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지배와 노동자 계급의 후퇴

 

채만수 ∣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소장

 

 

장기간 지속되고 되는 대공황으로 삶을 파괴당하고 있는 노동자ㆍ민중의 저항과 투쟁이 도처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남부) 유럽 국가들과 북부 아프리카 및 중동의 국가들에서 일고 있는 노동자ㆍ민중의 투쟁은 가히 혁명적이어서, 부르주아 언론은 그것들을 서슴없이 봉기(蜂起)라고 부르고 있다.

저들 노동자ㆍ민중으로 하여금 투쟁으로, 봉기로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분명 자본주의적 생산의 거대한 위기, 즉 대공황이고, 이 위기에 대응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독점)부르주아 국가의 반노동자적ㆍ반인민적 제반 정책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저들 노동자ㆍ민중의 투쟁과 봉기는 직접적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를 겨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당연히 과도기적 현상이긴 하지만, 상황은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그리스의 노동자들은 뛰어난 예외이지만, 다른 국가와 지역에서는 극소수의 선진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투쟁은 기껏해야 ‘신자유주의 반대’로, 즉 자본주의 자체와의 투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와의 투쟁으로 왜소화되어 있다.

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일까?

한마디로 이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후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당연히 간단히는 대답할 수 없는 대단히 복합적이고 역사적인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하고 거대한 문제이며, 따라서 이 작은 글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노동자계급의 그러한 정치적 후퇴를 초래한 주요 요인으로서의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 측면만을 간략히 다루려고 한다.

우선 최근 전개되고 있는 대공황과 관련한 측면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1.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과 노동자ㆍ민중의 투쟁

 

일찍이 (독점)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나 독점 부르주아 국가들은, ‘수정자본주의’니, ‘혼합경제체제’니, ‘케인즈주의 혁명’이니, ‘신경제’니 하는 온갖 요설(妖舌)을 농하면서, 더 이상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연적이고 주기적인 위기로서의 공황, 즉 종국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 그 자체의 종언(終焉)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공황은 없다고 강변해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강변해오던 그들 스스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심각한 공황’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 상황이, 특히 이 위기를 탈출하려는 몸부림으로서의 독점부르주아 국가들의 국가자본주의적 정책들이 노동자ㆍ민중의 삶을 파괴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투쟁과 봉기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끔 강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전개되고 있는 위기와 노동자ㆍ민중의 투쟁ㆍ봉기의 최대의 의의와 특징은 그것들이 모두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을 입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이는 명확하다.

그리스를 위시하여 스페인, 포르투갈, 이태리 등의 남부 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아일랜드나 벨기에, 나아가서는 프랑스나 영국 같은 서부 유럽 국가들까지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재정위기가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의 표현이며, 그들 국가에서 세차게 벌어지고 있는 대중의 투쟁ㆍ봉기가 그에 의해서 강제당하고 있는 것임은 사실상 누구에게나 그 자체로서 명확하다. 공황을 모면하고 완화하려는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재정지출, 특히 대공황을 맞아 줄줄이 도산의 위기에 처해가는 독점금융자본들을 구제하기 위한 국가의 거대한 재정지출이 재정위기를 불러왔기 때문이고, 그 부담을 노동자ㆍ민중에게 전가하려는 소위 ‘긴축정책’이, 공황 자체에 따른 고율 실업과 더불어, 노동자ㆍ민중의 투쟁과 봉기를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 아프리카 및 중동의 여러 국가들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노동자ㆍ민중의 봉기 역시 공황과 국가독점자본주의가 강제하고 있는 것,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의 표현임은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ㆍ소부르주아 언론은 이들 지역과 국가에서의 노동자ㆍ민중의 투쟁과 봉기를 주로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 혹은 민주화 투쟁, 민주화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도ㆍ해설하고 있다.

그들 투쟁과 봉기가 물론 ‘장기집권에 대한 저항’, 민주화 투쟁 혹은 민주화 혁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그 투쟁과 봉기의 주요 성격, 주요 측면으로 파악하는 것은 그 투쟁ㆍ봉기의 원인과 성격을 크게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저들 노동자ㆍ민중으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게끔 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폭등하고 있는 물가와 고율 실업, 복지의 축소 내지 파괴, 즉 공황과 그에 대응한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정책들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폭등하고 있는 물가’가 국가독점자본주의, 그 파탄의 표현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에게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대부분 물가의 변동을, 한편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관계로서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설명과는 전적으로 충돌하는 현상인 인플레이션을 아무렇지도 않게, 즉 자신들의 설명의 기본선인 수요와 공급 관계와의 어떤 연관도 설명함이 없이, ‘지폐의 증발에 의한 물가등귀’라고 설명한다. 그러고는 다시 또 나아가서 물가의 모든 등귀현상을 인플레이션이라고 규정한다. 즉, 인플레이션은 ‘지폐의 증발에 의한 물가등귀’라는 스스로의 규정을 무(無)로 돌려버린다.

이러한 설명, 혼란되고 사실상 의도적으로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설명 속에서는 인플레이션은 자본주의 일반, 나아가서 상품경제 일반에 고유한 것으로 되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위기, 그 전반적 위기와의 연관이, 그 계급적 성격이 은폐된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은 물가등귀 일반이 아니다. 그것은 ‘지폐의 증발에 의한 물가등귀’이며,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의 국가자본주의적 정책이 유발하는 물가등귀이다. 다시 말하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국가가 통화의 금태환을 정지하고 국가지폐를 ―현대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는 국가지폐화한 중앙은행권을― 남발함으로써 그 지폐의 가치가 저락하면서 발생하는 명목상의 물가등귀가 인플레이션이다.

지금은 과잉생산 공황, 그것도 대공황으로 대중의 구매력도, 생산적 소비를 위한 자본의 수요도 대폭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본래라면, 즉 금태환제가 시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자본주의 각국의 물가는 현저하게 저락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다. 일부 국가의 부동산처럼 공황의 타격으로 그 가격이 저락한 부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상품의 가격은 떨어지지 않고 있거나 오히려 폭등하고 있기조차 하다. 이는 모두가 국가독점자본주의적 정책 때문이며, 그 파탄의 표현이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각국은 파산해가는 독점자본을 구제하기 위한, 즉 돌아오는 어음 등 채무를 변제하기 위한 거대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금태환을 정지하고 소위 ‘관리통화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반적 위기와 그 격화가 강제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통화 남발이 공황의 한복판에서 물가 폭등이라는 사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북부 아프리카 및 중동의 여러 국가 등에서 노동자ㆍ인민을 봉기로 나서게 하고 있는 물가폭등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물가폭등은 이미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다. 대공황이 발발한 후 기축국제통화인 미국의 달러화와 유럽의 유로화가 가히 천문학적 규모로 살포되어 원유나 원자재, 곡물 등의 국제시장가격이 폭등해온 데다가, 한국 정부 역시 파산해가는 독점자본을 구제하기 위해서 거대한 자금을 살포해왔고, 특히 최근 수개월간에도 무더기로 쓰러져가는 저축은행들과 건설사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살포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하고 있고, 이에 이명박 정권은 공정거래위원회나 국세청 등의 단속과 협박을 동원하여 이를 억제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물가는 그렇게 행정권력으로 억제되는 것이 아니다.

 

 

2.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투쟁과 뜨로츠끼주의

 

이렇게 현재 전개되고 있는 공황 그 자체의 전개 양상도, 그에 의해서 강제 받고 있는 노동자ㆍ민중의 투쟁ㆍ봉기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을 표현하고 있고,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 전개되고 있는 위기의 양상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고 설명하는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독점)부르주아지의 측으로부터는 물론이고, 노동자계급 이데올로그들의 측으로부터도 그다지 많지 않다!

