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왕복서간> 아시아ㆍ인터내셔날리즘의 소재를 묻다 ― ≪영토문제와 역사인식≫(코케츠 아츠시 저)에서 받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사사키 타츠오(佐々木辰夫ㆍ아시아근현대사연구)

코케츠 아츠시(纐纈 厚ㆍ야마구치대학 교수,

동아시아 역사문화학회 회장)

번역: 임덕영(노사과연 편집위원)

 

 

*이 글은 일본 운동단체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의 계간지 ≪사회평론≫ 173호(2013年 春/夏)에 게재된 “アジアㆍインターナショナリズムのありかを問う ― ≪領土問題と歴史認識≫(纐纈 厚著)に触発されて”을 번역한 것이다. 본문의 각주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역자의 주이다.

 

 

[≪사회평론≫ 편집부 주]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 ‘독도(다케시마) 문제’는 일본인민에게 과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아시아에서 어떠한 관계를 구축해 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날카롭게 묻고 있다. 작년 이래로 ‘센카쿠 문제’를 둘러싼 일본 대중매체 보도는 ‘센카쿠 열도’를 호칭할 때 ‘오키나와 현의 센카쿠 열도’라 하면서, 일부러 ‘오키나와 현의’라는 수식어를 항상 사용, 일본 인민에게 오키나와를 포함시킨 내셔날리즘을 심어 놓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작년 12월 20일 간행된 ≪영토문제와 역사인식 ― 왜, 일ㆍ중ㆍ한은 손을 잡지 않는가≫(코케츠 아츠시, 스페이스 가야(伽耶) 간행)는 ‘국익’ 옹호의 이름하에 중국과 조선, 한국을 적대시하는 일본 국내의 풍조에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본서는, 현지 조사나 교류를 바탕으로 일ㆍ중, 일ㆍ조, 일ㆍ한 인민의 우호ㆍ연대의 문제를 정치와 역사인식 문제와 연계하여 연구하려는 저자, 코케츠 아츠시 씨의 진지한 자세가 선명하게 제시된 훌륭한 저서로 현재 호평 중에 발매 중이다.

이번 이 책에 대하여, 남아시아도 포함한 폭넓게 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작년 여름 ≪오키나와 전쟁 ― 또 하나의 시각≫(스페이스 가야 간행)을 지은 사사키 타츠오 씨가 코케츠 아츠시 씨에 질문하는 편지를 썼다. 이에 대해 코케츠 씨가 쓴 답장을 왕복서간이라는 형태로 묶어 두 분의 편지를 게재한다.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적 근대가 등장하기 이전의 동아시아 교류의 형태, 파시즘을 둘러싼 관점과 인터내셔날리즘의 내용과 관련된 검토가 덧붙여져 있다. 읽고 난 후 독자 여러분의 감상이나 의견을 부탁드린다.

 

 

[서간]

근세 아시아의 교류형태에서 배우다

 

사사키 타츠오

코케츠 아츠시 씨에게

먼저 서면을 드립니다만 상당히 장황하게 된 것을 양해해 주십시오.

 

저는 작년 12월 당신이 집필하신 ≪영토문제와 역사인식 ― 왜 일ㆍ중ㆍ한은 손을 잡지 않는가≫(스페이스 가야 간행)를 읽었습니다.

저는 수년 전 오사카에서 열린 50명 정도의 모임에서 당신이 하신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쓰시고 정리하신 문장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저의 감상을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코케츠 씨는 연구자이기 이전에 일본의 인민의 최대 과제 중 하나인 일ㆍ중, 일ㆍ조, 일ㆍ한 인민 연대의 회복이라는 중차대한 주제에 상당히 양심적, 혹은 주체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몰두하고 계시는 분이구나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점에 깊이 감명을 받았습니다. 중국, 한국과 타이완을 자주 방문하시고 또 현지 조사ㆍ강연 등을 수행하시면서 해당 지역에서 발화된 일본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의견을 받아들이면서 교류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코케츠 씨의 자세를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제가 최근 안고 있는 의문이나 소견을 말씀드리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다면 매우 기쁠 것이라 생각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이 서면을 드리는 바입니다.

