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과 중-쏘 논쟁

 

문영찬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연구위원

 

* 중-쏘 논쟁에 관련된 문건들은 Documents of the Sino-Soviet Split, http://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ino-soviet-split/index.htm을 참조하기 바란다.

 

 

 1.머리말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사회주의의 몰락은 바로 지금의 현실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가 한순간에 이루어지고 완료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세기의 수많은 운동과 혁명들 그리고 건설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역사적 고찰과 연구의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단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리는가에 의해 바로 지금의 사회주의 운동이 규정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청산주의를 거부하고 20세기 사회주의의 인류사에 대한 공헌을 긍정하는 것이다. 착취의 폐지, 민주주의의 신장, 정치적 평등, 수많은 민족해방들 등 20세기 사회주의는 인류사에 있어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성취를 남겼다. 이렇게 20세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공헌을 인정하는 것을 토대로 왜 20세기 사회주의가 무너졌는가를 탐색해야 한다. 어떤 오류가 축적되었고 언제부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이 질곡에 처하게 되었고 어떤 지점에서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가 왜곡되기 시작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서 분기점이 되었던 것은 1956년 쏘련 제20차 당대회에서의 스딸린에 대한 탄핵이었다. 바로 그전까지 인류사회에 엄청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었고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추앙받았던 스딸린이 흐루쉬쵸프에 의해 한순간에 희대의 독재자, 잔혹한 권력자로 낙인찍히고 탄핵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탄핵을 정당화한 것은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균열이 시작되었고 이후 흐루쉬쵸프는 사회주의 건설, 세계 변혁, 당의 성격, 국가의 성격 등에서 전반적인 수정주의를 노골화한다. 이에 대해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이른바 중-쏘 논쟁이 시작된다. 20차 당대회 이후 두 번에 걸쳐 세계 공산당ㆍ노동자당 회의가 열려 공통의 선언과 성명을 발표하여 균열은 봉합되었으나 1960년대에 들어서 중국과 쏘련 간에는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다. 이러한 중-쏘 논쟁은 수많은 쟁점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는 현대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쏘 논쟁의 전 과정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즉 중국과 쏘련의 논쟁은 단지 이론적인 논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균열을 가져왔고, 이는 중국과 쏘련의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한다. 이로 인하여 세계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으로 분열되었고,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고양 추세는 약화되고, 미제국주의 등 제국주의 진영은 세계적 역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되었으며, 이는 이후 쏘련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 등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볼 때, 중-쏘 논쟁은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고양의 정점에 있었으며 동시에 쇠퇴의 시작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등장하지 않고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이 유지되었다면 1970년대의 세계공황이 제국주의 진영에서 새로운 혁명으로 귀결되었을 것이지만, 상황은 거꾸로 진행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이렇게 중-쏘 논쟁은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을 의미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정주의의 등장에 맞서 원칙을 지키려는 많은 노력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논쟁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21세기 지금의 현실에 맞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중-쏘 논쟁은 세계적인 논쟁이다. 노동계급운동을 규정하는 대원칙으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세계 변혁에 대해 추상적인 원칙으로가 아니라 현실 정치적인 의미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논쟁의 경과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노동계급운동, 사회주의 운동은 그 본성에서 국제적인 운동이다. 더구나 지금 시기 제국주의 단일 체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제국주의 질서와 정면 대결함을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21세기 사회주의 운동은 국제적인 운동이 될 수밖에 없고 주체의 면에서는 국제주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중-쏘 논쟁의 교훈은 막대하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중-쏘 논쟁이 쏘련 수정주의의 등장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중국 측에서는 쏘련 내의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수정주의를 배태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쏘련 내의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정식화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 점을 밝히는 것은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이다. 이 글에서는 이에 대해 시론적으로 입장을 밝힐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못하고 향후의 연구 과제로 남겨둔다.

 

 

 2. 쏘련 수정주의 등장

 

쏘련에서 수정주의가 하나의 이론적 조류로, 나아가 정치적 조류로 등장한 것은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이다. 20차 당대회는 스딸린에 대해 전면적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에 대해 평화적 경로를 강조했다. 스딸린에 대한 전면 부정은 개인숭배 비판이라는 명목 하에 진행되었는데 실은 스딸린 시대 전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이는 30년에 걸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전면 부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에 따라 1930년대의 숙청이 전면 부정되었다. 1930년대 당시에는 나찌와 연계하여 쏘비에뜨 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으로서 규정되었던 사람들이 흐루쉬쵸프에 의해서는 스딸린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로서 규정되었던 것이다. 흐루쉬쵸프는 인민의 적이라는 규정 하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고 하여 스딸린을 전면 탄핵했다.

