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파악하는 관점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 ∣ 활동가집단 사상운동

번역: 임덕영(노사과연 편집위원)

 

 

* 이 글은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의 계간지 ≪사회평론≫ 제167호(2011년 가을)에 발표된 글을 번역한 것이다. 각주는 모두 원문의 주이며, 역자의 주는 본문 중 역주로 따로 표시하였다. ― ‘개혁ㆍ개방’ 30여년이 지난 중국 ‘사회주의’의 변모

 

 

들어가며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인가, 자본주의국가인가? 사회주의의 길을 모색 중이라고 파악되는 가, 자본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파악되는 가, 입장은 논자에 따라 매우 상이합니다. 글을 쓰며 이야기를 하는 저도 때에 따라서는 백인가, 흑인가 확실히 하고 싶은 충동에 쫓기곤 합니다. 이번(2011년 6월 1일 HOWS) 강좌가 이렇게 알쏭달쏭함을 틀림없이 풀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분들이 기대하고 계시다면 저는 아마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단정적으로 말을 하고, 깔끔하게 끝낼 작정을 해도, 어떤 해결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중국의 당과 정부의 문헌을 체계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충분히 읽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느껴왔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바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단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비추어 생각하고 무엇이 진실인가를 끝까지 밝혀내고 변화하고 있는 현실을 노력하여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아닐까요? 중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말하자면, 한 세기에 걸친 아포리아(간단히 해결될 수 없는 난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HOWS 2011년도 전기 리플렛에 이 시리즈(사회주의 제 국가의 현황과 항로)의 모티브를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세계정세의 격변, 대역류에 저항하며 살아남은 사회주의 제 국가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의해서도 규정되었으며, 제국주의의 세계지배에 대한 대응, 거리두기의 방식에 있어서도 두 가지 방식으로 분열되었다. 먼저 중국으로 대표된 개방경제의 실천은 사회주의를 재생시키려는 투쟁의 전도에 복잡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조선ㆍ꾸바를 포함하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적 시대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점과 밀접하고 불가결한 관계에 있다. 각국의 현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ㆍ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하자”라고.

이것이 저의 기본적 입각점입니다. 사회주의론의 입장에서 현대 중국을 고찰하는 최초의 본격적인 실험이 되겠습니다. 아카데미즘의 세계는 물론이거니와 논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세계를 넓게 살펴보아도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문제를 다루는 것은 얼마나 좀처럼 없던지.

큰 서점의 중국 코너를 힐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중국을 나쁜 어떤 것이라고 비난하고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악랄한 싸구려 유행물, 폭로성 류의 책들입니다. 아시아 대국으로 대두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공포심과 자기 자신을 일단 높게 두고 중국을 낮추어 보는 허세가 뒤섞인 대리물입니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중국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그 수법을 전수하려는 노하우 책. 진지한 연구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국 연구의 최근 융성은 약진하는 중국 시장에 파고들어 돈벌이를 꾀하고자 하는 일본 독점자본의 바람에 편승하여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수요의 존재에 의해 규정된 공급의 확대―중국연구를 밥벌이 재료로 하는 중국 관찰자(watcher)의 공급확대―를 반영한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중국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절대적으로 소수파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이 주제는 설령 수십 페이지를 할애하더라도 끝낼 수 없습니다.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기탄없는 의견(이론(異論)ㆍ반론)을 환영합니다.

 

 

‘개혁ㆍ개방’ 이후의 시대구분

 

먼저 현재의 중국이, ‘개방ㆍ개방’ 정책 30여년 남짓의 행보 가운데 어떠한 시기에 해당되는가를 정리해두고자 합니다. 저는 이 시기를 3단계로 나누어 고찰할 것입니다.

제1기는 1978년부터 1992년까지. 임시로 ‘도움닫기(助走)’ 시기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10년간의 재난’이라 일컬어진 프롤레타리아트 문화대혁명에 수반된 혼란을 수습하고, 1978년 당 11기 3중전회(중국공산당 제11기 전국대표대회 제3차 중앙위원회 총회)까지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의 후계자였던 화궈펑을 쫓아내고 주도권을 확립하여 1982년 12전대회에서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방침을 확정, 인민공사의 해체, 가족생산청부제의 도입이 시작됩니다. 1984년 12기 3중전회 ‘경제체제개혁에 대한 결정’을 고비로 국유기업개혁이 정치일정에 오릅니다만, 본격적인 전개는 제2기 이후로 넘겨집니다. 덩샤오핑의 주도권이 확립되었다고는 하지만, 중국공산당의 경제발전전략이 단선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 시기는 계획인가 시장인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확산되었던 시기이며 저는 ‘시장경제’화가 전면에 내세워진 제2기 이후에서 돌이켜 보면서, 이 시기를 ‘도움닫기’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제2기는 1992년부터 2001년까지. ‘개혁ㆍ개방’의 가속화기라고 하겠습니다. ‘계획이 주(主), 시장은 종(從)’에서 ‘시장이 주’로의 결정적 전환은 1992년 처음으로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1)의 발표를 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1989년 제2차 천안문 사건2)을 헤쳐나간 다음, ‘정리ㆍ정돈’이라 불린 조정기를 거쳐 ‘개혁ㆍ개방’의 변화로 대호령을 내렸던 것이 이 문헌입니다. 1985년 쏘련에서 고르바쵸프 지도부가 성립하고 다음 해부터 개시된 뻬레스뜨로이까의 영향이 동구에 파급되고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의 시작을 고한 것이 1989년이었으며, 제2차 천안문 사건은 그러한 세계적 격동의 한 가운데에서 그 일환으로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11기 3중전회부터 10년, 마침 그때 경제개혁의 왜곡이 노정되어 물가가 급등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과 노동자의 불만이 결합되어 제2차 천안문 사건에 이릅니다. 위에서 언급한 ‘정리ㆍ정돈’은 물가의 급등을 초래한 경기의 과열을 식히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습니다. 경제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순강화”에 표현된 이른바 덩샤오핑 이론이 무엇이었는지는 뒤에서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순강화”의 발표된 그 해 가을의 14전대회는 ‘사회주의시장경제’ 노선을 채택하여 기업경영을 행정으로부터 분리ㆍ재편ㆍ주식제로 하는 것을 축으로 한 국유기업개혁이 본격화됩니다. 국유제ㆍ공유제와 함께 사유경제를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중요 부문으로서 합법화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1999년 헌법개정). ‘개혁ㆍ개방’의 가속화기라고 이름붙인 이유입니다.

제3기는 2001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임시적으로 세계경제에의 융합기라고 해 둡니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맹합니다(2001-2006년 경과기간). 2002년 16전대회는 전년의 당창립 80주년 기념 축하대회에서의 연설에서 장쩌민 총서기가 제창한 ‘세 가지의 대표’3)를 승인하고 강령(총강) 개정이 이루어졌습니다. 사경영기업가[중국어로 私營이라 불리는데 종업원 7인 이상을 고용한 전형적인 사적 자본가를 말함-역주]의 입당의 길이 열리고, 2004년 개정헌법에 ‘사적 재산의 불가침’이 명기됩니다.4) 제3기는 16전대회에서의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의 인수인계 시기에 해당하며 16기 3중전회(2003년)의 후진타오의 ‘과학적 발전관’5)의 제창이후, 국내외의 제 조건에 의해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형식으로 종래의 발전전략의 수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제3기로 묶는 것은 시기의 경과에 따라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 대략적인 시기구분을 기억해 둔 다음, ‘개혁ㆍ개방’ 30년 남짓을 거쳐 중국이 어떠한 상황에 조우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타개하려 했는지 고찰해 봅시다.

 

 

17기 5중전회에서 보는 발전전략의 전환

 

후진타오 보고를 실마리로 하고자 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내걸고 있는 당면 목표인 ‘소강(小康)사회’6)란 비교적 여유 있는 사회,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입니다. 2020년에 국내 총생산(GDP)을 2000년의 4배로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2009년의 1인당 GDP는 3590달러이니까 GDP로 2010년에 일본을 따돌리고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은 의연하게 발전도상국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요?