가능한 한 문제를 요약하고자 합니다. 저서 가운데 ‘일본주의의 형성’(136페이지)과 ‘요시다 쇼인(吉田松蔭)’1)의 ‘조선영유론’(150페이지)을 예로 들자면, 일본이 조선 내지 중국을 영유하려고 하는 생각의 맹아를 요시다나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2), 메이지 이후에는 다카야마 쵸규(高山樗牛)3),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4)등으로 집약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점들은 우리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의 시야가 좁았다 혹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것은 왜인가라고 질문하고자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저는 첫 번째로서 당시 일본이 ‘쇄국’(해금)적 상황에 있었다는 것에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쇄국’적 상황은 좁은 의미의 일본, 보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 내지(內地)의 역사 구조인 것입니다. 에도 시대 초기부터의 일본을 북으로는 치시마(千島: 쿠릴열도), 홋카이도에서 남으로는 류큐(琉球)5), 서로는 츠시마(対馬: 대마도)까지를 포함한 것이라 한다면 내지는 ‘해금’ 하에 있었지만 그 외의 지역은 개국적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재확인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출병 후 ‘전후 경영’으로서 조선의 ‘통신사’ 파견이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이루어집니다. 통신사들은 한성(서울)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로 갈아타고 츠시마를 경유하여 에도로 향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번에 걸친 ‘임진전쟁’에서 왜군 수십만 명의 출병, 배로 인한 침입을 당하고, 또한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병ㆍ인민의 코를 잘라 내는 형벌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잔혹한 처사를 당한 것을 생각한다면, ‘우호외교’로서, 이전의 전쟁을 청산한다는, 매우 심각 혹은 중요한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통신사라는 방법은 책봉제에서 배운 화목 법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씨의 ≪아메노모리 혼슈(雨森芳洲)≫6)(미네르바 서방, 2011년)에 따르면 츠시마(対馬)번 종씨가신인 혼슈 등은 ‘조선과의 성심을 다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또 와타나베 쿄지(渡辺京二) 씨의 ≪흑선7) 전야 ― 러시아, 아이누8), 일본의 삼국지≫(요센(洋泉)사, 2012년)―이것을 저는 간결하게 요약할 능력이 없습니다만―에서는 이미 막부에 마츠마에(松前) 번사를 포함한 본토 일본인들이 아이누나 러시아계 주민과 연해주, 사할린, 쿠릴열도 및 홋카이도에서 공동생활이나 교류, 무역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표류 어민인 일본인이 뻬제르부르크나 이꾸츠크에서 러시아어를 배워 일ㆍ러 교류의 매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사할린이나 시베리아 침략과는 전혀 연이 없는 존재였었을 것입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를 방문했던 중국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류큐 왕국은 1372년부터 1875년까지, 즉 ‘류큐처분’9)의 직전까지 약 500여 년간 중국(명ㆍ청)과 책봉ㆍ조공ㆍ정삭(正朔)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아는 데 필요한, 일ㆍ중 교류의 기록 문서인 ≪역대보안(歴代宝案)≫*10) 등, 꽤 많은 문헌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 책봉ㆍ조공관계는 얼마 되지 않아 류큐와 그 외 중국과의 책봉, 조ㆍ공국 관계를 맺은, 예를 들어 조선, 안남11), 샴12), 자와13), 팔렘방14), 말라카15), 수마트라16), 순다17), 바타니18) 등과의 ‘대교역시대’를 구축했었던 것입니다. ≪역대보안≫에는 “자문(咨文)”이라는 대등한 교류, 무역관계를 나타내는 문서가 다수 담겨져 있습니다. 반복되지만, 14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짧지 않은 500년간, 중국과 류큐의 크고 작은 두 개의 봉건국가가 평화ㆍ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후세의 사가들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입니다.

‘고(古) 류큐’*19) 시대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성장한 쇼 쇼켄(尚象賢)20)(1682-1761) 및 헤시키야 쵸빙(平屋敷朝敏)21)(1700-1734) 등 정치가, 이데올로그, 문인들은, 그들 중 누구라도 대륙에 대한 패권행사나 침략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중국 및 다른 책봉국가와 우의를 계속 다지면서 예(禮)를 가지고 만나고 있었습니다. 예란, 말할 필요도 없이 봉건적 모델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외국과 접촉하는 관청을 예부라 부르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사이온(蔡温)22)과 같은 사람은, 류큐가 14세기 중국과 정식 교류를 가진 것을 ‘인문유신의 기본’이라 하며 ‘흥폐존망은 운명과 관련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실은 사람에게 달렸으며 하늘에 달린 것은 아니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 중국은 대국이며 류큐는 소국이지만 도덕적으로는 대등한 관계로 규정할 수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안정이나 번영은 내면의 도덕적 고결함이 외면으로 나타난 것이라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류큐를 일ㆍ중 양속(兩屬) 체제’로 총괄하는 것만으로는 아시아 교류사를 구상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단일까요? 류큐 왕조와 도쿠가와 막부는 모두 완전한 봉건제였습니다만 전자가 초소국이라 하더라도 근세ㆍ근대의 아시아에서 수행한 역할은 무시하기 힘들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머지않아 일본은 ‘만국 공법23) 질서(万国公法秩序)’에 의해 전 국가적인 침략, 전쟁의 세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清)도, 1458년 6월 슈리죠(首里城)24)의 궁전에 걸려 있던 범종의 명문에 한 번이고 두 번이고 예를 갖추었습니다.

 

류큐국은 남해에 위치하고 경승지이다. 조선의 뛰어난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대국인 중국과 류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일본과 류큐는 입술과 이(歯)의 관계와 같이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가운데 위치하며 류큐는 궁전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이다.

