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일본 공산당의 변절 ― 체제 내 ‘건설적 야당’으로의 전락의 궤적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 ∣ 활동가집단 사상운동

번역: 편집부

 

 

[편집자 주] 이 글은 필자가 글머리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노동사회과학≫ 제4호를 위하여 특별히 집필해주신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독자들은 일본의 노동운동이나 일본 공산당의 궤적과 상태는 물론, 부르주아적으로 오염된 ‘맑스주의’, 그 어디 못지않게 우리 사회에도 만연한 그러한 ‘맑스주의’ 일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인 야마시타(山下勇男) 선생께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처음에

 

2010년 9월 9일에 ≪노동사회과학≫ 편집부로부터 그 제4호에의 기고를 의뢰받았는데, 아래 3가지 점이 제시되었다.

 

1. 일본 공산당의 ‘사민당화’ 및 사회당의 해체문제

2. 흐루쉬쵸프 이래의 쏘련의 수정주의와 중-쏘 논쟁, 그것이 국제적 전선에 미친 영향

3. 유럽의 ‘68혁명’의 계급적 성격과 노동자계급 운동에 미친 영향

 

이들 어느 하나하나 대단히 커다란 테마이고, 그 일부에 응하는 것조차 좀처럼 용이하지 않다. 1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노동운동 전반의 총괄과 관련된 테마이다. 2에 관해서는, 우리에게 일정한 인식이나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 공산당의 “사회주의에 관한 결의”에 자극을 받아, 그 “결의”가 연구과제로서 뒤로 미룬 중-쏘 논쟁에서 시작되는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분열, 그것이 세계의 혁명운동에 미친 파괴적 작용, 부정적 유산에 관해서, 1956년 쏘련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의 중-쏘 논쟁에 다시 되돌아가 기본문헌부터 재검증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잠시 시간이 필요하다.1) 3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일본]에서도 ‘68혁명’을 검증하는 논집이 출판된다고 하는 사정이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지금 일본에서의 그 결과에 관해서, 또한 유럽에까지 시야를 넓혀 이 문제를 논할 준비는 아직 되어 있지 않다.2)

필자는 ‘활동가집단 사상운동’의 소속 멤버이다. 이 원고를 설령 개인명의로 공표한다고 하더라도, 소속 조직을 떠나 자신의 의견을 진술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저한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1을 주로 “일본 공산당의 ‘사민당화’”3)로 좁히고, 또한 그것과 관련하여 “사회당의 해체문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편집부의 요청에 응하기로 하였다.

 

 

계급의식의 해체 상황과 그 지표

 

일본의 노동운동은 깊은 어둠 속을 방황하고 있다. 1974-75년 공황을 경계로 일본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위기를 노동자계급과 근로인민의 어깨에 전가하여 생(生)을 부지하려고 하는 독점자본의 위업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퇴각하고 있다―아니, 어쩔 수 없이 퇴각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가질 수 없는 상태로 되어 있다.

본래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선두에 서서 ‘전위’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해야 할 일본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의 세계관ㆍ역사관을 내던져 노동자계급의 당임을 그만두고, 도시소시민층에 영합하는 부르주아 의회당으로 변질해버렸다. 의회당으로의 변질과정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방기, 부르주아 민족주의에의 굴복과 언제나 표리(表裏)를 이루었다. 그것은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걸친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 반혁명의 승리를 단서로 하여 개시된 것이 아니다. 그 기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60년대 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 과정을 개관(槪觀)하기 전에 일본의 노동운동의 쇠약상을 말해주는 2010년 7월의 참의원 의원선거의 결과를 일별해두자.

일본의 입법기관은 중의원(衆議院)과 참의원(參議院)의 2원제를 두고 있다. 중의원의 임기는 4년, 정원은 484의석이고, 참의원의 임기는 6년, 정원은 242의석인데, 참의원은 3년마다 반수가 개선(改選)되는 구조이다. 참의원 선거는 도도부현(都道府縣) 단위의 선거구와, 전국을 1구로 하는 비례대표제로 이루어지고, 후자에서의 득표수ㆍ득표율ㆍ획득의석수는 각 당의 소장(消長[=쇠퇴와 성장])을 가늠하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오해는 없겠지만, 우리는 F. 엥겔스의 가르침에 따라, 보통선거에 나타난 민의를 인민대중의 정치적 성숙도를 가늠하는 척도(barometer)로 본다. 국회에 의석을 가진 두 개의 정치세력, 즉 일본 공산당과, 구 일본사회당으로부터 전환한 현 사회민주당은 이미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노동자계급의 당으로서의 실질(實質)을 잃은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당은 지배계급이 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헌법개악에 반대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두 당의 공동투쟁의 실현을 핵심으로 하여 헌법개악 저지라는 폭넓은 통일전선의 형성―그 중심축을 담당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노동자계급이 아니면 안 된다―을 목표로 내걸고 있다.

2010년 7월의 참의원 선거 ‘비례구’에서의 일본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성적은 아래와 같다.

