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 (중) ― 아우프헤벤 저, 오세철 ‘역’, ≪소련은 무엇이었나≫를 중심으로

 

 

채만수 ∣ 노사과연 소장

 

 

III. 러시아 혁명과 좌익공산주의 (계속)

 

앞에서도 말했듯이, 뜨로츠끼주의자들과 좌익공산주의자들 간의 주요한 차이의 하나는 그들이 “어느 시기부터의 쏘련을 ‘타도해야 할 체제’로 매도하는가”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니라 쏘련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꼬민떼른 성립 후 그 내부에서 세계혁명의 전략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책 ‘경쟁’에서 그들이 패배한 시기의 차이이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패배한 것은 10월 혁명 직후부터 꼬민떼른 초기에 걸친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그들의 주요 투쟁 대상이 레닌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로 그 시기부터 쏘련을 타도 대상, 즉 몹쓸 사회로 매도하고 있으며, 레닌과 레닌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당연히 그 계승자인 쓰딸린에 대해서 극도의 적의를 드러내고”1)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세대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계급 투사들을 악몽처럼 짓눌러온 레닌주의”2) 운운할 뿐 아니라, 온갖 기회에 온갖 요설(妖說)로 레닌과 볼쉐비끼를 왜곡, 모략, 매도, 날조하고 있다. 이들 왜곡ㆍ모략ㆍ매도ㆍ날조의 대부분은 물론 자신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강변하려는 견강부회이고, 자신들이야말로 정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최고라는 불치의 자존망상의 표현이다.

 

빈껍데기 볼쉐비즘, 혹은 사실상의 멘쉐비끼로서의 레닌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적 맑스주의로서의 볼쉐비즘이나 혁명적 맑스주의자로서의 레닌은 사실은 빈껍데기이고, 사실은 멘쉐비즘, 멘쉐비끼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레닌은 모든 점에서 제2 인터내셔날 맑스주의의 정설들(ortho-doxies)에 계속 충실하려 했고, 독일 사민주의의 최고 이론가 카우츠키를 이데올로기적 권위로서 받아들였다. 이러한 형태의 맑스주의에 기본적인 것은, 생산력을 집적ㆍ집중함으로써 역사는 불가피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이었고, 그리하여 사회주의란 단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생산력에 대한 사적 통제를 제거하는 것이고, 사회 전체의 이익에 맞추어 그 생산력들을 사회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유럽 자본주의의 발달한 성격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는 이 이론이 점진적이고 의회 중심적인 길로 이어졌지만,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 때문에 그것은 혁명적 형태를 취했다.3) (강조는 인용자)

 

… 레닌은, ―배신의 거장을 비난할 때에조차― 언제나 충실한 카우츠키주의자(a loyal Kautskyist)였다.4)

 

저들이 “제2 인터내셔날 맑스주의의 정설들(orthodoxies)”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즉 “생산력을 집적ㆍ집중함으로써 역사는 불가피하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이나 “사회주의란 단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생산력에 대한 사적 통제를 제거하는 것이고, 사회 전체의 이익에 맞추어 그 생산력들을 사회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과연 정말로 “제2 인터내셔날 맑스주의의 정설들”이었는지, 아닌지, 혹은 제2 인터내셔날의 성립과 발전, 그 해체 과정, 그 과정 속에서의 제2 인터내셔날의 지배적ㆍ대표적인 정치노선과 이론적 조류의 변화에 대해서는 논의를 생략하기로 하자.

