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좌익공산주의의 발생 배경, 출현과 그 주장

 

전성식 ∣ 노사과연 연구위원

 

 

1. 머리말

 

지속되고 있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상황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던 반동의 광풍을 한풀 꺾었고 힘들게 버텨오던 해방을 꿈꿔오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전망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던 반동의 폭압은 매우 거셌다. 이러한 반동의 시기에 대해 뜨로츠끼는 이렇게 말하였다.

 

현재와 같은 반동의 시대는 노동자계급을 분열, 약화시키며 그 전위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수준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림은 물론, 이미 거쳐 온 과거의 저급한 단계로 정치사상을 퇴보시킨다.1)

 

한국에서 이른바 “좌익공산주의”의 등장은 이러한 “반동의 시대”의 특징을 매우 잘 보여준다. 이들은 한마디로 “반동의 시대”의 산물이다. 그들은 “반동의 시대”에 나타나는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수준”의 “전반적으로 떨어”진 것의 증명이며 “저급한 단계” “퇴보”의 정치적ㆍ인격적 표현이다.

뜨로츠끼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전위의 임무는 무엇보다도 이 퇴행적 흐름에 떠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전위는 시류에 맞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불리한 세력관계로 인해 전위가 이미 획득한 정치적 진지를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전위는 최소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진지만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적 진지는 막대한 희생을 대가로 치른 과거의 투쟁경험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이 방침을 ‘종파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앞으로 다가올 역사의 물결과 함께 새롭고 거대한 파도를 준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2)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반동의 시대”가 우리 내부에 반영되어 등장한 퇴행의 표현이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의 하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운동의 내부에서 허물고 있는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진지를 이들로부터 지켜내는 일이다.

하지만 솔직히 “좌익공산주의”를 총괄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역사에 등장한 너무나 다양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한 목소리로 스스로를 “좌익공산주의”라고 규정하고는 있지만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주장은 가장 기본적인 것을 결여하고 있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며, 그나마 그 내용도 뒤죽박죽이다.

그들의 하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국제공산주의흐름(ICC)는 공산주의자연맹, 제1, 2 및 3인터내셔널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로부터 출현한 좌익분파들에 의해 연이어 얻어진 성과들에 특히 독일ㆍ네덜란드 및 이탈리아 좌파의 공헌들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공헌들로 인해 우리는 계급의 모든 입장들을, 여기 이 강령 속에 표현된 바와 같이, 하나의 일관되고 전반적인 통찰로 통합할 수 있다.3)

 

매우 오랜 역사와 과학적 사회주의의 진정한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이들이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혁명적 운동의 “성과”와 “공헌”을 계승하여 “계급의 모든 입장들을” “하나의 일관되고 전반적인 통찰로 통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만 그 반대다. 그들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배우지 못했고 오히려 그것을 왜곡하고 그 결과 잘못된 결론에 이르고 결국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론까지 창조해낸다.

 

이 글은 먼저 세계사 속에서 “좌익공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과 파산, 꼬민떼른의 창립과정 속에서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또 공산주의 운동에서 이탈해가는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며 또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은 이들을 비판하는 것과 별개로 현재의 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에 대한 레닌의 비판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반비판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이다. 레닌은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4)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좌익공산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한다. 자신들을 가장 근본에서부터 비판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좌익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혐오하는 그 책은 의회와 노동조합과 관련한 중요한 사상이 제시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까지도 좌익공산주의와 맑스-레닌주의와의 근본적인 사상적ㆍ이론적 차이의 하나이다. 레닌의 비판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반비판을 검토하며 어떠한 주장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명멸했던 좌익공산주의자들을 살펴보며 그들의 주장을 간략히 다루려 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의 주장은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모든 주장을 하나하나 모두 살펴보지는 못하겠지만 최근 한국에서 출판된 책들을 중심으로 이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이들의 주장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

 

좌익공산주의는 갑자기 발생한 것은 아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가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제2인터내셔널은 세계 노동운동의 발전의 표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한계를 뚜렷이 드러내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역할을 다하며 운명을 마친다. 여기에서는 간략하게 제2인터내셔널의 역사를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을 위한 변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의 혼란에 대한 역사적 비판이다.

 

1) 제2인터내셔널(사회주의 인터내셔널, Socialist International)의 창립

 

1864년 9월 28일 결성된 제1인터내셔널이라 불리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는 1876년 7월 15일 제7차 대회에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는 해산한다”라는 결의를 하게 된다.5)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그것을 자유경쟁의 단계에서 독점자본주의 단계ㆍ제국주의의 단계에 이르게 한다. 주기적인 공황이 반복되어 자본주의 체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노동자대중을 고통에 떨어지게 하였지만 서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엄청났으며 일본의 자본주의도 눈부시게 성장한다.

이 시기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혁명운동은 비록 분열하여 약해졌지만 자본주의의 빠른 성장과 더불어 노동운동 역시 엄청난 발전을 한다. 노동자의 수는 급격히 증대하였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역시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었고 그 규모와 규율, 조직화, 기간 등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웠다. 노동조합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세계 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도 결성되었다.6)

자본주의적 발전에 따라 각국의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들의 차이가 점점 사라지고 공통의 과제가 제기되자 노동자들 사이에는 이념적ㆍ실천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사회주의 정당의 결성, 그리고 노동조합을 통한 대중파업이 기본적인 투쟁방식으로 변하면서 각국의 정당과 노동조합 사이에 국제적인 연대의 흐름이 강화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제1인터내셔널이 해산한 직후부터 시작되었는데 1877년에는 벨기에의 겐트, 1881년에는 스위스의 쉬르, 1883년과 1886년에는 빠리에서, 1888년에는 런던에서 노동자들의 국제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들 대회는 인터내셔널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1889년 7월 14일,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대회를 통해 국제조직을 결성하는데 그것이 이후 제2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리게 된다.7)

 

2) 제2인터내셔널 창립의 의의 및 한계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큰 특징은 사상적 동일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것의 기초는 맑스주의였다.8) 사상적 동일성에 기초했다는 것은 제1인터내셔널과 비교하여 중요한 차이였다. 왜냐하면 제1인터내셔널의 사상적 불일치는 제1인터내셔널의 가장 큰 문제였고 결국 그것의 해산에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9) 수많은 실천 속에서 맑스주의는 이미 지도적 이념의 지위를 확보했으며, 제1인터내셔널 당시 맑스주의에 의해 비판 받았던 분파들은 거의 소멸하였다. 또한 맑스주의자들은 실천적으로도 정확한 전술에 기초하여 노동운동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비록 맑스주의를 지도이념 인정하지 않는 세력들도 제2인터내셔널에 합류하였고 지도를 기꺼이 받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들은 단독으로 국제대회를 개최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다수를 점하였다. 이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적 경향의 토대를 이루게 된다. 또 한 가지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적 경향을 강화하게 했던 것은 강력하고 집중된 중심을 형성하지 못한 것이었다. 대회는 국제적인 지도부를 구성하지 못했고 국제적 기관지, 강령, 규약 등도 결의해내지 못했다. 심지어 공식 명칭조차 없었다. 이것은 국제적 연대를 공고히 하고 국제주의를 강화하는 것은 방해하였고 각국마다 자신의 조직과 활동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도록 하였다. 결국 이것은 전쟁의 위험이 가속화 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노동운동이 각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굴복하게 되는 데 일조하게 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10)

 

3) 제2인터내셔널의 전개과정

 

제2인터내셔널은 1891년 8월 브뤼셀에서 제2차 대회를 또 1893년 8월 취리히에서 제3차 대회를 개최한다. 이 두 번의 대회에서 논쟁이 되었던 것은 5월 1일에 관한 기본적인 방침에 대한 것이었다. 창립대회에서는 5월 1일을 ‘국제노동운동 시위의 날’로 정하고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임무로 결정했다.11) 이에 대해 독일과 영국의 기회주의자들은 5월 1일 개최되는 대회를 5월의 첫째 일요일로 변경하여 개최할 것을 반복하여 요구했다. 이는 노동절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었으나 이들은 결국 노동절을 각국에서 알아서 기념할 수 있도록 변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896년 7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4차 대회에서도 이러한 우익적 경향의 특징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대회에서는 리프크네히트에 의해 인터내셔널의 회원자격과 관련한 문제가 논의되었고 결국 베벨에 의해 결의안이 제출된다.12)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정치방침과 관련한 것으로 사실상 제2인터내셔널에 잔존하고 있었던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축출방침이었다. 원안에 따르면 생디칼리스트적 조합도 대상이 되었으나 결국 의결을 통해 생디칼리스트 조합은 배제되지 않았고 결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무정부주의자들만 탈퇴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1894년 프랑스에서 조레스-밀레랑-비비아니파의 급진적인 부르주아 국회의원의 가입을 받아들인 것과 비교된다. 그리하여 제2인터내셔널은 좌익기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원칙을 적용하는 것에 비해 우익기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오히려 문호까지 개방했다고 비판된다.

제5차 대회인 빠리대회에서는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제휴와 관련된 결의안이 검토된다. 이것은 이른바 밀레랑 사건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13) 이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입장이 제출된다. 첫 번째 입장은 “프롤레타리아가 계급투쟁에 기초하여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를 쟁취하는 경우에만 부르주아정부에 참가를 인정할 것이며, 사회당원이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한다. 부르주아 정부에 대해 사회당원이 취해야 할 태도는 항상 단호한 반대여야 한다”는 것이고 “부르주아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그 본질상 반대당의 역할을 해야 한다. 통치하는 당으로서의 사회민주당은 부르주아국가가 파괴된 이후에야 비로소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입장은 적극적 참여를 옹호하는 것으로 “밀레랑의 내각 입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은 공화국을 구했다고 말하고, 이처럼 자본가정부에 참가하는 것이 사회주의혁명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었다.14) 세 번째 입장은 카우츠키가 제출했는데 그것은 “개별 사회주의자의 부르주아 정부에의 입각은 정치권력 획득의 정상적인 출발점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항상 잠정적이고 예외적인 임시방편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있을 수 있다. 어떤 주어진 상황이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전술상의 문제이지 원칙상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대회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고 하였다. 공식적으로 역사의 무대에 중앙파가 등장한 것이다. 대회는 우익사회민주주의자들이 카우츠키가 제출한 결의안을 지지하며 카우츠키의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사실상 밀레랑의 행동을 승인하였다.

