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옌안문예강화 당파적으로 읽기 (1)

 

최상철 ∣ 노사과연 운영위원

 

 

들어가며

 

“옌안문예강화(在延安文艺座谈会上的讲话1), 이하 강화)”는 마오쩌둥(毛泽东, 이하 마오)이 1942년 5월 22일, 23일 양일에 걸쳐 옌안의 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이다. 이를 아이쓰치(艾思奇, 애사기)가 5월 30일에 발표하고2) 이듬해인 1943년 10월 19일 ≪해방일보(解放日报)≫에 “강화”의 전문이 정식으로 공표된다. “강화”는 마오의 입으로 구술되어 정리된 것이지만 개인의 관념에서 나온 산물은 아니다. 그것은 해방구가 열린 옌안에서의 집단적 논의의 결과물이다. 국민당통치구(국통구)에서의 논쟁은 불리한 조건에서 진행되었던 것이기에 일치된 인식을 획득하지 못하였지만 해방구에서는 공산당원과 비당원을 포함한 참가자들의 열띤 집단토론을 통해 비교적 명쾌하게 문제해결을 이루어갔다.3) 그렇기 때문에 “강화”에 담긴 내용은 옌안 해방구에서의 혁명운동이 만들어낸 일종의 집단 창작품으로 봐야 할 것이다. 좌담회에서의 토론은 중국 혁명운동의 집단 지성의 표현이지만, 토론의 큰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또 적절하고 풍부한 예시를 들어 완성해낸 마오의 연설은 전체 좌담회의 매듭을 짓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 할 것이다.

“강화”는 발표 이래로 현대 중국 문예운동의 역사에서 계속된 논쟁의 씨앗이었고 그 자체로 여러 쟁점을 포괄하고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강화”의 지침이 첨예한 갈등의 원인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현재 수준에서 입수한 참고 자료의 거의 대부분이 문화대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논조로 일관하고 있기에 문혁 당시의 문예운동과 “강화”를 둘러싼 쟁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아래와 같은 점만 명확히 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문화혁명 시기에 비판을 받았던 작가들이 다수 등장한다고 해서 문화혁명을 ‘10년 동란’으로 규정하는 덩샤오핑 이래의 수정주의적 중국공산당의 공식입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문화혁명에 대해 일도양단(一刀兩斷)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강화”를 재음미하면서 옌안시대를 중심으로 마오의 문예이론을 살펴보고 당대의 혁명적 문예운동의 실례를 재음미하며 현재 한국 노동자계급 문예운동에 대한 고민의 단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필자가 중문학 비전공자이며 중국어 실력은 극히 미력하다. 그래서 기존에 한국에 소개된 자료를 재정리하는 수준에서 논의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 인용에 있어서 불철저한 측면이 여럿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현실 노동자계급 문예운동에 대한 고민 수준이 일천하기에 현실 운동에 대한 제언은 참고사항에 그치게 될 것이다. 이는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며 오류와 한계에 대한 사후의 냉정한 평가와 비판을 달게 받기 위한 것이다.

이 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복원을 바라며 쓴 필자의 졸고 “맑스-레닌주의 문학ㆍ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노동사회과학≫ 제2호, 노사과연, 2009.)의 속편 격이다. 당시 글에 대해, 초보적인 이론적 고찰이 시도되었으나 운동론에 이르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과학적 문예이론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고전에 대한 탐구와 현실 운동이 치열하게 결합될 때만 가능하며 한 걸음 한 걸음의 전진이 도약을 위한 밑바탕이다. 문예이론과 혁명운동의 실천이 보다 통일되어 있는 마오의 글을 분석하여 지침을 찾아내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사전 전제이다. 필자의 작업이 현재와 훗날의 운동을 위한 하나의 주춧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지면을 빌려 자료 입수에 지대한 도움을 주신 김화선, 이지웅, 임소형, 주현우,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 동지들과 옌안문예강화에 대한 글을 쓰도록 자극하고 격려해주신 “노동자의 눈으로 문화읽기” 쎄미나 팀원들, 연구소에서 미학 쎄미나를 함께 했던 팀원들, 러시아어를 지도해주신 임채희 동지께 감사와 연대의 인사를 전한다.

 

 

“강화”의 배경 옌안

 

옌안은 산시성(陝西省) 북동부의 작은 옛 도시로 심하게 개석된 황토고원 속에 자리하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1934년 중국 중남부의 장시(江西) 쏘비에뜨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근거지를 옮겨야만 했다. 홍군은 1935년까지 9,600km(우회로를 계산하면 1만km를 훨씬 넘는다)의 대장정을 거쳐 숱한 고난과 희생을 딛고 옌안에 도착했다.4) 일개 성에 불과했던 옌안에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그곳은 항일 투쟁과 사회주의 혁명의 새로운 거점이 되었고, 중국 혁명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승리하게 된다.

소설 ≪닥터 노문 베쑨≫에서는 베쑨이 1938년 시안(西安)을 떠나 옌안에 도착할 당시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트럭은 마마자국이 난 듯한 언덕들 사이를 달리다 아래쪽으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지는 길로 나오게 되었다. 연안은 세 개의 골짜기들이 합류하는 저쪽, 팬케이크 같은 평원 위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5) 홍군은 옌안에서 동굴에 토굴을 파고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제법 틀을 갖추고 있었다. 소설 ≪닥터 노문 베쑨≫의 묘사를 계속해서 보자. “그 숙소는 언덕들 사이에 있는 동굴이었다. 크기는 캐나다 가정의 큰 방규모였는데, 온돌침대와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6) 옌안에 도착한 첫날 노먼 베쑨의 일기는 해방구에서의 활기를 보여준다. 옌안의 행정관리들이 자신감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고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인상 깊게 기술한다. 또 항일 투쟁 역량을 조직함과 동시에 사회개혁을 위한 종합적 프로그램도 추진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학생이 모여들던 학교와 초보적이지만 만인에 대한 무상의료를 실시하던 병원에 놀라워한다.7)

