은 자본소유나 토지소유라는 형태 하에 비(非)노동자들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 있다. 생산요소들이 그런 식으로 분배되어 있으면, 소비수단의 오늘날과 같은 분배는 저절로 생긴다. 물적 생산조건들이 노동자들 자신의 조합적 소유이면, 마찬가지로 오늘날과는 다른 소비수단의 분배도 생긴다.74)

 

분배관계는 인간이 그들의 사회적인 생활과정 속에서, 즉 그 사회적 생활의 생산 속에서 들어가는 생산관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그 뒷면이고, 그리하여 양자는 동일한, 역사적으로 경과적인 성격을 공유한다.75)

 

그런데 피케티에게 이러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와 같이 분배를 “생산양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unabhängig) 고찰・취급”하는 것은 반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의 특징이기 때문이다.76) 게다가, 피케티는 이미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린아임이 입증되지 않았던가! 이러한 ‘경제학’에 대해서 맑스와 엥엘스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가장 천박한 견해에서는 분배는 생산물들의 분배로서 나타나고, 그리하여 생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것, 생산에 대하여 마치 자립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분배는 생산물들의 분배이기 이전에, 1. 생산용구들의 분배이며, 2. 동일한 관계의 보다 진전된 규정, 즉 다양한 종류의 생산으로의 사회구성원들의 분배이다. (일정한 생산관계들 아래로의 개인들의 포섭.) 생산물들의 분배는 명백히, 생산과정 자체에 포함되어 있고 생산의 구조(Gliederung)를 규정하는 이러한 분배의 결과일 뿐이다. 생산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분배를 도외시하고 고찰된 생산은 명백히 공허한 추상인데, 한편 거꾸로 생산물들의 분배는, 본원적으로 생산의 한 계기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분배와 함께 저절로 주어져 있다.77)

 

생산과 분배의 관계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경제학에 대해서 쓰면 이러한 [즉, 피케티가 ≪21세기의 자본≫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것과 같은: 인용자] 정신 나간 소리를 하게 된다.78)

 

≪21세기 자본≫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명색이 ‘자본-노동 간의 소득 분배’ 혹은 ‘노동-자본 간의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논한다고 내세우면서도,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연적이고 주기적인 공황과 그것이 노동자들의 대량의 산업예비군화, 빈곤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사실상 전혀 어떤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물론 공황 혹은 대공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언급이란 게, 예컨대, 기껏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자본-노동 간 분배는 20세기를 거치면서 광범위한 변화를 겪었다. … 19세기에 관찰된 변화(전반기에 자본이 가져가는 몫이 늘었다가 다소 줄어든 이후 안정기로 접어든)는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만해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볼셰비키 혁명(1917), 대공황(1929-1939), 제2차 세계대전(1939-45) 그리고 이후 자본통제와 더불어 시행된 새로운 규제와 세금 정책 등, 1914-1945년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충격적인 사건들은 1950년대에 소득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몫을 역사적인 최저 수준으로 낮춰놓았다. 하지만 자본은 곧바로 스스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보수혁명의 서막을 알린 1979년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집권 및 1980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집권과 함께 자본이 차지하는 몫의 증가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이어 1989년 구소련이 붕괴하고 1990년대 금융의 세계화와 탈규제가 진행되었는데, 이 모든 사건은 세기 전반에 목격됐던 것과 정반대의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했다. 2010년이 되자 2007-2008년에 시작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1913년 이후 경험해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번창했다. 자본의 새로운 번영이 초래한 결과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바람직한 발전이었다.79)

 

보다시피, 공황의 주기적 필연성이나, 그것이 노동자계급에 대해서 미치는 치명적 영향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다. “… 대공황(1929-1939), … 그리고 이후 자본통제와 더불어 시행된 새로운 규제와 세금 정책 등, 1914-1945년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충격적인 사건들은 1950년대에 소득에서 자본이 가져가는 몫을 역사적인 최저 수준으로 낮춰놓았다”고 쓸 때, 대공황은 오히려 ‘자본-노동 간의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완화한 것처럼까지 읽힌다. 그리고 “자본통제”? 그것은 아마 국가독점자본주의 좌파의 소위 복지정책을 의미할 것인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대공황과 전재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혁명화에 대한 체제 내로의 포섭・매수정책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한 마디도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가 이들 문제에 대해서 사실상 한 마디도 안 하는 것은 물론, 그가 그것들을 몰라서는 결코 아닐 것이고, 그것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이 자본주의 체제의 종말을 앞당기는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일 터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대가답게 피케티는 역시 현명하다!

얼핏 자본주의에 대해서 무척 비판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피케티의 이 세기적 장광설이 설교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사회적 국가(social state)”[!]와 “누진적 소득세(progressive income tax)”, “글로벌 자본세(global tax on capital)”니 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강화이다. 물론 기회 있을 때마다 곳곳에서 악질적이고 교활하게 반공주의를 설교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독자 대중을 “글로벌 자본세”라는 유토피아, 몽환경(夢幻境)으로 끌고 가면서!80)

결국 그는 부의 분배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사회적 국가’니, ‘누진적 소득세’니, 심지어 ‘글로벌 자본세’니 하는 것을 설교하지만, 그것을 실행하고 실현할 주체는 어디까지나 부르주아 국가, 자본주의 발전의 현 단계에서는 독점부르주아지의 국가다.81) “학술적 설득력과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세계에 피케티 광풍을 불러왔다”는 그의 부의 불평등 완화책은 그리하여 사실 개념적으로는, 시쳇말로,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자는 말보다도 훨씬 훨~씬 끔찍한 주장이다. 가게의 생선에 대한 고양이의 탐욕은 사용가치에 대한 탐욕이어서 그의 뱃구레의 크기에 의해서 제한되지만, 잉여가치에 대한 자본의, 독점자본의 탐욕은 결코 한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독점자본주의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통과점이지만,82) 피케티 등이, 예컨대, 이른바 누진적 소득세 운운하면서 국가의 개입을 들먹일 때, 그들의 시점(視點)・시선은 그러한 객관적・과학적 시점・시선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아무튼, 피케티의 이 세기적 저작은 “기본소득”이니, “재벌개혁・재벌해체”83) 하면서 황혼의 자본주의를 구하려고 애처롭게 발버둥치고 있는, 이 시대의 수많은 반동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한 거의 모든 요소들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저서에 대한 ‘우파의 비판’은, 한편에서는 당연히 무지와 그 무지한(無知漢)들의 근시안적인 탐욕에서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우파’의 지성이 저 ‘진보적 지식인들’의 ‘좌파적’ 선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선의를, 즉 그 무지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즉, 그들이 가는 길을 선의로 단단히 포장해주기 위해서다.

한편, 피케티는 “… 인플레이션은 이 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84)고 쓰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 인플레이션은 역시 “모든 가격의 일반적 상승”85)이다. 걸출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답게 상품가격의 실질적 등귀와 명목적 등귀의 구별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인플레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아니 사실은 인플레이션을 필연적으로 내재・예정하고 있는 이른바 관리통화제도라는 현대 자본주의의 불환통화제도가 사실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면적 위기에 대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대응기구86)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물론 입을 꾸-욱 다물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발설하는 것은 ‘21세기 자본’에 위험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하자면, 피케티는 빈부의 “양극화의 근본요인: r>g (the fundamental force for divergence: r>g)”87)라며,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r>g라는 부등식으로 표현할 이 근본적인 불평등은 이 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여기서 r은 연평균 자본수익률을 뜻하며, 자본에서 얻는 이윤, 배당금, 이자, 임대료, 기타 소득을 자본총액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g는 경제성장률, 즉 소득이나 생산의 연간 증가율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이 책의 논리를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것이다.88)

 

자, 그렇다면, 이 불평등을 해소 혹은 완화하기 위한 수단은, 이른바 누진적 소득세 등을 통해서 r, 즉 ‘자본수익률’을 낮추는 데에서뿐만 아니라, g, 즉 ‘경제성장률, 즉 소득이나 생산의 연간 증가율’을 고양・증대시키는 데에서도 찾아져야 할 것이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피케티는 어떤가? 앞에서 본 것처럼, “정보기술 혁명을 포함한 최근의 혁신은 기존의 생산 방식을 크게 바꾸지도 못할뿐더러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지도 못”한다며89) 부정적 예언만 하고 있을 뿐, 그 고양・증대책에 대해서는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 혹시, 오늘날의 이른바 “소득 주도 성장론”처럼, ‘누진적 소득세’나 ‘글로벌 자본세’(?)가 그러한 기능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런데, 피케티에게 있어서는 인구 및 경제성장률의 저하가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요인(force)’일 뿐, 불평등의 완화가 경제성장률을 고양・증대시키는 ‘요인’은 아니다.) 아무튼 대단히 훌륭한 논리다.

