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번역] “‘68’년 5월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는가?”

 

* 이 글은, 아티카(Attica) KNE 조직의 대학생 축제에서 마키스 파파도폴로스(Makis Papadopoulos)의 연설(2018년 6월 16일)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 : 제일호 │ 부산지회 회원

 

 

68년 5월 이후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왜 이 주제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향수 때문에 68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다행스럽게도, 시리자(SYRIZA) 및 일부 기회주의자들의 최근의 행사들과는 달리, 오늘날의 KNE 행사에는 주로 젊은이들, 대학생들이 참석을 하고 있으며, 단지 그 사건에 대해 경험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학 강당에서 관련된 토론의 기억을 가진 몇몇의 중년의 사람들만 참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68년의 5월을 토론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 현실을 덮어 가리기 원하는 부르주아 선전의 신화, 그 투쟁에서 노동계급 그리고 CGT(노동총동맹, Confederation Generale du Travai)와 PCF(프랑스 공산당, Parti Communiste Français)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는 신화를 폭로하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운동의 빠른 하향으로의 전환에 대해 배타적인 정치적 책임을 그들에게만 도발적으로 놓는다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이다. 콘-벤디트(Cohn-Bendit)와 같은 두드러진 반공산주의적 모험주의자들을 진정한 혁명가로서 끈질기게 내세우고 5월을 단순한 학생들의 봉기로 내세우는 부르주아적 신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긍정적 경험과 실수들, 약점들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검토가 오늘날 우리를 더 강하게 하며, 이는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폐지, 사회주의를 미래에 더 빨리 가져오기 때문에 우리는 68년 5월을 토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68년 5월 사건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와 정치 사이의 관계를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사건 발전의 경제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예를 들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미국에서의 운동과 같은 운동의 상승의 국제적인 차원이 있지만, 오늘 우리는 프랑스에 국한해서만 논의할 것이다.

올해는 맑스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인데, 그는 그의 저작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쓰지만,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조건 하에서 임의로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각각의 주어진 시대에서의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하에서 쓴다고 하였다.

그러면, 사건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 이 시기에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경제의 전개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프랑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제2차 세계대전 후, 장 모네(Jean Monnet)에 의해 구체화된 현대화 및 기반시설을 위한 국가 계획이 프랑스에서 시행되었고, 미국의 마셜 플랜(Marshall Plan)에 의해 투자 부분에서 자금이 조달되었다. 1954년 이후 프랑스 산업생산의 증가율은 연간 9-10%에 달했다. 원자력 발전, 항공우주, 전자의 현대적인 분야들은 유럽의 다른 열강의 자본주의 경제에 비해 많은 역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프랑스에는 자본주의의 공황이 없었다. 대조적으로 1969년과 1973년 사이에 프랑스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는 물론 유럽 영역에 대한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한 단계 상승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이 목표는 1960년 이후 프랑스가 15개 식민지에서, 특히 아프리카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통치권을 상실했기 때문에 더욱 더 절실하게 되었다.

힘의 상호관계가 변화함에 따라 프랑스 제국주의의 더 큰 독자성을 표방하는 드골(De Gaulle) 장군은 미국의 선택과는 어느 정도 다르게 자기 자신을 차별화 시켰다.

1966년 프랑스는 NATO의 군사 부문과 조직 기구에서 철수했다. 프랑스의 우라늄 농축 망이 국내의 핵무기 생산을 위해 만들어졌다.

1963년 이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경제의 전략적인 부문에서 외국인 투자를 제한했다. 달러의 지배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드골은 냉전의 시기에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의 유럽”에 관해 말했다. 그는 66년 9월 프놈펜(Phnom Penh)과 대화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비판했고 같은 해 쏘련을 방문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EEC(유럽경제공동체-역자)를 설립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드골은 초국가적 기관과 유럽 공통의 외교 및 방위 정책에 대해, “여러 국가들의 유럽”을 대치시켰다. 그는 1963년 영국의 가입을 거부했으며 영국을 미국의 “트로이의 목마”로 간주했다. 그는 프랑스-독일 축을 구축하려고 노력했으며 아데나워(Adenauer) 수상과 프랑스-독일의 정기적인 회의에 대해 협약을 체결했다.

 

 

 

 

미국과 드골 간의 논쟁

 

우리가 언급한 것을 보면, 우리 모두는 왜 드골의 정치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프랑스에서 부르주아 내부적인 모순이 심화되었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미국이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가장 친(pro)대서양적인 세력들과 협력하여 프랑스에서 독자적이고 다면적인 전후의 활동을 한 것은 단지 프랑스 공산당의 영향력을 제한하고 반공산주의를 육성하는 데만 제한된 것이 아니며, 미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드골의 정치적 지배에 대해 부르주아적 압력을 가하고 침식하는 형태로 관여하였다.

