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맑스주의는 어떻게 실증주의로 타락하는가?―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재비판

신재길 | 교육위원장

 

 

[차례]

1. 논쟁의 기본에 대하여

2. 비판문*에서 드러난 맑스주의의 왜곡

   1) 비판문은 어떻게 철학의 근본문제를 마하주의로 만들었나?

   2) 비판문은 어떻게 실증주의로 귀결되었나?

3. 비판문의 기계론적 사고방식

   1) 본질과 현상을 분리하여 실체화시키는 사고방식

   2) 용어물신주의

   3)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대립시키는 사고

4.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하여

 

 

* 문영찬, 맑스주의 철학의 수정과 부르주아적 속류화, ≪정세와 노동≫ 제149호(2019년 3월)를, 이하 비판문으로 표기하겠다. 지난번 내 견해를 비판한 문영찬 위원장의 글에 대한 재비판에서 문영찬 위원장이라는 호칭을 썼다. 이 때문에 견해나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보다 개인에 대한 비판의 의미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번에는 보다 객관적으로 비판문이라 칭하기로 한다. 문 위원장 개인보다는 비판문에 나타나는 사고방식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1. 논쟁의 기본에 대하여

 

의견이 다른 상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견해와 다른 점은 무엇인지 또는 같은 점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며, 같은 견해는 옹호하고 다른 부분은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판문은 내가 제출한 견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이 비판에 나서고 있다. 단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신재길 동지의 방법은 하나의 비유를 그대로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관계가 왜 3층 구조로 나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착상을, 직관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비유 자체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것이 하나의 가설의 수준으로 발전해야 하는데 신재길 동지는 그러한 수준에 전혀 다가서지 못하고 자신의 하나의 착상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한 것이다. 신재길 동지는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의 개념들의 적용이기 때문에 그러한 적용이 과학적일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자연 과학의 개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사회의 영역에 적용할 때는 사회적 근거를 갖추어야 한다.1)

 

이 글을 보면, 내가 비유 자체를 과학으로 둔갑시킨 것처럼 보인다. 또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나누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한 것 같다.

 

먼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나눈 것이 어떤 근거도 없다는 주장에 대해 나의 이전 논문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하겠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개념은 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분해할 성질의 개념이 아니다. 이는 인간 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분화되어 독자적 영역을 이룬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독립하여 사회를 처음 이루기 시작할 시기에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가 분해되지 않고 생존 활동 자체가 경제고 정치며 이데올로기 활동이었다. 그러다가 계급이 생겨나고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지배 계급이 나타나면서 정치 영역과 이데올로기 영역이 경제 영역에서 분리되기 시작하고, 근대에 이르러서 정교분리 원칙에 의해 이데올로기 영역마저 정치 영역과 분리되게 되었다. 각 영역이 분리되지 않았을 때에는 각 영역의 관계 문제는 제기조차 되지 않았지만 분리되게 되자, 각 영역 간의 관계가 문제시되었고, 맑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경제 영역이 정치, 이데올로기 영역을 규정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건물의 토대 상부구조에 비유한 것이다.2)

 

위 내용과 자신의 의견이 다르면 다시 비판하고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면 되지, 나름대로 근거를 제시한 것은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태도이다.

 

다음은 내가 비유를 과학이라고 주장했다는 내용이다. 다음을 보자.

 

경제가 정치를 규정한다는 측면을 토대-상부구조의 비유로 설명했듯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을 물리학, 화학, 생물학의 비유로 설명하고자 한 것이 나의 의도이다. 물리 법칙에 토대해서 화학이 성립되고 물리와 화학 법칙에 토대해서 생물 법칙이 성립할 수 있다는 점이 토대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내용이 된다. 그러나 물리 법칙에 토대하지만 화학의 독자적 법칙이 존재하고 생물학도 독자적 법칙이 존재하며 이를 물리 법칙이나 화학 법칙으로 환원할 수 없다. 이 점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에 비견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를 건물의 토대 상부구조에 대한 비유와 더불어 물리학, 화학, 생물학에 대한 비유를 보충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고 포괄적 설명이라고 생각한다.3)

 

인용한 나의 글에서 보듯이, 나는 (맑스가 토대-상부구조라는 건축학적 비유로 설명한 것에 더하여) 자연 과학의 위계적 질서(물리학-화학-생물학)의 비유로 사회 과학을 설명했다. 인식의 명료화를 도모하고자 할 뿐이지 비유 자체를 과학적 근거로 제시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이해도 없이 엉뚱하게도 비유가설의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느니 과학적 근거가 못 된다느니 하는 비판을 한다면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비판문의 문제는 내 견해를 이해 못 하고 곡해한 것에 있지 않다. 이 정도라면 굳이 나는 이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스스로를 철저한 맑스주의자라고 하면서도 정작 비판문에서는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맑스주의를 실증주의로 왜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2. 비판문에 드러난 맑스주의의 왜곡

 

1) 비판문은 어떻게 철학의 근본문제를 마하주의로 만들었나?

먼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이라는 문제부터 살펴보자.

 

비판문에서, 내가 철학의 근본문제를 셋으로 나누어 철학의 근본문제의 통일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통일동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식론, 존재론, 방법론은 동전의 앞면, 뒷면과 동전의 소재와 같이 통일되어 있다. 하지만 동전의 앞면은 금액이 적혀 있고, 뒷면은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소재는 금 또는 은 등이다. 이와 같이 같은 동전도 각각의 측면에 따라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동전의 앞면, 뒷면, 소재를 따로따로 고찰한다고 해서 이를 두고 동전의 통일을 파괴한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철학의 근본문제도 인식론적 측면, 존재론적 측면, 방법론적 측면을 따로따로 고찰한다고 해서 이 세 가지의 통일성이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맑스도 상품 일체로서 자본의 생산, 유통, 소비라는 세 과정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과정은 그것들의 내적인 통일성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나란히 존재하고, 각 과정은 다른 과정의 전제로 존재한다.4) 철학의 근본문제도 이런 변증법적 통일의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이 세 측면의 연관 관계를 밝힐 수 있는가이다. 세 측면의 연관 관계를 올바르게 밝히지 못하면 상호 연관 관계가 옳게 이해되지 못하고 상호 독자적인 발전으로 이해하든가, 아니면 한 측면이 다른 측면을 부정하게 됨으로 해서 총체적 이해를 방해하여 통일적 이해를 하지 못하게 한다. 나는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5)에서 인식론적 근본문제물질의 객관성의 문제와 인식 가능성의 문제로, 그리고 존재론적 근본문제물질의 속성과 물질들의 상호 관계 문제로, 마지막으로 방법론적 근본문제운동과 변화의 보편적 법칙 문제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분리할 수도 없고, 서로가 서로를 전제로 하는 순환 고리를 이루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인식론적 문제를 선결적 문제로, 존재론적 문제를 중심적 문제로 그리고 방법론적 문제를 포괄적 문제로 하여 그 상호 관계를 밝힌 바 있다.

 

나는 이런 문제 제기가 철학의 근본문제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동전을 앞면만 알고 있는 것보다 뒷면과 소재도 아는 것이 동전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하는 것과 같다. 통일은 다양성의 통일이고, 발전은 다양성과 복잡성의 확대이며 그 연관 관계의 강화이다. 분업이 발전할수록 산업의 사회성이 강화되는 이치와 같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자. 철학의 근본문제와 관련한 쟁점은 「물질-의식」의 관계가 존재론적 문제(즉 「인간-세계」의 관계 문제)를 포괄할 수 있는가이다.

