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득세하는 포퓰리즘, 그리고 파씨즘과 모칭 사회주의

 

채만수 │ 소장

 

 

1. 포퓰리즘은 무엇인가

 

부르주아 정치에 사실상 언제나 만연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근래에, 특히 2007/8년 이래의 세계적인 경제・금융위기 이후, 그 동안 포퓰리즘 하면, 연상하고 했던 중남미 국가들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여러 나라에서도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고,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논의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활발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정평 있는 대답은 아직 제시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대부분 논객들이, ‘포퓰리즘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극히 어렵다’는 식의 대답들을 내놓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예컨대, 미국의 유서 깊은 사회주의 월간지, ≪먼쓸리 리뷰(Monthly Review)≫의 편집자인 J. B.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조차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정의하기가 극히 어려운데, 이는 그것이 어떤 명확한 실질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since lacking any definite substantive content.).1)

 

그러나 이는 포퓰리즘을 정의하는 데에서의 그 접근법과 논리의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포퓰리즘은 “어떤 명확한 실질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포퓰리즘이라고 불리는 여러 정치적 조류들은,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모두 “명확한 실질적인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 다만, “어떤 명확한 공통의 실질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을(lacking any definite substantive common content)” 뿐이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어떤 공통의 실질적인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포퓰리즘 그것을 그 ‘내용’에 따라서, 즉, 그 ‘공통의 내용’에 따라서 정의하려고 하는 것은 터무니 없은 시도로서, 그 정의는 극히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불가능하다.

포퓰리즘을 구태여 그 내용과 관련하여 규정해야 한다면, 그 각 조류는 서로 그 내용을 달리하면서도, 그 내용들은 모두 몰이론적・몰과학적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그 특징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기는 해도, 포퓰리즘 그것에 대한 정의는 아닐 것이다.

사실. 포퓰리즘의 본질은, 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그 행태 혹은 그 방식에 있다.

실제로, 예를 들어, 프랑스의 국민전선(FN)이나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AfD)’ 등등의 ‘우익 포퓰리즘’과, 그리스의 시리자(Syriza)나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 등과 같은 좌익 포퓰리즘을 어떤 공통의 내용을 들어 포퓰리즘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포퓰리즘’ 혹은 ‘포퓰리스트’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분류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들을 다시 ‘우익 포퓰리즘’과 ‘좌익 포퓰리즘’으로 나누면서도, 사실상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서슴지 않는다. 이는, 그 내용과 정치적 지향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때로는 극과 극으로 대립하고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그들을 하나의 범주 속에 묶어 분류하게끔 하는 무언가 명확한 공통의 적극적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정치적 내용과 지향을 때로는 극단적으로까지 달리하는 정치적 조류들을 하나의 범주 속에 묶어 분류하게끔 하는 공통의 적극적 요소는 무엇일까?

내용에 공통성이 없는 것들을 어떤 하나의 범주 속에 분류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그 어떤 공통의 형태, 이 경우 그들 각 조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의 정치행태 혹은 정치방식 이외에, 어떤 공통의 적극적 요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들 각 조류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공통의 정치행태 혹은 정치방식이라는 데에 착목하여 포퓰리즘을 정의하자면, 포퓰리즘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들이 해결하겠다고 내세우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과 그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할 능력도 전혀 없는 자들이 엉터리・사기적 해결책들로 대중의 순진한 정치적 감성을 (비상하게, 즉 예사롭지 않게) 자극하면서 (대개는,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기성의 권력, 전통적인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에 대항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대중 선동적 정치행태 혹은 정치방식이다. 포퓰리즘 혹은 포퓰리스트들은, 좌든, 우든, 모두 그러한 정치행태・정치방식을 공유하고 있다.

포퓰리즘이란, 이렇게 ‘대중의 순진한 정치적 감성을 자극하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대중 선동적 정치행태 혹은 정치방식’이기 때문에, 예컨대, ≪조선일보≫ 등과 같은, 기득권을 가진 언론이나 정치가들이, 주로 좌익 포퓰리즘에 적대해서이지만, 포퓰리즘을 경멸적으로 ‘대중영합주의’라고 번역하고 규정하는 것은 그다지 그르지 않다. 좌익 포퓰리즘이든, 우익 포퓰리즘이든, 포퓰리스트들은 대중에 영합할 뿐 아니라, 대중을 오도한다는 것도 물론 잊어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2. 포퓰리즘으로서의 부르주아 정치

 

포퓰리즘이란 이렇게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과 그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할 능력도 없는 자들, 그러한 집단이 엉터리・사기적 해결책들로 대중의 순진한 정치적 감성을 자극하면서 권력을 추구하는 대중 선동적 정치행태 혹은 정치방식이라는 점에서, 사실은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 일반, 즉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포퓰리즘이다.2)