이렇듯 우익적 경향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갔으나 제6차 대회인 암스테르담에서는 이를 저지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것은 수정주의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베른슈타인에 의해 독일사회민주당 내에서 벌어졌던 수정주의 논쟁이 제2인터내셔널 대회로 옮겨왔던 것이다. 우익사회민주주의자들은 수정주의적 내용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독일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중앙파가 수정주의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견지하였기 때문이었다.15)

1907년 8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제7차 대회는 식민지문제를 주요한 문제로 다루었는데 이는 식민지를 둘러싸고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주요한 정치문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익사회민주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의 관료들은 식민지가 자신들에게 주는 ‘떡고물’에 의해 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제출된 결의안에는 “대회는 식민지가 일반적으로 ―또한 꼬집어 말하면 노동자계급에게 있어서― 유용하다거나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대회는 식민지 정책을 원칙적으로, 또한 언제 어디서나 배격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체제하에서도 그것은 문명의 진보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었고 이 결의안은 좌익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앙파의 반대에 부딪쳐 치열한 논쟁을 거쳐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삭제되고 통과된다.16)

대회는 증대하는 전쟁의 위험에 따라 이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물론 군국주의 반대와 전쟁 반대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대회는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고 전쟁준비와 관련된 군비확대를 반대하고 상비군을 민병으로 대치하는 것을 노력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생했을 경우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지향하기 위해 전쟁에 간섭하고 전쟁이 야기한 정치ㆍ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인민을 분기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자본주의적 계급지배의 철폐를 앞당기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결의하였다.17)

제8차 대회는 1910년 8월 코펜하겐에서 개최된다. 코펜하겐대회에서는 전쟁의 위협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에서 전쟁반대의 결의안이 제출되었으며 이는 슈투트가르트대회의 기본 노선을 따른 것으로 의회에 진출한 사회주의자 대표의 의무를 좀 더 강조했다. 또한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그런데 총파업을 전쟁반대의 수단으로 채택하자는 의견을 결의안에 넣자는 의견은 탄압의 빌미가 된다는 주장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으나 우익사회민주주의자들의 총파업에 대한 근본적 거부감도 커다란 이유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특징적인 것의 하나는 민족문제에 대한 것인데 오스트리아 노동조합운동에서 발생한 민족주의적 분열이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민족문제를 둘러싼 견해의 차이(‘국제주의정신-민족자결’ 대 ‘문화-민족자치제’)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후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근거한 것으로 우익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수정주의적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대회는 노동조합 사이의 연대를 국제적인 규모로 강화할 필요와 모든 나라에서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에 힘쓸 것을 선언하였다.

제9차 대회는 1914년 8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국제정세가 엄혹해지는 관계로 임시회의를 1912년 11월 바젤에서 열게 되었다. 당시에 이미 제국주의 열강과 그 위성국가 간에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18)

대회에서는 ‘바젤선언’을 채택했는데 “만국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이 전쟁에 대한 전쟁에서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음을 밝히고 “세계전쟁의 뒤를 이어 프롤레타리아트혁명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지배계급의 우려가 평화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보장”이라고 선언하고 발칸국가들의 당에는 ‘민족자결’의 원칙과 중립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정부에 대해 전쟁당사국에 대한 지원 중지, 개입 금지, 절대 중립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결의는 당시 전 세계적으로 고양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지역적인 전쟁에서 보여주었던 사회주의 조직들의 투쟁의 경험 및 대중들의 반전의식의 고양이라는 상황에 의해 중앙파를 비롯하여 우익사회주의자까지도 절대적인 지지를 하게 하였다.19)

 

4) 제1차 세계대전

 

1914년 7월 28일 동맹국(주도국은 독일ㆍ오스트리아-헝가리ㆍ터키)과 연합국(주도국은 프랑스ㆍ영국ㆍ러시아ㆍ이탈리아ㆍ일본이며 1917년부터 미국도 가담)의 두 진영으로 나누어 전쟁이 일어났으며 제2인터내셔널은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결정해야 했다. 앞서 본 것처럼 슈투트가르트대회, 코펜하겐대회, 바젤대회를 통해 전쟁반대 및 전쟁반대 투표, ‘전쟁에 의해 초래된 정치ㆍ경제적 위기의 혁명적 이용’을 거듭 천명해왔지만, 정작 결정적인 상황이 발생하자 사회민주주의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조국방위”라는 부르주아지의 주장에 동조하고 만다.

8월 2일 독일노동조합 간부들은 부르주아지들과 ‘사회평화, 파업배제 협정’을 맺었고, 8월 3일 독일사회민주당의 간부들은 국회의원단 회의에서 78대 14로 전쟁지지를 결정하였고 국회에서 당 의원 110명 전원이 군사공채에 찬성투표를 하였으며 “위기에 처하여 우리는 조국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이후 러시아와 세르비아 당을 제외하고 교전국 모든 사회당이 독일사회민주당과 같은 행동을 취했고 노동조합도 이에 동조하였으며 몇몇 국가에서는 내각에까지 참여한다. 우익사회민주주의자들은 노골적으로 “사회배외(애국)주의”자로서 행동했으며 중앙파들은 ‘방위전쟁이라는 주장에는 동조하면서 전쟁에는 반대라는 태도’(전시공채에는 반대투표를 하지 않지만 투표는 기권하는 등)를 보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20)

 

5)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약평

 

1889년 빠리에서 결성된 제2인터내셔널(사회주의 인터내셔널, Socialist International)은 19세기 마지막 10년과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ㆍ정책ㆍ방법에 큰 영향을 끼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들의 연합체였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의 다소 평화로운 발전의 시기였으며, 세계제국주의가 성장하고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는 자본주의가 크게 확대되는 시기임과 동시에 국제정치에서의 자본주의적 대립이 첨예해지는 시기이기도 한데 이는 부르주아의 역사적 역할이 진보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반동적이 역할로 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인터내셔널은 주로 조직과 교육활동, 즉 사회당과 노동조합, 협동조합을 건설하는 활동에 집중했으며 계급투쟁을 둘러싼 태도도 일반적으로 온건한 경향을 띄었다. 또한 임금, 노동시간, 사회보험, 공장입법, 노동자의 선거권 등에 관하여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많은 양보를 얻어냈다. 이러한 성과는 물론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의 성장에 의해 탄압 일변도의 정책이 수정된 결과이지만 다른 한편 제국주의 국가의 부르주아지들이 노동귀족을 양성하여 노동자계급 전체의 연대성과 혁명적 정신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세계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과 확대에 의한 환상과 떡고물에 의한 부패에 굴복하여 발생한 것으로, 기회주의적인 노동관료와 소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구성되었던 지도부의 배신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레닌은 이에 대해 “19세기 말의 객관적 조건은 기회주의를 만개시켰으며, 부르주아적 합법성의 이용이 아닌 그것에의 투항으로 전향케 했고, 노동계급의 관료화와 귀족화라는 얄팍한 빵 껍질을 날조해 냈으며, 그리고 수많은 쁘띠부르주아적 ‘동반자들’을 사회민주당에 끌어들였다.

전쟁은 이러한 발전을 가속화시켰고, 기회주의를 사회배외주의로 변형시켰으며, 기회주의자들과 부르주아지 사이의 은밀한 제휴를 공공연한 것으로 만들었다.”21)라고 평가하였다.

 

6) 제2인터내셔널에서 좌파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좌파가 형성되었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미약했으며 미숙했다. 또한 이들은 하나의 사상과 이론으로 결집되어 있지도 못하였다. 이는 제2인터내셔널이 활동하던 시기의 정세는 이들이 발전하기에 유리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일부는 생디칼리즘 노동조합과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가졌던 그룹으로 영국의 직장위원회 운동,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단,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라틴 아메리카의 생디칼리즘 좌파 등으로 구성되었다. 맑스주의는 기존의 국가권력을 노동자계급의 권력기구로 대치시키는 정치투쟁, 즉 혁명에서의 국가권력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파악하고 이를 위해 혁명적 당의 건설과 지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데 비해 이들은 이를 일정하게 부정하였다. 또한 이들은 사회주의의 실현은 노동자계급 스스로가 생산수단을 점유하고 이를 스스로 관리, 통제하는 것 여부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대중투쟁이어야 하며, 투쟁의 중심은 태업, 파업, 총파업, 공장점거, 노동자 자주관리로 이어지는 경제변혁투쟁이어야 함을 주장하고 국가권력을 노동자계급의 권력기구로 대치하는 정치투쟁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그룹이었다.

한편 “좌익주의”라고 불리던 그룹이 있었는데 독일의 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 체트킨, 메링, 프랑스의 게드, 영국의 하이드만, 네덜란드의 판네쿡, 미국의 뎁스, 레온 등으로, 이들은 상대적으로 좌익적이었으나 사상적 편차가 심한 이질적인 집단이었고 명확한 강령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절대적 불가피성과 국가권력의 쟁취, 정치투쟁의 일차적 중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를 지도하는 혁명적 노동자당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이견을 보였다. 또한 이들의 일부는 의회나 노동조합 특히 부르주아지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배하에 있는 노동조합 내에서의 활동을 부정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쏘비에뜨’ 또는 ‘평의회’를 건설하는 것을 대중활동의 중심으로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후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된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의 관료주의자들의 지도하에서 의회와 노동조합 활동에 국한되어 혁명의식과 자발성이 상실되어 버린 서유럽 혁명운동과 노동운동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레닌에 의해 지도되던 러시아의 볼쉐비끼 세력도 제2인터내셔널의 좌파를 이루었다.

