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인도 공산당의 좌경 노선과 혁명의 실패 ― 초기 인도 공산당의 식민지 문제에 대한 논쟁

 

 

이병진 ∣ 노사과연 회원, 양심수

 

 

[편집자 주] 이 글은 이병진 동지가 감옥에서 쓴 소중한 원고이다. 이병진 동지의 요청대로 초고를 약간 수정하고, 가필했음을 밝힌다. 제한된 자료로 작성된 글이기에 보다 상세하게 근거를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으며 일부에서는 다소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다. 이병진 동지가 자유의 몸이 된다면 불충분한 내용을 상세하게 채우고, 남아 있는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을 완성하면서 보낸 이병진 동지의 편지를 아래에 발췌한다. 이 글의 각주 중 [편집자 주]로 표시된 것은 최상철에 의한 것이다. ― 최상철(노사과연 운영위원)

 

 

그리운 최상철 동지에게

 

약속한 날짜에 글을 보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 인도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사실, 지식(특히 간디와 보세) 등등 수정하고 바꾸다 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인도 공산당에 대해서 명료한 관점이 생겼어요. 앞으로 인도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상철 동지께 부탁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면밀한 편집과 수정을 (문맥이 맞지 않는 부분에 대한 수정까지 포함해서) 부탁드려요. 제가 요즘 많이 지쳐서 집중력이 떨어졌어요. 한 번 더 수정해서 다시 쓰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나요. 시간도 더 많이 지체될 것 같구요. 무례함을 무릅쓰고 완벽한 오류와 교정을 못한 채 원고를 보냅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세요. (하략)

 

 

1. 시작글

 

인도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20세기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와 세계정세 변화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인도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세력과 힘든 투쟁을 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었고 민족해방 투쟁의 최선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와 같은 대중들의 지지와 신뢰를 토대로 중국 공산당은 인민 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반면에 인도에서는 노동자 총파업과 농민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고, 1947―1950년 사이에 지금의 안드라 쁘라데시(Andhra Pradesh) 주(State)의 뗄란가나(Telangana) 지역에서는 무려 3천 개의 마을에서 3백만 명의 농민들이 무장 봉기를 일으켰는데도 인도 공산당은 혁명의 기회를 놓치고 내부의 노선 투쟁으로 분열되었다. 인도 초대 수상인 네루가 비동맹외교 전략으로 쏘비에트공화국연방과 가깝게 지내자 인도 공산당 내부 노선 갈등이 더 격화되어 1964년에는 인도 공산당이 분열하여 인도 맑스주의 공산당이 만들어졌다. 또한 인도 맑스주의 공산당 내부는 맑스-레닌주의와 마오주의 분파로 나뉘어졌다.1)

200년간 식민 지배를 받은 인도는 영국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대중들의 광범위한 봉기와 혁명적 열기로 고조되었다. 그러나 인도 공산당은 그런 대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조직화하지 못함으로써 부르주아들에게 패배하였다.

이 글은 왜 인도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던 정세를 활용하지 못하여 혁명에 실패했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인도 공산당의 패배는 단지 인도 공산당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좌익공산주의의 거짓된 혁명적 구호와 선전들이 오늘날까지 계속 확대재생산되어 대중들의 좌익 혐오와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인도 공산당의 좌경 노선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은 그런 편향을 바로잡아 줄 것이며 우리에게도 실천의 이론적 근거가 될 것이다.2)

인도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분파적 경향은 식민지 문제에서 인도 부르주아를 어떻게 볼 것인가와 관련해서 아주 뚜렷이 나타난다. 1920년 모스끄바에서 열린 꼬민떼른 제2차 대회에서 레닌과 로이(M. N. Roy)의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레닌은 인도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좌경노선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고 반제국주의 운동에 앞장서는 인도 부르주아들을 지지하고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조언했다. 그러나 인도 공산주의자3)들은 좌편향의 오류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했고 인도 인민들의 반영(反英) 투쟁에 적극 동참하지 못함으로써 부르주아들에게 정치적 지도력을 빼앗겼고, 대중들로부터 고립되는 심각한 전략적 실패에 빠졌다.

인도 공산당의 노선 분열과 갈등이 커지자 1950년 인도 공산당 대표단은 모스끄바에 가서 쓰딸린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가까스로 인도 공산당 강령(Party programme)과 전술(Tactical line)을 만들어 좌경노선의 오류를 바로잡고 인도 공산당의 단결과 전진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런데 1956년 쏘련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쓰딸린에 대한 예기치 않은 탄핵이 있었고 1962년 인도와 중국의 국경분쟁 그리고 중국과 쏘련의 이념 논쟁이 격화되면서 인도 공산당 역시 크게 흔들리면서 1964년에 다시 분열되었다. 이처럼 인도 공산당은 창당 초기부터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분파적 경향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인도 대중들을 분열시켜 부르주아와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그런 오류를 깨달아 쏘련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좌경 노선을 극복하려 했지만, 쏘련의 변절로 오히려 더 큰 혼란에 빠지면서 인도 혁명의 동력을 점점 상실하였다. 인도 공산당의 사례는 인도 대중들의 동의와 지지 없는 좌경적 혁명노선을 고수하는 모험주의가 오히려 혁명을 후퇴시키고 결과적으로 반혁명 노선에 복무하게 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언뜻 보기에는 가장 혁명적이고 전투적인 노선이 사실은 가장 반혁명적이고 혁명을 후퇴시키는 노선임을 인도 공산당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은 이 같은 관점에서 꼬민떼른 2차 대회에서 레닌과 로이의 논쟁을 살펴보고 실제로 인도 공산당의 좌편향과 오류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분석할 것이다.

 

 

2. 인도 좌익들의 식민지 문제에 대한 이해

 

인도 좌익들은 미성숙한 계급의식에 사로잡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인도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인도 좌익들의 정치적 미숙함은 로이의 사상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인도 출신 멕시꼬 공산당 대표로 1920년 꼬민떼른 2차 대회에 참석했던 그는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 초안을 제출했다. 로이의 테제 원안에는 좌익분파적 경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레닌은 로이의 원안을 직접 수정하였다. 꼬민떼른 2차 대회에서는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로이의 원안을 거부하고 레닌이 수정 제안한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보완 테제를 통과시켰다.

