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유로꼬뮤니즘의 배반과 타락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이 움켜쥘 정치적 결론은 무엇인가?

 

   전백철현국노동자정치협회 회원

 

 

1. 왜 지금 유로꼬뮤니즘 비판인가?

 

유로꼬뮤니즘은 철지난 한때의 유행이었는가? 유로꼬뮤니즘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가 이제는 폐기되고만 과거의 노선에 불과한 것인가?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이탈리아 공산당의 이른바 “역사적 타협(compromesso storica)”, 프랑스 공산당의 “좌파연합(union de la gauche)”, 그리고 스페인 공산당의 정권도전이라는 1차적 목표가 실패로 끝나면서, 유로꼬뮤니즘 자체도 폐기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10년도 채 되지 않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현실사회주의체제가 붕괴했다. 그에 따라 이들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의 유로공산당들도 다른 대부분의 공산당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1)

 

유로꼬뮤니즘이 이처럼 한때의 철 지난 유행이고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면 지금 와서 한국 사회에서 유로꼬뮤니즘을 비판하는 것이 학문적 의미 외에 무슨 실천적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유로꼬뮤니즘의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과 유로꼬뮤니즘을 한 측면에서만 보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다. 유로꼬뮤니즘 공산당들이 집권에 실패하고 프랑스 공산당이 제2차 대전 이후 28%나 의석을 차지했다가 지금은 5% 이내로 의석이 줄어들면서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데 실패하고, 의회주의 노선으로 타락했다는 측면에서 유로꼬뮤니즘이 쇠퇴했다고 한다면 일정 정도 맞는 말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집권에 실패하고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좌파 민주당’으로 바꾸고 국민정당으로 변모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도 유로꼬뮤니즘은 쇠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서 이렇게 물어보자! 사회민주주의는 쇠퇴했는가? 독일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이 1차 대전을 앞두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선을 폐기하고, 배외주의적인 정당으로 타락하고 이후 집권하여 독점자본의 좌파역할을 수행하며 노동자계급을 탄압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보루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사회민주주의 노선은 쇠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노선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추악한 국민정당 노선으로 변모하여 독점자본주의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되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통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 노선은 여전히 각국 개량주의 당들의 지배적인 노선이 되고 있다.

‘자본주의 구조개혁론’, ‘혁명으로 가는 각국의 길’이라는 평화이행 노선을 내걸고 있는 유로꼬뮤니즘은 대중적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하면서 그 노선의 공상성, 반노동자성이 폭로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로꼬뮤니즘 노선은 폐기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유로꼬뮤니즘 노선은 유럽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등 자본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일본, 미국, 캐나다, 영국 공산당2) 등 대다수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과, 심지어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 공산당 내에서조차 지배적인 노선이 되고 있다.

이 점에서 유로꼬뮤니즘 노선은 폐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퍼렇게 살아남아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과 정치적 전망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 노선은 쏘련 붕괴 이후에는 한국에서도 사회주의의 다원주의, 평화적 이행노선, 민주적 사회주의 등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폐기하고 ‘신노선’을 제기하는 것으로 유행하였고 이것이 민중당, 한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진보정당추진위 등으로 이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진보정당의 개량주의 노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마치고 있다. 지금은 입에 발린 사회주의 노선조차도 걷어치우고 노골적인 반공주의 투사가 되어 한국의 베른슈타인임을 자처하고 있는 주대환도 처음에는 ‘민주주의와 함께 가는 사회주의’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폐기하고 유로꼬뮤니즘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진보신당 내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신좌파’들도 직접적으로 유로꼬뮤니즘노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구조개혁론’이라는 노선으로 살아남아 있고, 민주노동당 내에도 ‘진보적 민주주의’ 변혁론이라는 이름으로 활개치고 있다. 심지어 맑스주의 정당임을 주장하고 있는 <평등연대>(현재 해방연대)에서도 2003년에 한때는 ‘사회주의로 가는 우리의 길’(평등연대 의장 성두현)로 ‘국가기구 변형론’3)이라는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제창하기도 했다.

유로꼬뮤니즘의 특성은 이후에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반스딸린주의’라는 이름으로 쏘비에뜨 노선에 반대하는 반쏘, 반공주의를 특성으로 하고 있다. 한국 사회 운동진영 내에서도 ‘스딸린주의’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반쏘, 반공노선이 국가자본주의진영뿐만 아니라 운동진영의 전반적인 풍토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점은 유로꼬뮤니즘이 내세우는 ‘반스딸린주의’, ‘반쏘비에뜨 노선’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때문에 한국의 좌파진영 대다수에서도 ‘반스딸린주의’라는 명분으로 중앙집권계획을 반대하고 분산화된 계획을 옹호하면서 사회주의 생산과 경제의 핵심 원칙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스딸린주의 비판’이 ‘스딸린=악의 화신’, ‘스딸린주의 인민전선=스페인 혁명과 중국혁명 패배원인’, ‘스딸린주의 관료주의=쏘련 붕괴의 원인’, ‘스딸린=자본가’라는 비과학적이고 몰역사적인 비판이 판을 치고 있는데 사회주의를 실질적으로 건설하던 스딸린 시대에 대한 맑스-레닌주의적 평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4)

스딸린 시대에 대한 비과학적, 몰역사적인 평가는 흐루쉬쵸프의 쏘련 공산당 20차 대회 비밀연설에서의 스딸린 ‘개인숭배’ 비판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유로꼬뮤니즘의 대두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은 러시아 사회에서 문화적, 기술적, 역사적으로 짜리즘 체제가 물려놓은 후진적인 조건과 내부의 반혁명 공세, 제국주의 포위와 무력공세,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하는 객관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딸린 시대에는 사회주의 건설의 성과뿐만 아니라 집산화 착수시기와 전반적인 방향에서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의 중농과의 동맹을 해쳤던 오류, 지나침, 반혁명주의자들에 대한 숙청과정에서 범한 일부 무고한 공산당원들에 대해서조차 가해진 숙청, 인민전선의 올바른 원칙이 그 전술적용 과정에서 범한 오류 등 많은 오류와 한계를 범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불가피한 오류와 한계인지, 피할 수 있는 오류인지, 그 오류가 노선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인지, 노선의 적용과정에서 범한 것인지 등을 총체적이면서도 세심하게 평가해야 한다. 즉, 스딸린 시대의 문제를 맑스-레닌주의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함으로써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고 혁명노선과 원칙을 강화해야 하는데, 흐루쉬쵸프와 유로꼬뮤니즘 공산당들은 이를 전면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우경적인 수정주의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더욱이 흐루쉬쵸프의 스딸린 비판은 쏘련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 공산당의 단결을 새롭게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각국 유로꼬뮤니즘 공산당의 우경적인 독자화를 낳아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선과 혁명적 원칙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흐루쉬쵸프 수정주의 노선은 유럽 공산당뿐만 아니라 이미 스딸린 시대에서부터 일찌감치 독자노선을 강조하면서 전위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시장사회주의’ 길을 가고 있었던 유고의 수정주의 노선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체코 공산당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 대부분에서 민주집중제 거부와 다당제 인정, 노동자 자치라는 이름으로 계획요소를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제국주의자들은 쏘련에 대한 비방을 강화함으로써 이러한 유로꼬뮤니즘의 반공주의 노선을 뒤에서 부추겼다.

유로꼬뮤니즘 노선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인 쏘비에뜨식 사회주의와 전위정당 노선에 반대하면서 집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조차도 독자적인 집권능력이 어렵게 되자 사회민주당과의 연합을 통해서 집권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 노선으로 귀결되고 있다. 다만 유럽과 미국의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가진 공산당들은 여전히 맑스-레닌주의를 주장하고 있고,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다. 물론 미국, 영국, 캐나다 등 공산당들의 강령과 실천을 보면 일본 공산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노골적으로 의회주의를 주장하지 않고 대중투쟁을 다른 한편으로는 강조하고 있다. 또한 집권을 하지 않아 사회민주당처럼 추악한 배신의 경험은 덜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폐기하고 의회를 통한 평화적인 이행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여전히 개량주의 노선이다.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볼 때도 여전히 ‘문제는 국가’인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고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 인민의 대중국가를 세울 것인가?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그대로 두고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개조하거나 변형해서 그대로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변혁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을 중심으로 해서 전 세계적 공산주의 경향은 크게 마오주의 공산당의 반(反)수정주의 경향과 공산당 계열로 나눠볼 수 있다. 맑스-레닌주의를 내건 마오주의 경향들은 흐루쉬쵸프 집권 이후의 수정주의 노선을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올바르지만 이를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국가자본주의로 간주하고 있고, 당시 쏘련이 사회제국주의라고 보는 편향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흐루쉬쵸프 수정주의의 등장을 수정주의 쿠데타라고 규정하는 주관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러한 반수정주의 노선은 흐루쉬쵸프의 수정주의 노선으로 촉발되었지만 당시의 쏘련이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였고,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지원과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지원을 하는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국가 내부를 분열시키기도 했다. 중국에서도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통해서 유소기 같은 수정주의 세력들과의 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문화대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서 나오는 관료주의를 척결하고 노동자 인민들의 사회주의 문화를 고양하고 계급의식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공헌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편향이 나오고 경제적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부상한 등소평의 수정주의 노선을 막지 못했다.

마오주의 공산당들이 흐루쉬쵸프의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는데 이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중국에서도 마오의 올바른 노선에도 불구하고 수정주의를 막지 못하고 곧바로 ‘중국 자본주의’가 출현했던 것이다. 흐루쉬쵸프 수정주의가 자본주의 쿠데타라면 중국에서 모택동 사후 대두된 등소평의 수정주의도 쿠데타인데 그렇다면 쏘련에서 ‘수정주의 쿠데타’를 목격한 중국에서 수정주의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정주의를 막지 못했는가? 또한 이 쿠데타는 한 줌의 반동세력에 의한 권력 장악인데 중국에서는 왜 대중적인 세력기반을 가지지 못한 쿠데타 세력들에 의한 ‘자본주의 부활’을 막지 못했고, 이 반혁명 쿠데타 세력들을 이후에도 제압하지 못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마오주의 공산당들은 좌편향적 경향과 주관주의적 한계가 있지만 흐루쉬쵸프 시절부터 반(反)수정주의를 내걸고 있었기 때문에 쏘련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혼란을 겪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강력하게 견지하고 있다. 정치적, 이념적 혼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적 수준도 높게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반대로 기존 선진 자본주의 국가 공산당들은 유로꼬뮤니즘에서 한 차례 이론적 타락을 겪은 바 있고, 대다수 공산당들 역시 고르바쵸프의 ‘쇄신’, ‘개방’ 노선이 노골적으로 다당제와 부르주아 시장주의를 지향할 때도 이 노선을 추종하다가 쏘련 붕괴 이후에는 엄청난 정치적, 이념적 혼란을 겪으면서 더 우경화되기도 했다.

그리스 공산당처럼 쏘련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자기비판을 통해 다시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과 전위정당 노선을 분명히 하는 공산당만이 맑스-레닌주의 노선을 다시금 굳건하게 세우고 다시 자본주의 변혁의 길을 개척할 수 있다. 그리스 공산당은 자기비판과 사회주의 원칙의 쇄신노력 속에서 전후 유로꼬뮤니즘 공산당에서 일반화된 이행의 중간단계를 설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 변혁과 사회주의 변혁 사이에 중간단계를 설정하는 잘못된 반독점 전략은 이후 한국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노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와의 관계에서 많은 공산당들의 입장은 “반독점정부”라는 전략의 일환이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하나의 단계이며, 사회민주주의와 동맹하여 자본주의를 관리하는 정부들에서도 그 표현이 발견되었다. 이런 전략은 당초 모든 자본주의나라들이 아메리카합중국에 대한 “종속과 의존”의 관계에 있다고 하는 평가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위계의 최상위에 있는 나라인 아메리카합중국에서 아메리카합중국 공산당까지도 그런 전략을 채택했다.5)

 

그리스 노동자 인민의 투쟁을 이끌고 있는 그리스 공산당 역시 그리스에서 변혁의 과정 속에서 더 검증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자기비판과 쇄신 속에서 기존 공산당의 오류를 극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과 전위당 노선을 분명히 하고 왜곡된 반독점 노선을 정정하는 데 투쟁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 공산당을 중심으로 해서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대회가 지속적으로 열리고 있다는 것은 수정주의와 유로 코뮤니즘에 의해 변질되고 쏘련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 혼돈을 겪었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청산주의를 청산하고 혁명적 원칙을 강화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기회가 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국제회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 지배적인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일소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노선과 전위정당 노선, 혁명적인 반독점 노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로꼬뮤니즘 비판은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인민전선 전략전술에 대한 평가, 기존 공산당의 우경적인 노선과 실천에서의 우경화 등에 대한 평가의 문제를 담고 있고, 이러한 평가 속에서 유로꼬뮤니즘이 정치적 타락의 원천이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태도에 있음을 밝힘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당 노선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유로꼬뮤니즘 비판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개량주의 세력들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한국에서 전위정당을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급진적 정치세력의 몰역사성, 몰과학성,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유로꼬뮤니즘을 단순히 ‘스딸린주의’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유로꼬뮤니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몰지각한 이해가 되는 것이고, 이러한 논리는 ‘스딸린주의’ 비판을 내세워서 반쏘비에뜨, 반공 사상, 반맑스-레닌주의적 사상으로 넘어 갔던 유로꼬뮤니즘이 범했던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혁명적 비판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관점으로의 비판)이라는 오류의 굴레에 또 다시 빠져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래 기획은 국가 문제를 회피하는 유로꼬뮤니즘에 대해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의 입장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애초 기획의도와 달리 너무나 거창한 주제의 글이 되어 버렸다. 필자 혼자, 단시일 내에 그러나 여기에 이러한 광범위한 과제를 총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그러한 총체적 평가와 변혁 전망 모색에 있어서 문제의식과 대략적인 논의의 방향성 정도는 던져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2. 인민전선과 유로꼬뮤니즘

 

유로꼬뮤니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기원은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이탈리아 파쇼 권력 하에서 감옥에서 저술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옥중수고≫는 파시즘의 감옥에서 이탈리아 혁명의 패배 원인을 평가하면서 쓰였다. 그람시는 자본주의 발전이 미숙했던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성공했는데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왜 혁명이 실패했는가를 분석하기 위해 ‘진지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유로꼬뮤니즘은 이러한 진지전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점진적인 변화 속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차용하기도 했다. 그람시가 파시즘 감옥에서 검열을 염두에 두고 글을 썼기 때문에 모호한 글의 개념이 그람시를 우경적으로 해석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감되기 이전에 자유롭게 글을 썼던 그람시의 노선으로 볼 때, 그람시에게는 국가권력을 타도하는 기동전이라는 정치혁명 개념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옥중수고≫에서는 이탈리아 사회당(이후 공산당으로 분화) 내부의 극좌편향을 비판하면서 통일전선을 염두에 두고 진지전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6)

유로꼬뮤니즘을 이론적으로 저술했던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산티아고 까리요는 ≪유로꼬뮤니즘과 국가≫에서 서유럽 공산주의 운동은 스페인, 프랑스 등 인민전선 전술의 역사적 경험 및 전후 연립정부 수립의 경험을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전략으로 격상시킴으로써 유로꼬뮤니즘이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이후에 살펴볼 것처럼, 인민전선이 파시즘 하에서, 식민지ㆍ반식민지라는 특정한 국면, 특정한 시기에 전술이자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는 이행전략으로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인민전선에 대한 중대한 왜곡이다. 또한 유로꼬뮤니즘이 반쏘비에뜨, 반스딸린 노선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던 것을 볼 때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심지어 맑스-레닌주의 진영을 자처하며 반공주의를 비판하고 쏘련 사회주의에 대해서 지지하는 입장에 있는 미국 <노동자세계당(Workers World Party)>도 인민전선을 비판하고 있다.