 

「물질-의식」의 인식론적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인식 대상 문제이고, 둘째는 인식 가능성 문제이다.

첫째 문제, 인식 대상은 무엇인가? 즉 물질인가 의식인가의 문제인데, 이것은 물질의 선차성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의식이 선차적이고 물질은 의식의 외화라고 한다면 의식의 주된 대상은 의식이 될 것이다. 반면에 물질이 선차적이고 의식은 물질의 반영에 불과하다면 주된 인식 대상은 물질이 될 것이다. 이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둘째 문제, 인식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 즉 「물질-의식」의 동일성 문제인데, 이것은 진리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물질-의식」 동일성 문제의 해명을 중심으로 근대 철학은 불가지론자와 가지론자로 대립하였다. 물질과 의식의 일치 문제는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물질과 의식은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상호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과학 발전은 물질과 의식이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여러 논의가 나왔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해부학적 가설을 제시하고, 스피노자는 신(자연)이라는 한 실체의 두 가지 속성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로 설명했고, 셸링은 동일철학을 제시했다. 칸트 같은 불가지론자들도 있었지만 헤겔에 이르러서는 의식의 자기외화 과정이 물질이라고 하는 관념론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만족스런 설명이 되지 못했고, 맑스가 실천 개념을 인식론에 도입하면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즉 물질과 의식의 동일성 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서로 독립적이어서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는데, 실천의 주체는 인간이고 인간은 의식 있는 물질로 의식과 물질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론에 도입하여 이 난점을 해결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물질이면서 동시에 의식적 존재라는 이중적 속성은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물질-의식」의 인식론적 기본 명제와 모순되게 되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고자 시도한 것이 동구의 실천 논쟁이다. 실천론자들은 실천을 철학의 중심으로 삼으면 모순은 해결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주관과 주체가 갖는 철학적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대체로 주관 관념론적 경향으로 흘러 비판받았다. 주관은 의식 주관을 의미하고, 주체는 물질 운동을 의미한다. 그러나 서구 언어는 이를 모두 Subjekt(독어), subject(영어)로 표현하여 구분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의식적 주관과 물질적 주체가 애매해져 유물론적 기본 원칙이 훼손되게 되었다. 즉 물질이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명제인간 실천은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는 사실 간의 모순을 실천 중심 철학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는 철학의 근본문제를 인식론, 존재론, 방법론으로 확대하여 따로 설정하고 인간과 그 운동인 실천을 존재론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이런 각 영역별 근본문제의 상호 관계를 밝혀 그 모순적 통일성을 제시한 것이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라는 글이다.

 

여기서 쟁점으로 대두되는 것은 인간과 그의 실천이 「물질-의식」의 관계에 포함되는가이다. 즉, 인간과 그의 실천이 물질이든지 의식이든지 어느 한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인간과 그의 실천을 「물질-의식」의 관계에서 이미 충분히 포섭할 수 있다면, 나의 문제 제기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문제 제기는 그 근거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비판문에서는 「물질-의식」의 관계가 존재론도 포괄한다고 주장하며 탁월한 논변을 제시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를 맑스로부터 도출한 점도 탁월하다. 맑스ㆍ엥엘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 나오는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다는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이어 간다. 인간의 인식 과정을 의미하는 인식론과 존재, 외적 세계를 의미하는 존재론은 의식은 의식된 존재라는 의식의 본질에 의해 통일의 근거가 주어지는 것이다.6)

 

비판문에서 의식은 그 본질이 의식된 존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존재 개념은 물질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물질-의식」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인식론적 한계에서 벗어나 인식론과 존재론은 통일되어 있다는 단초를 마련한 듯 보인다. 의식의 본질존재라면 존재와 의식은 본질에서 같기 때문이다. 존재와 의식의 공통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제 「물질-의식」의 근본문제는 의식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물질 운동인 인간 실천을 포괄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의식의 본질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물질-의식」의 관계와 인간 실천의 통일적 인식을 위해 「물질-의식」의 관계 외부에 위치시킨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확대(존재론적 근본문제의 제기)는 필요 없을뿐더러 궤변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판문은 심각한 인식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의식된 존재의식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물질(존재)-의식」에 대입하면 「물질(존재)-의식된 물질(존재)」이 되어 버린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의식이 의식된 존재 즉 물질로 변해 버리는 마법이 일어났다. 그러니 탁월하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면 의식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의식된 존재의식인가 존재(물질)인가? 내게 의식된 일억 원은 의식인가 존재인가? 의식된 일억 원실재 일억 원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의식된 일억 원으로는 껌 한 통도 살 수 없다. 이렇듯 인식된 것존재로 생각하는 것을 인식적 오류라고 한다. 바로 비판문의식된 존재존재로 취급하고 있는 인식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의식된 존재도 의식일 뿐이다. 그런데 비판문에서는 의식된 존재외적 세계를 의미하는 존재의 의미로도 쓰고, 존재를 반영한 의식의 의미로도 쓰고 있다. 의식된 존재의식이기도 하고 존재이기도 한 이중적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다. 레닌이 마하주의를 비판한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이러한 이중적 의미로 의식 개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하는 물질적이기도 하고 관념적(의식적)이기도 한 것을 요소라고 하였다. 비판문의식존재와 같다.

 

레닌이 마하의 요소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잠깐 보자.

 

요소는 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인간의 신경에, 일반적으로는 인간 유기체에 의존하지만, 전자는 그렇지 않다.

물리적인 그리고 심리적인 요소 연관은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함께 존재한다.7)

 

요소(감각)를 어떤 때는 물리적인 것으로 또 어떤 때는 심리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불가지론자, 즉 흄주의자이다.8)

 

경우에 따라서 물리적인 것을 발생시킬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을 발생시킬 수도 있는 요소라고 부른다면, 이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경험비판론의 근본적인 출발점을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제를 더욱 혼란시키는 것이다.9)

 

비판문은 이 마하주의의 요소의식된 존재로 새롭고도, 탁월하게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비판문이 의식을 어떤 때는 의식으로 어떤 때는 존재로 된다고 주장한다면, 레닌이 말한 대로 흄주의자이다. 그리고 문제를 더욱 혼란시키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물질-의식」 관계가 인식론적 문제이고, 인식론에 한정 지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 것이다. 이를 존재론으로 확대할 때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절충주의적 관념론을 일일이 비판하지는 않겠다. 레닌의 인용문만으로도 비판문의 절충주의가 맑스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의식된 존재는 단지 존재를 반영한 의식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비판문 자체가 애매하게 처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도 가능하다(절충주의의 특징). 어쨌든 의식된 존재는 물질(존재) 아니면 의식(관념)이다. 의식된 존재가 의식이라면 이는 간단하다. 문제를 원점으로 돌리는 것이다. 즉 의식된 존재의식이면 인식론과 존재론을 통일시킬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비판문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의식은 의식된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맑스의 언급은 인간의 인식 과정을 의미하는 의식과 존재 즉, 객관적 실재 사이의 통일을 보여 주고 있고 또한 의식과 존재 중에서 존재가 일차적이라는 유물론 관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이 존재, 외적 세계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인식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10)

 

물질과 의식의 관계 문제가 유물론적 인식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물질-의식」의 관계 문제가 제기하는 물질의 선차성 문제는 사라진다. 「물질-의식」의 문제는 물질이 선차적인가 의식이 선차적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러한 물음에 물질이 선차적이라고 답하면 유물론이고, 의식이 선차적이라고 답하면 관념론이 된다. 유물론적 인식론은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전제가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전제하는 것은 신앙이지 과학이 아니다. 유물론을 전제한다면 유신론을 전제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맑스 이전에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논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는 주체의 선택의 문제로 남아 있었다. 맑스가 실천 개념을 철학에 도입하면서 이 문제는 비로소 논증되었다. 유물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논증의 문제이다. 즉 우연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인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에서 유물론을 전제하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전제해 버리는 오류이다. 맑스는 유물론을 전제한 것이 아니라 논증한 것이다. 이 논증은 뒤에서 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존재론 영역에서의 물질과 의식의 대립에 대해 살펴보자.

