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세기 사회주의에서 수정주의의 발전

 

문영찬 ∣ 노사과연 연구위원장

 

 

1. 머리말

 

세계대공황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2008년 리먼쇼크를 계기로 발발했던 세계대공황은 이후 구제금융의 투입과 중국 등의 신흥국의 투자증대를 기초로 극복되는 듯했으나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제국(諸國)과 일본, 미국 등의 재정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재차 공황이 심화되는 양상으로 접어들고 있다. 투자와 수출 주도의 중국경제도 한계에 부딪히며 과잉생산이 심화되고 있고 터키, 멕시코, 인도, 동남아, 브라질 등의 신흥국도 위기에 몰리고 있다. 한국의 경우 2012년부터 웅진그룹, stx그룹, 동양그룹 등이 무너지고 있고 삼성과 현대차를 제외한 여타의 30대 재벌그룹들도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세계대공황의 심화는 세계질서를 변동시키고 있는데 세계화의 구심이었던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들고 대신 중국-러시아 동맹이 또 하나의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는 중국과 미-일 동맹의 대립이 기본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세계대공황은 2013년 들어서는 경기침체 속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에 따라 약한 고리들에서 대중투쟁이 성장하고 있다. 브라질, 터키, 이집트 등에서는 대중투쟁의 폭발이 있었다.

이러한 세계대공황은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공황은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인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취득의 사적 성격 간의 모순이 폭발하는 것으로서 기존의 지배질서가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영원성에 근본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공황이 일국적, 혹은 한 지역의 차원을 넘어 세계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세계질서의 전반적 변동을 강제한다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운동 또한 국제주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하고 세계질서의 변동을 조건으로 변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을 세계적 차원에서 고찰한다면 세계대공황은 세계사회주의 운동이 쏘련 붕괴 뒤로 처했던 퇴조의 추세가 서서히 마감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세계대공황이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퇴조를 멈추게 하는 바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변혁의 전략, 전술을 다시금 벼려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전략, 전술이라는 실천의 방침은 동시에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를 기초로 하는 새로운 사회주의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운동은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정치운동과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사상을 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이 되었던 수정주의에 대한 전면적 고찰은 중요하다. 수정주의가 과연 무엇이고, 왜 발생했고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세계사적 반동을 초래했던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가 있게 되었는지를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뿐만 아니라 한계와 오류를 전면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인데 이러한 과정을 거칠 때만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형성이 가능한 것이다.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운동의 다양한 단계에서 등장했고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의 해체적 요소로 작용했고 끝내 사회주의 사회를 무너뜨렸고 21세기 지금도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사회주의 운동을 질식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수정주의를 전면적으로 고찰하면서 그를 극복하고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을 발전시킬 길을 탐색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2. 사회주의 운동에서 수정주의와 편향의 동일성과 차이성

 

20세기 사회주의를 돌아보면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다양한 편향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의회 내에서의 투쟁을 거부하고 밑으로부터 대중 투쟁만을 강조하는 것을 좌편향으로 비판했다. 또 1920년대 쏘련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뜨로츠끼는 ‘사회주의적 본원적 축적’ 즉, 농민들에 대한 수탈을 통한 초공업화를 주장하여 좌편향으로 비판받았고 부하린은 집단화를 통한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에 저항하면서 부농을 옹호하여 우편향으로 비판받았다. 이러한 편향에 대해 레닌도, 쓰딸린도 엄격하게 비판했지만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당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즉, 편향은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존재하는 오류인 것이다. 그러나 뜨로츠끼와 부하린이 1930년대에 쏘련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것으로 나아갔을 때 그것은 편향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반대자, 체제의 반대자로 전화된 것이었다.

수정주의는 베른슈타인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철학, 정치경제학, 강령 등 전반에서 수정주의를 제출했는데 이에 대해 레닌은 “맑스주의 자체 내부에서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한 경향의 투쟁”1)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레닌의 언급은 의미심장한데 레닌은 맑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 이론들이 맑스주의에 의해 패배하고 노동운동이 맑스주의로 무장해 가는 상황에 이르자 패배한 경향들이 맑스주의 내부로 들어와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근거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일반적 근거 위에서 수정주의로서 그 투쟁을 계속”2)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주의의 발생의 불가피성에 대해 레닌은 “자본주의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나란히 항상 광범한 쁘띠부르주아지와 소소유자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광범한 노동자당들의 대열 내부에서 쁘띠부르주아적인 세계관이 계속해서 고개를 치켜들게 된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3)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수정주의는 국제적인 현상으로서 독일에서 정통파와 베른슈타인주의, 프랑스에서 게드주의자와 조레스주의자, 영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연합과 독립노동당의 관계, 러시아에서 볼쉐비끼와 멘쉐비끼 간의 분리를 들고 있다.

그러면 수정주의에 대한 레닌의 분석을 기초로 사회주의 운동에서 수정주의와 편향의 동일성과 차이성에 대해 논해 보자. 레닌이 “맑스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위 글을 쓸 당시인 1908년에는 아직 수정주의와 편향의 구분이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에 따라 수정주의의 뿌리는 노동운동에 들어오는 소부르주아적 요소라고 파악하고 있고 또 볼쉐비끼와 멘쉐비끼의 대립을 정통과 수정주의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다. 여기서 수정주의와 편향의 동일성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수정주의 또한 처음에는 당내의 혹은 사회주의 운동 내의 한 편향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는 운동 내의 소부르주아적 요소라는 점에서 수정주의와 편향의 동일성이 있다. 그리고 편향이 심화되고 현실화되면 운동을 해체하는 요소가 된다는 점에도 수정주의와 편향의 동일성이 있다. 그런데 1908년 당시를 넘어서서 20세기 전체에 걸친 수정주의의 역사를 놓고 보면 편향과 수정주의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1920년대 뜨로츠끼와 부하린이 당내에서 좌, 우편향의 주장을 할 때와 1930년대 쏘련을 내부에서 파괴하는 작업을 하고 당에서 제명된 때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 30년대의 부하린과 뜨로츠끼가 수정주의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계급적으로 이탈하고 내부에서 체제의 반대자가 된 것은 수정주의와 유사하다. 1920년대 뜨로츠끼와 부하린이 편향된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당에서 배제된 것은 아니었고 그러한 편향에 대한 볼쉐비끼 당의 입장은 비판을 통한 ‘교정’이었다. 그리고 뜨로츠끼와 부하린은 당원자격을 유지하였고 당내에서의 책임 있는 자리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1930년대 접어들어 쏘련사회주의 사회를 내부에서 파괴하는 작업을 했을 때는 이미 당내의 편향을 넘어서서 볼쉐비끼 당과 쏘련사회주의의 적이 된 것이었고 따라서 당에서 축출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중국에 의해 수정주의라는 격렬한 비판을 받았던 유고의 티토의 경우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제국주의를 지지하였다. 이러한 티토의 입장은 사회주의 운동 내의 있을 수 있는 편향 또는 오류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는 당의 성격을 전 인민당으로 바꾸어 당의 노동계급 전위당적 성격을 타격하였고 또 국가의 성격을 전 인민국가로 바꾸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원칙을 타격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수정주의는 운동 내에 혹은 당내에 들어오는 소부르주아적 요소에 기인하는 편향을 넘어서서 계급성을 타격하는 것이고 계급성을 전화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세기에 존재하는 중국 수정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를 자본주의로 전화시켰는데 사회주의 시장경제라 불리는 중국수정주의는 수정주의가 계급성의 문제라는 것을 명백히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편향과 수정주의의 동일성과 차이성을 정리해 보자. 먼저 동일성을 논하자면 첫째 그 뿌리가 사회주의 내부에 들어오는 소부르주아적 요소에 있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즉, 수정주의와 각종의 좌우편향은 출발점이 운동 내의 소부르주아적 요소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둘째, 각종의 좌우편향도 그리고 수정주의도 그것이 발전하면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운동 자체를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 자체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그런데 수정주의와 편향은 이러한 동일성이 있지만 차이가 있다.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본질은 동요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양대 계급인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끊임없이 동요하는 것이 소부르주아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소부르주아적 요소가 사회주의 운동과 당에 들어오면 그들은 그러한 정치적 동요를 내부에 도입하게 되는데 각종의 좌, 우편향이 그러한 동요의 반영인 것이다. 그런데 수정주의는 이러한 동요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과학적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윤리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점,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하여 신칸트주의를 들고 나온 것, 흐루쇼프가 전 인민당, 전 인민국가를 주장하여 계급성을 타격한 것 등은 소부르주아적인 동요, 편향을 넘어서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의 노동계급성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제2 인터내셔날이 사회배외주의로 돌아서고 그 후신인 사회민주당들이 독점자본주의의 지주로 기능하고 있는 것, 쏘련의 수정주의가 쏘련사회를 붕괴로 몰아넣은 것, 중국의 덩샤오핑 수정주의가 사회주의를 해체하고 중국사회를 자본주의로 전화시킨 것 등은 소부르주아적 편향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를 부르주아화하는 자본가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수정주의는 운동 내의 혹은 당내의 편향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계급적 적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하나의 당에서 공존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수정주의와 편향은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수정주의는 편향을 넘어서서 즉, 소부르주아적 동요를 넘어서서 자본가계급의 계급성을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에 도입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수정주의에 대한 이러한 원리적 고찰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수정주의가 각 역사적 단계에서 어떻게 발생, 발전하였고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추적해 보도록 하자.

