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제2차 대전 후 미국의 계급투쟁 ― 공산주의 운동과 반공주의

손미아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편집위원

 

 

미국의 반공주의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공산주의 운동을 말살시키다시피 했는가?

어떤 이들은 미국 공산당의 인민전선 노선이 문제였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꼬민테른의 지시를 교조주의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진단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형식적으로 평가할 때 그들이 부분적으로 원칙적ㆍ자주적이지 못했다는 한계나 오류로서 지적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이 처했던 복잡ㆍ다기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분석한 위에서의 도출한 과학적 결론은 아닐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한계와 반공주의는 분명 다른 범주이기 때문이다. 반공주의는 결코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의 한계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가계급의 일방적인 공세이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실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은 최강의 제국주의를 형성한 자본가계급을 만나서 불운했다.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러시아 제국처럼 무너져가는 제국이 아니라, 왕성하게 발전하는 자본가계급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그러한 자본가계급이 사실상 전체 자본주의 세계를 압도하고 제패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1939년에 발발한 세계대전은, 미 제국주의로 하여금 1929년에 발발한 세계대공황으로부터 탈출할 출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피를 자양분 삼아 더욱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세계혁명운동의 역사를 통해서 배우고, 현재와 미래의 혁명노선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추상적ㆍ사변적 사고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자칫 자본가계급의 흑색선전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높은 것이다. ‘공산주의’ 적색공포는 분명 자본가계급이 유포하는 이데올로기이다.

모든 물질은 운동한다. 미국 공산주의 운동도 운동했고 지금도 물론 운동하고 있다.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1956년 이래 탈(脫)쏘주의적ㆍ개량주의적 노선을 내걸고 있어,1) 과거의 혁명적 전통을 복원해야할 과제도 부여받고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변화 발전해나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야 한다. 미국 공산주의운동의 역사는 그들의 문제인 동시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 미국의 반공주의

 

1) 세계대전과 미국의 반공주의

 

미국에서 반공주의가 주요하게 등장했던 시기는 제1ㆍ2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있다. 제1차 대전 때에도 제2차 대전 때에도 항상 대전이 종전되면서 반공주의가 극성을 떨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반공주의의 강화가 이렇게 양차에 걸친 세계대전의 종전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은, 한편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도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의 폭발이어서 그것을 통해서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전쟁뿐 아니라 이 공산주의와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투쟁으로서의 반공주의는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 미 제국주의가 제국주의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반공주의를 그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구축해가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1차ㆍ제2차 세계대전은 극에 달한 과잉생산과 시장의 태부족이라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의 파국적 폭발이었고, 따라서 세계시장의 재분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이들 제국주의 열강이 각각 자국의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교전 상대국의 노동자계급을 대대적으로 살육하도록 강제한, 독점자본가계급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대공세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세계 노동자계급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했다. “이 전쟁의 참된 승리자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였고, “세계의 노동자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러시아 노동자가 가한 결정적 일격에 의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파멸적인 타격을 주었던 것이다.”2)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국제 노동자계급은 나찌와의 전쟁 속에서 쏘련 공산주의를 지켜냈을 뿐 아니라 동부 유럽을 사회주의 세계체제 속에 편입했고, 중국에서의 혁명의 기반을 조성했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주지하는 것처럼,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미국은 사실상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로 올라섰고,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미국은 제국주의 열강 가운데 절대적인 패권자가 되었다. 대공황의 혼란과 제2차 대전의 파괴과정을 거치면서 미국은 20세기 중반까지 생산, 무역, 군사, 금융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면서 제2차 대전 후에는 세계적인 패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승전국(영국, 프랑스 등)과 패전국(독일과 이태리, 일본)을 막론하고 피폐해진 제국주의 열강을 그 하위 파트너로 편입시킴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전 세계로 그 군사기지를 전개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브레튼우즈 체제, 즉 제한 적인 금 태환과 연동된 달러 본위의 고정환율제를 통해 그 군사적ㆍ국제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패권을 강화해갔다. 국제연합도, 부분적으로는 물론 쏘련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역시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상 그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조성한 정세의 한 측면, 미 제국주의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이고 고무적인 한 측면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조성한 정세의 다른 한 측면 그것은, 미국과 자본주의 생산체제 그것에 극히 불리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절대적인 위기였다. 쏘련이야말로 연합국이 제2차 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한 주역이었을 뿐 아니라, 대전의 결과로 동유럽이 공산화되었고, 중국에서, 그리고 서유럽을 포함한 자본주의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사회주의ㆍ공산주의 혁명의 열기가 분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식민지 인민의 반제ㆍ민족해방운동이 광범하게 터져 나왔는데, 거기에서도 역시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세력이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미국의 자본가계급과 국가권력에게 있어 대(對)나찌 독일 전쟁에서의 공산주의 쏘련의 승리와 동부 유럽의 공산주의화는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것은 전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로 다가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쏘련이 가장 중요한 전승국이 되면서 공산주의의 위신이 더욱 높아졌고, 그 위력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자본주의에 대한 경쟁적 대안이자 최대의 적으로 공산주의가 급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쏘련식 모델의 매력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좌파정당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제국주의의 패권을 장악한 미국은, 그 독점자본가계급은 공산주의와 대립 속에서 자본주의를 구원할 반공주의의 주역을 자임하고 나섰다. 한편에서, 미국의 트루먼 정부는 특히 영국의 처칠과의 공조 하에 쏘련에 대한 봉쇄작전, 즉 냉전(트루먼 독트린)에 나섰고, 마샬플랜 등의 원조정책을 통해서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재건과 그 노동자계급의 포섭을 서둘렀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보다도 미국 내의 공산주의자들과 그 활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19세기 마지막 4/4분기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가 급성장하고 급격히 고도화되면서 미국의 노동자계급과 그 운동 역시 급격히, 그리고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제1차 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의 그러한 성장과 급진화는 더욱 가속되었고,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운동 상층부 일부의 자본가계급에의 투항과 협조주의가 발생했지만, 운동 전반의 반자본주의적 기조를 바꿀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이 끝나자 억눌렸던 노동자계급의 요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좀 더 자세히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은 유독 격렬하게 폭발했는데, 특히 1915년과 1916년에 물가가 급등한 반면 실업이 증가하자 노동자들은 더욱 더 전투적으로 되었다. 1917년 4월 6일과 10월 6일 사이에 광업부문의 파업 407건을 포함해서 3,000건의 파업이 발생하였고, 1917년에 총 4,400건 이상의 파업이 발생했다. 1917년과 1918년에 각각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1919년에는 4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는데, 이 기록은 1937년까지 깨지지 않았다.4) 한편,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정부의 요구에 의해 임금인상요구를 자제하면서 연장근무로 그들의 임금을 보충해야 했던 노동자들은 1945년 전쟁이 채 끝나기도 전부터 전쟁 기간에 있었던 그들의 경제적, 육체적 희생과 감소된 임금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면서 대대적으로 파업을 일으켰다. 수천 개의 파업이 발생했다.5) 특히 1944년에는 미국 역사의 어느 해 보다도 더 많은 파업이 발생했다.6)

사실 미국 노동운동에 대한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시기인 대공황기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최고조에 달했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직접적인 지도를 받았던 노동조합에 소속된 노동자들은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7)에 소속된 전체 조합원들의 25%에 달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상당히 영향력을 미쳤던 노동조합들은 또 다른 25%에 달했다.8) CIO에 속한 전체 노동자의 약 50%가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대중들은 쏘련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전쟁 이후에도 쏘련과 전쟁 동안에 맺었던 협력관계가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공산당의 이러한 급성장과 노동자 대중에 대한 영향력의 급격한 증대는 1944년 이후 “빨갱이사냥 (Red-baiting)”을, 특히 제2차 대전 후 광적인 매커시즘을 불러일으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9)

이러한 점에서, 즉 그것이 제2차 대전 이후 조성된 세계적인 사회주의ㆍ공산주의 혁명 열기에 대한, 그리고 동시에 급성장한 미국 내 노동운동, 특히 공산당에 대한 폭력적 대응이었다는 점에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에 의한 냉전과 반공주의의 강화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대반격이자 대공세였다.

 

 

2) 반공주의의 승리를 규정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역관계

 

제2차 대전 이후 미국이 반공주의의 보루가 것은 그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간의 역관계(力關係) 때문이었다.

미국에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그 파업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며 “빨갱이 사냥”에 나서는 사례들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고 1919년에 미국 공산당이 창립되자 자본가계급은 즉시 예의 “빨갱이 사냥”을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의 “빨갱이 사냥” 전통은 노동자계급의 힘에 비해 월등하게 강했던 자본가계급의 힘의 우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은 더욱더 막강해졌다.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대부분의 나라가 전쟁으로 황폐해졌지만, 미국은 그 반대였다. 전쟁 후 미국의 산업규모는 1929년의 그것의 몇 배가 되면서 자본주의 전 세계를 제패했고, 가히 ‘미국의 세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로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의 세기’가 온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의 독점자본은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생산하여 팔아넘김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남긴다. 독점자본에 의한 이러한 엄청난 군수물자 생산과 판매는 물론 독점자본과 국가기구와의 유착, 보다 정확히는 국가기구의 독점자본에의 종속의 표현이었는데, 이러한 유착 혹은 종속은 전쟁이 끝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왜냐하면, 전쟁 수행을 위해서 전쟁기간 동안에 국가에 의해서 세워진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종전 이후에 민간 독점자본에게 헐값으로 배분되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에는 주요 대공장이 연방정부의 소유였다. 전쟁 말기에 연방정부는 합성고무 생산시설, 마그네슘 및 항공기 생산시설의 90%, 알루미늄 생산시설의 70%, 기계 제조공장의 50%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솔린, 화학, 강철 공장들이 세워지고, 3,800마일의 오일 파이프라인이 세워졌는데, 이 모든 비용이 정부의 돈으로 지불되었다. 전쟁 동안 추가된 산업시설의 약 3분의 2가 연방정부의 기금에서 나왔다. 그런데 정부가 세운 이 공장들을 운영한 것은 100개의 민간 기업들이었다. 250개의 대기업 제조업체들이 전쟁 이전에는 국가 소유의 제조업 공장들의 65%를 운영했는데, 전쟁 동안에는 79%를 운영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1946년 6월 30일 정부는 이들 공장의 약 70%를 사적 독점자본에 매각했는데, 그 매도가격은 대개 그 평가가격의 60%에도 못 미치는 헐값이었다. 일부 대공장들은 더 낮은 비율의 가격에 팔렸다. 결국 6대 독점자본이 이들 공장의 48%를 소유하게 되었는데, U. S. Steel, International Harvester, Allied Chemical and Dye, General Electric, General Motors, 그리고, Bethlehem Steel이 그들이었다.10)

이렇게 해서 전쟁 중에 설립된 국영 공장들이 민간 자본가들에게 헐값으로 분양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자본가계급 간의 유착 혹은 독점자본가계급에의 국가의 종속은 더욱 강화되면서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힘의 우위는 더욱 강고해졌다.

 

 

3) 뉴딜과 반공주의

 

반공주의는 자본가계급이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파시즘은, 그것이 나찌나 이태리, 일본 등의 파시스트에 의해서 노골적으로 선언된 그것이든, 미국의 매카시즘 등등과 같이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든, 그 가장 격렬한 표현이다. 그런데 일견 진보적으로 보이는 자유주의 또한 반공주의의 주요한 한 형태이다. 루즈벨트 정부 하의 미국의 이른바 뉴딜정책이 바로 그러하였다.

대공황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을 지지했고, 케인즈 경제학, 즉 소비가 경제성장의 핵심이므로 소비를 증진시키는 공공정책을 대대적으로 펴야 하고, 여기에다 약간의 소득재분배정책을 펴야 한다는 논리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노동운동의 수많은 지도자들도 뉴딜정책이 복지의 향상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향상시킬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뉴딜정책에 동의하였다. 이렇듯 뉴딜은, 역사가 리자베스 코헨(Lizabeth Cohen)도 언급했듯이, “나라 전역에서 크게 경기침체의 압박에 맞서서 파업, 시위, 정책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11)

그러나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애초 일반적으로 뉴딜(New Deal)에 반대했고 ‘자유시장’을 주장했다. 뉴딜로 자본주의를, 따라서 자본가계급을 안정화시키려는 것이 루즈벨트의 목적이었지만, 자본가계급은 대공황 속에서 자본주의체제와 자본가계급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그들에게 일정한 양보를 요구하는 뉴딜보다 더 강력한 기제인 전쟁밖에 없음을 이미 본능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애초에 자본가계급은 뉴딜을 강력히 반대했다. 루즈벨트의 뉴딜은 본질적으로 자본가계급을 안정화시키고, 자본가계급의 사적재산을 보호하며, 자본주의를 온존시키기 위한 정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가계급은 뉴딜에서 요구하는 약간의 양보, 즉 약간의 사회재분배정책도 허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전기, 의류와 같은 소비재를 생산하는 자본가들 중 일부는 뉴딜이 노동자들의 가처분소득을 증대시켜 대중의 소비를 자극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뉴딜을 지지했지만,12)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그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예컨대, 자본가계급은 미국자유연맹(American Liberty League: ALL)을 결성하여, 뉴딜이 연방정부로 하여금 주 정부들 위에 군림하게 하는 ‘전체주의’적인 힘의 중앙집중화를 초래함으로써 헌법을 침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ALL은 또한 뉴딜의 사회보장정책이 각 주의 자율권을 침해하고 경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본가계급은 19세기말에 노동조합을 반대하기 위해 창립된 제조업체국가연합(National Association of Manufacturers: NAM)을 이용하여 반(反)뉴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0년대 NAM은 1차 세계대전의 난류 속에서 국가 전역에 확산됐던 노동 급진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오픈숍(Open Shop) 캠페인, 즉 노동조합원이 아닌 사람들도 고용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이끌었다. NAM은 1937년까지 대중들에게 뉴딜에 반대하는 선전을 하기 위해 라디오 프로그램, 영화, 빌보드 팝음악 전문지, 우편발송, 대변인, 의원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선전을 하는 데에 거의 예산의 절반인 1.500만 달러를 지불했다. NAM은 뉴딜의 일환으로 제정된 노동법인 와그너법(Wagner Act)13)에 대항해서 선두에 서서 싸웠다. NAM 소속 자본가들은 와그너법이 국회에 상정되기 이전과 이후에 와그너법의 반대를 위해 증언대에 서서 와그너법이 헌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화당은 뉴딜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기 위해 자본가계급에게 그들의 노동자들을 필사적으로 조직할 것을 요구했다.14) 제2차 대전 이전에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이렇게 뉴딜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제2차 대전을 계기로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은 오히려 케인즈주의와 뉴딜을 지지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전쟁을 거치면서, 전쟁 그 자체와 더불어 ‘진보적인’ 뉴딜과 케인즈주의가 노동자들을 포섭하는 데에, 즉 국가와 독점자본에 종속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컨대, 1942년에 미국광고연합(Advertising Federation of America)의 의장은, 전쟁이 “기업가들의 승리를 도왔다”고 말하면서, 기업이 전쟁 중에 스스로 ‘좋은 행동’을 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고, 이것은 일반시민, 그의 아내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그들의 자식이 선거에서 판결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전쟁 이후 온건하고 유연한 케인즈주의를 발전시킬 것을 약속했던 기업가들의 경제발전위원회(Committee for Economic Development) 등과 같은 새로운 조직들이 급성장했다. 1943년 미국의 상공회의소 의장은 절제된 목소리로 “단지 고의적으로 눈먼 자만이 원시적인 자유무역 시기에 있었던 구식 자본주의가 사라졌다는 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필립스 페인은, “이러한 낙관적인 접근방법은 기업가들이 전쟁 이후에 정치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 승인되었던 것 같다”15)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미국 자본가계급은 그들의 패권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제는 미국 대중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전쟁 전에 그렇게도 반대하던 뉴딜정책과 케인즈 정책에도 동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미국 자본가계급의 이러한 행보를 볼 때, 본질적으로는 같은 목적을 가진 작은 차이이면서도 대단히 커다란 차이처럼 포장되는 저들의 정책 차이에 따라 민주당과 공화당을 구별 짓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노동자계급에게 반공주의의 칼을 내리꽂을 때에도 ‘보수적인’ 공화당과 ‘진보적ㆍ자유주의적인’ 민주당을 다 활용했다.

 

 

4) 제2차 대전 후 노동운동의 고양과 매카시즘

 

1950년대에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데에서 가장 극단적인 공격을 가한 집단은 물론 기업계의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악명 높은 조셉 매카시(Joseph McCarthy)는 그들의 도구였다. 예를 들어, 자본가 언론 중에 하나인 ≪Quaker Oats≫는, “그는 사실 여부도 제대로 확인 안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계산이 항상 앞뒤가 맞는 것도 아니고, 그는 지금까지 자제력을 잃고 분별없이 무모한 짓을 해왔지만,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가 한 일은 좋았다”라고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자본가계급 일반은, “매카시는 우리 정부 안에 있는 스파이나 배신자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진작 행해져야만 했던 그러한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16)

그런데 극단적 반공주의로서의 매카시즘은 사실 제2차 대전 후에 고양된 미국의 노동운동에 대한 미 독점자본의 반격이었다.

미국의 노동운동은 1930년대의 승리에 이어 전쟁 직후에 다시 새롭게 고양되었다. 조직된 노동자들은 자본가계급의 ‘미국의 세기’에 저항할 수 있는 핵심집단이었으나, 전쟁 중에 노동조합들이 임금통제를 받아들임으로써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으로 실질임금이 하강하면서 노동자의 지위는 약화되었다. 전쟁에의 협조로 엄청난 생산을 달성하면서 파시즘을 패배시켰지만, 기업들에게 거대한 이윤을 안겨주었을 뿐, 모든 것이 노동자계급의 상태를 악화시켰던 것이다.17) 노동자들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실업증대와 임금감소에 저항하기 위해 투쟁했다.

