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옌안문예강화 당파적으로 읽기 (2)

 

최상철 ∣ 노사과연 운영위원

 

 

마오의 신민주주의 혁명전략

 

마오와 혁명 동지들은 1934년 장시쏘비에트의 붕괴의 교훈을 철저히 반성하였다. 장시쏘비에트의 붕괴는 국민당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의 우의에 근거한 대대적인 토벌작전과 홍군의 무리한 군사전술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당시 중국공산당을 지배하던 좌경노선의 오류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반봉건투쟁은 지나치게 좌경주의적 경향을 띠었고, 도시지역의 소부르주아와 민족자본가계급에 의해 제기되었던 반제ㆍ반봉건ㆍ민주 투쟁과 유기적인 결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수많은 동지들의 피와 시체를 넘어서 고난의 대장정을 통해 마침내 수립한 옌안의 정권은 과거의 오류를 극복해 낸 것이었다.

마오는 중국 사회의 계급분석을 치밀하게 해낸다. 그러면서 착취계급 지주계급 중 항일전쟁 중에 항전에 참가하는 적극성을 띠고 있는 중소지주 계급에 주목한다. 마오는 농민계급 중 70%를 차지하는 반(半)프롤레타리아 상태의 빈농을 혁명의 최대동력으로 보면서도 20%의 중농과 5%의 부농에 대해서도 섬세한 주의를 기울인다. 결론적으로 무산계급의 영도 하에서만 빈농과 중농이 해방될 수 있고, 또 무산계급은 빈농 및 중농과 확고한 동맹을 맺어야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음을 강조한다.1) 이 과정에서 도출된 마오의 신민주주의 혁명전략은 1단계 무산계급의 영도 하에 각 혁명계급연합 독재(专政)에서 2단계 사회주의 혁명으로 요약할 수 있다.2) 그중 항일 무장투쟁은 제1단계에 해당하는데 이 때 주요한 혁명동력이 바로 무산계급, 농민, 지식인 및 기타 소자산계급이다. 홍군이 새롭게 연 해방구의 권력은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기초로 하는 연합정권이었다. 그것은 민족자산 계급과 개명(開明)한 향신(鄕神)계급의 참여3)도 보장한 인민민주주의적 권력이었다. 새로운 해방구에서는 무리한 토지혁명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적 착취를 근절한다는 입장에서 소작료와 이자율의 인하를 추진한 혼합경제 체제를 유지하였다. 부재지주의 토지는 공동으로 경작되었으며, 세금은 현물 형태로 징수되었는데 세율은 일본인들이 요구하는 세금의 10%선에서 동결되었다. 또한 소비자협공조합과 산업협동조합도 널리 퍼져 있었다.4) 중국 공산당은 계급투쟁과 계급연합을 강조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을 농촌근거지에서 착실히 실천하였다.5)

마오의 혁명론은 레닌의 이론6)을 중국 현실에 맞게 적용한 독창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농민에 대한 섬세한 이해에 있었다. 마오는 결코 농민대중을 피동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았다. 진나라 시대 진승ㆍ오광(陳勝ㆍ吳廣)의 난에서부터 19세기 태평천국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농민봉기를 꿰뚫어 보면서 마오는 “중국봉건사회”에서는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에 반항하는 “농민의 계급투쟁, 농민의 봉기, 농민전쟁만이 역사 발전의 참된 원동력이었다”며 봉건사회에서 농민 투쟁의 의의를 밝혀낸다.7) 그리고 반식민지ㆍ반봉건 사회8)인 중국의 현 단계에 대해서 새롭게 분석해 내며 공산당의 영도로 이루어지는 농촌 근거지의 유격전쟁의 의의를 밝혀내었다.9)

중국 공산당 무장 유격대의 주력이 바로 농민이었다. 그것은 중국 공산당의 세심한 농민정책이 직접적인 무력으로 나타난 결과였고 그 안에서는 여성과 노인의 역할도 지대했다. 유격대는 군사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ㆍ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세력이었다. 전투가 없을 때는 경작을 도왔으며 유능한 선전자로서 역할을 하였다.10) 파업이 노동자들의 학교라 하듯이 중국혁명에서는 바로 유격대가 농민대중 사이에서 혁명적 지도를 발전시키기 위한 위대한 학교였다.11)

 

 

“강화”를 둘러싼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은 노농병 강고한 일체화를 통한 유격전을 통해 치열한 항일항전을 벌여 내었다. 그러나 노농병 대중과 지식인들의 일체화를 이뤄 내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오는 지식인과 청년학생들이 대중의 혁명투쟁 속에 뛰어들기 전에는 주관주의와 개인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동요계층임을 지적한다. 마오는 지식인의 선봉적 역할과 교량적 역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지식인들 중 일부가 긴급한 혁명의 고비에서 대오를 이탈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그중 소수는 혁명의 적으로 변하는 냉정한 현실에 눈을 감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이러한 지식인의 결함은 오직 장기적인 군중투쟁 속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12) 문예는 바로 지식인과 인민대중의 결합을 위한 유력한 무기이다.

항일의 근거지의 문예운동은 파쇼화하고 있는 국통구나 점령구의 억압적인 환경에 비해 대단히 민주적이었으며, 문예활동가가 노농병에 접근하기 용이하였기에 새로운 특색을 드러냈다. 항일의 근거지의 문예운동은 혁명근거지 문예운동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새로운 역사 조건하에서 발전한 것이었다.13) 그런데 해방구의 조건은 녹록치만은 않았다. 옌안을 비롯한 해방구 전역에서는 근대적인 산업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마오의 문예이론은 1930년대 쏘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론을 계승ㆍ발전시킨 것이지만 1930년대 쏘련과 항일전쟁 시기 옌안은 그 조건이 너무도 달랐다. 옌안에서는 1930년대 쏘련에서처럼 공업국유화 및 농촌의 기계화를 통해 노농연대를 달성하는 방식으로 도시 농촌 문제의 해결하는 것을 당면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옌안은 문예적인 토양도 척박했는데 홍군이 처음 도착할 당시에는 학계, 문단, 극단, 화단, 악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중국 전역에서 옌안에 모여든 수많은 문예활동가들 중 일부가 초기에 활동공간을 찾지 못해 탈락했던 것은 이들 의식의 불철저함도 원인이지만 이와 같은 옌안의 객관적 토대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일제의 삼광정책과 국민당의 반동적인 공세가 겹쳐 변구의 인구가 절반으로 격감했으며 한때 50만을 넘기던 팔로군은 30만으로 줄은 것이 해방구의 현실이었다. 또 화베이(华北)지역에 지속된 심각한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농산물의 생산량이 격감하고 전염병마저 돌았으며 해방구의 경제사정이 극도로 악화된 조건은 해방구를 극렬하게 압박해 오고 있었다. 당시의 생필품 부족은 지도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린뱌오(林彪)의 회상에 따르면 밤에 켜는 등불의 기름마저 없었다고 한다.14)

부르주아 전문가의 획득을 주요한 과제로 설정하고15), 과거 우수한 문화적 유산의 계승ㆍ발전16), 즉 정권의 문화를 통한 대중에 대한 간접봉사를 주요과제로 설정한 혁명 직후 레닌의 방침17)을 중국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반복하는 것은 껍질만 남은 교조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일 전쟁 수행을 위한 노농병 대중의 문화적 욕구의 충족, 그 정치적 사상적 생활면에서의 계몽, 다시 말해 대중을 향한 문화ㆍ예술의 직접적 봉사가 문화정책의 중심과제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18)

옌안에 모여든 수많은 지식인 중에는 유학파 출신도 더러 있고, 이들은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 등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학생 중에는 옌안의 생활 터전인 황토 벼랑의 토굴을 파기 전에는 육체노동을 해 본 적이 없는 이들도 있었다.19) 초판 2천 부 3판을 찍어도 6천 부밖에 책을 찍지 못하는 국통구에 비해 옌안에는 혁명을 통해 단련된 책을 볼 수 있는 간부만 1만이 되었다.20) 그와 달리 직접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인민대중은 80%가 문맹이었다. 당시의 문맹률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마오가 1927년에 집필한 “후난농민운동시찰보고(湖南农民运动考察报告)”에서 90%의 중국인민이 문화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을 지적하고 있으며21), 1945년 “연합정부론(联合政府论)”에서는 80%의 문맹 퇴치를 신중국의 주요사업22)으로 설정하고 있다. 심지어 해방구인 샨시(陝西), 간쑤(甘肃), 닝샤(宁夏) 변구23)에서도 인구 백오십만 중 문맹자가 백만24)이나 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지식인과 인민대중은 그 생활과 지적 조건에서 너무나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지식인에 대한 교육과 인민대중에 대한 교육을 결합하는 것은 지대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문예 운동을 순수 문예운동으로서가 아니라 해방구 각지에서 대대적인 생산운동과 결합하여 진행되었다.