(독점)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그것을 그러한 관점에서, 즉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비추어 지극히 당연하다. 독점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구조변화와 그에 따른 운동법칙의 변용을 과학적으로 파악한 것이어서, 그러한 규정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곧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레닌은 독점자본주의를 “기생적 혹은 썩어가는 자본주의”이자 “죽어가는 자본주의”1)라고 규정하고 있고,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가장 완벽한 물질적 준비이며, 사회주의의 직접적인 전단계2)라고 규정하고 있다. 독점자본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의미하는 바가 이러한데, (독점)부르주아들이 어떻게 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즉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나 부르주아 국가가 독점자본주의나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일 수밖에 없게끔 하고 있는 위기에 그들이 손 놓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계급적 인식의 한계 때문에,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이유와 목적 때문에 그러한 규정을 부인하는 것일 뿐,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들이 조만간 최후를 맞을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부인하고 있을 뿐, 그들은 그 위기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위기에의 그들의 그러한 대응, 즉 경제적 재생산과정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이 현대 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이게끔 하는 것이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레닌이 지적한 것처럼, “전쟁이”, 즉 제1차 세계대전이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엄청나게 촉진”3)시켰다면,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본격화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는 국가독점자본주의,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종말을 모면하려는 부르주아 국가의 경제적 재생산과정에의 전면적 개입을 되돌릴 수 없는 항상적 체제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 저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과 그 국가가 자본주의의 영구성, 그 영구번영을 강변하기 위해서 내세웠던 ‘수정자본주의’니, ‘혼합경제체제’니, ‘케인즈주의 혁명’이니 하는 규정들이 사실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적 규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1970년대 말에 저들 스스로 ‘케인즈주의의 파산’을 선언하며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를 내세웠을 때, 그것은 이미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반적 위기가 재차 격화되어 국가독점자본주의가 파탄해가고 있다는, 독점부르주아지 스스로의 고백이었다.

자본주의의 현 발전단계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위기와 그 전개 양상을 그러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설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이렇게 그 자체가, 현대 자본주의와 그 위기에 대한 시각과 분석의 과학성 여부의 문제일 뿐 아니라, (독점)부르주아지와 노동자계급 간의 치열한 이데올로기 투쟁, 치열한 계급투쟁이며 그 표현이다.

우리는 앞에서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현 상황이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파탄임이 명확하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전위임을 자임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대신에, 그것을 종파주의적으로 왜곡하여 설명하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된 이후의 대반동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더 널리 요란하게 퍼져왔다.

대표적으로 뜨로츠끼주의자들이,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반(反)쏘ㆍ반스딸린주의를 내세우는 자들이 그들이다.

특히 뜨로츠끼주의자들은 스스로 레닌의, 맑스-레닌주의의 정통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발전의 현단계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는 데에 대해서는, 그것을 스딸린주의라고 규정하면서, 한사코 반대, 아니 적대한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1917년에 레닌이 이미 “전쟁이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엄청나게 촉진”시켰으며,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위한 가장 완벽한 물질적 준비이며, 사회주의의 직접적인 전단계”라고 규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그렇게 레닌의 명문(明文)에도 불구하고 국가독점자본주의 규정을 부정하면서도 ‘레닌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변할 만큼 파렴치한 자들이다. (하기야, 1917년 여름에 혁명의 풍향이 급격히 볼쉐비끼의 승리로 기울고 있음을 간파하고 나서야 볼쉐비끼 진영에 합류하기까지 그토록 레닌과 볼쉐비끼에 적대적이었고 볼쉐비끼 진영에 합류한 이후에도 대독강화(對獨講和)나 노동조합 문제 등을 둘러싸고 그토록 레닌과 대립하던 뜨로츠끼 자신이 파렴치하게도 레닌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던 전통, 나아가 1927년의 당원 투표에서 10분의 1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축출된 그가, 맑스-레닌주의적 민주집중제를 부인하면서, 몰염치하게도 볼쉐비키 당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던 전통, 즉 교조(敎祖)로부터의 전통에 따른 것이겠지만!)

혹시 저들 뜨로츠끼주의자들은 레닌이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얘기한 것은 전쟁과의 관련에서였다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 봤자 소용이 없다. 레닌은, “전쟁이 독점자본주의를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전화시켰다”고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를 엄청나게 촉진시켰다(die Umwandlung … ungeheuer beschleunigte)”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점자본주의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전화는 독점자본주의의 내재적ㆍ필연적 법칙의 관철이며, 극도로 집중된 위기로서의 전쟁, 구체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은 “그 전화를 엄청나게 촉진시켰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국가독점자본주의 규정의 부인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현단계의 위기의 양상과 그 역사적 의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노동자계급 내에서 그들의 목청이 커지면 커질수록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후퇴는 그만큼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3. 뜨로츠끼주의자 등의 반쏘ㆍ반스딸린주의와 노동자계급의 후퇴

 

뜨로츠끼주의자들이 한사코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규정을 거부하는 것은 순전히 국가독점자본주의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쏘련에서의 지배적인 규정, 사실상 공인의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들은 스딸린주의라는 요설(妖舌)로 정당화하려 든다.

그리고 이때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스딸린주의란 맑스-레닌주의와는 다른 무언가 악마적인 것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뜨로츠끼주의의 수많은 갈래들 중에서도 가장 저질의, 가장 비열한 그것인 자칭 ‘국제사회주의자들(Inter-national Socialists)’의 한국 그룹인 ‘다함께’의 ‘국제연락간사’ 최일붕의 고담(高談)을 들어보자.

 

정치적으로 레닌이 … 스탈린을 낳았고, 스탈린은 구소련 블록을 해체시킨 공포정치와 경제 정체를 낳았다는 레닌-스탈린의 정치적 연속성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10월 혁명의 전통 전체를 내동댕이쳐버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레닌-스탈린 연속성론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 1929년에서 1953년 사망 때까지 스탈린의 권력 기반 전체가 1917년 10월에 세워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혁명 정부는 노동자 평의회의 선출된 대의원들에 기반을 두었다. …

이와 대조적으로 스탈린 치하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없었다. 스탈린의 1936년 헌법에 규정된 이른바 ‘최고 소비에트’는 가짜 의회 구조물이었다. 게다가 자유 선거도 치러지지 않았으며, 당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신문과 정간물은 그 당의 방침에 맹종했다. 당원의 다수는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 관료, 당 관료, 기업 관리자들이었다. 고위 당원이든 하급 당원이든 스탈린의 정책과 다른 정책을 내놓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재판받는 사람은 누구든 구속됐고 십중팔구 처형당했다.

스탈린의 당은 ‘공산당’을 자칭했지만, 실제로 그 당은 1917년의 당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었다.4)

 

흥미롭다. 논리 전개와 논증의 수법이 참으로 흥미롭고 가증스럽다.

무엇보다도 우선 “정치적으로 레닌이 … 스탈린을 낳았고, 스탈린은 구소련 블록을 해체시킨 공포정치와 경제 정체를 낳았다는 레닌-스탈린의 정치적 연속성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운운할 때, 그의 말하는 대로라면, 이견이 발생하는 지점,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오로지 이른바 “레닌-스탈린의 정치적 연속성” 여부일 뿐이다. “스탈린은 구소련 블록을 해체시킨 공포정치와 경제 정체를 낳았다”는 가장 사실에 반하고, 가장 악질적인 중상모략은 어떤 이견이나 논쟁의 여지도 없는 역사적 사실로 전제되어 버리고, 그리하여 많은 경우 순진한 독자의 뇌리에 그렇게 각인되어 버린다. 저들이 비열하게 노리는 대로 그렇게 각인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스딸린이 경제 정체를 낳았고, 그래서 쏘련이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 천하의 철면피한(鐵面皮漢)들이 아니고서는 천연덕스레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저들의 용어를 빌어서 ‘스딸린 치하’라고 하자.) ‘스딸린 치하’에서, 즉 “1929년에서 1953년 [스딸린의] 사망 때까지”, 쏘련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보다 자세히 얘기하면, 1929년에 제1차 5개년 계획에 의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 시작된 이후 히틀러의 나찌 독일이 쏘련을 침략할 때까지 나찌의 위협 하에서 낭비적일 수밖에 없는 군비(軍備)에 엄청난 물적ㆍ인적 자원을 할당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당하면서도, 그리고 제2차 대전 후 짧은 기간에 엄청난 전쟁의 파괴를 딛고, 쏘련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천하의 철면피한들이 아니고서는, 부르주아들조차, 아니 반쏘ㆍ반공주의자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당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법률학자이자 영국의 의회의원이던 D. N. 프리트(Pritt)는 이미 1936년에 이렇게 쓰고 있다.

