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헤겔과 맑스를 읽는 기묘한 방식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경우

 

홍승용 │ 현대사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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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동구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맑스주의에 가까웠던 진보적 지식인들 상당수는 알튀세르의 이론을 한 가지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대 불붙었던 맑스주의에 대한 폭넓은 관심이 신자유주의적 폭력과 포스트모던 유행어들의 홍수에 쓸려가는 동안, 알튀세르가 애용한 몇몇 개념들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면서 맑스주의를 고수하는 데에 효과적인 것이라고 여겨졌다. 맑스주의를 ‘정교화’하자는 원론적 주장에 반대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였다. ‘인식론적 단절’이나 ‘과잉결정’ 혹은 ‘이론적 실천’ 내지 ‘이론적 생산’이나 ‘징후독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그리고 ‘경제주의’나 ‘경험주의’에 대한 비판 등도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이에는 알튀세르의 뛰어난 수사법도 한몫 했다고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그의 논의에서 전제되는 난해하고 방대한 배경사상들을 감안할 때 그 이론적 타당성을 검증하기도 쉽지 않았을 듯하며, 이는 또한 실천적 효능에 대한 판단도 어렵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아직도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알튀세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식지 않고 있다. 그 열정으로부터 풍부한 이론적 실천적 성과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원한다. 알튀세르의 당대적 정치활동이나 그의 이론이 지닌 장점들을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헤겔과 맑스와 관련되는 그의 글에서 필자가 느끼는 의문을 몇 가지 제기하고자 한다.

 

 

2

 

맑스는 ≪자본론≫ 1권 2판 후기에서 헤겔 변증법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힌다. “변증법이 헤겔의 수중에서 신비화되기는 했지만, 변증법의 일반적 운동형태를 포괄적으로 또 알아볼 수 있게 서술한 최초의 사람은 헤겔이다. 헤겔에게는 변증법이 거꾸로 서 있다.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합리적인 알맹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바로 세워야 한다.”1) 여기서 그 ‘합리적인 알맹이’는 ‘신비한 껍질 속에 들어 있는’ 것이고 바로 세워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맑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헤겔의 것이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에 대해 맑스는 분명히 말한다. “변증법은 그 합리적인 형태에서는 부르주아지와 그 이론적 대변인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부정, 즉 그것의 불가피한 파멸을 인정하기 때문이며, 또 변증법은 역사적으로 전개되는 모든 형태들을 유동상태⋅운동상태에 있다고 여김으로써 그것들의 일시적 측면을 동시에 파악하기 때문이며, 또한 변증법은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자본1,19)

그런데 유물변증법을 다루는 긴 글에서 알튀세르는 헤겔 변증법 및 변증법 자체의 ‘합리적 핵심’에서 무엇이 남느냐는 질문에 대해2) 별다른 답을 내놓지 않으며, ‘폐기’, ‘포기’, ‘제거’, ‘절단’ 등의 간편한 논의방식으로 헤겔 변증법의 흔적들을 어떻게 해서든 지우려는 작업을 일관한다. 반면에 레닌은 1차대전의 와중에 헤겔의 ≪논리학≫을 읽고 변증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변증법이란 대립물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으며, 어떻게 동일한가(어떻게 동일하게 되는가)−그것들은 어떤 조건하에서 상호전화함으로써 동일하게 되는가−왜 인간의 오성은 이러한 대립물들을 죽은 경직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건적인, 동적인, 상호전화하는 것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관한 학설이다.”3) 레닌은 ‘개념들의 상호의존성, 예외 없이 모든 개념의 상호의존성’ 또는 ‘개념들의 상호이행. 예외 없이 모든 개념의 상호이행’(철학150)을 변증법의 본질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대립물들을 죽은 경직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조건적인, 동적인, 상호전화하는 것’으로 파악할 때, 알튀세르의 간편한 절단 논리는 변증법적 사유방식과 한참 거리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식 능력들 사이에 엄격한 칸막이를 치고, 대립물의 동일성 혹은 통일로 나가기보다 이율배반에 머무는 칸트의 사고방식과 손을 잡는 것 아닌가?4)

변증법과 거리가 있더라도 절단 논리가 대상 파악이나 실천에서 충분히 유용하다면 아무 상관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튀세르는 절단 논리로 어떤 성과를 거두는가? 일단 그는 ‘인식론적 절단’ 개념을 활용해 맑스의 이론을 1845년의 ‘절단기’를 전후로 ‘이데올로기적인’ 시기와 ‘과학적인’ 시기로 구분한다.(위하여68) 이로써 이데올로기라는 딱지가 붙게 되는 가장 중요한 저서는 휴머니즘적 서구 맑스주의자들의 애독서인 ≪경제학⋅철학초고≫다. 이 책에 대해 알튀세르는 이렇게 평가한다. “이 텍스트는 엄밀한 방식으로, 헤겔의 관념론의 포이어바흐의 유사-유물론으로의 엄밀한 의미에서의 ‘전도’를 수행하려 한다.”(위하여70) 알튀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청년 맑스가 헤겔주의자였다는 널리 퍼져 있는 테제는 따라서, 일반적으로, 신화이다. 반대로 맑스는 청년기에 단 한 번, 자신의 ‘과거의 철학적 의식’과의 단절의 전야에, 헤겔에 의거해 자신의 ‘착란된’ 의식을 청산하는 데 불가결한 경이로운 이론적 ‘해제반응’을 산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 맑스는 헤겔에 대해 줄곧 거리를 두어 왔다.”(위하여71)

