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맑스주의 전술론 발전의 역사

 

문영찬 ∣ 노사과연 연구위원장

 

 

1. 머리말

 

유럽의 재정위기 등 세계대공황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사회에서도 서서히 정세가 변화하고 있다. 한국의 정세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경향이 부딪히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한-미 FTA 등 지배계급의 압제가 심화되고 또 지난 10여 년의 관성의 반영으로 개량주의가 심화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위기가 강제하는 대중의 불만과 행동의 고조가 부딪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지난 반동의 시기를 견디면서 사회주의의 기치를 고수해왔다는 성과가 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한계와 문제를 노정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쏘련 붕괴의 영향으로 사상 자체가 크게 무너졌다는 것인데 개량주의의 확대는 물론 뜨로츠끼주의, 자율주의, 기본소득론 등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상들이 운동에 많이 침투했다. 사회주의운동은 사상을 핵으로 하여 전개되는 것인데 이렇게 사상이 무너져 있다는 것은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질곡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면면을 보면 소그룹적인 정파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각각의 사회주의 그룹은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는 과학적인 전술을 구사하기는커녕 선전그룹의 수준에 머물고 있고 그나마 존재했던 강령논쟁은 사회주의 진영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열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부 그룹이 추진한 당건설 움직임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는 그들의 당건설 노선이 운동의 현실에 조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건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고한 사상수준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각종의 비과학적인 사상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사회주의 사상 자체의 권위가 대중적으로 무너져 있는 상태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을 위해 사상의 건설이라는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당은 일부그룹이 깃발을 드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선진적이고 혁명적인 역량을 결집하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현 단계 사회주의 운동은 무너져 있는 사회주의 사상을 다시 복구하고 나아가 21세기 현실의 조건에 맞는 사상의 건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상의 건설은 단지 이론의 건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사상의 건설은 현 시기 노동운동을 재건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재건에 필요한 일체의 역사적 과제를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가능한 것이다. 즉, 사상의 건설은 역사적 과제의 충족, 현실의 정치적 실천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현실의 정치적 실천은 전술의 수립과 운용을 말한다. 현실적 전술의 구사 속에서, 전술적 실천 속에서 사상의 건설의 나침반을 세워내고 실천적인 사상의 건설이 가능한 것이다. 당건설의 전망을 세우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전술의 구사에 기반한 사상의 건설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20세기의 무수한 사회주의 운동과 건설의 경험은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전술의 수립과 실천의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맑스주의 성립이후 현실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은 전술원칙의 수립과 그것의 풍부화, 정교화의 역사였다. 역사적 현실이 요구하는 과제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 속에서 맑스주의 전술은 끊임없이 발전했던 것이고 그러한 전술의 성공은 혁명의 승리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국사회주의 운동 또한 강령논쟁의 수준을 넘어서서, 선전써클의 단계를 넘어서서, 노동자계급을 투쟁부대를 넘어서는 정치적 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본격적으로 전술을 수립하고 구사하는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맑스주의 전술론 발전의 역사를 고찰하고 그 속에서 맑스주의 전술원칙은 과연 무엇인가를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전술은 정세에 조응할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정세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집약이 전술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맑스주의는 언제나 전술에 앞서 과학적인 정세분석을 전제하고 있다. 맑스 자신 또한 과학적인 정세분석을 위한 혼신의 노력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술론의 고찰에 앞서 맑스가 성취한 과학적인 정세분석을 고찰하여 맑스주의 정세분석의 원칙을 살펴보도록 하자.

 

 

2. 맑스주의 정세분석론에 대한 고찰

 

맑스주의 정세분석론의 고전으로는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을 들 수 있다. 이 저작은 1848년부터 시작하여 1851년에 루이 보나빠르뜨의 황제 등극으로 막을 내린 프랑스의 혁명을 당대에 서술한 것으로 일종의 혁명사이면서도 동시에 각 계급세력의 치열한 각축과 정치적 진출과 쇠퇴를 보여주고 있다. 혁명적 시기에 각 계급세력들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또 각각의 세력이 반응을 하고 그 가운데 계급적 본질, 계급적 역량이 드러나는가를 뛰어난 필치로 서술하고 있다. 이 저작은 혁명의 요약일 뿐 아니라 뛰어난 정세분석론이다. 정세는 ‘계급역관계’라고 흔히 말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계급역관계’라는 개념이 성립한 것은 전적으로 맑스의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맑스 이전에, 그리고 맑스주의를 제외하고는 정세를 계급역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드물다. 맑스주의만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세의 본질은 각축하는 계급세력들의 역관계라고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은 계급역관계가 과연 무엇인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정의 몰락과 공화제의 성립, 노동계급의 봉기와 패배, 부르주아 의회의 독재, 보나빠르뜨의 대통령 당선과 부르주아 독재의 청산, 의회 내에서 부르주아지에 맞선 소부르주아지의 투쟁, 소부르주아지의 정치적 몰락, 의회적 외피를 쓴 왕정복고세력들의 독재, 왕정복고세력들 내부에서 대립과 그를 이용한 루이 보나빠르뜨의 투쟁, 보나빠르뜨의 승리와 제정의 시작. 이렇게 약 4년간의 프랑스의 혁명은 무수한 정치적 쟁점을 둘러싸고 빠른 속도로 변화해 갔는데 현상적으로는 공화제와 왕정의 싸움, 의회권력과 대통령과의 싸움 등을 보여주지만 실질적으로 그 바탕에는 계급적 본질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맑스는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것은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투쟁은 의회에서의 투쟁이고 나아가 선거를 통한 투쟁이라는 것으로 제한되고 있다. 그리하여 정치는 법률의 제정, 행정권의 행사 등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고 또 그렇게 조작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정치는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압제를 전제로 한다는 것, 노동자와 민중의 무권리를 전제로 한다는 것, 이를 기초로 전개되는 정치는 지배계급의 정치라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라는 것을 맑스는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맑스는 당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표현은 봉기였다는 것,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봉기, 동맹군을 확보하지 않은 노동자계급의 봉기는 고립되어 패배했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고 노동계급을 배척했던 소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지에게 배신당하고 몰락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왕정복고파를 포함하는 부르주아지 내에서의 분파싸움이 의회권력과 행정권력의 싸움으로 전개되고 거기서 행정권력이 승리하여 보나빠르뜨의 제정이 시작되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맑스는 또한 사적 유물론을 적용하여 이러한 모든 정세변화의 토대에 경제적 상황이 작용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맑스의 정세분석은 계급적 정세분석의 고전적 사례인데 그러면 본격적으로 당시의 정치적 쟁점과 그에 대한 각 계급세력들의 태도 등을 중심으로 계급적 정세분석의 실체에 접근해보자.

제1기: 1848년 2월 24일의 루이 필립 왕정의 전복과 1848년 5월 4일의 헌법제정 국민의회의 소집까지의 시기.

루이 필립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제가 만들어졌는데 이 시기는 주도하는 세력이 없었고 모든 것이 임시적인 것이었다. 왕조적 반정부파, 공화파 부르주아지, 민주주의 공화파 소부르주아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이 모두 2월 정부 내에서 임시로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공화제에 대한 해석은 각 세력이 모두 달랐다. 노동계급은 자신들이 무기를 손에 들고 일어나 공화제를 쟁취한 것이므로 그 공화국을 사회공화국이라 생각했는데 이에 대해 노동계급 이외의 모든 세력은 사회공화국을 생각하지 않았고 차츰 노동계급은 고립되기 시작한다.

제2기: 공화제 제정 및 헌법제정국민의회 시기, 1848년 5월 4일부터 1849년 5월 28일까지.

헌법제정국민의회는 공화제를 수립했는데 이는 부르주아 공화제였고 노동계급의 요구는 거부되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노동계급은 6월 폭동으로 응답했는데 노동계급은 여타의 계급들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다. 금융귀족, 산업부르주아지, 중간층, 소부르주아지, 군대, 기동방위대, 지식인, 성직자들, 농촌주민들은 모두 부르주아 공화제를 지지했고 노동계급은 학살과 추방을 당했다. 이 패배로 인해 이후 혁명의 역사에서 노동계급은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이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루이 필립의 부르주아 군주제 다음에 올 수 있는 것은 오직 부르주아 공화제뿐이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는 국왕의 이름으로 부르주아지의 국한된 부분이 지배하였으나 이제는 인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지 전체가 지배할 것이다.”1) 즉, 군주제를 노동계급이 전복하는 데 앞장섰고 그에 따라 노동계급의 요구가 새로운 공화제하에서 실현되기를 바랐지만 객관적으로 도래한 것은 부르주아공화제, 즉,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배제되는 체제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해 노동계급 이외의 모든 계급이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당시의 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엄격하게 평가한다. “일부 프롤레타리아트는 교환은행 및 노동자 협동조합 같은 공론적인 실험에 몰두한다. 다시 말해 낡은 세계 자체가 가지고 있는 거대한 수단들을 모두 이용하여 낡은 세계를 변혁하기를 포기하고 오히려 사회의 배후에서 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제한된 생존 조건들 내에서 자신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운동, 따라서 필연적으로 좌초하기 마련인 운동에 몰두한다”2)고 했던 것이다. 이는 노동계급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고 사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를 변혁하는 길을 걸어야만 하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일체의 무기를 활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이렇게 노동계급의 6월 폭동이 패배하고 노동계급이 정치무대에서 추방된 후에는 공화주의적 부르주아 분파의 지배와 와해의 역사라고 맑스는 쓰고 있다. 즉, “이 분파가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그들이 루이 필립 치하에서 몽상하였던 것처럼 왕권에 맞서 부르주아지가 자유주의적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에 맞선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동이 산탄으로 진압되었기 때문이다.”3) 이 분파의 배타적 지배는 공화제의 헌법의 작성과 빠리의 계엄으로 특징지어지는데 1848년 12월 10일 루이 보나빠르뜨가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이어진다. 이때 만들어진 헌법은 두 개의 권력을 상정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입법의회, 다른 하나는 대통령이었다. 노동계급을 진압한 후에 부르주아지는 이렇게 권력을 분할하여 이후 권력투쟁의 구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의 조카였던 루이 보나빠르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농민들의 압도적 지지 때문이었는데 이는 자본에 의해 억눌리고 수탈당하던 농민들이 보나빠르뜨를 통해 자본에 대항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즉, 나폴레옹 당시에는 부르주아지와 농민의 이해가 일치하고 동맹관계가 성립했다면 루이 보나빠르뜨 당시에는 자본과 농민이 적대적 이해관계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세금, 고리대 등으로 농민을 수탈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대통령인 루이 보나빠르뜨와 질서파(왕정복고파들의 연합)의 동맹과 공화파 부르주아지의 대결이 시작된다. 여기서 공화파 부르주아지는 쉽게 무너지는데 보나빠르뜨가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위협하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부터 공화파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 지배적인 분파가 아니라 단지 일개 분파로 전락했다.

제3기: 입헌 공화제 및 입법 국민의회 시기, 1849년 5월 28일부터 1850년 5월 31일까지.

이 시기는 부르주아 계급 전체와 소부르주아지의 싸움으로 특징지어 진다. 의회에서 소부르주아지를 대표했던 것은 산악파로서 의회의 750석 가운데 200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외국침략을 금지한 헌법에 반하여 프랑스군대가 로마를 포격한 것에 대해 보나빠르뜨를 탄핵하는 동의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이에 대해 의회는 탄핵안을 부결시켰고 산악파는 의회를 나왔고 의회 밖의 투쟁을 하였다. 산악파는 군대가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고 노동계급이 자신들을 지지하여 일어설 것을 기대했지만 지난 6월 폭동 당시에 소부르주아지에게 배신당했던 노동계급은 일어서지 않았고 산악파는 그 결과 정치적 패배를 당하고 추방당했고 빠리는 계엄상태가 되었다. 이들 소부르주아지의 기치는 민주주의였고 따라서 헌법을 위반하는 사태에 대해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있다고 외치며 투쟁했지만 현실은 계급적 질서에 의해 움직였던 것이다. 이들 소부르주아 당파의 패배 이후 의회는 질서파가 지배하게 되었는데 질서파는 보통선거를 폐지하여 자신들의 독재를 강화하지만 내각이라는 집행권력, 행정권력을 보나빠르뜨에게 넘겨주게 되고 이를 기초로 이후 질서파와 대통령인 보나빠르뜨의 대립이 시작된다.

제4기: 의회 내 부르주아지와 보나빠르뜨의 투쟁, 1850년 5월 31일부터 1951년 12월 2일까지.