 

청은 류큐를 ‘해방제미(海邦済美)’의 나라라 불렀습니다. 550년 후인 오늘날에도 현(県)민은 그 글이 그리고 있는 일ㆍ중ㆍ조 교류를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저는 물론 일ㆍ중 평화공존의 500년이 양국에 평온하며 끊임없이 관계가 발전하였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왜구나 국적 불명의 해적, 해난사고, 또한 중국의 여러 내전, 예를 들어 왜의 남해대원정(1405), 이자성의 난(1631), 성공(成功)의 타이완 점령(1661), 백련의 난(1796), 아편전쟁(1840) 및 태평천국운동(1851), 더 나아가, 시마츠(島津)번의 수탈 등을 극복하고 공존했습니다. 책봉선(오관선), 조공선, 직공선 등이 남중국해를 왕래하였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면 남중국해상의 코스로는 이른바 조어초군(釣魚礁群)(‘센카쿠’라는 이름은 1990년 구로이와 히사시(黒岩恒)가 영국명 Pinnacle Island를 번역한 것)이 산재하였으며, 이러한 섬들은 항해자들에게 아름다운 위치 확인의 길잡이였으며 바로 일ㆍ류 왕래자에게는 국제공공재로서 표식 섬이었습니다.

조금 더 들어 주십시오.

귀하의 저서에는 가끔 ‘책봉체제’라는 용어가 보입니다만, 중ㆍ조ㆍ일 및 동남아시아 제 지역 간 존재하였던 대등한 관계의 교류ㆍ무역관계가 존재하였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 경우에는 광의의 일본사의 관점에서 아시아 제 국가들과 그 인민과의 교류ㆍ연대ㆍ공존의 길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책봉체제 하에 이루어진 다양한 영위는 역사를 지양해 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책봉체제 하의 류큐 왕국의 아시아 교류사는, 아직 인민사관이라고도 해야 할 지평에 도달해 있지 않습니다. 오키나와 학자의 저서를 보아도 그것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사적인 이야기가 되어 죄송합니다만, 저는 이전부터 아시아ㆍ인터내셔날리즘이라 불러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인터내셔날리즘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 왔습니다. 제가 거기에 함의하고 있는 것은, 하나는,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제 지역ㆍ인민에게 행한 침략ㆍ전쟁의 책임을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밝히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 두 번째는 위의 광의의 일본사의 관점에서 아시아 인민과 우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코케츠 씨는 아시아ㆍ내셔날리즘이라 말하고 계십니다만, 그것은 인민연대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저는 자본수출을 기초로 한 우호는 삼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제가 의문스럽게 생각하였던 것은 귀하의 책에 파시즘 개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지적하고 계신 이시하라 칸지(石原莞爾)나 미야자키 마사요키(宮崎正義) 등은 ‘일본형 파시즘’의 역할을 수행한 주요한 인물 군으로 묶여질 필요가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파시즘을 어떻게 정리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후안무치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만약 제 신의를 받아 주셔서 답변을 주신다면 매우 감사드리겠습니다.

 

2013년 1월

사사키 타츠오(佐々木辰夫)

 

 

[답장]

아시아 제 인민과의 교류, 연대, 공존의 관점

 

코케츠 아츠시(纐纈 厚)

 

사사키 타츠오 님께

 

저의 근간인 ≪영토문제와 역사인식≫(스페이스 가야)을 정독해 주시고, 또한 매우 정성스러운 편지를 보내 주신 것에 대해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졸저에서 제가 의도한 것 이상의 점들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함께 몇 가지 질문도 해 주셨습니다. 사사키 씨의 풍부한 지식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하지만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급하게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가장 먼저 제시해 주신 질문입니다만, 전근대의 아시아사 총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관점이라는 점에 대해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즉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나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内)를 비롯한 막부 말기로부터 메이지 초기에 이르는, 이른바 일본 지식인들의 관점이 협소하였다는 것은 ‘쇄국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편에서는 일본을 둘러싼 지리적 공간에 있어서 ‘개국적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라는, 날카로운 지적이셨습니다. 사사키 씨가 함의하시는 점은 ‘쇄국상황’ 속에서 일본의 침략주의가 파생하였다고 파악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다른 측면에서의 ‘개국적 상황’의 역사 사실에 대한 재확인을 함과 동시에, 실제로 아시아 교류사가 확실히 아로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거기에 새로운 아시아 사관을 재구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문제제기라 받아들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이시며 그러한 논의도 최근 일본 역사학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국제학회인 동아시아 역사문화학회가 2009년 12월에 야마구치 대학에서 개최한 대회에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의 원생이 아메노모리 혼슈(雨森芳州)를 거론하면서 일ㆍ한/조의 교류사 연구에서 불가결한 인물이라는 것을 훌륭하게 논증한 발표를 하였습니다.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씨의 책이 발행되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적하신 대로, 아시아와의 연계ㆍ연대ㆍ통합을 위한 이론이나 행동을 제기하는 인재는 일본을 포함하여, 셀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요시다 쇼인 등의 한계성이 단지 ‘쇄국적 상황’에만 기인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요시다 등을 문제로 삼은 것은 쇄국적인 움직임 속에서 이에 대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취한 배경으로, 지리적ㆍ공간적인 제약이 아닌, 시대를 넘어서 강렬하게 천황제 내셔날리즘이 연면하게 일본인에게 내재화되었으며, 그것을 침략행위로 충동하면서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고 정치에너지로 전화시키기 위해서, 일본의 사상이나 운동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한편에서는 ‘개국적 상황’의 역사의 축적이 있었지만, 이것을 외재적 상황만으로 대상화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일본의 지식인의, 문자 그대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방편을 짜내는 것, 이것이 저의 일관된 자세입니다.