 

 

득표수 (전번)

득표율 (전번)

의석수 (전번)

일본 공산당

356만 표 (441만 표)

6.1% (7.5%)

3의석 (3의석)

사회민주당

224만 표 (263만 표)

3.8% (4.5%)

2의석 (2의석)

580만 표 (704만 표)

5의석 (5의석)

 

두 당은 이 선거에서 역사적인 참패를 맛봤다.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구 일본 사회당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오랫동안 국회에서 헌법개악의 발의를 저지할 수 있는 3분의 1의 의석을 점하고, 득표수에서 1200만 표 대를 유지해왔다. 그 후속 조직의 하나인 사회민주당은 바야흐로 소수세력으로 전락하여 의회당으로서 존속할 수 있을지 어떨지의 고빗사위에 서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우리의 주요한 관심은 일본 공산당의 동향이다.

2010년 9월 25-27의 3일간, 참의원 선거의 총괄을 목적으로 열린 일본 공산당 제25회 당대회 제2회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시이 가즈오(志位和夫) 위원장이 ‘맺음말[結語]’에서 소개한 하부당원의 의견, “왜 국정선거(國政選擧)에서 고전이 계속되는 것인가, 이러한 고통이 계속되는 것인가, 이는 모두가 느끼고 있다”가 패배의 충격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패배시마다 득표수와 득표율, 획득의석수라는 3개의 지표를 적절히 구사하여, 전번에 비해서 어느 하나라도 신장된 수치가 있으면, “전진”이라며 그 장을 호도해왔던 지금까지의 총괄은 이미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중적 정치투쟁의 조직화와 그 최전선에서 싸워야 할 임무를 방기하고 모든 정력을 선거를 위한 당세 확장(기관지 ≪신문 적기(しんぶん赤旗)≫ 독자와 당원의 확대, 및 대중운동의 봉쇄)에 쏟아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이번 중앙위원회 총회는 다시금 당의 기본노선 자체에 메스를 가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의회당으로부터의 재전환(再轉換)이 불가능해진 지도부의 한계가 드러났다. 강령을 학습하고, 강령이 제시하는 ‘정치혁신’의 전망에 확신을 갖고, 어떻게 해서든 당세확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여, 내년의 전국 지방선거와 다가올 중의원 선거에서 퇴조세(退潮勢)를 만회해야 한다는 것을 하부당원에게 독전(督戰)하는 길 외에, 지도부에게는 다른 선택지(選擇肢)가 없었던 것이다.

 

 

국정선거와 당세확장에 매몰된 40년간

 

오로지 당세확장, 그것도 철저한 양(量)의 추구, 질(質)을 수반하지 않은 당세의 팽창, 따라서 그 한계는 이번에 비로소 노정되었을 리가 없다.

2단계혁명 전략에 선 강령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단 내부의 일체의 이론(異論)과 비판을 배제하고 당내 민주주의 대신에 관료적 통제를 도입한 1961년의 제8회 당대회에서 부르주아 의회당으로 전환하는 기초가 확립되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중국공산당ㆍ모택동 노선과 결별한 1970년의 제11회 당대회에서 이 전환이 완성된 이후 과거 40년간의 당세 및 국정선거의 추이를 되돌아보면, 기본노선의 재검토, 재전환의 기회는 여러 차례 있었다.

1970년대 이후 대회 때마다 대회의 성공을 위해서 씨름해온 당세확장 운동은, 일시적으로 성과를 올리지만 대회 후에는 곧바로 도로 나무아미타불,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내리막에 제동이 걸리지 않게 된 사실을 상기하자. 1984년에 열린 제16회 당대회 제7회 중앙위원회 총회는 과거 10년간의 성적을 “국정선거에서의 10년간의 ‘일진일퇴’”라고 총괄했다. 이번의 참패를 총괄하면서 현 지도부는 이러한 과거와 경과를 결코 되돌아보고 있지 않다―아니, 되돌아보고 있지 못한 것이다.