이 시기는 한편으로 대통령인 보나빠르뜨와 왕조파 연합인 질서파의 대립이면서 실질적으로는 행정권력과 의회권력과의 싸움이다. 일차적으로 의회는 군대통수권을 상실하여 무력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대통령의 권력이 강화된다. 그리고 질서파는 의회에서 다수파의 지위를 상실하고 공화파 및 산악파와 연합한다.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 대중들은 부르주아의회와 부르주아 신문들과 서서히 결별하기 시작하고 이후 행정권력과 의회권력이 공공연히 결별하고 권력의 중심추는 보나빠르뜨에게 집중되고 의회정체 자체가 약화되고 마침내 보나빠르뜨는 황제에 등극한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맑스는 날카롭게 분석을 하고 있는데 의회권력의 성립과 몰락에 대한 맑스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의회에서 소부르주아지가 몰락하고 질서파의 독재가 시작되었을 때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이 다른 사회계급들에 대해서 질서파로서 행사한 지배는 이전 복고왕정하에서나 7월 왕정하에서 행사한 지배보다 더 무제한적이고 더 혹독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무제한적이고 혹독한 지배는 의회공화제라는 형태하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오직 이러한 형태하에서만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양대 부분이 단결할 수 있고 따라서 이 계급의 특권적 일 분파의 통치 대신에 이 계급 전체의 지배를 일정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4) 이러한 맑스의 분석은 의회공화제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하에서 부르주아 계급들은 서로 단결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인민에 대한 지배는 더욱더 철저해지고 가혹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경우 과거 파시즘하에서 부르주아지는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로 분열되어 있었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반파쇼 투쟁으로 민중 블록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과거 파시즘하에서 한국의 정치질서는 매우 불안정했는데 민주화되었다는 지금,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하에서 한국의 정치질서는 과거에 비해 매우 안정되었고 따라서 부르주아지의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지배는 더욱더 철저해졌고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이 더욱 고도화되었는데 이는 맑스가 분석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한편 맑스는 의회제의 몰락의 원인을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로부터 파악하고 있다. “국민의회가 국가 행정을 간소화하는 동시에 관료군을 최대한 감축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끝으로 시민 사회와 여론으로 하여금 정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독자 기관을 만들어 내게끔 하지 않는 이상, 장관들의 임면을 좌우할 힘을 상실하면서 일체의 현실적 영향력을 상실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물질적 이해는 바로 그 광범위하고 복잡다기한 국가기구의 유지와 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과잉인구를 국가기구에 취직시킴으로써 이윤, 이자, 지대, 보수의 형태로 챙길 수 없는 것을 국가 봉급이라는 형태로 보충한다. 한편 자신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탄압을 나날이 강화해야만 했고 따라서 국가권력의 수단과 인원을 나날이 증대해야만 했다. … 이처럼 프랑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한편으로는 모든 의회권력의 존립조건들, 따라서 또한 자기 자신의 의회권력의 존립조건들을 파괴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과 적대하는 집행권력을 거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5)

즉, 루이 보나빠르뜨는 농민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되었지만 점차 부르주아지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의회권력에 맞서는 집행권력의 강화에 대한 지지를 획득하고 끝내는 정치적 불안정보다 확고한 안정을 원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선택을 받아 제정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변동에서 주목할 것은 일차적으로 노동계급이 정치무대에서 추방되었다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소부르주아가 의회에서 몰락했다는 것이다. 민중부분을 대표하는 이 양대세력이 몰락한 것이 보나빠르뜨 제정 성립의 전제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1848년 혁명의 귀결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요구는 있었지만 사회변혁의 전략이 없었다는 것, 동맹군을 확보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상태였다는 것,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변혁의 핵심적 추진력이 약한 상태에서 소부르주아지, 공화파 부르주아지가 차례로 몰락하고 나아가 의회권력 자체가 집행권력에 패배하고 집행권력의 승리가 제정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사의 요약, 그리고 정세분석은 한국 사회의 변혁전략의 수립, 전술의 수립과 운용에서 긴요한 것이다. 계급세력들의 관계에 기초하여 전략을 수립하고 그러한 관계의 변화, 즉, 정세에 기초하여 전술을 수립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의 성장을 극대화하고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변혁의 전망에 대한 동의를 다른 계급들로부터 확보하여 동맹군을 확보하는 것, 바로 이러한 것이 부르주아 정치, 소부르주아 정치와 구별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인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정세분석의 방법론을 조금 더 심화시켜 보자. 기존에 한국의 사회주의 진영에는 일정한 정세분석 틀이 있었다. 먼저 사적 유물론의 원칙에 따라 경제적 토대에서 변화를 분석하여 토대가 안정되었는가 위기에 처해 있는가, 경제상황에 따라 민중의 불만이 증대되는가 아닌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적 토대에 기초하여 경제적 대립투쟁이 성장하는가 여부가 분석되어야 한다. 경제투쟁의 증대 여부는 대중의 불만이 증대되는가의 척도이고 나아가 대중의 행동성이 고조되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셋째, 경제적 토대, 경제적 대립투쟁에 기초하여 정치적 투쟁이 상승하는가가 중요하다. 객관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고 있는가, 그 쟁점에 대한 각 계급세력들의 태도는 어떠한가가 정세의 척도인 것이다. 이 세 번째의 정치적 대립투쟁의 진전 정도가 직접적으로 정세를 규정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대중의 불만이 고조되더라도 정치적 투쟁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지배계급은 얼마든지 위기를 넘기고 체제를 재편할 여유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맑스주의자의 과제는, 사회주의적 전위의 과제는 대중의 고조되는 불만에 기초하여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입장을 각인하고 그러한 혁명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조직, 투쟁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세분석 방법론은 일정한 과학성은 있지만 현 정세에서 보면 한계가 있다. 즉, 지금의 정세에서 보면 세계정세와 한국의 정세의 연관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이다. 세계대공황이 강제하는 지금의 현실에서 일국의 정세를 세계정세와 통일시켜 파악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 신식민지 국가로서 제국주의적 규정성이 강하고 따라서 제국주의 지배질서의 변동은 직접적으로 한국의 정세를 규정한다. 최근의 한-미 FTA가 첨예한 계급투쟁의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렇게 정세분석 방법론이 확장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경제적 토대, 경제적 투쟁, 정치적 대립투쟁 이외에 세계정세, 동아시아 정세가 정세분석에 포함되어야 하고 더불어 제국주의적 규정성을 담는 정세분석틀이 보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가권력은 미제의 괴뢰가 아니라 예속적 독점자본의 권력이라는 점에서 정세분석의 핵심은 한국의 국가권력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정치투쟁의 성장여부이다. 이를 초점으로 여타의 정세분석의 접근이 보완되고 풍부화되는 것이 올바른 정세분석의 방법론일 것이다.

 

 

3. 레닌 단계의 전략, 전술론

 

레닌은 “칼 맑스”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맑스주의의 전술론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공산당 선언”은 정치투쟁의 전술에 대한 근본적인 맑스주의 원칙을 진전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은 당면목표의 획득을 위해, 노동계급의 즉각적 이해의 강화를 위해 싸우지만 현재의 운동에서 그들은 또한 운동의 미래를 대표하고 고려한다.’” “맑스가 이 저작에서 수행되기를 원했던 정신은 가장 암울한 반동의 시기인 1856년에 독일에서의 상황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 보여진다: ‘독일에서 전체적인 것은 농민전쟁의 어떤 제2판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달려 있을 것이다.’”6)

이러한 맑스주의 전략, 전술론에 기초하여 레닌은 러시아의 상황에서 맑스주의 전략, 전술론을 한 단계 상승시키고 정교화한다.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이하 ≪두 가지 전술≫)은 제1차 러시아혁명을 앞둔 볼쉐비끼당의 전술을 정립한 것이다. 이러한 전술은 멘쉐비끼의 전술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수립된 것이었는데 레닌은 멘쉐비끼의 전술의 특징을 “과정으로서의 전술”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과정으로서의 전술”이 아닌 “계획으로서의 전술”을 대치시키면서 당시 정세에 대한 평가, 정치투쟁의 쟁점,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적 목표, 전술적 슬로건 등을 제기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라는 사상 혹은 전술원칙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전술”은 일종의 단계론으로 하나하나씩 단계를 밟아 투쟁을 상승시킨다는 것인데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현재의 정치적 쟁점, 당시에는 헌법의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고 자신의 혁명적 입장을 대치시킬 기회를 상실한다고 레닌은 비판하고 있다. 레닌은 “계획으로서의 전술”은 부르주아 혁명을 노동자계급이 주도하여 부르주아지의 유약성과 동요를 무력화시키고 노동자계급이 농민과 동맹하여 노동자ㆍ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제헌의회의 수립과 이를 위한 임시혁명정부를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면 레닌주의 전술론의 고전인 이 저작을 고찰하면서 맑스-레닌주의의 전술원칙은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살펴보자. 먼저 레닌은 전술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당의 전술이란 당의 정치행위, 혹은 그 정치활동의 성격, 방향, 방법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다. 전술적 결의안들은 새로운 임무와 관련하여, 혹은 새로운 정치상황을 고려하여 총체로서의 당의 정치행위를 정확하게 규정하기 위하여 당대회가 채택하는 것이다.”7) 레닌은 간략하게 전술을 총체로서 당의 정치행위라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상황을 고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는 맑스주의 전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먼저 전술은 새로운 정치상황 혹은 새로운 임무와 관련된 것이다. 즉, 변화된 정세에 대한 평가에 기초하여 요구되는 새로운 임무를 정식화하는 것이 전술의 요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술은 정세에 조응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 둘째, 전술은 총체로서 정치행위이다. 즉, 전술은 일정한 정치상황, 정세에 대해 어떤 부분적인 행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방침을 정하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인 행위도 일종의 전술이지만 그것은 총체로서 전술이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술을 수립한다는 것은 총체적인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총체적인 접근은 당연히 해당 정세에 있어서 목표, 전술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과정으로서 전술이 아니라 계획으로서 전술이라는 관점을 채택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전술적 목표를 설정하는가에 의해 전술방침은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목표에 의해 동맹군, 예비군, 주요타격방향(무력화해야 할 대상) 등이 설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적 실천, 정치행위의 집약으로서 대중에게 제시할 전술적 슬로건을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레닌주의의 전술에 대한 정의의 대체적 윤곽이다. 그러나 이를 좀 더 정교화한다면 특히 한국사회의 경험을 녹여서 본다면 ‘전술은 해당 정세에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태도를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이 무엇인가를 먼저 정리하고 그러한 쟁점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어떤 정치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정세는 퇴조기, 고양기, 혁명적 정세 등 다양할 수 있고 그에 따라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도 단일한 쟁점부터 다양한 쟁점으로, 권력의 문제로부터 기타 정치적 쟁점 등으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은 다양할 수 있다. 따라서 전술수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일차적으로 어떤 쟁점들이 형성되고 있고 그러한 쟁점들을 관통하는 본질은 무엇이고 어떤 것이 현 정세를 집약적으로 나타내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쟁점이 객관적으로 다양할 때는 어떤 단일한 태도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쟁점에 깊숙이 결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정치적 쟁점의 파악과 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 후에는 그러한 태도를 현실화하기 위한 조직, 투쟁형태, 슬로건 등 구체적인 전술이 나와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전술의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전술과 선전의 차이를 규명해보자. 레닌의 말을 잠시 옮겨보자. “설사 ‘권력쟁취’ 일반 등에 관한 문제라 할지라도 결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최신의 문제들을 젖혀 놓은 당대회의 행동은 과연 올바른 것인가? 의심할 나위 없이 올바르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정치상황은 그런 문제들을 전혀 현재의 일정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체 인민이 일정에 올린 것은 전제정부의 전복과 제헌의회 소집이다. 이러저러한 문필가들이 때에 맞건 안 맞건 건드려 본 문제들이 아니라 그 시기의 조건들에 의해, 그리고 사회발전의 객관적인 진행의 결과로서 중대한 정치적 의의를 지닌 문제들을 해결할 것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당대회이다.”8) 이 부분에는 선전과 전술의 차이가 잘 녹아 있다. 선전은 ‘권력쟁취 일반’을 말하는 것이다. 즉, 짜르를 타도하고 민중권력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시의 정세에서 선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의 결정은 그러한 층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즉, 객관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는 짜르의 전복과 헌법의 제정 문제가 정치적 쟁점인 것이고 당대회의 전술은 이러한 쟁점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 볼쉐비끼는 짜르의 타도, 제헌의회의 소집을 전술방침으로 정한 것이고 이를 위해 임시혁명정부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임시혁명정부는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제헌을 혁명적 방식으로 하기 위한 경로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선전과 전술의 차이다.

