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대담] 노동자 문예 창작 과정에서의 형식의 문제(박현욱, 최상철)

 

정리 ∣ 최상철(노동사회과학연구소 운영위원)

 

 

본문은 “노동자 문예 창작 과정에서 형식의 문제”를 주제로 <노동자 문화예술단 선언 “몸짓 선언”>(이하 <선언>으로 표기) 박현욱 동지와 진행한 대담을 풀어서 재구성한 것이다. 대담은 한 차례에 끝난 것이 아니며, 화제를 바꾸어가며 수차례 이어진 것이다. 정리 과정에서 되도록 실제 발언을 살렸으나 논리적 흐름에 따라 재구성했다. 부족한 부분은 박현욱 동지를 비롯한 <선언>동지들과 협의하여 재서술하였다.

본 주제는 이런 식의 대담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실제 문예 운동 과정에서 부딪치는 몇몇의 쟁점에 관해서만 다룰 수밖에 없었고, 분명한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예 운동가들이 당면하는 고민을 정리한 글이 많지 않기에 이 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최소한 타산지석이 될 수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새로운 문예 운동론을 작성하기 위한 시론이 될 수 있기를, 또 부디 다른 곳에서도 이런 식의 논쟁이 생산적으로 이루어져서 실제 운동의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에 담긴 사진은 박현욱 동지께서 직접 보내주신 것이다.)

 

 

박현욱(이하 욱): 동지가 문예운동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알고 있지만 대담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좋겠다.

 

최상철(이하 철): ≪정세와 노동≫과 이론지 ≪노동사회과학≫을 통해서 습작과도 같은 글을 써보고 또 부족한 솜씨로 번역도 해오고 있는데, 이는 나름대로 맑스-레닌주의적 예술론의 재구성의 길을 찾아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내 작업은 자족적인 것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기에 자기반성을 하고 있다. 이론이 중요하지만 자칫 담론의 형성에만 목을 매다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 문예를 매개로 실천활동을 하는 동지들과 괴리될 우려도 크다. 현실 투쟁의 일보전진을 근거로 하여 논쟁이 펼쳐져 온 것이 운동의 역사인데, 거꾸로 가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우려도 많았다.

원래 이번 ≪노동사회과학≫ 제4호에는 1980년대 소위 ‘뽕짝 논쟁’을 재조명하여 그 한계를 조명하고 그 이후 민중가요에 록음악 도입에 대한 논쟁을 거론하며 글을 이어가려 했다. 그래서 현재의 사실상 무논쟁의 시대,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적 문예 운동이 자본주의 상업대중음악의 압도적인 힘에 눌려있는 상태에 대해 분석해 보고 싶었다.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노동자 문예창작에 있어 형식의 문제를 논쟁적으로 제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활동가의 현실적인 욕구를 총족시킬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동지와 대담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따라서 이론적인 내용보다는 실천과정에서 직접 대면하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이끌어가고자 한다. 대담이라고는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내가 묻고 동지가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 같다.

 

욱: 노동자계급 문예 창작에 있어서 형식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이론작업은 분명히 유의미한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초 동지의 구상대로 집필을 하였다면 아마도 <선언>의 실제 활동에는 큰 반향을 주기는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대담을 이론지에 싣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정세와 노동≫이라면 어떨지는 몰라도.

 

철: 이론지 편집회의를 통해 집필이 아닌 대담 형식의 구성으로 바꾸어 보는 것은 어떨지 동의를 구했다. ≪노동사회과학≫에 대담이나 인터뷰 형식의 글이 실린 적이 없기에 다소 파격적인 제안일 수는 있지만 편집진들이 동의했다. 이론지에 실리는 글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실제 운동을 긴밀하게 반영하여 다시 실천활동에 반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 문예창작 문제에 관해 자기 정리도 필요했고 문예 활동가의 직접적인 조언도 필요했다. 이는 한 두 차례의 대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에 이번 대화에서는 그저 문제를 꺼내는 수준에서만 다루는 내용도 많을 것이다. 그래도 처음부터 배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작을 해보았으면 한다.

 

욱: 음악 형식을 화두로 꺼내자면 특정한 음계나 조성 혹은 장르에 계급성이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부르주아 상업문화에서 먼저 적합한 형식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계급적 문예 창작이 형식 그 자체에 의해 제한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철: 기본적인 판단에 동의한다. 민족어에 계급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노동자 계급에게 특정 장르가 수용되어 온 역사성이 있고, 특히 그것은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 왜곡된 바가 크다. 특히 뽕짝에 대해 언급한 것은 청산되지 않은 일제시대라는 조건이 있고, 한국사회 지배계급이 뽕짝의 체념적인 또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서를 적극적으로 우민화(愚民化)에 이용해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록 음악도 미제국주의의 정치적 영향력과 미군의 주둔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특정 형식을 절대로 쓰지 말자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한다.1)

 

욱: 내가 음악 전문가가 아니기에 제한된 발언이 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의 문예 창작은 상당히 목적의식적인 것이다. 민중가요에도 록음악, 트로트 아니면 복음성가적인 곡들이 굉장히 많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감성이나 생각을 움직이려는 방향으로 특정한 형식이 설정되었으리라는 것이다. 트로트의 체념적이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정서에 대해 말했지만, 트로트 내부에도 세부적인 갈래가 있기에 모든 트로트가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다고 본다.

 

철: 동의한다.

 

욱: 우리의 운동에서 문예는 상당히 감성적인 특성이 있다. 그러함에도 역사발전에 조응하는 과학성을 충분히 담지해야 한다. 이를테면 록음악에는 장점이 있지만 형식적인 특성에서 몰과학성을 강조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철: 이를테면 반지성주의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인가?

 

욱: 그렇다.2) 형식적인 측면에서 우려할 지점이 있기에 고민이 되는 점도 있다. 동지와는 달리 트로트나 록이 가진 장르의 역사성에 대한 부분을 고찰하면서 우려되는 지점을 고민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그 형식으로 창작을 하거나 시연을 할 때 그 형식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을 우선시 한다.

 

철: 여기서 창작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현욱 동지와 나 사이에는 각자의 처지에 의해 규정되는 입장에 차이가 있는 것 같다. 1980년대 뽕짝논쟁을 화두로 꺼낸 것은, 당시 이영미 선생을 비롯한 젊은 논자들이 이끌어 낸 이른 바 ‘민중문화’에 대한 담론의 유의미성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 논쟁은 ‘민족문화’ 대 ‘외래문화’라는 다소 도식적인 구도 하에서 진행되었지만, 외래의 대중예술 형식 수용 문제를 제기하며 큰 반향을 불러왔다. 또 트로트의 기원을 조명하며 이것이 전통적 형식이 아님을 밝혀내며 ‘왜색문화’에 대해 비판한 것도 의의가 있다.3) 하지만 ‘뽕짝’ 형식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들은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인 관점에서 논쟁에 임하기도 했다. 똑같은 비판의 잣대가 서양의 것,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록이나 재즈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적용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왜색문화’를 몰아낸다는 이름으로 ‘양키문화’로 획일화시켜 놓았다고 혹평한다. 당시 논쟁 참여자 중에서 이영미 선생의 논지가 상당히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와 트로트 형식의 유입에 대해서 설득력 있게 밝히면서도 감정적인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외래문화 수용에 있어서도 비판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럼에도 이 논쟁은 노동자 계급적인 입장에서 진행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겠다.

 

욱: 과거 역사에서 어떤 형식이 지배계급의 의도에 따라 굴절된 바에 대해 당연히 고민한다. 그런데 거기에 구애받아서 형식 수용을 경직된 방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지배계급의 의도는 의식적으로 배척하면서도 형식이 지니는 강점은 취하고 재해석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색문화, 양키문화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문화에서 국제주의(internationalism)적 보편성을 추가해야 한다고 본다. 

