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번역> 흐루쇼프가 거짓말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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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버 퍼(Grover Furr) 

번역: 노사과연 부산지회 연구팀

 

제6장 음모와 사건

39. 국외 추방1)

흐루쇼프

동지들! 다른 몇 가지 사실들에 주목해보자. 쏘련은 당연히 다민족국가의 모델로서 간주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위대한 조국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실질적으로 평등과 우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주도적인 인물이 스딸린이었다는 것과 쏘련의 민족정책인 레닌주의의 기본원칙들을 무례하게 위반한 인물이 스딸린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예외 없이 모든 공산주의자들, 공산주의 청년동맹원들(Komsomol)들과 함께 민족 전체가 원래의 고향에서 대규모로 국외 추방되었다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 이 국외추방 행위는 어떤 군사적인 고려에 의해 지시가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맑스-레닌주의자뿐만 아니라 일반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여성들, 아이들, 노인들,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청년동맹원들을 포함하여 민족 전체에게 적대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 그들을 대규모로 탄압하는 것, 몇몇 개인과 집단의 적대행위 때문에 그들 인구 전체를 비참함과 고통에 빠져들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할 수 없다. 

흐루쇼프는 이 국외추방들을 “폭로”하고 있지는 않다; 국외추방이 발생했던 그 시기에 국외추방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것은 스딸린에 적대하는 그의 세가지 고발이다: (1) 국외추방은 “어떤 예외 없이” 이루어졌다; (2) 국외추방은 “어떠한 군사적 고려에 의해 지시가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3) “민족 전체”가 “개인들 혹은 집단들의 적대적 행위 때문에” 처벌되었다. 이 내용들이 바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흐루쇼프의 “폭로들”이다. 

흐루쇼프는 까라차이(Karachai), 깔미크스(Kalmyks), 체첸-잉구이쉬 (Chech-en-Inguish), 발까르스(Balkars)에 관해서 언급한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는 크리미안 따따르인들(Crimean Tatars)이나 볼가강의 독일인들(Volga Germ-ans)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 국외추방을 초래하게 했던 사건들, 국외추방 그 자체와 그것의 여파는 쏘비에뜨 문서고에 문서로 잘 정리되어 있다. 쏘련이 몰락하고 나서야 이 문서들에 관한 정보가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가 이 문서들을 보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와 그의 조력자들은 흐루쇼프가 했던 각각의 비판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당연히: 역자) 알아야 했다. 

1. 국외추방에 대한 예외들에 대한 예는, 이 문제에 관한 주요한 러시아 전문가이자 극단적 반스딸린주의 연구자인 N. F. 부가이(N. F. Bugai)에 의해 출판된 쏘비에뜨 문서들로부터 삐깔로프(Pykhalov)에 의해 인용되었다. 

2. 국외추방에 대한 군사적 필요성은 붉은 군대(Red Army)의 후방을 안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국외 추방된 민족들 각각의 경우 인구의 많은 부분이 쏘련 정부에 반대하는 반역행위를 하면서 독일을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돕고 있었고, 쏘비에뜨 세력들에게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쏘비에뜨들은, 독일군들이 바로 전의 3년 동안 침략한 것으로 보아, 1944년에 다시 동쪽으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스딸린에 적대적이고 국외추방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부가이와 A. M. 고모프(A. M. Gomov)에 따르면, 

… 쏘비에뜨 정부는 대체로 올바르게 (정책: 역자) 우선권을 할당했는데, 전선의 후방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권리에 우선권을 두었고, 특히 북코카서스(North Caucasus)에서 그러했다.2) 

“비밀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우스개소리로 언급했다: 

우끄라이나인들은 이러한 운명에서 비켜갔는데, 이유는 오직 우끄라이나에서는 국외 추방자들이 너무 많아 그들을 추방할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스딸린은 역시 그들을 국외추방했을 것이다, (장내에서는 웃음과 술렁임이 있었다) 