그러면 여기서 전술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전략과 전술의 차이를 논해 보자. 레닌의 ≪두 가지 전술≫에서는 전략과 전술이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즉, 레닌 단계에서는 아직 전략과 전술의 명료한 구분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전술≫에서 전술이라고 이야기되는 많은 것들이 실은 전략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구분이 필요한 것은 전술은 전략에 기초하여 성립되기 때문인데 즉, 먼저 정확한 전략, 사회변혁 전략을 수립할 때만 올바른 전술의 수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회성격의 분석, 변혁의 성격, 계급세력의 배치 등은 전략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당시 러시아를 예로 들면 당시 러시아 변혁의 성격이 부르주아 혁명인가, 사회주의 혁명인가는 전략의 층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한 동맹군을 설정하는 것도 전략에 해당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레닌은 농민을 동맹군으로 하고 부르주아지를 무력화해야 한다고 했고 멘쉐비끼는 부르주아지를 동맹군으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전략의 층위에 해당하는 논쟁이다. 그런 점에서 전략은 계급세력의 배치가 핵심이다. 이렇게 계급세력의 배치를 확정해야 해당 정세에서 올바른 전술의 설정이 가능하다. 즉, 전술은 계급세력배치를 기초로 전술적 목표, 전술적 슬로건, 투쟁과 조직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물론 전술은 전략에 봉사한다는 점에서 전략과 전술은 상호침투한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데 해당되는 쟁점이 전략의 문제인지, 전술의 문제인지는 실천에 있어서 많은 중대한 차이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닌이 이를 구분하지 않고도 실천에서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를 전제로 보면 전략은 보다 큰 전술이라 할 수 있고 전술은 보다 작은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혁명에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이 전술이라고 하면 전략은 큰 전술이라 할 수 있고 또 흔히 전략적 결단이라고 하는 많은 사례들은 실은 전술적 결정인 것이 태반인 것이다. 이렇게 전략과 전술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상호간의 연관과 침투를 정확히 하는 것이 전략과 전술의 수립과 운용에 있어서 필요하다.

그러면 이번에는 강령과 전술의 차이를 논해보자. 먼저 레닌의 언급을 들어보자.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의 객관적 조건들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과제들에 합치하는, 이 정부의 행동 강령을 적시해야 한다. 이 강령은 우리 당의 최소강령 일체이자, 한편으로는 현재의 사회관계와 경제관계의 기반 위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다가올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의 강령이다.”9) 여기에는 최소강령의 의의가 잘 드러나 있다.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 현재의 사회관계와 경제관계의 기반위에서 실현가능하고 사회주의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것이 맑스주의에서의 최소강령인 것이다. 그러면 강령과 전술의 차이는 무엇인가? 강령은 목표이고 전술은 행동의 지침인가? 그런데 강령 또한 목표이면서도 행동의 지침이 아닌가? 따라서 행동의 지침인가 여부만으로 강령과 전술을 구분하는 것은 부족하다. 강령도 행동의 지침이고 전술도 행동의 지침이지만 둘의 차이는 정세에 의해 규정되는가 여부이다. 강령은 정세가 아니라 사회변혁의 성격에 의해, 전략단계에 의해 규정되는 목표이다. 그러나 전술은 정세에서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계급투쟁의 쟁점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를 결정하고 그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과 투쟁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당 정세에서 강령이라는 목표를 향해 운동해가는 노동계급의 방향과 진로, 힘이 전술이라 정리할 수 있다.

또한 레닌은 전술을 단지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는 것에 국한하지 않고 그러한 태도를 현실화할 조건까지 포함하여 전술의 문제를 전개하고 있다. 먼저 레닌의 언급을 보자. “위로부터의 행동에 관한 사상을 선전하고, 가장 정력적으로 공격적인 행동을 준비해야 하며, 그러한 행동의 조건과 형식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한 조건들 중 대회의 결의안은 두 가지를 최우선적인 것으로 내세우고 있다. 하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임시혁명정부에 참여하는 것의 형식적 측면(당 전권 대표들에 대한 당의 엄격한 통제)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참여가 갖는 성격 자체(완전한 사회주의변혁이라는 목표를 단 한순간도 간과하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다. … 어떤 경우이건 우리에게는 임시혁명정부에 아래로부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이러한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장해야 하며 ―혁명적 시기에는 사태가 직접적인 내전으로까지 매우 급박하게 치달을 수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10) 여기에서 레닌은 위로부터의 행동과 아래로부터의 행동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위로부터 행동을 부정해서는 안 되며 의식적으로 위로부터 행동을 준비하고 실현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 행동의 조건으로서 아래로부터의 행동, 특히 혁명적 시기에는 무장력이라는 조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건’이라는 개념인데 전술의 본질이 정세 속에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에 대한 태도의 결정이라면 그것의 실현을 위한 조건의 탐색이 전술의 범주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레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전술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술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데 레닌은 소부르주아적 전술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술의 정치적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협의회는 자신들의 결의안에 의해 자유주의 군주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수준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려가고 있다. 당대회는 자신들의 결의안에 의해 혁명적 민주주의 요소, 즉, 거간행위를 할 능력이 아니라 투쟁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혁명적 민주주의분자를 자신의 수준으로 의식적으로 끌어올리고 있다.”11) 이것이 어떤 전술을 취하는가의 실천적 의미이다. 민주주주의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를 승인하는 멘쉐비끼의 전술은 스스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반해 볼쉐비끼의 전술은 혁명적 민주주의자의 수준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전술이 어떠한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사회를 보면 민주대연합이라는 소부르주아전술을 사용하는 NL파는 국민참여당 등의 3자 통합을 통해 복지국가라는 자유주의적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는 반면 노동계급은 반자본주의 연합전선전술을 통해 소부르주아지를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입장으로 견인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트의 올바른 과학적 전술의 운용여부는 현실정치에서 엄청난 차이를 낳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계급을 과학적 전술로 무장시키는 것은 더 이상 지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를 넘어서는 전망에 대한 고민도 중요하지만 현실의 직접적인 정치적 실천, 총체적인 계획에 입각한 전술의 운용은 즉각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 전략과 전술의 상호관계에 대한 레닌의 언급을 더 들어보자. “맑스주의자들은 단연코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확신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러시아에 필요불가결한 일이 된, 사회-경제적 개혁과 정치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이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의 훼손, 부르주아지 지배의 훼손을 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런 개혁이 자본주의의 폭넓고 급속한 발전, 아시아적 발전이 아닌 유럽적 발전의 기반을 처음으로 진정하게 닦을 것이며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처음으로 가능하게 만들 것임을 의미한다. … 이 진리를 주장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당에게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정치적으로도 지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 현재의 ‘일반민주주의’ 운동에서 완전한 계급적 독자성을 가져야할 의무가 이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12) 여기에서 레닌은 명시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성, 부르주아 혁명이 자본주의 발전을 가속화할 것이라는 것, 그렇게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독자성을 완전히 가져야 한다는 사상이 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적 독자성의 사상은 당연히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사상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전술은 전략에 기초해야만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의 발전법칙에 입각하여 성립하는 전략, 전략에 입각하여 성립하는 전술, 그리고 헤게모니의 사상, 이렇게 레닌주의 전술론은 발전했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과 전술의 원칙으로서 헤게모니 사상은 지금의 NL파의 민주대연합론을 통박한다. 정치적 독자성을 버리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수준으로 내려가고 있는 NL파들은 과연 무엇이라 말하려는지? 한국의 당면 변혁은 민족민주적 과제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변혁이다. 그리고 그러한 민족민주적 과제 즉, 미제국주의 축출, 국가보안법의 폐지, 민족 통일 등은 노동계급이 주도하지 않는 한 실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들이 미제축출, 국가보안법 폐지를 방기하거나 막고 있다는 점을 비판해야 하며 한-미 FTA 국회비준의 공범임을 비판해야 한다. 당면 투쟁 하나하나에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확립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있을 때만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사상은 소부르주아적인 정치적 욕심과 구별되어야 한다. 레닌은 계급세력에 대한 분석, 사회성격에 대한 분석을 통해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부르주아 혁명임에도 우유부단하고 동요한다는 것을 드러내었고 그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혁명적 방식으로 진행될 때 노동계급이 “무기를 한쪽 어깨에서 다른 어깨로 옮기는 것” 즉, 혁명이 제공하는 무기를 부르주아지를 향해서 사용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다. 한국의 상황에서도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는 단순한 당위가 아니다. 현실의 정치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민족민주적 과제에 대해서도 우유부단한 세력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변혁운동에 대한 탄압세력이라는 것을 폭로해야 하고 또한 소부르주아지의 개량주의 노선이 노동계급의 전진과 변혁운동의 발전을 질곡하고 있고 사회주의 변혁에 대한 배신적인 노선이라는 것을 폭로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적으로 즉, 한편으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해, 다른 한편으로는 개량주의적인 소부르주아 상층에 대해 이중적으로 맞서 싸우면서 노동계급은 정치적 독자성과 헤게모니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 것이다. 이렇게 한국에서 노동계급의 독자성과 헤게모니를 강조하는 것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데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투쟁을 주도하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용해되지 않기 위한 필수조건이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노동계급이 당면 변혁에서 동맹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현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주도로 확대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운동이 용해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리하여 개량주의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노동계급의 독자성과 헤게모니 사상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에게 더 이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장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 특히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을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대는, 국가보안법의 철폐는 노동계급의 주도성과 헤게모니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레닌이 정식화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과 헤게모니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레닌에게 있어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사상은 당면 변혁, 전체운동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의 문제로 발전한다. 레닌의 말을 들어보자. “협의회의 모든 결정들은 우리가 추적해 온 일반적 사상, 즉 부르주아 혁명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전문적인 활동만을 해야 하며 전체 민주주의 운동을 지도하고 그 운동을 독자적으로 실행한다는 목표를 세워서는 안 된다는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경제주의자들’이 항상 경제투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몫이고 정치투쟁은 자유주의자들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빗나갔던 것같이, 신불꽃파는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하는 전 과정에서 부르주아 혁명에서 떨어져 한 구석에 겸손하게 있는 것이 우리의 몫이고 그 혁명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빗나가고 있다.”13) 여기에서 레닌은 노동계급의 독자성과 헤게모니를 ‘지도’의 문제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의 민주주의운동을 노동계급이 지도해야 한다는 사상을 레닌은 피력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에서 미제축출, 국가보안법의 폐지, 민족통일 등 미완의 민족민주과제는 더 이상 부르주아지에게 맡길 수 없고 오직 노동자계급과 전 민중의 단결된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노동계급은 단순한 투쟁부대를 넘어 전 민중의 투쟁을 지도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가계급 전체에 반대하는 반자본주의 전선의 건설에서도 노동계급은 주도성을 넘어 지도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도는 자임한다고 성립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계급이 지도력을 갖추기 위한 강고한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변혁의 전망에 대한 과학적 노선의 수립, 사회주의 전위당의 건설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지도의 사상을 전제로 하면서 동맹의 문제로 넘어가 보자. 동맹군을 확보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사회변혁 전략에 있어 필수이다. 어떠한 동맹군을 선택하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가에 따라 자본가계급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힘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멘쉐비끼는 부르주아지를 동맹군으로 선택했는데 멘쉐비끼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협의회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임시정부를 구성하거나 거기에 참가한다면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당에 실망한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이 당에서 떠나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당은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사회주의의 실현이라는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요구까지는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의 대의에서 물러서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혁명의 강도를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14) 이러한 멘쉐비끼의 입장에 대해 레닌은 통렬히 비판한다. “결국 여기, 우리 앞에 신불꽃파의 철학이 순수하고 일관된 형태로 전부 드러나 있는데 그 철학은 혁명이 부르주아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르주아적 저속함을 예찬하면서 길을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참여로 부르주아지가 물러서게 될 수도 있다는 식의 생각을 일부분이라도 그리고 일순간이라도 우리가 따른다면 이로써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전부 양보하는 것이다.”15) 여기서 레닌은 동맹의 원칙을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지가 혁명에서 물러나 혁명의 강도가 약화될 것이라는 멘쉐비끼의 주장은 부르주아지의 저속함에 노동계급이 양보하는 것이고 혁명의 주도권을 내주는 것이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멘쉐비끼는 당면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를 당연히 동맹군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심지어 부르주아지에게 주도권까지 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혁명임에도 철저하지 못하고 동요하며 따라서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무력화시키고 대신에 광범한 인민을 구성하는 농민과 동맹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동맹의 원칙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데 혁명의 성격은 객관적으로 사회발전 단계에 의해, 계급적 지형에 의해 주어지지만 동맹을 파악하고 선택하는 것은 멘쉐비끼와 같이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궁극목표인 사회주의 변혁의 전망을 앞당길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한다는 전망하에 동맹군을 선택하는 전략을 수립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혁명에서 부르주아지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무력화시키고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수립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동맹의 원칙이면서 동시에 민주변혁의 사회주의변혁으로의 성장전화라는 경로를 세운 것이기도 하다. 정리하면 동맹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주어지는 사회변혁의 성격을 기초로 노동자계급의 궁극목표인 사회주의 변혁의 승리를 앞당기는 데 필요한 세력을 동맹군으로 편제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동맹으로서 농민과 부르주아지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농민의 동요는 부르주아지의 동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농민은 당면한 시기에 사적 소유를 절대적으로 보전하기보다는 이 소유의 주요한 형태들 중의 하나인 지주의 토지를 빼앗는 데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사회주의적으로 되어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농민은 민주주의 혁명의 완전한 지지자, 가장 급진적인 지지자가 될 수 있다.”16) 이러한 레닌의 분석은 동맹군의 선택에 있어 최고도의 엄밀성을 보여주는데 한국의 당면한 사회주의 변혁에서도 동맹군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각 동맹군의 특성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그리고 그들의 계급적 요구를 노동계급이 수용하는 데 있어서 어떠한 원칙을 세워야 하는가를 시사한다. 이러한 동맹의 문제는 엄격하게 말하면 전술의 영역이 아니라 전략의 영역이다. 동맹군의 선택은 정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성격, 사회발전 단계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맹의 선택이 전략의 영역일지라도 그러한 동맹을 현실화하는 것은 전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레닌주의의 전술론의 핵인 ≪두 가지 전술≫에 대한 고찰을 마무리 하고, 레닌의 원숙기의 저작인 ≪공산주의에서 좌익소아병≫에서 드러난 레닌주의 전술원칙을 살펴보자.