 

철: 사회주의자는 국제주의자이어야 하며 문화에서도 국제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다만 그 국제주의라는 것이 이른바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이 된다면 현재에 있어서는 할리우드와 팝음악으로 대변되는 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지배하는 미제국주의 문화로의 평균적 수렴이라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 담론이 등장하던 시기에 민족적인 형식으로 계급적인 내용을 담는 방식을 취한 것은 당대에 분명한 유의미성을 지니는 것이었다. 쏘련에서 그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재즈와 록 음악에 반대했던 것은 경직된 방식이라 비판받을 수는 있고, 또 지금도 그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민족적인 것에 계급적인 내용을 담는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 각 민족적 형식이 지닌 국제적인 보편성을 밝혀내는 작업도 중요하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노동자 계급의 형식은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각국의 노동자 계급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욱: 각 문화의 상대성을 포기하고 주류에 쏠리는 식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또 보편성만을 강조하여 개별자들의 개별적 특수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편성을 취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을 때 그 형식이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적은 형식이 아니라 지배계급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철: 그렇다. 민족적 형식이라는 것도 새롭게 고민이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세계를 통합해내고 있고, 이전 같으면 각국의 고립적이며 개별적인 현상에 그쳤을 것들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문화에 있어서 민족적 형식 그리고 세계적 보편성이라는 것도 새롭게 고민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욱: 지배계급이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문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러다이트 운동처럼 기계를 적으로 설정한 오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지배문화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문예운동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직접 대면하여 당당히 맞서 싸우는 투쟁이라 말하고 싶다.

 

철: 어찌되었든 현재는 형식 논쟁 혹은 형식 수용의 논쟁이 과거와 거의 단절되어 있다.

 

욱: ‘논쟁’이 단절되었다는 것인가?

 

철: 물론 이 논쟁은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뽕짝논쟁과 같은 것은 1990년대 잠깐 있었던 록 음악 수용논쟁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욱: 그렇다. 1993년도 <천지인>이 등장했을 때 상당히 많은 논란이 있었다.

 

철: 그런데 대중음악 사전심의제도 철폐가 대중적 화두로 오르고 나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1995년도에 한양대학교 노천극장에서 <메이데이> 같은 민중 지향적 록밴드를 포함하여 <시나위>, <블랙홀> 록밴드와 <조국과 청춘>과 같은 민중가요 팀이 “자유”라는 주제 하에 모여 대중음악 사전심의제 철폐를 주장하며 공연을 했다. 이 시기를 분기점으로 록음악은 민중가요 내에서도 일종의 ‘시민권’을 획득했다고 본다. 심지어 과거 민중가요가 거의 군가풍의 행진곡이었던 것에서 이제는 많은 경우 록음악 풍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 80년대에는 ‘하드록=미제의 함성소리’ 식으로 상당히 경직된 비판이 있었고, 반면에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록음악을 비롯한 대중음악 형식 수용에 있어 상당히 무비판적이다. 논쟁도 별로 없고 창작도 답보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로 음악을 들고 있지만 이는 현재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와 집회 문화의 단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공격적인 발언이지만 현재 집회 문화는 실용적인 방식으로 그때 그때 대처하는 식으로 구성되는 것 같다. 직면하는 상황에 대한 대처도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장기적인 전망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욱: 공격적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하는데 공격적인 질문이나 발언 환영한다. 문제의식에 공감은 하는데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나보다는 음악 창작을 실제로 하는 동지들과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래도 주제넘게 이야기하자면 창작물이 많이 나오지 않은 것은 논쟁이나 고민의 지점이 풍부하지 않다는 것 이전에 운동의 토대, 운동 전체적인 지형변화와의 관계가 보다 일차적인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80년대에도 그렇고 90년대에도 여전히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운동과 노동계급의 운동이 병존하는 가운데 문화에서는 양쪽의 당파성이 뭉뚱그려진 형태로 함께 존재했다. 이런 것이 당시의 민중문화였다. 르네상스 시기라 할만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90년대 초반에 이르는 당시 문화를 가능하게 했던 노동자 운동의 폭발성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한 근본적인 조건의 변화 때문에 논쟁의 주체도 별로 없고, 치열하게 전개할 여건도 충분치 않다. 각개약진하는 상황은 비단 <선언>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농담 삼아 나 스스로를 순리주의자라고 부른다. (허허.) 혁명도 순리에 따르는 것이다. 문예 활동가들의 비주체적인 측면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논쟁이 절박한 상황이었다면 치열한 담론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문예 활동과 관련된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토론회나, 표현이 좀 우습지만 공개적인 학술제가 없었다. 이런 것과 함께 실제 문예 주체들의 정책적인 접근이 상당히 절실할 수밖에 없는데 아직까지 큰 의식변화가 없다. 노동법 개악, 비정규직, 노동 유연화, 신자유주의 등의 주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토론회가 이어진다. 나는 문예에 대해서도 토론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장을 다니면서 계급문화, 민중문화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주로 그런 것들을 교육하지만, 공개적인 토론회 등의 조직적인 논의는 현재까지는 뒷전으로 밀려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현재의 수준이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철: 문예에 대한 고민은 현실 운동과 따로 떨어져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현실운동의 전진과 문예 활동의 전진은 함께 상호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 한 번의 대화로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군가가 올라설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야기가 자칫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전개될 우려가 있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개인적인 질문일 수도 있지만 실제 창작 과정에서 부딪치는 고민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보자. 뽕짝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면 <선언>이 집회판에서 음악을 매개로 한 대중 선동을 할 때 트로트 풍의 곡조를 활용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이에 대한 고민을 듣고 싶다.

 

욱: [기름밥 청춘], [사람이 태어나]4), [동지의 길]과 같은 곡들이 대표적이다. 사실 트로트는 개인적으로 썩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웃음) 그러함에도 부르고 있다.

[사진 1] 2010년 여름 양재동 동희오토 농성장에서.

 

철: (웃음) 그렇다면 왜 불러야 한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욱: 우리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는 있지만, 대중 집회 공간에서는 대단히 자세하고 섬세한 문예적 표현을 해내기가 상당히 힘들다. 이 공간은 문예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이 아니라 집회와 투쟁을 위해 온 사람들의 열린 공간이다. 몸짓 공연을 할 때와 다르게 이런 곡들을 활용하는 것은,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들을 수동화․대상화하는 집회 문화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한다. 집회는 참가자들이 주인이며 이들이 만드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조직 노동자들이 명령을 통해 동원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동원되어 앉아 있다가 무대 위에서만 이뤄지는 모든 것을 ‘구경’만 하다가는 집회를 벗어나고자 한다. 어떤 식으로든 참여를 유도하려 한다. 문예팀은 공연자가 되고 집회 참여자들은 일방적인 수용자가 되는 구조를 어떻게든 깨고 싶다. 무대 위에서 모든 예술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모인 군중의 예술을 지향하는 전제 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을 배우고, 전달하고 같이 만들어 내려 하고 있다.

그랬을 때 집회 중에 그 한 꼭지를 위해 주어진 시간은 길어도 겨우 5분이다. 그 5분 안에 할 수 있는 문예적 표현을 위해서는 일단 곡 길이가 짧아야 하며, 멜로디와 리듬도 쉬워야 한다. 음계를 매우 복잡하게 써서 변조가 된다거나, 박자도 변박을 쓴다거나 하면 곤란하다. 음역도 넓지 않아야 하고 부르기에 불편함이 없어야 한다. 집회에 참여하러 온 사람들은 전문적인 공연에 참가하러 온 이들이 아니다. 그런 이들이 수용할 때 부담이 없는 형식을 같춘 장르를 선택하게 되는데, 아직까지는 뽕짝이 대세다.

 

철: 질문을 던져 보겠다. 스스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형식을 시연해야 한다면 창작자 혹은 공연자의 주체성이 퇴행된다고 보지는 않는가? 예술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가?

 

욱: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내가 예술적으로 깊이 있는 활동가가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철: 그렇다면 달리 질문해 보겠다. 실제로 창작자 공연자가 좋아하면서도 대중들이 쉽게 따라할 수 있으면서도 대중들의 능동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교육적인 효과도 담아 낼 수 있는 형식이 있다면 가장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욱: 그렇긴 하다. 당연히 아쉬움이 있다. 언급한 곡들보다 더 풍부하고 나은 곡이 있다면 당연히 그런 곡들을 선택하고 싶다.