따라서 ‘개국적 상황’을 절대 경시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사사키 씨가 소개해 주신 류큐 왕국 시대의 지식인이 중국을 비롯한 대륙이나 동남아시아 제 지역과의 교류를 과감하게 전개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교훈으로 삼을 필요성은 작금의 정치상황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제 지역의 연구자와 교류를 진행하면서, 먼저 중국의 연구자들과 ‘아시아 공동체 구축을 향한 전망과 실천’(가칭)이라는 이름의 공동강의를 각 대학에 구축ㆍ전개할 기획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에서는 정부주도에 의한, 이른바 공동교과서 만들기와는 일선을 달리하는, 자유롭고 자립화된 내용을 기본으로 합니다만, 사사키 씨가 지적해 주신 지식인들의 주장이나 사상 소개를 도입부분으로 하여 최종적으로는 기존의 국가 자체의 존재방식이나 국가의 구조를 넘어선 인민자립화 전략까지 고려한 논의를 제기해 나갈 생각입니다. 당면에서는, 기존의 국가 구조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국경을 넘어선 ‘연합국가’ 등 현시점에서는 몽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대담하게 구상해 나가고자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큰 주제와 관련해서는 일개의 역사연구자에 지나지 않는 제 자신도 약간의 발표하지 않은 원고를 작성 중입니다만, 이후 각국의 연구자와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심화시켜 가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비판이나 의문을 환기하는 것이 급선무이겠지만 어찌되었든 무엇이든 간에 열려진 논의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사사키 씨가 매우 정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생각하시면서, ‘근세ㆍ근대의 아시아에서 수행한 역할은 무시하기 어렵다’고 언급하신 류큐 왕조의 재평가ㆍ재정의는 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불가결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자각하는 바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중ㆍ조ㆍ일 및 동남아시아 제 지역 간에 존재하였던 대등한 관계의 교류ㆍ무역관계가 존재하였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확실히, 지적 그대로입니다만 졸저의 취지는 근대사회 성립 이후의 아시아 지역들의 정치변동 속에 발생한 국가에 의한 전쟁이나 폭력의 항상화 가운데, 내재적으로도 외재적으로도 파생된 영토문제와, 이에 얽힌 역사인식의 부재성을 고발하는 것에 주안을 둔 결과이기도 합니다.

물론 제가 특히 일본이나 아시아 근ㆍ현대정치군사사를 전문 영역으로 하는 자라는 데서 비롯된 한계가 그 배경이 될 것이라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만, 지적해 주신 바와 같이, 부(負)의 측면에서 교훈을 끄집어내는 것 이상으로, 이른바 정상적인 평화관계 속에 배양된 역사를 교훈으로 하는 것의 중요함도 이해는 하고 있는 바입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역사 연구자 중에 지적하신 바와 같이 광의의 일본사를 아시아 제 국가의 인민과의 교류ㆍ연대ㆍ공존의 관점에서 재구축하는 것은 전술한 바대로 실제로 긴급한 과제라 인식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아시아 공동체강의’의 기획도 그러한 과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것도 반복되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조금 주제에서 벗어나지만, 작금의 영토문제가 파생한 원인이나 배경, 그 해결을 위한 방도를 다수의 논자들이 쓰거나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토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 당분간은 두 단계를 밟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1단계로서 먼저 영토문제가 파생된 원인이나 배경을 논할 것, 2단계로서 그 이후 향후 아시아 제 국가들의 교류ㆍ연대ㆍ공존을 제언하면서 하나의 역사 교훈으로서의 역사사실을 발전적인 교훈으로 기억하고 학습의 대상으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제1단계로서 현재 저는 마고사마 우케루(孫崎享) 등이 편저로 있는 논집에 한 편의 논문을 기고하였습니다만, 그 제목은 “일한영토문제와 전후 아시아 질서 ― 두 가지 시스템의 병용과 미결의 역사문제”(≪끝나지 않는 점령≫(법령문화사, 2013년 4월 간행))입니다.