역시 알튀세르의 수사법은 현란하다. 맑스는 헤겔주의자였던 적이 없었고 헤겔에 대해 줄곧 거리를 두어 왔는데, 갑자기 ‘헤겔에 의거해’ ‘착란된’ 의식을 ‘청산하는’ 데 불가결한 이론적 ‘해제반응’을 산출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그 내용은 알튀세르의 설명에 따르면 ‘엄밀한 방식으로’ 헤겔의 관념론을 포이어바흐의 ‘유사-유물론’으로 전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1년 뒤에 맑스는 ‘과거의 철학적 의식’과 ‘단절’을 행하여 역사유물론자이자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는 것이다. ≪경제학⋅철학초고≫에서 맑스가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적극 받아들이고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엄밀한 방식으로’ 따위의 멋있는 표현과 섞어 심오하게 서술할 줄 알아야 철학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수사법의 효과는 있다. 맑스와 헤겔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강렬한 인상을 유발하는 것이다. 또 ‘유사-유물론’이라는 개념으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 역시 버려야 할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경제학 철학 초고≫에 ‘과거의 철학적 의식’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헤겔에 의거해’라는 말로 헤겔의 영향을 슬그머니 인정하면서, 이를 ‘경이로운 이론적 해제반응’이라는 멋진 표현으로 다시 교묘하게 덮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헤겔 및 포이어바흐와의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 맑스가 과학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정말 그러한가?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도 버렸는가? 또 헤겔의 변증법도 버렸는가? 맑스는 유물론자이고 변증법이론가다. ≪경제학⋅철학초고≫에서 맑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존중하고 헤겔의 관념론을 그의 ‘무비판적 실증주의’와 함께 명확히 비판하지만, 인간을 근본적으로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또 “운동의 결과인 동시에 출발점이기도”5) 한 주체로서 파악하는 점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이미 다른 길을 택한다. 곧 이어 쓰인 ≪독일이데올로기≫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구태의연한 유물론’이라고 비판하기 전부터 맑스는 유물론을 변증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 후에도 맑스는 변증법적이고 유물론적인 사유방법을 버리지 않는다. 맑스의 이런 발전은 헤겔과 포이어바흐와의 단절이라기보다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종합적 지양이다. 즉 그들의 이론에서 비판하고 버릴 것은 버리되 합리적 핵심은 보존하여 한 단계 끌어올리면서 종합하는 것이다. ≪경제학⋅철학초고≫는 물론 맑스의 경제학 연구과정에서 출발단계에 속하고, 아직 노동과 노동력의 구분도 없으며, 사적 소유와 소외된 노동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명확한 설명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맑스는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 내지 양극화를 자본주의의 근본 경향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결과인 빈곤과 소외 내지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의 폐기와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가 불가피함을 명시하고 있다. 이 기본관점이 그 후에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맑스 이론의 단절보다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이지 않는가?

이런 상식을 깨고 단절논리를 끌어들여 ≪경제학⋅철학초고≫를 ‘이데올로기 시기’에 가둬두는 가운데 정작 단절이라는 말이 조금은 어울릴 근본적 전환, ‘세계사적 전제전환’은 알튀세르의 논의에서 별 의미 없어진다. 사적 소유 곧 자본주의를 불가침의 기본전제로 삼는 부르주아 경제학을 거부하고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역사적 산물일 뿐이며 따라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이야말로 ‘세계사적 전제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이미 ≪경제학⋅철학초고≫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6) 물론 이후에도 맑스는 스미스나 리카도 등의 부르주아 경제학 가운데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되 받아들일 부분은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지 청산과 단절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맑스의 세계사적 전제전환을 파묻고 ≪경제학⋅철학초고≫에 이데올로기라는 딱지를 붙여 골동품 취급하면서 알튀세르가 실제로 거두는 주요 효과는 헤겔 변증법의 폐기처분 아닌가?

 

 

3

 

알튀세르는 헤겔 변증법을 폐기하는 근거로 헤겔의 관념론 이상으로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유물론적 전도만으로, 즉 ‘거꾸로 선 것을 바로 세우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을 온전히 뒤엎는 이 단순한 회전은 이 대상의 본질도 내용도 변화시키지 못하리라”(위하여137-138)는 것이다. 유물론적 ‘전도’라는 비유를 이처럼 희화하면서 알튀세르는 맑스 변증법과 헤겔 변증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헤겔 변증법의 대안으로 ‘과잉결정’ 개념을 제시한다. “모순의 존재 조건들이 모순 자체의 내부에 반영된다는 것, 복잡한 전체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지배관계를 갖도록 절합된 구조가 각 모순의 내부에 반영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 변증법의 가장 심오한 특징이며, 내가 최근에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한 것이었다.”(위하여357) 모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모순은 일의적이기를 멈추면서, 단번에 영구히 그 역할과 본질이 결정되어 차려 자세로 머물러 있기를 멈추면서, 모순에 역할을 할당하는 구조화된 복잡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런 끔찍한 말을 사용해도 된다면, 복잡하게-구조적으로-불균등하게-결정되는 것으로 말이다.”(위하여363) 이 장황한 논의에서 실제로 새로운 점은 구조라는 개념이 첨가되었다는 것뿐 아닌가?