이에 대해 불가닌, 까가노비치 등 많은 당내 세력들이 반발하였지만 흐루쉬쵸프는 이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노선을 관철시킨다. 이후 흐루쉬쵸프는 수정주의 노선을 노골화한다. 평화공존을 쏘련 대외정책의 총노선으로 규정하고 미제국주의와 화해를 모색한다. 뿐만 아니라 당의 성격을 전인민당(‘전 인민의 당’)으로 규정하여 노동자계급의 전위당이라는 계급적 성격을 없애버렸다. 또 국가의 성격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전인민국가(‘전 인민의 국가’)론을 내세웠는데 쏘련에는 더 이상 억압해야 할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경제에서는 시장친화적인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러한 흐루쉬쵸프 수정주의가 등장한 배경을 살펴보자. 그리스 공산당의 “사회주의에 관한 테제”에서는 수정주의의 등장원인으로 2차 대전 후 발전하는 생산력에 맞추어서 공산주의적 생산관계를 심화시키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 이론적으로 공산주의적 관계의 심화와는 반대방향으로 전개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가치법칙의 확대적용, 상품-화폐관계의 확대 등이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일정하게 타당하다. 2차 대전 후 급속하게 발전하는 생산력에 맞추어서 생산관계를 개선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협동농장 사회화의 제고, 국가와 국유기업 간 관계의 개선, 국유기업과 국유기업 간 관계의 개선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경제의 영역에서 수정주의 발생의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치ㆍ사상적인 면에서 볼 때 수정주의가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발생했는가이다. 먼저 외부적 요인으로는 제국주의의 압력이 1차적이다. 미제국주의가 강요하는 거대한 군비경쟁, 파괴공작, 그리고 회유 등이 사회주의 진영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흐루쉬쵸프가 평화공존을 대외정책의 총노선으로 내세운 것,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사회주의 진영에서 이탈하여 미제국주의와 동맹을 맺고 원조를 받은 것 등을 볼 때 제국주의의 압력이 쏘련에서 수정주의 발생의 한 원인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적 요인을 제외하고 내부적 요인을 본다면 그것은 쏘련 사회 자체의 성격, 즉,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라는 사회주의 자체의 취약성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회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로 특징지워진다. 그만큼 견고성이 약하고 구사회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회주의 사회, 쏘련 사회의 모순을 보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 남아 있었고, 상품-화폐 관계가 남아 있었고, 또 농업의 경우 전면적인 사회화가 아니라 협동조합적 소유로 남아 있었다. 특히 농민들은 협동농장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상당한 양의 개인 텃밭에서 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는 농민들에게 소소유자적인 본성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이 겉으로 드러난 구사회의 잔재라면 국유기업의 경우도 많은 모순이 있었다. 국유기업의 경영층이 자재와 인원을 빼돌려 사기업처럼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국유기업은 전인민소유로서 상당히 높은 소유형태임에도 이렇게 구사회의 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행기로서 사회주의 단계는 아직 구사회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자본주의로 회귀할, 즉 복고(復古)의 위험이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흐루쉬쵸프의 수정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회주의 사회의 취약성을 기초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공업기업의 국유화, 농민의 협동조합화로 인해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성립했지만 아직 그 견고함이라는 점에서는 많이 부족했던 것이다. 쏘련은 혁명 이후 30년간 공산주의를 향한 방향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가 수정주의의 발생으로 역전되었다고 한다면,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혁명 후 기업들을 국유화했으나 농업을 협동조합화하지 않았고 이후 국유기업조차 자본주의식으로 운영하면서 이른바 시장사회주의로 되었다. 이는 혁명의 승리가 바로 사회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만큼 사회주의라는 이행기는 취약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로부터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에 이르는 시기까지 사회주의는 하나의 이행기로서 치열한 계급투쟁의 과정이 되어야 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성립한 후에도 계급사회의 잔재와 끊임없이 싸우는 것을 통해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로 성장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흐루쉬쵸프 수정주의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라는 사회주의 사회의 주요모순이 정확히 처리되지 못하는 가운데 전문가층, 공장 경영층, 관료들 등을 토양으로 하여 발생했던 것이다.

 

 

 3.중-쏘 논쟁의 경과

 

