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시] 노예라고 다 노예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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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노예라고 다 노예인 것은 아냐

자기가 노예라는 것을 알고 그게 부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고개를 쳐들고 주인에게 대드는 자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닌 거야

 

보라고 옛날 옛적 고려적에

칼에 맞아 죽을지언정 항복은 하지 않겠다

기어코 개경에까지 쳐들어가

권귀들의 목을 베고 빼앗긴 재물을 도로 찾겠다

이렇게 다짐하고 들고일어섰던 망이와 망소이를 보라고

이렇게 노예이기를 마다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이제 노예가 아닌 거야

 

보라고 또

총칼로 왕후장상이 되고 안 되고 했던 그런 시절에

왕후장상이 따로 있는가

때를 만나면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노예들이라고 해서

모진 매질 밑에서 일만 하고 살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노비문서를 불에 태우고

이 땅에서 천민을 없애고 나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선언하고 동지를 규합했던 만적을 보라고

이렇게 노예이기를 거부한 그 순간부터

그는 이미 노예가 아닌 거야

 

노예가 노예인 것은

자기가 노예이면서 노예인 것을 깨닫지 못한 자야

깨닫고는 있으면서도 주인이 두려워서

노예이기를 거부하지 못하고 눌려사는 자나

주인이 던져주는 밥덩이의 크기에 배가 불러

돼지처럼 행복한 자야

그래서 노예는 노예시대에만 있었던 게 아냐

착취와 압박을 당하고 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깨닫고는 있어도 노예이기를 거부하지 못한 자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오늘날에도 노예인 거야

그 대신 착취와 압박을 당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게 부끄러워서 참지 못하고 싸우는 자

그는 이제 노예가 아닌 거야

해방자인 거야 해방자!

노사과연

노동운동의 정치적ㆍ이념적 발전을 위한 노동사회과학연구소

4월 13th, 2019 | By | Category: 제150호(2019년 4월), 권두시 | 조회수: 171