알튀세르는 자신의 논거를 무엇보다 마오의 주요 모순-부차 모순,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 측면 구별에서 끌어들인다. 그는 철학자답게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 모순의 주요 측면과 부차 측면, 모순의 불균등 발전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 확인에 머물지 않고, 그 복잡성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이 모순이 모습을 드러내는 복잡성이 하나의 구조화된 통일성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구조는 모순들 사이에서 표시되는 지배-종속 관계를 함축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위하여349) 그러면 한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한다는 사실, 즉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이 있다는 사실과, 모순이 나타나는 복잡성 곧 사회가 하나의 구조화된 통일성이라는 사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 구조가 모순들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를 함축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주장은 경험적 사실의 배후에는 구조가 있다는 단언일 뿐인데, 이러한 단언이 곧 사실 확인에서 이론적 근거를 산출하는 도약으로 변조된다. 이러한 단언과 도약을 통해 알튀세르는 마오의 사실 확인에 대한 ‘궁극적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마오가 본질적인 것으로 기술한 모순들 사이와 모순들의 측면들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관계에 궁극적으로 근거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특수한 구조이다.”(위하여351) 이로부터 알튀세르는 실천적 교훈을 끌어낸다. “지배관계를 갖는 구조는 불변하지만 그 속에서 역할들의 배역은 변화한다는 것이 실로 실천의 커다란 교훈이다. 즉, 주요 모순이 부차 모순으로 되고 부차 모순이 주요 모순의 자리를 취하며, 주요 측면이 부차 측면으로 되고 부차 측면이 주요 측면으로 되는 것이다. 항상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들이 있지만, 이것들은 지배관계를 갖도록 절합된 구조 속에서 역할을 교환하며, 반면 이 구조는 불변한다.”(위하여365)

그 ‘특수한 구조’, ‘지배관계를 갖는’ 불변적 구조는 단순한 작업가설이라고 볼 수 없다. 알튀세르가 지배를 ‘복잡성 자체에 본질적인 사실’이라고 자신 있게 단언하는 점에서 그렇다.(위하여349) 그러면 그것은 사실 확인들로부터 추상해낸 것인가, 아니면 어떤 선험적인 것인가. 후자라면 우리는 알튀세르의 관념론을 인정하고 그것을 동의하면 받아들이든지 그렇지 못하면 거부하면 된다. 유물론의 관점에서는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7) 그렇다면 ‘불변의’ 구조를 단언하는 데에 그칠 것이 아니라, 향후 전개될 사실의 변화를 따라잡으며, 즉 지배의 강도, 범위, 양태 등을 규명하며 이에 합당하게 그 ‘본질성’을 대우하는 것이 변증법적 사유에 부합될 것이다. 이 ‘본질성’은 사회구성체의 성격 및 변화 국면에 따라 모순들 사이의 압도적인 위계적 성격부터 동등성에 접근하는 상호규정성까지 다양한 편차를 드러낼 것이다. 이 경우 주요모순과 부차모순들의 가변적 세력관계를 면밀히 따져야 할 과제가 등장한다. 또한 그 ‘불변의’ 구조라는 ‘궁극적 근거’는 각 국면에서 여러 모순들 가운데 주요 모순을 식별할 필요성은 말해줄 수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식별하는 어려움을 해소해주지 못한다. 이러한 난점은 마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 아닌가?

과잉결정 개념의 모델인 마오의 모순론은 중국 정치현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우리 사회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사회적 모순들과 갈등들을 현실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평준화하고자 하는 편향에 맞서 전략적 사유를 고수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어느 사회, 어느 시점에서나 ‘하나의’ 주요모순이 ‘반드시’ 지도적 결정적 역할을 하고, 더구나 그것을 파악하면 모든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마오의 처방을 절대화할 수는 없다. 특정 모순을, 예컨대 계급모순 혹은 민족모순을 이 시점의 주요모순으로 파악하고, 또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운동의 역량을 집중한다고 해도, 그 밖의 다른 모순들, 예컨대 성소수자⋅장애인⋅이주노동자 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하는 억압과 차별, 페미니스트들이 문제로 삼는 모순들도 주요 모순의 해결과 함께 풀릴지는 미지수다. 뿐만 아니라 각각의 모순들로 고통 받는 당사자들은 자신이 직접 당면한 모순을 절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또 예컨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 모두 중대한 모순임을 인정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그 모순 가운데 특정 시점에서 어느 쪽이 주요모순이냐를 놓고 의견대립이 분출되고, 어느 한쪽이 권력관계에 근거해 다른 쪽의 견해를 오류라고 몰아붙일 때 역량의 집중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모순 개념은 그 전략적 효용과 함께 이데올로기적 남용의 가능성을 다분히 안고 있다. 변증법 이론은 주요모순 문제와 관련해 오늘의 현실을 감안해 마오의 논의를 한 걸음 더 밀고 가야 한다. 알튀세르는 이론 생산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필요한 이론 생산은 경험적 사실들을 추상하여 ‘궁극적 근거’나 원리처럼 내놓는 것이라기보다, 실천에서 당면하게 되는 난관들의 발전적 해결에 기여할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4

 