 

 

3. 수정주의의 1단계: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수정주의는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를 적대하는 경향이다. 즉, 맑스주의 언설과 개념들을 나름대로 혹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면서 현실적으로는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해체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수정주의의 특징은 베른슈타인부터, 티토, 똘리아띠, 흐루쇼프, 덩샤오핑, 장쩌민 등에 모두 공통된 점이다. 그러면 수정주의의 최초의 발생이라 할 수 있는 베른슈타인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베른슈타인주의자들은 철학에서 변증법적 유물론 대신에 신칸트주의를 들고 나왔고 변증법을 부정하고 그것을 진화론으로 대체했다. 또한 정치경제학에서는 카르텔과 트러스트가 공황을 제거할 것이라 주장했고 정치의 영역에서는 민주주의로 인해 다수의 지배가 가능해졌고 따라서 국가가 지배계급의 기관이라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했다.4) 이러한 경향을 요약하여 베른슈타인은 “운동이 전부이며 궁극목적이란 아무것도 아니다”고 선언했다. 이 언급은 분석을 요하는데 운동이 전부라는 말은 나름 그럴듯하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공산주의는 특정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지양해 가는 운동”이라 했다. 맑스의 이 언급과 베른슈타인의 언급을 비교해 보면 운동에 강조점을 둔다는 외양은 비슷하다. 이는 수정주의가 맑스주의의 외양을 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의 언급에서는 궁극적 목표, 즉, 노동계급의 최고의 목표인 착취의 폐지와 무계급사회의 건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언급은 전혀 없다. 즉, 맑스는 공산주의는 관념이 본질이 아니라 현실을 변혁해 가는 운동이 본질이라고 언급한 것인데 이를 베른슈타인은 강령에 해당하는 궁극목표를 폐기하는 식으로 비틀은 것이다. 세상에! 궁극목표 혹은 강령 없는 정치세력이 어디 있고 그런 사회주의 운동과 당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는 베른슈타인이 의식적으로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고 그를 자신의 수정주의로 대체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데 베른슈타인은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 대신에 ‘윤리적 사회주의’를 제기했다. 즉, 과학과 윤리를 대립시키는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무력화하려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는 과학인가 윤리인가가 쟁점이 되기도 했다. 베른슈타인의 입장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는 윤리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맑스주의의 모든 원칙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통한 인간해방으로 모아진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근본이 비윤리적이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윤리성의 부족을 내포하는가? 여기서 두 가지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째 사회주의에서 과학과 윤리 중에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의 여부, 둘째 맑스주의에서 윤리의 문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이다. 사회주의는, 그 운동은 개인의 운동이 아니다. 개인이 사회주의자로 자족하면서 살 때는 과학성보다 윤리성이 더 우선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개인의 관념의 영역을 넘어서서 현실적 운동이 될 때 즉, 계급적 운동이 되고 변혁적 운동이 될 때는 그것은 이미 정치의 영역이 된다. 따라서 베른슈타인의 윤리적 사회주의라는 문제제기는 정치는 윤리인가 과학인가의 문제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정치는 과학인가 윤리인가? 사회주의 정치는 과학인가, 윤리인가? 계급사회가 발생한 후로 무수히 많은 피억압계급들은 저항을 해 왔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 왔지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생산력의 문제, 즉, 변혁의 물질적 조건의 결여 때문이었고 따라서 사회주의 변혁의 물질적 조건이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비로소 사회주의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성으로 제기될 수 있었고 따라서 과학으로 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정치는 과학을 본질로 한다. 즉, 윤리인가 과학인가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과학이 일차적이고 윤리는 이차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과학적 노선의 수립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며 사상노선, 정치노선, 조직노선이 과학적으로 정립되는 것에 비례하여 운동이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맑스주의에서 윤리의 위치에 대해 논해 보자. 반공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것은 주로 사회주의자들은 비윤리적이라는 점을 드는 것이다. 대부분이 허구적인 것이지만 윤리라는 측정불가능성, 모호함이 반공주의자들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반공주의자들, 대부분의 지배계급이 들고 나오는 윤리 혹은 윤리학은 이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도외시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윤리학은 지배계급의 윤리학이고 또 사회에서 지배적인 윤리학이 된다. 그러나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은 저항 속에서 연대를 하고 해방의 길을 탐구하는 속에서 나름의 윤리를 형성해 간다. 즉,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는 지배계급의 윤리, 피지배계급의 윤리라는 두 개의 윤리가 존재하는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의 윤리와 노동자계급의 윤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맑스주의는 자신의 윤리학을 갖고 있다. 자본의 논리를 배격하고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윤리를 탐구하고 형성해 간다. 맑스주의 철학은 과학적 세계관을 정립하는 것을 기초로 주체의 능동성을 고양시키는 것이고 맑스주의 윤리학 또한 주체의 능동성의 고양이라는 점에서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를 해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20세기 초반 세계사회주의 운동은 맑스주의를 기반으로 고양의 추세를 지속하고 이는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한때 맑스주의자로서 활동했던 카우츠키는 러시아 혁명을 거부하고 수정주의로 전락한다. 카우츠키의 수정주의는 볼쉐비끼 혁명이 비민주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이로 인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민주주의의 관계가 사상논쟁의 쟁점으로 되며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에서 이를 정리한다. 먼저 카우츠키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사회주의의 양대진영(즉, 볼쉐비끼와 비볼쉐비끼) 간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두 가지 방법, 즉, 독재적인 방법과 민주적인 방법 간의 차이이다.”5) “프롤레타리아 독재, 따라서 일개인의 독재가 아니라 한 계급의 독재라는 말은 마르크스가 이러한 맥락에서 그 말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독재를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을 사실상 배제하고 있다.”6) 또한 카우츠키는 “문자 그대로 독재라는 말은 민주주의의 폐지를 의미한다”7)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카우츠키의 주장에 대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와 부르주아 국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문제”8)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카우츠키와 레닌의 대립의 요체는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관념의 영역에서 사고하다가 현실적으로 출현한 볼쉐비끼 혁명,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것을 거부하고 그 근거를 민주주의가 아니다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카우츠키의 입장은 여러 차원에서 비판될 수 있는데 첫째 계급을 떠나 민주주의를 사고한다는 점, 둘째 독재와 민주주의의 변증법적 관계를 보지 못한다는 점, 셋째 폭력에 대해 잘못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이다. 먼저 민주주의는 계급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는데 카우츠키는 이를 외면하고 “순수 민주주의”를 사고한다. 민주주의는 국가가 발생한 이래 다양한 모습을 취해 왔는데 그러한 민주주의는 각 사회, 각 역사발전의 단계가 갖고 있는 계급구성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노예주들의 민주주의였고 그것은 노예들에 대해서는 일종의 독재였다.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도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서 최초의 모습은 유산자들 즉, 부르주아들만의 배타적인 민주주의였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의해서 노동자들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는 형식적 참정권은 주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의 독재를 포장하는 것이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이와 같이 카우츠키는 민주주의와 계급과의 연관성, 민주주의와 독재의 연관성을 도외시하고 볼쉐비끼 혁명이 무력을 동원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비민주적이라고 규탄하고 자신의 배신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독재와 민주주의는 상호연관되어 있고 상호보충하고 또 상호 전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부르주아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모두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많은 나라에서 의연히 계급적 독재는 지속되고 있고 때로는 민주주의의 외양을 걷어 내고 군사독재가 전개되기도 하는 것이 비일비재하였다. 맑스주의에서는 이렇게 독재와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위선을 거부한다. 그것이 아니라 독재와 민주주의의 통일을 정확히 인식하고 철저한 독재를 통한 광범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내세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철저해질수록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더욱 광범해질 수 있다. 즉, 독재를 통하여 부르주아적 요소가 척결될 때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의 해방의 정도는 높아지는 것이고 따라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민주주의적 참여의 폭과 깊이가 확대될 수 있다. 또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광범해질수록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는 공고한 기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카우츠키와 레닌의 논쟁의 본질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소위 독재에 대립되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사회민주당들은 이후 독점자본주의의 주요한 지주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레닌은 카우츠키와 논쟁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가일층 발전시킨 것이었고 이와 같이 볼쉐비끼 혁명이라는 실천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라는 이론의 발전이 같이 통일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쏘련은 레닌의 사망 후에도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4. 수정주의의 2단계: 티토

