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한국 노동운동의 전개와 ‘사회구성체(사회성격)’ 논쟁에 대한 비판적 검토 –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통일적 인식을 위하여

 

 

김형균 │ 철도노동자, 회원

 

 

1. 들어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세계질서가 재구축되었다.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해체는 전 세계적인 대 반동을 가져왔다. 이른바 자본운동을 자유화하고 노동자・인민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 축적 전략이 브레이크 없이 작동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균열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2007년 제국주의 중심부인 미국을 강타한 대공황, 그것에 대한 대규모의 ‘양적완화’ 정책은 거대 은행의 줄도산을 막았을 뿐 당연하게도 근본적인 해결책에는 한 치도 다가서지 못했다. 도리어 위기관리의 최후 보루인 국가독점자본주의의 정부재정 위기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세계적인 과잉생산에 따른 전반적 위기, 신용제도의 과도한 팽창, 신자유주의 정책의 파산, 보호무역주의로의 선회와 미・중을 비롯한 국가 간 무역전쟁, 영국의 브렉시트 소동, 나토(NATO)와 러시아의 긴장 국면 지속 등등.

유럽연합의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 경제가 심상치 않다. 대미・대중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독일은 미・중 무역 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지난 2/4분기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1) 남유럽의 재정위기의 영향과 최근 국채금리의 마이너스 소동, 혼미한 영국의 브렉시트 상황 등이 얽혀있다. 세계의 경제성장률을 지탱하던 중국은, 정부의 각종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성장지표가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2)

20년의 경제 불황을 겪어온 일본은, 1억 2천만 내수시장의 포화상태 때문에 수출 비중을 높이면서 미국과 무역 분쟁을 빚고 있다. 아베 정권은,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부상하기 위해서 일본 내 평화헌법 수호세력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형국이다.

미 제국주의 패권의 급격한 약화와 제국주의 간의 경쟁・대결의 심화는, ‘전쟁을 통한 인류의 파멸이냐, 혁명을 통한 인류역사의 진보냐’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시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제2차 제국주의 전쟁과정에서 형성되었듯이, 21세기 자본주의의 모순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것이다.”3)

198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와 ‘변혁론’을 둘러싼 논쟁은, 커다란 역사적 의의와 진전에도 불구하고 지양・발전을 거듭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의 해체로 인해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대 반동을 넘어서지 못한 채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NL과 PD, 혹은 ‘우파’와 ‘좌파’의 분열이 고착화되었고 노동자・민중운동의 현실적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1980년대 사회과학적 이론의 성과를 계승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시급하고 중요하다. 엄밀한 이론적 평가와 진전은 혁명적 열정을 탑재한 연구자들의 활발한 논의・논쟁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다만 이 글은 한국 현대사, 특히 노동운동의 궤적을 살펴봄으로써,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1950년 전쟁까지, 그리고 노동(변혁)운동의 암흑기를 거쳐 다시 만개한 1980년대 변혁적 노동운동을 주목할 것이다. 지금의 자본의 위기가 깊어가는 객관적 조건에서 현실의 노동자・민중운동의 상태를 직시할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이후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쟁’ 또는 ‘사회성격 논쟁’의 경과와 대략적인 내용, 그리고 각 쟁점과 관련하여 약간의 견해를 드러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당시 NL-PD 간의 쟁점의 중심에 놓여 있던 ‘제국주의 규정성’과 ‘한국사회 발전정도’, 그로부터 제기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연관을 검토할 것이다. 또한 ‘민족’ 혹은 ‘민족문제’를 다루면서 그 정치적・계급적 성격과 그것의 기본관점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것이다. 현실운동에서 크나큰 질곡이 되고 있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역사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해 확인하면서 분절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할 것이다.

 

 

2. 한국 노동운동의 궤적

 

1) 일제하의 노동운동

 

한국(조선)의 본격적인 노동(변혁)운동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에 자본주의적 기업이 증가하고 노동자 수가 증가한다. 여기에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의 정치적・사상적 영향으로 1921년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었다. 이어 1925년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되고 1929년에는 원산노련의 지도하에 원산지역 노동자 3,000여명이 참가하는 총파업을 80여 일 간 벌였다. 1931년에는 사회주의자인 노동자 강주룡의 고공농성 투쟁이 진행되기도 한다. 1930년대가 되면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인해 노동운동은 위축되고 지하화 한다.

 

2) 일제로부터 해방 후 “8년간의 계급전쟁”4)

 

혁명적 노동운동의 최고조기는 1945년 8월 이후 이른바 ‘해방공간’에서였다. 혁명적 노동자당(조선공산당)과 혁명적 노조(전평), 그리고 인민통일전선체(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계급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조선공산당이 1945년 9월에 재건되어 지도적 역할을 한다. 이후 38선으로 분단되며 조선신민당과 통합하여 북조선 노동당(1946.8), 남조선노동당(1946.11)이 창건된다. 이후 조선노동당으로 통합(1949.6)된다. 1945년 8월 말경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건설되었고 지방수준에서는 인민위원회로 신속히 전환된다. 인민위원회는 특수한 형태의 민중적 자치기관 혹은 권력기구이다. 전국에 건설된 인민위원회를 기초하여, 1945년 9월 6일에 인민대표 1000여 명이 서울에 모여 ‘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조선의 노동자들은 57만 명을 포괄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를 결성(1945.11.5)한다.

“민중적 자치기관 혹은 권력기구인” 인민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조선 인민공화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려고 기도하고 있었”고, 노동자・농민은 “전체 남한 재산의 80%에 달하는 구 일본인 재산”의 많은 부분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의 제1단계인 인민민주주의혁명이 이미 결정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1945년 9월 8일, 조선에 진주한 미군정은 80%에 달하는 구 일본인 재산과 토지를 모두 군정청에 귀속시키는 조치를 단행한다. 그리고 ‘조선 인민공화국’을 부정하고 인민위원회를 무력으로 분쇄하면서 조선민중들의 ‘민족자결권’을 철저히 유린한다. 이는 미 제국주의와 그들의 토착 동맹세력인 친일・친미 대지주와 신흥자본가들, 그들의 정치세력인 이승만세력의 반혁명이다.

조선의 인민들은, 스스로가 건설하고자 한 ‘인민공화국’을 지켜내기 위해 미 제국주의와 토착 반혁명 세력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전개한다. “10월 인민항쟁(대구항쟁)”, “제주 4.3항쟁”, 여순 봉기, 그리고 이남의 거의 전국의 산악지역에서 게릴라 투쟁이 그것이다. 전평은 4차에 걸친 총파업을 전개했으나 미군정과 한민당 등의 무자비한 탄압과 테러로 해체된다. 그 자리를 전평 파괴에 앞장서온 어용 ‘대한노총’(한국노총의 전신)이 대신한다. 그리고 이어져 오던 계급전쟁은 1950년 6월 전면적인 전쟁으로 폭발한다. 1953년 정전협정으로 휴전선을 중심으로 분단은 고착화 국면에 들어간다.

이른바 “해방공간”은 노동자・농민을 중핵으로 하는 조선인민 대(對) 미 제국주의와 친미파로 변신한 친일대지주・신흥자본가 세력, 그들의 정치세력인 한민당(이승만) 세력을 한편으로 하는 계급전쟁이었다. 끝내 이남의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은 불발되었고, 혁명의 전위들은 그 주변부까지 절멸 당한다. 즉 조선공산당(이후 남조선노동당), 전평,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은 1945년부터 “한국전쟁(1950.6.25.~1953.7.27)”에 이르는 “8년 동안의 계급전쟁”을 통해 분쇄되었다. 그리고 이남에는 노동자・인민의 무덤 위에,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부르는 지주와 신흥자본가들의 “백색테러(반혁명)”국가가 수립된다.

1950년대 전쟁 이후 한국사회의 노동자・민중운동은 정치적 암흑기의 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미군정과 이승만세력에 의해 1946년 3월에 건설된 대한노총(이후 한국노총)은 해방정국에 전평 파괴에 집중했고, 내내 정권과 자본의 도구이자 노동자통제 수단으로 역할을 해 왔다.

 

3) 1950~60년대 신식민지 파씨즘과 노동자・민중운동

 

한국(조선)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은 민중에 대한 테러정치로 일관하면서 민중들의 불만은 응축되어 간다. 1958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자 한국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받아 파탄이 난다.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켜켜이 쌓인 불만이 4.19 혁명으로 분출한다.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공간을 통해 노동자・농민들이 떨쳐 일어난 것이다. “1961년 5월의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쿠데타는 일반적으로 평가되는 것처럼 부르주아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운동에 대한 부정이었다.”5)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공포정치를 한편으로 하면서 이념 조작을 통해 반공국가, 레드콤플렉스를 민중들에게 내면화시켰다. 이는 또한 “1950년대까지 이어지던 항일민족독립투사로서 인민들에게 각인된 사회주의(좌익)에 대한 권위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반공・반북 이데올로기 조작은 한국의 민중들에게 깊숙이 스며들어 무소불위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되었다.

신식민지 군사파쇼정권은 노동조합을 자신의 의도대로 활용하고 통제하기 위해, ‘대한노총’을 ‘한국노총’으로 재조직한다. 대한노총 산하 조직의 간부 9명을 선발하여 중앙정보부에서 훈련을 시킨 후, ‘한국노동단체 재건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11개 산별체계로 구성된 한국노총을 재조직하여 출범(1961.8.30)시켰다. 그리하여 반공주의와 국가주의를 전제로 하는 노동조합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유일한 노조체계는 재구성되었다.

이 시기에 “학생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및 수교를 반대하는 협의의 민족주의 운동 및 부정선거 규탄 등의 부르주아민주주의 운동으로 왜소화되어갔다. 자주적 농민운동이 압살된 위에 ‘재건국민운동’이니 ‘새마을운동’이니 하는 관제운동이 요란하게 벌어졌고, 노동운동은 철저히 질식되어 소수의 지하 학습써클로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해갔다. 그런데 박정희 집권 전반기, 특히 1960년 후반은 농민층 분해와 ‘이농’,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급격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 일본 및 미국 등에서 도입된 차관자금과 살인적인 고율의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조달한 국내 자금을 이용해서 포항・울산 등지에 대공장들이 건설되고 오늘날의 ‘재벌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대도시에는 영세공장들이 우후죽순처럼 그리고 노동자들은 영세공장이나 대공장에서도 비참한 지경이었다.”6)

 

4) 1970년대, 산업발전과 노동운동의 재 점화

 

70년대는, 여전히 반공과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한 어용 ‘한국노총-자본-국가’ 간의 커넥션이 강력한 반동적인 노동운동 시기다. 자본주의 사회구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중화학공업 뿐 아니라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노동집약적인 석유・봉제 등 경공업 부문이 급팽창하고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가 완성된다.