전후의 최초의 기간에, 미국은 국민통합정부로부터 프랑스 공산당을 축출하고 노동계급 내에서 프랑스 공산당의 영향력을 위축시키는 것을 목표로 초점을 맞추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개량주의 노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의 강력한 영향력은 미국이 추구한 반쏘련 노선의 확대에 장애로 간주되었고 체제의 안정성에 대한 잠재적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만일 프랑스 공산당이 자신의 노선을 수정하고 혁명적인 전략과 활동을 획득하는 경우에 대비하여.

1946년 총선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29%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후마니테(L’Humanité)는 독자가 가장 많은 신문이었으며 CIG(CIA의 전신)의 수장인 호이트 반덴버그(Hoyt Vandenberg)는 프랑스 공산당이 원한다면 그 당은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전후 미국의 반공산주의 개입에는 여러 계획들과 비밀 요원들의 네트워크가 포함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부르주아 내부의 모순의 맥락에서 프랑스 부르주아 정치인들에 의해 폭로되었다. 붉은 프랑스(red France)의 창조를 막기 위한 블루 플랜(Blue Plan)이 알려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코드명 “바람의 장미”(Rose of the Winds)라는 프랑스 반공산주의 네트워크가 설립되었는데, 대서양 동맹의 별모양의 상징과 같이, 후에 사회주의자 대통령 미테랑(Mitterrand)의 특별 고문이 되었던 프랑수아 드 그로수브르(François de Grossouv
-re)에 의해 지도되었다.

CIA는 분리주의적이고 반공산주의적인 노조 연합인 포스 오브리에르(Force Ouvrière)의 창설과 활동을 지지했는데 그것은 붉은 노동자들의 연합인 노동총동맹(CGT)의 커다란 영향력을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CIA는 또한 불법적인 비밀 군사 조직(OAS, Secret Army Organization)의 활동을 지원했는데, OAS는 드골에 대한 쿠데타를 조직했다. OAS는 알제리에서 식민지 멍에의 유지를 추구하면서, 드골을 지지했던 에비앙(Evian) 시장과 같은 사람들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드골을 직접 죽이려고 시도했다.

오랜 기간 후에 밝혀진 프랑스 의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1968년 5월 이전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성원이 시민 행동 기구(Civic Action Service)에 모집되었으며 그들은 비밀 활동의 이러한 비밀스러운 전쟁에 참여했다.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Pierre Mendès France)―그는 1968년 5월 27일 샤를레티 스타디움(Charléty Stadium)에서 열린 반정부 집회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와 같은 반권위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학생 그룹들이 친대서양적인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지지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마오주의자, 뜨로츠키주의자, 반권위주의 조류를 포함하는 콘-벤디트(Cohn-Bendit) 그룹은 드골 정부와 프랑스 공산당 모두를 목표로 삼았고, 실천적으로 대서양주의적인 프랑스 사회민주주 정부로의 접근을 촉진했다.

가이 호켄헴(Guy Hocquenghem)과 같은, 68년 5월의 비공산주의적 활동가들조차도 버나드 쿠치너(Bernard Kouchner)와 세르게 줄리(Serge July)와 같은 당시의 저명한 주역들을 친미 사이비 좌파의 기관들로 지목했다.

부르주아 진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이러한 발전의 결과들이 노동 계급, 학생들, 청년에게 무엇을 가져왔는지 살펴보자.

 

 

만족되지 못하는 현대의 요구들

 

1968년이라는 특수한 기간에, 이전의 기간과 관련하여 노동계급의 절대적 빈곤에 있어서 급격한 악화, 첨예한 증가가 있지는 않았고 심각한 자본주의의 공황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경험했는가? 1960년대에는 노동계급의 상대적 빈곤의 경향이 노동계급이 생산하는 부―이러한 부를 부르주아지, 독점 그룹의 주요 주주들이 향유하였다―와 관련하여 강화되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현대적 요구와 구매력 사이의 벌어지는 거리를 경험적으로 목격했다.

우리 시대에는 노동계급이 더 이상 단지 의복이나 일상적인 영양 공급과 같은 기본적인 요구만을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노동계급은 여가 시간의 증가, 창의적인 업무내용, 미래에 대한 불안의 근절, 자녀의 실질적인 교육, 건강보호 개선에 대한 요구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착취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규모로 맑스주의를 연구하지 않았더라도, 노동계급은 원자력 발전소, 작업장, 자동차 산업, 현대적인 공장에서 노동의 사회화와, 대자본에 의한 생산 결과물들의 전유 사이의 모순을 더욱 격렬하게 경험했다.

노동계급은 지금, 20세기의 처음 수십 년보다 더 교육을 받고 숙련되었다. 노동계급은 누가 업무의 속도를 결정하는지, 누가 투자와 우선 순위를 결정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더 반영할 수 있다. 혁명적인 전위가 노동계급을 이러한 방향으로 이끄는 만큼.

