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강신준의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 마르크스 「자본」의 재구성≫을 읽고

 

천연옥 ∣ 노사과연 부산지회 회원

 

 

대개 서평을 쓰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그 책의 내용에 동의하여 널리 알려서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하고 싶어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 책의 내용에 반대하여 그것이 무비판적으로 보급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싶어서이다. 나는 두 번째의 이유로 이 책의 서평을 쓰게 되었다.

 

독일어 원본에 기초한 맑스1)의 ≪자본≫을 한국에서 최초로 완역하여 출판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강신준은 ≪자본≫의 대중화를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프롤로그, 마르크스의 귀환과 「자본」의 재구성”에서 현재의 경제위기가 무덤 속에서 맑스를 불러내었고 사람들이 ≪자본≫을 다시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맑스의 해답은 애초에 완성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어서, 남겨진 하나의 저작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할 과제라고 한다. 여기에서 ‘귀환’이란 유행어에 맑스를 접목시킨 것은 의미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지난 백여 년 동안 맑스의 치열한 삶과 투쟁을 이어받아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운동을 해왔던 많은 사람들을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반동성도 담고 있다. 진지하게 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맑스는 어느 날 갑자기 어느 강단학자에 의해 무덤에서 불려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 속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사과연의 회원들 또한 그런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강신준은 말한다. (13쪽)

 

마르크스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생산이 보다 나은 새로운 생산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변혁적인 목표를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자본」 속에서 이 생산의 부정적인 측면, 즉 그것이 갖는 필연적인 모순을 분석하였다. 그의 귀환과 관련된 경제위기에 대한 분석도 바로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변혁적인 목표는 이런 분석만으로는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변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부정되는 현재를 대체할 새로운 긍정적 미래가 있어야 하며 여기에 다시 현재에서 미래로 이행하는 수단도 함께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세 가지 변혁의 구성요소―현재의 부정(자본주의적 사적 생산의 필연적 모순에 대한 분석), 긍정의 미래(사회적 생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이행수단(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사회적 생산으로의 구체적인 이행방법)―에 대한 글을 모두 남기지 못하고 단지 첫 번째 요소인 현재의 부정에 대한 저작으로서 「자본」만을 (그나마도 완성되지 못한 형태로 남겼을 뿐이다.)

 

강신준은 맑스주의에 대한 기본도 모르면서 맑스의 핵심 저작인 ≪자본≫을 번역하였음을 위의 인용문을 통하여 고백하고 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가인 맑스는 철학, 경제학, 정치학의 영역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체계화하였다. 맑스의 오랜 동지이자 전우인 실제로 ≪자본≫ 2, 3권을 출판한 엥겔스와 함께 맑스는 무수한 저작들을 통해서 ≪자본≫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나 강신준이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머지 두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맑스가 ≪자본≫의 서문에서 “이 책에서 나의 연구대상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및 그것에 대응하는 생산관계와 교환관계이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정도가 높은가 낮은가는 여기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법칙들 자체에 있으며, 움직일 수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작용해 관철되는 이 경향들 자체에 있다. … 현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고 말한 것처럼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적 체계 속에서 ≪자본≫의 역할은 한정된 것이었다. 맑스가 사망(1883년 3월 14일)하기 전 엥겔스와 함께 검토한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1880년)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새로운 사실들은 지금까지의 역사 전체를 새로이 연구하도록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졌다. 원시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 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 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 이제까지의 사회주의가 현존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과 그 결과들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을 그저 나쁜 것으로 보고 배격하는 것뿐이었다. 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분리될 수 없는 노동자계급의 착취를 극구 반대하는 것에 열심히 할수록, 점점 더 사회주의는 이 착취의 요체가 어디에 있으며 이 착취가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명확히 지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업은 한편으로는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그것의 역사적 연관과 관련하여 서술하는 것, 따라서 그것의 몰락의 필연성을 서술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은폐되어 있었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의 내적 성격을 발가벗기는 것이다. 이 작업은 잉여가치의 폭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다음과 같은 것이 증명되었다. 부불 노동의 전유가 자본주의의 생산 방식의 기본 형태이자 이 생산 방식을 통해 완성되는 노동자 착취의 기본 형태라는 것, 상품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가지는 가치 그대로 노동력을 구매하는 경우에도 자본가는 대가로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뽑아낸다는 것, 그리고 종국적으로 이 잉여가치는 유산 계급의 수중에 부단히 증대되며 누적되는 자본량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가치액을 형성한다는 것, 자본 생산의 유래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유래까지 설명되었다. 이 두 가지 위대한 발견들은 맑스의 공로이다. 유물론적 역사 파악, 그리고 잉여 가치를 매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 이 발견들에 의해 사회주의는 과학이 되었으며,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과학을 모든 개별성과 연관성의 지점에서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다.2) (강조는 인용자)