레닌은 볼쉐비끼의 성공의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철같은 규율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강철같은 규율이 가능하기 위한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곧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규율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그 규율은 어떻게 검증되는가? 그것은 어떻게 강화되는가? 첫째,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의식성에 의해서, 그리고 혁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 곧 전위의 끈기와 자기희생 및 영웅적 행동에 의해서이다. 둘째, 일차적으로 가장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뿐만 아니라 비프롤레타리아 근로인민 대중들과도 연결을 갖고 가장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며, 그리고 당신들이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융합할 수 있는 전위의 능력에 의해서이다. 셋째, 이 전위가 발휘하는 정치 지도력의 올바름에 의해서인 바, 이것은 가장 광범한 대중들이 자신들의 경험으로써 그 전략 및 전술의 올바름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이러한 조건들 없이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하여 사회 전체를 변혁시키고 말 선진계급의 당이 진정으로 될 수 있는 혁명적 당의 규율이란 이루어질 수 없다.”17) 레닌은 이렇게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철같은 규율을 볼쉐비끼가 성공한 근본적인 한 조건으로 들고 있다. 이는 현실적인 계급투쟁에서 전위당의 힘은 강철같은 규율에서 나온다는 것이고 이러한 강철같은 규율이 지식인 그룹의 느슨한 써클이나 아니면 멘쉐비끼와 같은 느슨한 조직과 달리 볼쉐비끼가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근본조건이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율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아가 뛰어난 어떤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규율은 전위의 의식성, 대중과의 결합능력, 그리고 올바른 전략전술을 요소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전략, 전술의 올바름은 정치지도력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것으로 현실적인 강철같은 규율은 전략, 전술을 통한 현실적인 운동 가운데에서 생성되는 것임을 레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파악은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정치운동과 근본적으로 비교되는 것으로서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근본요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닌은 볼쉐비즘이 노동운동 내의 어떤 적들에 대한 투쟁에서 발전되고 강화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1914년 사회배외주의로 결정적으로 발전하고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결정적으로 부르주아지 편이 되었던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이것이 노동운동에서 볼쉐비즘의 가장 큰 적으로 남아 있다. … 볼쉐비끼 활동 가운데에서 이 측면은 지금은 해외에서도 꽤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 내의 볼쉐비즘의 다른 적에 있어서는 사정이 다르다. 볼쉐비즘이, 무정부주의의 냄새가 나거나 무정부주의로부터 무엇인가를 빌려오며 그리고 모든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 일관성 있게 프롤레타리아적인 계급투쟁의 조건들과 요구들에 부합하지 못하는 쁘띠 부르주아 혁명주의에 대한 오랜 투쟁 속에서 모습을 갖추고 발전, 단련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들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18) 즉, 볼쉐비끼는 멘쉐비끼라는 기회주의적 조류와의 투쟁을 통해서만 단련되어 온 것이 아니라 쁘띠 부르주아적 혁명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도 단련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쁘띠 부르주아적 혁명주의는 무정부주의와 친화성을 갖고 프롤레타리아적 계급투쟁의 요구와 조건에 일관성 있게 부합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공포 때문에 ‘광란상태로 내몰리는’ 쁘띠 부르주아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이 현상은 무정부주의처럼 모든 자본주의 나라의 특징이다. 그와 같은 혁명주의의 불안정성, 그것의 불모성, 그리고 굴종, 무관심, 환상, 심지어 이런저런 부르주아적 ‘변덕’에 대한 ‘광란적’ 심취로 빠져들어 가는 그것의 경향― 이 모든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다.”19) 즉, 쁘띠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에 의해 몰락으로 내몰리는 계급으로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경향을 갖기는 하지만 그들의 혁명성은 불안정하며 심지어 불모성이 있고 광란으로 내몰리기도 한다고 레닌은 말하고 있다. 이러한 조류의 대표적인 것이 무정부주의와 러시아의 사회혁명당이라고 레닌은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운동은 부르주아지에게 굴종하는 기회주의와 투쟁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이기는 하지만 프롤레타리아적 일관성과 단호함을 갖지 못하고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 대해서도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민족민주적 과제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변혁을 당면과제로 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개량주의라는 기회주의와 맞서 싸워야 하는 과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겁나게 혁명적인 구호를 내세우지만 한국사회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결여하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조건에 대한 일관되지 못하고 심지어 환상적인 조류들, 좌편향 등에 대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운동 내에서 소부르주아적 혁명주의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소부르주아지는 끊임없이 몰락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편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노동계급의 대열 내로 갖고 들어오는 소부르주아적 급진성과 비일관성, 변덕, 불안정성과 싸울 때만 일관되고 강철같은 규율로 무장된 사회주의 운동의 건설이 가능한 것이다. 혁명을 사고하는 사람에게 있어 개량주의는 쉽게 파악된다. 그러나 소부르주아 혁명주의는 하나의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소부르주아 혁명주의에 대해 한편으로는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견인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오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레닌은 공산주의에서 좌익소아병을 비판하면서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비판하고 부르주아 의회를 활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비판한다. 레닌의 말을 잠시 들어보자. “그들은 전부는 아니지만 숱한 혁명들의 경험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그 경험은 혁명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반동적인 의회 밖의 대중행동과 혁명에 동조하는 (또한 더 좋은 것으로는 혁명을 직접 지원하는) 의회 내 반대파의 결합이 매우 유용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인과 ‘좌익’ 일반은 이 점에서 혁명의 교조주의자들처럼 생각하고 있다.”20) 사회주의자의 목표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절하기 위한 것이지만 따라서 밑으로부터 대중행동, 체제 밖에서의 행동이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것이지만 체제 내에서 체제를 폐절하는 부위를 갖는 것은 전체 운동의 발전과 성숙을 위해서 필수조건이 되는 것이다. 개량주의를 극복하는 하나의 길은 체제 밖에서 개량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체제 내에서의 혁명적 활동을 통해 대중 스스로 개량주의자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필요로 한다. “좌익”들은 바로 이러한 점을 놓치는 것이고 언제나 체제 밖에서의 활동만 선호하는데 이는 스스로의 전술적 활동의 폭을 제약하는 것이고 정치적 무능력으로 귀결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대중운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회 등의 체제 내에서 혁명적 활동을 조직하고 결합시키는 것, 이것이 레닌이 좌익소아병을 비판하면서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레닌은 혁명적 전술 수립에서 좌편향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는데 혁명적 분위기만으로 혁명적 전술이 수립될 수 없다는 냉철한 판단을 하고 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의회는 노동계급의 선진적인 혁명가들에게 아주 가증스런 것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 서유럽의 숱한 나라들에서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헛되이 그리고 초조하게 기대해 왔던 혁명적 분위기는 지금 ‘진기한 일’이나 ‘드문 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아마도 이 때문에 그런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는 것 같다. 물론 대중들 사이에 혁명적 분위기가 없다면 그리고 이 분위기의 성숙을 촉진시키는 조건들이 없다면 혁명적 전술은 결코 행동으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고통스럽고 피비린내 나는 오랜 경험으로 우리는 혁명적 전술이란 혁명적 분위기만 가지고 수립될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전술은 혁명운동의 경험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특정 나라의 (그리고 이웃 나라들과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모든 계급 세력에 대한 냉정하고 엄밀한 객관적 평가 위에서 수립되어야만 한다.”21) 물론 혁명적 분위기는 혁명적 전술의 수립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적 분위기에 휩쓸려서 전술을 수립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전술의 수립은 혁명적 분위기에 기초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계급세력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판단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레닌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들은 계급세력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결여한 상태에서 혁명적 분위기에 휩쓸려서 비과학적인 전술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좌편향적인 전술의 결과는 노동계급의 고립과 패배로 귀결되기 십상인 것이다. 따라서 누가 동맹군이 될 수 있는지, 대중의 결의 정도가 어떠한지를 단지 분위기가 아니라 냉철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좌편향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레닌은 타협의 서로 다른 두 가지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누구나 대중투쟁이라는 상황과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계급대립의 첨예화라는 상황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타협의 차이를 알고 있다. 곧 하나는 (파업기금의 부족, 지원의 부재로 말미암은 극단적인 굶주림과 탈진과 같은) 객관적인 조건들로 인한 부득이한 타협―이러한 타협을 맺은 노동자에게는 투쟁을 계속할 혁명적 헌신성과 준비성이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이기심(파업파괴자들도 ‘타협’을 맺는다!), 비겁함, 자본가들에게 빌붙겠다는 욕망, 자본가들의 협박, 때로는 설득, 때로는 개먹이, 때로는 감언이설을 객관적인 원인으로 돌리려는 배신자들의 타협이다(그러나 배신자들에 의한 타협의 예는 영국 노동운동사의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서 아주 많이 나타나지만 모든 나라의 거의 모든 노동자들은 이와 비슷한 현상을 갖가지 형태로 겪어왔다).”22) 현실의 운동은 일직선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관념적인 지식인만이 그러한 혁명의 경로를 사고할 수 있다. 현실의 운동은, 역사의 발전은 지그재그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현실적인 역량에 의해 일정한 타협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쏘비에뜨 러시아가 제국주의 독일에 영토 일부를 내주었던 브레스뜨-리또프스끄 협약이 그러하다. 혁명 러시아를 보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제국주의 독일에 양보를 하고 타협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타협으로 인해 혁명 러시아는 전쟁에 끌려들어 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고 내전에서 승리하고 사회주의 건설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는 혁명성을 파괴하는 타협이 아니라 혁명성을 보존하고 증대시키는 타협이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볼쉐비끼 지도부에서도 레닌의 이러한 타협 주장에 대해 상당수가 반대했다. 그러나 레닌은 당시의 객관적 조건에서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설득했고 그 결과 혁명 러시아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좌편향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좌익”공산주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타협을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혁명을 외치며 혁명이 일직선으로 발전하기를 원하는 것은 운동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결여할 시에는 현실 운동에서는 파국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운동이 선전써클의 수준에 머물거나 이론의 정립이 문제될 당시에는 선전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운동과 결합하고 현실 정세를 변화시키는 단계에 도달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기서 선전을 넘어선 대중활동이 중요한데 이 지점에 대해 레닌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노동계급의 다수의 견해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혁명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변화는 대중들의 정치적 경험으로써 창출되는 것이지 선전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23) 여기서 레닌은 대중 자신의 정치적 경험과 선전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다. 정권의 정책의 부당함, 반민중성 등을 말하는 것은 선전에 해당할 수 있다. 혁명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도 선전에 해당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혁명을 하려면, 현실 정세를 변화시키려면 대중 스스로의 정치적 경험을 통과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레닌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전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정치활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전을 넘어서는 전략, 전술의 수립이 중요해지고 대중운동과의 결합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좌익”들은 이렇게 선전과 대중 스스로의 경험을 구분하지 못하고 선전활동을 정치활동의 핵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은 선전 단계를 필요로 하지만, 그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일정단계에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 대중 스스로의 정치적 경험에 부합하는 전술의 운용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닌은 ≪공산주의에서 좌익소아병≫에서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종합하면서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각국에서 발흥하기 시작한 공산주의운동에서 좌편향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의 전술원칙을 정교하게 다듬고 있다. “좌익”들이 선전과 전술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반동적인 노동조합과 반동적인 의회에서 활동할 필요성을 지적하고 체제 밖에서의 대중투쟁과 체제 안에서의 혁명적 활동의 결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레닌의 전술론은 레닌 사망 후에 스딸린에 의해 정리되고 가일층 풍부화된다.