해방구에서는 항일군정대학(抗日军政大学), 산베이공학(陕北公学), 루쉰예술학교(鲁迅艺术学院), 군사학원(军事学院), 중국여자대학(中国女子大学), 맑스-레닌학교(马克思列宁学院) 등 각급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으며, 학생들은 교육과정을 이후에 농촌과 전선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식자운동으로 표상되는 대중적인 학습운동의 주요 활동가가 되었다. 이 운동은 문맹 퇴치를 위한 사회교육 운동, 동계학교, 야학, 식자반, 벽신문, 소선생(小先生)운동의 형태로 널리 퍼져 갔다.25) 모든 교육은 무료였으며 또 의무교육이었다. 몇 개 지역에서는 학령기 어린이 중 문자해독 가능비율이 80%나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26) 이런 조건에서 문인들은 ‘문장하향 문장입오(文章下乡 文章入伍)’27)라는 표어에 따라 전선에 배치되어 중국 현실에 기초한 사회주의 이념을 선전하였으며, 병사들을 위문하고 인민을 교육하는 보고문학을 집필하였으며, 노농병 인민대중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 시기 마오가 문무의 두 전선을 강조했던 것은 말뿐인 것이 아니었는데 실제로 1938년 옌안의 무대에 올라간 연극 ≪돌격≫은 전 단원이 동원되어 밤을 새워 가며 준비되었고,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 중에도 사흘 동안 일곱 차례나 성황리에 공연되었다.28)

그런데 지식인과 인민대중의 결합은 당위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문예 활동가들이 현실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현장에서 이탈하여 옌안으로 돌아오거나 아예 해방구를 떠나기도 하였다. 또 루쉰예술학교의 예술활동에서 전선에서 이탈한 행태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음악회에서는 베토벤의 소나타, 피아노협주곡29)이나 멘델스존의 <환상곡>30),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연주되고, 빠블로 삐까쏘를 모방하는 화풍이 유행하며 똘스또이의 ≪안나 까레리나≫를 세세하게 분석하는 등31), 지식인과 인민대중의 괴리도 여전히 심각하였다. 물론 옌안에서는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가 무대에서 상연되어 극중 <빠벨의 노래>가 관객에게 깊은 감흥을 주는32)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작품의 공연도 있었으나 당대 대중들은 보다 자신들의 현실에 맞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 형태를 요구했다.

마오가 대대적으로 전개한 정풍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풍운동은 2차 국공합작 성립이후 항전문학(抗战文学) 시대로 돌입한 1937년 이후 최대의 내외적 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조치였다. 새롭게 당에 유입된 지식인과 기존의 공산당원 간의 통일을 도모하고, 인민대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항일전쟁도 중국혁명도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마오의 1941년 5월 19일 “우리의 학습을 개조하자(改造我们的学习)”를 간부회의에서 보고하며 주관주의적 학풍을 배격하였다. 또 1942년 2월 1일 중국공산당중앙학교(中共党中央学校) 개학식에서 “당의 작풍을 바로잡자(整顿党的作风)”라는 연설을 하여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당풍을 제기한다. 일주일 뒤인 2월 8일에는 중앙선전사업회의(中央宣传工作会议)에서 “당팔고에 반대한다(反对党八股)”는 연설을 하여 당팔고에 반대하는 문풍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중국 공산당을 지배한 왕밍(王明)의 좌경노선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정풍운동을 전개한 마오는 철저하게 맑스ㆍ엥엘스ㆍ레닌ㆍ쓰딸린의 이념에 근거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답습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세히 파악하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중국 혁명의 실제를 통해 혁명적 실천의 지침을 도출해 내야 한다고 역설한다.33)

 

 

“강화” 이전의 논쟁

 

문예창작에 있어 민족적 형식의 문제는 “강화” 이전에 중요한 쟁점이었는데 이에 대한 논의는 마오가 1938년 “민족전쟁에 있어서의 중국공산당의 지위(中国共产党在民族战争中的地位)”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양팔고(洋八股)34)는 폐지해야 하며 공허하고 추상적인 소리는 중단해야 하며 교조주의는 버려야 한다. 그리하여 신선하고 활기 있는 중국의 인민이 좋아하고 즐기는 중국의 작풍와 중국의 기풍이 만들어져야 한다. 국제주의적 내용과 민족형식을 분리시키는 것은 국제주의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이 양자가 긴밀히 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 대열 내에 존재하고 있는 일부의 심각한 오류를 철저히 극복해야 한다.35)

 

마오의 글은 5ㆍ4 운동 이래의 신문학이 노동자ㆍ농민 대중으로부터 괴리된 점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옌안에서는 민족형식과 문예창작과 관련해서 저우양(周扬, 주양), 아이쓰치, 허치펑(何其方, 하기방), 천보다(陳伯达, 진백달)의 글이 ≪문예전선(文艺战线)≫, ≪중국문화(中国文化)≫에 발표되어 논쟁이 전개된다. 해방구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큰 의견대립이 없이 비교적 쉽게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국통구인 중칭에서의 논쟁이 다소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그중 “외래의 형식은 충분한 중국화를 거쳐 민족형식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궈모뤄(郭沫若, 곽말약)의 논의가 주목할 만하다.36)

마오의 “강화”가 있기까지 해방구에서는 대대적인 정풍운동이 전개되었고, 국통구는 나날이 파쇼화하는 가운데 소위 ‘전국파’의 파시즘 찬양이 횡행하였다. 1940년 쭝칭(中京)  ≪대공보(大公报)≫의 학술 부간 ≪전국(战国)≫의 편집진들이 주축이 된 전국파는 ‘문화형태사관’, ‘영웅사관’ 등 파시즘 사관이 담긴 글들을 집필하였다.37) 이들은 주관적 유심주의 세계관으로 ‘강한 권력이 낙후된 것을 정복한다’는 파시즘을 선전하였다. 이들은 과학을 ‘무력의 문화’로 왜곡시켰으며 영웅숭배론을 선동하고 천재를 찬양하고 ‘다수의 우둔한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인민을 모독하였다. 이들의 창작 모체는 ‘공포ㆍ광란ㆍ경건’이었다. 심지어 히틀러에게 영웅호걸이라는 외투를 입하고 침략전쟁을 변호하는 주석을 달기까지 하였다. 쩐추엔(阵铨, 진전)은 1942년 4월 4막 연극 ≪들장미≫38)를 출판하였는데 전국파의 파시즘을 선전하고 매국노를 미화시키고 면죄부를 주었다. 이는 예술적으로는 퇴폐적이며 감상주의적이며 저열한 로맨티즘을 조장하여 가장 해독을 깨쳤던 극본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 정권은 “≪들장미≫는 상연금지시킬 것이 아니라 제창해야 한다. 오히려 ≪굴원(屈原)≫39)의 극본이 ‘문제가 있다’” 운운하였다.40) 전국파는 프롤레타리아 문예를 공공연하게 부정하고 계급투쟁이론을 공격하였으며 파쇼적인 민족의식을 강조하였다. 파쇼 미학을 옹호하는 전국파에 비판은 다방면에서 전개되었다. 결국 혁명문예계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쩐추엔이 1943년 7월에 창간한 ≪민족문학(民族文学)≫은 5기를 간행한 후 문을 닫게 되었다.41)

이제 해방구에서의 논쟁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다. 해방구에서 시작된 정풍운동은 결코 오솔길을 걷는 것처럼 순탄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민대중과의 적극적인 융합을 통한 지식인의 철저한 자기개조에 이를 때만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며 오솔길이 아니라 암벽이 가득한 험준한 산맥을 오르는 것과 같았다. 문예활동가와 지식인들은 대장정과 기나긴 유격전 과정으로 형성된 공산당의 조직체계와 그 문화 및 민주집중제에 대해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고된 현실과 아직도 혁파해야 할 모순들 때문에 곳곳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딩링(丁玲, 정령)과 왕스웨이(王实味, 왕실미)42)의 비판이었다.

딩링은 <중국좌익작가연맹(中国左翼作家联盟, 약칭 좌련(左联))>이 결성된 1930년 이후 지도 간부43)로 활약하였으며, 여러 농촌 작가들처럼 근대 리얼리즘의 정통 수법을 바탕으로 한 작품을 썼다. 또 ≪내가 하촌에 있었을 때(我在霞村的时候)≫44)라는 단편을 쓰는 등 전선에서 문예 활동가로서 적극 복무하였다.45) 딩링은 1941년 4월 ≪해방일보≫ 창간 이후 그 부간(副刊) ≪문예(文艺)≫의 주편집자46)가 되었는데 41년 10월 23일 ≪해방일보≫에 발표한 “우리에겐 잡문이 필요하다(我们需要杂文)”47)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도 잡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 무기를 버릴 필요가 없다”48)며 루쉰의 방법론으로 옌안의 ‘암흑(黑暗)’을 폭로할 것을 요청한다. 딩링은 1942년 초 ≪해방일보≫ 부간 ≪문예≫의 편집자직을 사임한 이후49) 3월에 <옌안 항적(抗敌) 문예협회>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3월 9일에 “삼팔절유감(三八节有感)”50)을 ≪해방일보≫에 발표했는데 이 글의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성’이라는 두 글자는 어느 시대가 되어야 중시되지 않고, 특별한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51) 이 글은 공산당의 남성 간부가 시골 출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미모의 여성과 결혼한 사실을 두고 그 책임을 묻는 내용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두 여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한 글이다.52) 이것은 알렉산드라 꼴론따이가 ≪자매≫에서 폭로한 네쁘 시기의 모순을 옌안에서 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53) 당시 딩링의 글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던 이들과 달리 마오는 딩링의 비판에는 수긍할 만한 점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마오는 딩링의 비판의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내부비판을 할 때는 상대의 장점을 헤아려 먼저 이를 훌륭하게 인정한 뒤에 결점을 지적해야 상대에게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딩링은 마오의 충고를 받아들였다.54)

그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동지적인 비판이었다는 평가를 받은 딩링의 경우와는 달리 왕스웨이의 비판은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옌안중앙연구원(延安中央研究院)>의 연구원이었는데 1942년 2월 3일에 발표된 ≪해방일보≫ 부간 ≪문예≫에 “들백합꽃(野百合花)”55)를 발표하였고, 4월에 “정치가ㆍ예술가(政治家ㆍ艺术家)”56)를 <문협(文协)>57)의 기관지 ≪곡우(穀雨)≫58)에 발표하였다. 그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항일 근거지의 당정 지도자를 ‘큰 두목(大头子)’, 작은 두목(小头子)으로 보고 ‘인간에 대한 동정심도 없고(人的同情心都没有!)’ ‘사리사욕을 채우는 녀석(自私自利的傢伙)’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간접적으로 암흑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직접 암흑을 만든다(于是我们在那儿间接助长黑暗,甚至直接制造黑暗)’고 하였다.