 

(1) 레닌의 식민지 문제에 관한 인식

 

레닌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임을 간파하고 제국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중요한 임무로 보았다. 그래서 레닌은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옹호하였다. 레닌은 부르주아 계급의 목표와 노동자 계급의 목표는 다르지만,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민족의 자주권을 획득하기 위해 벌이는 투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노동자들에게서 중요한 것은 두 조류의 원칙들을 구별하는 것이다. 피억압민족의 부르주아지가 억압민족과 싸우는 한에서, 우리는 항상 모든 경우에 다른 누구보다도 더 단호하게 그들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억압에 대해 가장 용감하고 가장 일관된 반대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억압민족의 부르주아지가 그 자신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한, 우리는 그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억압민족의 특권과 폭력에 맞서 싸우며, 피억압민족이 특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지 않는다.4)

 

또한 레닌은 계속해서 이야기 한다.

 

어떠한 피억압민족의 부르주아 민족주의도, 억압에 대항하는 일반민주주의적 내용을 가졌는데,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바로 이 내용이다. 동시에 우리는 그것을 민족적 배타성으로 흐르는 경향과 엄격하게 구별한다.5)

 

이처럼 레닌은 식민지 민족의 부르주아들이 제국주의자들과 맞서 싸운다면 그들을 지지하고 그들과 전술적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레닌은 식민지 민족부르주아지의 이중성, 즉 제국주의 세력과 협조하면서 그들과 투쟁하는 특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런 인식을 토대로, 레닌은 꼬민떼른 2차 대회에서 식민지 민족부르주아지와 단결해야 한다고 했다.

 

꼬민떼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혁명운동을 지지할 의무를 지고 있지만 그것은 모든 후진국에서 장래의 프롤레타리아당―명칭상으로만이 아니라 진정한 공산당―의 분자들이 결집되어 그들 독자의 임무 즉 자기 민족 내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과 투쟁해야 하는 임무를 자각할 수 있도록 교육되어야 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꼬민떼른은 식민지나 식민지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이나 동맹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6)

레닌은 식민지 국가와 자본주의가 저발전된 국가에서 노동자 계급이 단독으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노동자 계급이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노동자 계급운동의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일시적으로 식민지 부르주아 민족운동에 결합해서 반제국주의 전선을 형성해야 한다고 했다. 레닌의 이런 식민지 문제에 대한 인식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부르주아들과 자본주의가 덜 발전된 낙후된 식민지 민족 부르주아들 간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하고, 식민지 민족 부르주아에게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이었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인식과는 크게 다르다.

레닌은 로이의 식민지 문제 초안의 오류를 바로잡아 주면서, 꼬민떼른이 인도 공산주의의 발전에 조력하기를 당부하고 인도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대중 투쟁을 조직하라는 요청을 한다.

 

공산주의 국제주의는 최고의 인도 공산주의 운동의 건설과 발전을 도와야 한다. 그리고 인도 공산당은 모든 역량으로 최후의 계급 이익을 위해서 광범위한 대중 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헌신해야 한다.7)

 

1922년에 열린 꼬민떼른 제4차 대회에서 로이는 또다시 자신의 좌익 노선을 관철시키려 했으나 대회는 로이의 노선을 반대하였다. 또 1924년에 열린 제5차 대회에서도 좌익 혁명노선을 계속 주장하였지만 역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식민지 부르주아 민족자주 운동과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끈 꼬민떼른의 공산주의 국제주의의 노선은 식민지 독립운동을 고무시켰다. 이 과정에서 신생 쏘비에트공화국연방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쏘련에 대한 고립ㆍ와해 기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레닌의 이와 같은 민족자결 노선은 좌경혁명노선의 모험주의 오류를 바로잡음으로써 쏘련과 식민지 민족국가들의 실질적인 혁명 역량 강화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2) 로이의 식민지 문제에 대한 인식

 

멕시꼬에서 주로 활동하던 로이는 꼬민떼른에 참가하면서 유명해졌고, 그 이후에 인도 공산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로이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레닌과 식민지 문제에 대해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로이는 레닌의 테제와 다른 자신의 테제안을 제출하였다.8) 로이는 꼬민떼른 2차 대회에 제출된 레닌의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는 노동자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은 동맹할 수 없다는 기계식 사고에 갇혀서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이중적 속성을 깊이 알지 못하고 예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로이는 영국지배자들의 탄압을 피해 주로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도 내부의 민족독립운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주관적인 좌익주의 관념으로 식민지 부르주아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였고 인도 대중들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관심도 없고 지지하지 않는다며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을 깎아내렸다.9) 로이는 왜 인도 대중들이 간디의 ‘시민불복종운동’, ‘비폭력운동’에 지지를 보내고 동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런 로이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은 그가 꼬민떼른에 제출했던 초안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10) 식민지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가 자유로운 민족국가 수립을 지향하고 있음에 비해, 노동자와 빈농대중은 대부분 무의식적일지라도 이러한 야만적 착취를 가능케 하는 제도에 대해 계속 저항하고 있다. 그러므로 식민지에는 두 세력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 두 세력은 함께 발전해 갈 수는 없다. 식민지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민족적 정신의 증대를 돕는 것과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이것은 반드시 대중의 계급의식의 각성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공산당을 매개로 하여 혁명적인 대중행동을 촉발시키고 이를 지지하면 진정한 혁명세력이 행동에 끌려 들어올 것이다. 그 세력은 외국 제국주의를 타도할 뿐만 아니라 점차 쏘비에트 권력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이로써 타도된 외국 자본주의 대신 현지에서 자본주의가 대두해 인민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계속하는 것을 저지할 수 있다.10)

 

프롤레타리아 공산당과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이 무조건적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로이의 주장은 반영 투쟁의 힘을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영국제국주의를 돕는 것이었다. 이처럼 로이가 초월적 혁명주의의 오류에 빠진 것은 그의 식민지 경제 발전론 사상 때문이었다. 로이는 제국주의 지배 아래에서도 정상적인 선진자본주의로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의 철도 건설 등에 대한 영국의 자본투자가 2000퍼센트나 증가하고 인도의 산업생산량이 15퍼센트씩 성장하는 것을 근거로 인도에서 자본주의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노동계급의 혁명역량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착각하였다.11) 인도가 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했다는 주관적 평가를 토대로 로이는 즉각적인 사회경제 혁명을 주장한다.