 

존재론의 영역에서 물질과 의식의 대립의 상대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서 예로 든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성질이라는 명제 또한 물질과 의식의 상대성을 의미한다. 이 명제에서는 의식이 물질의 파생물이라는 점이 드러나 있어서 의식과 물질은 절대적 대립을 하지 않는다.11)

 

이와 같이 비판문에서 물질과 의식의 대립의 상대성의식이 물질의 파생물이라는 데에서 찾고 있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다. 존재론에서 다루는 대상이 문제이다. 나는 존재론을 인식론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식론을 선결 문제12)로 설정했다. 인식론에서 유물론이 맑스에 의해 논증된 이상, 존재는 물질만을 의미하게 된다. 따라서 존재론의 대상에서 의식은 배제된다. 존재론에서 의식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은 맑스 이전, 즉 맑스가 유물론을 논증하기 이전에 의식을 진정한 존재로 취급하던 낡은 존재론이다. 오이저만13)이나 비판문에서 존재론에 의식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낡은 존재론, 즉 관념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존재론에서 의식은 물질과 절대적으로든 상대적으로든 대립하지 않는다. 존재론의 대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번역 문제를 잠깐 짚고 가자. ≪독일 이데올로기≫의 의식은 의식된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이 비판문이 관념론으로 가는 길을 제시했기 때문에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Das Bewußtsein kann nie etwas andres sein als das bewußte Sein, und das Sein der Menschen ist ihr wirklicher Lebensprozeß.14)

 

여기서 문제되는 부분은 das bewußte Sein이다. 이를 대체로 의식된 존재로 번역한다. 그러나 bewußt는 형용사로 1)알고 있는, 의식하는 2)의도적인, 고의의 3)언급한, 알려진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의식하다라고 할 때는 bewußt sein이라고 하고 의식되다라고 할 때는 bewußt werden이라고 한다. Seinsein의 동명사형이거나 보통명사형이다.

 

따라서 das bewußte Sein의식 존재보다는 의식 존재, 의식 있는 존재 또는 의식하고 있는 활동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번역하면 das bewußte Sein인간이나 인간의 의식 활동이라는 의미가 된다. 의식은 존재의 반영 내용뿐만 아니라, 감각, 판단, 추리라는 의식하는 활동 기능도 의미하기 때문에 단지 존재의 반영 내용만을 가리키는 의식된 존재로 번역하기보다는 의식적 존재로 번역하는 것이 맞고 앞뒤 문맥에도 맞다. (이 구절이 있는 문단의 주제가 인간의 물질적 활동이다.) 그리고 의식 존재로 번역하게 되면 의식이 존재라는 오해의 소지도 있다. (비판문이 이렇게 오해를 하고 있다.) 의식 존재로 번역하면 의식이 인간의 활동이라는 의미가 살아나고, das Sein der Menschen과도 호응하게 된다. 그리고 앞에 나오는 의식이 물질적 행위의 직접적 유출로서 나타난다는 의미도 살아난다.

 

다음으로 비판문의 노동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이 노동을 통하여 어떤 물질적인 대상을 개조한다고 해 보자. 그 경우 물질은 노동이라는 의식적 행위, 즉, 의식에 의해 조종당하고 개조되고 변형된다. 이 경우에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상대적으로만 독립되어 있을 따름이다.15) (강조는 인용자.)

 

비판문에서 노동이라는 의식적 행위의식으로 둔갑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떻게 의식적 행위가 의식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운전하는 것은 운전 매뉴얼을 외우고 있는 것과 다르고, 악기 연주는 악보만 외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와 같이 행위의식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관념론의 특징이다. 그런데 비판문에서 노동의식이 된다. 여기서도 비판문탁월함이 돋보인다. 맑스주의를 관념론으로 만드는 탁월함 말이다.

 

나아가 비판문물질은 의식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상대적으로만 독립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물질은 의식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지 상대적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 의식이 조금이라도 물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고는 의식의 외화로서의 물질을 인정하는 오솔길을 제공하게 된다. 이 부분이 동구의 실천론자들이 범한 오류이다. 실천을 철학의 중심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그들이 이해한 실천, 노동은 목적의식이었다. 이렇게 실천을 의식으로 치환시키자 관념론으로 타락하고 만 것이다. 같은 오류를 비판문에서 반복하고 있다. 비판문탁월한 논변은 인식론과 존재론을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을 통일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질 개념과 의식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애매하게 절충한 결과이다. 모든 이런 시도들은 관념론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 비판문은 어떻게 실증주의로 귀결되었나?

위에서 비판문의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이 마하주의와 변형된 실천론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았다. 이로써 비판문이 전제하고 있는 주된 논변은 비판되었다고 본다. 이제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비판문은 철학의 본성을 논하는 자리에서 긴 인용문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인용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존재의 영역, 존재론의 영역은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실증 과학의 영역이 되었다는 점이다.16)

 

이는 전형적인 실증주의 주장이다. 실증주의는 존재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존재론은 존재 전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실증 과학도 물질 존재 전체를 다루지 않는다. 실증주의적 사고에서 전체는 이름뿐이지 실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를 다루는 것은 실증주의자들에게 형이상학이 되어 버린다. 반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물질 존재를 개별적 영역에서 다루지 않고 전체적 관점에서 다룬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물질 전체는 개별 영역의 연관 속에, 통일 속에 실재한다. 존재에 대한 탐구는 실증 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엥엘스의 말은 개별 과학이 더 이상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전체로서의 존재 세계를 다루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만약 존재 전체를 철학에서 배제한다면 같은 논리로 「물질-의식」 관계도 철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는 실제로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실증주의자들은 「물질-의식」 관계는 심신 문제로 인지과학, 신경과학, 진화심리학 등에서 다룰 문제라는 것이다. 이렇게 실증주의자들은 철학의 근본문제를 형이상학이라 부르며 부정한다. 이를 비판문이 답습하고 있다.

 

다음으로 실천실천 개념을 구분 대립시키는 비판문의 실증주의적 사고를 검토하자. 비판문은 헤르츠베르크의 실천실천 개념을 구분하는 발언을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철학의 근본문제의 해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 물질과 의식의 상호 작용을 의미하는 실천 개념을 도입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17) (강조는 인용자.)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실천실천 개념을 구분하는 사고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개념이 실재를 반영한다고 보기 때문에 개념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개념이 실재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일치의 문제이다. 그러나 실증주의자들은 물질은 감각 경험만을 인정하고 감각 경험을 넘어서는 개념화 작업을 형이상학이라고 거부한다. 따라서 이들은 감각 경험을 뛰어넘는 즉 개량화, 수량화, 감각화되지 않는 모든 개념을 형이상학이라고 부정하게 된다. 이들의 모토는 개라는 개념은 짖지 않는다이다. 개념이 실재를 반영한다는 유물론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럼 비판문의 말을 들어 보자.

