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철학 강좌: 변증법적 유물론 (11월 7일부터 매주 월)

세계철학사8권10절

작성자
로두스
작성일
2015-11-17 17:20
조회
226

세계철학사8권 제10장

독점자본주의 이전시기의 러시아 철학사상과 사회학사상의 발전

-1860년~1890년대-

1861년 개혁으로 부르주아 경제제도가 경제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확립 되었고 생산력은 더욱 빨리 발전하기 시작 하였고, 임금 노동자의 수는 1897년 약 천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제 관계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농노제의 강고한 유물과 뒤섞여 있어서 지주적 토지소유와 농노에 대한 반봉건적 농민착취는 여전히 잔존 하였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사회생활은 자본주의 시대의 새롭고 근본적인 주요한 모순으로 더욱 강화 되었다. 지주적 토지소유와 지주적 권력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하는 농민과 지주계급간의 적대적 모순은 첨예화 되었다.

1879~1881년에 러시아에는 새로운 혁명적 정세가 나타났다. 농민대중들의 극심한 궁핍과 참상은 광범위한 농민을 봉기로 나서게 하였다. 노동자의 파업과 봉기가 거의 모든 공업 중심지를 휩쓸었다.

1877~1878년에 일어난 전쟁으로 민중의 어깨는 더욱 짓눌렸고 불만은 더욱 고조 되었다. 이 시기 나로드니키 조직 (‘토지와 자유’와 ‘인민의 의지’)의 혁명적 활동이 전개되었다. 1879~1881년의 혁명적 정세는 혁명으로 발전하지 못 하였는데 왜냐하면 인민대중을 조직하여 혁명투쟁으로 이끌어 나갈 만한 강고한 세력이 없었다. 나로드니키 사조는 “자유주의적 지주적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대중적 소부르주아적 투쟁”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고, 해방운동의 지도이론으로서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과학적 이론과 그에 기초한 새로운 혁명 조직이 요청 되었다. 이 시기 러시아 사회사상에서 가장 새롭고 성과가 많은 사조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마르크스)의 학설이었다.

러시아 지주계급과 부르주아지는 대게 가장 노골적인 종교적, 교회적 사조로부터 허위과학인 실증주의까지 잡다한 관념론 철학의 담당자이자 전도자였던 반면, 해방운동과 사회사상의 훌륭한 대표자들과 선진 과학자들은 1840년대에서 1860년대에 혁명적 민주주의 파가 지녔던 철학적 유물론의 방향을 옹호 하였다.

과학적인 철학으로서 철학적 사고의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던 것은 마르크스의 이론 이었다.

1. 체르니셰프스키 후계자들의 유물론적 세계관

니꼴라이 바실리예비치 셸구노프(1824~1891)

셸구노프의 사상적 원천은 유물론 철학 이었고, 벨린스키를 높이 평가하였고, 헤르첸 오가료프와 교류 하였다. 셸구노프의 견해의 형성과 활동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체르니셰프스키였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부탁으로 격문 「젊은 세대에게」「병사에게」를 써서 1860년대 초의 농민개혁을 통렬히 비판 하였다. 비밀혁명 단체인 ‘토지와 자유’의 활동에 참가 하였으며, 과도한 혁명 활동으로 인한 유형 활동 기간의 셸구노프의 중요한 노작으로는 『토지와 유기적 생명』『진보의 조건』『무지의 손실』『교육에 관한 편지』등의 저작이 있고, 그의 혁명적 공적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등에 의해 찬양 되었다.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하여 사회를 혁명적으로 개조하려는 사상을 옹호하고, “자유주의의 무가치함.........., 자유주의가 사회적 도구로서 쓸모없다는 사실”을 비판하였다. 동시에 혁명적 민주주의자 혹은 농민의 대변자 입장에서 자본주의 제도는 착취제도라고 비판 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이미 자신의 권리를 선언한 항상성을 지닌 사회계급 이라고 고찰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갖는 역사적 역할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나로드니키적 환상에 발목이 잡혀 농민공동체를 사회적 개조의 모델로 삼으려 하였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유물론적 방향을 받아들여 다양한 철학체계와 도덕 및 예술이론은 여러 계급이나 당파의 이해를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했으며, 유물론과 그가 말하는 실제론(realism)을 현존 제도에 반대하는 투쟁에 봉사하는 철학으로 보았다.