 

 

4. 스딸린에 의한 전술론의 발전

 

스딸린은 레닌 사망 후에 레닌주의의 수호를 위해 투쟁한다. 레닌 사망 후에 뜨로츠끼가 권력을 찬탈하려 기도하는 상황에서 레닌주의의 원칙을 정리한 것이 ≪레닌주의의 기초≫이다. 여기에서 스딸린은 뜨로츠끼주의에 대해 명확하게 반(半)멘쉐비끼 이론이라 규정한다. “우리의 러시아 ‘영구론자들’은 러시아 혁명에 있어서 농민의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 사상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영구’혁명 사상에 관한 맑스의 사상을 (한층 나쁘게) 변경시켰고 이를 실제적으로 이용하는 데 부적합하게 만들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이것이 바로 레닌이 이 이론을 반(半)멘쉐비끼 이론이라고 간주하고 이 이론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결연한 혁명투쟁과 정치권력의 장악을 볼쉐비끼로부터 빌려오고 농민의 역할에 대한 거부를 멘쉐비끼로부터 빌려오고 있다’라고 말한 이유이다(레닌의 논문 ≪혁명의 두 가지 노선≫을 보라).”24) 뜨로츠끼주의가 맑스로부터 영구혁명이라는 개념은 빌려오고 있지만 실은 맑스의 영구혁명 사상을 왜곡시켰고 실제로 맑스의 영구혁명 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은 레닌이었다. 뜨로츠끼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면서 러시아 혁명은 서유럽 혁명의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면서 이를 영구혁명이라 했지만 레닌은 반대로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인정하고 그것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ㆍ전화시키기 위해 농민을 동맹군으로 편제하여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주장했던 것이다. 즉, 부르주아적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연속적인 성장ㆍ전화에 대한 레닌의 이론이야말로 맑스의 영구혁명 사상을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구체화한 것이었다. 여기서 실천적으로 부딪혔던 것은 동맹군의 문제, 농민의 역할에 대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 스딸린은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농민의 문제는 단지 혁명의 성공과 관련된 동맹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건설에서 동맹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농민문제에 대한 스딸린의 언급을 들어보자. “러시아 맑스주의자의 대열에서 농민문제에 대한 진지한 연구는 정확히 말해서 1차 혁명(1905년) 직전에, 즉, 짜리즘을 타도하는 문제와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실현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당에 대두되었을 때, 그리고 임박한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 문제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 2) 부르주아 혁명기의 농민 … 이 시기의 특징적인 면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으로부터 농민의 해방, 즉 까제츠로부터 농민의 탈당, 프롤레타리아트로의, 볼쉐비끼 당으로의 방향전환이다. … 제국주의 전쟁은 단지 두마기의 교훈이 정확했음을 증명하고 부르주아지로부터 농민의 이탈과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고립을 극점에 달하게 했을 뿐이다. … 3) 프롤레타리아 혁명기의 농민 … 이 시기의 특징적인 면은 농민이 더 한층 혁명사상으로 고취된 점, 사회혁명당에 대한 농민의 환멸, 사회혁명당으로부터 농민의 이탈과 또 나라를 평화로 이끌어갈 수 있는 유일한 지속적 혁명세력인 프롤레타리아트 주위로의 직접적 결집을 향한 그들의 새로운 전환이었다. … 4) 쏘비에뜨 권력 수립 후의 농민 … 첫째, 쏘비에뜨 연방의 농민을 서구에 존재하는 농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세 번의 혁명 속에서 교육받았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또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하에 짜르와 부르주아권력에 맞서 투쟁했던 농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손 안에서 토지와 평화를 건네받았고 또 이러한 이유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예비군이 되었던 농민. … 둘째로 러시아의 농업은 서구의 농업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 이곳에서 농업은 쏘비에뜨 권력의 존재와 생산도구 및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그러한 발전의 선구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유럽적-인용자] 길을 따라 발전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 농업의 발전은 다른 길을 통해, 수백만의 소농과 중농을 조직하는 길을 통해, 농촌에서 국가에 의해 특별신용으로 지원받는 대중적 협동조합운동이 발전하는 길을 통해 진전되어야 한다.”25) 여기서 스딸린의 언급은 농민문제에서 뜨로츠끼주의와 레닌주의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뜨로츠끼 세력은 농민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에서 농민을 반혁명적 세력으로까지 파악하고 나아가 사회주의 건설에서 농민을 수탈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철저히 동맹의 문제를 무시하는 독선적인 주장이었다. 이에 반해 레닌은 농민이 부르주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농민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동맹이며 나아가 사회주의 건설에서도 농민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 동맹임을 강조했다. 심지어 노농동맹은 쏘비에뜨권력의 근간이라고까지 하였다.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의 진전에 따라,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농동맹이 강화됨에 따라 뜨로츠끼 노선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딸린의 공적은 뜨로츠끼 노선에 반대하여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수호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에서 노농동맹론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뜨로츠끼 노선의 좌편향에 맞서 사회주의 건설의 정확한 침로를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레닌주의의 전술론은 스딸린에 의해 정확하게 정리되고 나아가 풍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스딸린이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정리한 레닌주의 전략, 전술의 기본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스딸린은 전략의 개념을 정의한다. “2) 혁명의 단계와 전략. 전략이란 주어진 혁명의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한 타격방향의 결정이며, 혁명세력(주요 예비군과 2차 예비군)의 배치를 위한 상응하는 계획의 작성이며, 주어진 혁명단계 동안 이 계획을 수행하는 투쟁이다.”26) 이러한 스딸린의 정의는 맑스주의적 전략개념의 고전적인 정식화이다. 사실 레닌의 ≪두 가지 전술≫때까지만 해도 아직 전략과 전술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딸린은 레닌주의 전술론을 정리하면서 그를 총괄하여 전략과 전술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스딸린의 접근은 타당한데 전략과 전술은 현실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고 상호 침투하지만 ‘계획으로서의 전술’을 구사하기 위하여 전략과 전술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딸린의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전략은 혁명의 단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인지, 사회주의 혁명인지에 따라 전략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의 핵심은 스딸린에 따르면 주요타격방향의 결정과 예비군을 포함한 혁명세력의 배치이다. 여기서 주요개념으로 등장하는 것이 주요타격방향이라는 것인데, 예를 들면 러시아의 1차와 2차의 부르주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요 타격방향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였다. 소부르주아 농민을 자유주의 부르주아지가 획득하여 혁명의 유산과 개량의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소부르주아 농민을 프롤레타리아트가 획득하여 노농동맹을 이루어서 부르주아혁명을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하에 수행하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ㆍ전화할 것인지를 가늠하기 위해 주요타격방향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 개념의 설정으로 볼쉐비끼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민주주주의 혁명에서 동요성을 폭로하고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술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요 타격방향이라는 개념은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여전히 중요한데 한국사회는 민족민주적 과제를 포함하는 사회주의 변혁을 당면변혁으로 한다는 점에서 2중의 주요 타격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즉, 미제축출, 국가보안법의 폐지, 민족통일,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의 확장 등과 같은 민족민주적 과제 수행에 있어서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동요를 마비시키고 무력화시키는 주요타격방향을 설정해야 하며 자본에 맞서는 투쟁에 있어서, 반자본주의 연합전선을 꾸리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개량주의적인 소부르주아 상층의 동요와 우유부단, 소극성을 비판하고 정치적으로 무력화시켜야 한다. 이들 소부르주아 상층이 소부르주아 하층을 끌어들여 개량주의적 노선을 강화시키는 것을 마비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소부르주아 하층을 노동계급의 동맹군으로 끌어들여 사회주의 변혁노선, 반자본주의의 흐름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소부르주아 상층을 무력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8, 90년대의 민족민주변혁의 유산과 개량의 시작, 그리고 계급 대립구도의 변화에 따라 민족민주변혁에서 사회주의 변혁으로 변혁의 성격이 전환된 한국 사회운동의 현실이 이렇게 주요타격방향에서 2중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스딸린의 전략에 대한 정의는 주요타격방향의 설정만이 아니라 예비군을 포함한 혁명세력의 배치를 주요하게 말하고 있다. 즉, 혁명의 단계에서 포괄적인 계급세력의 배치가 전략의 주요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주요타격방향이라는 것도 이러한 계급세력의 배치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해당 단계의 혁명의 성취를 위해 누구를 타도하고 누구의 동요를 무력화시키고 누구를 동맹군으로 끌어들이고 하는 계급세력의 배치가 전략 개념의 핵심인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에서는 부르주아 혁명 단계가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계급세력의 배치, 핵심적으로는 동맹군의 배치가 변화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전략과 전술을 엄격하게 나누는 스딸린의 입장에서 전술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3) 운동의 간조ㆍ만조와 전술. 전술은 운동의 간조와 만조, 혁명의 고양과 쇠퇴의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노선의 결정이며, 투쟁과 조직의 낡은 형태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낡은 슬로건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이러한 형태들을 결합하여 그 노선을 수행하는 투쟁이다.”27) 이러한 스딸린의 전술에 대한 정의는 맑스주의적 전술개념의 기본적 원칙을 담고 있다. 먼저 전술은 운동의 간조와 만조, 혁명의 고양과 쇠퇴의 짧은 기간 동안 행동노선의 결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전술은 정세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전략이 혁명의 단계라는 포괄적인 접근을 전제한다는 것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바로 이 점 때문에 전략과 전술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은 전략과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립,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전술 또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고 반대로 전략은 일정단계에서는 변화해서는 안 되며 일관성 있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레닌에 의해 실천적으로 정립되었고 스딸린에 의해 정식화된 맑스주의적 전술개념의 기본원칙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전술개념은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투쟁과 조직의 낡은 형태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낡은 슬로건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고 이러한 형태들을 결합하는 투쟁이 전술임을 스딸린은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전술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투쟁과 조직의 형태, 전술적 슬로건임을 스딸린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스딸린의 견해에 대해 보충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 전술은 맑스주의자에게 있어 정치적 전술임은 물론이다. 엥겔스가 나눈 경제투쟁, 정치투쟁, 이데올로기 투쟁이라는 3대 투쟁에서 정세와 전술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투쟁이다. 정치투쟁의 발전여부가 정세를 규정하는 관건인 것이다. 경제적 토대의 위기여부, 경제적 투쟁의 고조로 인한 대중의 행동성 고조 등은 정치정세를 규정하는 전제이자 이를 떠받치는 요소이다. 현실적 정세의 변화는 각 계급세력의 정치투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술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정세분석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정세분석의 핵심은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 계급투쟁의 쟁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80년대 중반과 같이 헌법문제가 객관적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경우도 있고 97년 노동법투쟁과 같이 개별적인 법률이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경우도 있고 최근에는 타임오프, 정리해고 등과 같은 것이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보건대 정세를 파악하는 요점은 어떠한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고 있는가이고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을 보면 해당 정세가 어떤 추이에 있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전술은 객관적으로 형성되는 정치적 쟁점에 대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정치적 쟁점에 대한 태도의 결정이 전술의 골간을 이루는 것이다. 투쟁형태와 조직형태, 전술적 슬로건은 그러한 태도를 현실화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을 이루는 것이다. 과거 많이 있었던 전술논쟁들의 본질은 해당 쟁점에 대해 노동계급이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스딸린의 전술에 대한 정의에서 ‘정치적 쟁점에 대한 태도 혹은 입장의 결정’이라는 것이 보충될 필요가 있다. 전술은 그러한 태도의 결정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 조직, 슬로건 등을 요소로 하는 것이다.

한편 스딸린은 지도의 문제를 전략적 지도와 전술적 지도로 나누어서 구체화시킨다. 노동계급이 전략과 전술의 성공을 위해 지도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딸린은 전략적 지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적 지도의 임무는 혁명발전의 주어진 단계에 혁명의 주요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이러한 모든 예비군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 첫째, 결정적인 순간, 즉 혁명이 이미 성숙해 왔고 공세가 최고조에 달하고 봉기가 임박하고 예비군을 전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성공의 결정적인 조건이 되는 때에 적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혁명의 주요세력을 집중시키는 것. … 둘째, 결정적인 공격을 위한 순간과 봉기를 개시하는 순간의 선택을 때를 잘 보아서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전위가 끝까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예비군이 전위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고 적진영이 최고로 당황하는 순간과 일치하도록 맞추는 것.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면 ‘속도상실’이라는 위험한 오류에 빠지게 되고 당은 운동에 뒤처지거나 지나치게 앞서나가게 되고 실패의 위험을 자초하게 된다. … 셋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서 어떠한 어려움이나 복잡함에 직면하더라도 채택된 경로를 벗어나지 않고 추구하는 것은 전위가 투쟁의 주된 목적을 놓치지 않고 대중들이 전위의 주위에 집결되어 투쟁하며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면 어부들에게 잘 알려진 ‘방향상실’이라는 심각한 오류에 빠지게 된다. … 넷째, 퇴각이 불가피하고 적이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전투에 응하는 것이 명백하게 불리할 때, 주어진 세력관계상 퇴각만이 적의 타격으로부터 전위를 보호하고 전위의 예비세력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일 때, 적절한 퇴각을 실행하는 것을 고려하면서 예비군을 가동하는 것.”28) 이러한 스딸린의 전략적 지도의 개념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요약하는 것이다. 예비군을 전위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 속도상실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는 것,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위는 방향상실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 전략적 퇴각을 통해 전위와 예비군을 보호하는 것 등이 전략적 지도의 주요 내용이다. 이러한 전략적 지도의 개념은 전략의 운용의 원칙을 말하는 것인데 전쟁, 즉, 혁명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스딸린은 전략적 지도 개념에 이어서 전술적 지도라는 개념을 정식화한다. “5) 전술적 지도. 전술적 지도는 전략적 지도의 한 부분이며 전략의 임무와 요구에 종속한다. 전술적 지도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형태와 조직의 모든 형태에 정통하는 것이며 주어진 세력관계에서 전략적 성공을 준비하는데 필수적인 최대의 성과를 확보하기 위하여 투쟁과 조직의 형태들이 올바르게 이용되도록 책임지는 것이다. … 첫째, 주어진 순간의 운동의 간만동안 우세한 조건들에 가장 적합하고 따라서 대중들을 혁명적 견해로 이끄는 것을 조장하고 보장할 수 있으며 또한 수백만을 혁명전선으로 출정시키고 혁명전선에서 그들을 배치하는 것을 조장하고 보장해줄 수 있는 투쟁과 조직의 형태들을 정확하게 전면에 내세우는 것. …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전술이 지니는 위험성은 그 전술이 당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도자로부터 설 기반이 없는 소수의 보잘 것 없는 음모가들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었다는 점이다. … 둘째, 어떤 주어진 순간에 여러 과정의 사슬 가운데서 그것을 파악하여 사슬 전체를 움켜쥘 수 있게 해주고 전략적 성공을 준비하게 해주는 특정 고리를 찾아내는 것.”29) 이러한 스딸린의 전술적 지도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특히 주요고리(특정고리)라는 개념은 현실적으로 전술을 운용하는 주체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특정 정세에서 단일한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는 것은 혁명적 정세 아니면 급격한 고조기에나 있을 수 있다. 대부분의 정세, 퇴조나 완만한 상승기에 있어서는 단일한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는 것은 드물며 여러 가지 정치적 쟁점이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요고리를 찾아내는 것, 전체를 움켜쥐게 해주는 사슬을 찾아내는 것은 현실적인 전술의 운용에서 필수적이다. 스딸린은 그러한 주요고리의 예를 사회주의 건설에서 들고 있다.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전시공산주의에서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하던 시기에 공업과 농업을 활성화하여 경제를 재건으로 이끄는 시기에 있어서 주요한 고리는 상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고 스딸린은 말한다. 이는 상업의 활성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공업과 농업의 연결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주요고리라는 개념의 실천적 의미이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도 해당 정세에서 전체 국면을 장악하고 돌파하기 위한 주요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전술의 운용에 있어서 사활적이라 할 수 있다.