17기 5중전회는 발전전략(경제성장 패턴)의 전환, 내ㆍ외수 전략조정, 에너지 효율의 향상을 제출하였습니다. 발전전략의 전환에는 소비와 투자와 수출 등 3부분의 조화를 이룬 경제성장을 강조했습니다. 3부문의 몫은 약 1/3씩으로 소비부분의 미약성, 투자와 수출의 비율의 이상(異常) 고수준이 특징입니다. ‘선진국’의 경우 GDP에서 점하는 개인 소비 비율은 60% 전후이므로, 중국의 낮은 수준은 두드러진 것입니다. 거액의 무역흑자가 누적되어 중국을 보는 제 외국의 시선은 갈수록 따가워지며, 이 때문에 내수로 전환하는 경제성장으로 전환을 강요당하여, 17기 5중전회는 ‘도시ㆍ농촌주민의 수입을 동일하게 큰 폭으로 늘린다’는 목표를 내걸었습니다.

2009년 이후 법정 최저임금을 점차로 올렸으며, 또한 농촌 출신의 젊은이들이 일본계기업을 상대로 임금인상을 요구하여 실시한 파업(살쾡이 파업)7)을 사실상 묵인하였던 것도 노동자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당 중앙과 국무원은 ‘중요한 것 중 가장 중요한(重中之重)’ ‘3농 문제’8)의 해결에도 힘을 쏟아, 2006년에 농업세를 철폐, 농촌 대책비의 증액이나 곡물생산자에 대한 보조금의 확대, 최저매수가격의 상승 등 국가예산을 중점적으로 분배했던 것도 이번의 정책전환과 합치됩니다.

소득격차는 계속 확대되고 있습니다. 1997년 2.6배였던 도시와 농촌의 격차는 2010년에는 3.3배로 확대, 일반 종업원의 임금 격차는 최대 15배, 국유기업의 경영자와 평균 임금 격차는 128배인 상태입니다. 지니 계수(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측정하는 지표)는 0.47. 국제적 경계 라인으로 되어 있는 0.4를 10년 전에 넘은 이래 계속 상승. 국영 신화사 통신은 “용인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적기≫, 2010년 6월 5일). 중국의 세제는 세수에서 점하는 개인소득세의 비율이 낮으며(6.8%) 상속세가 없기 때문에 소득재분배가 기능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투자부분의 비대화는 복잡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고정자본(정부투자, 기업의 설비투자, 가계의 주택투자의 합계), 무엇보다 정부투자의 억제는 곤란을 매우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당중앙과 국무원은 반복하여 중복투자나 난개발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중앙 간부, 지방정부의 간부가 성적을 올리려는 경쟁이 격화되고 중앙의 통제의 효과가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입니다. 변변찮은 보상도 없이 농민을 강제적으로 토지에서 몰아내는 예(토지가 국유이기 때문입니다)가 끝이지 않고 있으며 농민의 항의행동이 폭동으로 발전하는 것도 종종 있습니다.

발전전략의 전환이 왜 필요한 것일까요? 배경에는 인구구성의 변화, 자원 면에서의 제약, 외압의 상승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15-64세를 생산연령인구라고 합니다만, 중국의 생산연령인구는 2015년 전후에 피크에 도달하고 감소ㆍ고령화 경향을 따를 것이라고 예상되고 있습니다.9) 경제성장에 따르는 자원의 확보는 그 어려움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중국인민대학의 웬티에준 교수는 중국 국정은 인구가 많으며 자원은 부족하다고 쓰고 있습니다(≪중국의 입장에서 농업농촌문제란 무엇인가? ― ‘3농 문제’와 중국의 경제ㆍ사회구조≫, 작품사, 2009년). 석유, 레어어스[희토류-역주]를 제외한 광물자원은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원을 얻기 위해 세계 각지에 진출하여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환경파괴나 낮은 에너지 효율은 향후 경제발전의 족쇄가 되고 있으며 유지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ㆍ외수 전략 조정의 중점은 수출 편중의 시정(수출과 수입의 양방 중시), 외자도입 중심에서의 전환(외자도입과 외교투자의 양방 중시, ‘밖으로 나가는(走出去)’ 전략의 가속), 수량 중시에서의 전환(질의 중시, 업무대행 제품의 수출 즉 가공무역형의 탈각, 고부가가치화)입니다. 마지막 항목은 노동집약형에서 자본집약형으로의 전환, 산업구조 고도화의 다른 표현임에 틀림없습니다.

당 중앙과 국무원은 2008년 리만 쇼크 후 세계적 불황에 즈음하여, 2009년부터 2년간 4조 위안의 경기대책을 실시하였습니다. 2009년 GDP가 34.5조 위안이므로 그 규모의 엄청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중국 경제는 그것에 의해 빠른 회복을 달성합니다만, ‘선진국’ 무엇보다 미ㆍ일 양국의 실질적인 제로 금리, 양적 완화 정책으로 인해, 전 세계에 뿌려진 과잉 머니의 일부가 당국의 외자규제를 빠져나가 중국에도 흘러들어(2010년 유입액, 당국의 추계로 355억 달러, 약 3조 엔) 물가를 상승시켰으며(2010년 6월 전년 동월대비 6.4%), 또한 경기대책의 일환으로 금융완화와 더불어 부동산 버블이 발생되어 어쩔 수 없이 금융 긴축 정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2011년도를 첫 해로 한 제12기 5개년 계획의 전도에 암운이 드리워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회주의관과 사회주의 건설노선

 

중국 공산당은 자국을 ‘사회주의’라고 규정할 때 이 지표를 무엇에서 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전에 맑스-레닌주의와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승인되어 온 사회주의의 일반적 원칙을 재확인해 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의 이해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ㆍ 자본의 폐절(노동력 상품의 폐절을 포함)

ㆍ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ㆍ 노동에 합당한 분배

ㆍ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조응하는 정치형태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이러한 제 원칙의 충족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세계적 이행기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며, 제 원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것은 더없이 어리석은 것이며, 엉터리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덩샤오핑은, 1979년 3월 중앙이론공작회의에서 “4개항의 기본원칙”을 제창합니다. 사회주의의 길,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10), 공산당의 지도, 맑스ㆍ레닌주의ㆍ마오쩌둥 사상의 견지라는 네 가지 입니다. 이것은 이후 ‘하나의 중심(경제건설), 두 개의 기본점(‘개혁ㆍ개방’과 ‘4개항의 기본원칙’의 견지)’으로 부연(敷衍)됩니다.

이야기의 순서를 뛰어넘어 1990년대로 옮겨가겠습니다. 1992년 초봄을 기후 온난한 연해부에서 보낸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의 정식 타이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각 지역을 시찰하고 담화를 발표합니다만 그것을 정리한 것이 “남순강화”입니다. 정치가 덩샤오핑의 뛰어난 담력을 느끼게 해주는 문헌임과 동시에 맑스주의의 제 원칙을 왜곡시킨 실용주의자(pragmatist) 덩샤오핑의 면목이 생생하게 드러난 문헌이기도 합니다. 핵심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개혁개방의 일보를 내딛지 않고 구태여 나아가려 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적 요소가 많아진다던지, 자본주의적 길을 걷게 된다는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해가 되는 것은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주로 판단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적인 국력증강, 인민의 생활수준의 향상에 유리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 계획인가, 시장인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계획경제는 사회주의와 동일(equal)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도 계획은 있다.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계획과 시장은 그 어느 쪽도 경제수단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을 해방하고,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착취를 소멸시키고 빈부의 차[양극분화-역주]를 없애고, 마지막으로 공동의 풍요로움[共同富裕, 공동부유가 중국어 원래의 표현이다-역주]에 도달하는 것이다. …

 