 

철: 적절한 예가 아닐 수 있지만 서양 대중음악의 예를 들어보고 싶다. 초창기 재즈의 경우 쉽게 몸을 움직이며 춤을 출 수 있으며 수용자들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음악이었다. 그러던 재즈 음악이 발전을 하면서 연주자 중심의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감상음악이 되었다. 그러면서 재즈 연주자들은 클래식 연주자처럼 학구적이 되어 갔고 점점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이러던 시기에 브라질에서 건너온 보사노바가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는 화성과 박이 단순하지 않으면서도 대중들이 쉽게 흥얼거릴 수 있는 선율의 음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보사노바는 연주자와 수용자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었기에 남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우리의 경우와 다른 이야기지만 창작자들의 욕구도 만족시키며 대중들의 능동성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도 같이 있는 형식을 찾아간다면 더욱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욱: 맞다. 문제의식에 공감한다. 우리 팀도 가끔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때가 있는데, 보사노바 편곡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이것도 좀 그런데, 트로트와 마찬가지로 보사노바도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건 취향의 문제다. (웃음) 한국의 대중들에게 보사노바는 흥이 막 난다거나 받아들이기 쉬운 형식은 아닌 것 같다.

다시 집회 문화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실제로 표현해야 하는 대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편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음계 같은 것들… 아직까지는 대중들에게 뽕짝이 제일 쉽고 시연하기 용이하다. 아니면 준트로트 혹은 세미뽕짝 형태가 전문적이지 않은 대중들이 같이하고 부르기에는 익숙하고 편한 곡들이 좋다.

 

철: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전국 노래자랑>의 막강한 위력을 보아하면 그렇다. 어떤 이는 이를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든 프로그램으로 꼽기도 한다. 또 얼마 전의 3․8 여성의 날 집회에서 여성 청소용역 노동자들이 무대에서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로 스스로의 현실을 풀어내었는데 역시나 뽕짝의 가사를 바꾸어서 부르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매향리 투쟁에서 [소양강 처녀]의 가사를 바꾸어 부른 것도 그렇고 콜트-콜텍 노동자들도 그랬고, 사례는 찾아보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노동자 대중이 주체가 되는 문화판이 트로트 곡을 소재로 한 ‘노가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길 바라는 점에서 큰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뽕짝 풍 투쟁가요 [기름밥 청춘], [사람이 태어나], [동지의 길]같은 곡들은 남성 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에서 부르기 좋은 곡들인 것 같다.

 

욱: 그것도 고민이다. 이것들은 다 예전 곡들이다. 김호철 동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요즘엔 뽕짝 풍의 창작이 많지 않다. 김호철 동지 같은 경우 대단히 남성적인 곡들을 많이 써왔다. 그런데 대단히 섬세한 감성이 담겨있는 [들불의 노래]와 같은 예외도 있다. ‘팍팍 쓸어버리자’5), ‘포크레인 삽날로’6), ‘해골 두 쪽 나도’7) 그런 가사를 쓰던 사람이 ‘밤새 내렸던 빗물에 젖어’로 시작하는 [들불의 노래]와 같은 곡을 만들어서 모두를 놀라게도 했다. 아무튼 민중가요가 목적의식적으로 많이 불려지게 된 것은 1987년 이후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전면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조건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조건 때문에 김호철로 대표되는 남성적 목소리의 민중가요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지금 향유하고 있는 민중문화도 이 시기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조직화된 중화학공업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은 엄청난 물적토대를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 시기 그들은 운동적으로 지탄도 받고 있고, 특히 많은 투쟁가의 동기가 되었던 현대 중공업 노조 같은 경우에는 어용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투쟁가는 그것이 창작되던 시기의 운동의 지형에서의 한계를 담고 있다. [단결투쟁가]도 정말 노동 현장에서 많이 부르는 곡인데 작시를 한 백무산은 최근 우경화된 정치 행보를 걷고 있기도 하다. 

남성 사업장 정서의 곡들을 일부러 고르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현재 <선언>은 그런 정서를 극복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노래나 문예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곡들을 활용하다보니 그런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 곡을 바꾸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를테면 젊은 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에서는 [가야하네]8) 그리고 상대적으로 여성적인 목소리도 낼 수 있는 [동지의 길] 같은 곡들을 활용한다.

 

철: 노래에 있어서는 실제 창작을 하는 것보다 기존에 있는 곡들을 활용한다고 하였지만 현욱 동지는 몸짓 말고도 작사와 같은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선언>활동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본다.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동지가 직접 작사를 하고, 지민주 동지가 노래를 부른 [길 그 끝에 서서]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이른 바 캠페인송 같은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형태는 아니라고 이전에도 이야기 한 바 있다. 그런데 가사를 쓸 때는 가사에 맞는 곡조를 당연히 염두에 두면서 작업을 했으리라 예상한다. 이 곡이 나온 배경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욱: 가사를 쓸 때는 당연히 곡 형식도 염두에 둔다. 빠르기는 미디엄 템포를 예상하고 가사를 쓴 것이다. 그러나 결과물이 나오는데 개인적인 구상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니다. 여럿이 창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철: 그렇다면 집단 창작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인가?

 

욱: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작사를 하면서 이 곡은 대강의 멜로디가 이랬으면 좋겠고, 미디엄 템포(모데라토 정도)로 갔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전했다. 실제 미디엄 템포의 멜로디 라인을 만든 것은 지민주 동지가 하신 거고, 실제 편곡은 다른 밴드9)가 했다. 집단 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함께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착상에서부터 전체의 의견을 모으고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편곡하는 동지들에게 의뢰를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비트가 강하게 나왔다.

 

철: 그렇다면 일종의 분업화의 방식으로 창작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욱: 그렇게 보는 것도 괜찮겠지만… 창작이 팀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내부의 여러 논의를 거쳐서 했을 것이다. 이 곡은 지민주 동지의 곡이고 프로듀싱은 또 다른 팀에서 담당했다. 작곡을 했다고 할지라도 편곡의 영역이 있고 이는 어느 정도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철: 앞에서 이 곡을 캠페인 송 갔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나도 어린 시절에 80년대를 겪어보았기 때문에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같은 곡들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리 선호하는 곡은 아닌데,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이 [길 그 끝에 서서]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소 갈등을 하기도 했다.

 

욱: 딱 [아 대한민국] 같은 곡을 의도한 것이다. 아니면 80년대를 겪은 사람이 알만한 [은하철도 999] 주제가 같은 것들. 사실 [길 그 끝에 서서]는 예상보다 반응이 많이 좋았다. 특히 전교조 선생님들이나 공무원 노동자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많이 봤다. 물론 생산직 노동자들에서도 반응이 좋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민주당 놈들이 노래 너무 좋다고 이 노래 써도 되냐고 물어오기도 했단다. 그래서 가사를 쓴 입장에서 불쾌했다. 어쨌든 상철 동지는 왜 사람들이 이 곡을 좋아할까 의문이라고 하는데 동지의 정서는 대중적인 것보다는 독특한 것 같다.

 

철: 그렇다. 인정한다. (웃음)

 

욱: [아 대한민국]을 염두에 두었다는 말은 캠페인 송이 가지는 장점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즉 곡을 불렀을 때 이를 듣는 사람들에게 곡조나 가사가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화성이 급격하게 바뀐다거나, 멜로디 라인이 낯설지 않아야 하며 엄청나게 실험적이면 곤란하다. 사실 [길 그 끝에 서서]는 직접 부를 때 그리 쉬운 곡은 아니다. 잘 부르려면 어려운 노래지만 적당히 부르려면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 [아 대한민국]이 딱 그런 곡이다. 그런 곡들이 흥얼거리기도 좋고 널리 퍼진다.

[길 그 끝에 서서]에는 구체적인 당파성을 담은 어휘가 없다. 일부러 다 뺐다. 노동자, 철거민, 장애인 등등 투쟁하는 민중 누구나 자신의 문제로 공감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그랬다.

 

철: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이 곡에 대해 좋은 반응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반성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꽉 막혀 있는 현실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고 싶어하는 동지들의 열망과 잘 호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욱: 이 곡의 가사를 쓴 것은 지금 활동하고 있는 친구에게 해 주고 싶었던 편지를 가사로 쓴 것이다. 그 자리에서 해 주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하고 곡으로 썼다. 이 친구는 정치적으로 올곧은 노선을 견지하려는 노동운동 활동가로 소수파라는 어려움에 힘겨워 했다. 굳건한 계급 해방적 관점을 지니고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전망을 고민하던 동지였는데, 현장이나 속한 조직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 옳은 투쟁이어서 이를 끝까지 밀고 나갔지만 물적인 조건이 뒷받침이 되지 않아 시련도 많이 겪었다. 비정규직화 반대한다고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조직하고 독려했지만 심지어 어떤 경우는 손배가압류 때문에 패륜아로 낙인찍히고, 구속되고는 노동자의 반응 때문에 상당히 힘겨워했다. 옳은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자니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한다면 운동하는 자신의 원칙에 맞지 않는 딜레마에 빠져 매우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졌다. “아, 다 포기하고 그냥 떠나고 싶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 친구에게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못했다. 