 

갖은 어려움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외부 세계의 군사적ㆍ교역상의 적대에도 불구하고 쏘련 사회주의는 엄청나게 후진적이었던 한 아시아적 국가(Asiatic State)를, 약 19년 만에 세계적으로 중요한 국가로, 산업이 크게 발전한 국가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략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했던 생활수준을 이미 동유럽의 여러 민족의 그것을 뛰어넘어 곧 산업이 발전한 서유럽 상류층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국가로 끌어올렸다.5)

 

이것이 편견 없이 쏘련 사회와 그 재판제도를 바라본 한 부르주아 법학자, 부르주아 정치인의 쏘련과 쏘련 공산당에 대한 평가였다. 게다가 스딸린 지도하의 쏘련 공산당, 스딸린 지도하의 쏘련 정부에 반대하여 반혁명 음모를 꾸몄던 까메네프조차 그 반혁명 조사과정에서 이렇게 진술했다고 하지 않는가?

 

… 하지만, 국가가 겪고 있던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 그 경제의 위기 상황에 대한 우리의 기대, 당 지도부의 경제 정책이 실패할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이미 1932년 후반기에 이르면 분명히 무너졌습니다.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하에 그 어려움들을 극복하면서, 국가는 성공적으로 경제 성장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투쟁을 멈췄어야 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반혁명 투쟁의 논리, 즉 권력을 잡으려는 노골적으로 무원칙한 노력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역경으로부터의 그러한 탈출, 즉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책의 승리는 우리에게 당의 지도부들에 대한,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스딸린에 대한 새로운 적개심과 증오를 불러일으켰습니다.”6)

“역경으로부터의 그러한 탈출, 즉 쏘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책의 승리”가, 결국 내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스딸린 치하’의 쏘련 경제 상황이, 저들에게 “당의 지도부들에 대한,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스딸린에 대한 새로운 적개심과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반혁명 음모를 하도록 몰아갔다는 얘기다. 물론, 뜨로츠끼주의자들을 위시한 반쏘ㆍ반공주의자들이나 흐루쉬쵸프 등의 수정주의자들처럼, 모든 것이 고문에 의한 것이었다고 떠들어대면 또 다른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7)

아무튼 다시 최일붕의 고담으로 돌아가 보면, ―― 그는 “스탈린은 구소련 블록을 해체시킨 공포정치와 경제 정체를 낳았다”고, ‘공포정치’를 거론한다.

공포정치! 다름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레닌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변하는 뜨로츠끼가 레닌을 향해서 퍼붓던 욕설, 바로 그것이다. 뜨로츠끼가 1904년에, 훗날 러시아 10월 혁명을 “근대사에 유례가 없는 역사적 범죄(historical crime without parallel in modern history)”라고 규정하게 되는 자신의 “친애하는 스승” 악셀로드(Pavel Borisovich Axelrod, 1850-1928)에게 헌정한 저서 ≪우리의 정치적 임무들≫8)은 “반동배의 두목(head of the reactionary wing)”인 “막시밀리앙 [로베스삐에르: 인용자] 레닌(Maximilien [de Robespierre] Lenin)”과 그 지지자들이 음모를 통해 당내에 공포정치를 꾀하고 있다는 비난과 모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훗날 뜨로츠끼 자신과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스딸린과 쏘련에 대해서 퍼붓는 비난과 모략은 사실 이때 뜨로츠끼가 레닌과 그 지지자들에게, 볼쉐비끼에게 퍼부었던 비난과 모략의 확대재판(擴大再版)이다.

1904년의 비난과 모략이야 그렇다 치고, 스탈린 시대의 ‘공포정치’ 운운하는 뜨로츠끼와 뜨로츠끼주의자들이 맑스-레닌주의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왜냐하면, 뜨로츠끼와 뜨로츠끼주의자들이, 그리고 반쏘ㆍ반공주의자적 자칭 사회주의자들, 자칭 공산주의자들, 자칭 꼬뮌주의자들 일반이 쏘련의, 특히 스딸린 시대의 이른바 ‘공포정치’를 반(反)맑스-레닌주의적, 혹은 비(非)맑스-레닌주의적이라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그러한 ‘비판’이야말로 사실은 바로 그들이야말로 반(反)맑스-레닌주의적이고 비(非)맑스-레닌주의적임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비판’, 즉 맑스-레닌주의의 의상(衣裳)을 입은 그러한 반공주의야말로 20세기 후반에 노동자계급을 정치적ㆍ사상적으로 후퇴시키고, 드디어는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를 붕괴ㆍ해체시키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이행기의 문제, 즉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로의 혁명적 이행기의 문제이고, 그에 대한 혁명적 이해ㆍ태도와 기회주의적=반혁명적 이해ㆍ태도의 문제이다.

저들이, “재판받는 사람은 누구든 구속됐고 십중팔구 처형당했다”며 나찌와 극우 반쏘ㆍ반공주의자들의 과장된 모략선전을 그대로 반복하면서,9) ‘공포정치’라고 비난하는 것은 필시 스딸린 시대 쏘련 정부와 공산당이 반혁명분자들에게 취한 단호한 정치적ㆍ사법적인 조치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저들이 ‘공포정치’라고 비난하는 조치들에 대하여 맑스-레닌주의의 창시자들은 저들 ‘맑스-레닌주의의 정통 계승자들’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과 만나게 된다. 예컨대, 빠리 꼬뮌 직후인 1873년 1월에 엥겔스는 “권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반권위주의”니, “자치주의”(오늘날의 소위 ‘자율주의’)니 운운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들 신사분들이 혁명을 구경이나 한 적이 있는가? 혁명은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적인 일이다. 그것은 주민의 일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소총과 총검, 대포를 사용하여, 그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권위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승리한 당은, 이 전쟁을 헛되이 끝내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무기가 반동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서 이 지배를 지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빠리 꼬뮌이 무장한 인민의 이 권위를 부르주아지에 대해서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 꼬뮌이 하루인들 지탱될 수 있었겠는가? 그와는 반대로, 꼬뮌이 이 권위를 충분히 광범히 사용하지 않은 것을 나무라야 하지 않는가?10)

 

혁명은, “주민의 일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소총과 총검, 대포를 사용하여, …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는 행위”이며, 혁명전쟁에서 “승리한 당은, 이 전쟁을 헛되이 끝내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무기가 반동들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포를 통해서 이 지배를 지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빠리 꼬뮌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것이 무력과 공포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충분히 광범히 사용하지 않은 것”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고 엥겔스는 언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닌은 그의 저서 ≪국가와 혁명≫에서 사회주의 운동 세력 내의 기회주의자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엥겔스의 이 언명을 인용하면서,11)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엥겔스는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황소의 뿔을 [=문제의 급소를: 인용자] 쥐고 있다. ― 꼬뮌은 국가의,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권력을 더 행사해야 하지 않았는가?12)

 