중-쏘 논쟁의 발단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56년 쏘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쉬쵸프의 스딸린 비판이다. 이른바 비밀연설이라 불리는 흐루쉬쵸프의 연설에서 그는 스딸린을 잔혹한 독재자로 묘사하고 인민의 적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고문 등을 받아 희생되었다고 했다. 그의 연설문 전체는 바로 이러한 스딸린의 악행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바로 전날까지 쏘련 사회주의 건설의 공로자, 2차 대전에서 뛰어난 군사지도자,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사람이 한순간에 탄핵된 것이었다. 그러나 스딸린에 대한 인민의 태도를 고려하여 흐루쉬쵸프는 개인숭배비판이라는 정치적 태도를 취한다. 이에 대해 각국의 공산당들은 개인숭배 비판이라는 점에 동의하였지만 세계 사회주의 운동과 진영은 서서히 균열되기 시작한다. 1956년 4월에 중국 공산당은 스딸린에 대해 공적이 1차적이고 오류는 2차적이라는 입장을 발표한다. 1957년에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가 열려 공동의 선언을 발표하고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을 도모하지만 이후 흐루쉬쵸프는 수정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1960년에 다시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가 열려 공동성명을 발표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중국과 쏘련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후 1960년에 쏘련이 중국과의 경제건설 협정을 파기하고 1,000여 명의 기술자들을 일방적으로 중국에서 철수시키고, 특히 쿠바위기에서 쏘련이 미국에 양보하여 쿠바에 대한 미국의 검열을 허용한 데 대해 중국이 반발한다. 쿠바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임을 비판한 것이다. 또한 중국은 쏘련의 평화공존 노선이 세계 피억압민족들의 혁명투쟁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1962년 쏘련 공산당 강령에서 ‘전인민국가’, ‘전인민당’이라는 노선이 등장한 것에 대해 비판한다. 1963년 논쟁이 격화되고 논쟁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이라는 차원으로까지 발전한다. 쏘련에서 전당원에게 공개편지를 발표하여 중국을 비난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중국은 이 공개편지에 대해 수차례에 걸쳐 체계적으로 반박한다. 이때부터 중국은 흐루쉬쵸프를 공식적으로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세계 사회주의 진영은 이론적 대립을 넘어서 정치적 분열의 길로 접어든다. 1964년 흐루쉬쵸프가 실각하고 이후 중국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다. 흐루쉬쵸프의 실각 이후에 등장한 브레즈네프 등의 쏘련 신지도부의 노선에 대해 중국은 ‘흐루쉬쵸프 없는 흐루쉬쵸프주의’라는 입장을 발표하고 이후 1960년대 말 중국과 쏘련의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후 중국과 쏘련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되고 사회주의 진영 대 제국주의 진영의 대립에서 주도권이 제국주의 진영 측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러한 중-쏘 논쟁의 경과는 수정주의의 등장이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 재앙이었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철저히 무너져가는 과정이었다는 것, 그로 인하여 제국주의 세력들이 재기할 수 있었다는 것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쟁점의 변화들을 보면 처음에는 스딸린이라는 지도자에 대한 평가의 차이에서 비롯하여 평화공존 노선을 바라보는 태도,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 당의 성격, 국가의 성격, 나아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으로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중-쏘 논쟁의 구체적 쟁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과연 무엇이 문제였고 올바른 입장은 무엇이고 이러한 세계적 대논쟁에서 끌어내야 할 교훈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4.중-쏘 논쟁의 쟁점들

 

1) 평화공존 노선

 

중-쏘 논쟁 초기에 가장 격렬했던 쟁점은 평화공존의 문제였다. 이것이 문제로 되었던 것은 쏘련과 미국의 관계가 세계정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흐루쉬쵸프는 2차 대전 후 핵무기의 존재로 인하여 근본적 변화가 생겼으며 평화공존 노선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아가 평화공존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흐루쉬쵸프는 핵무기의 존재로 인하여 세계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전쟁이라도 인류파멸의 시작이 될 수 있고 따라서 평화공존이 사활적인 문제라고 했다. 심지어 흐루쉬쵸프는 평화공존의 원칙이 “모든 현대 사회의 생활의 기본법칙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격렬하게 반발했는데 평화공존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첫째, 세계 사회주의 진영 나라들 간의 단결과 연대의 증진, 둘째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의 평화공존, 셋째, 약소민족들의 민족해방 투쟁에 대한 지지”가 총노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중국은 평화공존의 문제는 서로 다른 체제 간의 문제에 국한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평화공존은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의 문제에 국한되어야 하며 제국주의와 민족해방투쟁 간에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중국은 흐루쉬쵸프의 평화공존 노선이 레닌의 평화공존 노선과 다름을 지적했다. 흐루쉬쵸프는 평화공존 노선을 총노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제국주의와의 평화적 경쟁, 심지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 등을 주장했지만 레닌은 투쟁을 통하여 제국주의와 평화공존을 이루고 피억압인민과 피억압민족의 해방투쟁은 전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을 중국은 주장했다. 중국은 평화공존은 사회주의 나라 외교정책의 총노선이 될 수 없고 사회주의 나라의 외교정책은 근본적인 원칙을 체현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평화공존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중국은 평화공존은 인민들의 혁명투쟁을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흐루쉬쵸프가 각국 민족들의 해방투쟁의 승리와 독립이 평화공존 덕분이라는 주장을 하였던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평화공존 노선을 둘러싼 중국과 쏘련의 논쟁은 2차 대전 후의 세계정세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로 핵무기의 등장으로 인한 역관계의 변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의 격멸과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성립, 각국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들로 인한 진보의 흐름이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쏘련은 핵무기를 논리의 핵으로 삼아 평화공존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고, 중국은 그것이 각국에서 계급투쟁의 포기, 계급협조로 귀착되어서는 안 되며 나아가 약소민족들의 해방투쟁을 희생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교훈은 과연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인데, 평화공존 노선이 총노선이 되면 그것은 계급투쟁의 포기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는 쏘련 수정주의, 유로꼬뮤니즘 등이 보여준 것과 같다. 중국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근본원칙은 평화공존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며, 총노선은 그것을 반영하여 세계 사회주의 진영 간에는 단결과 연대,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에는 평화공존, 약소민족들의 민족해방투쟁과 피억압인민의 해방투쟁에 대해서는 지지와 원조 등으로 주장한 것은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2) 스딸린에 대한 평가