장기 농성장에 가서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외계인 같은 적이 있었다. 옳기 때문에 천 일을 넘게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 싸워도 안 되는 현실을 보면, 내 생각이 틀린 것이었나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런 고민을 현장 활동가들이 정말 많이 한다. 젊은 대공장 정규직 활동가의 이야기다. 선배 운동가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고 결심을 했고 실제로 비정규직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몸으로 옹호했다. 그런데 이 활동가가 같은 조합원 정규직에게 맞는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식당 노동자의 파업을 사수할 때가 그렇다. ‘비정규직 파업 좋지만, 밥을 안 주는 것은 누구를 위한 파업이냐’ 식으로 나왔다. 물론 구사대도 있겠지만 친한 노동자가 그렇게 쳐들어 왔을 때 휘두르는 주먹을 맞아야 하고 욕설을 그대로 들어야 한다. 옳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인데, ‘내가 뭐 하는 것인가’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이들에게 ‘네가 맞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정말 현장을 보면 답이 없을 때가 많다. 뭐라고 건네줄 말이 없다. 그래도 답은 없지만 ‘네가 하는 일이 맞다’ 그리고 ‘답이 없다’해도 운동이란 원래 없던 답을 뚫어내는 것이다. ‘길이 안 보인다’는 그 친구에게 ‘길이 안 보여서 틀린 길을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맞는 길을 온 것일 것이다.’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 쓴 가사이다. 여러 현장에서 이런 정서를 직접 확인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 노래를 통해서 활동가들이 위로를 받겠구나, 심기일전하겠구나 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곡을 쓴 것이다. 이 곡을 예상 외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주변에서 봐왔던 모습이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철: 이제 음악이 아니라 동지가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몸짓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어 보겠다. 개인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몸짓을 매개로 한 실천활동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 해 달라.

 

욱: 학생운동을 하던 1992년, 93년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가던 시기는 한국 학생운동의 역량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학생운동과 노동자계급 운동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학생운동이 노동계급 운동으로 전환하는 주요한 인자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을 때 당시의 물적인 토대는 대단한 것이었다. 단일 조직이 10만 명을 모아 놓고 출범식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고려대에서 1기 <한총련> 출범식을 할 때는 자리가 없어서 나무를 뽑아다가 다시 심었던 해프닝은 유명하고. 당시에는 학생 몸짓패가 과별로 하나씩 많은 경우 학년 별로 하나 씩 있었다. 그러한 당시 학생 운동의 토양은 문예 활동가들을 자연스럽게 배출해낼 수 있는 구조였다.

사실 학생 때에는 문예활동만 한 것이 아니라 학보사 기자, 학생회 대표자 등의 역할이 오히려 주된 것이었다. 그런데 졸업할 무렵 ‘너는 문예 활동을 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권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 당시에는 “춤추는 게 무슨 운동이에요?”라고 대답했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선배를 따라 어느 공장에 노동자 몸짓패가 연습하는 곳을 우연히 갔다가 그들의 척박한 현실에 정말 깜짝 놀랬다. 그곳에 있던 한 노동자 동지의 이야기가 생각을 바꾸게 한 직접적인 기계였다. “현장 노동자들의 문예적인 갈망이 있는데, 아무리 해도 기계만지고 일만하던 사람들은 떠오르질 않는다. 너같은 활동가 한 명이 정말 목마르다.” 당시에는 민중가수도 많았고, 노래 운동을 하는 동지들이 많았으나, 매우 효과적인 매체인 선동무(舞)를 전업적으로 담당하는 활동가가 적었다. 그렇게 현장 문화패를 조직하는 활동을 시작한 것이 지금에까지 이어진 것이다.

 

[사진 2] 2006 공공연맹 수련회

 

철: <몸짓 선언>과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선언의 몸짓에 배경으로 쓰는 곡들은 많은 부분 10년도 더 된 곡들이다. 동작도 바뀌는 부분도 있지만 그 이전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도 같은데.

 

욱: 잘 못 느낄 수도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창작하는 동작들을 계속 바꾸고 있다. 이것을 설명하자면 상당히 기술적인 내용을 되는데 이 자리에서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철: 선언의 동작은 때로는 무예(Martial arts)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욱: 맞다. 그렇다면 동지는 무예와 비슷한 동작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는가?

 

철: 자본의 강고한 전열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투부대가 필요한 것이며 당연히 우리의 전투부대를 형상화하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서 무예 비슷한 동작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형상화하는데 적합하다면 그 동작이 들어가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욱: 이화여자대학교 몸짓패 <투혼>에게 한 활동가가 써준 시가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춤, 무(舞)는 싸움, 무(武)이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무(舞)는 무(無)가 된다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보았을 때 무예와 춤은 뿌리가 같다. 무예냐 무용이냐는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무예이면서 무용이다. 그러나 정형화되어 있는 무술동작은 지양하고 싶다.

 

철: 2002년 캡스 노동조합 문예패 <불사조>와 같은 경우인가?10)

 

욱: <선언>은 캡스 노동조합 문예패의 강사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노동은 그 자체로 무예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 노동의 긍정성의 표현이 무예라는 형식으로 드러난 것이기에, 캡스 노동조합 <불사조>는 그 자체로서 분명한 의미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어찌되었건 정형화되어 있는 무술동작은 싫지만 일맥상통하는 무예와 무용의 접점을 동작으로 표현해내고자 한다.

 

철: <선언> 동지들은 여러 형식을 표현하지만 주요한 선동무에 있어서는 록 음악과 같이 드럼 비트가 명확한 곡이라든지, 행진곡 풍의 투쟁가가 주된 배경곡이 된다. 이런 점에서 다른 자유주의적 경향의 문예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욱: 현재에는 ‘너무 무예풍이다’는 비판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런 비판을 할 만한 이들과 접점이 많지 않기에 직접적으로 부딪힐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굳이 찾는다면 <선언>을 ‘문예 도구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 ‘부디 문예가 혁명의 도구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답한다. 오히려 과거에 선언은 오히려 덜 전투적이다는 평을 받았다. 선언의 몸짓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몸짓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다’는 비판이었다. 보다 전투적인 동작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철: ‘문예 도구주의’라는 표현은 도구에 대한 비변증법적인 이해에서 나온 속류적인 비판으로 보인다.

과거에 <선언>에 가하졌던 비판에 대한 감을 대충 잡아보자면, 아주 예전 80년대 풍의 문선이 떠오른다. 직선으로 쭉쭉 벋고 내리치고 하는 것들.

 

욱: 그렇다. ‘나서서 주먹을 뻗고, 손으로 치고 하는 것들이 노동자 문화다’라는 식의 반응들이었다.

 

철: 이에 비해 선언의 몸짓에는 돌고, 도약하고 하는 멋들어진 동작들이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동작을 창작할 때 무엇에서 영향을 받고 영감을 받는가?

 

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선언의 동작은 기본적으로 억눌린 이들이 해방을 지향하는 몸짓이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무예풍의 전투적인 동작을 많이 담고 있다. 그 외에도 상당히 많은 것들을 참고하게 되는데 탈춤, 사냥을 나갈 때 추는 남태평양, 아프리카 원주민의 춤, 한국무용, 현대 무용, 탱고에서 심지어 재즈댄스도 참고한다. 몸짓을 할 때 기본적인 서는 자세가 있는데 이 자세가 탱고와 상당히 비슷하다.