덩샤오핑은 ‘계획경제’를 ‘경제계획’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姓社姓資, 시장경제라는 체제에 사회주의라는 성을 붙일 것인가, 자본주의라는 성을 붙일 것인가-역주]를 묻지 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요약하면 생산력의 발전이 모든 것이며,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것에 효과가 있다면 수단ㆍ방법을 묻지 말라는 태도가 표명되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증권거래소가 창설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토지국유를 바탕으로 부동산의 판매가 시작된 것도 “남순강화”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덩샤오핑은 당시 ‘개혁ㆍ개방의 총설계사’라고 불렸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유방임을 장려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1992년은 봄부터 여름에 걸쳐 “남순강화”의 전당적 학습이 조직되고 11기 3중전회 이래 당내 논쟁이 결말을 보게 된 것이 같은 해 가을 14전대회였습니다. 장쩌민 보고는 “남순강화”의 의의를 언급하였고,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체제개혁은 어떠한 모델로 결정하면 좋을 것인가, 이것이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에 있어서 전 국면에 걸친 중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계획과 시장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처리하는 것에 있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특유의 것이며 계획경제야 말로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적 특징이라 한다. 11기 3중전회 이래 개혁의 심화에 동반되어 우리들은 점차 그러한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내고 개혁과 발전의 촉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 그중에서 특히 덩샤오핑 동지는 올해 처음으로 한 중요담화에서 더욱 그러한 지적을 하고 있다. “계획경제=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에도 계획은 있다. 시장경제=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계획과 시장은 어느 쪽도 경제수단이다. 계획인지, 시장인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와의 본질적 구별이 아니다”라고. 이러한 명확한 논지에 의해,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사회의 기본제도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사상 상의 질곡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기 때문에 계획과 시장과의 관계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에는 새로운 중요한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다. … 실천의 발전과 인식의 심화는 우리들이 확실히 제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체제 개혁의 목표는 사회주의의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고 한층 더 생산력의 해방과 발전을 촉진하는 것에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무엇인가

14전대회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덩샤오핑 노선의 전면적 계승,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의 정식화입니다. 13전대회(1989년)의 ‘사회주의 초급단계’ 규정11)을 기초로 하여 경제건설의 구체적 지침으로서 제출된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였습니다. 중국은 이후 이 코스를 쏜살같이 돌진해 갔습니다. 저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노선이 제출된 당 중추 및 사회과학원 내부사정을 알지 못합니다. 사회주의인가, 자본주의인가를 둘러싼 당내 대립을, 그 어느 쪽이라도 적절하게 설명하기 위해 절충, 접목할 수도 없습니다.

장쩌민은 1993년 9월 당내 교육용 교과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무엇인가≫를 정리하도록 지시합니다. 국무원 발전연구 센터와 사회과학원 공동편집에 의한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무엇인가≫(일역 ≪중국경제≫ 상ㆍ하, 종합법령, 1994년 6월)가 출판되었습니다. 8장 구성, Q&A방식으로 작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부록 “미국, 독일, 일본의 시장경제 모델의 아웃라인”을 배치하는 구성이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자국을 ‘사회주의’라 규정할 때의 지표를 이 텍스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길지만 중요한 것이므로 인용하겠습니다.

 

“시장경제는 사회체제 상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의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란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이며 지금까지의 계획경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것은 시장경제의 공통성을 가지며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제와 운영에 있어서 상통하며 비슷한 점이 있으며, 양자 간에 큰 차이는 없다. 덩샤오핑 동지가 말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방법상으로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와 매우 닮아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오늘날 세계 시장경제 국가의 모든 유용한 지식과 경험을 참고해야 한다. … / 또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이지만, 정권의 성격이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사회의 공정을 보장하고 지역의 발전을 강조하고 빈곤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정부는 이 조정 메커니즘과 사회정책을 통해 소득 차의 극단적인 확대를 막고 최종적으로는 모두가 유복하게 되는 것을 실현할 것이다. … / 요약하자면 정권의 성격이 사회주의이며 공산당의 지도가 있어, 공유제를 주체로 함께 유복하게 된다는 목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머리에 ‘사회주의’라는 관을 쓰고 있지만, ‘시장경제’라는 점에서는 자본주의와 차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공유제를 주체(主體)[주요한 몸통으로 한다는 것으로서 공유제가 소유형태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90년대 이후 형해화되어왔다-역주]로 하’고, ‘공산당의 지도’가 있으며, ‘정권의 성격이 사회주의’이며, ‘함께 유복하고자 하는 목표’를 들고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것입니다.

이하 ‘시장경제’의 원리적 파악, ‘공유제가 주체’의 음미에 대해 순서대로 제 의견을 표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애매하게 제시되는 자본주의와의 경계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와 같은 의미라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다릅니다. 그들은 특정 생산양식을 초월한 역사적 범주로서 ‘시장경제’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시장경제’가 모든 생산양식을 관통하여 중립적 성격이라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있는 것처럼, 사회주의 시장경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올바른 것일까요?

이후 저는 ‘시장경제’라는 호칭을 받아들이지 않고 ‘상품경제’라는 호칭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미는 동일합니다. ‘시장경제’ 개념에는 부르주아적 가치관이 붙어 다녀 오염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상품이란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되는 노동의 생산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생산물 모두가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품 내지는 상품유통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 한 사회의 노동생산물의 대부분이 상품으로 생산되어 유통되는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상품경제의 기초 위에 성립된 것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품-화폐유통이 상당 정도 발달되어 있을 것이 전제조건이었습니다. 상품유통이 지배적인 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성립과 동시에 출현하고 게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상품생산-상품유통을 최고도로 발달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칼 맑스의 대저 ≪자본론≫ 제1권 제1편 제1장 ‘상품’의 분석을 떠올려 주시길 바랍니다. 맑스는 ‘상품’을 특정의 생산양식에서 독립시킨 범주로서 다루며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서두의 한 문장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고 있는 제 사회의 부는 ‘상품의 거대한 집합’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그 부의 요소형태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상품’의 과학적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성립에 의해 가능성이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 두고자 합니다만 저는 사회주의 건설의 도상에서 과도기적으로 ‘상품경제’를 활용하는 것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산력의 발전이 늦춰진 단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국의 국가 사정은 충분히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방법을 제한적으로 채택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며 피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품경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왜곡시키고 미화하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애매하게 만드는 이론적 왜곡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는 ‘상품경제’의 부정ㆍ극복에 의해서만이 완성될 수 있다. ― 그것이 저의 인식입니다.

중국의 문헌을 읽다보면, ‘시장경제’에 대한 도를 넘은 찬미에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일례를 들어봅시다.

 

시장경제는 사회ㆍ경제자원 분배의 한 가지 방법이며 경제의 한 가지 구조이며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중요한 성과이다. 사회주의의 조건 하에서 시장경제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와 시장경제를 연계시키는 것은 위대한 창의이다.12)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의 중요한 성과라는 어법은 인류의 영지(英知)의 결정체라는 듯한 여운이 느껴집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상품경제는 경제는 이래야 한다는 청사진이 있어서 그 청사진에 따른 인간의 의식적 활동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 따위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제도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펼치는 경제활동이 개개의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경제법칙에 강제되고 이른바 그 결과로서 상품경제인 자본주의경제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며 맑스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적 경과”(≪자본론≫ 제1권 초판 “서언”, 1867년)에서 파악하였고, “그 사회구성체(자본주의사회)를 끝으로 인류의 전사(前史)는 끝난다”(≪경제학비판≫ “서언”, 1859년)라고 쓴 것은 그러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경제법칙에 구속된 사회를 극복하고 이성에 근거하여 경제활동을 계획ㆍ조직하고 관리하는 사회야말로 사회주의 사회인 것입니다.