 

강신준은 “제1부, 경제학은 하나가 아니다”에서 노동하지 않는 소수의 ‘그들’의 경제학과 노동하는 다수의 ‘우리들’의 경제학이 있고,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자본주의시대에 경제학이 두 개가 되었다고 한다. 생산과 소비가 일치된 전(前)자본주의 시대는 강신준에 의하면 아무런 착취도 억압도 없는 사회로 묘사된다.

강신준은 말한다. (30쪽)

 

노동의 양이 부의 크기를 결정지었다. 누구나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전혀 새삼스러울 것도 비밀스러울 것도 없는 투명하고 공개된 상식과 같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는가?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된다!’ 이솝우화의 경제적 교훈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맑스가 지도자인 과학적 사회주의는 모든 역사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한다. 특히 노예제 사회와 봉건제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이었던 노예와 농노는 지배계급인 노예소유자나 봉건영주보다 노동의 양이 적었다는 말인가? 맑스는 ≪자본≫의 곳곳에서 전자본주의 시대의 수탈과 억압에 대해서 지적하였다.

 

강신준은 “제2부, 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제3부, 만들어진 부는 어떻게 분배되는가?”에서 상품, 화폐, 가치, 잉여가치에 대해 쉬운 말로 설명하고 임금과 이윤, 그리고 이윤이 기업가이득(산업이윤과 상업이윤)과 이자로 분할되는 것을 쉽게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맑스를 왜곡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내 능력 밖이어서 다루지 않으려 한다.

 

“제4부, 전망”, 사실은 여기서부터 진짜 전쟁의 시작이다. “공황의 해법: ‘그들’의 경제학과 ‘우리들’의 경제학”에서 강신준은 말한다. (202쪽)

그렇다면 공황은 해결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폐기되어야만 해결되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일까? 마르크스를 불러낸 사람들은 이 단순한 대답을 얻으려 했을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왜 무덤에서 불려 나왔을까? 우선 공황 문제를 다룬 학자가 마르크스밖에 없다는 사실이 있다. ‘그들’의 경제학에서는 공황문제가 아예 다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 결론이 무엇이든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를 결코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마르크스가 그 두터운 분량의 「자본」을 집필한 까닭이 단지 자본주의적 생산의 폐기라는 단순한 결론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과학인 까닭은 그것이 사물을 하나의 과정으로 다루고 있으며 과정을 뛰어넘는 결론에 현혹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 「자본」을 재구성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조는 인용자)

 

이것이 바로 강신준과 같은 사람들이 맑스를 찾는 이유이다. ≪자본≫이외의 맑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다 무시하고 다 왜곡하고 ≪자본≫만 붙들고 재구성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이유이고, ‘귀환’이니 뭐니 하면서 맑스를 무덤에서 불러내는 이유이다.

엥겔스는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상대적 과잉인구 혹은 산업예비군이 언제나 자본 축적의 규모 및 정력과 균형을 이루게 하는 법칙은 헤파이스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못 박아 놓은 것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못 박아 놓는다. 그것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하는 빈곤의 축적을 제약한다. 따라서 한 쪽 극에서의 부의 축적은 동시에 다른 쪽 극에서의, 즉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자본으로서 생산하는 계급 측에서의 빈곤, 노동의 고통, 노예 상태, 무지, 야수화, 도덕적 타락 등의 축적이다(맑스의 ≪자본≫).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이와 다른 형태의 생산물 분배를 기대하는 것은, 전지의 전극이 연결되어 있는데도 물이 분해되지 않기를, 즉 양극에서는 산소, 음극에서는 수소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3) (강조는 인용자)

 

위 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강신준의 주장과는 달리 맑스는 ≪자본≫을 ‘자본주의 생산의 폐기’라는 단순한 결론을 위해서 썼던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지는 역사적 임무와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물질적 기초를 밝히고,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모순은 자본주의 그 자체를 폐기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강신준은 자본주의를 폐기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맑스를 왜곡하고 있다.