그리고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 일반, 즉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포퓰리즘이라는 규정은 절대적으로 정당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에 대한 무지! (혹은, 그 모순을 한때나마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했던 사람들의 경우, 그 무지로의 전향!) ― 이것이야말로 바로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가들의 필수 자격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실은 자본의 이익, 자본가계급의 이익인 정책들을, 어떤 자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어떤 자들은 부지불식간에, 국민, 즉 국가구성원 모두의 이익인 것처럼 포장, 선전하고 강행하는 것이 그들의 정치이고 정치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의 순진한 정치적 감성을 선동적으로 자극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추구하는 것이 그들의 정치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최근 들어, 예컨대, 미국 대통령 트럼프(Donald J. Trump)나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Alexander Boris de Pfeffel Johnson) 등을 포퓰리스트로 규정하긴 하지만, 기존의 전통적인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지는 않는바,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그러한, 즉 본질적으로 포퓰리즘적인 정치행태가 지배적・일상적이어서, 그것을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을 논하는 연구자들・논객들이 그것을 “정의하기 어렵다”고 고백하는 것도 사실은 몰이론적・몰과학적 대중선동 정치로서의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를, 그러한 정치행태를 그들이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기성의 권력, 전통적인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에 대항하는 비상한, 즉 예사롭지 않은 행태가, 즉 그 정도에 있어서 지배적・일상적이지 않고, 따라서 ‘당연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행태가 그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포률리즘을 기존의 전통적인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와 다른 것으로 보게끔 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본질적으로 포퓰리즘적인 정치형태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그들의 기본적 관점이 그들로 하여금 포퓰리즘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스트리아 경제연구소(WIFO) 소장이자 빈경제경영대학(Wirtschaftsuniversität)의 경제학 교수인 칼 아이깅어(Karl Aiginger) 박사가, “포퓰리즘은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다원주의・인권 및 사상의 교류(exchange of ideas)에 맞설 때, 그 영향은 분명하다”3)고 말할 때에, 거기에는 그러한 관점, 즉 부르주아 정치를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전형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부르주아 정치와 사회는 이상적인 것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주아 정치를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한, 그가 포퓰리즘을 정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이 글의 표제에서, “득세하는 포퓰리즘” 운운할 때, 그 ‘포퓰리즘’도 사실은, 포퓰리즘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통속적인 표현에 따라서 예(例)의 그 비상(非常)한, 즉 예사롭지 않은 포퓰리즘을 가리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포퓰리즘이란 용어는 그러한 통속적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그러한 통속적 개념을 차용하는 이유는, 기존의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가 포퓰리즘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우선 그것, 즉 비상한, 예사롭지 않은 포퓰리즘이 포퓰리즘의 대중적 용어법이기 때문이고, 또한 바로 그러한 개념의 포퓰리즘이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하려고 하는 주요 대상이기 때문이다.

 

 

3. 포퓰리즘 발흥의 원인

 

소위 부르주아 민주주의 그 자체가 무지와 대중선동의 정치여서 본래부터 포퓰리즘적이라는 점을 지적했는데, 부르주아 정치 그것이 이렇게 무지와 대중선동의 정치, 즉 포퓰리즘이어야 하는 것, 포퓰리즘일 수밖에 없는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발전에 따른 인민 대중의 광범한 빈곤과 억압의 원인과 실체를 은폐해야 하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의 본령, 그 임무이고, 이를 위해서는 부르주아 정치인들 자신이 그 원인과 실체에 대하여 무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그 원인과 실체는 부르주아적 정치인들에게도 은폐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순에 대한 무지! (혹은, 그 모순을 한때나마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했던 사람들의 경우, 그 무지로의 전향!) ― 이것이야말로 바로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가들의 필수 자격조건이라고 지적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대중의 빈곤과 그 원인에 대한 무지야말로 포퓰리즘의 원인이자 발판인데, 오늘날 득세하고 있는 포퓰리즘과 관련해서 보자면,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피억압 대중의 빈곤의 심화, 거듭되는 공황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위기야말로 바로 좌・우 포퓰리즘의 온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곤의 심화, 특히 공황에 의한 실업과 빈곤의 심화는 빈곤 상태의 그리고 그러한 상태로의 영락의 위험에 처한 광범한 대중의 저항, 투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고, 그러한 저항, 투쟁이 몰이론적・비과학적 ‘소부르주아 사회주의’ 정치세력에 의해 주도될 때, 그때 거기에서 다양한 형태의 좌익 포퓰리즘이 발생하고, 발흥하는 것이다. ― 중남미 국가들에서의 포퓰리즘이나 2009년의 재정・경제위기 이후 남부 유럽 국가들에서 발흥한 좌익 포퓰리즘이 전형적이다.4)

다른 한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위기가 심화되고, 노동자・민중이 저항에 나서게 되면, 그것은 당연히 독점자본의 체제 수호적 반동을 불러오고, 그것이 애국주의・국가주의・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대중선동 정치적 형태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우익 포퓰리즘, 즉 파씨즘이다. ― 최근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우익 포퓰리즘이 발흥, 아니 극성을 떨어가고 있는 것도 바로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위기에 대한 독점자본의 반동적 대응이다.

 

 

4. 우익 포퓰리즘, 즉 파씨즘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전통적인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에 도전하는 정치행태라는 측면에서, 즉 비상(非常)한, 즉 예사롭지 않은 포퓰리즘이라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은 사상적으로 소부르주아의 정치행태다. 그리고 이 포퓰리즘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익 포퓰리즘좌익 포퓰리이라는 두 조류가 있다.

J. B. 포스터가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혹은 위험으로 이해되고 있지만,5)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비상한, 즉 예사롭지 않은 포퓰리즘 일반이 도전하고 있는 것은, 소위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라, 기성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이고, 기존의 그 정치관행일 뿐이다.