 

유럽의 활동무대에서 중대한 정치적 이슈는 더 이상 부르주아계급에 대항하는 것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 이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파시스트 노예제도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되었다. 당시에 공산당 정책의 배경에서 이것은 노동자계급은 지금은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구조 내에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태를 방어하는 것에 자신을 한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더욱이 그것은 부르주아 사적소유관계의 기본적인 구조를 침해하고, 자본주의 착취의 부르주아 체제를 전복하는 어떠한 ‘파괴’선전이나 전복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기본적인 투쟁은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한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위해 파시스트 반혁명에 대항하는 것에 한정되었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그 개념을 이해했던 것처럼, 그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태로 자본주의 체제를 보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부르주아 반동과 파시스트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의 두 가지 다른 계급적 접근이 있다. 노동자계급 종식을 위해 계급투쟁의 정신으로 싸울 수 있는가 아니면 자본주의 사적소유의 보존을 위해 부르주아 변호의 정신으로 싸울 수 있는가이다.

히틀러 파시스트의 손에서 독일노동자계급의 패배는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이 관련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을 아주 멀고 희미한 미래로 넘겨주었다. 따라서 프랑꼬 파시즘에 저항하는 투쟁에서 이슈는 민주주의의 대 파시즘의 체제에 엄격하게 그어졌다.7)

 

물론 <노동자세계당>은 유로꼬뮤니즘 노선이 쏘비에뜨의 특정 관료주의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 쏘련으로부터의 ‘자율과 독립’을 외치며 반쏘비에뜨, 반공산주의를 부르짖는 것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당은 독일 노동자계급 혁명의 패배와 파시즘의 등장과 함께 노동자계급은 파쇼에 반대하는 민주주의 투쟁에 한정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근본 목표를 버리게 되었고, 이러한 인민전선이 이후 유로꼬뮤니즘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점은 뜨로츠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고 사회주의에 대해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미국 <진보노동당(PLP)>도 마찬가지이다.8)

 

 

1) 디미뜨로프와 꼬민테른 7차 대회

 

인민전선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꼬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제기한 반파쇼 통일전선에 대한 왜곡과 이해부족에서 비롯됐다. 과연 반파쇼인민전선에서 파시즘에 맞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투쟁한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한 노선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민전선전술이 통일전선의 형태로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핵심 노선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서구에서 인민전선전술은 이탈리아에서 파쇼정권의 수립과 30년대 초반 독일에서 히틀러 파쇼정권의 수립, 스페인에서는 이후 프랑꼬 파쇼독재에 맞서는 투쟁과 함께 반파시즘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독재 유형 중에서 가장 배외주의적이고 폭력적이고 야수적인 체제이다. 파시즘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출하고 금융독점의 이해에 복무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위기 탈출구이다. 파시즘은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위기 속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것을 진압하고 자본주의를 구출해서 자본주의 금융독점자본의 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한 반동적 폭력체제이다.

파시즘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공격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의 지배형태인 동시에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의 진보와 민주주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성과도 담겨 있는데 파시즘은 이것을 공격한다. 파시즘은 공황과 혁명적 위기로 자본주의 체제를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해 가장 먼저 이 투쟁의 선두에 서 있는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을 공격하고, 마침내 자유주의 부르주아조차도 공격한다. 그 중에서도 노동자계급의 가장 전위적 부위였던 공산주의자들을 먼저 공격하고, 이후에는 사민주의자들을 공격하고 기독교민주주의자들을 공격하고 마침내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분파들을 공격한다. 파시즘은 내부에서의 공세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군국주의적이고 국가주의, 인종주의로 무장하고 가장 폭력적이고 야수적인 형태로 타국을 침략한다.

파시즘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노동자계급과 진보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민주주의 세력은 물론이고 부르주아 내부의 자유주의 분파조차도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에 결합할 수 있다. 파시즘은 반공산주의를 본질로 하면서도 심지어는 배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다른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공격을 가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반파시즘 통일전선은 이러한 부르주아 내부의 모순, 부르주아 국가 내부의 모순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반파시즘은 사회민주당(독일), 사회당(스페인, 이탈리아), 뜨로츠끼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 같은 정치세력들과의 노동자통일전선에 기초하면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좌파 공화주의자들 같은 자유주의자들과 부르주아 국가 일부에도 통일전선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파시즘 통일전선이라는 인민전선전술이 탄생했다. 인민전선전술의 직접적인 기초자는 디미뜨로프이다. 디미뜨로프는 불가리아의 위대한 공산주의 투사이다. 독일 파시즘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9)을 조작하여 당시 독일에 머물고 있던 디미뜨로프를 이 사건의 배후로 몰아가서 구속시켰다. 디미뜨로프는 이 세기의 재판에서 독일 파시즘의 법정에서 파시즘을 폭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대담하게 주장하여 전 세계 인민들을 감동시켰다. 인민전선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회피하고 부르주아와의 협조노선으로 인해 파시즘과의 투쟁과 혁명을 패배로 몰아간 주범이라는 뜨로츠끼주의 진영의 악의적 역사 왜곡과 중상, 비방으로부터 진실을 구하기 위해서는 인민전선의 기초자인 디미뜨로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디미뜨로프를 편견 없이 이해하기 위해서 디미뜨로프의 파시즘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 마지막 부분을 인용하겠다.

 

디미트로프: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밝히고 방화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물론 미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인민재판소에 남겨진 일이다.

17세기에, 물리학자의 시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준엄한 종교재판소의 법정에 서서 이단자로서 사형을 선고받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 속 깊이 확신을 가지고 단호히 외쳤다.

“그래도 그것―지구―은 돌고 있다!”

그리고 이 과학상의 명제는 전 인류의 공유재산이 되었다.

(재판장은 격렬하게 디미트로프를 제지하고, 일어나 서류를 가지고 나가려 한다.)

디미트로프(계속하여): 오늘날 공산주의자도 옛날의 갈릴레이에 못지않은 단호함으로써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그것은 돌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돌고 있다― 소비에트유럽을 향하여, 세계소비에트공화국을 향하여!

그리고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이 지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으로 밀려 나온 이 수레바퀴는, 어떠한 절멸조치, 어떤 징역형이나 사형 판결로도 멈출 수는 없다. 그것은 돌고 있으며, 공산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때까지 계속 돌 것이다!

(경관이 디미트로프를 붙잡고 완력으로 피고석에 앉혔다.

판사들은 디미트로프에게 발언을 계속시킬 것인지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잠시 후 판사들은 법정으로 돌아와 디미트로프의 발언을 최종적으로 금지한다는 취지를 언도했다.)10)

 

파시즘 법정에서 디미뜨로프의 영웅적인 투쟁은 전 세계 인민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면서 디미뜨로프 석방을 위한 각국 인민들의 시위가 격화됐다. 파시즘 법정은 이러한 투쟁에 밀려 디미뜨로프를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디미뜨로프는 1933년 3월에 구속되어 1년여 만인 1934년 2월에 석방됐다. 그해 8월 2일인 꼬민테른 7차 대회에 참석해서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보고를 했다.

이것이 파시즘에 맞서는 인민전선을 제창한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디미뜨로프 테제이다. 이 반파쇼 인민전선 테제는 파시즘에 맞서는 견결한 투사이자 파시즘의 법정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담대하게 주장한 디미뜨로프가 석방된 지 6개월 만에 발표한 글이다. 이렇게 공산주의 원칙과 사상 하에 발표된 디미뜨로프 테제가, 파시즘에 패배하도록 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한 원흉으로 지금까지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반파쇼 통일전선을 제창했던 디미뜨로프 개인의 직접적인 전사(前史)이다.

 

 

2) 파시즘 대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대립선의 정치적 의미

 

뜨로츠끼주의자들은 꼬민테른 6차 대회를 좌편향이라 비판하고 7차 대회는 그 대립물인 우경화의 테제라고 비방, 중상을 한다. 그러나 6차 대회와 7차 대회의 테제가 만들어지는 시점의 정세 조건은 달랐다. 6차 대회는 29년 자본주의 대공황 이후에 정세가 고양되는 시점에 열렸다. 물론 이때에도 파시즘이 한창 세력을 넓혀가는 시점이었다.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해서 1차 세계대전에서 국가주의, 애국주의에 빠져서 세계 노동자계급을 배신했던 독일 사민당은 이후 집권세력이 된 상태에서 샤이데만과 노스케를 내세워서 독일 혁명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암살하고 혁명을 압살했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은 자본주의 위기를 최후에서 구출하는 독점자본의 구세정당이 되었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주적을 공산당에 두고 ‘볼쉐비즘으로부터의 구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부르주아와 긴밀하게 협조했다. 이러한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해 독점자본의 주구인 ‘사회파시즘’이라고 이들의 정치적 본질을 규정한 것은 정당했다.

이러한 정치적 규정 속에서도 독일 공산당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네 차례나 사회민주당에 통일전선을 제안했다. 그러나 독일 사민당은 파시즘으로 가고 있는 독일 대부르주아지와 손잡고 통일전선을 거부했다. 사회민주당은 나찌세력들이 노동자를 거리에서 학살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정부를 통해 노동자를 무장해제하고, 반동세력들의 무장을 원조했다. 사회민주당은 마침내 폰 힌덴부르크를 독일 대통령에 재선시키는 데 앞장섰는데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는 나찌스에게 완전 굴복하여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11)

독일에서 파시즘의 대두가 사회민주당의 반역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명백하지만 6차 대회의 결정은 사민당이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으로 타락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지지기반은 노동자계급이라는 이중성을 간과함으로써 전술적으로 파시즘에는 반대하지만 사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로부터 고립되는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히틀러가 1933년에 권력을 장악한 뒤인 1935년에 꼬민테른 7차 대회가 열렸다. 7차 대회에서는 6차 대회의 정세인식에 대한 기본적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히틀러의 부상에 대해서 간과한 측면을 비판하고 반파쇼 인민전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디미뜨로프가 테제를 발표할 때도 꼬민테른 내에서 비판세력이 존재했다. 디미뜨로프는 이에 대해 꼬민테른 7차 대회에서 “민주주의적 환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민주주의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정식화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다”는 폴란드 공산주의자인 렌스끼의 발언을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민전선 노선을 정식화하는 데 있어서 디미뜨로프의 주장은 대단히 중요한 주장이고, 이 주장이 인민전선을 중대하게 왜곡하거나 비판하는 데 주되게 인용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보기 바란다.

 

그것은 부르조아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의 문제를 잘못하며 비변증법적으로 제기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 공산주의자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다. 그 위대한 경험을 가져다 준 것은 소비에트연방에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 이러한 민주주의는 완결된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발전하고 있고 사회주의의 건설, 무계급사회의 창출, 경제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있는 자본주의의 유물을 앞으로 보다 성공적으로 극복함에 따라 점점 발전하여 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주의의 조건 아래 살고 있는 수천만 근로자는 각각의 나라에서 부르조아지의 지배가 취하고 있는 형태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 어떠한 정치체제가 존재하는가―민주적인 권리와 자유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부르조아민주주의 형태를 갖는 부르조아독재인가 그렇지 않으면 공공연한 파시즘의 형태를 취한 부르주아독재인가―는 결코 우리에게 무관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지지자이지만 노동자계급이 오랜 세월에 걸쳐 완강한 투쟁으로 쟁취한 민주주의적 획득물을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지켜내며 또 그 획득물을 확대시키기 위해 강고하게 투쟁할 것이다. … 부르조아민주주의에 대한 태도는 모든 조건 아래서 동일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10월 혁명시에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부르조아민주주의의 옹호를 내걸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에 반대한 모든 정당과 필사적으로 투쟁하였다. 볼셰비키가 이러한 정당들과 투쟁한 것은 당시 부르조아민주주의라는 기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모든 반혁명 세력을 동원하기 위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 여러 자본주의국들의 상태는 이와 다르다. 현재 파시스트 반혁명파는 근로자에게 매우 야만적인 착취와 억압의 체제를 만들어 내려고 부르조아민주주의를 공격하고 있다. 지금 많은 자본주의국의 근로대중은 구체적인 당면문제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가 아니라 부르조아민주주의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12)

 

디미뜨로프는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필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면서 레닌의 다음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혁명으로부터 샛길로 빠지게 할 염려가 있다든가 혹은 사회주의혁명을 가려버림으로써 그늘로 밀어 넣을 염려가 있다는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승리한 사회주의에서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밖에 없듯이 민주주의를 위한 전면적이고 일관된 혁명적 투쟁을 수행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조아지에 대한 승리를 준비할 수 없다.13)

 

디미뜨로프 테제에서 비방과 중상이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아니면 부르주아민주주인가가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인가 아니면 파시즘인가의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반파쇼 인민전선이 부르주아와 계급협조를 일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 테제는 파쇼 하에서 구체적인 당면목표로 주적인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부르주아민주주의 체제의 복원이 최종목표가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부르주아 독재체제이다. 이것은 본질적인 자본주의 국가유형이다. 이러한 부르주아 독재체제라는 단일한 국가유형이지만 통치형태 즉 계급지배 방식은 부르주아민주주의와 파시즘 체제 등 다양하게 나눠질 수 있다. 이것은 부르주아 국가는 어떠한 통치형태를 취하든 부르주아 독재를 국가유형으로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통치형태의 차이에 대해 구별하지 않는다면 파시즘 통치권력이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통치권력에서나 세심하게 정세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부르주아 독재반대라는 동일한 요구만 하게 될 것이다.

특정한 조건과 시기의 전술에서 특수한 이행전략이자 구체적인 당면문제로 제출된 반파쇼 인민전선을 반대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은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이는 파시즘 국면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에 내걸게 되면서 파시즘에는 반대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반대하는 사회민주주의 세력, 무정부주의자, 사회당 같은 정치세력과 그 지지자들과의 통일전선을 거부하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민주주의 투쟁에 기권하고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서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고립을 자초하게 하면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게 만든다. 이것은 실제 중국혁명과 스페인 혁명에서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극좌적인 편향으로 나타났다.

 

 

3) 계급협조를 돌파하는 이행의 특수성

 

인민전선인가? 계급협조인가? 이러한 대립선은 인민전선을 계급협조주의로 인식하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인민전선을 사심 없이 연구하면 인민전선이야말로 계급협조에 맞서서 투쟁한 이론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인민전선은 사회민주당이 반공산주의 입장에서 지배 권력이 되거나 지배 권력의 협조 세력이 되어서 파쇼에 봉사하는 사민당의 계급협조를 막고 반파시즘 전선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민당은 꼬민테른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의 반파쇼 인민전선에 대해서 반공산주의, 반볼쉐비끼 입장에 서서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파쇼권력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압살이 강화되자 사민당 내부의 노동자계급으로부터 공산당과 제휴하여 반파쇼 인민전선에 참가하라는 압박을 강하게 받으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디미뜨로프 테제를 통해서 인민전선이 계급협조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노선인지 살펴보자. 반파쇼인민전선의 주요한 기초는 노동자계급 내부의 통일전선이다. 7차 대회에서는 파시즘에 맞서서 정파를 넘어서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했다.