이 내용은 농담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스딸린이 우끄라이나인들의 국외추방을 원했었다고, 흐루쇼프가 진지하게 주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흐루쇼프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끄라이나인들에 관해서 언급했다. 왜냐하면 그가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소수의 우끄라이나인들이 ― 이들 대부분은 나찌와 함께 쏘비에뜨로 잠입했고 나찌의 범죄들을 부추겼다 ― 나찌의 편에 서서 쏘련에 반대하는 반역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4년-1945년 붉은 군대가 폴란드와 독일을 향해 서쪽으로 진격해나갈 때 붉은 군대의 후방에서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3) 체첸-잉구이쉬(Chechen-Ingui-sh)에서와 크리미안 따따르인들(Crimean Tatars)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던 반쏘비에뜨 폭동의 대규모적인 성격에 비추어, 똑같은 일이 그곳에서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쏘비에뜨들이 가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3. 민족 전체가 국외추방을 당하는 것이 필요했는가 아니냐의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된다. 첫 번째, 이러한 민족 집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반역자들이 얼마나 대규모였는가? 그 집단들이 너무나도 대규모적이라서 그 집단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포함했는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연루되어 있었으며, 반역자들이 대규모였다는 예들로 여기에서 우리가 선택한 이 두 민족의 경우를 아래에서 증거로 인용할 것이다. 

둘째로, 역시 대학살의 문제가 있다. 독특한 언어, 역사, 문화로 단단히 엮어진 작은 민족 집단을 쪼개는 것은 사실 그 민족 집단을 파괴하는 것이다.

체첸-잉구이쉬 (Chechen-Inguish)와 크리미안 따따르인들(Crimean Tatars)의 경우에는 나찌와의 협력에 인구 대부분이 연루될 정도로 대규모적이었다. “유죄인들만”을 처벌하고 고립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민족을 찢어놓는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정말로 그 민족을 파괴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대신에 민족 집단은 함께 모여 있을 수 있었고, 그들의 인구는 증가했다. 

나 자신처럼 나의 독자들도 개인들의 범죄에 대해 개인들을 처벌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집단들의 나찌와의 협력은 너무나 대규모적이어서 연루된 개인들을 모두 처벌하는 것은 집단으로서의 민족 생존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투옥과 처형으로 젊은 남성을 고갈시켜버리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고, 이는 젊은 여성들이 결혼할 젊은 남성을 거의 없는 상태로 만들었을 것이다. 

국외추방은 이 집단들을 온전한 상태로 유지하게 하였다. 국외추방 그 자체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은 민족 집단들의 인구가 현재의 인구에 이를 정도로, 그 이후 증가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민족 집단들의 문화와 언어들 그리고 사실상 인민들로서 그들의 존재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민족 집단들은 국외 추방된 장소들에서 잘 정착하였고, 되돌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원래 자기들이 살았던 고향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에 난제가 있다: 탈영이나 나찌와의 협력과 같은 단지 개인적인 범죄에 대해 개인을 처벌하는 것은, 집단적인 처벌의 관점이 아니라 개인적인 계몽의 관점과 일치했을 것이다 ― 나 자신도 공유하고 있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더 큰 죄악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바로 “인민들”로서의 이러한 민족 집단의 파괴, 한마디로 대학살을 불러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크리미안 따따르인들(Crimean Tatars) 

크리미안 따따르인들은 대규모로 국외추방되었다. 이전에 분류된 쏘비에뜨 문서고들에 있는 그들의 국외추방과 관련된 많은 문서들이 러시아에서 출판되었다. 당연히 그 문서들은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출판되었으며 그들의 주석은 아주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서들 자체는 아주 흥미롭다! 

1939년 218,000명의 크리미안 따따르인들이 있었다. 그것은 징집 연령대 사람들이 대략 22,000명 ― 대략 인구의 10% ―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1941년 그 시대의 쏘비에뜨 통계 수치에 의하면 20,000명의 크리미안 따따르 군인들이 붉은 군대에서 탈영했다. 1944년경 20,000명의 크리미안 따따르 군인들이 나찌 세력에 합류하였으며, 붉은 군대에 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찌에 대한 대규모 협력의 죄는 존재한다.4)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쏘비에뜨들은 이 일에 관하여 무엇을 했어야 했는가? 

쏘비에뜨들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 그들 모두는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 물론 쏘비에뜨들이 그렇게 계획하지는 않았다! 