 

레닌 사망 이후 2차 대전까지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폭발적인 고양의 길을 걸었다.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자본주의 각국에서 공산당이 생기고 식민지에서는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었는데 이는 레닌의 민족, 식민지 테제에 많이 기인하는 것이었다. 쏘련에서 1920년대에 발생했던 뜨로츠끼, 부하린의 좌, 우편향 노선은 패배하고 1930년대에는 단지 음모적 파괴분자로 역할했을 뿐이고 수정주의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데 2차 대전에서 파시즘이 몰락하고 쏘련이 승리하고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이 발전하고 중국이 반제반봉건 혁명을 수행함에 따라 세계정세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2차 대전 후의 세계정세는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 자본주의 세계의 미국중심으로의 재편, 식민지 체제의 붕괴로 요약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빨치산 투쟁으로 나찌를 몰아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하는데 공업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수립한다. 그런데 사회주의 건설로 나아가던 유고는 농업에서 집단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확립에 소극적이었고 나아가 국유화된 공업기업에 있어서 국가를 중심으로 한 통일적인 계획경제가 아니라 각 기업이 이윤논리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경제로 나아갔고 이를 포장하여 노동자 자주관리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은 다시 역전되어 사기업의 존재를 허용하게 되었고 이를 헌법에까지 보장하였다. 경제에서 이러한 노선과 더불어 정치에서도 사회주의 진영과의 단결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와 동맹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주의 세력과 반동부르주아 세력이 내전 중이었던 그리스에 대해 국경을 봉쇄하여 빨치산 세력에 타격을 주었고 한국 전쟁에서 미제국주의를 지지하고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제국주의를 지지하고 심지어 미제국주의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을 일컬어 시장사회주의라 하였다.

이러한 유고의 모습은 사회주의 혁명이 언제나 일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며 다양한 원인에 의해 왜곡되거나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유고의 모습에서 분석이 필요한 것은 노동자 자주관리라 일컫는 시장사회주의의 실체이다. 노동자 자주관리기업은 원료를 스스로 구매하고 생산물의 종류를 결정하고 스스로 가격을 결정하고 그것들을 스스로 판매하고 임금과 이윤의 분할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9) 즉,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달리 가격과 이윤의 결정을 국가가 아니라 기업 스스로 하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각 기업이 자본의 이윤논리에 따라 운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개개의 기업이 전체 국가의 계획과 무관하게 운영되게 되면 기업의 운영의 결정권은 전적으로 경영층이 갖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 되고 단지 사회주의적 포장을 걸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론적 측면에서 볼 때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의미하는 국유화가 어떤 의미인가가 중요한데 형식적 국유화를 넘어서서 개개의 기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첫째 개개 기업이 가격결정, 이윤과 임금의 분할 등에서 국가 전체의 계획에 종속될 것, 둘째 공장의 운영의 결정권이 경영층이 아니라 노동자 쏘비에트 혹은 노동자 대표대회로 대표되는 노동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고의 노동자 자주관리는 이 두 가지 모두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기업에서는 공장장은 국가 전체 경제의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임명한다. 이는 전문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장의 정치적 통제는 그 기업의 노동자 쏘비에트에서 갖는 것인데 유고의 노동자 자주관리에서 공장의 경영층은 단지 전문가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기업을 지배하는 주체가 되고 노동자들은 단순한 피고용자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윤을 중심으로 기업을 운영하게 되면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러한 유고의 시장사회주의는 사회주의라는 이름은 걸쳤지만 실제로는 거대한 국가자본주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유고가 사회주의 건설의 길을 배신하고 형식은 사회주의이지만, 내용적으로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 길을 걷고 미제국주의와 동맹의 길을 걸은 것은 2차 대전 이후의 정세에서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의 정세에서 유고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회주의 진영은 미제국주의와 동맹한 것이 아니라 미제국주의와 대결 속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고 건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고의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유고의 최고지도자인 티토 스스로가 이러한 길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원인은 유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점은 현재까지도 충분하게 해명되고 있지 못하고 향후의 연구과제이다. 다만 여기서 짚을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다. 유고 수정주의의 존재가 당시의 정세에서 의미했던 것은 막 성립한 세계사회주의 체제의 균열이었다. 이는 당시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문제인데 즉, 세계사회주의 체제의 성립,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재편과 냉전의 시작, 식민지 체제의 붕괴 등이라는 역사적 조건에 걸맞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구체화, 변화, 발전이 지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점을 조금 더 짚으면 러시아 혁명 이후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었고 2차 대전 후에는 어떻게 발전했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러시아 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한층 발전되었다. 즉, 레닌에 의해 세계 변혁전략이 제출되었던 것이다. 쏘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국가의 사회주의 건설, 자본주의국가에서 변혁적인 운동, 공산당의 창출, 식민지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창출, 이 세 세력의 동맹을 통한 제국주의와의 투쟁 등 총체적인 세계변혁 전략이 나왔던 것이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더 이상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세계변혁 전략 차원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일각에서 쓰딸린 비판의 일환으로 꼬민떼른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쏘련의 보위에 집중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악선동이다. 1920년대, 30년대에 있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양면의 통일이었다. 즉, 자본주의국가와 식민지 국가에서 해방투쟁과 쏘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통일이 당시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구체화였던 것이다. 꼬민떼른은 이러한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고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정세의 변화에 의해 1943년 해산되었다. 여기까지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차원에서 올바른 노선이었고 이는 꼬민떼른이 해산된 조건에서 전개된 2차 대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2차 대전을 관통하는 정치노선은 반파시즘 통일전선이었고 이 노선이 승리하여 영국과 미국 또한 한때 파시즘을 옹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반파시즘 전쟁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2차 대전이 쏘련의 승리로 끝난 이후였다. 많은 나라에서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미국을 여전히 우방으로 생각했고 심지어는 혁명의 후원자로까지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었는데 그리스, 터키 내전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개입, 중국혁명과 한국 전쟁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개입으로 미제국주의는 침략자적 본성, 제국주의적 본성을 분명히 드러내었던 것이다. 티토의 수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정세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인터내셔날은 즉각 건설되지 않았다. 대신에 꼬민포름이라는 공산주의 정보국이 건설되어 정보교환의 역할을 했다. 이렇게 2차 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구체화, 새로운 인터내셔날의 건설이 지체되는 상황에서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의 원칙, 새로운 세계정세에 걸맞는 세계변혁전략이 분명하게 수립되지 않았고 유고의 수정주의는 그러한 틈을 비집고 발생했던 것이다.