이른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포퓰리즘은 오직 오늘날 유럽 각국이나 미국에서 득세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뿐이다. 이 이른바 우익 포퓰리즘은, 성격상 그냥 우익이 아니라 사실은 극우익, 즉 파씨즘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인용한 J. B. 포스터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익 포퓰리즘이란, “퐈쑈적 부류”(파씨즘/네오파씨즘/포스트-파씨즘)의 조류들(movements)을 지칭하기 위해서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유럽의 논의에 도입된 완곡어법으로서, 그 특징은 … 극악하게 외국인 혐오적이고 초(超)민족주의적인 경향들이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이딸리아의 북부동맹, 네덜란드의 자유당, 영국독립당, 스웨덴민주당이나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유사한 정당들 및 운동들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6)

 

여기에서 포스터가 파씨즘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 내부에서의 자유민주주의의 반대어”여서, “그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대신에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 체제를 관리하여,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들과 집행권력에 대한 제한들을 제거하고, 노동자계급의 조직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억압적 기구를 강화하며, 타민족을 민족주의적 형태로 사회에서 배제하고자 한다.”7)

이렇게 본질에 있어서 퐈쇼적 조류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파씨즘이나 네오파씨즘 등으로 불리는 대신에 ‘우익 포률리즘’이라는 완곡어법으로 불리는 이유를 포스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동일한 현상은, 트럼프의 최고 행정수반으로의 등극이라는 형태로, 지금 미국에서도 승리를 거둔 상태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주류 논평은 일반적으로 파씨즘 혹은 네오 파씨즘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대신에 포퓰리즘이라는 보다 흐릿하고 보다 안전한 개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단지, 그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나치 독일이나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이미지 때문이거나, 갈수록 더 정치적 학대의 만능의 용어로서 사용되어 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유주의적 주류가 그것을 네오파씨즘으로 부르기를 회피하는 것은, 이러한 정치적 현상에 대한 어떤 진지한 관심에 수반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기인한다. 1935년에 브뤠히트(Bertolt Brecht)가 물었듯이, “파씨즘을 야기하는 자본주의에 반대를 표명하려 하지 않으면서 누구든 어떻게 파씨즘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8) (강조는 인용자.)

 

즉, 그것을 사실대로 파씨즘으로 부를 경우, 그 파씨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불러일으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우익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네오)퐈쑈적 세력과, 그들이 도전하는 기성의 정치세력 간의 친화적 관계 혹은 암묵의 동맹을 다음과 같이 폭로하고 있다.

 

우익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자유주의적 담론에서는 다소 부정적인 형용어로서 사용되고 있는바, 이러한 경향을 비난하기도 하면서, 파씨즘/네오파씨즘이라는 문제 전체를 제쳐둠으로써 그것에 은폐수단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급진적 우익”…에 대한 지배계급의 이중적(ambiguous)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네오퐈쑈적 우익 세력들은, …, 유럽 대부분에서 조직적으로 “탈악마화”되어 왔고, 중도우파적 (혹은 우익 중심적) 정부에서는 흔히 기꺼운(acceptable) 동반자로 간주되고 있다.9) (강조는 인용자)

 

자유주의 언론이 파씨즘 혹은 네오파씨즘을 우익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파씨즘 혹은 네오파씨즘으로서의 그 정체를 은폐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인데, 이는 이 “급진적 우익”, 즉 파씨즘/네오파씨즘에 대한 지배계급의 이중적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네오파쑈적 우익 세력들은, …, 유럽 대부분에서 조직적으로 “탈악마화”되어 왔고, 중도우파적 (혹은 우익 중심적) 정부에서는 흔히 기꺼운 동반자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중적 관계란 도대체 무엇일까? 혹은 그러한 이중적 관계는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사실상 동어반복적인 대답이지만, 그 이중적 관계란, 한편에서는 대립적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친연적(親緣的)인 관계 그 이외의 무엇일 수 없다. ‘급진적’이냐, 소위 ‘중도적’이냐에서 대립적이고, 양자 모두 우익적인 데에서 친연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우익적이라는 친연성에서 그들은 서로 “기꺼운 동반자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파씨즘이 파씨즘으로 불리는 대신에 일반적으로 ‘우익’ 포퓰리즘으로 불리는 것은, ‘중도적’이라고 평가・선전되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이, ‘중도 좌파’로 평가되고 있는 사민주의 계열의 정당들을 포함하여, 모두 사실은, 중도적이 아니라, 우익적이기 때문이고, 나아가서 ‘중도 우파’로 평가되는 정당들이나 정파들의 경우에는 극우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컨대, 미국의 트럼프적 정치현상이나 영국의 보리스 존슨적 정치현상이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근자에 이러한 우익 포퓰리즘, 즉 파씨즘/네오파씨즘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심각한 위기 상태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이다.10) 파씨즘으로서의 우익 포퓰리즘의 발흥을 저지하지 못하면 어떤 재앙이 초래될 것인가는 이미 역사를 통해서 통렬하게 경험한 대로다.

 

 

5. 좌익 포퓰리즘, 혹은 모칭 사회주의

 

여기 대한미국에서는 흔히 ‘조・중・동’ 등 극우언론의 지면에서 “포퓰리즘” 혹은 “포률리즘적”이라거나, “대중영합주의” 혹은 “대중 영합적”이라는 표현을 접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거기에 진한 적대와 경멸이 담겨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저절로 감지된다. 그들이 그렇게 적대와 경멸을 담아 “포퓰리즘” 혹은 “포률리즘적”, 혹은 “대중영합주의” 혹은 “대중 영합적”이라고 할 때, 그들이 가리키는 것은 좌익 포퓰리즘이고, 특히 중남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의 그것이다.