피고용인들은 대량 실업의 증가에 대해 우려했는데, 특히 1964년 20만 명에서 1967년 30만 명으로 증가했던 젊은 층의 대량 실업, 그리고 낭트(Nantes)와 세인트 나자르(St Nazaire) 조선소와 같은 특정 부문의 위기의 발발을 우려했다. 그들은 드골의 안정화 계획으로 인해 일과 보험의 권리를 제한하는 첫 번째 조치를 경험했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보험료를 인상했고 보험 기금들을 노동조합의 통제로부터 빼앗아갔다.

노동계급의 하위 계층, 말하자면, 1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최저 임금(월 400프랑밖에 되지 않는)을 받았는데, 노동자들이 매주 초과근무를 많이 하지 않는 한 이 돈으로 버젓한 생활을 해 나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대적 요구에 대한 만족의 결여가 특히 예민하게 떠올랐던 곳은 대학이었다. 전쟁 후 자본의 확대 재생산의 필요는 숙련된 과학 분야 인력에 대한 요구를 증가시켰다. 과학적인 연구와 지식은 자본의 수익성의 향상을 위해 생산에서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1960년대에는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는 학생들의 출신 계급이라는 점에서 그 구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주요하게는 그들의 계급적 전망을 차별화시켰다. 처음에는 실업과 저임금 작업의 위험. 말을 바꾸면 프롤레타리아화의 경향이 나타난다.

동시에, 기반시설, 실험실, 건물, 강사들이 학생들에게는 적절하지 않았다. 교육에서 계급의 장벽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었다. 교수의 권위주의 그리고 학생 강당을 남성을 위한 강당과 여성을 위한 강당으로 분리하는 것과 같은 일련의 시대착오는 이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성에 대한 억압과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열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래의 학생들에 대한 시험 장벽과 분리 메커니즘에 관련되었던 교육부의 법령과 같은, 한 점의 불꽃은 4월 말에 최초의 학생 동원의 방아쇠를 당기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만족되지 않는 현대의 요구라는 쟁점은 흐릿한 일반적인 도전의 분위기에 방아쇠를 당겼고 약간의 투쟁이 일어났다. 문제는 공산당이 그 상황을 어떻게 마주했는가이다.

 

 

프랑스 공산당(PCF)의 정치적 약점

 

프랑스 공산당은 노동계급과 강한 연계를 맺고 노동조합 운동에 커다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공장 점거에서, 노동 투쟁에서, 68년 5월에 대해 실제적인 정치적 무게를 부여했던 1000만 명의 강력한 대규모 총파업에서, 프랑스 공산당 노동조합 세력은 노동총동맹을 통해 지도를 했다.

1968년 5월 29일 프랑스 공산당의 대규모 정치 시위 이후에 비로소 드골은, 비록 슬로건이 정부의 변화라는 목표에 국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투쟁의 상승과 투쟁의 역동성으로 인한 대통령궁의 점거 가능성에 대해, 실제적으로 경계하게 되었다.

드골은 노동자 투쟁의 축소와 타협의 방향으로 프랑스 공산당을 밀어붙이기 위해 5월 30일 프랑스 공산당이 시민적 합법성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고발했다. 드골이 “직접 선거 이외의 다른 출구”, 즉 계엄령의 억압 조치를 선택하겠다고 위협한 것은 프랑스 공산당이 역동적인 모습을 보인 직후였다.

불행하게도 부르주아지에게 상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흐릿하고 일반적인 도전의 분위기는 권력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계획되고 조직된 공격으로 이어지는 데 결코 충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이 적절한 사회적 동맹을 형성하는 데도 충분하지 않았다.

1968년까지에 이르는 전후의 시기에 프랑스 공산당은 혁명적 전략에서 점점 더 후퇴하고 있었고 마침내 유로꼬뮤니즘이라는 공개적인 항복 노선을 쫓는 것으로 마감을 했다. 우리는 오늘날 이 쟁점의 깊이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전쟁 이전의 전략의 정교화의 모순과 그릇된 고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해를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개량주의 노선의 결정적인 부정적 영향, 사회주의로의 의회주의적 이행에 관한 환상, 더불어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협력하는 정부이다. 이 전략은 프랑스에서 친대서양적인 부르주아와 드골 지지자들 사이의 부르주아 내부의 모순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종종 스스로 추의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다.