 

 

5. 수정주의의 3단계: 흐루쇼프, 똘리아띠

 

유고의 티토 수정주의가 2차 대전 후 새로운 정세에서 수정주의의 발생이었지만 그러한 경향은 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서유럽 대부분의 공산당들은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고 또 각국에서 주요한 정당으로 떠올라 서유럽은 혁명적 분위기에 쌓여 있었다. 또한 동유럽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의 성공과 사회주의 건설, 그리고 중국혁명의 성공 등은 세계적 차원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위신을 높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쓰딸린은 1953년 사망하였다. 쓰딸린 사망 후 말렌꼬프가 뒤를 이었고 이후 베리야에 대한 숙청이 있었고 그리고 흐루쇼프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이후 1956년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세계 각국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비밀연설을 통하여 쓰딸린을 전면 탄핵하였다. 명분은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실제 내용은 쓰딸린이 잔혹한 권력자이고 음모적이며 고문을 통하여 무고한 인민을 희생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밀연설의 내용에 따르면 쓰딸린은 세계사회주의운동의 지도자이기는커녕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로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세계사회주의 각국의 공산당들은 개인숭배 비판에는 동의했지만 서서히 균열이 발생하고 이는 중-쏘 논쟁이라는 세계적 대논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중-쏘 논쟁은 중-쏘 국경에서의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하여 세계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으로 분열한다. 이후 중국 측은 쏘련을 사회제국주의로 규정하면서 더 이상 세계사회주의 진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유명한 3세계론을 편다. 미국과 쏘련을 1세계, 서유럽 자본주의와 일본, 동유럽 등을 2세계, 그리고 나머지 지역을 3세계로 규정하고 중국은 3세계에 속한다고 하면서 3세계 나라들과 연대에 주력한다. 그 과정에서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파탄을 가져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1970년대의 세계공황은 혁명으로 귀결되지 않고 거꾸로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로 귀결되게 된다.

그러면 이러한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을 가져왔던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흐루쇼프의 쓰딸린에 대한 탄핵은 맑스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맑스주의자는 지도자에 대해 평가할 때 노선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왜냐하면 노선이야말로 계급과 대중의 이해관계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며 따라서 대중의 현실에 비추어 지도자를 평가하는 것이 과학적 접근이고 맑스주의적 접근인 것이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는 이러한 접근이 전혀 없고 오직 음모적 방식으로 쓰딸린을 깎아내리고 탄핵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후 흐루쇼프의 행보는 일관되게 수정주의적 길을 걸은 것이었다. 당의 성격에서 노동계급 전위당적 성격을 폐기하고 무당파적인 전 인민당으로 바꾸고 국가의 성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전 인민국가로 바꾼 것이었다. 흐루쇼프를 편향을 넘어선 수정주의라 규정하는 근거는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전 인민당과 전 인민국가는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 당과 국가에서 계급성을 지워 버린 것이었다. 이를 통해 쏘련에서 수정주의는 사상, 정치, 경제 등에서 활개치고 부르주아적 요소들은 거세게 자라났다.

흐루쇼프 집권 하에서 경제는 계획에서 균열을 가져오고 잔존하는 상품-화폐관계와 계획경제의 관계, 나아가 계획경제의 운용원칙 등에서 많은 논쟁이 일어난다. 이를 가리켜서 가격-계산 논쟁이라 하는데 이 논쟁은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일어나고 이 결과 1965년 경제에서 자본주의적 개혁이라 할 수 있는 꼬씌긴 개혁이 실시된다. 그러면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에 앞서 1950년대의 쏘련사회 현실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가격-계산 논쟁에 대해 살펴보자.