 

강신준은 “공황이후의 전망: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글에서 자본주의가 인위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치유되지 않는 모순을 주기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속하는데, 존속하기 위해서 어떻게 변하게 될까? 라고 질문하면서 말한다. (215쪽)

 

신용의 팽창과 생산의 한계가 바로 공황을 일으키는 핵심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두 요인은 각기 독립적인 요인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용은 이윤에 의존하는 기생소득이며 이윤은 잉여가치가 전화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용은 잉여가치의 생산에 의존하는 요인이며 그런 점에서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의 한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공황을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처방은 바로 가치생산의 한계를 돌파하는데 있다. 케인스의 처방이 장기간에 걸쳐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이런 생산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두 가지 성분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내적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테일러 분업체계와 실현의 모순을 해결할 임금소득의 보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케인스의 처방이 효력을 다한 지금 다시 찾아온 공황에 의해 자본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맑스는 공황의 원인을 ≪자본≫ 제3권 30장 “화폐자본과 실물자본(Ⅰ)”에서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고 했다. 즉, 강신준이 말하는 것처럼 생산의 한계가 아니라 과잉생산이 문제인 것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첫째 자본주의는 왜 존속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와 둘째 케인스의 처방이 강신준의 주장처럼 자본주의 모순, 즉 생산의 한계와 임금소득의 증대를 통해 공황을 해소할 수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첫째 문제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으나 다시 말하자면 왜 자본주의의 존속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자본가들 아니 강신준의 표현대로 ‘일하지 않는 소수인 그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든 부를 생산하고도 다 빼앗긴 ‘일하는 다수인 우리들’이 고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자본주의를 끝장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둘째 문제로 넘어가면 1930년대 이후 진행된 현대사에 대한 다른 해석이 있다. 노사과연의 채만수 소장이 펴낸 ≪노동자교양경제학≫ 12강, 13강 신자유주의에 관한 부분을 보면 케인스주의의 등장배경과 역할에 대해서 잘 설명되어 있다.

채만수는 케인즈주의의 특징과 그 반노동자ㆍ반인민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말한다.

 

1930년대 대공황을 계기로 그들의 관점에도 현실에 대한 실천적 대응에도 일대 변화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절체절명의 대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서 국가가 나섰던 것인데, 케인즈 경제학에 이르러 이제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에는 ‘생산과 소비사이의 모순’그 구체적 표현으로서의 과잉생산이라는 고유한 내적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고, 이 모순을 완화ㆍ치유ㆍ예방하기 위하여 국가가 재정 및 금융적 수단을 동원,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등 재생산과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이론화되었던 것입니다. 케인즈 및 케인즈주의자들의 자본주의관은 이 점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하는 고전파 경제학과 구별되고, 따라서 ‘케인즈혁명’이라는 월계관이 씌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의 과잉생산을 ‘필연적’인 것으로서 인식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이를 단지 가능성으로만 인식할 뿐,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의 필연성을 부인하고 있고, 오히려 바로 그 점에서 그 이론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그 필연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정부가 유효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주기적인 과잉생산 공황을 자본주의적 생산에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맑스주의와 케인즈주의 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4)

 

강신준은 맑스주의와 케인즈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를 해소하고 맑스와 케인즈를 섞어놓음으로써 맑스를 재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강신준은 말한다. (217쪽)

 