시간은 기회주의적인 교란과 사회주의 혁명의 법칙에 대한 부정의 이 과정을 상세히 제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핵심 요점을 간략히 언급할 가치는 있다: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의 자본주의적인 재건을 목표로 한 46년 국민 통일 정부에 참여했다. 그 선택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은 1947년 코민포름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정부에 의한 프랑스 공산당의 추방―이러한 발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증명되었다―이후에, 프랑스 공산당은 제12차 당 대회(1950년)에서 그 화력을 단지 미국의 영향력에 반대하는 것에 쏟았고, 실천적으로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1956년 제20차 쏘련 공산당 당 대회 이후, 사회민주주의와 행동의 통일의 목표가 제기되었는데 사회민주주의에서는 무엇보다도 친대서양적인 부르주아 정치인들의 다수가 발견되고 나타났었다. 사회주의로의 폭력 혁명을 통한 이행은 필수적이지 않으며, 이제는 세력들의 국제적 상호관계의 변화로 인해 제국주의 전쟁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되었다.

알제리에서의 군사 쿠데타 이후, 그리고 드골이 국회의 해산뿐만 아니라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많은 권력의 집중을 요구했던 1958년 국민투표의 경우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특정 독점체들의 국유화, 자본주의 생산의 현대적인 부문의 강화, 실업의 감소, 교육개혁에 초점을 맞춘 공동의 강령을 가지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간에 정부적 협력의 목표를 특별히 언급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정부의 변화를 통해 자본가들의 부르주아 국가로부터, 사회의 현대적 요구에 대한 친인민적인 관리가 있을 수 있다는 환상을 키웠다.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주의로의 의회적 이행이라는 환상을 키웠다. 프랑스 공산당은 군사 독재를 강요하고자 하는 드골의 야망을 지지하는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가장 반동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이야기함으로써 노동자의 적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자본의 독재의 주요 형태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역할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66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로-대서양 동맹의 입장을 명백히 했던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의 공동 입후보를 지지했다. 1967년 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공산당은, 1차 투표에서 표를 덜 받은 한 당의 후보자가 더 많은 표를 얻은 당의 후보자에 찬성하여 2차 투표에서 철수하는 상호 철수 제도에 대해 사회주의자와 협정을 맺었다.

제17차 프랑스 공산당 당 대회에서 모리스 소레즈(Maurice Thorez) 총서기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통일이라는 목표를 언급하기도 했다. 1968년 사회당과 공산당의 협력을 위한 프랑스의 샹피니(Champigny) 협정이 공식화되었으며, 그 협정에서 국유화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가 기본 조건으로 확인되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의 기간 동안 미테랑은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프랑스 공산당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피했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혁명이 발발한 후, 미테랑은 명확한 반소비에트 지향과 함께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새로운 정치적 동맹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다. 본질적으로 그는 프랑스 공산당이 쏘련 공산당으로부터 더 공개적으로 거리를 두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리하여 68년 5월의 초점 없는 도전의 흐름을 배양한 오늘날의 만족되지 못하는 사회적 요구의 폭발에 직면하여, 프랑스 공산당은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의 필요성과 역사적 적시성을 조명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투쟁의 상승과 그것의 반자본주의 방향으로의 심화에 기여할 수 있는 혁명적인 노선을 더 이상 형성할 수 없었다.

 

 

그레넬 협정

 

노동권을 위한, 보다 많은 여가시간을 위한, 창의적인 노동의 내용을 위한, 사회적 번영을 위한 생산력으로서의 과학의 인력에 대한 효과적인 활용을 위한 현대의 요구는, 자본주의적 이윤에 기초한 성장의 길을 근절할 필요성을 조명하고 있는 반면에, 프랑스 공산당은 노동운동의 전투성과 역동성을, 임금 상승, 은퇴 연령의 저하, 주 40시간의 노동에 관한 투쟁이라는 경제적 틀에 제한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목표는, 심지어 자본의 권력, 나토(NATO) 및 유럽 경제 공동체(EEC)와의 총체적인 갈등의 필요성과 연계되어 있는 선언적인 방식조차도 아니다.

그 유일한 정치적 목표는 드골 정부의 사임과 소위 인민적인 정부의 출현이었다.

부르주아 정부로서는, 재정적 요구에 관하여 정부와 노동조합 간에 그레넬 협정을 제안하고, 그것에 서명한 후 며칠이 지나서 선거를 요구하는 것을 통해 이 개량주의 노선을 다루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5월 27일의 그레넬 협약에서 부르주아 정부는 노동총동맹(CGT)의 경제적 요구에 직면하여 상당한 양보를 했다. 부르주아 정부는 상승하고 있는 노동자 투쟁의 정치적 역동성을 제한하기 위해 최저 임금의 35% 상승, 은퇴 연령의 저하를 받아들였다. 공장 점거중인 노동자들은 그 협정을 즉각적으로 또는 유보조건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강한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첫째 주 안에 산업 생산은 다시 시작되었다.