가격계산 논쟁의 전사(前史)를 보면 쏘련에서 국유화를 통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형성기부터 경제논쟁이 있었다. 계획과 상품-화폐관계의 논쟁이 1920년대부터 있었고 이는 30년대를 거치면서 균형론으로 수렴된다. 그리하여 “제1부문과 제2부문, 공업과 농업, 각 산업부문 간, 각 공화국의 발전비율, 축적과 소비의 균형 등의 문제가 논의”10)되었고 “사회적 생산물의 균형표는 사회적 생산물의 생산, 소비, 축적의 균형을 표시하며 그 내용은 경제발전을 보증하는 재생산의 주요한 비율(보전기금과 국민소득, 생산과 소비, 소비와 축적, 생산수단의 생산과 소비대상의 생산 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11) 이러한 논쟁과 이론의 발전은 사회주의 생산관계라는 토대 위에서 경제 전체의 의식적인 계획의 필요성 때문이었고 그것은 전체 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이라는 이론으로 나아갔다. 이후 가격-계산논쟁과 관련하여 주요한 쟁점으로 되는 것이 거래세(매상고세)인데 거래세는 생산수단에는 붙지 않고 소비재에만 붙이는 것인데 이를 통해 생산수단의 가격은 낮게 되고 그에 따라 거래세는 재생산과 관련하여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1950년대 가치론 논쟁의 주요한 쟁점으로 되었다. 1956년 쏘련의 한 학자는 가격개혁을 제안하며 소비재의 가격은 그대로 두고 생산재의 가격을 일시에 2배 인상할 것을 제안하였고 그리하여 “소비재와 생산재의 가격을 가치에 일치시키”12)자고 하였다. 이들 학자들은 ‘가치와 가격의 괴리’로 인해 계획경제에 장애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격논쟁과 함께 상품-화폐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논쟁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 쓰딸린은 쏘련에서 상품-화폐관계가 존재하며 그것은 사회주의적 공업과 집단적 농업 간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서 교환을 위해 상품-화폐관계가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국유기업의 생산물은, 특히 생산수단은 상품이 아니라는 것 등을 쓰딸린은 밝혔었는데(쓰딸린,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 참조) 쓰딸린 사후 흐루쇼프 하에서 상품-화폐관계 논쟁은 쓰딸린의 견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 학자는 “이질적인 생산물, 그래서 서로 이질적인 개인의 노동 간에도 교환은 불가피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 간의 등가관계를 밝혀줄 상품-화폐관계와 가치법칙의 작용이 필연적”13)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기존의 견해 즉, 교환을 규정하는 것은 계획경제의 균형 있는 발전법칙이며 상품-화폐관계와 가치법칙은 보조적인 활용의 대상이 된다는 관점을 폐기하고 상품-화폐관계를 전면화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놓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쓰딸린적 관점의 학자들은 “가치에서 괴리된 가격이야말로 계획의 핵심적인 개념이며 이러한 경향은 결코 약해지지 않”으며 “국가가 의식적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작용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경제과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포기하고 생산의 규제자로서의 지위를 가치법칙 혹은 평균이윤법칙에 양도”14)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과정에서 ≪자본론≫의 생산가격 개념을 도입하여 쏘련에서 생산물의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제출되었고 또한 국민경제 전반에 걸쳐 단일한 이윤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출되었다. 이렇게 가격-계산논쟁이 50년대와 60년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그것은 1965년의 꼬씌긴 개혁과 1967년의 도매가격 인상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논쟁이 보여 주는 것은 사회주의경제와 자본주의경제의 구분이 이론적 차원에서 무너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즉, 사회주의 사회의 생산물이 상품인가 아닌가, 가격의 규제자가 가치법칙인가 아닌가 등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50년대의 가격-계산 논쟁은 혼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경제의 무정부성과 달리 의식적 계획을 본질로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회에 잔존하는 가치법칙은 생산과 가격의 규제자라기보다는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가격은 사회주의사회에서 자원의 배분을 결정하는 ‘균형 있는 발전법칙’에 근거하여 국가가 규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원칙이 무너지고 생산가격론, 단일한 이윤율 등이 제기되었던 것이고 국가의 계획에 넓은 여지를 주는 생산수단의 낮은 가격,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거래세(매상고세) 제도가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쏘련에서 상품-화폐관계의 전면화였고 개별기업의 자본주의적 운영이었고 쏘련경제의 침몰이었다. 이렇게 가격-계산 논쟁은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맑스주의 원칙에서 이탈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경제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심지어 철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흐루쇼프가 집권한 이후 철학의 영역에서 ‘실천’논쟁이 발생하였다. 당시 동독 등에서 주로 논의되었는데 흐루쇼프 집권 후 동독의 통일사회당의 수정주의지도부 하에서 당에 의해 논쟁이 의식적으로 조직되었다. 논쟁의 요점은 철학의 근본문제인 정신과 자연의 문제, 의식과 물질의 범주가 변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5) 이는 유물론과 관념론을 가르는 가장 근본적인 지점인데 여기에서 수정이 제기된 것이었다. 제기된 수정의 요점은 의식과 물질, 정신과 자연이라는 범주에 실천이라는 새로운 범주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철학의 근본범주는 정신-실천-자연이라는 것이 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인간의 실천을 철학에서 전면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것을 철학의 근본문제라는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실천은 철학에서 매우 주요한 주제이고 많은 논의가 되어온 주제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해방되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주체의 문제, 주체의 능동성, 실천의 문제는 특별히 철학적 고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수긍되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철학의 근본문제의 변경의 문제로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실천이 철학의 근본범주에 들어가 정신(의식)-실천-자연(물질)이라는 것이 철학의 근본범주가 된다면 이것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이고 이는 유물론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실천’적으로 폐기되는 것이다. 이것이 흐루쇼프 수정주의 하에서 벌어진 철학논쟁의 실상이다.16)