 

7) 찜머발트 운동(1915년 9월 5-8일)

 

노동자들이 혼란에서 빠져나오면서 사회민주당 내부의 분화와 대중의 좌익화, 혁명적 사상과 분위기가 형성되는 상황을 바탕으로 스위스에서 ‘국제사회주의자회의’가 열리게 된다. 유럽의 12개국 37명의 대의원과 1명의 참관인으로 구성된 회의의 다수파는 중앙파적 경향과 동요분자들로 구성되었고, 레닌을 비롯한 소수파는 찜머발트 좌파를 구성하였다.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조국수호’ 사상을 부르주아적 허구로 규정하면서, 혁명투쟁이 빠진 평화는 공허한 거짓 문구이며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적인 투쟁뿐이라고 선언한다. 1916년 말 부르주아 국가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에서 제국주의 강화로의 정책 전환이 일어나자 찜머발트 우파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 타협을 모색하게 되며 좌파와 우파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러시아 2월 혁명은 이를 더욱 강화한다(‘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22)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국제협의회가 뻬쩨르부르끄에서 열리고 ‘꼬민떼른’의 결성으로 찜머발트 운동은 해산된다.

 

 

3. 1918년 혁명의 경험23)

 

1) 독일

 

(1) 1918년 11월 혁명

 

러시아혁명 후 시작된 혁명적 고양은 유럽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의 하나인 독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독일에서는 전쟁 중에 첨예해진 계급적 갈등과 사회적 위기에 의해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었고 이는 1918년 혁명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전쟁 말기 독일은 융커적 지주경영과 반(半)절대주의적 군주제의 형태로 봉건제의 잔재가 남아있는 제국주의 국가였고 융커와 독점자본가가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었다. 전쟁은 독일 인민들을 피폐하게 하였고 독일의 인민들은 전쟁중지ㆍ평화를 원하였다. 1918년 1월 정치총파업 후 독일 정부는 공장을 군사화하는 듯 억압을 강화하였지만 여름부터 평화와 민주주의와 생활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정치파업과 시위가 전국화 하였고 위기가 심화되자 지배계급은 사회민주당 대표들을 포함시키는 연합정부를 출범시켜 혁명을 막고 군주제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 당시 사회민주당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기회주의 정책을 폈고, 독립사회민주당은 선진적인 노동자들을 규합하고 있었지만 중앙파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스파르타쿠스파는 독립사회민주당에 소속되어 있었고 힘도 미약했다.

10월 말 독일 해병사령부의 명령에 수병들이 불복종운동을 벌이며 진행한 시위와 이에 대한 발포에서 비롯한 봉기와 계속된 독일 곳곳에서 벌어진 총파업과 봉기는 군주제와 카이저 정부를 붕괴시키게 된다. 처음에는 군주제를 지키고자 했던 사회민주당의 지도부는 군주제가 11월 9일 붕괴되자 당일 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고, 이것을 혁명의 끝이라 생각하였다. 반면 스파르타쿠스파는 첫발을 내딛은 혁명을 마지막 승리까지 이끌어 갈 것을 주장하며 같은 날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을 선언한다.

사회민주당은 독립사회민주당과 공동정부(인민위원협의회, 에베르트-하제 정부)를 수립하였고 이들은 스스로 ‘사회주의’ 정부임을 표방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적대적이었고 부르주아 체제 내에서의 몇 가지 개혁의 실시로 혁명을 멈추려 하였다. 또한 이 공동정부는 쏘비에뜨 러시아와 외교를 단절하고 쏘비에뜨 대사관원을 내쫓았으며 간섭침략, 백위군 지원을 지속한다.

혁명에 의해 자극 받은 부르주아들은 기존 정당들을 개편하여 정당을 만드는데 11월 12일 독일민주당(상업계, 경공업기업주, 은행가, 주식중개인, 도시 소부르주아지, 부르주아 인?리겐챠 등), 11월 22일에는 독일국가인민당(대중공업자본가, 금융자본가, 대토지소유자 등), 11월 23일에는 독일인민당(대중공업자본가, 대은행가, 상공업에 관계있는 대지주 등), 크리스트교 인민연합(중앙)당(군주주의적 견해, 독일 남부, 남서부, 서부 가톨릭계 주민)이 만들어진다.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에베르트-하제 정부를 지지하고 헌법제정의회의 빠른 소집을 주장한다.

‘스파르타쿠스파’는 ‘스파르타쿠스단’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단일한 사회주의 독일공화국을 위한 투쟁’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평의회를 강화하고 혁명을 방위하며 국가기구에서 반혁명파를 쓸어버리자고 호소한다. 하지만 아직 독립사회민주당으로부터 조직적으로 완전히 분리하지 못하고 종속되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였다.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건설보다 의회공화국으로의 이른바 ‘질서정연한 이행’에 관심이 있었다. 이는 에베르트와 군부의 볼쉐비즘에 대한 동맹, 행정조직 및 사법부에 대해 개혁을 실시하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조치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11월 15일 대자본가 집단과 독일노동조합총위원회 지도자들이 ‘실무적인 협력에 관한 협정’을 맺은 것인데 이것은 혁명의 사회정치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독일정부는 카우츠키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화 위원회’를 설치하고 대대적 선전을 진행한다. 또 이 시기에 반동적 장교단은 ‘의용군’을 모집하여 12월 6일 반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한다.

한편 11월 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동력이었고 또한 성과로서 다양한 평의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인민들에게 커다란 지지를 받고 있었다. 12월 16-21일 노동자ㆍ병사평의회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렸고(사회민주당원 228명, 독립사회민주당원 87명, 무당파 병사 27명, 부르주아 정당원 25명, 스파르타쿠스단원 10명), 여기서는 국민의회소집과 그 전까지 모든 입법권과 집행권을 인민위원협의회에 부여하는 것을 결의한다.

대회 이후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노동자계급의 무장을 해제하려는 등 노골적인 반혁명정책을 수행했고 이에 맞서는 투쟁이 계속 벌어지자 이들은 구(舊)지배계급과 제휴를 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회민주당 대회 소집을 요구한다. 당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지만 결국 12월 28일 독립사회민주당은 정부에서 나오게 된다.

12월 29일 스파르타쿠스단은 독립사회민주당과 관계를 끊고 공산당을 창립하기를 결의하고 독일국제공산주의자(IKD)와 함께 30일에 독일공산당(KPD) 창립대회를 가진다. 대회는 당원이 개량주의적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것을 금지하고 또한 국민의회선거를 보이코트 하기로 결정한다.

독일정부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계속 감행하였고 1월 4일 독립사회민주당원이었던 베를린 경시총감을 쫓아낸다. 이에 공산당대표와 독립사회민주당 지도부가 공동으로 이끌었던 혁명행동위원회가 주도하여 시위(5일)와 총파업(6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이때에도 독립사회민주당은 정부와 교섭에 몰두하였고 교섭에 실패하자 봉기(8일)를 호소한다. 그러나 그동안 시간을 번 정부는 이를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는 살해당하게 된다.

국민의회선거는 19일 치러졌고 사회민주당은 165석(1,150만 표, 37.9%)  독립사회민주당은 22석(230만 표)을 얻어 의석의 45.5%를, 부르주아 정당은 54.5%의 의석을 얻는다. 공산당은 선거에 불참하였다.

국민회의는 2월 6일 열렸고, 이날 노동자ㆍ병사평의회 중앙평의회는 권력을 의회로 넘긴다. 2월 11일 에베르트는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월 13일에는 샤이데만이 사회민주당과 부르주아정당들의 대표자로 구성된 정부내각을 조직하며 투쟁은, 11월 혁명은 이렇게 종결된다.

 

(2) 1919년 2월에서 3월의 혁명봉기

 

국민회의에 권력을 넘겨주는 결정에 반대하여 독일의 여러 곳에서, 즉  1919년 1월 10일 브레멘, 1월 11일 쿡스하펜, 2월 아우크스부르크와 아샤펜부르크, 브라운슈바이크에서 봉기가 일어나고, 4월 13일 바이에른 평의회공화국사회주의공화국 혹은 평의회정권이 선포된다. 그러나 이 시기 혁명투쟁은 적의 공격을 막는 성격의 싸움이었고, 투쟁에 참여한 것은 광범한 인민대중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들이 많았으며 모두 패배로 귀결되었다.

 

2) 이탈리아

 

이탈리아 사회당은 비타협적이고 단합되었고 좌익적이었다. 처음부터 전쟁지지를 거부했으며 전쟁공채에도 반대를 했고 제헌의회 요구도 조합주의라고 비판했고 즉각적인 ‘사회주의공화국 설립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주장하였다.

1919-20년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들의 지지도는 매우 높았다. 이러한 상황은 전반적인 사회적 대결 분위기를 이끌었고 혁명적 기운 역시 높았다.

사회당은 전쟁 전부터 개량주의자와 최대 강령주의자의 두 가지 흐름이 있었는데 전자는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을 지원하기보다는 부르주아지와 결탁하였고 이들은 전후 소수파로 전락하였다. 후자는 혁명적 공약을 주장하고 사회주의 공화국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호소하였으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들은 개량주의를 기회주의와 협조주의로 비난했지만 그들과 헤어지기를 거부해 왔다. 사회당 내 좌익들은 개량주의자들의 제거를 주장해 왔으나 그 힘은 약했다.

1919년 11월 16일 국회의원선거에서 사회당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정치투쟁은 빠르게 고양되었고 노동자계급은 1920년 4월 공장평의회의 권한을 줄이려는 시도에 총파업으로 맞섰고, 8월에는 직장폐쇄에 맞서 공장점거운동이 전개된다. 1921년 5월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의석수는 사회당과 공산당 138석, 인민당 108석, 파시스트 35석으로 사회당이 승리한다. 1920년대 말부터 독점부르주아지는 노동자계급을 공격하였고 점차 테러가 사용되게 된다. 이에 1929년 8월 1일 파시스트 일당에 반대하는 정치적 총파업을 일으키는데 이는 정부의 탄압뿐 아니라 개량주의적 지도부의 기회주의에 의해 패배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사회당의 지도부는 개량주의자들을 제명한다. 하지만 지배계급은 뭇쏠리니를 수반으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탈리아에는 반혁명적 파시스트 독재 체제가 수립된다.