둘째, 옌안에서 진행된 예술활동과 무도회를 비판하며 ‘옥당춘에 노랫소리 지저귀고 미인의 걸음걸이가 춤추네(在这歌啭玉堂春, 舞迴金莲步)’라고 비판하며 일면적인 사례를 전반적인 것인 것처럼 침소봉대하였다. 또 평등주의(平均主义)를 표방하지만 ‘옷은 3색으로 나뉘고, 식량은 5등급으로 나뉜다(但衣分三色, 食分五等)’고 하며 사실을 왜곡하며 소부르주아적 평등주의를 선동하였다.

셋째, ‘예술가는 훨씬 열정적이고 민감(艺术家由于更热情更敏感)’하지만 ‘정치가는 세상물정에 익숙하고 수단방법에 정통하며 종횡으로 이간질에 능하다(政治家必须熟谙人情事故, 精通手段方法, 善能纵横捭阖)’고 하며 예술가를 정치가보다 상위에 올려놓았다.

넷째, 광명보다 암흑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고취시켰다.59)

이러한 왕스웨이의 입장은 비평의 입장, 그 구체적인 의견, 창작 기법의 측면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지닌 것이다.60) 마오가 “당팔고에 반대한다”에서 밝히고 있듯이 적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분쇄하는 것과 우연히 잘못을 저지른 동지에 대한 비판하는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전자와 달리 후자에 대해서는 자아비판을 유도함으로 해서 스스로 잘못을 교정하게 해야 한다. 무산계급 대중을 겁주거나 대중에 대한 잔혹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혁명운동에 큰 피해를 주는 것일 뿐이다. 동지와 인민대중에 대한 비판은 꾸준하며 장기간에 걸치는 교정ㆍ교화이다.61) 그러나 왕스웨이의 주장은 당과 인민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었고 반동파들에게 좋은 선전수단이 되었다. 국민당의 특무기관은 즉시 그의 “들백합꽃”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반공선전을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왕스웨이가 재직하던 <중앙연구원>은 5월부터 ‘당의 민주와 기율에 관한 좌담회(党的民主与纪律的座谈会)’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정풍운동을 무산계급 사상과 비무산계급 사상의 투쟁이라고 규정하며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왕스웨이는 끝내 참석을 거부하였다.62)

 

 

치열한 문예논쟁의 귀결점으로서의 “강화”

 

정풍운동 과정에서 첨예한 논쟁이 오가는 중에 마오와 류카이펑(刘凯豊, 유개풍)의 소집으로 옌안 문예좌담회(延安文艺座谈会)가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약 100여 명이 참석하였으며 1942년 5월 2일, 9일 23일에 걸쳐 총 3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옌안 문예좌담회에는 딩링, 아이칭, 허치펑, 저우양, 샤오쥔(萧军, 소군)과 같은 문예종사자를 포함하여 마오와 주더(朱德, 주덕), 천윈(陈雲, 진운)과 같은 주요 당ㆍ정ㆍ군 관계자들도 참가하였다.63) 논란의 첨예한 중심이 된 왕스웨이는 불참하였다. 마오는 첫 날의 개회사에서 5ㆍ4운동 이래 혁명적 문학예술운동을 전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문예가 인민의 무기이며, 한마음 한뜻으로 적과 투쟁하는 것을 돕는 데 문예의 목적이 있다고 명확히 규정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분명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문예종사자들이 입장, 태도, 사업대상, 사업문제 및 학습문제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간결하게 정리한다.

먼저 입장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무산계급과 인민대중의 입장, 공산당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러면서 문예활동가들에게 적과 아 그리고 통일전선의 동맹자를 먼저 명확히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일본제국주의와 인민의 적에 대한 태도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확한 것이며, 동맹자에 대한 태도도 연합과 비판이라는 두 단어로 간결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민대중과 그 선봉대에 대한 태도이다. 무산계급 인민대중 내에도 수많은 모순이 있는데, 마오는 문예활동가들에게 참을성 있게 이들의 전진을 조력할 것을 주문한다. 인민을 적대하거나 경멸해서는 안 되며, 인민이 낙후된 것을 버리고 혁명적인 것을 발양하게 하는 자기개조를 묘사하면서 인민과 한마음 한뜻으로(同心同德) 싸워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예 사업대상도 명확하게 밝히는데 그것은 해방구의 노동자, 농민, 병사 및 혁명적 간부이다. 마오는 글을 모르는 인민도 연극, 그림, 음악과 같은 예술의 수용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문예활동가들에게 지식인들의 무미건조한 언어가 아니라 인민대중의 생생한 언어를 배울 것을 주문한다. 그것은 길고 고통스러운 시련을 거쳐 문예 창작자와 그 수용자 사이의 거리를 극적으로 좁혀 내는 것이다.64) 마오 역시 지식인 출신이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의 과오에 대해 자아비판하며 그가 어떻게 자산계급과 소부르주아계급의 의식(资产阶级的和小资产阶级的感情)을 교정하게 되었는지 성찰한다. 이것이 바로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의 변화하는 지식인의 자기개조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습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맑스ㆍ레닌주의에 대한 학습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 설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계급사회에서 초계급적인 사랑 운운하는 일부 동지들의 전도된 관점을 비판한다.65) 마오는 이러한 추상적 담론을 배격하고 학습을 통해 각 계급의 면모와 심리를 연구하며 구체성에 도달할 것을 요청하며 첫 날의 연설을 마친다.

이에 따라 해방구의 문예활동가들은 치열한 토론을 벌인다. 대담의 마지막 날 5월 23일에 이르러 마오는 토론의 결과에 자신의 의견을 담아 마지막 연설을 하며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딩링의 글로 촉발된 치열한 논의에 대한 집단적 토론의 결과물이다. 마오는 논의를 정의가 아닌 항일운동의 객관적인 실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5ㆍ4운동 이래의 문예운동의 성과를 계승하는 것이며 현 시기 항일운동 근거지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마오는 그러한 문예의 중심은 바로 대중을 위하는 것임을 재확인하며 문예의 논쟁의 출발점과 문예의 목적을 명확히 한다. 이하에서 “강화” 결론부의 내용을 요약한다.

 

 

1. 우리의 문예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초계급적 예술 운운하면서 실제로는 자산계급을 위한 문예를 옹호하는 이들이 있지만 문예는 전 인구의 90% 이상을 점하고 있는 인민을 위한 것이다. 이들은 혁명의 영도계급 노동자, 광범위하고 견결한 동맹군 농민, 혁명전쟁의 주력인 무장 인민대오, 장기적인 합작이 가능한 도시소부르주아계급과 지식인66) 동맹자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실제의 행동으로 무산계급적인 관점을 웅변해야 한다. 문예활동가들은 벽보, 벽화, 민요, 민담과 같은 인민대중의 맹아상태의 예술을 사랑해야 하며, 이것을 단지 자신의 작품을 장식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인민대중과 일체가 되는 것은 철저한 학습에 기초하여 실제투쟁 속에 깊이 들어갈 때만 달성될 수 있고, 그러할 때만이 진정으로 무산계급적인 문학예술이 가능하게 된다. 대중의 생활과 대중의 투쟁에서 살아 있는 맑스주의를 적용할 때만이 종파주의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2. 어떻게 복무할 것인가

 

여기서의 화두는 보급(普及)과 제고(提高)의 문제이다. 양자는 똑같이 중요한 것이지만 이에는 올바른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마오는 보급과 제고의 문제에 있어 양자 모두 적절히 중요하다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지 않는다. 그것은 변증법과는 전혀 무관한 절충주의일 뿐이다. 보급과 제고의 문제는 철저하게 해방구의 현실에 기초해서 해결해야 한다. 그 기준점은 착취계급이 아닌 노농병 인민대중을 대한 보급이며 이들로부터 출발한 제고이다. 높은 수준으로 문예를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기초가 필요하며, 보급이 기초가 되었을 때 무산계급의 전진방향에 따라 제고를 할 수 있다. 문학예술의 원천은 인민대중의 생활상이며 그것을 올바르게 반영하여 새로운 전형을 창출해야 한다. 모순과 투쟁을 전형화하고 예술작품으로 형상화하면 인민대중들은 각성하고 분발하며, 단결하고 투쟁하고 자신의 환경에 대해 스스로 개조하게 된다.