 

식민지에서의 혁명운동은 본질적으로 경제투쟁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민족주의 운동은 소부르주아 계급에 한정되어 있으며 대중의 지향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대중의 적극적인 지지가 없으면 식민지의 민족해방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라에서 특히 인도에서 대중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지도자와 행동을 함께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운동과는 독립적으로 전진하고 있다.12)

 

그러나 인도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으며 그 상당수는 소작지 경영마저 빼앗겨 생산과정에서 축출당하고 굶주리고 있었다. 또 여성과 아동의 초과착취와, 다양한 언어와 높은 문맹률, 종교적 카스트적인 편견이 노동자계급 의식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제국주의자들의 극심한 탄압으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심한 제약이 따르고 있던 것이 인도의 현실이었다. 영국 식민지 정부는 꼬민떼른에 참여한 후 인도로 돌아온 공산주의자들을 검거하여 투옥시켰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10월 혁명 사상의 유입을 차단하려고 인도 내의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했다. 이후 1925년에 깐뿌르 공모사건이 있었고, 1929년 3월부터 1935년까지 대규모적으로 공산주의자를 탄압했던 미루뜨(Meerut) 공모사건이 있었다. 이런 현실적 배경을 고려해 볼 때 인도 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을 지도할 확고한 전위 정당으로 존재하기가 어려웠다. 로이는 인도의 그런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좌익 모험주의 노선으로 인도의 혁명가들을 혼란과 분열에 빠뜨렸다.13) 그런데도 로이는 자신의 오류를 끝까지 수정하지 않았고 그의 좌편향 노선은 이후 인도 공산주의 운동의 발전을 혼란에 빠뜨렸다.

 

 

3. 인도 공산당의 좌경화와 정치적 헤게모니의 약화

 

영국 제국주의의 반공산주의 정책으로 인도의 공산주의자들은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도의 혁명가들은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서 좌파그룹을 형성하여 커다란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였다. 이들은 전 인도 노동조합회의(All India Trade Union Congress)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파업과 시위 그리고 농민들의 봉기는 영국제국주의에 대한 독립투쟁에서 중요한 투쟁 동력이었다.

그러나 인도 공산당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던 정세변화와 혁명가들에 대한 대중들의 우호적 지지기반을 활용하지 못하고 반제국주의 투쟁전선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데 실패한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반파시즘 투쟁에서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가 오락가락하면서 인도 공산당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부르주아에게 정치적 헤게모니를 빼앗기게 된다.

여기서는 1942년 인도철수운동(Quit India Movement)과 독립직후의 대규모 농민투쟁이었던 뗄란가나(Telangana) 투쟁, 그리고 1949년 철도 총파업 투쟁을 중심으로 인도 공산당의 좌편향 오류를 분석한다.

 

(1) 꼬민떼른 제6차 대회의 식민지 문제 인식의 변화

 

레닌은 민주주의와 피억압계급의 해방을 위한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식민지 국가와 종속국가들의 민족해방 투쟁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노동계급이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해방을 이끄는 부르주아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1928년 꼬민떼른 제6차 대회에서 식민지와 종속국가 부르주아에 대한 태도에 다소 종파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다.14) 식민지 부르주아에 대한 태도 변화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4ㆍ12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 공산당을 탄압했던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다. 장제스의 반혁명 쿠데타와 왕징웨이의 배신으로 혁명 역량에 지대한 타격을 받은 이후 민족부르주아와 연대해서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보고 프롤레타리아의 주도로 식민지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시각이 형성되었다. 대회의 테제와 주요 연사들의 추가 논평에서 일정 정도 반제민족해방 운동의 현실에 맞지 않는 시각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당시 제국주의가 갖고 있던 군사적 힘과 식민지 국가들에서 거세게 일어나고 있던 반제국주의 투쟁의 객관적 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오류였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와 맑스주의당이 일찍이 반제투쟁 단계에서, 즉 다른 계급 특히 민족부르주아가 제국주의와 타협함으로써 불신받게 되는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들의 혁명적 잠재성이 아직 고갈되지 않았을 때 헤게모니를 의미하였다. 이것은 반제투쟁의 현실과 식민지사회의 구조, 동양의 계급세력의 상호 관계를 무시한 잘못된 방침이었다. 현실적인 조건 속에서 민족혁명의 초기국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가 불가피하고 필수적이라고 믿을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전혀 없었다.15)

 

한편으로 일부 인도 대표들은 보다 좌익적 입장에서 6차 대회의 테제를 비판하였다.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혁명운동에 관한 공동 보고자였던 시칸테르 수르는 로이와 같은 입장에서 인도의 부르주아와 인민 전선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때때로 민족부르주아는 영국제국주의에 대해 혁명적 태도를 취하고 있고 우리와의 블록을 제안하고 있지만, 우리는 격렬한 투쟁을 하는 동안에 그들의 지원에 의지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16)

또 다른 인도 대표 나라얀 역시 영국이 인도 민족 부르주아를 ‘자치허용’이라는 당근으로 포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도의 자본주의 발전의 도상에 가로놓인 장애물들이 영국제국주의에 의해 제거되는 정도에 따라 부르주아가 더욱 협력에 빠져들어 가고 잇달아 제국주의에 굴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고 하였다.17)

라즈는 민족해방은 사회주의 혁명으로만 달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확신했다. “제국주의는 자본가들의 창조물이자 총사령관이다. 공산주의는 근로대중의 창조물이자 전위이다. 모든 정당은 두 개의 주요한 범주 중 어느 하나에 포함된다.”18)

이와 같은 인도 공산당 지도자들의 좌편향 노선은 인도 민족 부르주아들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방해하여 인도 공산당이 고립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제국주의 국가 영국의 노동자계급도 수행하기 어려운 혁명적 구호를 내걸고 영국제국주의자들과 싸운 인도 공산당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영국제국주의자들은 1929년부터 무려 5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인도의 혁명가들을 잡아 가두었다. 이 시기 인도 공산당 역사에서 중요한 미루뜨(Meerut) 음모사건이 일어났다. 철도 파업 조직을 이유로 영국인 3명을 포함한 인도 공산당 활동가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영국 식민지 정부의 무리한 재판은 인도는 물론 전 세계에서 영국에 대한 분노를 확산시켰다. 영국 공산당은 물론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까지 영국을 비난하며 미루뜨 감옥에 갇힌 구속자들을 구명하려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또 법정에서 인도 공산당원들은 혁명사상과 혁명의 목표를 여론화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건에서 직접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목표로 한 것은 취약한 물리적 토대에서 나온 관념적 노선이 분명한 것이었다. 인도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을 통해 광범위한 계층의 지지를 받으며 실질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데 실패하였고, 미성숙함과 혁명에 대한 조급증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2) 꼬민떼른 7차 대회와 좌경노선의 수정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더 심화되었고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이 더욱 활발히 일어났다. 인도에서는 반영 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이 대중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인도 공산당이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좋은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인도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를 부정하는 혁명전략 때문에 공동의 반제국주의 전선을 만드는 데 실패하였다. 인도 공산당은 영국제국주의와 우유부단하게 협상하는 간디와 그의 ‘비폭력’ 노선을 비판하였지만, 오히려 간디의 시민불복종운동은 대중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민족부르주아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인도 공산당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민족부르주아들이 갖고 있던 진보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인도는 오랜 역사를 통해 다양한 민족들이 존재하며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갖고 있는 수십 개의 토호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더군다나 인도 사회는 낡은 카스트 신분체제가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봉건적인 체제와 의식의 변화 없이 곧바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는 관념이다. 그런데도 인도의 공산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투쟁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해방의 국면과 사회주의 혁명의 국면을 혼동하였다.