끝으로 스딸린은 레닌주의 전략, 전술론을 요약하면서 개량과 혁명의 관계에 대해 정식화한다. “개량주의자에게 있어서 혁명적 활동은 어떤 부수적인 것 말하자면 단순히 눈가림을 위한 것이지만 개량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지의 지배하에서 개량주의자들의 전술에 의한 개량이 필연적으로 부르주아지 지배를 강화시키고 혁명을 붕괴시키는 도구로 바뀌어 버리는 이유이다. 반대로 혁명주의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점은 혁명적 활동이지 개량이 아니다. 혁명주의자에게 있어서 개량은 혁명의 부산물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조건하에서 혁명주의적 전술에 의한 개량이 부르주아지 지배를 붕괴시키고 혁명을 강화시키는 도구, 혁명운동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거점이 되는 이유이다. 혁명주의자들은 합법작업과 비합법작업을 결합시키는 데 있어서 하나의 원조물, 즉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기 위해 대중들을 혁명적으로 준비시키는 비합법활동의 엄호물로 활용하기 위하여 개량을 받아들일 것이다.”30) 이러한 스딸린의 개량과 혁명의 관계에 대한 정식화는 개량주의자들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다. 개량주의자에게 혁명적 활동은 눈가림이고 개량이 진실된 목표이며 그것은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강화에 봉사하지만 혁명주의자에게 있어서는 개량은 혁명적 활동의 부산물이고 혁명활동을 위한 엄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지금 상황에서 개량주의가 지배적인 현실에서 이러한 스딸린의 언급은 사회주의자가 개량에 대해 정확한 관점을 갖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5. 꼬민떼른에서 전술론의 발전

 

꼬민떼른은 러시아 혁명 이후 성립된 국제적인 인터내셔널이다. 제2인터내셔널이 제1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조국방위전쟁이라는 노선으로 전환하여 파산한 후에 볼쉐비끼 혁명의 승리를 기초로 새롭게 형성되는 각국의 혁명운동이 결집한 것이 꼬민떼른이었던 것이다. 꼬민떼른은 레닌주의를 기초로 그 전의 사회민주당의 조직노선, 전술노선 등을 청산하고 볼쉐비끼 노선에 따라 각국의 혁명운동을 개조하고 발전시키는 데 봉사하였다. 그에 따라 꼬민떼른의 전술론은 한편으로는 쏘련 공산당의 전술론에 기초하면서도 국제조직이라는 점에서 세계혁명의 전략전술을 수립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초기의 꼬민떼른의 전술론은 볼쉐비끼 전술원칙을 흡수하는 상태였는데 차츰 꼬민떼른이 발전하면서 전술론 또한 발전해 간다. 1920년 8월에 꼬민떼른에서 발표된 “공산당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를 보면 혁명적 의회주의를 정립하여 한편으로는 개량주의, 기회주의노선에 대해 투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의회를 활용하기를 거부하는 좌편향에 대해 투쟁한다. 먼저 테제는 부르주아 의회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천명한다. “국가제도로서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의 ‘민주적인’ 지배형태가 되었다. 일정한 발전단계에서 부르주아는 인민의 대의기관이라는 외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외면적으로는 초계급적인 ‘민의’의 조직으로서 나타나지만 본질적으로는 지배적인 자본이 장악한 탄압과 억압의 도구이다. …의회주의는 부르주아 독재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는 과도기에 프롤레타리아적 국가통치형태가 될 수도 없다. … 프롤레타리아의 임무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폭파, 파괴함과 동시에 공화제냐 입헌군주제냐를 불문하고 모든 의회시설을 파괴하는 데 있다.”31) 이러한 꼬민떼른의 입장은 원칙적으로 부르주아 의회가 부르주아 독재의 하나의 형태일 뿐이며 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의 형태가 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즉, 제2인터내셔널의 평화적 발전의 시기에 지배적이었던 의회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꼬민떼른은 계급투쟁의 원칙을 정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부르주아에 대한, 결국 부르주아의 국가권력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주요한 투쟁방법은 무엇보다도 우선 ‘대중행동’이라는 방법이다. … 내란으로 발전해갈 이 대중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 지도당은 가능한 한 모든 합법적 진지를 자기 손에 확보하고 그것을 혁명적 보조적 거점으로 하고 또 이 진지들을 주요한 전투계획, 대중투쟁의 계획에 종속시켜야 한다. … 공산당이 이 기관에 들어가는 것은 그 가운데서 유기적인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중행동에 의하여 부르주아 국가기구나 의회 그 자체를 내부에서 폭파하는 것을 의회 내부에서 돕기 위해서이다.”32) 이는 의회의 활용과 대중투쟁의 관계를 정리한 것인데 의회의 활용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며 주된 것은 대중투쟁이라는 원칙을 확인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기초로 꼬민떼른은 혁명적 의회주의라는 노선을 정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선거참여와 의회 내의 혁명적 활동을 절대로 무조건적으로 거부한다는 의미의 원칙적 ‘반의회주의’는 어떤 비판도 견뎌내지 못하는 소박하고 천진하기 짝이 없는 이론이며, 때로는 정치적 술책에 전념하는 의원들에 대한 건전한 혐오감에서 유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혁명적 의회주의의 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 선거나 의회 보이코트, 나아가 의회 탈퇴는 주로 직접 권력을 목표로 하는 무장투쟁에 돌입하게 될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만 허용된다.”33) 이러한 꼬민떼른의 입장은 “좌익”들이 의회활용을 거부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볼쉐비끼적 입장에서 혁명적 의회주의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다. 반의회주의가 부르주아 의회에 대한 대중의 혐오를 반영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는 의회를 활용하여 부르주아 의회의 본질을 폭로하고 대중 스스로의 정치적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 보이코트 등은 정세에 따라 가능하지만 그것은 혁명적 정세나 혁명적 행동의 고조 시기에나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의회에 대한 꼬민떼른의 입장 정리는 막 생성되기 시작한 각국 공산당의 전술원칙의 정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서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 등장했던 좌익공산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꼬민떼른에서 1921년 7월에 발표된 “전술에 관한 테제”는 비로소 일정한 완성된 틀을 가진 전술결의라 할 수 있다. 이 테제가 다루고 있는 범주는 개량주의자와의 분리의 문제, 부분요구 투쟁과 혁명적 전망의 문제, 중간층에 대한 태도, 행동의 국제적 조정, 제2, 제2.5인터내셔널의 쇠퇴 등인데 그 주제가 매우 포괄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또 국제조직에 걸맞는 전술원칙의 수립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먼저 부분적 요구투쟁과 혁명적 전망의 문제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자. “노동자계급은 현재 모든 자본주의국에서 수많은 가공할 만한 재해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므로 그들을 억누르고 있는 그 모든 하중, 비 오듯 쏟아지고 있는 돌더미에 대한 투쟁을, 탁상공론식으로 고안된 하나의 과녁에 집중시킨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반대로 중요한 것은 대중의 모든 요구를 혁명적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인데, 이러한 혁명적 투쟁이 서로 결합하여 비로소 사회혁명의 강력한 흐름을 이루는 것이다. 공산당은 이러한 투쟁을 위하여 자본주의의 기반 위에서 그 동요하고 있는 건물을 강화하고 개선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는 최소강령을 내세우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건물을 파괴하는 일이 당의 주도적 목표이며, 당의 절실한 임무이다. 그러나 이 임무를 수행하려면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게 지체 없이 즉각 충족되어야 할 요구들을 내세워야만 하며, 그것이 자본가계급의 이윤경제와 맞아 떨어지든 아니든 관계없이 대중의 투쟁을 통하여 이러한 요구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34) 이 부문의 서술은 첫째, 부분요구 투쟁과 혁명적 전망의 결합의 문제, 둘째, 맑스주의 최소강령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대중의 다양한 요구를 억지로 하나로 통합하는 것은 맑스주의 전술이 아니며 맑스주의자는 대중의 다양한 요구 자체에 근거하여 그러한 요구들을 혁명적 투쟁의 전망과 결합시키는 것이 임무라는 것이다. 물론 다양한 요구들 중에 주요한 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러한 주요고리를 찾는 작업이 다양한 요구를 억지로 통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꼬민떼른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의 서술은 최소강령의 의미를 정식화하고 있는데 맑스주의 최소강령은 체제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당면한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통해 노동계급의 역량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그것은 혁명의 전망으로 수렴되어야 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향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꼬민떼른이 부분요구 투쟁과 혁명적 전망의 결합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꼬민떼른의 전술론이 한층 정교화되고 풍부화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편 행동의 국제적 조정은 꼬민떼른의 전술의 특유한 것으로서 세계 최초로 실질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와 투쟁의 문제를 다룬 것이었다. “국제 반혁명전선을 돌파하는 데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 세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혁명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혁명적 투쟁의 통일적인 국제적 지도를 실현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각 구성부분이 정치적ㆍ조직적으로 중앙집권화되는 것, 자치라는 기회주의자의 책략을 극복하는 것,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와 그 전 기구의 적절한 정치적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35) 이 부분은 꼬민떼른에 특유한 전술원칙으로서 국제 인터내셔널이 세계적 반혁명에 대항하고 혁명의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혁명세력의 국제적인 통일행동이 중요하며 조직적으로는 중앙집권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향후 세계대공황이 발전함에 따라 각국에서 계급투쟁이 격화되고 사회주의적 정치적 구심이 발전해 간다면 그것들의 결집으로서 국제적인 인터내셔널이 건설될 것이고 거기에서는 국제적 차원의 전술원칙을 정립해가야 한다는 것을 꼬민떼른의 테제의 이 부분은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1924년 7월에 발표된 꼬민떼른의 “전술문제에 관한 테제”는 이전의 테제보다 한층 더 풍부하게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국제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고 권력의 문제, 대중적 공산당의 창설문제, 대중적 공산당 창설의 기본적인 전제조건, 우편향과 극좌적 편향에 대한 문제, 통일전선 전술, 노동자ㆍ농민정부라는 슬로건, 부분적 요구, 민주주의적ㆍ평화주의적 환상, 서구와 동양, 단일한 세계공산당의 형성의 문제, 꼬민떼른 각 지부의 활동 과제 등이 이 테제의 주요 내용을 이루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과거의 테제에 비해 한층 풍부화된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특히 국제정세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고 통일전전선술을 제기하고 있고 노동자ㆍ농민정부라는 슬로건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국제정세에서는 민주주의적ㆍ평화주의적 국면이라는 규정에 대해 검토를 하고 있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실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적 ‘질서’의 안정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가일층 강화된 세계적인 부르주아적 반동을 위장하고, 인민에 대한 새로운 기만을 준비하는 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 … 변화한 것은 항쟁의 형태일 뿐이고 그 본질은 아니다.”36) 이는 1920년대 중반 당시의 국제정세를 요약한 것인데 제1차 대전이라는 전쟁이 종식되고 러시아 혁명 후의 혁명적 파고가 지난 직후의 상황에서 현상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평화적 국면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되는 상황에서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반동이 강화되고 변화된 것은 항쟁의 형태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파악은 타당한데 실제로 1920년대에 이미 이탈리아의 뭇쏠리니가 파시즘을 내세워 집권했고 20년대 후반에 가면 히틀러가 등장하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적, 평화주의적 국면이라는 정세분석은 현상에 불과하고 계급대립의 심화가 국제정세의 저변에 흐르고 있었던 것으로서 꼬민떼른이 이러한 국제정세를 총괄한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테제는 권력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세계 부르주아 정책의 두 가지 방향은 1) 공공연하고 반동적인 방향, 2) 민주주의적, 개량주의적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발밑의 지반이 흔들리고 부르주아가 강고하게 지배하던 ‘정상적인’ 시대가 과거로 흘러가버려 혁명적 사건들이 절박하게 일어나고, 프롤레타리아적 변혁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때, 지배계급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두 가지 정책의 체계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37)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은 전쟁과 혁명 이후의 정세에서 지배계급이 혁명세력에 대해 진압을 하려는 열망과 다른 한편으로 개량의 정책으로써 혁명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것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에 대해 부르주아가 종래의 방법으로 지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부에서는 파시즘으로 일부에서는 사회민주주의를 활용한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독일에서 사민당은 노동자들의 봉기를 유혈 진압했고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에 사민당은 파시즘의 등장과 집권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테제는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는 최초의 제국주의 대전과 자본주의에 대한 최초의 근로자 전투들에 의해 약화된 현대 자본주의의 오른손과 왼손”38)이며 “대전 중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권좌에 참가시킨 것은 ‘자’국 노동자의 상층부를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과 대립시키는 일이 제국주의자에게 아주 실제적으로 필요해졌다는 사정 때문”39)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리하여 꼬민떼른은 서유럽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은 사민당의 집권과 파시즘의 등장에 대해 계급적 관점에서 원칙적 입장을 세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민떼른은 바로 이 테제에서 통일전선전술을 제기하는데 사민당이 자본가계급과 협조하는 정책을 그만두고 공산당과 연합하여 노동계급의 통일을 이루어서 자본가계급에 대한 공동의 전선을 치자는 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통일전선전술의 제기는 볼쉐비끼 혁명 이후 각국에서 신생 공산당들이 생겨나는 가운데 국제정세의 변화 추이에 맞추어 노동계급의 전술을 풍부히 하고 전술원칙을 확립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의 풍부화와 더불어 대중적 공산당의 창설문제를 이 테제는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데 새로 공산당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대중적 영향력이 약한 상태에서 이를 돌파하기 위한 방침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꼬민떼른 3차 대회에서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을 제기했고 대중적 공산당 창설의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서 1) 공장세포를 기초로 한 당건설 2) 노동조합 내에서 당활동의 원칙, 3) 공장ㆍ경영위원회 창설운동 4) 농민에 대한 정책, 5) 민족문제에 대한 정책 등을 제기한다. 이리하여 꼬민떼른의 전술방침은 풍부하게 발전하고 대중적 세력으로서 각국의 공산당이 발돋움하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었다.