결국 생산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방법, 다시 말해 과잉자본과 과잉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자본소유를 사적 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공황 이후 자본주의는 그런 방향으로 변화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그것은 공황의 자연적 강제력이 자본주의에 가하는 필연적인 작용이며 자본주의는 이 작용의 방향을 따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공황이후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인 제너럴 모터스를 결국 국유화한 것은 바로 그런 공황의 자연적 강제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자본주의적 기본모순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이라고 표현할 때,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로의 전화는 사회주의 혁명에서 혁명정부가 기본적으로 취해야 하는 경제적 조치이다. 이것은 맑스의 1847년 “공산당 선언”에 언명되어 있고, 맑스의 많은 정치적 글들 속에 표현되어 있다. 즉 자본주의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폐기하기 위해서 취해야 할 기본적 조치인 것이다. 그런데 강신준은 자본주의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자본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그 예가 오바마 정부의 공황구제, 즉 국민의 세금으로 파산해가는 독점자본을 인수하는 국유화이다.

채만수는 ≪노동자교양경제학≫ 에서 말한다.

 

국ㆍ공유기업이 발생하는 두 번째 원인은 ‘공황구제’입니다. 경제공황이라는 사태를 맞으면 수많은 자본이 파산해가게 되는데, 거대 독점자본의 파산을 방치하면 자본주의체제 그 자체가 파산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국가가 국민의 세금과 재원을 담보로 하여 그들 파산하는 독점자본에게 거대한 특혜적 구제금융을 제공하거나 아예 국유화하여 구제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황구제입니다.5)

 

공황이라는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시키는 한 방법, 무너져 가는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 파산 직전의 기업을 국민의 세금으로 살리는 국유화에 대해 자본소유를 사적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전환시키는 것이라는 미화하는 주장(이 주장에 따르면 오바마 정권만이 아니라 현대양행을 국유화하여 한국중공업이라 이름 붙인 전두환 정권도 얼마나 훌륭한가?)을 한 강신준은 이어서 말한다. (217-218쪽)

 

다음으로 실현의 모순을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을까? 실현의 모순을 일으키는 요인은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특징 때문이다. … 따라서 실현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산이 확대될 때 소비도 함께 늘어나야만 한다. 케인스의 처방은 임금소득의 보장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었고 공황 이후 오바마 정부가 대규모 소득재분배 정책을 시행하고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높이겠다고 공언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공황의 강제력은 소득분배의 구조를 바꾸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 결국 공황이 강제하는 소득분배의 구조변화는 임금소득의 감소를 억제하는 방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황 즉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는 자본의 위기이고,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자본은 이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하려고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라는 현대자본주의의 구체적 모습이다. 신자유주의는 크게 보아 공공부문의 시장화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표현되는데,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불안정 노동의 확대이다. 이것의 결과는 노동자계급의 임금소득의 축소로 나타난다. 우리가 이해하는 한 공황의 강제력은 임금소득의 확대가 아니라 임금소득의 축소이다. 이에 대해 강신준도 이 책의 24쪽에서 한국의 노동소득분배율이 1998년 61.9%에서 2007년 61.5%로 줄어들고 있다고 한국은행 자료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올해 월가 점령시위로 떠들썩했던 미국의 경우에는 실업률 20%, 청년 실업률 40%로 갈수록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강제하는 인구법칙에 따른 상대적 과잉인구의 증가에 의한 임금소득의 축소의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최근 오슬로대학의 박노자 교수가 ≪레디앙≫에 발표한 글 “북유럽 극우파가 극성인 이유”6)에는 복지국가의 모델인 노르웨이와 핀란드의 온건 좌파에 의해 도입된 신자유주의로, 핀란드의 경우 이미 1999년에 비정규직의 비율이 21%에 달하고 있으며, 노르웨이의 경우 9%(유럽연합 평균 14%)에 불과하지만 신자유주의에 가장 노출된 토건업 같은 부문에서는 오슬로 지역 같으면 약 25%의 노동자만이 정규직이고 나머지는 국내나 외국에서 파견된 비정규직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이미 북유럽 복지국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강신준의 주장과는 반대로 공황의 강제력은 임금소득의 확대가 아니라 임금소득의 축소로 나아가고 있으며, 역사상 복지국가의 성립은 쏘련이라는 사회주의국가의 존재와의 대립 속에서 자국의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을 제거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자본의 양보에 불과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강신준은 ‘제 11장 액션 플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자본주의라는 현재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라는 미래로 이행하기 위한 이행수단을 말한다. (228쪽)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인간의 경제적 욕망 가운데 사회적 욕망의 비중을 높이고 개인적 욕망의 비중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욕망의 사적 소유가 감소하고 욕망의 사회적 소유가 증가하는 것을 뜻한다.