반면에 민족부르주아들은 인도 국민회의를 구심으로 반영 투쟁을 강화하였다. 인도 국민회의는 1932년 라호르(Lahore) 회의에서 ‘완전한 자주독립(Complete Independence)’을 결정하여 영국제국주의자들을 압박하였다. 인도의 인민대중들은 결정을 열렬히 지지하였고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를 대표하는 정치 조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1932년 영국 제국주의는 국민회의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인도 국민회의는 투쟁의 수위를 높여 1933년에 간디가 이끄는 시민불복종운동을 시작하였다. 인도 대중들은 시민불복종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자발적인 파업과 농민봉기를 일으켰다. 이런 적극적인 대중들의 운동이 인도 전 지역으로 들불처럼 퍼졌다. 대중들의 투쟁열기가 고조되자 1934년 인도 국민회의 안에서 급진적인 사회개혁가들과 혁명가들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회의당(the Congress Socialist Party)19)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인도의 완전한 독립과 농촌혁명을 당면과제로 내세웠다. 인도 공산주의자들의 예측과 달리 인도의 민족부르주아들은 영국 제국주의자들과 적극적으로 싸웠다.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도 공산당은 민족부르주아들과 교류도 하지 않았고 노동자 계급 주도의 사회주의 혁명에 매달렸다. 그러다 보니 대중들의 투쟁열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음에도 민족해방투쟁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미미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인도 공산당의 좌경 노선은 1932년에 해외의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특히 중국 공산당과 영국 공산당 그리고 독일 공산당이 인도 공산당에 편지를 보내 국민회의가 조직하는 대중투쟁에 동참하여 대중적 고립을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조언을 하였다.20) 서한은 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태도는 단지 민족개량주의를 폭로하는 데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그에 대한 비판 또한 민족운동에 참여하고 개량주의 조직 속에서 일하는 것과 결합되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21) 이런 인도 공산당에 대한 우려는 1935년에 열린 꼬민떼른 제7차 대회에서도 주요 쟁점이 되었다. 제7차 대회에서는 제6차 대회에서 제기된 분파주의 경향노선을 수정하였다. 그러면서 제7차 대회에서는 모든 반제국주의 세력과의 연대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특히 인도 공산주의 운동의 경험이 비판받았다. 왕밍은 식민지 문제에 관한 주요 보고서에서 인도 공산주의자들의 사업은 인도 쏘비에트 공화국의 설립과 토지의 무상몰수 그리고 총파업을 요구함으로써 부르주아 민주적 강령을 뛰어넘어 연대에 실패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오히려 간디주의와 개량주의의 영향력을 강화시켰을 뿐이라며 인도 공산당의 좌익적 오류를 지적하였다.22)

식민지 문제에 관해 또 다른 보고서를 제출했던 G. M. 디미뜨로프(Dimitrov)는 인도 공산당은 인도의 민족부르주아와 함께 거국적인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인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개량주의자의 지도하에 있는 것들을 포함하여 모든 반제국주의적 대중활동을 지지하고 확대하며 참가해야 한다. 정치적ㆍ조직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한편, 그들은 인도 국민회의에 참가한 조직들 내에서 적극적인 사업을 수행해야만 하며 영국제국주의에 대한 인도민족의 해방운동을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 그 조직들 중에서 민족혁명진영의 구체화과정을 촉진시켜야만 한다.23)

 

이와 같은 꼬민떼른 제7차 대회 회의의 영향으로 인도 공산당은 민족 부르주아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버리고 인도 국민회의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6년에는 국민회의 내부 사회주의 회의당에도 대거 가입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우호적이었던 네루(J. Nehru)가 인도 국민회의 의장이 되었다.

인도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중반부터 좌익 노선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민족부르주아와의 연합전선에 집중하였다. 국민회의 내부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함으로써 범좌파 진영의 정치적 기반을 키우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국민회의 입당은 인도 국민회의 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적 입지점을 넓혔다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한계도 있었다.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적극 끌어들여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키려 하였고 우익들은 그런 공산주의자들을 압박하고 견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 공산주의자들은 독자적인 인도 공산당의 노선을 유지하고 민족부르주아 세력에 포섭되거나 흡수되지 않는 조건에서 민족부르주아와 연합한다는 ‘인민전선’ 전략을 제대로 실천해야 했는데 이를 간과하였다. 인도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꼬민떼른의 결정을 단지 기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족부르주아들과 형식적 연합에는 성공하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어떻게 정세를 주도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혼돈이 있었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서 뿌리 깊게 자리한 좌경노선의 문제점을 바로잡으려면 치열한 고민과 내부 논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도 공산주의자들은 그런 고민 없이 꼬민떼른 대회의 결정에 따라 갑자기 노선을 바꿈으로써 인도 정세의 구체적 실정에 맞는 노선과 전략을 수립하려는 변증법적인 고민이 없었다. 이러한 취약한 토대에서 노선 전환은 또 다른 내부 불신과 노선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24)

영국제국주의는 1935년 인도정부법을 개정하여 지방자치정부(provincial government)와 지방의회(provincial legislatures)를 구성하였다. 1935년 인도정부법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외교, 국방, 세금 및 재정은 식민지 중앙정부가 계속 권한을 갖고 보건, 교육, 농업, 복지 분야는 지방자치 정부에 이양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인도인들의 독립요구에 부응하여 자치정부수립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의 핵심적인 자주권인 외교, 국방, 재정은 영국제국주의자들이 그대로 갖겠다는 교묘한 술책에 불과하다. 둘째는 인도인들의 선거권을 인정하였지만 종교에 따라 즉, 힌두교와 이슬람교 유권자들을 따로 구분하여 투표를 하게 하였다. 이는 영국제국주의의 지배와 분리 전략으로 인도 내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분열 갈등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도정부법에 따른 선거 참여를 놓고 인도 국민회의 내부에는 심각한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국민회의 좌파는 기만적인 지방 자치정부 수립은 영국제국주의 포섭에 넘어가는 것이므로 지방정부 참여에 반대하였다. 반면에 국민회의 우파는 지방정부 참여를 찬성하였다.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지방정부 참여에 동의하였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발했던 여러 지역에서 자치정부 의원에 당선되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국민회의 우파가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실제로 국민회의가 집권한 봄베이 지방정부는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1938년 델리에서 개최된 전 인도 국민회의 위원회(All-India Congress Committee)에서 이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국민회의 내 좌파는 우파를 견제하기 위해 급진적 민족주의자인 수바스 찬드라 보세(Subhas Chandra Bose)를 인도 국민회의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우파는 간디와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25)을 내세워 의장으로 선출된 보세가 집행위원회(Working Committee)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막았다. 허수아비 회장이 된 보세는 국민회의를 탈회하여 전 인도 전진 블럭(All-India Forward Bloc)을 만들었다. 국민회의 좌파 진영의 분열로 공산당은 입지가 악화되었다.