 

 

6. 마오쩌뚱에 의한 전술론의 풍부화

 

마오쩌뚱은 중국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지도자이다. 기존에 마오쩌뚱에 대해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중국화한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했다는 것이 주요한 평가였다. 이에 대해 덩샤오핑은 마오쩌뚱의 사회주의 건설노선과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자신의 노선을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바꿔치기 했지만 마오쩌뚱이 ‘거인’이라면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의 원칙을 실용주의로 바꿔치기한 수정주의자인 것이 현실이다. 마오쩌뚱의 거인과 같은 면모는 그의 현실적인 실천에서 확인되지만 그의 여러 저작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술론의 차원에서 보면 마오쩌뚱은 맑스-레닌주의 전술을 매우 풍부하게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반식민지에서의 해방운동은 복잡하고 고난에 찬 것이었는데 이를 위해 중국혁명의 전략, 전술이 풍부하게 발전되었고 마오쩌뚱은 이러한 발전을 주도했다. 특히 마오쩌뚱의 전술론은 그의 군사전술에서 빛을 발하는데 장기간의 내전을 지도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광대한 중국대륙에서 지구전을 행하고 나아가 일제에 맞서는 민족해방전쟁을 지도하면서 뛰어난 군사적 전술을 담는 저술을 했다. 1936년에 발표된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라는 논문은 마오쩌뚱이 전략, 전술의 문제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전쟁의 법칙은 발전한다는 것을 전제로 일반적인 전쟁의 법칙, 혁명전쟁의 법칙, 중국혁명전쟁의 법칙을 전개하는데 이는 변증법의 보편-특수-개별이라는 범주를 혁명전쟁에 적용한 것이었다. 즉, 마오쩌뚱의 전략, 전술론은 변증법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마오쩌뚱의 전술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관되게 풍부하게 구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쟁 상황이 다름에 따라 전쟁의 지도법칙도 달라지게 된다. 즉, 시간, 지역, 성격이 다름에 따라 달라진다. … 모든 전쟁의 지휘의 법칙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고 전쟁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는 것으로, 고정불변의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40) 즉 마오쩌뚱은 전쟁을 계급투쟁의 최고 형태로 파악하고 분석하면서 전면적으로 변증법적 관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증법적 관점으로 접근함에 따라 ‘전쟁의 지휘법칙’이라는 범주를 마오쩌뚱은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뚱은 레닌이 맑스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정신은 바로 ‘구체적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라고 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중국혁명전쟁의 특성을 분석한다. “그러면 중국혁명전쟁의 특성은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를 네 가지로 분류하고자 한다. 첫 번째 특성은 중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발전이 불균형한 반식민지 대국이며 또 1924-1927년의 혁명을 겪었다는 점이다. … 두 번째 특성은 적이 강하다는 점이다. … 즉 [장개석군은-인용자] 중국역사상 그 어느 시대의 군대와도 다르고 세계의 현대 국가의 군대와 엇비슷한 수준의 군으로 개조하고 있다. 무기 및 군수물자의 공급이 홍군에 비하여 대단히 풍부하며 또 군대의 숫자가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대의 군대보다도 많으며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상비군보다도 많다. 따라서 그들의 군대와 홍군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가 있는 것이다. … 세 번째의 특성은 홍군이 약하다는 것이다. … 네 번째의 특성은 공산당의 영도와 토지혁명이다. … 홍군은 비록 숫자는 적으나 강대한 전투력을 갖고 있다. 그것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홍군의 성원이 토지혁명에서 나옴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또 지휘관과 전투원 사이의 이해관계가 정치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41) 이렇게 마오쩌뚱은 중국혁명전쟁의 특성을 적아의 비교, 중국사회의 역사적 조건, 중국의 혁명에서 비롯되는 공산당의 영도와 토지혁명이라는 구체적 상황을 갖고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적을 과대평가하거나 자신의 역량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적아의 역량을 있는 그대로 평가하면서도 혁명의 특성과 맞물리는 고도의 정밀한 분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혁명전쟁에 대해 마오쩌뚱이 변증법을 갖고서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석의 귀결은 중국혁명전쟁의 지도법칙이라는 매우 실천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의 도출이다.

그러면 군사전술에서 나타나는 마오쩌뚱의 변증법의 적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추적해보기로 하자. 마오쩌뚱은 1937년에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항일전쟁을 지도한다. 1938년에 발표된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는 항일전쟁에서 유격전술의 문제를 총괄한 저작이다. 마오쩌뚱은 항일전쟁에서 유격전술이 보조적인 위치이면서도 전략적 견지에서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은 우리의 이 큰 나라에서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기는 하지만 나라가 작다보니 병력이 부족하여 점령지구에 많은 공간을 남겨두고 있다. 때문에 항일유격전쟁은 주로 내선에서 정규군과 합동작전을 펼 것이 아니라 외선에서 단독전쟁을 펴야 하는 것이다. … 오늘의 중국은 상술한 역사에는 없었던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그 중에 하나가 매우 새롭다고 할 수 있는 유격전쟁이다. 만일 우리의 적이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전술에 의해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것이 전반적인 항일전쟁에서 보조적인 위치에 처해 있는 항일유격전쟁을 전략적 견지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42) 즉, 중국에서 항일유격전쟁의 근거는 적이 점령지구에 많은 공간을 남겨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근거로 중국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유격전쟁이 성립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마오쩌뚱의 판단은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레닌의 언급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를 기초로 마오쩌뚱은 방어전과 공격전의 결합과 상호전화, 지구전과 속결전, 내선작전과 외선작전 등의 관계 등을 서술한다. 또한 마오쩌뚱은 유명한 근거지론을 정립하는데 다음과 같다.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 중 세 번째는 근거지의 창설문제이다. 이 문제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전쟁의 장기성과 잔혹성으로부터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전국적인 전략적 반격을 진행해야만 잃어버린 땅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적의 전선이 우리의 중부까지 깊이 들어와 종단하여 국토의 절반 심지어는 태반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 적의 후방이 되었다. 우리는 적에게 점령당한 이 광대한 지역에서 유격전쟁을 진행하여 적의 후방도 전선이 되게 함으로써 적이 자기의 전 점령지 내에서 전쟁을 중지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전략적인 반격이 진행되지 않는 한, 또한 잃어버린 땅이 회복되지 않는 한 적군의 후방 유격전쟁도 계속하여 견지해야 한다.”43) 이러한 근거지론은 중국의 항일전쟁의 특성, 즉, 광대한 영토와 적의 점령지역의 많은 공간들에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중국인민이 항일의지를 가졌다는 인민전쟁이라는 특성, 당장은 항일세력이 전략적 반격을 할 수 없다는 정세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근거지를 창설하는 유격전쟁론을 펼쳤던 것이다. 이러한 근거지론, 유격전쟁론은 항일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통일한다는 항일통일전선에 기초하여 그러한 정치적 기반을 군사적 힘으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마오쩌뚱의 군사전술론은 1938년 발표된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논문에서 정점에 달한다. 이 논문에서 먼저 마오쩌뚱은 중국의 항일전쟁이 지구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논술한다. “항전 10개월 동안의 모든 경험은 다음의 두 가지 견해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 필망론이고 하나는 중국 속전필승론이다. 전자는 타협적 경향을 낳고 있으며 후자는 적을 경시하는 경향을 낳고 있다. 그들의 문제를 보는 방법은 모두 주관적이며 일면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비과학적인 것이다.”44) … “항일전쟁은 어째서 지구전인가? 궁극적 승리는 어째서 중국의 것인가?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장점은 그 전쟁역량이 강한 것이고, 단점은 그 전쟁의 본질적 퇴보성과 야만성에 있으며 그 인력과 물력이 부족한 데 있으며, 국제정세에 있어서 그들에게 대한 원조가 적다는 데 있다. 이러한 것들이 일본 측의 특성이다. … 종합해서 말한다면 중국의 단점은 전쟁역량이 약한 것이고, 장점은 그 전쟁의 본질적인 진보성과 정의성에 있으며, 큰 나라이자 국제정세에 있어서 그 원조자가 많은 데 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중국의 특성이다. … 이러한 것들이 중일전쟁이 가지고 있는 서로 모순되는 기본특성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쌍방의 모든 정치상의 정책과 군사상의 전략전술을 규정하였고 또한 규정하고 있으며, 전쟁이 지구적이며 궁극적 승리가 일본에 있지 않고 중국에 있다는 것을 규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바로 이러한 특성들의 경쟁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전쟁 수행과정에서 각각 그 본성에 따라 변화할 것이며, 모든 것은 여기서부터 생겨날 것이다.”45) 바로 이러한 것들이 마오쩌뚱이 중국의 항일전쟁이 지구전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들이다. 이러한 판단은 일본 측과 중국 측의 역량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 전쟁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고 나아가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정치와 군사의 양 방면에서 적아의 역량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기초로 중국의 항일전쟁의 지구전적 성격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가능했던 것은 마오쩌뚱이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고전적 명제에 기초하고 있고 나아가 전쟁이 계급투쟁의 최고형태라는 것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정치과 군사의 통일적 파악을 중국혁명의 지도자, 항일전쟁의 지도자인 마오쩌뚱은 강제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오쩌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지도자는 군사 면에서 형식적인 통수권자인 것과는 달리 군사에 있어서 실질적인 지도자였고 정치와 군사의 통일적인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오쩌뚱은 중국 필망론에 반대하고 속전필승론에 반대하면서 지구전 필승론이라는 정치군사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항일에 있어서 지구전론을 세운 마오쩌뚱은 지구전을 세 단계로 나눈다. “중일전쟁이 지구전이며 또한 궁극적 승리가 중국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지구전이 세 가지 단계로써 구체적으로 표현되리라는 것은 합리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제1단계는 적의 전략적 공격, 우리의 전략적 방어의 시기이며, 제2단계는 적의 전략적 수비, 우리의 반격 준비의 시기이며, 제3단계는 우리의 전략적 반격, 적의 전략적 퇴각의 시기이다. 이 세 단계의 구체적 상황은 미리 단정할 수 없으나 지금의 모든 조건에 의거하여 추세를 고찰하면 대체적으로 그 상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46) 이러한 단계구분은 지구전에 대한 전략적 계획을 세우는 토대로 작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항일전쟁은 마오쩌뚱이 단계구분을 한 대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마오쩌뚱의 군사전략은 한국의 상황에서 정세가 완만히 상승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마오쩌뚱의 단계구분을 한국의 상황에 적용하면 최근까지는 자본가계급의 전략적 공격과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방어의 시기였다. 그리고 정세가 반전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자본가계급의 전략적 수비,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반격의 준비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정세가 지속적으로 상승한다면 노동자계급의 전략적 공격과 자본가계급의 전략적 퇴각의 시기가 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입이 가능한 것은 마오쩌뚱의 군사전술은 정치적 전략전술과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정치를 통일시켜서 파악하는 것은 마오쩌뚱에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미 클라우제비츠가 200년 전에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고 한 바 있다. 마오쩌뚱은 이를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나아가 고도로 발전시켜서 항일을 위한 정치적 동원이라는 범주를 제기하고 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라는 견지에서 말한다면 전쟁은 곧 정치이며 전쟁 그 자체가 정치적 성격을 띤 행동이다. 자고로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는 전쟁은 없었다. … 그러나 ‘전쟁은 그 자체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견지에서 말한다면 전쟁은 일반적 정치와 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다.’ 정치가 일정한 단계까지 발전하면 더 이상 종전처럼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정치적 길 위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쓸어버리기 위한 전쟁을 폭발시키게 된다. … 정치적 동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전쟁의 정치적 목적을 군대와 인민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모든 병사와 인민에게 왜 싸워야 하며 싸움이 그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명백히 알려주어야 한다. … 다음으로 이 목적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치와 정책도 설명해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강령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항일구국 10대 강령’이 있고 또 ‘항전건국강령’이 있다.”47) 이렇게 정치와 군사의 통일적인 지도자였던 마오쩌뚱은 정치와 전쟁의 관계를 철저하게 파고들었고 나아가 고전적인 명제들을 심화시키고 전쟁을 위한 정치적 동원이라는 범주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전쟁기술은 앞서 있었으나 중국민족을 대표하는 마오쩌뚱 등 인민의 정치와 전쟁의 통일적인 항전에는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구전의 3단계를 나누었던 마오쩌뚱은 각 전략단계마다 주요한 투쟁의 형태를 구체화한다. “위에서 말한 바처럼 항일전쟁의 세 가지 전략단계의 작전형태를 보면, 제1단계에서는 운동전이 중요하고 유격전과 진지전은 보조적인 것이며, 제2단계에서는 유격전이 중요한 위치로 올라가고 운동전과 진지전은 이를 보조하게 되며, 제3단계에서는 운동전이 다시 중요한 형태로 올라가고 진지전과 유격전은 이를 보조하게 된다.”48) 여기서 운동전은 주로 정규군의 작전을 말하는 것이고 유격전은 유격부대의 비정규적인 작전을 말하는 것이다. 제 1단계 즉, 전략적 방어의 시기에 운동전이 중요한 것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적의 형세를 꺾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맞받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유격전과 진지전은 이렇게 결사항전하는 정규부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2단계에서는 적의 진군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유격전을 주로 운용하여 적의 힘을 빼고 지치게 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다. 제3단계 즉, 전략적 공격의 시기에는 다시 정규적인 운동전이 주요하고 유격전이 이를 보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략적 단계 즉, 정세에 의해 투쟁형태가 변한다는 맑스주의적 관점, 변증법의 관점이 군사전술의 차원에서도 철저히 관철되고 있는 것이 마오쩌뚱의 전술론의 특징이다.