 

 

4. 레닌의 ‘좌익공산주의’ 비판

 

1)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레닌은 당시 공산주의 운동의 발전 단계의 특수성을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기본 원칙들의 완전한 터득”, “세계 혁명운동이 강력한 고양”, “새로운 근로인민 대중들의 투쟁에로의 합류”, “노동계급의 정치적 각성과 단결의 급속한 성장”, “공산당들의 대중적인 출현과 공고화” 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기의 공산주의 운동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정치 지도와 대중을 위해 싸우는 능력, 그들을 이념적으로 프롤레타리아 전위 쪽으로 끌어들이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24)

그러한 시점에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정치적 경험부족과 이론적 능력부족 때문에 “지도자-당-계급-대중”을 혼동하고,25) ‘혁명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합법 활동을 경시하고, “반동성”을 이유로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적 활동 공간에서의 활동을 거부하며,26)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폐물이” 되었다는 잘못된 판단을 근거로 의회 및 선거참여를 거부한 것에 대해 레닌은 혹독한 비판을 가한다.27) 그들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의 하나는 “어떠한 타협도 안 된다!”와 “타협 없이, 우회 없이 전진하자”였는데 이는 그들의 “유아성”을 아주 잘 표현해준다.28)

물론 그는 “좌익 교조주의”의 오류가 “우익 교조주의(사회배외주의와 카우츠키주의)”의 오류보다 “천 배나 덜 위험하고 덜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아주 어린, 겨우 싹트고 있는 경향이기 때문”일 뿐이기 때문이라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고 “좌익 교조주의”는 “우익 교조주의”와 “방향이 다를 뿐인 똑같은 오류”이고 “우익 기회주의”를 “보충하는 형태”, “노동운동의 기회주의적 범죄에 대한 일종의 형벌”이라고 지적하며 “우익 기회주의”와 마찬가지로 본다.

레닌은 ‘당독재인가 계급독재인가, 지도자들의 독재(당)인가 아니면 대중들의 독재(당)인가’, “위로부터인가 아니면 아래로 부터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지도자들-당-계급-대중’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오는 유치한 주장이라 비판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의 귀결은 결국 “당 원칙과 당 규율의 거부”로 귀결되며 결국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노동조합과 관련하여,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 노동계급의 커다란 진보였지만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당의 성장 후에는 일정한 반동성, 편협성, 침체성을 불가피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조합과 당의 상호작용 없이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동성을 근거로 그것도 노동조합 상층부의 반동성ㆍ반혁명성을 빌미로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며 그러한 주장을 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으로 공산주의자라면 “반드시 대중이 있는 곳에서는 작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또한 의회투쟁과 관련하여 부르주아의회는 비록 혁명가에게 역사적인 폐물이 되었지만 아직 노동자들에게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의회선거에 참여하여 의회연단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무용성을 주장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다.

 

2) 영국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조언29)

 

당시 영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조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그 중 ‘영국사회당’, ‘사회주의 노동당’, ‘남 웨일즈 사회주의 협회’, ‘노동자 사회주의 연맹’은 공산당 창당을 희망하고 있었으며 서로 협의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통합된 공산당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통합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은 의회에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새로운 공산당을 오래되고 직업적이고 주로 노동조합으로 구성되고 기회주의적이고 사회 배외주의적인 노동당에 통합시켜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의견 차이였다.

레닌은 의회투쟁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오류임에 분명하지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각국의 공산당이, 쏘비에뜨 권력을 지지하지만 의회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관계를 끊는다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 그래서 “의회선거의 참가를 포기하는 것은 영국의 혁명적 노동자 측의 오류이지만, 그러나 당신이 열거한, 볼쉐비즘에 동조하고 진지하게 쏘비에뜨 공화국을 지지하는 모든 조류나 분자를 모아 영국에 커다란 노동자 공산당을 결성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것보다는, 이 오류를 범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3) 레닌에 대한 반론

 

좌익공산주의자들의 태두격인 판네쿡과 호르터 등은 서로 간의 약간의 입장 차이를 보이지만, 그 둘의 생각이 동구와 서구의 차이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즉 양자 공히 동구는 농촌의 공동체주의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이러한 조건이 레닌의 전술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서구의 조건은 부르주아 문명화가 대중들의 사고와 감성을 장악하고 있고 농민도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레닌의 주장에 대해 반대를 한다. 이들은 물론 당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당의 권력 장악, “철의 규율” 등을 둘러싸고 상이한 입장을 보였다.

최근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당시 레닌의 규정에 의해 “좌익공산주의”는 종파적이고 반(半)무정부주의적 조류로 치부되는데 이는 옳지 않은 규정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에 참여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에 옳지 않은 전술이기에 그러한 것이지 무조건적인 반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관념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19년 이래 수행했던 투쟁의 경험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독일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혁명의 최초에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에 반대하여 노동자평의회와 쏘비에뜨가 제기된 것은 실질적 운동이었고 그것은 옳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좌익공산주의자에게 가해지는 ‘반당적’이라는 비판 역시 옳지 않은 비난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시 혁명운동의 복잡한 현실을 무시한 비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평의회주의’와 같은 무정부주의적 영향을 받은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좌익공산주의는 ‘공산주의당’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있었고, 실제적으로 혁명시기의 당은 대중조직이 될 수 없고 그 본질적 임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아의식”의 고양이며 선진적 소수라는 볼쉐비끼의 경험과 의식에 동의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한다.

 

 

5. 몇 가지 ‘좌익공산주의’

 

1) 안톤 판네쿡30)

 

저명한 천문학자였던 판네쿡은 네덜란드 사회민주연맹에서 좌익을 대표하여 활동하였고 당의 지나친 의회주의에 반대하다가 1909년 추방되었다. 그는 그해 사회민주당을 만들었고 이 당은 1918년 이후에 공산당이 된다. 판네쿡은 처음부터 좌익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 시기 우익기회주의에 맞서 올바르게 투쟁한 모범적인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공산주의자였다.31)

그는 사회민주연맹에서 추방된 후 독일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였는데 수정주의자들은 물론 카우츠키를 포함한 중도파와 첨예한 논쟁을 벌인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사회변혁을 환상이라고 비판했는데,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위치와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폭력에 의한 국가의 전복이 불가피함을 주장했다. 또한 국가와 관련한 혁명의 임무에서 “프롤레타리아 권력 기관의 도움을 받아 국가권력 기관을 파괴하고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카우츠키와 논쟁한다.32)

판네쿡은 ≪노동운동에서의 전술상 의견 차이≫(1909년)를 발표하는데 레닌은 “유럽 노동운동에서의 의견 차이”라는 글에서 “노동운동에서의 전술상의 기본적 의견 차이”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려 한 흥미 있는 시도”라 하며, “앞으로의 서술에서 우리는 독자들에게 판네쿡의 결론들을 소개할 터인데, 이 결론들은 정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높게 평가한다.33)

판네쿡은 개량과 혁명의 문제를 다룰 때에도 계급투쟁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수립이라는 목표에서 시작하는데, 진화와 혁명의 관계, 혁명과정의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함을 주장한다. “무정부주의와 수정주의는 모두 노동운동에 있어 부르주아적 노선에 속하며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프롤레타리아적 사고와 결합시킨 것”, “무정부주의는 거칠어진 소시민의 이데올로기이며 수정주의는 양순한 소시민의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는 노동조합과 관련해서 노동조합의 우선과제는 생활조건 개선과 가능한 한 착취를 제한시키는 것을 위한 투쟁으로 이 과제는 “자본주의 안에 머무는 것이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부르주아사회의 발전은 노동조합이 보수적으로 머무는 것조차 방해하여 “노조는 이미 언급된 목적 이외에 다른 새로운 목적과 과제를 상정함으로써가 아니라 노동조건의 개선투쟁이라는 자신의 특수한 과제를 가능한 한 잘 충족시킴으로써, 즉 의식적인 개선투쟁이라는 자신의 특수한 과제를 가능한 한 잘 충족시킴으로써, 즉 의식적인 의도나 강령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의해서 혁명의 도구가”될 것이고 사회의 혁명적 전복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대중파업과 관련해서도 혁명의 시기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조직이 정치화하게 되면 대중파업은 지배계급을 노동자계급의 의지에 강제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적합한 수단으로 또한 이것은 정치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의 대립적 목표가 갖는 장애가 제거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34)

또한 사회주의가 근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이며 반자본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사회주의는 억압과 착취, 절대주의 등에 대립해서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피억압민족 사이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강한 공감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좌익공산주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그가 처음부터 의회의 활용과 노동조합에 중요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회주의적 투쟁과 관련하여, 이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발전과 의식화에 유용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함과 동시에 노동자계급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잡는 것은 유토피아이고 부조리한 주장이며 불가능하다고 명확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판네쿡은 1920년에 쓴 글에서 경제적 붕괴가 혁명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고 주장하며 이 붕괴를 곧 모든 유럽의 선진국이 겪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분명히 구별해야 하며, 제2인터내셔널의 방법인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운동 전술이 제3인터내셔널에서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즉 “의회주의는 혁명에 필수적인 대중의 활동성을 저지하는 불가피한 경향을 갖는다”거나 ‘의회주의는 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권력을 강화시켜서 결국은 반혁명적으로 작용하여 지도자마저 부패시킨다’거나, “자립과 자기해방을 향한 이 길에서 한 단계는 의회주의의 거부”하는 것이라거나 “의회주의는 노동대중에 대한 지도자의 정신적 힘을 그리고 노조운동의 그 물질적 힘을 구현하는 것이”라거나 “노조운동이 그 일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연적 조직이었고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이기도 했다면 혁명기에 노조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립하는 것” 또 “오랜 조직형태인 노조와 정당, 그리고 새로운 평의회 조직들은 사회발전의 단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위치에 속하며, 그 기능 역시 상이하다. 전자는 자본주의 내의 여타 다른 계급들 중 노동자계급의 위치를 확보해주며, 이들 모두 자본주의 팽창기에 속하는 것이다. 후자는 자본주의를 괴멸시키고, 계급분열을 없애기 위해 노동자계급에게 완전한 지배를 보장해주는 것이며, 시기적으로 자본주의 쇠퇴기에 속한다”라는 주장을 한다.35)

 

2)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KAPD)

 

독일공산당 내 스파르타쿠스단 경향과 독일국제공산주의자 경향 간의 갈등은 처음부터 존재했으나 혁명의 실패 이후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욱 심각해진다. 즉 전자는 중앙집권화, 대중조직에서의 활동을 강조했고 후자는 평의회 체제와 분권화된 협의체를 강조했다. 이후 갈등은 심해지고 결국 분열로 나아갔고 좌익공산주의자들은 KAPD를 결성한다.36)

KAPD는 ‘세계자본주의는 쇠퇴기’에 들어섰으며 “독일에서의 경제ㆍ정치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발할 만큼 무르익었다”고 파악하고 “독일 혁명의 문제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의식 자체의 발전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회에 참여는 개량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며 그러한 주장은 프롤레타리아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장이며 평의회 체제를 주장한다. 또한 노동조합 역시 독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장벽으로 노동조합의 반혁명적 성격은 노조의 구조와 작동방식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의 파괴만이 독일에서 사회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의 대안으로 “공장조직”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이후 10월 혁명을 이중혁명(산업 지역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농촌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다시 부르주아 혁명으로 설명하고 쏘련사회를 국가자본주의사회로 파악한다. 이들은 정치적 당의 존재를 러시아혁명의 부르주아적 본질로 생각한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정당에 대한 무지한 입장은 반인텔리적 흐름으로 또 반조직적 경향으로 흘러 ‘조직의 해체’, ‘정치 활동 포기’로 귀결된다. 이후 독일/네덜란드 좌파로부터는 테러리스트와 혁명조직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공산주의자들만 남게 되며 사실상 정치적으로 소멸한다.