부르주아지에 대해서, 반혁명분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고 광범하게 혁명적 권력을, 혁명적 무력을, 혁명적 공포를 행사해야 한다는 엥겔스나 맑스,13) 레닌의 주장은 분명 저들 ‘맑스-레닌주의의 정통 계승자들’, 즉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공포정치’ 비판ㆍ비난과는 정반대이다. 그리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붕괴를 초래하고,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를 초래한 책임의 커다란 일단도, 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소위 스딸린주의, 스딸린주의적 ‘공포정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흐루쉬쵸프에 의한 스딸린 격하운동 이후 득세하게 된 수정주의, 기회주의, 즉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일탈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에의 굴신에 있다. 그리고 뜨로츠끼주의자 등의 반쏘주의, 반스딸린주의와 그에 따른 자본주의 세계 노동자계급의 분열 및 그 안에 배태된 반쏘주의야말로 그러한 일탈과 노동자계급의 후퇴에 커다란 공헌을 해왔다는 사실도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뜨로츠끼주의자로서의 최일붕은 다시, “1929년에서 1953년 사망 때까지 스탈린의 권력 기반 전체가 1917년 10월에 세워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며, “혁명 정부는 노동자 평의회의 선출된 대의원들에 기반을 두었”으나 “이와 대조적으로 스탈린 치하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스탈린의 1936년 헌법에 규정된 이른바 ‘최고 소비에트’는 가짜 의회 구조물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스탈린의 1936년 헌법에 규정된 이른바 ‘최고 소비에트’는 가짜 의회 구조물이었다”? ―― 그런 독단의 논법이라면, 우리가 이렇게 규정한 들 저들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는 최일붕 등 뜨로츠끼주의자들은 가짜 인간 구조물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반론은 결코 정확한 것이 아니다. 문맥상 명백히 ‘최고 소비에트는 참된 의회 구조물이었어야 하는데, 스탈린의 1936년 헌법에 규정된 이른바 ‘최고 소비에트’는 가짜 의회 구조물이었다’는 최일붕의 독단에 대한 대구(對句)로서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서 결코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왜냐? 쏘비에뜨는, 그것이 최고 쏘비에뜨든, 보다 하위의 쏘비에뜨든, 본래 결코 ‘의회 구조물’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쏘비에뜨, 혹은 노동자 평의회는, 부르주아적 의회 구조물이 아니라, 빠리 꼬뮌이 그러했던 것처럼, 입법기구이자 동시에 집행기구인 것이다. 부르주아 의회주의자들과, 입으로는 혁명을 얘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실천적으로는 노동자들의 혁명적 진출, 그 성과를 헐뜯고, 그것을 파괴하는 데에 골몰하는 반혁명분자들만이 쏘비에뜨가 ‘진짜 의회 구조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신문과 정간물은 그 당의 방침에 맹종했다”거나, “고위 당원이든 하급 당원이든 스탈린의 정책과 다른 정책을 내놓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주장 역시 모략적 독단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최일붕 그는 또한, “당원의 다수는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 관료, 당 관료, 기업 관리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저들의 이러한 주장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민 모두가 노동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하거나, 쏘련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라는 저들의 악의적 신앙의 표현일 뿐이다.14)

쏘련을 가리켜 ‘국가자본주의’라고 하는 저들의 주장을 내가 악의적 신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토니 클리프(Tony Cliff)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른바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일찍이 1948년(―이때는 1930년대 이후 달성한 쏘련 사회의 비약적 발전과 특히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 때문에 쏘련과 스딸린의 국제적 위신과 명예가 고도로 높아져 있던 때이고, 따라서 제국주의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훼손시켜야 할 때였다―)부터 ‘쏘련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예컨대 우리 사회의 걸출한 IS의 한 사람인 정성진 교수 스스로가 자신의 이론적 교부이자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국제사회주의자’, 혹은 ‘국가자본주의론자’인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나 크리스 하먼(Chris Harman)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막무가내의 주장일 뿐, 어떤 합리적인 이론적ㆍ사실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제시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으로 논증해 보라는 만델(Ernest Mandel)의 집요한 추궁에 대해 캘리니코스도 하먼도 제대로 답변한 것 같지는 않다.15)

 

캘리니코스도 하먼도 쏘련이 ‘국가자본주의’임을 이렇게 논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정성진 교수는, 걸출한 IS답게, 자신은 “만델-캘리니코스 논쟁에서” “기본적으로 캘리니코스 입장을 지지하는 편”16)이라며, 참으로 강고하게도 ‘쏘련=국가자본주의’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바로 악의적 신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17)

한편 뜨로츠끼주의자 최일붕은, 스딸린 시대에 쏘련에는 “게다가 자유선거도 치러지지 않았으며, 당은 하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자유선거도 치러지지 않았다”는 말은 그 자체로서는 무엇을 의미하려는지 불분명하지만, 그에 이어서 그가 “당은 하나밖에 없었다”고 ‘비판’할 때, 그의 계급적 지향이 명백해진다. 그는 다름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표현으로서의 공산당 일당제를 부르주아적 다당제를 부인한 “무서운 원리모욕죄”18)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은 공산당 일당제가, 자신들의 교조(敎祖) 뜨로츠끼가 아직 당과 국가에서 누구 못지않은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에, 그리고 나아가서는 레닌 생전에 확립된 것이라는 사실을 물론 은폐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저들은 쏘련에서의 공산당 일당제가 스딸린 시대에, 그러니까 1928년이나 그 이후에 비로소 확립된 것처럼 암시한다. 그런 기만과 은폐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영광스러운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아닐 것이다.

저들이 스스로 맑스-레닌주의자임을 주장할 뿐 아니라 그 ‘정통 계승자’임을 강병하고 있으니까 묻는 말이지만, 정당이란 것이 계급적 이익을 추구하는 ‘계급의 전위조직’이라면, 노동자계급 이외의 무계급 사회에서, 그러한 무계급 사회를 혁명적으로 지향하는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전위조직으로서의 공산당 이외의 다른 계급의 전위조직을 허용하지 않는 공산당 일당제가 왜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자유선거도 치러지지 않았으며, 당은 하나밖에 없었다”는 저들의 고발은, 저들의 지향이 다름 아니라 바로 (소)부르주아 사회, 계급사회,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임을 부지불식간에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상에서는 가장 저질의, 가장 비열한 형태의 뜨로츠끼주의로서의, 한 자칭 ‘국제사회주의자’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는데, 이는 다만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역사적인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인 후퇴에 어떤 공헌을 해왔는가를 가장 명쾌한 형태로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들뿐만 아니라, 뜨로츠끼주의자들 일반이, 나아가서는 널리 사회주의자, 꼬뮌주의자 등을 자임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반쏘주의자들이, 따라서 각양각색의 실천적 반공주의자들 일반이,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상 동일한 기여, 동일한 역할을 해왔고,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저들은 한결같이 맑스주의의, 맑스-레닌주의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노동자계급의 전진에 끼친 해악은 그만큼 크고 위험한 것이다.

저들은 모두 스딸린 시대의 쏘련 정부와 공산당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반인민적ㆍ반노동자적이었으며, 따라서 그들 인민으로부터 광범한 적의를 샀던 것처럼 선전한다. 하지만, 역사는 당시 쏘련의 상황은 저들의 그러한 악의적 선전과 정반대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스딸린 지도하의 당과 정부, 절대 다수의 인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좁은 의미의 군사력에서의 엄청난 열세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찌의 침략을 물리치고 제2차 대전을 승리로 끝냈다는 사실은 스딸린 시대의 쏘련이 노동자ㆍ인민 주체의 사회, 노동자계급의 창의와 적극성, 헌신이 지배하던 시대임을 웅변한다.