보급과 제고에 있어서도 인민 대중 의식의 불균등한 발전을 고려해야 한다. 보급이 중요하다고 해서 똑같은 것만을 반복하면 의미가 없는 보급사업이다. 보급의 기초 위에 제고가 되어야 하고, 보급이 제고를 결정하지만 동시에 제고는 보급을 지도한다. 여기에서는 의식발전의 지역적인 불균등도 감안해야 한다. 또 국제적인 견지에서 앞서 간 쏘련의 경험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대중에 대한 제고도 중요하지만 선진분자인 간부에 대한 제고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67) 이 양자는 상호통일되어 있다. 또 전문가와 보급사업에 종사하는 일꾼 간의 관계도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대중이 직접 창작하고 향유하는 노래와 미술에 주의를 기울이고 현장의 보고문학과 소극단에 깊은 관심을 두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대중과 문예활동가들이 일체가 되어야 하듯이 일선활동가와 전문가도 긴밀히 결합해야 한다. 전문가는 귀중한 존재이며, 예술가는 오직 대중과 깊은 연계 속에서 대중의 충실한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68)

계급사회에서 초공리주의(超功利主义)는 없으며 누구의 공리주의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협소한 공리주의에 빠지는 것과 원대한 목표를 지닌 혁명적 공리주의이다. 스스로의 협소한 공리주의를 추구하면서 대중에 대해 공리주의라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인민대중에 대한 모독이다. 문예는 인민대중에게 진정으로 이익을 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양춘백설(阳春白雪)과 하리파인(下里巴人)69)은 통일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전문가만의 협소한 공리주의가 될 뿐이다.

 

 

3. 당의 문예사업과 당 전반 사업의 관계문제 및

문예계의 통일전선의 문제

 

모든 문화와 문학예술은 반드시 일정한 계급과 정치노선에 속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70), 초계급적 예술, 정치와 병행하거나 상호 독립된 예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문학예술은 당 사업의 일환이며 혁명임무에 복종하는 것이며 이를 반대하는 것은 예술에 대한 당의 지도를 부정하며 초계급적인 예술을 강조하며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부정한 뜨로츠끼 식의 이원론에 빠지는 것이다.71) 문예는 계급 대중의 정치에 종속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계급 대중의 정치에 거대한 영향을 준다. 레닌의 ‘톱니바퀴와 나사’라는 비유는 예술을 전체의 부속품으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혁명사업전체에 있어서 문예가 없다면 혁명운동이 진행될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만큼 문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를 통해서만 계급 대중의 요구가 집중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며 부르주아계급정치와 달리 무산계급의 정치는 대중의 의견을 집중하여 제련하고 그것을 다시 대중 속으로 보내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 문예의 정치성과 그 진실성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며 무산계급의 정치와 정치가를 비속화하는 것은 잘못이다.72) 또 통일전선 내에서 소자산계급 문예가들의 역량을 근로인민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조력하며 이들을 전선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특히 중요한 임무이다.

 

 

4. 문예비평의 기준

 

문예비평에는 정치적 기준과 예술적 기준이 있다. 정치적 기준은 항일투쟁에서 단결을 이루고 인민을 고무하며 전진시키는 것이 좋은 것이다. 여기서 동기(주관적인 기대, 主观愿望)만을 강조하고 그 효과(사회적 실천, 社会实践)를 부정하는 관념론과 이것을 단순히 뒤집은 기계론적인 유물론을 모두 배격해야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양자의 상호통일이며 이것은 사회 대중들 속에서 일으킨 효과에 의해 실천적으로 검증되는 것이다.73) 예술적인 기준에 있어서는 보다 예술성이 있는 예술이 좋거나 비교적 좋은 것이다. 비평은 각양각색의 예술품의 자유경쟁을 허용하면서도 예술과학의 기준에 비추어 올바르게 비판해야 하며 저급한 예술은 고급한 예술로 제고시켜야 하며 대중투쟁과 유리된 예술을 변화시켜 내야 한다.

정치적 기준과 예술적 기준은 추상적이며 절대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양자는 상호 통일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1은 정치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반동적인 작품이 예술성을 갖출 수 있으며 이러한 예술성 있는 반동문예는 심각한 해악성을 지닌다.74) 그러나 올바른 정치견해만이 있고 예술적인 힘이 없는 표어나 구호식의 경향에도 반대해야 하며 문예 투쟁에 있어 양방향 모두에 전선을 치고 투쟁해야 한다.

추상적인 ‘인성론’과 ‘사랑’에 기초한 문학이 아닌 명확한 계급성을 견지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할 수 없으며75) 사회의 추악한 현상들을 사랑할 수 없다. 착취 사회가 소멸한 그때에 가서야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게 된다.76) 

광명(光明)과 암흑(黑暗)의 문제에 있어 광명과 암흑을 절반씩 묘사한다는 절충주의는 옳지 못하다. 소자산계급의 문학은 광명을 찾아낸 적이 없으며 단지 암흑을 드러낸 ‘폭로문학’이었다. 반면에 사회주의 건설기 쏘련의 문학은 사업의 결함이나 부정적 인물을 묘사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전반적인 광명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총체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인민대중에게 해독을 끼치는 암흑세력을 폭로하며 인민대중의 혁명 투쟁을 찬양하는 것이 혁명적 문예활동가들의 기본적 과업이다.

‘아직도 잡문(杂文)의 시대이며, 아직도 루쉰의 필법을 필요로 한다’77)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폭로문학은 그 대상과 내용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적과 원수에 대한 폭로와 조소는 인민 자신에 대해 결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잡문시대’의 루쉰도 결코 혁명적 인민과 혁명 정당을 조소하거나 공격한 적이 없다. 인민의 결함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하지만 그것은 인민의 입장에서 인민을 보호하며 인민을 교양하는 뜨거운 마음에서 행해져야 한다. 풍자의 수법을 무조건적으로 폐기해서는 안 되지만 풍자의 대상이 적, 동맹자, 인민일 경우 그 수법은 명확히 다르게 적용되어야 한다.

‘광명을 노래하는 작품이 반드시 위대한 것은 아니며, 암흑을 그려 내는 작품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주장은 문예의 당파성과 계급성을 전혀 전제로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자산계급의 문학예술가가 스스로를 찬양하듯 무산계급의 문학예술가는 근로인민을 찬양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무산계급의 소위 ‘암흑’을 묘사하는 작품은 보잘 것 없는 것이다.78) 인류세계사의 창조자로서의 인민, 무산계급, 공산당, 신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어찌 노래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인민의 사업에 대해 열정이 없고 무산계급과 그 선봉대의 투쟁에 대해 냉담을 취하는 이들은 단지 자기 자신과 소그룹을 위해 노래할 뿐이다. 혁명적 인민에게는 이러한 이들이 필요 없다.79)

‘입장은 옳았으나 단지 표현이 잘못되었기에 나쁜 작용을 일으켰을 뿐’이라는 변명이 있다. 이것은 전술한 동기와 그 효과에 대한 비변증법적인 이해이다. 효과의 문제는 곧 입장의 문제이다. 의사에 대해 그가 내린 처방이 환자를 치료했는지 여부로 그의 의술을 판단할 수 있듯이 문예비평에서 작가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그의 실천을 보아야 한다. 작가는 자신의 의도에 대한 효과를 고려하고 올바른 표현수법을 통해 그것을 드러내야 한다. 또 오류에 대해서는 성의 있게 자기비판을 하여 그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올바른 입장은 이러한 엄숙한 실천과정에서만 파악되게 되는 것이다. 주관적인 이해와 실제적인 이해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맑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유물론의 핵심을 학습하는 것이지 문예작품에 철학강의를 쓰라는 것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다. 맑스주의에 대한 학습이 작가의 ‘창작의욕을 방해한다(就要妨害创作情绪)’는 주장이 있는데, 맑스주의는 비무산계급적인 창작의욕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괴 과정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건설이 가능하다.80)

 

 

5. 정풍운동

 

정풍운동은 관념론, 교조주의, 공상, 공담(空谈), 실천에 대한 경시, 대중과의 유리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공산당에 입당하였지만 아직도 사상적으로 입당하지 못한 이들이 당의 사상적 통일성을 해치고 있다. 소자산계급출신자들은 문학예술의 방법을 포함한 여러 방법으로 자신을 완강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면모대로 당을 개조하고 세계를 개조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무산계급은 이에 대해 일체의 양보 없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81) 중국은 후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진하고 있다. 대후방(大后方)의 독자들은 진부한 자신들의 상태가 아니라 혁명근거지의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이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하기에 혁명근거지의 인민대중을 위해 쓰는 작품이 전국적인 의의를 지니는 것이다. 지식인은 대중과 결합해야 하고 루쉰을 본보기로 삼아 인민 대중의 소가 되어야 한다. 정풍과정에서 동지들이 스스로의 작풍과 면모를 개조하면 대중들에게 열렬히 환영받는 우수한 작풍을 창작해 낼 수 있고, 전 중국의 문예운동을 빛나는 새 단계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마오는 “강화”의 후반부에서 파제예프82)의 ≪궤멸≫(1926)83)을 예로 들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간략히 보충한다. ≪궤멸≫은 심리 소설로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새 장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으로 인해 1920년대 산문에서 나타난 혁명을 자연발생적인 반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분별한 열정(보리스 삘리냐끄)으로 보는 비과학적 견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미리 예정된 ‘새로운 인간’의 모범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들에서 드러나는 여러 주인공들의 성격을 통해 세세한 인간 군상을 묘사해 내었다.84) 파제예프는 똘스또이의 ‘심리학적 리얼리즘’의 영향으로 내적 심리 변화의 발전 과정을 분석하고 감정과 사고의 외면과 본질을 날카롭게 구별하면서 인물을 형상화해 내었다.85)

 

 

“강화”와 숙청의 문제 및 반뜨로츠끼주의 투쟁

 

“강화” 이후 반당적 행위에 대한 비판 특히 왕스웨이에 대한 숙청이 주요한 과제가 되었다. 왕스웨이와 달리 딩링은 다른 동지들의 비판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였고, 자아비판을 통해 스스로를 교정하였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스웨이는 최소한의 자아비판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달랐다. 이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숙청에 대한 문제를 원론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하겠다.