철: 잠깐, 탱고는 남아메리카의 하층민의 음악에서 유래한 것이기는 하지만 상당히 세속적이며 속류적인 문화와 많이 연관되어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른 바 사교춤의 형태로 수용되고 있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욱: 세속적이며 속류적이라는 것은 인민적이라는 것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유럽에 건너가 부르주아의 사교춤이 된 것과 달리 탱고의 원류는 다르다. 탱고에는 하층민의 사랑에 대한 정열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그 강렬한 비트는 인민들의 고된 삶 및 저항정신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탈춤하고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철: 몸짓이라는 표현 방식은 언어가 달라도 통할 수 있다. 그래서 외국의 동지들도 <선언>의 몸짓에 좋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봤다.

 

욱: 잘 몰랐는데, 그런 동지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네팔, 일본에서 공연하면서 실제 경험하기도 했고. 동지가 직접 경험한 것도 있다면 이야기해 달라.

 

철: 한 히피적인 미국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주노동자 문화제에서 <선언>의 공연을 보더니 저 팀 뭐냐고 훌륭하다(cool)고 했다. 이에 대해 영어로 ‘Manifesto’라고 하는 팀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욱: 보통 히피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은 <선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철: 이 친구는 한국의 집회에는 왜 이렇게 성난 연사(angry speaker)가 많냐며 투덜댔다. 이에 비해 <선언> 같은 문예팀은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한국의 집회 연사들이 분노하는 이유에 대해서 그 역사적인 맥락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면 그 친구가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욱: 그렇게 말하면 <선언>은 성난 춤꾼(angry dancer)이다. 

 

철: (웃음). 그렇다면 다른 외국 동지들은 어떤 지점에 좋은 반응을 보이는가?

 

욱: 정확히 말하자면 좋아하는 분이 있고, 싫어하는 분이 있고, 의아해 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의아해 하는 분들도 제법 있다. 연도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남반구 노조 연대회의>11) 대회가 한국에서 열린 적이 있다. 그 때 <선언>의 몸짓 공연을 보고 특히 남아공 활동가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 들었다. 저렇게 무서운 춤을 추는 집회를 하면 도대체 누가 오겠냐는 반응이었다. 그런 반응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바로 앞에 자본가들의 군대가 총을 쏘는데 총에 맞아가면서도 흥겹게 춤을 추는 아프리카 동지들을 다큐멘터리에서 보았기에 나 역시 의아했다. 내 앞에서 나의 적이 총을 쏜다면 난 절대로 그렇게 신나게 춤을 추지 못한다. 여기에는 정서상의 차이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접한 경험은 상당히 한정되고 제한된 것이지만 유럽 쪽 문화의 영향이 강한 곳의 나라 동지들은 상대적으로 신기해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동양의 마셜 아츠에 대해 신비함을 느끼는 것 같은 반응이다.

이렇게 의아해 하는 정서와는 달리 아시아 쪽에서는 아무래도 동양의 무예의 전통 때문인지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네팔로 강제 추방된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선언>을 네팔에 초청했던 적이 있다. 말도 안 통하고 노래를 알아듣는 것도 아닌데 <선언>을 초청한 이유는 ‘우리도 저렇게 힘차게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들과 맞서 싸우는 힘있는 문화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일본의 도로치바12) 동지들이 주최하는 집회, 그 이후 건설노조 집회 등에 갔었다. 그 집회에는 온갖 정파들이 모이지만 주로 일본 좌파들이 많이 참여한다고 한다. 일본 동지들이 <선언>이 처음 방문한 2005년도 공연을 잘 기억한다더라. 그 전에 일본에서는 ‘집회 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행위는 투쟁을 회피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지닌 것이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일본공산당>에 대한 반편향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화가 투쟁을 회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강화하는 것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잊지 않고 기억한다고 했다. 한국의 농민들이 WTO 반대 투쟁을 위해 홍콩에 가서 보여주었던 전투적 역동성에 현지인들이 감화받았다. 거기에는 한국 민중문화의 전투성․역동성이 한 몫을 하고 있지 않았나는 하는 식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또 <선언>의 직접적이고 전투적인 형태의 몸선(線)은, 이런 것에 목말라 하는 동지들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진 3] 2005년 11월 6일 일본 전국노동자 총궐기대회

 

철: <선언>의 동작은 상당히 전문적이고 오랬동안 연습을 해야 시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개인적인 경험인데 학생 문선패 활동을 하던 한 후배가 한 때 <선언>과 같은 숙련된 동작만 좋아했었던 편향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직접 문예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성취감과 희열감도 상당히 중요한데 그 후배는 이를 간과했었다. 계급 대중이 직접적으로 시연하면서 느끼는 해방감이 보다 일차적인 것인데 동작의 완성도만 높이 평가한다면 또 다른 형태의 왜곡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대중들이 표현할 수 있는 쉬운 동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냥 부차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선언>의 동작이 ‘현장 노동자들이 시연하기에 지나치게 어렵고 전문적인 동작이다’라는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욱: 이 역시 고민이 많이 되는 지점이다. 선언 활동이 구체화되기 이전에는 ‘노동자 문화는 생산의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이 자기 목표를 가지고 스스로 창작하면 되는 것 아니냐, 전업 활동가들이 옆에 붙으면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었다. 그 조차도 어떻게 보면 교조적인 생각이었다는 판단을 현장에 들어가면서 하게 되었다. 옆에서 너희들 왜 그렇게밖에 못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30년, 40년을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자본주의 문화의 비주체적인 수용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체제내화 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왜 이렇게 체제내화 되었냐고 비판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할 때 내용적이며 형식적인 측면에 심도있는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그 역할을 해보겠다고 현장 문예패 교육사업․조직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실제 <선언> 또한 실제 문선 공연을 해야하는 경우가 생겼고, 연행․공연도 담당하게 되었다. 현장 문예패 문선 활동이 한계가 많은데 능력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시간이 가장 제약이었다. 그러다 보니 동작들이 ‘너무 어렵지 않느냐’는 반응이 나왔다.

그래도 노동자들이 다리를 쫙 벌리고 서서, 팔을 어색하게 펴고, 손을 쭉쭉 뻗고 그것도 면장갑을 끼고, 머리띠는 허리에까지 치렁치렁하게 하는 것은 싫었다. 그런 문선이 싫어서 만든 것이 [파도 앞에서] 문선이었다. 그게 나올 당시 논란이 많았다. “저건 백댄서들 추는 춤이다. 저게 무슨 노동자 문예냐” 그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하고 싶었다. 비판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이 있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었다. 학생 때 1학년 말에서 2학년 올라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 [동지]의 문선을 만든 적이 있었다. 직각적인 선과 주먹을 뻗는 동작들은 “사랑 영원한 사랑~” 부분에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분에 한국 고전 무용의 곡선적인 동작을 넣었더니 반응이 양극단으로 나뉘더라.

‘어렵다’는 반응에 대해서 두 가지로 대답하고 싶다. 하나는 어려울 필요가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자 문예패니까 ‘진정성’만 가지고 하던 대로 하면 대중들이 따라 올 것이라는 것은 한가한 생각이며 착각이다. 대중들의 눈높이는 TV를 틀면 나오는 젊은 댄스팀의 기교있는 춤에 익숙해진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진정성’만으로 관성적인 동작들만 반복해서 대중들이 선동의 내용에 감화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 어려울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한가함’에 대한 반경향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은 <선언> 활동 초기 ‘절대로 노동자가 할 수 없는 동작’이라는 반응이 있었지만 이제는 현장 노동자 문예패도 그 동작들을 어려워하긴 하지만 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언>은 체대 출신도 아니고, 무용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학교 다닐 때 춤 동아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 때도 ‘우리도 하는데 현장 노동자들이 못한다고 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선언>이 볼쇼이 발레단처럼 인체를 이용한 아름다움을 극한까지 이용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 볼쇼이 발레단에 나는 크게 감동을 받거나 하지는 않는데 다만 기술적으로 잘하네 이런 느낌만을 받는다. 우리의 방식대로 현장 노동자들을 교육했고 실제로 그 결과물을 나타났다.

 

철: ‘어렵다’는 반응에 대해 답하면서 문예패 활동에 있어서 의식성과 자생성의 융합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답변을 한 것 같다.

자본주의 상업 대중문화에 맞서기 위해 전문 문예패는 동작에 있어서 기술적 완성도를 추구해야 하며 숙련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에 적극 동의한다.