아무튼, 저들의 주장에 따르면, 레닌은 카우츠키가 변절하기 이전이나 이후에나 영락없이 “충실한 카우츠키주의자(a loyal Kautskyist)”였고, “사회주의란 단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생산력에 대한 사적 통제를 제거하는 것이고, 사회 전체의 이익에 맞추어 그 생산력들을 사회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고수한 기회주의자였다! 그리하여 국가 혹은 국가권력과 관련하여 그러한 기회주의적 견해를 더없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예컨대,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저작이 아니라 유령 레닌의 저작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사회주의란 단지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생산력에 대한 사적 통제를 제거하는 것이고 …” 운운의 이론이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그 “자본주의의 발달한 성격 때문에” “점진적이고 의회 중심적인 길로 이어졌지만,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 때문에 그것은 혁명적 형태를 취했다”는 명제 또한 좌익공산주의자들다운 비논리이고 비약이다. 아니, 한 입으로는 화려한 혁명적 공문구들을 늘어놓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발달한 자본주의국가들에서의 혁명의 불가능성을, 그리하여 혁명에 대한 체념을 대중의 의식 속에 은밀하고 부정직한 방법으로 주입하는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주의의 조건으로서 국가는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The state had to be destroyed as a condition of socialism)”고 쓰고 있지만, 그 국가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파괴되기 전에,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기 위해서라도, 먼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장악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발달한 자본주의국가들에서는 그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력은 “자본주의의 발달한 성격 때문에” “점진적이고 의회 중심적인 길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단지’ 장악만 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파괴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코 그 권력 장악의 방법이나 형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님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저들의 주장에서 그 방법 혹은 형태를 규정하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가 발달했느냐’, 아니냐이다!

아무튼 저들의 노는 꼴은 좀 더 지켜보자.

 

레닌의 맑스주의의 혁명적 측면은 … 그가 전쟁에 대한 혁명적 반대라는 비타협적 태도를 취했을 때에 가장 명확히 표현되었다. 이 근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러시아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레닌과 의견을 달리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의견 차이는,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태도나, 러시아[의 혁명: 인용자]는 오직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1917년까지의) 레닌의 견해(view) 같은 다른 문제들과 관련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볼쉐비끼들 내부에서 부하린과 뺘따꼬프(Pyatakov)를 중심으로 반대 좌익분파가 형성되었다.5) (강조는 인용자)

 

이 인용문에는 두 개의 흥미로운 각주(원문에서는 후주)가 붙어 있는데, 그것들에 관해서는 조금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자.

본문으로 돌아오면, 우선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태도 때문에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의견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얘기는 좌익공산주의자들다운 음흉한 매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민족주의에 대하여 레닌이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아무런 지적도, 설명도 하지 않으면서, 마치 레닌이 공지(共知)의 어떤 용납하기 어려운 태도라도 취했다는 듯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러나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레닌은 민족주의, 민족문제에 대하여 어떤 ‘용납하기 어려운 태도’도 전혀 취한 바 없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이여, 그러한 것이 있다면, 지적해 보시라!

게다가 ‘민족주의’란 것 자체가 다양하게 계급적 색조를 달리하는 것이라서, 지금 이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말하듯이 밑도 끝도 없이 그저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태도” 운운하면, 레닌이 도대체 어떤 색조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태도를 취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레닌에게 있어 중요했던 것은, 역시 내가 아는 한에서이지만,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문제였고, 그에 관해서 레닌은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천명하고 취했다. 좌익공산주의자님들이여, 이 민족자결주의에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다음에, “1917년까지” 레닌은 “러시아[의 혁명: 인용자]는 오직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취했다? 바로 그 때문에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레닌과 의견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얘기하면, 레닌은 영락없는 멘쉐비끼이다. 실제로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지금 인용한 문단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 러시아의 상황에서 [좌익공산주의자로서의: 인용자] 부하린의 제국주의 및 국가자본주의 분석과 관련한 핵심은, 러시아의 좌익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러시아는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만을 할 수 있다는, (멘쉐비끼도 볼쉐비끼도 공히 품고 있던) 고전적인 맑스주의 노선을 포기할 수 있게끔 한 것이었다.6) (강조는 인용자)

 