한국자본주의가 발전한 만큼 노동자 수도 급속도로 증가하여 경공업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치열하게 벌어졌고, 청년・학생운동의 반파쇼 민주화 투쟁도 강인하게 벌어졌던 시기다. 1969년에서 70년 초 경제위기를 맞아 부실기업 정리 등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10월 유신(72년) 선포로 파쇼체제의 폭력성을 강화한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투쟁은 노동자 투쟁에 불을 지폈다. 1970년 165건이던 노동쟁의가 다음해 1,656건으로 10배나 늘어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청년・학생운동과 종교계의 양심을 깨워, 야학이나 선교회를 통해 노동문제에 도움을 주게 만든다. 이로써 흔적조차 지워진 노동운동이 ‘민주노조운동’으로 새롭게 발화되었고, 청년・학생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반파쇼 민주화 투쟁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자본주의는 파쇼정권의 비호 아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급속한 축적을 달성해 왔다. 그러나 1979년 2/4분기에 세계경제가 오일쇼크 등의 여파로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부도가 난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 점거투쟁을 벌이자, 경찰병력을 투입하여 농성장을 침탈하는 과정에서 김경숙 노동자의 사망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부산과 마산에서 민중항쟁이 발생한다. 이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지배계급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되고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다.

 

5) 1980년대, 광주민중학살과 혁명적 노동운동의 부활

 

유신독재가 사라지자 민주화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노동자・민중 투쟁은 계엄령과 12월 12일 전두환의 1차 쿠데타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등이 2차 쿠데타(5.17)를 일으켜 총칼로 민중투쟁을 밀어붙이면서 광주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전두환 파쇼일당은 광주민중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대량 학살을 자행한다.

광주학살은 한국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또한 미 제국주의에 대한 가공된 민중들의 허위적인 인식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은 1970년대의 민주화(부르주아 민주주의) 요구투쟁만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변혁을 고민하고 실천하기 시작한다. 5.18 이후, 학생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살아남은 자의 몫을 다하기 위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 힘의 원천인 노동현장으로 물밀듯이 들어간다. 그 규모가 작게는 1만, 많게는 3만 명까지 추산된다.7)

이어 1985년에 있었던 구로동맹 파업은 변혁적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1986년 ‘5.3 인천항쟁’, 그리고 마침내 19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6월 민중항쟁’, 이어 ‘7・8・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폭발한다.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은 파쇼지배를 무력화시키고 대중 자신의 정치적 공간을 열었다. 특히 당시 노동자 대투쟁은, 저임금・장시간 노동・병영적 통제 등 무권리 상태에 놓여 있던 노동자의 ‘인간선언’이자, 노동자계급이 사회변혁의 중심부대임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이념적 성향이 강한 소수 활동가들에게 머물렀던 ‘노동해방 사상’이, 대투쟁을 통해 배출된 수많은 선진노동자들의 이념적 지향으로 되었다.

투쟁의 성과로 조직률은 급상승하고 어용 한국노총과 다른 자주・민주적인 노동조합 운동이 전면화 되었다. 이러한 노조의 지역별협의(연합)회는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을 결성했다. 전노협은 ‘노동해방, 평등세상 실현’의 기치를 강령에 명확히 명시했고, ‘자주성・민주성・연대성・투쟁성・변혁지향성’이라는 ‘민주노조’의 지향과 기준을 대중화시켰다. 이는 전평이후 단절되었던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노동운동이 다시 살아났음을 의미한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의 ‘사회구성체’ 혹은 ‘사회성격’ 논쟁이 전면화 되었다. 맑스-레닌주의 사상・이론이 부활하고 한국의 현실에 적용하면서 사회와 변혁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심화되었다. 인민노련, 삼민동맹, 사노맹, 노동계급 등등 혁명적 정치조직이 우후죽순처럼 건설되었다. 이 변혁적 정치조직들은 치열한 논쟁과 실천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의 한국사회 ‘변혁의 참모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정파로 존재했다.

 

6) 1990년대, 변혁 운동의 급격한 우경화와 민주노조 운동의 일정한 상승

 

1991년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가 해체되자 혁명적 정치조직인 인민노련, 삼민동맹, 사노맹, 노동계급 등은 맑스-레닌주의를 버리고 급격히 우익 청산주의적 태도를 취한다. 한편 쏘련을 ‘국가자본주의’, ‘쓰딸린주의’ 등으로 부정하면서 70년의 사회주의 역사 속에 녹아있는 맑스주의를 실천적으로 부정하는 좌익 청산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이들도 있다. 일부 노동운동의 명망가들과 지식인들은 노골적으로 자본에 투항했고, 또 많은 지식인들은 사회변혁 대신에 ‘개량적 시민주의’ 등으로 전향했다. 이 시기에 포스트 맑스주의니 시민운동론이니 하는 소부르주아 이론이 대거 쏟아져 나왔고, 사민주의적 시민운동(경실련 등)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김대중・김영삼 등으로 표현되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지배계급으로 등극하면서 노동자・민중의 계급적 대립물로 전화했다.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변혁적 선진노동자들은, 1980년대 섭취한 정치적・계급적 의식의 조각들을 부여잡고, ‘현장파’로 혹은 ‘국민파’로 즉자적으로 투쟁전선을 지켜왔다.

한편, 1980년대 말의 노동자・민중의 거대한 투쟁을 경험한 독점자본과 파씨즘 체제는, 그 지배체제를 3당 합당, 경제단체협의회(경단협) 등을 통하여 재정비한다. 그들의 피억압 민중에 대한 대 반격은, 전투적으로 투쟁하던 전노협 해체에 화력이 집중되었다. 한편으로 김영삼의 ‘신노사관계 구상’ 등 신자유주의 축적전략을 전면화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이후가 되면 임금인상 등 최소한의 경제투쟁조차 단위 사업장 자본가를 넘어 총자본(자본가 단체와 국가권력)을 상대해야 하는 정세로 전환된다.

‘민주노조’ 운동은 “사수! 전노협”을 내걸고 방어투쟁에 집중하는 한편, 1995년에 ‘전노협’과 ‘대공장노조연대회의’, ‘업종회의’가 총 망라된 민주노총을 건설한다. 민주노총은 96년 말~97년 초, 김영삼 정권의 ‘정리해고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총파업을 전개하면서 투쟁의 최고치를 찍는다.

 

7) 1997년 이후, 개량주의 노동운동 확산

 

1997년 말, 금융・경제위기를 맞아 민주노총은 시험대에 올랐다. 1998년 2월 6일,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참석하여 정리해고제, 근로자 파견법 도입을 합의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전노협이 담지했던 변혁적 지향과 전투성은 개량주의 노동운동으로 후퇴하게 된다.

한편 노동자・민중 운동은 그간의 투쟁의 성과를 모아 ‘민주노동당’을 창당(2000.1.30)했다. 민주노동당은 기본적으로 의회주의・사민주의 노선, 즉 개량주의 정당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더불어 개량적 노동운동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 방침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를 부르주아 의회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내로 가두면서 노동운동을 교란한다. 민주노동당과 그 후신인 통합진보당은 급기야 야권연대라는 몰 계급성에 기인하는 전술적 오류를 반복하다가 2014년,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판결로 일거에 무너진다.

결국 노동운동의 혁명적 이념은 퇴색되고 전투적 노조에 이어 개량주의적 정당조차 잃었다. 그 결과 대략적으로 2007년 경제위기 이후부터 단위노조 차원의 고립분산적인 파업투쟁이 전개되었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조의 76일간의 옥쇄파업 투쟁을 비롯하여 수많은 단위사업장 차원의 고립 분산적인 투쟁이 진행되었다. 점차 단사 차원의 대중적인 파업투쟁 동력조차 약화되었고, 대중파업 투쟁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노조가 줄어들고 농성・캠페인・고공농성・오체투지・단식 등 무기력한 투쟁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몰렸다.

1990년 이후 혁명적 정치운동이 변혁성을 상실하고 개량주의로 돌아섰고, 민주노총이 정치적 과제를 떠안아 왔지만, 자본의 위기를 노동자계급이 고스란히 전가 받는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노동운동의 후퇴는 자본의 탄압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주체적인 측면에서는 정치운동의 대대적인 후퇴에 주로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개량주의・사민주의적 지향은 결코 개량조차 쟁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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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동운동은, ‘노동력 판매조건을 둘러싼 투쟁’에 한정짓는 경제적 조합주의를 넘어, 온갖 사민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을 걷어내고, ‘노동해방-민중해방-민족해방’을 향한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재조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과학적 사상・이론을 재정립하고 운동의 분열상을 극복하여 변혁적 정치운동을 복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사회 변혁의 경로와 노동자・민중의 목표가 대중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우선 1980년대 중반이후 한국사회 변혁이론을 지양・발전시키는 작업부터 필요하다. 변혁적 전망을 다시 움켜쥐기 위해서는, 당시 변혁적 전망의 상실의 계기가 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의 성격 및 그에 대한 평가”는 필수 항목이 되었다. 당시 미완의 변혁노선으로 분열이 고착화된 NL-PD의 이론적・실천적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3. 1980년대 ‘사회구성체’ 혹은 ‘사회성격’ 논쟁에 대해

 

1) 사회구성체의 기본개념

 

사회구성체 또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는 사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사회발전의 세계사적 단계를 총괄하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각각의 경제적 사회구성체는 인류의 진보적 발전과정에서의 일정 단계를 지칭한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대체로 말해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전진해가는 단계로서 아시아적 생산양식, 고대적 생산양식, 봉건적 생산양식, 근대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들 수 있다”고 요약하고 있다.