실천적 난관들의 해결에 기여하자는 주장에 대해 알튀세르는 아마 ‘경험론’이라는 딱지를 붙이려 들 것이다. 그는 경험론이라는 용어를 광의로 사용한다. 즉 그것은 ‘합리주의적 경험론과 감각주의적 경험론 모두’를 포함한다. 또 그는 이런 의미의 경험론이 헤겔의 사상 속에서도 작동한다고 본다.8) 그에 따르면 지식의 경험론적 과정 전체는 추상이라는 주체의 작용에 근거한다. “안다는 것은 실재적 대상으로부터 본질을 추상하는 것이며, 주체는 본질의 소유를 지식이라고 부른다.”(읽기43) “지식은 하나의 추상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지식을 함축하는 실재로부터 이루어지는 본질의 추출이며, 따라서 본질을 함축하고 감추어 놓은 실재로부터 본질을 분리시키는 것이다.”(읽기44) 알튀세르는 ‘지식에 대한 경험주의적 개념화’를 ‘종교적인 것의 세속적인 복사판’(읽기42)이라고 규정하며, 이러한 문제의식이 헤겔까지의 고전철학에서 핵심이었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엥겔스와 레닌, 심지어 맑스의 경우에도, 특히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 이 문제의식이 작동된다고 인정한다.(읽기47) 하지만 인식과정에 불가피한 추상과 경험론을 동일시하거나 경험론을 종교의 복사판으로 취급하려면 그럴듯한 증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알튀세르는 그것을 자명한 것처럼 다루면서 경험론에 부정적 색깔을 칠해놓을 뿐이지 않은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상론하는 문제는 실재 대상과 지식 대상의 구분이다. 이 구분을 위해 알튀세르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서설을 논거로 끌어들인다. 그에 따르면 맑스는 ‘실재적 대상’을 ‘지식의 대상’과 동일시하는 헤겔적 혼동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헤겔에게 역사에 관한 절대적 관념론의 형태를 취했던 이러한 혼동은 원리적으로는 경험론적 문제의식을 특징짓는 혼동의 한 변종에 불과하다. 맑스는 이러한 혼동에 반대하여 실재적 대상(‘전후를 총괄하여 머리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 구체 즉 현실적 총체성)과 지식의 대상의 구별을 옹호했는데, 지식의 대상은 사유의 생산물이고, 사유는 스스로가 사유의 구체로서, 사유적 총체로서, 지식의 대상을 생산한다.”(읽기50) 실재 대상과 지식 대상의 구별은 경험주의 비판에 머물지 않고, ‘이론적 실천’ 개념의 논거가 되기도 한다. 이 구별에 따라 알튀세르는 “이론적 실천에 고유한 지식의 생산은 전적으로 사유의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다”(읽기52)고 단언한다. 이에 따라 실천이라는 진리의 기준에도 근본적 변화가 생긴다. “왜냐하면 이론적 실천은 그 자체가 기준인 것이며, 그 자체 속에 그 생산물의 질을 유효하게 할 수 있는 분명한 의정서, 요컨대 과학적 실천의 생산물이 갖는 과학성이라는 기준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과학의 현실적 실천에 있어서도 사정은 동일하다; 만약 제과학이 진실되게 구성되고 발전한다면, 그것이 생산한 지식을 ‘진리’, 요컨대 지식이라고 선언하기 위해 외부적 제실천으로부터 검증받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읽기73-74)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서설에서 ‘현실적인 것’과 ‘사유의 산물’을 혼동하는 헤겔의 관념론을 비판했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현실적인 것’을 ‘실재적 대상’으로, ‘사유의 산물’을 ‘지식의 대상’이라고 슬쩍 바꿔놓는다. ‘지식의 대상’이라는 말을 그냥 ‘지식’이라고 하면 무슨 문제인가? 그처럼 ‘대상’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간단한 요술에 의거해 그가 도달한 종착점은 ‘외적 제실천으로부터 검증받아야 필요’가 없는 지식의 세계, 한마디로 비변증법적 관념론의 왕국 아닌가?

우리는 현실적인 것 예컨대 복잡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해, 다양한 통계자료, 개념, 명제, 직접적 경험 등을 활용해 사유함으로써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이 지식의 대상을 통계자료, 개념, 명제, 직접적 경험이 아니라 그것들이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외부의 현실적인 것, 즉 복잡한 자본주의 메커니즘이라고 본다. ≪자본론≫은 이 현실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체계적 지식, 곧 사유의 산물이다. ≪자본론≫의 서술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치밀하게 진행된다고 해도 그 대상인 자본주의 메커니즘과 동떨어져 있다면, 그래서 다양한 경로로 그 괴리가 확인된다면, 우리는 그만큼 그것의 인식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험주의적 추상에 대한 알튀세르의 경멸을 무시한 채, 효과적 지식 생산을 위해서는 본질과 현상의 구분이 불가피하다고 보되 양자의 관계를 단순화하기보다 긴밀한 상호작용에 주목하면서, 여러 층위의 본질들을 파헤치고 싶어 할 것이다. 또 “만약 본질이 현상과 다르지 않다면, 만약 내재적인 본질이 비본질적인 것 또는 현상적인 외부와 다르지 않다면 과학에 대한 요구가 없게 될 것”이라는 맑스의 테제를 ‘천진난만한 췌언’(읽기240)이라고 조롱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개념을 통한 추상이 실재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는 데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그것을 방해하는지 면밀하게 따지고, 방해하는 개념들이나 사유방법은 주저하지 않고 수정해야 한다고 볼 것이다.9)