 

3)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1926년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축출된 후 이들은 1)꼬민떼른의 ‘혁명적 의회주의’ 발상, 2)통일전선 개념, 3)쏘련의 부르주아 국가로의 변질 및 꼬민떼른의 국제주의적 입장포기, 4)공산당들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수호’를 기치로 내걸며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부르주아 민족주의당으로 되어가는 것에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은 ‘혁명당이 없이는 혁명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유지했으며 레닌주의 및 꼬민떼른의 입장을 일정 정도 견지한다.

노동조합과 관련해서도 이들은 노동조합을 프롤레타리아트의식이 단련되는 “공산주의의 학교”로 파악했으며 혁명시기에 미래의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장소로 이행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반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노동조합을 통해 지도력을 얻고, “개량주의 지도부”를 몰아냄으로써 노동조합을 내부로부터 변화시킬 수 있음을 주장했으며, 노동조합의 내부에서 활동하는 것 역시 주장한다.

 

4) 혁명당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Bureau for the Revolutionary Party, IBRP)37)

 

이들은 현재 공산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파악하고 제국주의 전쟁이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문제가 역사의 의제에 오른다고 파악하고 있다. “부족한 것은 이러한 투쟁을 준비할 혁명당”이라 주장한다.

그들은 의회는 노동자에게 환상을 준다는 의미에서 부르주아지에게 쓸모가 있다고 하며, “혁명가는 그들 자신의 계급영역에서 노동자들에게 싸우라고 요구하면서 의회선거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은 노동과 자본의 중매기관”이라는 규정하에, 노조는 “자본주의 전복의 유용한 도구가 아니며 결코 그런 적이 없었다”며 노동자들 자신이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자본주의의 보존을 위해 일하는 조직이”라고 규정한다. 노동조합을 정복하고 혁명기관으로 변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며 “모든 곳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반혁명의 기지가 될 노동조합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중기관은 “투쟁의 시기” 계급투쟁이 벌어지는 상황에 나타나며 일상의 시기에서 “당과 노동계급의 넓은 대중 사이의 직접적 연결고리로서 작업장에서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수단을 찾는 것은 공산주의 조직의 임무”라고 주장한다.

현재가 세계혁명당[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당] 건설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할 시기로 규정하고 이를 위해 노력함을 천명하고 있다.

 

5) 국제공산주의흐름(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ICC)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를 “자본주의의 쇠퇴”의 시기로 규정하고 두 차례에 걸쳐 인류에게 위기, 세계대전, 재건 그리고 새로운 위기의 야만적 반복이 일어났고,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쇠퇴의 최종 단계인 해체의 시기로 진입하여, 이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공산주의 세계혁명이냐 아니면 인류의 파멸이냐)의 양자택일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1871년 빠리꼬뮌은 혁명의 최초의 시도였으나 당시에는 조건이 성숙하지 못해 실패한 것으로 평가한다. 이후 자본주의는 쇠퇴의 단계에 들어섰고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공산주의 세계혁명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으나 이후 혁명들의 실패는 러시아 혁명의 고립과 변질을 초래하였고 스딸린주의의 등장은 혁명에 무덤을 판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이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가 결합한 형태인 국가자본주의로 주장한다.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국가’ 혹은 ‘공산주의국가’들도 이에 해당하며 따라서 이 국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또는 조건부의 변호도 전적으로 반혁명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민족국가의 독립, ‘민족자결권’ 등은 그것이 어떤 무엇이든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독약’임을 주장한다.

선거 및 의회에 참여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상승기에는 의미가 있는 투쟁이었지만 쇠퇴기에서는 그렇지 않고 오히려 계급 내부에서 반혁명적인 역할만을 하며 사기극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혁명적 의회주의”를 대변하는 흐름은 “부르주아 진영의 결정적인 부분들이”라고 규정한다. ‘민주주의’는 부르주아계급의 위선적인 지배형태의 하나로 스딸린주의나 파시즘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은 과거에는 프롤레타리아의 기관이지만 지금은 자본의 도구라고 규정하고 이는 직업군 또는 산업부문으로 조직되는 특징이나 나쁜 지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적인 조직을 이용하는 것, 재건설 하는 것 또는 재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모든 정치전략은 자본주의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정치적 경향은 “확고하게 반혁명 진영의 편에 서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스스로 확장과 조직화를 담당함으로써 자신들의 투쟁들을 통일해야 하는데 이는 자립적인 ‘노동자총회’와 이를 통해 언제나 선출ㆍ퇴출될 수 있는 대리자들의 ‘위원회’를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노동자계급이 그의 혁명적 투쟁 속에서 만들어내고 그것의 정치적 권력의 행사에 이용하게 될 조직형식은 노동자평의회이고, 노동자계급은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전 세계적 차원으로, 즉 노동자평의회들의 국제적인 권력을 확립해야 함을 주장한다.

“혁명적 정치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즉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자의식의 일반화과정의 활동적인 요소이다. 그 역할은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는 것’도,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인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투쟁들의 단일화를 향한, 노동자들이 그 투쟁들을 스스로 장악하는 것을 향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혁명적 정치적 목적들은 제시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6. 좌익공산주의 비판

 

1) 지도자-당-계급-대중

 

이미 살펴본 것처럼 좌익공산주의는 현재까지 과거의 입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오고 있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비판은 레닌에게서 이미 이루어졌고 그에 대해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정치조직” 또는 “전위”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이들은 혼란을 나타낸다. 현재 한국의 좌익공산주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국제공산주의흐름’은 “혁명적 정치조직은 프롤레타리아의 전위, 즉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자의식의 일반화 과정의 활동적인 요소이다. 그 역할은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는 것’도, 노동자계급의 이름으로 ‘권력을 인수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투쟁들의 단일화를 향한, 노동자들이 그 투쟁들을 스스로 장악하는 것을 향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그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혁명적 정치적 목적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공허한 추상적인 표현이 거슬리더라도 그것을 무시하면 그들이 어느 정도 “전위의 역할”에 대해서 알고 있고 인정을 하고 있다는 점은 알 수 있다.38) 하지만 그것의 발전된 형태가 바로 “당”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갖고 있는 “당”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 속의 돈키호테처럼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하고 돌진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에 대해서는 레닌이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에서 “당”의 필요성을 아직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던 그들의 선배들인 이른바 ‘원조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당 독재인가 아니면 계급독재인가, 지도자들의 독재(당)인가 아니면 대중들의 독재(당)인가?”라는 질문을 하자 언급한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된다.

즉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끝없는 사고의 혼란을 증명하”는 것이고 “현명해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며 해준 대답, “대중들은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 사회적 생산체제 내의 위치에 따른 분류에 관계없는 압도적 다수 일반과 사회적 생산체제 내의 특정한 지위를 갖고 있는 부류들을 대비시켜야만 대중과 계급들을 대비시킬 수 있다는 것, 보통 대부분의 경우, 적어도 현대 문명국들에서는 정당들이 계급들을 지도한다는 것, 정당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책임 있는 자리에 선출되어 지도자라고 불리는 가장 권위 있고 영향력 있으며 노련한 당원들로 이루어진 어느 정도 견실한 그룹들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 등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초보적이다. 이 모든 것은 단순명쾌하다”는 언급이 바로 그것이다.39)

이른바 좌익공산주의자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위와 대중, 당과 계급 사이의 올바른 상호관계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좌익’공산주의자”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이고 “‘좌익’소아병”이라 불리는 것이겠지만.40)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의 그들은 “모든 부르주아 정당은 모두 똑같이 반혁명적이다. 모든 소위 ‘사회주의’, ‘공산주의’ 노동자당들(지금에 있어서는 이전의 ‘공산주의자들’), 극좌파(뜨로츠끼주의자, 마오주의자 및 전(前)마오주의자, 공식적인 무정부주의자)의 단체들은 자본의 정치기구의 좌익을 이루고 있다. ‘인민전선’, ‘반파시즘전선’ 및 ‘공동전선’과 같이,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당 하나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모든 전술들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통제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데 기여할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과거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당과 “정당으로서의 볼쉐비즘”을 전혀 구분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고 몸으로 비극적인 정치적 경험을 감당했다. 그래서 과거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은 안타까움과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최근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가당치도 않은 이론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은 “공산주의자연맹, 제1, 2 및 3인터내셔널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로부터 출현한 좌익분파들에 의해 연이어 얻어진 성과들에 특히 독일ㆍ네덜란드 및 이탈리아 좌파의 공헌들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1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는 바꾸닌주의였다. 이들의 분파적 활동은 제1인터내셔널을 실질적 분열과 해산을 가져왔다. 제2인터내셔널에서 가장 먼저 문제가 된 분파는 무정부주의자들로 이들은 좌익분파를 이루었다. 생디칼리즘 역시 좌익분파를 이루었으나 이들 역시 제1인터내셔널을 혼란에 빠뜨린 프루동주의와 바꾸닌주의를 이데올로기적 배경으로 한다. 물론 이들은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부들이 우경화하고 부패하는 것에 대한 대안 세력으로 여겨지면서 그 공백을 메우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지만 결국 공산주의운동에서 이탈한다. 과연 이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알고도 “좌익”이라는 말에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만일 모르고 그렇게 한다면 무지한 것이고, 혹시 알고도 그렇게 한다면 “병(病)”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노동조합