쏘비에뜨들은 20,000명의 탈영병들을 총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쏘비에뜨들은 ― 국외 추방된 ― 바로 그 징집 연령대의 젊은이들을 투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는 실질적으로 크리미안 따따르 민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를 위한, 젊은 따따르 여성들의 남편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신에 쏘비에뜨 정부는 민족 전체를 중앙아시아로 추방하기로 결정했고 1944년 그들은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그들에게는 토지도 주어졌고 몇 년간 모든 세금도 면제되었다. 따따르 민족은 고스란히 살아남았고 1950년 후반경에 민족의 규모가 성장했다.

 

체첸인들(Chechens)과 잉구쉬인들(Ingush) 

1943년 체첸-잉구쉬 자치 쏘비에뜨 사회주의 공화국(CHASSR)에는 대략 450,000명의 체첸인들과 잉구쉬인들이 있었다. 이것은 징집 연령대의 인구가 대략 40,000~50,000명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1942년 나찌의 군사적인 성공이 정점에 이를 무렵, 14576명이 징집요구를 받았는데 그들 중의 13560명 혹은 93%가 탈주하여 숨거나 혹은 산악지역의 반역자 집단이나 산적 집단에 가담했다.

체첸-잉구쉬 인구 중에서 독일세력과의 대규모 협력이 있었다. 코카서스에 대한 독일의 침공이 가장 대규모였을 때인 1943년 2월의 친독일-반쏘비에뜨 무장반란을 자만하며 자랑스러워했던 체첸의 민족주의자 한 사람을 라디오 스포보다(Radio Svoboda)가 2000년 2월 23일 인터뷰 하였다.

이 인터뷰의 설명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누락에 의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 반역이 발생했지만, 그 반역은 나찌의 깃발 아래 나찌와의 동맹의 목적을 가지고 발생했다는 것이다.

부가이(Bugai)와 고모프(Gomov)에 의하면 국외추방 동안 국외추방자들 중 희생자들은 이 추방자들의 극히 낮은 비율인 0.25%였다.

비밀경찰(NKVD)의 기록들은 체첸-잉구쉬 민족과 동시에 체포된 다른 민족들 493,269명을 수송하는 180대의 호송열차에 대해 입증해준다. 작전과정에서 50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여행 도중 1,272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p. 56)

그 사건이 겨울에 그리고 유럽, 아마도 전세계,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처절한 전쟁 동안 발생했기 때문에, 그 수치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흐루쇼프의 고발이 단지 진실인가 아닌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흐루쇼프는 주장했다: (1) 민족 집단들이 “어떤 예외도 없이” 국외추방되었다: (2) 국외추방에 대한 군사적인 이유는 없다: (3) 나찌와의 협력과 반역은 “개인적인 행위이거나 몇몇 집단들의 행위”였다. 흐루쇼프의 이 세 가지 주장 모두가 거짓이다: (1) 예외는 존재했다: (2) 군사적인 이유로 추방되었고 (3) 단순히 개인적인 배신이 아닌 대규모의 배신이 있었다. 흐루쇼프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예외의 문제는 부록에서 인용문으로 대체한다.

 

40. 레닌그라드 사건

흐루쇼프

애국전쟁이 끝난 후, 쏘련은 위대한 희생과 엄청난 노력을 통하여 획득한 훌륭한 승리를 자랑스럽게 강조했다. 국가는 정치적 열정의 기간을 경험했다…

그리고 소위 “레닌그라드 사건”이 터져 나온 것은 정확히 이 시기였다. 우리가 지금 증명해왔듯이 이 사건은 날조되었다.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 중에는 보즈네센스끼(Voznesensky), 꾸즈네뜨소프(Kuznetsov), 로디오노프(Rodionov), 뽀쁘꼬프(Popkov)와 다른 동지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인민의 적으로 낙인이 찍혀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단 말인가?

사실들은 “레닌그라드 사건” 역시 스딸린이 당 간부들에 적대하여 취했던 제멋대로인 행동의 결과인 것을 증명했다.

레닌그라드 사건은 불가사의하면서도 중요하고 흥미롭다. 그 사건이 단지 날조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범죄들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많은 이유들이 있다.

다행히 우리가 여기에서 그 사건을 해명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흐루쇼프가 이 사건이 “스딸린의 제멋대로인 행동”의 결과라고 주장했을 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5) 이것은 흐루쇼프가 “진실을 명백히 외면”한 경우이다.