 

노동자계급의 대열이 분열되어 있고 그들과 그 외 근로인민층이 단결되지 않았던 상태가, 파시즘이 권력을 장악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라면 프롤레타리아 대열의 통일이 달성되고 인민전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보장하고 파시스트 전쟁방화자로부터 평화를 지키며 최종적으로 자본에 대해 노동이 승리하는 길을 연다.14)

 

이러한 주장에 대해 꼬민테른 내에서도 인민전선이 부르주아지와의 계급협조 정책이라며 ‘순수한 계급적 노동자 정책’을 주장하는 데 대해서 디미뜨로프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일부 혈기왕성한 ‘좌익’ 비판가가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7회 대회의 여러 결정에 대해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계급투쟁의 원칙과 인민전선정책을 대립시켜 생각하는 것만큼 지독한 정치적인 무고려와 우열성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사회민주당이 취해온 부르조아지와의 계급협조 정책에 환멸을 느껴 개량주의 입장을 내버리려고 하는 많은 좌익 사회주의자가 점점 극단적인 반대로 빠져들어 종파주의와 좌익주의의 희생물이 되는 특징적 현상을 우리는 여러 차례 보았다. 그들은 인민전선정책과 부르조아지와의 계급협조정책을 동일시하는 잘못을 저질러 ‘순수한 계급적 노동자 정책’을 주장한다. 그들은 파시즘에 반대하는 노동자계급과 소부르조아지, 농민, 인텔리겐차의 민주주의적인 여러 층의 공동투쟁을 계급투쟁의 입장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인민전선정책이 부르조아지와의 계급협조정책과 동일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며, 성실한 좌익 사회주의자를 향하여 인민전선정책의 계급적 의미를 참을 수 있게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파시즘과, 일반적으로 반동파를 이롭게 할 뿐인 정치적 단견으로부터 벗어나도록 그들을 도울 필요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따름이다.15)

 

인민전선은 사민당 같은 개량주의 정당과의 위,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이 기초이다. 이 기초 위에서 부분적으로 파시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세력들과의 연대를 추구한다. 다만 그 연대의 조건은 공산당의 자주성과 독자성, 변혁성이다. 이것을 우편향으로 비판한다면 역으로 6차 꼬민테른 테제인 ‘계급 대 계급’ 노선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안 된다. 반파시즘 통일전선인 인민전선을 비판한다면 파시즘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마저도 적으로 돌리고 투쟁해야 한다.

식민지, 반식민지에서 인민전선은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농민과의 동맹으로 봉건세력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한다. 여기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부르주아는 적극적인 제휴의 대상이다. 이것은 꼬민테른 2차 대회에서 레닌이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16)를 발표하고 인도 공산당 혁명가인 로이와 논쟁하면서 제시한 원칙에 출발을 두고 있다. 로이와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중국 등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 내에서의 민족부르주아지와의 통일전선을 거부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했다.

이것은 반제국주의, 반봉건 투쟁에 있어서 명백한 좌편향이고 고립을 자초하는 자멸적인 전략이다. 물론 당시 중국에 대해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라고 주장했다. 중국 혁명의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를 주적으로 해서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과 반봉건의 과제를 수행한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라는 규정이 올바름을 검증하고 있다. 반파쇼 투쟁에서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이 가장 앞장서서 투쟁하고 대중적인 지도력을 쟁취해서 혁명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중국에서도 반제국주의 투쟁을 통해서 국민당을 대신해서 혁명의 영도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중국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라고 해서 이 혁명을 부르주아가 주도하고 부르주아 혁명의 단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자의 두 가지 전술≫에서 말한 것처럼,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계급동맹을 맺고 부르주아 혁명을 성공시키면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독재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꼬민테른 7차 대회 이후에 반파시즘 인민전선은 전술에서 이행의 전략이 되었다. 인민전선전술이 특정한 시기, 특정한 조건에서의 전술에서 하나의 이행전략이 되었다는 것은 거대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이행전략이 되었다는 것은 파시즘 국가에서는 노동자통일전선에 기초한 자유주의자들과의 일시적, 조건적 연합으로, 식민지, 반식민지국에서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과제를 가지는 민족부르주아와의 연합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이행전략으로써 위치 지어졌다는 것이 된다.

인민전선이 반파쇼 민주주의 투쟁, 반제 반봉건 투쟁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전략이 되었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 민주주의 투쟁의 대립이 아니라 민주주의 투쟁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정식이 수립되는 것이다. 반파쇼 인민전선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의 조건, 식민지, 반식민지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는 각국마다의 이행의 특수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국 노동자세계당에서 “공산당의 정책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기본적인 투쟁은 성공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향한 관점에서가 아니라 단지 부르주아 민주주의 시스템의 승리를 위해 파시스트 반혁명에 대항하는 것에 한정되었다”고 인민전선을 비판하는 것은 엉뚱한 비판이 되는 것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민전선전술이 전술에서 전략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인민전선의 전략전술 정신과 원칙, 조건과 인민전선의 적용에 있어서 한계와 오류를 세심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조건에서 전술이자 이행전략인 인민전선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일반적인 전술이자 이행전략으로 사고한다면 계급타협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중국, 북, 쿠바 등에서 성립한 인민전선 국가들에 대해서 쏘비에뜨 노선에 입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고 한다. 국가자본주의자들은 스딸린주의식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그것은 각국마다의 이행의 특수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레닌은 이 특수한 이행형태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외치는 자들은 평생 혁명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 두 가지 전술≫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고 해도 순수 민주주의 요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과제가 포함된다고 말했다. 반대로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라 해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요구가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이후에도 기만적인 부르주아가 회피했던 민주주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중국, 북, 쿠바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로 인민정권이 수립됐는데 이 권력은 토지 분배라는 반봉건의 과제뿐만 아니라 주요 산업 국유화와 은행국유화라는 사회주의적 과제를 해결했다.

반면 유로꼬뮤니즘은 이 이행의 특수성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배제한 이행의 다양성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 평화적 이행노선을 레닌이 말한 이행의 특수성이라며 변호하고 있다. 유로꼬뮤니즘이 인민전선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지만 디미뜨로프가 제출한 인민전선은 오히려 의회를 통한 평화로운 이행전략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경고하고 비판했다.

 

우리는 통일전선정부가 정세에 적합한 일정한 근본적인 혁명적 요구, 예를 들어 생산의 통제, 은행의 통제, 경찰의 해산, 경찰에 대신하여 노동자 무장민병의 설치 등등을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

레닌은 15년 전에 ‘프롤레타리아혁명으로의 이행 혹은 접근의 형태를 찾아내는’(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주의’ 소아병≫) 것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라고 우리에게 호소했다. 분명 통일전선정부는 일련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이행형태의 하나가 될 것이다. ‘좌익’ 공론가는 레닌의 이 지시를 언제나 회피해 왔다. 시야가 좁은 선전가인 그들은 단지 ‘목적’에 관해 말할 뿐 ‘이행의 형태’ 등에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데 우익 기회주의자는 노동자 사이에 부르조아지의 독재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가는, 의회를 통한 평화로운 산보라는 환상을 퍼뜨리기 위해 이 두 개의 독재 사이에 특수한 민주주의적 중간단계를 설정하려 했다. 이 가공의 ‘중간단계’를 그들은 또한 ‘이행형태’라고도 부르면서 레닌까지 인용했다! 그러나 이 속임수를 폭로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혁명’에의, 즉 부르조아 독재 타도에의 이행과 접근의 형태에 관해 말했던 것이지 부르조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의 이행형태에 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7)

 

극좌적인 뜨로츠끼주의자들은 파시즘 체제 하에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목적’에 대해서만 말할 뿐 ‘이행의 형태’에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에 당시에도 우익 기회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적 중간단계를 설정하고 이것을 평화로운 이행형태라고 주장했다. 실제 다음에 보게 되겠지만 유로코뮤니스트들은 맑스-레닌주의의 수사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위 주장처럼, 레닌이 말한 각 나라마다의 특수한 이형형태라고 유로꼬뮤니즘을 합리화했다.

여기서 우리는 디미뜨로프가 레닌의 말을 빌려 인민전선이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의 이행형태가 아니라 부르주아 독재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의 이행과 접근의 형태라고 주장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주장에 의하면 인민전선은 파시즘 시기에 반파쇼 민주주의 요구를 내걸고 있지만 이 요구를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로 이행하는 특수한 이행과 접근의 형태로써 제기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의 대립선을 치는 것은 핵심적 당면 요구로써 내거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머무르는 목표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독재 체제가 파시즘을 내세워서 부르주아 계급지배와 통치를 강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파시즘 통치형태를 분쇄함으로써 그것의 본질인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타도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일시적 제휴조차도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분명히 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근본목표 하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의 계급협조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 내부의 모순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인민전선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의 요구를 가지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회피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요구를 목표로 잘못 알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요구가 실제 반파쇼 투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공시켰는지는 혁명세력의 주체역량과 파시즘과의 역관계,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권의 기회주의, 구체적인 정세마다 후퇴와 전진의 전술운용의 문제로써 다른 지점으로 구체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문제이다. 또한 이러한 평가에는 인민전선의 전략, 전술의 구체적인 운용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사회민주당의 배신적 행태, 무정부주의자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이 혁명에서 취했던 노선과 역할에 대한 평가 등을 총체적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조건에서 인민전선은 정당했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중국에서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주도한 무한정부18)에서 이중권력과 쏘비에뜨 혁명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 됐다면 반외세와 반봉건을 내걸었던 무한정부에 맞서 반혁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꼬 파시즘 독재에 맞서 투쟁하는 공화제 정부에 대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반란으로 인해 프랑꼬 파쇼 독재와 제국주의의 공격 앞에서 공화제 정부는 분열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의 인민전선은 파쇼의 발흥을 막고, 루즈벨트로 하여금 공황기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 일정 정도 양보하도록 했다. 이러한 미국에서의 인민전선은 미국에서 파쇼체제를 막고, 미국 부르주아 정권이 독일 파시즘과 맞서 싸우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파쇼정권이 수립되었다면 쏘련은 독일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미제국주의와 동시에 싸우면서 괴멸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 내부의 모순을 이용해서 쏘련인민들은 영웅적 투쟁을 통해서 독일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 세계적으로 파시즘 체제를 붕괴시켰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인민전선은 다시 검토하겠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선의 혁명적 이행의 원칙과 인민전선 내부에서의 주도성을 상실함으로써 미국 공산당이 독점자본의 또 다른 분파인 민주당의 후위대로 전락하게 되는 타락의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파쇼의 출현을 막고 인민전선 정부19)가 수립됐다. 하지만 이 정부는 인민전선 정부의 한 축인 사회당 세력의 배신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서 스페인 혁명에 대해 불간섭 정책을 취함으로써 스페인 혁명을 배신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민전선이 프랑스에서 1934년 2월 파시즘의 반동 쿠데타를 막고 파시즘의 발흥을 막은 것은 성과의 측면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특정한 시기, 특정한 조건 내에서 전술이자 이행의 특수한 전략이 된 인민전선정부는 도대체 어떠한 정부인가?

 

그것은 우선 첫째로, 파시즘과 반동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정부다. 그것은 통일전선운동의 결과로 성립하고 공산당과 노동자계급의 대중조직들의 활동을 전혀 제한하지 않으며 반대로, 반혁명적인 금융계의 거두와 그 앞잡이인 파시스트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정부여야 한다.20)

 

이러한 정부가 만들어질 수 있는 정세 조건은 무엇인가?

지배계급이 대중적 반파시즘운동의 힘찬 고양을 이미 억누를 수 없게 된 정치적 위기의 조건하에서라고. 그러나 이는, 그것이 없다면 통일전선정부의 형성이 사실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반적인 통찰에 불과하다. 이 정부를 만드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임무로서 일정에 올릴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특수한 전제조건이 존재하는 경우로 한정된다. 그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다음의 전제조건이다.

첫째로, 부르조아지의 국가기구가 이미 거의 해체ㆍ마비되고 있고 그 결과, 부르조아지가 반동과 파시즘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정부의 설립을 방해할 수 없게 될 것.

둘째로, 극히 광범한 근로대중, 특히 대중적 노동조합이 파시즘과 반동에 대해 격렬히 반항하고는 있지만 아직 공산당의 지도하에 소비에트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에 나설 만한 용의는 없을 때.

셋째로, 통일전선에 참가하고 있는 사회민주당과 그의 여러 당의 대열 내에 분화와 좌익화가 진행되어 이미 그 상당부분이 파시스트 및 그 외 반동파에 대한 가차 없는 조치를 요구하고, 공산주의자와 함께 파시즘에 반대하여 투쟁하며 자신이 속한 당 속에서 공산주의에 적의를 품은 반동적인 부분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하게끔 되어 있을 것.21)

 

이러한 인민전선 정부가 들어설 수 있는 ‘특수한 전제조건’을 무시하고 인민전선을 모든 시기, 모든 조건에서 확장해서 적용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계급협조가 되거나 연립정권에 참여하여 내각 내에서 계급협조주의를 일삼는 ‘입각주의’에 빠져버리게 된다. 디미뜨로프는 1923년 독일 ‘노동자정부’에서 공산주의자가 좌익 사회민주주의자와 함께 작센정부에 참여했던 경험에 대해 당시 정세에서 참여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프롤레타리아를 무장시키기 위해 그들의 지위를 이용하지 않고, 부르주아민주주의 틀 안에 흔히 있는 의회주의 각료처럼 행동한 것’을 두고 독일 공산당 내의 우익 기회주의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인민전선이 가능한 조건에 더해 공산당의 독자성과 자주성, 혁명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민전선의 이러한 혁명적 원칙과 정세조건에 대한 면밀하고 구체적인 고려 없이 일반적 수준에서 인민전선정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인민전선의 잘못된 적용이고, 결과적으로 인민전선이 아니다.

 

 

3. 공산당 타락의 직접적인 기원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폐기하고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과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개조해서 사용한다는 유로꼬뮤니즘은 인민전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로꼬뮤니즘은 직접적으로 흐루쉬쵸프 수정주의가 중심이 되는 1956년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형태가 장차 점점 더 다양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정말 법칙에 꼭 들어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이행 형태가 모두 어떠한 조건에서도 반드시 내전을 수반할 것이라고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22)

 

물론 위의 20차 당대회 테제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이행형태가 반드시 내전을 수반할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때로는 집권을 통해 사회주의의 혁명적 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지배계급이 사회주의적 조치인 몰수와 국유화를 단행한다면 반동들의 반란은 필연적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단지 반동 쿠데타에 맞서 농민 등과의 계급동맹으로 혁명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문화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도 중요한 것이다.