 

 

자유주의에 대한 “자유의지론적”(libertarian) 설교자들

 

현대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반자본주의적인 노선을 가진, 급진적인 투쟁 강령으로써 전투적 방식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무능력은 또한 부르주아적 및 소부르주아적 개념들이 꽃피우는 데 기여했는데 이것들은 차례로 대규모 반공산주의 운동의 출현과 노동운동의 무장해제에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마르쿠제(Marcuse)는 현대적인 가전제품과 자동차의 획득을, 노동자의 소외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면서, 그러한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계급의 요구를 비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노동계급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를 자신의 노동의 생산물, 자기 자신의 노동 활동, 다른 사람들과 그 환경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데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했다.

그러나 노동자가 생산하는 특정 제품이나 특정 서비스가 아닌, 자본주의적 이윤을 노동의 목표로 강요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인데, 물(水)에서부터 건강과 자녀의 양육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화시키면서 특정한 소비 패턴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 시장의 정글 안에서 일시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경쟁하도록 압박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이다.

이러한 상황은 산업과 기술의 발전 일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68년 5월에 학생 운동의 대열에 최초로 영향을 주었던 수많은 소부르주아적 및 부르주아의 흐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주의자들, 실존주의자들, 신프로이트주의자들, 소위 반권위주의자들 등과 같은 그들 중 다수의 사람에 대해, 우리는 뒤에 이어지는 루카스(Loukas) 동지의 개입에서 그들을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억압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개인의 권리를 미화했던 “자유의지 노선”의 정치적 결과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노선은 자본주의 체제에 무해할 뿐만 아니라 자본의 새로운 공격을 위해 유용했다. 당시의 프랑스 맑스주의자들(미셸 클로스카드(Michel Clouscard))은 “자유의지론적 자유주의”에 대해 정확하게 말했다.

무정부주의적 슬로건인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와 “어떤 종류의 권력도 부패한다”는 것은 자본의 권력을 타도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모호하게 만들고 그 운동을 무장해제 시켰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그리고 실업을 철폐하기 위해서는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불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더 적은 정부 관료주의 그리고 더 많은 자유에 대한 흐릿하고 일반화된 요구는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정치의 기치가 되었는데, 이것은 물론 강력한 부르주아 국가들에 의해, 반공주의와 함께―왜냐하면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노동자 권력의 국가에 비유하기 때문이다―적용되었다.

억압적인 사회 일반에 반대하는 개인주의의 미화는 사회주의 나라들에서 인권이 짓밟히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미국의 선전 활동의 배경이 되었는데 이는 사회적 권리 및 의무와 관련하여 개인적 권리의 우선권과 보호라는 동시대의 선전으로 발전했다. 사회의 이익을 사회적 억압의 한 형태로서 제기하는 어떤 선택에 세례를 주는 것은 철저하게 반동적인 정치 노선이다. 이 정치노선은 자본주의에서 착취를 당하는 수백만 명의 권리를 억압하고 숨 막히게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고 확장한다면, 몇 년 안에 우리는 강간범, 어린이에 대한 이상 성욕자, 마약 거래자의 개인적 권리의 보호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입장은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를 신성하고 불가침한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주체성에 대한 개인주의적 신화는 1968년 5월 이후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에 의해 이용당했다. 적극적인 참여와 각 개별 노동자들의 창의성의 자유화라는 망토를 걸친 새로운 형태의 조직들은 노동자들 간의 경쟁과 노동 강도의 강화를 증가시켰다. 그것들은 기업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각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뜨로츠끼주의 그룹들의 실제 역할

 

3월 22일의 운동은, 한 사회학과 학생인 콘 벤디트(Cohn-Bendit) 자신이 그때 말한 것처럼, 명확한 강령, 체계, 구조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체제에 무해한 것이었다. 이 노선을 따르는 학생들은 “억압의 타도”와 “권력에의 상상력”을 외쳤지만, 본질적으로 부르주아 권력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고, 부르주아 국가가 인민들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조직하는 것을 허용했다. 콘 벤디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확고한 반공산주의를 언급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드골 정부와 프랑스 공산당을 비난하면서, 친대서양적인 프랑스 사회민주주의를 체계적으로 정치적으로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입안된 “자유의지적인” 모호한 슬로건은 정부를 교체하고자 하는 목표에 실천적으로 봉사했다.

이 모험주의적인 사람은 처음에는 프랑스 공산당의 프랑스 청년 조직에서 추방되었던 근본적인 뜨로츠키주의 그룹―이 그룹은 알랭 크리빈(Alain Krivine)을 지도자로 하는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출현했었다―을 지지했다.