즉, “멘쉐비끼도 볼쉐비끼도 공히(both the Mensheviks and the Bolsheviks)” 러시아 혁명에 대한 동일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나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을 제외하면, 과연 누가 이렇게 비열한 망발, 역사의 왜곡ㆍ날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주지하는 바이지만, 러시아 혁명에 대한 멘쉐비끼의 노선과 볼쉐비끼의 노선은, 그 주체의 면에서도 그 내용과 그 발전의 전망ㆍ정책이라는 면에서도, 동일하기는커녕 정면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멘쉐비끼의 그것이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고 사회주의로의 이행ㆍ혁명은 먼 미래의 일로 미뤄 버리는 것이었음에 반하여, 볼쉐비끼의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선도하고 주도하여 곧바로 사회주의로 성장ㆍ전화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그러한 볼쉐비끼적 노선과 실천의 정당성은 무엇보다도 러시아 혁명의 전개 과정 바로 그것에 의해서 실제로 입증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모략ㆍ매도가 아니라면, 이토록 정면에서 대립적인 두 개의 노선을 어떻게 “(멘쉐비끼도 볼쉐비끼도 공히 품고 있던) 고전적인 맑스주의 노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더라도 양쪽 모두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지향했다고?

이것이 저들의 항변이라면, 그것은 정말 구차한 말장난일 뿐이다. 그리고 저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니 전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 단계, 그 구체적 상황이 우선 어떤 성격의 혁명을 요구하고 있었는가이다. 그러한 단계, 그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의 혁명이 어떤 의미에서든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보다 고도의 단계, 예컨대, 사회주의적ㆍ공산주의적인 것이어야 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역시, 자신들이 한 말의 의미도 모른 채 ‘수미일관’ 시끄럽게 지껄여 대는 좌익공산주의자들다운 관념적인 역사 비약론, 역사 비월론(飛越論)일 뿐이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가 방금 인용한 말들의 바로 앞에서, 저들 스스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에서는 상황이 다소 달랐다. 짜르의 전제적 지배하에 있는 압도적으로 농업적ㆍ소농적인 국가로서, 그 내부에 사회민주주의가 확립될 수 없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부르주아 사회[원문대로 직역: 인용자]도 지배적으로 되지 못했다.7)

 

“러시아에서는 … 부르주아 사회도 지배적으로 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저들의 발언이다. 바로 러시아에서는 어떤 형태든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요구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떤 형태, 어떤 전망을 갖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인가일 터인데,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는 짐짓 외면한 채 “러시아는 오직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만을 할 수 있다는, (멘쉐비끼도 볼쉐비끼도 공히 품고 있던) 고전적인 맑스주의 노선” 운운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볼쉐비즘과 레닌을 빈껍데기의 볼쉐비즘, 멘쉐비즘, 멘쉐비끼로 색칠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비열하고 가증스러운 왜곡ㆍ매도인가?

한 가지 더 이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이 “1917년까지” “러시아[의 혁명: 인용자]는 오직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1915년에 이미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했다”8)는 레닌의 발언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레닌 역시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수미일관 앞에서 한 말 다르고 뒤에서 한 말 다르다고, 그렇게 이해해야 할까?

 

레닌과 ‘좌익공산주의자들’

 

이제 앞에서 미뤄 두었던 각주에 대해서 언급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우선, 앞에서 인용한 문단 중 “레닌의 맑스주의의 혁명적 측면은 … 그가 전쟁에 대한 혁명적 반대라는 비타협적 태도를 취했을 때에 가장 명확히 표현되었다”는 문장에는 문법상의 결함을 포함한, 따라서 대략 다음과 같은 각주(원문에서는 후주)가 붙어 있다.