 

(3)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인도 공산당 지도력의 한계

 

꼬민떼른 제7차 대회의 결정 이후 인도 공산당이 국민회의와 손잡고 벌인 민족해방투쟁은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인도 공산주의자들의 노력으로 1936년 공산당의 농민전선체인 전 인도 끼산사바(All India Kisan Sabha)가 결성되었다. 같은 해에 인도 공산당의 학생조직으로 전 인도 학생연맹(All India Students Federation, AISF)이 결성되었고, 진보작가협회(The Progressive Writers’ Association)가 꼴까따에서 결성되었다. 인도 공산당의 입지가 농민과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도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인도 공산당이 노동자주의의 편협성을 넘어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며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1939-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인도 공산당은 민족해방투쟁에서 민족부르주아지에게 주도권을 뺏기고 지도력의 한계를 보인다. 인도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과 인도 국내 정세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인도 독립이라는 결정적인 국면에서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 남부디리파드(E. M. S. Namboodiripad)는 그 당시 인도 공산당이 개량주의와 우익기회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비판한다.26) 그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인민전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인도의 현실에서 볼 때, 인도 공산당이 전쟁 이후 반제국주의 투쟁과 인도의 독립이라는 식민지 과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인도 공산당을 비판한다. 인도 공산당은 인도의 실정과 구체적 현실에 맞는 노선을 제시하지 않고 막연하게 쏘련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만으로 “세계 혁명의 죄수(a prisoner of world revolution)”인 영국 제국주의가 자동적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기회주의에 빠졌다고 비판한다.27)

제국주의의 몰락은 필연이므로 영국제국주의자들이 자연스럽게 몰락할 것이라는 의식이 인도 공산주의자들 내에도 있었다. 그렇다면 인도의 독립은 자동적으로 찾아올 것이므로, 이런 관념에 사로잡힌 이들은 영국제국주의자들과의 투쟁에 소극적이었다. 이것은 영국제국주의자들을 도와준 기회주의적 행동이었다. 실제로 영국 식민정부는 1940년대 민족부르주아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1939년 영국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인도의 참전을 강제하였다. 이에 대해서 민족 부르주아들은 즉각적인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였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전쟁이 끝나면 주권을 이양하겠다고 설득하려 했지만 간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부르주아들은 “독립 아니면 죽음”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인도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극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인도 국민회의는 조건 없이 즉시 인도를 떠나라며 1942년 인도철수운동에 돌입하였다.

당황한 영국제국주의자들은 인도 국민회의 지도부를 모조리 체포하고 인도철수운동 대중시위를 총칼로 무자비하게 짓뭉개 버렸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영국에 우호적이었고 비폭력주의자인 간디까지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이런 무력 진압 덕분에 인도철수운동 시위는 일순간에 제압되었지만 이는 인도 인민대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전국 각지에서 간디와 인도 국민회의 지도부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일어났고 이런 시위에 참여한 격노한 군중들은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인도 해군도 시위에 참여하면서 인도는 혁명전야에 휩싸였다. 그리고 1945년 7월 5일 총선에서 노동당이 하원 다수당이 되자 영국제국주의의 대인도정책에 변화가 생겼다. 영국제국주의는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 구성을 위한 임시정부 구성에 동의하였다. 이처럼 인도 민족부르주아들은 영국제국주의자들과 흔들림 없이 투쟁하여 자주독립을 위한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반면에 인도 공산당은 국제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반파쇼 투쟁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정세를 혼동하여 민족 부르주아지의 반영 투쟁에 적극 나서지 못했다. 이런 인도 공산당의 정세판단 오류는 인도 내부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급진주의 신좌익과 반공산주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기여를 하였다. 인도 공산당이 이렇게 큰 오류를 범했던 것은 국내 정세와 국제 정세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인도 공산당은 영국 제국주의가 뮌헨협정을 통해, 나찌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 지배하는 것을 묵인하는 것을 근거로, 반파시즘과 반제국주의 투쟁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것은 꼬민떼른의 입장과 인도 내부의 반영 투쟁 요구와도 부합되었다. 그런데 1939년 8월 23일 쏘련과 나찌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맺고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공격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인도 공산당은 혼란에 빠졌다. 당시 인도 지식인들과 대중들은 인도를 지배하는 영국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의식이 높았지만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파쇼 투쟁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쏘련이 독일이 제안한 불가침 조약을 맺은 이유는 독일과 동맹을 맺으려는 것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을 돌격대로 내세워 쏘련을 공격하려는 것을 막고 방어를 준비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었다. 쏘련은 1935년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유럽집단 안보를 제안했다. 쏘련은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까지 체결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5월 뮌헨에서 파시스트 국가인 독일과 이딸리아와 회담을 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28) 지역을 독일에게 넘겨주었다. 그런데도 독일은 이미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합병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1939년 3월 15일 체코의 프라하를 점령했다. 일주일 후에는 발트해의 중요 항구인 리뚜아니아의 끌라이뻬다(Klaieda)를 점령한다.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1939년 3월 쏘련은 영국과 프랑스와 반파시스트 동맹의 협상을 시작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나찌 독일이 쏘련을 공격할 것이라 보았으므로 협상은 지지부진 하였다.29) 이런 상황에서 쏘련은 유럽의 반쏘비에트 전선에 대응하기 위하여 나찌 독일과 전략적으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것이고, 불가침 조약을 깨고 1941년에 쏘련을 침략한 것은 독일이었다.