이와 같이 흐루쇼프의 수정주의는 편향을 넘어서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건설을 무력화시키는 부르주아적 요소였다. 또한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의 오른팔이었는데 중국에 의해 중-쏘 논쟁 당시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주의’라 혹평을 받았다. 그러면 이러한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단지 쓰딸린이 사람을 잘못 본 것으로 보면 되는가? 아니면 쓰딸린을 넘어서고자 하는 흐루쇼프의 욕망 때문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러한 접근은 진실의 일면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과학적인 접근, 맑스주의적 접근이 아니다.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과 전개를 추적하면 흐루쇼프의 노선은 쓰딸린 당시의 당내 논쟁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쓰딸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 이를 기초로 쓰딸린을 탄핵하고 수정주의를 전면화하는 길을 밟은 것이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경로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흐루쇼프가 자신의 노선을 숨기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노선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대중적 검증을 받고 당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인데 이는 단지 흐루쇼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선상의 한계 혹은 오류의 문제이다. 즉 당시 쏘련 사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 혹은 오류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쏘련 사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이 공고했다면 흐루쇼프가 권력을 잡을 수도 없었고 또 설사 권력을 잡았더라도 수정주의를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과 이론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발생자체가 역사적인 것이다. 맑스에 의해 처음에는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단지 인수해서는 혁명이 불가능하며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해야만 한다는 인식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 국가를 분쇄한 이후 혁명적 독재를 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발전하였고 이후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론으로 정식화되었다. 이러한 맑스의 인식은 레닌에 의해 한층 구체화되었는데 그것은 쏘비에트라는 형식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를 구체화한 것이었고 나아가 연방국가의 형성과정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레닌 사망 후 쓰딸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권력의 장악을 핵으로 하는 직접적인 혁명과정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서 부딪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을 정식화한 것이었다. 레닌 사망 후 얼마 되지 않은 1924년에 쓰여진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쓰딸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3가지 차원에서 정리한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둘째 부르주아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셋째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형태로서 쏘비에트 권력이 그것이다. 첫 번째 혁명의 도구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국내외의 반혁명의 진압과 사회주의 건설로 근로인민을 조직하는 것이며,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억압, 민주주의에서 부르주아지의 배제를 말하며, 쏘비에트 형태는 “국가의 전(全) 권력과 전 국가기구의 영속적이고 유일한 기초”로서 파악된다. 이러한 쓰딸린의 인식은 1926년에 쓰여진 “레닌주의의 문제에 대하여”에서 일보 전진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투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지속이다”라는 레닌의 언급을 강조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세 측면을 정식화한다. “첫째 착취자들의 억압, 조국의 방어, … 둘째, 피착취 근로대중을 즉시 부르주아지로부터 분리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러한 대중들과의 동맹을 강화하며… 셋째, 사회주의 조직화, 계급의 폐지, 계급 없는 사회,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활용.”17) 이러한 세 측면은 억압의 측면, 동맹의 측면, 건설의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악은 레닌 당시의 인식보다 일보 전진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사회주의 건설에 부딪히고 있던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쓰딸린은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관련을 해명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이다”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쓰딸린은 당의 지도적 역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분해야 하며 당의 지도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당은 계급의 한 부분일 뿐이며 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필요한 당의 권위는 노동계급의 당에 대한 확신, 지지에 근거한다는 것 등을 들어 지노비예프의 당독재론을 비판한다.18) 이러한 쓰딸린의 언급은 당시의 사상투쟁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20세기 내내 사회주의국가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이고 앞으로 건설될 21세기 사회주의에서도 쟁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전위당 없이 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는 당 이외에 많은 조직들이 필요한데 쏘비에트라는 대중조직, 여성, 청년조직 등 대중이 주체가 되는 조직들이 국가에 참여하면서 현실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당의 역할은 국가라는 폭력의 담지자와 달리 지도적, 사상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노선과 정책의 올바름에 의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여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당이고 국가는 물리적인 힘을 본질로 하여 억압의 역할, 동맹의 역할, 건설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과 국가는 한편으로는 통일될 수밖에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딸린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역사적 발전에 따라 구체화되는데 1930년대에는 쏘련 헌법으로 표현된다. 쏘련의 헌법은 유보조항 없는 민주주의, 인류역사상 가장 전면적인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것이 쓰딸린에 의해 강조되고 있다.19) 이러한 쏘련헌법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통일을 이론을 넘어서서 정치적 현실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2차 대전 전까지 20년대의 상황, 30년대의 상황에 맞게 발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2차 대전 이후의 상황이다. 2차 대전 후의 상황은 20년대, 30년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러한 상황 변화에 맞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이론적 정립이 없었다는 것이다. 2차 대전 후 쏘련 사회는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근본적인 상황변화에 직면해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세계사회주의 체제가 성립하였고 세계 각국에서 공산당들이 주요한 당으로 부상하고 식민지 체제가 붕괴되는 상황이었고 이에 대해 제국주의진영은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냉전을 개시하는 상황이었다. 국내적으로는 공업과 농업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확립하는 단계를 지나 사회주의 경제가 성숙하고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단계로 접어들었고 이에 따라 쏘련 사회 내적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도시와 농촌의 모순, 전체경제에서 계획과 잔존하는 상품-화폐관계의 모순, 잔존하는 관료주의와 인민대중의 모순 등이 전면적으로 대두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근본적인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 정립되어야 했는데 여기서 중대한 공백이 있었던 것이다. 쓰딸린은 “쏘련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제문제”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일정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모순, 도시와 농촌의 모순이 점차 해결되고 있고 상품-화폐관계와 가치법칙이 활용의 대상이라는 원칙론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모순이 쏘련 사회가 해결해야만 하는 주요모순으로 전면적으로 대두되고 있고 나아가 이들 모순을 해결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허점, 공백 때문에 쓰딸린 사후 권력의 급격한 변동이 있었던 것이고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대두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흐루쇼프가 수정주의를 전개하면서 가장 우선시한 것은 국내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왜곡하고 실질적으로 폐기하는 것이었고 국제적으로는 핵무기의 존재를 준거로 하여 제국주의와 계급적 화해를 하고 세계 각국의 해방투쟁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고하게 한다.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각각의 역사적 단계가 바뀔 때마다 대두하는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론적으로 나아가 정치적으로 변화, 발전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닌의 테제 “혁명의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이다”를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건설과정은 혁명의 과정이다. 즉, 자본주의라는 사회구성체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완전한 공산주의라는 사회구성체로 이행하는 과정이 사회주의 건설과정이며 따라서 사회주의 건설의 과정은 혁명의 과정이며 사회주의 건설에서도 근본문제는 국가권력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레닌의 테제를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는 사회주의 건설과정 전체에 확장시킬 때만 우리는 수정주의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한편 흐루쇼프 수정주의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흐루쇼프 수정주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파탄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즉, 흐루쇼프 수정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해서도 전면적으로 공격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결과가 아니라 흐루쇼프 이전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어떠했는가이다. 티토의 수정주의가 2차 대전 후 상황에서 새로운 상황에 맞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정립의 지체, 인터내셔날의 건설의 지체의 공백을 틈타 발생했다는 것은 이미 언급되었다. 그런데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는 양상은 역으로 그 당시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수준이 어떠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권력을 잡고 20차 당대회에서 쓰딸린을 탄핵한 후 동유럽 등 세계 각국의 공산당, 노동자당의 지도부를 전복하는 일에 착수하고 동유럽의 대부분의 당들의 지도부를 수정주의자로 교체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세계사회주의 진영에서 쏘련의 위상, 동유럽에 쏘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 쏘련과 동유럽의 경제적인 연관 등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점들로 인해 동유럽 각국 공산당의 노선이 수정주의로 변화한 것은 근본적으로는 당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취약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2차 대전 후의 상황에 걸맞는 세계변혁전략으로 각국의 공산당들이 통일되는 수준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공고했다면 아무리 쏘련 공산당의 지도부가 수정주의 노선을 걷는다고 해도 여타의 공산당들의 노선이 수정주의로 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세계 각국의 공산당의 자주성과 세계사회주의 진영과 운동의 통일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점 역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현실 정치적 원칙이라면 역사적 발전단계, 세계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끊임없이 변화,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동유럽과 서유럽의 공산당과 노동자 당에 확산되는 과정은 단지 전복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서유럽의 공산당에서는 흐루쇼프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과 노선, 즉, 사회주의 진영이 제국주의 진영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과 한편으로는 핵무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제국주의와의 투쟁이 아니라 공존 속에서 평화롭게 혁명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의회에서 다수파를 형성하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노선이 점차 확산되었다. 이딸리아의 똘리아띠가 그러한 주장의 선봉에 서 있었고 그는 이를 가리켜서 구조개혁론이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한다.20) 즉, 부르주아 국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를 수립하는 방식이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 내부에서 구조를 서서히 개혁해 가는 것을 통해 사회주의 권력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환상적이고 당시의 인식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제국주의세력의 혁명세력에 대한 개량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서유럽의 공산당들이 소위 유로꼬뮤니즘이라는 수정주의로 전화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6. 수정주의의 4단계: 덩샤오핑, 장쩌민 등

 