흐루쇼프는 분명히 순간 순간의 필요에 따라 짜맞추기 위해 “레닌그라드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에 대해 몇 번씩이나 말을 바꾸었다. 1953년 6월 25일 흐루쇼프의 손에 체포되기(그리고 아마도 살해당하기) 전날, 베리아는 최고회의간부회(Presidium)에 전(前) 비밀경찰이었던 M. D. 류민(M. D. Riumin)의 조사와 관계된 편지를 썼다. 이 문서에서 베리아는 류민을 레닌그라드 사건을 날조했다는 혐의로 고발한다. 이 편지에 내무부(MVD) 전(前) 수장이었으며 스딸린에 의해 해임되었던 사람인 이그나뜨예프(Ignat’ev)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다고 적혀 있는 것이 흐루쇼프에게 문제가 된 것 같다.

일 년이 지난 후 1954년 5월 3일 흐루쇼프가 이끌었던 최고회의간부회는 “‘레닌그라드 사건’에 대하여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CC CPSU) 최고회의간부회의 결정[postanovlenie]”을 출판했다. 이 문서는 아바꾸모프(Abakumov) 그리고 특히 베리아를 비난한다! 그러나 베리아는 “레닌그라드 사건”이나 그것과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할 당시 국가보안성[Ministerstvo Gosudarstvennoi Bezopasnosti (MGB)]이나 내무부[Ministerstvo Vnutrennikh Del(MVD)]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2년이 지난 뒤, “비밀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딸린에게 모든 비난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다시 또 “비밀연설”이 있은 후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57년 6월 흐루쇼프는 스딸린은 보즈네센스끼와 다른 사람들의 체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베리아와 말렌꼬프(Malenkov)가 그 체포를 부추기었다고 말했다!

말렌꼬프의 역할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베리아는 그 당시에 내무부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베리아는 확실히 그 체포에 연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어떤 경우에 흐루쇼프를 믿는 것 이상으로(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역자) 1957년에 흐루쇼프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41. 민그렐족(Mingrelian6)) 사건

흐루쇼프

똑같은 방식의 교훈은 그루지아(Georgia)에 존재했다는 민그렐족(Mingrelian) 민족주의자 조직의 사건이다. 알려진 바대로 이 사건에 관해서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51년 11월과 1952년 3월 결의안들을 내렸다. 정치국과의 사전 토론도 없이 이 결의안들이 내려졌다. 스딸린이 개인적으로 그 결의안들을 지시했다. 그 결의안들은 많은 충성스런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심각한 고발을 포함하고 있었다. 날조된 서류들에 기초하여, 제국주의 권력의 도움을 받아 그 공화국에서 쏘비에뜨 권력을 청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민족주의자 조직이 그루지아에 존재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것과 연관되어, 당과 쏘비에뜨의 책임 있는 많은 노동자들이 그루지아에서 체포되었다. 나중에 증명되어진 바대로, 이 사건은 그루지아당 조직에 적대하는 중상모략이었다.

흐루쇼프가 여기에서 유일하게 특별히 고발한 것은, 스딸린이 정치국에서 사전 토론도 없이 1951년 11월과 1952년 3월의 중앙위원회 결정들을 개인적으로 지시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1951년 11월 9일의 정치국 결의안들의 중요한 판본이 출판되었다. 편집인들은, 스딸린이 원본에 대해 정정사항을 요구했다는 것을 언급한다: 몇 가지 경우에 있어서는 그것을 더욱 정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경우에는 민족주의에 대한 너무 가혹한 고발들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7) 그러나 1951년 11월 9일의 정치국 결정들과 1952년 3월 27일 정치국 결정들(ibid,, 352-4)은 둘 다 정치국 회의에서 받아들여졌다(ibid., p. 351 n. 1; p. 354 no. 1). 후자의 경우에는 스딸린이 제목을 썼지만 결의안들은 정치국의 의제에 기초하여 내려졌다.8) 그러나 흐루쇼프의 주된 주장은 스딸린이 이 사건을 날조한 데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 이 모든 것은 그루지아인들이 스딸린을 언급하면서 부르는 것처럼 ‘그루지아 민족의 위대한 아들’ 이라는 스딸린의 ‘온화한’ 지도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조직 “메모리얼(Memorial)” 구성원인 극단적 반스딸린주의 연구자 니끼따 뻬뜨로프(Nikita Petrov)가 인용한 문서에 의하면, 실제 문제는 “그루지아 지도자들의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9)