 

욱: 문예활동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무기를 갈고 닦아야 한다. 총에 기름칠 하고, 칼날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게 연습이고 기술적인 고민이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1994년도였나, 공장에 갔을 때 야간 집회를 하는 중에 비가 ? 내렸다. 수염이 덥수럭하게 난 ‘형님’ 노동자들이 빗속에서 한 손에는 죽창을 들고 손을 한 번 쫙 뻗던 그 때 보이던 노동자의 팔뚝 그리고 얼굴의 주름… 별 다른 동작이 없었지만 모든 게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났다. 그래서 여전히 지금도 방방 뛰고 하는 기술적인 부분을 소화해낼 수 있는 젊은 사람만이 문선을 할 수는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는 것이 지론이다. 그런데 그렇게 강조는 하지만 실제 <선언>공연은 안 그렇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것만 있어서도 안 되고, 그것만 있어서도 안 된다’고 답하고 싶다.

 

철: 방금 말한 사례와 비슷한 경험을 많이들 이야기 하더라. 조선업종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도 파업 투쟁 조직에 성공하여 모두가 한 손에는 쇠파이프, 한 손에는 라이터를 들고 한 번 ‘쿵’하고 내려치고 라이터로 불을 켰는데, 그 때 그 감동으로 아직까지 운동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욱: 그런데 단결하고 하나 됨을 강조하는 것은 외형상 파쇼적인 문화와 닮아 보일 수 있다. 집단화되고 하나가 됨을 강조하고 그 힘을 분출해내기 위한 문예적 요소를 쓰게 되면 파시스트들이 쓰는 표현과 모양새가 똑같이 진다. 여기서는 외양상의 유사점이 문제다. 가령 군부독재와 싸우던 시절에 앞에서 선동문선을 하는 것을 보면 군인들의 군무(群舞)와 전혀 다르지 않다. 혹은 천 명 만 명을 <선언>이 같은 몸짓을 시킬 때를 봐도 그렇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자유주의적 경향에서의 비판이 있을 수도 있다.

 

철: 단 외형상의 유사성 때문에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보편을 위해 개별을 희생하는 방식인지, 아니면 개별이 지니는 생명력을 살리며 그것을 보편화하여 더 큰 힘을 발휘하게 하는 방식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특히 노동자 계급 문예는 노동자 계급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를 획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노력한다는 측면에서 파쇼적인 문예와 노동자 계급의 문예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두 사례는 모두 남성 노동자들의 경우인데 여성 노동자들의 사례도 있다면 말해 달라.

 

욱: 여성노동자들도 상당히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던 사례가 많이 있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998년 현대자동차에서 식당 여성노동자들이 “밥주걱 사수대”를 조직해 내서 싸웠던 장면이 떠오른다. 냄비 등을 비롯한 식기를 두드리던 여성노동자들의 소리의 일체감이 주었던 감흥은 대단한 것이었다.13)

   

철: 초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벌어질 때 <선언> 동지들의 무대를 본 적이 있다. 대략 2002년도 경으로 기억한다. 당시에 휠체어에 탄 장애인도 할 수 있는 동작 배우기 시간을 갖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장애인 동지들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또 그 투쟁에서 문화 공연을 하면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비롯한 장애인 동지들이 <선언>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이며 좋은 평가를 내리는 것을 보면서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실제 중중 장애인 동지들이 그 동작을 따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데도.

 

욱: 처음에는 정말 고민이 많았다. 우리의 동작들이 오히려 장애인들에게 좌절감을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장애인 동지들이 무대를 좋아하는 것은 현실을 깨고 해방을 지향하는 그 몸짓이 전달하는 그 메시지에 온 몸으로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철: 현재는 장애인 운동가들이 스스로 몸짓패를 만들고, 그 외에도 노래패, 연극패도 만들며 주체적인 문예역량을 갖추고 있기에 당시의 고민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욱: 그렇다. 장애인 몸짓패의 활동에도 <선언>은 연대하고 있다. 장애인 문예활동과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의견교환은 해당 주체들과 직접 나누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철: 최근에 대중 집회 때 문화 공연은 많은 경우 생략되거나 있다고 해도 앞서 언급한 ‘노가바’라든지 상업 대중문화의 패러디에서 크게 나가지 않는다. 생산적인 문예활동을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패러디라는 방법은 유효하지만 전문 문예패의 경우 패러디라는 방식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고 동지도 이에 동의할 것 같다. 최근 보신각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집회14)에서도 한 문예팀이 군사훈련 반대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내용을 만담과 대중가요, 코메디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패러디해서 공연하더라. 나는 이런 것들이 영 내키지가 않지만 대중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대중문화의 형식을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형식으로 정치적 내용을 담아내야 하며, 패러디라는 방식은 1차원적인 것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현 상태의 대중 의식을 보니 고민이 들었다.

 

욱: 민감한 내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언급한 문예패 역시 나름대로 진정성을 지니고 자신들의 활동을 하고 있고 이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존중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패러디에 대해서만 말해 보겠다. 패러디는 절대로 안 된다는 입장은 아니다. 누가,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패러디는 실제 생산 현장 동지들이 자생적으로 쉽게 체험하는 문화로 자신의 내용을 풀어내기에 괜찮은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문예를 전업으로 하며 현장의 문예를 끌어가는 이들은 패러디는 지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은 패러디라는 형식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넘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측면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좋은 반응’이라고 하는 것을 그냥 익숙한 대중매체물을 시연함으로써 사람들이 웃고 박수 치는 것만을 의미한다면 조금 문제가 있다. 사람들로부터 패러디를 보며 웃긴 웃지만 참 허탈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패러디물의 시연을 보면서 사람들이 더 좋아했던 것은 패러디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을 시연한 연행팀이 해당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토론하고 고민해서 극에 반영한 점이 더 크게 와 닿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새로운 형식’이라고 하는 이들은 닳고 닳은 전업 활동가들이라고 본다. 직업적으로 하루에 집회 3-4회 씩 참여하는 이들과 달리 대중들은 대중문화에 상당히 많이 노출되어 있다. 대중들이 단지 재미있고 웃긴 것들을 보고 싶어 한다면 그 시간에 차라리 [개그 콘서트]를 보지 왜 집회를 나오겠냐고 반문하고 싶다. 경직된 형식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히 재미를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형식이 필요하다.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지만, 대중에게 접근한 이후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보다 구체적으로 있어야 한다. 편하게만 생각하면 발전이 없다.

 

철: 무식하게 질문해 보겠다. 전문 문예패의 패러디에 대해 비판적으로 견해를 표명한 것은 동지가 쉬운 뽕짝풍의 민중가요를 활용하는 것과는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욱: 두 가지는 다르다. 집회에서 뽕짝풍의 민중가요를 도입할 때는 대개 행위의 주체가 대중이며, 그 과정에서 트로트라는 특정한 양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패러디로 만들어진 꽁트는 보여주는 장르인데다가 이미 완성된 극 형태다. 즉, 자본주의 상업문화가 매체를 통해 보여진 완성품을 재활용하는 것이다. 대체로 전문 문예패가 패러디물을 시연할 때 대중은 수동적이 된다. 이에 반해 우리가 무대에 오를 때 사회자가 “잠시 쉬어가는 시간입니다”하고 소개하면 바로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우린 쉬러 나오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보면서 쉬는 것이 아니라. 집회라는 공간을 통해 쉬운 형태의 집단 예술이라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철: 앞에서 언급된 ‘새로운 형식’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해보자.

 

욱: 새로운 형식은 늘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늘 하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이상 감동을 받지 않는다’라는 편견에는 반대한다. 그래서 <선언>은 집체극을 만들 때도 늘 다루던 스토리와 형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표현했는지를 고민한다. <선언>이 연출하는 집체극은 어떻게 보면 뻔히 스토리도 보이고 결말도 보이는 신파극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폭력으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이 조직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자본과 공권력에 맞서 싸워 끝내 승리한다는 내용으로 2007년 상암동에서 열린 노동절 전야제 집체 문선을 완성했던 적이 있다. 이를 본 어느 동지가 자신의 블로그에 그 뻔한 내용에 ‘진심의 힘’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는 글을 보았다. 우리는 잠깐의 웃음과 박수가 아니라 대중의 감동과 실천적인 변화를 원한다.15)

[사진 4] 2008 노동절 집회문선, <선언> 연출.
 이랜드 동지가 줄을 꼭 움켜쥐고 다른 동지들이 줄을 다시 잡으러 가는 모습.