여기에서 결론으로 이른바 영토문제가 미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이 펼쳐 놓은 전후 질서로서의 얄타 시스템이 형태를 바꾸어 존속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미국이 아시아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ㆍ중, 일ㆍ한, 일ㆍ조 사이의 알력이나 분쟁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자의적으로 심어 놓은 결과로서 파생되고 있다는 것을 논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전후 아시아 질서의 기본으로 그 얄타 시스템과 냉전 시스템을 병용하면서 이러한 제 국가들의 교류ㆍ연대ㆍ공존을 향한 길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말하는 두 가지 시스템이 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예전의 미소 냉전 체제가 쏘련의 붕괴로 종언을 맞이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미쏘협조노선을 원칙으로 하는 얄타 시스템도 원래라면 해소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원래 얄타 시스템이란 유럽의 독일, 아시아의 일본의 파시즘 부활을 저지하고 전후에도 연합 국가들이 국제사회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문자 그대로 세계질서의 대명사로서 유지될 전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한편에서 구 쏘련이 러시아로 바뀌었으며 또한 정치군사대국으로의 길을 질주하는 중국의 대두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세계정세에 있어서도, 전후 국제정치를 리더해 온 것은 미, 영, 쏘, 중국이며 현재는 미, 러, 중입니다. 이들 삼국은 현재에 있어서도 매우 적당한 형태로 일정한 협조노선을 걷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 증거로 러시아는 얄타 시스템에서 예전의 일본 영토였던 에토로후(択捉), 구나시리(国後), 하보마이(歯舞), 시코탄(色丹)의, 이른바 ‘북방사도’를 실효지배하고 미국도 이 시스템을 배경으로 오키나와 기지화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정확히 말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오해를 낳을 가능성이 큽니다만, 그 의미로는 아직까지 얄타 시스템은 살아 있다고 말해도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저는 현재에 계속되는 미국의 매우 부당한 대일정책, 현대판 ‘국체’라고도 말해야 하는 안보체제를 지탱하는 미국 측의 대일 전략의 심층에 있는 얄타 시스템에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덧붙여 그 시스템에 편승해 온 전후 일본 보수체제ㆍ보수구조를 일관되게 문제시해 오고 있습니다.

크게 논점이 벗어나고 말았습니다만, 제2단계로서 논의를 진행해야 할 것은, 그러한 미국의 패권주의를 청산하면서 교류ㆍ연대ㆍ공존의 길을 찾기 위한 검증 재료로서, 사사키 씨가 지적하고 계신 아시아 교류사의 철저한 분석과 교훈을 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사사키 씨의 작업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아직 두 가지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첫째 사사키 씨가 ‘아시아ㆍ인터내셔날리즘’이라는 용어로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 제 지역, 인민에게 행한 침략, 전쟁의 책임을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서 밝히고, 그들과 연대하는 것. 두 번째는 상기의 광의의 일본사의 관점에서 아시아 인민과 우호를 맺는 것’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계십니다. 이에 대해 저는 졸저 중 ‘아시아ㆍ내셔날리즘(Asian National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것이 인민연대로 연결되는 것인가라는 지적. 두 번째로 졸저의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입니다. 급한 대로 요약하여 답변해 올립니다.