사건들의 추이 상, 시핑이 말한 상품경제의 ‘자원분배’ 기능에 대해 보충해 두고자 합니다. 상품경제는 상품을 파는 쪽과 사는 쪽이 대등한 관계(당연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만)로 시장에서 상대하는 것이 성립합니다. 상품생산자는 자신이 만든 상품에 어느 정도 사회적 수요가 있을지를 알지 못한 채 생산하기 때문에, 반드시 팔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사고자 하는 쪽을 찾는 것은 우연적인 기회에 속합니다. 팔리지 않으면 상품의 가격은 내려가거나 혹은 전혀 팔리지 않는다면 그는 파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반대로 수요가 있지만 공급되는 상품이 적은 경우 가격은 등귀하고 그 상품생산자는 생각지 못하게 이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모든 상품에 대해 사회적 규범으로 확대되고, 시핑이 말하는 ‘자원배분’이 개개의 상품생산자의 의사를 넘어서 결과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리고 이 경과는 장대한 손실(loss), 사회적 부의 낭비를 피할 수 없으며, 그 기초 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발달한 상품경제 하에서는 노동력 또한 상품으로서 시장에 판매되는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력도 또한 상품으로 판매되는 관계에 놓이게 되어 근대의 생산자본이 성립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이론가들은 노동시장의 존재를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개의치 않고 있어 보입니다. 사회주의는 노동력 상품의 폐절, 즉 자본의 폐절을 전제로 합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의심은 깊어갈 뿐입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네쁘(NEP)인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1920년대의 쏘련 신경제정책(NEP)에 비교하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시 ‘개혁ㆍ개방’의 원점에 네쁘의 재평가를 통한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상, 경제관리가 벽에 부딪히면, 반복하여 “네쁘로 돌아가자”의 목소리가 올라가곤 했던 것입니다. 뻬레스뜨로이까의 과정에도 그러한 면에 있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개혁ㆍ개방’ 정책을 네쁘와 관련짓고 있는 것 같은 흔적은 헝가리 경제개혁의 경험에서 섭취하려 했던 움직임 가운데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오리 카즈코(毛里和子) 저 ≪중국과 쏘련≫(이와나미(岩波) 신서, 1989년 5월)에 1970년대 말, 즉 덩샤오핑이 당내 주도권을 확립시킨 시기, 사회과학원 연구자가 헝가리를 시찰(1979년 11월)했다는 기술이 나옵니다. 위광위안(于光遠) 사회과학원 부원장, 류궈광(劉國光) 동 경제연구소 부소장등 ‘개혁파’의 면면이었습니다. 시장 사회주의론의 원류는 동구, 특히 헝가리ㆍ폴란드ㆍ유고슬라비아입니다. 중국이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분은 W. Brus, K. Laski의 ≪맑스에서 시장으로 ― 경제 시스템을 모색하는 사회주의≫(이와나미 서점, 1995년 9월)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헝가리의 경제개혁은 ‘규제된 시장을 동반한 중앙계획화’라 불리며, 1968년에 착수되었습니다. 모오리에 의하면, “동구나 쏘련의 경제체제를 연구하는 도중 1965년 꼬쉬낀 개혁이후 쏘련경제는 개량적 집중계획경제형, 헝가리의 1968년 이후의 개혁은 시장경제를 포함한 계획경제형, 그리고 유고 경제는 시장사회주의형이라는, 폴란드 출신의 경제학자 브루스의 이론이 (중국의 연구자에) 흡수되어 간다.” 동구ㆍ쏘련의 경제개혁의 경험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되짚어 보면 네쁘에 도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등장했던 시기는 보다 직접적으로 네쁘가 의식되고 있었습니다. 앞서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무엇인가≫는 “중국의 경제개혁의 목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의 확립이지만 이 개혁목표의 이론적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하여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 세기말 맑스는 미래의 사회에서는 전 사회의 생산과 경제활동이 계획적으로 조직된다고 상정하고 있었다. 1906년 레닌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서로 대립적인 사회의 기본체제라고 간주하고 있지 않았다. 10월 혁명이후, 쏘련 공산당(볼쉐비끼)에서는 전시 공산주의라는 특수한 역사 시기를 이용하여 ‘직접적 이행’, ‘화폐의 폐지’를 실험해 보려 했으나, 그러나, 1921년 봄부터 신경제정책의 실시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실천에서 레닌은 사고 방식을 크게 변환시켜 ‘시장이라는 경제형식을 도입’하고, 국가의 경제계획을 실현하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닌이 서거한 이후 이론인식 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시장경제와 대립시키는 사고방식이 다시 주류가 되었으며,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특유의 것이며 계획경제야말로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하려 한다면 지령성의, 고도로 집권적인 관리에 의한 계획경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다는, 고정관념이 형성되었다.

 

1930년대의 ‘사회주의공업화’ 이후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 평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파고들 수는 없습니다.

이 문헌은 네쁘를 중단시킨 것은 잘못이며 계속해야 했다고 멀리 돌려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에 의한 경제봉쇄와 제1차 대전 후의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의 종언에 직면해 있던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의 외적 그리고 역사적 제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류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13)

순서가 뒤바뀌었습니다. ‘네쁘’가 어떤 것인가를 약간 교과서적이지만 간단히 다루어 두고자 합니다. 네쁘란 1921년 쏘련 공산당 제10차 대회에서 채택된 신경제정책입니다. 네쁘는 농민이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경제의 상대적 후진적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경과기에서 시장ㆍ상업ㆍ화폐유통을 이용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기초를 만들어내는 정책이었습니다. 내전이나 제국주의의 간섭정책에 의해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세우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기초로 혁명 후 국유화된 공업부문은 자본가에 임차하여 경영을 위임함과 함께, 전시 공산주의 시기에 실시되었던 농산물 징발을 대신하여 공업제품과 농산물이 시장을 통하여 교환될 수 있도록 전환한 것입니다. 농업 생산은 이것에 의해 급속히 회복되었습니다. 국영 상업과 함께 협동조합 상업이 장려되고 사영상업도 인정되었습니다(새롭게 탄생한 사적 상인들은 이후 네쁘만이라 불렸습니다). 이 정책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우회, 일시적 퇴각에 다름 아니며 그것은 혁명 당시 레닌이 판단할 때 정세가 허락하지 않았던 당초의 전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네쁘가 1920년대 말의 일련의 논쟁을 거쳐, 30년대 초두부터 본격화된 농업의 집단화와 사회주의 공업화의 정책에 자리를 내주었던 것입니다.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네쁘적이지만 그러나 네쁘의 영역을 훨씬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 저의 시각입니다. 사실 역사상 전례 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중국 공산당 자신들에 있기 때문입니다. 16기 4중전회(2004년 9월)의 “당의 집정 능력 육성 강화에 관한 당중앙의 결정”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조건 하에 시장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엄청난 창의인 것이며 전혀 새로운 과제이다. 세계의 경제, 과학기술을 흡수하는 힘과 우리나라의 개혁, 발전의 새로운 정세에 부합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내적 요구와 특징을 파악하고 자각하여 객관적 법칙에 따라 사회주의 우위성과 시장원리를 살려 경제운영지도의 수준을 끊임없이 높여야 한다.

 

1992년 이래 20년에 걸쳐 시장경제화를 추진한 결과, 중국의 경제ㆍ사회가 어떠한 난관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그에 앞서 어떠한 사회주의를 전망할 수 있는지, 나중에 되돌아보기로 하고, 앞으로 나아가 보겠습니다.

관용구 ‘공유제를 주체로 하여’의 의미

 

다음으로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사회주의’라고 자기규정 할 때의 제2의 지표, ‘공유제를 주체[主體: 주요한 몸통-역주]로 하여’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980년대부터의 국유기업개혁, 1990년대 이후 현저하게 된 주식제의 도입의 과정을 거슬러 재현하는 것을 할 수는 없고, 한 발 건너뛰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데이터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공업기업의 생산고” [표 1]입니다.

 

[표 ] 공업기업의 생산고

 

1986년

2006년

국유

6201억 위안 (68.7%)

9조 8910억 위안 (31.2%)

집단제

2637억 위안 (29.2%)

5조 362억 위안 (15.9%)

사유

 

6조 7240억 위안 (21.2%)

외자

 

10조 77억 위안 (31.6%)

출전: 중국연구소 ≪중국연감≫ 2008년 판

 

국유 부분의 비율의 축소ㆍ반감, 사유부분과 외자부분의 비약을 볼 수 있습니다. 비슷한 데이터로 보충하겠습니다. 국가 통계국에 의한 “제2회 전국경제 센서스(전수조사)”에 의하면 2008년 말 소유형태별 기업수는 국유가 3.1%(2004년 5.8%), 공유제(집단제) 7%(상동 16.3%), 사유(외자 제외) 72.5%라고 되어 있습니다(≪적기≫, 2009년 12월 26일 자). 국유제와 공유제의 비율의 저하는 재편ㆍ통합이 진행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외자의 비율이 높은 것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입니다.

또 한 가지 “상장기업의 주식분포” [표 2]를 봅시다.

 

[표 2] 상장기업의 주식분포

 

1992년

2006년

 

비유통 주

69.25%

62.08%

 

국가 주

41.38%

30.70%

 

법인 주

26.63%

5.03%

 

종업원지주

1.23%

0.02%

 

기타

0%

26.54%

 

유통주

30.75%

37.72%

 

A 주

15.87%

22.08%

국내 투자가 용

B 주

14.88%

1.53%

해외 투자가 용

H 주

0%

14.10%

중국 국내에서 등기하고 홍콩 등의 해외 시장에 상장한 기업의 주식

 

출전: 중국연구소 ≪중국연감≫ 2008년 판

 

주식제로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공업생산고와 같이 극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비유통 주라는 것은 주식제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 발생한 주식 가운데, 시장에서 공개ㆍ유통하고 있지 않은 주식을 지칭합니다. 즉 어떤 기업이 발행한 주식 가운데 시장에 유통하고 있는 유통 주와 유통하고 있지 않은 비유통 주가 있는 것입니다. 비유통 주의 존재에 대해서는 시장에서의 거래를 통한 주가의 자유로운 형성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등의 비판이 있다고 이야기됩니다. 그거야 어쨌건, 비유통 주에는 양면적 성격이 있습니다. 주식시장의 규모가 아직 작기 때문에 전체 주식을 일거에 공개하면 주식이 폭락할 수밖에 없어 시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공개할 수밖에 없다는 사정이 한 가지, 또 다른 하나는 정부가 경제의 감제고지(瞰制高地)를 계속 장악하기 위한 국가 또는 지방정부에 의한 일정 규모의 주식보유입니다.