1946년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큰 파업의 물결이 일었던 해였다. 1945-46년에는 무려 8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주로 석유, 자동차, 강철, 전기, 석탄, 버스운전이나 기타 잡역부 일을 했던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1945년 9월 시작된 전국적인 파업은 약 4만3천 명의 석유 노동자들이 20개 주에서 시작했는데, 약 20만 명의 광부들과 북서지역의 약 4만4천 명의 벌목노동자들, 약 7만 명의 중서부 트럭운전자들,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의 약 4만 명의 기계노동자들이 참여했다. 1945년 11월에는 GM에서 약 17만5천 명의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노동자들이 30%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파업의 물결은 1946년에 최고조에 달하여, 노동통계국은 1946년 1월을 “미국의 역사상 노동자와 자본가의 투쟁이 가장 심하게 발생했던 시기였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파업은 광산, 정육업, 강철 공장을 맹렬하게 쓸어버렸고, 디트로이트에서는 목축 노동자들, 시애틀에서는 버스 노동자들과 신문 인쇄 노동자들, 미시간 플린트 공장에서는 학교시설 노동자들, 그리고 나라 전역에서 전화교환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다. 미국전기노조(GE)에서도 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나서 노동자들은 시간당 임금을 18.5센트씩, 즉 하루에 약 1.5달러를 더 올렸다.18)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진저와 크리스티아노는 이렇게 쓰고 있다.

 

1945-46년 사이에 약 800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지금까지 미국 역사상 최고였다. 1945년 미국 추수 감사절에 즈음해서 GM UAW에서 20만 명, 1946년 새해에 즈음해서 UE에서 하루 2달러 인상을 요구하면서 16개 주에서 파업을 벌였고, 1월 21일 미국 강철 노동자들이 30개 주 75만 명이 포함된 강철 제련소들을 폐쇄하면서 임금투쟁을 했다. GM 노동자들은 113일 동안 투쟁해서 승리했다. 40만 명의 미국 광산노동자들은 4월 1일 투쟁에 들어가 임금인상과 건강과 복지를 요구했다. 5월에 철도 열차승무원과 기관사들이 파업을 하여 2일 동안 운송이 마비되었다.19)

  

자본가계급은 이러한 노동운동의 발전이 그들의 힘과 권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겼다. 자본가계급은 또한 CIO와 같은 산업노동조합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변화에 대해 우려했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높은 사회보장기금, 더 많은 공공기금, 그리고 사회복지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들은 기업의 세금증대를 의미했고, 또한 기업의 이윤의 감소를 의미했으며, 더욱이 그것들은 노동자들이 소외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해 전진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패배시켜야만 제국주의의 패권을 잡고 국내에서 지배 권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엘렌 쉬레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매카시즘이 왜 노동운동을 목표로 했는가에 대한 많은 이유들이 있다. 매카시즘이 노동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모든 초기 시도들 (사업주들의 “빨갱이 사냥”)이 한층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 것뿐이다. 반공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자본가들에게는 전투적인 좌파 노동조합들이 1930년대 이후로 만들어왔던 성과들을 되돌리는 데에 매우 유용한 방법이었다. 이와 유사하게도 빨갱이 사냥은 오랫동안 보수주의적 노동 지도자들과 그들의 동맹세력들이 그들의 라이벌이었던 좌파 활동가들에게 대항하여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유용한 무기였다. 매카시즘이 미국 노동운동을 목표로 했는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공산주의가 미국 노동자계급에게 집중을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우리가 매카시즘이 어떻게 작용했고 어떻게 노동운동과 나머지 미국 사회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선 매카시즘의 피해자가 “무고한 자유주의자들”이라는 미신을 버려야한다. 그러한 무고한 피해자들이 존재하고 많은 집중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회조사위원회 앞에 회부되고, 대배심(Grand juries) 앞에 끌려가거나 전체 사업장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려졌던 남녀의 대부분은 공산당 내에 또는 그 주변에 있었거나 또는 있어 왔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었다.20)

 

 

5) 민주당ㆍ공화당, 그리고 자본가계급

 

미국에서 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가 노동자계급의 고양되는 투쟁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냉전은 그러한 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를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었다. 냉전은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또 하나의 기제였던 것이다. 냉전과 반공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억압하는 방식만이 달랐을 뿐 본질은 같은 것이었다.

미국에서 애초에 냉전을 추진한 핵심세력은 공화당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당이었다는 사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 내부의 ‘민주’와 보수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며, 자본주의 국가와 정부는 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임을 보여주고 있다. 혹은 지배계급 내의 ‘민주주의적’ 분파, 혹은 ‘진보적’ 분파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노동자계급에게 더욱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를 미국의 민주당이 노동운동 내의 우파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반공주의를 내세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궤멸시켜버리다시피 하게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앞에서도 본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독점자본에게는 2가지의 걸림돌 혹은 위협이 있었다. 하나는 미국 노동자계급 운동의 고양이었고, 또 하나는 공산주의의 발전이었다.

193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자 국가 쏘련은 세계적인 강국으로 성장했는데,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엄청난 파괴에도 불구하고 그 힘과 위상이 약화되거나 저하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높아졌다. 그리고 그 위력에 의해서 제2차 대전 이후에는 동유럽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알바니아 7개국과 아시아에서도 노동자계급의 국가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변화와 그 추이는 자본주의체제에 절체절명의 위기였고, 따라서 저지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적으로 저지해야 하고, 또 주도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제국주의의 새로운 패자(覇者) 미국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편에서는 국내의 반공주의 내전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쏘련에 대한 냉전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벌여나갔다.

그리고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은 자본가계급의 이러한 양대 반공주의 전선에서 사실상 어떤 차이도 없는 정치적 전사들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다만 역할 분담만이 있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대쏘 냉전을 벌이는 데에서는 민주당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면, 미국의 기업가들이 “미국 자본가들을 위한 뉴딜”이라고 부르는, 그리고 미국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을 궤멸시키다시피 하는 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프트-하틀리법(1947년)을 통과시키는 데에서는 공화당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들 모두가 독점자본가계급의 당이기 때문이었다.

 

 

2. 미국 공산당과 1930년대의 그 활동

 

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미국의 노동운동을 그토록 혁혁하게 발전시켰던 공산주의자들이 왜 그렇게 빠르게 쇠퇴하였는가? 여기에 미국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 자신의 책임은 무엇인가?

냉전과 ‘빨갱이 사냥’에 그 주요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역사가들은, 그리고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임을 자임하면서도 반쏘적인 연구자나 활동가들은 공산당의 통일전선 (United Front) 노선과 지도력의 한계, 쏘련 중심의 꼬민테른 활동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21)

그러나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대패배의 주요 원인을 공산주의자들의 통일전선 노선이나 쏘련 중심의 꼬민테른 활동 등에서 찾는다면,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 자신의 노선과 활동에 그 패배의 원인의 일단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가장 주요한 원인은 힘의 압도적 우위에 있던 독점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운동 내부의 반공주의적 우파 자유주의자들, 변절자들의 무단의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공산당이 그 패배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것들이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찾기 위해 미국 공산당의 활동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1) 미국 공산당의 기원

 

미국 공산당은 특히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고 태어났다. 러시아 혁명이 미국 좌파 사회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미국 역사가들은 그것은 마치 잠자고 있던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22)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기원은 1881-1891년에 미국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 SPA)에서 좌파블록이 형성되면서 부터였지만, 실제 미국 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19년으로 그 미국사회당에서 축출된 좌파들이었다. 애초 1919년에 미국 공산당은 아메리카공산당(Communist Party of America: CP)과 공산주의노동당(Communist Labor Party of America: CLP)이라는  두 개의 당으로 창립되었으나, 1920년 꼬민테른의 통합 제안에 따라 1921년에 미국 공산당(Communist Party USA: CPUSA)으로 통합된다.23)

미국 공산당의 탄생과정을 보면, 이런 조직이 어떻게 1930년-1940년대 미국의 노동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이 갈 정도로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탄생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미국 내에서도 공산당을 조직하려했다는 시도 자체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다만 그것이 미국 노동자계급의 성숙도와 무관하게 성급하게 시도되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창립 자체가 매우 불안정 하여, 창립 때부터 내부의 집단들이 두 번씩이나 이합집산하게 되는 위기를 겪은 것이다.

미국 공산당의 창립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러시아 혁명 전까지 미국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주의의 틀 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좌파 사회주의자들은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아서 미국사회당 내에서 열심히 활동을 한 결과 당내에서 주요한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특히 1919년 1월에 제3인터내셔날(=꼬민테른)이 결성되고, 레닌이 미국사회당의 좌익을 꼬민테른에 가입하도록 초청한 것은 공산당을 결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4) 사회당의 좌파들은 사회당 전국임원회의(National Executive Committee)의 15석 중에서 12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우파는 좌파의 이러한 우세를 인정하지 않고 좌파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맨처음 1919년 5월 24일에 미시간 사회당(Michigan Socialist Party)이 추방당한 이래, 불과 몇 주 사이에 매사추세츠, 오하이오, 시카고 조직 등 많은 지역조직들이 추방당함으로써 결국은 총 사회당원의 약 3분의 2가 추방당하게 되었다. 1919년 1월 현재 사회당원의 수는 109,589명이었는데, 7월에는 39,750명으로 격감했다.

1919년 5월에 미국사회당으로부터 이렇게 좌파들이 숙청당한 결과 곧 시작될 공산당 창당에 참가하거나 후원할 7만 명의 좌파 집단이 형성되었다. 미국에서는 러시아인들을 중심으로 한 외국어연맹과 미국 본토 출신으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집단, 미시간 지역 조직 등 3개의 집단이 공산당원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공산당을 창당하여 레닌의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자 하였다.

1919년 6월 21일 20개 주에서 온 94명의 대표자들이 뉴욕에 모여서 전국좌파회의를 열고, 8월 30일에 열릴 사회당 비상 전당대회에서 좌파가 사회당의 지도부를 장악할 수 있으면, 사회당을 공산당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해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사회당과 결별한 후 9월 1일에 새로운 공산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한다. 그러나 이들 집단 사이에는 몇 가지 문제를 두고 이견이 벌어졌다. 특히, 미시간-러시아 외국어동맹과 미국 본토 출신들로 구성된 영어 사용 집단 사이에 상당한 괴리감이 있었는데, 우선 미시간 집단과 러시아 출신의 외국어연맹은 이미 사회당으로부터 쫓겨났고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9월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능한 빨리 공산당을 창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미국의 본토인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더 앞서 있으며, 당의 성격은 레닌 지도하의 러시아 볼쉐비끼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 본토 출신들은 우선적으로 사회당을 공산당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시도해 보자고 주장하면서, 사회당 내에서 뭔가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그렇게 빨리 나오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당의 성격은 좀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열의 쟁점은 결국 언제 공산당을 창당할 것이며, 누가 당을 지도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괴리감은 쉽게 극복되지 못했다. 결국 미시간-러시아 외국어동맹이 9월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앞서 나갔다. 이들은 1919년 7월 초에 모여, 9월 1일 시카고에서 전당대회(National Convention)를 열어 아메리카공산당(Communist Party of America)을 창당할 것을 결의했고, 공식적인 기관지 ≪공산주의자(The Communist)≫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와중에도 1919년 6월에 전국좌파회의의 다수에 의해 선출된 좌파 전국의회(National Council)는 계속해서 사회당을 이어 받으려는 태도를 취했다. 사회당 전국 임원회의(Socialist National Executive Com-mittee)가 새 전국임원회의(new NEC)를 선거하기 위한 투표를 무효화하자, 1919년 7월 26-27일 좌파는 시카고에서 새 ‘회의(Committee)’의 한 세션을 개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리드(John Reed), 프라이나(Louis C. Fraina), 루텐버그(Charles E. Ruthenberg) 등의 8명의 좌파 후보자들은 엄숙하게 표결 결과를 테이블로 만들었고, 사회당 전국임원회의 사무총장(Executive Secretary) 아돌프 거머(Adolph Germer)가 나타나줄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들이 당의 전국 사령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새 ‘회의 (Committee)’는 또한 임시 당의장에는 카터필드(L. E. Katterfeld)를, 그리고 서기장(Executive Secretary)에는 알프레드 웨겐크네히트(Alfred Wagenk-necht)를 임명했다. 그리고 축출 당했던 조직들을 다시 복귀시킬 것이며, ≪혁명 시대(The Revolutional Age)≫를 당의 공식적인 기관지로 채택하고, 꼬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에 가입할 것을 결의했다.

시카고에서 이러한 부질없는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루텐버그, 퍼거슨(Isaac E. Ferguson), 발람(John J. Ballam), 울프(Bertram D. Wolfe), 코헨(Cohen) 등은 7월 28일 사회당을 장악하여 변화시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포기하고 독자적으로 공산당을 창당하기 위해 시카고로 갈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 외국어연맹, 미시간 집단 및 좌파 전국의회 다수파는 공동의 요구로 1919년 9월 1일 시카고에서 아메리카공산당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좌파 전국의회의 소수파였던 기틀로우(Benjamin Gitlow), 라킨(James Larkin) 등은 리드와 웨겐네히트 등에 합류했고, 이들 영어권 연맹들은 좌파 전국의회 다수파를 무조건 항복이라고, 즉 사회당 내에서 투쟁을 해보지도 않고 따로 당을 만드는 행위는 비겁한 배신행위라고 비난하면서, 그들과는 따로 8월 15일 공식기관지인 ≪노동의 목소리(The Voice of Labor)≫를 발간하고, 8월 30일 시카고의 사회당 전당대회(Socialist Convention)에 참석한 후, 그들 자신들만의 공산당을 건설하려고 계획한다. 그들에게는 이제 사회당 우파에 대한 투쟁이 외국어연맹, 미시간 조직 및 나머지 영어권 좌파들에 대한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해서 1919년 미국 공산당은 두 개의 당으로 나뉘어 창당되었다. 1919년 8월 30일 시카고에서 열린 사회당 긴급 전당대회(Emergency National Convention)에서 알프레드 거머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들이 승리하자 리드, 기틀로우, 웨겐크네히트가 주도하는 영어권 좌파들은 이 사회당 전당대회를 박차고 나와 1919년 8월 31일  21개 주의 82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공산주의노동자당(Communist Labor Party of America: CLP)을 창립했다. 한편, 1919년 9월 1일엔 프라이나, 루텐버그 등이 주도하는 러시아 외국어연합과 미시간 집단 및 기타 좌파들을 대표하는 128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아메리카공산당(Communist Party of America: CP)를 창당했다. 양당 사이에는 CP의 강령이 대중행동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보다 강조함에 비해서 CLP의 그것은 대중행동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추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창립과정에서도 나타났듯이, 미국 공산당은 태생적으로 조직적인 허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막 태어난 미국 공산당에 가혹한 ‘빨갱이 사냥’을 가했다. 1919-20년의 저 악명 높은 반공주의 팔머 급습(Parlmer Raids)25)의 직접적인 대상이 바로 그 두 달 전에 창립된 미국 공산당과 그 당원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1919년 두 개의 공산당이 출범하자마자 정부의 반공주의 공격이 극대화되었지만, 공산주의자들 내부에서는 미국인 집단과 외국인 집단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 지속되었다.

1920년 4월에서 5월 사이에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은 3개의 집단, 즉 두 개의 CP(하나는 외국인연맹, 다른 하나는 루텐버그 집단)와 하나의 CLP로 분리되었다가, 1920년 4월말에서 5월말에 CP의 루텐버그 집단과 CLP가 통합하여 연합공산당(United Communist Party)으로 통합된다. 이제 연합공산당과 외국인연맹 집단의 CP라는 두 당으로 나뉜 셈이 되었다. 여기에서 1920년 꼬민테른은 두 당이 통합할 것을 제안하게 되고, 두 당은 꼬민테른의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21년에 하나의 미국 공산당(CPUSA)으로 통합한다.

그러나 미국 공산당은 이렇게 조직적 취약성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1929년 이후 대공황을 맞아 헌신적으로 활동하며 1940년대까지 미국의 노동자계급 운동을 크게 발전시키게 된다. 그들이 처했던 가혹한 조건과 조직적 취약성을 고려하면, 어느 누구라도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헌신적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대공황기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과 미국의 공산주의 운동

 

1929년에 시작된 세계공황의 시기에 미국 공산주의자들이 미국 노동운동에 미친 역할은 혁혁한 것이었다. 1929-1935년의 공황기에 공산주의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요구들을 조직하는 데 열의와 헌신을 다하였다. 이 대공황을 맞아 자본가계급이 자신들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에게 전가하자 노동자들은 실업, 임금삭감 등의 고통을 당하여 미국 전역에서 투쟁으로 요구를 분출하고 있었다. 이에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현장투쟁을 조직하고 노동자계급의 전위로 복무하기 위해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이 힘을 획득할 수 있도록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제6차 꼬민테른대회(1928)의 제안에 따라 미국 공산당이 스스로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진단했으며,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United Front)을 내세워 독자적인 노동조합을 세우고, 자본가계급에 대항해서 투쟁하려는 노동자들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으로 조직하고자 했다.

초기 미국 공산당의 노동운동의 중심은 윌리암 포스터(William Z. Foster)가 지도하던 노동조합교육연맹(Trade Union Educational League: TUEL)이었다.26) 1929-1935년까지 포스터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원들은 TUEL 속으로 들어가 공산당 노동분과를 건설하며 활동했다. 이 시기에 시카고 노동운동을 통해서 중요한 기반을 닦은 공산주의자들은 미국노동총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FL)27)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1926년에 광부들의 노동조합에서 조직화에 성공했고, 의류제조산업노동조합(Needle Trades Workers Industrial Union), 여성노동자 노동조합들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당시 공산당이 조직화에 큰 성과를 이룬 부문은 의류제조산업노동조합, 전국광부노동조합(National Miners Union), 전국섬유노동조합(National Textile Workers Union) 등이었다. 1929년 가을에, TUEL은 새로운 노동조합들의 중심인 노동조합통일동맹(TUUL, Trade Union Unity League)으로 옮겨갔는데, 이 TUUL이 AFL과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힘의 창조의 근원이었다. TUUL은 산업노조를 대표했고, 미숙련노동자들의 조직을 위해 헌신했다. 이후 몇 년 동안 공산당에는 풀타임 노동조합원인 당원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노동조합에 속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데 그들의 모든 시간을 다 헌신함에 따라 노동현장에서 일을 하는 당원들의 수가 증가하였다. 당시 노동현장에 속해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공장에서는 ‘공장핵 (Shop nucleus)’을 구성했고, 도시, 지역, 도심지 등에는 ‘세포(Cell)’와 같은 형태로 당원들을 포괄하였다.28) 이리하여 1930년초의  “혁명적인 노동조합”들은 약 2만 명 미만의 조합원들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1934년에는 조합원들이 12만 5천 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거의 TUUL 멤버였다. 1931년에 전국광부노동조합(NMU)에서는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1931-1933년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은 규모가 작은 10개의 노동조합들을 건설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는 자동차공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건설하지 못했으나, 1930년대에는 약 400명의 핵심 당원들이 노동자들의 권리와 산업노조의 투사들로서 산업현장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한 자동차노동조합(Auto Workers Union: AWU)에서도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 자동차노동조합은 AFL의 직능별 노동조합에 대항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전부터 ‘이중노조(Dual Unionism)’에 관여하고 있었는데, 1930년에 TUUL에 가입하면서 TUUL 자동차산업노조(TUUL Auto Industry Union)를 창립할 수 있게 되었다. AWU가 크고 작은 파업투쟁에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초창기에는 자동차 공장에서 대규모 투쟁을 조직하지는 못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 AWU를 통해서 전투적인 산업노동조합원들로서의 명성을 획득하였고, 그들의 경쟁자인 AFL 회원들과는 달리 파업 중 희생정신과 조직능력을 보여주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명성은 그들이 이후에 설립될 미국자동차노동조합(United Auto Workers: UAW)의 강력한 구성원이 될 많은 지도자들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TUUL은 CIO에서 새롭게 건설된 산업노동조합들의 핵심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 시기에 TUUL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은 이후에 건설될 CIO 노동조합들인 미국전기노동조합(United Electrical Workers Union: UE), 미국해양노동조합(Marine Workers Industrial Union), 운수노동조합(Transportation Workers Union: TWU)에 영향을 주었고,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teel Workers Organizing Committee: SWOC)에서도 그 정책을 세우는데 공헌했다.29)

한편, 1933년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파시즘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통일하고 그 주위에 모든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하라”는 꼬민테른의 제안에 따라 미국 공산당은 사회당 및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하는 통일전선을 형성하였고, 보다 대규모 노동조합들을 포함하고 있던 미국노동총연맹(AFL) 속에 들어가 비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들과도 합병을 하고 동맹을 하는 등 보다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을 조직하고자 했다. 이러한 경향은 지역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1933-1934년에 지역에서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TUUL을 폐기하고 AFL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1936년까지, 즉 AFL에서 CIO가 분리될 때까지 공산당원의 약 36%가 AFL 노동조합 내에 있었다.

