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마당: 이 달의 역사] 광주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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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영 | 회원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당긴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대규모 무력 앞에 진압당했지만 결코 패배라 말할 수 없는 승리의 투쟁사로 기록될 오월의 역사!

이번 호 <이 달의 역사>는 바로 그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당시의 처참하고 장엄한 역사의 현장을 자세히 다루기보다는, 항쟁의 성격과 배경, 그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5ㆍ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 문제

 

명칭은 곧 역사적 사건의 성격 규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광주민주화운동은 6공화국 노태우 정권이 붙인 이름이다. 이 명칭은 13대 대통령에 당선됐던 노태우가 설치ㆍ운영했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1)가 5ㆍ18을 민주화운동으로 평가한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당시 5ㆍ18이 의거, 항쟁으로 규정되면 군의 진압책임이 거론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화투쟁의 일환이라는 입장을 민화위가 취하였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보수-폭동, 진보-민주화운동이라는 이분법적 선동을 펼치는 세력이 있으나, 이는 명백한 사실 왜곡으로, 실제는 노태우와 집권 여당이 자신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프레임이었던 것이다.2)

 

 

따라서, 민주화운동은 그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최소한 항쟁 또는 투쟁으로 규정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즉, 신군부라는 내란세력이 벌인 폭력과 학살에 대한 저항권의 발동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5ㆍ18은 민주화 흐름을 거부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내란세력이 내려보낸 공수부대가 시위대와 시민을 무차별 공격하고 살상하자 이에 성난 민중이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조직하여 저항한 사건인 것이다. 이에 따라 현재 광주 지역 사회와 관련 단체 등은 광주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해 오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사망 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맡게 된다. 그러나 이때 막강한 권력자가 사라진 공백을 놓치지 않고 쿠데타를 준비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전두환3)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군부 내 강경파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온건파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무력으로 몰아내며 신군부 세력이 되었다. 1980년 4월 14일부터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여 내각에 합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에 학생들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규탄하며 1980년 봄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5월 15일에는 서울의 35개 대학과 지방의 24개 대학에서 나온 학생들 수만 명이 전국 주요 도시의 거리를 메웠다. 서울에서만 10만 명의 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시위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부상자들도 속출하였다. 이미 광화문 일대에는 계엄군의 탱크가 진주해 있었다. 학생들에게도 서울 곳곳에 군인들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가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곧 군대가 치고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시위가 절정에 달한 저녁 8시경 신현확 국무총리는 연말까지 개헌안 확정, 내년 상반기까지 양대 선거 실시라는 민주화 일정을 발표하며 학생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결국 시위를 이끌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시위를 멈추고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게 된다. 이를 흔히 서울역 회군이라고 부른다. 서울역 회군 뒤인 5월 16일 저녁부터 17일 오후까지 전국 55개 대학 학생 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를 열고, 5월 22일까지 비상계엄해제, 연내 정권 이양을 위한 정치 일정의 조속한 천명 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7일 밤 9시 30분 신군부는 10분간의 찬반토론 없는 국무회의를 거쳐 당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곧바로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인사 및 학생운동 지도부를 연행하고 전국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그리고 5월 18일 아침은 밝아 왔다.

 

 

광주민중항쟁의 전개 과정

 

항쟁의 전개 과정은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5월 18일로 학생 시위에 의한 발단기이다.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마련한 행동지침에 따라 전남대 정문 앞으로 학생들이 집결한다. 공수부대는 이미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가 파견된 상황으로, 이들은 신군부의 정예부대로서 시위 진압장비보다는 전투장비를 갖춘 부대였다. 이것은 애초에 신군부는 일반적인 시위 진압으로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약 2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자 공수부대가 학생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하였고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를 보다 못한 시민들이 말리려고 나섰다가 그들 역시 무참하게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시기 항쟁의 중심 세력은 학생들로 시위는 전남대뿐만 아니라 조선대와 광주교대 앞에서도 벌어졌으며, 소식을 듣고 분노한 학생들은 도청과 광주역 등에서도 시위를 하였다.4)

 

 

2기는 5월 19일로 학생 시위에 일반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투쟁의 양상이 수세에서 공세로 이행하기 시작한다. 이날 시내 상가 대부분은 문은 열지 않았고 광주 시내 전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전날의 진압에 대한 분노로 시위대는 급격히 늘어 3,000여 명에 육박했으며, 특히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해 단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은 언론기관의 차량 및 관련 장소에 불을 지르며 공격한다. 시위 규모, 참여 계층, 시위 지역 면에서 18일과는 다른 양상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간다.