중앙정부가 직간접적으로 영향 하에 두는 대상산업종류는 몇 번 개정되어 현재는 7대 산업종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신화사, “국무원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국유경제지배 7대 산업종을 발표”, 2006년 12월). 7대 산업종은 ‘국가의 안전과 국민 경제의 명맥과 관련된 중요산업과 기간분야’ 즉, 군사공업, 운전(運電)망ㆍ전력, 석유ㆍ석유화학, 전기통신, 석탄, 민간항공, 해운입니다. 은행(중앙은행에 해당하는 중국인민은행 이외, 정책은행 3행, 상업은행 5행) 과 철도가 제외되어 있는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정부가 경제의 근간을 계속 지배하는 현황을 고찰함에 있어서, ‘국진민퇴(國進民退)’(국유경제의 확대, 민간소유 경제의 축소)라고 비판하는 언론이 힘을 얻어간다고 합니다. 은행융자의 우대, 종업원의 ‘민간’에 비한 상대적 고임금ㆍ고복지가 원성의 표적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뇌물이나 횡령 등 불상사가 국유부문에 집중되어 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이것을 시정하지 못하여 중국 공산당에 대한 인민의 신뢰저하가 초래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공유제를 주체로 한’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해야 될까요? 레닌이 네쁘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의 국가 자본주의’(“식량세에 대하여 ― 신정책의 의의와 그 제 조건”, 1921년 4월)이라 규정했던 것을 상기해보겠습니다. 확실히 그러한 측면은 인정됩니다. 중국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하고 있는가는 별개로 하고 말입니다. 다른 측면, 국유ㆍ공유의 구별 없는 주식제가 확산되고, 그 국유기업도 세계시장에 진출하여 타국자본과 자웅을 겨루는 전개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즉 국유부분도 포함하여 ‘자본’이 우세한 경제체제가 되고 있다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공유제’가 ‘주체’이므로 ‘사회주의다’라 이야기되더라도, 갑자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계경제의 ‘주류’에 융화되다

 

중국은 전술한 대로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맹했습니다. WTO 가맹할 즈음 격렬한 논쟁이 펼쳐졌습니다. 농업부문에의 타격은 물론이거니와, 공업부문도 경쟁력이 없는 기업이 중대한 시련을 거치게 될 것이 명확했습니다. WTO 가맹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과 잃을 수 있는 것, 이해득실이 가맹 가부의 판단 기준이 되었습니다.

당시 문헌에 눈을 돌려보면, WTO 가맹으로 “세계경제의 주류에 융화되다”(중국대사관 HP, 2001년)라고 가맹의 목적이 명기되어 있던 것이 생각납니다. “중국이 어떻게 국제경제의 경쟁질서에 적응하고, 어떻게 빨리 보다 안정적으로 더욱 자신감을 가지고 전면적으로 세계무역의 무대에 등장할 것인가”(상동)를 생각하여 가맹을 결단하였던 것입니다. 외압을 이용하여 경쟁력이 낮은 부분을 도태시키고 경쟁력이 있는 부문을 보다 강화시키려고 하는 이른바 충격 요법이었습니다. 한창 경과하고 있을 때인 2005년 16기 5중전회(10월)를 해설한 신화사 보도 “장기계획으로의 전환이 나타내는 세 가지 커다란 시그널”은 중국 경제는 “세계시장에 계속 융화되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WTO 가맹을 계기로 외자의 중국 시장 참가가 갑자기 가속화되었습니다. 중국 자본의 해외진출(走出去)은 거슬러 올라가면 14전대회(1992년)의 장쩌민 보고에서 이미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현실화된 것은 역시 WTO 가맹 이후입니다. 풍부한 외자준비(2010년 말 2조 8473억 달러)의 효율적 운영을 지향하며 자본금 2000억 달러로 2007년 9월에 국영투자 팬더를 설립. 2008년 말까지 투자총액 210억 달러. 2009년 투자액은 580억 달러였습니다.

중국 자본유출은 최근 급속한 전개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본유입국입니다. 중국의 자본유출이 ‘선진’ 제 국가에서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최근 5-6년 사이입니다. 미국이나 EU가 중지를 요청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자원이 빈곤한 국가이며, 경제성장에 동반된 원료수입은 급속히 확대되어, 특히 석유나 레어메탈을 포함한 자원이 풍요로운 아프리카 대륙으로의 진출은 눈부시며, 미국ㆍEU의 주요 제국주의국과 중국이 자원 획득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치하는 투쟁의 무대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최근 ‘선진’ 자본주의 제 국가로의 진출 예로서, 스웨덴 자동차 회사인 볼보나 일본 토레이(東レ)의 제1주주로 뛰어오른 것이 매스컴에 등장했던 것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대일 진출 예로는 IBM 컴퓨터 사업을 이어받은 레이보의 존재가 알려져 있습니다. 구 IMF 후지사와 공장에는 전노련 산하의 전일본금속정보기품 노동조합(JMIU)이 있어 소수조합이긴 합니다만 중국자본과의 사이에 이미 노동관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술력이 있는 일본의 중소기업의 중국자본에 의한 매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중국의 당과 정부는 중국자본의 진출처에서의 노자관계에 어떻게 대처할 작정일까요? 쟁의 행위가 발전될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여기에서야말로 중국 ‘사회주의’의 진가를 시험해볼 수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제 의문은 이러한 ‘세계경제의 주류’에 융화되기 전에, 어떠한 사회주의가 있는 것일까, 또는 있을 수 있는 것일까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 자체로서는 세계가 바뀌지 않으면 중국도 바뀔 수 없다는 것이 됩니다. 덩샤오핑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는 100년 계속(100년은 비유이며 그 정도 긴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일 것입니다)되며, 따라서 경과기라는 평가일 것입니다만, ‘초급단계’이지만, 이미 ‘사회주의’라고 자기규정을 하고 있으므로 중국 공산당이 그리는 사회주의 상을 근본부터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중국 공산당

 

자국의 경제건설에 대한 관심의 집중, 제국주의 제 국가와의 대립을 하면서도 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전방위외교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 국제적 계급투쟁과 관련된 문제의식의 결락 ― 종합해 보면, 인터내셔널리즘의 희박화는 중국 ‘사회주의’의 전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편으로 중국은 자국을 발전도상국으로 위치지우며 국제무대에서 도상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양면을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방패막으로서 중국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중국은 꾸바의 입장에서도 최대의 무역상대국입니다. 2009년 10월 꾸바 노동조합중앙조직(CTC)의 대표가 방일하였을 때, 중국이 꾸바의 무역에서 어느 정도(상세불명) 대우하는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국혁명의 성과가 소실되어 버린 것만은 아닌 한정적일지라도 계승되어 현재에도 계속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려해야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기관이어야 할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의 형해화의 진행, 당에 의한 대리입니다. 당과 국가의 일체화에 의한 당의 국가기구로의 해소, 당의 전위로서의 기능의 상실이 쏘련붕괴의 내적 요인이었다고 한다면, 중국 공산당은 쏘련붕괴의 교훈을 살리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을까? 원래 전면적 시장경제화14)와 노동ㆍ생산과정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을 기초로 하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양립할 수 있을 것인가, 등등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의 당원 수는 2010년에는 당당하게 8천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제가 가지고 있는 통계에 의하면 2008년 당원 수는 7573만 1000명(여성 21.0%, 소수민족 6.5%, 대학ㆍ전문학교 이상 졸업자 7.50%). 출신별 구성은 [표 3]과 같습니다.