 

물질과 정신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의 근거의 문제가 될 경우, 그 근거는 실천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이다. 예를 들면 과학과 실험, 생산 등이다.18)

 

인용문에서는 실천 개념현실적인 사회적 실천을 나누고 실천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개념은 사물을 반영한다는 유물론의 반영 이론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개념을 현상과 분리시켜 실체로 사고하는 있는 것이다. 개념을 구체적 사물과 분리된 실체로 이해하는 것은 관념론의 일반적 경향인데, 다만 실체로 이해한 개념을 인정하는 객관 관념론과 이를 부정하는 실증주의로 나뉠 뿐이다. 그러나 개념을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구체적 사물이나 사태의 속성으로 실재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모든 개념은 추상적이다. 왜냐하면 개념은 추상 과정의 결과이기 때문이다.19) 따라서 공통적 속성인 추상적 개념을 부정하는 것은 구체적 사물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비판문실천 개념현실적 사회적 실천을 구분하여 구체적인 현실적 사회적 실천 속에서 공통적 속성만을 추상화한 실천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마치 구체적 노동에서 추상적 노동을 분리시켜 추상적 노동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두 번째는 철학의 근본문제의 해결주체의 선택의 문제로 보는 관점이다. 실증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의 선택의 문제가 된다. 실증주의는 실천 개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증주의자들처럼 비판문의 논변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물질-의식」 관계를 풀기 위해서는 「물질-의식」보다 고차원의 상위 개념이나 다른 전제가 있어야 한다.

맑스는 이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자.

 

모든 인간 역사의 제1 전제는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 개인들의 생존이다. 그러므로 최초로 확인되어야 할 사실은 이 개인들의 신체적 조직과 이 신체적 조직에 주어진, 그 밖의 자연과의 관계이다.20) (번역 수정.)

모든 역사 서술은 이 자연적 기초들 및 역사 진행 속에서의 인간들의 행동에 의한 이 자연적 기초들의 변모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21)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첫 번째 고찰 방식에서는 살아 있는 개인보다는 의식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적인 생활에 조응하는 두 번째의 고찰 방식에서는 현실적인, 살아 있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며 의식을 단지 그러한 개인들의 의식으로서만 간주한다.22) (번역 수정. 강조는 맑스.)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는 두 가지는 첫째 모든 인간 역사의 제1 전제살아 있는 인간이며, 둘째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고 할 때 이 의식은 살아 있는 개인들의 의식이라는 점이다. 「물질-의식」 관계 문제도 무전제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을 전제로 하며, 의식이란 살아 있는 개인의 의식이다. 이 두 가지를 전제하지 않고는 「물질-의식」 관계 문제는 해결할 수 없고, 주관적 선택에 맡겨 버리게 된다. 즉 「물질-의식」이라는 인식론적 틀 속에서는 「물질-의식」 개념 이상의 포괄적 개념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은 의식에 포함되지 않고, 의식은 물질에 포함되지 않는 독립적 대립항에서는, 물질이 먼저인지 즉 물질에서 의식이 파생된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먼저인지 즉 의식에서 물질이 파생된 것인지 논증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물질-의식」이 인식론적 공리 체계의 최고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적 공리 체계 즉 「물질-의식」의 대립항을 뛰어넘는 이를 포괄할 수 있는 보다 더 추상적 개념을 전제로 세워야 해결된다. 「물질-의식」의 대립항을 뛰어넘는 개념으로, 맑스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을 제시한 것이다. 맑스ㆍ엥엘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어떻게 의식이 인간 실천으로부터 발생하고 발전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의식이 인간 생존과 생존을 위한 실천으로부터 발생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밝히는 것을 역사적 추상 또는 시원적 추상이나 구체적 추상이라고 한다.23)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이 「물질-의식」 관계의 제1 전제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이며, 살아 있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실천 과정에서 발생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맑스의 말을 좀 더 살펴보자.

 

인간들은 의식에 의해서, 종교에 의해서,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동물들과 구별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적 조직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는 단계로부터 자신의 생활 수단을 생산하기 시작하자마자 동물들과 구별되기 시작한다.24) (번역 수정.)

이념들, 표상들, 의식 등의 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물질적 활동과 물질적 교류 속에, 현실적 생활의 언어 속에 직접적으로 연루된다. 인간들의 표상함, 사유함, 정신적 교류는 여기에서 또한 그들의 물질적 행위(Verhal-ten)의 직접적 유출로서 나타난다.25)

네 가지 계기, 즉 근원적, 역사적인 관계들의 네 측면이 이미 고찰된 이 후에, 이제야 우리는 인간이 또한 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는 역시 처음부터 순수한 의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 물론 의식은 처음에는 당연히 가장 가까운 감성적 환경에 관한 단순한 의식, 자기를 의식하게 되어 가는 개인의 외부에 있는 타인이나 다른 사물과의 협소한 연관에 관한 단순한 의식일 뿐이다.26)

분업은 물질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의 분할이 등장하는 시점으로부터 비로소 진정으로 분업이 된다. 이 시점부터 의식은, 현실적인 어떤 것을 눈앞에 놓지(vorzustellen) 않고서도, 현실적으로 어떤 것을 표상한다고(vor-zustellen), 자기를 현존하는 실천의 의식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현실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 이 시점부터 의식은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순수한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등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27)

 

이렇게 장황하게 맑스의 말을 인용한 것은 보다 생생하게 의식의 탄생 과정을 전달하고 싶어서다. 요약해 보면, 인간은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동물과 구분된다. 이 의식은 인간이 생산수단을 생산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의식은 인간의 물질적 실천과 교류에 기반하여 언어로 형식을 갖춘다. 의식의 초기 단계는 물질적 행위와 구분되지 않았다. 즉 실천의 직접적인 주관적 형식이었다.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업과 함께 의식은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했다. 「물질-의식」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맑스는 인간의 실천이 의식의 원천임을 논증했다. 이로써 「물질-의식」의 관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유물론의 필연성 문제임이 논증되었다. 그러나 의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로 하는 「물질-의식」의 인식론적 틀에서는 의식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고, 순수한 의식28)도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물질의 의식에의 반영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 실천의식의 실체이다. 이는 노동이 가치의 실체인 이치와 같다. 그러나 노동이 가치의 실체이나 가치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듯이, 실천도 의식의 실체이나 의식으로 규정될 수 없다. 노동이 가치의 실체이면서 가치 체계 밖에 존재하듯이, 마찬가지로 실천도 의식의 실체이지만 「물질-의식」 공리 체계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열이 온도의 원인이지만 열은 온도로 측정하지 않고 열량으로 측정하는 것과 같다.

 

이상과 같이 의식은 실천 즉 물질(인간)에 의해 생성, 발전하는 것으로 「물질-의식」 관계의 선차성 문제는 논리적으로 해결된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비판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천 개념이 물질과 의식 개념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재길 동지의 독단이다. 물질과 의식이 인식론상의 궁극 개념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비롯한 이 세계의 일체의 존재 범주를 추상한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관(의식)과 객관(물질)의 통일을 의미하는 실천이라는 범주는 당연히 의식-물질 개념의 하위 범주가 된다. 신재길 동지가 이를 부정하는 것은 철학적 추상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9)

 

비판문은 여기서 실천이 의식-물질 개념의 하위 범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실천이 의식-물질의 하위 범주일 수 없다. 이는 구체적(시원적) 추상을 간과한 오류이다. 이는 마치 가치를 만들어 낸 노동이 가치의 하위 범주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철학적 추상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했으니, 추상의 의미를 검토해 보자. 위에서 구체적 추상의 의미를 설명했고, 그 과정도 보여 주었다. 구체적(시원적) 추상 개념으로 볼 때, 실천의식의 실체이지 의식실천의 시원일 수 없다. 즉 실천이 더 상위 개념이다.