물체의 운동및 물체형태의 형성은 정확히 규정된 물리적 법칙에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였고, 목적론이나 신학적 이론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자연의 객관적 합법칙성을 승인하였다.

셸구노프의 세계관에는 변증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을 부단히 변화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운동과 변화의 발전법칙을 자연과 사회생활의 모든 현상에까지 확장시키려고 노력 하였다. 대립물의 투쟁은 생명의 법칙이자 생명의 전진적인 발전의 원천으로 보았다.

인식과정의 기본적인 계기는 자극이며, 자극은 외적환경이 우리의 감각기관에 전해져 감각으로 이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인식능력을 무한하다고 보았으며, “생명의 가동적인 형태가 가동적인 사상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기초하여 개념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는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를 알 수 없다”는 칸트의 명제는 셸구노프의 유물론적 인식론의 의의와 정신에 모순된다.

미학에서도 유물론적 원리를 계승하고 사상적, 선진적 예술을 옹호하기 위한 열렬한 투사가 되었다.

막심 알렉셰비치 안토노비치 (1835~1918년)

안토노비치는 문학평론가이자 사회평론가였으며, 자연과학적 지식이 풍부한 선전가였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사상가 및 사회활동가가 되었다. 1860년대에는 ‘토지와 자유’의 활동에 참가 하였으며, 『소브례멘니크』지에 발표한 여러논문- 「현대철학자의 두 가지 유형」 「헤겔철학에 관하여」 「현대생리학과 철학」「현대철학」등-에서 그의 견해를 피력 하였다.

혁명적 민주주의파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지지하였으며, 다윈주의를 옹호하였고, 베히(도표)주의의 반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비판을 가했다. 유물론과 관념론사이에 중간은 없다고 단언 했으며, 존재와 사고의 관계에 대한 문제가 철학을 서로 대립하는 두 유파로 나누는 분수령 이라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우세하기 시작한 19세기말~ 20세기 초의 혁명운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 이전의 유물론적 입장에 머물러 있었다.

안토노비치는 당시 생리학의 성과인 세체노프의 대뇌 반사 설에 입각해있었다. 사고가 현실의 가장 본질적인 제 계기를 개괄하는 복잡한 과정을 통해 개념이 형성 된다고 보았다.

수학의 공리조차도 실재적 존재 실재적 관계와 완전히 조응 한다고 보았다. 플라톤 헤겔 칸트 쇼펜하우어등의 관념론 체계를 비판 하였으며 관념론은 완전히 끝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천 및 경험을 지식의 진리성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보았다.

그러나 안토노비치는 변증법적 방법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었다. 특히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에는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하려는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자연현상의 상호연관과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 라이엘과 다윈의 발견을 끌어 들였다.

사회에도 변증법적 발전의 원리를 적용하려 하였고, 체르니셰프스키의 미학의 기본 명제를 옹호했다.

미하일 에브그라포비치 살티코프-시체드린(1826~1889년)

러시아의 위대한 풍자작가 살티코프-시체드린은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의 단원 이었다,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상에 공명하고 있었지만 푸리에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점점 푸리에의 이론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황금시대’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으며 현존 사회제도는 새로운 제도로 바뀔 것이고 이 새로운 제도가 인간 본성의 여러 근본적인 요구에 틀림없이 답할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 풍자작가는 『페테르부르그 시골뜨기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약탈자’야말로 현대의 진정한 대표자이며,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늘어빠진 인간 유형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다,” (탈 탈 탈자로 끝나는 말은?)

인민의 ‘무자각’과 싸우고 인민에게 권리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혁명적 민주주의 지식인의 첫째 임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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