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회과학연구소

[이론] 맑스주의 철학과 한국의 사회 운동

문영찬 | 연구위원장

 

 

* 이 글은 지난 5월 16일 대구 새벗도서관에서 열린 <새벗 2019 철학 연속 강좌>에서 발표되었던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입니다.

 

 

1. 철학과 정치의 통일로서 맑스주의 철학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11번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맑스의 묘비명이기도 한 이 테제는 맑스주의 철학의 요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맑스 이전에 많은 철학자들은 인류의 정신적, 지적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해 왔으나 그들의 결정적 한계는 세계를 단지 해석해 왔을 뿐이라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맑스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은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관조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근대의 칸트와 헤겔 또한 철학에 중대한 공헌을 했으나 그들의 철학은 역시 세계, 사회에 대한 관조, 해석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맑스는 산업 혁명, 프랑스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의 결과 형성되었던 노동자계급의 진출을 목도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았고 그를 위해 이전의 철학자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기존의 철학의 한계, 특히 독일 고전철학의 한계가 사변적 철학임을 간파하고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제기했다.

철학은 이 세계, 즉 자연과 사회에 대해 총체적인 관점, 세계관을 갖게 해 준다. 역사상 뛰어난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나름의 독특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세계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물질의 운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인지 등이 철학자들 간에 수천 년간이나 논쟁되었고 이러한 논쟁은 철학의 근본 문제라는 형식으로 정식화되기도 했다. 물질과 정신 중에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문제로 철학의 근본 문제가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가 철학의 근본 문제가 되는 까닭은 인간과 자연, 이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이 세계, 외적 세계, 자연의 성질을 대표하는 개념으로서 물질 개념이 추출되었고, 인간 주체를 대표하는 개념으로서 정신, 의식 개념이 추출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의식과 물질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인가라는 철학의 근본 문제는 인간과 자연, 외적 세계의 관계를 수천 년간이나 인간이 사고하고 추상한 결과로 도출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정신이 일차적이라고 보는 철학자들은 관념론의 진영에 서게 되었고 물질, 자연이 일차적이라고 보는 철학자들은 유물론의 진영에 서게 되었는데, 철학의 역사는 다름 아니라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맑스와 그의 동료인 엥엘스는 이전의 철학자들의 성과, 특히 칸트와 헤겔 등의 독일 고전철학을 흡수하면서 그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형성하는 길로 나아갔다. 엥엘스는 ≪반듀링론≫에서 변증법적 법칙을 구성하여 자연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 법칙을 자연 속에서 찾아내어 자연으로부터 전개하는 것1)이라고 정식화하고 있는데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신을 훌륭히 표현하는 것이다. 즉, 이 구절에는 변증법적 법칙이라는 개념보다 자연이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이 표현되고 있고, 변증법적 개념 자체는 자연의 반영임이 제시되고 있다. 이로써 유물론적 지반에 기초한 변증법이라는 관점을 확보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운동하고 있는 물질로 가득 차 있고 끊임없이 생성, 발전, 소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관점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맑스와 엥엘스는 이러한 세계관에 기초하여 사회에 대한 유물론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사(史)적 유물론이다. 사회에 대해 유물론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물질적 기초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인류 역사를 구성하고 사회의 형성과 유지, 발전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것은,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것, 즉 물질적 생산의 문제임을 발견하였고 이러한 물질적 생산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관계가 생산관계를 구성하며, 이러한 생산관계가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형성하고, 그러한 토대 위에 국가와 종교, 예술, 법 등의 상부구조가 성립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계급관계, 자본주의 사회의 경우는 소유계급으로서의 자본가계급,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무산자로서 노동자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립이 사회의 발전을 규정하며, 이는 인류 역사 전체에 걸치는 것으로서 결국,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정식화를 이루어 내었다.

이리하여 맑스는 한편으로 기존의 철학을 변증법 유물론의 세계관으로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사회에 대한 유물론을 추구하면서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이 인류의 역사 발전의 관건임을 파악하였고, 혁명은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지 못하는 생산관계가 계급투쟁의 결과 변혁되는 것임을 밝혔다. 그리하여 맑스는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이루어 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맑스의 공헌은 철학에서 근본적인 혁명을 이룩한 것이었으며 사변적 철학은 철저히 분쇄되었고 기존의 철학은 하나의 단순한 세계관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철학에 포섭되어 있던 많은 내용들은 다양한 개별 과학, 즉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개별 학문들로 분화, 발전하게 되었다.