40년이 경과하면서, 단 한번, 일본 공산당에 정권참여의 기회가 돌아왔다고 지도부가 착각할 만한 사태가 일어났다. 1998년 참의원 선거의 비례구에서의 820만 표(득표율 14.6%, 전번 대비 433만 표 증가)의 획득이 그것으로, 지도부는 당의 역사상 “최고봉에 도달”했다며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데] 그것은 일본 공산당의 실력과는 무관한, 명백한 사건에 불과했다. [그때는] 때마침 자유민주당 정권의 경제대책에서의 ‘실정(失政)’, 정치자금을 둘러싼 새로운 불상사나 대장성(大藏省[=재무성]) 관료의 독직사건의 발각 등이 거듭되어 대중의 정치불신이 극도로 높아진 시기였다. 예전부터 사용돼온 표현으로는 부동표(浮動票), 당시에 빈번히 사용된 표현으로는 이른바 무당파층(無黨派層)의 표의 일부가 일본 공산당에 던져졌던 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매스컴 보도의 하찮은 방향 변화로 어떻게든 조작과 유도가 가능한 포퓰리즘 현상이 대중의식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우리의 관측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일본 공산당의 득표는 다음 번 2001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433만 표로 반감(半減), 1995년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일본 공산당의 성적은 그 후 계속해서 400만 표 대에서 낮게 떠돌고, 2010년에는 40년 전인 1971년의 수준인 322만 표로 되돌아가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1998년의 일시적인 ‘성공’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그것은 이 당으로 하여금 부르주아 의회당 그것으로의 변질을 완성하게 한 전기(轉機)가 되었다. 민주당(현재의 집권당인 민주당의 전신) 주도의 연립정권에 참가하리라는 기대가 갑자기 높아졌다. 1970년대의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민주연합정권’을 수립한다고 한 제11회 당대회의 노선은 벌써 오래 전에 무너져 있었다. 부르주아 정당들, 그들의 이데올로기 기관인 매스컴은 일제히, 일본 공산당이여 현실정당이 되어라, 강령을 바꿔라 하고 일본 공산당 지도부를 압박했다. 일본 공산당 지도부는 민주연합정권 수립의 전단계로서의 ‘잠정정권(暫定政權)’ 구상을 발표하여, 당의 생명선이었던 일미안전보장체제로부터의 탈각(脫却)을 보류하고, 아울러 자위대를 용인함으로써 부르주아 기관들의 요구에 항복했다. 지배계급에게는 일본 공산당을 연립정권에 참가시킬 의사 따위는 애초부터 털끝만큼도 없었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 무해한 존재로 길러내기만 하면 좋았던 것이다. 일본 공산당 지도부는 이 올가미에 감쪽같이 걸려들어 버렸다.

2000년에 열린 제22회 당대회에서는, “일본 공산당은 일본의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다”라고 명기된 규약 ‘전문(前文)’이 삭제되었다. 규약 본문 제1장 “일본 공산당의 명칭, 성격, 조직원칙”은 “노동자계급의 당임과 동시에 일본국민의 당”이라고 규정을 고치고 “국민이 주인공”, “다수자 혁명”의 입장을 천명하여, 노동자계급의 당으로부터 “국민의 당”으로의 전환을 정당화했다. 대회 후의 기자회견에서 지도부는 차기대회에서의 강령개정을 예고했다. 이렇게 하여 2003년에 열릴 예정이었던 제23회 당대회를 앞두고 강령개정 준비가 시작되었다.

후와 데츠조(不破哲三) 중앙위원회 의장이 강령개정을 위해서 맨 먼저 손을 댄 것은, 맑스주의 기본문헌의 재해석―이라고 듣기 좋게 들리지만, 사실은 맑스주의로부터 일체의 혁명성을 제거하고, 맑스ㆍ엥겔스를 온건한 민주주의자ㆍ공화주의자로 꾸미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많은 수의 논문과 저작을 발표했다.

제23회 당대회에 제출된 강령 개정안의 특징은, 첫째로, 일련의 개량을 쌓아감으로써 “룰(rule) 있는 자본주의”를 수립하는 “민주적 개혁” 노선을 정식화한 것, 결국 ‘혁명’은 이미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둘째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의 민주적 개혁이 한계에 달한 시점에서 국민이 (투표로) 결정하는 것으로 되었다. 사회주의적 변혁은 혁명적 비약을 수반하는 일 없이 실현된다. 자본주의의 모순의 끊임없는 폭로나,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선두에 서서 노동자계급을 계급으로서 도야(陶冶)하기 위한 사상투쟁, 원래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주체로서 단련해내는 공산주의자로서의 책임은 내던져졌다. 셋째로, 현대세계의 기본구조, 현대사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제국주의론을 카우츠키주의적([즉,] 제국주의=현대자본주의의 ‘정책’[이라는 식])으로 개찬(改竄)한 것. 독점자본주의 이콜(equal) 제국주의가 아니다!

현재 침략전쟁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닌가가 제국주의인가 아닌가를 판정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이 기준에 따르면, 침략전쟁을 수행 중인 아메리카[=미국]는 제국주의이지만,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 프랑스나 독일은 제국주의가 아닌 것으로 되었다. NATO군의 일익(一翼)으로서의 프랑스ㆍ독일의 대(對)유고슬라비아 침략전쟁에의 개입, 아메리카 제국주의의 ‘유지(有志)연합’의 일익으로서의 아프가니스탄에의 참전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일본 공산당이 비과학적인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장을 가지고 맑스ㆍ레닌주의와 절연하고, 이를 당의 역사로부터 추방한 순간이었다.

 

 

전후사(戦後史)에서의 일본 공산당과 일본사회당

 

이야기의 선후가 뒤바뀌게 되지만, 일본 공산당과 일본사회당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일언하여 두자. 일본 공산당이 부르주아 의회주의 노선으로 경사됨에 따라서 본래 의회당인 일본 사회당과의 사이에서 노동자계급의 표 쟁탈전을 연출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의 노동조합운동은, 그 형성기(形成期)에는, 일본 공산당이 지도하는 전일본산업별노동조합회의(全日本産業別労働組合会議,=産別会議)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미 제국주의의 초기 점령정책은 1947년부터 48년에 걸쳐서 일본 공산당을 탄압하고 반공세력을 육성하는 것으로 바뀌고, 산별회의를 와해시키면서, 일본 사회당과 결탁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日本労働組合総評議会, =総評)가 1950년에 결성되었다. 점령당국의 후원을 받아 산별회의를 파괴한 총평―일본사회당 지도부에 대한 일본 공산당의 원한과도 같은 증오의 감정은 두고두고 꼬리를 끌게 되었다.