 

 

[표 3] 중국 공산당원의 출신별 구성

노동자

9.7 %

농목어민

31.1 %

기관간부ㆍ기업관리자ㆍ전문기술자

30.4 %

학생

2.7 %

이ㆍ퇴ㆍ휴직자

18.8 %

기타

7.4 %

 

출전: 21세기 중국총연 ≪중국정보 핸드북≫ 2009년 판

 

출신별에서는 의연하게 농민의 비율이 높은 것(중국혁명이 농민을 주체로 한 토지혁명이었던 것을 반영), 노동자 인구의 증가에 비해 노동자의 비율이 낮은 것이 특징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기관간부ㆍ전문기술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중국 공산당의 계급적 성격의 변화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는 일단 저로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16전대회(2002년)에 사영(私營) 기업가에 입당의 길이 열린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쏘련 공산당이 제22회 대회(1961년)에서 ‘전 인민의 당’ 규정을 (‘전인민국가’규정과 함께) 채용했던 것이 쏘련 공산당의 경우 ‘계급’ 철폐를 인정한 후라는 것에서 사정은 다르지만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전인대 대표의 출신별구성” [표 4]를 보겠습니다.

 

 

[표 4] 전인대 대표의 출신별 구성

회기

노동자ㆍ농민

군인

간부

지식인

귀국화교

기타

5

47.3 %

14.4 %

13.4 %

15.0 %

1.0 %

9.0 %

6

26.6 %

9.0 %

21.4 %

23.5 %

1.3 %

18.2 %

7

23.0 %

9.0 %

24.7 %

23.5 %

1.7 %

18.2 %

8

20.6 %

9.0 %

28.2 %

21.8 %

1.2 %

19.2 %

9

18.9 %

9.0 %

33.2 %

21.1 %

1.2 %

16.6 %

10

18.5 %

9.0 %

32.4 %

21.2 %

1.3 %

17.7 %

 

출전: 중국연구소 ≪중국연감≫ 2008년 판

 

회기가 지날수록 ‘노동자ㆍ농민’의 비율이 낮아져, 제10기(2003-2008년)는 18.5%에 지나지 않습니다. ‘간부’의 비율은 ‘노동자ㆍ농민’과 역비례의 관계로 계속 증가하여, 제10기는 32.4%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데이터 가운데 당과 국가의 관계, 인민권력의 본래의 모습에서의 괴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변질과정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지나친 것일까요?

 

 

민족주의가 주류 이데올로기로

 

일본의 중국보도를 보고 있으면, 인터넷 상의 정보의 삭제, 당선전부에 의한 신문ㆍ잡지의 검열과 같은 언론통제의 일면이 자주 클로즈업 됩니다. 실제는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여러 다양한 문헌(일역된 것에 한합니다)에 접할 때마다 오히려 통제가 먹혀들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닐까라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당과 국가의 진로를 둘러싼 끊임없이 반복된 논쟁, 터부시되어온 정치체제개혁에 대한 언설 등이 그것입니다.

공산당의 통치에 이의를 주창하고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닌 한 자유로운 정도가 상당히 높아져온 것은 아닐까요? 예를 들어 ≪염황춘추(炎黃春秋)≫지 부사장이며 동시에 신화사 기자를 역임한 적이 있고 ‘국진민퇴(國進民退)’ 비판의 최선두이며 ‘사회민주주의’를 호언장담하는 양지젱(楊繼縄)15)이 “변화의 조짐은”이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문장을 써도 나는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다. 옛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30년 전보다 좋아졌다. 진보는 멈추어서는 안 되지만 국가가 너무 비대하기 때문에 서두르면 문제가 분출한다. 한 발 한 발, 전진할 수밖에 없다.” (“지금 두 가지의 모순, 정치의 민주화를 ― ≪염황춘추≫ 부사장 양지젱 씨에게 묻다”.)

마리청(馬立誠)의 “구부러진 나무의 가지 ― 중국 내셔널리즘 비판”(≪세계≫, 2011년 3월호)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마 씨는 이 논문에서 “현재 중국에서 옥석혼교[玉石混交, 옥과 돌이 뒤섞여 있다는 의미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뜻-역주]의 민족주의는 이미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다”라고 총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때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라타 타다요시(村田忠義, 요코하마 국립대학 교수) 저, ≪센카쿠 열도ㆍ조어도(釣魚島)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시험받고 있는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혜≫(일본교보사, 2004년 6월) 가운데 “9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도 중국에서도 애국주의만이 강조되는 민족주의적 풍조가 강화되었다”라고 제시한 것을 보고, 마 씨의 분석과 비판이 진실을 표현하고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마 씨에 의하면 중국 내셔널리즘의 전환점은 1996년입니다. 1995년 타이완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방미, 이른바 돌파외교를 강행하고 이에 대륙이 반격, 타이완 해협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 미국이 항공모함 2척을 동(同) 해역에 진출시켜 일촉즉발의 사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상황은 1996년 일변하였습니다. 이 해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노우-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이 정서적인 민족주의를 자극하여 민족주의의 논의는 “소수 학자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영역으로 진출”하였고 “맹목의 힘”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뭇 충격적이었던 것은 “악덕상인과 불량작가들이 큰 돈을 벌고 주색이나 벌이고 있을 때, 열광적이며 빈곤한 분청(분노한 청년들)이 ‘상인으로서의 민족주의’의 ‘거대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마 씨는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대표적 저작 8권을 골라 경향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마 씨 자신은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은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며, 중국 위협론의 시장을 확대시킬 수도 있다는 국익중시의 입장에서 비판, 즉 “건강한” 내셔널리즘의 입장에서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을 비판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비판에는 절대적 한계가 노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중국이 세계를 지휘한다”라는 대국주의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는 점, 나찌 신봉과 같은 파시스트의 모조품인 우파 조류에서 중국을 제국주의의 식민지라 상정하는 ‘좌’라는 사조까지 역시 ‘옥석혼교’(관련해서 저는 ‘옥’이라고 형용되는 것에 어울리는 민족주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입니다.

마 씨는 ‘병적인 민족주의’의 특징을 네 가지에 걸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상처를 훈장으로 하는 것, 두 번째는 자기애가 강하게 배타적이 것, 세 번째는 자신이 놓인 상황을 알지 못하는 것, 네 번째는 호전적. “즉, 피해자 심리에서 졸부심리까지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라고.

 

 

되살아나는 중화사상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내셔널리즘 태두(台頭)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개혁ㆍ개방’의 심화와 함께 배금주의가 만연하고 간부에 의한 공금횡령ㆍ부정축재가 횡행, 확산되는 한편 다양한 격차, 즉 사회적 긴장의 고조를 배경으로 배외주의적 감정이 사람들을 계속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사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술한 16기 4중전회(2004년 9월)를 해설한 ≪요망신문주간(瞭望新聞周刊≫에 매우 흥미 있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어 소개하겠습니다.

 

시장경제의 발전과 사회전환의 심화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종래의 이익구조는 크게 조정되고 계속 조정되어 새로운 사회계층과 나날이 다양해지는 이익추구가 생겨나고 있다. 상이한 이익주체 간 복잡하게 착종된 이해의 투쟁이 생겨나고, 따라서 새로운 모순과 문제가 발생하고 사회의 융화와 정치의 안정에 영향을 주는 두드러진 모순과 잠재적 위험이 생겨나고 있다. 어떻게 하여 사회의 이해를 조정하고 사회의 자원을 재편하고 사회의 안정을 지키며 사회 각 계층의 이익을 조화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고 가능한 한 정책 집행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고 모든 인민이 각자 최선을 다하여 적절한 거주를 얻고 게다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 총회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되고 있다.16)

 

단어를 신중히 골라내기는 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중국 사회에서 계급투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인식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적 제 모순의 첨예화에 직면할 때의 중국 공산당의 대처의 방식에 있습니다. 장쩌민 시대에 끊임없이 강조된 ‘사회주의 정신문명건설’은 내용상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내셔널리즘에 의한 국론 통일, ‘중화사상’의 복권이었습니다. 16전대회(2002년)의 장쩌민 보고에서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단어가 3번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는 “(6) 문화의 건설과 문화체제의 개혁” 중 다음의 일절이 있었습니다.