 

 

2. 철학이 없는 운동의 현실

 

광주 민중 항쟁의 결과 생성, 발전되었던 1980년대의 한국의 변혁 운동은 1990년대 초 쏘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후 한국의 운동은 개량주의적 운동과 조합주의적 운동으로 점차 변화되었고 이론적으로는 맑스주의가 부정되고 운동은 이론적 푯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운동 내적인 요인만 본다면 운동의 역사가 일천하였고 이론적 성숙도가 얕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특히 철학의 영역에서 온갖 소부르주아적 흐름이 득세하였고 맑스주의 철학은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는데 이는 80년대 운동이 급진적이고 나름대로 과학적 길을 추구했지만 그 깊이가 부족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는 지금 현재에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나름대로 전투성을 유지하는 운동의 상당수는 철학이 거세된 채로 저항을 이어 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노동 운동의 현실을 보면 전투적인 노동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 상당수는 조합주의적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 운동은 철학이 없는 운동이고 저항이라 할 수 있는데 그 결과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지만 그러한 투쟁은 일회성으로 그치고 있으며 운동의 발전으로 귀결되고 있지 못하다.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을 철학적 차원에서 해명하고 하나의 세계관으로 발전시키지 못할 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일종인 조합주의에 빠져드는 것은 불가피한 현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전투적 운동을 이어 감에도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전망으로 다가서고 있지 못하고 나아가 변혁적인 당 건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전투적인 조합주의 운동은 그것이 노동자계급의 변혁적인 세계관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운동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운동의 발전을 위한 변혁적인 이론의 기치를 드는 것이 필요하며 나아가 그러한 이론의 문제를 세계관의 차원으로까지 고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철학이 없는 운동의 현실을 말해 주는 현상은 경제주의적 조류이다. 경제주의라는 용어는 레닌에 의해 널리 쓰인 바가 있는데 이는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국가 권력과 맞서는 정치 투쟁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협소한 경제적 투쟁에 머무르는 것을 가리킨다. 경제주의는 정치 투쟁은 혁명적 지식인에게 맡기고 노동자는 경제적 투쟁에 주력한다는 것으로서 이는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의식과 정치적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주의는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두는데 이 또한 철학 즉, 변혁적 이론이 노동 운동의 현실과 결합하지 못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며 동시에 철학이 노동 운동과 결합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결과이기도 하다.

경제주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을 경제적 현상, 영역에 국한하여 본다는 점에서 매우 협소하며 그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세계관이 단순한 하나의 관점을 넘어 세계관이 되는 이유는 경제적 현상만이 아니라 정치적 현상, 나아가 사회 전체를 바라보고 사회의 근본 모순을 고민하고 인간의 역사 전체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 때문이다. 사회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세계관, 인간의 역사 전체를 꿰뚫는 세계관, 인간 사회를 자연의 현상, 전체 우주와 연관 지어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하는 세계관을 가질 때 노동자계급의 운동과 투쟁은 막힘이 없이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조합주의와 경제주의가 운동의 현실의 다수의 흐름인 것은 운동이 그만큼 퇴조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렇게 노동 운동이 변혁적 세계관과 거리가 먼 상태가 지속된다면, 정세가 변화하여도, 공황이 발발하여 지배계급이 수세에 몰린다 해도 운동은 치고 나갈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할 수 없다.

이러한 조합주의와 경제주의는 철학이 없는 운동의 현실을 말해 준다. 의식성, 이론, 세계관의 결여가 바로 이러한 흐름의 특징이다. 그런데 노동 운동의 이러한 현실은 잘못된 이론, 잘못된 철학이 또한 운동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의 반영이기도 하다.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이 잘못된 철학, 사이비 철학, 반맑스주의 철학을 갖고 있는 것과 노동 운동의 철학이 없는 현실은 동전의 양면이다.

철학이 없는 운동의 현실의 또 하나의 모습은 전략을 가지지 못한 급진적 저항의 모습이다. 주로 지식인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모습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분노하고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저항에 나서지만 과학적 이론과 세계관이 결여된 채 저항하고 깨지고 하는 양상을 반복한다. 일부 지식인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모습은 일종의 좌편향인데 이는 노동 운동에서 철학이 없는 현실의 왜곡된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좌편향은 잘못된 철학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인 세계관과 철학을 가지지 못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론적 발전과 성숙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것이다.