레닌은 “당조직과 당문학”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당을 포함하여) 자발적인 결사체 역시 반당적 견해를 옹호하는 데 있어 당 명칭을 도용하는 당원들을 자유롭게 추방할 것이다. … 그러므로 반당적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을 숙청하지 않는다면, 당은 처음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나중에는 물리적으로 해체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86)

 

반당적 행위에 대한 숙청이 문학ㆍ예술과 관련을 맺고 있을 때 그것은 더욱더 섬세한 대응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섬세한 대응은 과감하고 단호한 비판을 우회하는 것이 아니다. 레닌은 1908년 2월 13일 고리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리끼의 창신주의적 입장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비판하지만 그 어조는 상당히 친근하다.87) 그런데 혁명 운동이 전진하고 내전이라는 위기가 닥친 1919년 7월 31일에 고리끼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고리끼에 대해 상당히 강경한 어조로 동지적(同志的)인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88) 같은 해 9월 15일에 보낸 편지에서는 인민의 “지적역량”을 지식인들의 “역량”과 혼동해서는 안 됨을 지적하고 내전 시기 까제뜨와 멘쉐비끼를 옹호하는 팜플렛 ≪전쟁, 조국과 인류(Война, отечество и человечество)≫를 쓴 꼬롤렌꼬(Владимир Галактионович Короленко, 1853-1921)와 같은 “인재들”에 대해서 “감옥에서 몇 주일 지내게 하는 것은 결코 해로운 일이 아니”라고까지 썼다. 그리고 고리끼에 대해서 파멸을 언급할 정도로 심각한 경고를 내린다.89) 고리끼와 같은 위대한 무산계급의 작가에 대해서도 그 과오에 대한 비판은 결코 우회할 수 없는 문제이며 꼬를렌꼬와 같은 반동적 작가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쁘롤레트꿀트(Пролеткульт)에 대한 레닌의 과감한 조치90)는 또 어떠한가.

사회주의의 역사에서의 예술가들에 대한 숙청에 대해 쓰딸린이나 쥐다노프와 같은 이들의 정권유지 욕망을 위한 발명품이라는 것은 흔하고 흔한 악선동일 뿐이다. 그러나 레닌의 저작을 꼼꼼히 읽고 그 시대를 마주 대하면 레닌 시대의 고민이 직접적이고 절박한 현실로 닥쳤을 때의 그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필연적인 굴절이 있었음을 이해하기 된다. 특정한 예술작품이 반동적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창작되었고 그것이 실제적인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면 사회주의 사회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앞으로 바로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은 단순히 특정 예술 작품에 대한 금지와 특정 작가에 대한 비판과 처벌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소수의 전문가들에게만 의지하지 않는 광범한 근로인민대중이 창작하는 새로운 예술운동과 결부될 때만이 이와 같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고민은 도외시한 채 숙청에 대해 편견에 가득 찬 인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운동이 부르주아 사회의 속류적 인식에 갇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때로는 예술정책과 예술가에 대한 숙청에 있어 오류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오류를 낳게 한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안적인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

다시 왕스웨이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왕스웨이의 문제점은 사소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동지들의 비판에 대해 진지하게 화답하지도, 여러 차례 요청된 좌담회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좌담회에서는 거듭해서 대표를 파견하여 그와 온종일 담론하게 하였지만 그는 궤변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는 “개인과 당의 공리주의 사이에 내재된 모순은 거의 해결할 수 없으므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겠다”며 탈당하였고 이는 여러 동지들을 분개하게 하였다. 쭈앙난시앙(装南翔, 장남상)은 6월 1일 ≪해방일보≫에 글을 발표하여 옌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물자배분상의 차이는 구시대의 ‘등급제도’와 본질적으로 다름을 지적하였다. 아이칭도 6월 24일자 ≪해방일보≫에서 왕스웨이의 분열책동을 비판하였다. 왕스웨이가 말한 ‘옷은 3색으로 나뉘고’는 남색 사선무늬옷과 회청색 무명옷 그리고 검은색 무명옷 사이의 구분에 불과하다. 또 ‘식량은 5등급으로 나뉜다’는 것도 거짓에 기초한 악선동이었다. 옌안에서는 가장 좋은 음식이 작은 공기 두 그릇(동물성 한 그릇, 식물성 한 그릇)과 국 한 그릇이고, 가장 나쁜 음식도 쌀밥과 공동반찬이 보편적이었다. 아이칭은 왕스웨이가 옌안의 자유로운 조건과 <옌안중앙연구원>의 연구원이라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악의에 충만한 글을 짓고, 좌경적인 술어로서 우연적이고 일면적인 현상을 무한히 확대시켜 그것을 마치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상승시켰음을 냉엄하게 비판하였다. 

<중앙연구원>의 좌담회에서는 왕스웨이와 뜨로츠끼주의자와의 관계도 규명하였다. 그는 1929년에 처음으로 뜨로츠끼파와 관계하면서, 이들을 위하여 뜨로츠끼파에 의해 수정된 레닌의 유언과 ≪뜨로츠끼 자서전≫을 번역하였으며, 뜨로츠끼파 간행물에 소설을 발표하였다. 또 1936년까지 뜨로츠끼파 천칭천(陈淸晨, 진청신)과 서신을 교환하였다. 중앙연구원 부원장 판원란(范文澜, 범문란)은 좌담회를 종료하면서 왕스웨이가 뜨로츠끼주의 분자임을 확인하였다. 또 “왕스웨이 사건에 대한 결의”가 발표되어 왕스웨이 사상에 대한 대대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7월 28일, 29일 저우양은 ≪해방일보≫에 왕스웨이의 문학관이 뜨로츠끼적인 이원론임을 밝히며 문학은 당의 문학이 되어야 함을 밝히고 있다. 기나긴 비판과 사상투쟁이 이뤄지고 난 후인 1944년 5월 기자회견에서야 왕스웨이는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다.91)

1930년대 쏘련에서처럼 중국혁명에 있어서도 뜨로츠끼주의와의 투쟁은 혁명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이하에 마오의 글을 인용한다. 쓰딸린의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군대제도의 개혁, 정치제도의 개혁, 민중운동의 발전, 국방교육의 실시, 민족반역자와 뜨로츠끼파에 대한 진압92), 군수공업의 발전, 인민생활의 개선 등 이러한 일들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인가?”93)

 

그렇지만 우리의 민족통일전선 내부에는 파괴작용을 하는 적의 앞잡이들, 즉 민족 반역자ㆍ뜨로츠끼파ㆍ친일분자 등이 있다. … 일본제국주의의 특무기관은 시시각각으로 우리 당을 파괴하려 하고 있으며, 숨어 있는 민족반역자ㆍ뜨로츠끼파ㆍ친일파ㆍ부화뇌동하는 분자ㆍ투기분자를 열성자로 가장시켜, 우리 당에 잠입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한 경각성과 엄밀한 방비를 일각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94)

 

중국혁명에서 뜨로츠끼주의가 가했던 해악성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아그네스 스메들리는 ≪중국혁명의 노래≫에서 뜨로츠끼주의자들이 통일전선을 파괴하기 위해 혁명대오 내에 2, 3명의 공작원을 몰래 파견하였던 것이 언급한다.95) 또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장에 있던 궈모뤄는 다음과 같이 뜨로츠끼주의자들의 반동적 행태에 대해 분개한다.

 

뜨로츠끼주의자의 모험과 책동은 오로지 단결의 파괴, 통일전선의 파괴를 지향한 것이며, 그들은 ‘단결항전, 국민당과의 합작ㆍ협동하여 곤란을 극복한다’라는 중국 공산당의 주장은 ‘계급적 입장을 희생하여 노동자 농민을 배신하는 것’이라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굴복’ 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자신은 음으로 양으로 반동파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염치도 없다.96)

 

중국혁명에서의 반뜨로츠끼 투쟁과 마오가 “강화”에서 내린 정치적 기준과 예술적 기준의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이렇게 일치한다.