저들 극우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이 (중남미 국가들에서의) 좌익 포퓰리즘을 그토록 적대하고 경멸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좌익 포퓰리즘이 왕왕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내걸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의 온존 등 기존 체제의 바탕 위에서이지만,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층인 빈곤에 시달리는 인민 대중을 달래기 위해서 주요 생산수단의 일부를 국유화한다든가, 세율을 다소 인상한다든가 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들 좌익 포퓰리스트들이 내세우는 바의, 이렇게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전제로 하는 ‘사회주의’, 그것은 분명 모칭(冒稱) 사회주의이고, 기껏해야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들 좌익 포퓰리스트들이 내세우는 ‘사회주의’가 과연 정말 노동자계급이 건설할 미래사회의 상으로서의 사회주의, 그리고 그러한 미래사회로 진전하는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인지, 아니면 단지 노동자・인민의 빈곤・고통과 그에 따른 그들의 저항을 포착, 오도하는 소부르주아 좌파의, 선의의 혹은 악의의 정치놀음, 즉 모칭 사회주의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들 극우 이데올로그들에게는 그것을 파악할 능력도 관심도 없다. 그들로서는 좌익 포퓰리즘의 득세, 특히 그 집권과 예정된・필연적 파산을 사회주의 일반을 먹칠하고, 매도해버림으로써 대중 일반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심을, 혹은 절망감・좌절감을 주입하는 기회로 삼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아무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좌익 포퓰리즘은 전통적으로는 “분홍 조류(Pink Tide)”11)라고 불릴 만큼 그들 국가들의 ‘좌익’ 정치의 일종의 전통적 트레이드마크였다.12) 그런데 특히 2009년에 폭발한 재정위기를 계기로 그리스, 이딸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으로 범람, 남부 유럽 국가들에서도 좌익 포퓰리즘은 이제, 그리스의 시리자처럼 집권도 가능할 만큼, 도도한 한 정치적 조류로 되어 있다.13)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부르주아・소부르주아 정치제도는,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무지의 정치, 대중선동의 정치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포퓰리즘인데, 다른 한편에서 실질적으로는, 주민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노동자・인민은 “정치로부터, 즉 민주주의에의 적극적 참여로부터 배제되고 내쫓기는”14) 소수 유산자들만의 민주주의다. 그리하여 레닌에 의하면, “맑스는 빠리 꼬뮌의 경험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을”, “피억압자들에게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억압계급의 어떤 대표자들이 의회에서 자신들을 대표하고 짓밟을(zertreten)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허락된다”15)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빈곤과 실업이 확산・심화되면, “정치로부터, 즉 민주주의에의 적극적 참여로부터 배제되고 내쫓기는” 노동자・인민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들고 일어서게 되는바, 노동자・인민의 이러한 자연발생적 저항이 선동 정치적 소부르주아 좌파에 의해서 포착되어 주도될 때, 그것은 좌익 포퓰리즘의 발흥, 득세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바로 이 노동자・인민의 자연발생적 저항, 민주주의의 요구라는 측면에 주목하여 (좌익) 포퓰리즘에 대한 한 찬양자는, “틀에 박힌 민주주의 때문에, 포퓰리즘은 인민의 요구들을 고려하고 집단적 참여를 촉진하는, 유일하게 생산적인 형태로 되었다”16)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우선 유럽의 좌익 포퓰리즘을 우익 포퓰리즘과 비교해보자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민자・난민 문제에 대해서 개방적・포용적이고, 배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우익 포퓰리즘, 즉 네오파씨즘, 네오나치즘과 확연히 구별된다.

나아가, 유럽의 그것이든, 중남미의 그것이든, 그리고 ‘사회주의’를 내걸든, 아니든, 좌익 포퓰리즘은, 적어도 표방하는 바로는, 독점자본과 그 독재에 반대하면서, 부의 평등한 분배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예의 좌익 포퓰리즘의 찬양자는 “우익 포퓰리즘은 공포를 불러일으키지만, 좌익 포퓰리즘은 희망을 불러일으킨다”고, 혹은 “우익 포퓰리즘은 증오와 무관심에 뿌리박고 있으나, 좌익 포퓰리즘은 정의와 평등에 뿌리박고 있다”17)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한편, 앞에서 포퓰리즘은 일반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혹은 위험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말했거니와, 실제로 좌익 포퓰리즘은, 많은 사람들의 선입견과는 전혀 반대로, 그리고 좌익 포퓰리스트들 자신의 화려한 수사나 극우적 언론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자체로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나 위험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철저히 부르주아 자유민주주의적 틀 내의 운동이다. 좌익 포퓰리즘이 만일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나 위험이 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불러오는 반동, 즉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서일 뿐이다.

아무튼 좌익 포퓰리즘은, 그것이 ‘사회주의’를 내걸든, 아니든, 독점자본과 그 독재에 반대하면서, 부의 평등한 분배와 민주주의를 주장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주장들은 현실에 부딪치자마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독일과 영국의 속담이 진리임을 생생하게 실증하면서, 그 몰이론・비과학성 때문에 곧바로 파산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극우적 반동을 낳는다. ‘독점자본과 그 독재에 반대’니, ‘부의 평등한 분배와 민주주의’니 하는 주장들은 결국 기껏해야 공염불이고, 사실은 대중에 대한 기만인 것이다.

과학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기성의 국가기구를 단순히 장악하여, 이를 그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가동할 수는 없다”18)는 것;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로부터 차례차례 모든 자본을 빼앗고, 모든 생산용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산력의 크기를 가능한 한 급속히 증대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19)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좌익 포퓰리스트들은 이러한 과학의 가르침과는 정확히 반대로 움직이면서, 그리고 그렇게 정확히 반대로 움직임으로써, 민주주의와 평등을 실현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노라고 떠들어댄다. 기성의 국가기구를 고스란히 이어받아서 그것을 이용하여, 그리고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고스란히 보장한 채! ― 그러니 파탄할 수밖에!

몇 가지 실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대표적으로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그래온 것처럼, 빈곤과 실업을 강요하는 기존의 정치・사회・경제 상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비등하여 이른바 좌파 정권들, 즉 좌익 포퓰리즘적 정권들이 집권하게 되면, 그 정권들은 당연히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극우 언론의 표현으로는, 대중에 영합하는 몇 가지 경제적 조치들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국가기구와,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 즉 기존의 생산관계를 온존시킨 채!