 

중국과 쏘련의 논쟁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쟁점은 스딸린에 대한 평가였다. 흐루쉬쵸프의 이른바 비밀연설문은 이후 스딸린 격하라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격하가 아니라 전면 탄핵이었다. 잔혹한 독재자로 묘사된 스딸린은 더 이상 공산주의자라고 볼 수도 없고 나아가 쏘련과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는 더더욱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정치적으로 포장하여 개인숭배 비판이라고 한 것은 교묘한 것이었다. 문제는 개인숭배가 아니라 스딸린이 지도자로 있었던 레닌 사후 30년간의 쏘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전면 부정되었다는 것이다.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쉬쵸프의 연설 이후 각국 공산당은 개인숭배 비판에 대해 동의하였지만 30년간의 쏘련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전면 부정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노선의 문제였다. 이에 따라 중국과 알바니아 등이 반발하게 되고, 1963년 중국은 ≪홍기≫에 “스딸린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게재하여 스딸린 문제에 대한 입장을 체계적으로 밝혔다. 여기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투쟁이 지도자, 당, 계급, 그리고 대중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있고 민주집중제라는 공산주의 원칙을 침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스딸린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에 대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의 문제는 스딸린 개인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레닌 사후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어떻게 요약할 것인가의 문제임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스딸린 또한 오류는 있었는데, 어떤 것은 회피될 수 있었고 어떤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선례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 때문에 회피될 수 없었다고 분석했다. 반혁명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반혁명분자들이 정당하게 처벌받았지만 동시에 무고한 사람들이 잘못되어 희생되었음을 지적했다. 그리하여 스딸린의 공적과 오류를 비교할 때, 그의 공적이 오류를 압도하며 스딸린은 일차적으로 올바랐고 그의 잘못들은 이차적이라고 주장했다. 쏘련의 스딸린 비판에 대해서는 그들이 스딸린의 삶과 저작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적 및 과학적 분석을 하지 못하고 올바름과 그릇됨 간의 어떠한 구분도 없이 그를 완전히 부정했다고 비판했다. 즉 쏘련의 지도부가 스딸린을 동지로서가 아니라 적으로 대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개인숭배와 싸운다는 구실 하에 1) 당의 지도자인 스딸린을 당과 프롤레타리아트, 인민대중과 대립시켰고, 2) 프롤레타리아 당,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회주의 체제를 더럽혔고, 3)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한 혁명가들을 공격하고 수정주의자들이 당을 찬탈하는 길을 열었으며, 4) 형제당과 나라들의 내정에 간섭하고 그 지도부들을 파괴했고, 5) 맑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형제당들을 공격하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분열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중국의 비판은 흐루쉬쵸프의 스딸린 탄핵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고 나아가 흐루쉬쵸프를 수정주의자라고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스딸린은 레닌 사후 30년간 쏘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이끌었고 나아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세계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중국의 경우 스딸린과 쏘련의 존재로 인해 혁명에 많은 도움을 얻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중국의 입장에서 스딸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혁명적 노선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사회에서 지도자는 어떠한 존재인가? 중국이 개인숭배 비판이 민주집중제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사회주의 운동의 기본적인 조직원리는 민주집중제인데 이는 민주적 원리와 강력한 지도의 집중의 통일을 의미한다. 지도자는 밑으로부터 강제되는 민주적 힘, 당원, 대중들의 힘을 바탕으로 정확한 노선을 제시하는 것이 역할이다. 따라서 지도자를 탄핵하는 것은 노선을 탄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흐루쉬쵸프가 개인숭배 비판이라고 한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흐루쉬쵸프의 이후 행적을 보면 개인숭배 비판을 구실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전인민국가’라는 그의 주장은 이러한 흐름의 자연스런 발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인민국가는 관료주의 이데올로기이다. 더 이상 억압할 계급이 없다는 이유에서 전인민국가를 선언했지만 실은 전인민국가 노선 하에서 관료주의는 거세게 자라났고 국가기구는 급팽창했다. 계급적 성격이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볼 때, 전인민국가는 전인민에 대한 국가, 반인민적인 관료주의 국가노선이었던 것이다.