 

그럼 이제 일반적인 추상 개념을 살펴보자. 물질과 의식이 인식론상의 궁극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비판문은 이를 이 세계의 일체의 존재 범주를 추상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추상에는 위에서 살핀 구체적 추상 외에 속성의 추상30)포괄적 추상이 있다. 물질과 의식은 물질의 많은 속성들 중에서 객관적 속성과 주관적 속성을 추상한 개념이다. 그런데 인간은 객관적 속성과 주관적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즉 개념의 종속 관계를 따질 때, 인간 개념이 물질과 의식의 속성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에도 의식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인간은 물질이나 의식의 하위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위 개념이라면 물질이든지 의식이든지 둘 중 하나에 포함되어야 한다. 인식론에서 물질 개념과 의식 개념은 독립적인 대립 관계이기 때문이다. 오리너구리는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다. 오리너구리일 뿐이다.

 

포괄적 추상 개념을 살펴보자.

속성의 추상 개념에서 인간은 물질도 아니고 의식도 아니다. 동시에 인간은 의식이기도 하고 물질이기도 하다. 속성의 추상 개념에서는 인간을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구체적 추상 개념으로는 인간은 생산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다. 포괄적 추상 개념에서는 어떨까?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6번을 보자.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31)

 

맑스가 말하는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속성의 추상 개념을 말한다. 맑스는 인간을 포괄적 추상 개념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즉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ensemble은 불어인데 일반적으로 총체로 번역한다. ensemble은 조화로운 전체를 의미한다. 우리가 익숙한 음악의 합창단이나 합주단을 말하고, 수학에서 집합을 말한다. 이는 개별적 속성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말하고, 동시에 인간관계 전체를 말한다. 이 사회적 관계 개념에는 개인, 집단(계층, 계급), 인류 전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맑스는 굳이 독일어에 없는 ensemble이라는 불어를 쓴 것이다. 이것이 포괄적 추상 개념이다. 총체성 개념을 의미한다.

 

따라서 맑스가 쓰는 인간은 속성의 추상 개념이 아니며 포괄적 추상 개념이거나 구체적 추상 개념이다. 속성 개념인 물질이나 의식과는 추상 자체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따라서 직접 종속 관계를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파악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라는 본질 정의 속에 이미 세계(자연과 사회)와 인간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곧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존재론적 추상 개념이다.

 

이렇듯 인식론과 존재론의 구별 정립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통일적 이해의 전제가 된다. 이를 분명히 구별하여 둘 간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지 못한다면 비판문이 범한 오류는 계속적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변증법 문제도 간단히 언급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인식론의 궁극 개념은 물질과 의식이다. 이는 존재하는 것의 두 가지 보편적인 대립적 속성을 추상한 것이다. 즉 존재하는 것에 한정되는 개념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변증법의 핵심은 운동이고, 운동은 「존재와 무(無, 존재하지 않는 것)」의 관계 문제이다. 물질과 의식 개념보다 「존재와 무」 개념이 더 포괄적 개념으로 「물질-의식」 관계에 「존재와 무」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다. 즉 변증법은 「물질-의식」 관계에서 도출되지 않는다. 물질과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는 것변증법의 근본 원리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도출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물질이나 의식이나 모두 변증법적 운동을 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변증법적 운동의 사례를 하늘만큼 쌓는다고 변증법적 운동의 필연성이 논증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귀납의 한계 때문이다. 귀납으로는 필연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변증법의 필연성을 논증하는 것은 변증법적 사례의 량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증법적 운동의 속성 자체에서 논증되어야 한다. 그래서 헤겔은 ≪논리학≫의 시작을 「존재와 무」로부터 시작하고 변증법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논증한 것이다.

 

비판문은 다음과 같이 변증법의 근본문제를 제기한다.

 

유물론적 변증법의 근본문제는 추상적인 존재와 무가 아니라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이다.32)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물질의 운동은 변증법적이고 물질은 의식에 반영되니 의식의 운동도 변증법이다. 즉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 변증법도 포함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변증법 문제를 따로 분리해서 고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는 선결 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물질 운동이 변증법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의 근본문제는 물질과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을 하는 필연성을 해명하기 위한 문제인데, 비판문은 물질 운동이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물질 운동이 왜 작용 반작용과 같은 기계적 운동이 아니고 변증법적 운동이여야 하는지는 전혀 밝히지 않고, 운동은 변증법이라는 선언으로 논증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 운동이 변증법이라는 것을 논증하지 않고 물질과 운동의 통일성을 논하는 것은 기계론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제 비판문의 기계론적 사고방식을 살펴보자.

 

 

3. 비판문의 기계론적 사고방식

 

1) 본질과 현상을 분리하여 실체화시키는 사고방식

본질과 현상을 분리하여 실체화시키는 사고방식은 전쟁 개념과 당파성을 논하는 곳에서 두드러진다. 비판문은 전쟁의 본질인 계급 투쟁을 부정하고, 전쟁의 여러 현상(종교 전쟁, 민족 전쟁 등)을 제시하였다. 내가 모든 전쟁은 근본적으로 계급 투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은 전쟁의 현상이 아니라 본질을 말한 것이다.

 

비판문의 말을 들어 보자.

 

필자는 신재길 동지를 제외하고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에게 전쟁은 기본적으로 계급 투쟁이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신재길 동지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모든 전쟁은 계급 투쟁이라는 주장이 맑스주의라고 하고 있다. 신재길 동지가 맑스의 수많은 글 중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33)

 

전쟁의 본질이 계급 투쟁이라는 것은, 맑스주의 고전에서 무수히 찾을 수 있다.

 

16세기의 이른바 종교 전쟁들에서는 무엇보다도 매우 실증적인 물질적 계급 이해들이 문제였으며, 이 전쟁들은 후일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국내의 충돌들과 꼭 마찬가지로 계급 투쟁들이었다. 당시 이 계급 투쟁들이 종교적인 구호를 내걸었다 하더라도, 각 계급들의 이해들이나 욕구들이나 요구들이 종교적 외피 밑에 감추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이것은 사태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하며 또한 그 시대의 상황으로부터 쉽게 설명된다.

― F. 엥엘스34)

 

전쟁의 계급적 성격, 이것이야말로 사회주의자가(그가 배신자가 아니라면) 직면하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1914-18년의 제국주의 전쟁은 세계분할, 전리품의 분배, 그리고 약소민족들의 약탈과 교살을 위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양 진영 사이의 전쟁이었다. 이것이 1912년 바젤 선언에서 당시 임박한 전쟁에 대해 내린 평가였고 그것은 여러 사실로써 확증되었다. 전쟁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로부터 이탈하는 자는 그 누구라도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 V. I. 레닌35)

 

전쟁과 계급 투쟁은 그 성격과 질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비판문의 주장은 사실 지난번 반박문에서 충분히 밝혔기에, 여기서는 비판문이 요구한 전쟁에 대한 언급을 하나씩만 드는 걸로 비판을 대신하겠다.

 

간단한 오류를 하나 더 짚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계급 전쟁이라는 용어 문제이다. 비판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계급 전쟁을 부정하고 있다.

 

물론 80년대 운동에서 계급 전쟁이라는 표현이 쓰였던 적이 있고 지금도 일부에서는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선동의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서 엄밀한 과학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그러한 선동적 요소가 아니라, 이론으로서 과학으로서 전쟁과 계급 투쟁의 개념은 질을 달리하는 것이다.36)

 

그럼 맑스의 말과 비교해 보자.

 

프랑스 사회 내부의 계급 전쟁은 각 국가들이 서로 대립하는 세계 전쟁으로 전환된다.37) (번역 수정. 강조는 인용자.)