그러나 레벤쉬타인은 미국공산주의자들이 AFL과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힘의 창조의 원동력이었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는 데 원동력을 제공했던 TUUL을 더 강한 좌파 노동조합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에는 물론 거대한 AFL에 대항하여 독자적인 노동조합으로서 역할을 다하기에는 TUUL의 규모 자체가 너무 작았다는 한계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더 중요하게는 1929-1935년의 시기에 미국 공산당원들이 미국 노동자들의 요구를 잘 이해하여 그들과 함께 노동자 대중투쟁을 수행하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30)

 

 

3)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의 창립과 활동

 

1935년 이후 미국공산주의자들은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미국노동운동의 중심부로 뛰어들었다. CIO를 건설하는 데 힘썼던 수백 명의 공산당원들은 노동운동 내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했고, 공산주의의 힘은 현저하게 증가했다.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의 건설과정은 다음과 같다. 1935년에 처음 산업별조직위원회(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s: CIO)가 미국노동총동맹(AFL) 내의 한 분파로써 설립되었다. 그런데, 보수파가 우세했던 AFL의 집행위원회가 1936년 중반에 CIO 내에서 “반항하는 노동조합들”의 회원자격을 정지시키려고 했다. 이에 1936년 존 루이스(John Lewis) 지도하의 CIO 노동조합들이 AFL을 탈퇴, 그 명칭을 산업별조직위원회에서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로 바꾸어 독립적인 조직으로 탄생시킨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처음에는 CIO가 AFL에 머무는 것을 지지하면서, AFL에서 CIO가 분리되어 이중의 연합체가 형성되는 것에는 반대하며 AFL과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으나, 이후 CIO가 AFL에서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 확실하게 되자,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대다수 노동조합들을 대거 CIO로 이동하게 함으로써 CIO의 건설에 적극 참여한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미국전기노동조합(UE),31)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WOC), 운수노동조합(TWU) 등이 AFL을 떠나 CIO로 이동했다. 수개월 후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이끌거나,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는 여러 노동조합들도 CIO로 이동했다.

한편, 공황기에 공산당원들이 CIO의 현장에서 벌인 헌신적인 조직 활동에 대해서 레벤쉬타인은 이렇게 쓰고 있다.

 

공산당에 소속된 노동조합원들은 CIO 내에서 헌신적인 활동을 했고, CIO에 소속된 노동조합들(UAW, UE, 등등)에서 현장 조직 활동을 함으로써 최고의 조직가들로서의 명성을 획득했다. 젊은 공산당원들이나 동조자들은,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전체 세대의 에너지를 들끓어 오르게 하고, 상상력에 불을 붙이는 노동조합 운동에 매료되어, 어떤 일이든 실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도우려고 하였다. 공산당에 소속된 노동조합원들은 곧 그들 자신이 CIO 내에서 최고의 조직가들로서의 명성을 획득했다. 다수의 노동조합 내에서, 공산주의 노동조합원들은 매우 열심히 일하고 있었고,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CIO 노동조합원들은 한 작업장 내에서 5-6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핵(Nucleus)’에 의해서 조직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젊었다. 노동조합원들의 소규모 핵은 주로 지역 조직가들이나 순회 조직가들에 의해서 조직되었는데, 이들 조직가들은 노동조합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탐구해나갔다. ‘핵’들은 매우 무관심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가입시키는 어려운 작업을 수행했으며, 그들 공산주의자들 자신들은 실제 그들이 처한 조건에서 할 수 있는 역할보다 더 많은 역할을 했으며, 또 대다수 동료들이 파업을 하려고 하지 않을 때조차 파업을 제의하곤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새로운 산업노조의 구성원들 전부에게 영향력을 미친 것은 단지 그들의 열정과 교육만이 아니다. 산업공황으로 국가가 대부분의 노동자들을 실업의 위험으로 몰아넣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 조직화를 주도했다. 파업이 발생하면, 공산주의자들은 파업에 동참했으며, 매우 전투적으로 그리고 전체가 총동원되어 투쟁했으나, 공산주의자들이 공장 내에서 의지할 만한 공장 내의 고유한 조직, 사상, 지도력은 부족했다. 이렇게 해서 1930년대 대공황기에, 미국 노동자계급의 상당한 부분이, 비록 최소한 노동조합의 부분에서이긴 하지만, 외부 지도자들을 따를 정도로 충분히 무르익게 되었다.32)

 

 

4)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단위노조 조직

 

1930년대에 공산주의자들은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WOC),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전국항만노조(National Maritime Union: NMU), 미국전기노동조합(United Electrical and Radio Workers of America: UE), 운수노동조합(TWU)등에서 현장의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932년 공산주의자들은 독자적으로 강철ㆍ금속산업노동조합(Steel and Metal Workers Industrial Union: SMWIU)를 설립하여 현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이미 존재하던 AFL 소속인 철ㆍ강철연합(Iron and Steel Association: ISA)의 투쟁이 발생했을 때, 이 두 조직이 연합하여 투쟁하려던 시도가 실패함으로써 현장노동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합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또한 1935년 당 노선이 바뀌자, 공산주의자들은 SMWIU를 포기하고 AFL과 융합하였으나, 이 과정에서도 역시 현장 노동자들과 연합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존 루이스가 AFL 내의 통합철ㆍ강철노동조합(Amalgamated Iron and Steel Workers: AISW)을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WOC)로 바꾸었는데, 이 SWOC의 권위주의적 구조는 루이스와 반공주의자들의 힘을 강화시켜 주었고, 그들에 의해 밀려난 공산주의자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SWOC 내에 좌파블럭을 형성하려는 공산당 지도부의 약 4년간에 걸친 노력과 투쟁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필립 머레이(Philip Murray)와 같은 우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해고되게 된다.

1930년대에 노동현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벌였던 가장 중요한 선도적 투쟁은 1936-1937년의 GM 플린트 공장 점거농성이었다. 1933년 말에 공산주의자들은 자동차 공장에서 그들의 본거지였던 TUUL을 폐기하고, 자동차 노동조합으로써 성장하고 있던 AFL의 연방노동조합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는데, 국가산업부흥법(NIRA)이 큰 활력소가 되어 이 AFL에 자동차 노동자들뿐 아니라 다른 많은 노동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34년 AFL이 회사 측과 합의를 이루어내는 데 실패하면서 보수적 지도세력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환상이 깨어지게 되고,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좌파들은 자동차 공장에서 숙련직과 비숙련직을 포함한 단일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에 책임을 맡고 나섰다. 공산주의자들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의 투쟁에서 헌신적인 행동과 탁월한 조직능력으로 전투적인 산업 노동조합원으로서의 명성을 획득하였다. UAW는 여러 AFL 소속 노동조합들과 미국기계ㆍ교육노조(Mechanics Educational Association of America)를 포함한 몇 개의 독립노동조합들로 결성된 노동조합이었는데, AFL 소속 시보레(Toledo Chevrolet) 공장의 공산주의자였던 로버트 트레비스(Robert Travis)와 클리브랜드 TUUL 자동차노동조합 지도자였던 윈햄 모르티머(Wyndham Mortimer)의 노력에 의해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운동이 발전되었다. 1937년 GM 플린트 공장의 공산주의자였던 모르티머와 트레비스는 점거농성투쟁을 조직함으로써 GM 자본가들을 노동조합에 굴복시켰고, UAW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확대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의 힘은 1938년까지 UAW에서 단일의 가장 강력히 조직된 정치적 힘이 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매우 뛰어난 조직가, 매우 열심히 활동하는 노동조합원으로서의 평판을 얻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은 GM 플린트 공장의 투쟁에서 얻은 평판으로 UAW에서 많은 노동자들을 새로 조직할 수 있었다. 또한 GM 플린트 공장 점거투쟁의 승리는 계속해서 미국전역의 공장들에서 조직화의 물결로 퍼져나가 미국 노동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공산당이 UAW에서 강할 수 있었던 것은, 모르티머나 트레비스와 같은 몇 명의 지도자들이 적재적소에서 그들의 지지자들과 함께 결정적 지도력을 발휘하며 투쟁했기 때문이었다.33)

공산당은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WOC),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이외에도 전국항만노조(NMU), 전국운수노동조합(TWU) 등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큰 성과를 이룬 곳은 전기산업이었다. 전기산업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과거 TUUL 소속이었던 노동자들을 대거 미국전기노동조합(United Electrical Workers Union: UE)으로 조직했고, 이후 제임스 카레이(James B. Carey)와 공산주의자들이 연합, 미국전기ㆍ라디오노동자연합회(United Electrical and Radio Workers of America: 약칭 UE)34)를 세웠다. 또한 1937년엔 제임스 메틀스(James Matles)가 과거에 강철ㆍ금속산업노동조합 (SMWIU)에 속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UE에 대거 가입함으로써 UE는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진보의 핵으로 존재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스케넥터디 사회주의자들(Schenectady Socialists), 뉴욕시 유태인 공산주의자들(New York City Jewish Communists), 영국인 계급의식투쟁 사회주의자 노동자들(English Class-consious Militant Socialist Unionists), 전미국 세계산업노동자동맹(All-American IWWs) 등이 공산당으로 합류했다. 또한 가장 자생적인 좌파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전국광산노조(International Union of Mine), 기계가공ㆍ제련노동자들(Mill and Smelter Workers), 국제목재노동자들(International Wood Workers of America)도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광부들과 기계가공ㆍ제련노동자들은 가장 성공적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 노동조합인, 서부지역광부연맹(Western Federation of Minors) 의 후예들이었는데, 이들의 일부가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농업노동자들을 조직했고, 미국통신협회(American Communications Association)를 조직했으며, 포장노동자조직위원회(Packing Workers Organizing Committee)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흑인사회에서 CIO를 조직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은 기아(飢餓)행진을 촉발시켜 미국 각 도시에서 약 1백만 명의 사람들을 참여시켰으며, 실업자들의 투쟁을 대거 조직했다.

결론적으로 미국 공산당은 1930년대에 미국 노조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1938-1939년에 공산당의 지도력은 노동운동에서 새싹을 틔웠다. 새로 설립된 CIO 노동조합들은 노동현장에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공급했고, 미국 급진주의 전통을 발달시켰다. 한편, 이 시기에는 보수주의자들도 노동조합을 장악해 들어오게 되고, 전국항만노조(NMU),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WOC)에서 반공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성공적으로 장악하게 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려는 첫 시도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3. 노동자계급의 후퇴와 미국 공산당

 

1) 인민노선ㆍ통일전선 전술의 문제였는가?

 

미국 공산당은 이렇게 대공황과 제2차 대전을 거치면서 역동적인 발전을 성취했지만, 오늘날에는 노동운동 속에서조차 사실상 거의 정치적 영향력을 잃은 무기력한 존재로 되어 있다.

미국 공산당과 공산주의 운동이 이렇게 급격히 쇠퇴하게 된 주요 원인은 물론,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제국주의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의 압도적으로 우월한 힘과 그 힘에 의한 반공주의 공격, 그리고 그 한 형태로서의 냉전이었다. 하지만, 그 급격한 쇠퇴과정에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 자신의 책임은 없었는가?

많은 역사가들은 공산당의 노선과 지도력의 한계, 쏘련 중심의 꼬민테른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실버스(Malcom Sylvers)와 프리켓(James Prickett)은 인민전선을 강조하면서 당의 공장단위(Party Shop Unit)를 없앤 것이 당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직적으로 약화시켰다고 말한다.35) 게라시(John Gerassi)는 미국 공산당과 미국사회당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후 공산당이 변질되어 혁명적 열정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36) 또한 드래퍼(Theodore Draper)와 레벤쉬타인은 미국 공산당이 쏘련과 꼬민테른의 지침을 미국의 조건에 맞게 적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른 것이 그 한계였다고 말하고 있다.37) 레벤쉬타인은 당의 레닌주의와 인민전선동맹이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세력들을 거부하게 함으로써 당이 약화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이슨(Mark Naison)은 뉴딜을 둘러싼 민중의 투쟁과 CIO가 민주당의 루즈벨트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결정에 직면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정책으로 나가게 된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발전을 막았다고 평가하고 있다.38) 예츠(Michael Yates)도 미국 공산당이 독립적인 제3의 당을 만들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39) 리첸스테인(Nelson Lichtenstein)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파업에 반대했기 때문에  노동현장의 투사로서의 그들의 위치를 쇠퇴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나, 할퍼른(Martin Halpern)은 UAW에서 그러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40) 키란(Roger Keeran)은 얼 브라우더(Earl Browder)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동운동의 발전에 불리한 노사협조주의를 주장함에 따라, 그리고 그가 당을 정치적 연합형태로 변형시킴에 따라 현장의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방향감각을 잃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고도 주장한다.41) 이써먼(Maurice Isser-man)과 스타로빈(Joseph Starobin)은 공산당의 당수가 윌리암 포스터에서 얼 브라우더로 바뀜에 따라 당파주의적인 노동조합 정책으로 변질되었다고 보고 있다.42) 레벤쉬타인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얼 브라우더의 변절을 비판한다.43)

그러면 정말 꼬민테른의 통일전선이 본질적인 문제였는가? 꼬민테른에서 주창했던 통일전선전술은 무엇이었는가?

꼬민테른은 러시아 혁명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국제노동운동, 즉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레닌에 의해 창설되었다. 1930년대 이후 꼬민테른의 주요 정책이었던 통일전선론은 영국 및 유럽의 좌파들의 좌익적 오류를 극복하고자 레닌이 꼬민테른 제2차 대회(1920)에서 발표한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좌익소아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44) 그리고 레닌의 지도하의 꼬민테른 제3차 대회는 “대중 속으로”라는 슬로건 하에 통일전선을 도입하게 되고, 제4차대회에서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어 실행되기 시작했다. 레닌의 통일전선에 대한 테제는 러시아 혁명과정에서 볼쉐비끼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꼬민테른의 통일전선 전술은 임박한 세계공황과 그 뒤를 이은 제국주의 전쟁의 시기에 꼬민테른의 주요전술로 대두된다. 1928년 7-8월에 열린 제6차 꼬민테른 국제대회는 세계공황으로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기 때문에 공산당은 그들 스스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1933년 독점자본가계급이 히틀러를 권좌에 앉히자, 1935년 열린 꼬민테른 제7차 대회는 반파시즘 통일전선ㆍ인민전선 정책을 강화하고, “파시즘과 전쟁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노동운동을 통일하고, 그 주위에 모든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하는 정책”45)을 채택했다. 1934년 꼬민테른은 꼬민테른에 가입한 모든 공산주의당에게 사회당, 사회민주주의당, 심지어 자유민주주의적 정당들까지도 반파시즘의 깃발 아래 전술적 연합을 할 것을 제안했다.46)

꼬민테른의 통일전선 전술이 전쟁과 파시즘으로 광분했던 자본가계급에 대한 대응전술이었음을 상기하면, 그것은 계급협조 정책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그 계급투쟁을 견지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이 통일전선 전술은 그 자체가 공산주의의 목적과 행동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강령이 아니라 시기와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행동지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은 이 통일전선전술을 어떻게 실행했는가?

미국 공산당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꼬민테른의 통일전선 전술은 주요하게 제6차 대회(1928)와 제7차 대회(1935)의 결의였다. 1929년 미국에서 세계대공황이 발발할 당시 꼬민테른의 주요 전술은 자본주의의 붕괴가 임박했으므로 노동자계급은 아래로부터 통일전선을 형성해서 광범위한 대중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미국의 공산주의자들도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을 세우면서 노동자 대중들을 조직해갔다.47) 그러나 1933년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세계 공산당들은 다른 좌파들과 함께 반파시즘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때 미국 공산주의자들도 좀 더 광범위하게 사회당 및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하는 통일전선을 형성하였다.48) 이렇게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에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건설에 적극적으로 기여했고, 현장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데 헌신적으로 참여했다. 미국공산주의자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면서 미국노동운동을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전통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최근 미국의 일부 역사가들은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를 재조명하면서 미국에서의 인민전선(Popular Front)의 긍정적인 효과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이슨은 미국의 통일전선이었던 인민전선의 역할에 대해 “1935년에서 1939년까지 미국 공산당은 인민들의 투쟁의 고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하면서 인민전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특히 당지도력이 혁명적인 웅변술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 속으로 들어가 대중들의 에너지를 노동조합 건설에 힘쓰도록 했고, 대중들의 뉴딜법제화를 위한 운동을 지지하고, 대중들을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경각시켰다고 평가한다. 그는, 이렇게 해서 “당원수가 1934년 2만6천 명에서 1939년 8만5천 명으로 급증하였을 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 급진주의자들 사이에 협력정신을 통해서 북미에 걸쳐 소외된 집단들이 권리를 갖는 것을 도왔다” 하고 평가한다. 결국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전선을 통해서 산업노동조합의 조직화 운동, 흑인평등 운동, 나찌즘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저항운동 등을 비롯하여 파시즘에 맞서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데 있어 그들의 영웅적인 용기를 보여주었으며, 더 나아가 문화적으로 다양한 인종들 사이에 전망 세우기 등은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민중들의 요구들을 꽃피움으로써 소외된 민중의 운동을 발전시켰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49)

키란도 꼬민테른 제7차대회(1935) 이후 1934-1938년의 인민전선 시기에 1935년 CIO를 창립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급증되는 등 노동운동이 성장했으며, 1934년 이후에 노동현장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고 평가한다. 1934년 이후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CIO 노동조합들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AFL 노동조합에서도 지도자적인 위치를 획득할 정도로 당이 조직하는 기술, 리더쉽, 실제적인 경험, 자신감 등으로 충만해 있었고, 이것이 현장노동자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다는 것이다.50)

인민전선이 미국의 혁명운동을 고양시킨 긍정적인 효과가 위와 같았다면, 많은 역사가들이 지적했던 부정적인 효과란 무엇이었는가?