그들은 이미 1956년에 폴란드의 그리고 주요하게는 헝가리의 반혁명 세력에 대하여 동정심을 표명했다. 프랑스와 같은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가능성을 거부하면서, 그들은 사회주의 혁명의 불꽃을 먼 미래로 연기했다. 그들이 제안한 이행기적 투쟁 강령은 자본주의의 영역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조직의 창출에 초점을 맞추었다.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프랑스 공산당이 자연발생적인 노동자 활동과 전투적인 형태의 투쟁을 과소평가하고 고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의 이론가인 어니스트 만델(Ernest Mandel)은 68년 5월을 평가하면서, 혁명적 전위가 존재하지 않을 때조차도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노동자들의 실천적인 경험은 혁명적인 계급의식의 발전의 가속화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험은 보여 주었다고 썼다.

그러나 경험은 이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효과적인 혁명적 전위의 결여는 부르주아 계급이 운동의 상승을 완화하도록 촉진했다. 부르주아 정부는 당근―그것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에 대한 일시적인 양보의 전술이다―과 채찍―그것은 프랑스 공산당이 부르주아적 합법성에 반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하면서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체포, 상해, 살인, 위협을 가하는 억압이다―을 활용했다.

부르주아 정부는 “민주주의를 위한 방위 위원회”와 같은 준국가기구를 동원했고, 뿐만 아니라 5월 30일 드골을 지지하며 결집한 수십만 명의 시민을 동원했는데 그들은 “프랑스인을 위한 프랑스”와 “공산주의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준국가조직들은 심지어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동맹의 지역 사무소 밖에서 때때로 경고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부르주아 정부는 조기 선거를 선언하는 카드를 사용했는데 거기에서 드골주의자들(Gaulists)은 38.3%에서 46.4%로 그들의 득표율을 상승시켰다: 선거 전(前) 기간 동안 18세의 노동자이자 공산주의 청년 조직의 성원인 마크 랑뱅(Marc Lanvin)이 살해되었는데, 푸조(Peugeot) 공장의 공장 점령에서 2명의 노동자처럼 그리고 한 17세의 학생처럼 그렇게 살해되었다. 노동자들에게 경제적 요구에 만족한 후에는 파업을 중단하라고 이미 요구했던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주의자들과의 민주적 통일”이라는 부르주아 정부의 형성을 정치적 목표로 설정했으며 그리고 드골이 헌법위원회를 향한 자신의 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덫에 빠지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자연스럽게 사건의 경과는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이 결정적인 계급적 대결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노동 운동을 쉽게 무장 해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주요하게는 공산주의 청년 조직에서 추방된 분파로부터 형성되었던 뜨로츠키주의 연맹은 사회당과 공산당 간의 협력이라는 부르주아 정부를 구성하려는 목표를 지지하기 위해 선거에 나타났다.

5월에 “포장 도로 아래, 해변”이라는 노래를 부르던 대학생들은 이미 6월부터 여름 방학을 시작하기 위해 진짜 해변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빨리 68년 5월 프랑스의 전투적 투쟁들이 죽어 버렸다. 그 후 몇 년 동안 프랑스는 유럽-대서양의 제국주의적 계획 내에 더 유기적으로 동화되었다. 프랑스의 낭테레(Nanterre)에서 활동하기 전에, 독일 사회주의 학생 연합에서 출발했던 콘 벤디트(Cohn-Bendit)는, 다음 수십 년 동안 독일에서 부르주아 정치가로 다시 나타났다.

 

 

68년 5월은 무엇이었나?

 

앞서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프랑스의 1968년 5월에 대한 몇 가지 특수한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자본과 노동 간의 근본 모순을 첨예하게 만들고, 노동 계급, 인민, 인민의 청년층의 증가하는 불만에 객관적으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을 68년 5월은 증명했다. 체제가 부패해가고 있는 독점 자본주의 시대에 어떤 부르주아 정책, 어떤 형태의 기술적인 현대화도, 성장하고 있는 사회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자본주의적 이윤의 제단에서 그러한 요구의 희생 사이의 간극을 완전하게 영원히 은폐할 수는 없다는 것을 5월은 폭로하였다.

역으로, 생산력의 성장이 자본주의 하에서 진행됨에 따라, 이 격차는 단지 점점 커질 뿐이며, 그리하여 이 길은, 팽창하고 변화하고 있는 현대의 사회적 요구의 만족을 초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그러한 만족에 반대된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처지와 불만의 악화는 노동자와 빈곤한 인민 층의 부분에서 계급의식의 성숙을 자동적으로 초래하지는 않는다. 혁명적 전위가 존재하면서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의 공산당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인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폐지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시키고 지도하기 위해 필요하다.