 

원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질서의 기관으로 변질되었고 노동조합적인 조직형태들은 그것이 ‘공식적인’ 또는 ‘기초단위’든 상관없이, 노동자계급을 통제하고 투쟁을 방해하는 조직이라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대신하는 노동자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41)

하지만 레닌에게 있어서 노동조합은 “교육조직, 끌어들이는 조직, 훈련하는 조직이다. 이것은 학교다. 관리의 학교이고, 경영의 학교이며, 공산주의의 학교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대중적인 조직이고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대중은 이를 통해서 만나게 된다. 비록 노동자계급운동의 발전 과정 속에서 “노동조합들은 일정한 반동적 모습들, 일정한 직능적 편협성, 일정한 정치적 무관심의 경향, 일정한 침체성을 불가피하게 드러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조합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노동자계급의 당과 노동조합의 상호작용을 통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반동성을 두려워하는 것, 그것을 회피하고나 뛰어넘으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짓”이라 비판하는데 이것이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가장 후진적인 계층과 대중들을 훈련, 교육, 계몽시켜 새로운 삶으로 끌어들이는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기능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더구나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은 “반동적인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거나 후진적인 노동자 대중들을 반동적인 지도자들, 부르주아지의 앞잡이들, 노동귀족들, 또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들의 영향력 하에 내버려” 두는 무책임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레닌은 좌익공사주의자들에게 “만일 당신이 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대중의 동조와 공감과 지지를 얻고자 한다면, 지도자들로부터 오는 어려움들, 곧 고통, 속임수, 모욕, 박해 등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대중이 있는 곳에서 작업해야만 한다. 아무리 반동적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나 반(半)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있는 기구들과 협회 및 결사체들에서 체계적으로, 참을성 있고, 끈덕지고 끈기있게 선전과 선동을 하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치룰 수 있어야만 하며,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노동조합들과 노동자 협동조합들 (때로는 적어도 협동조합들), 바로 이런 것들이 대중이 있는 조직이다”42)라고 인내심을 갖고 설득한다. 하지만 많은 수의 좌익공산주의자들에게 이것은 ‘쇠귀에 경 읽기’로 결과한다. 그리고 그들의 제자를 자처하는 자들은 선생들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3) 선거참여 혹은 의회 활용

 

원조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폐물이 되어버린 모든 의회주의적 투쟁형태로의 복귀는 단호히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레닌은 의회주의가 역사적으로 폐물이 되어버렸다는 말은 선전의 의미에서는 옳지만 실천적인 극복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폐물이” 되었다는 말에는 엄청난 비판을 가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독일의 [좌익들]이 자신들의 바램을, 자신들의 이념적, 정치적 태도를, 객관적인 현실로 오인하였음은 명약관화하다. 이것은 혁명가들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오류이다. …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의회주의는 [정치적으로 폐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폐물이 된 것을 계급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대중들에게 폐물이 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다시 우리는 [좌익]들이 어떻게 사고해야 되는지를 모르며, 계급정당으로서, 대중 정당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모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신은 대중들 수준으로, 계급의 후진층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당신은 그들에게 쓰디쓴 진실을 말해주어야만 한다. 당신은 그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의회주의적 편견을 편견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당신은 (계급의 공산주의적 전위뿐만 아니라) 바로 계급 전체의, 그리고 (대중의 선진적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로 모든 근로인민 대중의 의식과 준비 정도의 실제 상태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펴야만 한다.43)

 

이러한 레닌의 주장이 어디가 잘못되었는가? 레닌의 문제의식과 비판은 현재의 ‘좌익공산주의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4) 이른바 “자본주의의 쇠퇴(The decadence of capitalism)”44)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쇠퇴기로 규정한 것은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그들의 거의 모든 주장의 가장 기초가 되어 사용되고 있다.45)

그런데 국제공산주의흐름은 이를 좀 더 세련화하고자 한다. 그들은 이미 맑스-레닌주의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개념과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가장 기초적인 개념들을 그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처럼 이것저것을 덧붙이며 설명한 후 “쇠퇴이론”을 “역사적 유물론의 구체화”라고 규정한다.46)

또한 그들은 “생산양식의 쇠퇴라는 보편적 개념을 도출하고 이러한 보편적 개념을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여 그로부터 정치적 귀결을 연역”47)하겠다고 큰 목소리로 선언하고 인류의 역사를 요약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이 “자본주의의 쇠퇴론”을 들고 나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의 모든 근거를 “자본주의의 쇠퇴”에서 찾아서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이들은 세계 사회주의운동 및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에서 레닌을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룩셈부르크를 불러온다.48) 그리고 자신의 이론의 뿌리를 ≪자본축적론≫에서 찾는다.49)

이들은 또 미첼이라는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자를 이 내용과 관련하여 높이 평가하는데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이탈리아 좌파가 획득한 명료성의 예는 1934년 9월 빌랑 11호에 실린 “고통받는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와 순환”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 미첼(Mitchell)은 쇠퇴기의 자본의 최심층적인 경향들을 추적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몰락에 대한 이론에 기초하여 논거를 발전시킨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쇠퇴가 1912-14년에 시작된 것으로 규정하고 “생산양식에 내재한 모순의 본질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더 이상 역사적 사명을 즉, 지속적이고 진보적 방식으로 생산력과 인간노동생산성을 발전시키는 사명을 달성할 수 없는” 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적 전유에 대항한 생산력의 반란은 한때는 간헐적이었으나 이제 항구적인 것이 되었고 자본주의는 전반적인 해체의 위기에 들어섰다”고 보았다.

미첼은 상승하는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와 쇠퇴과정에서의 경기상승 및 후퇴시기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지적했다. 상승기에는 위기가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지속적 확장에 필요한 계기가 되는 반면, 새로운 시대에 초래된 시장의 포화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오로지 제국주의 전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쇠퇴기에는 자본주의는 전쟁이라는 한 방향으로만 체제의 모순을 인도할 뿐이다. 인류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혁명을 통해서만 그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마치 예언처럼 정확하게 그 저자는 그 시기가 앞으로 추정적으로 어떻게 발전하게 될지를 논하고 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길로 가던,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간에 자본주의는 전쟁이라는 운명으로 돌이킬 수 없게 내몰리게 된다.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는 오늘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단언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시아를 재분할할 목적으로 폭발하게 될 것이고 결국 전 세계적인 문제로 될 것이라는 점이다.”50)

 

도대체 이들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읽어보긴 했는가? 1916년에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도 또 검열을 의식하여 “이솝류의 언어”, “‘노예’의 언어”51)로 쓰인 그 책을 읽고도 미첼이라는 좌익공산주의자가 1934년에 쓴 글을 발견하고 너무 놀랍다는 듯이 “마치 예언처럼 정확하게”라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열강에 의한 세계의 분할”이라는 제국주의의 한 가지 특징과 불균등발전이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법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 세계적인 재분할이 불가피하다는 예상’을 도출해내는 레닌의 통찰과 “쇠퇴기에는 자본주의는 전쟁이라는 한 방향으로만 체제의 모순을 인도할 뿐이”라는 주장과 어느 것이 더 훌륭한가? 자본주의의 발전을 당대의 최고의 경제적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ㆍ최후의 발전단계’로 규정하며 자신의 이론을 세워낸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주의 몰락에 대한 이론에 기초하여 논거를 발전시킨” 미첼의 이론 중 어느 것이 더 올바른가? 모두 레닌이 앞선다. 현실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은 미첼이 말한 것처럼 “아시아를 재분할할 목적으로 폭발하”지 않았고, 레닌의 예상처럼 “전 세계적인 재분할”을 목적으로 전개되었다.52)

 

 

7. 나가며

 

현재의 ‘좌익공산주의’ 경향은 다양하지만 노동조합과 의회에 대한 견해에 있어 과거 ‘좌익공산주의’의 견해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당과 관련한 문제에서 이들은 당을 부정하는 견해와 당을 인정하는 견해가 모두 있으나, 비록 당(혁명적 정치조직,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주장도 과거 ‘좌익공산주의’의 견해를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비판은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 아직도 유효하고 가장 기본적인 비판이 된다.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좌익공산주의자들의 견해는 뜨로츠끼주의자들보다 훨씬 반동적이다. 이들은 뜨로츠끼주의자들을 비판하지만 중요한 점을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반쏘ㆍ반공주의다. 비록 아직까지 이들의 실천적 힘은 미약하지만 이들이 점차 끼칠 해악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이들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은 바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글은 그러한 노력의 시작으로, 미흡하지만 관심과 격려 및 비판을 부탁드린다.

 


 

1) 뜨로츠끼, “스탈린주의와 볼셰비키주의”, ≪역사의 대안 트로츠키주의≫, 풀무질, 2003, p. 193.

 

2) 뜨로츠끼, 같은 곳. 뜨로츠끼를 인용했다고 내가 이른바 “뜨로츠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맑스와 레닌을 언급한다고 맑스주의자나 레닌주의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뜨로츠끼를 희화화하려는 것 또한 절대 아니다. 우리 연구소가 “뜨로츠끼주의”를 가장 열심히 비판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과 과학에 입각한 비판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곧 출간될 ≪뜨로츠끼주의냐 레닌주의냐≫를 참조하길 부탁드린다.

 

3) 오세철 편저, “국제공산주의흐름(ICC)의 강령”, ≪좌익 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빛나는 전망, 2008, p. 452.