이러한 조건 하에서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여 ‘좌파 정권’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핵심적 조치는 당연히 재정적 수단에 의한 그것, 즉 재정지출의 확대에 의한 조치일 수밖에 없다.20) 그런데 생산수단은 자본가들에 의해서 사적으로, 즉 독점적・배타적으로 소유되어 있고, 따라서 생산물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해야 할 국가의 것이 아니라, 그들 자본가의 것이다. 그리하여 세수(稅收) 즉 재정수입은 그들에 의해서 제약된다. 재정적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등에 업고 세율을 인상할 수 있지만, 자본가계급, 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자본가계급의 대대적인 저항과, 대대적인 정치가들 및 고위 관료들의 매수가 그 세수의 확대를 좁은 한계 내에 가두어버린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국가독점자본주의적 화폐・통화제도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즉, 국채를 증발하여 ‘대중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일시적 부분적으로 대중의 요구가 충족되고, 일시적 부분적으로 빈곤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과정이 일정하게 진행되면,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이 인플레이션이 다시 빈곤을 악화시키고, 이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완화시키기 위해 적자재정, 즉 국채발행=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한 재정지출을 더욱더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 과정은 인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을, 따라서 빈곤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대중은 당연히 ‘좌파 정권’에 환멸을 느끼게 되고, 우익 포퓰리즘을 수용하게 된다.

그것이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라틴 아메리카 여러 국가들의 대체적인 정치사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시대의 신식민지 일반의 현상이긴 하지만, 특히 공공연하게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되고 있는 중남미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덧붙여졌다. 즉,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가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려 하면, 그들은 군사 개입과 쿠데타, 그리고 그들의 정치・경제체제를 불안정화하려는 격렬한 시도의 표적이 된다.21)

 

1950년대 이후의 라틴 아메리카만을 고려하자면, 미합중국은 선출된 정부들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과테말라, 도미니카 공화국, 칠레, 아이티, 그레나다 및 파나마에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을 하였거나,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였다.22) 뿐만 아니라 미합중국은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및 볼리비아에서 혁명적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서 군사행동으로 개입하였다. 나아가서 … 미합중국은 온두라스, 파라과이 그리고 브라질에서 야당 집단들과 언론을 재정적으로 지원・조직하기 위해서 세금 달러를 지출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들의 의회탄핵을 이끌어냈다. 힐러리 클린턴이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붸네수엘라,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칠레 및 브라질에서 동일한 형태로 불안정화를 추구한 이러한 활동들을 관장했다.23)

 

이 증언 중 특히 주목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였다”거나 “야당 집단들과 언론을 재정적으로 지원・조직하기 위해서 세금 달러를 지출”하였다는 부분이다. 즉, 거기에서는 제국주의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내부의 부역계급, 즉 토착 자본가계급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바,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였다”거나 “야당 집단들과 언론을 재정적으로 지원・조직하기 위해서 세금 달러를 지출”하였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현 시기 제국주의 지배의 특징적 형태인 충실한 대리 권력의 지원・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부의 부역계급에 의한 이러한 군사 쿠데타 등이 가능한 것은 당연히,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대신에, 기성의 관료적・군사적 기구들을 온존시키기 때문이고, 대중적으로는 사회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 기초한 포퓰리즘 정권은, 결국엔 노동자・민중의 생활조건들을 의미 있게 개선할 수도, 그들을 혁명적으로 조직할 수도 없기 때문인 것이다. 결국 제국주의가 지원하는 군사 쿠데타에 의하든, 또 다른 포퓰리즘, 즉 자본의 우익 포퓰리즘에 의해서든, 좌익 포퓰리즘 정권, 모칭 사회주의의 파산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런데 좌익 포퓰리즘 정권은 노동자・인민의 생활조건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다. 기존의 체제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개선’하는 것이 목표인 좌익 포퓰리즘 정권은 왕왕 제국주의 국제 금융독점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예컨대, 그 정권의 성립에 우리 국내에서도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과 ‘노동자 정치활동가들’이 환호성을 질렀던, 저 유명한 룰라(Luiz Inácio Lula da Silva)로부터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로 이어진 브라질의 노동자당(PT) 정권(2002-2016)이나,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SYRIZA) 정권(2015-2019)은 사실상 IMF 등 제국주의 금융독점자본이 명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충실한 집행자이지 않았던가?24) 한편 시리자 정권의 연정 파트너가 반동적인 그리스독립당(ANEL)이었다는 사실이나, 지난 8월에 결별했지만 이딸리아의 오성운동이 극우 북부동맹과 한때 연정을 구성했다는 사실들도 좌익 포퓰리즘의, 소부르주아지에 특유한 무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소부르주아 좌파의 천박한 좌익 포퓰리즘에 불과한 모칭 사회주의의 이러한 파산들을 자본의 나팔수인 부르주아 언론과 이데올로그들은 의도적・악의적으로 그것이 마치 과학적 사회주의의 실패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사회주의 일반을 먹칠하고, 대중에게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경계심을, 혹은 절망감・좌절감을 주입하기 위해서!25)