각 사회구성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체로 표현되는 특정 생산양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질적 재화의 생산, 교환, 분배, 소비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들인 생산관계들의 총체가 이 사회구성체의 경제적 토대를 형성한다. 이 토대 위에 법적이고 정치적인 상부구조가 세워지고 일정한 사회적 의식형태들이 그 토대에 조응하게 된다. 생산관계들의 총체인 경제적 토대와 그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를 총괄한 개념이 사회구성체이며 이것은 사회를 구체적, 역사적 실체로서 분석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다.8)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도 내용과 형식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토대는 상부구조에 대해서 일차적이고 규정적인 역할을 한다.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엥겔스에 따르면, 상부구조의 여러 측면ㅡ정치, 헌법, 법률형태, 철학이론, 종교적 견해 등ㅡ은 역사적 발전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마오쩌둥은 <모순론>에서 “일반적으로 생산력, 실천 그리고 경제적 토대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유물론자가 아니다. 하지만 생산관계, 이론 그리고 상부구조의 측면도 일정한 조건에서는 주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상부구조의 측면을 강조한 것은,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 매우 취약한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인 중국에서도 농민들의 힘에 의해 사회변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들은 혁명을 성공시켰다.

“알뛰세르는 ‘중층결정론’, 즉 ‘최종 심급에서의 경제’를 주창하여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때 중층결정론은 ‘내용과 형식의 관계’에서 사실상 최종 심급만 남긴 것이다. 그는 유럽의 변심한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맑스의 사회구성체론이 해체되는 데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은 유럽의 변심한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토대의 변혁 자체를 해체한다. 이와 다른 차원에서 주체사상은 상부구조의 자율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사실상 사회구성체 규정의 무용론에 이른다.”9)

1980년대 한국에서의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한 검토에 앞서 ‘사적 유물론의 기본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 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한 사회의 경제적 사회구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 분석 도구를 달리 할 때, 그 논쟁이 생산적으로 전개되기보다 동문서답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하다. 실제로 이는 1980년대 한국에서 진행된 사회구성체 혹은 사회성격 논쟁에서 노정되었던 문제이자 지금까지도 하나의 쟁점으로 잠복해 있다.

 

2)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전개과정과 쟁점

 

(1) 한국의 사회구성체 규명의 복잡성

‘생산관계들의 총체인 경제적 토대와 그 위에 세워진 상부구조를 총괄한 개념이 사회구성체’, 즉 ‘사회구성체론’은 사회 변혁론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유럽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달리,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의 경제적 사회구성에 대한 규명은 상대적으로 복잡성을 띨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의 규정성과 신식민지에서 자본주의 발전과의 관계의 문제, 그에 따른 정치권력의 성격의 문제, 잔존하는 봉건적 요소에 대한 규명문제, 한(조선)반도의 경우 민족분단의 문제 등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회구성체’를 정확하게 규명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발전의 세계사적 보편성과 신식민지에서의 특수성을 통일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신식민지 내의 자본주의 발전과 그에 따른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제국주의 규정성, 종속문제)의 위상과 성격, 그리고 그 연관을 통일적으로 파악해 내야 한다. 여전히 온존해 왔던 봉건적 요소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규명과 한국의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의 차지하는 위치와 그 성격을 밝혀야 한다. 한(조선)반도 전체 차원에서 보면 민족분단이 놓여 있는데, 북에서는 사회주의, 남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수립되어 60년을 경과했다. 양자는 첨예한 냉전적 대립상태이다. 또한 북의 사회주의 체제와 미 제국주의 간의 대립은, 현재 동북아 정세를 규정할 정도로 날이 서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복잡한 한국의 ‘사회구성체’ 또는 ‘사회성격’에 대해서, 1980년대 논쟁은 어떻게 전개되고 주요한 쟁점은 무엇이었는지 거칠게나마 들여다보자!

 

(2)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전개과정

1980년대 초반에 한국의 변혁을 모색하는 논쟁이 청년・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변혁론을 둘러싼 논쟁이 본격화 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이 논쟁은 처음부터 “한국 사회변혁의 필연성과 가능성, 나아가 그 전략과 전술의 근거를 찾는 작업”이었다.

그것의 역사적 배경에는, 1960년 이래 한국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운동의 암흑기를 거쳐 1980년대 변혁적인 노동자・민중투쟁의 성장이 있었다. “1970년대에 반유신(=반파쇼) 민주화 운동과 민주노조 운동 등으로 전개되고 1980년의 소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의 전개와 과정을 겪으면서, 그리고 그 경험을 비판적으로 평가・수용하고 새로운 전략・전술을 모색하면서 1980년대 비약적으로 성장・발전한 청년・학생・노동자・민중운동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러한 운동의 성장에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10)

좀 더 구체적인 논쟁의 경과과정은, 1980년대 초반에 이른바 MT・MC 논쟁을 시작으로 1985년 이후 학계와 운동진영 내부에서 본격화되었다.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내부에서의 진행된 이른바 ‘CNP’―‘CDR’(BDR), ‘NDR’, ‘PDR’(SR)―논쟁, 1985년 박현채(국독자)-이대근(주변부자본주의론)의 논쟁, 이어 1886년에서 87년에 걸쳐 NL(민족해방파)와 CA(제헌의회파) 간의 논쟁, 1988~89년에 걸쳐 NL(민족해방파)와 PD(민중민주파)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다.11)

이러한 논쟁은 한국 사회의 구성과 성격・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사회과학의 르네쌍스”라 할 만하다. 이 과정에서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에 대한 재발견”하게 되고, 이를 둘러싼 분열이 발생했다. 1989년 이후 쏘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를 계기로 수정주의가 등장하면서 사회구성체 논쟁은 주변화 되었다.

당시의 사회구성체 논쟁은 매우 복잡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느 경우에도 크게 두 가지 문제, 즉 ‘제국주의 혹은 종속의 문제’와 ‘한국사회의 경제적 구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혹은 그에 대한 규정에 기초하여 벌어졌다.”12) 전체적으로 보아 주요 견해는, ‘반(半)봉건사회론(식반론) 혹은 반(半)자본주의론(식반자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국독자론)’이 제출되어 논쟁의 기본 축을 이루었다. ‘신식국독자론’을 주장하는 내부에서도 제국주의 규정성과 한국자본주의 발전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많은 쟁점이 노정되었다.

 

(3) ‘식민지반봉건사회론’ 또는 ‘식민지반자본주의론’에 대해

NL논자들은 ‘식민지반봉건사회(식반론)’라는 정식을 제출했다가 극심한 논쟁과정에서 비판을 받으면서 ‘식민지반자본사회(식반자론)’로 바꾸었다. 이 두 정식의 본질적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봉건적 지주(지주-소작관계)”보다 “매판자본”을 맨 앞에 위치시키면서 한국사회가 ‘반자본주의’ 즉 자본주의 사회라는 점에 방점이 가 있는 정도이다. ‘반봉건사회’라는 사회구성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둘러싸인 봉건적 생산양식’으로서 사회구성체 이론에 부합되지만, “반자본주의사회”라는 개념은,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사회이론에서 이탈한 것”13)이란 것이란 점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식반자론’은 한국 자본주의의 대외(특히, 대미) 예속 또는 종속에 해당하는 ‘식민지성’과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 수준 및 성격을 나타내는 ‘반자본주의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에 대해서는, “외국 독점자본의 지배하에 기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한국의 자본주의는 농촌에 봉건적 소작제가 온존”되어 있고, “자본주의 그 자체도 매판성과 전근대성을 띤 자본주의 즉 ‘반자본주의’적 성격의 것으로 되었다.”14)는 것이다.

그런데 ‘반봉건성’ 혹은 ‘반자본주의성’에 대한 해석이 무한정 확장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반봉건성(혹은 반자본성)’은 “정치적 상부구조의 특수성, 봉건적 사상의식, 이식자본주의의 기형성(천민성・관료성), 더 나아가 분단 그 자체, 자주적 국민국가 및 자립적 국민경제의 결여 등으로 정식화했다.” 즉 “정치, 경제, 군사, 사회, 사상,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한국 민중의 자주성을 억압하고 있는 역사적 질곡의 총체”15)라는 규정으로까지 확장한다.

‘식반자론’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대해서는 독점자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근대성과 의존성을 가진 식민지 경제체제 하에서의 매판적 독과점 현상을 공업선진국의 독점자본주의단계의 그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16)며, “국내 부르주아지의 이 분파는 전적으로 유통영역에 존재한다. 그 역할은 피억압 국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투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매판부르주아지는 생산에 종사하지 않기 때문에 제국주의 자본과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 그것의 온전한 존속은 제국주의자들의 존재에 달려있다”17)는 것이다.

또한 ‘식반자론’은, 한국자본주의가 대외 의존성의 심화로 인해 독점자본은 발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 근거로 “원자재와 시설재의 대부분을 미국을 비롯한 외국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공해 만든 제품의 실현도 대외 시장을 상대로 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 한국에서 재생산 과정에 내부적으로 충당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저임금으로 획득할 수 있는 노동력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자본 활동은 기층민중의 고혈로 외국 독점자본의 식민지 초과이윤을 보장해주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18) 여기서도 한국의 노동력 착취의 주체는 제국주의로만 상정함으로써 국내자본의 물적 기반은 사라졌다!

따라서 (신)식민지국의 자본은 독점자본으로 성장할 수 없고, 있다고 해도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사회에 대한 식민지적 규정이기도 한데, 한국자본주의가 “이식자본주의의 기형성(천민성・관료성)”으로 인해 생산력이 발전할 수 없는 구조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이러한 생산력 정체론은 ‘신식국독자론’을 주창하는 일부에서도 나타난다.(노해동A그룹)19)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민족부르주아지는 실질적으로 자기 자본의 전부를 민족적 경제 내의 생산과정에 투자하는 자본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비교적 약한 소자본 소유자뿐만 아니라 대독점 소유자도 포함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결국 한국의 대자본이 매판자본이 아닌 것으로 된다. 종합무역상사 등을 통해 매판자본으로서 역할을 부분적으로 수행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산업자본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권력에 대한 성격과 그 계급기반’에 대해서는, “식민주의적 대리통치체제이자 매판파쇼체제”라고 규정하며, “계급구조는 미국과 결탁한 매판자본, 친미적인 지주, 반동관료”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은, 오직 제국주의 본국의 국가권력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어떤 문건에는 한국을 식민지로 규정하는 근거로서 ‘주한미군은 철저한 점령군’이며 ‘한국은 미국의 군사침략기지’라는 점을 들면서 ‘정치・군사적 지배’를 강조한다.