결국, 피케티의 저 세기적 저서가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적 지적 세계에서는 착취와 대립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과 필연적 법칙에 대한 무지 내지는 은폐, 무비판적 인식이야말로, 그리고 상투적인 싸구려 반공 모략・선전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저열함이야말로 ‘부르주아적 좌파’의 덕목이고, 세기적 명성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이다.

 

 

V. ≪자본론≫의 과학성・혁명성과 자본주의 체제

    ― 결론을 대신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자본론≫은 전혀 다르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자유 대~한미국과 ≪자본론≫ 간의 각별히 아름다운 인연에 대해서, 즉 파쇼적 탄압에 의해서 ≪자본론≫이 40년 동안이나 공포의 금서였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했다. 이때 ‘공포’는 물론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국가에 의해서, 즉 자유 대~한미국에 의해서 ‘확인’받고, ‘보장’받고 있는 노동자・인민 대중의 공포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유 대~한미국이 ≪자본론≫을 ‘공포의 금서’로 만든 것은 ≪자본론≫ 그것이, 시대에 뒤떨어지기는커녕, 너무나도 생생히 현대 자본주의를, 그 구조와 운동법칙을, 그 모순과 착취・대립을 해부하고,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론≫ 그것이 생생히 밝히고 폭로하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의 진실에 대한, 따라서 ≪자본론≫의 과학성・혁명성에 대한 자유 대~한미국의 떨칠 수 없는 공포 때문이다.90)

맑스는 일찍이 이렇게 쓴 바 있다.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서 전복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나 이론 또한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그것이 인간에게(ad hominem: am Menschen) 입증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radikal)으로 되자마자 인간에게 입증된다. 근본적이라 함은 사물을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91)

 

그리고, 예컨대, ≪자본론≫ 제3권에는, 앞에서 그 일부분을 인용했지만, 이렇게 쓰여 있다.

 

[고전 경제학파적 주장에 반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특수한 종류(Art)의, 특정한 역사적 규정성을 지닌 한 생산양식이라는 것, 다른 모든 특정한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어떤 주어진 단계의 역사적 생산력과 그 발전 형태를 그 역사적 조건으로서 전제하는데 그 조건이란 그 자체가 선행한 과정의 역사적 성과이고 산물이며 거기에서 그것을 주어진 기초로 하여 새로운 생산양식이 나온다고 하는 것, 이러한 특정한 역사적으로 규정된 생산양식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인간이 그들의 사회적인 생활과정 속에서, 즉 그 사회적 생활을 생산하면서 들어가는 관계―는 하나의 특정한, 역사적인, 그리고 과도적(過渡的)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배관계는 이 생산관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며 그 뒷면이고, 그리하여 양자는 동일한, 역사적인, 과도적인 성격을 공유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92)

 

“사물을 뿌리부터 파악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자연적이고 비역사적・항구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대신에 “역사적인, 과도적인 성격”을 갖은 것으로 파악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바로 ≪자본론≫을 비롯한 맑스・엥엘스의 이론의 과학성・혁명성의 근원인 것이다.

≪자본론≫의 이 과학성과 혁명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을 그 역사적 전제인 상품(생산과 그 유통)의93) 분석으로부터 시작하는 데에서도 나타나 있다. 이 상품의 분석을 통해서 맑스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특질, 그 생산에서의 유용적・구체적 노동과 추상적・일반적 인간노동이라는 노동의 이중성, 화폐의 생성과 그 본질・기능을 명확히 하고 있고, 나아가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등가교환에 기초한 자본의 가치증식・잉여가치의 생산의 비밀을 밝히고 있으며, 계급적 적대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과 온갖 특징들, 그리고 주기적이고 필연적인 공황을 포함한 그 운동법칙들을 규명하고 있다.

그러면, 최대한의 잉여가치의 생산, 이윤의 획득을 목표로 주기적인 공황으로 점철된 운동법칙에 복속되어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은 결국 어떤 운명을 맞을 것인가?

우선, ≪자본론≫에서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은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서”, 그리고 자본가와 토지소유자는 “경제적 범주들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들 및 이해관계들의 담지자(擔持者, Träger)”로서 파악된다.94) 자본가란, 바로 “부단히 갱신되는 … 자본의 운동…의 의식적 담당자”요, “가치의 증식”이 “그의 주관적인 목적이며, 추상적 부를 더욱더 많이 취득하는 것이 그의 활동들의 유일한 추진 동기인” “의지와 의식이 부여된, 인격화된 자본”이기95)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 강제법칙으로서 관철시키는”96)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단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 획득한,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인 노동개체와 그 노동조건의 결합에 기초한 사적 소유가, 타인의 노동이지만 형식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서 구축(驅逐)”97)되면,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사회적 규모로 확립되면, 이제 “자유경쟁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재적 법칙들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 강제법칙으로서 관철”되기 때문에, 자본가 개개인의 주관적 의사・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이 전화과정이 낡은 사회를 폭과 깊이에 있어서 충분히 분해해 버리자마자, 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로 전화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화되자마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자기 발로 서게 되자마자, 노동은 한층 더 사회화되고 토지 및 기타 생산수단은 더 한층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으로, 곧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전화되며, 그리하여 사적소유자의 가일층의 수탈은 새로운 형태를 취한다. 이제 수탈되는 것은, 더 이상 스스로 경영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많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에 내재적인 법칙이 작용함으로써, 즉 자본의 집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들을 때려죽인다. 이러한 집중, 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 나란히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가 더욱더 대규모로 발전하고, 과학의 의식적인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으로의 노동수단의 전화, 생산수단을 결합된 사회적 노동의 생산수단으로서 사용함으로써 얻는 모든 생산수단의 절약이 발전하며, 모든 민족의 세계시장 망 속으로의 편입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 제도의 국제적 성격이 발전한다. 이 전화과정의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가 줄어듦에 따라서 빈궁, 압박, 예속, 타락, 착취의 규모가 증대하는데, 그러나 또한 끊임없이 팽창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자체의 기구에 의해서 훈련되고 결집되며 조직되는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역시 증대한다. 자본의 독점은 그와 함께 그리고 그 아래에서 개화한 이 생산양식의 질곡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다. 그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최후를 알리는 종이 울린다. 수탈자들이 수탈된다.98)

 

소생산자들과 영세・중소 자본들을 수탈하면서, 즉 자본의 집중에 의한 독점화와 그에 따른 노동자계급과 그 조직화・반항의 증대가 결국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 조종을 울릴 수밖에 없음을 간명하게 말하고 있다.

주지하는 것처럼,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현대 자본주의는 자본의 집중・독점의 강화와 계급투쟁의 격화에 따른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전반적인 위기에 대한 부르주아 국가의 전면적 대응체제, 즉 사적소유의 최후를 연기하고 연명시키려는 국가의 전면적인 대응체제이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구성의 발전”이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인 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사회구성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국가의 대응도 물론 자본주의 체제를 영구화할 수 없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99)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것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갈수록 그 모순과 대립이 격화돼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는 가히 인공지능(AI)을 자랑하는 근래의, 문자 그대로 비약적인 과학기술혁명이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그것에 어떤 운명을 강제할 것인가를, 저 시대 뒤떨어진 ≪자본론≫에 의거해서 고찰해 보자.

우선, 저 세기적인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그는 이렇게 용감하게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도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은 민간자본의 축적과 집중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균형을 잡아주는 힘이다.100)

맑스는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은 민간자본의 축적과 집중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균형을 잡아주는 힘이다”? 그리고 “특히 정보기술 혁명을 포함한 … 최근의 혁신은 기존의 생산 방식을 크게 뒤바꾸지도 못할 뿐더러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지도 못”101)할 것이며, 그리하여 이것이 향후에도 ‘부의 불평등’이 더욱 악화되거나 적어도 개선되기 어려운 논거가 된다? ― 가히 세기적인 명성에 값하는 무지와 만용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말씀과는 정확히 반대로, 맑스는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기는커녕,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역시 피케티의 말씀과는 정확히 반대로, 그러한 “기술 진보와 생산성 향상은 민간자본의 축적과 집중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균형을 잡아주는 힘”이기는커녕, 거꾸로 그러한 기술의 진보와 그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발전은 바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을 강화하는, 따라서 결국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조종(弔鐘)을 울리게 하는 힘으로 보았다.

