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권두시] 10월, 대구 대항쟁

 

고희림(편집위원)

 

 

 

부황 든 식민지

 

일본의 친구가 된 맥아더는

미군이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진주하기 하루 전 9월 7일, 일본에 앉아서

포고령 1호를 발동했다

 

“조선은 미국 거다” “일본 거였던 거도 다 미국 거다” “말도 영어로 해라”

가 요지다

 

놈팽이, 깡패, 강도의 앞잡이 맥아더

조선을 점령하고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다

동양척식회사를 이름만 바꿔서 신한공사로

일본인 소유 재산이었던, 국가 전 자산의 80%를 미국이 삼켜

미군 체류비로 사용했다

45년 8월에서 12월 사이에 물가는 70배로 뛰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기아임금의 1/3로 떨어졌다

실업자는 홍수사태

나이어린 소녀는 장시간 노동과 굶주림으로 처참했다

 

이 땅의 지배자가 된 미군정은 그 흔한 ‘경제개발계획’도 없었다

식민지 점령 지배에만 오직 관심 가질 뿐

기껏 한다는 게 46년 1월 25일자로 ‘미곡 수집령’을 발표

농민의 식량을 일제하 경찰, 공무원 출신들을 동원해 강제공출 했다

 

친일경찰이 ‘탈취대’를 구성, 마을을 뒤지러 가서는

남정네들을 양 쪽으로 세워놓고 식량 숨긴 곳 불 때까지 뺨때리기를 했다

아재와 조카가 마주보고…

유가사회의 전통을 지닌 조선에서 천인공노할!

이런 일을 자행한 영천시장을, 10월항쟁 군중들이 때려죽여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강제 공출된 쌀은 도시에서 공정하게 분배될 리 없었다

친일파들이 갈라먹고

미군정은 분배도 늑장을 부렸다

 

한국여론협회의 46년 8월 여론조사

“미군이 잘한 것 없다”는 항에 98%가 체크를 했다

 

택도 없는 자유식량정책에서 강제공출로 정책은 오락가락

친일지주들이 쌀을 숨겨

쌀값은 40배로 폭등한다

 

서울에서는, 46년 3월 28일 소년ㆍ소녀노동자를 포함하여 수백의 노동자들이 시청으로 몰려가

“일을 하려 하니 배고파 못하겠소. 쌀을 주오!” 절규한다

미군정의 엉터리 식량정책으로 전국은 굶주렸으며 기아시위가 계속되었다

 

대구에서는 3월 11일 10시

남루한 옷차림에 부황 든 얼굴을 한 남녀 수백 명이 빈 쌀자루를 들고 도청 앞에 몰려들었다

“배급을 주소” “쌀을 주소” “우리는 사흘 동안 굶었소”

46년 4월 1일에도 대구역 뒤편, 칠성정(동) 5구 4반 빈민들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의 지원 아래 기아시위를 벌였다

7월 1일 아침 기아시위는 절박한 것이었다

콜레라로 교통이 차단되자 군중들은

“길을 틔워라!”는 구호를 외쳤다

 

 

신전술

 

노동자ㆍ농민, 민중이 정치세력화한 조선공산당, 남로당

미군정과 협력하여 인민정부로 평화적 이행을 지향했다

하지만 미국은 처음부터 이를 탄압하고 배제했다

군정이 좌우합작을 추진해 사실상 조선공산당을 제외하더니

정판사위폐조작사건을 통해 대탄압을 가했다

미군정과의 평화는 이제 깨졌다

 

박헌영과 남로당은 신전술을 제시한다

전면전은 아니고 제한적으로 압박하는 전술이었다

 

마침내 노동자들의 9월 총파업

7천여 명의 부산 철도 노동자들의 9월 23일 0시 파업을 선두로 4만여 명의 철도노동자로부터 시작된 파업

전평 산하의 금속, 화학, 섬유 등 남한 일대로 번졌고

학생들의 동정파업

미군 병사들조차 ‘조선에서부터 미군 철퇴하라!’고 요구

 

이는 ‘마른 섶에 불을 던지는 격’이었다

 

 

10월 항쟁 전야

 

45년 12월 10일

대구에서는 ‘조선노동조합대구지방평의회’(노평) 결성

메이데이 행사 때는 노동자, 시민 25,000명이 모였다

그만큼 조직이 튼튼했다

남로당 중앙에서 총파업 지시가 있자 대구 노동계는 술렁였다

9월 총파업은 9월 23일 대구철도기관구 노조원 1,000여명의 파업으로 시작한다

27일에는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가 대구노평 위원장 윤장혁을 책임자로 선임한다