해방구 옌안에서는 활기가 넘쳤지만 주ㆍ객관적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았다. ≪모택동의 문학예술론≫을 번역한 이욱연이 “강화”에 붙인 해제를 보면 당시 옌안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국민당은 1937년 2차 국공합작 한지 불과 2년이 지난 1939년 말부터 ‘포위토벌(围剿)’을 가해오며 해방구를 압박해 왔다. 더불어 일본은 홍군의 근거지에 대해 모조리 불태우고(烧光), 모조리 죽이고(杀光), 모조리 빼앗는(抢光) 삼광정책(三光政策)을 실시한다.8) 1941년 7월 삼광정책 원흉인 화베이(華北)지구 일본군 총사령관 오까무라 야스지(岡村寧次)는 30만의 대군을 움직여 ‘대태평양 전쟁에 대비한 중국 북부의 완전소탕’을 목표로 하였고 해방구에 대한 장기적인 공세를 지속해 왔다. 게다가 국민당군은 봉쇄망을 펼쳐 팔로군과 신사군의 협력과 물자 이동을 방해했다.9) 더욱이 변방인 옌안에는 생산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산지로 둘러싸여 있기에 경제적 토양이 척박했다. 이런 조건에서도 새로운 해방구로 소부르주아 출신의 청년ㆍ인텔리들이 다수 모여든다. 그 무렵 옌안으로 모여든 문화계 종사자 수가 급증하여 각종 기관과 단체, 학교에서 기본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초창기 옌안 시절처럼 일사분란하지 않았다.10) 1937년 당시 5만이 조금 넘던 공산당원이 1940년에는 80만에 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당시의 옌안의 상태를 보여준다.11) 마오는 당시 옌안에 모여든 많은 문예활동가들이 1980년대 이남 운동판의 ‘골방’에 유비할 수 있는 ‘샹하이(上海)의 다락방(亭子间)’ 출신임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근거지가 옮겨진 것은 샹하이와 옌안으로 단지 지리적으로 이동한 것이 아님을 지적하며, 문예종사자들이 반봉건ㆍ반식민지 사회와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혁명적 신민주주의 사회라는 서로 다른 두 역사시기를 지나왔다고 분석한다.12)

그런데 다수의 국통구 출신 지식인, 문화예술 활동가들은 해방구에서의 활동 그리고 그곳 대중의 구체적 조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부르주아 출신 지식인, 문화예술 활동가들이 인민대중이 권력을 잡은 새로운 해방구, 그러나 물질적 조건은 여러모로 열악한 옌안에서 자신들의 관념적 이상주의와 현실과의 차이에서 느꼈을 괴리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수의 문예종사자들이 대중에 대한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는 개인주의, 분산주의, 자유주의, 허무주의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당시 중국공산당이 주력으로 삼았던 혁명의 지지세력은 노농병 인민대중이었다. 이들의 즐기는 문예는 구래의 것이었는데 인텔리들은 대중의 수준을 무시하고 예술적 ‘제고(提高)’에만 신경을 썼다. 옌안을 둘러싼 군사적 포위로 인한 곤경과 사상ㆍ문화적 동요와 혼란으로 인해 혁명 대오를 재정비해야 했다. 그래서 주관주의에 반대하는 학풍ㆍ종파주의에 반대하는 당풍ㆍ당팔고(党八股)에 반대하며 문예론을 정비한 문풍의 3대 차원의 정풍운동(整风运动)이 대대적으로 일어났고, 80만 중국공산당원이 맑스-레닌주의와 마오사상으로 무장된 강고한 대오를 형성하게 된다. 강화는 바로 문예 정풍운동의 지침을 제공한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의 발전적 계승으로 태어난 마오의 문예이론

 

“강화”는 중국혁명과 마오의 독창성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하늘 아래 무에서 창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강화”와 마오의 문예이론은 철저하게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입각하고 있다. 또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이론 적용 특히 당과 문예의 관계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맑스-레닌주의를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강화”에서 ‘학습문제’를 제기하며 문예종사자들이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13) 때문만이 아니라 마오의 문예사상 전반에 그리고 “강화”의 기저에 맑스-레닌주의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화”는 중국 혁명의 특수성을 반영한 저작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 문예운동사의 보편성 안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국 혁명의 주도자들도 사회주의 문예의 성과와 오랜 논쟁의 결과물에 영향력을 받아왔고 마오의 “강화”도 이에 기초해 있다.

마오는 문화와 정치ㆍ경제와의 관련성에 대해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간결히 정리한다. 마오는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정리했던 사적 유물론의 기초를 정확히 이해하고 적용했다. 사적 유물론은 문예이론을 비롯한 마오 사상에 공통한 것이다.

 

일정한 형태의 문화14)(관념형태로서의 문화)는 일정한 사회의 정치ㆍ경제의 반영이며, 또한 일정한 사회의 정치ㆍ경제에 중대한 영향과 작용을 미친다. 그리고 경제는 이러한 문화의 토대이며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 표현이다15). 이것이 우리가 문화와 정치ㆍ경제와의 관계 및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 갖고 있는 기본적 관점이다. 그러므로 일정한 형태의 정치ㆍ경제는 먼저 일정한 형태의 문화를 결정하게 되고, 그 후 그 일정한 형태의 문화16)가 다시 일정한 형태의 정치ㆍ경제에 영향을 주며 작용을 하게 된다.17)

 

마오는 문체의 문제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도 선배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마오는 “강화”가 있기 3개월 전에 강연한 “당팔고에 반대한다(反对党八股)”18)에서 형식적인 팔고문체에 대해 반대하며 “언어가 무미건조하여 부랑아 같다(语言无味,像个瘪三)19)”고 비판한다. 이는 경향문학에 대한 엥엘스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 작가가 관념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인민대중에게 주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행위 자체로부터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20)는 것이다. 또 라쌀레의 비극 ≪프란츠 폰 지킹엔(Franz von Sickingen)≫의 평가를 둘러싸고 맑스가 ‘지킹엔 논쟁’에서 쉴러의 따를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라쌀레의 오류를 지적한 것과 상응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더 셰익스피어화(shakespearisieren)했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당신이 쉴러화(Schillern)한 것, 즉 개인들을 시대정신의 단순한 대변인으로21) 전락시킨 것이야말로 가장 중대한 오류라고 여깁니다.22)

 

문화ㆍ예술에 대한 유물론적인 이해는 맑스-레닌주의에 공통한 것이다. 그러나 맑스ㆍ엥엘스보다 마오 시대의 문예이론은 보다 발전된 결과물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맑스ㆍ엥엘스의 시대에는 부르주아 집단이 문예창작을 주도하고 있었던23) 반면에 마오의 시대에는 이미 무산계급 집단이 창작을 주도하고 있었다. 또 레닌보다도 마오의 문예이론이 풍부하고 생명력 있는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마오가 레닌주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보다 인민대중과 밀접한 구체적인 현장에서 적용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당면 혁명에서 예술을 매개로 한 투쟁의 의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문예창작에 관여하며 이론을 실제 혁명운동에 적용하였다. 이를 위해 마오는 레닌의 이론을 받아들이되 한 번의 도약을 이루어낸다. 레닌은 1902년 발표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혁명이론 없이는 혁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24)는 단호한 선언으로 경제주의자들의 기관지 ≪노동자의 사업≫25)을 비판한다. 이 선언은 마오의 문예론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된다. 간부 교육과 대중교육을 상호구분 또 상호통일하며, 혁명문화를 인민대중의 유력한 혁명적 무기로 간주하고 혁명운동을 이끌 혁명이론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이는 엥엘스의 발자끄론26)을 재음미 해본다면 지나친 비약이라기보다는 충분히 가능한 도약으로 보인다. 그렇게 마오는 문화 전선을 총탄과 포탄이 오가는 무(武)의 전선과 동등한 위상을 지니는 것으로 평가한다.