또한 마오쩌뚱은 군대에서의 정치사업에 대해 정식화를 한다. “근본적 태도는 병사를 존중하며 인민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로부터 출발하면 그에 따르는 각종 정책, 방법, 방식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떠난다면 정책, 방법, 방식도 반드시 그릇되게 되며 군관과 병사 간, 군대와 인민 간의 관계도 도저히 좋을 수 없게 된다. 군대 정치사업의 3대 원칙은 첫째, 관병일치이며, 둘째, 군민일치이며, 셋째, 적군와해이다. 이러한 원칙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려면 병사를 존중하고 인민을 존중하며 무기를 포기한 적군포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이러한 근본적 태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근본적 태도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므로 시정해야 할 것이다.”49) 여기서 마오쩌뚱은 군사정치사업을 다루고 있는데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는 그리고 정치와 군사의 통일적 관점에서는 당연히 병사들에 대한 정치적 접근이 중요하고 그에 따라 관병일치, 즉, 군간부, 당간부와 병사들의 일치, 그리고 군민일치, 즉, 군대와 인민의 이익과 정서의 일치가 핵심이라는 것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고 나아가 적군와해 즉, 적군에 대한 정치사업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적군을 정치적으로 와해시키고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정치적으로 견인하는 정책인 것이다.

이렇게 마오쩌뚱의 군사전술론은 정치와 군사의 통일을 전제로 변증법의 관점을 군사전술에 철저히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접근을 통하여 마오쩌뚱은 전쟁의 지휘법칙, 나아가 중국혁명전쟁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었고 중국의 혁명전쟁과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중국혁명의 승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오쩌뚱의 전술론을 레닌과 스딸린과 비교해본다면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의 전략, 전술론을 러시아 혁명의 과정에서 정립했다면 스딸린은 그러한 레닌의 전술론을 뜨로츠끼주의에 맞서 수호했고 나아가 사회주의 건설에서 전술론을 세웠다. 마오쩌뚱은 그러한 레닌과 스딸린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중국 혁명의 특성에 맞게 발전시켰는데 특히 군사전술의 운용은 변증법의 무한한 발전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마오쩌뚱은 모순론과 실천론이라는 저작을 쓸 수 있었고 맑스주의 철학의 보고를 증가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7. 맑스-레닌주의 전술원칙에 대하여

 

이러한 고찰을 통하여 맑스주의 전술원칙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맑스주의 전술은 무엇보다도 술수, 책략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세 속에서 설정되는 전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태도의 정립과 그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형태, 조직형태, 슬로건을 정하는 것, 그리고 이를 운용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지도, 전술적 지도 등은 총체로서 하나의 과학인 것이다. 이는 요즘 유행하는 부르주아적 정치공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둘째, 맑스주의 전술은 과학적인 정세분석과 연동되는 것이다. 정세의 본질은 계급역관계라는 것, 일정한 전략단계를 기초로 정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고 주요 정치정세의 변화, 새로운 정치적 쟁점이 형성될 때마다 전술이 변화하거나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정세와 전술의 관계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당이 존재한다면 이러한 전술은 당의 전술결의라는 형태로 표현될 것이다.

셋째, 전술은 전략에 봉사하는 것이고 전략에 종속되는 것이다. 전술에서는 패배할 수 있지만 전략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전략과 전술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 사이에 만리장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략은 큰 전술이라 할 수 있고 전술은 작은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략은 전술에 의해 현실화되며 전술은 전략에 의해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전략과 전술은 상호침투하며 이 과정을 통해 정세를 역동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넷째, 맑스주의 전술에서 으뜸가는 원칙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과 헤게모니이다. 이를 맑스는 공산주의자는 현재의 운동에서 미래를 대표한다고 표현했고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라 했다. 이러한 원칙의 의미는 전략, 전술은 착취의 폐지라는 원대한 목표, 노동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한 노동자계급의 운동 방향이라는 본질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무시하거나 단지 책 속에만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 그리고 당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두루뭉술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입장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의 폐지라는 원대하고 근본적인 목표를 상실하거나 약화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고도화되는 착취질서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성장은 이러한 헤게모니를 고수하고 발전시킬 때만 가능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성숙시킴은 물론 자신의 주변에 동맹군을 끌어들일 수 있다.

다섯째, 맑스주의 전술의 운용은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전술이 하나의 책략이 아니며 부르주아적 정치공학과 다른 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현실의 운동방향인 전략, 전술에 녹여낸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 의거하여 구체적인 전술방침을 정할 때만 오류를 극소화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성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오쩌뚱이 군사전술에서 변증법을 풍부히 발전시키고 있는 것은 맑스주의 전술에 철학이 녹아들 때 어떠한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여섯째, 동맹군을 편제하고 설정하는 것은 전략의 차원이지만 그 동맹의 문제를 현실화시키는 것은 전술의 문제이다. 맑스주의 전술은 전략에 의해 규정되는 동맹군을 현실로 자신의 주위에 모이게 하기 위한 방침을 철저하게 견지하여야 한다. 모든 전술방침의 결정에 동맹군에 대한 배려가 녹아 있어야 한다. 관성적인 투쟁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전술에 동맹군을 견인하는 원칙이 녹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곱째, 맑스주의 전술은 주체의 면에서 전위운동을 강화하고 대중운동을 강화하는 데 봉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전술의 운용을 통해 전위의 정치적 능력, 정치적 지도의 능력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술운용의 목표와 방점을 대중운동의 성장에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운동의 강화와 동떨어진 의회주의적 전술, 관념적인 탁상공론, “좌익”적인 전술은 배격되어야 한다. 따라서 맑스주의 전술원칙의 다른 하나는 혁명적 현실주의라 할 수 있다. 우익적, 좌익적 편향에 맞서 싸우면서 현실운동의 전진을 개척하는 데 봉사하는 혁명적 현실주의가 맑스주의적 전술원칙의 하나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맑스주의 전술론은 역사적 계급투쟁의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전술원칙 또한 풍부하게 발전할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주의 운동은 전술의 영역에서 보면 매우 척박하다. 노동자계급운동은 개량주의에 의해 지배되면서 전술다운 전술을 운용해본 경험이 매우 부족하고 현실 운동은 사회주의자의 의식적이고 과학적인 전술이 아니라 거의 대중의 역동성, 자발성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무장해제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측면에서는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는 전술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 쏘련 붕괴 후로 무너진 노동자계급의 사상을 재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전술의 수립과 운용을 통해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시키는 양 날개의 전략을 가져야 한다.

맑스주의 전술론은 맑스, 엥겔스, 레닌, 스딸린, 마오쩌뚱 등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이러한 전술론의 발전은 곧 사회주의운동의 발전과 혁명의 발전과 일치했는데 이러한 전술론의 발전은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과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로 인해 후퇴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맑스 이래로 그리고 20세기 사회주의가 남긴 전술론을 추적하여 복원하고 현실의 운동에 적용하려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전술의 영역에서도 과학이 관철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의 기초는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기초로 맑스주의 전략, 전술론을 가다듬어 갈 때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거인으로 성장할 날은 멀지 않을 것이다.

 


 

1) 맑스,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2권, 박종철 출판사, 1992, p. 295.

 

2) 맑스, 같은 곳.

3) 같은 책, p. 299.

4) 같은 책, p. 316.

5) 같은 책, p. 328.

 

6) 레닌, “칼 맑스”, ≪정세와 노동≫ 제28호(2007년 10월), 노사과연, pp. 84-85.

 

7)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박종철출판사, 2003, pp. 15-16.

 

8) 레닌, 같은 책, p. 19.

9) 같은 책, p. 23.

10) 같은 책, p. 28.

11) 같은 책, p. 52.

12) 같은 책, p. 55.

13) 같은 책, p. 123.

14) 같은 책, p. 129.

15) 같은 책, p. 130.

16) 같은 책, p. 136.

 

17) 레닌, ≪공산주의에서 좌익소아병≫, 돌베개, 1989, p. 18.

 

18) 레닌, 같은 책, p. 27.

19) 같은 책, p. 28.

20) 같은 책, p. 65.

21) 같은 책, p. 67.

22) 같은 책, p. 73.

23) 같은 책, p. 93.

 

24) 스딸린, ≪레닌주의의 기초≫, ≪스탈린 선집≫ 제1권, 전진 출판사, 1988, p. 96.

 

25) 스딸린, 같은 책, pp. 109-118.

26) 같은 책, p. 129.

27) 같은 책, p. 130.

28) 같은 책, pp. 231-234.

29) 같은 책, pp. 135-137.

30) 같은 책, p. 139.

 

31) “공산당과 의회주의에 관한 테제”, ≪코민테른 자료선집≫ 제1권, 동녘 출판사, 1989, p. 303.

 

32) 같은 글, p. 305.

33) 같은 글, pp. 306-307.

34) “전술에 관한 테제”, 같은 책, p. 351.

35) 같은 글, p. 362.

36) “전술문제에 관한 테제”, 같은 책, p. 372.

37) 같은 글, p. 375.

38) 같은 글, p. 377.

39) 같은 곳.

 

40) 마오쩌뚱,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 ≪모택동 선집≫ 제1권, 범우사, 2001, pp. 219-220.

 

41) 마오쩌뚱, 같은 글, pp. 234-237.

 

42) 마오쩌뚱, “항일유격전쟁의 전략문제”, 같은 책, pp. 88-89.

 

43) 같은 글, p. 101.

44) 마오쩌뚱, “지구전을 논함”, 같은 책, p. 126.

45) 같은 글, pp. 126-136.

46) 같은 글, p. 152.

47) 같은 글, pp. 170-173.

48) 같은 글, p. 194.

49) 같은 글, p. 209.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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