 

 

3)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전쟁과 평화의 문제 또한 중-쏘 논쟁의 주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세계혁명의 전망이 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쏘련은 핵무기의 존재로 인해 평화의 문제가 절대적이 되었으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전쟁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중국은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을 구분해야 하며 인민의 해방투쟁과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전쟁을 지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쏘련 측은 “어떤 작은 ‘지역적 전쟁’도 세계전쟁의 대화재로 불똥이 튈 수도 있으며,” 그리고 “오늘날 어떤 종류의 전쟁도, 비록 그것이 일반적인 비핵전쟁으로 발발할지라도, 파괴적인 핵-미사일의 대화재로 발전할 듯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노아의 방주―지구―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쏘련 측의 주장은 평화의 문제를 일종의 절대적 테제로 제기한 것으로서 평화공존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총노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의 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핵위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옳지만 평화와 전쟁의 문제에 대한 계급적 접근은 아니다. 중국 측이 주장한 것이 바로 평화와 전쟁의 문제에 대한 계급적 접근이었다. 중국 측은 전쟁의 발생 원인은 제국주의에 의한 억압에 있다고 보았고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에 의한 전쟁은 불의의 전쟁이며 이에 맞서는 것은 정의의 전쟁이라는 구분을 제기했다. 또한 평화는 인민의 무장된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도 제기했다.

이러한 중국 측의 입장은 1950년대 말, 60년대 초에 급격히 발전하고 있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족해방투쟁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쏘련 측의 ‘총노선으로서의 평화공존’은 이러한 민족해방투쟁을 평화공존 노선에 종속시키는 것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제국주의의 간섭을 받았던 경험을 볼 때 평화는 혁명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평화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으로써 쟁취하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인민은 무장된 힘으로써 제국주의의 간섭을 물리쳤다. 또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고전적인 명제를 보더라도 전쟁에서 정치의 요소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계급적 접근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 전쟁의 소멸은 제국주의의 소멸을 요구한다는 것을 놓친다면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그르치는 것이고 이는 인민의 막대한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핵전쟁의 방지라는 전인류적 가치와 계급적 접근을 통일시켜서 접근할 때만 올바른 관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쏘련 측은 계급적 접근을 폐기하고 핵무기의 위협만 강조하면서 전쟁과 평화에 대해 잘못된 길을 걸은 것이다.

 

 

4) 유고슬라비아 문제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사회인가는 중-쏘 논쟁에서 첨예한 대립지점이었다. 쏘련 측은 ‘시장사회주의’라 불리는 유고가 사회주의 사회라고 승인한 반면, 중국 측은 유고를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보았다. 유고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를 돌이켜보면 된다. 유고의 시장사회주의는 현 중국의 선례였던 것이다.

유고는 2차 대전에서 빨치산 투쟁을 통해 나찌 치하에서 해방되었고 이후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공업기업들이 국유화되었다. 그런데 유고의 티토는 이후 미국과 동맹하여 미국의 원조를 받고 이로 인해 세계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배척되었다. 1957년 공산당ㆍ노동자당 국제회의의 ‘선언’과 1960년의 ‘성명’은 유고를 수정주의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흐루쉬쵸프는 1962년경부터 유고 또한 사회주의 사회라고 옹호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이후 유고와 관계를 회복한다. 이에 대해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는데 중-쏘 논쟁 과정에서 유고사회의 실체에 대해 접근하여 사회주의 사회가 아님을 주장한다. 쏘련 측이 유고가 사회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의 공업기업이 국유화된 상태라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중국은 유고가 사회주의 혁명을 했으나 이미 자본주의로 복고된 상태이며 국제적으로는 미제국주의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측은 1963년 ≪인민일보≫와 ≪홍기≫에서 유고의 사회성격을 분석하고 있다. 유고정부의 사적 자본에 대한 정책은 그것을 활용하고 제한하고 변혁하고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장하고 고무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유고 헌법에 사적 개인이 기업을 설립하고 임노동을 고용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1963년에 이미 115,000개의 사적 자본가들이 기업 활동을 하고 있어서 자본가의 경제적 활동이 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도시에서 이러한 자본가들의 활동과 더불어 농촌은 자본주의에 의해 깊숙이 침식당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1951년에 티토는 농업 집단화를 포기하고 농민들의 협동조합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나마 있던 협동농장들도 자본주의적 농장으로 탈바꿈했다. 협동농장들은 농민들로부터 농산물을 독점적으로 구매하고 판매하는 기업으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특권을 이용하여 가격을 조작하고 농민을 착취하는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것이 농업에서 자본주의를 복고하는 길이라고 중국 측은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 유고 하면 떠오르는 ‘노동자 자주관리’에 대한 중국 측의 분석을 살펴보자. 중국 측은 노동자 자주관리를 특수한 종류의 국가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다.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원료를 스스로 구매하고 생산물의 종류를 결정하고 가격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것들을 스스로 판매하고 임금과 이윤의 분할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고는 시장사회주의라 불리는 것인데 이를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이라 칭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개개의 기업이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업이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면 기업의 지배는 노동자가 아니라 경영층이 전적으로 갖게 되는 것은 필연이다. 또한 이는 고전적인 사회주의 원리와도 배치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모든 자본을 부르주아지로부터 몰수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한다”고 정식화되어 있다. 노동자계급이 지배계급으로서 통치하기 위해서는 개별기업이 무정부적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되며, 국가의 수중에 집중하여 계획적으로 운영할 때만 노동자계급의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가 보장되는 것이다. 유고의 시장사회주의는 이러한 점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고 노동자가 사회주의 인민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것을 강제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이름의 기업들에서 노동자의 위원회는 단지 형식적일 뿐이었고 투표하는 기계이며 모든 권력은 경영자의 수중에 있는 것이라고 중국 측은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시장사회주의를 중국 측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있다. 1) 국가에 의해 통합된 경제계획의 포기, 2) 기업의 운영에서 우선적인 인센티브로서 이윤의 사용, 3) 자본가의 자유로운 경쟁을 고무하는 정책의 추구, 4) 자본가의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는 중요한 지렛대로서 신용과 은행의 사용, 5) 기업 간의 관계는 단일한 정부하의 상호원조와 협조의 사회주의적 관계들이 아니라 자유 시장에서 경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이다. 이러한 것이 시장사회주의에 대한 당시의 중국 측의 분석이었다.