맑스와 엥엘스는,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26)고 말했지만, 실제로 오늘날 노동자・인민 대중은 저들의 그러한 의도적인 악선전에 사실상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근래 인터넷의 발달・보급으로 SNS니, Social media니 하는, 자본이 아니어도 사실상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사회적으로 표현, 소통할 수 있는 수단들이 널리 보급되어 이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자본의 거대한 대중매체, 그 대중조작수단의 괴력과도 같은 지배력 앞에서 이들 매체의 힘은 그 자체로서는 시쳇말로 족탈불급(足脫不及)임은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좌익 포퓰리즘, 즉 사회주의를 모칭하는 소부르주아 좌파의 급진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과학적 사회주의 진영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혼란과 무기력을 반영하는 것인바, 그 혼란과 무기력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노동자계급의 절대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선 사상・이론적 혼란은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맑스주의 진영 속에 발생한 수정주의, 즉 현대 사회민주주의에서 발단하였지만, 이 현대 사민주의는 레닌을 위시한 혁명적 진영의 가차 없는 이론적 비판과 러시아 혁명에 의해서 타격을 받았고, 대공황과 제2차 대전 등을 거치면서 무력해진 바 있다. 즉, 그 사상・이론적 혼란은 그 자체가 단지 하나의 일화(逸話) 내지 개천 같은 흐름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혼란은, 제2차 대전 후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노동자계급을 포섭하기 위한 전략으로, 애초엔 미국의 지원 하에, 그리고 나중엔 ‘전후 대호황’의 힘으로 실시된 이른바 복지국가 체제에 노동자계급이 안주하면서 사민주의의 지배력 강화와 이른바 유로 코뮤니즘 등의 형태로 재발・발전했고, 흐루쇼프 정권 이래의 신수정주의의 발생과 발전, 그에 따른 중・쏘 이념분쟁 등을 거치면서 심화되어, 마침내는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의 해체・붕괴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세계체제 해체는, 특히 노동자계급 내부의 사상・이론적 혼란을 부추겨, 소위 좌익공산주의니, 뜨로츠키주의니 하는, 혁명적 수사(修辭)로 위장한 악질적 반공주의 조류들까지 득세하게끔 함으로써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후퇴와 무기력을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후퇴와 무기력의 한 반영이자 표현인 좌익 포퓰리즘, 즉 모칭 사회주의와 그 파산, 그리고 그 파산이 마치 과학적 사회주의의 파산인 것처럼 자본의 나팔수들이 덧씌우는 선전이 과학적 사회주의의 그러한 무기력으로부터의 회복을 심히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모칭 사회주의의 파산과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론적 혼란은 뭐니 뭐니 해도 붸네수엘라의 예에서 그 가장 극적인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플레이션의 악순환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고, 그리하여 극우 언론의 조롱거리로 되어 있지만, 붸네수엘라는 한때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깃발 하에 그 특수한 조건 때문에 좌익 포퓰리즘 정권으로서는 최상의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은 ‘21세기의 사회주의’라며 열광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차베스 정권의 여러 “사업들(missions)”의 성과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차베스 정권의 볼리바르 혁명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프로그램에 대한 관료층의 비협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부기구 외부에 일련의 ‘사업들’(missions)을 창출해냈다”는데, 이는 단지 ‘관료층’ 혹은 ‘관료주의’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혁명’의 문제 자체가 아닌가? 만일 지금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이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차베스나 볼리바르 혁명에 대한 찬양자들이 그러한 것처럼, 기존의 부르주아 국가를 그대로 존치시킨 채 그 권력만을 장악하고, 그것을 지렛대로 정부의 외부에 일련의 ‘사업들’을 창출하고 장려함으로써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별문제 아니라는 듯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 등의 국가관을, 따라서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는 소부르주아적 망상이 아니겠는가?27)

 

그리고 차베스 정권의 성과가 크게 붸네수엘라의 석유자원에 힘입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석유와 같은 어떤 특정한 부존자원이 혁명의 재원을 조달할 수 있게 하는 행운을 가진 나라의 수를 꼽자면 아마 열 손가락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극소수이며, 설령 볼리바르 혁명의 ‘성격’ 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21세기(형)의 (사회주의) 혁명 운운하고 일반화시킬 수는 결코 없…다”고 말한 후에, 다음과 같음 말로 글을 맺었다.

 

“21세기(형)의 혁명” ― 그것은, ‘20세기의 혁명’의 성공도 좌절도 다 거기에 달렸던 것처럼, 다름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의 원칙(―물론 교조주의적인 그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그것―)에 철저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28)

 

오늘날 붸네수엘라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 그 극심한 정치적・경제적 혼란은 당시의 전망이 과히 빗나간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제국주의의 집요한 봉쇄와 파괴・불안정화 정책에서, 그리고 특히 ‘2014년의 70% 하락을 포함한 2013년 이래의 석유 가격의 급락’29)에서 오늘날 붸네수엘라 사태의 원인을 찾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봉쇄와 파괴・불안정화 정책은, 유감스럽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대부분의 국가에서의 혁명이 감내・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상수적(常數的) 요인일 뿐이다. 그리고 급격한 유가하락은 사태를 격화시킨 요인이지, 사태 그 자체의 원인은 아니다. 그리하여, 실제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와 원칙에 따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지양한, 그리고 이행기의 정치형태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고수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그보다 더 가혹한 외적 조건도, 물론 고난 속에서이지만, 견디면서 발전한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고, 또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특히 유가 하락에 따른 이 격심한 혼란은, 차베스 정권의 성과가 석유자원이라는 특수한 조건에 힘입고 있다는 사실, 즉 그 특수성을 망각한 채 그 성과를 ‘21세기 사회주의’라고 일반화한 것이 얼마나 과학의 빈곤을 드러낸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좌익 포퓰리즘이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걸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중적으로 부정적 유산을 남기면서 이내 필연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지 좌파의 모칭 사회주의이지,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보장하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 모칭 사회주의는 객관적으로는, 그 예정된 필연적 파탄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대중의 엉뚱한 환멸을 조성할 뿐 아니라, 애초부터 노동자・인민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환상으로 오도, 제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의 언론・이데올로그들이 적대하고 조롱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와 필요에서, 그것을 경계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적 사회주의만이 노동자계급의 미래를 여는 것이다.