 

 

“강화”의 발표

 

옌안문예좌담회에서 마오의 연설이 있은 이후 중국공산당은 “강화”에서 제기된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43년 3월 10일에는 중앙문화사업위원회와 중앙조직부는 당의 문예활동가회의를 연합 개최하여 대중의 생활과 투쟁 속에 어떻게 깊이 파고들 것인가에 대해 토의하였다. 3월 22일 중앙문화사업위원회는 연극운동방침토론회를 개최하여 “전쟁ㆍ생산ㆍ교육을 위하여 복무”하는 것을 연극운동의 방침으로 확정하였다. 1943년 10월 19일 “강화”는 ≪해방일보(解放日报)≫에 마오의 명의로 공식 발표되었다. 그리고 1943년 11월 당의 선전부는 “당의 문예정책 집행에 관한 결정(关于执行党的文艺政策的决定)”이라는 포고문을 통해 “강화”를 학습하여 “당의 방침을 문예부문 내에 관철시킴으로써 문예를 민족과 인민의 해방사업에 잘 복무하도록 함과 아울러 문예사업 자체를 더욱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이어서 해방구 곳곳에서는 문예활동가회의가 개최되었고, 노농병 대중문예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창작이 왕성해졌으며 해방구의 문예운동은 크게 성장하고 발전하였다.97) 해방구의 문예운동은 1943년부터 대대적으로 전개된 생산운동과 절약운동98)의 성과와 더불어 그 효과가 증폭되었다.

사회주의 예술론을 도식적으로 보는 이들은 마오의 “강화”를 1930년대 쏘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론의 중국판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대만의 반공주의자 천지파(陳繼法, 진계법)는 강화의 내용의 독창성을 부정하며 1925년 쏘련 공산당의 “문학예술에 관한 당의 정책”, 1932년 “문예단체의 개편”의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방법론의 모방에 불과하다며 그 가치를 깎아내린다.99) 그러나 “강화”를 비롯한 마오의 저술 곳곳에는 구체적인 중국의 현실에 대한 고뇌와 성찰이 진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마오 개인의 사색의 산물이 아니라 중국의 해방투쟁을 향한 공산주의자 동지들의 치열한 집단적 투쟁의 산물로서 탄생하였다. “강화”는 신문학운동 이후 산적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문예운동과 예술가의 실천에 대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중국 현대문예사는 “강화”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뉜다.100)

 

* 다음 호에서는 “강화”와 관련한 예술 창작의 실례들을 살펴보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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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노동사회과학≫ 제5호에 실린 필자의 “옌안문예강화 당파적으로 읽기 (1)”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

322쪽의 “반면에 마오는 1942년에도 아직 중국이 잡문의 시대이며 루쉰의 필법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라는 서술은 명백한 오류이기에 다음과 같이 교정해야 한다: “마오는 “강화”에서 잡문시대 루쉰 문학의 의의를 밝혀내며 그것이 새로운 해방구가 열린 옌안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 명료하게 정리하였다.”

 


 

1) 일반적으로 농민이라 할 때는 주로 빈농과 중농을 가리킨다. 마오쩌둥 저, 김승일 역,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中国革命和中國共産黨)”(1939), ≪모택동 선집≫ 제2권, 범우사, 2002, pp. 348, 352 참조.

 

2) 마오쩌둥, “신민주주의론”, 같은 책, p. 382.

 

3) “그러나 많은 중소지주 출신의 개명한 향신들, 즉 약간은 자본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는 지주들은 아직까지는 항일에 적극성을 띠고 있으므로, 그들을 단합시켜 함께 항일해야 한다.” (마오쩌둥,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 같은 책, p. 348.)

 

4) 에드가 스노우 저, 진홍범 역, ≪중국의 붉은 별≫, 두레, 1985, p. 430.

 

5) 중국 공산당은 통일누진세와 감조감식(减租减息, 소작과 이자율 인하) 정책을 실시하여 농민의 봉건적 압박을 경감하면서도 교조교식(交租交息, 소작료와 이자를 지주에게 반드시 되돌려 주도록 함) 정책을 실시하여 계급대립을 경감함으로써 각 계층의 단결을 강화하였다. 池田誠(이께다 마꼬또) 저, 동양사연구회 역, “항일전쟁의 전략과 전술”, ≪중국 혁명의 전략과 노선≫, 이성과현실사, 1987, pp. 398-399.; “중국 공산당과 중화민족 ― 중국 공산당 창립22주년 기념 ≪해방일보≫ 사론”(1943년), ≪중국 혁명론≫, 범우사, 2013, p. 198 참조.

 

6)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혁명운동은 각이한 나라에서 균등하고 동일한 형태로 발전하지 않으며 또 그러할 수도 없다. 활동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기회의 이러한 완전하고 전면적인 이용은 다양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의 결과로서만 나타난다.” (Lenin Collected Works, Vol. 15, p. 187.)

7) 마오쩌둥, 앞의 글, p. 335.

 

8) 1926-1927년간에 쓰딸린과 뜨로츠끼 진영 간의 중국 사회 성격 논쟁에서 뜨로츠끼, 라제끄, 천두슈(陈独秀, 진독수)와 같은 이들은 중국사회가 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하였다는 지극히도 무리한 주장을 펼쳤다. 池田誠, “중국 현대사회에 있어서 제계급의 분석”, 앞의 책, pp. 29-31 참조.

 

9) 마오쩌둥, 앞의 글, p. 345.

 

10) “프랑스 혁명을 이끌고 나간 초기의 군대처럼 초라하고 아무것도 갖춘 것이 없는 팔로군은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않고서도 침략자를 격퇴하고 대중들에게 자유를 가르쳐 일깨우는 이중의 과업을 성취해 나가고 있다.” (죠르쥬 울만(George Uhlman)의 회상. Agnes Smedley, ≪The Great Road: The Life and Times of Chu Teh≫, Monthly Review Press, 1956, p. 392.; 아그네스 스메들리 저, 홍수원 역, ≪한 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두레, 1986, p. 384.)

 

11) W. Z. 포스터,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 제2권, 동녘, 1988, p. 217.

 

12) 마오쩌둥, 앞의 글, pp. 350-351.

 

13) 朱德发 외 편, 임춘성 역, ≪중국현대문학운동사 Ⅰ ― 신민주주의혁명시기≫, 전인, 1989, p. 187.

 

14) 우노 시게아끼 저, 김정화 역, ≪중국공산당사≫, 일월서각, 1984, p. 140.

 

15) Lenin Collected Works, Vol. 29, pp. 69-75.; 레닌 저, 이길주 역, ≪레닌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8, pp. 171-177.

 

16) Lenin Collected Works, Vol. 31, p. 317.; 같은 책, p. 208.

 

17) 藏原惟人(쿠라하라 코레히또) 저, 유염하 편역, ≪문화활동 세미나≫, 공동체, 1988, p. 204.

 

18) 藏原惟人, 같은 책, pp. 204-205.

 

19) Agnes Smedley, op. cit., p. 356.; 아그네스 스메들리, 앞의 책, p. 353.

 

20) 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강화”,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두레, 1989, p. 20.

 

21) 마오쩌둥 저, 이욱연 역, ≪모택동의 문학예술론≫, 논장, 1989, p. 19.

 

22) 마오쩌둥, 같은 책, p. 142.

 

23) “陝甘宁边区(섬감녕변구). 이들 지역은 1931년 이후 혁명유격전 속에서 점차 발전된 중국공산혁명의 근거지로 1937년 이전에는 섬감녕 홍색구역(红色区域)이라 불렸다. 중앙 홍군이 이 지역에 도착한 이후 혁명의 중심 근거지가 되었고, 공산당 중앙이 소재했다. 옌안 등 20여 개의 현이 속해 있었다. 변구는 공산당 해방구를 가리킨다.” (“강화”에 붙인 이욱연의 역주, 같은 책, p. 99.)

 

24) 마오쩌둥, “문화사업 중의 통일전선(文化工作中的统一战线, 1944)”, 같은 책, p. 137.

 

25) 池田誠, “항일전쟁의 전략과 전술”, 앞의 책, p. 399.

 

26) 에드가 스노우, 같은 곳.

 

27) 문장을 농촌으로, 문장을 부대로. 이는 <중화전국 문예계항적협회 옌안분회(中华全国文艺界抗敌协会 延安分会, 약칭 문협(文协)>의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표어이다. 전형준, ≪현대 중국문학의 이해≫, 문학과 지성사, 1996, p. 251 참조.

 

28) 쭝청(宗诚) 저, 김미란 역, ≪딩링≫, 다섯수레, 1998, pp. 200-202.

 

29) 베토벤은 수많은 소나타 작품을 남겼기에 이것만으로는 어떤 작품을 가리키는 건지 알 수 없다. 또 피아노협주곡은 총 5개의 작품을 남겼다.

 

30) 아마도 <환상곡 Op. 28> 아니면 <환상곡과 카프리스 Op. 16>을 가리키는 것 같다.

 

31) “강화”에 대한 이욱연의 역자 해제, ≪모택동의 문학예술론≫, p. 94.;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중국 현대문학의 이해≫, 한길사, 1991, p. 75 참조.