일본 사회당이, 특히 그 좌파부분이 총평을 무대로 일본의 노동조합운동을 견인한 시대는 1950년대 중엽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일본 공산당은 그 동안 ‘사회당-총평 블록’에 뒤처지는 위치에 있었다. 일본 공산당의 기본노선의 의회주의=선거지상주의로의 전환은 노동자계급 표의 쟁탈전, 일본 공산당계와 일본 사회당계로의 분단의 고착화로 연결된다. 그것은 또한 노동조합ㆍ청년조직ㆍ여성조직 등등, 대중조직의 모든 전선에서 균열을 넓혔다.

공산주의자라면,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든, 대중투쟁의 선두에 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1960년대 이래 일본 공산당은 이 의무와 책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아니 오히려, 수행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1964년의 춘계투쟁(춘투)에서 총평이 계획한 4월 17일의 총파업(제네스트)에 즈음하여, 중국 공산당 편향의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고 있던 당시의 일본 공산당 지도부는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으면서도 노동자의 임금인상 요구밖에 내걸고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총파업 계획의 재고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공산당은 이윽고 이 총파업을 “미 제국주의가 꾸미는 도발파업”으로 규정하게 되고, 총평 내에서 총파업을 결행할 준비를 해나가고 있던 하부당원을, 돌연 총파업 중지 활동으로 몰아가는 공작을 전개했다. 또한 1973년의 춘투에서 계획된 총파업에 교육노동자가 하루 온종일 파업에 참가하는 계획에 반대하여, 부모ㆍ국민과 단결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어, 본부의 지령에 반하여 파업파괴 보안요원을 독자적으로 배치하는 배신을 저질렀다. 1975년에 공공기업체ㆍ공무원 노동자가, 미국의 점령 하에서 초법규적으로 박탈당한 파업권을 파업으로써 탈환하려고 했던 투쟁에 즈음해서는, ‘자신들은 협의를 받은 바 없다’, ‘국회에서 심의해야 한다’며, 방관자적 태도를 취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선거지상주의의 입장에서 당세확장과 선거에서의 표를 목표로 뒤떨어진 대중의식에 영합하는 정치자세는 1960년대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공산당을 관통하는 중대한 오점(汚點), 부정적 유산을 구성하고 있다.

일본 사회당의 해체는 이 당을 그 뼈대로서 지탱해온 총평의 쇠퇴, 특히 1975년의 파업권(罷業權) 파업의 패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1980년을 전후한 시기, 영국에 대처 정권이, 미국에 레이건 정권이 등장하고, 이에 연동된 형태로 일본에 “행정개혁”(나중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기치로 하는 나카소네(中曾根) 정권이 등장했다. 공공기업체, 그 중에서도 일본국유철도(국철)의 ‘적자경영’을 표적으로 한 ‘분할ㆍ민영화’ 공격, 즉 국철 나아가서는 총평의 핵심적 존재였던 국철노동조합(国労, [=고꾸로])의 파괴를 통한 총평의 해체, 독점자본의 지배기구로 편입된 민간중화학산업의 ‘노동조합’에 의한 전국 제패(制覇)가 추진되었다. 과정을 생략하자면, 국철은 1987년에 해체되었는데, 고꾸로(国労)는 그 사이 매스컴으로부터 ‘국적(國賊)’ 취급이라는 몰매를 맞고, 제멋대로의 국가적 부당노동행위 끝에 결국 군소조합으로 전락되어, 총평 해체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일본 사회당은, 그것을 떠받쳐온 총평의 쇠퇴와 우선회(右旋回),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日本労働組合総連合会, =連合, 렌고) 결성에의 합류와 함께,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걸친 세계적인 격동, 즉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 반혁명의 승리로 끝나는 세계사적 동향 속에서, 급속한 지반침하가 진행되었다. 낙양(落陽)의 일본사회당은 지배계급이 놓은 함정에 빠졌다. 1993년에 장기집권의 좌(座)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자유민주당[자민당]은 이듬해인 94년에 일본 사회당을 포섭,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위원장을 수반으로 삼아 정권의 좌에 복귀했다. 무라야마 수상은 연립정권 발족 후의 국회에서 사회당의 이념에 반하여 자위대 합헌과 일미안보조약 견지를 언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95년의 당대회에서 이 무라야마 발언을 추인하는, 기본노선의 대전환을 단행했다. 마침내 무라야마 정권은 3%에서 5%로의 소비세율의 인상이라고 하는 선물까지 남겨두고 재임 1년 반 만에 수상자리를 자유민주당에 명도하고, 스스로 무너지는 길을 더듬었다.4)

이에 대하여 일본 공산당 지도부는, 사회당-총평 블록의 해체과정을 일본의 노동운동 총체의 위기로 파악하고 반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김이 닿는 산하의 노동조합을 그러모아 별개의 내셔날 센터 전국노동조합총연합(全国労働組合総連合, =全労連)을 결성하는 분열주의로 내달렸다. 일본 공산당 지도부가 기대했을, 일본 사회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회당 지지표 긁어모으기는, 기대가 어긋나, 허망한 꿈으로 끝났다.