흐루쉬쵸프를 중심으로 하는 수정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이행의 형태는 다양하다 할지라도 그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있다는 레닌의 혁명적 원칙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평화이행론을 마치 이행의 형태, 그것도 주요한 이행의 형태라고 내세우고 있다. 심지어 이들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자들은 제국주의의 공세로부터 혁명 권력을 지켜내고,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제기된 평화공존론을 제국주의 국가와의 계급타협으로 변질시켰다.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자들은 평화이행을 위한 방법으로 부르주아 의회를 부르주아 국가 내부에서 바꿀 수 있다는 우경화된 입장을 제출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근로농민과 광범한 인테리겐챠층 그리고 모든 애국세력들을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켜, 자본가와 지주와의 타협정책을 취하고 있는 기회주의자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함으로써, 반민중적인 반동세력들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의회 내에서 안정된 다수를 차지하여 의회를 부르조아민주주의 기관으로부터 진정한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도구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23)

 

이러한 근본적인 입장변화는 ‘현재의 상태가 본질적으로 변화’되었다는 정세변화에 기인한 것인데 위 주장에서 평화이행을 주장할 새롭게 변화된 근본적인 조건은 아무것도 없다. 노동자계급 주위에 근로농민과 광범한 인?리겐찌아, 애국세력들이 광범위하게 주위에 결집되었다는 것은 권력획득을 위한 주체역량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인바, 이것이 평화이행의 근거는 될 수 없다.

혁명의 주체역량이 유리하게 되었다고 해서 군대와 경찰, 정보기구 같은 무력기구와 수백만의 행정관료 기구와 독점부르주아 언론기구를 통해 전체 사회를 장악한 독점부르주아 국가권력이 무력화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본가와 지주와의 타협정책을 취하고 있는 기회주의자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함으로써, 반민중적인 반동세력들을 완전히 패배시키’는 상황이 주어진다면 혁명으로 나아갈 조건이 강화된 것이지 자본주의 국가기구인 의회 내에서 안정적 다수를 차지하여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편입해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부르주아 국가기구인 의회를 ‘진정한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는 도구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라는 수정주의자들의 망상은 이들이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한 물신주의와 의회주의에 빠져 있음을 보여줄 따름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프랑스 내전의 경험을 통해 경고하고, 레닌이 이 분석을 토대로 강조한 것처럼, “노동자계급은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접수하여 자기 자신의 목적대로 행사할 수 없다”는 혁명적 원칙과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혁명 이후에 기존의 낡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자신의 의지대로 활용, 또는 변형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파괴되어야 하고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인민의 대중국가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로 철저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스딸린 사망 3년 뒤인 1956년 2월 24-25일의 밤에 개최된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는 ‘스딸린 개인숭배’ 비판을 한 스딸린 격하 당대회로 알려져 있으나 그러한 스딸린 비판 뒤에서는 이처럼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거부하는 평화적 이행론과 부르주아 국가기구 활용론, 변형론이 핵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20차 당대회 이후인 1957년 러시아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모스끄바에서 열렸던 세계 공산당ㆍ노동자당 회의는 ‘모스끄바 선언’을 통해 이러한 ‘사회주의로 향하는 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이라는 수정주의 노선을 다시금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현재의 조건에서는, 일련의 자본주의국가에서 전위부대의 지도를 받는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의 통일전선 및 인민전선, 기타 모든 형태의 정당과 사회단체의 협정이나 정치적 협력에 힘입어 대다수 민중을 통일하여 내전을 거치지 않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기본적인 생산수단을 민중의 손으로 되찾아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민중의 대다수를 지주로 하여, 자본가나 지주와의 타협정책을 포기하지 못하는 기회주의자에게 단호한 반격을 가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반동적ㆍ반민중적 세력을 물리치고, 의회에서 안정적 과반수를 얻어내어 부르조아지의 계급적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인 의회를 근로민중에게 봉사하는 도구로 바꾸고 의회 밖에서의 광범한 대중투쟁을 통해 반동세력의 저항을 분쇄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평화롭게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을 조성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24)

 

쏘련 20차 당대회를 필두로 해서 시작된 모스끄바 선언과 1960년 ‘모스끄바 성명’에서 다시금 확인된 쏘련 공산당의 수정주의는 이때를 전후로 하여 전 세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선언과 성명에 대해서 중국, 알바니아를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혹은 몇몇 국가 공산당에서 반대하고 비판했지만 이 수정주의 노선은 선진자본주의 국가 공산당 대부분에서 일반적인 노선으로 자리 잡았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스탈린 비판이 시작된 후인 1956년 12월의 제8차 당대회에서 독점의 지배에 반대하여 그 지배체제를 구조적으로 개량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 새로운 민주적 다수파를 결집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 일본 공산당은 1961년 제8차 당대회에서 위의 방침을 일본에 구체화한 새로운 강령을 결정하였고, 이탈리아 공산당은 1967년 당대회에서 51년 강령을 재검토한 “사회주의로 향한 이탈리아의 길”을 강령으로 확정했다. 모스크바의 시녀라 불린 프랑스 공산당도 1968년 12월의 중앙위원회에서 “상파뉴선언”으로 알려진 강령적 문서 “선진적 민주주의를 위해, 사회주의 프랑스를 위해”를 채택했다(이 문서는 1970년 2월의 제19차 당대회에서 승인되었다).25)

 

이러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평화이행 노선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의 다양한 형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를 본질로 하는 것이었다. 결국 디미뜨로프가 ‘의회를 통한 평화로운 산보라는 환상을 퍼뜨리기 위해’ 평화적 이행론을 주장했던 우익기회주의를 비판했던 것에서 보듯이 인민전선과 평화적 이행론은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평화이행론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한 맹신을 갖고 인민전선의 혁명적 원칙을 배반하면서 등장하였던 것이다.

 

 

4. 유로꼬뮤니즘의 맑스-레닌주의 위조와 부르주아 국가 숭배

 

위에서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유로꼬뮤니즘 노선이 ‘스딸린주의’ 인민전선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그 노선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수정주의 노선을 기원으로 하는 유로꼬뮤니즘이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를 전개하였으며 각국에서 그 노선의 실현은 얼마나 공산당을 타락시키고 노동자계급을 배반하였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유로꼬뮤니즘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 대부분의 수정주의 이행노선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근거는 물론이고 이론적 배경이나 깊이 역시 대단히 취약하다. 따라서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이론적 글은 그렇게 많지 않다. 국내에서는 그람시에 대한 우경적인 해석을 중심으로 그람시의 진지전 노선과 유로꼬뮤니즘의 관계를 밝힌 글이 소개되어 있고, 몇몇 논문으로 유로꼬뮤니즘에 대한 소개가 있다. 유로꼬뮤니즘을 중심으로 다루는 저서 중에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책은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산티아고 까리요에 의한 ≪유로꼬뮤니즘과 국가≫와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축출된 이른바 좌파 유로꼬뮤니즘노선이라고 할 수 있는 F. 끌로댕의 ≪유로꼬뮤니즘과 사회주의≫이다. 이 두 저작은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정리한 대표적인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끌로댕은 유로꼬뮤니즘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지만 그 정치적 결론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주장하지는 않는 점에서 좌우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노선은 크게 차이가 없다.

모든 개량주의 노선이 그렇듯 유로꼬뮤니즘 역시 이론적으로는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에 대한 왜곡과 변형으로부터 출발한다. 산티아고 까리요는 이렇게 말한다.

 

맑스주의 사상들을 비판적으로 심화시킴과 동시에 현대의 국가, 특히 그것의 민주주의적 변혁의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 자본주의 국가는 현실의 문제다. 그 현재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변혁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민주주의적, 다당제적, 의회주의적 방도를 수행하고자 제안하는 혁명을 포함하여 모든 혁명의 문제다.26)

 

혁명의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의 문제이다. 이 점은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나, 까리오나 다 마찬가지며, 무정부주의자들이나 맑스, 엥겔스, 레닌에게나 다 마찬가지다. 다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기구 내에서 점진적인 개량을 통해서 사회주의에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유로꼬뮤니즘 역시 국가권력을 타도, 분쇄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 사회주의 권력에 이르는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길’을 주장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맑스-레닌주의처럼 현존하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국가권력이 무너진 자리에 프롤레타리아 대중 독재국가를 세우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맑스-레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로꼬뮤니즘은 여전히 맑스주의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민주주의 변혁의 가능성’으로 ‘민주주의적, 다당제적, 의회주의적 방도’를 주요하게 내세우면서 맑스주의 국가론의 핵심 사상을 거부하고 있다.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정치적 형태가 각 국가의 역사성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라고 말한다.

 

부르조아 국가는 아주 다양한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즉 모든 부르조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끝까지 본질을 분석해보면 부르조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나타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27)

 

레닌의 이 주장에 대해 까리요는 이렇게 반박한다.

 

그는 절반도 맞지 않았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그 모든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의 본질은 오늘날 우리가 판단할 수 있듯이 근로인민의 헤게모니이기 때문이며, 또 그 정치적 형태의 다양함과 풍부함 자체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연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이다.28)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혁명에 반대하여 반동적인 공세를 계속하게 될 부르주아에 맞서 혁명 권력을 사수,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를 통해 전 인민의 국가에 대한 참여를 통해 대중국가를 건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는 생산과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그 잔재로 남아 있는 부르주아 문화, 의식에 맞서서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을 조직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국가권력의 본질인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의한 억압이지만 부르주아 국가와 달리 여기서는 자본주의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했던 노동자 인민의 절대 다수에 의한 부르주아 반동 모리배 소수에 대한 억압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자 인민의 절대 다수가 통치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절대 다수 인민을 위한 계급적 민주주의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사회주의 생산력을 고도로 발전시키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구별, 농촌과 도시의 구별을 없애서 관료주의를 그 뿌리부터 제거하면서 전체 인민의 물질적, 정신적, 문화적 풍요를 위해서 투쟁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는 착취계급이 절멸하여 부르주아 반혁명의 가능성이 없어지고, 문화적, 물질적 풍요 속에 능력에 따른 노동과 필요에 따른 공산주의적 분배원리가 강화됨에 따라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할 필요가 없어지면 사멸해 가는 국가 즉 준(準)국가이다.

간략하게 정리했지만 이것이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의 핵심 사상이며, 현실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에서도 부르주아 국가를 대신해서 ‘필연적으로’ 출현한 국가유형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맑스-레닌주의 핵심 사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변혁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역사적으로도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국가유형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것이다. 이 필연성은 쏘비에뜨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한 쏘련이나 신민주주의 혁명의 형태를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한 중국이나 반봉건, 반외세의 과제를 해결하면서 인민권력으로 출발한 쿠바에서도 ‘필연적으로’ 나타난 프롤레타리아 국가 유형이었다.

이러한 사회주의 변혁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부하면 칠레 아옌데정권처럼, 의회를 통해 집권했다고 해도 부르주아 반혁명에 의해 비극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한 21세기 사회주의라고 하는 베네주엘라 차베스 권력의 경우에도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 집권했지만 미제와 부르주아 반혁명에 의해 끊임없이 권력을 위협받고 있고, 결국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지 못하면 더 이상의 혁명을 포기하고 브라질 룰라처럼, 자본주의자가 되거나 칠레 아옌데처럼, 부르주아 반동에 의해 권력을 탈취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로 변모했음에도 불구하고 쏘련사회주의의 흐루쉬쵸프 정권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 대신에 ‘전인민의 국가’로 변모하여 사회주의 내 수정주의를 강화하고, 유고의 티토나 동구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전위당 노선을 약화시켜 시장사회주의로 타락하면서 마침내 사회주의가 붕괴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유로꼬뮤니즘은 이행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일 뿐이라는 맑스-레닌주의 핵심사상과 혁명의 현실성을 거부하고, ‘민주주의적, 다당제, 의회제적 방도’를 이행의 주요한 형태라고 주장하고 있다.

까리요는 “우리는 사회민주주의 진영으로 넘어가지도 않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들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29)며 한사코 자신들은 개량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심으로 혁명 없이 선거와 의회를 통해 평화롭게 착취와 수탈이 없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로꼬뮤니즘의 이러한 진정성 모두를 사악한 거짓말이라고 거부하지는 않겠다. 이들의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노골적인 위조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의도로만 유로꼬뮤니즘에 대해 비판한다면 유로꼬뮤니즘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객관적인 역사나 정치적 배경에 대해 접근하지 못하고 주관주의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관적인 의도를 분석하는 것과 아울러 이 주장이 ‘필연적으로’ 어떻게 귀결되느냐의 문제를 추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유로꼬뮤니즘이 이러한 ‘혁명관’을 가지게 된 객관적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제시한 해결책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우리나라나, 비슷한 발전 수준 이상의 다른 나라들에서 타당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으로 다원주의와 의회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는 베트남이나 라오스 그리고 제3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그런 다원주의와 의회제의 발전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이 나라들에서는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반대로, 똑 같은 오류는 자신의 모델들을 혁명과 사회주의에 관한 일반법칙으로서 정립하고 다른 모든 경우에 적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저질러지고 있다. 사회주의의 길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헤아린 레닌의 현명한 통찰은 현실에서 완전히 확인되고 있다.30)

 

까리요는 “70년대의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31)에서 보듯 70년대의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발전한 자본주의는 의회주의가 발전해 있어서 혁명의 일반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예외적인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위에서 비판했듯이 까리요는 ‘사회주의의 길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일찍이 헤아린 레닌의 현명한 통찰’을 가지고 자신들의 노선을 합리화하지만 그 말 뒤에 레닌이 핵심적으로 강조하려 했던 그럼에도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누락하고 있다.

쏘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쉬쵸프도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에 대해 모든 국가에서 다 적용될 이행노선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회주의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이행노선일 뿐,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국가에서는 여전히 비의회주의적인 혁명적 이행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흐루쉬쵸프 수정주의의 계승자답게 유로꼬뮤니즘도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까리요는 자본주의 국가가 본질적으로 폭력과 억압의 기구라는 맑스-레닌주의의 국가론을 거부하면서 그람시나 알뛰세를 내세워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예외성’을 주장한다.