단 현재의 한국의 근로인민대중과 당대의 중국 인민의 조건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베토벤은 철저한 공화주의자였으며, 빠블로 삐까쏘도 파시즘을 폭로하는 진보적인 예술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레닌은 레프 똘스또이를 분석하여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 하였다. 따라서 만약 현재 우리의 문예운동이 과거 서구의 진보적 문예 유산에 대한 보급과 재이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마오가 그렇게도 비판한 교조주의의 재판일 것이며 지극히 단편적인 식견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문예운동과 전선운동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32) 쭝청, 앞의 책, pp. 185-186, 199.

 

33) 정풍운동 진행 과정은 꼬민떼른 해산 준비과정(1943년 6월 10일 최종 해산)과 시기가 맞물린다.

 

34) 5ㆍ4운동 이후 낡은 팔고문(八股文)에 반대한 백화(白话) 운동이 극단적으로 발전하자, 유럽 문화에 심취한 지식층에서는 팔고문을 대신한 새로운 형식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여기에도 많은 폐풍이 따랐고 루쉰은 이를 양팔고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양팔고는 서양 형식을 취한 틀에 박힌 문장으로 이해하면 된다. 더 자세한 것은 마오의 “당팔고에 반대한다”를 보라.

 

35) 김승일의 번역(김승일 역, “중국 혁명과 중국 공산당”(1939), 앞의 책, pp. 234-235)과 전형준이 번역해 인용하고 있는 부분(전형준, 앞의 책, p. 254)을 바탕으로 하였다.

 

36) 전형준, 같은 책, pp. 256-262.

 

37) 리스핑(李世平) 저, 최륜수ㆍ조현숙 역, ≪중국현대 정치사상사≫, 한길사, 1989, pp. 283-285.

 

38) 朱德发 외 편, ≪중국현대문학운동사 Ⅰ ― 신민주주의혁명시기≫에 한자 표기가 안 되어 있다. 野蔷薇, 阵铨, 野客 등으로 검색해 보았으나 정확한 원제를 찾지 못하였다.

 

39) 궈모뤄의 희극이자 대표작. 춘추전국시대 굴원의 고사를 모티브로 통일전선전술의 올바름과 국민당 반동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번역본을 찾아서 읽기 쉬운 작품이다.

 

40) ≪해방일보≫ 1942년 6월 28일 제2판; 朱德发 외 편, 앞의 책, p. 217에서 재인용.

 

41) 朱德发 외 편, 같은 책, pp. 214-218.

 

42)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의 ≪중국 현대문학의 이해≫에서는 이 두 작가를 중심으로 <맑스-레닌 연구원>에서 살롱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근거를 본문에 밝히고 있지는 않다.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같은 책, pp. 75-76 참조.

 

43) 덩니우두(邓牛顿) 저, 양일모ㆍ염정삼 역, ≪중국현대미학사상사≫, 일월서각, 1991, p. 229.

 

44) 일본군의 점령지였다가 후일 국민당의 통치지역이 된 마을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맡은 여성의 굳세고 책임감 있는 성품의 묘사한 작품.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앞의 책, p. 232 참조. 이 작품의 여주인공은 일본군 위안부 출신인데 이 책은 김미란의 번역으로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45) 岡崎俊夫(오까자끼 토시오), “사회주의 문학의 형상과 평가”, 高桑純夫 외 저, 우리기획 편역, ≪사회주의 문화운동≫, 이삭, 1985, p. 141.

 

46) 쭝청, 앞의 책, p. 210.;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앞의 책, p. 231 참조. 쭝청의 ≪딩링≫ 번역자인 김미란은 딩링이 ‘≪해방일보≫ 문예란의 편집을 맡은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오역으로 보인다. 朱德发 외 편, ≪중국현대문학운동사 Ⅰ ― 신민주주의혁명시기≫의 번역본에는 ‘≪해방일보≫의 문예 부록’이라 표현되어 있다. 단, 이러한 추정은 당시 발행된 ≪해방일보≫를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고 간접적인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에 혹시 정확히 알고 있는 동지가 있다면 제대로 지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47) 원문은 http://www.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yanan1942/2-01.htm을 보라. 단 바로 그해 1941년 1월에 완난(皖南, 환남) 사변이 일어나 신사군 8천이 국민당군에게 학살당했던 정세를 고려하면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48) 我们这时代还须要杂文,我们不要放弃这一武器.

 

49) 일각에서는 딩링이 마오의 비판 때문에 직위를 내려놓게 된 것으로 묘사하지만, 쭝청의 책에 따르면 싼베이의 홍군 생활에 관한 장편을 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쭝청, 같은 곳 참조.

 

50) 원문은 http://www.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yanan1942/2-02.htm을 보라.

 

51) “妇女”这两个字,将在什么时代才不被重视,不需要特别的被提出呢?

 

52) 쭝청, 앞의 책, p. 211.

 

53) 물론 네쁘 시대의 쏘련과 해방구 옌안에서의 상황은 전혀 다른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54) 쭝청, 앞의 책, p. 212 참조. 전투에도 앞장서면서도 실을 짜서 의복을 보급하고 가사노동도 담당하며 예술 활동에도 지대한 기여를 하였던 여성동지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자기희생을 통한 활동을 지속하지 않았다면 중국혁명의 승리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중 삼중의 고통과 모순에 허덕여야 했던 여성의 문제는 해방구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며 해방구에서 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무수히 많은 쟁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성해방의 문제는 우리의 해방운동에 있어서 결코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고 계급해방을 이루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과제이며 상당히 섬세한 접근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전체 주제상 그리고 필자가 당시 옌안의 여성들의 상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딩링의 글과 마오의 언급에 대해서 단순히 소개하는 데서 그치는 것에 대해 양해를 부탁한다.

중국 혁명 이후에도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실천이 있었다. 그중 문혁 시기 여성해방 운동의 현실과 쟁점에 대해서는 1985년 동녘에서 출판된 끌로디 보로이엘의 ≪하늘의 절반≫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가 있다.

 

55) 원문은 http://www.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yanan1942/5-09.htm을 보라.

 

56) 원문은 http://www.marxists.org/chinese/reference-books/yanan1942/1-01.htm을 보라.

 

57) 섬감녕변구문화계구망협회(陝甘宁边区文化界救亡协会)가 1939년 개명한 것이다.

 

58) 1941년 옌안에서 창간되어 총 6기까지 간행됨. 아이칭(艾靑, 애청), 딩링 등이 편집을 담당하였다. 해방구 군민의 전투생활을 반영하는 문학창작이 주로 발표되었고 문예비평과 번역을 병행하여 게재되었다. ≪곡우≫는 “강화” 발표를 전후하여 비교적 영향력이 있던 문예간행물이었다. 朱德发 외 편, 앞의 책, p. 256 참조.

 

59) 朱德发 외 편, 같은 책, pp. 218-219.

 

60) 같은 곳.

 

61) 마오쩌둥, “당팔고에 반대한다”, ≪연안문예강화ㆍ당팔고에 반대한다≫, pp. 80-81.

 

62) 朱德发 외 편, 앞의 책, pp. 219-220.

 

63)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앞의 책, p. 65.

 

64) “입으로 대중화를 제창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참되게 실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반 민중에게서 실제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화(化)’할 수 없습니다.” (마오쩌둥, “당팔고에 반대한다”, pp. 91-92.)

 

65) 이는 왕스웨이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66) 루쉰은 농촌의 인민대중과 유리된 지식과 지식인의 과잉을 꼬집었으며(“지식의 과잉”), “그들이 예전처럼 방구석에나 틀어 앉아 그 고귀한 지식 노동이나 하도록 들여보내자. 실패할지언정 실패한 것은 노동자의 육체일 뿐, 노동자의 지식은 끝내 살아 있는 것!”이라며 ‘지식노동자’의 특권의식을 풍자했다(“지식 노동자여, 만세!”). (루쉰 저, 이욱연 역,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도서출판 창, 1994, pp. 185-188.)

 

67) “강화”에 대한 여러 해설들이 이 부분은 건너뛰고 인민대중에 대한 보급을 강조한 대목만을 대충 훑어 넘기는 사례가 많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 웹상에 돌아다니는 “강화”에 대한 해설들이 강화의 핵심을 제멋대로 축약해서 왜곡하고 있음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68) 쓰딸린은 1932년 10월 26일 고리끼의 자택에서 열린 행사에서, 예술가(Писатели, 문학 작가를 가리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여기서는 넓은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를 ‘인류 영혼의 기사(技士)(ин-женеры человеческих душ)’라 하였다. (陳繼法 저, 총성의 역, ≪사회주의 예술론≫, 1979, 일월서각, pp. 129-130, 177.) 이는 예술가의 특권적 지위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생활을 표현해야 하는 예술가의 책무를 그만큼 강조하는 것이다.

 

69) 양춘백설은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초나라의 고상한 가곡이며 매우 어려워서 따라 부르기 힘든 곡이며, 이와 반대로 하리파인은 널리 유행하는 쉽고 통속적인 가요이다. ≪문선(文選)≫의 “송옥이 초왕에게 답함(宋玉對楚王問)”에는 송옥의 고매한 뜻을 범인이 어찌 알겠느냐는 뜻으로 등장한다. 마오는 이 고사를 뒤집어서 재전유하고 있다.