노사과연

 


 

1) John Bellamy Foster, “이것은 포퓰리즘이 아니다(This Is Not Populism)”, Monthly Review, Vol. 69, No. 2 (June 2017), p. 1.

 

2) “… 포퓰리즘은 … 정치가들이 있는 한, 계속 존재해 왔다. … 그러나 …” (Jon Henley, “포퓰리즘은 어떻게 유럽에서 선거세력으로 등장했는가(How populism emetged as an electoral force in Europe)”, <https://www.theguardian.com/world/ng-interactive/2018/nov/20/how-populism-emerged-as-electoral-force-in-europe>).

 

3) Karl Aiginger, “포퓰리즘: 근원, 귀추, 그리고 대응전략(Populism: Roots, consequences, and counter strategy)”, <http://voxeu.org/article/populism:-roots-consequences-and-counter-strategy>.

 

4) “스페인, 이딸리아, 그리스 같은 국가들에서는 포퓰리즘은 오로지 급진적인 우익 현상만은 아니다. 이는 아마 재정위기가 이들 국가들을 강타했다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다. 그들 국가들은 따라서 좌익 포퓰리스트적 메시지의 완전한 무대를 이루고 있다.”(Matthijs Rooduijn[암스텔담 대학, 정치사회학자], “왜 갑자기 포퓰리즘이 대유행하는가?[Why is populism suddenly all the rage?]”, <https://www.theguardian.com/world/political-science/2018/nov/20/why-is-populism-suddenly-so-sexy-the-reasons-are-many>).

 

5) J. B. Foster, 같은 글, p. 3.

6) 같은 글, p. 1.

7) 같은 글, p. 4.

8) 같은 글, pp. 1-2.

9) 같은 글, p. 2.

 

10)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은, 미 제국주의의 패권의 장기간에 걸친 위기의, 그리고 네오 파씨즘을 향한 미 제국주의의 궤도의 가장 심각한 단계를 나타낸다.”(마이클 조셉 롸베르토[Michael Joseph Roberto], “미국 파씨즘의 기원[The Origins of American Fascism]”, Monthly Review, Vol. 69, No. 2 [June 2017], p. 26.). 그러나 이 “장기간에 걸친 위기(protracted crisis)”는 당연히 단지 미 제국주의의 현상만은 아니다. 이 장기적인 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보편적 현상으로 되어 있고, 그리하여 “파씨즘은 독점금융자본주의 시대의 세계적인 현상(fascism as a global phenomenon in the epoch of monopoly-finance capitalism)”(같은 글, p. 27.)이 되어 있다.

 

11) 야코포 쿠스토디(Jacopo Custodi), “라틴 아메리카와 남부 유럽의 좌익 포퓰리즘 … (Left-wing populism in Latin America and Southern Europe: a new form of social patriotism or a left path to regional integration)”, <https://www.academia.edu/31058031/Left-wing_populism_in_Latin_America_and_Southern_Europe_a_new_form_of_social_patriotism_or_a_left_path_to_regional_integration>; 라사로스 카라봐실리스(Lazaros Karavasilis), “좌익 포퓰리즘은 아직도 타당한가?(Is Left-Wing Populism Still Relevant?), <http://new-pretender.com/2018/07/22/is-left-wing-populism-still-relevant/> 등등.

 

12) “좌익 포퓰리즘은 라틴 아메리카 정치의 한 가운데에 있어 왔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 그러했다. 게툴리오 봐르가스(Getulio Vargas)와 같은 지도자들에서부터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와 차베스(Hugo Chavez)라는 보다 최근의 예들까지, 남아메리카에서의 좌익 포퓰리즘의 전통은 유장하고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라사로스 카라봐실리스, 같은 글.)

 

13) 물론 2009년의 경제위기 이전에도 유럽에 좌익 포퓰리즘이 없진 않았다. 그리하여, “… 유럽 역시 2008년 이전에도 보다 유사한 정당들의 보다 소규모의 그 자신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의 사회당(Socialist Party)이나 독일의 좌익당(Die Linke)은 지난 수십 년간 유럽에서 좌익 포퓰리즘의 가장 두드러진 경우들의 일부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그리스의 PASOK은 … 포퓰리즘적 민주 정치의 또 다른 예다.” (라사로스 카라봐실리스, 같은 글.)

14) V. I. 레닌, ≪국가와 혁명≫, Lenin Collected Works, Vol. 25, Progress Publishers, p. 466.

 

15) 같은 곳.; Lenin Werke, Bd. 25, Dietz Verlag, S. 475.; Howard Waitzkin, “Revolution Now: Teachings from the Global South for Revolutionaries in the Global North”, Monthly Review, Vol 69, No. 6, Nov. 2017, p. 19.

 

16) 싼티아고 사발라(Santiago Zabala, 바르셀로나의 폼페우 퐈브롸 대학 철학교수), “좌・우익 포퓰리즘의 차이 … (The difference between right and left-wing populism)”, <https: www.alazeera.com/indepth/opinion/2017/01/difference-left-wing-populism-170112162814894.html>

 

17) 싼티아고 사발라, 같은 글.

 

18) K. 맑스, “프랑스의 내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4권, p. 61.; MEW, Bd, 17, S. 336.; ― “저의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을 확인하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저는 거기에서 프랑스 혁명의 다음 시도는, 이미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관료적・군사적 기구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때려 부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이 대륙에서의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전제조건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빠리의 영웅적 당동지들의 시도이기도 합니다.” (K. 맑스, “하노붜의 루드뷔히 쿠겔만에게”(런던, 1871년 4월 12일.), MEW, Bd. 33, S. 205.)

 

19) K. 맑스・F. 엥엘스, ≪공산당 선언≫,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p. 420.; MEW, Bd. 4, S. 481.