 

… (2) 민족정신의 발양을 소중히 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민족정신은 하나의 민족이 생존, 발전하게 되는 정신적 지주이다. 어떤 민족도 분기(奮起)의 정신과 고상한 품격을 갖지 않는다면 세계민족의 대열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5천 년 넘어 발전해온 가운데 중화민족은 애국주의를 중핵으로 하여 단결ㆍ통일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근면과 용기로 스스로의 향상을 추구해온 위대한 민족정신을 형성해 왔다. 우리 당은 인민을 지도하고 장기에 걸친 실천 가운데 끊임없이 시대와 사회의 발전의 요청과 결부시키면서 이 민족정신을 풍부히 해왔다. 세계적 범위에서 다양한 사상ㆍ문화가 상호 격심하게 휘감겨있는 상태를 목전에 두고 민족정신의 발양을 소중히 하는 것을 문화 건설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서 국가교육, 정신문명의 건설의 전 과정에 포함시켜야 하며 언제나 전인민의 고양된, 향상을 추구하는 정신 상태를 갖게 해야 한다.

 

이와 함께 공자의 재평가, 유교정신의 부흥의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후진타오 총서기가 2006년 시작한 ‘사회주의 영욕관(榮辱觀)’(8영(榮)8치(恥))17) 캠페인은 ‘시장경제’화가 초래한 사회적 규범의 문란을 국민도덕의 찬양을 통해 바로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정신의 부흥과 도덕적 설교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국사회의 위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이것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중국의 내셔널리즘이 진보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시기는 훨씬 전에 끝났습니다. ― 이것이 현 시점에 있는 우리들의 인식입니다. 민족해방투쟁의 진보적 힘이었던 중국의 민족주의는 인류와 역사의 진보적 측면을 대표함과 동시에, 특히 인터내셔널적인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으로서 국제적 지위를 쌓아올린 지금, 민족주의에 어떠한 진보적 성격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 제 모순의 첨예화를 살짝 바꿔놓는 것에 지나지 않은 내셔널리즘의 고취는 중국의 ‘사회주의’의 전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고 있습니다. ― 저는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중국의 미래를 결정할 제 조건

 

저는 지금까지 중국 ‘사회주의’의 현실을 엄격한 관점으로 바라보아 왔습니다. 저희들은 이론과 실천을 포함하여 아시아 사회주의의 전도에 놓인 다양하고 거대한 곤란에서 눈을 돌려버리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렇다 하더라도 비관일색으로 감추어버리는 것도 아닌 중국 ‘사회주의’의 진로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황을 고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변혁 가능한 대상으로서, 변화해 가는 현실을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바꿔, 중국 공산당의 역사는 창립 이래 좌우의 대립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990년대 이후 ‘개혁ㆍ개방’의 심화와 함께 좌파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장경제’ 30여년의 실천을 거슬러 살펴보면, 사회적 제 모순이 첨예화되고 그 해결은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1년 후 지도부의 교대를 앞두고 노선상의 대립의 그 날카로움이 증가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오 파는 당내에서 기반을 굳히는 한편, 2008년 마오쩌둥주의 공산당을 결성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비합법ㆍ비공식입니다. 결성 당시 그 당이 발표한 “전인민에 고하는 서”를 읽은 친구의 말에 의하면, 중국의 현황을 ‘제국주의의 종속국’, 권력의 성격을 ‘제국주의와 매판 부르주아의 동맹’, 또 중국 공산당은 ‘수정주의의 당’이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가 그다지 없는 가운데 이것저것 추측하는 수밖에 없지만 당 내외에서 격렬한 노선상의 대립이 재연되고 있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18)

마오쩌둥 시대의 평가를 둘러싼 알력도 그 중 하나입니다. 당창립 90주년 (2011년 7월 1일)을 전후하여 마오 시대의 평등주의에의 심정적 회복을 포함하여 ‘홍가(혁명가)를 부르자’ 캠페인 형태로 그것이 표면화되었습니다. 토지를 몰수당한 농민의 항의행동이나 농민공(출가(出稼) 노동자)의 노동쟁의에 대한 지원활동의 활성화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일당제 더하기 시장경제의 ‘중국방식(모델)’을 둘러싸고 정치제체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와 일당제의 견지, 국유의 확대를 주장하는 “보수파”의 힘겨루기가 극심함을 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양지젱 논문, “통치모델, 중국에서 논쟁”, ≪일경(日經)≫, 2010년 3월 29일.)

저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중국 공산당 정권이 무너질 때는 중국에서 반혁명이 승리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쏘련ㆍ동구의 사회주의 체제붕괴의 과정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중국 공산당의 와해는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중국 공산당의 분열은 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세계경제의 불가결 혹은 중요한 파트너로서 중국을 구슬리면서 중국 공산당을 변질시켜 최종적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공공연하게 전쟁을 일으킬 수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노리는 것은 체제 내부의 모순ㆍ알력을 일으켜 이데올로기적으로 침식시키고 평화적으로 체제의 와해를 부추기는 ‘평화연변’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은 국제공산주의 무엇보다 아시아 반제국주의전선의 정비ㆍ부흥과 연동하면서 중국 공산당 내외의 좌파의 역량의 증대, ‘제국주의의 종속국’이라는 시대착오적 민족주의적 편향의 극복,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분산되어 있다고는 하나 저임금 구조의 타파, 권리확충을 위해 일어서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성숙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의 사회주의의 진로를 개척해 나가는 투쟁은 반혁명의 획책을 극복하고 저지해 나가면서 수행되는 계급투쟁의, 복잡 혹은 특수한 임무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치며 

 

마지막으로 중국의 현황을 해명하는 데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남아 있는 과제, 건국 이래 ‘개혁ㆍ개방’의 전사(前史)와 ‘3농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1. ‘개혁ㆍ개방’에 한정된 현 시점의 고찰은 ‘개혁ㆍ개방’으로의 전환의 의미를 역사에 비추어 밝힐 때의 불안전, 불충분함을 일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건국 이래 사회주의 건설 행보를 개괄함과 동시에 쏘련과의 동맹관계의 균열을 배경으로 시작된 중-소논쟁(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총 노선을 둘러싼 논쟁), 그리고 이와 불가결한 관계로 전개된 중국 공산당의 당내 투쟁의 귀결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과정의 총괄은 중-소 양 공산당의 어느 편이라도 끝끝내 행해진 바가 없었으며, 양국, 무엇보다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에 커다란 왜곡을 초래한 것입니다. 양당ㆍ양국은 그 이후에도 서로 대면하지 않고 중국은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수습을 거쳐 ‘개혁ㆍ개방’의 길에 발을 내딛고, 쏘련은 뻬레스뜨로이까를 거쳐 와해의 길로 접어든 것이었습니다.

2. 중국의 인구는 13억.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하더라도 9억(70%)은 여전히 농민입니다. 중국의 문제는 요약하면 농업ㆍ농민문제라고 말하는 연구가 있을 정도입니다. 중국 근대화의 빛과 그림자는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형태를 취하며 농업ㆍ농촌ㆍ농민이라는 ‘3농 문제’의 해명을 회피해서는 중국 문제의 심층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조건과 기회가 있다면 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테마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펜을 놓고자 합니다.

 


 

1) 남순강화: 정식 표제는 “덩샤오핑 동지의 우창(武昌), 주하이(珠海), 상하이(上海) 등에서의 담화의 요점”. 중국공산당 중앙문건 1992년 2호로 공표되어 당중앙이 전당적 학습을 호소하였다. 덩샤오핑 이론(“이론”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는다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의 전모는 ≪덩샤오핑 문선≫ 제3권에 정리되어 있다. ≪덩샤오핑 문선≫은 처음에 상ㆍ하 두 권으로 출판되었고, 뒤에 1982-1992년분이 독립적으로 출판되었으며 또한 그 이후 3권으로서 재판되었다. “남순강화”는 ≪덩샤오핑 문선 1982-1992≫(일역=≪텐북스≫ 1995년 3월)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지만 번역은 ≪이코노미스트≫ 1992년 4월 32일 호가 뛰어나다.

 

2) 제2차 천안문 사건: 다케이 테루오(武井照夫), “천안문의 ‘사건’과 그 배경”, ≪다케이 테루오 상황논집 1980-1993 사회주의의 위기는 인류의 위기≫, 스페이스 가야(伽耶), 2010년 4월 참조.

 

3) 세 가지의 대표: 중국 공산당은 선진적 생산력 발전의 요청을 대표하고 선진적 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하며 가장 광범한 인민의 근본적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쩌민 총서기가 2000년 2월 25일의 광동성 시찰 중 연설에서 처음 제출되었으며 2001년 7월 1일 중국 공산당창립 80주년 축하대회의 연설에서 체계적으로 설명되었으며, 2002년 16전대회에서 강령(총강)에 기입되었다.