알튀세르가 헤겔을 경험론적 이데올로기와 엮어서 함께 비난한 것은 탁월한 감각의 소산이라고 할 만하다. 헤겔의 관념변증법은 알튀세르의 유물변증법이 단순화하는 것과 달리, 실재 대상과의 부단한 대결과정을 통해 전개되며, 이 점에서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선 유물론’10)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경험론적’이기 때문이다. 맑스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한 ‘추상에서 구체로’ 올라가는 방법은 또한 헤겔 변증법의 한 가지 정수이기도 하다. 알튀세르는 맑스가 활용하는 이 방법 자체의 의의를 무효화한다. “≪자본론≫ 제1권으로부터 제3권으로의 이행은 사유 속의 추상으로부터 현실적 구체로의 이행과 무관하며,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사유의 추상으로부터 경험적인 구체로의 이행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1권으로부터 제3권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결코 추상을 떠나지 않았으며, 지식 즉 ‘사고와 인지의 생산물’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즉, 우리는 개념을 떠난 적이 없다.”(읽기241) 맑스가 헤겔 변증법에서 받아들이는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하는 방법은 현실적 경험적 구체로의 이행과 당연히 다르다. 알튀세르는 이 당연한 이야기를 강조하면서 추상을 외치는 가운데, 사유를 통해 재생산된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수많은 규정들의 총괄, 다양한 것들의 통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라는 인식, 또 그것이 ‘총괄과정, 결과로서 현상하지 출발점으로 현상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슬그머니 흐려놓고 있는 것이다. ≪자본론≫은 제1권 상품에 대한 추상적 서술부터 제3권 마지막 장 ‘계급들’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구체적 지식으로 발전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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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검토한 몇 가지 문제들 이외에도 ‘이론적 생산’이나 ‘역사주의’ 내지 ‘시간’의 문제 등과 관련해서도 알튀세르는 맑스의 이론에서 헤겔 변증법의 흔적을 지우는 가운데, 변증법적 사유방법의 주요 특성들을 무효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반-헤겔주의에 비하면 알튀세르는 아직 헤겔주의의 마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알튀세르의 경험론 비판은 들뢰즈의 손에서 한 차원 더 현실 문제로부터 멀어져 개념의 동일성에 근거하는 재현 자체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나아간다.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모순은 부정과 함께 들뢰즈의 차이형이상학에서 차이와 긍정의 그림자 내지 부차적 효과의 위치로 떨어진다. 들뢰즈는 오늘날 반-헤겔주의가 범람한다고 공지하면서, ‘현대적 사유’가 ‘재현의 파산’과 더불어 태어났다고 선언한다.11) 그에 따르면 재현적 사고에서는 동일성이 우위를 차지하는데, 동일성은 “차이와 반복이라는 보다 심층적인 유희에 의한 광학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차이19) 그는 차이와 반복 그 자체를 사유하고자 하며, 이는 “차이나는 것들을 같음으로 환원하고 부정적인 것들로 만들어버리는 재현의 형식들에서 벗어나야 가능”(차이19)하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의 반-헤겔주의적 반-재현 논의를 잠시 따라가보자. 그가 재현을 비난하는 이유는 재현이 “동일성의 형식에 머물기 때문이다.”(차이166) 그는 재현의 네 가지 요소들을 구분하면서 이 요소들이 동일성으로 귀착된다고 본다. “재현은 특정한 요소들에 의해 정의된다. 개념 안의 동일성, 개념의 규정 안에 있는 대립, 판단 안의 유비, 대상 안의 유사성 등이 그 요소들에 해당한다. 그 어떤 것이든 개념의 동일성은 재현 안에 있는 같음의 형식을 구성한다.”(차이307) 들뢰즈의 비판에 따르면, 이 동일성의 형식은 공통감 및 양식이라는 공준들에 의거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또 이 공준들은 재현 안의 같음과 유사성의 이미지를 통해 ‘사유를 압살’한다.(차이368) 재현의 요소인 개념들 내지 범주들은 “실재에 비해 너무 일반적이고 너무 크다. 그물은 너무 성겨서 대단히 큰 물고기도 빠져나가 버린다.”(차이165) 이 개념적 재현은 차이에 대한 사유를 왜곡한다. “동일성과 유사성은 다만 차이의 재현을 위한 조건일 뿐이고, 이 재현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차이의 존재와 차이의 사유가 변질되는 과정이다. 그 재현은 마치 어떤 광학적 효과처럼 즉자적 상태의 조건이 누리는 참된 지위의 시야를 흐려놓는다.”(차이270) “재현의 요구들에 종속되는 한에서 차이는 그 자체로 사유되지 않고, 또 사유될 수도 없다.”(차이553) 이 재현적 사유에 맞서 들뢰즈는 ‘우글거리는 차이들’, ‘자유롭고 야생적인 혹은 길들여지지 않은 차이들의 다원주의’(차이132)를 추구한다.

그에 따르면 재현적 사유의 뿌리는 깊다. 이미 플라톤주의도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지 않고, 차이를 어떤 근거에 관련짓고 같음의 사태에 종속시킨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 그것은 모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한다는 것이며 허상(시뮬라크르)과 반영들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차이162) “허상은 이 발산적 계열들 위에서 유희를 벌이지만, 여기서는 모든 유사성이 폐기되어 있다. 따라서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모상인지 가리킬 수 없다.”(차이167) 들뢰즈가 이처럼 허상을 찬양하는 이유는 “재현 이하의 영역의 실재성을 체험적으로 발견”(차이167)하자는 데에 있다. 재현 이하의 영역은 ‘원천적이고 강도적인 깊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안에는 어떤 것이 자유로운 차이들의 상태로 살아 우글거리고 있다.”(차이133) 반면에 “재현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긍정할 능력을 결코 획득하지 못한다.”(차이556)