 

 

여당(與黨)이 된다는 환상에 이끌린 ‘야당외교’의 전개

 

다시 1998년으로 돌아간다. 1998년을 기점으로 일본 공산당의 국제 활동에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야당외교(野黨外交)’의 개시가 그것이었다.

어느 날 기관지 ≪적기(赤旗)≫의 지면을 열고, 후와 데츠조(不破哲三)의 연재 르포르타주 “튀니지의 7일간”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2003년). 왜 튀니지인가?

그 나라의 공산주의자와 교류하기 위해서 원로(遠路)를 마다않고 떠난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집권당과 교류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일본 공산당은 수년마다 열리는 아시아정당국제회의(ICAPP)―거기에는 아시아 국가들의 집권당을 포함한 정당들이 얼굴을 내민다―에 반드시 출석하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과는 오랜 중단을 거쳐 관계를 수복한 1998년 이후 이론교류ㆍ이론회담과 같은 형식으로 내왕하는 기회가 증가해 왔다. 교류는 베트남 공산당이나 쿠바 공산당과도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그러나 공산당ㆍ노동자당 간의 교류와 연대, 협력과는 차원을 달리한, 상대가 집권당이기 때문에 일본 공산당 측에서 벌이는 ‘야당외교’의 일환임이, 대회에서 채택된 문서를 통해서 차차 명백해졌다. 결국 1998년의 선거에서 ‘대약진’하여 ‘여당이 된다’는 염원을 달성할 수 있다고 착각한 이래, 장래 ‘여당’이 되기 위한 준비로서 ‘야당외교’가 위치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5)

1998년에 ≪공산당 선언≫ 150주년과 그리스 공산당 창립 80주년을 기하여 그리스 공산당이 호소했던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가 아테네에서 소집되었다. 이듬해인 99년부터 그리스 공산당의 주도로 2년마다 1회,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가 열리게 된 것은 주지하는 대로이다.6) 회의는 애초의 아테네에서 민스끄(벨라루시), 리스본, 상파울루, 뉴델리로 회의장을 옮기면서 지구를 일주하고, 12년째를 맞는 금년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되어 있다. 그리스 공산당의 국제주의적 공헌이 서서히 결실을 맺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재결집이 곤란들을 극복하며 전진하고 있다. 그리스 공산당 제17회 당대회(2005년)의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상황에 관한 결의”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국제공산주의 운동은 “조직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도 뿔뿔이 흩어진 채”이고, 내부에서 “혁명적 공산주의자의 견해와 개량주의ㆍ기회주의의 견해”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재결집은 개시되었다. 일본 공산당이 “공산당”을 이름으로 내세우는 이상, 이 회의에 계속 출석하고, 주저 없이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도리이다. 제1회 회의에 유럽 주재의 ≪적기≫ 특파원을 파견했었지만(실제로는 사태 관망), 일본 공산당은 그 이후 회의를 계속 묵살해왔다. 2007년의 민스끄부터, 그때까지 옵저버로 참가했던 중국 공산당이 정식으로 참가하기에 이르러 묵살할 수만은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겠지만, 2009년 4월에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현재의 국제금융위기와 맑스주의”를 주제로 하는 일중(日中)공산당 제3회 이론회담에서 대표단장을 맡은 후와 데츠조 씨는, 의도적으로 회담의 주제로부터 벗어나,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와 그리스 공산당을 사실을 왜곡하여 비방중상하는 발언을 했다(不破哲三著, ≪激動する世界はどこに向かうか―日中理論会談の報告≫, “スターリン時代礼讃の一潮流について”, 新日本出版社,2009年 9月刊). 이것이,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등을 돌린 지 40년 후에 다다른, 일본 공산당의 말로였다.

 

 

부르주아 의회당으로의 변절의 전사(前史)

 

일본 공산당이 여기에 다다르게 되는 전사(前史)를 간략히 더듬어두자.