 

4) 사적 재산의 불가침: 2000년 3월 4일 개정헌법 제13조(사유재산) ① 시민의 합법적 소유재산은 침해할 수 없다. ② 국가는 법률의 결정에 따라 시민의 사적재산권 및 상속권을 보호한다. (다카하시 와노(高橋和之), ≪신판 세계헌법집≫, 이와나미(岩波)문고, 2007년 1월.)

 

5) 과학적 발전관: 당 16기 3중전회(2003년 10월)에서 후진타오 총서기에 의해 제기되었다. 인간본위, 전면적 조화를 취해 지속가능한 발전관으로 된다.

 

6) 소강사회의 전면건설: 덩샤오핑은 1979년, 오오히라(大平)수상과 회견하였을 때, 중국형 근대화를 ‘소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84년에 그것을 1인당 GDP가 800달러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2000년 말 중국 1인당 GDP는 800달러가 되어 전체적으로 ‘소강’수준에 달하게 되었다. 16전대회는 이것을 수준이 낮은 전면적이지 않은 불균등한 소강이라고 하며 ‘소강사회의 전면건설’이라는 목표를 제출하였다. 2020년에 GDP를 2000년의 4배로 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7) 노동자계급의 대두: 웬티에준(温鉄軍: 중국인민대학 가지속발전고등연구원집행원장), “새로운 시대의 중요문제 3가지”, ≪정황≫, 2010년 10월호. “중국에서는 백 년 가까이 맑스주의를 스승으로서 우러러 보아왔으나, 규범적인 의미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곤란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마침내 맑스주의에 빈번한 이론에 비교적 합치된 노동자 계급이 내부에 출현하고 있습니다. ― 그들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시민이 되는 것을 요구하며 노동자로서 복리후생을 위해 투쟁합니다. 임시공을 고도로 조직한 대규모 스트라이크가 최근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것은 차례차례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제대로 정치화가 된 진짜 노동자계급의 형성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경제일화 ‘일꾼들이 눈을 뜨는 중국’ 작년 여름 파업 중개의 창카이(常凱: 중국인민대학노동관계연구소장ㆍ교수) 씨가 되돌아 보다”, ≪아사히(朝日)≫, 2011년 1월 17일. “그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시골로 돌아가 농업을 하였던 어버이 세대와는 다르게, 도시에서 결혼하고 집을 마련하여 계속 살고자 합니다. 생활비를 보내는 것뿐 아니라, 장래를 위해 자금도 필요하며 지금 이외의 복리후생 등의 대우에도 민감합니다.”

 

8) 3농 문제: 농업ㆍ농촌ㆍ농민 문제. 웬티에준 중국인민대학교수가 1996년 농업의 부진, 농촌의 피폐, 농민의 빈곤을 ‘3농 문제’라고 이름 붙여 제기하고 경종을 울린 것이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중국공산당은 2004년 ‘3농 문제’를 제출한 한자 9000자에 달하는 통달 “1호 문건”을 발하고 동년 3월 제10기 전인대 제2회 회의에서 원자바오 수상이 “농업ㆍ농촌ㆍ농민 문제의 해결은 우리들의 모든 활동의 중점 중 중점”이라고 호소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과 국무원은 ‘3농 문제’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위치지우기에 이르렀다.

 

9) 생산연령 인구의 감소: 다카하시 요시오(高橋祥夫), “인구동태로 본 신흥국 ― 인도네시아, 브라질, 터키, 베트남이 유망”, ≪이코노미스트≫, 2010년 12월 14일 호 외.

 

10)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독재: 중국공산당의 강령(총강)에는 ‘인민민주주의독재’라고 표기되어 있다. 제2차 대전 후 동구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이나 중국의 ‘신민주주의혁명’ 즉 ‘인민민주주의독재’는 이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일형태라 재정의되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현재에도 두 가지 사용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11) 사회주의 초급계급: 자오쯔양(趙紫陽) 보고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의 길을 따라 전진하자”에 의한다. “우리나라의 사회가 현재 위치해 있는 역사적 단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 이것은 중국의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며, 우리들이 올바른 노선과 정책을 결정, 집행하는 데 있어서의 근본적 근거이다. /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당은 이미 명확한 답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사회주의의 초급단계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판단에는 이중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먼저, 우리나라의 사회는 이미 사회주의 사회이다. 우리들은 사회주의를 견지해야 할 것으로서 이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두 번째로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사회는 아직 초급단계에 있다. 우리들은 이 실제 상황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단계를 뛰어 넘지 않아야 한다. … / … 우리들의 사회주의는 반식민지ㆍ반봉건사회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바로 이 생산력의 수준은 발달한 자본주의 제국보다 훨씬 낮다. 그 때문에 다른 많은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조건을 바탕으로 달성한 공업화와 생산의 상품화, 사회화, 근대화를 우리들이 달성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엄청나게 긴 초급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12) 시핑(石平), “개혁ㆍ개방을 흔들림 없이 진전시켜 ‘11ㆍ5’기 경제ㆍ사회발전에 강대한 원동력과 체제상의 보증을 부여하자”, ≪求是≫, 2006년 11호.

 

13)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의 경험: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 “20세기 사회주의 총괄의 관점 ― 그리스 공산당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를 읽다”, 본지 159호(2009년 가을).

 

14) 전면적 시장경제화: 구태여 “전면적”이라고 한 것은 다음 기술에 따른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상품자원의 95%이상은 시장에 의해 분배되고, 국가가 가격을 결정하는 상품은 5%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한 상품에서 수급관계가 균형이 아닌 공급과잉인 것이 99%를 넘고 있다. 노동시장, 자본시장, 부동산시장, 기술정보시장을 포함한 시장전체가 끊임없이 정비되고 있다. … 상무성 공정무역국의 위탁을 받은 최근 연구에 의하면 중국 경제의 시장화 정도는 73.8%에 달하여, 이미 시장경제의 임계 수준(60%이상)을 넘어섰으며, 발전도상의 시장경제국에 진입한 것은 의심할 수 없다.” (“16기 5중전회의 해설 ‘장기계획으로의 전환을 발하는 세 가지의 커다란 신호’”, 신화사, 베이징, 2005년 10월 10일.)

 

15) 양지젱, “‘중국모델’의 찬사는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2011년 3월 22일호.

 

16) “중요한 절목의 중요한 회의, ≪요망신문주간≫ 16기 4중총(2004년 9월)을 해설”.

 

17) 8영8치: ‘8영’은 조국열애, 인민봉사, 과학존중, 근면노동, 단결상조, 성실신용, 법률엄수, 각고분투. ‘8치’는 조국파괴, 인민배리, 우미무지, 안면태만, 사리사욕, 도덕망각, 법률무시, 사치음탕.

 

18) 마오쩌둥 이외의 좌파 ‘신좌파’: 광의의 좌파에는 ‘신좌파’가 포함된다. 내가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콴치훙(關志雄)(노무라 자본주의 연구소 시니어 펠로우) 저, ≪중국경제혁명 최종장 ― 자본주의로의 시련≫(일경, 2005년)에서였다. 이 책에 의하면 신좌파는 2004년 여름, ‘국퇴민진(國退民進)’의 과정에서 생겨난 상장국유기업간부에 의한 MBO(매니지먼트 바이 아웃)의 수법을 사용한 국유자산의 경영권 탈취, ‘국력의 자본화’를 비판하며 등장했다. 이것을 계기로 신좌파와 국유자산 탈취를 묵인한 신자유주의파의 응수가 오고갔다. 하지만 한육파(韓毓派) “장기 혁명 ― 마오쩌둥의 사회주의”(긴키대학국제인문과학연구소 기요, ≪술(述)≫, 2007년 3월)는 신좌파의 대표적 논객(문헌)으로 왕후이(旺暉)(사회과학원문학연구소), “글로벌화 가운데 중국의 자기변혁을 향하여”(≪세계≫ 1998년 10-12월호)를 들고 있다. 한마디로 ‘신좌파’라 말해도 통합된 어떤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사상적 통일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그들에 속해 있는 언설 “반근대의 근대화”를 지금까지 충분히 이해해 왔던 것은 아니며 지식분자가 중심이며 정치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닌 듯하여 본문에서는 구태여 ‘신좌파’라고 다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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