1953년 4월 10일 스딸린이 죽고 한 달이 지난 후, 쏘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최고회의간부회는 사건 전체를 날조했다는 것과 체포된 많은 사람들을 장기간 고문, 투옥, 학대했다는 것 때문에 누구보다도 특히, 국가보안성의 수장이었던 S. D. 이그나뜨예프(S. D. Ignat’ev)를 비난하는 결정을 채택한다. 흐루쇼프 자신은 최고회의간부회의 회원이었다!

이그나뜨예프는 적어도 그의 부하들인 M. D. 류민(M. D. Riumin), 뜨세뜨꼬프(Tsetkov)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데 대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명백하게 이름이 올라 있다. 1953년 4월 1일 이그나뜨예프는 역시 “의사들의 음모(Doctors’ Plot)”의 조작에 대해 최고회의간부회에 의해 비난을 받았고, 4월 3일 그의 직무태만 때문에 중앙위원회 서기로서의 지위에서 해임된다(P. 24). 1953년 6월 25일 최고회의간부회에 제출된 베리아가 작성했던 보고서는 다른 사건들과 “레닌그라드 사건”의 피고인들에 대하여 류민과 다른 부하들이 고문을 사용하는 것을 이그나뜨예프가 허락했다고 그를 비난한다(p. 66).10)

그러나 일단 베리아가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을 때, 이그나뜨예프를 책임 있는 직위들로 회복시켰던 사람은 바로 흐루쇼프 자신이었다! 이그나뜨예프는 20차 전당대회에 출석했고 흐루쇼프는 “의사들의 음모”와 관련하여 특별히 그에 대해 언급을 했다 ― 그런데 최고회의간부회는 “의사들의 음모”에서의 그의 역할 때문에 이전에 신랄하게 그를 비판했었고 강등을 시켰었다!

≪New Leader≫ 판에서 보리스 니꼴라예프스끼(Boris Nikolaevsky)의 언급은 역시 “민그렐족 음모”에서 이그나뜨예프의 책임을 지적한다.

“민그렐족 음모”에 대한 흐루쇼프의 진술은 1952년 그루지아에서 있었던 숙청을 설명한다. 그가 “레닌그라드 사건”처럼 “민그렐족 사건”을 역시 베리아와 아바꾸모프에 의해 꾸며졌다고 암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고의적인 왜곡이다. 베리아의 가장 쓰라린 적들 중의 한 명이었던 이그나뜨예프가 국가안전부의 장관으로 지명되었던 것은 바로 정확히 1951년 11월이었다; 그러므로 “민그렐족 사건”은 베리아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조작되었다.

 

42. 유고슬라비아

흐루쇼프

스딸린의 제멋대로의 행동은 국가 내부의 삶과 관계된 결정들에서 뿐만 아니라 쏘련의 국제관계에서도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중앙위원회의 7월 전원회의는 유고슬라비아와의 갈등이 발생한 것에 대한 이유들을 자세히 연구했다. 여기에서 스딸린은 참으로 부끄러운 역할을 했다. “유고슬라비아 사건”에서 동지들 간의 당내 토론을 통하여 풀릴 수 없었던 문제들은 없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충분한 근거는 없었다; 그 국가와의 관계 파괴라는 사태를 예방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거나 단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오류들과 단점들은 스딸린에 의해 기괴한 방식으로 과장되었는데 그것은 우호적인 국가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 역시 또 다른 거짓말이다. 1953년 7월 흐루쇼프, 몰로또프와 말렌꼬프는 베리아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계획했다는 이유로 공격했다. 반면에 그들 자신들은 티토(Tito)와 랑꼬비치(Rankovich)를 “쏘련의 적들처럼 행동하는” “자본가들의 대리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에서 흐루쇼프는 그들을 “동지들(comrades)”이라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흐루쇼프는 다른 곳에서는 유고슬라비아와의 화해를 시작했다는 것 때문에 베리아를 공격했고, 그리고 그들을 “동지들”이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이 바로 흐루쇼프가 여기에서 정확히 하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유고 지도자들을 동지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역자) 스딸린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43. 의사들의 음모