노동자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은 꼬민테른 제7차 대회가 명시한대로 “파시즘과 전쟁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하여 노동운동을 통일하고 그 주위에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하는 정책“이었지만, 미국에서는 이 통일전선과 인민전선이 아래로부터 견고하고 광범위하게 형성되지 못하고 위로부터 형성되었던 점에서 공산주의 운동 한계를 노정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현장에서 노동조합을 통해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에는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이것이 반파시즘을 위한 아래로부터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형성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오히려 위로부터의 통일전선, 즉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연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프랑스나 스페인의 상황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해보면, 미국의 통일전선이 아래로부터 광범위한 인민전선으로 만들어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 양쪽 지도자들이 서로 연합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1936년 반파시즘 데모행렬에서 양쪽 집단이 서로 마주하게 되었는데, 이에 데모 대열에 있던 노동자 대중들은 “통일”, “통일”을 외치며 서로 합쳤고, 이어 몇 주 후에 파시즘에 맞서 승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노동자 대중의 광범위한 인민전선과 통일전선이 만들어지지 못한 채 공산당 지도부와 사회당을 비롯한 노동운동 내 자유주의자들과의 협력관계가 형성되었다. 즉 꼬민테른의 제안처럼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 모두 형성된 통일전선이 아니라, ‘위로부터 형성된 통일전선’은 그 자체 모순을 유발시켜 결국 공산주의자들의 쇠퇴에 일정 부분 기여하게 된 것이다.

 

 

2) 뉴딜과 미국 공산당

 

뉴딜 시기에 루즈벨트 정부와 긴밀한 계급적 협조관계를 유지한 것이 미국 공산당 쇠퇴의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들은 과연 루즈벨트 정부와 긴밀한 계급적 협조관계를 맺었던 것인가?

대공황이 격화하자 자본가계급의 안정을 위해 루즈벨트에 의해 제안된 뉴딜은, 보수적인 자본가계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계급과 민중들에게 일정 정도 양보와 혜택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그 때문에 당시 많은 노동자들과 민중이 뉴딜정책의 입법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합류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루즈벨트의 뉴딜의 본질을 몰랐을 리가 없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대중의 그러한 투쟁을 독려했는데, 이때 공산주의자들의 의도는 뉴딜 입법화를 요구하며 자생적으로 분출하는 노동자 대중운동을 고양시키려는 것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뉴딜이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그들의 권리를 보방할 것으로 해석하고, 각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인정투쟁을 거세게 벌이기 시작했다.52) 그러므로 인민대중들이 뉴딜의 법제화 등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요구하는 대중투쟁을 벌였을 때, 미국 공산당이 인민대중과 같이 싸운 것은 그러한 투쟁이야말로 노동자들을 광범하게 조직하는 계기일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한에서 거기에는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공산주의자들이 뉴딜정책에 대응하는 데 있어서의 한계는, 노동자ㆍ민중에게 뉴딜의 개량주의적 본질을 분명히 알려야 했는데, 그러한 노력이 부족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사실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루즈벨트 정부와 긴밀한 계급적 협조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루즈벨트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대중들의 투쟁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했다. 다만, 루즈벨트 정부의 힘이 워낙 강했고, 대중들이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루즈벨트 정부를 향한 과감한 비판을 하지 못하다가 오히려 나중에는 우파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하게 되고, 결국은 공산주의자들을 내몰려는 루즈벨트의 덫에 갇히고 만다.

많은 좌파 역사가들은 뉴딜기에 미국 공산당이 혁명적 선동이나 행동을 과감하게 하지 못했던 점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게라시는 “미국 공산당이 계급 협조적이었던 통일전선 속에서 사회민주당과 연합한 것은 스스로 자살을 초래한 일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그 시기에 미국 공산당이 비타협적으로 혁명노선을 견지했다면, 그 규모가 급감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그러한 강인한 노선은 확실히 그 신뢰를 계속 유지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산당이 뉴딜의 대중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계속 공격하는 일이었다”53)는 것이다.

루즈벨트 정부는 분명 독점자본가계급의 정부였고,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위한 정부였다. 실제로 그의 정책을 반영한 전국산업부흥법(NIRA)이나 와그너법 등은 양날의 칼을 가진 것이어서, 언뜻 보기에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결성권이 주어진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계급에게도 도한 그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그들의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루즈벨트가 노동자계급에게 개량을 주었을지언정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본의 안정을 위한 개량이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성을 견결히 견지하는 부분에서 좀 더 명확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한계가 있다.

공황기에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참여하여 미국노동운동의 고양을 이끌어 낸 혁혁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노동운동과 공산당이 급격히 쇠퇴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은 물론,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당시 미국의 독점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현격한 힘의 불균형과 그러한 막강한 독점자본의 대대적인 반공주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산당의 급격한 쇠퇴에는 당연히 그들 스스로의 한계도 작용했다. 우선 공산당 지도부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운동 내 우파 기회주의자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노동자계급의 계급성을 견결히 지키는 가운데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매진했어야 함에도, 오히려 그 시기와 기회를 놓치고 부르주아 정부와 우파 기회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한 점이 가장 큰 한계였을 것이다.

미국 공산당은 전통적으로 공화당과 민주당을 구분해서 민주당을 좀 더 진보적인 집단으로 보아왔지만, 반공주의 공격을 통해 미국 공산주의자들과 그 운동을 궤멸시키다시피 한 장본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였다. 공화당이 자유시장주의를 외치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욕구를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낸 반면, 민주당의 루즈벨트는 뉴딜이라는 보다 고차원적인 수법을 통하여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충실하게 지키려 했고, 트루먼은 냉전을 통하여 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를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트루먼의 냉전정책도 공화당의 태프트하틀리법도 모두 본질적으로 같은 반공주의였다. 결국 이들 양당은 그 수법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모두 독점자본가계급을 대표하는 세력이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민주당을 바라보는 미국 공산당의 관점의 오류, 특히 얼 브라우더(Earl R. Browder)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공산당의 대표였던 브라우더는, “루즈벨트 지지 세력은 인민전선의 주요한 요소이자 구성부분의 하나로서 행동할 것”54)이라고 했는데, 이는 명백한 우편향이다. 미국 공산당이 공화당과 민주당 정부의 탄압에 못 이겨 결국 1940년 11월 꼬민테른과의 조직적인 결합을 해소하고 난 이후, 공산당 내에 기회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테헤란 회담 이후 1943년경부터는 브라우더 등을 중심으로 한 기회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은 전쟁 이후 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에 의해 궤멸되다시피 한 이후에는 개량주의적 노선으로 급선회하게 된다.55)

 

 

3) 제3의 당 설립문제

 

미국 공산당은 1919년 창립 후 곧바로 자본가계급과 정부의 반공주의 공격, 즉 “빨갱이 사냥”을 당하여 비합법조직 상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미국 공산당은 이 합법적인 정당을 통하여 노동자대중을 조직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1921년 12월 23-26일, 합법적인 조직으로서 미국노동자당(Workers Party of America)을 건설한다. 이 노동자당은 전반적으로 공산당에 의해 지도되었으며, 공산주의자 주도의 미국 노동동맹(American Labor Alliance), 미국사회당 좌파인 노동자의회(Workers’ Council), 그리고 기타 조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56)

그러나 이 미국노동자당 역시 선거정당은 아니었고, 따라서 공산당은 창당 당시부터 선거용의 제3의 정당을 창당하고자 했다. 그리고 거기에 성공했더라면, 공산주의자들은 1930년대 노동현장을 조직했던 힘과 노동자계급의 조직력으로 독자적인 세력화를 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즈벨트 정부가 CIO 의장들이었던 시드니 힐만(Sidney Hillman), 필립 머레이(Philip Murray) 등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CIO 내의 이들 우파 자유주의자들을 민주당 내로 흡수해버리자, 그 과정에서 이들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던 공산주의자들도 노사협력의 올가미에 갇히게 되었다.57)

예츠는 노동과 협력관계를 유지한 자본의 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1930년대에는 독립적인 노동자 당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진정으로 있었는데, 공산당 내의 상당한 부분이 루즈벨트와 뉴딜의 최면에 걸렸고, 전쟁 중에는 민주당과 완전히 협력했음을 지적한다.58) 또한 그는 1930년대에는 미국의 새로운 산업노동조합들에서 새로운 독립정책들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는데, 루즈벨트 행정부가 시드니 힐만이나 필립 머레이와 같은 몇몇 CIO 우파지도자들과 협력했고, 그들을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이나 상대적으로 더 독립적인 존 루이스에 대항하는 쐐기로 사용했으며, 심지어 공산주의자들도 이 덫에 걸려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노동운동 진영의 우파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반(反)노동자적인 민주당 사이에 밀접하고 치명적인 연합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나이슨도 공산주의자들이 1936년에 제3당 운동을 다시 시작했으나, 그들이 연합했던 CIO의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루즈벨트 후보 지지를 결정하는 바람에 이 제3당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지 못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이후 공산당 대표였던 얼 브라우더의 주요 전략은 노동자계급이 이끄는 농민노동자당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36년 선거에 독자적인 출마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공산주의자들은 제3당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전국 차원과 지역 차원에서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활동을 위한 선전작업을 개시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위스콘신 진보농민노동자연맹(Wisconsin Progressive Farmer Labor Federation)과 미시간, 오하이오, 메사추세츠, 코넥티컷에 있는 지역 노동당에 근거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산업노동자들 사이의 민초들의 뉴딜 파도에 직면하여, 그리고 CIO의 루즈벨트 후보 지지 결정에 직면하여, 농민-노동당(Farmer-Labor Party)을 위한 선동을 단지 전국과 지역의 선거전으로만 한정했다. 코민테른의 승인 하에, 그들은 얼 브라우더의 독립후보 전략을 단지 공화당이 승리할 경우에 닥쳐올 위험을 경고하는 정도로만 한정했다. 그렇게 해서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역사에서의 자신들의 첫 번째 당을 반대(反對)당들 중 하나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대선 선거에 사용하고 말았다.59)

 

한편, 꼬민테른은 1937년경 인민전선을 노동자ㆍ농민당의 틀로만 제한하지 않고 민주당의 좌파까지도 포괄하는 인민전선을 형성하겠다는 미국 공산당의 계획에 동의하면서도, 루즈벨트 정책을 이상화하여 “루즈벨트 지지 세력은 인민전선의 중요한 요소이자 구성부분의 하나로서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한 얼 브라우더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고 있었다. 특히 디미트로프는 루즈벨트를 변호해서는 안 되며 반파시즘 민주주의 노선에 모순되는 그의 조치에 대해 비판을 가할 것을 강조했다.60)

공산주의자들은 루즈벨트 집권기였던 1930년대보다는 오히려 트루먼 정부 시기였던 1947년 이후에야 트루먼 정부의 냉전과 반공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민주당에서 나와 독립적인 제3의 당을 결성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노동현장은 이미 트루먼 협정, 태프트-하틀리법, 마샬정책 등으로 이어지는 트루먼 정부의 냉전과 반공주의에 의해 위축되어 있었고, 또한 트루먼 정부와 강고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CIO 내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할 근거만을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 많은 역사가들이,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노동현장에서 강고한 지도력을 획득하고 있었던 1930년대에 바로 제3의 당을 만들었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미국 공산당에는 노동운동 내 우파들, 즉 AFL 내 보수주의자들이나 CIO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의도를 명확히 꿰뚫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미국 공산당은 CIO와 AFL 노동조합의 우파들과 반파시즘 투쟁을 위해 연합하려 했으나, 이들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공산당보다는 오히려 자본가계급의 대표자들인 루즈벨트나 투르먼과 더 강고하게 연합했다. 미국 공산당이 인민전선, 즉 통일전선 전술을 잘못 운용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루즈벨트 정부와 강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협력함으로써 덫에 걸려 휘둘리게 된 점일 것이다.

 

 

4) 무분규 협약과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상실

 

미국 공산당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은 제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대부분 노동조합이 참여했던 ‘무분규 협정(No-Strike Pledge)’을 마치 공산당이 선도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진실이 아니다.

1941년 독일의 쏘련 침공이 시작된 이후, 미국 공산당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전 국가적인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쏘련을 지지하는 노선을 채택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진격이 급격해지는 가운데, 미국 내에서 반파시즘 투쟁에 집중하자는 의견은 공산당만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거의 모든 좌파 노동조합들에서는 미국이 쏘련을 도와야 한다는 요구들이 합창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이 쏘련을 도와 반파시즘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생산증대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분규 협정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제시되었다. 그리고 미국 공산당이 이에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고 전에 거의 모든 노동조합들이 이 무분규 협정을 받아들였다.

레벤쉬타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들은 오히려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거의 모든 미국 노동조합들이 ‘무분규 협정’을 받아들이자, 이러한 CIO의 정책을 단순히 따라감으로써 꼬민테른의 새로운 노선, 즉 미국에서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 국가적인 통일전선을 위해 활동해야 하며, 나찌 독일에 대항한 쏘련의 투쟁을 대중에게 선전해야 한다는 노선을 이행하게 된 셈이 되었다.61) 전 세계가 파시즘에 의해 파멸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무분규협정을 포함한 “공산당의 새로운 노선은 그 당시 할 수 있었던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62)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자본가계급과 루즈벨트 정부도 이 무분규협약을 이용하여 한편으로는 반파시즘전선을 세우고자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전쟁을 이용하여 그들의 힘을 키우고자 한 속셈도 있었을 것인데, 미국 공산당이 이를 간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즈벨트는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기도 전에 노동조합에게 무분규정책을 받아들이라고 압력을 가했다. 전국의 거의 모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여기에 동의했고, 단지 광부노동조합의 존 루이스만이 이에 반대했다.63) 대부분의 노동조합들과 공산주의자들도 이 무분규 협약을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을 반파시즘 전선 성립의 조건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급박한 국내외 정세 속에서 미국 공산당에게는, 반파시즘 전선을 굳건히 건설하는 한편, 자본가계급과 부르주아 정부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지켜내야만 하는 이중의 과제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 공산당은 무분규 협약을 둘러싸고 한계를 드러냈다. 대표적으로 1934-1945년까지 공산당 대표였던 얼 브라우더의 노선이 그것이었다. 노동자들은 무분규 협약으로 인해 그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불평과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전쟁의 시기이긴 했지만, 미국 노동자들의 요구는 합당한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전쟁 물자를 조달한다는 명목 하에 노동자들에게 “생산증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요구하면서 미국 자본가계급과 정부는 무기생산과 판매를 통하여 거대한 이윤을 축적하고 있었던 반면, 전시 인플레이션으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현저하게 저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초과시간 임금, 성과급, 물가조절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했다. 이렇게 되자 노동현장의 좌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무분규 협약을 지지하기를 주저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브라우더는 좌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설득하여 임금을 약간만 인상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탓이었다.

또한, 브라우더는 무분규 협약을 둘러싼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첫째, 연방정부가 나서서 생산증대로 인한 사업주의 이윤 착취를 막을 것, 둘째, 성과급(piece-work) 제도를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레벤쉬타인의 지적처럼 브라우더가 제안한 특별수당제도는 많은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들을 끓는 물에 던져 넣는 것과 같았다. 예컨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소속 노동자들이 생산증대로 자본가들의 이윤만 폭증하는 데에 불만을 터뜨릴 때에도 브라우더는 ‘특별수당’ 제도를 제안하면서 자동차 노동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현장 노동자들은 브라우더의 ‘특별수당’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이 흑인 노동자들의 임금인상과 지위향상을 위해 투쟁했던 경험을 높이 존중하여 결국 무분규 협약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레벤쉬타인에 의하면, 무분규 협약에 대한 현장의 노동자들의 우려를 무마하고자 브라우더가 제시한 특별수당 제도와 같은 제안들은 거의 효과가 없었고, 노동자집단 분파들 사이에 갈등만 증대시켜, 오히려 노동현장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약화되고 반공주의자들의 힘이 커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분규 협약을 둘러싼 갈등이 CIO와 노동운동의 나머지 부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파괴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64)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우더는 대전 말기에 생산 확대에 대한 강박관념을 더욱 심하게 드러내면서, 계획의 단계에서부터 작업현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단계를 자신의 스타일대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오류를 낳기도 했다.65)

브라우더의 우편향은 1943년 10월 테헤란 회담 이후 더 심해지는데, 그는 테헤란 회담을 미국-쏘련의 우호관계의 새로운 시작으로 보고, 국제적인 차원에서 미국 내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리고 1944년 5월에는 마침내 미국 공산당(CPUSA)을 해체하고 공산주의자정치연합(Communist Political Association: CPA)을 결성할 것을 제안했다.66)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다신의 당을 해체하고 민주당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했다.67) 브라우더는 1946년에 그의 우편향 때문에 당으로부터 제명되게 되는데, 무분규 협약을 둘러싼 그의 정세 오판(誤判)은 자본가계급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의 에너지를 희석시키고 미국 공산당을 크게 약화시켰다.