피케티는, “마르크스에게는 그의 예언들을 가다듬는 데 필요한 통계자료가 부족했던 것이 틀림없”으며, “그는 자신의 결론들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연구에 착수하기 전인 1848년에 이미 그 결론들을 내렸다”고102) 항의하겠지만, 맑스와 엥엘스는 1848년에 이미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생산도구들을, 따라서 생산관계들을, 따라서 전체 사회적 관계들을 지속적으로 변혁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 생산의 지속적인 변혁, 모든 사회적 상태의 부단한 동요, 항구적인 불안과 변동이 이전의 모든 시대로부터 부르주아 시대를 구별짓는다. 모든 불변의 녹슨 관계들은 일련의 낡고 고귀한 관념들 및 견해들과 함께 해체되고, 새로 형성된 모든 것은, 그것들이 굳어질 수 있기도 전에(ehe sie verknöchern können), 낡아버린다.103)

 

그리고 ≪자본론≫ 제1권에서는, “공산당 선언”의 바로 이 구절을 각주로 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공업은 생산과정의 현존의 형태를 결코 최종적인(definitiv) 것으로 간주하지도, 다루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그 기술적 기초는, 이전의 모든 생산양식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었음에 반해서, 혁명적이다. 기계와 화학적 과정, 기타 방법들에 의해서 근대적 공업은 생산의 기술적 기초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기능들과 노동과정의 사회적 결합들을 끊임없이 변혁한다.104)

 

과연, 맑스(와 엥엘스)는,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얼마나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가!

이렇게 “지속적인 기술 진보와 꾸준한 생산성 향상이 이뤄질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맑스는 생산에 있어서의 기계의 도입 및 그 개량을 극히 중요시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고용, 따라서 산업예비군화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다.

우선 자본가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고 개량하는 것은 새로운 생산방식을 통해서, 즉 노동생산력을 제고(提高)함으로써 상품을 저렴하게 생산하고, 그리하여 특별잉여가치, 즉 초과이윤을 획득하고, 또한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는 동기와 충동 때문이다.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상품의 현실적 가치는, 그 개별적 가치가 아니라, 그 사회적 가치이다. 다시 말해서, 그 가치는, 개별적인 경우에 그 상품이 생산자에게 실제로 요구하는 노동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서 측정된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을 사용하는 자본가가 [그 변화된 생산방식에 의해 9펜스에 생산한: 인용자] 자신의 상품을 1쉴링이라는 그 사회적 가치에 판매한다면, 그는 그것을 그 개별적 가치보다 3펜스만큼 높게 판매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3펜스라는 특별잉여가치(Extramehrwert)를 실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12시간의 노동일은 이제 그에게는 이전의 12개 대신에 24개의 상품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1노동일의 생산물을 판매하기 위해서 그는 2배의 매상고, 즉 2배나 더 큰 시장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정들이 여전하다면, 그의 상품들은 그 가격을 인하함으로써만 보다 더 큰 시장영역을 정복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상품을 그 개별적 가치보다 높게, 그러나 그 사회적 가치보다 낮게, 이를테면, 개당 10펜스에 판매할 것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개당 1페니의 특별잉여가치를 획득한다. … 어떤 개별자본가에게나 노동생산력을 제고함으로써 상품을 저렴하게 하려는 동기가 존재하는 것이다.105)

 

그러나 이 특별잉여가치는 이내 사라져버리고 만다. 맑스는 이렇게 얘기한다.

 

저 특별잉여가치는, 새로운 생산방식이 일반화되고, 그와 더불어 보다 저렴하게 생산된 상품들의 개별적 가치와 그것들의 사회적 가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자마자, 사라진다. 새로운 [생산: 역자]방식을 가진 자본가에게는, 그가 자신의 상품을 사회적 가치 이하로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형태로 느껴지는 바의,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이라는 동일한 법칙이, 경쟁의 강제법칙으로서 그의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생산방식을 도입하도록 내모는 것이다.106)

 

그리고 이를 엥엘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대공업의 기계들의 무한한 개량가능성을 모든 개별 산업자본가들에게 하나의 강제명령으로 전화시키는 것, 즉 파산이라는 형벌 때문에(bei Strafe des Untergangs) 자신들의 기계를 더욱더 개량하게 하는 강제명령으로 전화시키는 것은 바로 사회적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추진력이다.107)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기초한 경쟁은 기계를 끊임없이 개량하게 하는바, 드디어 오늘날에는 이른바 AI(인공지능)과 ‘고용 없는 성장’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혹은 나아가서는, “이젠 경제가 성장할수록 고용은 줄어드는 ‘고용 죽이는 성장’ 시대가 현실화되고 있다.”108) 일본의 한 르포라이터는 이미 1982년 말에 이렇게 쓰고 있다.

 

‘… 장래의 공장이라고 하는 것의 첫 번째 최고의 목표는 역시 무인화 공장이다….’ … 공장의 무인화(無人化)는 로봇이 노동자를 구축(驅逐)하여 달성된다. 빛나는 과학기술의 도달점, 그것이 공장의 비인간화이다.109)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자본론≫이 이미 충분한 근거와 논리로 예견한 사태였다. 우선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계가 개량될 때마다 자본은 더욱더 소수의 노동자를 고용한다.110)

 

그러나 이것이 결코 오늘날과 같은 ‘고용 없는 성장’의 충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다. “기계는 그것이 채용되는 노동부문에서는 필연적으로 노동자를 배제하지만, 그러나 또한 다른 노동부문에서는 고용의 증가를 불러일으키는 일도 있을 수 있”기111) 때문이다.

우선 농업 부문을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농업을 점령하자마자, 혹은 점령한 정도에 따라서, 여기에서 기능하는 자본의 축적과 함께 농업노동인구에 대한 수요는 절대적으로 줄어드는데, 그들의 배척은 다른 비농업적 산업에서와는 달리 보다 큰 견인에 의해서 보완되지 않는다. 농촌인구의 일부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혹은 매뉴팩춰 프롤레타리아트로 옮겨가려 하고 있고, 이러한 전화에 유리한 사정을 기다리고 있다.112)

 

그리하여, 주지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예외 없이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지주와 자본가, 소생산자들까지 포함하여, 예컨대 19세기나 20세기 전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엄청나게 줄어들어 있다. 소농민들이 대거 몰락,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로 된 것이다.

그에 비해서 공업 부문에서는 사태가 좀 다른 곡선을 그리면서 발전한다. “기계경영에 의해서 다수의 노동자가 실제로 구축되고 잠재적으로 대체됨에도 불구하고, 동종 공장수의 증가나 기존 공장의 규모의 확대로 표현되는 기계경영 자체의 성장과 함께 결국 공장노동자도, 그들에 의해서 구축된 매뉴팩처 노동자, 또는 수공업자보다도 다수로 될 수 있”으며, 자본의 구성의 고도화에 따른 “취업 노동자수의 상대적인 감소는 그 절대적인 증가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113)

그리고 이른바 과학기술혁명, 혹은 정보통신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인 지난 세기 70년대까지는 세계 모든 국가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이른바 ‘신흥국들’에서는 실제로도 취업임금노동자의 수는, 공황에 의한 주기적인 축소, 즉 산업예비군의 돌연한 증대를 별도로 하면, 경향적으로 증대해 왔다.