그리고, 스딸린이 악마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스딸린 지도하의 쏘련이 바로 그러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스딸린이 바로 그러한 사회를 건설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서, 부르주아 언론, 그 선전도구에 의해서, 그리고 맑스주의의 가면, 맑스-레닌주의의 가면을 쓴 반공주의자들에 의해서 악마화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악마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까운 것을 제쳐둔 정말 비겁한 예들이지만,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같은 반공주의 학살자들을 영웅으로 추앙한다든가, 반제(反帝) 수카르노 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미 괴뢰정권을 세우면서 수백만 인민을 학살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제3세계의 수많은 반제국주의적 정치지도자들을 악마화하는 저들 자본의 이데올로그들, 독점자본의 선전기구들, 대중 이데올로기 조작과 지배에 사실상 전지전능한 제국주의 언론의 행태를 상기하자.

 

 

4. 소위 ‘스딸린주의 비판’에 대하여

 

‘스딸린주의’ 운운하는 저들 반쏘ㆍ반공주의자들의 대부분, 즉 뜨로츠끼주의자들 등은 한결같이 스딸린과 이른바 스딸린주의를 무언가 음험한 악마, 악마적인 것으로 묘사하면서 ‘스딸린주의’와 맑스-레닌주의는 전혀 다른 것처럼 주장한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 최일붕도 제기한 이른바 ‘레닌-스딸린 연속성’ 여부의 문제이다.

그러나 같은 패거리인 IS 정성진 교수가 편집위원장을 맡은 그 잡지에 나란히 실린 글들에서 또 다른 반쏘ㆍ반스딸린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은, 최일붕의 주장과는 반대로, 아무튼 ‘스딸린주의’는 맑스-레닌주의임을 주장한다.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맑스사상연구소 소장’ 문국진은, “마르크스주의는 곧 스탈린주의적으로 왜곡되고 변형된 유물변증법으로 치달아왔다”며, “마르크스 사상은 이제 탈스탈린주의적ㆍ구소련적 교조주의로부터 해방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19) 이때 그는 자신의 ‘스탈린주의적 철학’ 혹은 ‘구소련적 철학’에 대한 비판이 바로 레닌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임을, 즉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임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컨대, 이렇게 얘기한다.

 

문제는 유물론에 있다. 레닌의 그것은 천박한 이원론 사상, 즉 물질과 정신의 철두철미한 이원론에 근거한 천박한 반영론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오늘날까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이어져온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것이 레닌적 사고가 그 주요한 내용으로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왔다는 데에 변증법적 유물론의 비극이 담겨 있는 것이다.

코르쉬는 초기(1920년대)에는 레닌주의를 수용했으나, 소련의 정치적 일탈과 변질, ‘탈노동자 국가화’와 관료에 의한 노동자 통제를 겪으면서 레닌주의로부터 빠져나오게 된다. 그의 비판은 정치적 측면에 한정되지 않고 철학적 레닌주의의 반대로까지 발전하였다. 따라서 본래의 마르크스주의와 그 레닌적 일탈을 분리시키고, 변증법적 사상과의 거리가 먼 편협하고 천박한 반영론적 유물론의 철학적 오류를 지적하는 데에까지 나아간 것이다.20)

구사회주의권이 해체되었으나 그 이데올로기적 잔재가 아직 미청산된 현재로서, 구소련권의 마르크스-레닌주의(사실상의 스탈린주의) 철학의 극복이 또다시 새롭게 우리에게 과제로서 다가오는 시점에서, 코르쉬의 문제 제기와 대안, 그 철학적ㆍ정치적 투쟁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으로 향하는 하나의 이정표를 던져주고 있다 하겠다.21) (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역시 그 잡지에 나란히 실린 글에서 또 다른 반쏘ㆍ반스딸린주의적 ‘맑스주의자’ 이성백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그래서는 안 되는 왜곡된 마르크스주의의 한 표본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함에 있어서 스탈린주의 비판을 통하여 마르크스주의가 앞으로 다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사실 20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의 볼모로 붙잡혀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체를 비롯해 여러 폐해들이 초래되었다.22)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다른 것인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사상을 가리키고,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의 사상을 가리키는가? 그런데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는 스탈린의 지휘 하에 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름에 기대어 스탈린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동의어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적어도 철학에 있어서는 스탈린주의 철학이란 표현은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란 표현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해두는 것부터가 스탈린주의 비판의 첫걸음이 된다고 할 수 있다.23) (강조는 인용자.)

 

그래서 마르크스의 사상과 레닌의 사상을 지칭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로 독립적으로 사용해야 한다.24)

 

결국 이들은 이른바 스딸린주의 비판이 사실은 맑스-레닌주의 비판임을, 이성백 교수는 교수다운 복선을 깔고, 즉 약간은 부정직하게, 그러나 동시에 명확히, 그리고 문국진 소장은 더 없이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맑스주의, 레닌주의, 맑스-레닌주의=스딸린주의에 대한 문국진 소장이나 이성백 교수의 이해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서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다.)

그리고 덧붙여 얘기하자면, 이른바 ‘스딸린주의 비판’을 빙자하여 사실은 맑스-레닌주의를 가장 철저하고 부정직하게 비판ㆍ부정하고 있는 자들은, 앞에서도 본 것처럼, 다름 아니라 뜨로츠끼주의자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한 뜨로츠끼주의 비판자는 정당하게도 뜨로츠끼주의를 “위장된 반혁명”으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파시스트들과 뜨로츠끼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는 이렇다 ― 파시스트들의 기만(欺瞞)이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 의해서나 쉽게 간파됨에 반해서, 뜨로츠끼주의자들의 기만은, 그것이 ‘혁명적’, ‘맑스주의적’, 심지어 ‘레닌주의적’ 표현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는 간파되지 않는다.

거기에 뜨로츠끼주의의 위험성이 있다.25)

 

뜨로츠끼와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역사적ㆍ실천적 행적은 이 비판, 즉 뜨로츠끼주의란 “위장된 반혁명”이라는 비판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당연히 뜨로츠끼주의자들에 대한 그것을 넘어서 무릇 반쏘-‘맑스주의자들’, 혹은 반쏘-‘맑스-레닌주의자들’ 일반에 해당된다.

한편, 이성백 교수는, “스탈린주의 철학,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있어서 그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고)” “마르크스의 철학적 작업을 이어받아 역사와 사회에 관한 변증법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발전시켜 현실에 개입하는 ‘실천의 철학’을 확립하지 못했다”26)고 선언한다. 그러면서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확립하는 작업은 소련이 아니라 서구에서 올바른 방향이 설정되었다”27)고 주장한다. 그리고, “구소련권의 마르크스-레닌주의(사실상의 스탈린주의) 철학의 극복이 또다시 새롭게 우리에게 과제로서 다가오는 시점에서, 코르쉬의 문제 제기와 대안, 그 철학적ㆍ정치적 투쟁은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으로 향하는 하나의 이정표를 던져주고 있다”고 할 때, 문국진 역시 분명 그렇게, 즉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확립하는 작업은 소련이 아니라 서구에서 올바른 방향이 설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레닌이 그토록 질타했던, 20세기 초 서유럽에서의 사민주의의 타락, 노동자계급에 대한 역사적 배신을 그들은 ‘맑스주의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 지배가 얼마나 강고한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5. 맑스-레닌주의의 이행기와 반쏘주의자들의 ‘이행기’

 

그런데, 저들이 스딸린 시대의 쏘련을 비판하면서 핵심적으로 노리는 것, 더욱이 화려한 혁명적 수사를 구사하면서 그렇게 노리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서의,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기’, “장기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쏘련 역시 그 도중(途中)에 있었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이행기를28) 실천적으로 부인하는 것,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그것을 실천적으로 부인하는 것, 다시 그리하여 반혁명을 위한 길을 여는 것이다.