1961년의 제8회 당대회 이후 1960년대 전반기에 일본 공산당은 이미 공공연해지고 있던 중-쏘 논쟁의 와중에서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 노선에 밀착하여 쏘련 공산당=현대 수장주의 비판으로 급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제8회 당대회는 일본의 현상을 “미 제국주의에 의한 반(半)점령, 사실상의 종속국”으로 파악하고, 당면한 혁명의 성질을 2개의 적, “미 제국주의와 이에 종속하는 일본 독점자본”을 타도하고, 진실한 독립을 달성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한 2단계 전략을 채택했다. 거기에는 모택동의 반미ㆍ민족주의 노선―그것은 1960년대의 “반미ㆍ반쏘”를 거쳐, 1970년대의 “쏘련 주적”론으로 변모해간다―과 서로 공명(共鳴)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쏘련 공산당과의 관계가 파국을 맞는 것은 1964년의 부분적 핵무기 금지조약의 국회 비준에서였다. 국회의원이자 당의 최고지도부의 멤버이기도 했던 시가 요시오(志賀義雄)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작가)가 일본 공산당의 방침에 반하여 찬성표를 던진다고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지도부의 다수파는 쏘련 공산당의 “간섭”을 격렬하게 비판함과 함께, 시가(志賀)ㆍ나카노(中野) 그리고 그들과 이어진 당원의 제명처분으로 대항했다. 두 당의 관계는 절연상태에 빠졌다.

일본 공산당은 1965년 9월의 인도네시아 공산당 사건, 이른바 9ㆍ30사건7)이 일어나자, 모택동 노선을 추수(追隨)하는 위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겠지만, 돌연 중국 공산당과의 대결로 나아갔다. 이 전환은 재차 당내투쟁으로 파급되어 모택동파의 제명(1966년)으로 발전했다. 모택동은 때마침 프롤레타리아트 문화대혁명을 발동(같은 해)했다. 무장봉기를 혁명투쟁의 기본 형태로 내세우는 가운데, 베이징에 체재 중이던 일본 공산당 간부가 홍위병의 규탄을 받게 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두 당의 관계는 냉각화의 한 길을 더듬었다. 우리가 부르주아 의회주의 노선의 완성이라고 규정하는 1970년의 제11회 당대회는 선행하는 모택동 노선과의, 나아가서는 당내의 모택동파와의 격렬한 비난과 응수, 결별을 통해서 준비된 것이었다(예컨대, 1967년 4월 29일 ≪적기≫ 평론원 논문 “극좌기회주의자의 중상과 도발” ― 이 논문의 필자는, 전후관계로 보아, 명백히 후와 데츠조 씨였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경과를 더듬어 쏘련 공산당 및 중국 공산당과 몌별(袂別)하고, “자주독립”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일본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등을 돌리는 전환의 슬로건이 되었다. 1960년대 전반기에 중-쏘 논쟁이 공공연해지고, 당과 당 사이의 논쟁의 수준으로부터 국가 간의 대립ㆍ충돌로 발전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이 세계 혁명운동에 미친 파괴적인 작용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 대결 구도를 풀어 일치점을 구하는 공동투쟁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힘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상태를 전제로 하고 고착화하는 쪽에 몸을 두는 것을 의미했다. 베트남 인민이 항미구국(抗米救国)의 민족해방투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서로 반목하는 쏘련과 중국을 자신들의 투쟁 쪽으로 끌어당기고,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힘을 배경으로 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운동, 민족해방투쟁 세력들―세계의 3대(大) 혁명 조류―을 단결시켜 투쟁을 승리로 이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정신과 그것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전기(轉機)가 된 1980년대의 국제적 사건들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몌별한 일본 공산당의 “자주독립” 노선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1980년대 초에 일어난 2개의 국제적 사건들―아프가니스탄 문제와 폴란드 문제―과,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걸친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반혁명의 승리)에 대한 일본 공산당의 반응에, 간단히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공산당은 1991년의 쏘련 붕괴에 즈음하여, “역사의 거악(巨惡)” 쏘련의 붕괴를 “쌍수를 들어 열렬히 환영”했다. 사회주의의 미래를 개척하는 전도(前途)에 가로놓여 있는 장해가 제거되었다고까지 단언했다. 이 견해가 얼마나 몰계급적이고 반노동자적이었던가는 그 후 20년을 거친 세계의 현실, 특히 노동자계급이 내던져진 비참한 현실이 무엇보다도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매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내던진 일본 공산당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고 하는 2개의 체제가 병존하면서 혁명과 반혁명이 서로 투쟁하는 세계구조를 인식할 수 없었다. 제국주의 진영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하여 음으로 양으로 압력을 가하고, 사회주의 건설에 따라다니는 결함과 오류를 포착해서는 간섭과 개입을 기도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내부에 존재하는 부단결(不団結, [분열])이나 알력을 최대한 이용했다. 그렇지만 일본 공산당은, 2개의 초대국 미국과 쏘련이 세계의 분할ㆍ지배를 둘러싸고 서로 다투고 있다고 보는, 모택동 시대의 중국 공산당의 세계구조 인식을 의연히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이다.