 

 

3. 잘못된 철학을 가진 운동의 현실

 

한국 자본주의는 이미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이다. 그 결과 노동 운동의 상층부 상당수는 사회 변혁의 전망을 상실하고 개량주의에 젖어 있다. 이는 문재인 정권의 사회적 합의주의에 적극 호응하는 흐름에서 역력하다. 노동 운동 상층부의 이러한 개량주의는 철학의 면에서 본다면 부르주아적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가계급과의 협조를 통한 노동자의 현실의 일정한 개선이 이들의 최대 목표이다. 이들에게서 노동자계급의 세계관, 의식성, 이론은 찾아볼 수 없으며 노동 운동 내의 부르주아 정치가 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이다.

잘못된 철학을 가진 운동 내의 주요한 또 하나의 모습은 신좌파 운동이다. 유럽에서 68 혁명 이후, 특히 프랑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를 선언하고 유럽의 공산당들이 유로 꼬뮤니즘으로 방향 전환을 하면서, 환경,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인권 등의 다양한 운동들이 생성, 발전되기 시작했다. 이 운동들은 자본주의 모순의 발전의 결과 나타난 것이라는 점에서 진보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운동들이 의식적으로 기존의 맑스주의 운동과 선을 그으면서 사회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부정하고 계급투쟁을 부정하는 것을 토대로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실이 전개된 이유를 보면, 20세기 사회주의에서 특히, 서유럽 공산당들의 개량주의로의 전환이 큰 이유이지만 이러한 신좌파 운동의 내적인 논리 또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푸코의 경우 의식적으로 계급적 접근을 반대하고 변증법을 반대하면서 사회에서 억압받고 배제되는 다양한 영역의 연대를 하나의 대안적 전략 논리로서 제기했다. 이러한 푸코의 논리는 신좌파 운동의 논리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이 논리는 겉으로는 다양한 저항 세력들을 묶어 낸다는 것을 표방하지만, 결정적으로 사회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신좌파 운동이 진보적 가치를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혁적일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 그리고 그렇게 변혁성을 상실한 진보 운동이라는 것은 결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없고 결국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보완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사회에 대해, 사회적 현상에 대해 계급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가장 근본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회의 형성과 유지, 발전은 경제적 생산관계,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계급관계에 의해 근본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에 근거한 것이다. 즉, 사회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근거 지우는 것은 사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에 의한 것이며 푸코의 경우 맑스주의 철학을 부정하는 것을 토대로 저항을 꿈꾸기 때문에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비과학적인 논리의 제기에 빠져든 것이다. 푸코가 사회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권력의 섬세한 그물망,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감시의 시선과 판옵티콘을 제기한 것은 성과이지만 사회에 대한 계급적 접근을 부정한 것은 엄격히 비판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좌파 철학 외에도 다양한 소부르주아 철학이 운동에서 행세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알튀세르를 들 수 있는데 알튀세르는 20세기 사회주의의 한계와 오류에 대한 문제 제기자로서 출발했지만 소위 이론적 실천이라는 것을 들고나오면서 방향을 잘못 잡고 이후 프랑스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포기를 선언하자 맑스주의에 대한 청산주의의 길을 걸었다. 알튀세르주의자 스스로 알튀세르의 공헌으로 들고 있는 것은 운동을 청산한다는 부담 없이 맑스주의를 편안하게 청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운동사적으로 볼 때 알튀세르가 맑스주의 운동의 청산의 통로였다는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기존의 운동의 한계와 오류에 대한 문제 제기이지만 실제로는 맑스주의 운동 자체에 대한 청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알튀세르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지금의 운동 현실에서 배제에 대한 저항을 들고나오는데 이는 실제로는 푸코류의 담론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들에게서도 계급적 접근은 사라지고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데, 변혁 운동이 퇴조하면서 그를 대체한 것이 시민운동이다. 다양한 시민 단체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신좌파 운동의 형태를 띠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은데 이들 시민운동의 세계관은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많은 시민 단체 활동가들은 이미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인적 자원의 새로운 공급원이기도 하다. 소부르주아적 관점의 활동이 사회적으로 성공할 경우 부르주아적 관점으로 이행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성상 필연적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시민운동에 대해 그들의 세계관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이들 운동들을 노동자계급의 편으로 끌어당기면서 시민 사회의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세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4. 운동의 무기, 계급투쟁의 무기로서 철학

 

맑스주의 철학은 철학과 정치의 통일을 이루면서 현실의 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고 또 운동의 주체로서 역할을 해 왔다. 맑스주의 철학의 이러한 특징은 20세기 사회주의, 쏘련의 붕괴로 인해 사라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쏘련 붕괴의 정치적 결과와 그 영향을 극복하면서 맑스주의 철학을 벼려 내어 운동의 무기로 쓰이도록 하는 것이 정확한 방향이다.