 

철: 자칫하면 ‘낯설게 하기’와 ‘카타르시스’를 양자택일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후자를 보다 주요한 것처럼 여기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욱: 아니다. 낯설게 하기는 <선언>이 문예창작 행위를 하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창작 기법이다. 음악을 끊어서 흐름을 단지 편하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등 기술적으로 ‘낯설게 하기’는 많이 활용한다. 또 카타르시스를 추구하는 것도 단순한 감정적 배설과 자기 정화의 과정을 넘어선 것이다. 즉 전망을 제시하고 교훈을 제시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방법을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중성을 지적해야 한다. 집회에 참여하는 대중은 문예전문가가 아니며 이들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중이 편하게 향유하면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 단 선동문예이기 때문에 무대의 시연자들은 대중을 편하게 느끼게 해서만은 안된다는 이중성이 있다는 것이다. 해방에 이르는 진실은 불편한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집회에 참여한 대중을 불편하게 한다. 해방감으로서의 카타르시스, 혁명적 낙관성과 함께 혁명의 과정에서의 고난이라는 불편함의 양측을 변증법적으로 담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철: 이 대답은 카타르시스와 ‘낯설게 하기’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대한 현장 운동가의 답변으로서 상당히 훌륭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경우 양자를 딜레마적인 것으로 인식하는데 그쳐, 속류적으로 절충시켜 버리고 만다.

이제는 집체문선이라는 형식으로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을 표현하는 과정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달라.

 

욱: 나는 집체문선이 현재로서는 상당히 유효한 방식이라 생각한다. 현재 조건에서 대중 집회는 분명히 한정된 공간이다. 일상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문화된 연기를 배우기 힘든 조건을 고려한 상태에서 집체극을 도입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 조건에서 <선언>은 문예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여 투쟁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기름의 역할을 하려 한다. 집체 문선을 통해 <선언> 뿐만 아니라 여러 문예 활동가 동지들, 현장 노동자 동지들이 한 무대에 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주체 스스로 감화가 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크다. 처음 무대에 오르는 이들은 데면데면 하니까 일종의 연기지도, 동선지도 같은 것들은 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알아서 자기 스스로의 내용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철: 그것은 주체들에게 가능성을 열어두고 원하는 것을 스스로 발언하게 한 결과인가?

 

욱: 그거보다는 표현양식이 서투른 부분에 대한 도움을 주는 정도로 한정해야 한다. 전반적인 모든 과정은 토론을 거치고 다만 연출자로서의 의견을 제시하고, 똑같은 주체로서 입장을 나누는 과정을 거친다.

집체문선의 또 다른 효과는 무용 즉, 마임이 가져다주는 해방감이다. 그것은 연기라는 구체적인 동작과는 달리 한 단계 추상화되어 있는 동작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 추상화의 과정은 피상적인 알레고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 추상화의 과정을 거친 동작들이 오히려 접근성이 더 좋다고 할까.

 

철: 왜냐면 각자의 경험이 다른 것인데, 추상화 과정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경험을 자기화하는데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 내에 있는 여러 양상과 갈등을 획일화하지 않기 위해서 추상화라는 방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추상화 단계를 거친 집체문선이 계급적 당파성, 집단성, 자기해방의 체험에 유효한 기제라는 맥락에 대체로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욱: 맞다. 단 하나 지적하자면 답이 있어서 집체문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진 5] 2006 공공연맹 수련회 집체문선, <선언> 연출.

 

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선언>은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추구하면서도 동영상을 보면서 동작을 배우려 하는 것은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욱: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창작자로서 활동가로서 기본적으로 반대한다. 몸짓은 노래와 달라서 그 형태가 매우 추상적이다. 노래는 가사가 있어 매우 구체적이고 악보가 있어서 음계, 멜로디, 리듬을 전달할 수 있다. 춤에도 무보가 있긴 하지만 쓰지 않고 있다. 춤은 추상화를 거친 동작들이다. 창작자로서 보자면 동영상을 통해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동작이 퍼지는 것이 싫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동작이 하나하나 창작되는 데에는 다 그 의미가 있다. 그 의미가 곡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종의 창작관이다. <선언>은 현장 문예지도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는 팀이다. 언제든지 배우고 싶다면 연락을 달라는 것이다. 직접적인 접촉을 과정을 통해서 창작의 의도와 그에 대한 해석을 전달할 준비가 되어 있다. 활동가로서 현장에서 그런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선진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기에, ‘몸짓’은 현장 노동자들과 만나 들어가는 매개체다.

<선언>은 아무에게나 문선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문선은 선동의 무기다. 선동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한 젊은 남성 동지가 선언의 무대를 보고 음료수를 가져다 주면서 말했다. “나는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르고, 다만 선배를 따라 처음으로 집회를 왔다. 그런데 아까 무용이라고 해야 하나 그 춤추는 것을 봤는데 바로 도로에 뛰쳐나가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야기는 선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다. 문선은 선동을 잘하기 위한 구체적인 기술이다. 선동 때문에 그에 감동을 받고, 감화가 되어 길거리에 났다가 방패에 찍혀 죽을 수도 있다. 가문의 패륜아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위험한 선동을 전혀 그럴 의도가 없는 이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그런 의도가 없는 이들이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죄악에 창작자로서 일조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다.

특히 <선언>은 당파적인 팀이다. 당파적으로 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어용노조라든가 한국노총이 내 창작물을 가져다 그 어용 짓거리에 쓰는 것은 견딜 수 없다. 영상에는 창작자의 의도도 없고, 영상을 보면 손짓 발짓을 제외한 아무것도 안 보인다.  

 

철: 의도는 충분히 알았다. 그러나 복제를 통해 아우라를 소멸시켜가는 대중매체가 일반화되어 있는 시대가 아닌가? 이제는 영화의 시대를 넘어 대중들의 직접적인 생산에의 욕구가 발현되는 UCC16)의 시대인데, <선언>의 방식은 수공업적인 도제 시대의 방식이 아닌가?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교육만으로는 대중적으로 널리 전파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욱: 맞다. 그것이 우리의 한계다. 출판을 하는 연구소와는 차이가 있다.

 

철: 연구소는 재정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적극적으로 출판하는 것은 목표로 하고 있다. 또 내용물을 복제해 가려 한다면 오히려 적극 권장한다. 왜곡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욱: 연구소의 매체는 문서화되어 있고 매우 구체적인 글로 서술되어 있다. 실제로 영상 제작을 권유하는 동지들이 주변에 있다. 현장에서 변혁적인 노동자들이 몸짓을 배우고 싶어하는데, 이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때문에 원래의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선언>이 모든 것을 다 담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고 답한다. 무책임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철: 무책임이라기보다는 ‘자족’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욱: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한계이지만 그것을 극복하자고 원칙을 훼손하는 것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의 방법상의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변화되는 상황에서 원칙을 지키되 동영상이나 기타 더 많은 대중접점을 만드는 것에 대해 좀더 열린 사고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팀내의 고민이 있다.

 

철: 좋다. 새로운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정치적 동기를 훼손시키지 않는 새로운 창작을 기대해 보겠다.

앞서 동지가 ‘민중문화’라는 이름으로 노동자 계급 문화와 자유주의적인 문화가 미분화된 상태로 공존했던 것을 언급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분명히 분화가 되어야 하는 시대다. 이를 테면 민주노조 운동에서 사회주의 노동자계급 운동으로 분명한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 본다. 잘 알다시피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의 곡으로 안치환의 [철의 노동자]가 있는데, 이 곡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의 자기 선언을 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의 시대적인 사명을 밝힌 곡이다.17) 그런데 이제는 그간의 민주노조 운동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할 시기다. 안치환은 더 이상 노동자 계급을 중심에 놓는 창작을 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노동조합을 버리자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조합 운동에 분명한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명확히 담아내어 운동의 장벽에 뚫고 갈 돌파구를 열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도 그렇다. 개량의 여지가 사라져가고 있을 정도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철폐의 요구는 경제투쟁의 요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장 투쟁과 사회주의가 더 긴밀히 결합될 것이 요청되고 있으며, 여기에 문예패가 견지해야 할 당파성이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미분화된 ‘민중문화’에서 명확한 노동자 계급의 당파적인 문화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한다. 이와 관련해서 현장에서 고민하는 동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욱: 민중문화가 당파적으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선언>은 민주노조 운동을 주요한 거점으로 복무하며 당파성을 담지해내려 하고 있다. 조직화된 민주노조의 상층부의 관료화와 달리 기층 현장의 정서는 또 다르다. 또 아예 조직화되지 않은 수많은 대중이 운동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민주노조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겠다. <선언>은 문예팀이기 때문에 친근하게 현장 노동자들에게 다가다는데 용이하다. 그런 현장의 노동자 한 명을 만나서 사회주의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학습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이를 그 동지가 받아들이는 데까지는 4년에서 5년이 걸릴 때도 있다. 사회주의적 전망을 제시하고 그것을 노동자 계급의 자기 전망으로 가져다주는 기초단위로서 민주노조는 유효하다.