 

4)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은 한국에서 제목의 번역과 관련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좌익공산주의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전파자인 오세철 교수는 앞의 책의 “편저자 서문”에서 “레닌 말년의 논쟁적 글 ≪좌익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서 [소아병]이라는 오역으로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좌파를 폄하하고 왜곡한 역사를 바로 잡는 것도 공산주의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오세철, 같은 책, p. 7)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Infantile Disorder”를 “유아적 무질서”로 번역해야 옳은데 “소아병”으로 오역하여 “세계공산주의 운동의 좌파를 폄하하고”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번역과 관련하여 오세철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확한 비판은 이 책에 실린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상)”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길 바란다. 아무튼 “disorder”는 정신과적 질환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장애’로 번역된다. 예를 들면 망상장애(delusional disorder), 인격장애(personality disorder), 적응장애(adjust-ment disorder), 학습장애(learning disorder) 등이 그것이다.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서 문제로 자주 언급되는 우울증(depression)은 하나의 증상을 표현하는 것이며, 정식 진단명은 주요우울장애(major depression disorder)이고 또한 최근 사회문제로 언급되는 공황장애 역시 영어로는 ‘panic disorder’로 표기되며, 기분장애(mood disorder)의 일종이다.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다함께’가 ‘쏘련국가자본주의론’에서처럼 이 부분에서 좌익공산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 하는 점이다. 그들은 이 책을 ≪‘좌익’ 공산주의 ― 어린애 같은 뒤죽박죽≫(최일붕, ≪진보평론≫ 제22호, 2004년 겨울, p. 110)이라고 번역한다.

 

5) 이에 대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제1인터내셔널은 그 역사적 역할을 완수하고, 전 세계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이 훨씬 거대하게 성장하는 시대, 즉 실제로 그 운동이 폭(幅)을 넓히고 개개의 민족국가 내에 대중적인 사회주의적 노동자당이 창조되는 시대를 위한 길을 열었다.” (레닌, “칼 맑스”, ≪정세와 노동≫ 제24호(2007년 5월), 노사과연, p. 68.)

 

6) “독일에서 1869년에 결성된 것을 시초로 계속해서 네덜란드 1870년, 덴마크 1871년, 보헤미아 1872년, 미국 1876년, 프랑스 1879년, 스페인 1879년, 영국(당이 아니라 그룹) 1880년, 러시아(그룹) 1883년, 노르웨이 1887년, 오스트리아ㆍ스위스ㆍ스웨덴ㆍ핀란드 1890년, 폴란드ㆍ이탈리아 1892년, 불가리아ㆍ헝가리ㆍ칠레 1894년, 아르헨티나 1896년, 일본 1901년, 세르비아 1903년, 캐나다 1904년, 중국 1911년, 브라질 1916년” (포스터, ≪세계사회주의운동사≫, 동녘, 1987, p. 139.)

 

7) 당시에 빠리에서는 앞서 언급한 국제대회 이외에도 프랑스혁명을 기념하는 또 다른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후자를 주도한 세력은 프랑스 노동운동의 다수파로 자본주의하에서 실행 가능한 범위에서 노동자계급 활동을 조직할 것을 주장한 ‘가능파’였다. 후자는 약 600명이 참여하여 391명이 참여한 전자에 비해 수적 우세를 자랑했지만 이들의 대회는 과거의 대회들과 마찬가지로 일회성으로 끝났다. 또한 참가자에 있어서도 양자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참가자는 “영국의 케어 하디, 독일의 리프크네히트, 베벨,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게오르그 폰 폴말, 클라라 제트킨, 프랑스의 줄 게드, 라파르그, 바이양, 롱게, 벨기에의 앙제르, 방델벨드, 이탈리아의 안드레아스 코스타, 치르치아노, 오스트리아의 빅토르 아들러, 네덜란드의 도메라 뉴벤호이스, 스페인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러시아의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등이”었고 이들은 모두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악명을 포함하여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아무튼 두 그룹은 엥겔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년 후인 1891년에 열린 제2차 대회인 브뤼셀대회에서 통합된다.

 

8) 대회장의 정면에는 금박글자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강신준,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제3호, 1992년 겨울, pp. 34-35.)

 

9) “50년대 말에서 60년대에 걸쳐 민주주의 운동이 부활한 시기는 맑스를 다시 실천 활동으로 불러냈다. 1864년 (9월 28일)에 국제노동자협회―그 유명한 제1인터내셔날―가 런던에서 창립되었다. 맑스는 이 조직의 심장이자 혼이었다. 그는 그 최초의 ‘연설’[‘창립선언’]과 수많은 결의, 성명 그리고 선언의 필자였다. 많은 나라의 노동운동을 통합시킴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비프롤레타리아적ㆍ전(前)맑스주의적 사회주의(마찌니(Mazzini), 프루동, 바꾸닌, 영국의 자유주의적 조합주의, 독일에서의 라쌀레적 우익 편향, 등등)를 공동행동의 길로 향하도록 노력함으로써, 그리고 이들 모든 종파 및 학파들의 이론과 투쟁함으로써, 맑스는 다양한 국가에 있어서의 노동자계급의 프롤레타리아적 투쟁의 한결 같은 전술을 단조(鍛造)해냈다. 빠리 꼬뮌(1871)―그에 대해서 맑스는 대단히 심오하고, 명쾌하고, 날카로우며, 효과적인 혁명적 분석(≪프랑스에서의 내전≫, 1871)를 제공하고 있다―이 붕괴된 후에는, 그리고 바꾸닌파에 의해서 인터내셔날이 분열된 후에는, 유럽에서 그러한 조직은 존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인터내셔날의 헤이그 대회(1872) 후에 맑스는 인터내셔날의 총평의회를 뉴욕으로 이주시켰다.” (레닌, 앞의 책, 같은 곳.)

 

10) “제2인터내셔널에 대한 불만이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퍼지고 증가하는 것은 그것의 기회주의적인 속성 때문에, 그리고 세계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한 투쟁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 전술의 방향을 잡아줄 수 있는 진정 중앙집중화되고 진정 선도적인 중앙기구를 만드는 데 무력했기 때문이다.”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1989, p. 103.)

 

11) “대회는 국제적인 대시위운동을 조직할 것을 결정한다. 이 결정에 기초하여 모든 국가, 모든 도시에서 대회가 지정하는 날짜에 노동자대중은 국가 당국에 대하여 노동일을 법률로 8시간으로 낮출 것, 또한 파리대회의 다른 열 가지 결정을 실행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미 미국노동총동맹이 1888년 12월의 세인트루이스대회에서 1890년 5월 1일을 기하여 같은 목적의 시위운동을 실행할 것을 결정했으므로, 이 날을 국제적 시위의 날로 정한다. 각국의 노동자는 각각 자국의 조건에 맞추어 시위를 조직해야 한다.” (포스터, 앞의 책, p. 148.)

 

12) “즉 제2인터내셔널의 회원자격을 [자본주의적 소유와 생산을 사회주의적 소유와 생산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동시에 입법 및 의회 활동을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수단의 하나로서 간주하는 그런 조직이 대표]와 [비록 정치투쟁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지만 입법 및 의회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고 천명하는 모든 노동조합]으로 국한하였다.”(강신준, 앞의 글, p. 38.)

 

13) 밀레랑 사건은 사회주의자였던 밀레랑이 당의 허락도 없이 부르주아 내각에 입각을 했던 것인데, 드레퓌스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공화정이 위기에 처하자 새롭게 구성되는 철저한 부르주아 내각에 사회주의자가 합류했던 것이다.

 

14) 포스터, 앞의 책, pp. 178-180.

 

15) “대회는 있는 힘을 다하여 수정주의자의 노력을 부정한다. 그들의 목표는 계급투쟁에 기초한 우리들의 시련을 통한 승리로 빛나는 정책을 변형하려는 것이며, 부르주아지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에 의해 정치권력을 탈취하는 대신에, 기존의 사회질서에 양보하는 정책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1) 당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기초한 정치적ㆍ경제적 조건하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책임도 모두 거부하며, 따라서 지배계급이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어떠한 조치도 단연코 지지하지 않는다. (2) 부르주아사회하에서 사회민주당이 정부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라고 선언한다. (같은 책, p. 192.)

 

16) 같은 책, pp. 216-217. “이 문장을 포함하는 한 구절에 관한 투표에서 흥미 깊은 사실이 드러났다. 즉, 식민지를 소유하는 강대국의 대의원 대부분과 소식민국[소제국주의국]의 전(全)대의원이 그 구절을 그대로 남겨두는 데 찬성했다.” (같은 책, p. 217.)

 

17) 같은 책, pp. 219-222.

 

18) 1911년 7월 독일과 프랑스의 충돌, 1911년 이탈리아-터키 전쟁, 1912년 10월 발칸국가들 간의 전쟁.

 

19) 포스터, 같은 책, 같은 곳. 레닌은 이에 대해 “그들은 거액의 약속어음을 끊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지불할 것인지 두고 보자”라고 했다. 당연하고 예상된 결과였지만 결국 중앙파와 우익사회주의자들은 부도를 냈다.

 

20) 슬로건은 세 가지로 나눠지는데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혹은 ‘제국주의 전쟁에서의 자국정부의 패배’ 대 ‘조국방위’ 대 ‘승리하지도 말고 패배하지도 말자’였다.

 

21) 레닌, “사회주의와 전쟁”, ≪사회주의와 전쟁 外≫, 두레, 1989, p. 42.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지나간(소위 ‘평화로운’) 역사적 시대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배태되어 근년에 이르러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사실상의 지배권을 획득하고 있었던 기회주의의 붕괴에 불과하다. 기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부정하고 그것을 부르주아적 개량주의로 바꿔치기해 버렸다. 그들은 계급투쟁과, 그것의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필연적으로 내전으로 전화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계급 간의 협력을 설파했다. 그들은 애국주의와 조국방위를 구실삼아 부르주아적 배외주의를 설파했다. 그들은 노동자는 조국을 갖지 않는다고 하는, 이미 “공산당선언” 속에서 언급된 바 있는 사회주의의 기본적 진리를 무시하거나 혹은 부정해버렸다. 그들은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전쟁이 필요성을 인정하는 대신에, 반군국주의 투쟁에서는 감상적인 소시민적 입장에 머물렀다. 그들은 부르주아적 합법성을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이 합법성을 물신화함으로써, 위기의 시대에는 비합법적 형태의 조직과 선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훨씬 이전부터 준비해 온 셈이다. 기회주의의 당연한 ‘보조자’인 ―똑같이 부르주아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 즉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에 대해 적의를 가진―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즘 유파의 특징은 오늘날과 같은 위기의 시기에 배외주의의 슬로건을 기회주의자에 못지않게 파렴치하고도 뻔뻔스럽게 되풀이하는 것이다.” (레닌, “전쟁과 러시아 사회민주당”, 같은 책, pp. 203-205.)