무분규 협약은 한편에서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반파시즘 전선으로서 기능했지만, 그 이면에는 독점자본과 정부의 과대한 생산증대 요구와 착취의 강화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모순이 극대화될 수 있는 양날의 칼이었다. 특히, 이 무분규 협약은 전쟁을 준비하던 루즈벨트 행정부와 CIO 우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해 제안된 것이어서 이미 그러한 모순의 격화를 예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말기가 되면 실제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간의 모순이 격화되어 투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산증대’에 대한 과도한 압박을 받으면서 “임금인상요구를 억제”해야 했던 많은 노동현장에서 1944년 이후 불만과 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의 투쟁은 1944-1945년에 크게 증가했다. 그런데 루즈벨트 정부와 CIO 우파자유주의자들은 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현장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투쟁을 억압했다.68)

또한 AFL, CIO의 우파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정부가 파업을 억제하는 데에 동의했다.69) 일부 파업 현장에서는 그 파업이 월터 루이터(Walter Reuther)와 같은 반공주의자들에게 이용되어 조합의 지도력이 반공주의자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월터 루이터는 1944년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에서 분출하던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용하여 UAW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고, 1947년 이후 CIO 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등 반공주의의 선봉에 선다.70)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전후(戰後) 노동자들의 분출하는 파업에 동참했는데, 국가와 AFL, CIO 내의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기화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전후에 들불처럼 타오르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결합할 틈도 없이, 실제로는 이미 1944년부터 시작된 국가와 독점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의 먹잇감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이 무분규 협약을 둘러싼 모순의 발현에 좀 더 명확하게 대처했어야 했다. 즉, 그들은 노동대중들에게 무분규협약이 오직 반파시즘 전선을 지키기 위한 일시적인 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는 게 필요했으며, 또한 무분규협약 때문에 전쟁 말기에 노동현장에서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적극 결합하여 그 투쟁들을 이끌었어야 했다. 전쟁 말기에 정부가 노동자들의 자생적으로 분출하는 파업을 억압하는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이 무분규 협약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뿐 아니라 반자본 운동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전선을 재정비했어야 했고, 이를 통해서 아래로부터의 광범한 통일전선을 건설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대투쟁의 시기에 전선을 주도하여 아래로 부터의 통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에 매달려 루즈벨트 정부와 CIO 자유주의자들의 덫에 갇히는 한계를 노정했다.

결국, 노동자계급은 제2차 대전 동안 정세의 주도권을 크게 상실했고, 그 결과 전후 독점자본의 반공주의의 공격에 의해 무너지게 되었다.

 

 

4. 미국 반공주의의 전개과정

 

1)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빨갱이 사냥’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8개월이 지난 1919년 11월은 미국에서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시기였다. 당시 빨갱이 사냥이 개시된 이유는, 국내적으로는 좌파세력이 급성장하고 국제적으로는 러시아 혁명과 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운동의 활성화로 독점자본과 정부의 긴장감과 공포가 고죄된 때문이었다.

1919년 9월 두 개의 공산당(CP, CLP)이 출범한지 두 달 만인 11월 8일 반공산주의 습격이 뉴욕시에서 처음 일어났다. 1919년에 몰아닥친 빨갱이사냥은 이제 막 싹이 튼 공산주의를 파괴하였다. 1919년 사이에 빨갱이 사냥이 시작된 것은 1919년 2월 시애틀 총파업이 발생했을 때였다. 시애틀 총파업 이후, 9월 9일 보스턴 경찰 파업, 9월 22일 철강업 파업, 11월 11일 미국광부노동조합(UMW)의 석탄파업 등이 보수언론과 자본가계급에 의해서 공산주의가 주도한 것으로 선동됨에 따라 미국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당시 빨갱이 사냥이 가장 극에 달했던 것은 바로 그 악명 높은 팔머급습(Palmer’s Raids)이었다.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팔머는 독점자본으로부터 급진주의자들에게 강하게 대처하라는 압력을 받자 급진주의자들을 급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팔머급습은 11월 7일 연방 정부가 미국 내 12개의 도시에서 러시아노동자연맹(Union of Russian Workers)을 습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11월 11일에는 센트랄리아 대학살(Centralia Massacre)이 발생했고, 바로 이날 군대가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을 급습했다. 센트랄리아 대학살에 이어 덴버, 푸에블로, 콜로라도,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오클란드와 캘리포니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급습이 발생했다. 1920년 1월 1일에는 시카고에서도 1919년 뉴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습격했던 것과 같은 습격이 일어나, 공산주의자들과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 회원들이 급습을 당했으며, 1월 2일에는 약 33개의 도시와 해안을 따라 전국에 동시에 공산주의자 급습이 발생했다. 1920년 2월 2일 빨갱이 사냥이 절정에 달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후버(Hoover)와 팔머의 지시로 연방기관이 30개 이상의 도시에서 급진주의 소굴을 덮치고 CLP와 CP의 구성원이라는 의심을 받는 5-10만 명을 체포했다. 빨갱이 사냥은 미국의 급진주의 운동을 파괴했다. 1919년 CP와 CLP는 약 4만 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팔머급습에 의해 그 수가 1만 명 이하로 급격히 줄었다.71)

 

 

2) 대공황 및 제2차 대전기의 반공주의

 

대공황기, 특히 1935년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미 정부와 독점자본의 반공주의가 극악한 형태로는 드러나지 않았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파시스트들을 제외한 모든 집단과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져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모순이 드러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본가계급과 정부에게도 전쟁 수행을 위한 무기생산에 노동자계급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戰時) 중에도 반공주의는 미국의 지배계급과 그 부역세력 속에 지속적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① 자본가계급의 뿌리 깊은 반공주의

 

미국의 노동운동사에서 반공주의의 역사는 공산주의의 그것보다 더 길다.72) 1930년대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분출하는 임금인상 요구에 전면적으로 결합하여 투쟁에 참여하면서 노동운동의 급성장에 기여했다. 특히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CIO 창립 이후 전투적인 몇몇 CIO 노동조합들이나 생산공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1930년대 말에 자본가계급은 노동조합 활동을 반대하기 위해 반공주의를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자본가계급은 CIO를 주요 표적으로 삼았고, CIO 내에서도 특히 SWOC가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본가계급은 반노조주의를 반공주의로 연결시켰을 뿐 아니라, 공산주의를 불신하고 공격했던 반공주의 성향의 노동조합 지도자들까지도 공격했다. 자본가계급의 반공산주의 선전은 노동자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으나, 보수언론과 정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신문, 잡지, 라디오는 일반적으로 사업주에게 동조했고, CIO 노동조합들이 부패한 조직이라고 악선전하였다. 

연방 정부는 교회, 미국노동총연맹(AFL), 기업들, 국가정부, 지방자치체보다도 더 중요한 반공주의의 근거지였다.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박해하려는 행정부의 시도는 크게 1940년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40년도 전에 행정부 또는 행정부 소속의 일부 사람들은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작적으로 여러 시도를 했다. 그 중에서도 전쟁 이전에 행정부가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억제하려고 시도했던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해리 브릿지스(Harry Bridges)를 추방한 일이었다.73)

1939년 공산주의자들이 행정부와 함께 하는 것을 거절함에 따라 여러 정부기관에서 CIO에 소속되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 강화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1939년 9월에, 루즈벨트가 악명 높은 연방수사국(FBI)의 일반정보분과(General Intelligence Division)의 재개를 명령하고, 법무부로 하여금 ‘(국가)파괴행위’에 대해서 전반적인 조사를 하라고 지시한 일이다.74) 또한 1940년 초에, 루즈벨트는 전국노사관계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NLRB) 내의 공산주의자 동조자들을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자본가계급과 정부는 반공주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긴밀하게 결합했다. 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는 또 다른 중요한 분야인 주 정부와 기타 지방정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방경찰들과 사법관들은 노동조합원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위해 종종 사업주와 협력하곤 했다.75)

 

② 미국노동총연맹 (AFL)의 반공주의

 

미국노동총연맹의 반공주의는 미국의 사회당 좌파들과 AFL의 실력자 곰퍼스(Samuel Gompus) 간의 오랜 전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노동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AFL을 하나의 정치적 정당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반면, 곰퍼스와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경제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경제투쟁을 중시했고, 좌파 정당과 동맹을 맺는 것을 피했다. 이러한 대립관계 속에서 결국 곰퍼스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과 동맹을 맺고,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을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공격적이 된 AFL의 보수적 지도세력은 노동운동을 정치운동으로 전환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하여,76) AFL에 잔류했던 구 사회주의 세력들, 즉 사실상 곰퍼스의 궤도로 들어온 세력들과 동맹했다. 그린(William Green)이나 거머(Adolph Germer), 프레이(John Frey), 더빈스키(David  Dubinsky) 같은 AFL의 보수주의자들은 여러 노동조합들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진압하려고 하였고, 급진주의적인 노동조합을 저지하기 위해 사업주들과 협력하였다.

 

③ 카톨릭 종교집단의 반공주의

 

1930년대 중반 노동운동의 성장기에 ‘자유주의적인’ 성직자들은 노동현장에서 유럽에서와 같은 산업선교 운동을 벌이거나, ‘노동학교’를 설립, 그 안에서 카톨릭 노동조합원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훌륭한 노동조합원뿐 아니라 훌륭한 카톨릭 신자가 될 것을 훈교했다. 노동현장의 카톨릭 노동조합원들을 조직하고자 카톨릭노동조합연맹 (Association of Catholic Trade Union-ists: ACTU)을 만들었다.

그런데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이 ‘카톨릭 노동자’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카톨릭의 신념과 이데올로기와 유일하게 다른 조직이라는 것을 알기 시작했고, 그들의 주요한 적은 공산주의자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전쟁 전에는 ACTU가 교회의 보수세력에 의해서 상당한 반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쟁 이후에는 오히려 ACTU에 속해 있던 여러 카톨릭 ‘노동학교’와 산업 성직자들이 좌파 주도의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3) 제2차 세계대전 후 반공주의의 고조화

 

제2차 세계대전 후 1945년과 1946년에 파업이 급증하자 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적 공세 역시 가열됐다. 특히 1946년 11월 의회선거 이후 보수세력에 반대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격화되자 자본가계급은 파업의 주된 주체인 CIO가 공산당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고, 반공주의를 고조시켰다. 예를 들면, 1946년 반(反)노조주의를 대표하던 미국의 상공회의소는 정부 내 좌파 공무원들의 숙청을 주장하고 나섰다. 정부는 공산주의 통제 하에 있는 조직들과 노동조합의 명단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반공주의 팜플렛을 발간하였고, 동시에 태프트-하틀리법에 반공주의적 항목을 포함시켰다. 1946년부터는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최악의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자본가계급은 정부 및 보수언론과 함께 반공주의를 고무시켰고, 그 결과 1945-1948년 사이에 공산주의를 말살시키자는 정서가 대중 속에 고조되었다.77)

대부분 신문의 논조들은 반(反)노조주의적이었고, 심지어 폭력적인 반공산주의를 옹호했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공산주의자들이 우세한 노동조합들을 폭로하고 공격했다. 자본가들은 전국노사관계위원회(NLRB)의 지원에 의존해서 자신들의 사업장에 소속된 노동조합을 무력화시켰다. 자본가들은, 태프트-하틀리법에 의거해서 공산주의자가 아님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술서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노조 간부들이 거부하는 것을 ‘애국심 부족’이라고 비난하면서, 협상하기를 거부했다.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주도하는 CIO 내 노동조합들은 진술서에 서명하지 않은 좌파 주도의 노동조합들을 습격하여 해체하고 자신들의 조합들, 즉 반공주의자 주도의 노동조합들에 합병시켰다.78)

다른 한편에서는, 1946년 이후 반공주의가 고조되자 기회를 포착한 반공주의적 카톨릭 노동활동가들 역시 그 활동을 확대해갔다.79)

한편, 1947년부터 연방 정부의 법무부와 FBI는 CIO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고 조사하는 작업을 진두지휘 했다. 1947년 투르먼은 특별전담반을 설치하여 연방공무원들 가운데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해고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미국공공노동조합(USA Public Workers: UPW)에서 파업을 주도했던 상당수 활동가들이 해고되었다. FBI가 미국 공산당을 박해한 내용들이 1948년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에게 어떤 효과를 주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자세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있다.80)

1948년 대통령선거에서 공산당이 민주당의 트루먼후보 대신 제3의 독자적 진보당 후보인 왈라스(Henry A. Wallace)를 지지하고, 또 마샬정책을 반대함으로써 CIO 내에 분열이 일어나자, 트루먼 정부는 점점 더 명백하게 CIO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내몰았다. 트루먼 정부는 또한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도록 자유주의자들을 압박한다. 이에 1948년 초 CIO는 공산주의에 대한 추방을 확대하기로 결정한다.81) 

의회에서도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이 가해졌다. 태프트-하틀리법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매우 심각한 손상을 주기 시작했다. 1947년 노동운동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의회 조사가 증대되어 갔다. 사업주들이나 반공산주의 노동조합원들에 이끌려서 의회 위원회가 열렸고, 이 의회 위원회는 공산주의자들뿐 아니라 기타 좌파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위증죄나 국회 모욕죄 등으로 기소하기 위한 방법들을 모색했다.82)

미국 전역에서 좌파 노동조합에 대한 공세가 여러 가지 양상으로 벌어졌다. 미국 전역에서 마치 독안에 든 쥐와 같이 요새에 갇힌 좌파들은 매일 반공주의자 집단들의 맹공격에 직면해야 했다. 이러한 모든 반공주의 공격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결국 연방 정부였다. 법무부와 태프트-하틀리법은 노동운동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파괴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했다.

 

① 태프트-하틀리법, 트루먼 독트린, 마샬플랜

 

반공주의에 관한 한 미국의 자본가계급과 정부는 뗄 수 없는 관계였고, 민주당과 공화당 사이에는 사실상 구별이 없었다. 반공주의 공격을 위해서 자본가계급, 공화당, 그리고 민주당 정부는 한 몸 같이 움직였다. 이것은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민주당 정부에 가지고 있던 우호적 관점이 환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가계급과 보수주의 공화당에 의해 시작된 반공주의의 가장 강력한 기제 중 하나는 바로 태프트-하틀리법이었다. 1946년 11월 선거 이후 공화당이 주도하는 새 의회는 노동운동 내 공산주의의 힘을 분쇄하기 위해서 1947년 6월에 태프트-하틀리법이라는 새로운 노사관계법을 제정했는데, 거기에는 노동조합의 모든 상근간부들이 자신은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진술서에 사인을 해야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진술서에 허위로 서명한 사람은 위증죄로 기소되어 감옥에 가야 했다. 어느 노동조합 상근자가 이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할 경우, 와그너법상의 협상의 권리 등을 박탈당했다.83)

공산당은 자본가계급의 이러한 공격에, 즉 태프트-하틀리법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AFL도 CIO와 함께 태프트-하틀리법에 반대하기 위해 단결했다. 머레이, 루이터, 그리고 대부분의 CIO 자유주의자들은 처음엔 그 법의 폐지를 위한 강력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종국에는 진술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84)

공산주의자들이 태프트-하틀리법에 강력하게 저항하자 연방 정부는 더욱 거세게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했다. 트루먼 정부와 압력에 의해 CIO 내의 머레이나 중도파 등 투르먼과 그 운명을 같이하는 자유주의자들은 CIO내 공산주의자들을 말살하기 위해 태프트-하틀리법상의 진술서 서명 여부를 이용했다.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진술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좌파 노동조합들을 급습하고 또 CIO에서 추방함으로써 미국 내에서 공산주의를 절멸시키다시피 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한편, 민주당의 트루먼 정부는 쏘련에 대한 냉전을 선포함으로써 세계적 반공주의의 포문을 열었다. 트루먼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도 사실은 바로 쏘련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6년 트루먼은 처칠을 초청하여 전쟁동맹국 사이에 “철의장막”을 치겠다고 했다. 이제 그는 미국의 대중을 상대로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쏘련에 대한 우정과 경외감을 종결하라는 캠페인을 시작했던 것이다.85)

트루먼 정부는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을 발표함으로써 냉전과 전 세계적 반공주의의 포문을 열었는데, 이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 국가들에 대해서 미국이 정치, 경제, 군사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것으로서, 명실 공히 전 세계 어느 국가의 혁명도 봉쇄하려는 것이었다.86) 트루먼 독트린은 전 세계 민중들에게 쏘련이 위협해 온다고 악선전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공격의 시작이었다. 트루먼은 연설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로써 ‘자유’의 개념을 들고 나와 이 ‘자유’를 ‘반공주의’와 동일시하였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 자유의 개념을 자본가계급과 정부가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1947년 6월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Marshall)은 유럽에 경제원조를 제공하는 대가로 유럽의 국가들이 스스로 계획을 입안하여 미국에 제시하라고 촉구함으로써 유럽 지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 야욕을 드러낸다. 마샬플랜은 유럽에 미국의 지배권을 확립하고 서유럽을 반(反)쏘 방어기지로써 세우려는 투르먼 독트린의 확대과정이었다.

1947년 7월 트루먼은 국가보안법(National Defence Act)을 입법하여 국가안보위원회(NSC)를 창설하고, 중앙정보국(CIA)을 신설했다. CIA는 이후 각 국가에서 공산당을 몰아내는 활동을 벌여오고 있다. 그리고 1949년엔 유럽 국가들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미국이 군사적ㆍ정치적으로도 유럽을 지배하는 ‘새 시대’의 문을 열었다. 트루먼의 1947년 3월 21일 집행명령(Executive Order) 제9835호는 약 2백만의 연방 공무원들의 충성도를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이 명령은 또한 법무장관에게 “전체주의, 파시스트, 공산주의자, 또는 전복 기도자”로써 지목된 사람들을 해고하기 위해 그들의 명단을 작성할 것을 주문했다.87) 또한 1950년의 한국전쟁은 아시아에서의 미국정부의 단호한 반공주의를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트루먼은 이를 잘 활용했다. 1950년 6월 26일 트루먼은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팽창에 대항하여 군사개입을 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트루먼 독트린을 태평양까지 공식적으로 확대했다. 한국전쟁 시기에 트루먼은 전 세계적인 규모로 쏘련과 중국을 포위하는 군사기지를 확보했다.

한편, 미국 공산당은 유럽 여러 나라의 공산당들과 연합하여 마샬플랜에 대항해서 단호한 공격을 개시했다. 또한 미국 공산당은 CIO가 마샬플랜에 동의하거나, 투르먼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으나, 이러한 주장은 이미 반공주의로 무장된 CIO 우파 자유주의자들에게 먹혀들지 못했다.88)

 

② 1950-1952년의 매카시즘

 

자본가계급과 국가의 반공주의는 1950-1952년의 매카시 선풍으로 그 절정에 달하였다.