그런데 쏘련과 나찌 독일이 불가침 조약을 맺자 인도의 국내 여론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심지어 인도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노선을 걷던 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쏘련-독일 불가침 조약을 지지하며 그런 정세를 이용하여 반영 투쟁을 구상하였다. 그는 나찌 독일군과 일본군의 힘을 빌려서 영국과의 전쟁을 계획하였다.30)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초기에는 국민회의 좌파진영과 인도 공산당은 반파쇼투쟁보다는 영국제국주의와의 투쟁이라는 데 강한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 6월에 나찌 독일이 쏘련을 침략하자 제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꼬민떼른은 즉각 ‘인민전쟁(people’s war)’ 노선을 결정하고 파시스트 국가인 독일, 이딸리아, 일본과 전면전을 벌였다.

그런데도 인도 공산당 지도부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유럽의 전쟁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과 쏘련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던 1941년 7월 인도 공산당은 ‘혁명전쟁’을 결정하였다. 인도 공산당 지도부는 영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시기가 혁명의 기회라 보고 볼쉐비끼 식의 혁명전쟁을 중앙위원회 정치국(Polit Bureau)에서 통과시켰다.31) 인도 공산당 정치국은 1942년 12월에 가서야 새로운 정세 변화를 깨닫고 급히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선을 인민전쟁 노선으로 수정한다. 1942년 2월 인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사회주의 국가 대신 “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인민전쟁에 참여한다는 결정을 한다. 인도 공산당의 노선 변경은 당 내부의 깊이 있는 토론과 인도 국내 정세의 면밀한 분석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꼬민떼른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승인한 것이었다. 당의 중요 노선을 바꾸는 일인데도 중앙위원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당내 토의 없이 몇몇 중앙위원들이 감옥에서 의견을 나누고 보고하는 식으로 새로운 노선을 결정하였고 공산당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였다.32)

게다가 인도 공산당은 인도 전역이 가장 치열한 반영 투쟁의 열기로 들끓고 있는 인도의 현실과 꼬민떼른의 결정 사이에서 인도 공산당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반파시스트 전선이라는 명분으로 쏘련과 영국이 동맹을 맺자 인도 공산당은 반영 투쟁에서 한발 빼는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정부도 1942년 7월에 인도 공산당의 활동을 합법화하였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공산당 간부들을 석방하였다.

그러자 공산당은 ‘영국의 하수인’이라는 반공산주의 여론이 급속히 퍼졌다. 1942년에 인도의 민족부르주아들과 전체인민들은 총파업과 봉기를 벌여 인도철수운동을 하고 있는데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고 영국을 두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국민회의 좌파와 네루를 포함한 민족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들은 인도 공산당을 ‘영국의 간첩’이라며 맹비난하였다. 더 심각한 것은 반제투쟁전선에 적극 참가하였던 청년학생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공산당을 불신하여 새로운 좌파운동이 일어났고 인도 공산당은 지도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혼란에 빠졌다.

영국 식민 정부가 인도 공산당을 합법정당으로 인정한 직후 1943년 5월 최초로 인도 공산당 대회가 열렸다. 회의는 1주일 동안 열렸지만 인도 공산당의 노선이 국제 정세와 국내 정세 사이에서 심각한 괴리가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했고 진지한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33) 공산당이 꼬민떼른의 결정에 따라 ‘인민전쟁’ 노선으로 방침을 정한 것은 옳은 것이었지만, 민족해방투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인도 실정을 고려한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 투쟁에 나섰어야 했다. 인도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과 제1차 세계대전의 차이점과 정세흐름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민족해방의 과제를 수행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제시해야 했지만 좌경노선과 기회주의 노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서 우왕좌왕하다가 민족부르주아 우파와 좌파 모두에게서 불신받고 대중들로부터 고립되는 심각한 실패에 놓였다.

이런 공산당의 위기는 인도 독립을 앞두고 부르주아에게 정치적으로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다급해진 인도 공산당은 1946년부터 또다시 급진적인 좌경노선에 빠져들면서 더욱 대중들과 고립되었다. 2차 대전 종전 직후 인도 공산주의자들은 복잡한 인도 내부의 실정에 맞는 자체 투쟁 방향과 전망을 제시하지 않고 인도 현실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사회주의 혁명 ‘구호’만 외쳤다. 이는 당시 인도 인민들의 정서와 매우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연이어 1949년 5월 9일 철도 총파업의 실패는 네루 정부의 강경한 탄압으로 이어졌고, 인도 공산당의 정치 지도력뿐만 아니라 조직기반 자체에 엄청난 타격과 피해를 입혔다. 결국 반제투쟁에서 가장 용감하고 헌신적인 투쟁으로 인도의 대중투쟁을 이끌던 인도 공산당은 영국제국주의가 인도에 권력을 이양하던 결정적 시기에 좌경노선과 기회주의 노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인도독립 직후 중요한 시기에 부르주아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4. 맺는 글

 

이 글은 영국제국주의와의 투쟁과 맞물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운동에서 큰 영향을 끼친 인도 공산당이 왜 인도혁명에 실패했는지에 대한 하나의 시론적 분석이다. 인도 공산당은 초기부터 좌경적 오류가 있었고 그런 좌경노선을 내부의 진지한 토론과 인도 국내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으로부터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공산주의 운동가들의 비판과 결정을 비주체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바로 이러한 주체적 역량 강화에 결정적으로 취약했던 것이 인도 공산당의 실패 원인이라는 것이 이 시론적 분석에서 얻은 결론이다.

인도 부르주아들의 기만성은 독립 직후 곧 드러났다. 영국제국주의자들의 폭정과 압제의 시대에서 곧 해방의 시대가 올 것이라 믿었던 인민대중들은 민족 부르주아에게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기만적인 토지개혁으로 그 본질이 드러나며 인민들은 이에 저항하였다. 인도 중부 내륙 뗄란가나(Telangana)에서는 농민군이 농촌해방구를 건설하며 혁명적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들 피억압계급을 지도하고 이끌 유일한 정치세력은 인도 공산당뿐이었다. 그러나 인도 공산당 지도자들은 과학적인 맑스-레닌주의 이론으로 현실에 기반한 주체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방법과 노선을 찾으려는 고민보다는 쏘련의 방침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심했다. 당 내부의 좌경노선과 기회주의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였고 농민들의 자발적 봉기에 적극적으로 결합해야 되는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심지어 1950년 모스끄바에 대표단을 보냈을 때는 쓰딸린 앞에서 당내 입장 차이를 그대로 드러내며 언쟁을 하기까지 하였다. 독립 직후 인도의 경제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었으며 신속한 토지개혁이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인도 공산당은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난 농민군을 조직화하고 또 노동계급과의 신뢰를 쌓는 노력을 하는 데 실패하였다. 인도 혁명의 실패와 중국 혁명의 성공 간에는 그러한 깊은 간극이 있다.