실제로 뜨로츠끼주의자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뜨로츠끼(주의)의 소위 “이행기 강령”이란, 다름 아니라, 맑스주의의 ‘이행기’ 개념에서 혁명성을 제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고, 맑스주의와는 전연 무관한 것, 아니 반(反)맑스주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에서의 이행기는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이에” 놓여 있는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의 혁명적 변혁의 시대”이고, “이 시기에 대응”한 “정치적 과도기”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의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의 시기임에29) 반해서, 뜨로츠끼와 뜨로츠끼주의자들의 ‘이행기’란 기껏해야 “부르주아지가 예외적인 곤란에 처해 있는 전쟁이나 혁명의 시기(time of war or revolution, when the bourgeoisie is plunged into exceptional difficulties)”3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제4 인터내셔날의 강령’으로 자랑스럽게 강조해 마지않는 이른바 “이행기 강령(transitional program)”이란 것도 단지, “현재의 요구와 사회주의적 혁명 강령 사이의 가교(bridge between present demand and the socialist program of the revolution)”, 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해서 대중을 체계적으로 동원하는 데에 그 과제가 있는(the task of which lies in systematic mobilization of the masses for the proletarian revolution)” 강령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것도, 그가 임의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의 강령이라고 부르는 여타의 사회주의 강령들이, 당연히 그가 보기에는, “서로 독립적인 두 부분(two parts independent of each other)”으로, 즉 “부르주아 사회의 틀 내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최소강령(minimum program which limited itself to reforms within the framework of bourgeois society)”과 “언젠지 모를 장래에 사회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의 대체를 약속한 최대강령(maximum pro-gram which promised substitution of socialism for capitalism in the indefinite future)”으로 나뉘어 있었다는31) 독단에 기초한, 말하자면 ‘가교(bridge) 강령’이다.

전형적인 뜨로츠끼(주의)적 기회주의이고, 사기와 기만의 한 예이다.

더구나 “고전적 사회민주주의”가 그 강령을 “서로 독립적인 두 부분(Classical Social Democracy … divided its program into two parts independent of each other)”으로 나누었다니?! 그리고 이 두 강령, 즉 “(소위) 최소 강령과 최대 강령 사이에는 어떤 가교도 존재하지 않았다(Between the minimum and the maximum program no bridge existed)”니?! ― 이 얼마나 뜨로츠끼의 유아독존적 오만과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맑스-레닌주의의 가면을 쓰고 그 얼마나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 등을 부정하고 욕보이고 있는가?!

아무튼, 뜨로츠끼(주의)적인 기회주의적이며 기만과 사기에 찬 ‘이행기’ 개념에 의해서만, 혹은 맑스와 엥겔스, 레닌이 그토록 강조했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서의 이행기 개념 그것을 부정해야만, 쏘련을, 특히 스딸린 시대의 쏘련을 ‘공포정치’라고, 반노동자적ㆍ반인민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다.

 

 

6. 현대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자계급의 후퇴

 

오늘날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한국을 포함하여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사실상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적ㆍ이념적 포로로 잡혀 있고, 이 점이야말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후퇴의 본질적인 표현이다.

오늘날 한국의 소위 진보진영 속에서,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radical) 대안을 찾는 대신에, ‘기본소득’이니, ‘사회적 기업’이니 하는 헛소리들을 떠들어대며, 부질없는 소위 복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물론 (좌파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현대 사민주의의 사상적 지배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진풍경이다.32)

맑스주의임을 자임하던 서유럽의 현대 사민주의가 어떻게 기회주의로, 나아가서는 ‘사회배외주의’로, 즉 독점자본가계급의 배외주의적ㆍ제국주의적 노동자계급 지배ㆍ억압 도구로 전락했는가는,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전개되는 속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관련하여, 일찍이 레닌이 통렬하게 비판한 대로이다. 그리고 그들 사민주의 정당들은 그들이 위선적으로 내걸고 있던 ‘맑스주의’라는 간판도 1960년대를 지나면서는 대부분 다 철거해버렸다.

그런데도 유럽의 강단 맑스주의자들, 즉 사회민주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은, 그리고 그들의 직접적ㆍ간접적 영향력 하에 1980년대 이후 발생ㆍ성장해온 이 사회의 강단 맑스주의자들은, 현대 서유럽 강단의 맑스주의야말로, 즉 현대 사민주의적 맑스주의야말로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적 이론적 전통을 올바로 계승하고 있고, 발전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확립하는 작업은 소련이 아니라 서구에서 올바른 방향이 설정되었다”는, 앞에서 본 이성백 교수의 발언도 물론 그런 유의 주장의 하나이다.

그런데, 강단 맑스주의자들의 이러한 강변과 노동자계급의 사상ㆍ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배, 영향력은 정치적ㆍ실천적으로 노동자계급을 사민주의 지지로 몰아가고 있고, 따라서 그 정치적 후퇴와 무기력을 광범하게 강력하게 조장하고 있다. 이들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노골적ㆍ적극적으로 사민주의 정당들과 그 정책들을 옹호하고 있든, 그에 대한 기만적 비판을 가하고 있든, 사실상 똑같이 그렇게 작용하고 있다.

사실 현대 사민주의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구차하다. 현대 사민주의의 계급적 정체를 아는 데에는 서유럽의 저들 사민주의 정당들, 그 정권들이 벌여온 정치적 행적의 일부를 극히 간략히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과 북부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사민주의 정당들이 여러 번 정권을 담당했다. 그리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해체ㆍ붕괴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한 최근의 일들 몇몇만을 취해보기로 하면, 예컨대, 유고슬라비아가 엄청난 비극을 수반하면서 조각조각 해체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과정에서 저들 사민주의 정권이, 특히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그것이 수행해왔고, 또 수행하고 있는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저들 사민주의 정권의 역할과 미국의 극우 정권의 그것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차별성이 있었는가?

그 무차별성, 그것이 바로 현대 사민주의이다. 즉, 독점자본의 노동자계급 기만ㆍ지배 사상과 정책들, 제국주의 ― 그것이 바로 현대 사민주의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노동자계급을 광범하고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 무엇에 의해서? 무엇보다도, 저들의 사실상 전지전능한 이데올로기 조작ㆍ지배 수단을 통해서, 즉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이 지배하는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고도로 발전한 독점자본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른바 ‘복지정책’을 통해서! 이 과정에서 물론 ‘진보적 지식인들’,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누구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진보적인 것처럼, 대단히 인민이익ㆍ노동자계급이익 옹호적인 것처럼, 그리하여 대단히 좌익적인 것처럼,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물론 복지제도와 그 확대ㆍ강화를, 그것이 아무리 부르주아적인 것일지라도,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가능한 한 모든 기회에 그 확대ㆍ강화를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르주아적 복지제도가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민주의적, 즉 독점자본가계급 좌파적 환상이나, 그 부르주아적 복지제도가 요구하기만 하면 어떤 조건에서도 확대ㆍ강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부르주아적 복지제도는 그것을 도입하고 강화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그것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다는 조건, 그리고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혹은 부르주아적 생산이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조건에 있다는 조건, 즉 부르주아적 생산이 확대ㆍ성장하고 있다는 조건, 이 두 조건하에서만 도입되고 확대ㆍ강화되었고, 또 그럴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한 극우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한 대표적인 보수인사, 극우정권에서 중책을 맡았던 그의 이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사실상 한 극우인사의 발언은, 여러 모로 비뚤어진 것이긴 하지만, 경청할 만한 바가 전혀 없지는 않다. 보도는 이렇다.

우리나라 의료보험 도입의 산파 역할을 한 김종인 전 보사부장관은 최근 복지 논쟁과 관련, “주요 복지제도는 대부분 보수세력이 만든 것”이라며 “역사를 보면 진보는 ‘복지는 아편’이라고 거부하고 보수의 어젠다(의제)였다”고 말했다.