1950년 2월 위스콘신 출신의 공화당 상원의원 조셉 메카시(Joseph Raymond ‘Joe’ McCarthy)는 국무부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있다rh 폭탄선언을 함으로써 정부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있으며 정부 안의 이들 반역자들이 미국을 쏘련에 팔아먹고 있다는 공화당의 주장을 공식화하였다. 이 새로운 빨갱이 사냥은 1950년 9월에 공화당이 우세한 의회가 국내보안법(맥카란법, McCarran Act, 전복활동통제법[Subversive Activities Control Act]이라고도 불린다)을 제정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 법은 모든 공산당원이나 ‘공산당 전선원’에게 정부에 등록하도록 요구한 것으로서, 정치사찰 대상의 범위를 연방 정부 공무원으로부터 민간단체들과 개인들에게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트루먼은 국내보안법이나 매카시 상원의원의 극단적인 방식을 거부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을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몰아내라는 요구에는 동의하였다. 그러므로 민주당 행정부와 공화당 의회는 수단에 있어서만 달랐을 뿐 목적은 서로 같았던 것이다.89)

1951년과 1952년에 매카시 돌풍은 반공주의세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1952년의 선거에서 매카시와 공화당의 동일성은 더욱 더 확실해졌다. 그러나 투르먼이야말로 매카시의 광대놀음판을 마련해 준 장본인이다. 투르먼은 표면적으로는 매카시즘에 반대했지만,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는 동안에 공산주의자들의 구속과 억압을 강화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매카시즘을 지지했다. 매카시에 대한 트루먼 정부의 반대는 모순으로 가득 찼다. 1950년 4월 25일, 트루먼은 미국의 국가안보는 공산주의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지 않다고 선언했지만, 동시에 트루먼 정부는 미국인들의 독서의 자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51년 초 정부는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 공산주의 선전물”을 압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트루먼 정부가 메카시즘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외교정책과 관련된 영역을 양보한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었다. 또한 한국전쟁의 여파로 강화된 냉전은 매카시즘과 동일한 동기로 인한 것임이 드러났다. 국가의 반공주의 행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1955년 FBI는 교육자부터 과학자까지 2만6천 명의 명단을 체포해야 할 사람들로 발표했고, 1958년까지 이 중 1만2천 명이 체포대상자, 나머지는 요시찰자로 분류되었다.90) 

결국 매카시즘은 전쟁 이후 자본가계급과 국가권력에 의해 피어난 반공주의라는 악의 꽃이었다. 매카시즘은 단지 도를 벗어난 매카시라는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매카시즘이란 단어는 바로 반공주의를 원했던 세력들의 상징이었고, 대중들을 가장 간단하게 미혹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매카시즘은 미국 공산주의와 연결된 모든 이념과 기관 등의 영향을 파괴하기 위한 가장 편리하고도 간결한 방법이었다.

 

 

5. 반공주의와 노동운동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역할

 

미국에서 반공주의의 폭압은 자본가계급과 국가권력에 의해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었다. 노동운동 내의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 역시 자본가계급과 국가의 요구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을 노동조합들로부터 몰아내는 데에 앞장섰다.

 

1) CIO의 균열

 

①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위에서 본 것처럼, 정부와 독점자본가계급의 반공주의 공세가 강화된 것은 1944년 이후였고, 특히 냉전과 함께 그것이 극렬해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그런데 노동운동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반공주의 공세는 놀랍게도 그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1939-1940년경에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바로 1935년에서 1939년까지 공산주의자들이 CIO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혁혁한 활동을 벌인 직후였다. 말하자면, 이들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는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그들의 반격이었던 셈이다.

공세의 주역은 존 루이스(John L. Lewis), 시드니 힐만(Sidney Hillman), 필립 머레이(Philip Murray) 등과 같은 CIO의 지도적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1935년에 AFL이 산업별조직위원회(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 CIO)를 추방했을 때 AFL로부터 나와 독립적인 산업별노동조합회의(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CIO)를 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커지자 1938-1940년에 CIO 내의 이들 우파는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려고 시도하는데, CIO를 창립하는 데 초석을 놓았고, 초창기에는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파시즘에 반대하고 루즈벨트의 정책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 했던 루이스가 그 반공주의자적인 본색을 드러내면서 맨 먼저 그 추방을 시도한다.91) 루이스 이후 CIO 의장이었던 시드니 힐만과 필립 머레이도 이 시기에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억제하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작업에 앞장서게 된다. 예를 들면, 힐만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강등시키고 그들의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약화시킨다.92) 머레이는 힐만과 함께 1939년 3월 UAW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윈햄 모르티머(Wyndham Mortimer)나 조지 애즈(George Addes)의 출마를 막음으로써, UAW 내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 그리하여 UAW에서 루이터(Walter P. Reuther)가 승리했는데, 이는 결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서 CIO에서 힘의 관계를 이동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과 제임스 카레이(James Carey) 등 CIO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루즈벨트 행정부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나갔는데,93) 이 당시 루즈벨트 행정부는 유럽전쟁에 직면하고 의회 보수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뉴딜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포기하고, 연합군 지원을 위해 무기수송을 증대하기 시작했으며 대량의 미군의 참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공산주의자들의 정책과 태도는 전혀 달랐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들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달리 1941년에 나찌가 쏘련을 침공하기 전까지는 제2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으로 간주하여, 연합군에 대한 지지를 강화해가는 루즈벨트의 대외정책을 공격했고,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무시하는 CIO의 머레이 등과 충돌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루즈벨트 행정부와 밀착했던 저들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더욱더 그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공산주의자들94)을 숙청하려는 생각을 품게 된다.95)

이 시기에 CIO 내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로 하여금 반공주의적 결의문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그들을 굴복시켰다. 이 결의문은 CIO가 “나찌즘, 공산주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 독재, 외국정책으로부터 유출되는 모든 정책들을 거부한다”고 진술했다. 또한 “나찌즘, 공산주의, 파시즘은 노동복지에 적대적인 것으로써 정부의 형태를 파괴하는 것”이며, “CIO는 산업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정치의 원리에 반대되는 이상한 외국 정책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운운하고 있었다.96)

공산주의자들은, CIO 자유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이 이 결의문이 채택이 되지 않으면 CIO를 깨트리고 AFL에 가입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CIO의 분열을 피하고자 그것을 받아들였다.

 

②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쏘련이 가장 중요한 전승국으로 등장하면서 공산주의의 위신이 더욱 높아졌고, 그 위력이 세계로 떨쳐나가자 독점자본과 미 행정부는 CIO 내의 우파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반공주의를 강화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전쟁 전보다 더욱더 민주당의 주춧돌 역할을 하면서 국가정책에 참여하게 된97)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자본가계급과 정부의 냉전정책과 반공주의정책을 그대로 따랐고, 그 결과 노동조합 내에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함으로써 피 묻은 칼을 손에 쥐고 있는 역사 속의 주인공이 되었다.

특히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머레이를 포함한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지지했던 트루먼이 선거에서 승리하자 트루먼 정부와 더욱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트루먼 정부가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낼 것을 요구하자, 트루먼 정부의 막대한 힘을 빌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2) 우파에 의한 좌파 노동조합의 급습

 

1947년부터 노동운동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은 태프트-하틀리 선서진술서(Taft-Hartley Affidavits)를 이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하고, 나아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하에 있던 좌파 노동조합들을 급습ㆍ약탈하기에 이른다.98) 예츠에 의하면,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자본가계급 및 그 국가와 협정을 맺기 위한 전제조건이 바로 노동운동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폐기처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99)

반공주의자들의 좌파 노동조합들에 대한 급습과 약탈은 1947-1948년에 좌파 노동조합들이 태프트-하틀리법의 진술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 본격화되었다.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에서 권력을 잡은 루이터가 가장 먼저 좌파 노동조합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루이터는 자신의 분파가 UAW의 지도부를 장악하자마자, 좌파 노동조합들에 대한 급습을 시작했다. 1948년 그는 UAW가 “민주적” 조직으로 변하기를 원하는 공산주의 주도의 어떤 노동조합에 속한 현장노동자들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게 바로 급습의 신호였다. 루이터는 태프트-하틀리 선서진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노동조합들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나와 UAW에 합류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미국전기노조(UE)를 필두로 운수노조(TWU), 광부노조(Mine), 기계가공노조(Mill), 그리고 농기계노동조합(Farm Equipment Workers Union: FE) 등 전체 지역노조들을 낚아채려는 의지를 표명했다. 태프트-하틀리 선서진술서에 서명을 하지 않은 이들 노동조합들은 UAW에 합류할 것을 제의받았다. 그러나 Mine이나 Mill 등은 루이터의 공격이 있기 전부터 이미 공격을 받고 있었다. Mine과 Mill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힘이 강해지자 1947년 3월초에 이미 10만 조합원 중 3만 명을 포함하는 48개의 지역의 우파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도받는 것을 거부하고 노동조합으로부터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다만 그들은 CIO에는 남는다고 했는데, CIO의 다른 노동조합들이 자신들을 환영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결국, 1948년 봄까지, Mine과 Mill은 다방면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들 공격은 주로 철강노동자들이 주도했으나, 미국자동차노조(UAW), GAS, 코크노동자들(Coke workers), CIO 조선노동조합(Shipyard Workers Union) 등도 철강노동자들의 그 뒤를 이어 공격에 참여했다.

UAW는 또한 농기계노동조합(FE)도 습격했다. 우선 1949년 2월 FE 노동조합원들을 UAW로 흡수시키려는 목표 하에 FE의 300회원들과 대접전을 벌였다. 처음에, FE 임원회의는 UAW로 흡수되라는 CIO의 명령에 저항했다. 그러나 5ㆍ6월이 되면 사태는 FE의 저항이 용감하다기보다는 어쩌면 허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더 크고 부유한 UAW가 FE로 거대한 침투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UAW는 포틀랜드(Portland) 회의에서 받은 승인서를 들고, FE 본거지를 급습하여 부당한 요구를 했다. FE 지도자들은 독립한다는 그들의 맹세를 포기하고 급히 UE와 합병을 협상하게 된다.100)

공산주의 주도하에 있던 더 작은 노동조합들은 더욱 취약했다. 한 예로, 투쟁 중이던 식품담배노동조합(Food and Tobacco Workers: FTA)은 캘리포니아 통조림 공장에 있는 거대한 AFL 소속 트럭운전사노동조합 (Teamsters union)과 경쟁하고 있었다. AFL 트럭운전사노동조합은 그 크기만 따져 봐도 FTA를 압도했을 뿐 아니라, 통조림 제조업자들의 상품  운송을 빠른 시간에 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함으로써 FTA로서는 도저히 모을 수 없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노동조합 의장이던 도널드 핸더슨(Donald Henderson)이, 캘리포니아와 살리나스(Salinas) 지역에서 약 3천 명의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반공주의자 지도자들의 지역이었던 FTA Local 78을 인수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역 78 지도자들은 대부분의 회원들을 AFL 트럭운전사노동조합으로 데려갔다. 또한 FTA 지도부가 태프트-하틀리 선서진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자 FTA 노동자들에게 AFL 가입을 강요하는 변명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결국, 1948년 중반에서 1949년 2월까지 사면초가에 몰린 FTA는 지역에서 반공주의자들의 급습과 약탈로 약 1만6천 명의 노동자를 잃게 되었다.

태프트-하틀리 선서진술서는 작은 좌파 연합들을 급습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고 있던 작은 노동조합들이 급습을 당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작은 노동조합들이 급습당하는 동안, 지도자는 비(非)공산주의자였지만 공산당의 거점이었던 몇몇 작은 노동조합들도 쓸려나갔다. CIO 조선소 노동자들과 가스 및 코크 노동자 연합에서 좌파의 핵들이 쓸려나갔다. 철강 노동자들의 소탕 작전은 평소대로 진행되었다. 소매, 도매 등의 유통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공 지도세력과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원들이 이끄는 뉴욕지역 간에 공공연한 전쟁이 발발하였다. 미국 전역에서 증가하는 반공주의의 흐름에 편승하여, 좌파 노동조합들에 대한 급습이 거대한 파도와 같이 발생했다. 반공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미국이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위험에 직면했다고 악선전을 해댐으로써, 반공주의자들이 좌파 노동조합들을 급습하여 파괴하는 분위기를 아주 효과적으로 조성했다.

1949년 8월, 상황은 절점으로 치닫게 된다. 머레이와 CIO 내 다수를 차지한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내놓고 좌파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를 받는 노동조합들은 태프트-하틀리 선서를 거부한 대가로 반공주의자들이 자행한 급습에 의해 심한 타격을 받았다. 태프트-하틀리법에 대항하던 마지막 근거지였던 미국철강노동조합(USW)도 1949년 7월29일 결국 그들의 저항을 포기하고 진술서에 서명하게 된다. 좌파 노동조합들은 우파 노동조합으로 흡수되어 갔고, 공산주의 조합원들의 저항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3) 1949-1950년 우파에 의한 좌파 노동조합의 숙청

 

1948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의 트루먼의 승리는 CIO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의 힘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강화시키고, 공산주의자들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트루먼 정부의 외교정책을 반대하는 등 트루먼을 공격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CIO 대표 머레이는 트루먼의 승리 이후 매우 대담해져서 공산주의에 대한 전쟁을 가차 없이 진행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CIO 내로의 공산주의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CIO 내에 남아 싸우기로 결정하지만, 머레이는 점점 더 CIO 내에 공산주의자들의 존재를 원하지 않게 된다. 

1949-1950년 사이에 우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숙청이 본격화되었다. 우파 자유주의자들은 CIO 전국대회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CIO 전국대회는 UE와 FE를 CIO로부터 추방하기 시작하여, 대회가 끝난 다음날 이사회는 공산당 노선을 따랐던 10개의 CIO 노동조합들을 추방했다. 추방된 10개의 노동조합은, 미국신문방송협회(American Communications Association), 식품ㆍ담배노동조합(Food and Tobacco Workers), 모피ㆍ가죽노동조합(Fur and Leather Worerks), 광업노동조합(Mine), 기계제조노동조합(Mill), 사무ㆍ전문직노동조합(United Office and Professional Workers), 미국공공노동조합(United Public Workers), 국제항만ㆍ창고노동조합(International Longshoremen’s and Warehousemen’s Union), 항만요리사와노동자들(Marine Cooks and Steward), 국제어업노동조합(International Fishermen’s Union), 그리고 가구노동조합(United Furniture Workers)였다.101) 그리고 이로써 CIO는 40만 명의 UE 조합원102)을 포함하여 약 1백만 명의 조합원들을 잃었다. CIO 전체 조합원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원이었다.

CIO로부터 추방된 노동조합들은 물론 저항했다. 광업노동조합(Mine)과 기계제조노동조합(Mill) 지도부는 그들을 추방당한 것에 대해 매우 강력하게 CIO를 공격했다. 식품ㆍ담배노동조합(FTA)은 CIO 내에 남아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가장 공개적인 공산주의 노동조합이었던 가죽노동자들 (Fur Workers)도 CIO에 저항했다. 그러나 축출된 노동조합들은 결국 약화되었고, 사라지거나 다른 노동조합들과 합병되었다. 20년 후에는 축출된 노동조합 중 오직 4개만이 살아남았다.103) 모든 반공주의 힘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상태를 약화시키려는 집중공세를 퍼부어댔다.104)

미국 공산당은 이러한 반공주의자들의 집중공세에 대항하여 새로운 좌파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미국정부기관을 비롯한 모든 반공주의에 의한 집중포격을 받으면서 결국 1955년 미국 공산당은 독립적인 좌파노동조합을 포기한다.105) 결국, 반공주의자들의 공산주의자 소탕작전은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거의 모두 소탕된 CIO는 1955년 보수적인 AFL과 합병했다. CIO에는 이제 보수적인 AFL과 합병될 정도로 보수파만 남은 것이었다.

이러한 광적인 반공주의는 196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태프트-하틀리법은 1956년까지 모든 노동조합 간부들로 하여금 비공산주의자임을 진술서에 서명하게 했다. 1954년의 공산주의자통제법(Communist Control Act)은 공산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노동조합들에서 전국노사관계위원회(NLRB)를 구성하는 것을 금함으로써 이들 노동자들이 임금 등과 관련된 단체협약을 할 수 없도록 했다. 랜드럼-그리핀법(Landrum-Griffin Act)은 공산당원임을 보고하지 않았을 경우 약 1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고, 1년간 감옥에 가두었다.

1954년까지 59개의 노동조합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고, 40개의 노동조합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조합원이 되는 것을 막았다. 1955년까지 직접적인 학대와 두려움은 노동조합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모든 영향력을 제거했다. 그렇게 해서 발생한 노동운동의 쇠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1949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의 기간은 노동운동 내 우파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추방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바로 공화당의 매카시 마녀사냥과 맞물리는 시기였다.

 

 

6. 반공주의와 민주주의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의, 그리고 그에 편승하고 협조한 자유주의적 노동운동가들의 광적인 반공주의는 당연히 미국 공산당에 가장 심한 타격을 주었고, 노동운동 내의 좌익세력을 전반적으로 파괴하였다.

반공주의가 노동운동에 미친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현재까지도 미국노동운동에서 혁명적 기운이 쇠진된 채 쇠퇴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CIO는 공산당원이었던 노동조합원들의 숙청과 함께 조직적 탄력을 잃었다. CIO는 크게는 시민권과 작게는 양성평등을 위해 투쟁했었고, 국제노동자계급 단결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가장 선진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조직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CIO가 치명적인 반공주의를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노동자들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여 혁명의 전위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갖지 못한 채로 쇠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성장하는 시민권 운동을 폐기했고, 인종평등 정책을 폐기했으며, 백인남성 관료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노동조합 내에 관료주의가 팽배해지게 되었다.