 

이에 관한 레닌의 선명한 노선은 볼쉐비끼와 유럽의 좌익공산주의자―찜머발트 좌파―의 동맹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인용자] 이 동맹은 레닌이, 우익을 거부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붕괴되었다.9) (강조는 인용자)

 

찜머발트 회의, 즉 제1차 국제사회주의자 회의(1915년 9월 5-8일)에서의 “국제주의자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집단”10)의 일익을 담당했던 분자들을 “유럽의 좌익공산주의자”로 규정하는 저들의 역사의 선취, 역사의 날조에 대해서는 눈감기로 하자. 아무튼, 주지하는 것처럼, 제1차 제국주의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그리고 전후의 대혼란 속에서도 일관해서 혁명적 노선을 견지한 것은 볼쉐비끼였고, 레닌이었다. 그런데도 찜머발트 회의에서 형성된 좌파 집단이 마치 자신들, 즉 좌익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도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면서 “이 동맹은 레닌이, 우익을 거부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붕괴되었다”(!)라고 말하다니?! 이 얼마나 좌익공산주의자들다운 비열한 역사왜곡인가?

또 하나의 각주(원문에서는 후주)는 “그 결과,11) 볼쉐비끼들 내부에서 부하린과 뺘따꼬프를 중심으로 반대 좌익분파가 형성되었다”는 문장 중의 “부하린”에 붙어 있는데, 그 내용과 오 교수님 스스로 “감회가 깊다”시는 기똥찬 ‘번역’은, 앞에서의 지적(≪노동사회과학≫ 제5호, p. 62)을 참조하기 바란다.

문제는 이 주를 달게 한 부하린과 뺘따꼬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반대 좌익분파”, 혹은 “러시아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성격과 역할인데, 그 성격과 역할이란 분명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당에 적대적인 그룹으로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좌익공산주의라고 자칭했던 일파(一派). 1918년 초에 독일과의 강화조약의 체결을 둘러싼 논쟁을 계기로 형성되었다. 이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사회혁명당 좌파와 마찬가지로, 강화 교섭을 반대했고, 좌익적 언사에 사로잡혀, 아직 군대를 갖지 못한 신생 쏘비에트 공화국을 제국주의 독일과의 “혁명전쟁(revolutionary war)”에 끌어들이는 모험주의적 정책을 주장했다. 부하린, 라덱(Radek), 뺘따꼬프가 이 파의 수령이었다. 이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전쟁을 하지 마라, 그러나 강화(講和)도 맺지 마라”는 보다 완곡하고 위장된 형태의 슬로건 하에 전쟁 계속의 노선을 추구했던 뜨로츠끼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파괴를 초래할 정책을 당에 강요하려고 하였다.12) (강조는 인용자)

 

“당에 적대적인 그룹으로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좌익공산주의라고 자칭했던 일파(一派)”! 그것이 바로 발생기(發生期)의 러시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날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쏘련ㆍ동유럽 국가들 같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저들의 진하디 진한 적대가 입증하는, 그리고 앞에서도 예를 들어 지적한 것처럼,13) 발칸반도ㆍ이라크ㆍ리비아 등등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략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의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좌익공산주의라고 자칭하는 일파!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자들’을 ‘제국주의적 도발의 도구’라고 불렀다.”14) 그리고 “뜨로츠끼의 지원을 받으며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당 노선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투쟁을 전개했고, 당과 쏘비에트 등에서의 지위를 사임함으로써 당을 위협하고 분열시키려 하였다.”15)

 

좌익공산주의자들 드디어 레닌을 계몽하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볼쉐비끼 지도부는 러시아에서의 혁명과 그 발전 전망에 대하여 멘쉐비끼와 다름없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레닌 역시, 1917년 4월에야 마음을 열고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하긴 했지만, 한참 하수(下手)이자 기회주의적 대중추수자에 불과하였다. 보라, 그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좌익 분파로부터 나오는 이단적 견해들에 대한 레닌의 애초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2월 혁명 이후 그는 자신의 정통적 신념과 상관없이 사태의 전개에 허심탄회해지겠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볼쉐비끼 지도부가, 부르주아 사회가 장기간 발전할 조짐이 있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에, 혁명기가 결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계속되는 행동들로부터 명확했다. 노동자들은 생산 현장에서 공장위원회를 설립하여 자본가 권력과 전투적으로 싸우고 있었고, 농민 병사들은 전선을 탈주하여 토지를 빼앗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호응하여, 그리고 볼쉐비끼 지도부에 대항하여 레닌은 1917년에 당내 좌익공산주의적 경향의 본질적 입장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4월 테제’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했다.16)