참고로 PD진영의 한국의 국가권력에 대한 인식은, 예속 또는 종속적인 ‘국내・외 독점자본의 지배도구’인 동시에 ‘제국주의의 신식민지주의적 대리통치체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한국자본주의 발전정도에 대한 규정, 그에 따른 국가권력의 계급적 기반에 관한 문제이자 자율성 정도와 관련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NL논자들은 한국자본주의의 전근대성과 왜곡성, 제국주의의 정치・군사적 지배, 한국의 국가권력의 본질적 예속성을 강조하고, 그 혁명 전략으로 변혁운동 역량에 대한 전(全) 한(조선)반도적 시각, 반제 자주화와 민족해방운동을 포괄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NLPDR)를 변혁전략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는 ‘식반자론’은 “반제 자주화=민족해방”에 방점이 있고,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당면한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

2011년에 발표된 한 문건에 의하면, “현 단계 진보적 정권의 성격은 자주적 민주정부로 나아가는 ‘낮은 단계 자주적 민주정부’이며, 이는 현실적으로 ‘반(反)한나라당(현재의 자유한국당) 진보개혁 정권’”20)이라고 한다. 민주노동당, 통합진보당의 실패를 경험한 2019년 말 현재는, 어떤 구체적 반제 민족해방 혁명의 동력과 경로를 제시하고 있는지는 추적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식반자론’이 ‘신식국독자론’과 다른 특성은, 국내 독점자본의 실체와 지배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사회의 모순구조를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자본주의 발전으로부터 도출하지 않고, 오직 제국주의의 규정성으로 인해 한국자본주의의 미발전과 왜곡・기형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모순해결의 주체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에서의 노동과 자본 간의 계급 대립이 근본적이고 적대적인 것임에도, 제국주의 규정성 즉 민족모순이라는 개념 속에 용해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한국자본주의 제 모순 극복을 위한 주체 설정에 대해서도, “모든 가능한 반제민주주의 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노동자계급의 존재, 그리고 역할과 임무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적인 명제로부터 이탈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에서는 맑스가 주장한 일국적 차원의 토대와 상부구조의 조응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으며, 세계적 차원의 복잡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형성된다.”고 하여 사실상 사적 유물론의 기본명제를 주관적으로 왜곡시킨다. 이는 제국주의 규정성을 ‘반봉건성이나 매판성’과의 관련만을 보다보니, 한국자본주의 발전을 규명하지 못함으로써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에 대한 통일적 파악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4)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해

“제국주의 규정성을 반봉건성이나 매판성과 관련지어 파악하려는 시도와는 반대로, 자본주의적 발전과 관련지어 파악하려는 입장으로서 사회운동권 및 학계에서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국독자)이다.”21) 신식국독자론은 한국사회의 구조를 신식민지 특수성을 가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해한다. 그 정치적 상부구조로서 신식민지 파씨즘의 성격을 부각시켰다. 신식국독자론을 주창하는 이론지형 내부에도 많은 쟁점이 있지만 당시 주장의 일단을 완결적으로 드러내 보면 이렇다.

“①봉건체제기에 있던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한 후 일제의 주도 아래 1910년 이래의 토지조사사업을 중심으로 본원적 축적을 수행하고, 늦어도 1930년 초반까지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로 이행했다. 물론 농촌에는 반봉건적 경제형태가 광범위하게 남아있었고 자본주의 경제의 대부분을 일본 제국주의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성격상 식민지반봉건사회이고 반제반봉건의 민주주의적 과제가 전면화 된다. ②해방 후 농지개혁을 통해 반봉건 잔재는 거의 해체되었고 계급적으로 유의미한 지주 범주는 소멸되었다. 구 식민지하에서 위축되었던 토착자본가는 적산불하, 원조물자 배당 등의 계기로 제1의 경제적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고, 60년대 이후에는 국제자본의 운동논리를 적극적으로 수용, 급속한 자본축적을 이루었으며, 현재에는 명실상부한 독점자본으로서 경제 전반을 장악하고, 국민대중 대다수를 수탈하고 있다. 물론 재생산구조의 대외의존성은 예나 지금이나 지속되고 있고, 60년대 이래로 직접 침투도 하여 중요사업 부문을 지배하고 있다. 현 사회의 성격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22)이고, 제국주의와 그에 예속된 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반제반독점의 민주주의적 과제가 전면화 된다.”23)

‘국가권력의 성격’은 ‘신식민지 파씨즘’으로 규정하는데 그것은,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주의의 결합물의 소산”으로 규정한다. “제국주의의 지배방식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발전논리를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운동 논리 속에 편입시키고, 그러한 경제적 예속관계를 근거로 하여 자신이 직접 국가권력을 보유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예속독점자본으로 하여금 자신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문화적 이해를 관철시키게 한다.”는 인식이다.

“학계의 신식국독자론의 전개과정은, 첫째 주변부자본주의론 대(對) 국독자론의 1단계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박현채 선생의 국독자론을 광범위하게 수용하는 단계, 둘째 NL의 대두에 조응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와 그로 인한 ‘민족해방’의 과제를 수용하면서 박선생의 민족경제론을 그러한 견지에서 재해석하는 단계(민족경제론과 국독자론의 모순문제가 제기된다), 셋째 국제변혁운동사(쏘비에뜨 및 남미의 논의)의 논쟁 성과(종속적 국독자론)를 수용하면서, ‘반제반독점 NLPDR’론에 근거한 ‘신식국독자’론을 재정립하는 단계이다.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의 발전단계와 그 종속적 재생산과정이 특수성을 모순적으로 통일시키는 정식으로서의 그 핵심 테제로서 ‘독점강화/종속심화’(윤소영)태제를 제시했다.”24) 그러나 이러한 테제가 한국자본주의에서 어떻게 관철되는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거쳐, 한국사회에 구체적 분석과 방침으로 재생산되기에는 앙상하다.

이러한 관점의 추적연구가 이어지지 못한 채 중단된 것은 한계이자 아쉬움이다. 또한 독점강화/종속심화냐, 약화냐 하는 논쟁이 존재했지만 이 역시 지속적 논쟁이 이어지지 못함에 따라 무엇이 유실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없다. 더불어 제국주의 규정성(종속 또는 예속의 문제)이 한국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온 것인지, 질곡으로 작용해 왔는지에 대한 내부 논쟁이 존재했으나, 이 문제는 한국사회의 변혁의 가능성을 자본주의의 발전, 즉 자본주의의 모순의 심화에서 찾지 않고 생산력의 정체 또는 왜곡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과학성을 상실하고 있다.

 

 

4. 한국 ‘경제적 사회구성체’에 대해

 

1) 레닌의 ≪제국주의론≫ 핵심 요약

논의 전개에 앞서 우선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요약이 필요할 것 같다.

레닌은 ≪제국주의론≫에서, “생산의 집적, 독점체, 은행과 산업의 합병 혹은 유착, 이러한 과정이 바로 금융자본의 발생사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금융자본은 다른 모든 형태의 자본에 대해 우위를 확립하는데, 이는 곧 ‘금융과두제’의 지배를 의미하며, 금융적으로 강력한 몇몇 국가가 나머지 다른 모든 국가 위에 우뚝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를 토대로 금융자본은 일국적인 테두리를 넘어 국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즉 선진국에 조성된 막대한 ‘과잉자본’은 국외로 수출됨으로써 “금융자본의 국제적 종속망 및 연결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자본수출이야말로 “세계의 대다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의 토대이며, 한 줌밖에 안 되는 부유한 국가들의 자본주의적 기생성의 토대인 것이다!” 이들 독점체들은 상호간의 협정을 맺음으로써 국제카르텔을 형성하여 전 세계를 분할한다. 제국주의 세계분할은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세계의 영토분할, “세력권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1900년 공황기를 전후로 한 19세기 말, 20세기 초 “처음으로 전 세계는 완전히 분할되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오직 재분할만이 가능할 뿐이다”며, 1916년 당시 레닌은 제국주의전쟁의 불가피성을 도출한다.

제국주의의 경제적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단지 식민지 확장을 위한 식민지 정책과 제국주의 정책만을 염두에 둘 경우, 그것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곧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최근 단계의 주요 특질은 대기업가들의 독점단체가 지배한다는 데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보다 결사적으로 되는”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괄은 <자본주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에서 제국주의 5가지 기본적 특질을 추상한다. “(1)생산과 자본의 집적이 고도의 단계에 달해, 경제생활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는 독점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2)은행자본이 산업자본과 융합하여 ‘금융자본’을 이루고, 이를 기초로 하여 금융과두제가 형성된다. (3)상품수출과 구별되는 자본수출이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4)국제적 독점자본가 단체가 형성되어 세계를 분할한다. (5)자본주의 거대열강에 의한 전 세계의 영토적 분할이 완성 된다”

현대에 있어 특히 두드러지는 제국주의 정치・군사적 지배는 그것이 ‘제국주의인 한’ 필연적으로 경제적 토대로부터 나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레닌은 제국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정의를 내리기에 앞서 순경제적인 의미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는, 제국주의에 대한 경제 분석이 필수적이며 선행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리하여 현대의 제국주의가 이전의 제국주의에 비해 달라진 점을 가려냄으로써 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실천적 규정을 끌어내야 한다.

“제국주의는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라고 밝혔듯이 보다 중요한 문제는 제국주의 시대의 올바른 혁명노선의 문제를 찾으려는 데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제국주의의 경제적 특질을 분석했으며, 제국주의와 기회주의는 반제국주의투쟁에 있어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즉 전자는 후자를 형성・배양하는 물적 토대임을 밝힌 것이다.25)

 

2) 식민지의 붕괴와 신식민지 성립

190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열강의 자본은 집적・집중을 통해 자본주의 최고단계인 독점자본주의를 성립한다. 선진자본주의 국가 내에서 평균이윤을 획득할 수 없는 ‘과잉자본’은 식민지에 수출됨으로써 세계의 약소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과 착취의 토대”가 된다. 1900년대를 전후하여 제국주의는 식민지 쟁탈전을 통해 전 세계를 분할하고, 식민지 국가에 자본을 투하(수출)하고 무력과 토착 지배계급을 기반으로 직・간접통치를 통해 식민지 국가의 인민을 대상으로 착취와 수탈을 통해 초과이윤을 획득한다.

일본 제국주의가 36년간 조선을 지배하고 수탈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의 직접지배 아래서도 언제나 토착 지주계급이나 신흥자본가 등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세력이 있었다. 착취와 수탈의 대상인 조선의 인민의 입장에서 조선총독부로 대표되는 일본제국주의 세력과 친일파로 불리는 친일 지주와 토착 신흥자본가 계급 등은 모두 하나의 착취계급이었다는 점만 언급하자.