 

본질적으로 맑스, 엥겔스와 레닌은 국가를 특히 그 억압적인 성격을 강조하여 한 계급이 다른 계급들에 대한 지배의 도구로서 파악한다. 다른 맑스주의자들, 그중에서도 그람시와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대해서도 거론하는데, 이것들은 폭력에 의거하기보다는 정신적인 수준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보면, 종교장치(서로 다른 교회들의 체계), 교육장치(공립과 사립을 막론한 학교 체계), 가족, 사법장치, 정치장치, 정보장치(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와 문화장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밖에도 자본주의 국가가 정치, 주요한 지배적인 경제그룹들의 대표자로서, 경제발전의 조정자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또 다른 차원의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32)

 

이러한 주장은 맑스-레닌주의 국가론에 대한 속물적이고 조잡한 왜곡이다. 자본주의에서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조차도 자본주의의 물질적, 폭력적 기구를 바탕으로 해서 이 기구를 강화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이데올로기적 기구는 폭력적 지배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맑스-레닌주의의 사적 유물론의 초보적인 이해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인 물질적 세력인 지배계급이 동시에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세력이라는 말이다. 물질적인 생산의 수단을 통제하는 계급은 그 결과 정신적인 생산의 수단도 통제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정신적인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계급의 사상은 대체로 그것에 종속된다.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들의 관념적 표현, 사상으로서 파악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만드는 관계들의 표현, 곧 이 계급의 지배 사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33)

맑스-레닌주의는 국가권력의 본질이 폭력과 억압의 도구라고 주장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폭력과 억압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권력은 지배계급, 독점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폭력과 억압을 주로 사용하지만 전체 사회에 대한 지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기구를 활용해서 ‘동의와 설득’을 활용하기도 하고, 사회‘질서’를 강화하기도 한다. 국가기구는 부르주아 특히 독점자본주의 국가이지만 전체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서 형식적으로는 사회보다 위에 위치해서 전체 사회를 위한, 중립적인 기구인 양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착취자와 피억압자가 자본주의 지배체제에 맞서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켜 지배질서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계급 간의 경제적 이익관계가 얽혀 있는 이 계급들 간의 적대감으로 인하여 자신과 사회가 무익한 투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서는 외견상 사회 위에 군림하는 하나의 권력이, 즉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사회를 유지하고 계급 간의 갈등을 조화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 즉 사회로부터 나왔지만 사회보다 상부에 위치하며 사회로부터 그 자신을 점점 더 소외시키는 권력이 바로 국가인 것이다.34)

 

국가가 계급 사이의 갈등을 조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계급모순을 중재자로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함이다. 까리요가 이러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해 “정치, 주요한 지배적인 경제그룹들의 대표자로서, 경제발전의 조정자로서 등장하고 있다는 또 다른 차원의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로꼬뮤니즘의 이데올로기적 타락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게 한다. 까리요는 현대국가가 독점자본주의 국가임을 부정하고 있다. 국가가 ‘경제발전의 조정자’로서 나서는 것은 노자 간의 이해를 중재하고 조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까리요는 엥겔스의 혁명성 역시 왜곡하기 위해, 엥겔스가 ≪1848-1850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의 서문에서 말한 바 있는, 바리게이트에 입각한 전술이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졌고 보통선거의 활용을 강조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엥겔스가 독일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의 기관지인 ≪전진≫에 서문을 기고할 때 부분적으로 삭제 당했고, 서문을 가지고 엥겔스를 ‘완고한 평화적 법률 숭배자’로 취급하는 데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엥겔스의 서문을 40년 동안이나 원문 그대로 출판하지 않았고, 베른슈타인도 이를 근거로 개량주의의 근거로 활용했다. 엥겔스는 당시 독일 사민당의 합법주의로의 경도에 대해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개탄을 했다.

 

여러분은 절대적인 합법성, 어떤 상황에서도 법률을 준수하는 합법성, 발안자 스스로가 파기한 법률까지도 준수하는 합법성에 스스로 육체와 영혼을 팔아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 선거권이 빨리 획득되지 않으면 가능한 한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실력 행사에 들어가는 오스트리아 인들을 보십시오! 또다시 여러분의 발목을 채우려고 하는 사회주의자 법하에서 여러분 자신이 했던 위법 행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합법성은 우리에게 적합한 한에서만 합법성이며,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획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문구조차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35)

 

맑스-레닌주의가 국가에 대한 이러한 속물적인 인식에 맞서 평생을 싸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로꼬뮤니즘은 쁘띠 부르주아적 속물적 인식에 사로잡혀서 맑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을 교묘하게 왜곡하고 위조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개량주의에 빠져들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위조한 것과 같은 뻔뻔한 조작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까리요는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현대국가의 본질이 변모했다고 하지만, 자신도 비록 후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였지만 스페인의 프랑꼬 파시스트 독재와 투쟁하고,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고작 수십 년 전에 파시스트 독재가 의회와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공산주의자들과 노동자계급뿐만 아니라 수천만 인민들을 전쟁과 학살의 참화로 몰아넣었던 역사를 철저하게 망각하고 있다. 부르주아 국가는 계급지배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동의와 설득’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까리요는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민주주의적’ 변혁전략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들의 경우 오늘날의 혁명전략은 독점자본주의의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이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을 ―전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부분적으로나마― 개조하는 것, 즉 이것들을 변혁하고 활용하는 것을 지향해야만 한다. 현대의 경험은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리고 ―전쟁이나 혹은 경제적 및 정치적 파국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이것이 국가장치의 민주적 변혁에 관건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36)

 

이것이 유로꼬뮤니즘의 ‘국가기구 개조론’의 핵심이다. 흐루쉬쵸프가 제시한 바 있는 국가기구의 민주적 개조이다. 의회기구도 마찬가지로 인수해서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에게 봉사하는 기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까리요는 이데올로기 기구와 폭력기구를 분리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현대 제국주의 국가의 현실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거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현대 제국주의 국가는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면전은 아니지만 무력을 사용한 전쟁을 일상적으로 벌이고 있으며, 제국주의 경제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공황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파국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까리요는 이러한 제국주의 경제와 정치의 일상적인 상황을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간주하면서 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국가장치의 민주적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유로꼬뮤니즘은 제국주의 국가의 포로가 되어 물신숭배를 하고 있으며, 제국주의의 배외주의적, 폭력적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라는 예외성을 이유로 교묘하게 제국주의 변호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외성에 의해 까리요는 폭력혁명을 단지 후진적인 러시아만의 산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발전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첫 단계는 폭력행위에 의한 국가의 억압적 장치의 파괴라고 인식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이 질문은 차르 치하의 러시아라는 맥락에서, 즉 파멸적인 군사적 패배의 상황에서 제기될 수도 있다. 당시 러시아는 전체 국가장치가 붕괴되고, 군대의 대다수는 평화와 빵 그리고 토지를 갈구하며 재앙에 굴복해서 혁명세력 쪽으로 넘어온 상황이었다.37)

 

이처럼 유로꼬뮤니즘 정치세력들은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러시아적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했으며 러시아와는 다른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변혁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전략 대신에 까리요는 “민주적인 대중행동이 대표적인 민주적 제도들에 의한 행동과 결합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봉사하고 있는 대표적인 민주적 도구들이 사회주의에 봉사하도록 활용되어야만 한다”38)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로꼬뮤니즘은 자본주의에 봉사하고 있는 민주적 도구들을 활용하여 사회주의에 봉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봉사하고 있는 도구에 이용됨으로써 자본주의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로꼬뮤니즘은 자본주의 국가장치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변혁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가?

 

그 방법은, 기존의 사회 내부에서라도, 즉 사회주의 세력들이 정부에 첫발을 내딛기 전에라도, 국가장치의 민주화를 위한 열정적이고 지적인 행동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 대한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하는 상황을 획득하는 데 있다. 이러한 목적이 부분적으로라도 달성되는 한, 그 성과는 억압적 장치에도 반영될 것이다.39)

까리요는 국가장치의 민주화의 사례로 공무원노조의 등장과 1968년 프랑스 혁명에서 경찰조합들의 일련의 저항과 군대 내에서의 심각한 소요의 발생을 예로 들고 있다. 까리요는 이러한 사례를 국가기구 민주화의 첫 단계로 보면서 국가권력이 무장세력에게 폭력적 명령을 지시하도록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반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역할, 즉 독점자본주의의 국가권력이 무장세력에게 수행하도록 지시하는 역할인 것이다. 공공질서의 세력들과 경찰은 사회를 반사회적 분자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교통을 정리하기 위해서,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대중시위 및 대중파업은 공공질서와 충돌하지 않으며, 다만 정부가 그들을 탄압하도록 경찰을 파견할 때에만 공공질서와 충돌하게 된다. 파업은 사용자들의 대표와 노동자들의 대표 사이의 협상을 위한 것이다. 시위 때의 질서유지는 사위조직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만약 경찰이 절도 및 범죄를 추적하고 마약을 거래하는 반사회적 분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전념한다면, 만일 그들이 점증하는 치명적 사고들을 막기 위해서 좀 더 효과적으로 도로를 순찰한다면, 그리고 만일 일반적으로 경찰이 주민과 그들의 문제에 좀 더 가깝게 밀착된다면, 이처럼 된다면 현대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전해질 것이다.40)

 

까리요의 “만일 … 한다면”이라는 가정법은 계속된다.

 

수천 명의 경찰들에게 전투복을 입히고 현대식 탄압장비를 갖추게 해서 파업자들과 대중적 시위를 공격하도록 내보낼 이유가 있는 것일까? 통치자로 하여금, 모든 시위들은 정당한 요구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자신들과 협상하도록 뽑힌 대표자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도록 하라. 그들이 인민과 대화하고, 인민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그들 자신의 결정을 수정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라. 당국으로 하여금 자신이 사회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하라. 사용자들은 노동자들과 직접 협상해야 한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찰의 지원 하에 명령을 부여할 수 있다는 방자한 생각을 버리게 하라!41)

 

까리요의 가정법은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대다수 주민이 이 체제 혹은 특정한 제도에 찬성하지 않고 그것들에 반대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공공질서의 방어란 다수의 의지가 수행되도록 보장하는 것을 뜻한다.42)

 

군대는 무엇보다도 국가적 독립 및 주권을 방위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결코 다른 계급 및 계층에 대한 독점적 과두제의 지배나 혹은 자본주의적인 정치적 및 사회적 현상의 신성불가침성을 보장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43)

 

까리요는 경찰이 인민들을 탄압하지 않고 치안과 교통질서 유지에 힘쓰고, 군대가 다른 계급과 계층에 대한 폭력적 지배의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대다수 인민들이 그것들에 반대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까리요는 여론 다수의 지지에 의해 이 가정법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까리요는 부르주아 물리적 지배를 보장하는 이데올로기 기구를 바꾸면 여론 다수가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회를 장악하여 평화로운 방식으로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까리요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폭력적인 무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까리요는 본래 국가권력은 중립적인데 지배권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자신들이 의회를 통해 권력을 잡으면 폭력적인 국가권력을 노동자 인민에게 봉사하는 기구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까리요의 가정은 끝까지 허망한 가정으로 끝난다. 까리요의 가정이 현실화되려면 경찰과 군대가 폭력기구임을 멈추도록 하기 위해 먼저 이데올로기 기구가 자신의 역할을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지배계급의 사상적 지배는 끝나고 인민 다수여론의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가능해서 집권으로 갈 수 있다.

현대독점자본주의는 군대, 경찰기구, 정보기구 등 폭력적 국가기구뿐만 아니라 폭력적 기구를 정당화하는 법적 장치인 법률기구들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육, 종교, 문화, 언론기구까지 철저하게 장악하고 있다. 정부는 권력자의 얼굴이 교체된다고 해도 이러한 사회 전체에 대한 독점자본의 지배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 과연 까리요는 폭력적 국가기구의 변화의 전제인 이데올로기적 기구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장악하여 인민에게 봉사하는 기구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가정으로 그친다면 인민 다수의 지지와 집권도 물 건너가는 것이다.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처럼, 인민 다수의 지지에 의해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사회민주당 정권은 사회 전체의 실질적 지배자인 독점자본에 굴복하여 독점자본의 버팀목이 되었다.

이 점은 여전히 공산주의를 참칭하고 있는 유로꼬뮤니즘 정치세력들이 장악한다고 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독점자본의 권력지배에 맞서기 위해서는 독점자본의 힘의 원천인 저들이 보유한 생산수단과 이데올로기 기구 등을 탈취해야만 한다. 독점자본에 대한 몰수가 없이 독점자본이 보유한 사회적 지배력을 어떻게 훼손할 수 있는가? 결국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독점자본의 사회지배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독점자본 몰수와 사회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독점자본은 자신이 가진 모든 물리력과 이데올로기 기구 등을 통해 이러한 사적소유 침해에 맞서 저항하고 집권세력들을 분쇄하기 위해 떨쳐 일어설 것이 분명한데 과연 선거로 집권한 유로꼬뮤니즘 세력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이 공세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사회주의 조치 자체도 취하지 못하고 독점자본의 힘에 굴복해버릴 것이다.

이미 집권하기도 전에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중립성 신화를 추종하고 자본주의에 맥없이 굴복한 유로꼬뮤니즘 세력이 이러한 조치를 취할 리 만무한 것이다. 까리요는 68년 프랑스 혁명의 경험을 운운하는데 군대와 경찰 내부가 동요하고 일부는 시위자들을 지지하면서 국가권력이 약화된 것은 바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인민 다수의 물리적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권력을 세우는 대신에 ‘상상력에게 권력을’이라는 낭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목표에 머물러 있던 프랑스 인민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하지 못했다. 튀니지와 이집트 인민봉기에서처럼, 군대와 경찰 일부는 동요했지만 그 혁명이 더 전진하지 못하고 주춤거릴 때 군대와 경찰이 자본주의 지배계급을 사수하는 마지막 수호대가 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까리요의 몽상적 가정법과 다르게 자본주의가 발전한 현대 독점자본주의 국가에서조차 경찰은 여전히 시위에 나서는 인민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있고 사법기관은 이들 인민들을 구속시키고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는 여전히 역사상 최대의 물리력으로 무장한 채 지배계급의 물리력의 총화로 남아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의 내전에 대비하고 있으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십만, 수백만의 인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있다. 방송과 신문 같은 언론기구 역시 독점자본의 나팔수가 되어 인민들의 의식을 흐리게 하고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있다.

유로꼬뮤니즘은 이러한 상황을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공산당이라는 명칭과 다르게 사민주의와 같은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혁명적 방법에 의해 권력을 획득한다는 구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로 회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선 만약 지배계급이 민주적 길을 차단하면, 그리고 혁명적 길이 가능해질 상황이 발전한다면, 우리는 혁명적 방법에 의해 권력을 획득한다는 구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44)

 

유로꼬뮤니즘의 위선적인 주장과 다르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해 지배계급이 ‘민주적 길을 차단하’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 혁명에 대해 역사상 모든 지배계급이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지배계급이 혁명적 상황을 맞아 ‘민주적 길을 차단하’지 않고 권력을 양도한 사례는 없었다. 지극히 예외적으로 평화적 방법에 의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결국 사회주의 조치에 대해서 순순하게 권력을 양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유로꼬뮤니즘의 결론은 무엇인가?

 

맑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는, 가장 발전된 나라들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 부분, 즉 혁명적 위기에 권력을 자신들의 (또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그 자체의) 수중에 장악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구의 소수에 불과했고, 따라서 이 소수는 무장된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폭력에 의해, 즉 독재에 의해 그 권력을 계속 유지하며 사회의 이행을 시작할 수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 및 자본주의 세계의 발전된 나라들에서는 근로인민이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중요성과 거대한 숫자를 지닌 문화세력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명백히 이러한 상황은 맑스, 엥겔스,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상황과는 아주 다르다.45)

 

유로꼬뮤니즘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소수에 의한 권력탈취로 둔갑하였다. 자신들의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에 대한 까리요의 위조는 극에 달하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제 소수의 음모가들이 모여서 무장된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이 소수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과 독재에 의지하는 ‘블랑끼주의’로 둔갑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까리요의 저작을 중심으로 유로꼬뮤니즘의 개량주의적인 국가론과 이행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타락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 등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의 강령도 기본적으로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국가문제와 이행에 대한 미국 공산당의 강령을 살펴보자! 미국 공산당은 강령에서는 여전히 맑스-레닌주의 정당임을 자처하고 있고 노동자계급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주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고 있다. 미국 공산당 전 서기장이었던 거스 홀의 글을 보자!

 

사회주의의 토대

정치권력은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장악될 것이다. 사회주의는 주요한 생산수단― 작업장, 공장, 농업경영 농장 등 사회가 요구하는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의 국유화로 시작한다. 거대한 독점기업과 은행은 공적소유 즉,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는 전체 노동자계급과 인민의 집단적 소유가 된다.