사회적 생산이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공황은 필연적이고 주기적인바,

 

공장제도의 돌발적이고 엄청난 확장가능성과 세계시장에 대한 그 의존성은 필연적으로 열병과도 같은 생산과 그에 따른 시장의 과잉공급을 낳고, 그 시장의 수축과 더불어 마비가 나타난다. 산업의 생활은 중간 정도의 활황기, 번영기, 과잉생산기, 공황기, 침체기의 순서로 변화한다. 기계경영이 노동자들의 고용과 그에 따른 생활상태에 끼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산업순환의 이러한 시기변화와 더불어 정규적으로 된다. 번영기를 제외하면, 시장에서의 개별적인 점유몫을 둘러싼 자본가들 간의 격렬하기 그지없는 투쟁이 미친듯이 벌어진다. 이러한 몫은 생산물의 저렴(低廉)함에 비례한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노동력을 대체하는 개량된 기계와 새로운 생산방법을 사용하는 데에서의 경쟁 외에,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밑으로 강제로 내려 누름으로써 상품의 저렴화가 추구되는 시점이 매번 나타난다.114)

 

그리고 번영기 및 과잉생산기의

 

생산 규모의 돌연하고 경련적인 팽창은 그 돌연한 수축의 전제이다. 수축은 다시 팽창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러나 이 팽창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인간재료 없이는, 인구의 절대적인 증가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의 증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증가는 노동자의 일부를 끊임없이 ‘유리(遊離)시키는’ 간단한 과정을 통해서, 생산의 증가에 비해서 사용 노동자 수를 감소시키는 방법들을 통해서 창출된다. 근대 산업의 모든 운동 형태는 그리하여 노동자 인구의 일부분을 끊임없이 실업자 혹은 반실업자로 전화시키는 데에서 생긴다.115)

 

게다가,

 

사회적 부, 기능 자본, 그 증가의 크기와 힘, 따라서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절대적 크기와 그 노동생산력이 크면 클수록, 산업예비군도 더 크다. 처분 가능한 노동력은 자본의 팽창력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원인에 의해서 발전한다. 산업예비군의 상대적 크기는 그리하여 부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증대한다. 그러나 이 예비군이 현역 노동자군에 비해서 크면 클수록 고정적 과잉인구가 더욱더 증대하는데, 그 궁핍은 그 노동의 고통에 정비례*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극빈층과 산업예비군이 크면 클수록 공인된 빈곤상태도 증대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 일반법칙이다.116) (강조는 맑스.)

 

아무튼 이렇게 “근대 산업의 중심―공장, 매뉴팩춰, 야금공장, 광산 등―에서는 노동자는 때로는 배척되고, 때로는 보다 대량으로 다시 견인되어, 비록 언제나 생산 규모에 대해서는 감소되는 비율에서이지만, 대체로 취업자 수가 증가”하는데,117) 그러나 한없이 그렇게 증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정한 발전단계에서는 공장부문들의 비상한 팽창이 사용노동자 수의 상대적 감소뿐만 아니라 절대적 감소와도 결합될 수 있다.”118) 그리고, 자유 대~한미국을 포함하여, 오늘날 AI, ‘고용 없는 성장’, ‘고용을 죽이는 성장’을 자랑하는 나라들은 모두 바로 그 발전단계를 향해서, 거기에 도달하는 날이 내일일지 모레일지 모르게, 아주 빠르게 줄달음치고 있다.

그러면 그렇게 “공장부문들의 비상한 팽창이 사용노동자 수의 상대적 감소뿐만 아니라 절대적 감소와도 결합”되는 단계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의 절대수를 줄이는, 즉 국민 전체로 하여금 실제로 보다 적은 시간에 총생산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인바, 왜냐하면, 그것은 인구의 다수를 용도폐기할(außer Kurs setzen)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자본주의적 생산의 독특한 한계가 나타나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이 결코 생산력의 발전이나 부의 생산을 위한 절대적인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일정한 시점에서 그 발전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 나타난다. 부분적으로 이 충돌은 노동자 인구의 이런저런 부분이 지금까지의 취업양식으로는 과잉으로 되는 주기적인 공항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계는 노동자들의 과잉시간이다. 사회가 획득하는 절대적인 과잉시간은 자본주의적 생산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생산력의 발전이 중요한 것은, 단지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한에서이고, 그것이 물질적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 일반을 줄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립 속에서 운동하는 것이다.119)

 

“노동자의 절대수를 줄이는, 즉 국민 전체로 하여금 실제로 보다 적은 시간에 총생산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 생산력의 발전은 혁명을 불러일으킬 것인바, 왜냐하면, 그것은 인구의 다수를 용도폐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도의 기술의 발전, 생산력의 발전으로 공장의 사실상의 무인화, 무인생산이 가능해질 때, 그러한 무인생산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 될 때,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폐기하고 보다 고도의 사회로 이행하는 사회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그리고 나아가서는 상품경제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도 자명하다. 무인생산이기 때문에, 즉 인간의 노동을 들이지 않고 생산되기 때문에, 생산물은 무가치하게 생산되며, 따라서 자본의 유일한 목적인 잉여가치 생산도 소멸한다. 상품이 상품이 아니게 되고, 자본이 자본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인생산이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생산물이 무가치하게 생산되지만,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상품생산, 자본주의적 생산은 결코 그 생산물들을 무상으로는 분배하지 않는다. 무인생산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는, 무산(無産)의 노동자계급의 절대다수, 따라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노동력을 판매할 곳이 없고, 따라서 소득이 없으며, 따라서 생활수단을 구매할 수가 없다. 물론 자본은 그 생산물을 판매할 곳이 없다. 전반적인 사회혁명이 아니고, 이 절대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사회복지제도? 기본소득제도? ― 좋은 말씀이다. 그러나 자본은 결코 사회복지제도를 위해서 혹은 기본소득제도를 위해서 존재하고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이, 자본의 국가가 사회복지제도든, 기본소득제도든, 그것을 수용한다면, 그것은 자본이 자본이기 위해서이고, 자본이 자본일 수 있는 한에서 마지못해서다. 그러나 무인생산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것이 될 때, 자본은 이미 자본일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때는 이미 자본주의는 그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그 정당성을 상실하는 것이다.120)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생기는 자본주의적 취득양식, 따라서 또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인 사적 소유의 첫 번째 부정(否定)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하나의 자연사적인 필연성으로써 그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이 부정은 사적 소유를 재건하지 않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에 기초하여 개인적인 소유를, 즉 협업과 토지의 공동점유 그리고 노동 자체에 의해서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점유에 기초한 개인적 소유를 재건한다.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개인들의 분산된 사적 소유의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로의 전화는 물론, 사실상 이미 사회적 생산경영에 기초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화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길고 어렵고 가혹한 과정이다. 거기에서는 소수의 탈취자에 의한 인민대중의 수탈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는 인민대중에 의한 소수의 탈취자의 수탈이 이루어진다.121)

 

한편, 자유롭고 전인격적인 인간이고자 하는 모두가 꿈꾸는,

 

자유의 왕국(Reich der Freiheit)은, 궁핍이나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규정되는 노동이 중지되는 곳에서 비로소 실제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문제의 본질상 본래의 물질적 생산의 영역의 저편에 있다. 미개인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해서 자연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문명인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모든 사회형태 속에서 그리고 있을 수 있는 모든 생산양식 하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발전함에 따라서, 필요가 확대되기 때문에, 이 자연필연성의 왕국도 확대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필요를 충족시킬 생산력도 확대된다. 자유는 이러한 영역에서는 단지 사회화된 인간, 즉 연합한 생산자들이, 어떤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되듯이 자신들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에 의해서 지배되는 대신에, 그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의 통제 하에 두는 경우에만, 최소한의 힘을 소비해서 자기의 인간적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도록 가장 적합한 조건 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변함없이 필연의 왕국(Reich der Notwendigkeit)이다. 이 왕국의 저편에서, 그 자체가 자기목적으로 인정되는 인간의 힘의 발전, 즉 진정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되는데, 그러나 그것은 오직 그 기초로서의 저 필연의 왕국 위에서만 개화할 수 있다. 노동일의 단축이야말로 그 근본조건이다.122)

“자유는 이러한 영역에서는 단지 사회화된 인간, 즉 연합한 생산자들이, 어떤 맹목적인 힘에 의해서 지배되듯이 자신들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에 의해서 지배되는 대신에, 그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의 통제 하에 두는 경우에만, 최소한의 힘을 소비해서 자기의 인간적 본성에 가장 잘 어울리도록 가장 적합한 조건 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 ― 무슨 뜻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한, 즉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자신들의 공동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한 조건은 무엇이겠는가?   노사과연

 


 

1) 전우용 역사학자, “불온서적”, ≪한겨레≫, 2018. 9. 20.

 

2) 한승동 선임기자, “나운규 ‘아리랑’ 성공은 일제의 엄혹한 검열 덕?”, ≪한겨레≫, 2016, 2. 19.