 

1) 세계관으로서 철학

맑스와 엥엘스가 철학에서 이룩한 혁명은 철학의 과학적 세계관으로의 전화로 요약된다. 기존의 사변적 철학은 세계관, 자연 철학, 논리학, 미학, 언어학 등등 일체의 학문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즉, 현재의 자연 과학과 사회 과학의 일체의 내용이 철학에 포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맑스와 엥엘스는 철학의 본질은 의식과 물질이라는 철학의 근본 문제를 중심으로 세계를 분석하고 조망하고 실천의 방향을 이끌어 내는 세계관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기존에 존재론에 해당하는 영역은 개별 과학으로 해소되는 것임을 밝혔다.

사실 세계관이라는 개념의 의미는 막대한 것이다.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자신의 세계관을 갖기 위해 분투했다는 점이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수천 년에 걸친 투쟁의 역사는 올바른 세계관을 위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 나아가 한 집단 그리고 계급에게 있어서 세계관을 갖는가, 아닌가 그리고 어떠한 세계관을 갖는가는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서 세계관은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계급에게 있어서 세계관을 갖는 계급은 세계관을 갖지 못하는 계급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세계관을 갖지 못하는 계급, 집단은 분해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묶어 주는 끈이 없거나 있어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관은 계급적 의식의 형성과 단결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세계관을 가질 경우 계급으로서의 단결의 중요한 필요조건을 확보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해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즉, 노동자계급이 세계관을 획득할 경우 전 사회적인 계급으로 올라설 수 있으며 자본가계급에 맞서는 투쟁에서 전 민중을 자신의 주위에 결집시킬 수 있게 된다.

 

2)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을 추동하는 철학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은 구체적으로 강령, 조직, 전술로 표현되는데, 세계관 이외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필요로 하며 나아가 사회와 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맑스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과학을 세웠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 생산력의 발전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운동으로서 사회의 진보와 혁명, 자본주의의 축적 법칙에 따른 다양한 계급의 형성과 몰락 그리고 그 결과로서 노동자계급의 발전, 착취의 메커니즘과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 그리고 이제는 기존의(20세기의) 사회주의 사회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 그리고 그 교훈 등등에 대해 오직 과학적 사회주의로서 맑스주의만이 정확한 답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한 영역의 이론은 세계관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며 또 세계관은 그러한 이론을 담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이 없었다면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형성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며 또 각 영역의 이론은 단편적인 명제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총체적인 변혁의 이론으로 통일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통일될 때만 살아 있는 이론이 되며 변혁의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의 역할은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포함한 현실, 특히 인간 사회의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모순에 찬 운동을 한다. 이에 대해 변증적 유물론은 유물론적 인식론, 모순론 등을 매개로 변화하는 현실을 이론화하게 한다. 한편으로 인간의 인식은 이 세계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인식론은 이론은 현실의 반영임을 분명히 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모순 개념을 핵심으로 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변화의 동력, 원인, 방향성을 과학적으로 이론화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논리학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이다.

 

3) 전위의 의식성의 내용으로서 철학

맑스주의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점에서 이론적 학습을 요구하는 것이다. 역사, 경제, 전략과 전술, 조직론, 국가론 등에서 맑스주의는 학습되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는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이 갖는 특성과 연관되는데,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라는 계급 사회를 지양하고 계급대립을 철폐하여 다른 모든 계급을 해방시킬 때만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즉, 노동자계급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는 것을 자신의 역사적 사명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은 다른 모든 피억압계급을 이끌고 투쟁하는 전위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이 전위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무장되어야 하며 전위의 의식성의 내용은 이러한 과학적 이론으로 구성된다.

철학은 세계관으로서, 전위의 의식성의 주요한 내용이 된다. 과학적 이론의 각각의 영역, 예를 들면,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심지어 자연 과학에 있어서도 이론적 쟁점이 있을 때, 그것의 올바름을 최후에 판단하게 해 주는 것은 철학이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의 세계관이 어떤 쟁점, 이론적 내용에 대한 올바름의 준거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어떤 접근이 관념론적인지 아니면 유물론적인지, 그리고 그 방식이 형이상학적인지 변증법적인지, 그리고 그 논리의 구성이 형식 논리학인지, 아니면 변증법적 논리학인지 등이 분석되고 숙고되면서 어떤 쟁점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서서히 형성해 나갈 수 있고 전위의 의식성은 주관적인 의지가 아니라 이러한 과학적인 이론적 태도 속에서 현실적인 내용을 형성해 갈 수 있다.