김 전 장관은 “유럽에선 보수세력이 사회 안정을 위해 복지정책을 시작했다”면서 “1881년 첫 사회보장제도인 의료보험을 내놓은 독일의 비스마르크도 보수였고,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유명한 베버리지 플랜을 만든 것도 영국 보수당 처칠 수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도 보수 정권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 직장인의료보험(1977년)을 도입하는 등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닦았다”며 “사실 진보 정권들은 뚜렷이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이어 “의보 도입 당시 경제 관료조차 재정에 부담을 주는 데다 보험료를 뗄 경우 근로자들이 반발할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박 대통령만 중요성을 이해해 시작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 때 긴급조치 3호(1974년ㆍ저소득층 세금 경감)가 80년대 중산층을 육성하는 토대 역할을 했다”고도 했다.33)

 

“유럽에선 보수세력이 사회 안정을 위해 복지정책을 시작했다”! ―― 결국 부르주아적 복지제도와 그 확대ㆍ강화는 부르주아 사회의 안정을 위한 것, 따라서 독점부르주아지의 “어젠다(의제)”라는 것이다.

진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맑스주의가 독일 노동자계급의 지배적 사상으로 널리 보급되고 자리 잡던 1880년대에, 그리고 유럽의 노동자들 사이에 대대적인 사회주의 혁명의 열정이 들끓고 있던 1940년대와 50년대 초에 부르주아적 복지제도가 도입되고 확대ㆍ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때는, 특히 19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는, 제2차 대전이라는 인류사에 그 유례가 없는 대파괴와 대살육의 후과(後果)로 부르주아적 생산이 빠른 속도로 확대ㆍ성장하던 시기였다. 바로 그러한 때에 현대 사민주의 세력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복지제도를 도입, 확대ㆍ강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그 부르주아적 복지제도를 도입하고 확대ㆍ강화할 조건들이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ㆍ민중의 투쟁이 격화되거나, 격화될 것으로 판단되면 극히 부분적으로야 그것이 도입ㆍ확대ㆍ강화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유의미할 정도로 그리 될 조건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우선, 사민주의는, 즉 독점부르주아지는 그들이 일찍이 확대ㆍ도입한 부르주아적 복제제도를 통해서, 그 후과로 노동자계급을 정치적 포로로 장악하고 있다. 그 부르주아적 복지제도에 안주하여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크게 후퇴해 있고, 무기력해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그리고 그들의 사상적ㆍ정치적 영향력 하에 있는 상당 부분의 노동자들이 ‘기본소득’이니, ‘사회적 기업’이니, ‘보편적 복지’니 하고 철 지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도 바로 그 후퇴와 무기력의 표현이다.

그리하여 실제로 1960년대 이후, 특히 신자유주의가 지배해온 1980년대 이후 서유럽과 북부 유럽 국가들에서의 사회복지제도의 역사는 그 해체와 약화로 점철되고 있다. 극우적 보수정권에 의해서뿐 아니라 사민주의 정권들에 의해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그 복지제도는 해체되어 왔고, 약화되어 왔다.

다음엔, 부르주아지가 그 복제제도를 확대ㆍ강화할 물질적 조건 또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은 1880년대의 독일처럼, 혹은 제2차 대전 직후 2ㆍ30년 동안의 자본주의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이 성장ㆍ발전하고 있는 시기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만성적이고 항상적인, 거대한 과잉생산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이다. 그처럼 한사코 공황의 필연성을 부인하던 저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스스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공황’이라고 자인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개혁’, 그리고 ‘긴축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사회복지에 대한 대대적 공격에 나서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러한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유럽의 노동자계급은 대부분, 사회혁명이라는 근본적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에, 되지도 않을 복지 수호에 매달리고 있다. 다름 아니라, 사민주의의, 즉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 지배의 무서운 위력이다.

 

 

7. 수정주의=기회주의의 득세와 노동자계급의 후퇴

 

이상에서는 자본주의 세계의 노동자계급(운동) 내부에 침투하여 목소리를 높여오고 지배력을 강화해온 제국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자계급의, 그리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와 무기력화를 초래했는가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지적해왔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와 무기력화는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반동적 요인(要因)들에 의해서만 전개된 게 아니다. 그러한 반동적 요인들은 20세기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특히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중심적이고 선도적인 세력이었던 쏘련 사회에서도 심각하게 발생ㆍ성장했다. 다름 아니라, 흐루쉬쵸프 정권 이래의 수정주의, 즉 기회주의의 득세, 맑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일탈과 그로 인한 노동자 국제주의의 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특히 흐루쉬쵸프의 스딸린 ‘비판’=격하 운동과 수정주의로의 방향전환은 중-쏘 이념분쟁을 야기하여 노동자 국제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고, 전 세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와 무기력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자계급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를 가져오고, 결국에는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ㆍ붕괴를 초래하게 된 것은, 뜨로츠끼주의자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스딸린주의 때문이 아니라, 흐루쉬쵸프 이후의 수정주의=기회주의의 득세에 그 원인의 일단이 있었던 것이다.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를 해체ㆍ붕괴시킨 최대의 원인은, 그리고 나아가 20세기 사회주의 속에 수정주의=기회주의를 발생ㆍ배양한 것도, 물론 ‘냉전’, 즉 제국주의에 의한 정치적,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봉쇄ㆍ공격과 파괴공작이었지만 말이다.

수정주의, 즉 기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의 하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즉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굴신이다. 수정주의가 득세하면서부터는 사회주의권에서도,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전위 속에서도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한 치열한 사상ㆍ이론적, 대중적 투쟁이 전개되지 않았다. 사상ㆍ이론적인 반종교 투쟁, 반관념론 투쟁이 전혀 벌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건성으로, 면피용으로 벌어졌을 뿐, 맑스와 엥겔스, 레닌에 의한 그것처럼 치열하고 집요하게는 결코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환경 속에서 부르주아적 자유주의가 노동자ㆍ인민 대중의 정신을 갉아먹지 않고, 그리하여 노동자계급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후퇴를 초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쏘련과 특히 동유럽 국가들에서의 정치적ㆍ이데올로기적 상황의 전개가 바로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수정주의자들, 즉 기회주의자들의 득세로 시간이 갈수록 사회주의는 그렇게 형해화되어갔고, 대중은 그렇게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쏘련이 해체되던 1991년에도 아직 노동자ㆍ민중의 대부분은 쏘련의 해체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지만, 이미 병은 중했다. 수정주의자들은 이미 사실상 제국주의자로까지 전락해서 그들과 야합하여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를, 쏘련의 해체를 선도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운했던 고르바쵸프는 터키 앙카라의 아메리칸 대학의 한 쎄미나에 초청되었을 때 가졌던 언론 인터뷰에서 가증스럽게도, “나의 대망(大望)은 공산주의, 즉 모든 사람들을 뒤덮고 있는 독재주의를 청산하는 것”이었으며, “이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서 나를 지탱해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것은 처 라이사였다”34)라고까지 공언했다. 맑스-레닌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그렇게 매도되고 내팽개쳐졌다. 흐루쉬쵸프의 스딸린 ‘비판’ㆍ격하 운동 이후 득세해온 수정주의=기회주의는 그렇게 파렴치하게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해갔던 것이다. 그리고 물론 자칭 혁명가들은 수많은 반쏘ㆍ반스딸린주의ㆍ반공주의자들은 그들의 그러한 전락을, 20세기 사회주의의 해체ㆍ붕괴를 쌍수를 들어 갈채하며 환영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들은 그러한 불모의 ‘혁명’을 요란하게 외치고 있다.

온갖 형태의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온갖 가면을 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의 투쟁, 그것 없이는, 그 투쟁에서의 승리 없이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전진도, 해방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이 근본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의 얘기를 들어보면,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고,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서 전복되어야 하는데, 하지만 또한 이론은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 이론은 그것이 사람들에게(ad hominem: am Menschen) 입증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radikal)으로 되자마자 사람들에게 입증된다. 근본적이라 함은 사물을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35)

 

진보적임을 자임하는 자들이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에서마저 속물적 인품이, 속물적 절충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굳이 인용하여 덧붙이는 말이다. (물론, 예컨대, 인터넷 댓글 같은 익명 속에 숨어서는 자신들에 대한 현명(顯名)의 비판자에게 온갖 비열한 발언과 추잡한 욕설들을 다 토해내고 있는 신사분들이시지만!)