레닌은 “당내 좌익적 경향의 기본적 입장들을 모두 받아들여” 그리하여 “볼쉐비끼 지도부에 대항하여” ‘4월 테제’를 발표했고,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했다”? 이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아니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역사의 왜곡ㆍ날조는 이토록 위대하다!

그런데 한국의 좌익공산주의자들, 그들의 수장은 한 수 더 뜬다. 우리는 앞에서, 오세철 교수님께서 “번역에서 본문과 각주에서 군더더기이거나 불필요한 극히 일부분의 내용…은 번역자가 제외시켰다”면서 얼마나 통 큰 짓을 하고 있으며, 어떤 내밀한 정치적 목적을 야비하게 추구하는가를 지적했다. 그러나 ‘번역자’가 한 일은 “번역에서 본문과 각주에서 군더더기이거나 불필요한 극히 일부분의 내용”을 통 크게 “제외”시킨 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한 좌익공산주의자의 위대함을 창작하기까지 했다. 원저자들인 ‘아우프헤벤’은, 레닌이 “당내 좌익적 경향의 기본적 입장들을 모두 받아들여” “‘4월 테제’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했다” 운운한 후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것을 맑스주의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임박한 파국, 그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The Impending Catastrophe and How to Avoid It)”17)에서 전쟁이 국가자본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러시아 사회를 혁명화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국가와 혁명≫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가장 비(非)사회민주주의적[인 면: 인용자]을 보여 주었고, 그는 네덜란드의 좌익공산주의자 판네쿡을 인정하기까지 했다.18) (강조는 인용자)

 

자, 다른 건 다 차치하고 마지막 문장의 후반부를 보자. 그 원문은 “he even acknowledged the Dutch left communist, Pannekoek”(강조는 인용자)이고, 따라서 대략 번역하자면 위와 같다. 그런데 한국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 오세철 교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번역’하셨는지 아는가?

 

[그는: 인용자] 네덜란드의 좌익공산주의자인 판네쿡에 찬사를 쓰기도 했다. (강조는 인용자)

 

even acknowledged”, 즉 “인정하기까지 했다”가 한국 좌익공산주의 지도자의 손에서는 슬그머니 “찬사를 쓰기도 했다”로 둔갑한다. 이것은 분명 오역(誤譯)이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의도적인, 지극히 음흉한 의도를 가진 창작(創作)이다. 이것이 바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좌익공산주의자를 자칭”하는 자들의 행태이다.

 

비혁명적 혹은 반혁명적 레닌으로의 회귀

 

고수가 하수를, 그것도 우호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 하수를 가지고 놀며 조롱하는 것은 고금의 상례이다. 그리하여 고수 좌익공산주의자들도 하수 레닌을 가지고 놀며 조롱하고 있다. 이렇게.

 

그러나 레닌의 혁명적 측면이 1917년에 사회민주주의적인 정통성과 절연(絶緣)하는 것 같았지만, ―좌익[공산주의자들: 인용자]에게 그가 그들의 일원이 된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10월 이후 곧 그들은 그것을 의심해야만 했다. 혁명의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의 이분법이 그의 사고 속에서 명백해진 것이다. 레닌에게 있어서는 혁명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은 프롤레타리아 당의 정치권력 속에 보증되었고, 생산현장에서의 관계들과 같은 ‘경제적’ 문제들은 본질적이지 않았다. 레닌의 관심은 갈수록 더욱더 러시아의 후진성, 즉각적 사회 변환을 위한 그 미성숙성으로, 그리고 따라서 당의 적절한 정치적 지도하에서의 국가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사회주의로의 최선의 길일지도 모른다는 역설적 개념으로 돌아갔다.19)

“혁명의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의 이분법이 그의 사고 속에서 명백해졌다”? 저들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은 결국 레닌의 사고는 전혀 변증법적이지 못하고 형이상학적ㆍ기계적이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맑스(나 엥겔스)를 제외하면, 당연히 오직 좌익공산주의자 자신들만이 변증법적일 터이니까!