 

22) 비록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일관되게 전쟁반대를 주장하였던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메링 등도 이 슬로건을 지지하지 않았다. 물론 당시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제국주의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혁명을 지지하느냐, 이것이 당시의 각 당을 구별하는 경계선이었다.

 

23) 제프 일리 저, 유강은 역, ≪The left 1848-2000≫, 뿌리와 이파리, 2008, pp. 318-319.

 

24) 레닌, “10. 몇 가지 결론”,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pp. 101-120.

 

25) 레닌, “5. 독일의 “좌익” 공산주의. 지도자들-당-계급-대중”, 같은 책, pp. 37-45.

 

26) 레닌, “6. 혁명가들은 반동적인 노동조합들에서 활동해야 할 것인가?”, 같은 책, pp. 46-57.

 

27) 레닌, “7. 부르주아 의회에 참여할 것인가?”, 같은 책, pp. 58-70.

 

28) 레닌, “8. 어떤 타협도 안 된다?”, 같은 책, pp. 71-84.

 

29)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영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레닌의 조언”, ≪정세와 노동≫ 제11호(2006년 3월), 노사과연, pp. 79-93.

 

30) 브라니츠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Ⅰ)≫, 중원문화, 1987, pp. 380-386. 그의 주요 저서인 ≪노동자평의회≫는 빛나는 전망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다. 판네쿡의 이름은 다양하게 번역되는데 빛나는 전망에서 번역한 것으로 사용한다.

 

31) 그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평가한다. “네덜란드에서는 트뢸스트라(Troelstra)의 기회주의당이 배외주의 일반과 유사했다. … 네덜란드의 고르터(Gorter)와 판네쿡이 이끄는 마르크스주의당만이 일관되고 진실하며 충직하고 확신에 찬 국제주의자들이다.”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外≫, 두레, 1989, p. 78.)

 

32) 이 논쟁에 대해서 레닌은 판네쿡의 주장이 “많은 결함으로 인하여 공격도 많이 받고 수난도 많이 당한다”거나 “정확성과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하지만 “이 논쟁에서 맑스주의를 대변한 것은 카우츠키가 아니라 판네쿡”이라고 한다(레닌, ≪국가와 혁명≫, 돌베게, 1998, p. 139). 레닌은 기회주의자들이 맑스주의 국가론을 어떻게 속류화시키는가를 증명하기 위해 그 논쟁을 인용하며 카우츠키의 왜곡을 폭로한다.

 

33) 레닌 외, ≪전략과 전술≫, 학민사, 1988, pp. 80-84.

 

34) “대중행동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노동조합의 무기인 파업을 국가권력에 대해 사용해야”, “대중파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두 가지 투쟁방식이 합쳐진다. 즉 여기에서 정치적 통찰과 노조의 규율은 한 사람의 투사가 갖는 사고하는 머리와 강한 팔에 해당한다.” (브라니츠키, 앞의 책, p. 383.)

35) 판네쿡이 언제부터 입장이 변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독일혁명의 쓰라린 경험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비록 견해의 차이가 상당히 컸지만 탄압 속에서 하나의 당에서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이 변절하여 함께 활동한 동지들을 살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은 ―비록 그가 아무리 강철 같은 혁명가라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이후 자신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킨다.

 

36) 레닌은 이에 대해 “당의 이념적, 이론적, 혁명적 성장과 성숙을 가로막고 조화롭고 진정으로 조직적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진정으로 준비하는 실천적 작업을 가로막는 혼란보다는 분열이 훨씬 나은 것이다”라고 평가한다(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분열”,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p. 122). 비슷한 맥락의 레닌의 의견 하나 더. “원칙에서의 깊고도 기본적인 불일치가 있기에 ―아마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 그것들이 가장 첨예하고도 가장 분파적인 선언의 옹호자 역을 하지는 않는가? 어떤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고 할 때, 분열과 같은 것을 옹호할 수 있는가? 물론 불일치가 진실로 매우 깊고 당이나 노동계급의 정책에서 그릇된 경향을 수정할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나는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레닌, “다시 한 번 노동조합에 대하여”(1921), ≪민주집중제≫, 녹두, 1991, p. 186.)

 

37) 1983년 이탈리아의 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Battaglia Comunista)와 영국의 Communist Workers Organisation(CWO)의 두 조직이 결합하며 결성된 IBRP는 2009년 조직의 명칭을 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ICT)로 개칭하였다.

 

38) “혁명적 정치조직은 프롤레타리아의 전위, 즉 프롤레타리아 내부의 자의식의 일반화 과정의 활동적인 요소” 참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다. 이들은 당을 언급한다. 하지만 추상적으로만 언급한다. 다행인 것은 이들 역시 과거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초기 독일과 이탈리아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역사적 결과에 대한 교훈 속에서 이들은 혼란스럽지만 “당”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이론에 포함시키고 있다.

 

39)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p. 39. 한마디 더 “이런 맥락에서 일반적으로 대중들의 독재와 지도자들의 독재를 대비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은 웃길 정도로 터무니없는 짓이며 어리석은 일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사실 이 간단명료한 문제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견해를 가진 옛 지도자들에 대신하여 지독한 잠꼬대와 허황된 말을 지껄여대는 새 지도자들이 (“지도자를 타도하자”라는 슬로건 아래)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지금 모습이 선조들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40) “인민대중 사이에서 우리(공산주의자들)는 무엇보다도 대양의 물 한 방울에 불과하다. 우리는 인민이 의식하는 것을 적절하게 표현할 때에만 통치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도하지 못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중들을 지도하지 못할 것이며, 모든 기구는 붕괴할 것이다.” (레닌, “R.C.P(B.) 중앙위원회의 정치보고 1922. 3. 27.-4. 2.”(스딸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관하여”, ≪스탈린 선집≫ 1, 전진, 1988, p. 230에서 재인용.)) 이들 문제에 관련한 레닌의 언급이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 인용문에 화들짝 놀랄 것이다. “지도”, “통치” 이러한 언급 때문에.

 

41) 그것의 형태와 호칭은 다양하다. “노동자동맹”, “평의회”, “노동자총회” 등등.

 

42)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p. 54.

 

43) 레닌, 같은 책, pp. 60-61.

 

44) 국제공산주의흐름 저, 오세철 역, ≪자본주의의 쇠퇴≫, 빛나는 전망, 2008. 사실 좌익공산주의자들 내에서도 “자본주의 쇠퇴론”에 대한 이견이 있고 논쟁이 있다. 오세철 편저, ≪좌익 공산주의: 혁명적 맑스주의 역사와 논쟁≫, pp.

262-278을 참조하라.

 

45) “공산주의혁명이 오늘날 필요하고 가능한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자본주의의 쇠퇴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 시기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령과 전략의 역사적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내용, 노동조합의 본질, ‘전선주의(frontism)’의 정치, 민족해방운동의 본질과 같은 문제는 자본주의 쇠퇴의 분석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국제공산주의흐름 저, 앞의 책, p. 11), “소련, 동유럽, 중국 및 쿠바 등지에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이름아래 세워졌던 국가체제는 단지, 자본주의 쇠퇴기에 전형적인, 국가자본주의로의 보편적 경향의 특히 야만적인 한 형태에 불과했다.”(같은 책, p. 226), “쇠퇴기의 자본주의에서 의회와 선거는 하나의 눈가림에 불과하게 되었다.”(같은 책, p. 227), “자본주의가 그 쇠퇴기에 진입함과 더불어, 도처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질서의 기관들로 변형되었다.”(같은 책, p. 228.)

 

46) “쇠퇴이론은 원시공산제, 고대노예제, 봉건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분석하는 역사유물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쇠퇴 이론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틀이다.” (오세철 편저, 앞의 책, p. 223.)

 

47) 국제공산주의흐름 저, 앞의 책, p. 43.

 

48) “1913년에 룩셈부르크는 이러한 역사적 위기의 진정한 경제적 뿌리를 분석하려 시도한 ≪자본축적론≫이라는 위대한 이론적 업적을 출간하였는데, 이러한 위기가 실제로 도래했음은 곧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의 형태로 인류에게 선포되었다.”(같은 책, p. 19.) 그런데 이러한 찬사는 레닌의 ≪제국주의론≫에 붙던 것 아니었던가?

 

49) “(≪자본축적론≫에서 주장한-인용자) 이러한 결론은 오늘날까지 자본주의 쇠퇴의 근본적 기원에 대한 가장 명확한 언명으로서, 쇠퇴를 80년간 경험하면서 혁명운동이 이뤄낸 다양한 이론적 정교화를 당연히 거치게 되었다.”(같은 책, pp. 19-20.) 레닌은 룩셈부르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하였다. “독수리는 닭보다 훨씬 낮게 하강할 수 있다. 그러나 닭은 독수리처럼 높이 상승할 수 없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 독립문제에서 오류를 범했고 1903년 멘셰비즘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렸고, 자본축적론에서 오류를 범했으며 1914년 7월에 플레하노프, 판더펠데(Vandervelde), 카우츠키 등과 함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연합을 주장했을 때 과오를 저질렀으며 1918년의 옥중에서 쓰여진 글에서 오류를 범했다(물론 1918년 말과 1919년 초에 석방된 이후에는 자신의 과오를 상당 부분 수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독수리이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 … ‘독일사회민주주의는 1914년 4월 4일 이후에는 냄새나는 시체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 말로써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 남길 것이다.” (브라니츠키, 앞의 책, p. 376에서 재인용.)

 

50) 국제공산주의흐름 저, ≪자본주의의 쇠퇴≫, pp. 28-30.

 

51) 레닌, ≪제국주의론≫, 백산서당, 1988, p. 29.

52) 그리고 전쟁의 결과도 쏘련의 존재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끝났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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