흐루쇼프

또한 “의사-음모가들의 사건”을 회상해보도록 하자.(장내는 술렁인다) 실제적으로 여의사 띠마슈끄(Timashuk)의 선언 이외의 “사건”은 없었으며 그녀는 아마도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명령을 받아서(결국, 그녀는 국가 안전기관의 비공식적인 협력자였다) 추측컨대 의사들이 부적절한 의학적인 치료방법들을 적용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선언했던 편지를 스딸린에게 썼다.

그러한 편지는 스딸린이 쏘련에 의사-음모가들이 있다는 즉각적인 결론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충분했다. 그는 저명한 쏘련의 의학 전문가 집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조사 행위와 조사 방법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충고도 하였다. 그는 학술원회원 비노그라도프(Vinogradov)는 사슬에 엮여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구타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 국가안전부 장관 이그나띠예프 동지가 대의원으로 이 전당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스딸린은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당신의 머리를 잘라버릴 것이다.”

스딸린은 개인적으로 조사담당 판사를 소환해서 그에게 지시사항을 내렸고 어떤 조사 방법들이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충고를 하였다; 이 방법들은 단순했다 ― 구타, 구타 그리고 다시 구타, 또 구타.

의사들이 체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정치국 회원들은 범죄에 대한 의사들의 자백이 적힌 조서(調書)를 받았다. 이 조서를 우리들에게 나누어 준 후, 스딸린이 우리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새끼 고양이처럼 눈이 멀었다; 내가 없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당신들은 적을 인식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국가는 사라질 것이다.”

사건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어서 아무도 조사가 기초한 사실들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유죄라고 자백을 했던 사람들을 접촉함으로서 사실들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체포된 의사들의 사건은 의문의 여지가 많이 있다고 느꼈다. 그들이 한때 우리를 치료했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 몇 명을 알고 있었다. 스딸린이 죽고 난 후, 우리가 이 “사건”을 조사했을 때, 우리는 이 사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날조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경멸할 만한 “사건”은 스딸린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을 결말까지 가져가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고(그는 그 결말을 생각했다), 이 이유 때문에 의사들은 여전히 살아 있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복권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 일했던 똑같은 장소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정부의 인사들을 포함하여 정상급의 인물들을 치료한다; 그들은 우리의 완전한 신임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의무를 정직하게 수행한다.

더럽고 부끄러운 다양한 사건들을 조직할 때 아주 기본적인 역할은 우리 당의 맹렬한 적이자 외국 정보기관의 대리인인 베리아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베리아는 스딸린의 신임을 도둑질했다.

이것은 “의사들의 음모”에 대한 완전히 거짓된 설명이다.11)

• “의사들의 음모”에 대한 조사는 1952년 국가보안성(MGB)에 의해 시작되었다. 띠마슈끄(Timashuk)의 편지들은 1948년에 쓰였다. 그 편지들은 심각한 질병에 걸린 쯔다노프(Zhdanov)의 치료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 편지들은 유대인 의사들에 대해서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여하튼 의사 띠마슈끄는 “의사들의 음모”와 어떠한 관련도 결코 없었고, 그 사건은 나중에 3년에서 4년이 지날 때까지 떠오르지조차 않았다. 흐루쇼프가 여기에서 분명히 그녀를 중상모략하고 있다.

• 이 시기에는 베리아가 아니라 이그나뜨예프가 비밀경찰(KGB)의 수장이었다. 1953년 4월 1일, 스딸린이 죽고 난 후 채 한 달도 못되어서 흐루쇼프가 회원이었던 최고회의간부회는 “의사들의 음모”을 조작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이그나뜨예프를 비판했다 (베리아 p. 22). 최고회의간부회가 그 사건을 거론한 것은 스딸린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 의사들의 음모 조작들을 멈추게 했고 의사들을 석방했으며 이그나뜨예프를 포함하여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체포했던 사람은 바로 베리아였다. 그리고 이그나뜨예프는 1953년 6월 말 베리아가 제거된 후(체포되거나 죽임을 당한 후) 곧 풀려났다.