우편국, 직물섬유업체, 신문사 및 인쇄소 등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10월 1일

오전 10시에는 남전이 파업에 돌입한다

정오 경, 부녀자들 1,000여명 대구부청에 몰려들어 쌀을 달라고 외친다

1시경에는 대구역전에 동맹파업단이 집합하여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을

역전 앞 노평본부에 게시한다

처음에는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가 점점 늘어 노동자 시민 15,000명이 집결

무장경찰과 대치한다

오후 5시, 역전광장 대구시투쟁위 주최로 전매국노조쟁의 지원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손기채ㆍ최문식ㆍ이선장ㆍ황태성ㆍ윤장혁 등 대구좌익의 지도자들이 선동연설을 계속했다

 

오후 6시경에는 역전에서 운수경찰관과 운수노조간에 충돌이 발생한다

경찰과 군중이 대구역과 노평사무실 앞에서 팽팽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오후 7시경 경찰이 발포

대팔연탄의 황말용, 철도노동자 김종태가 사망한다

경찰은 사방에 총을 갈겼다

 

1946년

차라리 ‘왜정 때보다 모하다’(못하다)라는 것이 일반적 평가

인민정부는 좌절되고

토지개혁도 되지 않았다

일본 놈이 버리고 간 재산은 모두 군정이 뺏아갔다

다시 조선인 순사와 면서기가 설치고

아래로부터의 모든 시도는 탄압을 받았다

 

‘이게 해방이가?’

열불이 나서 잠을 못 이뤘다

그래도 좋아지겠지, 참아보자,

그렇게 하루하루를 달랬다

 

‘대팔연탄에 말요이(말용)총각이 총 맞아 죽었다’

이 충격적 사실은 20만 인구 대구의 온 동네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분노는 정의가 되었다

 

그날 밤 학교와 공장에서는 밤새 횃불을 켜고

내일 보자며 울분을 삭였다

 

대구의전에서는,

황태성, 손기채 등 대구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대구의전, 대구상업, 대구사범, 대구고보 등등 학생 프락치를 소집했다

‘노동자를 구할 사람은 학생밖에 없다’

학생 대표들은 대구의전에서 밤을 새우며 노동자 시신 두 구를 지키고 있었다

황말용과 철도에서 일하는 김종태!

그야말로, 그날 밤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앞두고 있었다

 

 

대항쟁의 개시, 대구경찰서 해방

 

150여명의 대구의전생들이 시신을 앞에 두고 최무학의 선동연설을 듣는다

“여러분, 인민이 굶어죽었다. 우리들이 나서야 할 때다”

학생들이 시신을 들것에 받쳤다

대구사범대학, 대구농대가 합류했다. 각 학교에서는 대학생 선동대원들이 목청을 높이며 시위 합류를 선동했다

농대생 가운데는 집안이 부유한데도 좌익행동파로 활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해방기 조선청년 사이에는 가정환경에 관계없이 좌익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대구상업, 대구농림, 대륜중학, 경북중학, 대구고녀, 신명고녀 등의 학생들이 합류,

대구경찰서로 행진한다

오전 10시경 수천 명의 학생들이 대구서를 포위하고 경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권영석 경찰청장과 미국인 경찰청장 프레이져의 연설이 있었지만 시위군중 해산에 실패한다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시위군중과 경찰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이때

친일경찰이 아닌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의 소개로 경찰이 된 신재석 경위는 경찰복을 벗고 모자를 벗어 던지며 총기를 집어던진다

그리고는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했다

군중들은 투항연설을 한 신재석 경위를 헹가래 쳤다

이에 사기가 오른 학생대표와 장적우ㆍ이상훈ㆍ손기채ㆍ이선장 등 공산당 간부들, 최문식ㆍ이재복ㆍ이응수 등 인민당 간부들은 경찰을 어르고 달래며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성옥 서장은 무기를 무기고에 넣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그리고 대구역전의 특경대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하지만 이미 발포가 있은 뒤였다

이때 학생과 좌익청년들이 경찰서 안으로 진입해 유치장을 부수고 정치범을 석방시킨다

무기고를 접수하여 무기를 나눈다

경찰은 혼비백산하여 뺑소니친다

대구역전 근처의 경관뿐 아니라 도심지 파출소 경관들도 모두 도망갔다

 

 

학살

 

한편, 10월 2일 오전 8시에는 이미 전날 노동자 사망에 항의해 수천 명의 군중이 역전에 집합하여 무장경찰관과 살기등등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고함소리가 전날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야, 이 살인자들아!” “왜놈의 앞잡이들이 다시 애국시민을 죽이느냐?”

