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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혁파를 위하여
오늘 폭로문서는 장정일의 한국일보 칼럼 ‘선거가 곧 민주주의일 수야’로 현 시기 선거와 관련을 둔 마지막 문서인데 무엇보다 직접 민주주의의 상상력의 한계를 폭로한 문서입니다. 문서는 먼저 작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하게 언급한 후 소위 현 상황에서의 탈출의 도구로서의 ‘선거’를 폭로에 마지않았습니다. 연결해서 현 시기의 배반적인 누구들의 역할을 폭로했고 소위 대의제 정당 민주주의(다만 누군가는 정당 민주주의의 부재를 폭로한 바 있습니다.)의 관성을 폭로했습니다. 여기에서 도서 1권을 소개했고 이 도서는 다비드 판 레이브라우크의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이고 이로부터 ‘선거 근본주의’화 했음을 실토합니다. 이어서 이로 인한 역설도 폭로했는데 바로 선출한 선량들은 혐오하면서도 선거 자체는 숭배하는 상황입니다. 이 점은 누군가 질문했던 정확하게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도서를 추가로 제시할 수 있는 상황인데 제목만을 원용하면 그야말로 한 도서와 학자보다도 더 못한 사고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서는 계속해서 소위 ‘선거 (근본)주의자’들의 행태들을 폭로했고 현 시기까지의 다수의 부정적인 인물들의 당선사례들도 폭로해 대의제 민주주의의 허상을 결론으로 설정 했습니다. 일단 이 결론에서 전항에서 언급한 다비드 판 레이브라우크의 ‘민주주의의 왕가’ 까지는 어느 정도 맞다 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문서는 다음에서는 무엇보다 극복해야 할 철학자들을 주로 나열, 언급했고 이어 우파의 선거회의론을 제시하면서 가장 비근한 예로 카를 슈미트와 생소한 한스헤르만 호페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를 호명해 왕과 대통령(& 선출 귀족들)간의 차이를 폭로했습니다. 문서는 말미에서 ‘대의제’의 대안으로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것은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질타했고 추첨제의 적용한계에 대해 언급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불란서/프랑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적극적 투표 거부 자들이 커지기 전에 다양한 선거 제도의 개혁을 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종결했습니다. 이 점은 이미 노동당과 녹색당 등에서 지속 제기하는 문제이지만 동시에 이들의 한계 등으로 인해서 선거시기에만 부상했다가 선거 계절을 지나면서 수면 하로 잠수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점은 이 선거제도 개혁을 주장하는 정당들의 존재적 필요성의 설득을 실패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방법에서 독자성을 찾을 수 없는 등의 여러 가지 모순적 이유로 인해서 발생하는 사안입니다. 더해서 변혁진영 일각의 경제주의의 문제 등으로 인한 이 선거제도의 혁파와 같은 비 경제적 사안까지는 주도력 행사를 하지 않는 이유도 공범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단 선거 일정만 돌입하면 ‘선거 근본주의’는 너무나도 자주 출몰하는 데 ‘선거제도 혁파(또는 개정)’의 주제는 이 만큼도 논의하지 못하는 현실 정확히 이 혁파를 실행할 중심의 부재의 문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로 자주 등장하는 추첨 역시도 직접 민주주의의 범위 협소에 기여하는 바 이들의 광장 등에서의 존재 가령 지난 시기의 광장에서의 투쟁과 같은 종류의 더 직접적인 직접 민주주의도 존재하는 사실을 각성해야 합니다. 이미 누군가는 지난 시기의 투쟁의 광장의 상설화도 주창한 적이 있는데 이를 추진하면서 이후 구성원의 동질성을 고양한 후 추첨과 같은 단계도 실행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고 이 문서 역시 지면의 한계로 인한 그리고 주제적인 면에서 생략한 것인데 선거제도의 혁파와 동시에 이들의 상설화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행할 임무도 일정 부분 이상 부여받은 상황입니다. 이런 점들은 변혁 파 일부의 의견대로 하자면 역설적인 현상으로도 볼 수 있는데 선거제도의 문제를 폭로하고 실천하는 것 또한 변혁 파들의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투쟁을 벌이는 지점들에 대해서도 직접 민주주의라는 인식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인데 이것 역시도 사상 & 주의의 부활과 확립 과정에서 인지할 수 있습니다. 현 시기 대의 민주주의의 대안 당연하게 부상해야 하나 이제까지 경험한 것처럼 지난 1/4세기(25년)전의 후퇴를 역전할 인식의 성장을 요하고 20세기 변혁과정의 정명과 정 인식을 확립해야 직접 민주주의를 각성, 정착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기 특히 20세기로 돌입하면서 발생, 정착한 보통선거제도는 개량주의와 수정주의의 온존 구조를 형성했고 변혁의 역사의 진행을 봉쇄한 바 있습니다. 이는 구주 수정주의/유로 코뮤니즘과 같은 체제 내적 투항을 가속한 바 있는데 이로 인해서 변혁의 문제는 멀어지고 20세기 말의 대 붕괴를 거친 후 1/4세기(25년)까지 밀려 온 것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과학변혁의 사상, 주의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거의 올바른 활용 론(즉 선거를 선전 공간으로 사용하는)을 위시한 전면적인 주의의 재탄생과 이를 토대로 한 변혁을 진행하는 것은 필연인데 이를 위해 ‘선거 근본주의와의 투쟁’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정일의 한국일보 칼럼 ‘선거가 곧 민주주의일 수야’의 주소는 제시 주소와 같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469&aid=000020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