또한 중국 측이 유고를 비판한 것은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치적 측면에서 미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이었다. 유고는 1951년에 미국과 군사조약을 체결하고 “자유세계의 방어를 위해 모든 공헌을 하겠다”고 밝혔으며, 1954년에 NATO 동맹국이었던 그리스 및 터키와 동맹관계를 체결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유고의 미국에 대한 종속은 강화되었는데, 1961년에 유고는 총 3억 4천 6백만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원조 받았고 이는 당시 유고 연방정부 예산의 47.4%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유고는 제국주의의 덤핑시장이 되었고 제국주의의 주요한 투자처, 원료자원의 공급기지가 되었다.

한편 유고는 미제국주의의 입장에 서서 세계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 유고는 1) 1949년에 내전 중이던 그리스 빨치산 게릴라들에 대해 국경을 봉쇄했고, 2) 6ㆍ25 전쟁에서 미제국주의를 옹호했고, 3) 베트남 인민의 정의의 전쟁을 비방했고, 4) 알바니아에 대한 전복적 활동과 무장간섭을 했고, 4) 미국과 영국제국주의 군대가 레바논과 요르단을 1958년 점령했을 때 유엔에서 그들을 비난하기를 거부했고, 5) 1960년 일본인민의 반미투쟁에 대해 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등 많은 국제적 문제에서 피억압민족들의 저항을 비난하고 미제국주의를 옹호한 전력이 있다. 중국 측은 중-쏘 논쟁에서 이러한 유고의 정치적 입장을 들어 유고는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유고의 사례는 사회주의 혁명을 한 후에 제국주의의 압력과 유혹,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어려움 등에 직면하여 얼마든지 자본주의로 복고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라고 했던 유고는 공산주의로 전진이 아니라 자본주의로 후퇴의 길을 걸었고 그것을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목상으로는 국유기업이지만 개별기업들이 자본주의적으로 운영되는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은 이미 기업의 주인이 아니라 피착취자일 뿐이었다. 기업의 모든 권력은 경영층이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유고의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태도, 그리고 미제국주의에의 영합은 티토 등 유고의 지도자들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배신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유고의 티토는 거대한 국가자본주의를 이끄는 총자본가였던 것이다.

 

 

5) 이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중-쏘 논쟁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는 ‘전인민국가인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였다. 흐루쉬쵸프는 더 이상 억압할 계급이 쏘련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전인민국가를 선언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전인민국가를 선언한 흐루쉬쵸프 하의 쏘련에서 자본주의적 요소는 거세게 자라났다. 중국 측이 쏘련의 언론을 인용하며 주장한 바에 의하면, 각종의 국유기업들에서 경영층이 자재를 빼돌리고 인원을 빼돌려서 마치 사적 자본가처럼 기업을 운영하는 사례가 광범하게 존재했고 이를 위해 국가관료들과 결탁이 광범했다.