1930년대 세계적인 과잉생산이 낳은 대공황은, 끝내 제국주의 열강 간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했다. 그 결과로 미국이 제국주의의 세계질서의 유일 패권국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구 식민지 지배체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 민족해방투쟁’과 “민족해방투쟁과 민족자결을 지지・지원하는 사회주의가 거대한 세계체제를 형성한 때문26)”이다.

구식민지 지배체제는 제국주의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미 제국에 의해 작동하는 신식민지적 착취체제(기만・매수・정치・군사적 위협, 내정간섭, 부등가교환, 금리조작, 다국적기업 직접투입, 현물원조나 차관 등)를 통하여 경제적 예속 관계를 유지시킨다. 특히, 독점자본과 군산복합체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의 각종 군사적 간섭과 대립을 야기시킨다.

 

3) 한(조선)반도 이남에 성립된 국가권력의 성격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인민들이 스스로 노동자-인민의 국가를 세우려 했던, ‘민족자결’ 투쟁의 전개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이른바 “해방정국”에서 조선의 인민들은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반제・반봉건 혁명투쟁을 전개했다. 조선인민의 투쟁을 분쇄해 나간 반혁명세력은, 미군정과 반동적 신흥부르주아지와 일제하의 봉건지주들, 이를 토대로 한 한민당과 그 세력들이다. 미군정은 자신의 제국주의 신식민지 정책을 관철시킬 것을 목적으로 반동권력의 수립을 적극 지원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이승만 정권이다.

미 제국주의는 제3세계의 제국주의적 신식민지 정책을 추진해 왔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목적은 그 지배를 통한 상품 및 자본의 시장과 원료의 안전한 확보이고, 그 이권의 상실로 이어지는 자결권(사회주의화든 비동맹이든)을 인민으로부터 강탈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현지화・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그 지배방식이 직접지배든 간접지배든 간에 현지의 친 제국주의적인 토착 우익(그것이 군부든 민간이든)세력의 존재다. 제국주의의 토착지배계급(세력)은 제국주의 국가의 엄호・지원을 받으며 제국주의와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이해를 일치시키고 노동자 인민을 착취・수탈한다. 이는 “(신)식민지 인민에게는 피착취피억압, 일제부터의 ‘해방’공간에서 명확히 보여준 거처럼, 그 자결권의 상실이다”27)

 

4) 분단의 원인과 성격 그리고 모순구조

한(조선)반도를 둘러싼 분단의 원인과 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단과 제국주의시대의 4대 모순(계급모순, 체제 간 모순, 민족 모순, 제국주의 간 모순)과의 동태적 관련성을 이해해야 한다.

제국주의시대 세계사는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성립과 그에 대응하는 사회주의혁명의 성장, 민족해방운동의 고양에 따른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세력 간의 투쟁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28) 일제로부터 해방되기도 전인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 등의 국제적인 움직임, 1945년 4월 미국의 트루먼 정부가 제2차 세계대전 동맹국인 “쏘련과의 공조가 아니라 대결과 봉쇄를 통해 국익 추구하는 입장”29)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1945년 “해방공간”에서부터 “8년간의 계급전쟁”이 진행되었고, 남쪽의 혁명세력은 패배하여 1950년 전쟁을 경과하며 절멸 당했다. 그 후에 남쪽은 자본주의 체제로, 북은 사회주의 체제로 각각 발전해왔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었지만, 북의 사회주의 체제는 곧 노동자・인민의 국가이고 자본주의 세력(미 제국주의와 한국의 자본가 계급과 그 파쇼권력)과 대치하고 있다. 이남의 노동자・민중 역시 그들의 피억압・피착취와 수탈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따라서 남북 간의 분단문제는 본질적으로는 계급분단(계급대립)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남쪽의 내・외 (독점)자본가 계급과 그 정치부대인 신식민지 파씨즘 세력은 틀림없이 우리민족의 범주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 세력과 함께 한국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수탈세력이자 제국주의 세력과는 ‘혈연’보다 강한 동맹세력이자 반 통일세력이다. 그들이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경우는 내・외 독점자본의 시장 확대를 비롯한 자본의 최대이윤확보에 종속되는 경우일 뿐이다. 그들을 ‘민족자본’이니 하면서 통일의 주체로 설정한다면, 그것은 몰 계급성이 빚어낸 무지의 극치를 보여 줄 뿐이다. 따라서 “민족대단결”,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는, 노동자・민중의 지배・수탈자인 국내의 지배계급(독점자본과 그 국가권력)까지를 ‘민족해방’ 또는 ‘민족자결’의 주체세력에 포함하여 사용하는 용어라는 점에서 비유물론적・몰계급적 관념적 표현이다. 남쪽(한국)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계급적 분단’, 즉 첨예한 계급모순이 작동하고 있는 점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전반적 위기의 시대에 4대 모순 중에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한국)인민 간의 모순’ 역시, 제국주의 세계체제 차원에서의 계급모순이 외화된 것이다. 미 제국주의와 북 사회주의 간의 체제간의 모순도 제국주의와 노동자 국가인 사회주의와의 계급모순의 발현이다. ‘분단문제’, 이러한 ‘민족문제’ 해결의 주체는 남쪽의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 그리고 북 사회주의(노동자・인민의 국가)다. 따라서 남쪽의 노동자계급이 ‘반제 자주화’와 ‘노동해방 쟁취’를 위한 변혁적 역량으로의 성장 없이는 민족모순은 해소될 수 없다.

 

5) 한국에서 자본주의 발전

 

(1) 한국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 성립시기

한국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했다는 점, 독점자본이 한국 경제를 좌지우지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적 사회구성을 둘러싸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와 ‘식민지반봉건(혹은 반자본)사회’라는 주장이 격돌했고, 현재도 식반자론은 여전히 선전・선동되고 있다.

NL진영의 식반자론은 전술한 대로, “농촌에서 지주-소작관계가 온존・확대”되고 있고, “자본주의의 발전의 기형성과 전근대성”을 근거로 한국사회를 반봉건사회 혹은 반자본사회라고 규정하고 있다. “반봉건성의 의미는 경제형태 만이 아니라 정치・군사・사회・사상・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한국 민중의 자주성을 억압하고 있는 역사적 질곡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30) 이라고 그 의미를 무한 확장하면서, 한국사회 모순의 일면만 강조하고 있다.

최근에 입수한 ‘한국자본주의와 반제민주주의의 정치노선’을 다루는 문건에 의하면, ‘반자본주의성의 의미를 한국자본주의가 서구자본주의와 다르게 “정치적 민주주의와 대중복지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비정상적, 변칙 기형적 자본주의로 발전하였다는 ‘질(質)’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식민지 토대-상부구조가 조응하지 않고 괴리된다.”31)며 “제국주의적 지배의 1차적 규정성”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근본원인은, 사회역사발전의 유일한 주체인 인간의 ‘의지’와 직접적인 ‘동기’만을 중심으로 보고, 그 의지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동력, 즉 물질적 생산관계에서 찾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적 사회구성은 일국적 측면과 제국주의 규정성이라는 측면의 통일로 이행되었듯이, 그러므로 한국 노동자・민중과 국・내외 독점자본 간의 계급모순,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 민중과 제국주의 세력 간의 모순(민족모순)이 통일되어 있음은 이미 전술한 대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의 성립은 언제부터 되었는지 살펴보자.

한국에서 언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3가지의 대표적인 입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①“1910년에서 1918년까지 벌어졌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1910년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고, 더불어 “상부구조가 일제의 총독부, 즉 자본주의 권력이었다.”는 점을 들어 1910년대 설을 주장한다.(박현채)

1910년대 이행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첫재로, “토지조사사업으로 형식적으로는 근대 민법적 토지소유가 확립되었지만, 그것은 사실 외피에 불과했고, 자본주의적 양식에 대응하는 토지소유 양식이 형식적으로 존재하는 관계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둘째로, “상부구조가 자본주의적 권력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해야 한다면, 18~19세기의 인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상부구조의 성격을 들어 그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반드시 타당한 것은 아니다.”32)

②“토지조사사업(1910-1918)과 임야조사사업(1917-1924)이 본원적 축적과정”이고 “1910년~1924년 시기는 소위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이며, “1938년부터는 공산액이 농산액을 능가”한 통계를 근거로 “적어도 1930년대 식민지 조선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라고 주장한다.(권영욱)

이 주장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당시 조선의 직접생산자들 중 절대다수는 소작농민으로서 농업부문에 존재하고 있었고, 공업부문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는 농민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소수에 불과”했다는 점,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공산액에 비해 농산액이 많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 통계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농업생산물과 공업생산물 간에 극심한 식민지적 부등가 교환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증거로 이용되어야 할 자료”33)이다.

③1950년대 농지개혁(유상몰수 유상분배) 이후 지주-소작관계가 해체되고 자본제적 생산관계가 ‘지배적으로’ 되었다. “한국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으로 이행한 것은 빨라야 대한민국의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더 정확하게는 ‘농지개혁’이 이루어지고 나서”이고, “그 이전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보다는 봉건적 지주-소작관계가 양적으로 압도적・지배적이었고, 따라서 (반)봉건적 사회였다. … 농지개혁으로 지주-소작관계가 해체되면서 자본제적 관계가 양적으로 지배적으로, 즉 양적으로 다수가 되었다.” “가장 대규모로 직접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이 수탈되던 바로 1960년대 후반기에서 1970년대”인데, 이 시기에 “근대의 농지개혁, 혹은 토지개혁을 통한 농민적 분할지 소유 그 자체가 농민층 분해를 필연적인 것, … 기만적인 농지개혁이나 저곡가정책, 인플레이션과 협상가격차의 확대, 토지소득세 등은 사실은 이 필연적인 농민층 분해, 즉 농민의 토지상실을 가속화시킨 원인들”이고, “사회 구성 변화의 근본적인 추동력인 것은 바로 생산력의 발전”이다.34)

 

(2) 한국의 신식민지 파씨즘 체제의 성립과 자본주의 발전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이남에 미군정의 형태로 직접통치가 진행되었다. 미 제국주의가 조선 인민 절대다수의 자결권 행사, 반제・반봉건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압살하는 한편, 조선을 신식민지로 주조하는 과정이었다. 미 제국주의가 조선 이남에서 혁명투쟁을 제압하고 신식민지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급적 기반은, 조선의 친일・친미 지주와 신흥자본가, 그들의 정치부대인 이승만 세력이다.