 

혁명문화는 인민대중의 유력한 혁명적 무기이다. 혁명문화는 혁명 전에는 혁명적 사상의 준비이며 혁명 중에는 혁명의 총전선에 필요한, 하나의 중요한 전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의 문화공작자는 바로 이 문화전선에서의 각급 지휘관이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은 없다”27)라는 말은 혁명의 문화운동이 혁명의 실천운동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표현한 것이다.28)

 

“강화”는 레닌의 “당조직과 당문학(Партий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и партийная литература)”의 노선을 더욱 강고히 견지하고 있다. 마오는 레닌의 지침대로 중국 혁명의 문학예술도 “수천수백만의 근로인민에게 복무”29)해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레닌의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비유30)에 더욱 강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마오는 이를 부정한다면 “정치는 맑스주의적이고 예술은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뜨로츠끼의 이원론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한다.31)

당과 예술 그리고 무산계급의 문화에 대한 뜨로츠끼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 문화와 부르주아 예술, 프롤레타리아 문화와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대립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오류이다. 이 후자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 정권은 임시적이며, 과도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도덕적 숭고함이란, 그것이 계급을 초월한(above classes) 문화, 최초로 진정한 인간적 문화를 위한 초석을 닦는다는 데에 있다.32) (강조는 인용자의 것)

 

당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지도해가지만, 역사적 과정은 이끌어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중략) 예술의 영역은 당이 지도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당이 그것을 보호하고 도울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고 그것을 간접적으로 이끌 수 있을 뿐이다.33)

 

뜨로츠끼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기에 새로운 문화의 창조, 즉 대대적인 역사적 규모의 문화 건설이라는 문제는 있을 수 없다”34)고 주장한다. 그러나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프롤레타리아 예술이 남긴 위대한 성과 앞에서 그러한 주장은 설자리가 없다. 또 뜨로츠끼는 예술에 대한 당의 지도를 분명하게 부정하고 당은 단지 간접적으로 조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레닌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35) 혹자는 레닌이 거론한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다”는 독일속담36)을 근거로 레닌의 입장을 ‘유연성’ 있게 수용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레닌이 굳이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다”는 독일속담을 거론한 이유는 문학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지 ‘문학이 … 사회민주당 작업의 한 요소가 … 되어야 한다는 제안을 반박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37) 또 “당 조직과 당문학”이 당의 공식 문헌38)에 한정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고 이와 관련한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지만 레닌의 본문은 그러한 주장을 무색케 한다. 레닌은 글 전체에서 당 기관지와 당적인 문학ㆍ예술을 이원적으로 고찰하고 있지 않다. 레닌이 곤챠로프의 소설에 빗대어 가며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는다”는 반(半)오블로모프적(полуобломовского)39)이며 반(半)소상인적인 러시아의 원칙의 기반을 무너뜨리길 갈구한다.40) 또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부르주아 작가 양반의 자유가 과연 부르주아 사회의 부르주아 대중과의 관계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지 물으며 ‘절대적 자유’를 ‘부르주아적이거나 무정부적인 문구’라고 논박한다. 그러면서 부르주아 작가나 예술가나 여배우41)의 자유의 위선성과 ‘비계급적 문학과 예술’의 허구성을 폭로한다.42) 그리고 ‘미묘하고 개인적인 문학작업에 집단적인 통제’를 가하는 것에 화들짝 놀라는 자유투사 지식인들에게 당문학이 당에 의한 통제에 종속되어야 함을 단호하게 역설한다. 레닌은 당 외에도 문학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지만 당 문학이 지녀야 할 당파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단호하다. 그래서 당이 반당적 저작에 대해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당적 견해자들을 ‘자유롭게’ 숙청하는 것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43) 마오가 문예이론과 관련하여 집필한 저작들에서는 당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레닌주의적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음은 굳이 재론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마오의 문예이론과 “강화”는 맑스-레닌주의 문예론의 핵심이 녹아있다. 그리고 “강화”는 단순히 고전의 경구를 반복한 교조주의 저작이 아니라 고전을 재탄생 시킨 것이다.44) 그것은 철저하게 역사적인 현실에 기반한 것인데 “강화”가 탄생할 수 있었던 뒷배경에는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쏘련에서의 경험이 있다. 쏘련에서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제1차 5개년계획이 실시되었고 사회주의 경제 확립기에 맞는 새로운 문예정책이 수립될 필요가 있었다. 1932년 4월 23일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문예조직 개편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한다. “문학계에 아직 신경제정책(НЕП) 초기에 살아난 이색분자(異色分子, чуждых  элемент)의 영향력이 심대하여” “당은 모든 수단을 써서 문학과 여타 예술분야의 무산계급 조직을 강화했다”45)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리끼는 1934년의 제1차 쏘비에뜨작가전연방회의에서 문학의 주인공을 노동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으로 삼아야 하며46) 문학의 당적 지도의 철저한 관철을 외쳤다.47) 그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예운동의 성과는 마오의 “강화”에서도 계승ㆍ발전된다. 중국 혁명기에 당의 정치와 예술이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도 단지 레닌의 경구를 되풀이 한 것이 아니라 당과 당의 문예에 있어 확고한 노선을 관철시켜왔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가 반영이 된 것이다.

“강화”의 기념비성은 인민대중과 문예활동가의 관계를 재규명하여 현실의 실천 지침을 제시하였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강화”의 전편을 통해 인민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문예창작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인민대중에게 배우라고 설파하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으로 보이며 그것은 맑스ㆍ레닌과 다른 마오주의의 특징적인 요소로 보인다.48) 그러나 이 역시 마오만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며, 반파쇼 통일전선과 반제민족해방투쟁이 벌어지던 시대의 산물이다. 작곡가로서 반파쇼 투쟁과 통일전선운동에 복무했던 독일의 한스 아이슬러(Hanns Eisler)가 1935년에 대담에서 발언한 내용을 보자. 이는 음악가와 노동자계급 대중의 관계에 대해 철저하게 변증법을 적용한 것이다.