이후, 미국 노동조합들의 조직은 급격히 쇠퇴하여 미국전역의 노동자들 중 간신히 20%만이 노동조합에 속하게 되고, 꾸준히 쇠퇴한다. CIO와 AFL의 합병 후에, 중요한 유럽 노동운동에서 우익이거나 중용을 지켰던 CIO 자유주의자들이 이제 새로운 AFL-CIO의 ‘좌파’가 되었으나, 그것은 사회주의 집단이 없는 ‘좌파’였고, 미국의 노동운동은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이게 되었다. AFL-CIO는 심지어  CIA를 위해서 일했고, 전 세계의 민주정부를 전복하는 것을 도왔다.106)

그러나 이 광적인 반공주의의 파괴적 영향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독점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사실상 일체의 사회운동을 해체했고, 인민 일반의 정치적 입지를 좁혔다. 반공주의는 가장 혁명적인 집단과 그 운동을 탄압함으로써 계급계층들의 대중들을 독점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복속시킨 것이다.107)

반공주의 영향은 또한 미국 공산당이 혁명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모든 것들을 소멸시켰다.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여성평등권과 함께 흑인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고,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싸웠다. 특히 흑인여성이,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일하는 것을 해결하려 했고, 여성들이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여성들을 고무시켰다.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공황기에 실업자들의 분출하는 투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반공주의는 이러한 광범위한 저항운동의 흐름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하여 시민적 평등권 운동 또한 노동운동의 쇠락에 직접적ㆍ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진보주의의 쇠퇴는 백인 중산계층 안에서 흑인들을 몰아내게 만들었고, 반공주의 운동은 시민평등권 운동의 주요한 지지원이었던 노동조합들을 파괴시켰다. 이러한 노동조합들의 파괴는 초기 인종평등 운동을 중산계층 운동으로, 그것도 위축된 중산층 운동으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세계는 운동하고 유전(流轉)한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배경으로 독점자본이 노동자계급 운동을 분쇄하던 시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미 자본은 떠오르는 해가 아니라 자신을 주체 못하고 조락해가는, 그러한 존재이다. 특히 2007년 하반기 이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대공황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광적인 반공주의에 의해, 신자유주의에 의해 짓눌려온 노동자계급이 세계 곳곳에서 봇물처럼 투쟁을 벌이며 떨쳐 일어나고 있다. 미국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조만간 상황은 최근 수십 년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될 것이다. 이제 공세를 취하는 것은 독점자본가계급, 부르주아 국가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다.

다만, 노동운동 내의 우파 자유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이 놀았던 파괴적 역할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결코 그들이 노동자계급의 도도한 역사적 전진을 가로막을 수는 없지만, 그 발걸음을 더디게 할 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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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ㆍ 아돌프 거머(Adolph Germer, 1881-1964): 사회당 보수세력의 핵심으로써 사회당 좌파들을 축출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 그가 미국사회당(Socialist Party of America)의 전국중역비서(National Executive Secretary)로 있던 1916에서 1919년까지가 바로 보수주의적인 우파들에 의해 좌파들이 사회당으로부터 축출되어 1919년 공산당을 창당하던 시기였다.

ㆍ 데이비드 더빈스키(David Isaac Dubinsky, 1892. 2. 22.-1982. 9. 17.): 1932년-1966년 국제여성복노동조합(International Ladies’ Garment Workers’ Union: ILGWU) 대표. 1936년 시드니 힐만과 함께 미국노동당(American Labor Party)을 창당했으나, 이후, 개인적 및 정치적 차이로 힐만과 결별한 후, 뉴욕자유당(Liberal Party of New York)을 창당.

ㆍ 얼 브라우더(Earl Russell Browder, 1891. 5. 20.-1973. 6. 27.): 미국의 공산주의자. 1930년-1945년 미국 공산당 서기(General Secretary)를 역임했으나, 1946년 당에서 추방당함. 1930년에 공산당의 서기(General Secretary)가 되었고, 1932년 윌리엄 포스터가 심장병을 앓자 당의장(Chairman)의 자리를 역임. 얼브라우더는 서기로 일할 때, 인민전선(popular front) 전술을 당의 노선을 채택. 1936년 대통령 선거에서 독자후보로 출마. 1944년 제2차 대전의 종전과 전후(戰後) 미-쏘 간의 긴장 가능성을 간파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쏘련과 거리를 두려는 시도로서 공산당(CPUSA)을 해체하고 당이 아닌 공산주의자정치연합(Communist Political Association: CPA)를 결성하자고 주장(‘브라우더주의’: Browderism)했으나, 윌리엄 포스터 주도의 공산당은 이를 거부하며 1945년엔 그의 서기직을 박탈하고, 1946년엔 그를 제명했다.

ㆍ 조지 애즈(George F. Addes, 1911. 8. 26.-1990. 6. 19.):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의 창립자. 1936년-1947년까지 서기장 및 재정담당. 

ㆍ 해리 브릿지스(Harry Bridges, 1901. 7. 28.-1990. 3. 30.): 미국의 공산주의자. 열정적인 노동활동가. 약 40년 동안 호주-미국 노동조합 운동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미국 서해안, 하와이, 알래스카 지역의 부두하역 및 창고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인 국제부두하역ㆍ창고노조(International Longshore and Warehouse Union; ILWU)의 지도자. 193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공산당원으로 활동. 공산당원 여부에 대해 거짓으로 진술했다는 이유로 미국정부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1953년에 미국 대법원에 의해 무죄 판결.

ㆍ 헨리 왈라스(Henry Agard Wallace, 1888. 10. 7.-1965. 11. 18.): 진보적 자유주의자. 루즈벨트 대통령 하에서 제33대(1941년-1945년) 부통령직에 있었고, 1933년에서 1940년에는 농무부 장관, 1945년에서 1946년에는 통상부 장관을 역임. 1948년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당(Progressive Party)후보로 출마.

ㆍ 제임스 카레이(James B. Carey, 1911-?): 1930년대 노동자들의 대투쟁의 시기에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미국전기ㆍ라디오연합노조(United Electrical and Radio Workers of America: UE)를 창립했으나, 1941년 UE 전국대회에서 의장선거에서 낙선한 후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고, 핍립 머레이와 함께 반공주의자 대열에 합류했다. 1948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우세했던 세계노동조합연맹(WFTU)에서 CIO를 탈퇴시켜, 반공주의적인 국제자유노동조합연맹(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 ICFTU)을 창립했다. ‘민주주의를 위한 전기노동자들’(UE Members for Democratic Action: UEMDA) 같은 반공주의 단체를 만들어 UE 내에서 공산주의적 지도부에 대항했다. CIO가 UE를 제명하도록 압력을 넣었고, 새로운 반공주의적인 전기노동자노동조합을 설립했는데, 바로 국제전기ㆍ라디오ㆍ기계노동자노동조합(International Union of Electrical Radio and Machine Workers Union: IUE-CIO)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ㆍ 제이 러브스톤(Jay Lovestone, 1897. 12. 15.-1990. 3. 7.): 미국사회당 당원이었고, 1927년-1929년 사이에 미국 공산당의 사무총장(Executive Secretary)을 역임했으나, 1929년 공산당을 탈당한 후 공산당 반대파를 결집하여 반공주의 정당을 결성하여 중앙정보국(CIA)을 돕는 등 반공주의 운동을 벌였다.

ㆍ 존 브로피(John Brophy,1883–1963): 1920년대에는 미국광산노동조합 (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UMA)에서 활동했고,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CIO에서 활동. 1941년 존 루이스가 대표직을 사임한 후, CIO의 핵심지도자가 된다.

ㆍ 존 프레이(John Frey): AFL의 보수주의자. CIO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제이 러브스톤처럼 1920년대 말에 공산당(CPUSA)을 탈당하거나 그로부터 축출당한 사람들과 협력했다.

ㆍ 존 루이스(John Llewellyn Lewis, 1880. 2. 12.-1969. 6. 11.): 1920년-1960년까지 미국광산노동조합(the United Mine Workers of America: UMW) 의장. 1936년 AFL에서 CIO를 분리시키는 데 앞장섰고, 1930년대에 미국철강노조(United Steel Workers of America: USWA)를 설립. 1941년 CIO 대표직 사임 후, 1942년에 광산노조를 CIO로부터 탈퇴시켜 1944년 AFL로 옮겼다. 1936년 루즈벨트를 도왔으나, 1940년에는 루즈벨트의 외국정책에 반대했다. 루이스는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을 위해서 매우 공격적인 투사였으나, 제2차 대전 시기와 그 이후에는 반공주의자. 필립 머레이, 월터 루이터 등과 함께 1947년 이후 트루만 정부의 냉전과 반공주의 정책에 발맞추어,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한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

ㆍ 필립 머레이(Philip Murray, 1886. 5. 25.-1952. 11. 9.):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teel Workers Organizing Committee: SWOC)와 미국강철노동자(United Steelworkers of America: USWA)의 첫 회장. CIO와 SWOC 양쪽에서 책임을 맡고 있었다. 1940년 존 루이스(John Lewis)가 CIO의 회장직을 퇴임하자 그 뒤를 이어 1952년까지 CIO 회장을 역임. 루즈벨트 행정부와 제2차 대전 동안 전쟁에 대한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모든 CIO노동조합들을 대신하여 ‘무분규협약’을 채택하고, 월터 루이터와 함께 생산 증대를 위한 산업노조(Industry Union Councils)을 만들어 전시생산체제를 재정비했다. 월터 루이터, 존 루이스 등과 함께 1947년 이후 트루만 정부의 냉전과 반공주의 정책에 발맞추어,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한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

ㆍ 로버트 트레비스(Robert Travis): 미국 공산당원. 노동활동가. 1933-37년 GM 플린트 공장 파업을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하나.

ㆍ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us, 1850-1924): 1850년 영국 런던 출생, 1881년 미국 및 캐나다 노동조합연맹 (Federation of Organised Trades and Labour Unions of the U. S. and Canada)을 조직하는 데 기여했고, 5년 후 이 조직이 노동기사단을 탈퇴한 몇 개 직종별 노조와 결합하여 미국노동연맹(AFL)으로 발족할 때 의장직을 맡아 1895년을 제외하고는 1924년에 사망할 때까지 의장으로 재임.

ㆍ 시드니 힐만(Sidney Hillman, 1887-1946): 1935년 CIO(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의 창립 멤버. 1937년 AFL로부터 독립한 CIO(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의 부의장(Vice-President)을 역임. 1942년 창립된 CIO-PAC(CIO’s Political Action Committee)의 첫 대표. 루즈벨트와 민주당, 마셜정책을 지지. 1936년 더빈스키(Dubinsky)와 함께 미국노동당(American Labor Party)을 창당. 이 미국노동당은 사회당이나 민주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좌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0년 루즈벨트는 힐만을 국가안보자문위원회(National Defense Advisory Committee)에, 1941년에는 생산관리사무소의 부국장(associate director of the Office of Production Management)으로 임명했다. 1942년 전시생산국(the War Production Board)이 창립되었을 때, 루즈벨트는 힐만을 노동계 대표로 일하도록 지명.

ㆍ 월터 루이터(Walter Philip Reuther, 1907. 9. 1.-1970. 5. 9.): 미국자동차노동조합(United Automobile Workers: UAW)와 민주당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뉴딜정책을 지지했고, 제2차 대전 이후 1946년에 UAW 의장으로 당선된 후 1947년부터 CIO 노동조합들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ㆍ 윌리엄 그린(William Green): 1952년까지 AFL의 지도자. 그린과 그 집단은 1936년 AFL에서 CIO가 분리될 때, 새로운 CIO노동조합들에서 공산주의를 진압했다.

ㆍ 윌리엄 포스터(William Z. Foster, 1881. 2. 25.-1961. 9. 1.): 미국의 공산주의자. 노동활동가. 1929-1934년엔 미국 공산당 서기(General Secretary), 1945년-1957년엔 미국 공산당 의장(Chairman)을 역임. 미국사회당과 세계산업노동자동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의 일원이었으며, 1919년 강철노동자 파업을 주도.

ㆍ 윈햄 모르티머(Wyndham Mortimer): 미국 공산당원. 클리브랜드 TUUL 자동차노동조합 지도자. 로버트 트레비스(Robert Travis)와 함께 1937년 GM 플린트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노사과연

 


 

1) Harvey A. Levenstein, Communism, Anticommunism, and the CIO, Greenwood Press, 1981, p. 339.

 

2) W. Z. 포스터, ≪세계사회주의운동사: 제1, 2, 3 인터내셔널의 역사≫, 동녘. 1987, p. 254. 

 

3) 백창재, ≪미국 패권 연구≫, 인간사랑, 2009. pp. 52-53.

 

4) 멜빈 듀보프스키 지음, 배영수 옮김, ≪현대미국노동운동의 기원≫, 한울아카데미, 1990.

5) 리차드 보이어, 하버트 모레이스 지음, 이태섭 옮김,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도서출판 책갈피, 1996, pp. 365-86.

 

6) Robert Justin Goldstein, Political Repression in Modern America from 1870 to 1976,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1.

 

7) 1935년 11월 10일, 인쇄노동조합, 연합의류노동조합, 섬유노조연합, 광산․제련노동조합, 유전ㆍ천연가스 및 정유 노동조합, 전국여성의류노동조합, 모자제조노동조합이 주축이 되어 산업별조직위원회(CIO, Committee for Industrial Organization)를 창립한다. 이 위원회는 처음에는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지 않고 미국노동총동맹(AFL)에 속해 있었으나, 보수파가 주축이 된 AFL 집행위원회가 산업별조직위원회에 가담한 조합들을 제명시키고, 산업별조직위원회가 공산주의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는 등 산업별조직위원회를 탄압하자, 1938년에 이 산업별조직위원회는 AFL을 탈퇴했고, 산업별노동조합회의(The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로 조직 명칭을 바꾸어 독자적인 조직을 형성했다. (리차드 보이어, 하버트 모레이스 지음, 이태섭 옮김, 같은 책, pp. 323-349 참조.)

 

8) Roser Keeran “The Communist Influence on American Labor” in Michael E. Brown, Randy Martin, Frank Rosengarten, George Snedeker ed. New Studies in the Politics and Culture of US Communism, 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1993, pp. 163-193.

 

9) “[제2차 세계대전 후] 이같이 국제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미국지배계급은 국내에서 새로운 적을 만나게 되었다.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의 제반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동자, 농민, 흑인, 소수민족 등을 규합하는 민중적 지지기반이 필요했었다. 이들은 당시 대공황의 충격 속에서 가장 험난한 고통을 겪은 계급과 계층들로써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반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급속하게 나아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전 후 새로운 상황을 맞은 미국 자본주의체제의 지도자들은 1930년대의 그 같은 유산이 그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요인이 당장은 아니라 하더라도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의 영향력과 특권에 위협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모두 힘을 합쳐 사상 유례없는 잔혹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소위 매카시즘으로 기록된 캠페인이었다. 이 운동도 성공을 거두어 우선 노동조합에 대대적인 숙청운동이 벌어져 재편성되었고 급진적인 조직이나 운동은 범죄시 되었으며 지식인들은 갖가지 위협 속에 침묵을 강요당했다.” (해리 맥도프, 폴 M. 스위지 지음, 김유원 옮김, ≪미국자본주의의 위기≫, 일월서각, 1986, p. 185.)

 

10) Anne Fagan Ginger and David Christiano, The Cold War Against Labor: An Anthology in Two Volumes (Meiklejohn Civil Liberties Institute Studies in Law and Social Change, No 3),  Meiklejohn Civil Liberties Inst, 1987, p. 227.

 

11) Kim Phillips-Fein, Invisible Hands: The Making of the Conservative Movement from the New Deal to Reagan, W. W. Norton, New York and London, 2009, p. 9.

 

12) Kim Phillips-Fein, 같은 글.

 

13) 1935년 ‘뉴딜’의 일환으로 제정된 미국의 노동조합법. 정식명칭은 전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이며, 이 법률의 제안자인 당시의 상원의원 와그너(R. F. Wagner)의 이름을 따서 와그너법이라 부른다. 근로자의 단결권 및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부당노동행위제도와 교섭단위제도(交涉單位制度)를 설정하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제정된 태프트-하틀리법(法)은 새로이 근로자 측의 부당노동행위제도를 설정하고, 단체교섭의 단위ㆍ대상범위ㆍ방법 등에 대하여도 규제를 강화함으로써 와그너법을 대폭적으로 수정하였다.

 

14) Kim Phillips-Fein, 같은 글, pp. 3-25.

15) Kim Phillips-Fein, 같은 글, p. 31.

16) Kim Phillips-Fein, 같은 글.

17) Anne Fagan Ginger and David Christiano, 같은 책, pp. 314-15.

18) Kim Phillips-Fein, 같은 글.

19) Anne Fagan Ginger and David Christiano, 같은 책, p. 205.

 

20) Ellen Schrecker, “Labor and the Cold War” in Robert W. Cherny, William Issel, and Kieran Walsh Taylor ed. American Labor and the Cold War-Grassroots Politics and Postwar Political Culture. Rutgers University Press. 2004. pp. 7-8.

 

21) 예컨대, Roser Keeran 같은 글, p. 190.

 

22)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3-35.

 

23) Books LLC, Communist Parties in the United States: Revolutionary Communist Party, USA, Communist Party USA, Independent Labor League of America, Progressive Labor Party, Bibliography on American Communism, Freedom Road Socialist Organization, International Workers Party, Books LLC, 2010, p. 28.

 

24)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을 때, 전체 39개의 단체들 중에서 미국에서 온 참가집단은 4개의 집단(the Socialist Labor Party, the Socialist Propaganda League, I.W.W., The Workers International Industrial Union)이었다(Theodore Draper, The Roots of American Communism, The Viking Press, 1957, p. 150).

 

25) 두 개의 공산당이 출범한 지 두 달 만인 1919년 11월 8일 뉴욕시에서 반공산주의 습격이 처음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들을 습격을 지시한 자들은 뉴욕의회위원회(Lusk Committee of the New York)였다. 700여 명의 경찰들이 사무실과 회의 장소를 급습하여 수 톤의 문헌들과 서적들을 압수했고, 수백 명을 타격했다. 약 75명이 기소되었다. 이 습격 이후 뉴욕의 공산주의 조직은 곧바로 비합법 단체가 되었다. 러시아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외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추방당했다. 1920년 1월 1일에는 시카고에서도 뉴욕에서와 같은 급습이 일어나, 공산주의자들과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 회원 들이 급습을 당했으며, 1월 2일에는 약 33개의 도시와 해안을 따라 전국적으로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을 급습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월 5일에는 약 5000명이 체포되었다. 비합법 상태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은 이 팔머 급습 전인 1919년에 23,744명이었는데, 1920년에는 5,584명이 되었다. 외국어연맹원은 팔머 급습 이후 급습 이전의 26,680명에서 12,740명으로 줄었다. (Theodore Draper, 같은 책).

 

26) 레벤쉬타인에 의하면, 윌리암 포스터는 TUEL 내에 공산당의 노동분과를 만들어 그들로 하여금 이미 존재하는 노동조합 내에서 더 전투적이고, 급진적이며 산업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도록 자극하였다. TUEL은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새로운 공산주의자 대열의 기수 역할을 했으며,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진부한 술책’과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us)의 보수주의를 비판했다. 포스터는 TUEL 회원 들에게 노동조합 내에서 그들 스스로를 조직하고 급진적이 될 것을 주장했다. 포스터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혁명으로 가는 길로 인도하라고 격려했다. 포스터는 공산주의자들이 장광설이나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훌륭한 노동조합원”이 될 것을 강조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매일 매일 노동조합을 운영하기 위해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지도력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6-9).