들뢰즈의 논의를 들여다보면 개념의 동일성에 근거하는 재현의 문제점은 차이의 존재와 차이의 사유를 ‘변질’시키는 데에 있다. 그런데 들뢰즈는 차이를 같음의 사태에 종속시키는 플라톤주의를 전복하여 ‘모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부인하고 허상의 지배를 찬양’하고 싶어 한다. 사악한 악마 쪽인 개념에 의한 ‘사유의 변질’과 착한 천사 쪽인 ‘허상의 지배’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재현 이하 영역의 실재성을 체험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나쁜 개념적 재현’에 현혹되지 않고 제대로 된 실재에 다가가자는 것, 다시 말하면 실재에 대한 더욱 심오하고 면밀해진 ‘좋은 재현’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결국 들뢰즈 자신이 집요하게 기존의 재현적 사유방식을 비판하지만, 또 다른 재현적 사유방식을 제안하고 있을 뿐 아닌가? 개념의 동일성을 비판하면서 자신도 논의를 헛소리로 만들지 않고 진지하게 전개하기 위해서는 개념의 동일성에 일정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는 차이의 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활용하는 강도, 미분, 미분비, 미-분화, 개체화, 수축, 응시, 수동적 종합, 안주름운동, 밖주름운동, 겹주름운동, 막주름운동, 온주름운동, 봉투운동, 다양체, 헐벗은 반복, 옷 입은 반복 등등 무수한 개념들은 범주적 개념이 아니라 ‘기초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가 유행시키고 싶어 하는 새로운 개념들 아닌가?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을까? ‘이제까지의 철학은 차이를 제대로 재현하지 못했다. 내가 만드는 새로운 개념들을 끌어들여야 차이를 제대로, 심오하게 재현할 수 있다.’ 들뢰즈는 헤겔주의에서 변증법의 오래된 변질과 타락의 역사가 극단적 형식에 이른다고 주장한다.(차이361) 그런데 재현에 대한 들뢰즈의 끝없는 저주를 대하면 어쩐지 회의주의적 의식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떠올리게 된다. “그 의식에게 동일성이 제시되면 그것은 비동일성을 내보인다. 그리고 이제 그 의식에게 자신이 방금 발언한 이 비동일성을 제시하면, 그것은 동일성을 내보이는 쪽으로 넘어간다. 그것의 수다는 사실상 아집에 빠진 젊은이들의 언쟁이다.”12)

추상을 통해 얻어지는 개념의 동일성을 절대화함으로써 사태를 왜곡하고 대상의 생명을 죽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헤겔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헤겔은 개념과 동일성 혹은 추상을 버리고 어떤 새로운 인식 도구를 만들어내자고 하지 않는다. 그는 ‘우연적 속성들이나 술어들을 계속 따라다니는’ ‘표상적 사유’(현상학58)나, ‘내용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이자 내용을 넘어서는 허영’인 ‘논증적 사유’(현상학56)가 아니라, ‘개념의 노고’를 떠맡는 일이 과학에서 중요하다고 본다.(현상학56) ‘분리(Scheiden) 활동’ 곧 추상을 헤겔은 “가장 경탄할만하고 가장 위대한, 또는 오히려 절대적인 권능의 힘이자 노동”(현상학36)이라고 본다. 추상에 따르는 비현실성 내지 죽음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회피하고 황폐화과정으로부터 자신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뎌내고 죽음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정신은 절대적 분열상태 속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만 자신의 진리를 얻는다. 정신이 이러한 권능인 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서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거나 이것은 거짓이라고 말하고, 이제 그 일을 끝내고 그로부터 어떤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경우에 그렇듯이,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리는 긍정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거기에 머무름으로써만 그러한 권능이다.”(현상학36)

앞에서 재현에 대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뒤로는 재현을 끌어들이는 들뢰즈의 태도보다는 재현의 부정적 측면을 직시하자는 헤겔의 태도가 좀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맑스 역시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개념적 동일성에 의존하는 추상의 노고를 부단히 떠맡고, 필요하면 차이들을 무지막지하게 억눌러놓는 일도 감행하지 않았던가? 개념의 동일성에 대해 누구 못지않게 민감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인물로는 아도르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념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동일성 사유와 그 변형들인 ‘위상학적 사고’ 혹은 ‘행정적 사고’에 대한 비판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일관한다. 그래도 그는 사유한다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임을 인정한다. “동일성의 가상은 사유의 순수한 형식으로 인해 사유 자체에 내재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다.”13) 하지만 아도르노는 이러한 동일시에 따르는 폭력과 허위를 다시 개념을 통해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부정70-71) 일견 역설적이지만, 현실적인 이야기 아닌가? 이는 곧 ‘개념의 운동, 노동, 노고’라는 변증법의 핵심 문제 중 일부 아닌가?

 

 

6

 

들뢰즈와 변증법을 놓고 정색을 하고 논쟁하기는 어렵다. 알튀세르가 변증법을 과잉결정으로 압축해 버리듯이, 들뢰즈는 변증법을 ‘문제제기’와 동일시하는 데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차이391) 그의 차이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변증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모순과 대립의 문제를 동일성과 더불어 부차적인 효과의 영역으로 몰아낸다. 그에 따르면 차이는 대립을 가정하지 않으며, 모순으로 환원되거나 소급되지 않는다. “모순은 깊이가 얕고 차이만큼 깊지 않기 때문이다.”(차이134)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차이145) 모순을 비하하는 그의 차이형이상학이 부정을 경멸하고 긍정을 찬양하는 수사법은 다분히 선동적이다. “긍정은 차이, 거리를 긍정한다. 차이는 가벼운 것, 공기 같은 것, 긍정적인 것이다. 긍정한다는 것은 짐을 짊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짐을 던다는 것, 가볍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부정적인 것은 긍정의 환영, 대용품 같은 환영만을 산출한다.”(차이140) “부정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그림자에 불과하다. 부정은 이런 상위원리의 그림자, 이미 산출된 긍정 옆에 머물러 있는 차이의 그림자일 뿐이다.”(차이160)