 

우리는 음악지식인(music intellectual)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연대를 맺어야 합니다. 음악지식인은 노동자계급에게서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방법과 혁명적인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은 음악지식인들로부터 새롭고 현대적인 음악의 방법과 함께 위대한 고전음악의 전통을 전수받을 수 있습니다.49)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인민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법을 사용하라는 마오의 지침도 독단적인 조치가 아니다. 일찍이 엥엘스가 1885년 5월 15일 헤르만 쉴뤼터(Hermann Schlüt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가(詩歌, Poesie)가 대중에게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대중의 편견을 재현해야(Wiedergeben) 한다’고 한 바 있다.50) 그리고 마오와 동시대 인물인 1935년 디미뜨로프가 꼬민떼른 7차 대회에서 한 보고를 보자. 그는 스딸린이 볼쉐비끼가 당에 대한 지도와 대중에 대한 지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여, 당에 대한 지도뿐만 아니라 수백만 근로대중에 대한 지도의 과학으로서의 전술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했음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대중에게 이해하기 쉬운 말로 말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 한 우리의 결정을 광범한 대중의 것으로 만들 수 없음을(강조는 원문에 의함) 이야기 한다. 그것은 특히 파쇼의 위협에 맞서 목숨을 건 선전선동 활동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강조되어야 함을 역설한다.51) 마오는 “당팔고에 반대한다”에서 디미뜨로프의 보고를 인용하며 그것이 “꼬민떼른이 우리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내린 약처방”이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임을 강조한다.52) 또 스딸린이 1941년 7월 3일 발표한 연설이 ≪해방일보(解放日报)≫ 사설 한 편 정도 길이의 간결하고 명확한 내용이었음을 거론하며 긴박한 전시에 긴 문장 쓰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나리’53)를 신랄하게 비판한다.54)

마오는 혁명이론의 보편성을 중국 현실에 맞게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관료주의와 정신노동ㆍ육체노동의 분할을 인민 대중에 근거한 대중 노선으로 혁파해 나갈 것을 주장한다. 인민 대중에게서 배우고 인민 대중의 언어로 말하라는 것이 “강화”의 요체이다.55) 그리고 맑스-레닌주의를 단지 학습하라는 것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입장ㆍ태도ㆍ사업대상에 있어 노농병 인민대중과 혼연일체가 될 것을 분명하게 요구56)하고 있다. 그리고 마오는 명료한 언어로 모든 문화공작자에게 인민대중이라는 자신의 문화군대를 가질 것을 요구하며 대중노선을 설파한다. 그러면서 중국 혁명이 건설할 신민주주의 사회는 경제ㆍ정치ㆍ문화의 통합이며 새로운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청사진을 보여준다.57) 바로 여기에 마오 문예이론의 독창성이 있다.

 

 

“강화”와 루쉰

 

맑스-레닌주의라는 이론적 배경과 함께 “강화”의 문학적 원천인 루쉰 문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루쉰은 기로에선 중국 사회의 좌표를 제시한 지식인이다. 그의 문학은 5. 4 운동의 산물이며 또 루쉰 없이는 5. 4 운동을 논할 수 없다. 5. 4 운동은 레닌의 민족자결주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일어난 조선의 3. 1운동에 영감을 얻어 같은 해인 1919년에 일어났다. 여기엔 기본적으로 청년학생과 지식인이 중심이 되었지만 도시지역의 민족자본가와 상인 그리고 일부 노동자계급까지 참여한 중국 최초의 대중적 반제반봉건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58) 베이징에서 폭발한 5. 4 운동은 중국이 구민주주의 혁명에서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이전되는 위대한 대결절점이었다.59) 5. 4 운동 이후 중국에는 공산주의 세계관과 사회혁명론이라는 공산주의적 문화사상이 새로운 문화주력군으로 탄생했다. 5. 4를 기점으로 중국에서 세계무산계급 사회주의 혁명에 속하는 신민주주의 신문화가 탄생했으며 그리고 오늘에 있어서 반제ㆍ반봉건 신민주주의문화는 항일통일전선문화이다.60) 중국 공산당은 바로 5. 4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자신의 발판으로 하여 건설되었고, 마오는 루쉰을 사상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1931년 2월, 24명의 젊은 작가, 배우, 미술가가 체포되어 강제로 자기 무덤을 파게 한 뒤에 처형된 비극이 일어났다. 루쉰은 이에 격분하여 “심야에 쓰다(写于深夜里)”를 썼다. 루쉰을 직접 만난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이때 루쉰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한다.

 

나는 루쉰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는 서재에 있었는데 수염도 깍지 않은 어두운 얼굴에 머리는 헝클어졌고 볼은 푹 패였으며, 열 때문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음성은 깊은 증오에 싸여 있었다.

“이것은 그날 밤 내가 쓴 글이에요.” 그 특유의 에칭과 같은 서체로 쓰여진 원고를 내게 내밀면서 그는 말했다. “나는 이 글 제목을 “심야에 쓰다”로 붙였습니다. 영어로 번역해서 외국에서 발표해 주십시오.”

… 나는 루쉰에게 “만약 이 글을 발표하면 당신은 처형될 겁니다”하고 경고했다.

“도리 없지요. 누군가가 발언해 주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루쉰의 논문 “심야에 쓰다”는 외국에서도 끝내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중국에서 읽은 모든 것 가운데 내게 가장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것은 중국 역사의 가장 어두웠던 밤에 쓰인 열정적인 부르짖음이었다.61)

 

루쉰은 공산당원은 아니었다. 그러나 공산당원은 그의 넓은 교양과 깊은 정신력을 존경하였다. 옌안의 중심지에 공산당은 최초의 루쉰문고를 창설했다. 그리고 후일 공산당은 루쉰 예술학원을 창설했다. 거기에 몇백 명이나 되는 학교 출신의 청년들이 가장 뛰어난 작가나 미술가, 음악가, 배우에 관해서 배우려고 전국의 방방곡곡으로부터 모여들었다. 이 학원이야말로 살아있는 전투적인 예술을 창조했던 학원이었다.62)