위태로워진 아프가니스탄 4월 혁명(1978년)을 구출하기 위한, [아프가니스탄 혁명정부8)의] 요청을 받아들인 쏘련군의 출동(1980년)은, 4월 혁명의 의의를 인정하는가, 인정하지 않는가에서 견해와 입장이 크게 나뉜다. 쏘련을 증오하는 감정이 일본 공산당 지도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미 제국주의에 의해서 훈련되고, 파키스탄을 경유하여 투입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9)에 의한 반혁명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의 정치적 미숙, 당내의 불모의 파벌항쟁이 4월 혁명을 궁지에 빠뜨리고 있었다. 매스컴은, 바로 이때다 하고, 쏘련의 “침략”을 소리 높여 비난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야루젤스끼(Wojciech Jaruzelski) 정권이 비상계엄령(1981년 12월)을 선포했을 때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폴란드 사회주의가 위기에 빠진 원인은, 일본 공산당 지도부가 말하는 것처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이 쏘련에 대하여 “자주독립”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하고 쏘련이 말하는 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 따위는 아니었다. 폴란드는 사회주의공동체국가들(세프[SEV]10) 가맹국들)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기에레끄(Edward Gierek) 정권이 서둘러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제원조”에 의한 공업화를 시도하여 거액의 채무를 껴안게 되었다. 바웬사(Lech Wałęsa)의 ‘연대(Solidarity)’가 물심양면으로 제국주의의 전면적 지원을 받고 있었음은 나중에 밝혀졌다. 기에레끄 정권의 실정(失政)의 결과, 반혁명 세력이 마구 설치는 위기적 상황에 직면하고, 뒤를 이은 야루젤스끼 정권은 사회주의 방어의 필요성에 어쩔 수 없이 구국군사평의회(救國軍事評議會)에 의한 권력의 일시적 장악과 비상계엄령의 선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주의 진영은 이 기회를 틈타 세계의 모든 부르주아 기관을 동원한 반공ㆍ반사회주의 프로파겐다를 전개하고, 그리하여 이 사태에 직면한 세계의 공산당ㆍ노동자당은 스스로의 태도 결정을 압박받았다. 이때 일본 공산당은 부르주아 기관들이 내지르는 정보조작에 질질 끌려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라며, 쏘련과 폴란드 정권 비난의 대합창에 가세했다. 사회주의 건설을 올바른 궤도에 복귀시키기 위해서, 저질러진 오류를 척결하면서 과제를 공유하는 동지적 입장과는 전적으로 무연(無緣)한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일본 공산당이 부르주아 의회주의 노선―레닌이 우익 기회주의인 멘쉐비끼에게 쏘아붙였던 “의회주의 백치(Kretin)병”―으로 전환하고 나서 반세기가 지났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로의 노선의 전환은 부르주아 민족주의로의 경사(傾斜)와 언제나 표리를 이루었다. 양자(兩者)는 서로 보완하면서 이 당으로 하여금 마침내 부르주아적 가치관을 수용하고 또한 보급하는 체제 내 야당으로 변질시켰다. 자유민주당으로부터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 본격적인 보수 양당체제―노골적인 부르주아 독재체제―를 성립시킨 2009년의 중의원 선거 후, 일본 공산당은 스스로의 정치적 태도(stance)를 적절하게도 “건설적 야당”이라고 불렀다.

일본 공산당은 지금, 부르주아 의회당으로의 전환을 일관되게 추진해왔기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고 있다. 현 지도부에게는 그러한 자각은 없다. 설령 얼마간의 자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재전환이 불가능할 정도로 깊이 빠져버렸다. 하지만, 진짜로 비싼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은, 일본 공산당의 이러한 변절을 통해서 내일로의 문이 닫혀버린 일본의 노동자계급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형성을 위한 토양을 일구는 <사상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 공산당의 재생을 지향해온 우리 자신의 패배이기도 했다.

밑바닥 없는 늪으로부터의 탈출이 시급하다. 그를 위해서는 노동운동을 기초부터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데, 길은 험하고 또한 멀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해야 할 것, 할 수 있는 것을 위해서 지금은 단지 전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노사과연

 


 

1) “필자의 내심에는 있지만 이 책에서는 표출되지 않은 것에,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방정책―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노선을 평가ㆍ검토하는 과제가 있다. 이것은 헝가리에 이어 중국이, 쏘련의 뻬레스뜨로이까와 나란히, 아니 오히려 그에 선행하여 씨름해온 것으로서, 그 평가ㆍ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지론이지만, 중국혁명사 및 중-쏘 논쟁 → 중-쏘의 분열과 대결에 대한 평가와 검토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그리스 공산당의 선구적인 시도에서도 아직 거의 빠져 있는 것으로서, 아시아의 우리들에게 부과되어 있는 중요한 이론적 과제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武井昭夫狀況論集 1980-1993 社會主義の危機は人類の危機≫, スペース伽耶, 2010年4月刊, “서문”.)