아무튼 저들은, 본래 낙후된 데다가 장기간의 전쟁으로 형편없이 파괴된 러시아 경제ㆍ사회 전반을 레닌과 볼쉐비끼가 즉각적으로 사회주의적으로 변환시키는 대신에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의 노선을 취했다며 조롱조로 앙앙불락이다. 그리고 이는 10월 혁명 후 1920년대 초까지 러시아 좌익공산주의자들이 실제로 앙앙불락한 주요 주제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들의 이러한 시비의 터무니없는 오류를 “정통으로… 회귀”20)한 레닌이 어떻게 지적하고 비판했는지는, 그리고 이러한 앙앙불락에 바로 이어 저들 과거의, 그리고 현재의 좌익공산주의자들이 벌이는 또 하나의 앙앙불락, 즉 독일과의 강화 문제는 조금 뒤에서 논의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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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 지난번 호의 101페이지 맨 마지막의 오역을 “틱틴은 결국 순수하고 순혈한 형태의 자본주의를 19세기 중엽의 짧은 기간에 한정하고 있다.”로 바로잡습니다. 참고로 원문은, “Ticktin is led to restrict capitalism in its pure and unadulterated form to a brief period in the mid-nineteenth century.”입니다.

 


 

1) 채만수, “좌익공산주의자들의 쏘련론 (상) …”, ≪좌ㆍ우익 기회주의의 현재≫(≪노동사회과학≫, 제5호), 노사과연, 2012, pp. 104-105.

 

2) 아우프헤벤 저, 오세철 역, ≪소련은 무엇이었나: 소련 사회 붕괴와 해체에 대한 분석≫, 빛나는 전망, 2009, p. 15 부근; 채만수, 같은 글, p. 105의 각주 67)도 참조할 것.

 

3) 오세철 역, 같은 책, pp. 110-111 참조.

4) 같은 책, p. 110, 각주 31) 참조.

5) 같은 책, p. 111 참조.

6) 같은 책, p. 112 참조.

 

7) 같은 책, p. 110 참조.; 여기에서도 원문과 함께 오세철 교수님 스스로 “감회가 깊다”시는 참으로 기똥찬 ‘번역’을 독자들에게 참조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In Russia the situation was somewhat different. Still being an overwhelmingly agricultural and peasant country under the autocratic rule of the tsar, bourgeois society had not become dominant, let alone allowed the establishment of social democracy within it.”; 오 교수 ‘번역’: “러시아에서 상황은 조금 달랐다. 아직 짜르의 독재적 지배하의 절대적인 농업 국가였으므로 부르주아 사회는 지배적이지 않았고 그 안에 사회민주주의의 확립을 허용했다.”(강조는 인용자). “그 안에 사회민주주의의 확립을 허용했다”! ― 브라보~! 브라보~!

 

8) V. I. 레닌, “제1보”, ≪レーニン全集≫, 제21권, p. 389.; Lenin Collected Works, Vol. 21, p. 384.

 

9) 오세철 역, 앞의 책, p. 111 참조. [원문]: “Lenin’s clear line on this led to an alliance of the Bolsheviks with European left communist ― the Zimmerwald left ― this broke down because of Lenin’s refusal to work with those who rejected the right.”

 

10) V. I. 레닌, “1915년 9월 5-8일 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자들”, ≪レーニン全集≫, 제21권, p. 404.; Lenin Collected Works, Vol. 21, p. 389.