사회주의는 또한 에너지 산업과 모든 천연자원의 공적 소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다수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가계급 권력을 영원히 제거한다.46)

 

이것만 보면 혁명적인 맑스-레닌주의 공산당의 강령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은 유로꼬뮤니즘 공산당과 똑같이 ‘평화적 이행론’에 사로잡혀 있다.

 

사회주의로의 길

우리는 미국에서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투표용지를 통해서. 미국 인민들의 다수가 사회주의를 원할 때까지 미국에서 사회주의는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는 한 가지는 분명하다.47)

 

미국공산당은 평화적인 이행에 대해 지배계급이 반동적으로 저항할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노동자들이 회사 중역실을 인수하기 위해 들어섰을 때를 말하고자 하는데 그러면 지배계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래. 당신이 옳소. 우리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고 지금 당신은 그것을 모두 돌아가게 해야 될 것이요. 맞소. 그러면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요. 그러나 만일 지배계급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잊으시오! 그리고 군대와 경찰, 그리고 방위군을 부르면 혁명은 폭력적인 방법이 된다. 폭력혁명은 지배계급과 함께 시작된다. 노동자들과 그들의 동맹자들은 자신들을 방어하고 완전한 그들의 소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48)

 

지배계급이 평화로운 혁명의 이행에 대해서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는 이 나라에서 사회주의 사회는 천부적 권리로 규정되었지만 결코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던 모든 자유의 보증이 될 거라는 것을 믿고 지지한다. 이는 사람들의 조직적 선택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관점을 존중하고 견지하는 후보들의 경쟁을 통해 완벽하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한다.

실제로 천부인권의 자유는 회합의 장소와 언론과 라디오와 TV를 갖게 될 다수를 위한 훨씬 더 위대한 수단이 될 것이며, 자유를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49)

 

미국 공산당은 미국이라는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 덕택에 인민 다수가 투표로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지지하는 한 지배계급의 반동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조치를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 공산당은 민주공화국에서도 “이러한 민주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적 착취에 의해 설정된 편협성 속에 둘러싸여 있으며, 결과적으로 언제나 소수를 위한, 즉 유산계급들과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 민주주의로 남게 된다”50)는 레닌의 혁명적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미국 독점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 공화국 내에서 인권과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수천만 인민은 실업과 저임금 등으로 빈곤과 생존의 박탈 속에 살고 있으며, 수백만이 감옥에 투옥되어 있는 사회이다. 미제국주의는 전 세계 군사력 대부분을 집중하면서 거대 국가권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타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과 약탈, 학살, 고문으로 얼룩져 있는 피의 제국이다. 이러한 미제국주의에서 천부인권과 민주주의 타령을 하면서 사회주의를 평화적으로 건설하겠다는 것은 미공산당이 얼마나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고, 제국주의적으로 타락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물론 미국 공산당은 미국 사회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권리가 유린되고, 타국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가 강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미국공산당은 다음에 살펴볼 것처럼 우익진영 즉 공화당에 한정하여 반대하는 반독점 전략으로 우익을 고립시키면 민주적인 방법으로 평화이행이 가능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 공산당이 강령 곳곳에서 사회주의와 맑스-레닌주의를 반복한다고 해도 유로꼬뮤니즘의 평화적 이행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 한 정치적 타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맑스주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혁명적 원칙의 위반과 위조, 부르주아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물신숭배, 평화주의. 이것이 모든 유로꼬뮤니즘 공산당이 처한 정치적 현주소이다. 유로꼬뮤니즘이 아무리 공산당이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그 본질은 공산주의의 이름을 내건 개량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반쏘, 반공을 내건 유로꼬뮤니즘의 세계 공산주의 운동으로부터의 독자성은 결국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자율과 독자성이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배신과 제국주의에 대한 굴종을 의미할 뿐이다.

 

 

5. 유로꼬뮤니즘의 배반사와 정치적 교훈

 

유로꼬뮤니즘 공산당의 혁명적 원칙의 상실은 현실정치에서도 이들 공산당들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의회주의에 완전히 투항하도록 하고 있다. 유로꼬뮤니즘은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의 예외성을 주장한 근거는 45년부터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자본주의의 장기호황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성이 유로꼬뮤니즘 국가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이라는 패배주의를 심어 놓았으며 혁명을 사실상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68년 말부터 침체에 빠지기 시작한 세계 자본주의의는 마침내 73년도에는 전 세계 공황을 폭발시켰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의 침체가 시작할 무렵인 60년대 말에는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에서 폭발적인 대중투쟁이 발생하면서 자본주의의 정치적 안정성이 흔들렸다. 

프랑스 ‘5월사건’이라 불리는 68년 5월에서 69년까지 촉발된 인민봉기가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도 프랑스 공산당(PCF)이 유로꼬뮤니즘에 빠져서 변혁전망을 포기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자제시키며 노자협조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프랑스 공산당은 자신들의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반성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1976년 프랑스공산당 22차 당 대회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에띠엔 발리바르는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폐기를 비판하기 위해 레닌주의적 입장에 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51)를 썼지만 사실상 22차 당대회에서 이 결정이 만장일치로 이뤄졌음을 봤을 때, 강령개정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반대하고 조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 공산당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던 알뛰세와 발리바르가 이후 유로꼬뮤니즘을 비롯한 포스트 맑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인정되고, 발리바르가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변모한 것을 볼 때도 프랑스 공산당의 이론적 타락과 대중투쟁에서 수행한 반노동자적 역할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이 점은 같은 유로꼬뮤니즘인 이탈리아공산당(PCI)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자본주의 평화적 이행에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동안 이탈리아 노동자계급과 인민들은 69년 ‘뜨거운 가을’이라고 하여 현장통제, 노조사수 등의 요구를 내세우고 장시간 노동과 임금삭감, 연금제도 개혁에 맞서 550만의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파업을 전개하고 11월에는 총파업 시위에 2천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 인민들이 참여했다.

이렇게 유럽에서 다시 혁명적 정세가 고양되는 시점에서도 유로꼬뮤니즘 정치세력들은 선진자본주의 예외론에 빠져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타도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장악한다는 꿈에 사로잡혀 이 투쟁에서 계급협조주의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자신들의 자본주의의 객관적 위기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안정성 신화에 굴복하고 평화주의에 빠진 유로꼬뮤니즘 공산당은 대중투쟁이 촉발되어 나와도 그 보수적인 성격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고 대중투쟁의 걸림돌로 전락했던 것이다. 당시 60년대 말 유럽의 격렬한 대중투쟁에서만큼 전위정당임을 자처하고 있는 공산당이 보수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한 적은 없었다. 공산당은 격렬한 대중투쟁이 자신들의 평화적 이행에 방해가 될 것처럼 사고하고 현 자본주의 지배체제의 보수적인 제도권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공산당이 마치 제도권 정당처럼 행동한 것은 1960년대 말뿐만 아니라 70년대에도 계속됐다.

1973년에는 칠레 아옌데 정권이 선거로 집권한 뒤에 쿠데타에 의해 권력이 무너진 비극적인 역사적 교훈을 보면서도 유로꼬뮤니즘의 평화적 이행론은 계속적으로 강화되어 갔다. 1973년에는 기민당과 ‘역사적 대타협’을 통해 더욱더 우경화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1977년 2-3월에도 또 한 차례 여성들과 청년층의 대량 실업으로 인해 생존이 악화되면서 학생봉기와 노동자의 격렬한 공장점거가 발생했다. 이러한 격렬한 대중투쟁에 대해 오직 무정부적이고 테러주의적인 극좌무장 단체들만이 호응했다. 이들의 투쟁이 극좌적인 방향으로 흐르면서 패배했지만 그 당시에 공산당은 제도권의 일부분으로 자처했을 뿐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에 우호적인 한 이탈리아 정치관측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만약 사태가 예정대로 전개된다면 반도에는 두 개의 이탈리아가 동거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그 안에서 공산당이 느리지만 꾸준히 진전을 이루어내고 있는 제도상의 이탈리아이고, 다른 하나는 주변화된 시민들과 여성, 실업자, 학생들 사이에서 나날이 어려워지고 공산주의자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된 현실의 이탈리아이다.52)

 

당시 ‘붉은여단’에 의해 대표되는 ‘무장한 아우또노미아’는 이런 공산당의 보수적인 상태에 반발해서 나타는 극단적인 편향이었던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 중앙위원이고 주요 지도자였던 파제따(G. C. Pajetta)는 당시 공산당 지도자들이 대중적인 봉기에 대해 얼마나 곤혹스러워했으며 이러한 봉기를 대하는 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회의 들보는 무너졌으며 우리의 머리를 때렸다. 우리는 다른 비슷한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봉기가 탄생한 것은 바로 공허한 미래와 당장 소용있는 것을 움켜잡으려는 열망으로부터, 사회가 민주주의의 조직된 형태들에 대한 믿음의 결여로 이어질 위기에 있다는 느낌으로부터 였다. … 학생들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새로운 질서의 담지자로서보다는 현재 사회의 ‘공동관리자’로 간주한다.53)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6년 총선에서 34.4%로 역대 최다 득표를 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집권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제도권 정당 행세를 점잖게 하고 있고, ‘평화적 이행’을 확보할 수 있는 의석 확보에 고무돼서 평화적 이행에 걸림돌이 되는 대중투쟁을 경원시했다. 이러는 사이 이탈리아 공산당은 1979년에는 30.4%, 1983년에는 29.9%, 1987년에는 26.6%로 대중적 지지를 점점 더 상실했다. 마침내 이탈리아 공산당은 대중적 지지상실에 위기감을 느끼고 1991년 20차 전당대회에서 좌파민주당(PDS)으로 당명과 강령을 개정하고 국민정당으로 변모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국민정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곧바로 이탈리아 재건공산당(PRC)이 창당됐다.

그러나 재건공산당은 공산당으로서의 혁명적 원칙을 철저하게 다시 세우는 대신에 96년 3차 당대회에서 중도좌파 정부를 지지하기도 했다. 좌파민주당이 구 기독교민주당과 연합하고 재건공산당이 좌파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올리브 동맹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연립정부는 97년에는 복지예산이 포함된 25조원의 예산을 삭감하고 공기업 민영화 등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노골적으로 취했다. 그러자 재건공산당은 4차 당대회에서 중도좌파 정부를 지지한 결정을 철저하게 자기비판했다.54)

이후 연립중도좌파 정권에 실망한 이탈리아 노동자 인민들은 2004년에는 우익인 베를루스꼬니를 당선시켰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은 우익정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독자성을 포기하고 좌파민주당과 연합에 매달리고 있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은 기존 이탈리아공산당의 국민정당화에 반발하면서 공산당 재건을 내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맑스-레닌주의 정치노선이 분명하지 않고, 우익정치세력들이 출현하자 좌파민주당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이중대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공산당 역시 1961년의 제8회 당대회에서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채택하여 수정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공산당은 일본공산당은 1994년 제20회 당대회에서 “쏘련 패권주의라는 역사적 거악의 해체는, 대국적인 시야에서 보면, 세계혁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강령을 개정함으로써 국가자본주의자들 같은 반공주의에 빠져 들었다. 일본 공산당은 제국주의 국가 일본에서 미제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종속을 탈피한다는 이유로 평화적인 이행으로써 2단계 전략을 내걸었다. 일본공산당은 미제국주의로부터의 국가적 독립을 추구한다는 우익적 국가주의 노선에 빠지고 민주당과의 연합에 의존하는 계급타협적인 의회주의 세력으로 타락하였다. 일본 공산당은 대중투쟁을 조직하는 과제를 철저하게 회피하고 선거에서의 당선에만 매진하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일본제국주의의 군군주의의 상징인 자위대에 대해서도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인민들의 요구를 배신했다. 결국 일본 공산당은 2000년에도 38만 명의 당원을 보유한 거대정당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가 점점 더 떨어지면서 점점 더 왜소해지고 있다.55)

미국 공산당 역시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유로꼬뮤니즘에 의해서 평화주의 이행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국공산당의 유로꼬뮤니즘화는 인민전선을 잘못 적용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미국 공산당은 미국에서 파시즘의 부상에 맞서서 영웅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러나 미국 공산당은 ‘매카시 선풍’이라 불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테러와 더불어서 위축되었고, 내적으로는 특수한 조건, 특수한 시기에 제창된 인민전선을 잘못 적용함으로써 유로꼬뮤니즘의 길을 걷게 되었다. 미국 공산당은 미국에서도 싹 뜨기 시작한 파시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공산당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미국 민주당 루즈벨트와의 관계에서 서서히 독자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미국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포스터는 당시 미국 공산당이 루즈벨트를 어떻게 보고, 어떤 관계를 형성했는지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다.

 

루즈벨트는 자유주의적 자본가이고 백만장자여서 그의 정책은 결국 독점자본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 그의 뉴딜개혁들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틀을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았고, 더욱이 전투적 노동자계급이 대담하게 개혁을 수행하고 또 광범한 노동자계급 정당을 조직하는 것을 방해했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뉴딜정책의 근본목적이었다. 더욱이 루즈벨트의 케인즈주의 사상은 노동자계급 내에(마르크스주의를 물리치고) 위험한 개량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 초기에는 대다수의 독점자본이 루즈벨트를 지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기업가들은 그의 정치가 분명 파시즘을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징후는 많이 있었다. 루즈벨트의 유명한 전국산업부흥법은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국가에서 배워 미국상업회의소가 고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5년까지는 대부분의 금융자본이 루즈벨트의 자유주의적인 정책에 등을 돌리게 된다. 독점자본가들은 특히 그가 노동조합의 조직화에 호의를 보인 데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태도는 오픈 샵 제도를 취하고 있던 대규모 기간산업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월가의 세력은 루즈벨트의 미친 듯한 적이 되어 격렬하게 파시스트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36년, 1940년, 1944년에 그를 계속 재선시킨 것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인 미국 국민대중의 힘이었다. 특히 처음에 루즈벨트의 정책들이 파시스트적 색조를 강하게 띠고 있어서 월가의 강력한 후원을 얻고 있었던 동안에는, 공산당은 명백히 그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 당시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파업운동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1936년[의 선거]부터 당은 루즈벨트를 비판하면서도 강력히 지지했다.56)

미국 공산당은 루즈벨트의 근본적 한계와 뉴딜정책이 자본주의를 구출하고 노동자들을 계급협조주의로 포섭하는 정책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물론 유럽의 다수 국가가 공황을 맞아서 파시즘으로 치닫고 있을 때 미국 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파시즘의 부상을 막아내고 노동자들에 대해 재정지출 확대, 단협권리 인정, 최저임금제 보장, 노동시간 단축 등 양보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도록 한 점은 승리의 한 측면이다. 미국 공산당은 당시 노동자 투쟁을 주도했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 공산당은 인민전선의 전위가 아니라 미국 민주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루즈벨트가 파시스트적 입장을 취할 때는 “노동조합의 조직화와 파업운동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면 루즈벨트가 노동자들에 대해 타협적인 정책을 취할 때는 노동조합 조직화와 파업운동을 강화하는 노력을 자제했단 말이 아닌가?