 

계급 투쟁의 가장 격렬한 양상이 계급 전쟁이다. 그리고 모든 계급 투쟁은 무장 투쟁을 동반하게 된다. 지배 계급의 지배 도구의 핵심이 무장력이기 때문이다. 지배 계급의 무장력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비판문계급 전쟁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이제 전쟁이 계급 전쟁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 더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바로 본질과 현상에 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종교 전쟁도 본질상 계급 투쟁이며, 제국주의 전쟁도 본질상 계급 투쟁이다. 그러나 그 현상은 종교 전쟁이나 민족 전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비판문은 본질과 현상을 각각 분리하여 이를 성격과 질이 전혀 다른 것으로 실체화한다. 비판문의 말을 들어 보자. 전쟁과 계급 투쟁이 다른 것이기에 질을 달리하기에, 전화시키자는 주장이 성립하는 것이 아닌가?38)라는 비판문의 주장이, 맑스나 레닌의 전쟁 이해와 얼마나 다른지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제국주의 전쟁이 아무리 민족 전쟁의 외피를 써도, 계급 전쟁이 아무리 종교적 외피 밑에 감추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계급 투쟁이 본질이고 종교나 민족 간 투쟁은 외피, 현상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현상을 서로 분리하여 실체화시키는 사고는 당파성39) 논의에서도 나타난다. 당파성이 갑자기 논쟁에 등장한 것은 인간의 사회적 성격 중 지배성을 논하는 자리에서이다. 나는 인간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획득한 인간의 사회적 속성으로 지배성과 집단성을 들었다. 그런데 비판문은 이 지배성 개념을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로 인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부르주아 이론인 것처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나는 부르주아의 인정 여부가 진리의 기준일 수 없다고 반박했고 (지배성과 집단성 개념이 아무런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진화인류학의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밝혔다.

 

이에 대해 비판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본주의라는 계급 사회에 있어서는 사회 과학에 있어서 모든 이론에 계급적 각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신재길 동지는 전혀 무지한 듯이 행동한다. 사회 과학은 계급적 당파성에 따라 이론이 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맑스주의자의 ABC 아닌가? 따라서 신재길 동지는 진화인류학이 어떤 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한 것인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40)

 

여기서도 비판문의 특유의 기계적 사고방식으로 본질과 현상을 분리 실체화시키고 있다. 본질은 그 자체로 실재하지 않고 항상 구체적 사물과 사태의 현상 속에 있다. 따라서 구체적 사물과 사태의 구체적 논리 속에서만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지배성 개념의 당파성은 지배성이 드러난 현상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비판문은 지배성이라는 구체적 논의를 당파성이라는 고도의 추상적 논의와 대립시키고는 지배성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지배성 개념이 어떤 구체적 논리 전개 과정을 거쳐 또는 어떤 논의 구조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는지를 논구하여야 하는데, 비판문은 지배성 개념의 지배라는 용어에 집착하여 구체적 논리 구조와는 무관하게 부르주아지의 지배로 등치시키고 있다. 그리고 근거로 제시한 진화인류학도 어떤 점에서 부르주아적인지 언급 없이 막연한 짐작으로 진화인류학의 당파성을 재단하고 있다.

 

비판문은 추상적 본질 규정을 구체적 현상 형태와 분리하고 실체화시켜 본질과 대립시키고 있는데, 이를 지배성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비판문은 당파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 당파성에 대해서도 전혀 반대로 이해하고 있다. 지배성 개념을 부르주아가 노동자를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는 비판문이 얼마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잘못 알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주장하는 그런 순진하고 단순한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는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히 허구적인 형식적인 주장이 아니다. 상품 유통 과정에서 등가 교환 법칙을 반영한 이데올로기다. 반면에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는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에 의한 자본가계급의 억압을 주장한다. 지배를 주장한다. 착취를 주장한다. 이것이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이다. 자! 지배성 개념이 자본가계급이 인정하는 개념인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이 인정하는 개념인가? 분명하지 않은가? 당파성이라는 추상 개념을 실체화시켜 구체적 논의를 무시하고 모든 학문과 주장에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노동자 당파성과는 전혀 무관하며 관념론의 일반적 사고방식이다.

 

이상에서 본질과 현상에 대한 기계적 형식적 실체화에 대한 위험을 지적했다. 전쟁에 대한 제국주의적 주장의 옹호, 당파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순진한 사고 등은 근본적으로 비판문의 형식주의적 사고에 기인하며 이는 특유의 용어물신주의를 낳는다.

 

2) 용어물신주의

용어물신주의는 지난번에도 비판한 내용이다. 이는 헤겔과 맑스의 실천 개념을 동일하게 취급한다든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란 용어를 알튀세르와 같이 사용하였다고 내가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든지, 근대 철학의 딜레마라는 말은 이진경도 사용했으니 나의 사고를 이진경과 같다고 한다든지, 토대-상부구조를 이원이라고 표현한 것을 그 구체적 내용과는 무관하게 용어의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나의 사고가 이원론이라고 한다든지 등의 많은 곳에서 용어물신주의41)가 나타난다.

 

알튀세르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나누어 다루고, 나도 그러니 내가 알튀세르의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을 보자.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분리가 역사적 노동 분업에 기초한다는 것은 지난번과 위에서도 보았으니 이런 3분법이 근거 없다는 비판은 지나가자. 비판문이 나와 알튀세르를 연관시키는 의도는 아마도 알튀세르 비판을 통해 나를 손쉽게 비판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모르는 나와 알튀세르의 공통성이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비판문이 언급한 나와 알튀세르의 공통성이란, 사회를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나누어 분석한 것뿐이다. 알튀세르는 이를 대륙에 비유하고 있고, 바스카는 이를 지층에 비유하고, 나는 자연 과학에 비유하고 있는 내용은, 검토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수평적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고, 바스카는 수직적 관계로 보나 지층에 비유함으로 해서 시간적 제약을 갖기에, 나는 자연 과학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로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나와 알튀세르만의 공통성도 아니다. 맑스도 레닌도 이렇게 나누어 분석한다. 비판문이 인용한 레닌의 글에도 경제 투쟁, 정치 투쟁, 이데올로기 투쟁을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이는 비판문이 용어의 동일성에 집착하여 내용을 보지 못하는 용어물신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런 용어물신성은 근대 철학의 딜레마라는 용어를 비판하면서도 나타난다. 근대 철학의 딜레마라는 용어를 이진경이 처음으로 썼다고 하면서, 같은 용어를 쓴 나의 견해가 이진경의 견해와 같을 것이라 짐작하고, 이진경 비판을 통해 나를 비판하려고 한다. 근대 철학의 딜레마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내용은 이미 데카르트 당대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의 곤궁, 근대 철학의 역설, 근대 철학의 곤란 등으로 표현되는 철학사의 일반적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데카르트의 역설≫42)이라는 단행본도 나와 있다.

 

그리고 용어물신성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대목은 이원 구조를 이원론으로 인식하고, 맑스주의는 일원론이라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강조할 때이다. 내가 토대-상부구조를 이원 구조라고 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실체의 이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3층 구조에 대비되는 2층 구조의 의미로 썼다. 그런데 비판문2원이라는 용어에 집착하여 사회의 실체로서의 원(元)을 설정하고 나를 이원론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용어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는 별반 관심 밖인 것 같다. 이는 용어물신성에 사로잡혀 용어가 나타내는 내용은 안 보고, 용어 자체의 사전적 의미만을 보는 사고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에 대한 비판은 일렌꼬프로부터의 인용문으로 대신하자.