노사과연

 


1) 레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 W. I. Lenin Werke, Bd. 23, Berlin, 1978, S. 102.

 

2) 레닌, “임박한 파국,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W. I. Lenin Werke, Bd. 25, Berlin, 1981, S. 370.

 

3) 레닌, 같은 곳.

 

4) 최일붕, “1917~1928년 러시아: 혁명에서 반혁명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 러시아로”,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편, ≪마르크스주의 연구≫ 03, 제2권 제1호, 한울, 2005, pp. 87-88.

 

5) 마리오 소사 저, 노사과연 편집부 역, ≪진실이 밝혀지다: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노사과연, 2010, p. 125. (다만, 번역이 여기에서의 인용과 동일하진 않다.); D. N. Pritt, “The Moscow Trial was Fair(모스끄바 재판은 공정했다)”, http://www.marxists.org/history/international/comintern/sections/britain/pamphlets/1936/moscow-trial-fair.htm.

 

6) Report of Court Proceedings ― The Case of the Trotskyite-Zinovievit Terrorist Centre, Moscow, 1936, p. 14.; 마리오 소사, 같은 책, p. 120에서 재인용. (다만, 2010년 11월에 간행된 번역 초판에는 이 인용문이 오역되어 있다.)

7) 그러나 이른바 ‘모스끄바 재판들’에서의 피고인들의 증언이 고문에 의해서 강요된 것이라는 반쏘ㆍ반공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그 “재판들은 공정했다”는, 앞에서 인용한 D. N. 프리트의 증언뿐 아니라, 다름 아니라, 누구보다도 반쏘적이고 반공주의적인, 당시 모스끄바 주재 미국 대사 조셉 데이비스(Joseph E. Davies)나 스웨덴 대사 윌렌스티에르나(Eirc Gyllenstierna) 등의 현지 보고들이 있다(마리오 소사, 같은 책, pp. 124-130, 147-149, 151-153 참조). 따라서 그 재판에서의 증언들이 강요된 거짓 증언임을 책임 있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D. N. 프리트뿐 아니라 미국 대사나 스웨덴 대사 등의 현지 보고들이 거짓임을 먼저 입증하거나, 그러한 증언이나 보고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여기서 우리가 제시하고 있는 ≪진실이 밝혀지다: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의 저자 마리오 소사에 의해서 날조된 것임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8) Our Political Tasks(1904) ― Trotsky Internet Archive(www.marxists.org/archive/trotsky/index.htm)에서 영역본 전문(全文)을 볼 수 있다.

 

9) 마리오 소사의 저서 ≪진실이 밝혀지다: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은 바로, 저들의 그러한 악의적 과장과 왜곡, 모략을 폭로하면서, 당시 1930년대에 쏘련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가를 밝히는 책이다.

 

10) 엥겔스, “권위에 대하여”, MEW, Bd. 18, S. 308.

11) Lenin Werke, Bd. 25, S. 451.

 

12) 같은 책, S. 452.

 

13) 레닌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1873년에 “맑스는 정치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을 조롱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Lenin Werke, Bd. 25, S. 449.) ―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이 혁명적 형태를 띠게 되면, 즉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독재 대신에 그들 자신의 혁명적 독재를 실시하게 되면, 그들은 무서운 원리모욕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가련하고 비속한 일상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쳐부수기 위해서, 노동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국가를 폐지하는 대신에, 국가에 혁명적이고 과도적인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맑스, “정치적 무관심”, MEW, Bd. 18, S. 300.)

 

14)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이는 물론 스딸린 시대에 국가나 당, 기업에 관료주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쏘련 사회의 관료주의는 결코 저들이 말하는 ‘스탈린주의’ 탓이 아니다. 그것은 구(舊)체제, 짜르 시대로부터의 잔재였고,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스딸린 역시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싸워왔다. 그에 반해서, 대표적으로 노동조합조차 국가기구화하고 군사적으로 편재하려 했던 노동조합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뜨로츠끼야말로, 물론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쏘련에서의 관료주의에 누구보다도 책임이 있는 인간이다. 그런 그와 그 추종자들이 파렴치하게도 스딸린을 관료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있다.

 

15) 정성진, “해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파산한 이론을 은폐할 수 없는 수사학: 에르네스트 만델에 대한 답변”(“Rhetoric Which Cannot Conceal a Bankrupt Theory: A Reply to Ernest Mandel”, International Socialism, Winter 1992)의 번역 ‘해설’), ≪이론≫ 제4호, 1993 봄, p. 293.

 

16) 정성진, 같은 곳.

 

17) 저들이 자신들이야말로 ‘레닌의 정통 계승자’라고 강변하니까 하는 말이지만, 레닌은 이렇게 쓰고 있다. ― “모든 시민이 여기[=사회주의 사회, 혹은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 인용자]에서는 무장한 노동자들로 구성되는 국가에 고용된 종업원으로 전화된다. 모든 시민이 하나의 전인민적이고 국가적인 ‘신디케이트’의 종업원과 노동자로 되는 것이다.”(레닌, ≪국가와 혁명≫, Lenin Werke, Bd. 25, S. 488.) ―― 축하한다, ‘국제사회주의자들’이여! 다름 아니라 바로 여기에 쏘련이, 그 ‘인민은 노동자요 국가가 유일한 자본가였다’는, 그리하여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전거가 있었구나!

 

18) 위의 주 13) 참조.

 

19) 문국진, “현대철학에서의 헤겔과 마르크스―코르쉬와 마르쿠제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 03, 제2권 제1호, 2005, pp. 291, 292.

 

20) 문국진, 같은 글, p. 268.

 

21) 같은 글, p. 270.

 

22) 이성백, “스탈린주의 철학 비판”, 같은 책, p. 67.

 

23) 같은 글, pp. 71-72.

 

24) 같은 곳, 주 4).

 

25) M. J. Olgin, Trotskyism: Counter Revolution in Disguise, San Francisco: Proletarian Publisher, 1935, pp. 151-152.

 

26) 이성백, 같은 글, p. 83.

 

27) 같은 곳, 주 17).

 

28)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억압기구로서의 국가의: 인용자] 장래의 ‘사멸’의 시점을 규정하는 것은 문제로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고, 이 사멸은 명백히 장기적인 과정일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레닌, ≪국가와 혁명≫, Lenin Werke, Bd, 25, S. 471.)

 

29)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이에는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의 혁명적 변혁의 시대가 놓여 있다. 이 시기에 대응하여 또한 정치적 과도기가 있는데, 이 과도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일 수밖에 없다.” (맑스, “고타강령 비판”, MEW, Bd. 19, S. 20.)

 

30) Leon Trotsky, “The Death Agony of Capitalism and the Tasks of the Fourth International ― The Mobilization of the Masses around Transitional Demands to Prepare the Conquest of Power: The Transitional Pro-gram”, http://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8/tp/index.htm#contents.

 

31) 이상, 뜨로츠끼, 같은 글.

 

32)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벌이는 이른바 ‘사회적 기업’이니, ‘보편적 복지’니 하는 논의와 실천이 이명박 정부나 박근혜 등등이 벌이는 그것과 사실상 차별이 없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33) “[복지 百年大計] ‘주요 복지제도는 대부분 보수가 만든 것’”, ≪조선일보≫, 2011. 3. 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04/2011030400169.html.

 

34) “공산주의를 청산하는 것, 그것이 나의 대망이었다 ― 터키에서의 고르바쵸프의 연설”, 旬刊 ≪社會通信≫, No. 104, 도쿄, 2009. 6. 1.

 

35) 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MEW, Bd. 1, S. 385. (최인호 역, 같은 글,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1992, p. 9.)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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