9ㆍ9식 장총으로 무장한 경찰관들이 무력진압 할 기세였다

그 지휘자는 경찰청 특별경비대 대장이었던 악랄한 이강학이었다

이강학은 3.15부정선거 때 치안국장을 했고 부정선거 책임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11시쯤 경찰은 총격을 가했다

17명의 파업노동자가 사살되었다

 

 

범시민적 확산

 

학생들의 시위는 전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중앙통, 동성로 등 시내 일원의 영화관, 음식점, 상가와 관공서, 회사들이 오후 들어 대부분 철시를 단행하여 학생들의 연합시위를 지지했다

신발, 막걸리로 학생들을 격려했다

도청의 중하급 관리들마저 노골적으로 태업을 했다

2-3시경, 경북도청의 부장급 이상 조선인 고위간부들이 총사직론을 제기했다

대구의사회는 경찰이 시민들에게 발포를 중지하지 않으면 부상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하겠다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실제로도 치료를 거부한 병원이 적지 않았다

 

 

진압과 폭력시위

 

오후 3시쯤 4대의 미군 장갑차가 대구서로 진입했다

군중들은 침묵했다

미군과는 애초에 싸울 계획이 없었던, 주로 좌익으로 구성된 지도부는 신전술 방침대로

해산하여 시내의 다른 분단에 합류했다

시내는 노동자 청년 빈민 등 항쟁인민들로 붐볐다

친일경찰에 대한 사무친 보복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를 과장하여 경찰은 이 시위를 폭동으로 몰아갔다

 

 

해방공동체

 

하지만 항쟁인민은 곧 해방인민이었다

항쟁인민의 습격의 주 대상은 ‘진골목’이었다

군중들은 맨 먼저 반공청년단장이었던 이원만을 찾았다, 그러나 실패한다

이제 우익들과 한민당 간부들이 많이 사는 진골목은 항쟁인민들의 주 공격대상이었다

여기에서 압수한 가재도구와 쌀을 달성공원에 모아놓고 서구 쪽 빈민들에게 갈라주었다

항쟁은 이미 해방공동체였다

시위대는 분별을 잊지 않았다

초대 대구부윤 이경희의 집에 시위대들이 들이닥쳤다

애초에 시위대는 벼르고 왔으나 양심적인 관리였던 이경희의 적빈한 삶을 보고는

시위대는 그냥 돌아갔다

시위대는 석순경(경찰) 집에 들이닥쳤다 그의 청렴한 삶을 보고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쌀을 얼마쯤 갖다주고 시위대는 사라졌다

해방 후에 공채된 경찰들 중에는 착실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의균 경북도지사 관사에 들이닥친 시위대는 값나가는 것을 모두 쓸어서 달성공원으로 가져갔다

 

한편, 10월 2일 현풍에서는 현풍민청이 이끄는 3-4천명의 군중이 경찰지서를 습격한다

이들은 친일경찰에 대해 보복도 불사한다

이들은 3일간 현풍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자치단체를 구성하여 해방구를 만들었다

칠곡 약목도 흥분의 도가니

시위군중은 친일경찰에 뒤늦은 보복을 감행했다

 

 

계엄포고와 항쟁의 확산

 

마침내 오후 5시 계엄 선포

계엄사령관 포츠 대좌의 포고 요지, 통금을 실시하고 ‘10명 이상의 집회와 회의를 금한다’

하지만 시위대는 더욱 격앙한다

이제 시위대는 트럭에 나눠타고 경북 일원으로 항쟁을 확대한다,

그렇게 2일 밤은 저문다

그러나 3일 이후

더 큰 항쟁, 농민의 항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영천, 선산 등 경북 일원으로 확대되고 경상남도로 번진다,

충청도, 경기도, 전라도, 개성까지

전국 50여개 군의 농민항쟁으로 불꽃은 확산된다

갑오농민항쟁과 3.1운동과 함께 3대 민중항쟁으로 기록된다

 

미군정 아래 최초의 항쟁!

외세를 반대하고 민족자주를 주장한 항쟁

사회주의가 주도한 민주주의 항쟁!

 

그 항쟁의 불꽃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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