루즈벨트의 계급타협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틀 내에 머물렀고, 전투적 노동자계급이 혁명정당을 조직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인식하고 있다면 선거에서 3회에 거쳐 루즈벨트를 지지하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파업투쟁과 조직적 무장을 강화해서 강력한 공산당의 토대를 구축했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 공산당은 인민전선을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하는 접근형태로 사고한 것이 아니라 독점자본의 한 분파인 민주당과의 계급협조 정책으로 전락시켰다. 미국 공산당은 파시즘을 막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의 정치적 독자성을 상실하기 시작하면서 “루즈벨트를 비판하면서도 강력히 지지”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물론 당시는 미국 공산당이 독자성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는 파시즘 국면이 끝나고 쏘련과 미국의 냉전이 시작되는 시기에도 계속되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의 인민전선은 디미뜨로프가 ‘우익 기회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는 것처럼,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 가공의 ‘민주주의적 중간단계’를 반독점 전략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했다. 인민전선이 왜곡되고 유로꼬뮤니즘을 수용해서 평화적 이행단계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유로꼬뮤니즘은 평화적 이행노선에서 기인하는 ‘민주주의적 중간단계’를 설정하고 있다.

 

세 당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아래 인민 대다수에 의한 독점자본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민주적인 격퇴는 사회주의의 출발이 아니라 단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장기적 과정의 시작일 뿐이다. 프랑스 공산당이 ‘선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 스페인 공산당이 ‘정치적 사회적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 이탈리아 공산당이 ‘민주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라고 부르는 것 모두가 그러하다.57)

 

유로꼬뮤니즘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단계 사이에 ‘이행으로서의 이행’이라는 ‘민주주의적 중간단계를 두고 정치혁명 없이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하려고 한다. 유럽의 유로꼬뮤니즘 정당들은 독자적으로 또는 사민당과의 연립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이러한 이행을 달성하려 하는 반면에 미국 공산당은 우익정당인 공화당을 포위하고 민주당과 협조하는 반독점 전략으로, 민주당 정권으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심화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달성하려고 하는 구제불능의 민주당 추종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 공산당의 강령은 독점자본의 한 분파인 민주당에 대한 언급은 삼간 채 상당 부분을 우익진영 즉 공화당에 대한 투쟁만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극우진영은 초국적 자본의 가장 반동적, 군국주의적, 인종적, 반민주주의적인 부분이 이끌고 있다. … 반면에 극우진영은 클린턴 집권 동안에 후퇴했으나 그것은 중대하게 지속적으로 방해받지 않았다. 클린턴의 집권은 극우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모든 사회적 프로그램에 대해 공격하도록 하고, 방대한 우익음모에 그들의 노력을 강화시켰다. 2000년에 조지 부시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1952년 이후로 처음으로 하원과 상원 둘 다를 공화당 사수파가 승리함으로써 이들 우익경향은 더욱더 우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극우진영은 독점자본의 가장 반동적인 부분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우익진영은 군산복합체, 정유와 에너지 산업, 그리고 제약회사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하이테크 산업, 금융자본, 그리고 거대한 제조회사와 월마트 같은 대형 할인점을 포함하고 있다.58)

 

그렇다면 미국 공산당은 독점자본의 또 다른 분파인 민주당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부상하고 있는 다른 경향은 주로 민주당의 리더십과 관련되어 있다. 이 경향은 사회적 불만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와 민족적 피억압자와 여성들 사이에서 민주당의 대중적 지지층에게 기꺼이 양보하려 한다. 이 경향은 일반적으로 세계 및 국내 사회 세력에 대해 덜 민주주의적인 사회적 힘에 대해 덜 독단적이고, 덜 오만한 정책을 옹호한다. 그들의 특정한 제국주의적 이해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이들 초국적 자본부문과 그들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다른 수단이 소진될 때까지 군사력 사용을 상당히 자제한다. 그들은 유엔과 다른 국제기구에 대해 더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내에서 그들은 경제규제와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복지정책, 파괴적인 자본주의 경쟁의 극단성을 피하기 위한 지속적인 필요성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에서 이러한 일반적인 구분은 노동자계급과 진보적 세력들을 위해 중대한 기회를 포함하고 있다.59)

 

미국 공산당은 독점자본 지배의 양대 분파인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를 과장하면서 민주당을 진보적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공화당 정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으로 타국인민들을 수없이 학살하고 고문하고 독재정권을 지지한 민주당의 제국주의 정책을 옹호하고 있다. 이러한 공산당의 인식에 의해 민주당은 공화당 진영에 맞서는 반독점 전략의 동맹자가 되었다. 미국 공산당은 계급동맹 전략에서 멘쉐비즘으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공화당 정부 하에서 민주당과의 일시적이고 전술적인 제휴를 배제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제휴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과 자주성, 변혁성을 분명히 한 가운데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이러한 일시적 제휴에 있어서도 주도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고 대중투쟁 과정에서 민주당의 기회주의성과 반노동자성을 끊임없이 폭로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공산당은 공화당 우익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민주당과의 전략적인 동맹을 추구하고 있고, 결과적으로 미국 민주당의 정치적 이중대로 전락했다. 미국 공산당은 2008년 오바마가 집권하자 적극적으로 환영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오바마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계속하고 있다. 대중들의 민주당에 대한 환상과 미국노총(AFL-CIO)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의 민주당에 대한 지지는 미국 공산당이 민주당에 대해 가진 환상의 결과다.

유로꼬뮤니즘은 혁명 없는 혁명의 꿈을 꾸고 있다. 유로꼬뮤니즘은 공산주의의 이름을 내건 사민주의 아류다. 전위당 노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자본주의 구조개혁론’을 선택한 유로꼬뮤니즘의 사상적 타락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과 의회주의로의 경도, 자본주의에 대한 굴종 등 정치적 타락을 낳았다. 유로꼬뮤니즘이 출발 시점에서 부르주아 국가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물신숭배와 굴종에 빠진 것은 유럽에서 연이은 혁명의 패배에 기인했다. 유로꼬뮤니즘은 이러한 혁명의 패배에 대해 맑스-레닌주의적으로 분석하고 혁명노선을 벼리는 대신에 우익적 이탈을 계속했다.

유로꼬뮤니즘은 발전한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자본주의 안정으로 더 이상 혁명은 있을 수 없다는 패배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럽에서 60년대 말과 70년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대중봉기는 발전한 자본주의 안정성을 뒤흔들어놓았다. 자본주의가 급격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에 빠지면서 불안정성이 폭발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로꼬뮤니즘은 제도권 정당처럼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희구했다. 유로꼬뮤니즘 초기 자본주의가 안정적이라는 예상은 패배주의로 인한 자포자기적 심리상태에서 나타났다면 이후 안정성에 대한 열망은 평화로운 이행을 위해 자본주의에서 급격한 계급 간 충돌은 없어야 한다는 반동적인 열망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에서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중심으로 민주당, 국민참여당과의 연립정권으로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하려는 개량주의 정당의 우경적인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이들 개량주의자들은 연립내각의 한 부분에 참여하여 진보적 정책을 펼칠 수 있다고 사고하고 있는데 사민주의와 유로꼬뮤니즘의 역사에서 부르주아와의 연합은 결국 독점자본을 강화하는 데 개량주의 정당이 들러리서거나 앞장서는 것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개량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은 항상 단일한 계급의 정치권력이다”라는 맑스-레닌주의의 정신을 철저히 망각하고 있다. 현대자본주의 국가권력은 독점자본주의의 지배의 도구이다. 연립과 통합, 또는 개량주의 정당 독자적으로 선거를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독점자본의 전체 사회 지배를 끊어내지 못하는 한 자본주의 권력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뿐이다.

유로꼬뮤니즘의 사상적, 실천적 배반사로부터 우리는 다시 한 번 맑스-레닌주의의 핵심 사상인 전위당 노선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확고하게 움켜쥐어야 한다는 분명한 정치적 교훈을 얻게 되었다. 노동자계급이여! 유로꼬뮤니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굳세게 정치적으로 전진하자!      


 

1) 송기철, “1970년대 자본주의의 위기와 유로꼬뮤니즘”, ≪현장에서 미래를≫ 제123호(2006년 9/10월호),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2) 영국에서는 1920년 7월 20일 대영공산당(CPGB)이 창당됐다. 이 대영공산당(CPGB)은 처음에는 꼬민테른 노선에 따라 활동을 했다. 하지만 1951년에 발표된 두 번째 강령부터는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이라는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채택하였고, 이 강령은 1952년 22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70년대, 80년대까지 대영공산당(CPGB)의 공식 노선이 되었다. 1977년에는 대영공산당(CPGB)의 유로꼬뮤니즘을 반대하여 처음으로 대영공산당에서 분화한 신공산당(NCP)이 창당됐다. 이후 80년대 후반에는 대영공산당 내에서 유로꼬뮤니즘을 반대한 정치세력들이 당의 공식노선인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폐기했다. 그러자 1988-1991년 사이에 대영공산당 내부의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가진 정치세력들은 새롭게 영국공산당(CPB)을 창당했다. 현재 대영공산당(CPGB)은 80년대부터 유로꼬뮤니즘을 반대하는 정치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 따라서 현재의 대영공산당(CPGB)은 유로꼬뮤니즘 노선과 관련이 없고, 영국공산당의 유로꼬뮤니즘 노선에 대한 비판은 과거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견지했던 대영공산당(CPGB)과 그 노선을 계승하고 있는 영국공산당(CPB)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편 맑스-레닌주의대영공산당(CPGB-ML)은 대영공산당(CPGB)에서 분화한 당이 아니라 영국노동당의 블레어노선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영국사회주의노동당(SLP) 내에서 맑스-레닌주의 노선을 주장하다가 추방당하거나 탈당한 정치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참고로 영국사회주의노동당(SLP)는 국가자본주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영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는 다른 당이다). 맑스-레닌주의대영공산당(CPGB-ML)은 자신들이 유로꼬뮤니즘 이전인 20년대, 30년대의 대영공산당(CPGB) 노선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당은 영국사회주의노동당(SLP)에 대해서 개량주의 노선과 반공산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대영공산당(CPGB)에 대해서도 반공산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면서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확고한 지지노선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신공산당(NCP)에 대해서도 유로꼬뮤니즘을 청산하였지만 선거에서 노동당을 지지함으로써 유로꼬뮤니즘 노선의 아류가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영국 공산주의 정치세력들의 분화는 크게 보아 유로꼬뮤니즘과 영국 노동당에 대한 태도, 과거 쏘련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와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태도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보면 된다.

 

3) “한국에서의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실천적 고민을 제기해오고 있다. 즉,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이에 따라 확대된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되, 어느 시기에 부르주아정권을 타도하고 대체권력을 수립하거나, 혹은 이중권력상태를 통해 부르주아정권을 타도한다는 전략적 관점을 갖고 현재의 투쟁을 배치해가야 하는가, 아니면 부르주아민주주의질서 내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최대한 밀어붙이고 대중투쟁을 중심으로 역량을 확대하면서 선거를 통해 집권하고 집권 이후 민주주의를 전면화한다는 전략적 관점아래 현재의 투쟁을 배치해가야 하는가하는 실천적 고민을 제기해오고 있다. … 새로운 경로는 기존 국가기구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파괴가 아니라 기존 국가기구의 가장 반동적인 억압기구와 이데올로기기구의 파괴와 기존국가기구의 정당한 기능의 재조직화, 자치기구의 확장과 이들의 통합화를 통한, 기존국가기구의 일련의 변형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경로는 부르주아억압기구와 이데올로기기구의 파괴를 그 안에 포함하는 기존국가기구의 변형과정이다.” (성두현, “사회주의로 가는 우리의 길”, ≪평등세상≫, 2003년 11월 7일.)

 

이 주장은 전통적인 사민주의 정치세력의 의회주의적 경로를 통한 집권과 사회주의 건설에 대해 비판적이고 대중투쟁을 강조하면서도, 부르주아 정권 타도와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러시아혁명의 경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라 시대에 맞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환상을 부여하고 현존의 국가기구를 변형하여 사용한다는 전형적인 유로꼬뮤니즘의 주장이다.

4) 이에 대해서는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쏘련 사회주의 붕괴, 계획과 시장의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자의 사상≫ 제1호(2010년 3월)를 참고하기 바란다.

 

5) 그리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 제18회 대회에서 그리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테제”, ≪노동사회과학≫ 제2호(2009. 6.), 노사과연, p. 394.

 

6) 그람시 노선에 대해서 여기서 전체를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옥중수고≫에서 제시한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을 가지고 그람시가 유로꼬뮤니즘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유로꼬뮤니즘 세력의 주장에 대해 핵심적으로 비판해 보겠다. 그람시의 진지전 노선에서 유로꼬뮤니즘 세력들이 가장 많이 인용하는 문장은 “한 사회집단은 정치권력을 쟁취하기 전에 이미 ‘지도적’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그것이 권력 쟁취를 위한 주요 조건의 하나다).” (쥬세뻬 피오리, ≪안토니오 그람쉬≫, 이매진, 2004, p. 528.)라는 부분이다. 이 주장은 뒤에서 이렇게 연결되고 있다. “그 뒤 권력을 행사할 때, ‘지배적’이 되는 것이지만, 비록 그 권력을 아무리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계속해서 ‘지도적’이어야 한다.” (같은 책, p. 528.) 그람시의 진지전 사상은 권력장악 이전에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장악해야만 한다는 지점으로부터 유로꼬뮤니즘 정치세력들이나 이후 심지어는 시민운동세력조차 자본주의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노선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람시의 진지전 사상은 그가 무쏠리니 파시즘 체제의 감옥에 갇히기 이전의 이탈리아 사회당 내부의 노선투쟁이나 꼬민테른 내에서의 노선투쟁과 긴밀하게 연결하지 않고 특정 문장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해서 왜곡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유로꼬뮤니즘의 근거로 사용되는 문장에서도 진지전이 ‘권력쟁취를 위한 주요 조건의 하나’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람시에게 진지전은 국가권력을 결정적으로 타도하는 정치혁명과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자본주의 국가권력 타도와 권력쟁취로 가는, 그리고 쟁취한 권력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개념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 그람시가 수감 이전 정치투쟁을 하던 시기와 혁명 패배 이후 수감 이후에 정치노선이 바뀐 것이라는 반박을 할 수 있고, 또 그람시는 파시즘의 검열 때문에 은유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철저하게 레닌주의에 바탕을 둔 볼쉐비끼 노선에 충실하게 복무하려 하고 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사회당(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으로 분화) 내부의 보르디가로 대표되는 극좌노선이 파시즘 체제 하에서 통일전선을 거부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공세이론’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람시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대두에 대해 경시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차이에 대해 무시하던 이탈리아 공산당 내 다수파인 지도자들에 대해 반대했다.

 

이탈리아공산당 지도자들은 파시즘과 전통적 민주주의 정당들의 차이를 가볍게 봤다. 그리고 그 위험성을 간파하지 못한 탓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유린하려고 하고 있던 ‘부르주아 독재’라는 문제를 미처 제기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코민테른의 새로운 지도방침(중간 목표를 전환하고 공격노선에서 방어노선으로 이행할 것,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라 민주적 자유의 방어가 현재의 목표라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아울러 동맹이나 다른 세력과 연합할 필요성은 더더욱 이해되지 못했다. 이탈리아공산당 다수파는 이런 세력이 부르주아 전선의 좌파를 담당하는 세력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람쉬는 파시즘의 새로운 성격, 그것이 대표하는 위험의 심각성, 코민테른이 제기한 방어노선의 정당함을 이해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같은 책, pp. 354-355.)