 

관념적인 것의 언어적 존재에 대한 물신 숭배는 쇠퇴기의 헤겔 좌파 철학의 특징이었으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 당시 주목한 것이기도 했다. 관념적인 것의 언어적 존재에 대한 물신 숭배는 물론, 그러한 물신 숭배가 반영하는 사회적 관계 체계의 물신 숭배는 관념적인 것이 인간의 대상적이며, 실천적인 활동을 통해 생겨나고 재생산되며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모든 철학의 절대적이고 필연적인 종말이다.43)

 

3)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대립시키는 사고

내가 경제의 집약 집중이 정치이고, 정치의 연장이 전쟁이라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면서, 비판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단 논법이 논리의 형식을 따지는 것을 넘어서서 내용적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이행할 경우, 언제나 그 명제의 참이 성립하지는 않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경우에 구체적으로 올바름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그러한 구체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삼단 논법이기 때문에 올바른 명제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레닌과 클라우제비츠의 변증법적 명제를 기계적인 형식논리로 전화시키는 후퇴이며, 그에 따라 모든 전쟁은 계급 투쟁이라는 기괴하고 엉터리 같은 주장이 나온 것이다.44)

 

전쟁의 본질에 대한 논의는 앞에서 다루었기에 여기서는 간단히만 언급하자. 인용문에서는 내가 구체적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삼단 논법이기 때문에 올바른 명제라고 강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내가 어디서 삼단 논법이기에 올바르다고 주장했는지 다시 내 글을 꼼꼼히 보았다. 내 글엔 삼단 논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결국 내가 삼단 논법으로 논증했기에 잘못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내가 삼단 논법이기에 올바르다고 주장한 것처럼 곡해한 것 같다. 그러나 형식논리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형식논리이기 때문에 엉터리 같은 주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형식논리는 언어의 문법과 같은 것이라 내용과는 무관하다.

 

그런데 비판문은 올바르게 형식논리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왜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는 걸까? 이는 변증법과 형식논리를 대립시켜 형식논리를 무조건 백안시하는 사고가 밑에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잘못이다. 형식논리가 사칙 연산이라면 변증법은 미적분이다. 변증법은 형식논리를 자체 내에 한 요소로 포함하고 있으면서 그 한계를 극복한 고차원의 논리 체계이다. 따라서 형식논리와 변증법을 대립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내용이다. 비판문에 나타난 전쟁의 원인에 대한 내용적 비판은 다음과 같다.

 

전쟁의 원인이 경제 관계라고 할 경우, 그것은 계급적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고, 계급적 관계가 아닌 경제적 원인에 의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재길 동지는 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계급 투쟁이 아닌 많은 전쟁들, 예를 들면 역사상의 많은 민족 전쟁, 종족 전쟁도 궁극적으로는 부의 획득 등의 경제적 원인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원인도 분명히 경제 관계에는 포함되지만 계급 투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45)

 

여기서 전쟁의 원인에 계급적 관계가 아닌 경제적 원인이 있다고 하면서, 그 예로 부의 획득 등의 경제적 원인을 들고 있다. 부의 획득이란 무엇인가? 잉여가치의 착취나 약탈이다. 이제 잉여가치의 착취나 약탈이 계급적 관계가 아닌 그 어떤 경제적 원인이 되었다. 이런 주장을 부르주아 사회학자라면 모를까 맑스주의자의 발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기괴하고 엉터리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가?

 

 

4.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에 대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상부구조의 상대적 독자성 문제를 간단히 언급하고 마무리하자.

 

먼저 국가 혹은 정치의 상대적 독자성부터 보자.

 

비판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국가 혹은 정치의 내용은 부르주아지라는 지배 계급의 지배 도구이지만 그 형식은 공권력, 보편적 이념임을 말한다. 역으로 공적 권력이라는 형태, 자유, 평등 등의 보편적 이념은 국가의 내용이 아니라 한갓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르주아 국가의 경제적 토대로부터의 상대적 독자성을 보면, 즉, 경제적 토대에서 비롯되는 계급 관계, 계급적 규정력으로부터 부르주아 국가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적으로만 자유롭고 그런 한에서 상대적 독자성을 갖는다. 이러한 접근은 신재길 동지가 정치의 영역을 추상적으로 권력 관계로 파악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데, 신재길 동지가 정치에 대해 형식논리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6)

 

비판문은 정치(국가)의 내용은 계급 지배 도구이고 형식은 공권력, 보편적 이념이라고 하고, 정치(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형식이 내용에 상대적 독자성을 갖고 내용에 반작용하는 성격이 있다는 것에서 유추한 듯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정치(국가)의 상대적 독자성경제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이다. 그리고 정치(국가)의 형식이 갖는 상대적 독자성은 정치(국가)의 내용 즉 계급 지배 도구에 갖는 독자성이다. 따라서 정치(국가)의 상대성을 정치(국가)의 형식에서 찾는 것은 오류이다.

 

또한 비판문은 내가 정치 영역을 권력 관계로 파악한 것을 추상적이라고 비판하는데, 이는 아마도 허구적 근거가 없는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 관계란 허구적인 것도 근거 없는 것도 아니다. 권력 관계란 국가 권력, 특히 무장력의 소유 관계를 의미한다. 나는 무장력의 소유 관계를, 경제에서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와 비교하여 정치 영역의 계급 관계로 설명했다. 이 무장력을 소유하고 장악한 것이 바로 지배 도구의 본질이다. 그리고 정치(국가)의 상대적 독자성은 그 무슨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무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정치의 내용인 계급 지배 도구라는 무장력에서 정치의 상대적 독자성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도 비판문 특유의 용어물신주의의 단면을 볼 수 있다. 형식의 내용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과 정치의 경제에 대한 상대적 독자성이라는 용어의 형식적 동일성에 집착한 오류이다.

 

다음으로 이데올로기의 능동성으로 넘어가자.

 

비판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면 이데올로기의 능동성을 살펴보자.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인식에 있어서 중대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예술, 종교, 철학, 과학 등은 물질적 관계들이 인간의 인식에 반영되는 중요한 매개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각 영역은 치열한 계급 투쟁의 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한 투쟁은 물질적 관계의 직접적 반영이 아니라 철학에서 철학의 근본문제와 같이 매개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물질적 관계의 이러한 매개를 통한 반영이 정확히 이루어질 때, 이데올로기의 각 영역은 계급 투쟁에 중대한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다.47)

 

이데올로기는 의식 형태의 일종이다. 의식이 물질에 직접적으로 반작용할 수 없다. 매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비판문예술, 종교, 철학, 과학중요한 매개들이라고 하고, 철학에서 철학의 근본문제매개로 주장하고 있다. 이는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데올로기는 의식 형태이다. 예술, 종교, 철학, 과학철학의 근본문제의식 형태이다. 이데올로기를 물질적 관계와 매개시키는 것이 같은 의식 형태라는 주장이다. 물질과 의식을 매개하는 것이 의식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매개가 아니라 의식이 직접 물질과 관계 맺는 것이고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된다. 결국 관념론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의식과 물질을 매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실천이다. 실천이 이데올로기가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매개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은 어디에 근거를 두게 되는가? 실천이 의식의 영향을 받아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실천이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독자성을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천은 의식에 영향을 받지만 의식의 운동이 아니라 물질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일렌꼬프를 인용해 보자.