오히려 네루는 당시의 정세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국제적으로 비동맹외교노선을 전개하였으며 쏘련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른 비동맹국가들에서의 쏘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려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인도 공산당은 모스끄바에 찾아가 쏘련의 지침을 기다리는 비주체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사상적 혼란과 오류를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심각하게 운동에 해악이 되는지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런 인도 공산당의 혼란은 중쏘 이념분쟁으로 또다시 크게 요동치면서 1964년 이래 인도 공산당의 심각한 분열로 귀결되었다.

현재 인도는 세계 경제 공황으로 인한 모순이 들끓고 있다. 독립 이후 지금까지 가난과 차별을 겪어야 했던 농민과 최하층 카스트 달리트들 그리고 낙후된 정글 지역에 사는 부족민들이 끊임없이 무장하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과학적인 변혁사상을 도출해 내고 억압받고 있는 인도 인민대중들을 일깨우고 재탄생하여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

바로 지금 인도 공산당 초기의 좌경노선의 오류와 그 이후 민족해방투쟁 과정에서의 실패를 재음미하는 것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또한 좌익소아병과 기회주의 노선을 비판했던 레닌의 조언이 얼마나 절실한 지적이었는지 되짚어 보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과정이다. 영국제국주의자들의 반공정책으로 극심한 탄압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도 공산당이 최선봉에 서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사회주의 혁명사상으로 인도 인민대중을 일으켜 세워 민족해방을 앞당긴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인도 공산당의 영향력과 업적은 인도 인민대중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과거의 찬란한 역사에 안주하는 나태를 허용하지 않는다. 진보적 인류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잘못된 노선을 바로잡고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현실에 근거해서 과학적 사상과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인도 공산당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2013년 8월 14일 새벽 1시 반 전주교도소에서 완성

 


 

1) [편집자 주] 인도 공산당은 중쏘 분쟁 이후 오랜 기간의 노선투쟁을 거쳐 분화되었다. 인도공산당(CPI), 인도맑스주의공산당(CPIM), 인도맑스레닌주의공산당(CPIML)이 현재 대표적인 인도의 공산당들이다. 그 외에도 인도마오주의공산당(CPI(Maoist)), 인도사회주의통합중심(SUCI(C), Socialist Unity Centre of India(Communist) ― 이들에 대해서는 아직 통일된 번역이 없기에 편집자가 임의로 번역했다)과 같은 정당이 있다. 12억이 넘는 인구의 인도에서는 군소 공산당들도 상당한 숫자의 당원을 확보하고 있고 이외에도 소개하지 못한 수많은 분파들이 존재한다.

 

2) 레닌은 칼 맑스의 이론과 1871년 빠리 꼬뮌의 경험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관료적ㆍ군사적 국가기구의 파괴가 ‘모든 진정한 인민 혁명의 전제 조건’임을 재확인하고 각국의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간의 생명력 없는 반정립밖에 모르던 쁠레하노프와 멘쉐비끼 수정주의자들을 비판하였다. 1871년 당시 유럽대륙 어느 나라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민의 대다수를 이룰 만큼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였음을 그리고 칼 맑스가 쁘띠부르주아지의 특수성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론을 전개했음을 포착해 낸다. 그리고 ‘진정한 인민혁명’을 위해서는 혁명적인 노농동맹을 굳건히 하여 국가기구를 타도하고 파괴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V. I. 레닌 저, 김영철 역, ≪국가와 혁명≫, 논장, 1988, pp. 55-57.; Lenin Collected Works, Vol. 25, pp. 421-422를 참조하라.

이에 반해 좌익들은 무정부주의적인 관점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국가의 억압체제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대충 넘겨 버린다. 그러다 보니 관념적인 ‘혁명 구호’와 극좌 모험주의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좌익공산주의의 발생과 역사 및 주장에 대해서는 전성식, “좌익공산주의의 발생 배경, 출현과 그 주장”, ≪좌ㆍ우익 기회주의의 현재≫(≪노동사회과학≫, 제5호), 노사과연, 2012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3) 인도 공산당의 창당 시기에 대해 인도 공산당은 1925년, 맑스주의 인도 공산당은 1920년이라 주장한다. 인도의 진보적 활동가들은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운동을 하였지만 영국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 같은 해외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모스끄바에서 열린 꼬민떼른 제2차 대회에 참석했던 인도 활동가들이 따쉬껜트(Tashkent)에서 공산당을 결성했다. 그런데 이들은 인도에 돌아오자마자 영국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대부분 검거되었다. 이 사건이 1922―24년에 벌어진 뻬샤와르(Peshawar) 공모사건이다.

1924년 인도국민회의 내 좌파인 후스라트 모하니(Husrat Mohani)가 깐뿌르(Kanpur)에서 회의를 소집했는데, 거기에 인도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할 것이라는 내용이 깐뿌르의 지방 언론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사실 이 회의는 인도 공산당과 혁명 그룹들과는 아무 관련성이 없었다. 그런데 인도 공산당이 1925년 12월에 그 회의에 참가를 결정하고 인도 공산당 창당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때 인도 공산당 내부에서는 꼬민떼른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입장을 놓고 내부 노선갈등이 심각했다. 1926년에 꼬민떼른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입장이 거부되자 즉각적인 혁명조직 구성을 요구했던 사띠아 바가따(Satya Bhagata)는 인도 공산당을 탈당하여 인도 민족 공산당(National Communist Party of India)을 따로 만들었다. 이처럼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분파적 경향은 인도 공산당 결성 초기부터 나타났다.

4) V. I. 레닌, “민족자결권”, ≪맑스-레닌주의 민족운동론≫, 벼리, 1989, pp. 79-80.; Lenin Collected Works, Vol. 20, pp. 411-412.

[편집자 주] 필자 이병진 동지는 전주교도소에서 글을 완성하느라 자료 접근의 제한으로 인해 레닌의 “민족자결권” 원문을 직접 인용하지 못하고 Harkishan Singh Surjeet, ≪March of the Communist Move-ment in india≫, National Book Agency, Calcutta, 1998, p. 29에서 재인용했다. 편집 과정에서 국내 번역본과 원문을 확인하여 출처를 표기하였다.

 

5) 같은 글, p. 80.; Ibid., p. 412.

 

6) V. I. 레닌,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1920년 7월 28일), ≪민족 해방운동 Ⅱ ― 테제ㆍ노선ㆍ역사ㆍ사례≫, 조국, 1989, pp. 31-32.

 

7) Harkishan Singh Surjeet, op. cit., p. 32에서 재인용.