 

강신준의 이런 애매모호한 표현과 비교하여, 맑스의 1847년의 “공산당 선언”의 일부를 보자.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소유 일반의 폐지가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의 폐지이다. 그런데 현대의 부르주아적 사적 소유는 계급 대립에, 즉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들의 착취에 근거하는 생산물의 생산 및 전유의 최후의, 그리고 가장 완성된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단 하나의 표현으로 집약할 수 있다: 사적소유의 철폐.7)

 

맑스의 여러 저작들을 보면 사회주의(맑스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들과 분리되어서 사고되거나 분석된 적이 없다. 다시 강신준의 주장과 맑스의 주장을 비교하면서 읽어보자면, 강신준의 같은 책 229-233쪽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본주의 모순의 가장 단적인 표현인 공황을 만들어내는 두 요인, 생산의 모순과 실현의 모순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를 생산의 사회화와 임금소득의 증가라는 두 경향으로 몰아가고 이들 두 경향은 그대로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생산양식의 모습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암시는 바로 욕망의 사회화와 임금의 사회화라는 모습을 통해 생산이 사적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전화하는 종착점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에서 암시하는 사회주의의 모습이다. … 사회주의로의 이행주체는 정확하게 말해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조직인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이다. … 생산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노동시간을 공동으로 통제하고 이 통제권을 확대해나감으로써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다. … 노동시간의 단축이야말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결정적인 도약점이 되는 것이다. … 분배영역에서도 노동하는 사람들은 중요한 이행수단을 가지고 있다. … 노동조직에 의한 사회적 임금의 확대, 즉 임금의 사회화가 사회주의 이행의 두 번째 요소가 된다.

 

즉, 사회주의란 노동시간의 단축과 사회적 임금의 확대라는 이행수단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이미 “공산당 선언”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계급으로의 고양,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들을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들의 양을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 발전과정 속에서 계급적 차이들이 소멸되고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되면, 공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본래의 의미에서 정치권력이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폭력이다. 만일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연적으로 계급으로 단결되고 혁명을 통해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만들고, 또 지배계급으로서 낡은 생산관계들을 폭력적으로 폐기하게 된다면, 그들은 이 생산관계들과 아울러 계급대립의 존립 조건들과 계급 일반을 폐기하게 될 것이고, 또 이를 통해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도 폐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에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연합체가 나타난다.8)

 

맑스가 평생을 바쳐 사회주의 사회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각국의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단호한 부분으로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개입이었다. 그것은 강신준처럼 애매모호한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조직되는 혁명을 통해서 자본의 사적소유를 철폐하고, 임금소득의 확대나 사회적 임금의 확대가 아니라 임금제도 자체를 철폐하는 것을 통해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맑스의 이름으로 맑스를 왜곡하는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처럼 강신준 역시 맑스의 귀환이니 예언이니 하면서 변증법과 과학을 들먹이면서 노동시간의 단축이나 사회적 임금의 확대를 통해 사회주의가 먼 미래에 가능할 것이라고 설교하고 있다. 또한 현실사회주의에 대해서도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소수 볼쉐비끼의 군사쿠데타로 묘사하면서 소수파였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포기하였고, 독재와 폭력으로 지탱되다가 1991년 러시아 민중의 의지로 현실사회주의가 좌초되었다고 한다. 1902년 카우츠키는 ≪이스끄라≫ 제18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1848년과 대조적으로 지금은 슬라브인들이 혁명적 인민들의 대열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혁명 사상과 혁명적 행동의 무게중심이 더욱더 슬라브인들 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듯하다. 혁명의 중심이 서구에서 동구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9)

 

카우츠키가 인정한 것처럼 러시아는 19세기에 들어서자 세계혁명의 무게중심이 되었고, 정치사상의 한 조류로서의 볼쉐비즘은 1903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혁명을 준비하고 러시아노동운동을 지도했다. 러시아혁명을 군사쿠데타라니? 노사과연에서 출판한 바만 아자드의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10)를 보면 80년간의 쏘련 사회주의의 역사적 성과와 해체요인들에 대한 분석이 잘 이루어져 있다.