 

3) “지배 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표현, 사상의 형태로 표현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실로 하나의 계급을 지배계급이게 하는 관계의 관념적 표현, 따라서 이 계급의 지배의 사상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독일 이데올로기≫, MEW, Bd. 3, S. 46.); “인간의 생활관계, 그들의 사회적 관계, 그들의 사회적 존재와 더불어 그들의 표상, 견해, 개념도, 한 마디로 하면, 그들의 의식도 변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깊은 통찰력이 필요한가? / 관념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 정신적 생산은 물질적 생산과 더불어 변한다는 것 이외의 무엇인가? 어떤 시대의 지배적인 관념(Ideen)은 언제나 단지 지배계급의 관념이었다.” (≪공산당 선언≫, MEW, Bd. 4, S. 480.)

 

4) 예컨대, 정성진 경상대 교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2005).

 

5) “… 여기서 노동생산성과 노동의 생산력이라는 개념을 의식적으로 구분했다. 노동의 생산력은 노동의 사용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노동생산성은 여러 가지 생산력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노동과 산출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자본을 많이 사용하면 노동생산성이 증가하는데, 이것은 자본의 생산력 때문이다. 차액지대의 경우에는 자연의 생산력으로 인해 노동생산성이 증가한다.” (강남훈 한신대 교수, “정보혁명과 지대에 관한 소고”,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원 편,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2권 제1호, 한울, 2005, p. 215, 주 4.)

 

6) 2004년부터 2007년에 걸쳐 나와 이른바 “정보재 가치 논쟁”을 벌였던 강남훈・류동민 등등의 여러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나 박성수(한국해양대) 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정보재 가치논쟁≫(2005, 한신대 출판부) 참조.; 예를 들자면, “… 지적 재산권…은 정보상품에 대한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초과이윤을 얻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이다. 문제는 과연 이것을 마르크스적인 의미의 지대로 볼 수 있는가라는 것인데, 강남훈은 … 최근의 논문[‘정보혁명과 지대에 대한 소고’,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2권 제1호, 한울, 2005: 인용자]에서 차액지대 및 독점지대 개념을 이용하여 이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강남훈이 제시한 지대의 기준(또는 그것이 특별잉여가치나 독점이윤과 구별되는 차이)은 초과이윤의 원천이 ‘자본이나 노동에 내재하지 않으면서 모든 자본이 공유할 수 있는 힘이라는 조건’(p. 216)에 있다는 점이다. / 필자는 기본적으로 지대와 관련한 강남훈의 논지에 동의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의 주장 중에서 다소 불분명하게 처리된 부분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논평하고자 한다. / 먼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1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를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 또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에 내재하는 것’ 또는 ‘자본의 생산력’이라는 표현은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을 자본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을 분명히 해 둔다면, 강남훈의 주장처럼,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환되지 않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지대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지적 재산권은 결국 자본의 생산력으로 전환되지 않는 요소들에 대해 법적・제도적으로 소유권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자본이 공유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차액지대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 “정보상품의 가치와 지대”, ≪진보평론≫ 26호, 2005년 겨울, p. 264.)

 

7) 예컨대, “[현재의] 중앙은행권은 금화와 마찬가지로 화폐의 모든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유통수단・지불수단・가치저장수단・세계화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비록 내재적 가치를 가지지 않지만 객관적인 사회적 가치를 가지면서 가치척도의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 “󰡔자본󰡕의 금화와 현재의 중앙은행권”, ≪이론≫ 제16호[1996 겨울/ 1997 봄 통권호]); 이채언 전 전남대 교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새 발견≫(2008) 등.; [김수행 교수의 그러한 관점에 대한 비판은, 채만수, “‘금폐화론’과 현대 불환은행권 ― 김수행 교수의 「󰡔자본󰡕의 금화와 현재의 중앙은행권」 비판을 중심으로”, ≪진보평론≫ 창간호(1999년 가을), pp. 272-302 참조.]

 

8) 예컨대, 오세철(경영학) 전 연세대 교수의 여러 글들이나, 김수행, ≪마르크스가 예견한 미래사회≫.

 

9) 예컨대, 노동생산력이란 구체적 유용노동의 생산력, 즉 사용가치의 생산에서의 생산력이어서, 노동생산성의 상승이나 하락과 상관없이 동일한 노동시간에는 동일한 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은 ≪자본론≫ 제1권 제1편만 읽어봐도 누구에게나 명백하다. 따라서 노동생산성과 현대 부르주아 경제학의 이른바 GDP 디플레이터와는, 즉 이른바 ‘실질성장률’ 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른바 GDP 디플레이터를 들이대면서 “실질노동생산성[(Y/Py)/H]”(정성진, 같은 책, pp. 20-23, 86.) 운운하거나, “노동생산성(=부가가치/종업원수)의 성장률”(같은 책, p. 130) 운운하는 것은, 게다가 그러면서도 큰 목소리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수호자를 자임하는”(같은 책, p. 11.) 것은, 명백히 ≪자본론≫ 제1권 제1편도 읽어보지 않은 채,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싸구려 현대 부르주아 비과학을 맑스주의 경제학이라고 강매하는 야바위, 즉 사기이다!

 

10) 이채언, 같은 책, p. 277. (명백한 오탈자는 인용하면서 교정했다.)

 

11) 김수행, “󰡔자본󰡕의 금화와 현재의 중앙은행권”, pp. 42-43.

 

12) 핫토리 후미오(服部文男), “科學的經濟學と現代資本主義”, ≪(經濟學ゼミナール) 現代資本主義と「資本論」≫ I, 2000, 新日本出版社, p. 24.

 

13) 그러한 정책, 즉 확대된 재정투입으로 과연 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가는, 예컨대, 1970년대의 극심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서 볼 수 있듯이, 의문이다. 그런데 또 그와는 별도로, 그러한 ‘무제한한’ 재정투입은 물론 또 다른 모순, 특히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그 인플레이션의 정도가 심할 때에는 그로 말미암아 사회적・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기 때문에 물론 그 ‘무제한’에는 모종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무제한 혹은 제한의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부르주아 국가와 중앙은행의 주요 정책과제의 하나다.

 

14) “1920년대 미국은 보통 ‘금본위제 ’라고 부르던 시대, 정확히 말하면 달러에 대한 금의 태환이 보장되던 시대였는데, 이때 1926년 및 1927년의 도매물가지수의 평균을 100이라고 하면, 1933년 3월 말의 그것은 60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1929년 10월 말에 대공황이 폭발하여 물가가 폭락한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황이 폭발하기 이전에도 도매물가지수는 꾸준히 내리고 있었습니다. 대공황 직전 호황의 막바지에서조차 말입니다. / 그러던 것이, 1933년 4월 1일에 금 태환을 정지하자마자 도매물가지수가 오르기 시작합니다. 1933년이나 1934년이면 대공황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인데도 말입니다. / 결국 ‘공황구제’를 위해서, 즉 지불 불능으로 도산해가는 대자본들을 통화를 남발하여 구제하기 위해서 태환을 정지하고 불환은행권으로서의 달러를 증발했기 때문입니다. / 그리하여 당시 미국의 도매물가지수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1933년 3월 및 4월을 저점 (底點 )으로 V자 곡선을 그립니다.”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제6판), p. 194.)

 

15) 맑스,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MEW, Bd. 13, S. 98.

 

16) 같은 책, S. 99.

17) 같은 책, S. 100.

 

18)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141-142. (채만수 역, pp. 212-214.)

 

19) 닉슨의 이 “특별성명”의 전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채만수, ≪노동자교양경제학≫(제6판), pp. 616-619 참조. 다만, 오래 전에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970년대에 연거푸 ‘석유파동’을 겪고, 온스당 35달러이던 ‘금 가격’이 600달러, 800달러를 넘나드는 시대” 운운하고 있지만, 현재에는 온스당 1,200달러를 넘나들고 있는 시대라는 것을 첨언해둔다. 이는 미 달러의 가치가, 1971년 8월 15일 이전에는, 적어도 그 ‘공정(公定)가격’에 의하면, $1=1/35온스의 금이었으나, 오늘날에는 단지 $1=1/1200±α온스의 금임을 의미한다!

 

20) 곽노완, “달러지배체제의 위기와 21세기 코뮌주의의 한국경제 비전”, ≪진보평론≫ 제38호, 2008년 겨울, p. 98.

 

21) 엥엘스, 같은 책, S. 102.

 

22) 채만수, “금폐화론의 비과학성에 대하여 ―곽노완 박사가 경제과학에 날린 잽(jab)에 대한 간략한 비판”, ≪정세와 노동≫ 제42호, 2009년 1월, pp. 70-71.

 

23)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539-540.

 

24)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141. (채만수 역, 제1분책, p. 213.)

