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회차] ≪독불연보≫에 실린 편지 등
작성자
해인
작성일
2013-09-17 18:12
조회
599
2회차 9월 23일 8시~
공산주의와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 ≪독불연보≫에 실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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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논설 “공산주의와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은 마르크스가 ≪라인신문≫의 편집인으로서 쓴 첫 번째 논설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의 편집국장인 구스타프 콜프에 의해 작성되어 1842년 10월 11일에 발표된 논설 “공산주의론”에 자극을 받아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이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신문 토론에 참가하게 된다.
81) 모제스 헤쓰의 서문이 붙은 논설 “베를린의 가족의 집”을 ≪라인신문≫은 1842년 9월 30일에 게재하였다.
1820년과 1824년 사이에 건립된 베를린의 가족의 집은 약 400세대가 들어 있고, 대개는 한 세대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3층 건물 다섯 동이다. 1840년에 이 집에서 3000명의 사람들이 궁핍 속에서 살았다. 이따금 여러 가족이 방 하나를 나누어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82) 마르크스는 1842년에 잡지 ≪메리프토펠레스, 현재 독일에 대한 평론, 스케치 및 개관≫이 게재한 논설 “가장 천한 모습의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을 가리키고 있다.
83) 1842년 10월 7일자 ≪라인신문≫에 실린 통신문 “학자 대회”에 관한 것이다. ≪라인신문≫은 1942년 9월 28일부터 10월 9일까지 개최된, 공장 노동자의 사회적 상태를 향상시킬 수단에 대하여 논의한 제10차 프랑스 과학대회에 관하여 정기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대회에는 독일, 스위스, 영국, 벨기에, 러시아와 그 밖의 나라들에서 온 학자들이 참가하였다.
84) 1842년 10월 11일자 ≪알게마이네 짜이퉁≫에 실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기이네의 논설 “관세 대회”
85) 1842년 10월 11일자 ≪알게마이네 짜이퉁≫에 실린 통신문 “런던, 10월 15일”을 가리킨다.
86) 자주민들(Die Autonomen)은, 1815년 6월 8일의 독일 연방 약관을 근거로 현행 주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토지와 가족 관계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게 된 영주 가족과 백작 가족의 대리인들이었다. 중세 토지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토지 분할의 제한을 요구하였다. 라인주에서는 프로이센 정부가 법률에 의하여 더 이상의 토지 분할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법안은 제6차 라인주의회의 의원들에 의해서 부결되였다.
87)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2b 12.
88) 빌헬름 코제가르텐, ≪특히 프로이센 군주국의 몇몇 주의 경우에 있어서 토지소유의 양도 가능성과 분할 가능성에 관한 고찰≫, 본, 1842, 98.
89)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재산이란 무엇인가? 법과 정부의 원리에 관한 연구. 첫 번째 기록≫, 파리, 1840.
90) 바르떼르미 프로스페 앙팡뗑이 창설한 팔랑스테르(푸리에의 이념에 따라 만들어진 집단 노동 조직을 가진 농업적, 공업적 생산 및 소비 조합)의 구성원인 쉬스타브 데시딸을 다루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144) 이 세 편지는 마르크스가 루게에게 썼다. 이것은 ≪독불연보≫에 “1843년의 편지교환”이라는 기고문으로 실렸는데, 이 기고문에는 루게와 바쿠닌, 포이에르바흐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루게는 마르크스의 편지들을 편집 교정하였다.
145) 마르크스는 프로이센인들을 앞 러시아인들로, 니콜라우스 1세를 모든 뒷 러시아인들의 주인으로 풍자하고 있다.
146) 1843년 8월 루게는 마르크스에게 ≪독불연보≫를 파리에서 발행하겠다는 자신의 단호한 결단을 알려주었다. 그전에는 특히 슈트라스브르크와 스위스 지역들에서 발간되었다.
147) 에띠엔 까베, ≪이카리아로의 여행≫
공산주의와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 ≪독불연보≫에 실린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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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논설 “공산주의와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은 마르크스가 ≪라인신문≫의 편집인으로서 쓴 첫 번째 논설이다.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의 편집국장인 구스타프 콜프에 의해 작성되어 1842년 10월 11일에 발표된 논설 “공산주의론”에 자극을 받아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고 이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신문 토론에 참가하게 된다.
81) 모제스 헤쓰의 서문이 붙은 논설 “베를린의 가족의 집”을 ≪라인신문≫은 1842년 9월 30일에 게재하였다.
1820년과 1824년 사이에 건립된 베를린의 가족의 집은 약 400세대가 들어 있고, 대개는 한 세대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3층 건물 다섯 동이다. 1840년에 이 집에서 3000명의 사람들이 궁핍 속에서 살았다. 이따금 여러 가족이 방 하나를 나누어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82) 마르크스는 1842년에 잡지 ≪메리프토펠레스, 현재 독일에 대한 평론, 스케치 및 개관≫이 게재한 논설 “가장 천한 모습의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 짜이퉁≫”을 가리키고 있다.
83) 1842년 10월 7일자 ≪라인신문≫에 실린 통신문 “학자 대회”에 관한 것이다. ≪라인신문≫은 1942년 9월 28일부터 10월 9일까지 개최된, 공장 노동자의 사회적 상태를 향상시킬 수단에 대하여 논의한 제10차 프랑스 과학대회에 관하여 정기적으로 보도하였다. 이 대회에는 독일, 스위스, 영국, 벨기에, 러시아와 그 밖의 나라들에서 온 학자들이 참가하였다.
84) 1842년 10월 11일자 ≪알게마이네 짜이퉁≫에 실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기이네의 논설 “관세 대회”
85) 1842년 10월 11일자 ≪알게마이네 짜이퉁≫에 실린 통신문 “런던, 10월 15일”을 가리킨다.
86) 자주민들(Die Autonomen)은, 1815년 6월 8일의 독일 연방 약관을 근거로 현행 주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들의 토지와 가족 관계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게 된 영주 가족과 백작 가족의 대리인들이었다. 중세 토지 소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은 토지 분할의 제한을 요구하였다. 라인주에서는 프로이센 정부가 법률에 의하여 더 이상의 토지 분할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법안은 제6차 라인주의회의 의원들에 의해서 부결되였다.
87)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2b 12.
88) 빌헬름 코제가르텐, ≪특히 프로이센 군주국의 몇몇 주의 경우에 있어서 토지소유의 양도 가능성과 분할 가능성에 관한 고찰≫, 본, 1842, 98.
89)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재산이란 무엇인가? 법과 정부의 원리에 관한 연구. 첫 번째 기록≫, 파리, 1840.
90) 바르떼르미 프로스페 앙팡뗑이 창설한 팔랑스테르(푸리에의 이념에 따라 만들어진 집단 노동 조직을 가진 농업적, 공업적 생산 및 소비 조합)의 구성원인 쉬스타브 데시딸을 다루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144) 이 세 편지는 마르크스가 루게에게 썼다. 이것은 ≪독불연보≫에 “1843년의 편지교환”이라는 기고문으로 실렸는데, 이 기고문에는 루게와 바쿠닌, 포이에르바흐의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루게는 마르크스의 편지들을 편집 교정하였다.
145) 마르크스는 프로이센인들을 앞 러시아인들로, 니콜라우스 1세를 모든 뒷 러시아인들의 주인으로 풍자하고 있다.
146) 1843년 8월 루게는 마르크스에게 ≪독불연보≫를 파리에서 발행하겠다는 자신의 단호한 결단을 알려주었다. 그전에는 특히 슈트라스브르크와 스위스 지역들에서 발간되었다.
147) 에띠엔 까베, ≪이카리아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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