 

4)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구심의 형성과 철학

지난 촛불 시위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 중 가장 강대한 반동적 분파를 패배시킨 바 있다. 그리고 지금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가 전개되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 중 자유주의적 분파와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치적으로 절연하고 독자성을 실현하면서 계급적 단결을 강화해 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급적 단결의 강화는 단결의 구심을 필요로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기치를 드는 것이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의 기치를 들 때만 자본가계급과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있고, 조합주의, 경제주의 등 온갖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는데 노동자계급의 단결의 구심의 형성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실현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세계관이 성립하고 대중적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다. 독자적 세계관 없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계관으로서 철학이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그리고 맑스주의는 철학과 정치의 통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세계관을 성립시킨 바 있다. 쏘련의 붕괴 후에 자본가계급과 청산주의자들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은 매장되고, 배척되고 수난을 겪었지만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독자적 계급으로서 다시 정립되기 위해서는 그 필요조건으로서 세계관으로서 철학이 자리 잡아야 한다.

 

5)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와 철학

현재 문재인 정권은 박근혜 정권과 달리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사하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사실상 억압 일변도의 정책을 편 것과 달리 문재인 정권은 민중들의 동의와 민중들에 대한 억압 혹은 폭력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지배를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헤게모니적 지배는 자본가계급의 힘이 강화되었다는 것, 그 위치가 공고화되었다는 것의 표현인데 자본가계급은 이러한 헤게모니적 지배로써 시민 사회의 영역에서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이러한 헤게모니적 지배에 맞서서 노동자계급의 스스로의 헤게모니를 성립시키고 문재인 정권의 지배에 맞서야 한다. 즉,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헤게모니를 성립시키고 강화하는 것 이외에 문재인 정권에 맞서는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성립시키고 행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세계관이 필요조건이다. 즉,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철학, 세계관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헤게모니가 행사되고 시민 사회의 영역에서 문재인 정권의 헤게모니, 즉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에 맞서는 과정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단결을 이룩하고 그에 기초하여 노동자계급 이외의 민중들에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동의를 얻는 과정인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철학, 세계관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민중들을 노동자계급의 입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강제가 아니라 끈기 있는 설득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이야말로 이러한 설득을 가능하게 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은 무산자계급이기 때문에 자본가계급처럼, 재정지원, 혹은 법적인 조치 등의 개량, 혹은 당근을 민중들에게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노동자계급은 세계관을 가진 계급으로서, 독자적인 세계관을 갖지 못한 많은 민중 부문과 동요하는 세력을 견인할 수 있고 자신의 입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세계관을 무기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것은 이와 같이 세계관으로부터 도출되는 노동자계급의 전망을 무기로 자본가계급의 전망과 다른 전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민중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강제가 아닌 헤게모니의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며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은 헤게모니의 성립과 행사에서 하나의 필요조건이다.

 

 

5. 혁명의 대수학으로서 변증법

 

변증법은 노동자계급 해방 운동의 역사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와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가장 집요한 공격을 받아 왔고 지금도 받고 있다. 현재 유행하는 철학자들, 예를 들면, 푸코, 들뢰즈, 데리다, 라캉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 이외에도 니체, 프로이트, 후설, 하이데거, 하버마스, 알튀세르, 발리바르, 그리고 지젝 등 다양한 서구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변증법을 의식적으로 부정한다는 점이다.