루쉰은 여성관에서도 당대의 남성들에 비할 때 상당히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1933년에 쓴 “여성과 국난”에서 여성들의 ‘사치’와 ‘음탕’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 대해 뒤집어 보기를 시도한다. 여성들의 ‘사치’와 ‘음탕’은 사회 부패와 붕괴의 현상일 뿐 그 근본 원인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몇 년 전에 있었던 한국 사회에서 불거졌던 이른바 ‘된장녀’ 논쟁을 기억할 때, 이미 80년 전에 루쉰이 사태의 표면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근본 원인까지 캐어가 정확한 진단을 내린 것은 놀라운 일이다. 또한 루쉰은 성매매가 여성의 책임이 아니라 ‘여성을 파는 사회’, ‘그것을 사는 사람’에 있음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러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상류층 남녀들의 방탕을 보면서 ‘중국에서 노동자들의 세상이 때에 맞추어 올 성 싶은 모양’이라고 예단한다.63) 그리고 그러한 예견은 적중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도 루쉰의 탁견이 빛을 발한다. 엥엘스는 1890년 6월 5일 파울 에른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시대의 입센의 희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의 출세지향적인 여성의 다소 신경질적인 밤일(hysterischen Lukubrationen)에 대해 입센이 과연 책임을 져야 하는지, 또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64) 여기서 ‘신경질적인 밤일’이란 ≪인형의 집≫ 3막 마지막 부분 밤에 이뤄지는 로라의 가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편지에서 엥엘스는 북유럽 여성운동에 대해 자신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하다고 단서를 달고 있지만 엥엘스의 분석은 불충분해 보인다. 반면에 루쉰의 분석은 더욱 구체적이며 핵심을 포착하고 있다. 루쉰은 1924년에 발표한 글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경외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루쉰은 입센이 노라가 집을 나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결코 해답을 주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65) 죽은 입센은 극작가였을 뿐 사회에 해답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지적하며 입센은 여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루쉰은 집을 나간 노라에게는 선택지는 타락하는 길 아니면 다른 하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밖에 없다며 여성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물질적 조건이 필요함을 냉정하게 밝혀내고 있다.66) 그러면서 로라가 경제권을 얻는 문제에서 보편적인 여성해방 그리고 중국의 여성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이를 확장한다. 몇몇 여성이 경제권을 얻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정확히 지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여성해방의 문제를 중국 인민의 투쟁의 보편성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책상을 하나 옮기거나 난로를 하나 바꾸려 해도 피를 흘리지 않고는 불가능함’을 ‘피를 흘린다고 해도’ ‘꼭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을 밝힌다.67) 그러나 좌절해야 한다고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거대한 채찍이 등을 후려치지 않는 한’ 중국이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음을 밝히면서 변혁의 구체적이며 물질적인 동력을 밝혀낸다.68)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짤막한 글에서 이러한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69) 

이러한 루쉰이 마오와 중국 혁명 운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마오와 루쉰의 관계는 레닌과 체르느이셰프스끼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 간에는 차이가 있다. 레닌은 체르느이셰프스끼를 게르? 이후 장족의 진보를 이룬 전투적인 민주주의자이자 공상적 사회주의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심오한 자본주의 비평가로 평가하고 있다.70) 마오는 루쉰을 혁명적 민주주의자로만 본 것이 아니라 루쉰을 진정한 맑스주의자이며 철저한 유물론자로 보았다. 마오와 루쉰의 관계는 레닌과 체르느이셰프스끼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하다. 그래서 루쉰의 잡문(杂文)을 애독하였고 이를 자신의 저작에 즐겨 인용하였고 루쉰으로부터 혁명 운동의 지침을 찾았다. 그리고 그에 그치지 않고 모든 공산당원, 혁명가, 혁명적 문예공작자들의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71) 레닌은 체르느이셰프스끼의 시대를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기(대략 1861년부터 1895년까지)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1895년에서 현재(1914년)에 이르는 레닌의 시대를 프롤레타리아 시기로 구분하며72) 새로운 시대의 선진노동자들과 프롤레타리아 문예 출판물에 주목했다. 반면에 마오는 1942년에도 아직 중국이 잡문의 시대이며 루쉰의 필법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루쉰이 문학의 힘을 역설한 두 편의 단편을 보자.

 

니체는 피로 쓴 책을 읽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피로 쓰인 문장이란 아마 없으리라. 글은 어차피 먹으로 쓴다. 피로 쓰인 것은 핏자국일 뿐이다. 핏자국은, 물론 글보다 격정적이고, 보다 직접적이며 간명하긴 하다. 그러나 빛이 바래기 쉽고 지워지기 쉽다. 문학의 힘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怎么写)” 중에서)73)

 

먹으로 거짓말을 쓴다 해도 피로 쓰인 사실을 은폐할 수 없다. 피의 빚(血债)은 반드시 같은 것으로 갚아야만 한다. 늦게 갚는다면 이자도 그만큼 늘어갈 것이다. (“꽃 피지 않는 장미(无花的蔷薇)” 중에서)74)

 

이 중 후자는 1926년 루쉰이, 맨손으로 청원하던 시민과 학생을 군벌 돤치루이(段祺瑞, 단기서)가 발포를 명령해 학살한 3. 18 사건에 대해 피를 토해내듯 쓴 것이다. 루쉰은 훗날 린위탕(林语堂, 임어당)이 젊은이들에게 정치문제를 부딪쳐 나갈 것을 가르치지 않고 풍자화해 버림으로써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판했는데, 린위탕만큼 풍자에 뛰어나지 않는 젊은이들이 무서운 유혈의 탄압을 얼버무려 빈혈증을 드러내는 하찮은 수필을 쓰고 있다고 개탄했다.75)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루쉰에 대해 먹으로 쓰는 것이라 했다가 피로 써야 한다고 했다가 갈팡질팡 말 뒤집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변증법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루쉰이 쓴 두 편의 글은 모두 ‘피로 쓰인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후자에 있어 루쉰은 ‘피의 빚’을 갚는 것은 등가물에 의해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은 ‘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먹’으로 쓰는 것이기에 피로 쓰인 사실을 동어반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참혹한 현실은 자신의 등가형태 찾아야만 한다.76) 현실에 상응하는 등가물은 단순히 먹으로 쓰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먹으로 쓰인 거짓말”은 더더욱 아니다. 문학의 힘을 빌려서 먹으로 쓰인 글만이 피의 빚을 갚을 수 있으며 지식인ㆍ문필가는 문학의 힘으로 피의 빚을 갚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과 문학에 대한 루쉰의 관점은 아래의 마오의 시각과 일치한다.

 

인류의 사회생활이 … 문학예술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동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인민들은 그래도 전자에 불만족하며 후자를 요구합니다. … 두 가지 모두 아름답기는 하지만 문예작품이 반영해 내고 있는 생활은 보통의 실제생활보다 더욱 수준 높고 더욱 강렬하며, 더욱 집중적이고 더욱 전형적이며, 더욱 이상적이고 그리하여 더욱 보편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77)

 

그렇다. 문학ㆍ예술의 원천은 현실의 사회생활 그 자체이다. 현실이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전도된 인식은 관념론적 세계 인식의 시원(始原)이다. 예술이 불완전한 세계를 더욱 불완전하게 모방한 것이라는 예술 폄하는 플라톤식의 관념론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78) 그러나 그것은 생동하는 현실에서 출발해 그것을 더욱 높게 변혁으로 고양시키는 문예의 힘 앞에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맑스주의자라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물질적인 폭력(Gewalt)은 물질적인 폭력으로 전복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론도 대중을 붙잡을 때 물질적인 폭력이 된다.”79) 전술한 바와 같이 마오는 문예를 혁명이론의 위치로 격상시켰고 그것을 중국인민대중과 결합시킬 것을 요청했다. 그것이 물질적인 힘이 되어 마침내 광야를 사르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이 중국전체를 뒤흔들 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통일전선 전술에 있었다. 마오는 통일전선의 문제에 있어서도 루쉰으로부터 지혜를 빌리고 있다. 루쉰이 1930년에 쓴 “좌익작가연맹에 대한 의견(对于左翼作家联盟的意见)”의 마지막 단락을 보자.