흐루쇼프 수정주의는 중국의 마오쩌둥 등에 의해 철저히 비판을 받고 이는 중-쏘 논쟁으로 표현된다.21) 그런데 중국 또한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영향을 내적으로 받고 있었는데 이는 류사오치, 덩샤오핑을 대표로 하는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파)와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하는 조반파(造反派: 반대를 일으키는 당파)의 대립으로 표현되었다. 이들의 대립이 최초로 나타났던 것은 흐루쇼프의 쓰딸린 탄핵의 파고가 세계사회주의 진영으로 퍼져 가던 1957년, 58년이었다. 중국 내적으로는 이 당시가 반제반봉건 혁명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마오쩌둥 등에 의해 주도된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이 내적으로 부각되고 또 대외적으로 개인숭배 비판이 확산되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을 류사오치에게 넘기고 2선으로 물러난다. 그리하여 류사오치 국가주석과 덩샤오핑 총리체제가 되었는데 이들은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에 걸쳐서 농업에서 집단화에 소극적이었고 반대로 농민들의 사적 부속지의 확대, 상품-화폐관계의 확대 등 흐루쇼프와 유사한 정책을 취한다.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겉으로는 중국 공산당의 흐루쇼프 비판에는 보조를 같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오쩌둥 노선과 다른 수정주의 노선을 중국에 도입하는 정책을 지속한다. 이리하여 중국 공산당에는 두 개의 파가 생기게 되었는데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는 국제정세의 변동을 계기로 ‘뒷방늙은이’였던 마오쩌둥은 대반격을 하게 되고 그것이 문화대혁명이었다. 문화대혁명은 대중운동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지속 노선이었는데 류사오치, 덩샤오핑은 당시 실권파로 불리며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류사오치는 하방된 곳에서 사망하였고 덩샤오핑도 하방되었다. 그리하여 1965년부터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까지 약 10여년에 걸쳐 문화대혁명이 진행되었는데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이 10년의 무정부주의적 동란’이었다고 혹평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은 대중들의 폭발적 참여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혁명을 했음에도 남아 있는 관료주의, 구사회의 악습, 정치과 교육 등에서 대중의 소외 등을 극복하려 했고 그 지도세력으로서 군대, 당, 혁명위원회의 3자 연합이 구성되었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은 초기의 건강성을 차츰 잃고 편향이 발생하였다. 주로 좌편향이었는데 지식인에 대한 적대적 태도, 문화대혁명 추진세력들 간의 무장충돌 등이 그러했고 또 결정적으로는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꼽히던 국방부장 린뱌오가 사망한 후에 실질적인 동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린뱌오 사망 후에 유행했던 것이 비림비공(批林批孔)이었는데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한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망가다 죽었다고 발표된 린뱌오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의미가 있지만 공자를 비판한다는 것은 문화대혁명이 대중들의 실질적 이해관계보다 관념적 논쟁으로 흐르고 따라서 정치적 편향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문화대혁명이 흔들리자 다시 주자파가 복권되는 양상이 벌어지는데 저우언라이 총리의 주도로 덩샤오핑이 부총리로 복권되었다. 그러나 복권된 덩샤오핑은 다시 실각하는데 여전히 주자파 노선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1976년에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이 사망하게 되자 중국은 격랑에 휩싸이게 되는데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었던 화궈펑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주자파에게 밀려나고 이후 덩샤오핑은 실권을 쥐고 개혁, 개방노선을 밀고 나간다. 1978년 중국 공산당 11기 3중 전회에서 공식적으로 개혁, 개방을 선언하고 이른바 사상해방을 주장하여 수정주의를 전개할 사상적 토대를 확보한다. 이후 1980년대에 농업에서 집단적 농업인 인민공사를 해체하여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소하고 1990년대에 공업에서, 도시에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회사법을 도입하여 사회주의기업을 자본주의적 회사로 전환시키고 노동자계급은 피착취자로 전락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덩샤오핑은 끝까지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았는데 그것은 문화대혁명의 교훈 때문이었다. 즉, 한때 대중들의 타도 대상이 되었던 덩샤오핑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를 버렸다는 것이 공식화되면 중국인민의 저항이 시작될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 준다’는 방침에 의해 대규모의 사회주의 기업은 국유를 유지하고 중소형의 기업은 사유화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자본주의적 사영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 사영 자본가계급, 그리고 국유형식의 독점자본가들은 오늘날 중국의 실질적인 지배계급이 되었다.22)

덩샤오핑이 사회주의라는 수식어를 놓치지 않으면서 유지한 것이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덩샤오핑의 뒤를 이은 장쩌민은 2001년 3개 대표론을 발표하여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정식으로 허용하였다. 3개 대표론은 중국 공산당이 근본적으로 대표하는 3가지를 요약한 것인데 첫째, “우리 당은 시종 중국의 선진적 생산력의 발전 요구를 대표”하고 둘째, “우리 당은 시종 중국의 선진적 문화의 전진방향을 대표”하고 셋째, “우리 당은 시종 중국의 가장 광대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23) 이러한 3개 대표라는 것은 겉으로는 일반적인 언급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는 첫째의 선진적 생산력 발전 요구를 대표한다는 내용에서 자본가(사영) 또한 선진적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기초로 자본가의 공산당 당원가입을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장쩌민의 3개 대표론은 경제에서 자본주의를 도입하더라도 당은 무산계급적 성격을 유지한다는 최소한의 선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었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당 자체가 부르주아화하는 길을 걸었다. 자본가가 당원이 되어 권력에 마음껏 접근하고 공산당원 또한 자본가가 되는 것에 걸림돌이 없어졌다. 이것이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면 2007년에는 아예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지배를 인정하는 물권법이 제정되었다. 이른바 사적 소유 보호법이라 불리는 물권법은 자본가에게 있어 사활적인 것이었다.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이 핵심인데 문제는 이것이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까지 공식적으로,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물권법 제정이전에 자본가계급은 경제적 차원에서 지배계급이었다. 그런데 물권법 제정 이후에는 법적 지배계급, 즉,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올라선 것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권법은 소유권을 사회질서의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는 법이다. 수십조, 수백조에 달하는 독점자본의 부가 인정되는 근거는 단 하나인데 그것은 소유권이다. 따라서 소유권을 물권법 차원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이러한 자본가계급의 무제한적 부의 축적을 허용하고 그들의 지배를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물권법의 제정으로 법적 의미에서 중국은 공식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전화한 것이었다. 이것은 장쩌민의 뒤를 이은 후진타오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수정주의는 계급성을 타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지배를 타격하고 결국에는 자본가계급의 지배의 부활을 초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중국의 주자파는 수정주의의 본질을 보여 주는데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를 적대하는 경향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게 된 계기가 이른바 진리표준 논쟁이었는데 이는 진리의 검증기준은 실천이라는 맑스의 명제를 갖고서 화궈펑을 타격한 것이었다. 그리고 권력을 잡자마자 한 것이 사상해방을 통해 맑스-레닌주의의 원칙으로부터 자유를 확보하고 이어서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자본주의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그러면 이들 주자파의 집권, 중국에서 자본주의의 부활은 불가피했는가를 살펴보자. 쏘련에서 흐루쇼프 수정주의의 등장이 2차 대전 후 쏘련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실천면에서 발전의 지체 때문이었다면 중국에서 주자파의 집권은 문화대혁명에서 나타난 좌편향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당시 중국 공산당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에서 일정한 한계와 오류가 있었다. 이것의 극적인 표출이 린뱌오의 사망이었는데 마오쩌둥과 린뱌오가 미국과 국교수립 등의 문제로 견해차가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이었고 군대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린뱌오 입장에서 미국과의 화해 나아가 국교수립에 대해서는 마오쩌둥과 견해를 달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평가해 보면 마오쩌둥이 제기한 쏘련 사회제국주의론, 그리고 3세계론은 일정한 편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쏘련은 당시 수정주의 지도부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유지되는 사회주의 사회였다. 따라서 당시 중국 공산당은 쏘련이라는 국가전체를 적대시하는 사회제국주의론을 펴는 것이 아니라 쏘련의 수정주의자들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펼 필요가 있었다. 또 3세계론도 과한 것이었는데 미국과 쏘련이라는 초강대국-서유럽자본주의와 일본, 그리고 동유럽 등의 2세계-나머지 3세계라는 도식은 맑스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계질서는 제국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이 핵심이었고 이 과정에서 수정주의 세력은 중간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의 대립이 20세기 세계사의 주요한 내용이라는 진영테제는 60년대, 70년대에도 여전히 유효했었던 것이다. 또 여기서 60년대, 70년대의 중국의 위치와 1920년대, 30년대의 쏘련의 입장을 비교해 보면 당시 중국 공산당의 세계질서와 정세에 대한 입장, 세계변혁 전략 등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70년대 중국사회주의의 위치는 2, 30년대의 쏘련 사회주의보다 훨씬 호조건에 있었다. 2, 30년대의 쏘련 사회주의는 단지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하고 고립된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어려움의 가장 극단적인 표출이 독일 파시즘의 쏘련 공격이었다. 그러나 6, 70년대의 중국사회주의의 처지는 단지 하나의 사회주의국가가 아니었다. 수정주의세력을 제외하더라도 중국, 북베트남, 이북(조선), 알바니아, 쿠바 등 사회주의 진영이 존재하고 있었고 또 쏘련, 동유럽의 수정주의세력도 그 당시만 해도 감히 사회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지는 못하던 상황이었다. 또 세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이 고양되고 식민지체제가 해체되던 것도 중국사회주의에 호조건이었다. 즉, 6, 70년대 중국사회주의는 전혀 고립의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의 공격의 방향이 중국전체로 향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긴장이 린뱌오와 마오쩌둥의 견해차의 배경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회주의진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할 것이 아니라 진영테제는 의연히 유지되지만 다만 그 내용과 주체의 면에서 일정정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것으로 나아갔어야 했다. 즉, 쏘련이 수정주의의 길을 걸음으로 해서 세계사회주의 진영의 구심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고 선언하고 제국주의 세력과 투쟁하면서 수정주의세력을 고립시키는 세계변혁전략을 수립했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문화대혁명에서 좌편향, 세계정세에 대한 판단의 오류 등이 겹치면서 중국 내적으로 혁명파(조반파)의 위치가 약화되었고 이 틈을 비집고 주자파가 복권을 시도하고 마오쩌둥 사망 후에 주자파가 권력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역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발전의 문제, 그리고 세계변혁전략을 핵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문제가 사활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7. 결론: 수정주의 역사의 교훈