 

8) 꼬민떼른 대회에는 레닌이 집필한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와 로이가 작성한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안이 동시에 제출되었다. 1920년 7월 25일 민족ㆍ식민지 위원회의 회의에서 레닌의 테제를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로이의 테제는 대폭 수정 및 삭제하여 보완 테제로 채택했다. 그 다음 날인 26일 레닌이 자신의 테제를 보고했고, 레닌의 테제와 로이의 보완 테제가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9) Harkishan Singh Surjeet, op. cit., p. 31.

 

10) M. N. 로이,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로이 테제 원안”(1920년 7월 25일), ≪민족 해방운동 Ⅱ ― 테제ㆍ노선ㆍ역사ㆍ사례≫, p. 43. 인용한 로이의 테제 원안의 10항은 레닌에 의해 전체가 삭제되었다.

 

11) Harkishan Singh Surjeet, loc. cit.

 

12) M. N. 로이, 같은 곳. 인용한 것은 테제의 7항 중 일부이다. 레닌은 로이의 테제 원안 7항에서 위의 내용을 삭제하였다.

 

13) O. V. 마르띠쉰은 로이를 좌편향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면서 인도 혁명에서 로이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민족 해방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를 확립할 수도 없던 시기에, 부르주아 혁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근로 인민의 최고의 사회적 요구를 내거는 것은 인위적으로 반제민족전선 내의 갈등을 증폭ㆍ격화시키고 소수 공산주의 그룹들을 고립시킬 따름이었다. (O. V. 마르띠쉰, “인도의 반제통일전선문제”, ≪민족 해방운동 Ⅱ≫, p. 240.)

 

[편집자 주] 필자의 요청에 의해 부연 설명을 첨부한다. 마르띠쉰(Орест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ртышин)은 1937년 생으로 구쏘련 시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법학자다. 또한 아프리카와 인도의 역사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여러 편의 저술활동을 활발하게 펼쳐 오고 있다.

 

14) 꼬민떼른 6차 대회 때 식민지 문제에 관한 기조발표를 했던 O. V. 꾸시넨은 쏘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 부르주아지에 대해 “어느 정도 종파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인정하였다. ≪20th Congress of the CPSU. Verbatim Raport≫, Vol. 1, Moscow, 1956, p. 503(러시아어 판); O. V. 마르띠쉰, 같은 글, p. 248에서 재인용.

 

15) O. V. 마르띠쉰, 같은 글, p. 249.

 

16) ≪International Press Correspondence≫, No. 81(November 21, 1928), p. 1526.; 같은 글, p. 251에서 재인용.

 

17) Ibid., p. 1390.; 같은 글 p. 253에서 재인용.

18) Ibid., p. 1453.; 같은 글 p. 254에서 재인용.

 

19) [편집자 주] 인도 국민회의 내에 사회주의 간부회의 형태로 출범하여 간디주의를 배격하였다. 이들의 노선은 페이비언주의와 맑스-레닌주의가 혼재된 것이었다. 국민회의 내에는 사회주의 회의당 외에도 1922년에 결성된 스와라지당(Congress-Khilafat Swarajaya Party, 스와라지는 자치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간디의 불복종 노선에 대한 보다 우경적인 반대자로 자치령 획득을 강령으로 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8-1933년 혁명적 고양기에 쇠퇴하였다.

 

20) Harkishan Singh Surjeet, op. cit., pp. 45-46.

 

21) ≪The Communist International ≫, No. 16, 1932, pp. 43-44(러시아어판); O. V. 마르띠쉰, 앞의 글, p. 261에서 재인용.

 

22) Wang Ming, ≪The Revolutonary Movement in the Colonial Coun-tries≫, New York, 1935, pp. 40-43.; 같은 글, p. 262에서 재인용.

 

23) 같은 곳에서 재인용.

 

24) 인도 공산당은 좌익 분파적 경향을 명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그때그때의 정세 변화에 따라서 흔들렸다. 2차 세계대전 때 반파쇼 투쟁전선과 반제국주의 투쟁전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종전 직후에 반영(反英) 투쟁에 적극 나서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정세 판단 오류였다. 반대로 이후 독립 직후에는 급진적인 좌경노선으로 무리한 총파업을 벌여 사실상 공산당이 와해되는 상황에 몰렸다. 1962년 중국과 인도의 영토 분쟁 때는 인도 국민회의 정부를 지지하면서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도 틀어졌다. 이처럼 인도 공산당은 정세변화에 따라 좌충우돌하는 식의 분파주의적 속성을 계속 보여 주었다.

 

25) [편집자 주] 한편 훗날 보세는 반영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독일ㆍ일본과 협력하기도 한다. 미얀마와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1944년 임팔 전투에서 보세의 인도 국민군은 일본군과 공동의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26) E. M. S. Namboodiripad, ≪The Communist Party in Kerala ― Six decades of Struggle and Advance≫, National Book Centre, New Delhi, 1994, pp. 83-84.

 

남부디리파드는 1934년 사회주의 회의당의 창립 지도자였으며 인도 공산당 총서기와 인도 맑스주의 공산당 총서기를 역임한 인도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이다. 정호영이 옮긴 그의 글 ≪마하트마 간디의 불편한 진실≫(한스 컨텐츠, 2011)과 필자의 번역으로 ≪정세와 노동≫(노사과연)에 연재 중인 “인도독립투쟁의 역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27) 자본주의 경제 모순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려 ‘자동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실제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으며, 실천적으로 대기주의를 낳는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자본주의 붕괴와 이행문제”, ≪노동자의 사상≫ 제5호, 2013, p. 11.)

28) Sudetenland. 체코어로는 수데띠(Sudety).

 

29)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 “스딸린 바로보기(16)”, ≪정세와 노동≫ 제90호(2013년 5월), 노사과연, pp. 58-62.

 

30) 수바스 찬드라 보세는 친독(親獨)적 관점에서 반영(反英) 투쟁을 전개한 인물로 인도 현대사에서는 간디, 네루와 함께 주요한 독립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반영 투쟁이 최우선의 과제였기에 2차 대전 시기 추축국과 함께 제휴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인도 국민군을 조직하여 미얀마와 인도 접경지대에서 벌어진 임팔 전투에서 일본군과 공동 반영 전선을 형성한다. 이 전투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당시 그가 조직했던 국민군은 현재 인도군의 뿌리가 되고 있다.

 

31) Harkishan Singh Surjeet, op. cit., p. 54.

32) E. M. S. Namboodiripad, op. cit., p. 82.

 

33) E. M. S. 남부디리파드에 의하면 제1차 당대회 이후 제2차 당대회부터 제6차 당대회에 이르는 기간에는 당 내부에서 날카로운 노선 투쟁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E. M. S. Namboodiripad, op. cit., p. 83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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