 

3기는 20일부터 21일 오전에 이르는 시기로 기층 민중이 점차 투쟁의 선두에 나서면서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는 시기이다. 20일 오후 거리에 모인 시민들은 이제 맨손이 아닌 각목, 쇠파이프, 돌, 연탄집게, 식칼, 화염병 등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들고나와 집회를 열었고, 공수부대가 공격해 오면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하며 싸웠다. 이제 시민들은 소수의 공수부대쯤은 포위ㆍ공격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고 앰프를 실은 차가 시내를 돌며 시민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이에 힘입어 그동안 관망하던 시민들도 급속도로 시위에 합류하며 시민들의 사기는 강화되어 간다. 20일 오후 7시에 있었던 운전기사들의 차량 시위는 항쟁을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킨다. 약 200여 대의 차량이 요란한 경적과 함께 도청을 향해 진격했고, 그 뒤로 시민들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행진했다. 공수부대는 차의 유리를 깨고 진압봉과 대검을 사정없이 휘둘러 선두 대열에 있던 기사들과 시민들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도 물러서지 않고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또한 가두방송 차량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은 시민들이 각종 차량을 타고 도청 주변으로 모여들어 도청 주변은 시위 대열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곳곳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를 포위ㆍ공격했으며, 그동안 권력의 말단기구로 민중을 짓눌러 온 파출소 등도 공격한다. 늦은 밤까지 계속되는 시민들의 파상 공세에 밀린 공수부대 3여단은 밤 11시경 발포를 시작하고, 7여단 33대대는 수류탄을 투척한다. 그러나 이날 새벽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공수부대가 물러나며 해방된다. 또한, 계엄군 내에서는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었던 31사단장 정운의 지휘권을 사실상 박탈하고, 특전사령관 정호용이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지휘 체계의 이원화가 초래된다. 다른 한편 21일 오전, 시위 군중은 두 명의 시민 대표5)를 뽑아 도지사와 협상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권한도 없는 도지사와의 협상은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4기는 21일 오후로 시위 대중은 무장하여 시민군으로서 시가전에 돌입하게 되고 항쟁은 전남 지역으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21일 시민들은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와 차량 56대를 가져와6) 도청으로 향하였고, 일부 차량은 전남 각지에 소식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기 위해 광주를 빠져나갔다. 갑작스러운 장갑차의 출현에 놀란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 병력은 도청으로 도주하였다. 21일 오후 1시 정각. 갑자기 도청 건물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고, 근처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병들이 주동자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공수부대의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발포는 사격 중지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1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비극은 도청 앞뿐만 아니라 시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오후 4시경 드디어 무장한 시민군이 광주 시내에 나타났다. 나주, 화순 등지로 광주의 상황을 전하고 무기를 구하려고 빠져나갔던 차량이 목표를 이루고 돌아온 것이다.7) 이들에게서 무기를 받은 시민군은 공수부대와 교전을 시작했고 오후 5시 30분 계엄군의 총퇴각 결정으로 광주는 완전히 시민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21일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광주를 빠져나온 시위대가 광주 인근 지역에서 가두방송을 하며 광주의 소식을 알리고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항쟁은 목포, 함평, 무안, 나주, 화순, 해남 등 전남 지방 일대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8)

 

5기는 22일부터 27일 진압까지의 시기로 도청 장악 후 민중자치가 이루어진 기간이다. 우선, 22일에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는 민중들의 항쟁 의지를 충분히 수렴하고 발전시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무기 회수를 결정, 사태 수습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며 대중과 분리되기 시작한다. 23일에 시민들은 매일 개최되는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를 규탄하고, 계엄 철폐, 군부독재 타도, 김대중 석방 등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 24-25일에는 지도부의 투항 노선에 반대하는 투쟁파가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어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된다. 이들은 무기 반납을 중단하고 계엄군의 공격에 대비해 26일에는 기동타격대를 재편성하였고 이들은 계엄군과의 최후 항전까지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한편 계엄군은 26일 광주 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2만여 명의 병력을 배치함으로써 대대적인 광주 진압을 펼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침내 27일 새벽 3시. 계엄군의 진압 작전은 시작되었고 4시간 만에 끝이 났다. 이로써 광주 시민은 장엄했던 항쟁을 죽음으로 완성한다.

 

 

광주민중항쟁의 의의

 