자코뱅(Jacobins)과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없었다면 1789년 프랑스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없었을 것이고 필리키 에타이레이아(Filiki Etaireia)가 없었다면 1821년 그리스 부르주아 민족해방 혁명은 없었을 것이며 볼셰비키와 레닌이 없었다면 10월 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68년 5월 기간 동안 이러한 결론은, 개량주의 노선과 의회주의적인 환상의 우세로 인해, 자본주의 영토에 사회민주주의와 함께 “진보적인” 정부를 형성한다는 목표로 인해, 프랑스 공산당이 혁명적 전위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한 약점에 의해 두드러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의 중요성과 노동계급의 권력 쟁취를 강조하는 혁명 정책을 정식화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1968년 5월의 더 광범한 기간 동안,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적 인식의 영향력이 강화되었고, 무해하고 체제에 쉽게 통합되는 슬로건, 혹은 이어지는 몇 년 동안 자본주의의 재구조화에 있어서 자본의 공격을 위해 유용한 슬로건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중에 반공산주의적, 부르주아 정치인이 된 콘 벤디트와 같은 5월 학생 운동에서의 다른 지도자들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자연스러웠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와 상응하게, 우리는 2012년 광장에서 겉보기로는 자발적인 항의를 경험했는데, 그것은 실제적인 적을 겨냥하지 않았고, 조직화된 노동운동 외부에서 일어났으며, 본질적으로 시리자(SYRIZA)가 정부 권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도왔다. 이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정부에 무해한 변화의 방향으로 대중의 불만을 오도하는 조직화된 중심의 개입을 강조했다. 2012년의 흐릿한 반(反)각서 슬로건을 내거는 것은, 시리자(SYRIZA) 세력과 황금 새벽당(Golden Dawn) 세력의 정치적 만남의 지점을 구성했다.

노동계급은 68년 5월에 총파업과 전투적인 공장 탈취를 통해, 투쟁을 조직하고 자본주의 생산을 중단시키면서 역동적으로 전면에 부상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부르주아 계급과 드골 정부는 노동총동맹과 프랑스 공산당의 파업에 대한 호소 이후, 1000만 명의 노동자들의 총파업의 성공을 목격하고 난 후 비로소 실제적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계급투쟁의 객관적인 첨예화가 프랑스 공산당의 지도부로 하여금 개량주의 노선에서 혁명적인 방향으로 교정하도록 추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걱정을 했다. 지배계급은 객관적으로 어떤 계급이 자신들을 전복할 수 있는 전위적인 사회 계급인지―왜냐하면 그 계급은 사슬 외에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 세력의 전투적인 정치 및 노동조합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 노선은 본질적으로 노동운동을 경제적 안정과 재분배에 대한 요구로 축소시키는 노선이었고, 그 목표는 정부의 변화였다.

객관적으로 프랑스 공산당은, 일시적인 양보로써 운동의 역동성을 완화하고 부르주아 지배의 깃발 아래 보수적인 사회 세력을 동원하려 한 드골 정부의 책동을 촉진했다.

핵심적인 기회주의자, 뜨로츠키주의자 및 마오주의 그룹의 개입은 객관적으로 운동의 정치적 무장 해제에 도움을 주었다. 반쏘비에트주의, 일국에서, 민족적 수준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거부, 자연발생적인 노동자 활동의 역동성에 대한 관념화, 자본주의의 토대위에서 노동자의 통제와 ‘인민 친화적’ 관리에 초점을 맞춘 이행기적 투쟁 강령은 기회주의적 노선의 기본 요소 중 일부였다. 이런 식으로 뜨로츠키 5월 연맹은 3월 22일의 흐릿하고 무해한 운동의 꼬리로 출발하는데, 그것은 연속해서 실시된 선거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협력의 목표를 지지하도록 이끄는, 특수한 정치적 내용이 없는 봉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68년의 5월은 혁명이었을까?

 

68년 5월은,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균일한 객관적인 이해를 가진 독자적인 계급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그들의 상이한 계급적 배경, 그러나 주요하게는 졸업생들에게 있어서 상이한 계급적 전망, 대학들에서의 대중적인 조직화 이후에, 그들 중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실업의 위험과 미래의 프롤레타리아화로 가는 경향은 봉기에, 투쟁에, 그리고 대학생 운동의 급진화에 역할을 했다. 이는 결정적인 쟁점은, 부르주아 계급의 정책과 권력에 반대하는 계급 지향적인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실질적인 협력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일찍이 언급되었듯이, 그것은 우리가 프랑스 68년 5월의 정치적 내용에 대한 질문에 더 명확하게 대답하도록 해주고 그것이 다르게 진화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해준다. 68년 5월은 자본주의 권력의 전복을 위한 노동계급과 그 동맹들의 계획되고 조직된 공격을 표현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것을 허용하는 객관적인 조건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적인 정세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공산당은 개량주의적 전략으로 인해, 노동운동을 이러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혁명적인 정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첨예한 계급적 갈등이 있었다. 자본의 권력과의 갈등과 전복의 방향으로 계급투쟁이 상승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객관적으로 창출하는 노동운동에서의 의미 있는 상승이 있었다. 우리가 “비혁명적 정세”라고 개략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정적이고 불변하는, 고정된 정세가 아니다.