 

수정주의의 존재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운동의 한계와 오류의 반영이라 볼 수 있다.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를 제기할 수 있었고 일정한 반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제2 인터내셔날 시기의 평화적 발전으로 인해 의회주의적 경향, 합법주의적 경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기의 수정주의는 레닌에 의해 분쇄되었고 세계사회주의 운동의 고양추세는 지속되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 쏘련 사회주의 건설로 이어졌고 이는 2차 대전에서 쏘련의 승리와 중국혁명의 성공을 통해서 사회주의 진영이 제국주의진영을 압도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2차 대전 후의 새로운 정세, 새로운 세계질서에 걸맞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론의 발전, 세계변혁전략의 발전이 지체되었고 이를 틈타 흐루쇼프 수정주의가 발생하였다. 흐루쇼프가 중-쏘 논쟁의 과정에서 실각한 것은 마오쩌둥 등 중국 측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 등 중국사회주의세력은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과 세계변혁전략에서 3세계론, 쏘련사회제국주의론 등 일정한 오류를 범했고 나아가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좌편향으로 인해 주자파의 집권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였다.

이제 수정주의의 문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자면 거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수정주의는 정치적 현실의 문제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주자파는 쏘련의 수정주의자들과 달리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집권하고 있고 또한 사회주의라는 위장막을 쓰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최근까지도 공산당, 노동자당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세계사회주의운동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이북(조선)과 쿠바라는 사회주의국가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사회주의 운동이 다시 전진하기 위해서는 중국 수정주의를 극복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20세기 사회주의가 21세기 사회주의자들에게 남긴 과제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세력과 투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정주의세력의 영향력을 극복하는 투쟁을 전개해야만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전략을 가질 때만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적 운동으로 거듭날 수 있다.

둘째, 수정주의는 또한 이론의 영역에서 수많은 문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왜냐하면 수정주의의 존재,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와 현실은 바로 사회주의 운동의 한계와 오류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발전의 문제와 세계변혁전략을 핵으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발전의 문제로 요약된다. 21세기 지금의 현실에서 요구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론의 발전은 무엇을 요구하는지,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는 길은 어떠한 것인지 등이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화로 인해 변화, 발전한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그리고 그것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대공황에 처해있는 현실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세계변혁전략 차원에서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지도 역시 과제로 제기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한편으로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수정주의로 집약되는 20세기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 변화, 발전된 자본주의의 현실에 걸맞게 사상, 전략과 전술, 조직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1) V. I. 레닌, “맑스주의와 수정주의”, ≪레닌 저작집≫ 4-3, 전진출판사, 1991, p. 166.

 

2) 같은 곳.

3) 같은 글, p. 171.

 

4) 이상은 레닌의 베른슈타인 비판의 요약이다. 같은 글, pp. 166-167.

 

5) K. 카우츠키, ≪프롤레타리아 독재≫,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소나무, 1988, p. 13)에서 재인용.

 

6) 같은 책, p. 17.

7) 같은 책, p. 18.

8) 같은 책, p. 14.

 

9) 인민일보 편집부, “유고슬라비아는 사회주의 나라인가?(IS YUGOSLA-VIA A SOCIALIST COUNTRY?)”, 1963. <참조> http://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cpc/yugoslavia.htm

 

10) 윤종인, “소련에서의 계획과 가격 이론에 관한 일고찰”, 서울대 석사논문, 1992, p. 11.

 

11) 같은 글, p. 14.

12) 같은 글, p. 33.

13) 같은 글, p. 36.

14) 같은 글, p. 40.

 

15) 이선일 편역, ≪마르크스 레닌주의 실천논쟁―1960년대 동독의 실천 논쟁≫, 거름, 1989 참조.

 

16) 자세한 내용은 문영찬, “동구 ‘실천’논쟁에 대한 평가”, ≪정세와 노동≫ 제33호(2008년 3월), 노사과연을 참고하시오.

 

17) J. V. 쓰딸린, “레닌주의의 문제에 대하여”, ≪스탈린 선집≫ 제1권, 전진출판사, 1988, p. 209.

 

18) 같은 글, pp. 210-230.

 

19) J. V. 쓰딸린, “USSR 헌법초안에 대하여”, ≪스탈린 선집≫ 제2권, 전진출판사, 1990 참조.

 

20) 인민일보 편집부, “똘리아띠 동지와 우리 사이의 차이”, 1962.

    <참조> http://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cpc/togliatti.htm

 

21) 중-쏘 논쟁에 대한 요약은 문영찬,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쏘 논쟁”, ≪20세기 사회주의와 반혁명≫(≪노동사회과학≫, 제4호), 노사과연, 2011을 참고하시오. 그리고 중-쏘 논쟁의 원자료를 보고자 한다면 http://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index.htm을 참고하시오.

 

22) 덩샤오핑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비판은 문영찬, “등소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비판”, ≪공황과 사회주의≫(≪노동사회과학≫, 창간호), 노사과연, 2008을 참조하시오.

 

23) 장쩌민, “중국 공산당 성립 80주년을 경축하는 대회상의 강화”, ≪인민일보≫, 2001년 7월 2일자.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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