이 차이의 교리를 우리의 자본주의 현실에 적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그것은 생산수단과 노동력 가운데 무엇을 소유하느냐 하는 차이에 근거하는 차별과 적대를 긍정하자는 말인가? 계급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짐을 짊어지지 말고 그 짐을 덜고 가볍게 하자는 이야기인가?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과 차별을 없는 것처럼 부인⋅은폐하거나 당연시하지 말고, 명확히 인식하여 극복하자는 기존의 짐스러운 비판과 부정의 운동윤리를 ‘긍정의 환영, 대용품 같은 환영’, ‘이미 산출된 긍정 옆에 머물러 있는 차이의 그림자’ 등으로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이 축복의 말씀에 젊은이들이 끌려들어간다고 해서 어떻게 욕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설혹 1%의 사람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고 99%의 개돼지 범주에 속할지라도, 노동계급 상층부에 대한 제국주의적 매수의 효과로 적당히 문화생활을 누리면서 살 만큼 산다면 말이다. 더구나 ‘차이의 긍정’이라는 선동구호는 노동운동이나 변혁운동에서 적극 존중받지 못해온 다양한 분야들의 억압과 차별에 맞선 운동들에 어쩐지 무대 앞쪽에 한 자리 만들어줄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실은 차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념의 광채 속에서 차별이라는 전투적 개념이 시야에서 멀어지지 않았는가? 우리는 어떤 차이가 차이에 머무는 한 긍정하고 존중하자는 데에 동의하지만, 문제는 이런저런 차이들이 억압적 지배관계 속에서 차별주의의 먹잇감으로 둔갑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차별을 긍정하라고 권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부정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차이 긍정’의 이념은 차별에 맞선 전쟁에서 ‘차별에 맞서자’ 혹은 ‘차별을 없애라’는 직접적 구호보다 무기력할 뿐 아니라 무책임해 보이지 않는가?

들뢰즈의 차이형이상학은 실천과 동떨어진 공리공론에 머물지 않는다. 세계의 근본적인 작동원리에 대한 심오한 해명보다 그 정치적 효과가 우리의 더 큰 관심사가 될 수 있다. ≪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직접 제시하는 정치적 개념은 “유목적 분배들, 왕관 쓴 무정부 상태들”(차이145) 정도다. 들뢰즈와 맑스를 묶어보려는 사람들은 그런 비유로부터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내지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연상하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들이 흔히 그랬듯이, 그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들뢰즈가 말하는 바는 별로 없다. 다음 주장이 그의 희귀한 실천론이다. “역사는 부정을 통해, 부정의 부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의 규정을 통해, 차이들의 긍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역사는 그 어떤 경우 못지않게 피비린내 나고 잔혹하다.”(차이564) 그러나 정말로 차이의 긍정 때문에 역사가 피비린내 나고 잔혹하다고 보아야 할까? 오히려 우리는 피지배자들에 대한 지배자들의 차별 때문에, 이를 유지하려는 지배자들의 교활함과 집요함과 잔인성 때문에, 이에 맞서는 부정과 저항에 대한 지배자들의 무차별 폭력 때문에, 한 마디로 사회적 모순과 적대관계 때문에 역사는 피로 얼룩져왔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들뢰즈가 맑스에 대해 언급하는 다음 구절에서는 차이형이상학이 어떤 식으로 맑스의 이론을 왜곡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다. “차이와 분화의 과정은 언제나 부정적인 것과 대립의 과정에 비해 일차적이다. 맑스와 헤겔의 근본적인 차이를 주장하는 주석가들이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강조하는 것처럼, ≪자본론≫ 안에서 사회적 다양체의 중심부에 있는 분화의 범주(노동 분업)는 대립, 모순, 소외 등과 같은 헤겔의 개념들을 대체하고 있다−이 개념들이 형성하는 것은 단지 어떤 외양의 운동에 불과하고, 이 개념들의 가치는 오로지 추상적인 효과들에 대해 타당하지만, 이 효과들은 이미 자신을 생산하는 원리나 진정한 운동과는 분리되어 있다.”(차이447)

≪자본론≫을 어떻게 읽으면 노동 분업이 대립과 모순 혹은 소외와 같은 헤겔의 개념을 대체하고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자본론≫이 상세하게 말해주는 것처럼, 시초 축적 단계에서부터 ≪자본론≫이 탄생하던 시대까지 자본은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적 수탈과 착취, 곧 적대관계로 일관했다. 그것은 ‘외양의 운동’이나 ‘추상적 효과들’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 적대와 분리된 ‘진정한 운동’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 문제는 특히 ≪자본론≫ 1권 10장 ‘노동일’ 이후 오해의 여지없이 명확하게 ≪자본론≫을 관통한다. 이후 맑스는 잉여가치의 원천을 밝히는 과정에서 보이는 과학성의 외관에 연연하지 않고 종종 욕설까지 구사하면서 자본 및 그 이데올로그들과 한 치의 양보 없이 격전을 벌인다. 부르주아들 자신의 기록문서들에 근거해 맑스가 적시하는 무수한 폭력적 착취 사례들은 자본에 대한 어떤 환상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도면밀한 공부벌레인 들뢰즈로 하여금 모순과 적대, 대립과 소외가 ≪자본론≫에서 ‘외양의 운동’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게 만든 지적 풍토는 그 자체로 연구거리 아닐까?

맑스는 노동착취의 잔혹사를 상세히 추적할 뿐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적대관계를 수차례 명쾌하게 정식화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을 추진하는 동기, 그리고 그것을 규정하는 목적은 자본을 가능한 최대한도로 증식시키는 것,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최대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이다. 협업하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자본의 지배에 대한 그들의 반항도 증대하며, 또한 이 반항을 억누르기 위한 자본의 압력도 필연적으로 증대한다. 자본가에 의한 통제는, 사회적 노동과정의 성질에서 유래하는 하나의 특수기능일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사회적 노동과정을 착취하는 기능이며, 따라서 착취자와 그의 착취대상 사이의 불가피한 적대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자본1,450-451) 이 적대관계는 자본주의가 타락하거나 과도하게 발달한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자본1,1041)

계급관계로 인한 사회적 적대를 명시하려는 맑스의 입장은 ≪자본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혁명사를 서술하면서도 맑스와 엥겔스는 계급간의 모순을 은폐하고 무마하려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운동노선들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들은 독일농민전쟁과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 독일 3월 혁명에서 혁명을 배반하는 소시민 내지 중간층의 행태를 각별히 혐오한다.14) 맑스는 기본적으로 적대를 의식하고 드러내며 이를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적대의 논리를 구사한다. 모순과 적대를 ‘차이와 분화’로 바꿔놓는 것은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을 무장해제하는 것 아닌가? 변증법에 대한 들뢰즈의 비하는 “모순은 프롤레타리아의 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부르주아가 자신을 방어하고 보존하는 방식”(차이565)이라는 저주의 주술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들끓고 있는 현실적 모순과 적대를 차이형이상학의 심연 속에 묻어버리려 드는 들뢰즈의 반-재현론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데에 쓰일 효과적 무기 아니겠는가?