 

끝으로, 나는 연합전선은 공동의 목적을 갖는 것이 필수조건이라 생각한다. 누군가 ‘반동파들조차도 연합전선을 결성하였는데 우리는 아직도 단결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의식적으로 연합전선을 결성한 것은 아니다. 목적이 같아 행동이 일치한 것일 뿐이며, 그게 우리 쪽에서 보면 연합전선으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연합전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목적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징표이다. 아니면 소집단의 목적이나,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목적만을 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목적이 노농대중80)에 있다면, 전선은 당연히 통일될 것이다.81)

마오는 “강화”에 루쉰의 이 글을 인용하여82) 문예의 당파성을 강조하고 통일전선의 의의를 재강조 한다. 통일전선의 핵심은 단결과 투쟁의 통일이다. 통일전선을 계급협조주의와 등치시키는 좌익기회주의 분파의 왜곡과 악선동에 대해서는 통전의 원칙에 대한 마오의 간결한 정리로 대신한다.

 

첫째는 단결이고 둘째는 비판과 교육, 개조다. 통일전선에 있어 투항주의(投降主义)는 잘못된 것이며, 다른 사람에 대해 배척하고 없신여기는 태도를 취하는 종파주의 역시 잘못된 것이다. … 활용 가능한 모든 구지식인, 구예술인, 구식 의사와 연합하여, 그들을 돕고 감화시키고 개조하는 것이다. 개조를 위해서는 먼저 단결해야 한다.83) 

 

인민대중을 위해 복무하는 문예활동가의 임무를 강조함에 있어서도 “사나운 눈초리로 차갑게 뭇사람(千夫)의 지탄에 맞서지만 머리를 숙이고 달게 아이들(孺子)의 소가 되리라84)”는 루쉰의 글을 인용한다. 이렇게 마오는 철저하게 루쉰의 문학관을 현실의 지침으로 삼았고 마오의 문예관은 루쉰에게서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마오는 루쉰의 필법의 무조건적인 모방을 강요하지 않는다. 혁명적 문필가에는 자유를 반혁명분자에게는 억압을 가하고 있는 산시(陕西)ㆍ간쑤(甘肃)ㆍ닝샤(宁夏)와 후방의 항일 투쟁의 해방구에서는 루쉰의 풍자와 조소를 조건에 맞게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일제와 지배계급에 대해 풍자하고 조소해야 하지만 루쉰이 혁명적 인민과 혁명정당을 조롱한 적이 없었음을 분명히 한다.85)

긴박한 투쟁의 시기 옌안에서 루쉰예술학교가 설립되고 또 루쉰의 극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루쉰의 문학이 중국 혁명의 지표였기 때문이다. 루쉰의 문학관은 마오에게 이르러 중국인민과 결합하여 어떻게 새로운 생명을 얻고 또 어떻게 ‘물질적인 폭력’으로 전화될 수 있었는가는 이제 자명해졌다.

 

<계속>

 


 

1) 이하에서 중국어 원문표기는 문자 개혁을 이루어낸 중국혁명의 의의를 이어 받아 되도록 간체자로 표기한다. 단 고전에서 유래한 것, 대만의 것인 경우나 널리 쓰이는 한자어 등에서는 번체자로 표기한다. 본문에서 강화의 원문을 인용할 경우엔 출처는 아래와 같다. (≪신화통신(新华通讯)≫ 웹싸이트

http://news.xinhuanet.com/ziliao/2004-06/24/content_1545090.htm)

 

2) 朱德发 외 편, 임춘성 역, ≪중국현대문학운동사Ⅰ— 신민주주의혁명시기≫, 전인, 1989, p. 219. 당시의 발표는 해방구의 문예 활동가들에 국한되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3) 朱德发, 같은 책, p. 229.

 

4)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제16권, 한국브래태니커회사, 2002, pp. 82-83.

 

5) Ted Allan & Sydney Gordon, The scalpel, the sword : the story of Doctor Norman Bethune, Dundurn Press, 2009; 테드 알렌ㆍ시드니 고든 저, 천희상 역, ≪닥터 노먼 베쑨≫, 실천문학사, 2010, p. 370.

 

6) 테드 알렌ㆍ시드니 고든, 같은 책, p. 371.

 

7) 같은 책, p. 372.

 

8) 마오쩌둥 저, 이욱연 역, ≪모택동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9, p. 93.

 

9) Agnes Smedley, The Great Road: The Life and Times of Chu Teh, Montly Review Press, 1956, p. 386; 아그네스 스메들리 저, 홍수원 역,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두레, 1986, pp. 380-381. 원문을 보고 번역문 수정. 단 오까무라 야스지는 원문도 Yosuji Okamura로 잘못 표기하고 있음.

 

10) 쭝청(宗诚) 저, 김미란 역, ≪딩링≫, 다섯수레, 1998, p. 209.

 

11) 마오쩌둥, 앞의 책, 같은 곳.

 

12) 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강화”,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두레, 1989, p. 64.

 

13) 마오쩌둥, 같은 글, pp. 23-24.  

 

14) 一定的文化.

 

15) “정치는 경제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이다(политика есть самое концентрированное выражение экономики)”라는 구절은 레닌이 “직업동맹, 현 시기 그리고 뜨로츠끼 동지의 오류에 대하여”(Lenin Collected Works, Vol. 32, Progress, 1963, p. 32)에서 비롯한 것이다. 번역 전문은 ≪노동자정치신문≫, 44-46호에 실려 있다. (이하에서 나오는 레닌 저작의 러시아어 원문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인했다.)

 

16) 那一定形态的文化.

 

17) 번역문은 원문을 인터넷에서 확인 한 후 아래 두 개의 번역서를 참조하여 고쳐보았다.

 

원문주소: http://student.nbu.edu.cn/ycIdeology/showNews.aspx?columnID=1026&newsID=14701

 

마오쩌둥 저, 김승일 역, “신민주주의론”, ≪모순론ㆍ실천론(외)≫, 범우사, 2009, pp. 105-106.

 

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신민주주의론”, ≪지구전론ㆍ신민주주의론≫, 두레, 1989, p. 166.

 

18) 1942년 2월 8일 옌안의 간부회의에서 강연.