실제로 1950ㆍ60년대의 쏘련은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지 불과 20여 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에 따라 착취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구사회의 사고와 습관을 지닌 사람들은 광범하게 존재하여 각종의 부르주아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농민층은 소생산자로서 습관이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가 철폐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후에도 상당한 기간 자본주의적 유물, 구사회의 습관과 사고방식과 투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상품-화폐관계가 남아 있는 한 그러한 투쟁은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흐루쉬쵸프는 형식적으로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더 이상 억압할 계급이 없다는 이유로 전인민국가를 선언한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과 쏘련 간에 ‘이행기의 국가의 성격은 전인민국가인가 아니면 프롤레타리아 독재인가, 그리고 이행기는 어디까지인가’가 쟁점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1964년 7월 14일자 ≪홍기≫에서 이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관계를 정식화한다. “맑스와 레닌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존재하는 역사적 기간은 수정주의자 흐루쉬쵸프 도당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까지의 이행의 기간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완전한 공산주의’로, 모든 계급적 차이들이 제거되고 ‘계급없는 사회’가 실현되는 즉, 공산주의의 높은 단계까지에 이르는 이행의 전 시기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중국 측은 전인민국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함에도 그것을 폐기했다는 이유에서 흐루쉬쵸프를 수정주의라고 비난한 것이다. 즉, 전인민국가론은 쏘련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요소를 억압하는 과제를 포기하는 것이고 나아가 이들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자라나고 결국은 자본주의의 복고를 위한 길을 여는 것이라고 중국 측은 주장했던 것이다.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만 있더라도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확립된 후 20여 년 만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수천 년에 걸친 계급사회의 잔재, 사적 소유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일진대 이러한 요소들과의 투쟁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나아가 전인민국가는 관료주의의 토대가 되는 이론이다. 계급적 성격이 없는 국가, 전인민국가는 흐루쉬쵸프 하에서 광범하게 팽창했는데 실은 전인민의 이름을 빈 특권층, 노멘클라투라의 국가로의 전화였던 것이다. 전인민국가 하에서 관료들은 계급적 원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이는 전형적인 관료주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인민국가론의 쏘련에서 이후 경과한 30여 년의 기간은 실은 자본주의의 점진적인 복고과정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교훈은 국가는 계급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고 사회주의에서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규정을 각인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일 수밖에 없고 그 이후는 전인민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소멸이라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신식민지주의와 민족해방투쟁에 대하여

 

2차 대전 후 많은 식민지들이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주의는 이들에 대한 예속적 정책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신식민지주의를 실시한다. 단, 과거의 구식민지 정책과 달리 신식민지에서는 예속독점자본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을 육성하여 이들을 통해 신식민지적 지배를 계속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식민지적 지배에 대해 흐루쉬쵸프 등은 식민주의의 소멸로 파악했고 신식민지 민중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대해 눈을 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흐루쉬쵸프는 평화공존을 총노선으로 삼음에 따라 제국주의와 충돌을 회피하였고 따라서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식민지 민중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알제리의 독립전쟁이다. 1950년대 10여 년간 지속된 알제리 독립투쟁에 대해 흐루쉬쵸프는 식민지 종주국이었던 프랑스 편을 철저히 들었다. 흐루쉬쵸프는 알제리 민족해방투쟁에 대해 그것은 프랑스의 “내정”이라고 했다. 1955년 10월에 흐루쉬쵸프는 “무엇보다도 먼저, 쏘련은 다른 나라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않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프랑스가 약화되기를 원하지 않고 우리는 프랑스가 더 강력해지기를 원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들은 1963년 ≪홍기≫ 10월 22일자에 인용된 것인데, 당시 흐루쉬쵸프의 평화공존 노선이 얼마나 약소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희생시키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쏘련은 또한 1960년에 미제국주의가 콩고의 민족해방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유엔을 이용하여 무력간섭하는 것을 지지하기조차 했다. 바로 이러한 점이 중국 측의 격렬한 반발을 사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쏘련의 태도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보다 평화공존을 쏘련 대외정책의 총노선으로 삼은 것에 기인한다. 이것은 흐루쉬쵸프의 평화공존이 레닌주의적 평화공존이 아니라 일종의 계급협조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스스로 반식민지에서 해방되었고 일제의 침략을 물리쳤던 중국의 입장에서 쏘련의 평화공존 정책으로 인해 약소민족들의 민족해방투쟁이 희생되는 것은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쏘련은 이러한 중국의 입장에 대해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원하는 것이냐고 반박했지만 이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계급적 입장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7) 평화적 이행과 수정주의에 대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의 문제 또한 첨예한 쟁점이 되었다. 흐루쉬쵸프가 20차 당대회에서 평화적 이행의 문제를 강조한 후에 중국은 이에 반발했다. 흐루쉬쵸프는 2차 대전 후 세계정세의 변화로 인하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파악했으며 심지어는 의회적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국 측은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는데, 폭력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보편적 법칙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중국 측은 맑스나 레닌의 평화적 이행에 관련된 언급은 관료군사적 국가기제가 없거나 러시아 2월 혁명 직후처럼 인민무장이 가능했던 조건에서였으며, 2차 대전에서 드러났듯이 부르주아 국가들이 군사관료적 기구로 무장되어 있는 상태에서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행의 문제와 더불어 중국은 흐루쉬쵸프를 수정주의라고 정면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20세기 초에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가 인민을 배신하고 수정주의의 길을 걸었다면 현대에는 흐루쉬쵸프가 맑스-레닌주의 원칙을 버리고 수정주의의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중국과 쏘련의 논쟁은 이론적 논쟁을 떠나 정치적 정면대립으로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흐루쉬쵸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폐기, 당의 노동계급 전위당적 성격의 부인, 자본주의국에서 사회주의로 이행의 평화적ㆍ의회적 길의 강조, 국내에서 사회주의 건설에서 계획의 약화와 상품-화폐관계의 확대 등 중국의 입장에서는 전반적인 수정주의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쏘 논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흐루쉬쵸프가 실각한다. 그러나 흐루쉬쵸프의 뒤를 이은 것은 흐루쉬쵸프 노선의 충실한 집행자였던 브레즈네프였다. 중국은 쏘련의 신지도부에 대해 ‘흐루쉬쵸프 없는 흐루쉬쵸프주의’라고 혹평했고 쏘련은 모택동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대립은 끝내 중-쏘 국경에서의 무력충돌로까지 발전했고, 이로 인해 세계 사회주의 진영은 결정적인 분열의 길을 걷는다.