 

25) 채만수, 같은 글, p. 71.

26) 채만수, 같은 책, pp. 393-396.

 

27)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의 공통점이 있다. 기업경영이나 자기계발 분야에서 ‘경쟁’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짜 뉴스라는 점이다. 사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한번쯤 의심해볼 만한 이야기이고,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도 금방 틀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믿는다면, 이것은 경쟁이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 / 이런 대표적인 거짓말로 ‘자전거 효과’라는 말이 있다. 경제는 자전거와 같아서 페달을 계속 밟지 않으면 넘어진다는 말이다. … 이 이야기는 경제가 끊임없이, 그것도 상당한 속도로 성장하지 않으면 무너진다는 일종의 괴담이다.” (이관후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 “소득주도‘성장’을 그만둘 때”, ≪한겨레≫, 2018. 9. 19.)

 

28) 채만수, ≪노동자 교양경제학≫(제6판), pp. 400-405 참조.

 

29) 같은 책, pp. 718-719 참조.

 

30) “공장제도의 돌발적이고 엄청난 확장가능성과 세계시장에 대한 그 의존성은 필연적으로 열병과도 같은 생산과 그에 따른 시장의 과잉공급을 낳고, 그 시장의 수축과 더불어 마비가 나타난다. 산업의 생활은 중간 정도의 활황기, 번영기, 과잉생산기, 공황기, 침체기의 순서로 변화한다. 기계경영이 노동자들의 고용과 그에 따른 생활상태에 끼치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은 산업순환의 이러한 시기변화와 더불어 정규적으로 된다. 번영기를 제외하면, 시장에서의 개별적인 점유몫을 둘러싼 자본가들 간의 격렬하기 그지없는 투쟁이 미친 듯이 벌어진다. 이러한 몫은 생산물의 저렴함에 비례한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노동력을 대체하는 개량된 기계 및 새로운 생산방법을 사용하는 데에서의 경쟁 외에,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밑으로 강제로 내려 누름으로써 상품의 저렴화가 추구되는 시점이 매번 나타난다.” (MEW, Bd. 23, S. 476.)

 

31) 김정훈 기자, “[현미경]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골디락스 美경제’”, ≪조선일보≫, 2018. 10. 9.

 

32) 예컨대, 11일자 ≪조선일보≫(인터넷판)의 기사 제목은 “‘검은 목요일’ 美 쇼크에 韓 증시 폭락”(<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1/2018101102979.html>)이었고, ≪한겨레≫(인터넷판)의 제목은 “아시아 증시 ‘검은 목요일’…주식시장 언제 봄 올지 알 수 없다”(<http://www.hani.co.kr/arti/economy/finance/865508.html>)였다!

 

33) 그런데도 무지가 악의와 결합되면 실로 다음과 같은 극언까지 나온다: “고정수입으로 생활하는 시민에게는 정부의 어리석은 정책으로 인한 집값 폭등은 축복이 아닌 재앙이다. 재산세가 덩달아 뛰니 아파트를 한 귀퉁이 팔아서 세금 낼 수도 없고, 생활비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폭등했던 집값이 폭락하면 낸 세금을 반환받을 수 있을까? 혹시 집값 폭등은 이 정부가 세금 짜내기 위해서 기획한 것일 수도…?”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120] 국민 세금은 공돈이 아니다” ≪조선일보≫, 2018. 10. 9.) 다름 아니라, 다음과 같은 불치의 극우적 악의도 선전할 겸, 구제불능의 무지도 과시할 겸, “시민 불복종의 의무”로 포장하여 조세저항을 선동하며 내뱉는 발언이다: “남북 경협 사업은, 현장 조사도 할 수 없고 토목공사의 시공도 감리도 할 수 없으니 수십조인지 수백조인지 돈만 싸다 주는 것인가? 그러면 김정은과 그 측근들이 적당히 착복하고 나머지로 우리 금수강산을 모조리 헤집어 놓는 것 아닐까? 이런 경협을 위해서 국방까지 실질적으로 내어주니 북한 주민의 노예 상태를 영속화하고 우리 국민마저도 사지(死地)에 빠뜨리는 것 아닌가?”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같은 글)

 

34) “전 세계 주요국의 부동산 가격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수준을 넘어서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발표한 ‘세계 주택시장 동향’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글로벌 실질 주택가격 지수’가 160.1로 집계돼 자료가 확보된 2000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이는 전 세계 주택가격이 최고점을 찍었던 금융위기 직전인 지난 2008년 1분기의 159.0보다 높다. / … / IMF 주택 가격 지수는 2008년 1분기에 정점을 찍었지만, 금융위기로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하락했다. 2012년 1분기 143.1까지 떨어졌다가 이후 꾸준히 회복했고 최근엔 3분기 연속 상승했다. 약 6년 전인 저점 대비로는 약 12% 올랐다. / 국가별로 보면 63개국 가운데 48개국에서 최근 1년간 주택가격이 올랐다. 홍콩이 1년간 11.8%나 올라 주택가격 상승률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유럽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아일랜드로 11.1% 올랐고 아이슬란드(10.4%), 포르투갈(9%)이 뒤를 이었다. 캐나다와 독일, 뉴질랜드도 각각 5%가량 상승했고 미국은 3.9% 올랐다. / 아시아에서 홍콩 다음으로 집값이 많이 뛴 나라는 태국(6.4%)이었고 중국 3.2%, 일본 1.5% 등의 순이었다.” (박은하 기자, “전 세계에서 치솟는 집값 … IMF ‘주택가격 역대 최고’”, ≪경향신문≫(인터넷판), 2018. 9. 10.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809101933001&code=920100>)

 

35) “최근 주요 국가 중심가들 부동산이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 첫 번째 영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런던 … 4년 전보다 18% 하락했다. / 두 번째 중국 베이징 … 5개월 만에 20% 하락했다. / 세 번째 호주 시드니 … 10개월간 5% 하락했다. / 하락하는 부동산에 공통점은 지난 몇 년간 가파르게 올랐던 국가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홍창수 기자, “뉴욕 런던 시드니 밴쿠버 베이징 세계 집값 하락세 서울만 급등세”, ≪Daily Times≫, 2018. 9. 13. <http://www.d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1>)

 

36) 사실, “집값 폭등”이라며 소동을 피울 때에는 이미 폭등의 막바지이다. 실제로 이 글을 쓰고 있는 10월 중순 현재, 극성을 부리던 ‘강남’의 집값도 그 기세가 꺾인 게 역력하다.

 

37) “주거권은 생존권의 일부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니고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한국의 도시 재개발 관련 법들이나 역대 정부의 주택정책은 중산층 자산형성의 목표를 내세웠으나 실제는 토건세력의 이익을 보장하였으며, 임대주택 확대 등을 통한 서민의 주거 보장은 언제나 후순위로 밀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집값 폭등, 청년과 촛불시민은 절망한다”, ≪한겨레≫, 2018. 9. 12.)

 

38)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781-782.

 

39) “지대는, 토지소유자가 지구의 한 조각을 임대함으로써 매년 징수하는 일정한 화폐액으로 나타난다. … 어떤 일정한 화폐수입이나 모두 자본화될 수 있다. 즉, 어떤 상상적 자본의 이자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평균적 이자율이 5%라면, £200의 연간 지대도 £4,000의 자본의 이자로 간주될 수 있다. 토지의 구입가격 혹은 그 가치를 이루는 것은 그렇게 자본화된 지대인데, 그것은, 노동의 가격처럼, 일견 불합리한 법주인바, 왜냐하면, 토지는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며, 따라서 어떤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불합리한 형태의 배후에는 하나의 현실적인 생산관계가 숨어 있다.”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636.)

 

40) 채윤태 기자, “그린벨트 풀어 집 늘렸더니 … 집값은 되레 올랐다”,
≪한겨레≫, 2018. 9. 21.

 

41) 전성필 기자, “분당・일산보다 서울 가까운 신도시 4-5곳 만든다”,
≪조선일보≫(인터넷판), 2018. 9. 21.

 

42) 채윤태 기자, 같은 기사.