• 스딸린의 딸 스베뜨라나(Svetlana)에 의하면 스딸린은 유대인 의사들이 유죄라고 믿지 않았다.

스딸린은 반쯤 은퇴한 상황이었고 전개되고 있는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스딸린은 국가보안성(MGB)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리세프(Malyshev), 1952년 12월 1일 최고회의간부회의 모임에 대하여, Vestnik 5 (1997), p. 141]. 스딸린이 “민그렐족 사건”을 물론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더라도, 스딸린이 이 문제들 특히 위조된 “의사들의 음모” 사건을 해결할 책임을 베리아에게 맡길 계획을 세웠던 것은 가능하다.

사전에 동의가 없었다면, 죽어가는 스딸린의 침대 곁에서 열린 긴급 최고회의간부회의 모임에서, 어떻게 베리아가 동시에 내무부(MVD)와 국가안전성(MGV) 두 곳의 수장 ― 한 사람의 손아귀에 커다란 권력이 집중되는 것 ― 으로 선택되어질 수 있는가를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스딸린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동의는 스딸린이 병석에 있었던 동안인 이전의 날들 동안 이루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이 두 장관직에 대한 베리아의 임명은 스딸린의 동의와 아마도 진짜 아마도 그의 제안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의사들의 음모” 기사들은 스딸린이 죽기 전에 이미 신문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반스딸린주의자이자 이전의 쏘련 반체제 인사인 조레스 메드베데프(Zhor-es Medvedev)는, 다른 사실들과 함께 이것은 언론에서의 “의사들의 음모”에 대한 공격을 끝장냈던 사람이 바로 스딸린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메드베데프는 “의사들의 음모” 조작활동에 처음부터 일부분 있었던 반(反)유대주의에 스딸린이 반대했다고 지적한다, (조레스 메드베데프, Stalin i Evreiskaia Problema. (Moscow, 2003), 208ffl; 216 f.) 메드베데프가 인정하는 것처럼, 스딸린 자신이 반(反)유대주의에 반대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6장 끝) <노사과연>

 


1) 역자주: 여기에서 “국외 추방”이란 쏘련내부에서의 공화국 간의 이동을 말한다.

2) N, F. Bugai and A. M. Gomov. “The Forced Education of the Chechens and the Ingush.” Russian Studies in History. vol. 41. no. 2, Fall 2002, pp. 43-61, at p. 59.

3) Zhukov, IU. Stalin: Tainy Vlasti. Moscow: Vagrius, 2005, pp. 432-3.

4) 극단적인 반공주의 저술가인 조사자 J. 오토 폴(J. Otto Pohl)은 이 사람들이 모두 나찌 세력에 가담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독일 자료들을 가지고 주장한다. “크리미안 따따르인들에 적대하는 반역이라는 거짓 혐의(The False Charges of Treason against the Crimean Tatars)” (International Committee for Crimea, Washington, DC, 18 May 2010)을 보라.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차이는 없다. 쏘비에뜨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탈영은 여전히 심각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쏘비에뜨 유격병이나 도적 무리들에 가담을 했었다.

5) 사실은 역시 “레닌그라드 사건”에 연관된 날조가 없었다는 좋은 증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 복잡한 문제의 연구를 떠맡지 않을 것이다.

6) 역자주: 흑해 연안에 사는 그루지아인의 근연 부족.

7) Politbiuro TsK VKP(b) i Soviet Minisyrov SSSR. 1945-1953 gg. Moscow, 2002, p. 350-352.

8) 원문을 보려거든 다음의 주소에 나와 있는 같은 책 페이지의 부록과 팩시밀리를 보라, 349-354, at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mingrelianres.pdf

9) petrov, Nikita. Pervyi predesdatel’ Ivan Serov. Moscow: Marerik, 2005, p. 114. 

10) 135) 다음의 주소에 나와 있는 RKEB 1에서 베리아의 보고서들의 팩시밀리를 보라. at http://chss.montclair.edu/english/furr/research/mingrelianres.pdf 

11) 모든 자료들은 이 장에 관한 부록에서 인용되고 확인되었다.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Nov 9th, 2013 | By | Category: 2013년 11월호 제95호, 번역 | 조회수: 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