 

원문은 http://news.xinhuanet.com/ziliao/2004-06/24/content_1544992.htm

 

19) 마오쩌둥, “당팔고에 반대한다”,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p. 83. 역서에는 부랑아(瘪三, 피삼. 발음은 비에싼)에 달려있는 주석이 누락되어 있다. 오역의 위험을 감수하고 번역해보자면 “해방 이전 샹하이 시내에서 특별한 직업이 없이 구걸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보통 매우 말랐다.”

이 표현을 이용하면서 다소 언짢음을 느낄 홈리스 활동가들의 양해가 있기를 바란다.

 

20) 엥엘스, “민나 카우츠키에게 보낸 1895년 11월 26일자 편지”, MEW, Bd. 36, S. 394; 맑스ㆍ엥엘스 저, 김영기 역, ≪마르크스 엥겔스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9, p. 86.

 

21) Sprachrören. Sprachrohr는 오늘날 주로 전성관(傳聲管), 메가폰의 뜻으로 사용된다. 조만영은 ‘전달도구(메가폰)’으로 번역했으나 당시에는 메가폰이 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변인’으로 번역을 바꾸어 보았다.

 

22) MEW, Bd. 29, S. 592; 맑스ㆍ엥엘스ㆍ라쌀레 외 저, 조만영 편, ≪맑스주의 문학예술논쟁≫, 돌베개, 1989, pp. 39-40.

23) MEW, Bd. 36, S. 394; 맑스ㆍ엥엘스 저, 앞의 책, p. 86.

 

24) Lenin Collected Works, Vol. 5, p. 369.

 

원문은 “Без революционной теории не может быть и революционного движения.” 너무나 유명한 이 문구는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 없다”로 번역한 경우도 있으나 위의 번역이 직역이다. 번역은 레닌, ≪레닌 저작집≫ 제1권, 전진, 1988, p. 189. 필자의 번역은 기존의 번역과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일일이 밝히지는 않는다.

 

25) Рабочее Дело(Rabocheye Dyelo). ‘노동자의 대의’로 번역한 경우가 있는데 오역이다. 여기서는 ‘임무’, ‘사업’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26) “나는 심지어 경제적인 세부사항(예컨대 혁명 후 동산 및 부동산의 재분배)에 관해서도 이 시대(1816-1848년의 프랑스, 인용자)를 연구했다는 역사가ㆍ경제학자ㆍ통계학자들 모두를 합친 것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거기에서 배웠습니다. … 이것이야말로 나는 리얼리즘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이며 우리 발자끄 선생의 가장 멋들어진 특징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MarxㆍEngels, On Literature and Art, Progress, 1976, pp. 91-92; 백낙청, “민족문학과 리얼리즘론”,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창작과 비평사, 1990, pp. 710-711.)

 

엥엘스의 발자끄론에 대한 필자의 정리는 “맑스-레닌주의 문학ㆍ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노동사회과학≫ 제2호(2009)를 보라.

 

27) “혁명이론 없이는 혁명운동은 있을 수 없다”를 당시에 중국어로 그렇게 번역했던 모양이다. 没有革命的理论,就不会有革命的运动.

 

28) 마오쩌둥, “신민주주의론”, ≪지구전론ㆍ신민주주의론≫, p. 238.

 

29) Lenin Collected Works, Vol. 10, pp. 48-49; 레닌 저, 이길주 역, ≪레닌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8, p. 56; 마오쩌둥, “강화”,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p. 27.

 

30) Ibid., p. 45; 레닌, 같은 책, p. 52;마오쩌둥, 같은 글, p. 46.

 

31) 마오쩌둥, 같은 글, p. 47.

 

32) Leon Trotsky, Literature And Revolution,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71, p. 14;뜨로츠끼, ≪문학과 혁명≫, 과학과 사상, 1990, p. 17. 또 다른 번역은 슈미트ㆍ슈람 편, ≪사회주의현실주의의 구상≫, 태백, 1989, p. 12.

 

33) Ibid. 32, at. 218; 뜨로츠끼, 같은 책, p. 228.

 

34) Ibid., p. 185; 같은 책, p. 194.

 

35) 이 글의 주제가 뜨로츠끼 문예이론 비판이 아니기에 이 정도로 한다. 단 뜨로츠끼주의가 레닌주의와 대척점에 있듯이 뜨로츠끼 문예이론도 레닌주의에 대한 부정이며 마오의 문예이론도 뜨로츠끼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하겠다.

 

36) Lenin Collected Works, Vol. 10, p. 45; 레닌, 앞의 책, p. 52. “모든 비유는 불완전하다”는 속담의 독일어 원문은 “Jeder Vergleich hinkt”인데 독일어 번역을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확인했다.

 

37) Ibid. 36, at. 46; 같은 책, p. 53.

 

38) литература(literature)는 문학, 문헌 양자의 의미를 모두 지닐 수 있다.

 

39) 오블로모프는 곤챠로프(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동명소설의 주인공으로 19세기 전반 러시아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잉여인간의 전형이다. 이 인?리겐챠는 이전의 긍정적 모습을 상실한 무기력과 무행동의 극치를 보여준다.

 

40) Loc. cit.; 레닌, 같은 곳.

 

41) 레닌이 굳이 여배우를 예시한 것은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42) Ibid., pp. 48-49; 같은 책, pp. 55-56.

43) Ibid., p. 47; 같은 책, p. 54.

 

44) “교조적인 ‘맑스주의’는 결코 맑스주의가 아니고 반(反)맑스주의인 것입니다.” (마오쩌둥, 앞의 글, p. 61.)

 

45) 원문은 http://www.hist.msu.ru/ER/Etext/USSR/1932.htm 영역은 구글번역기를 이용하거나 아래 싸이트를 참조하라. http://www.revolutionarydemocracy.org/rdv8n1/litart.htm 이것을 발췌해서 소개한 것은 陳繼法 저, 총성의 역, ≪사회주의 예술론≫, 1979, 일월서각, p. 175를 보라. 대만에서 나온 반공도서임을 감안하길 바란다.

 

46) 고리끼, “쏘비에뜨 문학에 관하여”, ≪사회주의현실주의의 구상≫, p. 49.

 

47) 고리끼, 같은 글, p. 58.

 

48) 이러한 오해에는 전위와 대중에 대한 왜곡된 인식도 한몫을 하고 있다.

 

49) Hanns Eisler, “Problems of Working-Class Music ― Interview with Hanns Eisler”, A Bebel In Music, Seven Seas Books, 1978, p. 100. 한스 아이슬러 저, 최상철 역, “노동계급 음악의 문제들 — 한스 아이슬러와의 인터뷰”, ≪정세와 노동≫ 제49호(2009년 9월), 노사과연, p. 114.