 

20) 그리스 시리자 정권의 실정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도, “좌익 포퓰리즘의 교훈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함께 사실상 ‘그래도 역시 좌익 포퓰리즘!’을 외치는 좌익 포퓰리스트는 그 교훈의 하나로 “단순한 네오케인즈주의를 넘어서 전진해야 한다(… has to … moving beyond mere neo-Keynesianism …)”(라사로스 카라봐실리스의 같은 글.)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좌익 포퓰리즘 정권에게는 사실상 재정적 수단이 유일한 수단임을, 혹은 유일한 수단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21) Howard Waitzkin, 같은 글, p. 18.

 

22) 물론 중남미에서의 일만이 결코 아니다. 박정희 일당이나 전두환 일당에 의한 군사 쿠데타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예컨대, 그 과중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수가 수십만 명인지 수백만 명인지도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 1965년 인도네시아 군사 쿠데타와 그 결과로서의 수하르토 정권 등장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상식으로 되어 있다.

 

23) Howard Waitzkin, 같은 글, p. 34 (후주 2).

 

24) 그리스의 이른바 급진좌파연합(SYRIZA) 정권은 집권 9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음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 ― “올[2015] 1월에 실시된 지난 총선 이후 일어났었던 것은, 당시 새로운 시리자(SYRIZA) 정부가 지난 5년 동안 존재해 왔던, 그 나라의 견딜 수 없는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거짓 희망과 기대에 기초한, 일반 대중의 첫 도취였다. 일반 대중들의 요구들 중 일부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일부 극심한 문제들이 완화될 것이라 기대되었다. / 인민들의 주요 요구들 중 하나는, 채권자들과 유럽연합 기구들의 그 나라 경제에 대한 엄격한 지배를 끝장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유럽연합과 국제통화기금의 경제적 통제와 요구들은 더욱 숨 막힐 듯 조여와, 연금과 임금 수준은 약속되었던 것처럼 회복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삭감이 시작되었고, 실업률은 전례 없는 높이에 이르렀다. / 누적된 분노가, 인민들이 지난 7월 정부가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NO를 소리 높이 외치며 채권자들이 제안한 새로운 협약을 거부하도록 이끌었다. / 국민투표 이후의 상황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정부는 인민들의 바람을 이행하고, 새로운 협약(각서)을 거부하는 대신에, 유럽연합 주요 열강들의 요구들에 완전히 굴복했고, 이전의 두 각서보다 훨씬 악화된 새로운 각서에 서명했다. / 그리스 인민들은 그들의 희망과 기대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고, 좌절감, 환멸을 느끼며, 혼란스럽게 되었다. 시리자는 인민들에게 그들의 좌파 정부가 상황을 변화시킬 거라고 약속하고 있었다. 불현듯 인민들은 좌파 정부조차도 변화를 불러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 절망감이라는 개념은, 높은 비율의 인민들을 선거 과정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주요 요인이었고, [7월의 국민투표에서 정부가 제시한 ‘합의안’이 부결됨으로써 의회를 해산하고 실시한 9월 20일에 실시한 총선의: 인용자] 선거 결과를 만든 주요 요인이었다. 다른 당들은 더 나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이, 총 투표수의 35%와 145명의 국회의원으로, 시리자에게 정부를 되돌려준 총선의 결과를 결정했다. 시리자는 간신히 10명의 의원을 당선시킨 독립그리스인(Independent Greeks)과 함께, 다시 연립정부가 될 것이다. / 불확실하고 혼란스런 분위기 속에서, 네오파씨즘의 황금새벽(Golden Down)은 7%를 득표하여, 이제 원내 세력 중 제3당이 될 것이다.” (스티브 마브란토니스[Steve Mavrantonis, 호주공산당], “두 악(惡) 중 차악(次惡), ─ 그리스 유권자들 분노, 환멸(The lesser of two evils ― Greek voters angry, disillusioned”, ≪정세와 노동≫ 제117호 (2015년 11월), pp. 76-77. [원문은, <http://www.cpa.org.au/guardian/2015/1704/17-the-lesser-of-two-evils.html>])

 

25) “이번 총선은 가까운 장래의 정치적 사태에, 의심할 여지없이 악영향을 미치게 될 우려스러운 사실을 입증하였다. 좌파 세력으로 가장하고 있는 시리자가, 대안은 없다고, 저들은 모두 똑같다고, 자본주의와 그것의 만행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인민들이 생각하게끔 함으로써, 진보적 변화를 위한 노동계급운동에 가장 큰 해악을 끼쳐 왔다는 사실[을].”(스티브 마브란토니스, 같은 글, p. 77.)

 

26) “지배 계급의 사상이 어느 시대에나 지배적인 사상이다. 즉, 사회의 지배적인 물질적 권력인 바의 계급이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신적 권력이다. 물질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계급은 그와 동시에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또한 정신적 생산을 위한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에 종속되어 있다. 지배적 사상이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표현, 사상의 형태로 표현된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실로 하나의 계급을 지배계급이게 하는 관계의 관념적 표현, 따라서 이 계급의 지배의 사상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아니다.”(≪독일 이데올로기[Deutsche Ideologie]≫, I. 포이어바흐(Feuerbach), MEW, Bd. 3, S. 46.)(강조는 맑스・엥엘스에 의함.)

 

27) 채만수,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 혁명 ― 그 배경과 경과, 성격, 그리고 전망”, ≪정세와 노동≫ 제15호, 2006년 7・8월, p. 41.

28) 같은 글, p. 42.

 

29) “There’s nothing socialist about Venezuela”, <www.plp.org/challenge/2019/4/20/theres-nothing-socialist-about-venezuela.html>.

 

 

채만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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