 

 

 5. 결론

 

쏘련에서 수정주의의 등장과 그로 인한 중-쏘 논쟁, 그리고 그 결과로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파탄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 사회주의 사회는 하나의 이행기라는 것을 말한다. 즉,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 이행기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확립되고도 아직 계급사회의 유물이 광범하게 존재하며 구사회의 잔재와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그를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견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특히 유고와 같이 사회주의 혁명 후에도 자본주의 복고가 이루어지고 이를 미화하여 노동자 자주관리니 시장사회주의니 하는 것을 볼 때,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로 전진이냐, 자본주의로 복고냐의 두 길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중-쏘 논쟁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가르친다. 세계 사회주의 진영이 단결해 있을 때는 세계적 역관계에서 사회주의 진영이 제국주의 진영보다 우위에 서고 따라서 세계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이 순조로웠으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파탄되고 사회주의 진영이 분열되었을 때는 제국주의가 힘의 우위에 서게 되고 따라서 세계적 차원에서 반혁명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대공황이 재발했을 때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이 유지되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혁명으로 귀결되었을 것이지만, 역사는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로 인해 거꾸로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했다는 것을 가르친다.

셋째,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를 통일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한다. 피어린 투쟁으로 혁명을 성공시키더라도 건설의 문제에서 실패한다면 다시 착취사회가 부활한다. 또 사회주의 건설은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무수한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세계적 역관계에 의해 규정받으면서 간난신고의 길을 거쳐야 함을 말한다. 과거 8ㆍ90년대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파고들었지만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는 먼 미래의 일로 돌렸고 혁명 후의 문제라고 사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쏘련의 붕괴에서도 드러나듯이, 혁명은 결코 건설의 문제와 떨어질 수 없고 혁명을 위해서라도 건설의 문제를 연구해야 함을 말한다. 앞으로 많은 혁명이 발생하고 또 성공하고 또 일부는 좌절할 수도 있지만 이렇게 세계 사회주의 운동은 혁명과 건설에서 하나의 몸통이라는 것이 중-쏘 논쟁에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넷째, 중-쏘 논쟁은 세계 변혁과 일국 혁명의 관계에 대해 철저한 통일적 관점을 취할 것을 요구한다. 중국은 중-쏘 논쟁에서 철저히 세계 변혁의 관점에 서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세계 사회주의 진영 간에는 단결과 연대를,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진영 간에는 평화공존을, 전 세계 피억압민족과 인민의 해방투쟁에는 지지와 원조를 추구해야 함을 가르쳤다. 이러한 세계 변혁에 대한 시야 없이, 세계 변혁과 일국 변혁을 통일적으로 사고하는 관점 없이 21세기의 변혁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설혹 성공한다 해도 사회주의 건설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제국주의 지배방식의 변화, 세계적 쟁점의 이동 등을 면밀히 파악하면서 세계 변혁의 관점을 벼려낼 때만 일국에서의 변혁도 가능할 것이다.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구절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이다. 중-쏘 논쟁의 경과는 객관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붕괴과정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의 과정이다. 앞으로 닥칠 세계 변혁과 한국에서의 변혁의 과정은 많은 어려움들을 요구하겠지만 역사는 해결의 물질적 전제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과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경과하고 있는 세계사적 대반동의 시기는 역설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을 단련시키고 있다. 이 반동의 시기를 경과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은 20세기 사회주의의 교훈을 철저히 체득하고 변혁의 조건들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노사과연

 

문영찬 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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