미군정은 일본정부와 일본 민간단체 등이 소유해온 모든 재산과 주요 산업시설과 토지 등 국내 총 자산의 89~90%를 차지하던 귀속 재산을 강탈했다. 또한 토착 우익세력을 앞세워 군・경 무력과 준군사조직인 우익민병대를 일제하의 주구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조선 인민의 반제반봉건 혁명운동을 그 주변부까지 절멸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사회・문화 분야도 풀뿌리 교육공간을 폐쇄시키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주입하는 이데올로기 생산수단을 만들어갔다. “해방공간”에서 한국(조선)전쟁이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8년간의 계급전쟁”은 분쇄되었고, 이남에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부르는 지주와 신흥자본가들의 백색테러(반혁명)국가가 완성되었다. 한편 이북에는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기초로 사회주의체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서 한(조선)반도에는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인민 간의 모순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의 모순이 중첩되는 국면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으로 표현되는 신식민지 파씨즘 체제는, 이북이 반제반봉건 혁명을 전폭적으로 수행한 상황에서, 기만적이긴 하나 토지개혁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를 만들어간다. 또한 적산불하와 미국의 과잉자본인 원조35)물자 배분을 통해 독점 자본가 계급을 지원・육성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한다. 50년대 원조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이승만 정권은 노동자・민중들의 축적된 불만의 폭발, 4.19혁명으로 무너진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부터 대규모의 전면적인 미국의 차관과 일본의 청구권 자금 및 차관, 고율의 인플레이션을 통해서 조달한 국내 자금을 이용해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한다. 이 시기에 경공업 부문도 급팽창했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독점재벌이 자리를 잡아갔고, 1,2차 경제개발로 표현되는 ‘수출주도의 고도성장’의 축적패턴을 이어갔다. 그러나 1979년 말에 밀어닥친 경제위기는 계급투쟁을 격화시켰고 그 결과 박정희 유신파쇼체제도 종말을 고했다.

한국의 신식민지 파씨즘 정권은 제국주의 신식민지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예속 또는 종속적인 독점자본을 지원・육성하고 이들과 결탁함으로써 자신들의 정권기반을 다지고, 독점자본가 계급의 안정적인 성장의 지배도구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한국의 독점자본은 국가주도에 의해서 형성되고 성장했지만, 이 과정은 국가권력이 주도하는 ‘비독점적・경쟁적 국가자본주의’를 거쳐 ‘국가독점자본주의’36)로 이행해 왔다. 79년 말 경제위기 이후 1980년대는 명실상부한 독점자본이 주도하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안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미・일 제국주의 입장에서는, 현물형태의 무상원조, 유상차관을 비롯하여 상업차관, 직접적인 합작투자 등 자본수출을 통해, 신식민지적 착취체제를 구축해가는 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 제국주의의 동북아 전략의 핵심으로서 한・미・일 전쟁동맹과 경제블록 체제를 형성하여 동북아에서 대(對)사회주의권에 대항하는 체계를 강화하는 전략과 맞물려 있다. “결국 미・일 제국주의는 한국에서의 잉여수탈을, 정치・군사적으로는 대(對)사회주의권 방어를 위한 신식민지적 자본주의 전략을 적극 추진해 온 것이다.”37)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은 예속 또는 종속된 독점자본일 뿐만이 아니라 직접 또는 합작투자 및 대부자본 형태로 유입된 제국주의 자본의 주체가 된다. 1997년 금융・경제위기 이후에는 제국주의 자본의 유입이 극대화되었다. 따라서 한국의 신식민지 파씨즘 체계는 국내・외 독점자본의 위기관리체계가 된다. 미・일 독점자본은 한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잉여착취를 한국의 파씨즘을 통해 보장받는다. 그러므로 한국 파씨즘의 계급적 기반은 국내・외 독점자본이고,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인민간의 모순’은 제국주의 규정성, 즉 ‘민족모순’으로 표현되지만, 그것은 국내의 ‘계급모순’과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변혁운동의 고양에 의한 파씨즘 체제가 몰락의 위기에 처하게 되면, 제국주의 권력은 그 직접적인 정치적・군사적 침탈을 자행하게 될 것이다.

“식민지・신식민지 지배에 관한 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만을 지배자로서 강조하지만, 이 토착 지배・착취계급이 제국주의와 그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지배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강조하는 것이야 말로 중요하다.”38) 제국주의와 신식민지 독점자본, 그리고 그 정치권력은, 노동자・민중의 계급투쟁과 현존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철저한 동맹세력이다. 다시 강조하면, 신식민지의 노동자・민중의 ‘노동해방’과 ‘피억압 민중의 민족해방’은 철저히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과제다.

 

6) ‘계급모순’과 ‘민족모순’39)

 

1980년대 논쟁의 성과는 살려내고 사상・이론적 한계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1980년대는 노동자・민중투쟁의 발전은 한국의 근본적인 변혁에 대한 사회구성체와 변혁론에 대한 탐구와 논쟁을 전면화 시켰다. ‘사회구성체’ 혹은 ‘사회성격’ 논쟁은 한국사회의 극복해야 할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인식의 거대한 지평을 열었다. 1950년대 전쟁 후 긴 정치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와 사회적 모순을 사회과학적으로 재인식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에 대한 인식을 재발견 하고, 현실 노동운동에서 이정표를 만들려고 했던 과정은 한국노동운동사에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특히 NL과 PD논쟁은 한국사회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사상, 이론적 발전의 표현이었다. 이 논쟁과정에서 발생한 NL과 PD의 분립은 지속적인 탐구와 논쟁을 통해 지양・발전을 통해 통일적으로 재정립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한 충분한 시간을 갖기도 전에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를 맞았고 이어 세계적인 대 반동의 시대를 불러왔다.

이리하여 한국 노동자계급의 사상・이념적 좌표도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고, 발전의 경로를 밟아야 할 사상・이론적 진전은 중단되고 말았다.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오랜 노동자계급 투쟁의 역사로부터 축적된 풍부한 경험과 교훈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를 불러 일으켰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사회와 운동이론에 대한 과학적 탐구와 치열한 논쟁이 중단되면서 미완의 사상・이론은 그 지양・발전의 운동을 멈추어 버렸다.

그 결과 운동의 합목적성을 밝히는 이론은 경시되고 종파적 패거리주의가 선진노동자들을 갈라놓았다. 선진노동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사상・이론적 혼란으로 인한 정파적 대립과 그 고착화는 노동자계급 운동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계급 운동의 선진부위에 있는 상당수 활동가들조차, 독점자본의 이데올로기에 깊이 침윤되면서, 노동자계급 운동을 왜곡시키고 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①민족모순에 천착하는 세력들은, 물론 제국주의에 대한 건강한 실천적 태도를 견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대다수는 민족문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결여로 인해 현실운동에 있어서 몰 계급성을 곳곳에서 노정해 왔다. 민족문제를 부르주아적 내지 소부르주아적으로 해석하여 현실 운동에서 민주대통합이니, 야권연대니, 연합권력이니 하는, 독자적인 계급적 전략 없는 몰 계급적인 현실주의적 전술에만 몰두해 왔다.

‘반미 자주정권 수립’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노동자계급 정치를 한낱 부르주아 정치 속에, 특히 오직 의회 진출을 통한 집권전략 속에 가두어 버림으로 노동자계급 운동을 교란해 왔다. 이러한 독자적인 계급적 전략이 없는 몰계급적인 전술은 노동자계급 정치를 개량주의적・독점자본의 정치로 변질시켜온 것이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은 결코 별개도, 서로 대립적인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면적・이분법적 인식으로 발달한 독점자본주의 사회의 첨예한 계급적대의 주요한 지점에 대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②계급모순에 천착하는 세력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모순에 대한, 그리고 그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관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모순, 즉 민족적 종속과 피억압은 명백히 노-자 간의 계급모순의 다른 표현, 혹은 그 표현형태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모순의 문제를 협소하게 이해하여 제국주의, 민족모순의 문제를 현실투쟁에서 기각해 버린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협소한 노동자주의로 귀결되면서 계급투쟁을 경제투쟁에 한정하는 경향을 노정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부분은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 및 그 국가들에 대한,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매우 적대적이고 청산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뜨로츠키주의 또는 그 영향을 크게 받은 경우에는, 쏘련을 비롯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를 ‘국가자본주의’ 또는 ‘타락한 노동자국가’로 규정・적대하면서 반쏘・반북주의적 태도로 일관하여 결과적으로 반공주의를 노골화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집적된 거대한 계급투쟁의 경험과 이론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대신에 ‘스탈린주의’라는 단 한마디로 치환해버리는 비변증법적, 몰역사적 관점은 시급히 극복되어야 할 과제다. 한편,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내세우며 제도 정치권에 발을 내디딘 소위 ‘좌파’ 세력 역시 이미 그 혁명성을 잃고 사민주의적 개량주의 세력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5. ‘민족’ 또는 ‘민족문제’에 대해

 

1) 민족의 형성과 그 조건

 

1980년대 논쟁에서나 현재까지도 변함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민족’, ‘민족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기본적인 개념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공산당 선언≫에 의하면, 민족의 형성은 부르주아지의 국민(nation)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전면적인 지배를 위하여 전국을, 지금까지의 분산된 것에서 하나의 결합체로 조직하고, 각기 분산된 대중을 민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형성하였다. 이렇게 ‘민족’이라는 개념은 부르주아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자본제적 사회로 전체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자, 역사발전의 산물이다.

부르주아지가 전체대중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으려는 이유는, 낡은 봉건제적 권력을 타도하는 데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할 필요성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타국 부르주아지와의 경쟁에서 시장을 공고히 하고 나아가 식민지로 진출하는 데 ‘민족의 발전’이라는 애국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적대적 관계를 ‘국가=민족’이라는 이념에 용해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이전의 ‘민족’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공통의 조상과 언어를 지닌 공동체로서의 ‘민족체’(Nationalität)가 부르주아지의 성장으로 인해 발전하면서 하나의 ‘민족(nation)’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의 ‘민족체(Nationalität)’와 자본주의가 성립된 이후의 ‘민족(nation)’은 구분해야 한다.