한국 현대사에서 1980년 광주민중항쟁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첫째, 어떠한 폭력이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떨쳐 일어난 민중의 저항 정신을 계승하며, 향후 군부독재에 대항한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민중의 자치 능력을 입증했다. 해방 광주는 낡은 질서가 무너진 속에서 민중들의 손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 주었다. 기존의 지배 질서가 붕괴되면 혼란만 존재할 거라고 겁박하던 통치자들의 말이 기만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셋째, 미국과 군부독재의 정체를 명확하게 폭로하였다. 항쟁 당시 미국이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한 것이 밝혀짐으로써, 해방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의 장벽 속에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 민주주의의 선교사로 인식되어 왔던 미국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군부독재가 무슨 짓을 하든지 전폭적으로 지지할 수 있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야욕과 본질이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1980년대 반미자주화운동 발전에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광주와 미 제국주의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다른 제3 세계 국가들과 달리 그동안 반미운동이 전무했던 한국에서도 영원한 우방 미국에 대한 저항운동이 질적, 양적으로 강화되어 나타났다. 1980년 12월 9일 광주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82년 5월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으며, 83년 레이건 방한 반대 투쟁, 85년 전두환의 방미 반대 투쟁,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등이 터져 나왔다. 이어 농민들의 농산물 수입개방 반대 투쟁, 주한미군 철수 및 전시작전권 이양 문제, 나아가 반전ㆍ반핵 투쟁 등으로 퍼져 나가며 반미자주화운동은 80년대 사회운동의 중요한 흐름으로 작용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미국은 줄곧 무책임론을 주장하였지만, 다음의 미국 관리들의 몇몇 발언들만 보더라도 미국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개입하였는지는 분명해진다. 1980년 5월 22일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은 미국은 광주사태를 진압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4개 대대의 한국군을 미국의 통제하에서 풀어 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에 동의했다고 발표했다.9) 5월 23일 미 국무부 대변인은 카터 행정부는 한국에서 안보와 질서의 회복을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정치적 자유화에 대한 압력을 늦추기로 했다고 발표했으며, 6월 1일 카터 대통령은 워싱턴의 한 TV 방송에 출연해 우리의 우방 또는 무역상대국이 단지 우리의 인권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쏘련의 예속하에 내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미 국무부의 어떤 고위 관리는 오늘날의 한국사태는 인권 문제가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안정 유지를 바라는 미국의 국가 이익에 관한 문제라고 했다. 이와 같이 미국은 당시의 냉전 국제 질서 속에서 철저하게 자국 중심의 국익 우선 제국주의 정책을 펼쳐 왔던 것이다. 1980년 5월 29일 또 다른 미국 관리는 ≪뉴욕 타임즈≫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한 사회의 모든 부문은 이란과 달리 친미적이다. 그것은 북한이 제기하는 군사적 위협 때문이며 또 군부나 민간인 모두 미국의 도움을 바라기 때문이다. 이 보도를 통해 한국은 친미적이라며 매우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들의 이런 자신감은 대한민국이 그동안 얼마나 철저하게 미국의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이념적인 지배하에 놓여 왔는가를 보여 준다.

2019년 현재를 돌아본다. 45년처럼 미국의 직접 지배를 받고 있지 않기에, 80년처럼 군부독재 시절은 아니기에, 이제 더 이상 미국이 우리의 배후에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주한미군, 전시작전통제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싸드(THAAD)10) 배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북미 정상회담… 주권 국가라는 대한민국이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를 보면 답이 나온다. 결국 한미 관계는 호혜 평등의 관계가 아니며 미국의 대동북아 정책의 영향 아래 아직도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에 없이 한(조선)반도에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현 시기, 이제는 진정으로 분단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것을 이용해 그동안 미국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추구하며, 우리를 예속해 온 미 제국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을 이룰 때이다.  노사과연

 

 

[참고 자료]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돌베개, 2015.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3≫, 녹두, 1993.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연구반, ≪한국현대사 4≫, 풀빛, 1991.

이삼성, 광주민중봉기와 미국의 역할, ≪사회와 사상≫ 1989년 2월호.

위키백과.

 

 


1)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가 얻은 득표는 40% 미만으로, 국민들은 노태우를 뽑기는 했으나 그가 5공화국에서 권력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적 불신은 여전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기를 시작해야 하는 노태우가 5공 청산이라는 국민적 열망을 받아들이는 듯한 행보를 보이기 위해 발족한 것이 바로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다.

2)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1988년 6월 27일 5ㆍ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광주특위) 구성 결의안을 가결한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당시 명칭 논란이 상당했는데, 노태우 집권당인 여당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야당은 ‘광주민주항쟁’, ‘광주민주화투쟁’을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다 결국 야당이 ‘광주민주화운동’을 받아들이면서 일단락된다.

3) 전두환은 1995년 12월 3일 군사반란수괴혐의로 구속수감되었다가, 1997년 12월 22일 특별 사면 조치로 풀려난다(수감 기간은 2년 19일).

4) 약 800여 명으로 추산된다.

5) 시민 대표는 김범태(조선대 법대 1년, 27세)와 전춘심(일명 전옥주, 31세).

6) 노동자들의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고 하며, 일부 노동자는 함께 시위에 나섰다.

7) 인근 지역의 경찰병력이 대부분 광주로 차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무방비 상태인 이들 지역의 지서와 파출소 무기고에서 무기를 가져오는 것은 너무나 손쉬웠다. 또한, 화순에서는 탄광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8) 목포, 함평과 무안, 영암 등등 전남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를 공격해 무기를 획득하여 무장하였고, 시위와 투쟁을 하였다.

9)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 A. 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했다. 이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답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 이동을 문의했는데, 위컴은 미국 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함(agreed)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 한편 5월 22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10) 미국 본토로 날아가는 중국ㆍ러시아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씨스템.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5월 7th, 2019 | By | Category: 제151호(2019년 5월), 회원마당 | 조회수: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