 

언어 형식, 낱말 체계, 구문론적 체계로부터 시작해서 논리적 범주에까지 이르는 인간 두뇌 활동의 모든 형식은 사회적 발전의 산물이고 형식들이다. 이러한 형식으로 표현될 때에만, 외적이며 물질적인 것은 사회적 사실이나 혹은 사회적 인간의 속성인 관념적인 것으로 변형된다.48)

 

언어는 사고의 직접적 현실태이다. 그러나 언어 자체는 두뇌의 신경 조직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아니다. 언어는 의식의 표현 형태이다. 이렇게 의식이 언어라는 표현 형태를 갖게 되면 객관화되고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된다. 마치 가치가 화폐라는 가치 형태를 취하자 두 발로 서서 가듯, 의식도 언어라는 형태를 취하자 두 발로 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사고가 언어 형태를 통해 객관화되고,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되면 의식은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한다. 이 시점부터 의식은 세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순수한 이론, 신학, 철학, 도덕 등등의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개인들은 객관화된 이러한 의식 형태의 영향을 받아 실천에 나서게 된다. 물질-실천-의식(사고)-언어-의식(사고)-실천-물질의 순환 과정을 통해, 물질은 의식에 반영되고 다시 의식은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메카니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비판문에 대한 비판을 마치겠다.  노사과연

 

 


1) 문영찬, 같은 글, p. 52.

2) 신재길, “문영찬 연구위원장의 ‘비판’에 대한 반론”, ≪정세와 노동≫ 제147호(2018년 12월/2019년 1월).

3) 같은 글.

4) K.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Ⅱ≫, 김호균 역, 백의, p. 13.

5)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정세와 노동≫ 제119호(2016년 1월).

6) 문영찬, 앞의 글, p. 59.

7) V. I. 레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정광희 역, 아침, p. 55.

8) 같은 책, pp. 112-113.

9) 같은 책, pp. 131-132.

10) 문영찬, 앞의 글, p. 58.

11) 같은 글, p. 59.

12) 신재길, “물질과 철학의 근본문제”.

13) T. I. 오이저만, ≪철학의 근본문제≫, 세계, 1990.

14) Karl Marx Friedrich Engels Ausgewählte Werke in sechs Bänden, Bd. I, S. 212.

15) 문영찬, 앞의 글, p. 60.

16) 같은 글, p. 64.

17) 같은 글, p. 66.

18) 같은 글, p. 68.

19) ≪철학소사전≫, 동녘, p. 368.

20) K. 맑스ㆍF. 엥엘스, ≪독일 이데올로기≫(≪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이하 ≪저작 선집≫) 제1권), 박종철 출판사, p. 197.

21) 같은 책, 같은 곳.

22) 같은 책, p. 202.

23) 이러한 시원적, 구체적 추상은 ‘일반적 추상’ 즉 어떤 속성을 다른 요소들을 사상하고 추상하는 것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때 노동하는 인간(구체적으로는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인간)으로 규정한다.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성격이 인간의 본질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속성은 아니다. 모든 인간이 생산도구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생산도구를 만드는 구체적 노동자가 있지만, 베토벤 같은 음악가도 있고 플라톤 같은 철학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성격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생산도구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고 사회를 만들어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반적 추상’과 ‘시원적 추상’의 차이가 있다. 생김새나 성격이 다른 두 형제라도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다면 한 가족이듯이 ‘시원적 추상’ 또는 ‘역사적 추상’은 그 발생, 시원을 공유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아버지도 두 형제와 함께 살아가는 구체적 개인이지만 동시에 시원적 추상인 개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원적 추상을 구체적 추상이라고도 한다.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노동자는 구체적 개인이지만 인간을 대표하는 시원적 개인이다. 이것이 구체적 추상이다.

24) K. 맑스ㆍF. 엥엘스, 앞의 책, p. 197.

25) 같은 책, p. 201.

26) 같은 책, p. 210.

27) 같은 책, p. 211.

28) ‘순수한’ 의식이란 경험과 관계없는 사고의 형식을 말하는 것으로, 감각 형식, 오성 형식(판단, 범주), 이성(추리, 상상력)이 포함된다. 판단 능력이나 추리 능력은 반영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반영 이론 자체가 판단 능력과 추리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물질과 의식을 최고 개념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의식은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맑스는 인간 실천을 전제로 하여 ‘순수한’ 의식의 생성을 설명해 내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인식 과정이 아닌 인간의 물질적 운동 과정이다. 왜냐하면 의식이 존재하기 이전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재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29) 문영찬, 앞의 글, pp. 69-70.

30) 속성의 추상은 어떤 사물의 여러 속성 중에서 다른 속성들을 사상하고 하나의 속성을 추출하는 추상이다. 이를 증류적 추상이라고도 한다.

31) K. 맑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저작 선집≫ 제1권, p. 186.

32) 문영찬, 앞의 글, p. 65.

33) 같은 글, p. 53.

34) F. 엥엘스, ≪독일 농민 전쟁≫(≪저작 선집≫ 제2권), p. 143.

35) V. I.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소나무, pp. 92-93.

36) 문영찬, 앞의 글, p. 53.

37) K. 맑스,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저작 선집≫ 제2권), p. 82.

38) 문영찬, 앞의 글, p. 50.

39) 당파성은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을 말하는데 종종 객관성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이 객관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파성과 객관성은 다른 것이다. 객관성은 당파성과 무관하게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주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객관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어떤 이론 주장이 객관적인 사실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가 그 진리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당파성은 이런 객관성을 전제로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여 형성된다. 따라서 당파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객관성과 다르다. 먼저 당파성이 객관성 자체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당파성은 객관적 사실의 해석 문제에서 나타나며, 다음으로 객관적 사실들 중에서 어느 것을 구체적 실천이나 사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비판문’이 제기한 양자 역학은 양자 역학의 실험 결과가 당파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양자 역학의 실험 결과를 둘러싼 코펜하겐 해석에서 유물론적 해석과 관념론적 해석이 갈리는 것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 보자. 1+1=2라는 산술 법칙은 그 자체 객관적 법칙이다. 여기에는 어떤 당파성도 없다. 그러나 이를 해석하면서, 본유 관념의 상기라고 한다면 이는 관념론적 해석이다. 그러나 인간 경험의 일반적 추상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하면 이는 유물론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설이나 주장도 사실 부분이나 객관적 부분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나 해석을 평가하는 부분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모든 주장 학설을 당파성으로 일괄적으로 재단할 수 없고 객관적 사실과 구분하여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한다. 이는 쏘련에서 테일러 씨스템을 노동 과정에 도입한 것을 보더라도 그 구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0) 문영찬, 앞의 글, pp. 52-53.

41) ‘비판문’은 개념어가 갖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개념도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변화 발전한다는 변증법적 원칙은 사라지고, 특정 개념어는 그 자체 고유의 내용을 갖는 것으로 사고하는 용어물신성에 빠진다. 용어가 나타내는 사물이나 사고 내용과는 무관하게 용어의 사전적 내용을 절대화시켜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언어란 사고의 형태일 뿐이지 그 자체가 어떤 불변하는 고유의 내용을 갖는 것은 아니다. 금은 가치를 표현하는 형태에 불과한데 마치 가치가 금에서 나오는 듯이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고 내용이 마치 용어 자체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용어물신주의다. 이는 실증주의의 ‘언어는 곧 사고’라고 하는 자연주의적 오류이다.

42) 문장수, ≪데카르트의 역설≫, 역락, 2011.

43) E. V. 일렌꼬프,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연구사, p. 212.

44) 문영찬, 앞의 글, p. 55.

45) 같은 글, p. 54.

46) 같은 글, p. 47.

47) 같은 글, p. 50.

48) E. V. 일렌꼬프, 앞의 책, p. 204.

신재길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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