쓰딸린은 1913년에 작성한 ‘맑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논문에서, 언어, 지역, 경제생활, 심리상태의 공통성이라는 네 가지를 민족형성의 요소로 들고 있다. 그도 민족 형성 과정의 귀결점은 민족국가의 형성이라고 파악했다. 그런데, 쓰딸린은 폴란드인에 대해, 당시 삼분되어 있으면서 경제생활의 공통성, 지역의 공통성, 문화생활의 공통성에 기인한 심리상태의 공통성을 상실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민족이라고 간주했다. 자신이 기술한 민족 형성의 공통성 네 가지 중에서 세 가지나 빠져있는 폴란드 인에 대해 그가 민족이라고 기술했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일단 민족이 형성된 경우, 이것이 인위적으로 일시에 나누어진다고 하여 즉각적으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물론 경제생활의 공통성은 인위적으로 깨어지고, 지역적 공통성도 국가경계선에 의해 파괴된다. 그러나 자신의 시장 확보를 위해 나라를 하나로 합치려는 부르주아지의 존재 여부가 민족형성의 지표이다. 모든 대중과 함께 민족의 통일을 지향하는 강력한 추진력인 부르주아지가 있었던 당시 폴란드의 경우란, 아무리 그것을 부정한다 하더라도 하나의 민족인 것이다.”40) 물론 이처럼 폴란드가 조국의 통일을 지향했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이를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만 지지할 것이라고 주장한다.(이와 관련해서는 이후 논의)

한편 ‘분단국가인 민족이 여전히 민족이냐’라는 문제의 해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여전히 동일한 민족일 수 있게 하는 조건인, ‘통일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다. 즉 현실성을 상실해 가는 단일민족을 여전히 하나의 민족이게 하는 가장 유력한 조건은 통일을 위한 대중의 열망과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 조건의 상실은 마침내 단일민족을 분리시키고 만다.41)

그렇다면 식민지 시대 민족 역시 자본주의의 성립을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민족을 형성시켰다는 것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자본주의화 과정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의 다른 한 표현일 따름이다. 일단 식민지에 자본주의의 사회구성체가 형성되면 그때부터 제국주의의 자본수출은 본격화되고, 이는 필연적으로 식민지에서의 자본주의를 촉진시킨다.42)

 

2) ‘민족문제’의 역사적 전개과정

 

일반적으로 말해서 “민족문제란 피억압민족이 억압에 저항하여 민족독립과 민족적 통일을 실현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의 총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민족이 정치적으로 자립하여 독립적인 정치적・경제적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는 정치적 요구에 뿌리를 둔 문제들이다. 구체적으로는 각 역사적 시기에 따라서 민족의 형성과 민족국가 수립문제,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투쟁의 문제, 민족 간의 상호형성과 민족국가 수립문제, 민족독립운동(민족해방투쟁), 민족의 자립적 발전을 위한 운동 등이 그것에 포함된다.”43)

최초의 민족문제는 부르주아지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해방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계급해방이 포함되어 있는 민족의 문제, 이것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민족문제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보면, 제1단계는 봉건제도와 절대주의가 일소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와 부르주아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대략 1871년까지)에서의 민족 및 민족국가의 성립, 제2단계는 제국주의와 그 식민지정책이 출현하는 시기(1871~1917), 제3단계는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의 시기, 즉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의 시대 속에서 민족・식민지 문제가 크게 부상되고 민족해방투쟁이 격화되는 시기”44)이다.

제국주의 단계에 접어들면서 발생한 민족문제는 국제적인 문제로 발전한다는 특징이 있다. 유럽에서의 민족형성 과정은 지배민족에 대항한 자민족의 국가건설과 독립을 위한 투쟁의 과정과 일치한다.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민족의 형성과정은 민족해방, 조국독립을 위한 투쟁의 과정과 일치한다. 따라서 식민지에서의 민족 형성과정은 그 자체가 민족문제의 발생과정이다.

그런데 식민지에서의 민족문제, 즉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은 제국주의 본국 내의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공동의 적을 갖게 된다. 레닌은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높이 평가했고, 이를 사회주의혁명의 주요한 예비군으로 파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투쟁은, 그 초기에는 식민지 자본가계급의 이해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관계로, 또한 식민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이 아직 미발달한 관계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문제의 제3단계에는 상황이 크게 변화하는데, 민족문제의 해결이 피지배민족 내부의 계급적 모순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 변화의 원인으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민족해방운동이 크게 고무되었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내의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가속화되어, 이들을 노동자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키는 노동자당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식민지 내의 부르주아지는 점차 초기의 진보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개량주의적 민족주의로 변질되어갔다. 이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기보다 영합했으며 자국의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식민지 조선의 토착자본(민족자본)이 당시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취했는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보면 명확해 질 것이다.45)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동유럽・아시아지역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승리를 통하여 사회주의 세계체제가 성립되었다. 초강대국으로 등극한 미 제국주의는 전 세계의 변혁운동을 강력하게 견제하고, 이전 식민지에서 독립하였지만, 신식민지 상황에 있는 여러 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3) 민족문제는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문제는 그 시초에서는 부르주아지의 문제였지만 어느덧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과 정면으로 적대하는 노동자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유로 계급과 민족에 대한 올바른 해명이 필요하다.

맑스의 민족문제 관한 관점은 당시 영국에 종속되어 있던 아일랜드의 민족운동에 대한 태도나, 슬라브 민족운동에 대한 태도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아일랜드의 민족해방은 영국노동자계급에게 있어 결코 추상적인 정의의 문제나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회적 해방의 첫째 조건”46)이라고 함으로써 아일랜드 해방운동과 영국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관련성을 명확히 밝혔다.

한편 슬라브 민족들의 민족문제에서, 맑스나 엥겔스는 폴란드와 헝가리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지지를 보냈으나 기타 슬라브 민족들의 자결권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전자가 당시 반동의 보루였던 러시아제국에 대해 반대하는 투쟁이었던 데 반하여, 후자는 짜르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47)

맑스와 엥겔스가 민족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그 운동이 진보적인 의미를 지니는 한에서 만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레닌에 의해서도 완강하게 고수되었다. 레닌이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민족해방투쟁이 계급투쟁에 장애요인이 된다면 언제든지 그에 대해 반대하였다. 폴란드 문제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이러한 원칙적인 입장을 잘 표현해 준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유폴란드를 세우려는 공화파 분리주의자들의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했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반동으로 돌아섰을 때 레닌은 즉각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였다. “우리는 민족독립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이해에 종속시킨다.48)(레닌)

 

4)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문제

 

민족문제는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경우에만 부르주아적인 것이고, 현대 제국주의 하에서 민족문제는 계급문제이다.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제국주의와 제3세계 민족문제는 철저히 제국주의와 식민지 인민간의 모순이다. 제국주의 하의 민족문제는 민중적 민족문제, 즉 계급문제이다. 한국의 독점자본과 그 정치권력의 담지자들은 모두 하나의 민족구성원이지만,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를 둘러싸고 노동자계급과 적대계급이다. 제국주의와 국내 자본가계급은 한국의 피지배 민중의 지배와 착취・수탈의 동맹자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문제, 즉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고 노동자・민중의 자주권을 획득한다는 것은 민중적 민족문제, 본질적으로 계급문제인 것이다.

제국주의 신식민지 지배를 끝장내고 민족해방을 쟁취한다는 것과 그 동맹세력인 한국독점자본의 정치권력(국가권력)으로부터 노동해방을 쟁취한다는 것은, 동시적이고 불가분의 통일적 과제이다. 그러므로 ‘민족해방’ 없이 ‘노동해방’ 없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없이 민족해방은 요원한 것이다.

민족문제 해결 주체 역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피억압 민중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성장을 전제하지 않는 “반미자주정권 수립”이라는 전략적 목표는 현실성이 없다. 국내외 독점자본의 그 신식민지 파쇼권력의 타도 없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내외 (독점)자본과 국가권력이 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해방 투쟁에 나선다? 그것이 가능한 조건은 전술했듯이 자본주의가 미발달했던 일제 식민치하 초기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덧붙이면, 1950년까지 반제-반봉건 민중민주주의 혁명 투쟁을 전개했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 노동자・민중은 무엇으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가?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은 전 세계적인 과잉생산으로 인해 ‘전반적인 위기’가 재격화되어 있다. 지금의 세계정세는 위기의 대폭발 전야라는 것이 분석력 있는 인사들의 일치된 예상이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의 식민지・반식민지 민중에 대한 초과착취로 생명을 연장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은 극한에 달해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제3세계에서 자주정권 수립투쟁(민족해방 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져 왔고, 많은 나라에서 ‘반제 자주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사회발전에 대한 비과학에 근거해서 세운 수많은 ‘좌파정권’은, 미 제국주의와 그들의 토착연합 세력의 반혁명에 무너져 내렸다. 뿐만 아니라 베네수엘라와 같은 석유산업 중심의 특수한 산업기반을 가진 나라의 경우, 힘겹게 반혁명을 저지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자국 민중의 고통은 가중되고 있다. 1979년 2월,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미 제국주의에 맞서 ‘민족자결권’을 확보・사수하고 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세계질서에 대한 타격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노동해방-민중해방’의 역사적 진보와는 거리가 먼 종교국가(이슬람주의)로의 퇴행과정에 놓여있다.49)

국내 (독점)자본의 착취와 수탈도 제국주의로 인한 민중의 고통도, 모두 자본주의의 계급적대에서 오는 모순이요, “‘민족모순’은 ‘계급모순’의 현상형태 또는 그 외화형태50)”이다. 변혁의 필연성과 가능성은 고도로 발전한 생산력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모순, 생산의 (전 지구적) 사회적 성격과 전유・취득의 사적 성격간의 모순 등의 자본주의 모순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6. 나가며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계급투쟁의 객관적 조건을 읽어 내는 것과 주체의 상태에 대한 진단은 운동의 과제를 도출하고 그 진전을 도모하는 데 필수 불가결하다. 당면한 실천적 과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1991년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의 해체는 마치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 같고, 제국주의의 완전한 승리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금의 제국주의(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내부로부터 적대적인 모순이 농익은 상황임에 틀림없다.

영원할 것 같은 자본주의는 그 내적 모순의 격화로 ‘혁명이냐 전쟁과 파멸이냐’의 귀로에 놓여있다.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은 이러한 역사인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노동해방-민중해방-민족해방’에 대한 필연성과 가능성의 낙관적 전망을 가질 수 있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1940년 일제가 야심찬 ‘대동아공영권 결성’을 선언하는 등 승승장구하는 듯하자, 조선독립의 전망을 상실한 인사들이 일제에 투항했으나 코앞에 일제 패망이 있었다.