 

27) 미국노동총연맹(AFL)은 1881년 숙련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작업환경 개선 등을 위한 투쟁을 해왔던 ‘미국ㆍ캐나다 노동총동맹’이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으로 개편되면서 설립되었다. (리차드 보이어, 하버트 모레이스 지음, 이태섭 옮김,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책갈피, 1996. pp. 323-349).

 

28)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8. 

29)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19-20.

30)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23-31.

 

31) 정식 명칭은 미국전기ㆍ라디오 및 기계노동자 연합회(United Electrical, Radio and Machine Workers of America)이고, 약칭이 UE이다.

 

32)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40-42.

33) Roser Keeran, 같은 글, pp. 178-80.

 

34) 리차드 O. 보이어, 하버트 M. 모레이스 지음, 이태섭 옮김,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책갈피, 1996, p. 328.

 

35) Roser Keeran 같은 글, p. 190.

 

36) John Gerassi “The Comintern, the Fronts, and the CPUSA” in Michael E. Brown, Randy Martin, Frank Rosengarten, and George Snedeker ed. 같은 책, pp. 75-89.

 

37) Theodore Draper, 같은 책, pp. 267-326;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84-95.

 

38) Mark Naison “Remaking America: Communists and Liberals in the Popular Front” in Michael E. Brown, Randy Martin, Frank Rosengarten, and George Snedeker ed. 같은 책, pp. 45-70.

 

39) Michael Yates, “Can the Working Class Change the World?”, http://www.monthlyreview.org/0304yates.htm 2004. 

 

40) Roser Keeran, 같은 글, pp. 163-93.

41) Roser Keeran 같은 글.

 

42) Maurice Isserman, Which Side Were You On?, Middletown, CT: Wesleyan University Press, 1982); and Joseph R. Starobin, American Communism in Crisis, 1943-1957, Cambridge: Havard University Press, 1972. 

 

43)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82-84, 161-193.

 

44) 백의편집부, ≪코민테른과 통일전선: 코민테른 주요 문건집≫, 백의, 1988, p. 10.

 

45) 김성윤 엮음,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 II≫, 거름, 1986, p. 112.

 

46) John Gerassi, 같은 글, p. 75.

 

47) 꼬민테른은 1925년 미국 공산당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1) 노동조합 내부에서 일층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을 조직적으로 정착시킬 것, (2) 당의 민족별 집단을 전부 합동시켜 진정으로 통일적인 당을 형성할 것, (3) 현지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사업에 더욱 커다란 주의를 기울일 것, (4) 노동자생 활의 일상적인 절박한 문제에 기반을 둔 선동에 더욱 커다란 주의를 기울일 것 (통일전선전술의 적용)” (백의편집부, ≪코민테른과 통일전선: 코민테른 주요 문건집≫, 도서출판 백의, 1988, pp. 211-12).

 

48) 1934년 8월 미국 공산당 지도부들은 그들의 당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기관으로 보면서, 비록 그것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일지라도, 자유주의자와 사회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지도되는 통일전선을 검토하였다. 1934년 9월, 미국 공산당은 사회당(Socialist Party)과 그 당수 노먼 토마스(Norman Thomas)에게 “통일전선 (United Front)”에 합류하여 다음과 같은 투쟁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다. “① 임금상승과 노동시간 단축: 사측 노동조합 몰아내기 … AFL 관료주의 정책과 대항해서 투쟁하기… 혁명적 전통이 있는 지도세력 건설하기 … ② 노동자 실업 및 사회보장법안(H.R. 7598)의 즉각적인 입법화… 즉각적인 실업구제책… ③ 농부들의 비상구제법안의 입법화 … ④ 흑인의 권리 확대와 흑인 학대방지를 위한 입법화 … ⑤ 전쟁과 파시즘에 대항한 단결된 투쟁 … 군수품 선적반대, … ⑥ 지역, 공장, 노동조합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통일된 행동…” (John Gerassi, 같은 글, p. 80).

 

49) Mark Naison, 같은 글, pp. 45-70.

50) Roser Keeran 같은 글, pp. 163-193.

 

51) “뉴딜정책은 루즈벨트가 취임 초기에 파국적인 경제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업에 중점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정책으로, 이 정책은 민주 공화 양당과 이들이 대변하는 계급의 특성과 합치되는 것이었다.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은 세계공황의 시기에 스스로 앞장서서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안정화를 위한 정책을 도입한 것이었다.” (해리 맥도프, 폴 M. 스위지 지음, 김유원 옮김, ≪미국자본주의의 위기≫, 일월서각, 1986, pp. 140-145).

 

52) Mark Naison, 같은 글, pp. 45-70.

53) John Gerassi, 같은 글, pp. 75-89.

 

54) “1937년 4월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은 민주당의 좌파분자도 인민전선에 끌어들일 것을 목표로 한 미국 공산당의 조치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서기국 회의에서는 루즈벨트 정부의 정책을 이상화하여 ‘루즈벨트 지지 세력은 인민전선의 주요한 요소이자 구성부분의 하나로서 행동할 것이다’고 생각한 브라우더에 대하여 윌리암 포스터가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였다.” (김성윤 엮음,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 II≫, 거름, 1986, p. 156.)

 

55)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339.

 

56) Theodore Draper, 같은 책, p. 25 및 Books LLC, 같은 책, p. 29 등 참조.

 

57) Michael Yates, “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 Will This Include the U.S. Labor Movement?”, http://www.monthlyreview.org/700yates.htm; Michael Yates, “Can the Working Class Change the World?”,  http://www.monthlyreview.org/0304yates.htm.

 

58) Michael Yates, “Workers of All Countries, Unite: Will This Include the U.S. Labor Movement?”

59) Mark Naison, 같은 글, pp. 45-70.

 

60) “1938년 1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국은 미국문제를 심의하여, ‘파시즘의 위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전선’의 결성을 지향하는 당의 대담한 방침을 승인했다. 그러나 당 내부에, 소부르주아 세력, 진보세력, 민주주의 세력과의 광범한 공동운동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우려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와 동시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루즈벨트 정부의 정책에 대해 브라우더가 내린 평가는 일면적이며, 이 때문에 당이 추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음을 지적하고 루즈벨트 정부의 정책을 깊이 분석하였다. 디미트로프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미국위원회에서 연설을 통해, 루즈벨트 정부의 진보적인 조치를 교묘히 지지하라고 미국의 공산주의자에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를 위한 변호론을 펴서는 안되며’,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선의 요구에 모순되는 그의 조치에 대해서는 실무적인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김성윤 엮음, ≪코민테른과 세계혁명 I, II≫, 거름, 1986, pp. 155-156.)

 

61) “1942년까지 미국 공산당은 생산 증가의 문제에 있어서 공식적인 CIO 노선보다 더 나가지는 않았다. 미국 공산당은 단지, 최근 CIO 전국임원회의 선언, 즉 ‘생산의 증대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이 생계비를 더 많이 지출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해서는 안 되며, 노동운동이 계속 성장하고 지속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하고, 형평성 있는 세금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선언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는 정도였다. 오히려 미국 공산당은 소용돌이치는 물가가 통제되어야 하고, 사회안전과 실업보험이 확대되어야 하며, 정부의 결정구조에 노동계가 다시 대표자로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요한 것은, ‘무분규 협약’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고, 당이 어떻게 그것을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159, 170.)

 

62)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89.

63) Anne Fagan Ginger and David Christiano, 같은 책, pp. 187-213.

 

64)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171-176.

 

65) 예를 들면, 1943년 항만 노동자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부패한 부두하역노동자연맹(International Long-shoremen’s Association: ILA)을 탈퇴하고, 공산주의자인 해리 브릿지스(Harry Bridges)가 지도하고 있던 국제부두하역ㆍ창고노동조합(International Longshore and Warehouse Union: ILWU) 체계로 바꾸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브라우더 등은 항만 하역작업이 원활히 돌아가지 못할 것을 우려하면서, 공산주의자 영향력 하의 새로운 동해안 부두노동조합을 창설하거나 최소한 ILWU에 가입하는 것 등을 지원하기보다는, 항만노동자들에게 ILA로부터 탈퇴하지 말라고 제안했다. 브라우더 등은 항만노동자들이 ILA에 머물면서 생산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61).

 

66)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64.

67) John Gerassi, 같은 글, p. 82.

68) Robert Justin Goldstein, 같은 책, pp. 262-284.

69)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70) 1946-1947년 월터 루이터(Walter Reuther)가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의 의장이 되지만, 아직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는 노동조합들이 UAW의 집행이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루이터는 좌파 지도자들을 축출하고, 지역 노동조합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결국 1947년 가을 11월 전국대의에서 공산당 본거지를 포함한 전 지역을 휩쓸어 UAW를 반공기지로 만든다. 루이터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을 교묘히 배제함으로써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들은 농기계노동조합(Farm Equipment Workers Union: FE)과의 합병을 거부했다. FE와 합병하게 되면, 약 8만 명의 FE 조합원들이 UAW 내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약 500명의 FE 좌파 임원들이 UAW 집행회의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루이터 등은 통합 찬반투표 캠페인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FE와의 합병은 내부 시스템을 파괴하는 트로이의 목마, 즉 UAW 내에 직능별 노동조합을 허용하게 될 것이라고 선동했고, 결국 전체투표에서 합병이 기각되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198-205).

 

71) Robert Justin Goldstein, 같은 책, pp. 139-163.

 

72) 식민지 시대에 숙련공들은 임금 압박에 반대하여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단지 노동조건만을 향상시킨 것이 아니라 사업주의 재산도 몰수했다. 그 때문에 이 시기 이후 사업주들에 의한 ‘Red Herring’(훈제청어, 남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으로서의 반공주의가 파업이나 노동조합주의에 대항하여 대중의 의견을 결집시키는 도구로써 많이 이용되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00).

 

73) 루즈벨트는 해리 브릿지스가 서해안 노동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좌파이며 핵심적인 인물로 드러나자, 그에 대해 적대하는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자들이 루즈벨트의 대외정책에 반대하고 이 때문에 CIO가 분열되자, 해리 브릿지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화되었다. 법정에서는 브릿지스의 무죄가 입증되었지만, 미국 의회는 계속해서 그를 추방하기 위한 압력을 가하였다. 특히, 스미스법이 도입되면서 생긴 새로운 규정에는 공산당원이거나 파괴적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을, 심지어 과거에 그러한 조직에 속해 있었다 하더라도, 추방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는데, 정부는 이 스미스법으로 새롭게 무장을 하고 브릿지스 진영에 대한 학살을 개시했다. 마침내 1941년 2월 법무장관 작켄(Jacken)은 브릿지스를 체포ㆍ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27).

 

74) FBI의 ‘(국가)파괴행위에 대한 조사’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FBI 요원들은 CIO 좌파들의 회의를 ‘도촬(盜撮)’하기 시작했고, 주변의 자동차 번호판을 떼어갔으며, 해리 브릿지스의 호텔방을 도청하는 등 여러 행동을 했다. 정부는 “법을 어기는 공산주의자들”을 기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31).

 

75)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31.

 

76) 물론 그들의 행동과 노선이야말로 보수적 정치운동에 불과하지만!

 

77)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34.

 

78) Ellen Schrecker, “Labor and the Cold War” in Robert W. Cherny, William Issel and Kieran Walsh Taylor ed. American Labor and the Cold War ―Grassroots Politics and Postwar Political Culture. Rutgers University Press. 2004, pp. 7-24.

 

79) 카톨릭노동조합연맹(ACTU)에 속해 있던 가톨릭 ‘노동학교’와 산업성직자들이 좌파 주도의 노동조합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 ACTU의 반공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UE였다, ACTU는 UE 내 반좌파연합 조직화의 초기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6년 3월 뉴욕주에서 UE 반대운동을 조직한 수도원장 다비(Tom Darby)와 ACTU 지도자 도나우(George Donahue)는 UE 반대자들을 위한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노동조합의 지도부를 축출하기 위한 투쟁전략을 제안했다. ACTU는 또한 UAW에서도 활동적이었다. 여기에서는 전투적이고 음모적인 디트로이트 분회가 루이터를 지원했다. ACTU 사제인 수도원장 클란시(Clancy)가 디트로이트의 41개 ‘노동학교’의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ACTU는 미시간 지역에서도 루이터의 승리를 도왔다. 다만, UE와 UAW에서의 활동을 제외하곤, ACTU 그 자체의 영향력은 특별히 크지는 않았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236-40).

 

80)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42.

 

81) 1948년 3월 행정부는 머레이에게 거세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트루먼은 유럽의 공산주의자 선동가들이 샌프란시스코 CIO 회의가 제안한 ‘마샬플랜에 대한 격렬한 탄핵문’을 회람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머레이를 그의 사무실에 불러 CIO 내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강한 반대행동을 하라고 촉구했다. 3월 30일 머레이는 국방장관 포리스털(James Forrestal)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비록 UE나 다른 노동조합들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라도 CIO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기 위해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44).

 

82)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46.

83)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17.

 

84) 머레이는 태프트-하틀리법상의 진술서에 대해서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그것이 마녀사냥을 고무시켜 노동운동을 짓밟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술서가 뻔뻔스런 헌법위반이라고 주장하면서 1949년 중반까지 소속 강철노동조합 안에서 진술서 조항에 동의하라는 압력에 대해 저항하였다. 그러나 반공주의적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점차 머레이와 비슷한 양심의 가책을 누른 채 진술서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8년 그 법이 실행에 들어간 지 1년 만에, 102개의 AFL 노조 중 89개, 45개의 CIO 노조 중 30개에서 약 8만1천 명의 노동조합 간부들이 진술서에 서명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17).

 

85) Anne Fagan Ginger and David Christiano, 같은 책, pp. 234-300.

 

86) 스티븐 E. 엠브로즈 지음, 권만학 옮김. ≪국제질서와 세계주의≫, 을유문화사. 1996.

 

87) Anne Fagan Ginger and David Christiano, 같은 책, pp. 233-316.

 

88)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233-250.

 

89) 안윤모, “현대 미국의 사회운동”, 김덕호ㆍ김연진 엮음, ≪현대 미국의 사회운동≫, 비봉출판사, 2001.

 

90) Robert Justin Goldstein, Political Repression in Modern America from 1870 to 1976,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1, pp. 287-396.

 

91)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85-94.

 

92) 그는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의장 마틴(Homer Martin)을 시켜 노조의 힘을 중앙집중화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1938년 초에 마틴은 GM 플린트 공장 점거투쟁의 주역이었던 로버트 트레비스(Robert Travis)를 강등시켰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81.)

 

93) 루즈벨트가 3선에 성공하자, 힐만을 비롯하여 루즈벨트 정부에게 우호적이었던 노동조합원들이 루즈벨트를 강력하게 지지하기 시작했고,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 강철노동자조직위원회(SWOC), 그리고 고무노동자노동조합(United Rubber Workers)을 융합시키는 데 집중했고, 루이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거부하라고 강요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93).

 

94) 공산주의자들은 머레이, 힐만 등 루즈벨트와 협조하는 이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망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제기했고, 종종 국가방위중재위원회(National Defence Mediation Board: NDMB)의 명령에 저항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윈햄 모르티머(Wyndham Mortimer)는 이러한 집단 중에서 가장 유명했고, UAW 내에는 그의 견해를 따르는 많은 좌파들이 있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148).

 

95) 1941년 봄 CIO 노동조합 내 공산주의자들이 CIO 대표 머레이가 위원으로 속해 있던 국가방위중재위원회(NDMB)의 명령들에 반대하여 파업벌이자 머레이는 파업참가자들을 일터로 돌아가라며 해산시켰다. 머레이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새롭게 설립한 농기계ㆍ노동자․조직위원회(Farm Equipment Workers Organising Committee: FEWOC)를 억압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을 방해했다. 한편, 힐만은 방위산업들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기 위해 정부의 도움을 끌어들이는 데에 광분했다. 결국, 정부는 노동운동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하기 위한 첫 발포로서 잉글우드 (Inglewood)에 군대를 투입했다. 이때 해군장관(Secretary of Navy) 프랭크 녹스(Frank Knox)는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한 것을 변명하고자, “공산주의자들은 나라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힐만은 행정부에게 방위산업에서 공산주의자 출신의 노동자들을 해고하라고 촉구했다. 머레이는, 공산주의자들을 억압하도록 정부에 촉구하는 데에는 관심을 덜 가졌으나, 그 역시 CIO 조직 내의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그는 SWOC에 남아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뿌리 뽑는 일을 했고, 카레이가 25명의 CIO의 공산주의 조직가들을 해고했을 때에도 이를 묵인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145-155).

 

96)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213-220.

97)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180-185.

98) Roser Keeran, 같은 글, pp. 163-193.

99) Michael Yates, “Can the Working Class Change the World?”,

     http://www.monthlyreview.org/0304yates.htm 2004. 

 

100)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p. 290-291.

 

101)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302.

102)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294.

103) Roser Keeran, 같은 글, pp. 163-193.

104)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309.

 

105) 1955년에, 미국 공산당은 독립적인 좌파노동조합을 포기했다. 1954년 공산주의자 통제법(The Communist Control Act)은 정부에게 공산주의자 노동조합을 말살하도록 더 많은 권력을 부여했다. 법무장관은 체제전복자 활동통제를 위한 이사회 (Subversive Activities Control Board)를 열어서 공산주의의 지도를 받는 노동조합을 공표할 수 있었고, 그 노동조합들로부터 전국 노사관계법 (NLRA)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다. 겨우 20%의 노동조합원만으로도 새로운 비(非)공산주의 지도자 하에서 노동조합을 재결성할 수 있었고, 이 비(非)공산주의 지도자는 전국노사관계법 (NLRA) 및 전국노사관계위원회 (NLRB)와 계약이 가능했다. 그런데 AFL과 CIO에 가입된 노동조합들은 이 법의 효력에서 제외되었다. 이것으로 당 지도자은 이제 독립적인 좌파 노동조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고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Harvey A. Levenstein, 같은 책, p. 314).

 

106) Michael Yates, “Can the Working Class Change the World?”, http://www.monthlyreview.org/0304yates.htm.

 

107) David Bacon, “A Radical Vision for Today’s Labor Movement ― The Importance of Internationalism and Civil Right”, www.monthlyreview.org/090216bacon.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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