물론 혁명적 정세가 표출되는 시점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전위의 의지에 달려 있지도 않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과 혁명적 노동운동의 활동은 객관적 조건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고 기록되어졌다. 계급 간의 세력 균형은 자연현상과 같이 저절로 바뀌어 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도 바뀌어 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인 모순과 부르주아 내부의 모순의 첨예화와 연관이 있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자연스럽게 수행되는 계급투쟁의 과정과 결과에 기초하여 변화한다.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인 요인 사이의 이러한 상호 작용의 중요성은, 긍정적 방식으로는 1917년의 10월 혁명의 승리를 그리고 부정적 방식으로는 68년 5월의 투쟁의 결과를 비추어준다.

혁명적 상황에 대한 레닌주의의 기준에 근거해서 그 기간을 검토하면,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실들로 볼 때, 68년 5월에 프랑스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이전처럼 통치할 수 없는”, 즉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의 불안정성이 본질적으로 나타났던 지점에 우리가 객관적으로 도달했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 그러나 증가된 사회적 요구를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어려움이 증가하고 부르주아 헤게모니는 약화되었다. 드골을 지지하는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부분과 미국 간에 제국주의 내부적인 모순이 첨예화 되었다. 미국은 프랑스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지지했고 그 운동이 드골 정부에 대항하는 방향을 취하도록 개입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국가, 군대, 경찰 및 법원은 모두 단호하게 기능했고 따라서 혼란을 겪지는 않았다. 정부는 수십 만 명의 지지자들을 동원했다.

68년 5월은 노동계급과 청년의 삶에 있어서 첨예하고 광범위한 악화를 특징으로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이 현대의 사회적인 요구의 만족으로 이어지지 않고 실업, 불안정, 상대적 빈곤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은 더욱 더 분명해졌다. 노동계급이 생산한 부와 관련하여 노동계급의 상대적 빈곤은 증가했다

68년 5월, 우리는 전투적인 분위기, 전투성에서 극적인 상승, “아래로부터의 대규모 대중”의, 노동계급, 대학생들의 흐릿하고 피상적인 급진화를 보았지만, 이것은 혁명적 정세를 특징짓는, 부르주아 계급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세력들의 균형에 있어서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에는 당연히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이 계급투쟁의 결과와 운동의 급속한 완화에 대한 커다란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다. 분명히 프랑스 공산당이 무장 혁명 봉기를 즉각적으로 이끌 수 있는 조건은 성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실제적인 적,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목표로 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지배력에 균열을 내고 그 균열을 심화시키면서, 노동 운동의 정치적 투쟁을 상승시키고 한 단계 높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했었어야 했다. 프랑스 공산당은 개량주의 노선을 교정할 수 있었고 많은 공장 탈취에서 나타난 전투적인 열정을 정치적으로 풍부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였다.

프랑스 공산당은 “드골 하에서 10년이면 충분하다”라고 외치는 노동자들과 “권력에의 상상력” 이라고 벽에 적는 학생들에게 “노동자들이여, 당신들은 사장 없이도 관리할 수 있다”라는 슬로건을 공개적으로 선전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의 권력을 향한 방향으로 선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노동자를 위한 공장”이라는 희미하게 급진적 슬로건이 들려오고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바로 계급투쟁 내부에서, 진보적인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의회주의적 기만이라는 개량주의 노선을 교정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실망은 없다

 

68년 5월의 과정은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에게 공산당이 노동계급의 혁명적인 전위로 남아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가르쳐 준다. 이 역할은 단순히 건네어 지는 것이 아니며 역사에 의해서 영원히 수여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공산당들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혁명적인 전위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현대적 발전을 해석하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 사회주의 그리고 현대의 사회적 요구의 만족을 위한 필요를 조명하는 이상적인 전략을 정교화하기 위해, 계급투쟁의 역사적 경험을 지속적으로 자기 비판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계급투쟁의 상승에 도움이 될 이상적인 정책을 전투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노동계급과 가난한 인민 층과의 끈을 심화하고 넓히기 위해, 노동운동 내에서 반자본주의적 지향을 확립하기 위해, 사회적 동맹의 구축에 기여하기 위해.

우리 당은 이 모든 과업에 부응하기 위해 매일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영웅적인 그리스 공산당의 100년 동안의 투쟁과 희생을 통해 배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경험―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통해서도 배우고 있다.

프랑스에서의 68년 5월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순간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아마도 패배한 투쟁들에 대해 어떠한 실망감도 느끼지 않는다.

1968년 5월로부터, 우리는 발전된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면서 똑같은 길을 함께 행진하는 수십 만 명의 노동자와 학생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린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계급이 우리의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삶 속에서 마침내 권력을 잡기 위해, 이 똑같은 길을 끝까지 걸어가면서 투쟁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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