 

50) MEW, Bd. 36, S. 315; 맑스ㆍ엥엘스, 앞의 책, p. 487. 물론 엥엘스는 이 편지에서 시대를 넘어 생명력을 지니는 혁명가(革命歌) “라 마르쎄예즈”와 달리 챠티스트의 시가에서도 종교적 백치(religiöse Blödsinn)가 나오는 것에 대해 비평가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으며, 인민 대중과 함께 혁명 투쟁을 진행하는 마오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전술했지만 노동계급이 문예운동을 주도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해서 엥엘스와 마오의 차이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51) 디미뜨로프 저, 김대건 편역, ≪통일 전선연구≫, 거름, 1987, p. 180.

 

52) 마오쩌둥, “당팔고에 반대한다”, 앞의 책, pp. 94-95.

 

53) 我们的老爷.

 

54) 마오쩌둥, 같은 글, p. 78.

1941년 7월 3일 스딸린의 연설은 히틀러의 쏘련 침공에 맞서 긴급하게 이루어진 방송연설이다. 곧 반격할 것이라더니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몰래 도망간 이승만과 달리, 스딸린은 전황이 붉은 군대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은 심각한 위기상황임을 솔직하게 쏘비에뜨 인민들에게 알린다. 그러면서 인민들에게 반격의 방안을 제시하며 그 구체적인 전술까지 낱낱이 공개한다. 한 문장 한 단어도 헛되게 쓰이지 않은 이 연설은 ≪월간조선≫ 2000년 4월호에 실려 있다. 굳이 파쇼도당의 기관지를 보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을 잘하면 번역문을 읽어 볼 수 있다.

55) 한형식, ≪맑스주의 역사 강의≫, 그린비, 2010, pp. 323-324.

56) 마오쩌둥, “강화”, 앞의 책, pp. 17-23.

 

57) 마오쩌둥, “신민주주의론”, ≪지구전론ㆍ신민주주의론≫, p. 238.

 

58) 한국사회연구소 편, ≪사회과학사전≫, 1990, p. 540.

 

59) 廖盖隆 저, 정석태 역, ≪중국공산당사≫, 녹두, 1993, p. 29.

 

60) 마오쩌둥, 앞의 글, pp. 220-222.

 

61) Agnes Smedley, Battle Hymn of China, Alfred A Knopf, 1943, pp. 83-84; 아그네스 스메들리 저, 신경림 역, ≪중국혁명의 노래≫, 사사연, 1985, p. 89. ≪중국혁명의 노래≫가 1943년에 8월 23일에 초판이 출판된 것임을 감안하라.

 

62) Ibid. 61, at. 137-138; 아그네스 스메들리, 같은 책, pp. 140-141.

 

63) 루쉰 저, 이욱연 역,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도서출판 창, 1994, pp. 67-69.

 

64) MEW, Bd. 37, S. 411; 맑스ㆍ엥엘스, 앞의 책, p. 71.

 

65) 엥엘스는 1889년 5월 17일 파울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입센의 결말에 대해 이런 식의 열린 결말에 관객들이 익숙지 않다고 언급한다. (MEW, Bd. 37, SS. 212-213; 같은 책, p. 213.)

 

66) 루쉰, 앞의 책, pp. 71-72.

 

67) 오늘날 한국에서도 그러하다. 감옥에 수성펜 하나를 반입하기 위해서 교도소 관계자들에게 생난리에 가까운 항의를 해야만 한다. 감옥에 책을 한 권을 더 넣기 위해서 영치품 담당 교도관과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입씨름을 해야만 한다. 이른바 ‘일반 재소자’들의 경우의 열악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쌍용자동차에서 벌어진 22번째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대한문 분향소를 설치하기 위해서조차 경찰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68) 루쉰, 앞의 책, pp. 74-79.

 

69) 여기까지 루쉰의 여성관에 대한 평가는 필자가 옥중에 있는 이병진 동지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이미 글로 발표했던 것이다(≪정세와 노동≫ 제72호(2011년 10월), pp. 133-134). 여기서는 그것을 다시 손보아 삽입한다.

 

70) Lenin Collected Works, Vol. 20, p. 246; 레닌, 앞의 책, p. 145.

 

71) 마오쩌둥, “강화”,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p. 66.

 

72) Lenin Collected Works, Vol. 20, p. 245; 레닌, 앞의 책, p. 144.

 

73) 루쉰, 앞의 책, p. 183. 루쉰의 이 글은 필자의 졸고(최상철, “쿠바 혁명 50년: 혁명의 매개체로서의 문화ㆍ예술”, ≪노동사회과학≫ 제3호, 노사과연, 2010, p. 224)에서 부정확하게 인용한 적이 있다. 지면을 빌려 과거의 오류를 바로 잡는다.

 

74) 墨写的谎说,决掩不住血写的事实。血债必须用同物偿还。拖欠得愈久,就要付更大的利息!

 

75) Agnes Smedley, op. cit., p. 111; 아그네스 스메들리, 앞의 책, p. 116.

 

76) MEW, Bd. 23, S. 63; 칼 맑스 저, 김수행, 역, ≪자본론≫ Ⅰ-상, 비봉출판사, 2002, p. 61.

 

77) 마오쩌둥, 앞의 글, p. 38.

 

78)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형식으로 저술한 ≪국가≫에서 예술의 전범을 현실을 모방한 시로 설정하고 이를 이데아의 진리에서 멀리 멀리 떨어진 가상을 모방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국가≫ 중에서 시인에 대해 논한 부분만을 떼어놓고 살펴보고 싶다면 천병희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유문화사)의 부록 “플라톤 시론”을 보라.

 

79)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 MEW, Bd. 1, S. 385.

 

80) 工农大众. 노동대중 혹은 농공대중으로도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81) 见鲁迅《二心集·对于左翼作家联盟的意见》(《鲁迅全集》第4卷,人民文学出版社, 1981年版, 第237—238页.); 루쉰, 앞의 책, pp. 183-184. 번역은 원문을 참조하여 번역문을 수정하였다.

 

82) 마오쩌둥, 앞의 글, p. 33.

 

83) 마오쩌둥, “문화사업 중의 통일전선(文化工作中的统一战线)”, ≪모택동의 문학예술론≫, p. 139. 원문은 http://www.marxists.org/chinese/maozedong/marxist.org-chinese-mao-19441030.htm

 

84) 横眉冷对千夫指,俯首甘为孺子牛. 见鲁迅《集外集·自嘲》(《鲁迅全集》第7卷,人民文学出版社, 1981年版,第147页.); 마오쩌둥, “강화”,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p. 66.

 

85) 革命人民和革命政党(마오쩌둥, 같은 글, p. 58). 이등연의 번역에서는 ‘혁명적 인민(革命人民)’이 ‘혁명대중’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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