 

강신준은 “에필로그, 환상에서 과학으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43쪽)

 

상대에 대한 인정과 합의, 이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원리가 아닌가?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의 원리 위에 세워진 인위적인 제도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배반할 수 없다.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의 확대는 거부할 수 없는 요구이자 불가피한 요구이며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확대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져올 변증법적 전환이 사회화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그것이 민주주의의 확대를 필연적으로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는 역사상 자본주의에서 등장한 파시즘과 파시즘에 의한 인류의 학살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로 표현되는 보통선거권은 맑스ㆍ엥겔스에 의하면 노동자계급의 성숙도를 측정하는 기능에 불과하다. 계급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한계에 갇혀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다른 표현이다. 민주주의를 몰계급적으로 해석하는 강신준의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오류이다.

 

결론적으로 강신준은 철저히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사상으로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이론화하고 실천에 적용했던 맑스를 몰계급적으로 해석하면서 왜곡하고 있다. 강신준의 주장대로라면 케인즈나 오바마 등이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바마는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제국주의 침략과 전쟁을 통해 군수독점자본과 금융독점자본의 이익을 위해 미국 노동자 민중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노동자 민중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데 정점에 서 있다. 맑스의 ≪자본≫의 독일어 원본을 완역한 근 20년에 이르는 그의 노력의 현실적 결론이 케인즈와 오바마라니 맑스가 통곡할 일이다. 나는 그에게 다시 질문하고 싶다. 어떤 노동조합이고 어떤 노동자정당인가? 노동시간의 단축과 사회적 임금의 확대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한가? 특히 2008년 이후 심화되기 시작한 경제위기는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이 위기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시키려는 자본의 움직임으로 인하여 전 세계의 노동자 민중의 투쟁도 날로 격화되고 있다. 아랍의 봄과 월가시위로 상징되는 2011년, 그리고 한 해 내내 언론을 장식한 그리스의 총파업 소식은 집권 그리스의 사회당이 재정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노동자 민중의 복지에 대한 공격밖에 다른 선택이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유럽연합의 위기는 남부유럽을 넘어 전 유럽으로, 전 세계로 번져가고 있다. 임금소득의 확대는커녕 공황 때마다 구제를 위해 쏟아 부은 돈, 재정지출의 누적으로 인한 재정위기는 복지국가라 지칭되던 사회에서도 복지가 축소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공황이 임금소득의 확대와 사회적 소유를 확대시킨다는 필연성 운운하면서 ≪자본≫의 정신을 왜곡시키는 강신준의 책과 글, 강의가 많은 사람들 특히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다가가는 것에 경계한다.

 


 

1) 강신준은 ‘마르크스’라고 표현하고 있으나, 노사과연에서는 ‘맑스’라고 표현해 왔으므로 책 제목을 제외하고는 ‘맑스’라고 표현하기로 한다.

 

2) 엥겔스,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선집≫) 제5권, 박종철출판사, 1994, p. 453.

 

3) 엥겔스, 같은 책, p. 463.

 

4) 채만수, ≪노동자교양경제학≫(제5판), 노사과연, 2011, p. 614.

 

5) 채만수, 같은 책, p. 671.

 

6) 박노자, “북유럽 극우파가 극성인 이유(신자유주의 복지국가의 귀결…좌파 제대로 하면 사라져)”, ≪레디앙≫, 2011년 10월 28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3739.

 

7) 맑스, “공산주의당 선언”, ≪선집≫ 제1권, p. 413.

 

8) 맑스, 같은 글, pp. 420-421.

 

9) V. 레닌 저, 김남섭 역,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돌베개, 1989, p. 15.

 

10) 바만 아자드 저, 채만수 역, ≪영웅적 투쟁 쓰라린 패배 ― 사회주의국가 쏘련을 해체시킨 요인들≫, 노사과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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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옥 부산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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