첫 번째 점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전제가 되는 내셔날리즘의 정의에 대한 인식의 괴리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즉, 내셔날리즘은 매우 애매한 개념입니다만 기본적으로는 다양한 문화, 역사, 언어 등을 가진 민족이나 인종, 집단을 ‘국민’(nation)이라 강제적으로 카테고리화하고 인공적인 ‘국가’를 창출하는 것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효율적 운용을 의도한 것이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여기에서 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한 정의를 전제로 한다면 내셔날리즘은 ‘국가주의’라는 번역이 타당할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말하는 내셔날리즘은 어느 쪽인가 하면 패로키아리즘(parochialism: 애향주의)에 가까운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전자의 정의에서는 내셔날리즘은 배외주의적 색채를 띠는 결과가 되며 역사적 사실로서도 내셔날리즘을 강조하는 것으로 국내의 불평ㆍ불만을 억제하고 그것을 외부로 향하게 하여 방사하는 것으로 국내에 내재하는 모순의 심각화를 막고 체제변혁의 에너지를 말살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내셔날리즘은 국가권력에 억제, 농락당하는 것이 아닌, 자립된 방법을 짜내어 가는 데 있어서 의거처가 된, 하나의 사상으로도 파악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내셔날리즘은 예를 들어 절대 배외주의적 색채를 띠지 않는 ‘민족주의’로서 번역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민족이나 인민이 스스로를 주체화하고 기존의 나쁜 권력에서 해방되어 자립되어 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역사성, 언어성, 신체성으로의 복귀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0세기 초두의 ‘민족자결주의’도, 또한 현대의 ‘중동의 봄’이라는 명칭으로도 파악할 수 있는 이슬람 세계의 변동도, 스스로의 내셔날리티를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터내셔날리즘으로 지향해 가는 불가결한 전제로서 여기에서 말하는 의미의 내셔날리즘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른바 본래의 의미로의 내셔날리즘으로의 복귀가 요구되고 있으며, 그 내셔날리즘을 일국단위에서 다국 간으로 팽창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내셔날리즘을 인터내셔날리즘으로 심화시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꽤 멀리 돌아온 느낌을 드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내셔날리즘을 지양해 가는 과정에서야 말로, 오히려 인민연대를 낳을 방책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말하는 아시아ㆍ내셔날리즘은 일국으로 왜소화되지 않는 내셔날리즘을 아시아 지역으로 확장하고 그 집적으로서 인터내셔날리즘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전망을 강하게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질적인 차이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아시아로 한정해도 영토 문제나 역사인식의 괴리로 인해 내셔날리즘의 충돌이 현재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터내셔날리즘을 구상하기 이전의 과제로서, 이러한 내셔날리즘과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작년 1월 한국의 대학에서 개최된 학회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그때의 주제는 이러한 내셔날리즘을 상호 이어 나갈 방법으로 트랜스내셔날리즘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 왔습니다. 저는 졸저의 193-200페이지에서 ‘트랜스내셔날’(Transnational)이라는 용어를 제기하고 이것을 ‘국경을 넘은 사회관계의 확장’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내셔날리즘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닌, 내셔날리즘을 넘어선 사상으로서 이 ‘트랜스내셔날’의 개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특질입니다만 역사성, 언어성, 신체성을 평준화하고 이러한 것들을 사실상 말살하여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동질성을 요구하는 글로벌리제이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트랜스내셔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래의 인터내셔날리즘은 이러한 논의를 충분히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글로벌리제이션 등의 용어가 세계를 마치 통일적인 가치관이나 사상을 하나로 한다는 사상이라는 환상이 퍼지게 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논의는 이후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졸저에서 ‘파시즘’이라는 개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으로 옮겨 가겠습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다소 무리한 설명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저는 대학시절에는 독일 파시즘(=나찌즘)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왜 독일 국민이 그렇게 열광적으로 파시즘에 이끌렸던 것일까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마르쿠제나 프로이트, 칼 포퍼 등, 이른바 대체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분류되는 사상가들의 담론에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사상으로서의 파시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한편, 점차로 사상으로서의 파시즘 이상으로, 시스템으로서의 파시즘으로 관심의 대상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즉 파시즘은 자주 지적되는 바처럼, 사상에서 운동으로, 그리고 체제(시스템)로 이행하기 마련인데, 사상과 운동의 수준에서 파시즘이라는 용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체제(시스템)로서의 파시즘은 엄밀함을 결여하고 마는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즉 파시즘이라는 다의적인 해석을 허용하고 마는 용어의 한계성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전 일본에서도 논쟁이 되었지만, 파시즘의 존재성을 묻는 논의 수준이 아닌, 파시즘이 일본이며, 독일, 이딸리아며, 더 나아가서는 미국이나 영국 등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나타난 체제이며, 권력을 규정하는 실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 파시즘의 용어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제 30년도 더 전에 쓴 저의 ‘데뷔작’인 ≪총력전 체제연구≫(삼일서방, 1981년)에서 파시즘의 용어가 아닌 ‘총력전체제’라는 용어로 무엇보다 침략국가 일본의 구조적 특징과 정책 전개의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이 책은 ≪신판 총력전 체제연구≫(사회평론사, 2010년 간행)로 복간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 보론장 “총력전체제 연구에서 무엇이 논의되어 왔는가”를 새롭게 가필하여, 왜 파시즘이 아닌 ‘총력전’이라는 용어로 시스템으로서의 파시즘을 논하였는가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저는 무엇보다 일본, 독일, 이딸리아뿐 아니라 시스템으로서의 파시즘(총력전체제)은 미국에서도 영국에서 존재하였다는 것, 따라서 총력전체제의 구축에 의해 의사(擬似) 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만연하였다는 것, 이러한 점에서 데모크라시도 파시즘도 절대 대항개념이 아닌 파시즘과 데모크라시가 일체가 되어 인민억압에 동원되었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 권력이 스스로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인민을 억압하는 새로운 수법으로서 실제로는 현재적인 세계에서도 총력전 체제가 기동하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바입니다.

제 책 중 ≪근대일본정군(政軍)관계의 연구≫(이와나미(岩波) 서점, 2005년 간행)라는 비교적 두터운 저작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사회통합의 주체로서의 정당(정치)과 군부(군사)의 대립의 실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데모크라시와 파시즘을 결합시키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확대하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앞서의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도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데모크라시와 파시즘이라는 이항대립 등으로 파악하는 것은 명백하게 역사의 실태를 잘못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 11월 베이징의 대학에서 보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대한 파악 방식에 대한 토론 중, 중국의 연구자가 변함없이 이항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정면으로 반론을 행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기존의 데모크라시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의 이라크 전쟁 시기에 부시 대통령(당시)이 ‘정의의 전쟁’(justice war)이라 연호하였던 것은 문자 그대로 데모크라시와 파시즘을 일체화한 것에 대한 자기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상당히 주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파시즘 개념으로는 역사나 현상의 실태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현실 파악을 위한 리얼리티를 소실시키고 마는 것은 아닐까라는 문제제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25)나 미야자키 마사요시(宮崎正義)26) 등을 ‘일본형 파시즘’의 범주에 포괄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도 해 주셨습니다. 이상의 설명을 한데 엮어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특히 이시하라는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켰으며 ‘만주국’을 건설하였으므로 일본국내의 총력전 국가화에 선구라 불러야 할 ‘만주국’을 총력전 국가의 사례로서 구상한 인물이라 파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제가 반복하여 주장해 온 권력구조의 다중성을 특징으로 하는 다원적 연합국가로서의 천황제 국가 일본의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총력전 체제의 구축이 전망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이시하라 간지를 종래와 같이 ‘일본형 파시즘’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파악만이 아닌, 그러한 이시하라가 구상한 국가 구상에 대한 분석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일원적 혹은 통일적 권력 주체의 창출, 기능주의적인 도시공간의 설정, 그 상징으로서의 수도 ‘신경’(현재의 장춘)의 건설, 군사권력과 경제권력의 융합, 그리고 ‘왕도락토’의 슬로건에 나타난 의사 민주주의, 의사 평화주의의 주장, 이러한 것들은 문자 그대로 총력전 사상의 전형인 것입니다.