그런데 국가권력에 맞서 처절하게 싸우던 투사들도 당면 투쟁이 끝나고 나면 소멸하거나 소수의 활동가만이 남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투쟁이 끝난 이후의 노동자들이 혁명투사가 되고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제내화 되고 엄청난 애국주의자가 되는 것을 많이 본다. 해고당하고 국가 폭력에 치를 떠는 경험을 1년, 2년 하게 되더라도 사회주의적 변혁을 자기전망으로 가지는 노동자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우리의 무기를 가지고 단 한 번 소통의 기회를 얻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철: 이것은 <선언> 동지들이 민주노조 운동에서 사회주의적 전망을 찾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반동기에 대처하는 방식이기도 한 것 같다.

 

욱: 그래서 하나의 싸움을 이기기 위한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소모임이라도 조직해서 그 싸움이 끝난 이후에도 운동의 자기 전망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철: 동지의 말을 들으니 우끄라이나 출신 쏘련 감독 알렉산드르 도브젠꼬의 1929년 영화 [무기고]18)가 생각난다. 1차 대전 과정에서 우끄라이나의 병사와 노동자의 투쟁이 급진화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1916년이 시대적 배경이다. 노동자들이 무기를 만드는 공장, 즉 병기고를 점거하는 것에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영화는 승리로 끝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패배에 굴하지 않는 노동자의 모습을 형상화하며 마무리된다.19) 그것은 그러한 패배를 딛고 1917년 혁명이 승리하였음을 암시하며, 지금 우리가 쓰러지더라도 투쟁의 다음 세대는 우리의 패배를 보고 배울 것이며 마침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욱: 영화는 아직 못 보았다. 그런데 벌써 마무리하는 분위긴가? 아직 창작과 형식과 관련한 문제는 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고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

 

철: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 문예 창작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에 대해 정리해보도록 하자.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했는데 그전에는 형식과 내용은 변증법적인 관계이므로 이런 식으로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때는 자칫하면 변증법이라는 혁명의 무기를 절충적인 것으로 잘못 이해하게 되는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 운동의 현재라는 구체적인 조건이 생략된 피상적인 파악이 된다. 따라서 지금은 ‘발전하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내용이 노동자 계급 문예의 형식을 규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욱: 동의한다. 이 문제는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 노동조합에 현장 문예패가 연대 공연을 간 일이 있다. 밤을 새는 문화제였는데, 투쟁가에 문선을 하는 문예패에게 왜 재미도 없는 ‘투쟁가를 하느냐 신나는 거 해봐’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문예를 투쟁의 적극적인 도구로 생각하기 보다는 없으면 허전하니 문예를 배치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문예활동가들도 대중에게 쉽게 다가가는 것만 고려하여 상업문화를 패러디하는 것만 생각하는 현실을 깨 나가야 한다. 변증법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본질과 진리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탄생한 것이다. 상업 문화에 익숙해진 대중의 현 상태에 절충하는 것은 변증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중이 왜 그렇게 체제내화되었는지 질문하고, 그렇게 고정화된 현실과 형식에 대한 싸움이 문예패의 과업이다.

끝으로 이 말은 꼭 하고 싶은데 연배가 높으신 청소 용역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할 일이 있었다. 이분들이 <선언> 같은 록비트에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복잡한 춤을 과연 좋아할 지 의심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차라리 뽕짝에 맞추어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파도 앞에서]를 꼭 해달라는 요청에, 그리고 실제 청소 용역 노동자들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이를 통해 문예패 활동의 형식은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철: 동지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것 같다. 한 번의 대담으로 주요한 쟁점들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함을 다시금 느낀다. 이번에는 이 정도로 하고 다음 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진일보한 내용을 다루었으면 한다.

 

욱: 좋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개인 대 개인의 대담이 아니라 <선언> 모두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언급했지만 문예 관련한 토론회 같은 것을 조직해서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한 번 진하게 토론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도통 이런 것들을 하려는 사람이 없더라.

 

철: 긴 시간 좋은 말씀에 감사드린다. 이제는 <선언> 동지들을 비롯한 문예 활동가 동지들이 역으로 토론을 제안한다거나 문서로 자기정리를 하는 모습을 기대해 보겠다. 정리한 결과를 보고 다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1) 얼마 전에 <남북의 창>이었나,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는데 북에서도 브라스 밴드가 재즈 형식을 도입해서 연주하는 것을 보았다. 경직화된 방식의 민족적 표현 양식을 고수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그곳에서도 형식 수용에 있어서 유연성 있는 전환을 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진보적인 노동자계급의 형식에 있어서 원천적인 금기가 있다면 곤란할 것이며 이는 두 대담자 모두 공통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바이다.

 

2) 트로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록 음악 일반이 반지성주의적이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지적인 감상을 요구하는 록 음악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대화에서 두 참여자가 공통으로 인지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생략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에 유의하면서 흐름을 따라가 주길 바란다.

 

3) 물론 일부의 논자들은 아직도 트로트의 한국적 특징을 강조하면서 ‘왜색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4) 이 곡은 가사는 기존의 봉건적인 격언인 ‘남자는 세 번만 운다’를 뒤집어 ‘사람’으로 바꾸어 젠더(gender)적인 관점에서 문제제기를 하였고, 그것을 또다시 노동자의 시각에서 재해석해는 두 번의 극적인 도약을 이루어 냈다. 노동자 계급적 관점에서 새로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도록 재구성한 가사는 상당히 훌륭한 것이라고 평하고 싶다.

 

5) [쓰레기 청소가].

 

6) 같은 곡.

 

7) [파업가].

 

8) 한국외국어대 <새물결>이 만든 이 곡도 등장한 지 20년 가까이 되었다. 현재도 투쟁의 현장에서 노래 창작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대중적인 폭발력을 담은 곡이 많이 나오지 않는 현실을 하루 빨리 극복해내야 할 것이다.

 

9) 편곡은 마구리 밴드가 맡았다.

 

10) 이남경, “[캡스]경찰이 파업을 했다?!”, ≪참세상≫, 2002년 10월 9일,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id=23087

 

11) Southern Initiative on Globalisation and Trade Union Rights. 약칭 SIGTUR.

 

12) 일본 치바 현 국철노동조합에서 운전하는 노동자들이 분리되어 만든 복수노조.

 

13) 안타깝게도 당시의 “밥주걱 사수대”는 정리해고의 희생양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임인애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밥ㆍ꽃ㆍ양]을 보라.

 

14) 3월 5일 5시에 열린 “한미연합전쟁연습 중단, 한반도 평화수호 대회”. 집회의 정식 명칭에는 ‘국민대회’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목적의식적으로 ‘국민’은 삭제한다.

 

15) 이 주제와 관련해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을 참고하라. 정은진, “2010년 메이데이 집회와 노동자 문화에 대한 고민(1)”, ≪정세와 노동≫ 제59호(2010년 7/8월 합본호); 정은진, “2010년 메이데이 집회와 노동자 문화에 대한 고민(2)”, ≪정세와 노동≫ 제60호(2010년 9월).

 

16) user created contents. 생산물의 수용자로 머물던 사용자가 직접 제작한 창작물.

 

17) 문영찬, “민주노조운동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정세와 노동≫ 제36호(2008년 6월), p. 82.

 

18) Арсенал. 국내에서는 [병기고]라는 이름으로 DVD로 출시되었다.

 

19)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요즘 표현으로 ‘스포일러’가 되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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