 

2) 세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친 일본의 정세에 관해서 우리의 인식의 일단을 말해둔다. 이 시기의 일본은, 1970년의 일미안전보장조약(日米安全保障條約)의 자동연장을 둘러싼 공방을 배경으로, 베트남 반전투쟁이나 전국 학원투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해당된다. 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이 끝나고, 인플레이션의 앙진이나 ‘공해’의 다발 등, 고도성장에 수반한 모순이 분출되고 있었다. 학생이나 청년 노동자의 의식의 급진화, 그들의 행동양식에서의 일견 화려함의 그늘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올바른 방향이 상실되고 있었다. 본래 직장ㆍ생산의 장에서 조직되고 파업을 축으로 발휘되어야 할 청년 노동자의 투쟁 에너지가 가두주의(街頭主義)로 밀려갈 위험이 운동을 뒤덮고 있었다. 매스컴이 방류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침식되어 맑스주의의 통속화가 진행되고, 실존주의적이고 아나키스틱한 심정주의가 학생이나 청년 노동자를 장악하여,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해체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3) 편집부로부터 “일본 공산당의 ‘사민당화’”라는 정식이 제시되었지만, 우리는 일본 공산당의 현상을 이렇게 규정한 일이 없다. 이 정식이 그에 이어지는 “일본사회당의 해체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얘기되고 있다면, 일본 사회당의 성립사의 한 단면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사회당의 역사는 좌우 항쟁의 역사이다. 좌우 사이에서 이합집산을 반복해온 역사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우리가 일본 사회당을 사회민주주의당이라고 일괄해오지 않았던 것은, 이 당의 좌파부분이, 제2차 세계대전 전부터, 말하자면 노농파(勞農派) 맑스주의(일본 공산당에 대립하여 1927년에 창간된 잡지 ≪노농(勞農)≫에 결집한 집단)의 전통을 계승하고, 전후(戰後)에 관해서 말하자면, 1950년대 중엽부터 70년대 중엽까지, 결국 좌파의 전성기의 일본 공산당으로 하여금 유럽의 사회민주당과 구별되는 특이한 존재이게끔 해왔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당의 해체, 사회민주당으로의 전환(1996년) 후 이에 반대한 좌파는 ‘신사회당’을 결성했다. 노농파 맑스주의의 전통은 지금 이 당의 일부에 계승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 사회당의 어느 시대와 비교하는가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일본 공산당의 변절상은 1950년대 중엽에서 70년대 중엽까지의 일본사회당의 정치적 태도(stance)를 넘어, 그것보다 훨씬 우측에 위치해 있음을 부언해둔다.

 

4) 제2차 대전 후 일본사회당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은, 1947년의 가타야마(片山) 정권 이후, 이것이 두 번째였다. 가타야마 내각의 성립은 트루먼 독트린(공산주의 봉쇄정책)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냉전정책의 개시기(開始期)에 해당했다. 피폐한 경제의 부흥, 극동에서의 반공의 보루로서의 일본 독점자본주의의 재건을 점령당국으로부터 위임받은 가타야마 내각은, 노동자의 임금을 물가상승률 이하의 수준으로 고정하고 독점자본에게 충분한 이윤을 보장하는 정책을 수행했다. 가타야마 내각은 노동공세의 파도에 시달려 겨우 8개월여 만에 그 막을 내렸다.

 

5) 여당-야당이라고 하는, 부르주아 의회의 집권당과 비집권당의 관계에 갇힌 발상 그 자체가 부르주아 독재의 본질을 은폐하는 무궁화나무 잎인 의회민주제를 미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본래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6) [역자 주] 실제 이 국제회의는 1998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7) 9ㆍ30사건은, 수카르노(Sukarno) (대통령) 친위대의 운톤(Untung Syamsuri) 중령 등이 CIA가 조종한 장군평의회의 반(反)수카르노 쿠데타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일으킨 군사행동이다. 익일인 10월 1일에 수하르토(Suharto)나 나수치온(Abdul Harris Nasution) 장군 등이 이끄는 군부와 반공 이슬람 세력이, 당시 개발도상국에서 최대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공칭 150만 명)에, 일거에 재건 불가능할 정도까지 타격을 가했다. 이 당은 결코 사건의 주모자가 아니라 말하자면 언걸을 입은 피해자였다. 이 사건으로 300만 명을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 후 45년,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이 타격으로부터 아직도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있다. 당시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수카르노가 주창하는 나사콤(NASAKOM) 체제(NASAKOM은 민족주의[NASionalisme(=‘nationalism’)]ㆍ이슬람교[Agama(=‘religion’)]ㆍ공산주의[KOMunisme(=‘communism’)]의 통일과 조화라는 의미)의 내부에서 당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사건 후 수하르토의 독재체제가 수립되고, 나사콤 체제는 붕괴되었다. (佐々木辰夫 著, ≪アフガニスタン4月革命≫, スペース伽耶,2005年 10月刊).

 

8) [역자 주] 유엔에 가입하고 있던 대부분의 국가가 이 정부를 합법정부로 승인하고 있었고, 한국 정부 역시 그랬다.

 

9) [역자 주] 현재의 탈레반은 그 후신이다.

 

10) [역자 주] 일반적으로 COMECON 혹은 CMEA로 알려진, 공산권의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tsance, 1949년 결성)를 가리키며, SEV는 러시아어의 약칭이다. 불가리아, 헝가리, 동독, 몽고(62년 가맹), 폴란드, 루마니아, 쏘련, 체코슬로비키아의 8개국이 가맹국이었고, 유고, 베트남, 쿠바, 조선 등은 옵서버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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