 

 

7

 

들뢰즈의 차이형이상학이 자본주의 체제옹호론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물론 우리 자신이 그 심연 속에서 무작정 지적 유희에 빠져있을 때뿐이다. 또 들뢰즈가 변증법을 단순화하고 헤겔과 맑스를 자신의 형이상학에 맞춰 기묘하게 재구성한다고 해서 들뢰즈의 철학이 아무 쓸모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존 철학의 근본 전제들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주체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구사하고자 하는 그의 자세는 존중할 만하다. 그가 우리의 게으른 사유방식에 다양한 어휘로 유쾌한 혹은 불쾌한 자극을 가해준다는 것도 생산적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론이든, 그것이 헤겔의 것이든 맑스의 것이든 혹은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것이든, 현실에 비추어 평가하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는 일은 개돼지이기를 거부하는 독자의 기본 의무 아닌가? 들뢰즈 애독자들도 공통감과 양식에만 의존하지 않고 악의적으로도 들뢰즈의 텍스트 한 구절 한 구절을 면밀히 읽고 따져서 그 긍정적 효과만 아니라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열성적으로 논쟁하는 풍토를 기대하면 왜 안 되겠는가? 그런데 그 부정적 효과 중 한 가지는 맑스와 헤겔을 읽지 않는 풍토를 만든 것 아닐까? 먼저 맑스와 헤겔을 충실히 읽고 나서 들뢰즈나 알튀세르를 읽는다면, 그들도 변혁을 위해 좀 더 좋은 자극제가 되지 않을까? 

노사과연

 

 


 

1)  K. 마르크스: ≪자본론: 정치경제학비판≫ 1, 김수행 역, 비봉출판사 2015, 19쪽. 이하 ‘자본1’로 약칭함.

 

2)  L.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관모 역, 후마니타스 2017, 281쪽. 이하 ‘위하여’로 약칭함.

 

3)  V. I. 레닌, ≪철학노트≫, 홍영두 역, 논장 1989, 54쪽. 이하 ‘철학’으로 약칭함.

 

4)  이런 이유에서 그는 맑스를 헤겔과 분리하고 칸트와 결합하려는 델라 볼페와 콜레티를 중요시한다. 다만 이들이 절단기를 ≪경제학⋅철학초고≫(1844) 이전인 1843년에 설정하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위하여75)

 

5)  K. 맑스: ≪경제학⋅철학초고≫, 김문현 역, 동서문화사 2014, 97쪽.

 

6)  1844부터 맑스가 엥겔스와 함께 쓴 ≪신성가족≫에는 다음과 대목이 나온다. “국민 경제학의 모든 설명 전개는 사적 소유를 전제로 삼고 있다. 국민 경제학에게 이 기본 전제는 더 이상의 어떤 시험에도 들게 할 수 없는 불가침의 사실, 더욱이 세이가 소박하게 고백한 바와 같이 국민 경제학이 다만 ‘우연적으로’만 언급하게 되는 그러한 사실로 여겨진다. 그런데 프루동은 국민 경제학의 토대인 사적 소유를 비판적 시험, 그것도 결정적이며 무자비한 동시에 과학적인 최초의 시험에 들게 한다. 이것이 그가 이룩한 거대한 과학적 진보요, 국민 경제학에 혁명을 일으키고 국민 경제학을 하나의 진정한 과학으로 만드는 진보이다.” K. 맑스/ F. 엥겔스, ≪신성가족≫,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1, 최인호 외 역, 박종철출판사 1994, 97-98쪽.

 

7)  이 경우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맑스와 엥겔스의 비판을 떠올리게 된다. “우선 한 가지 사실로부터 하나의 추상이 만들어진다. 그러고 나서 이 사실이 바로 이 추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렇듯 가장 널리 유포된 저질의 방식이 독일식의 심오하고 사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사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다. 반성: 자연, 쥐−자연, 고양이에 의한 쥐의 소모 = 자연에 의한 자연의 소모 = 자연의 자기 소모. 사실의 철학적 서술: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먹힌다는 것은 자연의 자기소모에 기초를 두고 있다.” K. 맑스/ F.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김대웅 역, 두레 2015, 243-244쪽.

 

8)  L.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 김진엽 역, 도서출판두레 1991, 42쪽. 이하 ‘읽기’로 약칭함.

 

9)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개념적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를 통해 개념적 질서를 수정하는 기술을 수행하는 사유”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Th.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 19쪽.

 

10) F. 엥겔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양재혁 역, 돌베게 2015, 56쪽.

 

11)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18-19쪽 참조. 이하 ‘차이’로 약칭함.

 

12) G. W. 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nkfurt/M. 1970, 162쪽. 이하 ‘현상학’으로 약칭함.

 

13) 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홍승용 역, 한길사 1999, 57쪽. 이하 ‘부정’으로 약칭함.

 

14) K. 맑스: ≪프랑스혁명사 3부작≫, 임지현/ 이종훈 역, 소나무 1990, F. 엥겔스: ≪엥겔스의 독일 혁명사 연구≫, 박홍진 역, 아침 19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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