저는 전후 일본사회도 전후 판 총력전 국가로서 파악하고 있으며, 그러한 것은 제 일련의 저작이나 논문에서 반복하여 제기해 왔으며, 이후에도 그러한 논의를 심화시켜 나갈 문제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근대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갈 때 가장 체계적인 총력전 사상을 전개하고 일본 정치의 총력전체제화의 선구적인 인물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다나카 기이치 ― 총력전 국가의 선구자≫(후요(芙蓉) 서방 출판, 2007년 간행)이라 이름 붙인 책을 썼습니다만, 부제에 나와 있는 대로, ‘총력전 국가 일본의 실천자’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나카 기이치나 이시하라 간지 등을 정치사적으로 위치 지을 때 파시즘이나 파시스트라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너무나 불충분하며 그들의 국가 구상이나 권력론, 또는 국가와 인간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파악했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보다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현재 겨우 총력전 체제에 대한 관심이 연구자 사이에 퍼져 가고 있습니다만, 저도 기존의 데모크라시에 내재하는 파시즘성을 총력전 사상의 개념에서 추출하고 비판하는 관점을 내세워 왔으므로, 30년을 거쳐 겨우 여기까지 왔구나라고 감개무량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형 파시즘’이라 말하는, 일종의 유형화 작업에는 현재의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상으로 현대의 데모크라시에 내재하는 파시즘적 요소로서의 ‘동원’ 기능에 착목함으로써 데모크라시의 재정의와 비판적 관점의 확립이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충분히 자각하지 않고 있는 동안 데모크라시와 파시즘이 일종의 “융합”하고 있는 현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합니다.

본래라면, 시간을 들여 보다 정성껏 답변을 드려야 했는데, 결말이 없는 내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2013년 2월

코케츠 아츠시(纐纈 厚)

 

 

추신

스페이스 가야 편집부에서 사사키 씨가 쓰신 ≪오키나와 전쟁 ― 또 하나의 시각≫(스페이스 가야)의 저서를 증정해 주셨습니다.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에게도 공저로 ≪오키나와 전쟁 ― 국토가 전장이 되었을 때≫(아오키(青木) 서점, 1987년 간행)과 ≪오키나와 전쟁과 천황제≫(릿푸(立風) 서방, 1987년 간행)이 있으며, 1985년에 ‘오키나와 전을 생각하는 모임(도쿄)’를 설립하는 등 오키나와 전쟁에는 오래전부터 관심을 계속 가져왔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스스로의 역사논집인 ≪침략전쟁 ― 역사사실과 역사인식≫(츠쿠바(筑摩) 서방, 신서, 1999년 간행)에서, “제5장 천황제 군대의 특질과 전쟁의 실태  2. 오키나와 전과 비밀전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무엇을 하였는가” 중, 사사키 씨와 거의 동일한 관점에서 천황제 군대의 특질에 대해 오키나와 전의 실태를 쫓으면서 밝힌 바 있습니다.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들과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묶여 ‘일본인’이 될 것을 강요받았던 오키나와 사람들의 괴리 속에서 소개해 주신 치비치리가마와 심크가마27)의 차이가 탄생된 역사사실은 천황제를 사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검증소재가 된다며 저는 일관되어 생각해 왔습니다. 동 책은 현재에는 절판되었기 때문에 작년 사회평론사에서 나온 ≪침략전쟁과 총력전≫이라는 이름의 논집에 수록되었습니다. 근일 중 그 책을 증정해 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읽어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1) 요시다 쇼인(1830-1859)은 일본의 무사, 사상가, 교육자, 병학자, 지역연구가로서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2) 하시모토 사나이(1834-1859)는 일본 막부 말기의 재야 활동가(志士), 사상가로서 막번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구 선진기술의 도입이나 일본과 러시아의 제휴 필요성을 주장하는 개국론을 전개하였다.

 

3) 다카야마 쵸규(1871-1902)는 메이지 시대의 문예평론가, 사상가로, 메이지 30년대(19세기 말-20세기 초)의 언론을 선도하였다. 일본주의, 로만주의, 니체주의 등 주장의 변화가 심하였으며,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약자의 사상이라 하여 부정적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4) 도쿠토미 소호(1863-1957)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사상가, 역사, 평론가. 정치가로서도 활동. 전전(戦前), 전중(戦中), 전후(戦後) 시대에 걸쳐 다양한 활동으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침. 19세기 말에는 부국강병, 징병제, 국회개설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일청 전쟁 시에는 조선출병론을 제창하는 등, ‘수축적 일본’이 ‘팽창적 일본’으로 전환하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국민의 친구≫지에서 주장하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밖으로는 ‘제국주의’, 안으로는 ‘평민주의’ 양자를 통합하는 ‘황실중심주의’를 제창하였으며, 만주사변 이후에는 군부와 연계하여 ‘황실중심주의사상’을 더욱 전개하였다. 전쟁 후 포츠담 선언의 무조건 항복 수락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근세일본국민사≫를 완성하였다.