동시에 한국의 노동운동, 계급투쟁의 역사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중심으로 재구축되었던 제국주의 세계질서는 한국현대사의 모든 부침과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제국주의 세계적 지배질서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적 내부모순이 격화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자본주의의 위기전개와 자본가 진영의 공세로 인한 노동자・민중의 참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개량주의 노동운동은 어떠한 개량도 확보하지 못했음을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운동을 교란하는 개량주의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폭로하여 변혁적 노동자・민중운동을 복원해야 한다. ‘재벌개혁’, ‘재벌해체’ 등등의 각종 사민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평가하고 변혁적 태도를 대중적으로 벼려내야 한다.

한국사회의 변혁적 지향에서 제기된 NL-PD의 분리를 극복하기 위한 ‘좌-우파’ 간의 적극적인 연대를 정립해야 한다. 변혁의 전략적 노선이 미처 통일되지 못하더라도 인식의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최대치의 통일전선을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예컨대, 노동자계급의 인식을 왜곡・위축시켜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아 온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시급한 공통의 과제다.

1980~90년대 사회구성체(또는 사회성격)와 변혁론 논쟁과 같은, 우리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를 계승하고 인식을 넓혀야 한다. 그리고 현실 운동을 대중화하는 풍토를 되살려 내야 한다. 동시에 NL-PD로 표현되는 미완성의 사상・이론에 대한 지양・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주파의 몰계급적 개량주의와 애국주의, 현장파의 반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제고와 경제주의 극복은 시급한 과제다.

 

20세기 사회주의의 경험은 21세기 변혁의 풍부한 경험적 자양분이다. 맑스는 ‘빠리꼬뮨’의 실패 경험에서 다가올 노동자계급 투쟁에 필요한 이론적 자양분을 추출하고 정식화했다. 20세기 사회주의에 대해서 오늘 우리는 맑스와 같은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20세기 사회주의는 분명히 “노동자계급의 깃발”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20세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깃발이 한번 내려졌다고 해서 “풍요롭고 평등한”, ‘노동해방-민중해방-인간해방’을 향한 역사의 진보가 멈춘 것은 결코 아니다.

“20세기 사회주의가 제2차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형성되었듯이, 21세기 자본주의의 모순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것이다.” 깊어가는 자본의 위기는 계급투쟁의 격화를 의미한다.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근거한 변혁운동의 참모부 건설의 필요성과 방법이 제시되고 그 현실성에 접근해야 한다. 자본이 설치한 노동자계급의 분할 통제 전략을 넘어 “대자적” 계급으로, 전투적 노동운동으로의 재건이 필요하다. 그에 따른 방법이 제시되고 조직・실천 방안을 실천해야 한다. 

노사과연


 

1) ≪이코노믹리뷰≫, 2019.8.18. (http://m.econovill.com/news/articleWiew.html?idxno=369880)

 

2)<「BBC NEWS /코리아>, 2019.7.15.(http://www.bbc.com/korean/news-48987149)

 

3)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성명서(2018.11.5)

4) 권정기, 한국노동운동 역사에 대한 하나의 관점, ≪정세와 노동≫ 121호, 노사과연, 2016.3. pp.45-48. 참조

 

5) 채만수, 한국노동운동의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 ≪피억압의 정치학≫ (상), 노사과연, 2008. p.468

 

6) 채만수, 같은 책, pp.468-469.

 

7) http://www.610.or.kr/board/content/page/67/post/1082

 

8) ‘노동자의 책’ 사전, (http://www.laborbook.org/dic/view.php?dic_part=dic01&idx=5175)

 

9) 함종호, 중국 사회성격논쟁, ≪현대사상≫ 20: 마오쩌둥, 현대사상연구소, 2018.12. p34

 

10) 채만수, 다시 한국사회의 구성과 성격에 대하여, ≪피억압의 정치학≫ (上), 노사과연, 2008.3. pp.315-316

 

11) 조희연, 현 단계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이 구도와 쟁점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구성체논쟁≫Ⅱ, 죽산, p.13 참조

 

12) 채만수, 같은 글, p.318

13) 채만수, 같은 글, p.325 참조

 

14) 민족경제, p.156

 

15) 조진경, 한국현대사와 80년대 한국사회, ≪한국 사회의 성격과 운동≫, 공동체, 1987. p.29

 

16) 민족경제, p.158

17) 같은 책, p.199

18) 같은 책, p.154

 

19) 채만수, 다시 한국사회의 구성과 성격에 대하여, ≪피억압의 정치학≫ (上), 노사과연, 2008.3. pp.326 이하 참조

 

20) 21세기 ‘자주통일론 서문’, 2011.

 

21) 조희연, 현 단계 한국사회구성체논쟁이 구도와 쟁점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구성체논쟁≫Ⅱ, 죽산, p.32

 

22)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독점자본이 국가와 유착하여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법이 체계화된 것, 독점자본주의의 특수한 형태로서 “독점체의 힘과 국가의 힘이 단일 메커니즘으로 결합”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23) 이경철, ‘NL논자’의 사회성격론 비판ㅡ‘식민지반자본주의사회론’에 대하여, ≪NL론 비판≫Ⅰ, 새길, p.131

 

24) 조희연, 같은 글, p.23

 

25) 남상일, ≪제국주의론≫의 올바른 이해와 교훈, ≪제국주의론≫의 옮긴이 서문, 백산서당, 1988, pp.5-24 ※ 따옴표 안의 내용은 모두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원문이다.

 

26) 채만수, 신식민주의와 신식민지 파씨즘, ≪노동사회과학≫ 제9호: 21세기 대공황과 레닌주의, 노사과연, p.68

 

27) 채만수, 같은 글

 

28) 백욱인, 분단과 민족문제, ≪한국사회구성체논쟁≫Ⅱ, 죽산, p.313

 

29)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한 번스 미 국무장관의 메모에 의하면, 1945년 4월 트루먼 정부는 쏘련과의 공조가 아니라 대결과 봉쇄를 통해 국익 추구하는 입장, 미국은 쏘련의 전쟁참전 이전에 일본의 항복을 받는 길만이 일본은 물론 중국까지 독점하는 동시에 조선을 단독장악 하는 등 동북아 패권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황성환, ≪제국의 몰락 下≫, 민플 참조)

 

30) 김민철, 민족민주운동의 전략적 과제에 대한 쟁점들, 1988, p.27.(≪한국사회구성체논쟁Ⅱ≫에서 재인용)

 

31) 조진경, 민족과 경제, p.155

 

32) 채만수, 한국에서 자본주의 사회구성의 성립, 그리고 그 시기를 둘러싼 논쟁, ≪노동자교양경제학≫, 노사과연, pp.78-79

 

33) 채만수, 같은 글, pp.80-84

34) 채만수, 같은 글, p.85

 

35) 원래 원조라는 것은, 우호적인 정권에 대한 지원을 통해 신생국이 비자본주의적 길을 걷지 못하도록 하고, 그들을 사회주의체제에 대항하는 중심세력으로 끌어들이며, 신생국에 대한 경제적 지배권을 유지하고 전과 동일하게 착취의 대상으로 이용하려는 신식민지주의적 침투의 가장 세련된 형태이다. 원조는 주로 현물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제국주의 국가의 과잉생산물의 소비와 신식민지에서의 종속적 경제시스템을 구축하는 역할을 한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총 14억을 원조했는데, 이중 5억6천만 달러가 경제원조, 8억 4천만 달러가 군사원조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미국의 원조도 대부분 군사적 분야의 완제품 구입에 사용되었고 경제개발이나 산업인프라 구축에는 거의 사용되지 못했다.”(권오중 외교국방연구소 연구실장)

 

36) “한국과 같은 후발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아직 경쟁적인 단계에서부터, 아니 실제로는 자본주의 사회구성이 성립되기도 전인 1930년대 이전부터 이미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전반적 위기에 종속되어 있었다. 한국자본주의는 위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그 비독점적・경쟁적 단계에서부터 국가의 전면적인 개입을 통해서만 존속하고 성장할 수 있었고, 따라서 ‘비독점・경쟁적 국가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이행과정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채만수, 제10강 독점자본주의, 노동자교양경제학, 2015, 노사과연, p.550

 

37) 현 한국사회의 본질 및 성격과 국가권력의 성격, 한국사회구성체논쟁Ⅱ, 죽산, p.167 참조

 

38) 채만수, 신식민주의와 신식민지 파씨즘, ≪노동사회과학≫ 제9호: 21세기 대공황과 레닌주의, 노사과연, 2016.7.12., p.83

 

39) ≪정세와 노동≫ 2011년 10월호에 실린 “한국노동운동의 몇 가지 쟁점에 대하여”(채만수) 제하의 글 중에 일부를 재구성 함.(노사과연 토론회 발제문으로 작성했던 글의 일부임)

 

40) 강형민, 「‘애국주의’의 민족이론 비판」, ≪NL론 비판≫Ⅰ, 벼리, p.177

 

41) 강형민, 같은 글, 후주27), p.250 참조

 

42) 레닌, ≪제국주의론≫, 남상일 역, 백산서당, p.96 참조

 

43) 畑田重夫, 민족문제 서설, 배동문 역음,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한울, p.42(재인용)

 

44) 한동민, ≪애국주의란 무엇인가≫, 참한, pp.19-20

45) ‘식민지 시기 조선의 기업가’(류석렬),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4285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업을 포함한 당대의 경제적 성취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것일 수 없다. 폭력과 차별이 일상화된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 오늘에까지 번성한 자칭 ‘민족 자본가’들은, ‘민족’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민중들에게 비싸고 거칠더라도 ‘우리 것’을 ‘사라’고 외치는 대신 자기 헌신과 사회적・민족적 기여를 토대로 한 민중적 신뢰 획득과 역사적・도덕적 헤게모니의 구축에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근대적 조선인 대자본의 핵이었을 뿐만 아니라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해방 후 한민당을 결성하기에까지 이르렀던 동아일보・경성방직 계열의 경우 1930년대 이후 과연 민족 자본가에 걸맞은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출처: 교수신문)

 

46) 맑스, 마이어와 포크트에게 보내는 편지, ≪국가와 혁명≫, 논장, pp.243-244에서 재인용

 

47) 강현민, 애국주의 민족이론의 비판, ≪NL론 비판≪≫Ⅰ, 새길. pp.200-201 참조

 

48) 마르크스주의 국가론과 혁명론, pp.243-244에서 재인용 (레닌의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논장)

 

49) 참조기사.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147940

 

50) 채만수, 다시 한국사회의 구성과 성격에 대하여, ≪피억압의 정치학≫ 上, 노사과연, 2008.3,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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