 

11) 즉, “민족주의에 대한 레닌의 태도나, 러시아[의 혁명: 인용자]는 오직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일 수밖에 없다는 (1917년까지의) 레닌의 견해(view)” 때문에.

 

12) ≪レーニン全集≫, 제27권, p. 575 사항 역주(譯註) 및 Lenin Col-lected Works, Vol. 27, pp. 556-557 후주 참조.; 일본어판 전집의 사항 역주와 영어판의 후주는 곳곳에 표현의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는 양쪽을 대조하여 작성했다.

 

13) ≪노동사회과학≫ 제5호, p. 126의 각주 97) 참조.

 

14) ≪レーニン全集≫, 제27권, 같은 곳 및 Lenin Collected Works, Vol. 27, p. 557 참조.; 역시 양자의 차이를 고려하면서 작성했다.

 

15) 같은 곳.; 그리고 V. I. 레닌, “‘좌익공산주의자들’의 행동에 대한 촌평”, ≪レーニン全集≫, 제27권, p. 205 및 Lenin Collected Works, Vol. 27, p. 202도 참조.

 

16) 오세철 역, 앞의 책, pp. 112-113 참조.; 좀 길긴 하지만, 여기에서도 오 교수님의 기똥찬 ‘번역’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된다. ― “But despite Lenin’s initial hostility to the heretical ideas coming out of this left fraction, after the February revolution he showed that he would not let his orthodoxy prevent him from being open to events. Just as the Bolshevik leadership thought that a long period of development of bourgeois society was on the horizon, it was clear from the continuing actions of the workers and peasants that the revolutionary period was by no means over. Workers were setting up factory committees and militantly contesting capitalist authority at the point of production; peasants soldiers were deserting the front and seizing land. Responding to this, and against the Bolshevik leadership, Lenin in 1917 seemed to take up all the essential positions of the left communist tendency within the party. In April Theses he called for proletarian socialist revolution.”; 오 교수의 ‘번역’: “그러나 이러한 좌익분파의 사상에 대한 레닌의 초기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2월 혁명 이후 레닌은 그의 정통성이 여러 사건들에 열려져 있음을 보였다. 볼셰비키 지도부가 부르주아 사회의 장기간의 발전이 지평위에 있는 것처럼, 혁명기는 결코 끝나지 않은 노동자와 농민의 지속적인 행동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명확하다. / 노동자는 공장위원회를 만들고 생산의 지점에서 자본주의 전위에 전투적으로 대항했고 농민군대는 전선을 깨고 토지를 장악했다. 이에 대응하면서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부에 반대하여 1917년 레닌은 당에서 좌익공산주의 경향의 모든 본질적 입장을 취한 것처럼 보였다. 4월 테제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했다.”

 

17) 이 작은 것 하나에서도 역시 좌익공산주의자들답다! 왜냐하면, 원래의 제목은 “The Impending Catastrophe and How to Avoid It(임박한 파국, 그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가 아니라, “The Impending Catastrophe and How to Combat It”, 우리말로는, “임박한 파국,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러시아어 원문은 “Грозящая катастрофа и как с ней бороться”이기 때문이고, 맞서 싸우는 것과 피하는 것은 실로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18) 오세철 역, 같은 책, p. 113 참조.

 

19) 같은 책, pp. 113-114 참조.; 이 인용문의 첫 문장 “But if the revolutionary side of Lenin seemed in 1917 to break from social democratic orthodoxy ― if it seemed to the left that he had become one of them ― soon after October, they were to doubt it”을 오 교수님께서 어떻게 ‘번역’하셨는지도 보자.; 오 교수 ‘번역’: “그러나 레닌의 혁명적 측면이 1917년 사회민주주의 정통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처럼 보였다면 즉, 10월 혁명 이후 그가 좌파의 입장을 취했다면 의심할 여지가 있다.”!!!

 

20) 같은 책, p. 113.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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