 

5) 현재의 오키나와 현 일대를 일컫는 옛 지명으로, 류큐 왕국에서 유래하였다. 1609년 시마즈 씨의 침입을 받은 후 그 지배 아래 놓였으며 1879년의 일본 침략을 계기로 450년간의 왕조가 오키나와 현이 되었다.

 

6) 아메노모리 혼슈(1668-1755)는 에도시대 중기의 유학자로서 중국어, 조선어에 능통하여 이씨 왕조 조선과의 우호적 교류와 관련된 실무에도 종사하였다.

 

7) 에도 시대에 서양 배를 부르던 말.

 

8) 아이누는 일본과 러시아에 걸쳐 거주한 북방선주민족으로 현재의 홋카이도, 쿠릴열도에 남겨진 지명의 다수는 아이누어에서 유래하고 있다.

 

9) 류큐처분은, 1872년부터 1879년에 걸쳐, 예전 류큐 왕국에 위임했던 것을 폐하고 일본 직속의 행정기구인 현(県)을 설치한 처분을 의미한다.

* ≪역대보안(歴代宝案)≫. 류큐 정부의 외교문서 및 문안의 집성. 1424년(쇼 하시(尚巴志) 3년, 영락(永楽) 22년)부터 1867년(쇼 타이(尚泰) 20년, 동치(同治) 6년)까지 440년에 걸친 중국을 중심으로 하고 조선ㆍ남방 제국과의 왕복 문서를 수록. 원래 3집 262권, 별집 3권으로 이루어진 한문기록. 제1집은 사츠마(薩摩) 침략 이전의 대무역시대를 반영, 남방제국과의 왕복문서 편찬. 1424년부터 1696년까지 49권(현재 41권), 제2집은 데이 준소쿠(程順則)등이 감수에 참여하여 1697년부터 1728년까지 집대성, 이어서 1858년까지의 것을 추가하여 200권(현재 187권)으로 하였다. 제3집은 1858년부터 67년까지 13권(현재 13권). 대부분이 편년체로 되어 있으므로 류큐 왕국과 그 외교관계의 전모가 한문으로 알 수 있다. 히라가나 일본어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일본(사츠마)과의 교류는 별도의 문서에 따른다. (≪사회평론≫ 편집자 주)

10) 안남이란 중국 측이 베트남을 불렀던 옛 명칭을 말한다.

 

11) 샴이란 타이의 옛 명칭이다.

 

12) 자와는 영어로는 Java이며 인도네시아를 구성하는 섬 중 하나를 말한다.

 

13) 팔레방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남쪽에 있는 도시를 말한다.

 

14) 말라카는 말레이시아의 항구도시를 말한다.

 

15) 수마트라는 인도네시아의 섬을 말한다.

 

16) 순다는 자와의 서부 지역을 말한다.

 

17) 바타니는 말레이 반도 북부를 말한다.

* ‘류큐 정벌’ 되기 이전의 류큐. 아와후유(伊波普猷)가 이름 붙였다. (서간의 필자인 사사키 타츠오의 원주)

 

18) 쇼 쇼켄은 류큐 왕국의 정치가로 섭정직을 7년간 역임하면서 왕국의 발본적인 개혁책을 제시하였다.

 

19) 헤시키야 쵸빙은 근세 류큐의 문인으로 이야기 작가이다.

 

20) 사이온(1682-1762)은 류큐 왕국의 정치가로서 하천공사나 산림보호 등 류큐의 농업 발전에 공헌했다.

 

21) 만국 공법은 본래 국제법학자 헨리 화이튼의 대표적 저작인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가 한어로 번역되었을 때 사용된 제목이다. 그러나 정작 번역된 당시 청보다도 일본, 특히 메이지 유신 초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기존의 중국 중심의 ‘예(禮)’를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에서, ‘조약’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22) 현 오키나와의 성으로 류큐 왕국 당시 국제 교류의 거점이었다.

 

23) 이시하라 간지(1889-1949)는 육군군인으로 만주사건을 성공시킨 주모자. 이후 내부 권력 싸움 등으로 예비역으로 쫓겨났으며 종전 시에는 병으로 전범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24) 미야자키 마사요시(1893-1954)는 이시하라 간지의 브레인으로 활약하였으며, 만주국과 일본에서 관료주도의 통제경제체제의 확립을 지향하였다.

 

25) 치비치리가마(チビチリガマ) 사건과, 심크가마(シムクガマ) 사건은 오키나와 인이 집단적으로 굴에 피신하였을 때 발생한 사건이다. 치비치리 가마 사건은, 1945년 4월 1일 치비치리 가마(굴)에 숨어 있던 오키나와 피난민들이 미군들에게 발각되어 집단 자결한 사건이다. 미군은 굴에서 나오기만 하면 안전하게 보호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피난민은 그 말을 신용하지 않고 일부는 죽창으로 저항하다가 총에 맞아 숨졌으며, 나머지는 집단 자결하였다. 같은 날 심크 가마에 피신하였던 피난민들은, 일부는 굴에 떨어진 폭탄에 숨졌다. 그 이후 피난처가 미군에 발견되었으나, 나머지 생존자들은 미군의 명령에 따라 항복하여 목숨을 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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