 

43) “정부가 집값 안정 대책으로 서울 인근에 330만㎡(100만 평) 규모 신도시 4-5곳을 조성해 총 20만 가구를 공급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1980년대, 2000년대 초에 이은 3기 신도시다. 서울과 수도권에 중・소규모 택지도 17곳을 개발해 3만5000가구를 공급하기로 했다. 서울 도심의 주택 건축 요건도 완화키로 했다. … 정부가 대규모 공급 확대 카드를 꺼내 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집값을 잡는 데는 규제로 수요를 줄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주택 공급이 우선해야 한다. … 서울 강남이나 분당에 필적하는 경쟁력 있는 신도시를 지어야 한다.” (“[사설] 강남 수준 집이 계속 공급되면 집값 결국 잡힌다”, ≪조선일보≫, 2018. 9. 22.)

 

44) “최근 정부의 연이은 부동산대책으로 종합부동산세 등 보유세 강화로 인해 세금 증가분이 세입자에게 전가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 전문가들은 집주인이 세입자에 비용을 전가하기가 당장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임대사업자 제재강화에 전월세가격 치솟는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921_0000426449>, [2018. 9. 25.]); “당장은 쉽지 않을 것으로”!? ― 결국은 전가되고야 만다는 뜻이다!

 

45) 이 나라에서 누가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을까? 지대가 발생할 여지가 사실상 거의 없는, 따라서 ‘경제적 가치’가 별반 없는 국유림을 제외하면, 구차하게 통계를 동원할 필요도 없이 삼성이나 롯데를 비롯한 재벌들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소유한 그 엄청난 토지의 어느 것이 이른바 ‘토지공개념’ 상 문제가 되는가? 사실상 아무것도 문제로 되지 않는다. 이른바 ‘토지공개념’이란 다름 아니라 ‘비자본가적 토지소유’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46) “… 과잉노동자인구가 축적의, 혹은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의 부(富)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라면, 이 과잉인구는 거꾸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지렛대, 아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생존조건(Existenzbedingung)이 된다. 그것은, 흡사 자본이 자신의 비용으로 육성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절대적으로 자본에 속하는,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산업예비군을 형성한다.”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661.)

 

47) 같은 책, S. 669-670.

 

48) http://www.greenkorea.org/?p=36488

 

49) https://prezi.com/viyg3gokjmmd/presentation/

 

50) “마르크스 사상은 과연 세상을 구할 것인가? [좌담] 위기의 시대, 마르크스의 눈으로 세상 보기”,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362 (2012. 2. 13.)

51) 같은 곳.

 

52) 연합뉴스, “자본주의 파산선고…‘정치적 생태주의 바로세워야’”,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412971 (2015.04.30.)

 

53) ≪자본론≫ 제1권, MEW, Bd. 23, S. 57-58. (채만수 역, 같은 책,
제1분책, pp. 77-78.)

 

54) MEW, Bd. 23, S. 192. (채만수 역, 같은 책, 제2분책, p. 298.)

 

55) 필시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이 그의 소부르주아적 시각으로는 그렇게 “‘돈벌기’에만 급급한” 것으로, 그리하여 자본가의 “지배질서 속에서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일단 그렇게 보이게 되면,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과 공모관계에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논리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56) MEW, Bd. 23, S. 528.

57)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97.

58) 같은 책, S. 820-821.

59) 같은 책, S. 784.

 

60) 물론 부르주아 경제학계의 반응・평가는 나와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이렇게: “800쪽이 넘는 두터운 책 한 권, 그리고 얇은 별책 부록이 함께 배달됐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다. 영어로 한번 읽었고 출판사의 배려로 가제본을 또 한 번 읽었지만, 피케티 말마따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데 다다른 극도의 불평등 현상을 이해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선 몇 번이고 되짚어 보아야 할 책이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피케티와 사회적 경제”, ≪한겨레≫, 2014. 9. 17.)

 

61) 박치현 기자, “[토마 피케티] 불평등은 어디에서 오는가?―[특집] ≪21세기 자본≫ 번역본 출간 및 피케티 방한 토론회 개최”, ≪대학신문≫, 2014. 9. 21.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167>)

 

62) 피케티 저, 장경덕・유엔제이 역, 이강국 감수, ≪21세기 자본≫,
글항아리, 2014, p. 61.

 

63) 같은 책, pp. 12 이하.

 

64) “요컨대 마르크스는 자본의 가격과 희소성의 원리에 관한 리카도 모형을 자본주의 동학에 대한 더 철저한 분석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 시대에 자본은 토지 관련 부동산이 아니라 주로 (기계와 공장을 비롯한) 산업자본이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자본의 양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사실 그의 주요 결론은 ‘무한 축적의 원리principle of infinite accumulation’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다. 즉 자본은 계속 축적되면서 갈수록 소수의 손에 집중되는 움직일 수 없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 아무런 자연적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파멸을 예언한 근거다.” (같은 책, p. 18.)

 

65) 같은 책, p. 19.

66) 같은 책, p. 40.; 미국어판, p. 27.

67) 같은 책, p. 08.; 미국어판, p. 1.

 

68) 같은 책, 69) 같은 책, p. 617.; 미국어판, p. 515.p. 6, “일러두기”.

 

70) “이 유통과정은 바로 본원적인 가치생산의 관계들이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나는 영역이다.”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835.) “그리하여 토지소유, 자본 그리고 임금노동은, 자본가가 노동으로부터 뽑아내는 잉여가치의 일부를, 자본은 자본가에게 이윤의 형태로 끌어당기고, 대지의 독점은 토지소유자에게 다른 일부분을 지대의 형태로 끌어당기며, 노동은 노동자에게 최후의, 그러나 처분 가능한 가치부분을 임금의 형태로 차지하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소득의 원천으로부터, 즉, 그것들에 의해서 가치의 한 부분이 이윤의 형태로, 제2의 부분이 지대의 형태로, 그리고 제3의 부분이 임금으로 전화되는 원천으로부터, ― 그것들로부터 이 가치부분들 자체 및 그 가치부분들이 존재하거나 그 가치부분들과 교환될 수 있는 바의, 생산물의 관련 부분들 자체가 생기는, 그리하여 궁극적인 원천으로서의 그것들로부터 생산물의 가치 자체가 생기는 현실적인 원천으로 전화된다.” (같은 책, S. 834.)

 

71) 피케티, 같은 책, p. 53.

72) 같은 책, p. 119.

 

73) “노동자들 사이(일반 노동자, 기술자, 관리자들 사이)와 자본소유자들 사이(소주주, 중간 규모의 주주, 대주주, 지주들 사이)의 소득불평등 문제는 …”(같은 책, p. 53.)

 

74) 맑스, ≪고타 강령 비판≫, MEW, Bd. 19, S. 22.

 

75)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885.

 

76) “속류 사회주의는, 분배를 생산양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unabhängig)고찰・취급하고, 그리하여 사회주의가 주로 분배를 중심으로 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로부터 (그리고 일부 민주주의자는 다시 속류 사회주의로부터) 물려받았다.” (≪고타 강령 비판≫, 같은 곳.)

 

77) K. 맑스, “경제학 비판을 위한 서설”, MEW, Bd. 13. S. 628.

 

78) F. 엥엘스,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의 변혁 (반뒤링론)≫, MEW, Bd. 20, S. 173.

 

79) 피케티, 같은 책, pp. 55-56.

 

80) 같은 책, pp. 617 이하.; 미국어판, pp. 515 이하.

 

81) “2015년 1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전미경제학회에서는 그 유명한 ‘맨큐-피케티 논쟁’이 벌어졌다. 피케티는 자신을 심하게 몰아치는 하버드대학의 그레고리 맨큐를 향해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응수했다. ‘부자들은 옷이나 음식만 사는 게 아니라 정치권력이나 경제학자마저 산다.’” (주상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국민경제자문회의 거시경제분과 의장, “[세상 읽기] 한국에 오는 토마 피케티”, ≪한겨레≫, 2018. 10. 12.) ― 지금 인용한 이 칼럼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피케티 역시 현대 국가가 자본의 국가임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보수진영은 피케티의 방한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운운하면서 진보적임을 자임하는 이 칼럼의 필자가 위 인용문에 이어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대공황 당시에 자본주의를 구하려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총수요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바 있다”며, “21세기의 피케티는 자본이 가진 무소불위의 힘을 적절히 조절하고 분배 개선에 노력을 기울여야 자본주의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쓸 때, 그리하여 사실상 그에 동의의 뜻을 표할 때, 자신이 어떤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처럼, 피케티 역시 그러한 자가당착을 인식할 능력은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82) “근대 국가는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든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기관이고, 자본가의 국가이며, 관념상의 총자본가다. 더 많은 생산력을 국가가 자신의 소유로 떠맡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현실적인 총자본가로 되고, 더욱더 많은 국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이다. 자본관계는 지양되지 않고, 오히려 절정으로 내달리게 된다. 그러나 절정에 오르면 그것은 급변한다. 생산력의 국가적 소유는 충돌의 해결은 아니지만, 해결의 형식적 수단, 즉 손잡이를 숨기고 있다.” (F. 엥엘스,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MEW, Bd. 19, S. 222.)