 

70) 물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표어는 왕권과 귀족, 교회로부터의 예술의 독립이라는 진보적인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이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지배가 분명해진 현재에도 ‘예술을 위한 예술’을 강조하는 것은 계급적대에 대해 눈을 감거나 착취를 옹호하는 예술을 변호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71) 지난 호에 실린 최상철, “옌안문예강화 당파적으로 읽기 (1)”, ≪좌ㆍ우익 기회주의의 현재≫(≪노동사회과학≫, 제5호), 노사과연, 2012, pp. 312-315를 참조하라.

 

72) 이 대목은 왕스웨이의 “정치가ㆍ예술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다.

 

73)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실천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진리를 발전시킨다. 감성적 인식에서 출발하여 능동적으로 이성적 인식으로 발전시키고, 또 이성적인 인식에서 출발하여 능동적으로 혁명적 실천을 지도함으로써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를 변혁한다. 실천ㆍ인식, 다시 실천, 다시 인식이라는 형식이 끊임없이 순환ㆍ반복되고 이렇게 순환할 때마다 실천과 인식의 내용은 한층 높은 수준으로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전체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앎과 함의 통일론이다.” (마오쩌둥 저, 이등연 역, “실천론”, ≪실천론ㆍ모순론≫, 두레, 1989, p. 31.)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과 미학은 이렇게 통일되어 있다.

 

74) 영화사에 길이 남을 혁신적인 영화 기법을 도입한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감독의 작품이 나찌의 선전도구에 얼마나 적합한 무기였는가. 히틀러의 요청에 의해 1935년 나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영화 ≪의지의 승리≫, 그리고 건강한 육체에 대해 탐미적인 영상미로 담아내며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올림피아≫는 어떠했는가. 혹자는 영화 ≪올림피아≫에 손기정의 영상이 담겨 있음에 감격하기도 하지만 히틀러와 리펜슈탈은 손기정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에게 손기정은 동맹국 일본의 선수였을 뿐이다. 리펜슈탈은 과묵한 마라톤 주자의 모습을 담아내었고 손기정의 영상은 파시즘 선전의 부속물로 활용되었다. 리펜슈탈은 전후 전범재판에서 자신은 정치와 무관하고 오직 영화미학만을 추구했다는 항변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치적 과오에 면죄부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또 할복자살한 시대착오적 극우작가 미시마 유끼오(三島 由紀夫)를 보자. 미시마의 삶을 탐미주의적인 영상과 필립 글래스(Phillip Glass)의 미니멀리즘(Minimalism, 극소주의로 번역하기도 함)으로 조화시킨 폴 슈레이더(Paul Schrader) 감독의 영화 ≪미시마(Mishima)≫(198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미시마의 유미주의와 파시즘 간에는 결코 심연의 간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의식에서 초연’한 유미주의를 극에 까지 추구한 것이 바로 파시즘 미학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ängler)와 같은 ‘비정치적’인 음악가가 나찌 체제 하에서 작곡하고 지휘한 것은 바로 나찌를 위해 괴벨스를 위해 더없이도 훌륭한 외교관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경분, ≪망명 음악, 나찌 음악 ― 20세기 서구 음악의 어두운 역사≫, 책세상, 2004, pp. 119-123 참조.)

이렇게 고찰해 볼 때 발터 벤야민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내린 “파시즘은 정치를 심미화하며, 공산주의는 예술을 정치화하여 파시즘에 대항한다”는 결론과 마오가 정치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 내린 결론이 상당히 근접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75) 쓰딸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적을 증오할 때만이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하였다.

 

76) 당대 최고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1942년 4월 19일 바로 히틀러의 생일 전야의 연주회에서 하켄크로이츠 깃발 아래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하였다. 철저한 공화주의자로서 모든 인류의 평등과 형제애를 부르짖은 베토벤의 교향곡은 구시대적인 억압과 신분제에 대해서는 드높은 혁명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히틀러 하에서 보편적 인류애를 부르짖는 베토벤의 음악은 아리안 우월주의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되어 버렸다.

 

77) 이 부분은 딩링의 “우리에겐 잡문이 필요하다”에 대한 화답으로 볼 수 있다.

 

78) 이는 쏘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제기된 혁명적 낭만주의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강화”에는 직접적으로 낭만주의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지만 마오는 1939년 4월 루쉰예술학교 개교 1주년 기념사에서 ‘항일의 현실주의,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구호를 제기하였다. (邓牛顿, 앞의 책, p. 225 참조.)

 

79) 광명과 암흑의 문제에서 소자산계급 지식인의 회의주의와 혁명적 인민의 낙관주의가 교차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옌안에서 불리던 아래에 인용한 속요를 보면 고난의 투쟁을 낙관으로 버티어 내는 인민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상략)

언덕은 드높고 강은 푸르니,

변구는 살기 좋은 곳,

올해는 더 많은 양식을 생산하자,

마오 동지가 난민을 부르니,

난민은 달려왔다. 그들도 풍요로워지리라.

팔로가 적과 싸우고 있는 동안에도

이곳은 평화로운 생활이네.

우리에게 팔로가 있는 까닭에.

 

(갠서 스타인, ≪연안≫, 1962.; 우노 시게아끼, 앞의 책, p. 144에서 재인용.)

 

80) 예술 창작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낡은 사회를 파괴하고 건설해야 하는 노동계급의 과제와 정확히 일치한다.

 

81) “우리는 경찰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자본가 출세주의로부터, 나아가 부르주아 무정부주의적인 개인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출판을 확립하길 원하며, 또 그렇게 할 것이다.” (Lenin Collected Works, Vol. 10, p. 47.; 레닌, “당조직과 당문학”, 앞의 책, p. 54.)

 

82) 파제예프는 다음과 같은 예술관을 피력했다. “예술가가 현상 본질을 전달하는 것은 구체적인 현상에 대한 추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존재하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전시와 묘사를 통해서이다.” (비엔쭈주(编著组, 편저조) 저, 유홍준ㆍ박수인 역, ≪예술개론≫, 청년사, 1989, p. 258에서 재인용.)

 

83) 이 책은 1988년 예문출판사에서 번역이 되었기에 찾아서 읽어볼 수 있다. 다만 백군과 맞서 싸우는 파르티잔이 연해주의 조선인과 마주친 장면에서는 우리가 보기에 다소 언짢은 상황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84) 꼬빌레프 외 저, 임채희ㆍ이득재 역, ≪러시아 현대문학사≫, 제3문학사, 1993, pp. 78-79.

 

85) 이철ㆍ이종진ㆍ장실, ≪러시아 문학사≫, 벽호, 1994, p. 509. 이 책에는 ≪궤멸≫의 출판년도가 1927년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86) Lenin Collected Works, Vol. 10, p. 47.; 레닌, 같은 곳.

 

87) Lenin Collected Works, Vol. 34, pp. 385-386.; 같은 책, pp. 233-235. 이 시기 레닌은 자신보다 고리끼가 문학ㆍ예술에 대해 더 폭넓은 식견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고리끼와 교류하였다.

 

88) Lenin Collected Works, Vol. 35, pp. 410-414.; 같은 책, pp. 274-278.

 

89) Lenin Collected Works, Vol. 44, pp. 283-284.; 같은 책, pp. 279-281.

 

90) 자세한 것은 필자의 졸고 “맑스-레닌주의 문학ㆍ예술론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한 고찰”, ≪노동사회과학≫ 제2호(2009)를 보라.

 

91) 朱德发 외 편, 앞의 책, pp. 220-223.

 

92) 镇压汉奸托派. 여기서 托派는 뜨로츠끼파(托洛茨基派)의 준말이다. 이등연 번역의 ≪지구전론ㆍ신민주주의론≫, 두레, 1989에는 뜨로츠끼파에 대한 부분을 번역에서 누락시키고 있다.

 

93) 마오쩌둥, “지구전론(持久战论)”, ≪모택동 선집≫ 제2권, p. 128.

원문은 http://news.xinhuanet.com/ziliao/2004-06/30/content_1557356.htm을 보라.

 

94) 마오쩌둥, “민족전쟁에 있어서의 중국공산당의 지위”, 같은 책, pp. 222-223.

 

95) Agnes Smedley, ≪Battle Hymn of China≫, Alfred A Knopf, 1943, p. 165.; 아그네스 스메들리 저, 신경림 역, ≪중국혁명의 노래≫, 사사연, 1985, p. 169.

 

96) 궈모뤄, ≪항일전 회고록≫; 池田誠, “항일전쟁의 전략과 전술”, 앞의 책, p. 386에서 재인용.

 

97)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앞의 책, pp. 57-58.

 

98) 당시 생산운동과 절약운동의 양상에 대해서는 池田誠, 앞의 글, pp. 398-399를 참조하라.

 

99) 陳繼法, 앞의 책, p. 194. 또 천지파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쓰딸린 개인의 발명품으로 본다(같은 책, p. 127). 맑스ㆍ엥엘스의 저작과, 레닌 시대의 치열한 논쟁, 쏘비에트 작가동맹을 통한 문예창작자들 자신의 치열한 논쟁과정은 공중으로 증발해 버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100) 김하림ㆍ유중하ㆍ이주로, 앞의 책, pp. 76-77.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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