 

이 주장대로라면 그람시의 입장은 꼬민테른 7차 대회에서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그람시는 레닌주의적 관점에 서서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을 대립시키는 뜨로츠끼의 영구혁명론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의 뒷부분이 그람시의 진지전 사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또 유로꼬뮤니즘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서구의 국가기구와 시민사회의 관련에 대한 주장인데, 유로꼬뮤니즘 세력들은 뜨로츠끼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러시아 국가에 대비되는 서구 사회의 차이를 분석하고 있는 글의 전반적 맥락을 제거하고 특정 부분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운동의 영구적 성격에 대한 브론슈타인의 이론(뜨로츠끼의 영구혁명: 필자 주)이 기동적 이론의 정치적 반영이 아닌가―다시 말하여 궁극적으로는 국민적 생활의 구조가 아직 미숙하고 느슨하며 ‘참호 혹은 요새’로 될 능력이 없는 나라의 일반적ㆍ경제적ㆍ문화적ㆍ사회적 조건을 반영한 것―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경우 겉으로는 ‘서구적’이었던 브론슈타인은 사실상은 세계시민적일 뿐―즉 피상적으로만 민족적이고 또 피상적으로만 서구적, 혹은 유럽적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일리치[레닌]는 심오하게 민족적이며 심오하게 유럽적이었다. 브론슈타인의 회고록을 보면 그가, 자신의 이론이 15년 후에나 옳았음이 증명되었다는 풍자를 듣고 그것을 또 다른 풍자로 응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 자체로서는 15년 전이건 15년 후이건 좋은 것일 수 없었다. 귀차르디니의 이야기에 나오는 고집쟁이의 경우처럼 그의 생각은 다소는 옳은 것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추상적인 실천적 예측에서는 옳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네 살짜리 여자 아이를 보고 ‘저 아이는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는 그 아이가 스무 살이 되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내 그럴 줄 알았느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아이가 네 살 때 그 나이로도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아이를 강간하는 그 사람의 행동을 옳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일리치는 1917년의 동구에서는 성공적으로 전용된 기동전이, 서구에서는 가능한 유일한 형태인 진지전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 같다. … 그러나 일리치는 자신의 공식을 확장시킬 시간이 없었다. 물론 시간이 있었더라도 단지 이론적으로만 확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본적 과제는 일국적(一國的)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그 공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지형에 대한 탐색과 시민사회의 요소들로 표현되는 참호와 요새의 요소에 대한 확인이 요구된다.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모든 것이었고 시민사회는 아직 원시적이고 무정형한 것이었지만,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고 국가가 동요할 때에는 당장에 시민사회의 견고한 구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국가는 단지 외곽에 둘러쳐진 외호(外濠)에 불과하며 그 뒤에는 요새와 토루(土壘)의 강력한 체계가 버티고 있었다. 물론 요새와 토루의 수는 나라마다 다를 것이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개의 나라에 대한 정밀한 탐색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Ⅰ≫, 거름출판사, 1995, pp. 249-251.)

 

물론 이 저서의 편집자는 주에서 그람시의 뜨로츠끼에 대한 비판은 역설적으로 뜨로츠끼가 공세론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중국혁명과 스페인 내전에서 뜨로츠끼는 영국혁명론의 공식에 따라 반식민지 국가인 중국과 파시즘 하의 스페인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국민당 좌파와의 통일전선을 계급협조주의로 비판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노선을 곧바로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람시의 비판은 정당하다 할 수 있다. 그람시는 진지전이라는 통일전선에서 농민과의 계급동맹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는데, 러시아의 국가권력이 서구와 같은 시민사회에 둘러싸여 있지는 않다는 그람시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기동전적인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으로 결정적으로 성공했으나 이미 이전부터 농민과의 계급동맹을 가장 중요하게 사고하고, 혁명 이후에도 권력유지에 있어서 농민과의 계급동맹을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한 것을 봤을 때, 러시아 혁명이 진지전 없이 기동전만으로 이뤄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람시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문제를 일국혁명과 세계혁명의 관계라는 문제에서 끌어내는 것으로 봤을 때, 국가권력 타도라는 혁명의 문제를 당연하게 전제하고 그 혁명을 성취하고, 혁명 이후에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진지전의 개념을 모색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이 기동전만으로 이뤄지고 서구에서의 혁명은 진지전으로 주되게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유로꼬뮤니즘 정치세력들이 그람시의 주장을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왜곡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 측면은 있다. 또한 국가권력 쟁취 이전에 공장평의회에 대해 “권력문제의 본질을 생산적 조직체 속에서 포착해야 한다.”(같은 책, p.43.)는 그람시의 주장 역시 이렇게 왜곡될 소지가 있다.

 

보르디가는 전술적으로 의회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무분별한 ‘공세이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국가권력 타도 없이 공장평의회에 대해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그람시에 대해 비판한 점은 옳았다. 그러나 초기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그람시가 적극적으로 자기비판하고, 옥중수고에서 자생성 이론에 대해 비판하고, ‘현대의 군주’라는 은유적 표현이지만 전위정당에 대해 적극 강조한 점을 봤을 때 유로꼬뮤니즘이 이러한 점을 들어 그람시로부터 유로꼬뮤니즘 노선을 빌려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파시즘의 감옥 속에서도 혁명의 패배를 평가하고 다시금 혁명을 모색했던 그람시에 대한 철저한 왜곡이다.

 

7) 노동자세계당, “유로꼬뮤니즘의 의미”, 1977년 7월 11일, http://www.workers.org/marcy/cd/sameuro/euro/euro00.htm.

 

8) “1936년 2월에 있을 다음 선거에 대비하여 좌익 정당들은 이른바 ‘인민전선’ 명부를 작성했다. 파시즘 및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을 고려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자들 및 일부 부르주아적 분자들과 동맹을 형성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평화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사상인 인민전선 전략은 제7차 꼬민테른 총회[1935년]에서 개발되었다. 이 강령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의 구성을 시도하고, 때로는 공산당원들의 부르주아 정부 참여를 시도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은 그리하여 기층민중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계급협조주의적 지도부도 포괄한 동맹이었고, “나쁜” 파쇼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좋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을 지원한 동맹이었다. 이 노선은 G. 디미뜨로프(Dimitroff)에 의해서, 꼬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의 그의 모든 면에서 신중한 연설에 의해서 명시되었다.” (진보노동당, “스페인 내전(1936-1939)의 교훈”,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 노사과연, 2009, pp. 160-161.)

 

진보노동당의 이 글은 주로 뜨로츠끼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의 노선과 스페인 내전에서 취한 반동적인 행보가 스페인 내전 패배의 주요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들에 의한 역사왜곡에 대해 폭로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민전선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맑스-레닌주의 정당에서 인민전선을 비판하는 것은, 이후에 보겠지만 인민전선의 원칙과 인민전선을 잘못 적용함으로써 몰계급적인 유로꼬뮤니즘 정당으로 타락한 미국공산당의 경험과 사례를 뒤섞어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9)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히틀러가 1930년 1월에 연립내각의 수상이 되고, 1933년 2월 27일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과정에서 히틀러와 당시 국회의장이던 헤르만 괴링, 요제프 괴벨스 등이 나찌당원이었던 반 데르 류베를 내세워서 국회의사당에 방화를 하게 하였다. 파쇼정권은 당시 독일에서 꼬민테른 국제활동을 하고 있던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인 디미뜨로프, 바실 따네프 등이 이 사건에 직접 관련되고 그 배후에 독일 공산당이 있다고 조작함으로써 당시 파시즘에 대한 최대의 저항세력인 독일 공산당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디미뜨로프는 1933년 12월 파시즘 법정에서 이 사건이 조작임을 공개적으로 폭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원칙을 선전ㆍ선동하였다.

 

10) G. M. 디미트로프, “법정 최후진술 기록”,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하여 통일전선 연구≫, 거름, 1987, pp. 61-62.

 

11) W. Z. 포스터, ≪세계사회주의 운동사 2≫, 동녘, 1988, pp. 147-149 참조.

 

12) G. M. 디미트로프,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이루기 위해(1935년 8월 13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7회 대회에서의 보고 맺음말)”,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하여 통일전선 연구≫, pp. 175-176.

 

13) G. M. 디미트로프, 같은 글, p. 178.

 

14) G. M. 디미트로프,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인민전선”, 같은 책, p. 235.

 

15) 같은 글, pp. 235-236.

 

16) 레닌은 1920년 7월 28일 꼬민테른 2차 대회에서 “민족ㆍ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를 발표하였다. 이 테제에 대해 로이는 식민지에서 중간층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세력과 노동자, 농민의 혁명운동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으로 유지하면서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세력과 협정이나 동맹을 맺어야 하고, 선진국 프롤레타리아의 원조에 의해 후진국이 자본주의적 발전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쏘비에뜨 체제로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러한 국가에서의 투쟁의 객관적 성격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의 단계에 머물러 있음은 분명하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제국주의와의 타협적인 속성을 봤을 때,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표현 대신에 민족혁명운동이라고 하는 것으로 했다.

 

17) G. M. 디미트로프,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추구하는 투쟁에서의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임무(1935년 8월 2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7회 대회에서의 보고)”, 같은 책, pp. 142-143.

 

18) 1927년 중국 무한에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합작하여 세운 혁명정부로 봉건군벌과 결탁하여 남경정부를 수립한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에 맞섰다. 이 무한정부는 이후에 장개석에 굴복한 국민당 좌파의 배신으로 인해 장개석 군대에 처절하게 패배했다.

 

19) 프랑스에서는 1936년 4월 26일-5월 3일 총선에서 사회당의 레옹 블룸을 총리로 해서 사회당과 급진당이 연합한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됐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인민전선 정부에 연립정권으로 참여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디미뜨로프는 이와 관련하여 1936년 5월 11일 “프랑스 문제에 대하여”에서 연립정부 구성이 인민전선의 성과지만 현재의 정세에서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에 참가하는 것은 연립정권의 한 축인 급진당 같은 부르주아와의 계급협조이기 때문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만약 그 정부가 파시즘과 반동에 반대하여 단호하게 투쟁하는 정부로 변할 수 있는 조건하에 있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꼬민테른 7차 대회에서 지적된 가장 중요한 계기이다. 우리가 참가하는 것은 특정한 조건하에서는 가능하다-이것은 대회에서 언급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러한 조건은 아직 충족되어 있지 못하다. …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어떠한 슬로건을 필요로 하는가? 나는 그것을 두 마디로 정식화하겠다. ‘모든 것을 인민전선을 위해, 모든 것을 인민전선에 의해’, 즉 우리는 모든 정치적ㆍ전술적 조치ㆍ의회 내의 또한 의회 밖의 조치, 인민전선의 발전, 지방위원회의 조직, 군대 내의 조직, 농민 사이의 조직, 필요에 따라 인민전선을 방위하고,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그것을 발전시켜 강화한다고 하는 프랑스와 프랑스 인민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필요에 따라 수행되어야 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G. M. 디미트로프, “프랑스 문제에 대하여”, ≪코민테른 자료선집 3≫, 동녘, 1989, pp. 177-178.)

 

여기서도 인민전선이 계급협조와 무관하고, 지방위원회와 군내 조직, 농민 사이의 조직 등에 대한 강조를 봤을 때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무장해제’를 주장하는 노선이라는 비난과 무관함을 알 수 있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스페인에 대한 불간섭 정책을 두고서 인민전선의 오류라는 비판이 있는데 그것 역시 인민전선에 내재한 계급협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공장점거 투쟁과 대중투쟁으로 인해 인민전선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레옹 블룸 정부는 노동자계급의 공장점거 파업을 두려워하고, 스페인 혁명을 지원한다면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압박에 굴복하여 스페인혁명에 대한 불개입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레옹 블롬 정부는 독점자본의 자본유출 공세에 굴복하면서 결국 1년 만에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 인민전선 정부의 수립은 인민전선의 올바름을 명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다만 인민전선 정부의 수립 이후에 프랑스 공산당이 독자적인 대중투쟁으로 주도성을 발휘하면서 대중투쟁을 혁명적으로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한 지점은 인민전선의 적용과정의 문제로 독자적으로 평가돼야 하는 문제이다.

 

20) G. M. 디미트로프, “파시즘의 공세와, 파시즘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의 통일을 추구하는 투쟁에서의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임무(1935년 8월 2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7회 대회에서의 보고)”, ≪반파시즘 통일전선에 대하여 통일전선 연구≫, p. 138.

 

21) G. M. 디미트로프, 같은 글, p. 139.

 

22) 소볼레프ㆍ콘스탄티노프 외 지음, ≪반제민족통일전선 연구,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및 각국의 혁명사례 분석≫, 이성과 현실, 1988, p. 25.

 

23) 같은 곳.

 

24) 민정구 엮음, ≪통일전선론≫, 백산서당, 1987, p. 86.

 

25) 같은 책, pp. 86-87.

 

26) 산티아고 까리요, ≪유로꼬뮤니즘과 국가≫, 새길, 1992, pp. 15-16.

 

27) 레닌, ≪국가와 혁명≫, 논장, 1994, pp. 50-51.

 

28) 산티아고 까리요, 같은 책, p. 200.

 

29) 같은 책, p. 23.

30) 같은 곳.

31) 같은 곳.

32) 같은 책, p. 24.

 

33) 칼 마르크스ㆍ프리드리히 엥겔스 저, 김대웅 역, ≪독일이데올로기≫, 두레, 1989, pp. 91-92.

 

34) 레닌, ≪국가와 혁명≫, p. 18.

 

35) 엥겔스, “엥겔스가 브레슬라우의 베르너 좀바르트에게”,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6권, 박종철출판사, p. 579.

 

36) 산티아고 까리요, 같은 책, p. 34.

37) 같은 책, pp. 63-64.

38) 같은 책, p. 66.

39) 같은 책, p. 67.

40) 같은 책, p. 71.

41) 같은 곳.

42) 같은 책, p. 73.

43) 같은 책, pp. 84-85.

44) 같은 책, p. 172.

45) 같은 책, p. 194.

 

46) 거스 홀, “사회주의 미국”, 2001년 9월 20일, http://cpusa.org/socialism-usa-gus-hall.

 

47) 거스 홀, 같은 글.

48) 같은 글.

49) 같은 글.

 

50) 레닌, ≪국가와 혁명≫, p. 109.

 

51) 국내에는 ≪민주주의와 독재≫(최인락 옮김, 연구사, 1990)로 번역되어 있다.

 

52) F. 끌로댕, ≪유로꼬뮤니즘과 사회주의≫, 새길, 1992, p. 128.

 

53) 같은 책, p. 129.

 

54) 이수미, “이탈리아 좌파정당의 쇄신 좌파민주당과 재건공산당의 연합전략 비교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3학년도 석사학위 청구 논문 참조.

 

55) 야마시타 이사오(山下勇男)/사에키 후미오(佐伯文夫)(사회주의 연구가ㆍ활동가집단 ‘사상운동’ 회원) 저, 채만수 역, “일본의 맑스주의 운동과 일본 공산당”, ≪진보평론≫ 8호(2001년 여름)를 참조.

56) W. Z. 포스터, 같은 책, pp. 156-157.

 

57) F. 끌로댕, 같은 책, p. 119.

 

58) 미국 공산당, “미국 사회주의”(미국 공산당 강령), 2006년 5월 19일,

     http://www.cpusa.org/party-program.

 

59) 미국 공산당, 같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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