이들이 변증법적 인식을 부정하고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본질과 현상은 하나라는 본질 직관의 방식(후설, 하이데거 등)이거나 아니면 푸코, 니체 등과 같이 반과학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면서 겉으로 저항을 내세우는 것이다. 하버마스의 경우 자신의 의사소통 행위론을 내세우면서 의식적으로 맑스주의의 사적 유물론을 해체하여 변혁성이 거세된 사회 이론으로 전화시키려고도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이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은 결코 매장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하면서 새로운 사물, 새로운 질이 탄생하고 다른 것으로 전화하고 또 운동의 내부를 보면 대립하는 모순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며 변증법은 이러한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이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2007년의 세계 금융위기 혹은 대공황은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폭발한 것에 다름 아니다. 쏘련 붕괴 후에 자본가계급의 독재가 심화되면서 노동자계급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열시키는 것을 기초로 소위 복지 국가에서 내주었던 개량의 성과물을 탈취하면서 착취의 정도를 높이고 자본주의의 부패성이 높아지면서 그 모순이 금융위기로 폭발했던 것이다. 심화되는 빈부 격차, 자본가계급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가일층의 억압을 변증법적 모순 개념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변증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성립한 형식 논리학을 딛고 근대 철학과 과학의 성과로 정립되었고 또 세계관과 논리학으로 발전하여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은 모순율을 핵으로 하여 2천 년 동안 지고의 진리로 간주되어 왔으나 자연과 인간 사회에서 변화하는 다양한 현상과 본질의 내용을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논리형식상의 옳고 그름만을 판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봉건제도가 일소되고 자유, 평등의 이념이 외쳐지는 상황에서 자연과 사회를 어떤 변화의 과정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져 왔고 독일 고전철학에 이르러 헤겔에 의해 일목요연한 논리학으로서 변증법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관념론의 지반 위에서의 논리학이었으며 신비화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겔은 변증법을 개념의 자기운동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헤겔의 관념론적 한계는 맑스와 엥엘스에 의해 극복되고 맑스와 엥엘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거꾸로 세워서 올바르게 정립하였다. 즉, 유물론적 변증법으로 개작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변증법에 대한 일체의 신비로운 관점은 사라지고 이 세계는 끊임없이 생성, 발전, 소멸하는 물질의 운동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관점, 유물론적인 변증법적 세계관이 성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논리학으로서 변증법은 유물론적 인식론에 입각하여 발전했다. 인간의 인식의 본질은 이 세계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인식론에 따를 때, 변증법의 다양한 개념들, 그리고 변증법 자체도 변화, 발전하는 자연과 사회의 변화 과정을 개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관점이 성립했던 것이다. 논리는 현실의 반영이며 심지어 논리보다 역사가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적 관점으로 인해 변증법적 논리학은 유물론적 지반 위에서 확고하게 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역사는 유물론적으로 파악되어, 발전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규정된다는 관점, 혁명은 그러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결과라는 인식이 맑스에 의해 정립되었고 그러한 생산관계에서 비롯되는 계급대립과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이라는 관점이 정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변증법은 혁명의 대수학으로 불렸는데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대립의 현실을 변증법적 모순 개념으로 설명하고 혁명을 계급대립의 양적 발전의 질적 전화에 의해 설명하고 변증법적 부정과 지양의 개념으로써 사회적 진보의 경향을 설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자본가계급에게 있어 사회 혁명의 필연성을 긍정하고 나아가 변혁의 경로를 제기하고 또 계급투쟁의 무기로 쓰이는 변증법은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헤겔이 부르주아 사회에서 배타시되었던 것도 자본가계급이 진보성을 상실하고 보수화되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후 부르주아 철학은 대부분 칸트를 재탕하고 우려먹는 수준에 머물거나 아니면 반과학을 내세우면서 노골적인 비합리주의의 길을 걸었다.

지금도 한국 사회의 모순에 찬 현실은 변증법을 빼고는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나아가 노동자계급의 해방 운동에 있어서 운동을 본질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변증법적 지양 개념이 사라질 수는 없다. 맑스는 운동의 본질에 대해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운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성찰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지양이라는 변증법적 개념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의 열악한 운동 현실을 규정하는 커다란 요인으로서 쏘련의 붕괴에 대한 해명도, 맑스주의 철학, 변증법적 개념의 도움을 받을 때만 가능하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부딪혔던 어려움과 곤란, 그리고 오류는 맑스가 정립한 사적 유물론의 개념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쏘련 사회주의는 거대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수정주의와 경제 정책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개혁이 실시되어, 발전하는 생산력과 후퇴된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쏘련 사회가 깊은 경제 침체의 늪에 빠지고 이에 대해 우편향적인 잘못된 대처가 끝내 쏘련을 붕괴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금 맑스주의 철학은 하나의 세계관과 논리학으로 재정립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쏘련의 붕괴를 해명하고 지금의 자본주의 현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무기로서, 운동의 무기, 계급투쟁의 무기로서 재탄생되어야 하는 도정에 놓여 있다.  노사과연

 

 


1) F. 엥엘스, ≪반듀링론≫(≪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5권), 박종철 출판사, p. 155.

문영찬 연구위원장

1개의 댓글

  • 현 정세에 너무나 절실한 문서입니다. 무엇보다 마극사/마르크스를 내세우지만 청산주의를 감추거나 노정한 사례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라도 더욱 이러합니다. 소시민적인 사조들의 소멸의 도래를 소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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