 

83) 참여연대 참여사회연구소기획, 김대환・김균 공편의 ≪한국재벌개혁론≫(나남출판, 1999)이 간행되었을 때, 나는 ≪독서신문≫의 요청으로 ‘서평’을 기고하면서 그 제목을 “황금신(黃金神)의 경전”이라고 붙인 적이 있는데, 이른바 ‘개벌 개혁론’・‘재벌 해체론’의 객관적 의의에 관해서는, ≪노동자교양경제학≫(제6판), pp. 567-570을 참조하기 바람. 참고로, ‘진보적이기 그지없는’ 저 ≪한국재벌개혁론≫ 속의 한 구절만 소개하자면, ― “사실 재벌의 창업주는 분명히 professional manager이다. 재벌 창업주는 정치권 로비 능력이나 노동자 억압능력까지 포함하여 어쨌든 효율성면에서 남보다 우수했던 전문능력가임이 틀림없다.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좋다고 해서 이를 유능한 창업총수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김기원, “재벌체제의 지양과 책임 전문경영체제의 구축”, ≪한국재벌개혁론≫, p. 196.) 그리고 오늘날 극우정당들과 극우언론이 ‘참여연대’ 출신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앙앙불락하고 있는 여러 경제정책들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가 없지 않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경실련’ 출신들이 놀던 꼴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없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84) 피케티, 같은 책, p. 128.

85) 같은 책, p. 129.

 

86) 기업의 파산은 직접적으로는 지불불능 때문이다. 이에 현대 부르주아 국가가 불환의, 따라서 금태환의 의무를 지지 않으면서도 강제통용력을 가진 통화의 증발(增發)을 통해서, 직접적으로는 지불불능에 빠진 독점자본을 구제하고, 즉 그들의 어음을 막아주고, 간접적으로는 공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공황의 충격을 완화하려는 게 소위 관리통화제도의 동기고 목적이다. 따라서 관리통화제도 하에서는 인플레이션은 필연적이다.

 

87) 같은 책, p. 37.; 미국어판, p. 25.

88) 같은 책, p. 39.; 미국어판, p. 25.

89) 같은 책, p. 119.

 

90) 저 앞에서 “식민지에서와 그 본국에서의 사상 탄압・통제의 강도의 차이”에 대해서 얘기했지만, ≪자본론≫의 과학성・혁명성에 대한 자유 대~한미국의 공포는 바로 일제시대의 ‘외지’가 가졌던 것과 같은 정치적・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취약성 때문에 더욱 무서운 그것이었을 것이다.

 

91)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1844), MEW, Bd. 1, S. 385. (최인호 역,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p. 9.)

 

92) MEW, Bd. 25, S. 885.

 

93)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전제이기 때문에 …” (MEW, Bd. 23, S. 374.)

 

94) MEW, Bd. 23, S. 16.; 채만수 역, 제1분책, pp. 17-18.

 

95) 같은 책, S. 167-168.; 채만수 역, 제2분책, pp. 254-255.

 

96) 같은 책, S. 286.; 채만수 역, 제2분책, p. 449.

 

97) 같은 책, S. 790.

 

98) 같은 책, S. 790-791.

 

99) “…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물질적 준비이고, 사회주의의 직접적인 전단계(前段階, Vorstufe)이며, …” (레닌,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Lenin Werke, Bd, 25, S. 370.)

 

100) 피케티, 같은 책, p. 19.; “Marx totally neglected the possibility of durable technological progress and steadily increasing productivity, which is a force that can to some extent serve as a counterweight to the process of accumulation and concentration of private capital.” (영어판, p. 10.); 뿐만 아니라 피케티는 이렇게도 말한다. ― “19세기와 20세기 초 모든 경제학자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머릿속에는 생산성의 영구적이고 지속적인 향상에 의해 추동되는 구조적 성장이라는 개념이 명백히 정립되거나 공식화되어 있지 않았다. 그 당시 암묵적인 가설은 생산의 증가, 특히 제조업 생산의 증가는 무엇보다도 주로 산업자본의 축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다시 말해 더 많은 생산은 각각의 노동자가 더 많은 기계와 설비를 이용했기 때문이지,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 자체가 증가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생산성 증가만이 장기적인 구조적 성장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시대에는 역사적인 관점과 좋은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다.” (피케티, 같은 책, p. 275.) 무엇보다도, “각각의 노동자가 더 많은 기계와 설비를 이용”한다고 하는 것은 생산력 증대의 조건이자 그 표현이다. 그런데도, “더 많은 생산은 각각의 노동자가 더 많은 기계와 설비를 이용했기 때문이지, 노동과 자본의 생산성 자체가 증가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생산성 증가만이 장기적인 구조적 성장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짖고 있다고 하면, 좀 거칠긴 하지만, 지나친 표현일까?

 

101) 같은 책, p. 119.

 

102) 같은 책, p. 19.; 같은 곳에서 피케티는, 맑스는 “그는 분명히 대단한 정치적 열광의 풍토 속에서 글을 썼는데 이 때문에 때로 성급하게 지름길을 택해야 했으며, 이것이 훗날 그의 발목을 잡게 된다. 경제 이론이 가능한 한 충실한 역사적 자료에 뿌리를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이런 면에서 마르크스는 그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이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지껄이고 나서는, 거기에 다음과 같은 후주를 붙이고 있다. ― “때때로 그는 입수할 수 있었던 최선의 통계를 활용하려 했지만(이는 맬서스와 리카도가 이용할 수 있었던 것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매우 초보적인 것이었다), 언제나 그의 이론적인 주장과 명료하게 연관을 짓지도 않은 채 보통 전체적인 인상만 보는 식으로 활용했을 뿐이다.” (같은 책, p. 702.) 그러나 그가 여기에서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은, 맑스는, 피케티 자신처럼, (그리고 한국에서는, 예컨대, 자칭 “진정한 마르크수주의 전통의 수호자” 정성진 교수님처럼) 부르주아 통계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가공・나열하지 않고, 그것들을 선별적으로, 비판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103) “공산당 선언”, MEW, Bd. 4, S. 465.; 최인호 역, “공산주의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4권, p. 403.

 

104) MEW, Bd. 23, S. 510-511.

 

105) MEW, Bd. 23, S. 336; 채만수 역, 제3분책(근간), pp. 527-528.

 

106) MEW, Bd. 23, S. 337-338.; 채만수 역, 같은 책, p. 530.

 

107) F. 엥엘스,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1880), MEW,
Bd. 19, S. 217.

 

108) 김정훈 기자, “기업은 성장해도 일자리가 없다”, ≪조선일보≫, 2008. 3. 14.

 

109) 가마타 사토시(鎌田 慧), ≪極限の合理化工場: ロボット時代の現場≫, 東京: 三一書房, 1982, p. 127.

 

110) MEW, Bd. 23, S. 462.

111) MEW, Bd. 23, S. 466.

112) MEW, Bd. 23, S. 671.

113) MEW, Bd. 23, S. 473.

114) MEW, Bd. 23, S. 476.

115) MEW, Bd. 23, S. 662.

 

116) MEW, Bd. 23, S. 673-674. [* MEW에는 “반비례한다(im umgekehrten Verhältnis … stehen)”으로 되어 있으나, 저자가 교정한 프랑스어판(Le Capital: Critique de L’Économie Politique, Livre Premier, Éditions du Progès, Moscou, 1982, p. 612)에 따라 “정비례한다(être en raison directe …)”로 수정했다.]

 

117) MEW, Bd. 23, S. 670.

118) MEW, Bd. 23, S. 471.

119) ≪자본론≫ 제3권, MEW, Bd. 25, S. 274.

 

120)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의 역사적 임무이자 정당성(Berechtigung)이다. 실로 그에 의해서 자본은 무의식 중에 보다 고도의 생산형태의 물질적 조건들을 창출한다.” (MEW, Bd. 25, S. 269.)

 

121) MEW, Bd. 23, S. 791.

 

122) 같은 책, S. 828.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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